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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

고린도 전서 15장(부활장) 주석

by 은총가득 2021. 4. 9.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고전 15:1-11)

 

바울은 이 장에서 고린도 교인들의 얼마가 완전히 부인한 죽은 자의 부활의 교리를 주장하고 확립시킨다(12절). 그들이 후메네오와 빌레도와 같이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말하여 부활의 교리를 은유로써 해석했거나 혹은 부활은 생명의 다른 과정에 불과하다고 말하거나 혹은 이성과 과학에 모순되어 불합리하다고 버렸거나 아뭏든 부활을 부인하였다. 그들은 미래의 보상을 부인하였다. 이방인이나 불경건한 사람들이 이 부활의 진리를 부정하는 것은 이상하게 보이지 않으나 계시에 의한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나 분명하게 발견된 진리를 부인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더우기 이 교리는 너무나 중요한 교리인 것이다. 바울이 이 진리에 대하여 확신시킬 때가 되었다. 왜냐하면 부활의 진리가 흔들리면 기독교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바울은 복음의 총체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부터 시작한다. 이 터전 위에 죽은 자의 부활이 되어있다. 다음을 주목하자. 신령한 진리는 상호의 연관에서 관찰될 때에 증거가 분명하게 확립된다. 기초가 튼튼하면 위의 건물이 안정된다. 복음에 대하여 관찰하여 보자.

 

Ⅰ. 바울은 복음을 강조한다(1,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하며 강조한다.

 

1. 그것은 그가 계속적으로 전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yes)이고 아니요(no)가 아니다. 바울은 같은 복음을 전하였고 같은 진리를 가르쳤다. 이 점에 대하여 그는 그들에게 호소할 수가 있었다.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치는 무흠한 교사들은 자가 자신들이나 다른 사람에게 모순된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바울이 지금까지 가르친 교리를 계속 가르치는 것이다.

 

2. 그것은 그들이 받은 것이다. 그들은 복음의 신앙을 확신하고 마음으로 믿었고 입으로 증거했던 것이다. 그것은 낯선 교리가 아니다. 복음은 그들이 지금까지 굳게 서고 계속 서야 할 터전이다. 이 진리를 버리면 서야 할 땅이 없고 신앙의 근거가 없어진다. 다음을 주목하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의 기초이다. 이 기초를 제거하면 전체의 구조가 무너지고 영원에 대한 소망이 떨어진다. 그리스도인들이 환란 날에 굳게 서고 하나님에게 충성할 수 있는 것은 이 진리를 고수함에 있다.

 

3. 그들이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복음이다(2절). 왜냐하면 "다른 이름으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으니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 구원을 받을 다른 이름이 천하에 없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과 부활에 입각하지 않고는 그의 이름에 구원이 없다. 이것들이 우리의 거룩한 신앙을 구원하는 진리이다. 우리 구속자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사망에 대한 그의 정복이 우리의 영적 생활과 소망의 근원이다. 이제 구원의 진리에 대하여 관찰하여 보자.

 

(1) 이 진리들은 마음에 간직하고 고수해야 한다(히 10:23).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자." 다음을 주목하자. 만약 우리가 구원되려면 복음의 진리를 우리 마음에 고정시키고 생각에 결단하고 끝까지 지탱하며 굳게 잡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진리에 주의하지 않고 그 능력에 순종하지 아니하며 최후까지 견디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2) 우리가 만일 목적을 믿음에 있어서 계속적으로 인내하지 않으면 헛되게 믿는 것이다. 일시적인 믿음은 유익하지 못하다. 불신으로 떨어져 더 큰 악을 범하게 된다. 그리고 부활을 부인하면 기독교를 헛되게 고백하는 것이다. 부활을 부인하면 기독교를 이해할 수 없고 믿음과 소망의 여지가 없게 된다.

 

Ⅱ. 이 복음이 무엇인지 관찰하자. 바울은 이것을 그렇게나 강조한다. 그가 받고 무엇보다 먼저(evn prw,toi/j) 즉 "첫째로 그리고 주로" 전한 것이 복음의 진리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다시 사셨다는 것이 첫째이며 가장 필요한 진리의 교리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즉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희생으로 내어 줌이 되고 그들을 위하여 용서를 얻어 하나님에 의하여 용납되었음을 보이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다. 다음을 주목하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복음의 진리의 총합이며 실체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영적 생활이 일어나고 여기에 우리의 영생의 기초를 두어야 한다.

 

 

 

Ⅲ. 이 진리가 어떻게 확립되는가 관찰하자.

 

1. 구약의 예언에 의하여서이다. 그는 성경대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성경에 의하여 성경의 예언대로 그리고 성경의 예표(type)대로 장사되고 죽은 자에서 살아나셨다. 그러한 예언은 다음과 같다. 시편 16장 10절, 이사야 53장 4-6절, 다니엘 9장 26,27절, 호세아 6장 2절이다. 그러한 예표는 요나(마 12:4)와 이삭이며 이삭은 바울에 의하여 대표로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을 받았느니라(히 11:19). 다음을 주목하자. 구약의 예언과 예표가 어떻게 응하였는지를 아는 것은 복음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확립하는 좋은 증거이다.

 

2. 많은 실제로 본 자들의 증거에 의함이다. 이들은 그리스도가 부활한 후에 그를 보았다. 바울은 자신의 것을 제외하고 다섯 경우를 듣다. "그리스도는 게바 또는 베드로에게 보이시고 그 후에 열두 제자에게 보이셨다." 비록 유다는 그들 중에 없었지만 열 둘이라고 불리어진 것은 이것이 그들이 늘 사용하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다." 바울이 이 서신을 쓸때에는 얼마나 이미 잠을 자고 있었으나 그들 중에 많은 사람이 살아 있었다. 이것은 갈릴리에서 있었던 일이다(마 28:10). 그 후에 야고보 혼자에게 보이시고 그리고 승천하실 때에 열두 사도에게 보이셨다. 이것은 감람산에서 있었다(눅 24:50). 사도행전 2장 2절과 5-7절을 비교하라. 다음을 주목하자. 그렇게나 많은 눈이 그렇게나 많은 다른 시간에 보았으며 한 제자의 연약함을 기쁘게 받아 주어 그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만져보도록 허락한 것을 보면 그리스도의 부활이 얼마나 분명한 일인가! 이 진리를 확신시키고 전하기 위하여 귀한 모든 것을 희생하고 굳게 선 성도들을 믿기 위해서 다른 이유를 구해야 하겠는가! 바울 자신도 그리스도를 본 은혜를 입었다. 구주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은 사도의 한 직책이었다(눅 24:48). 바울이 사도직을 받았을 때에도 이 증거를 맡게 되었다고 주 예수께서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나타나셨다. 사도행전 9장 17절에 기록되어 있다. 이 은혜를 언급하면서 바울은 자신에 대해 겸손한 언급을 한다. 바울은 하나님에 의하여 크게 은혜를 입었으나 항상 자기를 낮추고 그렇게 표현하기에 노력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그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였다(8절). 유산된 자이며 때에 맞지 않게 죽어서 태어난 자(e;ktrwma)였다. 바울은 다른 사도들이 개인적인 교제를 가진 것과 같은 성숙한 사도직을 가지지 못하고 마치 갑자기 새로 탄생한 새로운 탄생을 닮은 것 같다.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교제를 가질 수 없을 때에 사도직를 받았다. 그는 주님을 알지도 따르지도 못했다. 이것이 바울이 겸손한 자리에 서야 할 이유였다.

 

(2) 자기 자신이 다른 사도보다 열등하다고 자백한다.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다." 가장 적은 자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서 맨 나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직이나 사도의 칭함을 받을 자격이 없다"(9절). 다른 곳에서 바울은 진정으로 "가장 큰 사도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다고"(고후 11:5) 우리에게 말한다. 은사나 은혜나 봉사나 고통 그 무엇에 있어서 어떠한 사정이 그를 비천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다음을 주목하자. 높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겸손한 정신은 사람을 위대하게 만든다. 그의 장점을 더욱 나타나게 만든다. 바울을 겸손하게 만든 것은 그리스도와 신자들을 핍박한 그의 악함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최대의 악에서부터 최대의 선을 얼마나 쉽게 만들어 내는가! 죄인들이 성자들로 될 때에 그들의 과거의 죄가 유용하도록 만들어진다. 즉 그를 겸손하고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만든다.

 

(3) 바울은 그에게 가치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린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10절) "나는 스스로 있는 자로다"라고 말하심은 하나님의 특권이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서 만드신 바요 그의 은혜로 만들어진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좋은 것은 이 원천에서 나왔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고 항상 겸손하고 감사하였다. 우리도 그와 같이 하여야 한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라고 말할 정도로 바울은 그의 근면과 열심과 봉사를 알았으나 더욱 더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로 생각했다. 다음을 주목하자. 하나님의 은혜를 부여 받은 사람들은 그것이 헛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신령한 본질을 사랑하고 연단하고 사용해야 한다. 바울은 그러했다. 그러므로 그렇게 노력하고 그렇게나 성공했다. 그러나 노력하면 할수록 더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의 한없고 과분한 은총을 찬양했다. 겸손한 심령은 은혜로운 심령이다. 교만이 정복된 곳에 은혜가 넘침은 당연하다. 이와 같이 말한 후에 바울은 그의 본론으로 다시 돌아간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한다(11절). 바울이 같은 복음을 모든 때에 모든 장소에서 전한 것은 물론 다른 사도 들도 마찬가지 였다. "그러므로 내가 저희가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베드로나 바울이나 어떤 다른 사도가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더라도 모두가 같은 진리를 주장하고 같은 이야기를 말하고 같은 교리를 전파하고 같은 증거로 확신시켰다. 모두가 이 점에 있어서 같다. 즉 십자가에 죽으시고 살아나신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총합이며 본질이다. 모든 참다운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믿는 데 한 마음이다. 이 믿음으로 살고 이 믿음에 의하여 그들은 죽는다.

 

 

죽은 자의 부활(고전 15:12-19)

 

우리 구주의 부활 진리를 확립한 후에 바울은 부활이 없다고 교인들에게 논박을 가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12절). 이 절과 논술의 과정으로 보아 부활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이방인들의 공통적인 감정이었다. 이에 반대하여 바울은 반대할 수 없는 사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을 제시한다. 바울은 그들의 주장에서 발생하는 모순을 들어 논박하기 시작한다.

 

Ⅰ.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였으리라"(13절). 그리고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다시 생명으로 회복될 수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을 것이요(16절). 그러나 그리스도가 부활할 것이 구약 예언에서 예언되고 그가 부활한 것을 많은 눈이 보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예언하고 지금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을 있을 수 없다고 너희 중에 어떤 사람들이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Ⅱ. 그렇게 되면 복음의 전파와 믿음이 헛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 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 것이며"(14) 이 가정이 인정된다면 기독교의 주요한 증거를 파괴할 것이다. 그래서

 

1. 전도를 헛되게 한다. "우리 사도들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는 이 진리에 대하여 하나님의 증인으로 자처하고 이 진리의 확립을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나 그러나 속이는 자요 거짓말하는 사람이 된다. 왜냐하면 사실에 있어서 거짓된 것을 주장하며 공포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신앙이 건전한 터전 위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무슨 목적을 위하여 이 어렵고도 모험적인 봉사를 수행하겠는가? 무엇을 위하여 전도하며, 우리의 노력이 헛수고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이 생의 기대도 저 생의 소망도 가지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일어나시지 않았다면 복음은 껍질이며 공터이다."

 

2. 이 가정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목사들의 노력을 헛 것으로 만든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17절), 죄와 죄의 정죄 아래에 있다. 왜냐하면 용서가 주어짐은 그의 죽음과 죄에 대한 희생의 댓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엡 1:7) 그리스도의 피의 흐름이 없이는 죄의 사함이 있을 수 없다. 다시 살아나심이 없이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시고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면 그를 통해서 우리가 의롭게 되고 영생을 얻었다는 무슨 증거가 있겠는가? 그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다면 어떻게 우리를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겠는가? 이와 같이 가정한다면 그를 믿는 신앙이 얼마나 않되겠는가! 우리의 의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가 반드시 살아나셔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의도 구원도 없었을 것이다. 만일 그가 아직 죽은 자 가운데 있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헛 것이 된다.

 

Ⅲ. 이 가정에서 발생하는 또 하나의 모순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다"는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그들이 일어날 수 없고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위하여 죽었던 자도 잃어버린바 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부활을 부정하는 고린도 교인들은 육체의 재생은 물론 미래의 심판도 부인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사망이 육체의 생명뿐만 아니라 인간이 파멸되고 없어진다고 생각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바울은 그들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며 죽은 후에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 없다는 가정에서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맏든 자들의 완전한 상실을 추론하지 않았을 것이다. 육체가 일어나지 못하면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 이땅에만 제한시키게 된다. "너희의 생각대로 부활이 없다면, 내생이 없다면 죽은 그리스도인은 완전히 상실한 자가 되고 우리의 믿음과 신앙이 얼마나 공허하게 될 것인가!"

 

Ⅳ.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목사나 종들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더욱 불쌍한 사람이 될 것이다"(19절). 이것이 또한 부활이 없는 또 다른 모순이 된다.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사람들의 상태가 더욱 다른 사람보다 나쁠 것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그에게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를 구속자로 믿는 사람은 그에 의한 구원과 구속을 희망한다. 그러나 부활이 없고 고린도에서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에 의하여 주장되는 장래의 보상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소망은 이생에 제한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 이생에 제한된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욱 비참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이 서신은 쓰던 그 때의 환경에서는 세상의 지배자들의 보호도 지지도 받지 못했다. 다만 모든 사람들에 의하여 핍박을 받을 뿐이었다. 전도자들과 기독교인들이 이생에 있어서만 그리스도에게 소망이 있었다면 그들의 생은 고난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그들이 미움을 받고 추격을 받고 비난을 받으며 모든 세상의 안락을 박탈당하고 모든 형태의 고난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세상의 누구보다 더 어려운 길로 걸어야 하고 그러면서 밝은 소망도 없다. 이보다 더 모순된 일이 있겠는가? 원수들보다 더 나쁜 상태에 영원히 버려 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겠는가? 부활이 없거나 내세를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 있어서 큰 모순일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 너머에는 소망이 없고 기독교인을 가장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참으로 기독교인은 이 세상에 대하여 죽고 다른 세상을 소망하며 살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육체의 쾌락은 무의미한 것이며 영적이며 하늘의 기쁨이 그가 열망하는 것들이다. 세상의 쾌락도 없고 더 좋은 세상을 소망하지 못하면 얼마나 슬픈 일이겠는가!

 

 

 

 

부활의 순서와 상태(고전 15:20-34)

 

이 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게 죽은 자들의 부활의 진리를 확립한다.

 

Ⅰ.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1. 그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었다"(20절). 그리스도는 자신을 일으키셨고 바로 이런 면에서 그 안에서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로 일어나셨다. 유대의 추수가 첫열매를 바침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처럼 그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날 확실성이 있다. 처음 열매가 거룩한 즉 전체의 떡이 거룩하게 된다(롬 11:16).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연합된 그리스도의 전 몸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보장된다. 그리스도가 일어났던 것처럼 그들이 일어날 것이다. 첫 열매가 거룩하여 전체의 떡이 거룩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는 자기만을 위하여 부활하심이 아니요 몸인 교회의 머리로써 부활하셨다.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살전 4:14). 다음을 주목하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보증이요 약속이다. 왜냐하면 그가 일어나심으로 우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룩한 덩어리의 한부분이며 첫 열매의 용납과 은총에 참여한다. 이것이 부활의 진리에 대한 바울의 첫 논술이다.

 

 

2.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의 병행으로 설명한다. 사람에 의하여 사망이 왔으므로 사람으로부터 구원이 오는 것은 타당한 일이다. 즉 모든 사람이 부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21절).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첫째 아담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게 되고 같은 죄의 성질을 가졌던 것같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공로를 통하여 성령에 참여하고 영적인 성질을 가지게 되고 재생하여 죽지 않게 된다. 죽는 모든 사람은 아담의 죄로 죽는다. 바위의 의미에 있어서 사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공적과 능력을 통하여 일어난다. 그러나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외 없이 다 산다는 의미가 아니다. 바울의 논지는 일반적 의미에 제한한다. 그리스도는 첫 열매로 일어나셨다. 그러므로 "그에게 붙은 자"가 일어나게 된다(23절).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일어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일어나는 사람은 모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사망이 첫째 아담 때문일 것같이 부활은 그리스도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을 통하여 사망이 왔고 사람을 통하여 구원이 왔다. 첫째 아담이 그의 후손을 파멸시킨 것같이 둘째 아담이 그의 씨를 영광의 영생으로 회복한 것이 하나님의 지혜인 것 같다.

 

 

3. 바울은 부활에는 질서가 있을 것임을 천명한다. 정확하게 어떻게 될 것인가는 말하여지지 않으나 다만 질서가 있음을 말한다. 아마 가장 높은 지위와 가장 훌륭한 봉사와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장 무서운 악과 죽음을 당한 자들이 먼저 일어날 것이다. 첫째 열매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에 그의 붙은 사람들이 다음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의 사람의 부활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의미가 아니고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에 그의 붙은 사람들이 다음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의 사람의 부활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의미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산 사람들은 전체의 떡덩이가 거룩하다고 생각하기 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첫 열매들을 바쳐야 하는 것이 아니고 오순절과 봉헌제에 바칠 때까지 구별하여 둔다.

 

첫 열매들의 헌납은 전체의 떡덩이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추수하기 전에 시행하는 것이 아니고 바치기 위하여 구별하였다가 그 후에 바치더라도 그런 것이다. 그리스도의 성도가 그리스도 앞에서 부활있었더라도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들의 부활보다 앞서는 것이다. 그들이 부활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부활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부활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기 때문임을 주목하자.

 

Ⅱ. 바울은 그리스도의 모든 원수가 파멸되고 마지막 사망이 파멸될 때까지 중보적 왕국의 계속에서부터 논한다(24-26절). 그리스도는 부활하시고 부활 때에 왕국이 부여되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그의 손에 주어졌다"(마 28:18).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다(빌 2:9-11). 이 왕국의 통치는 모든 적대하는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모든 원수를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하시리라"(24,25절). "맨 나중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26절)

 

 

 

 

1. 이 주장은 다음과 같은 특별한 점이 있다.

 

(1) 우리의 구주는 모든 권세를 손에 넣고 중보자로서 왕국을 소유하고 다스리시기 위하여 죽은 자로부터 일어나셨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 14:9).

 

(2) 이 중보적 왕국은 끝이 있다. 하나님이 백성을 완전하게 보호하고 모든 원수를 정복할 때까지이다. "그 때에 끝이 오리니"(24절) .

 

(3) 모든 적대하는 원수들이 완전히 정복하고 굴복시킬 때까지는 끝이 오지 않는다(24, 25절).

 

(4) 다른 원수 중에서 사망이 파멸되고 버려져야 한다(26절). 모든 사람에 대한 사망의 능력이 취소되어야 한다. 여기까지 바울은 밝히 말한다. 그러나 성도들은 일어나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망과 무덤이 그들을 지배하고 우리의 구주인 왕의 권능이 그 백성의 마지막 원수를 지배하여 그 힘을 파멸시키지 못할 것이다. 성도들이 다시 일어날 때까지 사망은 취소되지 않는다. 때가 차서 중보적 왕국이 바쳐질 때에 일어난다. 성도들은 다시 일어나서 죽지 않는다. 이것이 논지의 범위이다.

 

2. 바울은 주목해야 할 몇 가지 암시를 주고 있다.

 

(1)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로서 우리 구주는 위임된 왕국을 가진다. "만물을 저의 발 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27절).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의 권세는 위임된다. 비록 그의 중보가 하나님의 성격을 가정하지만 중보자로서 하나님의 성격을 밝히 유지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인간의 중간 사람으로 인간과 하나님의 성질을 가지고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하며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위탁과 권능을 받는다. 아버지는 전체의 섭리 중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나타낸다. 인간이 된 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의 대리자로 나타난다. 하나님으로서 그에게 속한 피조물에 대한 영원한 지배가 아니고 하나님이며 사람이신 중보자로서 그에게 위탁된 왕국이다. 그리고 그의 부활 후에 아버지와 함께 왕위에 앉으셨다(계 3:21). 그래서 예언이 이루어졌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시 2:6). 이 의미는 신약에서 여러 번 나타났다.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시고"(막 16:19; 롬 8:34; 골 3:1), 권능자의 우편에 앉으시다(막 14:62; 눅 22:69).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시다(히 12:2).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히 8:1). 이 자리에 앉으심은 중보적 권능과 왕국을 가지는 것으로 그의 승천 때에 이뤄졌다(막 16:19). 이것은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겸손과 낮아짐과 인간이 되심과 십자가에서 저주의 죽음을 한 댓가라고 말하여진다(빌 2:6-12). 승천하실 때에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를 다스리고 보호할 능력을 가지시고 모든 원수를 파멸하고 구원을 완성하실 때까지 수행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에게 속한 근원적이고 무한한 권력이 아니다. 특별한 목표를 위하여 제한된 권력이다. 권력을 가지신 그가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으로 행동하시지 않고 중보자로서 행하며 거역을 받은 하나님으로서가 아니고 거역한 피조물을 위한 중재로서 행동하신다. 하나님으로서 지배하실 수 있으나 중보자로서 위임된 권력을 사용하신다.

 

(2) 위임된 왕국은 마침내 아버지께 바쳐진다(24절). 왜냐하면 그것은 특별한 표를 위하여 받은 권력이며 교회의 모든 원수가 영원히 멸망될 때까지 교회의 성도를 다스리고 보호할 권력이기 때문이다(25,26절). 이 목표가 달성되면 그 권력과 권위가 필요없게 된다. 구속자는 교회의 원수가 멸망하고 교회의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지배하신다. 이 목적이 달성되면 이 목적으로 받은 권력을 돌리신다. 그러나 그는 하늘에서 영광된 교회를 영원히 다스리신다.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시리라"(계 11:15).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로다"(눅 1:33).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라"(단 7:14)(막 4:7 참조).

 

(3) 구속자는 그의 성도의 마지막 원수가 멸망하고 사망이 없어지고 성도가 재생하여 완전한 생명을 얻어 다시 죽을 위험이 없을 때까지 다스리신다. 그때까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가지신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그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으신 그가" 우리와 관계를 가지시고 우리를 생각하시는 그가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있다. 즉었던 그가 영원히 사시고 통치하신다.

 

(4)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28절). 이 의미는 그의 왕국에서 그러한 권위로써 통치하시던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국을 바칠 때에 아버지께 복종하신다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인간성은 영광스러운 피조물이 끝나는 것이다. 이것은 왕국이 바쳐질 때에 나타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며 우리 구원의 완성은 전연 하나님에 속한 것이며 하나님만 명예롭게 되는 것이다. 비록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인간이 사용되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다. "그것은 주님의 행위이며 우리의 눈에 기적임을" 주목하자.

 

Ⅲ.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들의 경우에서 부활을 증거한다(29절). "만일 죽은자들이 도무지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죽은 자들이 살지 못하면 그들이 무엇을 했겠는가? 그들의 세례가 얼마나 허망한 것일까! 세례를 지지해야 하느냐 버려야 하느냐? 만일 죽은 자들이 살지 못하면 어찌 그들이 세례를 받겠는가?(u`pe,r tw/nnekrw/n) 죽은 자들을 위한 이 세례가 무엇일까? 바울의 논술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보편적인 결론인가, 혹은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특수한 사람에 대한 것인가? 관사를 제외하면 세 단어로 구성되어 있지만 해석가들에 의하여 세 가지의 세 곱보다 더 많은 의미가 부여되는 이 모호한 귀절을 누가 해석할 수 있겠는가? 세례의 뜻이 무엇인지 혹은 그것이 본래의 의미로 쓰였는지 비유적으로 사용하였는지 일치하지 않는다. 만약 그것이 본래의 의미로 쓰여졌다면 그리스도인의 고유의 세례인지 혹은 다른 세례식인지도 모른다.

 

죽은 자가 누구인지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무슨 의미로 uvpe.r 이라는 전치사가 사용되었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은 죽은 자가 우리의 주님 자신이라고 이해한다. 앞에서 언급한 휘트비(Whitby)를 참고하라. 만일 죽은 자가 살아나지 않으면 죽은 자 가운데에 남아있는 죽은 구주의 이름으로 누가 세례를 받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oi, nekroi 가 한 사람의 죽은 자를 의미한다는 유일한 예이다. 그것은 그 말들이 다른 곳에서는 가지지 않는 한 의미이다. 세례받은 자들(oi, baptizo,menoi)은 만일 죽은자들(oi, gek roi)이 우리 구주를 의미하면 일반적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어떤 특별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 점은 순교자를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왜 그들은 그들의 신앙을 위하여 순교하는가? 이것은 때때로 옛 사람들에 의하여 피의 세례라 불리어졌고 우리 주님에 의하여는 막연한 세례라 말하여졌다(마 20:22; 눅 12:50). 그러나 무슨 뜻으로 순교를 하는 자들이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를 받는다고 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초대 교회 시대에 세례없이 죽는 자들의 이름으로 어떠한 사람을 세례 주는 한 관습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러한 관습이 그 당시에 유행했더라면 바울이 혐오하지 않고 그것을 언급했을 수가 없으리라는 뜻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러한 관습이 그 당시에 유행했더라면 바울이 혐오하지 않고 그것을 언급했을수가 없으리라는 뜻도 나타난다. 어떤 이들은 그 당시에 지켜주던 죽은 자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들의 부활을 소망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의 의미에 적당하나 그러한 행위가 사도 시대에 사용된 것 같지 않다. 어떠 이들은 신앙을 위하여 죽은 자들의 이름이나 정절을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들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확실히 어떤 이들이 이것을 지킴으로써 기독교인으로 개종되었다. 만약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이 살아나지 못하면 이런 동기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헛 것이 된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이 당시에 많은 핍박을 받지 않았고 순교의 일들이나 순교자들의 확고한 신앙에 의하여 개종하는 자들도 보지 못했다. oi nekroi. 는 너무나 일반적인 표현이므로 순교자들만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oi, nekroi 는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옮기어진 자들을 의미한다. "너희중에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11:30) 주의 식탁에서 무질서하게 행했기 때문이다. 이 일이 그들의 얼마를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기적적인 지진이 간수를 개종시킨 일과 같다.

 

 

Ⅳ. 바울은 이 가정에 대하여 자신의 행위와 다른 그리스도인의 행위에서 오는 모순으로 주장한다.

 

1.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많은 위험을 당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30절).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릎쓰리요. 왜 우리가 계속적인 위험을 당하겠는가 더욱 더 사도들인 우리가 그러할까?"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위험하며 더욱 더 전도자와 사도가 되는 것은 그 당시에는 위험한 일이었다. 사도는 말한다. "이제 우리가 죽은 뒤에 소망이 없고 우리가 온전히 죽고 재생하지 못하면 이 위험을 당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다음을 주목하자. 기독교를 처음 증거할 때에 따를 위험 때문에 이생의 저 너머에 소망이 없음은 어리석은 고백일 것이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이생의 모든 복과 안락을 다 바치고 모든 악을 당하며 장래의 보장도 가지지 못하는 일이 된다. 이것이 모든 것을 인내해야 하는 기독교인에게 적당한 신앙의 성격이겠는가? 바울은 주장을 밝힌다. "내가 날마다 죽는 것을 그리스도안에 있는 너희의 기쁨과 기독교의 모든 위로와 거룩한 믿음의 도움으로 증거하노라"(31절). 바울은 죽음의 계속적인 위험 가운데 있었고 그의 손에 목숨을 들고 다녔다.

 

이 생명 뒤에 소망이 없다면 어찌하여 이렇게 자신을 내어 놓을까? 죽음을 바라보면서 소망 없이 사는 것은 낙담스럽고 위로가 없으며 우울한 삶임에 틀림 없다.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을 확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극단적인 약함을 당하게 된다. 바울을 큰 어려움과 사나운 원수들을 당하였다.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32절). 사나운 무리들에 의하여 찢기고 데메드리오와 다른 직공들의 소동을 당할 위험에 있었다(행 19:24). 어떤 이들은 이것을 문자 그대로 짐승들과 싸웠다고 해석한다. 로마의 원형 극장에서 당한 일로 이해한다. 니케포러스(Nicephorus)는 이런 취지의 이야기를 말하고 짐승들이 바울에게 접근했을 때에 유순한 기적을 말한다. 그러나 그의 인생에 있어서 그렇게나 특별한 시험과 환경을 누군가 빼놓고 바울 자신이 그의 고난을 상세히 말할 때에 간과할 이가 없다(고후 11:24 참고). 그가 유대인들에 의하여 다섯 번 매맞고 세 번 막대기로 맞고 한 번 돌로 침을 당하고 세 번 풍랑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 짐승과 싸웠다고 언급하지 않았음은 이상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짐승들과 싸움은 비유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의 짐승은 사나운 야생과 같은 성질을 가진 사람들이다. 바울은 말한다.

 

 

"죽은 자들이 다시 살지 않으면 이러한 싸움에서 내가 무슨 유익을 가지겠는가? 죽은 자가 일어나지 않으면 어찌하여 내가 매일 죽으며 난폭한 손에 의하여 죽을 위험을 당하는가? 그리고 죽은 후에 멸망한다면(post mortem nihi), 그 후에 아무 것도 기대하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불쌍한 일이 있겠는가?" 바울이 그렇게나 무식했을까? 바울에 대하여 그렇게 생각하도록 고린도 교인들에게 어떤 여지를 주었던가? 죽는 것이 그에게 큰 유익을 가져오리라는 것을 확신하지 못했다면 바울이 그의 생명을 던졌을까? 죽은 후에 보다 더좋은 생이 있다는 생각 외에 그 무엇이 이생의 사랑을 버리게 하겠는가? "죽은 자가 일어나지 않으면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을까?" 나에게 무엇을 약속하겠는가? 다음을 주목하자. 하나님께 충성함으로 그리스도인에게 유익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바울이 그러하였고 우리의 주님이 그러했다(히 12:2). 우리들도 그들의 본을 받도록 명령을 받고 우리의 열매를 거룩하게 바쳐 우리의 목표가 영생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목표요 우리 영혼의 구원이다(벧전 1:9). 이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2. 둘째의 모순은 이생의 안락을 취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이 되는 것이다.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32절). 식도락자가 되자. 선지자 이사야의 22장 13절에 그렇게 나타난다. 짐승같이 죽으면 짐승같이 살도록 하자. 이것이 죽은 후에 부활이 없다면 생의 쾌락을 포기하고 생의 모든 비참함을 당하여 잔인하게 죽는 것보다 현명한 일일 것이다. 이 귀절은 분명히 내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린도 교인 중에서 부활을 부인한 사람은 사두개인이며 그들의 주장은 성경에 기록된 것과 같이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행 23:8). 이다. 즉 인간은 육체이며 육의 것을 살릴 아무것도 없으며 죽으면 다시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러한 사두개인들에 대하여 반대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주장이 아무런 힘이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가 다시 살지 못하더라도 마음을 살리면 유익하기 때문이다. 아니 마음이 천국의 영광과 행복의 주된자리이며 주체이다. 만일 사후의 소망이 없다면 현명한 사람은 바울이 산 비참한 생애보다 안락한 생애를 더 좋아하지 않겠는가? 아니요 가능한 한 이 생애를 즐기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생애는 너무나 짧기 때문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생후의 소망보다 아무 것도 이 생애의 안위와 쾌락을 무시할 수 없게 하고 가난과 경멸과 비참과 죽음을 사랑할 수 없게 한다. 사도들과 초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살았다. 만일 그들이 자기를 속이고 허망하고 헛된 소망으로 세상을 버렸다면 그들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하고 그들의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은가!

 

Ⅴ. 바울은 주의와 격려와 책망으로 그의 주장을 끝맺는다.

 

1. 나쁜 사람과 타락한 생활과 신념을 가진 사람들과의 위험한 교제를 피하도록 주의한다. 바울은 말한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33절), 아마도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문란한 생활을 한 사람들이었고 타락한 원리로써 그들의 악한 행위를 지지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들의 입에는 이런 말이 늘 있었다. "먹고 마시자. 왜냐하면 내일 우리가 죽기 때문이다." 만일 장래의 세계가 없다면 그들의 말이 적절하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신념을 논박한 후에 그들과의 교제가 얼마나 위험한가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경고한다. 만일 그들이 저들의 신념에 동조하면 그들에 의하여 타락하고 그들의 생활을 따를 것이라 하였다. 다음을 주목하자. 나쁜 친구와의 교제는 나쁜 사람을 만들기 쉽다. 잘못과 악은 전염된다. 감염을 피하려면 그들과 멀리해야 한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잠 13:20).

 

2. 여기에서 저들의 죄에서 떠나 일어나서 보다 거룩하고 의로운 생활을 하도록 권면한다(34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혹은 의롭게 깨어서(evkh,fate diai,wj) 더 죄를 짓지 말라. "스스로 일어나서 회개하여 죄를 버리고 악한 길을 버리고 잘못을 고쳐 나태와 어리석음으로 기독교인의 소망을 삼키고 그 행위를 타락시킬 그러한 교제와 원리를 버리라." 내세에 대한 불신은 모든 덕과 경건을 말살시킨다. 그 진리에 대한 가장 어떤 개선은 죄를 그만두고 열심으로 신앙에 정진하는 일이다. 만일 부활과 장래의 생활이 있다면 그것을 믿는 사람답게 살고 행해야 한다. 우리의 도덕을 문란하게 하고 우리를 타락시키며 음란하게 만드는 주정뱅이와 같이 행하면 안 된다.

 

3. 그들 중에 얼마에게 주는 엄한 책망이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다음을 주목하자.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하나님에 대하여 그의 성질과 은혜와 통치에 대하여 모든 지식을 다 제공한다. 이 신앙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을 모르고 있음은 자신을 책망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나태와 하나님을 경시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경시하며 하나님에 대하여 그렇게나 무지하고 하나님에 관한 일에 그렇게나 무관심한 일이 무서운 수치가 아니겠는가? 부활과 장래의 생애에 대한 불신은 하나님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의 신실한 종들을 버리지 않으며 그들이 아무런 보상도 없이 그렇게나 어려운 고통에 처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노력과 인내를 잊을 만큼 불성실하며 불친절하시지 않음을 안다. 나는 이 표현이 보다 강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 가운데에 하나님을 부인하고 인간의 일만 인정하는 무신론자가 있었다. 이들은 기독교 교회의 중상이며 수치이다. 마치 무신은 내세를 불신하는 근저에 있다. 하나님과 섭리와 이 세상의 생활이 얼마나 불공평하며 선한 사람이 얼마나 고난을 당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모든 일이 바로 판단을 받을 내세를 의심할 수가 없다.

 

 

심는 것과 다시 사는 것(고전15:35-50)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에 반대하는 그럴싸한 주된 반대에 대하여 답변한다. 반대의 제안을 관찰하자.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35절). 그들이 어떻게 일어날까? 무슨 능력으로 일어날까? 그것이 이방인들 중에서 유행하던 사상이며 사두개인들은 죽은 인간을 영생시키며 죽은 자를 재생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의 범위 내에 있지 않다고 믿는 것 같다. 죽은 자의 부활을 반대하는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그들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전연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반대의 다른 하나는 부활할 몸의 성질이다.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같은 몸으로, 같은 모양으로, 같은 크기와 지체로, 같은 성질로 오느냐 여러 성질로 오느냐?" 먼저 반대는 교리를 반대하는 자들의 것이고, 후자는 호기심의 의심하는 자들의 것이다.

 

 

Ⅰ. 전자의 반대에 대하여 바울은 매년 씨가 죽고 다시 살아나는 신령한 능력과 같이 죽은 자도 살아날 수 있다고 말한다. 죽은 자의 부활이 그와 같은 능력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의심하는 것은 너무나 연약하고 어리석은 토이다.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고"(36절) 다시 살아나기 전에 썩어야 한다. 죽은 후에 싹이 돋아날 뿐 아니라 살기 위하여 죽어야 한다. 매년 씨앗이 살아나는 그러한 힘으로 죽은 자가 살아날 것을 상상치 못함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것이 첫째 질문에 대한 사도의 답변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우리가 죽은 것이 살아나서 재생하는 것은 매일 보면서 죽은 자를 일으킬 신령한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Ⅱ. 바울은 둘째 질문에 더 상세히 대답한다.

 

1. 심지어는 씨가 변화하는 것을 지적한다. 뿌리는 것을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밀이나 알갱이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형체를 부여하신다. 서로 다른 종류를 구별하시기 위함이다. 뿌려진 모든 씨는 고유의 형체를 가지고, 그 종류에 알맞는 성질과 모양을 가진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모르는 것과 같이 씨앗이 큰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분명하다. 죽은 자가 죽은 후에 그들의 몸으로 일어나는 모양도 이와 같다는 것이 이 절에 암시되어 있다.

 

2. 계속해서 식물에 있어서 여러 종류가 있는 것과 같이 육체에 있어서도 여러 종류가 있다.

 

(1) 육체의 종류.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요" 사람의 육체도 있고 짐승의 육체도 있고 물고기의 육체도 있고 새의 육체도 있다(39절). 모든 종류에는 고유한 형체가 있어서 서로 다른 것이다.

 

(2) 땅의 육체도 있고 하늘의 육체도 있다.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과 다르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의 참 영광은 지위와 상태에 적당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땅의 육체는 하늘에 어울리지 않고 하늘의 육체는 땅에 어울리지 않는다.

 

(3) 하늘의 육체 중에도 여러 영광이 있다.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41절). 이 모든 것이 다음을 암시해 준다. 죽은자의 부활도 안전히 변하여 하늘에 적당하게 되며 해와 달과 별들의 영광이 있듯이 죽은 자의 부활도 여러 영광이 있을 것이다. 같은 재료에서 여러 종류의 식물과 육체를 형성하는 것과 같이 죽은 자와 썩어질 육체를 일으키는 능력도 하나님에게는 있음을 암시한다. 태양과 별들도 지구와 같은 재료로 만들어져 있으나 하나님의 교묘한 기술로써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같은 재료에서 그렇게나 많은 것은 만드시는 분이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없겠는가?

 

3. 문제에 대하여 직접 말한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다"고 말한다. 썩어질 씨앗에서 식물이 자라나는 것과 같이 하늘의 육체를 입게 된다. 별들의 영광이 다른 것과 같이 다시 사는 육체도 영광이 다르다.

 

(1)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산다." 그것은 심어진다. 죽은 자를 묻는 것은 심는 것과 같다. 심어지는 우리의 육체는 썩어지며 부서지기 쉬우나 우리가 다시 살 때에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 되어 다시는 썩지 아니한다.

 

(2)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산다." 현재의 우리의 육체는 나쁜 육체이다(빌 3:21). 죽은 시체보다 더 싫은 것은 없다. 아무런 줄거움이 없는 경멸받고 깨어진 그릇으로 던져지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시에 영광이 더하여진다. 우리 주님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된다. 땅의 모든 찌꺼기에서 정결하게 되어 맑은 물질이 되고 주님의 몸과 같이 빛이 나게 된다.

 

(3)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그것은 가련한 물건으로 사망의 지배 하에 모든 활력과 생명과 힘을 박탈당하여 땅에 묻힌다. 그것은 움직일 수도 없다. 우리가 다시 살아날 때에 우리의 육체는 신령한 생명을 얻어 새 힘을 가진다. 그들은 건장하고 굳세며 영원하여 연약함과 부패를 당하지 않는다.

 

(4) "육의 몸으로 심는다." 즉 동물과 같은 몸(sw/ma fuciko.n), 신령한 상태와 기쁨에 비교하면 거치른 천한 상태와 감각적인 쾌락에 적당한 몸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일어날 때에는 전연 다르다. 우리의 육체는 신령하게 된다. 육체가 육체 아닌 것이 되며 물질이 비물질이 된다는 말이 된다. 표현이 비교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부활때에는 우리의 몸이 최고로 순결하여지고 밝고 민활하게 된다. 비록 그들이 영이되지 않더라도 영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가 될 것이다. 무에서 창조하시고 같은 물질에서 여러 종류의 물질을 만드시는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썩어질 생명이 없는 몸에서 불후의 영광스러운 생명의 몸을 만드실 능력이 없겠는가?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시며" 불가능일 수가 없다.

 

4. 바울은 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의 비교로써 설명한다.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몇 가지의 예로써 설명한다.

 

(1)첫째 아담으로부터 이 세상에서 육의 몸을 가진 것과 같이 둘째 아담에서 신령한 몸을 기대한다. 이것이 전체의 비교에 내포되어 있다.

 

(2) 이것은 이 두 사람이 가진 다른 성질에 위치한다.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즉 우리들 자신과 같이 자기와 같은 사람으로 번식하는 능력을 가지고 자기보다 더 낫지도 않고 다르지 않는 자기와 같은 육의 몸과 성질을 물려 주었다. "둘째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 14:25). 그에게는 생명이 있고 원하시는 자를 살리신다(요 5:21, 22). "첫째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그의 육체는 땅에 알맞다. 그러나 "둘째 아담은 하늘에서 난 주이시니" 하늘에서 내려온 자가 땅에게 생명을 준다(요 6:33). 하늘에서 내려온 자는 하늘에 계셨던 자이다. 그리고 하늘과 땅의 주이시다. 첫째 아담이 우리에게 육의 몸을 전하여 줄 수 있다면 둘째 아담이 우리의 몸을 신령한 몸으로 만들 수가 없겠는가? 이 하계의 대리적인 주가 그 일을 할 수 있다면 하늘과 땅의 주님께서 그 일을 하실 수 없을까?

 

(3) 우리가 둘째 아담으로부터 신령한 몸을 얻기 전에 첫째 아담으로부터 육의 몸을 가져야 한다(49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이것이 섭리의 질서이다. 우리가 살아있고 영적이며 불멸의 몸을 둘째 아담의 살리는 능력으로 받기 전에 약하고 깨어지기 쉽고 죽어야 하는 육체를 첫째 아담에서 받아야 한다. 우리는 다시 죽지 않고 살기 위하여 먼저 죽어야 한다.

 

(4)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다운 신자는 육의 몸을 가진 것과 같이 영의 몸을 가질 것도 그만큼 확실하다. 우리는 첫째 아담을 닮아 땅에 속했으며 둘째 아담을 닮아 하늘에 속했다. 육의 몸을 가진 확실성만 영의 몸을 가질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다시 살 만 아니라 영광스럽게 변화한다.

 

5. 이 변화의 이유를 지적하면서 바울은 논술을 종합한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50절). 자연의 몸은 육이요 피요 뼈와 근육과 신경과 혈관과 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육체는 썩어질 구조요 부패하기 쉽다. 이런 것이 하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는 없다. 썩을 것이 썩지 못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으면 모순이다. 하늘 나라는 썩지 않으며 시들지 않는다(벧전 1:4). 이것이 어떻게 육과 혈로써 소유되겠는가? 이것이 하늘 나라를 이어받기 전에 영원한 물질로 변화되어야 한다. 종합하면 성도들은 다시 살 때에 현재의 상태에서 크게 변화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그들이 썩어질 혈과 육이지만 그때에는 썩지 아니할 영광스럽고 신령한 몸이 되어서 하늘의 세계와 상태에 적합하게 된다. 그곳에서 영원한 나라에서 살게 된다.

 

 

산 자의 부활(고전 15:51-57)

 

변화에 대한 바울의 말을 확정시킨다.

 

Ⅰ. 바울은 그때까지 감추어져 있고 알려지지 않은 것 즉 모든 성도들이 다 죽은 것이 아니고 변화되리라는 것을 여기서 말한다. 주님이 오실 때에 살아있는 자들은 죽음이 없이 구름 위로 들리워진다(살전 4:11). 그러나 이 귀절은 변화가 없으리라는 것이 아니다. 죽은 자들과 같이 산 자들의 육체도 변화된다. 이것도 "순식간에 홀연히"(52절) 일어난다. 전능의 능력이 어떠한 일을 할 수 없을까? 죽은 자들을 소생시키는 능력이 이와 같이 순식간에 산 자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 혈과 육은 하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산 자들도 죽은 자과 같이 변화되어야 한다. 이것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인 바울의 비밀이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즉 전에 어둡고 알지 못하던 것을 밝힌다. 다음을 주목하자. 복음 안에는 많은 비밀들이 우리에게 보여진다.

 

전에 알려지지 않은 진리가 알리어지고 전에 어둡고 애매한 진리가 밝혀지고 충분히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부분적으로 계시된다. 바울은 여기에서 주민의 재림시에 살아있는 성도는 죽지 아니하고 변화되어 이 변화는 순식간에 마지막 나팔에 눈 깜짝할 순간에 일어나는 알려지지 않은 진리를 밝힌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쫓아 강림하시리니"(살전 4:16) 그것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오라는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의 큰 부름의 소리이다. 이 소리에 무덤이 열리고 죽은 성도는 썩지 아니할 몸으로 일어나며 산 성도들도 썩지 아니할 상태로 된다(52절).

 

Ⅱ. 바울은 이 변화의 이유를 진술한다(53절).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은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그렇지 아니하면 어떻게 인간이 썩지 아니할 나라의 알맞는 시민이 되며 영원한 유업을 받기에 적당하겠는가? 썩을 것과 죽을 것이 어찌 썩지 아니하고 영원한 것을 누리겠는가? 인간이 이 행복을 누리기 전에 썩을 육체가 썩지 아니하고 죽을 육체가 죽지 아니함을 입어야 한다. 다음을 주목하자. 썩지 아니함을 입을 것은 이 썩을 몸이다. 다시 일어나는 것은 파괴될 조직체이다. 심은 것이 다시 소생해야 한다. 서도들은 자기의 육체로 올 것이다(38절).

 

Ⅲ.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와 죽은 자가 변화를 받을 때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 알린다.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혹은 "주께서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사 25:8).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그리고 사망이 완전히 정복되고 성도들은 그 권세에서 해방된다. 우리의 주님이 일어난 성도를 인도할 곳은 사망이 정복된 곳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승리의 찬양(e,pinikion)을 부를 것이다. 썩을 몸이 썩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 사망은 영원히 삼킨 바 된다(ei;j ni/koj). 그리스도는 성도들이 죽을 때에 사망이 삼키지 못하도록 하신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살 때에 사망이 영원히 삼키어버린다. 이 사망의 멸망에 대하여 성도들은 승리의 "노래를 터뜨릴 것"이다.

 

1. 성도들은 정복된 사망에 대하여 개가를 부를 것이다. 그리고 이 크고도 무서운 파괴자를 경멸한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너의 쏘는 것 너의 해치는 능력이 어디에 있느냐? 얼마나 많은 비참함을 우리에게 행하였는가? 우리는 죽었다. 보라. 우리는 다시 살았다. 그리고 다시 죽지 않는다. 너는 정복되었고 무기를 빼앗기고 공격할 힘이 없어졌다. 너의 운명적인 대포가 어디에 있느냐? 너의 창고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너의 재난을 무서워하지 어떠고 너의 능력에 반항하며 너의 분노를 조롱한다. 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네가 어떻게 되었느냐? 너의 파괴와 우상 숭배가 어디에 있느냐? 한 때에 우리는 너의 포로가 되었다. 옥문이 파괴되고 자물쇠와 빗이 제거되었다. 쇠사슬이 끊어지고 우리는 영원히 자유하게 되었다. 포로가 석방되었다. 상상되던 승리자는 정복되고 노예는 석방되었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종말이 되었구나. 사망의 끈이 풀리고 우리도 자유롭게 되었다. 죽음으로 상처받지 않고 무덤에 갇히지 않는다." 순식간에 사망의 능력이 정복되고 무덤의 파괴가 사라졌다. 성도에게는 그들의 자취가 없어졌다. 그들이 어디에 있는가? 성도가 영생으로 일어날 때에 그들의 주님에게 찬양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송축하리라. 사망을 정복한 영광이여!

 

 

2. 승리에 대한 기초가 여기서 암시된다.

 

(1) 사망을 능력이 나오는 출처로써 설명한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가 사망에게 독소를 준다. 죄가 사망에게 해치고 죽일 능력을 준다. 용서받지 못한 죄 이외에 아무 것도 사망의 능력을 주지 않는다.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죄에게 능력을 주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자들에 대한 저주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죄는 사망의 모체이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롬 5:12) 죄의 결과요 죄의 후손이다.

 

(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도들이 획득한 승리로써 설명한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이 쏘는 것을 제거하셨다. 죄에 대한 속죄를 하셨다. 죄의 용서를 획득하시고 그러므로 사망의 소리가 있어도 해하지 못한다.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를 위한 구속자가 당한 저주 때문에 율법의 저주가 없어졌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고난과 죽음에 의하여 죄는 힘과 쏘는 것을 빼앗겼다. 사망이 신자를 잡아도 쏘지도 못하고 능력도 없다. 무덤이 열리고 사망의 줄이 풀어지며 죽은 성도가 재생하며 썩지 아니하고 영생하여 사망에서 해방될 날이 온다. 성도에 대해서는 사망의 힘이 없게 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하여 사망을 극복하고 신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사망을 정복한다. 이 승리를 소망하며 그들은 기뻐하고 무덤에서 일어날 때에 사망을 이긴다. 다음을 주목하자. 죄가 용서받고 사망이 정복됨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덕택이다. 율법은 사망에게 파괴할 능력을 주었으나 죄의 용서는 율법에서 이 능력을 박탈하였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3) 사망에 대한 성도의 승리는 찬양이 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57절). 우리의 기쁨을 성화시키는 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영광을 거두시고 우리가 그것을 드릴 때에 우리는 거룩한 방법으로 축복과 명예를 누린다. 이것은 우리의 만족을 높인다. 우리의 의무를 다하여 기쁨을 깨닫는다. 성도들이 다시 살때 사망에 대한 승리보다 더 기쁜 일이 있겠는가? 그들이 구원의 하나님과 주님을 즐거워하지 않겠는가? 주께서 "사망한 자에게 기사를 보이시겠나이까? 유혼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시 88:10) 사망의 권세 아래에 있는 사람은 찬양할 마음이 없다. 사망에 대한 정복과 승리가 성도의 입을 움직여 하나님을 찬양하게 한다. 위대한 승리에 대한 찬양이요, 그 수단에 대한 찬양이다. 우리의 가치 때문이 아니요, 그리스도 때문이다. 어찌 하나님께 찬양하지 않을까? 다음을 주목하자. 우리 구주의 죽음과 부활과 고난과 정복 때문에 얼마나 많은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가! 하늘의 궁창이 찬양에 화답하도다. "하나님께 감사하노라"는 노래가 퍼지며 아멘과 할렐루야로 화답하리라.

 

 

주의 일에 항상 힘쓰라(고전 15:58)

 

이 절에서 위에서 생기는 동기와 권면을 가진다.

 

Ⅰ. 권면은 세 가지이다.

 

1. 성도들은 견고해야 한다.

복음을 믿는 믿음에 견고해야 한다. 즉 바울이 전하고 그들이 받은 복음이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3,4절) 죽은 자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믿어야 한다. "이들 진리에 대한 너의 믿음이 흔들리게 하지 말라. 그들은 확실하고 가장 중요한 것이다." 다음을 주목하자. 그리스도인은 죽은 자의 부활을 확고히 믿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기초하여 있다.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요 14:19). 이것이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이다. 내세를 불신하면 모든 부정과 부도에 빠지게 된다. 내일 우리가 죽으면 우리가 동물처럼 살 것이라는 것이 추론된다.

 

2. 성도들이 "흔들리지" 말도록 권면한다.

왜냐하면 썩지 아니하고 영생할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은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면 안 된다(골 1:23). 이 위로의 소망을 포기하면 안 된다. 이들 소망은 부활하신 구주의 죽음에 기초한 실질적인 소망이다.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의 약속이다. 이 소망은 세상의 고난을 이기며 사망의 공포에 대한 해독제이며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수행하게 하는 생동하는 동기가 된다. 성도들이 이 소망을 버릴 수가 있겠는가? 그들이 흔들리면 되겠는가? 다음을 주목하자. 그리스도인은 복된 부활을 기대하면서 살아야 한다. 이 소망은 영혼의 닻이 되어야 한다(히 6:19).

 

3. 바울은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권면한다.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며 "항상" 봉사해야 한다. 성도들은 근면하고 인내해야 하며 참다운 경건으로 전진해야 하고 성한 일을 하는 데 민첩해야 한다. 영광스러운 소망을 가진 자들이 기쁘게 의무를 수행하며 근면하고 인내한다. 장래에 있어서 큰 보답을 기대한다면 과도히 충성하겠는가? 이 소망이 어떠한 활기와 결심과 끈기를 일으킬까? 다을 주목하자. 기독교인은 거룩한 생활에 있어서 인색하면 안 된다. 건전한 신앙에 부요하며 주의 일에 힘써야 한다.

 

 

Ⅱ. 전술한 말에서 생기는 동기는 그들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터전을 가지고 있다. 기대할 수 있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 확실한 것처럼 그들이 다시 산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인 것같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다. 사도들이 죽은후에 주님을 보았고 만남을 무릎쓰고 이 진리를 세상에 증거하였다. 이렇게 확실한 사실을 의심할 여지가 있겠는가? 다음을 주목하자. 참다운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으며 그들의 부지런한 봉사와 고통스러운 고난도 수포로 되지 않는다. 기독교인의 수고는 헛된 수고가 아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희생하나 하나님에 의하여 아무 것도 손해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풍부히 보답을 받는다. 하나님은 성도의 수고를 잊어버리실 정도로 부당하지 않다(히 6:10). 그들이 생각했던 이상으로 하나님은 보상하신다. 그들이 행한 봉사나 그들이 당한 고난이 내세의 기쁨과 비교될 수가 없다(롬 8:18). 다음을 주목하자.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좋은 삯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선한 일군을 위하여는 아무리 충성해도 부족하다. 지금 봉사하면 차후에 그를 뵙는다. 땅에서 그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면 하늘에서 그와 함께 다스리게 된다. 그를 위하여 죽으면 죽은 자에서 다시 살아나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로 보답되어서 영생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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