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tolome Esteban MUrillo 의 그림
사도바울이 아나니아를 회복시킴 Ananias restoring the sight of Saint Paul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 Pietro da Cortona, 이탈리아의 화가·건축가(1596~1669). c.1631년경
바울 곁의 사람들(1) 아나니아
바울이 예수를 영접한 후 첫 번 친구가 아나니아입니다.
바울에게 <형제>라고 부른 첫 사람이 아나니아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예수를 영접함으로 옛 친구들을 모조리 잃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친구들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바울의 옛 친구들은 <배신자>로 낙인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이 하나도 주변에 없을 때 첫 친구가 아나니아입니다.
바울은 회심하고 직가로 갔습니다. 그 곳에 아나니아가 살고 있었습니다. 핍박을 피하여 도망와 살던 유대인이었습니다. 아나니아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봅니다.
1. 경건한 사람
사도행전은 아나니아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희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나는 그 빛의 광채를 인하여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행22;10-13)
아나니아는 경건한 사람입니다.
경건이라고 하는 말은 구별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구별된 사람입니까? 구별하는 사람이 구별된 사람입니다.
물질을 구별합니다. 성금입니다. 십일조, 첫열매가 구별된 물질입니다. 물질을 구별할 줄 아는 이가 경건한 사람입니다.
시간을 구별합니다. 성일입니다. 주일, 그리고 새벽기도가 구별된 시간입니다.
땅을 구별합니다. 성지입니다. 하나님의 구별된 땅을 거룩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구별합니다. 성인입니다. 아무하고나 어울리지 않습니다. 구별된 행동을 하여야 경건한 사람입니다.
2. 칭찬듣는 사람
사도행전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행22;12)
아나니아는 칭찬듣는 사람입니다.
욕을 들으면 안 됩니다. 칭찬을 들어야 합니다. 그 사람에 대하여 말할 때 좋은 말이 나와야 합니다.
경건하고 칭찬듣는 사람이라는 말만 가지고도 그의 인격, 그의 믿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3.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사람
아무나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받을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나 TV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TV를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TV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아무나 듣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정오의 빛보다 강한 빛이 내려와서 사울은 눈이 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사울을 데리고 직가로 왔습니다. 사울은 너무나 충격이 컸습니다. 그래서 3일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이야기를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행9;8-9)
그 때 아나니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습니다.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행 9;10-11)
이같이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확실한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영성이 아나니아에게 있었습니다.
4. 믿음의 역사가 있는 사람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사울을 찾아 갔습니다. 그 다음 이야기를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행 9;12-19)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하였습니다.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벗어지고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말씀과 능력이 같이 역사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나니아였습니다. 말씀이 말씀에서 끝나지 않게 우리는 기도하여야 합니다.
믿음의 역사가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하여야 합니다.
5. 제자가 된 사람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아나니아를 제자라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행 9;11)
일군은 많아도 헌신자가 없습니다. 신자는 많아도 제자는 적었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신자중에 제자였습니다. 보통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보통 헌신자가 어니었음이 들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자인가요? 제자인가요?
아나니아는 제자였습니다.
6. 사람을 기른 사람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은 사람을 기르는 사람입니다. 10년을 보고는 나무를 심고, 100년을 보고는 사람을 심어야 합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인정하였습니다. 모두가 사울을 미워할 때였습니다. 모두가 사울을 피할 때였습니다. 모두가 사울을 모를 때였습니다. 아나니아만은 사울을 인정하였습니다. 아나니아만은 사울에게 다가가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자세히 보면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세례를 준 것같습니다. 직가에서 일어나 세례를 받았다고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행22;16)
사울은 직가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직가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면 아나니아외에 다른 사람이 세례를 줄 사람이 없습니다. 아나니아는 사람을 길렀습니다. 기독교의 거목을 기른 사람중에 하나가 아나니아입니다.
내가 기른 사람이 세계에 복음을 크게 전하였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사람을 기르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그리고 아나니아 이야기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 다음부터 사울이 등장합니다. 사울이 바울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등장합니다.
아나니아는 바울을 등장하게 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그 후 아나니아는 바울 소식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중얼거렸을 것입니다.
<내가 안수하였던 바울,
내가 기도할 때 비늘이 눈에서 떨어졌던 바울,
내가 세례를 주었던 바울,대견스럽다>
이런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무대에 나가도록 뒤에서 도와주는 이가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나니아는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1. 경건한 사람
2. 칭찬든 사람
3.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사람
4. 믿음의 역사가 있는 사람
5. 제자가 된 사람
6. 사람을 기른 사람
바울곁의 사람들(2) 디모데
바울곁의 사람들은 모두 바울과 함께 복음 때문에 생사고락을 같이 한 사람들입니다. 바울 곁에서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가장 가까웠던 사람은 디모데였을 것입니다.
그 증거가 있습니다. 바울이 13 권 바울 서신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6 편지의 서두에 디모데 이름이 바울과 나란히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4곳은 바울과 디모데 둘 만 등장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울은 늘 디모데를 곁에 두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가장 가까운 측근이었습니다.
디모데의 배경
1. 가정의 축복
디모데는 가정적인 축복을 받았습니다. 디모데는 갈라디아 성 루가오니아 지역에 있는 루스드라 출신입니다.
디모데는 혼혈아였습나다. 어머니는 유대인이었고 아버지는 헬라인이었습니다. 어머니 유니게는 디모데를 믿음으로 잘 양육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유니게의 어머니 그러니까 디모데의 할머니 로이스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손들에게 믿음을 잘 상속시킨 여자입니다(딤후 1;5) 그래서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알았습니다(딤후 3;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5-17)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3-5)
디모데란 <하나님의 상급><귀중품>이라는 뜻입니다. 유니게란 <선한 승리>라는 의미입니다. 선한 승리를 하는 자녀에게는 하나님이 상급을 주십니다.
디모데도 믿음의 맥을 말할 때 외할머니 어머니의 맥을 말하고 있습니다. 대대로 믿음이 유산으로 내려 왔습니다.
부모가 믿음의 유산을 주면 하나님은 사랑의 유산을 보너스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디모데는 할머니, 어머니로부터 믿음을 유산으로 받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 1;7)
디모데는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디모데는 가정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2. 만남의 축복
일생 누구를 만나고 사느냐가 그 사람의 인생을 좌우합니다. 디모데는 바울을 만남으로 디모데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두 번째 여행을 떠났습니다. 루스드라에 왔습니다. 물론 실라와 같이 왔습니다. 그 때 그 곳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디모데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디모데는 바울의 평생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한번 만남을 통하여 평생 생애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만남으로 일생이 달라졌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일생이 달라졌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을 만남으로 생에 전환기를 맞이하였습니다.
3. 영성의 축복
디모데는 영성적으로도 축복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났을 때 이렇게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모친은 유대 여자요>(행 16;1)
바울이 제1차 전도 여행으로 루스드라에 갔었습니다. 그 때 모자가 예수를 영접하였던 것같습니다.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행 14;6-21)
바울은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고전 4:17, 고후 1:1) 영적인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참 아들(딤전1:2)이라고 극단적으로 사랑하였습니다. 바울 때문에 예수님을 알게 된 영적인 아들입니다.
바울이 이 때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2,3년 후에 다시 와 보니 디모데의 믿음이 괄목할만 하게 성장되어 있었습니다. 디모데는 영성이 있었습니다. 씨를 심기만 하면 잘 자라는 옥토가 있듯이 디모데는 영적인 옥토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디모데를 동역자로 선택한 것입니다.
4. 일찍부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축복
어떤 사람은 늙어서 은혜를 체험하고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되거나 선교사가 되어 일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일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린 디모데를 데리고 일하면서 사람들에게 디모데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고린도 교회에 심부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쓰면서 디모데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편지에 적어 보냈습니다.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보내어 내게로 오게 하라 나는 저가 형제들과 함께 오기를 기다리노라>(고전 16;10-11)
그리고 디모데에게 직접 네 연소함 때문에 사람들이 업신여기지 못 하게 말과 행실을 조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딤전4:12)
이같이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일군이 되었습니다. 이는 큰 축복이었습니다. 사무엘처럼 일찍부터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디모데는 그런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5. 연단의 축복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로마에 있었습니다. 로마는 기독교인들을 무참히 잡아 처형하는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카타콤베 동굴속으로 숨었습니다. 특히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경멸하였습니다.
그 때 바울은 디모데를 데리고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에서 디모데가 바울과 함께 있었던 증거들이 성경에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빌 1;1)
빌립보서는 로마에서 쓰여진 옥중서신입니다. 그리고 골로새서도 로마 감옥에서 쓴 편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골1;1-2)
이같이 바울과 디모데는 같이 로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은 로마에서 재판을 받고 사형당할 즈음이 되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로 알리고 싶어서 편지를 썼습니다. 이것이 빌립보서입니다. 편지를 써서 누구 손에 보낼가 하고 생각하다가 드디어 디모데를 생각하였습니다.
로마에서 빌립보까지는 걸어서 40일 거리는 먼 거립니다. 왕복 80일 걸리는 곳입니다. 그 곳에 바울은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그 내용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나도 속히 가기를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빌 2;19-24)
바울은 디모데를 소개할 때에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연단을 받은 복음의 투사였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수고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전에 바울은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로 보낸 적이 있습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딤전 1;1-4)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중요한 부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감옥에 있으면서 겨울이 되니까 외투와 성경을 가지고 오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딤후 4;9-13)
이같이 디모데는 바울이 중대한 일이 있을 때 심부름시킨 일군이었습니다.
궂은 일이 있을 때 부탁한 일군이었습니다. 위험한 일이 있을 때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무슨 일이든지 시킬 수 있는 바울곁의 사람이었습니다.
이같이 디모데는 축복의 일군이었습니다.
1. 가정의 축복
2. 만남의 축복
3. 영성의 축복
4. 일찍부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축복
5. 연단의 축복
바울곁의 사람들(3) 실라
기독교 역사를 바꾼 사람은 바울입니다.
바울 곁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바울의 동역자들이었습니다.
후에 하나님께서는 이들 모두에게 공동 우승하였다고 칭찬할 것입니다.
앞 장 서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뒤에서 바쳐주는 사람도 중요합니다.
바울 곁에 사람중에 중요한 사람이 바로 실라입니다. 이제부터 실라를 추적하여 보려고 합니다.
두 이름
실라의 다른 이름 실루아노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실라로 나오고 바울 서신에서는 실루아노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누가는 실라라고 부르고 있고, 바울은 실루아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행 17;1, 10)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한 세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에 후에 편지할 때 세 명 이름으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살전 1;1)
그러므로 실라와 실루아노는 같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루아노는 라틴어 이름입니다. 실라는 애칭이었습니다. 바울은 서신서를 쓸 때에 공식적인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면 실라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1. 중간 역할자
안디옥에 기독교인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안디옥은 당시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로마, 알렉산드리아 다음에 안디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안디옥이 복음화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처음 예수를 영접한 이방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처럼 믿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유대인처럼 키파를 써야 하는가? 유대인처럼 유월절을 지켜야 하는가?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였습니다. 그 때 예루살렘 사도들은 회의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편지를 안디옥에서 예수를 영접한 이들에게 전하여 주었습니다. 요즈음 같으면 편지도 있고, 이메일도 있고, 훽스도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는 인편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그 때 예루살렘 교회가 선정하는 데 바울과 바나바와 유다와 실라를 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편지를 주어서 안디옥으로 보냈습니다. 그 이야기가 사도행전 15장입니다.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행 15;22-29)
그 편지 내용의 결론은 유대인과 같이 짐을지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 선언문이었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저희가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행 15;28-32)
아무 짐을 지우지는 않을 것이지만 우상 제물과 피와 목매아 죽인 것과 음행만은 멀리 하라고 율법을 축소하여 보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대표로 뽑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가요?
실라는 중간 역할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맡길만한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윗 사람이 사람을 뽑을 때 <그 사람에게 그 일을 맡기면 틀림없다>라는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실라는 그런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2. 예언의 영이 있는 선지자
실라는 편지만 전하여 준 것이 아니라 예언을 하면서 위로하고 사랑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영성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저희가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행 15;27-33)
3. 또 뽑힌 사람
실라는 예루살렘 교회가 대표로 뽑아 안디옥으로 보낸 사람입니다. 그 때 바울과 같이 일하였습니다. 바울은 그와 같이 일하면서 실라를 잘 보아 두었습니다.
15장에 실라는 바울과 같이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바나바와 대판 싸움이 났습니다. 15장 후반입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떠났습니다. 바울은 동역자가 없었습니다.
그 때 실라를 동역자로 불러 바울은 그 때부터 실라와 동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행 15;39-40)
한번 일해보고는 다시 같이 일해보고 싶은 사람이 실라였습니다. 한번 일해보고는 <그 사람하고는 이제 같이 일 안 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라는 달랐습니다. 바울이 고독하여 졌을 때, 바울이 동역자를 잃었을 때 그 자리를 실라로 채웠습니다. 여기에서 실라의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동역자로 실라를 선택한 이유가 또 하나 성경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바울도 실라도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가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죽도록 매를 맞았습니다. 수갑도 찼습니다. 그 때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찬송을 부르며 기도하였습니다.
옥터가 흔들리고 문이 열렸습니다. 수갑도 풀어졌습니다. 놀라서 풀어 주었습니다. 그 때 바울이 말했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우리를 내어 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 아전들이 이 말로 상관들에게 고하니 저희가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행 6;37-40)
<로마 사람인 우리를...>라고 한 말을 보면 실라도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으면 최고 시민권이었습니다. 바울은 같은 시민권을 가지고 로마 점령지를 돌기가 편리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바울은 실라를 동역자로 선택하였습니다.
우리는 한번 교제하면 또 선택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4. 베드로의 동역자
실라는 후에 베드로와도 같이 일한 흔적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벧전 5;12)
베드로가 베드로 전서를 쓸 때 그는 이미 글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눈이 흐려져 있었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성경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다만 짐작할 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베드로 전서는 베드로가 말하는 대로 실라가 대필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보면 실라는 베드로와도 동역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같이 실라는 하나님의 일군들과 늘 같이 일하였던 일군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라는 한 마디로 큰 사람들을 도와 주는 일군이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적인 인물. 예루살렘 교회에서결정된 사실을 안디옥 교회에 전달했을 때 특사로 갔으며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 다녔다(행 16:19) 그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것 같다(행 16:36) 바울의 2차 선교 여행 때는 바울의 좋은 동반자가 되었다(행 16:19) 바울의 편지에 나타나는 실루아노는 실라의 라틴식 이름이다(고후1:19; 살전 1:1; 살후 1:1)
바울곁의 사람들(4)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바울 곁에서 일한 사람들 가운데 아주 모범적인 부부가 있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가정이 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가정입니다. 이 가정은 건강한 가정, 정상적인 가정의 모델을 우리에게 제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정상적이고 건강한 가정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1. 동거
성경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이야기는 모두 5번 나오고 있습니다. 모두 부부가 나란히 나오고 있습니다. 한번도 떨어진 적이 없습니다. 떨어져 살더라도 같이 사는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나는 지난 주간 모 교회 장로님과 식사를 하였습니다. 세 아들중에 장남입니다. 형은 한 달에 한번 아버지에게 전화를 드리고, 자기는 매일 전화를 드립니다. 형에게는 아버지가 한 달에 한번 전화가 없으면 무슨 일 없느냐고 전화를 하고, 자기에게는 어쩌다가 하루만 전화를 안 해도 <무슨 일 있냐?>라고 전화를 한다는 것입니다. 떨어져도 같이 사는 가정이 있고 같이 살아도 떨어져 사는 가정이 있습니다. 어느 여인에게 <결혼한지 몇 년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여인은 대답하였습니다.<적과의 동침이 25년이요>같이 동거하는 가정이 정상적인 가정입니다.
2. 인물 배출
그 가정에서 훌륭한 인물이 배출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놀라운 사람을 길러내는 온상이 되어야 정상적인 가정, 건강한 가정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의 강의를 듣고 잘못 되었음을 알고 자기 집에 데려다가 성경을 풀어 주었습니다. 후에 아볼로는 에베소 교회를 부흥시키고 여기 저기 부흥회를 다니는 강사가 되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직업이 텐트 수선사였습니다. 겉으로 보면 텐트나 꼬매는 이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능통한 아굴라를 재교육시키는 것을 보면 성경에 대단한 이였습니다. 바로 믿어 보려고 성경을 깊이 팠던 이였습니다.
3. 동역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가정은 하나님의 일하는 이와 같이 일하는 가정이었습니다. 바울을 만난 후 바울을 평생 떠나지 않았습니다(행18;1-3) 바울이 로마 교회에게 편지를 쓸 때 이렇게 썼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 나 뿐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롬16;3-4) 여러분 가운데 나와 함께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분이 누구일가요?
4. 하나님 중심
브리스굴라와 아굴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멋진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이들은 이같은 특징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1. 동거
2. 인물 배출
3. 동역
4. 하나님 중심
바울곁의 사람들(5) 누가
누가는 성경에 그리 많이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단지 세 번만 성경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제1등장 골 4;11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골로새 교회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 때 같이 있던 6명의 안부도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6명을 세명씩, 세명씩 두 팀으로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세명은 아리스다고와 마가와 유스도라는 예수였습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희는 할례당이라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골 4;10-11)
바울 옆에 있는 유대인 동역자는 이제 세명만 남았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출발은 많아도 끝까지 같이 하는 유대인은 세 명뿐이었습니다.
제2등장 골 4;14
두 번째 등장은 바로 직후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세 명이 유대인 동역자였고 이어서 헬라인 동역자 세 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바브라, 누가 데마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골4;14)
이같이 누가는 바울과 끝까지 함께 있었던 동역자였습니다.
제3등장 딤후 4;11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누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0-11)
이제부터 누가의 인물됨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1. 의사 누가
당시 의사였다면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부를 포기하고 선교한 사람입니다.
작은 사람이 작은 것을 포기하는 것보다 큰 사람이 큰 것을 포기하는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교를 위하여 큰 것을 포기한 사람이 누가입니다. 누가는 큰 것을 포기한 큰 포기의 사람입니다.
어떤 사업가가 장미화원을 가꾸는 한 가정을 방문하였습니다.
이 가정 주인은 정원으로 사업가를 데리고 가서 백장미, 흑장미, 노랑장미등 각종 장미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더니 몇 송이만 남겨놓고 모로지 잘라 버렸습니다. 깜짝 놀란 사업가가 이유를 물었습니다. 주인은 대답하였습니다.
<많이 잘라야 좋은 장미가 핀답니다>
이 말을 들은 사업가는 번 돈을 아낌없이 주기 시작하였습니다. 미국의 대재벌 워너 메이커 이야기입니다. 큰 포기는 큰 역사를 불러 옵니다.
2. 저자 누가.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두 권을 썼습니다.
누가 복음을 쓰면서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로 써보내는....>(눅 1;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저자는 누가입니다.
사도행전을 쓰면서 <데오빌라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행1;1)라고 하였는 데 데로빌라에게 먼저 쓴 글이 누가복음인 것을<눅1;3)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저자도 누가입니다.
누가는 헬라인입니다. 수리아 안디옥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방인입니다. 그렇다면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성경 66권은 38명의 저자가 1600년 동안 썼습니다. 38명 저자 가운데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은 오직 누가 한 명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누가의 위대성을 볼 수 있습니다. 이방인이 그토록 놀라운 성경을 썼다는 데 같이 경악하여야 합니다.
누가는 두 권을 모두 데오빌로에게 쓰고 있습니다. 데오빌로는 이방인입니다. 헬라인입니다. 누가는 헬라 문학에 정통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66권 중에 두 권이 차지하는 위치는 엄청나게 큽니다. 성경은 다 귀중한 책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특별히 중요한 책입니다. 만일 사도행전이 없었다면 초대 기독교 역사를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성령 강림,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전혀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가 전하지 않는 독특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누가가 아니었으면 알 수 없었던 사실은 무엇일가요?
1. 세례요한의 잉태
2. 마리아와 사가랴와 시므온의 노래
3. 베들레헴 여관의 만원
4.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난 이야기
5. 아기예수를 찾은 목자 이야기
6. 율법대로 성전에 들어간 아기 예수
7. 12살 유월절 성전 이야기
8.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
9. 회개하는 강도에게 확신을 주는 말씀
10.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
11. 선한 사마리아 비유
12.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
13. 탕자 비유
14.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
이런 이야기는 누가복음이 알려주어서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두 권은 모두 기독교 태동기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책입니다.
따라서 누가는 온 기독교인들에게 큰 공헌을 한 사람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사람입니다.
3. 선교사 누가
누가가 사도행전을 쓰면서 1장부터 8장까지는 베드로 이야기를 썼습니다. 그리고 9장부터는 바울 이야기를 내려 갔습니다. 그러다가 바울 일행을 <우리>라고 말하는 것은 사도행전 16장부터입니다.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와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행 16;10-32)
그 전에 바울은 분명히 실라와 디모데가 한 팀이 되어 선교 여행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빌립보부터 누가가 <우리가>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드로아부터 누가가 동행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일행은 빌립보에 가기 전에 드로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구와 어울리느냐고 그 사람의 일생입니다. 누가는 의사로서 병원에 남아 있지 않고 선교팀과 함께 선교에 헌신하였습니다. 좋은 팀에 소속되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요나와 함께 있던 이들은 요나 때문에 일어나는 풍랑에 같이 고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4. 조력자 누가
우리는 조력자 누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은 두 가지 병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가시와 같은 병입니다.
고쳐 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 기도하였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부정적인 것이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7-10)
바울은 평생 가시와 같은 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또 하나의 병이 있었습니다. 다메섹으로 예수믿는 이들을 잡으러 올라가다가 정오의 빛보다 더 강한 빛이 덮쳤습니다. 그 때 눈이 멀었습니다. 아나니아가 안수하여 비늘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낫기는 하였지만 다 낫지는 못 하였습니다. 그래서 눈이 아팠습니다. 어두웠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은 바울에게 눈을 빼주고 싶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갈4;15)
바울은 이같이 두 가지 병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바울에게 의사 누가를 붙여 주셔서 수시로 몸을 돌보아 주셨을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꼭 필요한 조력자를 붙여 주셨습니다. 동역자를 넘어 조력자였습니다.
말이 둔한 모세에게 말을 잘 하는 아론을 붙여 주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질이 급한 베드로에게 성격이 차분한 요한을 붙여 주셨습니다.
누가는 그 큰 사람 바울에게 둘도 없는 조력자였습니다.
5. 신학자, 역사가 누가
6. 전설 누가.
누가는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도 없습니다. 자녀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섬긴 수리아 안디옥 의사였습니다.
84세까지 복음을 증거하다가 베오디아에서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잠에 들었습니다.
순교하였을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바울곁의 사람들(6) 아볼로
아볼로의 고향은 알렉산드리아입니다. 그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 연안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로마가 제일 컸습니다. 다음이 알렉산드리아였습니다. 아프리카입니다. 애급입니다.
그 곳에서 살던 아볼로가 초대 교회사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바울의 곁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아볼로에 대하여 공부하려고 합니다.
1. 성경의 사람 아볼로
아볼로는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고 사도행전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행 18;24)
다른 성경에는 <학문이 많은>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RSV 성경에는 <달변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 맞는 것같습니다. 성경을 잘 알고 학문에 깊고 달변인이었던 것같습니다. 모든 면에서 유능한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2. 부족하여도 전하는 아볼로
아볼로는 예수님에 대하여 일찍 들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나 로마나 안디옥은 당시 3대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일찍 들어 갔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핍박받는 유대인들이 도망갔습니다. 숨기 쉬운 곳이 큰 도시입니다.
그래서 이 3대 도시에는 이미 기독교 복음이 증거되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이 전한 복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가 고향인 아볼로는 일찍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를 몰랐습니다. 요한의 세례만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볼로는 여기 저기 다니면서 예수를 전한 사람입니다.
완전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불완전하여도 전하였던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행 18;24-25)
완전하여 질 때까지 기다려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 모습 이대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부족하여도 할려고 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3. 성숙하여지는 아볼로.
아볼로는 예수님을 알되 제대로 알지도 못 하면서 여기 저기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것도 오늘 말씀대로 <담대히> 전하였습니다.
에베소에서 복음을 증거할 때 드디어 일이 벌어졌습니다. 성경부터 보려고 합니다.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라 하였더니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행 18;26-28)
아볼로가 에베소 교회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들었습니다. 부부가 듣고 보니 요한의 세례밖에 모르고 예수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강사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간 부부의 사랑의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자세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드디어 아볼로는 성숙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가야로 가서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거기에 가서는 많은 유익을 주었습니다. 전에는 담대히 전하였지만 유익을 주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전하여도 유익을 주지 못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대로 알고 전하여야 유익을 주게 됩니다.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남으로 완전하여졌습니다.
4. 선교의 지경을 넓히는 아볼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를 고린도 교회로 보내어 부흥회를 인도시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를 소개하였습니다.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로 가서 말씀을 증거하였습니다.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 지 아볼로 파가 생겼습니다. 바울이 개척한 교회라 바울파도 있었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이렇게 파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볼로파와 바울파사이에 분쟁이 생겼습니다. 아볼로는 달변가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에 둔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볼로 인기가 충천하였던 것같습니다. 그래서 파가 생기고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에 이런 내용이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4-9)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밭으로 보았습니다. 처음에 자기가 와서 좋은 씨를 뿌렸습니다.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르셨습니다. 하나님은 두 사람의 사역을 다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심는 이도 중요하고 물 주는 이도 중요합니다. 둘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기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심어도 아무리 물을 주어도 길러 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5. 히브리서 저자설 아볼로
1537년 마르틴 루터는 히브리서를 쓴 이가 아볼로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약속에 신약이 있습니다. 이사야서입니다. 특별히 40장 이하를 읽으면 복음서는 읽는 것같습니다. 어쩌면 복음서 보다 더 정확합니다.
한 곳만 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4-7)
그대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가 마치 예수님을 본 듯이 기록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약속에도 구약이 있습니다. 히브리서입니다. 히브리서는 읽으면 온통 구약같습니다. 한 곳만 봅니다.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예비한 첫 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 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히 9;1-8)
그대로 구약입니다. 그런데 아볼로는 구약에 정통한 사람이라고 이미 공부하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행 18;24)
성경에 능하다는 말은 구약성경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아예 신약이 없었습니다. 아볼로는 구약에 능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히브리서는 아볼로가 썼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 많은 이들이 이 학설을 따르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누가 저자인지 확실하게 말해 줄 사람은 없습니다. 바울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볼로설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초대 교회사에 아볼로는 빼놓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울곁에 사람들 가운데 만만치 않은 실력자였습니다. 아볼로는 큰 사람이었습니다.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한 때 사용하였던 사람입니다.
바울곁의 사람들(7) 디도
바울 곁에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중요한 사람중에 하나가 디도입니다.
디도는 안디옥 사람입니다. 유대인이 아닙니다. 헬라문화에 젖은 사람입니다.
디도는 바울이 전도하여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를 참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진정한 아들은 육적인 아들이 아니라 영적인 아들입니다. 왜냐하면 육적 아들은 이 땅에서 끝나지만 영적인 아들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디도 1;4)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딤전 2;1)
바울의 참 아들 디도의 모습을 잘 연구하여 보려고 합니다.
1.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디도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 여행을 하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 갔습니다. 그 때 안디옥에서 출발하였는 데 안디옥의 디도를 데리고 올라 갔습니다.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갈 2;1)
그러면 왜 디도를 데리고 올라갔을 가요?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하여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이방인 선교지를 어디까지 할 것이냐를 의논하러 올라 갔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지역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디도가 있는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선교지 의논에 필요하여 데리고 올라 갔을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이방인 선교가 잘 되고 있다는 것을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데리고 갔을 지도 모릅니다. 이방인의 영성, 이방인의 제도들을 참고적으로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알리고 싶어서 데리고 갔을 것입니다.
어느 것이 더 맞을 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디도는 벌써 기독교 지도자들과 접하는 자리에 앉게 된 사람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2. 할례와 디도
당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증명하려고 할례를 받았습니다.
할례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결혼식 못지 않게 중요한 행사입니다. 생후 8일째 되는 날 남자아이의 성기 표피를 잘라 버리는 의식입니다. 그럼으로써 일찍부터 자녀에게 남녀의 성별을 명확하게 자각시키는 것입니다.
할례의식은 다음과 같이 행해집니다.
아기가 태어난 지 8일째가 되면 그 아기의 형제 자매는 물론이고 이웃이나 친척들을 불러 그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먼저 아버지가 한 입 가득 술을 머금고는 솜 조각에 술을 뿜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아기의 입을 적십니다.
이것은 아기가 통증을 느끼지 못하도록 알코올로 마취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아직 신경이 덜 발달된 만큼 통증을 느끼지는 못 합니다.
할례의식을 행하는 사람을 <모헬>이라고 일컫습니다. 모헬은 자신이 비장하고 있는 특수한 칼로 남자아이의 표피를 자릅니다. 의식이 끝나면 그 곳에 모였던 사람들은 춤과 노래로 축하해 줍니다. 이 때 아이의 엄마는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할례의식을 치르지 않은 남자 아이는 유대인으로 인정받지 못 합니다. 그것은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한 가족이 되는 할례의식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태어난 아기가 여자일 경우는 교회에서 명명식을 하는 것으로 할례의식을 대신합니다. 남자아이 때처럼 축하파티를 벌이지는 않습니다.
구약성서에는 할례에 대하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씌어 있습니다.
<너희들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은 너희 자손이 아닌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할례는 순수한 종교적 의식이지만 최근에는 위생적 측면에서 유대인이 아닌 사람도 생후 즉시 이와 같은 수술을 받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어렸을 때 표피를 제가함으로써 아이가 성장한 다음 포경 따위로 괴로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청결을 유지할 수 있는 등 효과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디도의 할례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갈 2;3-5)
이 말씀 가운데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받게 아니하였으니>(갈2;3)라는 말씀이 문제입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1. 할례는 유대인만 받는 것이지 헬라인 기독교인은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억지로 할례받게 아니 하였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2. 그러나 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디도도 할례를 받았는 데 억지로 받지 않고 자진해서 기쁨으로 받았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 성경 말씀은 두 가지 해석을 다 가능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법을 따라야 할지 말아야 할지 논쟁거리였습니다.
어느 것이 맞는 해석일지 아직도 해석은 분분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디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군이 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3. 바울의 심부름꾼 디도
바울과 고린도 교회 관계는 그리 부드럽지 않았습니다. 아볼로 파가 생기고 바울 파가 생겼습니다. 여러 가지 안 맞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전서에서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아파서 후서는 눈물로 쓰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2;4)
그 후 바울은 고린도 교회 반응을 알아 보려고 디도를 고린도 교회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보고를 받았습니다. 대단히 만족스러운 보고를 받았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바울의 충고를 잘 받아 드렸다는 보고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동안에 근심 걱정하였던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6-11)
그래서 디도는 말년에 바울의 심부름을 하면서 바울을 기쁘게 하고 교회를 든든하게 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전설
디도에게 전설이 있습니다.
로마 시대 그레데의 수도는 고틴이었습니다. 디도는 그 곳에 복음을 증거하다가 그 곳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디도 무덤위에 디도 기념 교회가 지금 세워져 있습니다.
디도는 그레데에 처음으로 복음을 가지고 들어 간 선교사였습니다.
지금도 그레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디도는 그레데에게 정말 좋은 일을 한 사람입니다. 지금 그레데의 98%가 예수를 영접한 사람입니다>
디도에 대하여는 더 이상 알고 싶어도 알 방법이 없습니다. 더 이상 자료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 자료를 주신 것만도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디도는 바울곁의 사람이었습니다. 책임감과 봉사정신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훌륭한 심부름꾼의 본보기입니다.
바울곁의 사람들(8) 오네시모
바울곁에 있었던 사람들은 대단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가장 인상깊은 사람이 있습니다. 오네시모입니다.
오네시모는 노예요 절도범이었습니다. 빌레몬의 종이었습니다.
빌레몬은 소아시아 골로새에 살고 있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오네시모라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당시 그 주변에는 6천만명 가량의 노예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재산을 훔쳐 가지고 로마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오네시모는 다시 체포되어 감옥에 갔습니다. 마침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다가 붙잡혀 갇힌 감옥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를 복음의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찾아 다니며 전도하는 바울에게 집어 넣어준 오네시모는 전도의 특별한 대상이었습니다. 바울은 나이가 많이 들었어도 늘 전도가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사랑을 위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몬 9)
바울은 감옥이라는 악조건의 자리에서도 언제나 전도였습니다.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몬 10)
감옥에서 오네시모는 전적으로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넓고도 좁았습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이 잘 알고 있는 동역자 빌레몬(몬1)의 노예였습니다. 그래서 빌레몬에게 편지를 쓴 것이 바로 빌레몬서입니다. 바울은 너무 좋아서 친필로 썼습니다(몬19)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가 복음으로 전혀 딴 사람이 되었음을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1.무익하던 사람이 유익한 사람으로
바울은 이렇게 오네시모를 평하고 있습니다.
<나와 네게 유익하니라>(11)
오네시모는 복음적인 사람이 되고 나서는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네시모라는 뜻은 <유익한 사람><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름 그대로 오네시모는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아니지만 외경중에 도마복음이 있습니다. 도마복음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회개란 무엇이냐? 그것은 동쪽이 서쪽이 되고, 서쪽이 동쪽이 되는 것이며, 남쪽이 북쪽이 되고 북쪽이 남쪽이 되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대로 오네시모라는 뜻은 <유익한 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의 부모가 오네시모에게 기대감을 가지고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서 이름을 지어 주었겠습니까? 나도 두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 라미라는 이름을 찾기 위하여 성경을 한번 다 읽었습니다. 그리고 라오미와 같은 여인이 되라고 라미라고 붙였습니다. 희일이는 언제나 하나의 기쁨이 되라고 그렇게 붙였습니다. 언제나 자녀의 이름에는 부모의 기대가 들어 있습니다.
오네시모를 낳고 부모는 남에게 유익되게 살라고 그렇게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남에게 무익되게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드디어 부모의 기대대로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고 남이 그렇게 인정하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들을 향한 기대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부모는 여러분에게 어떤 기대를 가지고 여러분의 이름을 지어 주었을 가요?
2. 도망자가 귀가자로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었습니다. 종노릇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어서 피해를 주고 도망간 오네시모를 회개시켜서 다시 빌레몬에게 돌려 보내게 되었습니다.
<네게 저를 돌려 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12)
오네시모가 가겠다고 하니까 돌려 보낸다고 한 것입니다.
당시 기록을 보니까 그 때에는 그 지역에 6천만명의 노예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예에 대한 법이 엄격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노예를 부리기 좋게 하기 위하여 영혼이 없는 동물이라고 불렀습니다. 살아있는 도구라고 말했습니다. 두 발 가진 편리한 동물이라고 여겼습니다. 노예는 주인의 사유재산이기에 마음대로 죽일 수가 있었습니다. 도망간 노예가 잡히면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사지를 짤라서 죽이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운이 좋은 노예는 라틴어 Fugitivus 즉 도망자라는 머릿글자인 F 자를 이마에 찍어 일생 핍박당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오네시모는 그래도 회개하고 자기 주인에게로 돌아가 다시 섬기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보통 결심이 아니라 생명을 건 결단이었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아니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아니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결단이었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돌아가야 원칙이고,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용서하여야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반대였습니다. 빌레몬은 오네시모에게 분을 품고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응어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용서하라고 강요할 수 없고, 오네시모에게 돌아가라고 강요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중간에 바울이 역할을 지혜롭게 하였습니다.
바울의 간절한 호소를 들을 수 있습니다.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너는 이 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14-21)
이 본문에서 바울의 가슴 울리는 말을 들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
<...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오 형제여!..>
<...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모두가 가슴을 울리는 언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같은 심정을 가지고 이 일을 잘 처리하였습니다. 오네시모를 멋진 사람으로 개조시켰습니다.
3. 배반자가 심복으로
복음으로 변화된 오네시모는 바울의 심복이 되었습니다. 동역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심부름꾼이 된 것도 아닙니다. 심복이 되었습니다. 심복은 원어로 스플랑크나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내장이나 간장을 의미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만일 내장이 없다면 살 수가 없습니다. 간장이 없다면 당장 죽을 것입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없이는 살 수 없을 정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적어도 당시 바울은 최고의 동역자를 오네시모로 여기고 있음이 틀림이 없습니다.
주의 종이 <난 그 사람없이는 일을 할 수가 없다>라고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얼마나 오네시모를 사랑하고 있는 지 눈물이 날 정도입니다.
11절 저는 내게 유익하다.
12절 저는 내 심복이라.
13절 저를 내게 머믈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17절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 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18절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오네시모는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가장 큰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바울의 편지로 인하여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 드렸을 것입니다. 빌레몬의 뜻은 <사랑을 간직한 자>라는 의미입니다.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이였기에 어쩌면 바울의 편지를 받고 오네시모를 노예에서 해방시켰을 지도 모릅니다. 오네시모는 잡혀 죽을가 두려워하던 암흑의 생활에서 깨어나 이제는 떳떳하게 광명속에서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사랑과 빌레몬의 용서는 오네시모를 전적으로 다른 사람이 되게 하였을 것입니다.
전설
후에 오네시모는 에베소의 감독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안디옥의 감독 이그나티우스가 시리아로 호송되고 있었습니다. 순교의 길을 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 때 에베소의 감독 오네시모에게 감사하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성경이 아니기에 믿을 것은 아니지만 충분히 참고할 수 있습니다.
동일 인물일지 아니면 동명이인일지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의 인간성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오네시모 때문에 바울의 인간성이 잘 들어났습니다.
만일 오네시모가 없었으면 이런 중간 역할을 잘 하는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글 : 강문호 목사>
https://cafe.daum.net/ssj0643/cPLw/258?svc=cafeapi
렘브란트 - 감옥에서 저술중인 바울
고향은 다소(그리이스 문화의 중심지이며 자유도시로 많은 유대인이 회당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다.)
주후7년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엄격한 바리세교육으로 유명한 벤야민 지파에 속하며
로마 시민인 아버지의 밑에서 태어나 그리이스 철학에 정통했으며 후에 이스라엘에서 3~4년간
그시대에 가장 유명한 율법학자 가말리엘 밑에서 교육을 마쳤다.
스테반의 순교 - 렘브란트 말을 타고 스테반의 죽음을 증인서는 사울
아직 사울인 그는 열심으로 초대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는 박해자였다
카바바조 - 바울의 회심 돌아서서 바울(작은 자)이 되는 순간
주님은 언제나 겸손한 그릇을 크게 쓰신다.
다메섹(다마스커스)의 그리스도인의 전도를 막기위한 여행도중,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눈이 먼다
그리고 아래 그림에 나오는 아나니아의 집에서 광명을 찾는다.
아나니아의 집
회심을 위하여 과거의 세상것들에 눈이 멀 필요가 있다.
주님이 찾아오시면 빛된 주님의 진리로 눈을 뜨게 되고
광명에 감격하여 아직도 어둠속에 있는 세상사람들에게
주님의 진리의 빛을 선전하는 산 증인이 되는 것이다.
사도행전 14 : 11 바울일행을 허메(헤르메스- 도둑, 의학의 신, 제우스의 전령)와 쓰스 (제우스) 로 알고
소를 바치려는 리카오니아 사람들, 그리고 이를 저지하는 바울일행
그리이스 로마 신화에서 제우스는 자기의 전령인 헤르메스와 자주 동행한다.
선경험 선지식으로 주님을 이해하려는 이방인들의 보편적인 태도
그림 중앙 위에 헤르메스(의학의 신- 손의 지팡이는 병원표지에 자주 보인다)동상이 보인다.
행 27:41 바울이 탄 배가 파선하여 해안에 좌초하고 있다.
오직 주를 위하여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담대함
주를 위해 사는 사명자에게 죽음이란 천국을 가기 위한 변화의 과정에 불과한 것
고리도후서 11장으로 그의 수고와 노고와 여정을 대신한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바울의 순교
blog.naver.com/sbs3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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