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롬9:19-29)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절대주권을 가지고 계심으로 하나님의 판단기준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기에 인간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9:20)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여러 인간을 선택하셔서 다양한 역할을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앞부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스마엘 · 에서 · 바로에게는 부정적인 역할을 맡기셨지만, 이삭 · 야곱에게는 긍정적인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에 관하여 힐문할 수 없습니다. (9:22-23)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 자손들을 통하여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22장 17~18절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러한 아브라함의 택하심으로 그 자손들인 이스라엘은 선민사상을 가지게 되었고, 이는 이방인과 공유할 수 없는 배타적인 구원의 특권 의식과 우월감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믿었는데, 이는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며, 그들 외에는 약속 밖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행 3:13, 7:32) 그러나 혈통적 이스라엘이 모두 이스라엘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는 자들만이 약속의 자녀로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롬9:6-8) 그들은 구원의 대상으로서 ‘먼저(first)’이었으나 예수의 은혜를 거부함으로써 구원에서 ‘나중(last)’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1장 16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이 전파되는 순서와 구원의 순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복음을 배척하고 은혜를 거부함에 따라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고 구원의 은혜가 이방인에게 임하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8장 12절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사도행전 13장 46절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로마서 11장 11~12절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여기서 ‘저희의 넘어짐’은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한 것을 말하고 이를 통해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1~16절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입니다. 그중 16절 ‘이와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에서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 자”는 이방인 중에 예수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이며,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된 자”는 혈통적으로 유대인이지만, 예수의 은혜를 배척한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영원히 버려진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구원을 얻은 후에 이스라엘 중에 ‘남은 자’가 구원을 얻게 되어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혈통적 이스라엘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 (11:26) 요한계시록 7장 1~8절의 하나님의 인(印) 맞은 십사만사천은 육적 이스라엘 중 구원받은 자가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 중에 구원받은 영적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19절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따라 어떤 사람은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버리셨다면, 버림받은 사람들이 “강퍅케 된 것”에 대하여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주장을 제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버리신 기준이 사람들의 행위에 있지 않다면, 버림당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불의하고 불공정하다고 생각하여 불만을 토로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20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판단으로 하나님을 판단한다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힐문하다”는 헬라어 “안타포크리노마이”로 “시비하다, 논박하다, ~와 다투다”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에 감히 하나님과 논쟁하거나 그의 뜻을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범하여 타락한 아담 이후의 인간들은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고 자신의 기준에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예정과 뜻을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대적하는 죄를 범하기도 합니다. 창세기 3장 22절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러기에 인간에게 가장 현명한 태도는 창조주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히 그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8~9절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9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21절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바울은 창조주와 피조물,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인간의 항변을 설명하기 위해서 토기장이의 비유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진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는 유대인들에게는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이미지이며, 그는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분입니다. (사 29:16, 렘 18:1-6) 그릇(스큐오스)은 인간을 가리킬 때 사용했으며, 흔히 유대인들은 인간을 “진흙의 형상”이라고 칭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따라 이삭 · 야곱은 귀히 쓰는 그릇이며, 이스마엘 · 에서 · 바로는 천히 쓰인 그릇입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고유권한으로써 아무도 이 권한에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2~23절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여기서 ‘진노’는 하나님의 정죄나 심판을 의미합니다.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은 진노를 그릇에 쏟아붓듯이 하나님의 인내와 긍휼을 끝까지 무시하다가 결국 하나님께 진노의 심판을 받게 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은 하나님 영광의 풍요함을 알고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를 경험할 자들을 말합니다. (8:30)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22~23절까지 마치 진노의 대상과 긍휼의 대상이 예정된 것처럼 보임으로써 이중 예정론을 지지하는 것같이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여 각 개인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구원받을 자와 심판받을 자가 예정되어 있다고 주장(이중 예정론)합니다. 그러나 이는 본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이나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이라는 표현에서 예정론적인 요소를 찾아내어 구원의 제한성을 주장하는 것은 본문을 정반대로 읽은 결과입니다. 오히려 구원을 어느 한 집단으로 제한하려는 것, 즉 유대인들의 선민사상과 같은 구원의 제한성 · 편파성을 깨뜨리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중 예정론을 주장하는 것은 본문의 표면적인 의미에만 매달린 나머지 바울이 주장하려는 의도나 목적을 파악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습니다. (2:11) 어느 혈통인지 어느 민족 출신인지가 구원을 결정하는 요소가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의 은혜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게 됩니다.
고려 시대의 천민들이 난(難)을 일으킬 때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느냐(王侯將相 寧有種乎)?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태어나기 전부터 왕후장상이 선택된 것이 아니라 누구나 노력하고 실력을 쌓으면 왕후장상, 즉 임금이든 제후든 장수든 재상이든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신앙적인 말은 아니지만,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혈통이나 민족의 구별이 의미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느냐? 가 구원의 필수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구원받을 자와 심판받을 자를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예정하셔서 그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얻게 하시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을 받게 합니다.
24절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이 그릇’은 23절의 긍휼의 그릇을 가리키는 것으로 ‘긍휼의 그릇’은 유대인과 이방인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아 구원받아 교회를 이룬 사람들입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택함 받은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이라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택함 받지 못했던 이방인 중에서도 은혜를 믿는 자들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 보기에는 하나님의 약속에서 배제된 이방인들이 구원받게 된 것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것이고 이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긍휼의 그릇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의롭게 된 모든 사람을 통칭합니다.
25~26절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부르셨는데, 이를 호세아와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여 성경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옛 백성인 이스라엘과는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새로이 약속해 주시고 선택하신 백성이 곧 교회입니다.
호세아 1장 10절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
2장 23절 ‘내가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와 ‘내 백성 아니었던 자’는 약속에서 배제되었던 이방인들로 이들도 은혜를 힘입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복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이며, 영적 이스라엘이 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1~13절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과거에는 약속의 언약과 관계없고 세상 소망이 없고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았던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스라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약속의 유업을 얻게 될 하나님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갈 3:28-29)
27~29절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혈통적인 이스라엘 가운데서 ‘남은 자’만을 진정한 영적 이스라엘이 되게 하시기 위해 택하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1장 9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이사야 10장 21~22절‘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22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스바냐 2장 7절 ‘그 지경은 유다 족속의 남은 자에게로 돌아갈지라 그들이 거기서 양 떼를 먹이고 저녁에는 아스글론 집들에 누우리니 이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가 그들을 권고하여 그 사로잡힘을 돌이킬 것임이니라’ 스바냐 3장 13절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으며 먹으며 누우나 놀라게 할 자가 없으리라’
이스라엘이 모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남은 자’만이 구원받을 수 있으며 이것조차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긍휼의 충만함이 이방인들을 은혜 안으로 부르셨고, 혈통적 유대인들 가운데서 남은 자들을 보존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구원의 신비입니다. 로마서 11장 25, 33절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원 전 예정과 풍성한 긍휼로 구원받은 것을 깨닫고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받은 은혜가 값싼 은혜가 되지 않도록 믿음의 행위를 통해 구원받은 증거를 나타내야 합니다. https://blog.naver.com/jicsbc99a
토기장이 비유와 예정론(롬9:21-24)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롬9:21-24)
로마서 9장의 토기장이 비유를 일부에선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을 말씀하는 것이지 개인구원의 예정과 유기에 관한 설명이 아니라고 해석합니다. 전체 문맥에서 따져서 그런 의미가 된다고 말하지만 앞뒤를 연결해보면 오히려 개인 구원의 예정에 관한 의미가 더 강합니다.
우선 토기장이 비유 자체를 해석하는 데에 집착해선 안 됩니다. 비유란 어디까지나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주제를 더 선명하게 설명해주는 보조 역할만 합니다.
토기장이가 귀히 쓰거나 천히 쓰는 그릇으로 나눠서 만드는 것은 오직 토기장이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으로 나눠서 각기 다르게 통치하시는 것도 오직 그분의 절대적 주권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논의를 하게 된 근본 원인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예수님이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로 유대인으로 왔는데 왜 동족 유대인의 배척을 받았으며 그들은 잘 믿지 않고 이방인 신자들만 많아지는가라는 의심 비평 반발이 있었습니다. 그에 대해 바울은 9-11장에 걸쳐서 변증을 하면서 토기장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 민족을 당신의 주권에 따라 다스릴 뿐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초대교회 당시의 이방인이 오히려 예수를 더 많이 잘 믿는 역설적인 상황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따른 계획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논의를 이끌고 가다가 결론을 어떻게 내렸습니까?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롬11:25,26a) 쉽게 말해 충만한 수의 이방인더러 먼저 믿게 하고 그 후에는 이스라엘도 믿게 될 것인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전체 맥락에서 보면 개인구원과 관계없는 것 같으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바울이 변증하고 있는 주제가 유대인 대다수가 왜 동족 예수를 배척하느냐는 즉, 유대인들은 왜 구원 받는 숫자가 적느냐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개인구원과 관련된 질문이므로 바울의 변증의 주제도 그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예수를 믿어 구원 받는 한 개인과 연관되지 한 민족 전체를 구원하는 법은 없습니다.
이 논증의 결론도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구원 받을 때까지”라고 말합니다. 이방민족 전체가 그것도 한 명 빠짐없이 다 구원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후에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해서 마찬가지로 한 명도 빠짐없이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다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어법상 아주 많다는 뜻으로 온(all Israel)이라고 표현한 것뿐입니다. 우리말에도 여의도에 백만 관중이 모이면 온 서울 사람들이 다 모였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방인의 경우와 같은 맥락에서 유대인 중에서 충만한 수가 구원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대다수 혹은 최소한 과반수라고 예측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충만한 숫자일 뿐입니다. 당신께서 구원을 주기로 택한 자들은 당신의 때가 되면 한 명도 누락시키지 않고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6:37)
그리고 이스라엘과 이방족속에 관한 논의가 롬11:26에선 개인적 구원에 관한 설명으로 바뀌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구원은 민족 단위가 아니고 개인별로 이뤄질 뿐 아니라 이 변증의 시발 자체가 구원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상기 토기장이 비유에 관한 말씀에서부터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천히 쓸 그릇은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인데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있다”고 합니다. 반면에 귀히 쓸 그릇은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인데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둘로 나누어서 각기 다르게 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앞에서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롬9:20)라는 반어법으로 하나님께 불평 원망할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9:24에서 그렇게 둘로 나눈 그릇을 누구라고 설명합니까?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이 그릇은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긍휼의 그릇 즉, 구원 받는 그릇인데 유대인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 중에서 한 족속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민족이 아니라 “부르신 자” 즉, 구원 받기로 택함 받았기에 하나님이 구원을 선물로 준 개인입니다. 토기장이 비유의 본문이 직접 개인의 구원 예정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 반대도 성립됩니다. 진노의 그릇은 “우리가 아니라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심을 받지 못한 자니라.” 민족의 구분 없이 예정에 속하지 못한 유기된 자들 모두가 진노의 그릇이 됩니다. 요컨대 바울은 유대인들이 동족인 예수를 배척하고 또 많이 믿지 않는 까닭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계획에 따르는데 그 구원은 예정에 따라 이뤄진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논의의 앞부분에선 이스라엘이라고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 약속의 씨에 들어가야만 한다고 전제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선 이삭만, 이삭에게선 야곱만이 약속의 씨앗이 되는데 그들은 태어나기도 전부터 하나님이 택했다고 강조합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9:10-13)
다시 강조하지만 분명히 개인의 구원에 관한 진술입니다. 나아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것도 구약성경의 예언대로 실행하려고 야곱을 택했다고 합니다. 그럼 신자가 믿을 것을 미리 알고서 택해준다는 예지예정론은 성경이 지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자면 로마서 9-11장의 주제는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 민족의 구원에 대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말씀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민족별로 이뤄지지 않고 오직 개인에게만 적용되므로 그 주제 자체는 물론 그것을 보충 설명하는 토기장이 비유도 개인의 예정에 관한 진술입니다. http://whyjesusonly.com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한다는 것은?
유대인의 경계지표를 허문 예수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이스라엘이 예수를 끝까지 거부하는 이유
초대 교회의 이방인들이 갖는 큰 의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지금도 불신자들이 동일한 내용으로 자주 제기하는 질문입니다. 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를 안 믿거나 더디 믿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입어 다른 민족은 도무지 알 수도 없는 너무나 큰 권능으로 보호와 인도를 받았고, 거룩한 율법을 수여 받았으며, 무엇보다 메시아가 와서 구원할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도 소유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유대인 가운데 구주가 왔음에도 믿지 않는 것은 이상하며, 자기 민족도 잘 믿지 않는 구주를 자꾸 이방인더러 믿으라면 본말이 전도된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하나님의 경륜에 속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인 그분의 뜻을 알 수는 없지만 이방인을 먼저 믿게 하는 것이 당신의 인류 구속사에서의 순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그 순서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도 일본이나 일부 회교 국가들에는 이스라엘보다 크리스천 숫자가 더 적을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얼마나 많이 구원하느냐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계획에 달린 것입니다.
성경이 정작 말하는 바는 그분의 구원에서 이방인이라고 순서에서 전혀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베푸는 당신의 사랑과 권능이 유대인들에게보다 적거나 약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바울 당시나 지금이나 구원은 어디까지나 한 죄인과 하나님의 일대일 개인적 관계에서 이뤄지는 것이지 한 민족 전체를 다 구원하고 심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 전체적으로 봤을 때에 유대인들이 늦게 믿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배척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모세오경(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 다섯 권의 별칭)을 너무 금과옥조로 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죄인과 교제를 하는 것을 두고 바리새인들이 계속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들과 일상적으로 만나 식사도 하고 복음도 전했으므로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찾아가 사역을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서에서 죄수라고 말한 것은 율법을 어긴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모세오경 뿐 아니라 그 오경을 구체적으로 적용하도록 만든 장로들의 유전을 어긴 자는 죄인으로 취급 했고 또 유대 사회의 교제에서 제외시켰던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사회활동에서 불이익을 받게 된 것을 넘어서, 종교적으로는 거룩한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기에 더 이상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자라는 심각한 뜻을 지녔습니다.
예컨대 장로의 유전에 따르면 안식일에 오리는 여행해도 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규정들을 위반한 죄인들과 교제를 했을 뿐 아니라,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마5:41)라고 가르쳤습니다. 눈은 눈으로 갚으라는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을 문자적으로만 적용하지 말고 그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로선 그 출신도 분명하지 않은 한 젊은 랍비가 안식일 규정을 위반해도 된다고 부추기고 있다고 여겨졌을 것입니다.
장로들의 유전은 자기들이 만든 것이라 치지만, 특별히 오경의 규정 하나가 끝내 그들의 발목을 잡아매었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3)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가 당신께서 주신 거룩한 율법을 어기며 나무에 달려 죽을 수는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 스스로 자가당착을 범했거나, 일구이언(一口二言)한 것이 되니까 말입니다. 그들로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스스로 주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죄인들과 교제하며 장로의 유전을 예사로 어기며(?) 선한 것이 나올 리 없는 나사렛 출신에다 그 아비 요셉을 아는 유대인들로선 예수를 결코 메시아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생애 중에 그를 그리스도라 시인하는 자는 출교(黜敎)시키기로 결의 했습니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후에는 저주 받은 죽음을 받은 자가 메시아가 될 수가 없다고 믿고 끝까지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고전1:23)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사정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유대인들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벧전2:8)이 되었다고 시편118:22를 풀어서 설명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자, 믿는 자에게는 보배인 줄은 그들로선 도무지 깨닫지도 인정하지도 못한 것입니다.
모세오경에도 이미 십자가는 있었다.
유대인들의 오류는 율법의 문자적 적용에만 집착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미처 몰랐던 사항이 있습니다. 우선 율법의 핵심인 십계명 자체가 바로 십자가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첫 네 계명은 하나님과 수직적 관계이고, 나머지 여섯 계명은 인간 사이의 수평적 관계를 뜻합니다. 그럼 십자가 형식이 바로 세로와 가로가 교차하는 십자가이지 않습니까?
그 의미는 하나님의 거룩한 택한 백성이라면 당연히 그 두 관계에서 다 완벽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상 어느 누구도 십계명을 온전히 지킨 자는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이 두 차원의 계명을 문자적으로도 온전히 지켰습니다. 예수님이 어긴 것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말로 하나님이 직접 수여하지 않고 인간 장로들이 고안해낸 유전이지 모세오경 자체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상징하는 십계명을 문자적으로나 그 내용으로나 완성시킨 유일한 인자이신 예수님만이 십자가에 달릴 온전한 대속 제물이 될 자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출애굽 유월절 사건 때도 십자가는 등장합니다. “해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출12:6,7) 하나님이 애굽의 모든 장자(長子)를 다 죽이는 열 번째 재앙 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문을 닫고 집안에 머물면서 문에다 어린 양의 피를 발라서 살아났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그 어린 양의 피를 보고 지나쳤기(유월, 踰越, passover) 때문입니다. 그런데 피를 바른 설주는 문을 지탱하는 세로 기둥이며, 인방은 가로 기둥입니다. 비록 십자가 모양은 아니라도 분명히 피를 가로와 세로에 발랐습니다. 십자가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상징입니다.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여호와와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며 불평을 터뜨리자 하나님은 불 뱀을 보내어 백성들이 물려 죽는 벌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백성이 그 죄를 회개하자 하나님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게 하고 불 뱀에 물렸어도 그 놋 뱀을 보는 자는 살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은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3:14)라고 장대위의 놋 뱀에 자신을 비유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하나님과 원수 된 죄를 용서해줄 메시아가 나무에 달릴 것이라고 이 사건에서도 예표(豫表)했던 것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와 아비 이삭을 속여 장자권을 차지한 후에 형의 분노를 피해 단신으로 피난길에 나섭니다. 조부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의 땅에서 복의 근원이 되어 하나님의 기업을 물러 받고 싶었지만 오히려 그 땅에서 살아갈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언제 가나안으로 돌아와 그 축복을 이어받을 수 있을지, 아니 안전하게 돌아오기라도 할지 염려되어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 잇는 사닥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하며 그 언약을 다시 확인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니엘을 제자로 부르면서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요1:51)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당신께서 죄인들로 하늘로 올라가게 만드는 사닥다리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 될 믿음의 자녀들을 불러내어 구원해주시겠다는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시킬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결국 메시아가 나무에 매달리는 모습으로 하늘로 가는 사다리가 될 것이라고 모세오경에서만 네 번이나 상징적으로 말씀해 놓았던 것입니다.
자가 당착에 빠진 유대인
물론 문자적으로만 오경을 이해 적용하는 유대인들더러 구약성경에 숨겨진 메시아에 대한 상징, 예표, 묵시까지 정확히 해석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의 유대인들이 범하는 더 결정적인 오류는 너무나 엄연한 하나의 진실을 무의식적으로 간과하거나, 의도적으로 외면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메시아를 십자가에 매단 것은 자기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 총독이 봐도 죽일 죄라곤 없었는데도 하나님 모욕죄와 로마제국 반란죄로 몰아서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참으로 흥미롭지 않습니까? 자기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놓고선 나무에 달려 저주받은 죽음을 당한 자가 메시아일 리 없다니 도대체 앞뒤가 안 맞습니다. 자가당착을 범한 것은 하나님과 메시아가 아니라 도리어 그들입니다.
쉽게 비유해보겠습니다. 미국시민권자인 한국인 교포가 한국을 방문하고 다시 LA 공항에 입국했습니다. 미국시민전용 입국심사대에 가서 독수리 문양이 그려진 미국여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입국심사관이 아무리 봐도 한국인인데다 영어도 제대로 통하지 않고 인상이 나쁘다고 그 자리에서 한국여권을 억지로 만들어 쥐어주고는 한국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곤 미국여권도 없으면서 미국인 행세해서 쫓아내었다고 강변하는 꼴입니다.
유대인들로선 아무리 판단해도 메시아가 아닌데도 메시아 행세를 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했기에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고 항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앞뒤가 전혀 안 맞습니다. 우선 최고로 중한 하나님을 모독한 죄는 스데반의 예에서 보듯이 그 자리에서 돌로 쳐 죽이면 됩니다. 복음서에도 그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죽이려고 수차 시도했지만 유대 일반 대중들이 그를 메시아 혹은 신적 권능을 지닌 선지자로 여기니까 눈치를 보느라 차마 그러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십자가 처형은 로마가 제국을 반역한 죄인에게, 로마로선 최고의 죄이므로, 내리는 극형입니다. 유대인들이 유대인을 나무에 매다 죽이는 사형제도란 아예 없습니다. 유대인들끼리는 노예도 삼지 말고 빌려준 돈에 이자도 받지 말라고 율법은 명합니다. 하나님께 저주받는 십자가형을 동족에게 부과했다간 스스로 율법을 어기게 되므로 차마 예수에게도 적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어떤 꾀를 내었습니까? 로마법을 빌려서라도 기필코 예수님을 하나님께 저주 받은 형태의 죽음으로 몰아가겠다고 덤볐습니다. 단순히 자기들에게 사형을 언도할 권한이 없어서 로마 총독의 재판정에 넘겼다고 여겨선 부족합니다. 로마는 제국에 항거하지 않는 한 각 식민지의 고유종교를 인정하면서 신앙의 자유를 주었습니다. 또 예수님 당시는 로마 황제숭배가 시작되기 전이라 더더욱 그랬습니다. 스데반의 예에서 보듯 한 명 정도 유대 특유의 종교적 이유로 죽였다고 제국이 별반 문제 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자기들이 저주 받을 죽음으로 몰고 갈 각본을 짜서 그렇게 시행하고선 그것 때문에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단순히 예수를 아무리 판단해도 도무지 메시아가 아니라 믿지 않았고 또 하나님을 모욕하기에 돌로 쳐 죽였다고 하면 논리적으로 전혀 모순이 없습니다. 한 젊은 랍비를 종교적으로 박해하고 전혀 무고한데도 살인하려는 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 하면서 스스로 손에 피를 안 묻히려는 너무나 교묘하고 음흉한 계교였습니다.
나아가 예수를 죽인 후에 혹시 있을지 모르는 대중들의 소요나 더 열렬한 추종을 막기 위한 너무나 귀가 막힌 예방조치였습니다. 나무에 달려 저주 받은 자가 어찌 메시아일 수 있는가라고 떠벌리면 가뜩이나 율법의 멍에에 눌려 있던 유대 대중들이 예수 믿을 엄두가 나겠습니까? 일석이조가 아니라 일석수십조의 이득을 노린 것입니다.
핑퐁게임을 하는 사단의 수하들
예수님이 십자가 사형에까지 처해지는 당시의 과정은 물론 마지막 날의 상황만 잘 살펴봐도 그가 메시아였음이 확증됩니다. 유대를 다스리는 세 권력 기관들끼리 골치 아픈 문제를 상대 코트에 던져 넣으려는 핑퐁게임하기 바빴습니다. 그 세 기관은 평소에는 서로 싫어하면서도 기득권을 향유하려고 긴장된 권력 균형을 이루던 유대공회와 로마총독과 헤롯왕입니다. 그리고 겉으로는 셋 다 예수를 안 죽이려 서로 발뺌했습니다.
그 중에 빌라도와 헤롯은 실제로 예수님을 죽일 의도가 없었습니다. 그들도 예수에게서 신적 권능을 발견했든지, 최소한 죽일만한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알았습니다. 그들도 예수가 인간이 도무지 행할 수 없는 수많은 이적을 일으켰고,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권세 있는 가르침을 베풀었고,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는 이야기를 익히 전해 들었습니다. 예수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그들로선 그를 죽였다간 혹시라도 천벌을 받을지도 염려되었을 것입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로 이뤄진 유대 공회는 달랐습니다. 유대 공회 안에서도 제사장 그룹인 사두개인과, 주로 율법사 서기관 랍비에 종사하는 바리새인은 평소에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성전제사(사두개인)와 율법(바리새인)을 구실로 유대 대중들을 자기들 권력 아래에 묶어두어야만 했습니다. 그날 밤만은 공통의 이익을 위해 의기투합했고 설명 드린 대로 너무나 교묘하게 나무에 매다는 처형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헤롯의 경우, 유대의 실질적 왕이긴 해도 검사 측에 해당되는 유대공회가 제기한 죄목과는 무관했습니다. 이미 설명한 대로 하나님 모독이라는 종교적 죄는 유대공회가, 로마제국 반란은 총독이 다룰 문제였습니다. 공회로선 빌라도가 반란죄를 적용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상황을 전개해야만 했습니다. 대중들을 선동할 필요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빌라도는 평소 예수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고 아내마저 전날 밤 꿈자리가 사납다고 죽이지 말라고 만류했습니다. 또 로마를 반역했던 일은 커녕 그런 의도조차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로마군인도 아닌 유대관원의 수하들에게 아무 저항 없이 순순히 잡혀올 리 없다는 것입니다. 총독에까지 오를 정도로 정치적 계산이 빠른 그가 이 사태의 배경에 유대공회의 종교적 음모가 있음을 눈치 못 챘을 리 없었을 것입니다.
유대 공회의 음모가 얼마나 교묘했는지 또 다른 증거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로마를 반역하려고 시도한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것은 누가 봐도 다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왕이라고 자처한다고 몰아붙였습니다. 유대 왕은 제국이 임명하고 또 지금 헤롯이 왕으로 엄연히 있기에 그 주장만으로 로마에 항거한 셈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으로선 구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유대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라는 뜻일 뿐이었습니다. 실제로도 정치적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공개적으로 얼마나 그런 말씀을 선포했는지 모르지만, 구약에 능통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뜻을 모를 리 없었습니다. 유대 대중들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추종하지 못하게 하려는 음모는 감춘 채 자기들의 귀책사유가 되지 않을 정치적 올가미를 덮어씌운 것입니다.
거기다 무신론자이자 우상숭배자인 빌라도가 살아계신 참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로마 황제를 더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유대관원들은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정치적 술수는 정치 구단인 빌라도를 오히려 능가했습니다. 유대 대중들을 선동해 십자가에 죽이지 않으면 민란이 일어날 것처럼 상황을 이끌었습니다. 대중들로 십자가에 죽이라고 그 처형방법마저 미리 지정해주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 십자가라는 죽음의 방식 때문에 유대인들은 예수 믿는데 거리낌을 갖는다고 합니다. 인간 죄악의 추악함과 치사함과 완악함의 절정입니다.
흥미롭게도 그날 밤만 따지면 세상 권력 셋 중에 헤롯이 제일 의롭고, 의롭다는 표현이 부적합하므로 가장 덜 악하고, 그 다음이 빌라도이고, 마지막이 유대 공회입니다. 앞의 둘은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 권력만 추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유대 관원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고 율법을 열심히 준수하는 자들입니다. 종교적 열성이 부귀와 명예에 맛들이면 얼마나 사악해지는지, 세상권력과도 비교 안 될 정도로, 생생히 보여주는 실례이기도 합니다.
그날 저녁에는 모두가 영적으로 미쳐 돌아갔습니다. 인간으로서 정상적인 사고를 갖고 행하는 이는 오직 예수님뿐이었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마저 인류 역사 내내 회자될만한 수치스런 짓을 범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아 예수를 모르는 모든 자연인이 참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사단은 재물과 권력으로 얻을 수 있는 현실적 안일과 형통에 눈이 먼 인간들을, 그것도 지도층들의 영혼부터 완전히 미혹시켰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받지 못하게 하려는 유대관원들의 술수가 성공하도록 사단은 빌라도, 헤롯, 로마군병과 유대무리들을 공중 권세로 완전히 휘어잡았던 것입니다. 역사상 최대의 핑퐁게임 대회에 모두를 선수로 나서게 만든 꼴입니다. 물론 그중에 우승자는 유대공회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경륜(지혜를 실제 적용하는 방식)이 놀랍지 않습니까? 사단에 놀아난 유대 공회는 저주 받은 죽음인 십자가를 통해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부인하여 대중들로 믿지 못하게 만들려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십자가라야만 메시아가 됨을 구약에서부터 예표한 후에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어 직접 실증(實證)케 했지 않습니까?
간혹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물론 그분의 역사적 실존성마저 완강히 부인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설명 드린 성경의 진술만 해도 도무지 인간이 지어낼 만한 성격이 아닙니다. 설령 그랬다 쳐도 그날 밤의 당사자들인 헤롯, 빌라도, 베드로는 물론 유대 대중이 혹은 그 후손이 그 기록을 보고 전혀 반발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일어난 사실을 사실대로 정미하게 기록했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십자가의 궁극적인 배후에는 하나님의 완벽한 구원 계획이 있었고, 예수님은 정말로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실 메시아였다는 것입니다. .
유대인의 경계지표를 허문 예수님
예수님이 나무에 매달리게 된 것은 역사상 최고로 정교하고도 사악한 유대관원들의 계략 때문이었습니다. 정작 궁금한 것은 주님께 그렇게 열광했던 대중이 왜 십자가 사건이 끝나고 그 부활을 알고도 계속 거부했는지 이유입니다. 마지막 날 밤에는 흑암의 세력에 휘말려 군중 심리에 쫓겨 갔다 쳐도, 주님으로부터 온갖 이적과 치유의 섬김을 받았고 권세 있는 복음의 가르침을 들었지 않습니까? 저주스럽게 나무에 매달렸다는 것과 나사렛 출신의 목수 아들이었음을 알았다는 것 외에 주님을 배척할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모세오경을 끔찍이 여긴 이유는 나름대로 타당합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까닭이 모세오경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정확히 파악하여 깊이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아주 세부적인 규정까지 덧붙여서 율법준수에 모든 심혈을 쏟은 것입니다. 또 그 율법 준수야말로 바벨론처럼 우상숭배 하는 이방인들과 거룩한 창조주 참 하나님을 따르는 자기들과 가장 다른 점이라고 믿었습니다.
특별히 할례와 안식일과 십일조, 셋은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야말로 유대인을 가장 유대인답게 만드는 푯대였습니다. 이 셋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거룩한 유대인과 구원 밖에 있는 이방인을 나누는 경계지표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논쟁을 벌였던 주제가 이 셋에 집중되었던 것입니다. 다른 말로 그들 눈에는 예수는 이방인과 방불했던 것입니다. 거기다 종교적 토론에서도 밀리고 대중들의 인기가 그에게 쏠리자 죽일 음모를 꾸몄고 급기야 그를 따르는 자들도 동일하게 출교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만에 하나 황제의 눈에 벗어날까 두려워했다면, 유대 대중들은 유대사회를 실제로 이끄는 산헤드린의 심기를 건드릴 것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로마 황제는 제국의, 공회는 유대의 최고 권력기관입니다. 거기다 유대는 종교 중심의 사회라 더더욱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북한에서 김정일이 죽자 인민들이 속으로는 전혀 슬프지 않고 심지어 쾌재를 불렀어도 혹시 충성심이 모자란다고 간주되어 그 사회에서 매장될까 거짓 눈물을 흘리며 곡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주님의 가르침 그대로 사람은 자기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이 땅에 보물을 쌓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과 재물 둘을 겸하여 섬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유대 지도층들은 물론 대중들도 비록 할례, 안식일, 십일조 등 경건한 종교적 의식으로 이방인과 경계지표를 삼고 있었지만 진짜로 모시고 있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의 성격이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의 견지에선 너무나 위선적이고 당신의 나라 확장에 전혀 무익한 모든 경계지표들을 무너트리는 일이었습니다. 절기 따라 성전에 경배하러 온 순례객을 상대로 환전과 희생제물 장사로 이익을 챙기기 급급한 자들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야단치며 쫓아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부하면서도 율법에 예표된 메시아인 당신을 알아보기는커녕 도리어 죽이려드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마귀의 자식이라고 선포했습니다.(요8:39-47) 그들은 안식일에 할례는 열심히 주면서 당신께서 사람의 전신을 건전케 한 것으로 비방하는 잘못을 예리하게 통박했습니다.(요7:23)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도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고 그들의 가식과 위선을 벗겨냈습니다.(마23:23)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의 경계지표가 잘못되었으니 무너뜨리라고 아무리 가르치고 또 몸소 실천해 보여도 완전히 소귀에 경 읽기였습니다. 결국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서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마15:14)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다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5)
유대 대중들을 향해선 어서 빨리 그 잘못된 경계지표를 버리고 참 하나님 앞으로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라고 초청했습니다. 당신이 십자가에서 세상 모든 죄를 지고 죽을 어린 양임을 믿고 당신이 가는 길대로 따르면 부활 생명을 얻는다고 선포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게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8-30) 유대인들이 지는 짐과 수고가 현실의 고난이 아니고 장로들이 정한 종교적 유전입니다.
지금도 유대대중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근본이유는 하나입니다. 자기들의 경계지표를 허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종교적 측면에선 자기들만이 하나님이 택한 거룩한 백성으로서 율법대로 살기에 모든 면에서 의롭다는 교만입니다. 그 내면에는 경계지표로 둘러싸인 자기들 사회에서 출교 당할까 두려운 것입니다. 자기들을 솔로몬 때의 영광으로 되돌려 줄 헛된 메시아를 아직도 기다리고 있기에 실은 이 땅에서의 형통만 바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재물을 주인으로 삼으려니까 예수가 방해되기에 믿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의롭다고 자부하는 그들로선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지적이겠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 비추어 성경 말씀을 잘 분석하면 이런 결론 밖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더디 믿는 역사적, 문화적, 종교적 원인들은 지엽적인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다른 모든 자연인들과 마찬가지로 원죄 하에 태어난 영적 소경으로 죄에 찌들어 있기 때문일 뿐입니다.
- To be continued
(*) 경계지표- 존 오트버그 저작, "평범 이상의 삶"(국제제자훈련원 번역발간)의 44,45 page "경계표시 신앙"에 나오는 내용을 일부 참조하였습니다.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한다는 것은?(롬10:9,10)
전도가 미련한 까닭은?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지금껏 유대인들의 잘못을 따지려고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정작 우리를 되돌아보자는 뜻입니다. 우리가 과연 그들과 다를 바가 있는가를 말입니다. 물론 기독교는 유대교 같은 확고한 경계지표들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신약교회에서 행하는 세례와 성찬식도 이미 믿은 자들이 십자가 복음을 고백하고 기념하는 의식입니다. 불신자가 참여할 수 없어 그들과 구별되는 의식이긴 해도 그 의식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교회에서의 불이익이나 출교 같은 일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대신에 서두에 인용한 본문 말씀이 구원으로의 초대에 너무 남용 혹은 오용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를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주라 시인하기만 하면 구원 받았다고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구원 초대를 하기 위한 전도 형식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택하여 은혜로 구원을 주신다는 예정 교리에 반대하여 인간 쪽에서 반드시 먼저 믿어야만 한다는 논리의 근거로도 동원됩니다.
그러나 이는 이 구절을 문자적으로만, 혹은 이 구절만 따로 떼어내어 해석하는 것으로 성경이 정작 말하는 바에 비하면 많이 부족합니다. 지금껏 살핀 대로 문맥상 유대인들을 일차 대상으로 한 말씀이라는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아주 논리적인 바울 사도가 구태여 이스라엘의 구원을 논하면서 이 말씀을 한 까닭을 반드시 따져보아야 합니다. 바로 앞부분에서 이미 그 까닭을 언급했습니다.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가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傳播)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10:5-8)
신자들이 교리적으로 잘 알고 있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얻는 의”를 주어로 삼아 “이 같이 말하되”라고 의인화(擬人化) 했습니다. 결국 믿음으로 얻는 의는 구원 받은 신자를 대변하는 셈인데, 신자도 의인화된 의가 말하는 대로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말이란 당연히 자기가 믿는 바에서 나오기에 신자의 믿음도 그 말하는 바와 일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의가 말하는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정확하게 따지면 둘 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마찬가지로 의인화 되었음)가 말하고 있는 것을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율법의 의가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와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라고 말하고 있는데, 믿음의 의는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도 그 마음으로 말하고 있다고 했듯이 의인화 되었으며. 마찬가지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을 뜻합니다. 율법에 고착 된 그들의 종교적 사상 혹은 정서 때문에 그런 말들을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유대인들이 따르는 율법의 의를 신자가 따라야 할 십자가에 드러난 예수님의 의와 비교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인간은 아무도 하늘에 올라갈 수 없고, 음부에 내려 갈 수도 없다고 마음으로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틀린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객관적 진리를 말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빗대어 그런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부활하여 승천했다는 사실과, 모든 죄인을 대신하여 죽음으로써 구원의 길을 열었다는 사실 둘 다 완전히 부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는 단순히 인간 랍비에 불과하지 죄인을 구원하러 온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믿음의 의는 그 반대가 진리임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가 죽음에서 살아난 그리스도라는 복음입니다. 그는 결코 인간 랍비가 아니라 하나님 본체로서 인간의 모든 죄책을 감당한 대속제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의 앞에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아닌 자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옛 자아가 십자가에서 그분과 연합해 같이 죽고 그분의 부활에 연합해 성령으로 새롭게 거듭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로 덧입혀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들음에서 나는가?
한 죄인이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유대인들이 그분을 배척했던 것과 같은 이유로 예수를 거부했지만, 그 이유는 다 사라지고 더 이상 그분이 자신에게 거리낌이 되지 않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아무리 도덕적으로 의롭고 종교적으로 경건하게 살아도 자기 나라만 부강하게 해주는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자기들끼리 향유해 오던 고유이익을 놓치지 않으려고 절대로 자기들의 경계지표를 허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 땅의 행복과 안일만 추구하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진심으로 죽을 죄인임을 고백하며 겸허하게 엎드리면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구분하지 않고 즉, 아무런 경계지표를 적용하지 않고 하늘의 참 생명으로 새롭게 해주신다고 선언했습니다. 유대인들로선 그런 예수님을 믿기는커녕 인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를 메시아로 인정하는 순간 지금껏 자신들이 틀렸음도 인정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죽이려 덮어씌운 덫에 오히려 자기들이 걸려서 영원한 진노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된 형국입니다.
결국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는 문맥상의 의미는 자기 심령 깊숙이 예수를 배척하려 했던 어떤 이유나 근거라도 완전히 없앤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에 대해 완전히 뒤바뀌어진 마음에서 그 신앙고백도 자연히 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정말로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며 그 죄를 없앨 방도란 그분의 십자가 죽음 밖에 없음을 철두철미 깨닫는 체험적 고백으로 말입니다.
또 지금까지 재물을 주인으로 삼았던 헛되고 헛된 인생 여정에서 돌이켜 좁고 협착한 길이지만 예수님이 가신 길을 뒤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이 180도로 완전히 바뀌었기에 단지 그 사실을 사실대로 입술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님 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다는 것이 실제로 자기 인생을 붙들어주는 가장 근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단순히 예수님이 구세주라고 입술로 시인한다고 믿음이 생기거나 구원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대속 죽음으로 우리 죄가 사해졌음을 믿으라고 하니까 그 종교적 진술이 객관적으로 옳기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심지어 앞으로 믿어보려고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뜻으로 “믿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입술로 그분을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갖고 있던 것 같은 편견, 선입관, 왜곡, 오해, 거리낌, 등을 완전히 버리고 진짜로 그분 앞에 완전히 항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사렛의 목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 메시아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자기 생명을 가름하는 절대적이고도 온전한 진리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온전한 믿음도 예수가 정말로 그리스도임을 알게 됨으로써 바울처럼 예수의 가장 극렬한 핍박자에서 가장 열렬한 옹호자가 되는 변화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또 그런 변화가 생긴다면 그 마음에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에 한 치의 의심과 주저함도 없기에 입술로 자동으로 시인하게 되는 법입니다.
흔히들 세상에선 유대인들이 동족이었던 예수를 가장 쉽게 믿을 수 있었을 텐데 왜 믿지 않느냐고 반발합니다. 바울 사도가 말하는 뜻은 유대인들에게 오히려 가장 믿기 어려운 상황과 종교적 선입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모두가 나사렛 예수는 이단으로 여기기에 쉽게 믿을 수 없다는 것을 그만큼 잘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만나 거듭난 그는 그야말로 예수 외에는 인생의 의미와 가치가 전혀 없다는 것을 온전히 실감했습니다. 십자가 구원이야말로 영원하고도 절대적 진리이기에 그 믿음의 말씀을 동족에게 간절히 호소하겠다는 것입니다.
“입술로 시인하려면 믿어야 하고, 믿으려면 들어야 하고, 들으려면 보내져야 한다.”는 말은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너무나 당연한 내용입니다. 대신에 바울이 그 뒤에 결론을 어떻게 내렸는지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10:14,15)
“어찌(how)”라는 말을 네 번이나 반복하며 강조했습니다. 그렇게 안 하면 도저히 다른 수단이 없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를 믿기 가장 힘든 사상과 관습에 젖어 있는 유대인들로 믿게 하려면 어떻게 하든 복음을 전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저주 받은 죽음을 당했기에 메시아가 될 수 없다고 끝까지 우겨도, 아니 그럴수록 전하지 않고는 어찌 믿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유대인들이여 제발 어떻게 하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오늘날의 복음을 전하는 자도 바울과 같은 절박함으로 전해야 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 아무리 도덕적으로 의롭고 철학적으로 심오한 사상을 가졌고 종교적으로도 경건해도, 그래서 예수가 도무지 이해도 안 되어 믿을 수 없다고 우겨도 예수를 모르면 죽을 수밖에 없으니 복음은 전해야 합니다. 그런 가장 어려운 자들에게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컨대 본문은 전도해야할 당위성과 절박성을 강조한 것이지 전도의 절차를 뜻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까지 왜곡하는 유대인
마음으로 믿어 입술로 시인해야 한다는 본문에 대한 또 다른 오류는 하나님의 예정을 부인하는 측에서 인간이 적극적, 능동적, 의지적으로 먼저 믿어야만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에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래서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라는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예리하게 지적하고서 믿음의 의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가 인간 랍비에 불과하니까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된 유대인 나름의 또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 또한 모세오경을 신성시하여서 문자적으로만 해석 적용한데서 기인했습니다.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음부에 내려가겠느냐?(인간 예수는 절대 하늘에서 내려온 것도 올라간 것도 아니다)”라는 그들의 생각도 오경의 기록을 문자 그대로, 그것도 일부만 떼서 자기들 편견에 끼어 맞추어서 해석한 데서 생겼던 것입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命令)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신30:11,12)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전수하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율법이 하늘 높은 곳에 있기에 인간이 지키기 어렵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그런 의미를 더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에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13,14절) 하나님의 계명이 먼 바다 밖에 있지 않고 네 마음 즉, 너무나 가까운 곳에 있으니 네 마음만 온전히 바뀌면 얼마든지 행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제 바울이 자기들이 전파한 복음을 “마음으로 믿어 입술로 시인하라”고 권면한 이유가 자명해지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에게 아주 익숙한 구약의 구절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 말씀이 네 입에 있다”는 히브리적인 표현은 그 말씀들을 항상 암송하며 묵상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진심으로 믿고 암송하니까 아주 가까이 있는 것이며 또 그대로 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 말씀을 예수님께만은 일부만 문자적으로 적용했습니다. “(율법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라는 부분은 생략하고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만 동원한 것입니다. “하늘에 있지 않다”, 또 “바다 밖에 있지 않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율법이 멀지 않다는 비유적 표현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인간은, 특별히 예수는 절대 하늘로 올라갈 수 없다는 뜻으로 오용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모세는 아무도 오를 수 없는 곳(시내 산)까지 올라가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율법을 받아 왔으니 율법을 대체할 구원 수단은 전혀 없다고 자부하며 고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름도 없고 출신 배경이 의심스런 랍비가 나타나 자기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하니까 도무지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이 말씀은 율법을 신성시하려는 목적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매일 암송 묵상하면서 진심으로 믿고 실천하라는 단순한 뜻입니다. 모세나 율법 자체가 구원의 수단 혹은 매개체가 아니고 대신에 율법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2:13-24 일부만 발췌)
율법을 자랑하고 가르치면서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방인 중에서 오히려 하나님이 모독을 받았습니다. 오늘날의 신자의 형편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자체만 신성시 했지 율법에 담긴 뜻은 무시했습니다.
거기다 분명히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일부만 떼어내어서 예수를 비방 배척하는데 오용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일부만 문자적으로 적용하여서 회중을 오도하는 오늘날의 일부 종교지도자들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그런 목회자만 비방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율법대로 살지 못하는 죄인일 수밖에 없기에 더더욱 십자가 복음만이 생명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었던 바울도 이전에는 동족들과 똑 같이 율법에 대해서 왜곡 편향된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생각, 구체적으로는 예수를 배척하는 이유를 훤히 꿰뚫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부터 그들과 똑 같은 거리낌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율법을 표면적 문자적으로 지키면 의인이 되는 줄 믿었습니다. 지금 바울이 유대인들의 오류를 정확히 지적한 이유도 복음과 율법의 차이를 너무나 생생하게 실감했기에 그 둘을 대비해서 마음에서 자연히 따라 나오는 믿음을 강조하려는 뜻이었습니다.
또 유대인들이 모세만 추종하지만 예수가 바로 구약에서 예언한 언젠가 오실 모세 같은 선지자 즉,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문자적으로 적용하여 생긴 예수에 대해 거리끼는 마음을 전부 없애고 그를 믿어 구원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동족들 앞에 기다리는 것은 진노의 형벌 뿐이니 그들 대신에 자기가 그 벌을 받겠다는 심정과 각오로 제발 복음을 온전히 들어보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래야만 율법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계속 암송하면서 마음에 완전한 자기 것으로 바뀌어져 있으면 행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음은 입보다 더 자기에게 가깝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과 인간의 믿음
문제는 이 말씀과 달리 유대인들은 율법대로 사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들이 말씀의 암송 묵상을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더욱 엄격히 잘 지키려고 실생활에 맞게끔 구체적으로 세분화시키기도 했습니다. 율법으로 유대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시키는 근간으로 삼았습니다. 그야말로 율법을 가까이 두었는데도 왜 실패를 했습니까?
그들은 율법을 마음으로 지키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실제 마음은 재물을 주인으로 삼고 있었기에 율법은 단지 형식으로만 지켰습니다.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마음은 참 하나님으로부터 멀었던 것입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15:8)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게 된 계기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자신들의 경계지표 중의 하나인 정결례를 구실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했기 때문입니다. 떡 먹을 때에 손을 씻도록 한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15:9) 겉으로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장로의 유전을 더 심긴다는 것입니다. 유대사회의 관습과 전통을 중시하는 것은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이며, 그 사회에서 출교당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실은 재물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바로 이어서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15:10)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원죄 하에 태어나는 모든 이의 마음이 이미 더럽혀져 있기에 입술로는 “주여!”라고 해도 하나님을 멀리 한 채 죄를 범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유일한 민족인 유대인들이, 그것도 가르치는 이들마저 이러니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자는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정죄함이 있고 죄의 삯은 사망이 될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결국 자연인이 복음을 전해 듣고 마음으로 믿으려 한다고 온전히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 이전에 성령의 간섭으로 그 마음 밭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옥토로 바뀌어져야만 합니다. 사단에 미혹되어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를 보지 못하는 영혼을 하나님이 새롭게 하여 새사람으로 바꾸어주어야만 합니다. 참으로 놀랍게도 율법이 가까이 있기에 행할 수 있다는 신명기 30:11-14 계명 바로 앞에도 그런 뜻의 말씀이 나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신30:6)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사랑하고 율법을 지켜 행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노력에 딸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당신의 택한 백성의 마음에 먼저 할례를 베풀어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유대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2:28,29)
예수님이 율법을, 특별히 장로의 유전을 문자적으로 지켜야만 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자들 모두를 당신께 나오라고 초청했습니다. 마치 누구나 복음을 듣고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바로 그 앞에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천국 복음을 듣고도 지혜로운 자들인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전혀 회개치 않고 당신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는것을 꾸짖었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11:24-27)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대로만 이뤄집니다. 그리고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아야만 합니다.
심지어 마음으로 믿어 입술로 시인하라는 본문에 바로 이어서도 그런 뜻을 명학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롬10-18-21)
이스라엘은 율법이나 복음이나 들어서 알고도 순종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기를 거슬려 말하는 백성을 향해 종일 내 손을 벌렸다고 합니다. 십자가가 거리낌이 된다는 자가당착적 이유로 아직도 예수를 부인하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은 지금도 긍휼의 손길을 거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구원 계획에 따라 택한 자의 마음에 당신께서 할례를 해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전도가 미련한 까닭은?
바울이 유대인들이 믿지 않는 이유를 로마서 9, 10 두 장에 걸쳐서 설명하면서 어떻게 결론을 내렸습니까? 아무리 유대인 나름의 믿지 못하는 이유들이 많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이방인이 먼저 많이 믿게 만든 후에 유대인들도 믿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 전에 유대인들이 더러는 악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말로 전해 듣고 마음을 믿어 입술로 시인하기 전에 반드시 하나님의 선도적, 일방적, 주도적, 절대적인 은혜가 한 죄인에게 임해야 합니다. 그런 하나님이 마음에 주시는 할례를 받고서 복음을 들어야 아들의 소원대로 복음의 계시를 받는 것입니다. 또 그 계시에 대해 반드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온당한 반응이 믿음인 것입니다.
바울이 “어찌”를 네 번이나 반복해 강조했던 이유는 동족의 구원을 갈망하는 그의 애끓음의 반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어느 때에 동족 중에 어떤 자를, 얼마나 많이 구원하실 지는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또 그러니까 더더욱 복음을 말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충분하다고 구원을 자신하고 있는 유대인일수록 십자가 복음을 정확하게 풀어서 전해야 하고, 그 계시를 받을지 아닐지는 성령님의 역사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느니라.”(고전1:21)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라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4,5)
하나님의 지혜는 심오하고 복잡한 교리가 아닙니다. 죽음에서 살아나 승천하신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이며 그분을 자신의 주인으로 온전히 모시고 따르지 않으면 어떤 소망도 없다는 단순한 진리입니다. 짧고 단순해도 모든 이의 영원한 운명을 가르는 절대적 진리입니다. 또 이 지혜는 말로 전해짐과 동시에 성령의 역사가 따라야만 하기에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마음으로 믿어 입술로 시인해야 한다는 것이 단순히 구원으로 초청하는 전도절차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또 인간의 자유 의지로 반드시 믿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세상 지혜로는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유대인은 더더욱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편견에 싸여 완악하게 믿지 않는 동족 유대인을 너무나 안타까이 여긴 바울의 비장함을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했다고 해서 전도를 단지 종교적 의무로만 간주해선 안 됩니다. 세상 지혜에 가려 예수에 대해 어두워진 영혼이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우니 하나님께서 제발 그 마음에 할례를 베푸셔서 새사람으로 바꿔달라는 바울 같은 간절함을 품는 것입니다. 그런 간절함이 있으면 전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본문의 참의미인 것입니다.
cafe.daum.net/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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