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류의 죄와 심판(롬 3:9-20)
바울은 그 동안 이방 사람들의 불경함과 불의(1:18-32), 도덕주의자들의 위선적인 죄(2;1-16), 그리고 율법을 자랑하면서 순종하지 않는 유대인들의 외식(2:17-3:8)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고발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마지막으로 이야기의 초점을 바울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문을 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그리고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결코 아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그 동안 정죄해 온 사람들에 비해 하나도 나은 점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모두가 죄 아래에 있다고 선언했으며(3:9), 온 인류가 타락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전 7:20 인용),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시14:1-3, 시53:1-3 인용)."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남을 속이고(시 5:9 인용),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가득 차있으며(상처를 입힘:시 140:3 인용),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한 말이 가득하도다(시 10:7 인용).""그 발은 피를 흘리는 일에 빨리 달려가니, 파멸과 고생이 그의 길에 있도다. 그는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사 59:7-8 인용, 참고 잠 1:6),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시 36:1 인용)" |
이 성경 구절들은 모든 인류를 향해 유죄 판결을 내리신 몇 가지 구약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선언들을 모은 것입니다. 이 구절들은 모두 인간이 얼마나 철저하게 죄에 감염되어 있는 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 구절들은 죄에 빠진 인간의 모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말해주고 있다고 합니다.
1. 죄의 불경함 바울은 인용한 말씀들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불경한 죄를 지었다"고 강조합니다. 인간은 마땅히 자기를 지어주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지도 않으며(3:11),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3:18).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마음대로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류의 죄의 원인은 바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생각하기를 싫어하고, 자기의 사상에서 하나님을 제거하려고 합니다(무신론, 살신론). 사람들은 창조 주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과 쾌락과 재물을 더 사랑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의 본질은 이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할 인간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러한 반역과 오만, 그리고 그들의 무관심에 대해 진노하시며 심판하실 것입니다. |
2. 전 인격적인 타락 바울이 인용한 말씀들은 "인간이 전 인격적으로 타락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버린 결과 우리의 지성이나 감정의 일부분만 타락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의 세력은 우리의 모든 지성과 감정, 성적 활동과 양심과 의지를 포함한 모든 부분까지 침투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마치 온 몸에 화상을 입은 환자처럼 모든 인격 구석구석까지 죄의 세균에 감염되어버렸습니다. 구약 성경은 사람의 목구멍이 마치 열린 무덤과 같다고 말합니다. 열린 무덤에서 시체가 썩는 악취가 나는 것처럼, 그 입으로 온갖 부정하고 더러운 말을 내뱉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혀로 날마다 거짓말을 해대고, 입술 밑에는 상처를 입히는 치명적인 독이 숨겨져 있으며, 입에는 남을 저주하는 악담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아도 이것이 진실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혀와 입술은 이미 거짓말과 남을 해치며 상처를 입히는 데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의 발이 폭력과 피 흘리는 일을 하는 곳으로 "빨리 달려간다"고 말합니다. 우리 발은 아웃을 위해 희생하고 돕는 일에는 천천히 갑니다. 그러나 그릇된 일을 할 때는 신속히 달려갑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악을 행하기 때문에 그들이 가는 길에 평안이 사라지고, 그 대신 파멸과 불행으로 가득 차버렸다고 말합니다. 폭력과 불법적인 인생에는 파멸과 고난이 따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성경은 사람들의 눈이 당연히 보아야 할 것은 보지 않고, 보아서는 안될 것만을 보고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눈은 음란과 탐욕에 가득 차서 죄를 짓는 도구로 사용되기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원래 우리 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버린 결과 우리의 생각과 모든 지체는 하나님을 모독하며 이웃을 해치고 악을 행하는 일을 하는 데에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모든 사람들의 전 인격이 타락했다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
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함(죄의 보편성) 바울이 인용한 말씀들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성경 말씀에는 "아무도 없다"는 말이 4번이나 나오고 있고, "하나도 없다"는 말이 2번이나 언급되었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사람들 중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의롭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해서 조사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의로운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훌륭하고 고상한 이상가와 사상가도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는 마침내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모든 인간들 중에는 그 행위가 온전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인간이 마땅히 가야 할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치우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위에 인용한 성경 말씀에는 "제 갈 길로 갔다"는 말이 2번이나 나오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강조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인생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사람들이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3:19). 우리는 율법이 없을 때는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눈으로 죄를 바라보면 즉시 우리의 구석구석에까지 죄의 세균이 득실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마치 현미경과 같아서 우리가 우리의병을 잘 알지 못할 때에 정확하게 가르쳐 줍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그 동안 해 왔던 말의 결론을 이렇게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3;20)." 바울은 율법이 사람들의 죄에 대해 검사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재판을 할 때에 검사는 피고인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여러 가지 증거를 제출합니다. 이때에 검사가 피고인의 유죄를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를 제출하게 되면 피고인은 더 이상 자신을 변호할 수 없게 됩니다. 이 경우 피고인은 오직 판사의 관대한 처분만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율법도 모든 사람들이 유죄라는 것을 입증할만한 너무나 분명한 증거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고발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무죄에 대해 변명하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여 율법은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물게 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의(롬 3:21-22)
바울은 이방 세계의 부도덕한 자들(1:18-28)과 도덕주의 자들(2:1-16), 유대인(2:17-3:8), 그리고 모든 사람들(3:9-20)이 하나님 앞에서 범한 죄를 낱낱이 지적했습니다. 그는 종족과 계층, 신조와 문화, 유대인과 이방인, 부도덕한 자와 도덕적인 자, 그리고 종교적인 자와 불경한 자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범한 죄는 증거가 명백하고, 또 고의적이어서 아무도 변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아무런 희망 없이 하나님의 진노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사람들이 어둠 속에 갇혀서 심판받도록 방관만 하셨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둠 속에 갇힌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생명의 길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1.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다(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21)."
바울은 "그러나 이제는("누니")"이란 말로 새 단락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그러나"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이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앞의 단락을 접고 이야기의 내용을 전환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이란 말도 앞의 내용을 전환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두 마디 말은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서 환한 빛이 비취는 밝으로 나온 것처럼 모든 상황을 한 순간에 역전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동안 모든 인류가 정죄 받아 마땅하다고 선언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동안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해서 변명도 하지 못한 채 침묵해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사람들은 좌절과 낙망의 어둠 속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러나 이제는"이라는 말로 이 모든 어두움을 한 순간에 빛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제" 정죄 당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의의 길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행위와 율법으로 인해 정죄 받았던 사람들을, 이제 믿는 자를 위해 예비된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제 변명할 수가 없어서 침묵하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용서와 은혜의 세계로 들어갈 길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바울은 "율법 외에(코리스 노몬)"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바울이 소개하는 의는 사람들이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의는 율법이나 인간의 행위와 관계 없이 의롭게 될 수 있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행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율법과 관계없이 의롭게 될 수 있는 한 가지 길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길은 "행위=상급"이라는 사고에 익숙한 우리에게 매우 낯선 법입니다. 이 길은 인종이나 민족, 계급, 신분, 빈부 귀천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은혜의 길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길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말은 인간이 자신의 행위로 얻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의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민족, 계층, 연령을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되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의"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친히 그들을 위해서 의롭게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서 "사람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페파네로타이) 고 말합니다. "나타났다"는 말은 "계시되었다", 또는 "알려졌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을 준비하시고 그 동안 그것을 숨기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이 구원의 길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계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비밀을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셨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이 비밀을 제자들에게 전해주셨고, 또 다시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가서 그 비밀을 모든 민족들에게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죄인을 위해 준비해 주신 구원의 소식은 더 이상 숨겨진 비밀이 아닙니다. 이 구원의 길은 마땅히 온 세상에 전파되어 모든 민족이 듣고 구원받아야만 합니다. 사실상 이러한 하나님의 의는 오래 전에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증거되어 왔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부분적으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구원의 길에 대해서 증거해왔습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메시아와 새 언약을 통해서 인류에게 주어질 복음에 대해서 증거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종을 보내셔서 죄인들을 대신해서 고난받게 하실 것을 예고했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증거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말세에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은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오래 전부터 증거된 것이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의(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22)."
마침내 바울은 자신이 예고했던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의였습니다. 이 의는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의였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고,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누구든지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는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누구든지 "차별이 없이 받을 수 있는 의"입니다." 이 약속은 모든 사람을 위한 약속이며, 따라서 유대인이나, 이방인, 남녀 노소나 빈부와 귀천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요엘 선지자의 예고대로 하나님은 말세에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영접하는 자, 곧 그(예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실 것입니다(요 1:12).
구속과 칭의(롬 3:23-24)
바울은 하나님께서 친히 죄인들을 위해 준비하신 의의 길이 예비되어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의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민족, 계층, 남녀노소, 빈부와 귀천을 막론하고 적용되는 약속이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의롭다고 하시는 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23)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23).
23절은 "왜냐하면"이란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우리 말 성경에는 이 말이 빠져있다). 이것은 23절이 앞에 나온 절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의 길을 준비해 주신 것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이방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 실패했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 받은 유대인들 역시 이 일에 실패했습니다. 물론 타락의 정도는 족속과 계층간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극도로 타락한 증상을 보이는 반면, 다른 사람은 보다 약한 죄의 증상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다고 인정 받을 사람은 그 누구도 없습니다. 그들의 죄는 고의적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스스로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을 위해서 구원하실 길을 준비해 주셔야만 했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이르지 못했다"(휘스테론타이)는 말은 무엇이 "결여되거나", "부족한(결핍된)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광을 결여하거나, 그 영광이 부족(결핍)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이 결여(부족, 결핍)되었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슨 말입니까? 성경학자들은 이 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네 가지 다른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1) 사람들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했다(눅 17:18, 행 12:23, 롬 4;20, 고전 10:31, 고후 4;15, 빌 1:11, 살전 2:6, 계 4:9 등).
2) 사람들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존귀, 칭찬)을 받지못하게 되었다(요 5:41,44, 롬 2:7, 히 3:3, 벧전 1:7, 벧후 1:17 등).
3) 사람들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형상)을 반영하지 못하게 되었다(고전 11:7, 고후 3:18, 8;23).
4) 사람들은 죄로 인해서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롬 5:2, 고전 2:7, 고후 4:17, 골 1:27, 살후 2:14, 딤후 2:10, 히 히 2:10, 벧전 5:1 등)
이러한 네 가지 견해는 각기 나름대로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학자들에게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것은 세 번째 견해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한다"는 말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로 돌려서 표현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1번의 견해는 다소 무리한 점이 있습니다. 둘째로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이란 말은 종종 하나님께서 주시는 칭찬이나 존귀를 의미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장의 흐름을 볼 때에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란 말이 하나님의 칭찬보다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므로 2번의 견해는 문맥에 다소 어색합니다. 셋째로 본문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은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미래 사건인 재림과 연결시키는 4번의 해석도 다소 어색한 해석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3번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무난합니다. 3번의 견해를 받아들이면 본문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매, (이로 인해)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영광)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사단을 좆아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저주를 받았으며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두신 하나님의 형상(영광)을 나타내는 데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셨으며, 따라서 사람들은 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지혜와 지식과 거룩과 선함...)을 반영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반역하였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버림을 받아서 정욕에 이끌려 방탕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그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친히 그들을 구원할 길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3. 구속과 칭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24)."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값없이(인간의 행위나 공로 없이) 죄인들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의였습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호의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인데, 어떻게 죄인을 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죄인을 무죄로 선언하셨다면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이 될 것입니다. 판사는 죄인이 불쌍하다고 그에게 무죄를 선언할 수 없습니다. 만일 이렇게 한다면 그는 자기 직무를 잘못한 일로 인해서 처벌이나 권한을 박탈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도 죄인을 아무 이유 없이 무죄라고 선언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죄인을 무죄로 선언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때문이었습니다. "구속"(아폴로트로세오스)은 상업용어로, "값을 대신 주고 꺼내온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때로 잘못을 해서 많은 빚을 질 때가 있었습니다. 이때에 그가 만일 그 돈을 갚을 힘이 없으면 자기 몸을 팔아(종이 되어)서라도 그 빚을 갚아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가장 가까운 친척 중에서 재력이 있는 사람이 그를 대신해서 몸 값을 지불하고 해방시켜 주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때에 몸값을 대신 지불하고 형제가 종이 되지 않도록 구해내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구속"입니다.
우리는 우리 죄로 인해서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 그 죄 값을 지불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보시고, 자기 아들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리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게 하셨습니다(막 10;45). 그리고 하나님은 이를 근거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죄와 사망의 노예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것이 가리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이유도 없이 죄인들을 무죄로 선언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무죄로 선포하시기 위해서 매우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 그 죄값을 지불하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죄인이 직접 형벌을 받는 것이고, 둘째는 벌금을 내는 것이며(벌금형), 셋째는 다른 사람이 대신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대형제도). 우리가 교통사고를 내고 서로 합의한 후에 합의금을 내면 형벌을 면제받을 수 있습니다. 또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전에 우리 나라에는 다른 사람이 대신 형벌을 받는 제도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보면 흥부가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매를 맞고 돈을 받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바로 대형제도입니다.
이 제도는 악용될 것을 우려해서 현재 우리 나라에서 실시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제도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습니다. 늙으신 부모님을 대신해서 젊은 자녀가 가서 매를 맞거나, 죄인이 피치 못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 가까운 친구가 대신 가서 그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는 일은 선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죄인을 의롭게 하시기 위해서 이러한 대형제도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시기 위해서 아무도 항의할 수 없는 매우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자신의 아들을 우리 대신 형벌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의 사지를 잘라서 불에 태워 하나님께 번제로 드릴 때처럼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 일을 실행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이 일을 믿는 사람을 무죄로 선언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소개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였습니다.
화목제물(롬 3:25-26)
하나님은 죄인을 위해 친히 구원의 길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의는 그리스도를 통한 의였으며, 율법(행위)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 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의 길을 준비하신 것은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해서 하나님의 영광(형상)을 드러내는 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값(행위) 없이 은혜로 의롭게 되는 길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인류의 죄 값을 지불하게 하셨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무죄로 선언하셨습니다. 이제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의 길에 대해서 또 다른 중요한 일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 화목 제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25(상)"
하나님은 인간과 화해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화목 제물"로 세우셨습니다. "화목 제물"(힐라스테리온)은 감사나 서원을 위해 자원해서 드린 제물이었습니다. 이 제물은 흔히 속죄 제사와 번제를 드린 후에 마지막으로 드려졌습니다. 화목 제물은 하나님과 제물을 드린 사람 사이에 평화와 축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화목 제물은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고 나서, 그 나머지를 가지고 제사장과 제물을 드린 사람이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드린 화목 제물로 인해서 하나님과 막혔던 모든 관계가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화목 제물"로 세워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인류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저주의 담으로 막혀버렸기 때문입니다(롬 1:18).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죄를 보고 진노하시며 죄를 불쾌하게 여기십니다. 세상의 재판관들도 죄를 지은 사람을 보면 분노합니다. 그러므로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죄를 보시고 진노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 드릴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죄인들과 화목하기 위해서 침히 "화목제물"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오래 전에 핵 문제로 인해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려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상황이 악화되었다면, 한반도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미국은 북한을 달래기 위해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특사로 파견했습니다. 그리고 카터는 북한에 가서 정치 지도자들을 만나서 그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던 한반도 상황은 진정되게 되었습니다. 이 경우에 카터 전 대통령은 미국과 북한 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화목제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피를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 제물로 세우셨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이 "사망"은 육체적인 죽음뿐 아니라, 하나님께 버림받아 비참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무서운 진노를 그리스도에게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를 흘리면서 기도했습니다. 주님은 죄인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 박힌 채로 "목마르다"고 소리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대신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주님은 마침내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피를 통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으로"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다시 살리시고 자기 우편에 앉아서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내 의와 내가 흘린 피를 보시고, 죄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요일 2:2, 4:4)" 하나님께서는 그 요청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느냐?" 하나님은 만일 사람들이 "예!"라고 대답하면, 그들을 무죄로 선포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믿음을 통해 하나님과 죄인을 화목하게 하는 제물이 되셨습니다.
2. 하나님은 지나간 죄를 간과하기로 작정하셨다(25(하))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25(하))..."
부모들은 자녀들이 작은 죄를 범하면 그들을 징계하여 바로 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일단 자녀들이 죄에 깊이 빠져서 스스로 헤어 나오지 못하면, 더 이상 자녀들을 책망하지 않습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책망하는 대신에 자녀들을 죄에서 구해내려고 모든 노력을 다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면, 과거의 죄를 용서하고 기쁘게 그들을 맞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스스로 죄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과거에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고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과거에 지은 죄를 더 이상 처벌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믿고 돌아오면 누구든지 용서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3.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26)."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화목 제물로 세우신 것은 공의를 무너뜨리지 않고,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었습니다. 우리는 재판할 때에 피고인이 죄를 지은 증거가 드러나면 그에 합당한 형벌을 내리기를 원합니다. 만일 어떤 재판관이 피고인이 죄를 지은 증거가 제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벼운 형벌을 부과하면 우리는 분노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피고인이 죄를 지어서 무거운 형벌을 받으면 동정심이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한 그가 받는 형벌을 가볍게 해주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죄를 지은 사람에게 알맞는 형벌을 부과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보다 더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공정하게 처벌하여 공의를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은 그가 받는 고통을 보시고 마음 아파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의때문에 그를 무조건 무죄로 선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께서은 공의를 지키시는 동시에 죄인들을 용서할 수 있는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이루시기 위해서 인류를 대신해서 자기 아들을 형벌 받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사람들을 무죄로 선언시하, 자기 자녀로 받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법으로서 자신도 불의한 심판자가 되시지 않으시고, 죄인들도 무죄 선포하셨습니다. 이러한 점에서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가장 잘 나타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법(롬 3:27-31)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류를 위한 구원의 길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인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심으로 인류의 모든 죄값을 지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의롭다고 선언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익숙한 유대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반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유대인들이 반대할 수 있는 몇 가지 질문을 제시하고, 스스로 그 질문에 대해서 답변하고 있습니다.
1. 믿음은 자랑을 금하고 겸손하게 만든다! (27-28)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27-28)."
바울은 믿음을 통해서 의롭게 된 사람은 "자랑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 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오직 그들만을 선택하고 사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과 달리 율법을 받은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언약의 백성이 된 표시로 할례를 받았으며, 할례를 받지않은 이방인들과는 상종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이 자랑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자랑할 수 없는 것은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방인 중에도 남들보다 더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을 보고 비판하면서 바르게 살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때때로 자기가 비판하는 일을 행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역시 자기의 의를 자랑 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28). "인정한다"(로기조마이)는 말은 모든 일들을 생각해 본 후에 최종적으로 동의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문제에 대해서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결국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행위)이 아니라 믿음에 달려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게 된 사람들은 자신을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자랑 할 것은 오직 하나님과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은 아직도 자신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잊은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자랑을 버리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주안에서 자랑해야 하며,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해야 합니다(고전 1:31, 갈 6:14).
2.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믿음의 법으로 공평하게 대하신다(29-30)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 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 할례 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29-30)."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의 하나님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만 거룩한 율법과 예배의식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창조하시고 날마다 그들을 먹이고 입혀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아브라만 위한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땅의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창 12:2-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을 선택하신 것은, 그들을 통해서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일을 망각하고 이방 민족을 정죄하고 멸시했습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셔서 자신을 통해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자기백성과 자녀라고 불러주셨습니다.
3. 믿음은 율법을 폐지하지 않는다(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31)."
바울은 믿음은 율법을 폐지하지 않고 오히려 세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에, 율법에 익숙한 유대인들은 이렇게 항의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면, 율법을 행하지 않아도 된만 말인가? 당신 말대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면 아무렇게 살아도 되지 않는가?" 그러나 바울은 이에 대해 "그럴 수 없다!'고 단호하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이 율법을 무너뜨리지 않고 오히려 세워준다고 말합니다. "율법"(토라)은 "가르침, 또는 교훈"이라는 말로서, 1) 구약 성경 전체, 또는 2) 모세오경을 부를 때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믿음의 법은 구약 성경이나 율법을 무너뜨리지 않고 더 견고하게 세워줍니다. 믿음의 법은 이미 구약 성경을 통해서 증거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사람들의 죄의 현 주소를 알게 해주고,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율법을 폐지하기보다 오히려 더 완전하게 해줍니다. 믿음의 법은 율법을 무시하는 방임주의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자원하여 율법을 지키는 사람을 만들어줍니다.<최영찬 목사>
화목하게 하는 제물.
(레위기 3 장)
비록 보잘것없고
작은 것일지라도 우리의 내면에 선함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시고 감동 받으시는 줄 믿습니다.
-- * --
우리가 하나님앞에 나올 때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감사하기 보다는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 주시면 감사하고 보답하겠다는 생각이 앞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감사하여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우리 인생들이 고난의 삶을 살게된 것은 에덴 동산에서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것 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마귀의
유혹에 빠져 인간이 하나님같이 되는 것을 소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과 하나님과의 화목은
깨어졌습니다.그런데 오늘 화목제는 하나님께서
다시 본래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로 우리를 부르시는 제사입니다.
본래의 관계란 인간이 오직 하나님이
주신 것만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를 원하십니다.
화목제는 번제와 모든 것이 같은데 다른점은
번제는 제물의 모든 것을 태우지만 화목제는 내장과 내장에
덮인 기름은 태우고 고기는 하나님 앞에서 먹도록 되어 있습니다.
대표 적인 5 대 제사는
1. 번제 2. 소제 3. 화목제 4.속건제 5. 속죄제 입니다.
1. 화목케 하는 제물과 피.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제물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면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문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레위기 3 : 1-2)
화목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일종의 감사의 제사입니다.
그리고 화목제의 또 다른 별명은 평화의 제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속건죄나 속죄제는
의무적으로 드려야 하는 제사인 반면
화목제는 제사를 청하는 사람이 스스로 자원해서,드리는 제사입니다.
제사를 청하는 사람이 화목제에 쓰일 흠없는
짐승을 가지고 오면, 제사장이 이 짐승을 인계받아,짐승의
머리에 안수를 하고, 번제단이 있는 회막문에서 칼로 죽이게 됩니다.
짐승의 머리에 안수한다라는 것은 제사장이
짐승의 머리에 손을 대고 기도한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물로 받치는 짐승이, 사람을 대신한다는 전가의 행위입니다.
2. 가장 기름진 것으로.
"그는 또 그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의
번제물 위에서 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레위기 3 : 3-5)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또 화목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려야 합니다.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기름과 간을 덮고 있는 껍질과 두 콩팥과 함께 떼어내야 합니다.
아론의 자손 제사장은 기름진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의 번제물 위에서
살라야 하며 가장 기름진 것,가장좋은 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3. 양의 화목제물.
"만일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는
화목제의 제물이 양이면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드릴지며 만일 그의 예물
로 드리는 것이 어린 양이면 그것을 여호와 앞으로 끌어
다가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앞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그는 그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그 기름 곧
미골에서 벤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음식이니라"
(레위기 3 : 6-11)
산비둘기나 어린 비둘기는 번제를
위해서 드려질 수는 있으나 화목제로는 허용되지
않습니다.양을 화목제물로 드리는 것도 소를 드리는 것과 동일합니다.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양도 흠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으로 끌고가 안수하고 회막 문에서 잡습니다.
제사는 사람에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
미골에서 뗀 기름진
꼬리와 내장에 덮인 기름과
허리쪽의 기름과 간에 덮인 기름덩어리를 콩팥과 함께 떼어냅니다.
제사장은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기름을
가져다가 번제단 위에서 불살라 불에 태워 여호와께 드리는 음식입니다.
4. 염소의 화목제물.
"만일 그의 예물이 염소면 그것을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그것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앞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그는 그 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레위기 3 : 12-17)
세 번째로 염소를 화목제물로 드리는
경우에도 앞의 소와 양을 잡는 경우와 대동소이힙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그것을 여호와 앞 회막으로 끌어가야 합니다.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문 앞에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염소를 잡습니다.아론의 자손 제사장은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제사장은 그 중에서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립니다.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콩팥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기름과 간에 덮인 기름덩어리를 콩팥과 함께 떼어냅니다.
그것을 불살라 하나님께 드립니다.
기름은 하나님께 드려야합니다. 제사장은 기름을
번제단 위에서 불사릅니다.하나님께 화제로 드리는 음식입니다.
온전한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냄새입니다.
모든 기름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대로,하나님이 정하신
제물을 받치면 그것이 하나님이 향기롭게 받으시는 예물이 됩니다,
5. 친교와 사랑의 제사.
하나님과 화목케 되고, 그것을 이웃들과 함께 즐거워하며
기쁨을 나눌 수 있게 하신 것은, 결국 하나님과 화목케 되면,
다른 사람들과도 화목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화목제를 드림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 화평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를 감사하고 기뻐하기 위해서 주위 사람들과 함께
바쳐진 제물의 고기를 나누어 먹도록 하나님이 정해놓으셨습니다.
화목제는 평소에도 드리지만 무교절,맥추절,수장절 때 주기적으로 드림) ‘
여러분 제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케 된 것을 기뻐하고 여러분과 함께 즐거워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의미로
화목제때 받쳐진 제물을 가지고 와서 주변 사람들과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래서 화목제는 받쳐진 짐승의
내장과 기름만 태우고,제사장의 분깃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제사를 청한 사람이 가져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화목제는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들을 화목케 만드는 중보자가 되신다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의 상태에서, 복음을 듣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의 원수 된 상태가 아니라,화목하게 된 상태로 변화 받게됩니다.
( 교훈 )
화목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과 친교를 위해
드리는 제사로 수직적인 화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
식사를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수평적인 화해와 친교로 확장됩니다.
또한 이 교제에는
남녀의 차별이나 빈부 귀천의 차별이 없음을 상징하여 주고 있습니다.
경제적 형편에 따라 각기의 바치는 제물에 차별이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화평을 누리게 된 성도들 간에는 남녀 노소,빈부 귀천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한 성도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 화평을 만드는 자가 되어야 함을 교훈해 줍니다.
이 땅에 화평을 이루러 오신
그리스도의 제자 된 성도들이 사람들
사이에 오히려 분란과 다툼을 일으킨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언제 어디서나 남을 섬기고
용서하는 마음으로 사람들 사이에 화평을 만드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예수님이 우리에게
화목의 제물이 되어주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화목케 되었듯이,
우리 역시도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 다른 사람들에게도
화목을 전하는 사람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모든 생활에서 예수님과 함께 화평을 이루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삶에서의 '화평의 사신' 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주변 많은 사람들이 화평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 될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G 록키산맥>
힐라스테리온(ἱλαστήριον)에 대한 묵상
로마서 3:25은 아래와 같이 증언한다.
[새번역]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 제물로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을 때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심으로써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개역개정]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
바울 사도는 로마서 2~3장에서,
1) 로마서 2:1 - 3:21에 걸쳐, 인간이 율법의 행위를 통하여 구원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2) 로마서 3:22 이하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라고 주장한다.
위에 인용한 3:25은 2)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속죄 제물"로 보내어 피 흘리게 하셨고, 그 피를 보시고 사람들의 죄를 간과해 주셨기 때문에 죄 아래 있는 인간의 구원이 가능하다는 논리이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속죄 제물" (개역 “화목제물")로 번역된 힐라스테리온(ἱλαστήριον)을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좋은지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힐라스테리온을 “속죄 제물"로 번역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속죄 제물"을 뜻하는 같은 어근의 힐라스모스(ἱλασμός)라는 단어가 따로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속죄 제물" 말고 더 나은 번역의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 대안적 번역이 딱딱한 이 구절에 생기를 불어넣어, 바울 사도의 이야기를 생생한 그림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성전 지성소 안에 법궤가 놓여 있었다. 이 법궤 안에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 언약을 새긴 돌판, 만나를 넣어둔 금 항아리가 들어 있었다(히9:4). 이 셋은 모두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원망과 불평과 불순종의 죄를 기억하게 하는 상징들이다. (민수기 16-17, 출애굽기 16, 32장을 찾아 보라.) 이 법궤를 덮고 있는 윗 뚜껑을 "속죄판"(히 9:5, 개역은 “속죄소")이라고 불렀는데, 이 뚜껑이 헬라어로 힐라스테리온(ἱλαστήριον)이다. 히브리서 설명대로,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차례 속죄 제물의 피를 들고 지성소에 들어가 법궤의 윗 뚜껑인 속죄판에 피를 바르는 예식을 행하고(히 9:7), 위에서 내려다 보시는 하나님께서 법궤 안 내용물을 보시고 인간의 죄를 기억하는 대신 이 피를 보시고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도록 중보하며 빌었다.
언약궤. 두천사가 앉아있는 뚜껑 부분이 속죄판이다. |
바울은 로마서 3:25에서 예수께서 바로 이 법궤의 윗 뚜껑 “속죄판"이 되셨다고 설명한 것이다. 염소와 황소와 암송아지의 피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께서 그 보혈로 친히 인간의 죄를 가리우는 힐라스테리온(ἱλαστήριον)이 되셨다는 말씀이다. 위에서 내려다보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기억나게 하는 아론의 지팡이와 만나와 언약궤를 보시는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임당한 자신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한결같은 은혜를 베푸시도록 하셨다는 말이다. 그 은혜로 인간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설명이다. 히브리서 9장과 함께 읽으며 바울의 설명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구원의 은혜를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속죄 제물"이 되셨다는 지금의 한글 번역도 은혜롭다. 그러나 우리가 지성소의 구조에 친숙하다면,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속죄판"이 되셨다는 새로운 번역은, 잊을 수 없는 생생한 이미지를 우리 가슴에 새겨주어 더 풍성한 은혜를 우리에게 선사한다. 우진성 목사 (성경과설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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