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장은 마가복음 전체의 토대를 형성하는 일련의 사건들과 주제들을 매우 박진감 넘치게 소개해 준다.
1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 1) 서언(1:1~13); 2) 예수의 메시지의 요지(1:14~15); 3) 예수의 갈릴리 초기 사역(1:16~45).
1. 서언(1:1~131)
이 첫째 단락은 세 개의 소 단락들로 구성되어 있다: 1) 세례 요한의 사역(1:1~8); 2) 예수의 세례(1:9~11); 3) 예수의 시험(1:12~13). 본 단락은 예수의 공생애에 바로 앞서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을 진술해 줌과 동시에, 독자들에게 앞으로 복음서에서 전개될 내용의 이해에 필수적인 몇 가지 단서/열쇠들을 제공해 준다.2
본 서언 단락이 복음서의 나머지 부분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독특하다는 사실을 확인해 보는 것은 중요하다. 첫째, 본 서언에서 인상적인 기능을 하고 있는 환상과 하늘로부터의 음성(1:10~11)은, 9장에서의 경우를 제외하고,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둘째, 본 서언에서 예수의 사역과 관련하여 특징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성령과 사단의 활동은, 3장에서 그들에 관한 논쟁을 제외하고,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셋째, 본 서언에서 그처럼 자주 언급되고 있는 광야(헤 에레모스)에 대한 언급(1:3, 4, 12, 13)이 다른 곳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3 넷째, 마가는 유독 이곳에서만(1:2~3) 진행되는 사건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구약 성경(사 40:3)을 직접 인용하고 있다.4 다섯째, 앞으로의 이야기 전개에서는 예수가 누구인가가 줄곧 감추어진 모습으로 소개될 것인데 반해(참조. 1:25, 34, 44; 7:36; 8:30 등), 본 서언 단락에서는 예수의 신분이 수차에 걸쳐 명백히 진술되고 있다. 아마도 마가는 본 단락에서 독자들이 복음서를 읽어 내려가는 과정 속에서 줄곧 유념해야 할 예수의 정체에 관한 지침을 제공해 주고자 한 것 같다.5 이러한 사실들은 본 서언이 단순한 하나의 시작이 아니라, 예수의 정체와 그의 사역의 의미에 관한 집약적인 기독론적 단락으로 의도되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오늘날 마가복음 독자들도 본 서론 단락에서 이러한 독서 지침들을 주목하는 것이 복음서 전체를 적절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세례 요한의 사역(1:1~8)
1장 1절의 표제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묘사한다. 마가복음에서 그리스도라는 용어가 자주 나타나지는 않지만(8:29; 9:41; 12:35; 13:21; 14:61; 15:32), 모든 경우들에 있어서 호칭적 의미를 갖는 것이 분명하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 초두에서 예수께서 구약이 내다보았던 메시아라는 사실을 명백히 밝힌다. 예수의 이러한 신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부연에 의해 그 차원이 더욱 고조된다. 마가는 그의 책을 예수 그리스도의6 ‘복음’이라고 규정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지금까지 구전으로 전해져 왔지만, 그는 이제 그 내용을 책으로 기록하여 전하려 하는 것이다.
표제에 이어, 본 단락은 메시아의 오심과 연관된 구약 성경의 두 구절들(말 3:1; 사 40:3)을 연결하여 인용한다(1:2~3). 그런데 이 인용구는 메시아 자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의 선행자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이 예언은 메시아 자신이 아니라, 그의 선행자로 예견된 한 인물, 즉 엘리야에 의해 성취되어야 하였다(참조. 말 4:5~6). 그런데 그 예언이 세례 요한에게 적용됨으로써, 그가 예견된 엘리야의 역할을 수행하는 자임을 시사한다(참조. 막 9:13; 눅 1:17). 이러한 시사점은 세례 요한의 복장에 대한 묘사(1:6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가 엘리야의 모습을 연상케 해 준다는 사실에 의해 더욱 명확해 진다(참조. 왕하 1:8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더이다… 그는 … 엘리야로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오심을 예비하는 요한의 선포(1:7~8)는 그 자신이 인용구의 예언을 성취하는 자임을 확증해 준다. 이는 단순한 사건의 묘사가 아니라, 요한이 내다보는 인물이 다름 아닌 구약 성경으로부터 기대되어 왔고, 그 당대의 사람들이 그처럼 고대해 왔던(참조. 1:5), 메시아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시사해 준다.
(2) 예수의 세례(1:9~11)
본 단락은 요한이 내다보았던 분이 다름 아닌 나사렛 예수라고는 사실을 밝힌다. 본 단락의 제목은 일반적으로 예수의 세례라고 붙여지지만, 실제로 예수의 세례에 관한 내용은 1장 9절에서 간단히 언급될 뿐이며, 1장 10~11절은 그 세례 사건 직후 예수께 일어난 현상을 묘사하는데 할애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례 직후 예수께 일어난 계시적 현상은, 다른 복음서들의 그것과 달리(참조. 눅 3:21~22), 예수께 한정된 경험으로 묘사되고 있다.
계시 현상은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 ‘하늘이 갈라짐’은 곧 선포될 예수께 대한 진리가 천상적 성격을 띄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둘째, ‘성령’ 강림은 메시아적 성령 강림으로서(참조. 사 61:1), 예수의 메시아적 사역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것임을 시사해 준다. 셋째, 하늘로부터 들려온 ‘음성’은 메시아의 신분을 확증해 준다. 이러한 삼중적 계시는 예수의 메시아적 사역이 스스로 취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으로부터 임명된 것임을 밝혀 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본 단락은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의 인격의 비밀(종,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을 감지하도록 돕는다.
1장 1절 표제에서 제시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지위가 그의 사역 초입에서 하나님 자신에 의해 재확인되고 있는 점은 흥미롭다(1:10; 참조. 시 2:7; 사 42:1).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사실이 예수의 사역 말미에, 그의 십자가 죽음에 직면하여, 땅에 있는 한 이방인의 입으로부터 재확인되고 있다는 점은 더욱 흥미롭다(15:39). 어쩌면 마가는 그의 표제에서 밝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신분을 예수의 사역 처음과 마지막에 의도적으로 확증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3) 예수의 시험(1:12~13)
끝으로 본 단락은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 적을 대적하기 위해 광야로 나가시는 모습을 소개한다. 사실 마가의 묘사는 동일한 사건에 대한 마태(4:1~11)나 누가(4:1~13)의 묘사보다 훨씬 더 간략하다. 하지만 그는 이 짧은 단락 안에서 ‘광야’ 주제를 ‘시험’ 주제와 인상적으로 연결해서 제시한다. 광야는 예수의 대적들인 ‘사단’과 ‘들짐승들’의 장소이지만, 예수는 그곳에서 그의 후원자들인 ‘성령’과 ‘천사들’과 함께 그들에 대한 전쟁을 수행해 나간다. ‘사십 일’ 간에 걸친 예수의 광야 체재는 모세의 사십 일 시내산 체재(출 24:18; 신 9:9 등), 엘리야의 사십 일 광야 여정(왕상 19:8), 그리고 ‘사십 년’ 간에 걸친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서 그 배경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스라엘의 사십 년 간에 걸친 광야 생활의 목적이 그들을 시험하는데 있었다는 점은(참조. 신 1~11장) 예수의 사십 일 광야 체제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을 보여 준다.7 예수와 그의 대적들 사이의 이러한 대면은, 복음서가 계속 진술해 나갈, 그리고 16장에서 그 최종적 승리를 선포하게 될, 사단에 대한 예수의 전쟁을 예시해 준다.8
2. 예수의 메시지의 요지(1:14~15)
본 단락의 위치와 관련해서는 많은 제안들이 있어왔지만, 아직 의견의 일치는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적지 않은 학자들은 본 단락을 서언의 결론부로 보고자 한다. 많은 학자들은 본 단락을 새로운 대단락9의 도입부로 본다. 이러한 의견의 불일치는 본 단락이 앞뒤의 단락들과 긴밀한 연관성을 공히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징 때문에 생겨난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사실 본 단락은 서언부와 본론부를 잇는 교량 역할을 적절히 수행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본 단락은 단순한 교량으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그 자체가 복음서 전체의 주제를 요약적으로 제시해 주는 주제 선포 단락으로서의 고유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10
본 단락은 1장 1절에서 언급되었고, 1장 2~13절에서 그 어렴풋한 그림이 그려졌던, 그리스도의 ‘복음’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그리스도 자신의 선포를 기술함으로써 명확히 제시해 준다. 예수의 선포의 첫 부분은 ‘때가 성취되었다’11는 사실을 선언한다. 여기서 ‘때’는 문맥상 메시아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선지자들이 내다보았던 메시아 시대가 예수의 사역 상황 가운데 이미 도래하였다는 것이다. 메시아 시대는 더 이상 미래적이거나 임박한 상황이 아니라, 이미 그 성취가 현존해 있는 것이다.
첫 부분의 이러한 의미는 선포의 뒷 부분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예수의 선포의 둘째 부분인(엥기켄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의 해석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근대적 논의에서 긴 논란을 불러일으켜 왔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자세히 논의한다는 것은 지면상 불가능하지만, 오늘날 신약 학계에서 공감하고 있는 입장은 명확하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시간이나 장소나 사건이나 상황 등과 같은 어떤 단일한 지칭 대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혹은 ‘왕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12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완료형 동사(엥기켄, ‘가깝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이다. 먼저 이 동사는 진행적 동작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웠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통치가 시간적으로 이미 완결된 상태에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표현은 단순히 하나님의 나라가 시간적으로 아직 도래하지 않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 또한 아니다. 이러한 이해는 선포의 첫 부분과 명백히 상충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선포의 첫째 부분과 둘째 부분의 연결된 의미는 무엇일까? 그 대답이 단순하지는 않지만,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현존해 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시간적으로 이미 종결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역 현장에서 계속 진행되어 가는 그러한 역동적인 실체인 것이다.13
선포의 마지막 부분은 서로 연결된 두 가지 명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예수의 사역과 함께 시작된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대해 하나님의 백성은 그에 합당한 반응을 보여야 한다. 그 반응은 ‘회개’와 ‘믿음’이다. 이 두 가지 반응은 신약 성경 전체에서 자주 언급되는 제자도의 기초이다(참조. 행 11:17, 18; 20:21; 히 6:1 등). 본 선포에서 ‘회개’는 구약에서 자주 요청되던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회개는 단순한 ‘마음의 변화, 후회, 참회’와 같은 문자적 의미 이상의, 삶의 의미와 방향과 목적의 철저한 전환을 의미한다. ‘믿음’은 단순한 지적 동의 이상의, 전적인 신뢰와 헌신을 의미한다. 그런데 믿음의 대상이 ‘복음’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그렇다면 ‘복음을 믿으라’는 명령의 의미는 무엇인가? 앞의 논의에서 ‘복음’은 하나님의 통치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 분명해 졌다. 따라서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이미 현존해 있는 하나님의 통치에 전적으로 헌신하고 순종하라는 것이다.14
이 짧은 단락에서 간단하면서도 명확하게 제시된 예수의 이 선포 내용은 앞으로 복음서 전체를 통해 그 세세한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되어 나갈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그러한 관심과 기대를 가지고 마가복음을 읽어 나가는 것이 복음서를 적절히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3. 갈릴리 초기 사역(1:16~45)
학자들은 마가복음의 본론의 첫째 대단원을 대개 1장 16절~8장 26절(21)로 구분하며, 그 첫째 대단원의 처음 대단락을 1장 16절~3장 6절(12)로 구분한다. 1장의 나머지 부분을 다루기에 앞서 그 부분이 속해 있는 전체 단락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16~20 제자들을 부르심
1:21~28 권위 있는 가르침과 귀신 축출
1:29~31 베드로의 장모 치유
1:32~34 치유 및 귀신 축출 사역 요약
1:35~39 갈릴리에서 지속적인 설교 사역
1:40~45 문둥병자의 치유
2:1~12 가버나움에서 중풍 병자의 치유,
죄를 사하는 권세
2:13~17 레위를 부르심, 죄인들과의 식사
2:18~22 금식에 대한 질문, 옛것과 새것
2:23~28 안식일에 이삭을 꺾음, 안식일의 주
3:1~6 안식일에 손마른 자의 치유,
예수를 죽이려는 공모
3:7~12 무리가 예수를 좇음
본 대단락은 크게 두 가지 사실을 잘 기술해 준다.
첫 째, 본 대단락은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한 그 주변 갈릴리 지역에서의 예수의 권위 있는 가르침과 사역을 소개해 준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1:15), 그의 제자들을 부르시며(1:16~20; 2:14), 권위 있게 가르치시며(1:21~22, 27; 2:2, 13), 권위 있게 치유하시며(1:23~26, 30~31, 32~34, 40~42; 2:3~12; 3:1~5), 자신의 메시아적 권위를 선포하신다(2:5, 10 - 죄를 사하는 권세; 2:28 - 안식일의 주; 참조. 1:24).
둘째, 본 대단락은 (특히 후반부2:1~3:6에서) 예수의 사역으로부터 비롯된 예수께 대한 적대감의 진전을 보여 준다: 2장 6~7절에서는 마음 속 질문이 제기된다; 2장 16절에서는 제자들에게 질문이 제기된다; 2장 18절에서는 예수 자신에게 질문이 제기된다; 2장24절에서는 예수께서 힐문을 당한다; 3장 2절에서는 그의 대적들이 예수를 송사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주목한다; 3장 6절에서는 그들이 예수의 죽음을 계획한다. 예수의 권위 있는 가르침과 사역은 서기관들이나 이스라엘의 종교적 지도자들의 그것과 같지 않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이었다(1:15, 27; 2:21~22, 28). 이러한 그의 사역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기존 종교 체제 안에서 아무런 적법성도 갖추지 않고 나타났는데도, 그의 권위와 능력과 그로 말미암은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일반 사람들은 서로간에 ‘이 사람이 누구냐’(1:27)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으며,15 종교적 지도자들은 분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2:16, 24; 3:2, 6).16
(1) 제자들을 부르심(1:16~20)
1장 14~15절의 중대한 선언 이후, 사람들은 곧 전격적인 우주적 변화나, 최소한 국가적 변혁을 기대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본 단락에서 발견하는 그림은 그러한 기대와 전혀 다르다. 예수는 세상의 관심으로부터 동떨어진 갈릴리 해변에서 하찮게 보이는 몇몇 어부들을 자신의 선교사역을 위해 동참하라고 권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예수의 메시아적 선교가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바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진행될 것임을 시사해 준다(참조. 10:42~45). 하나님의 통치는 온 세상이 떠들썩하게 주목하게 되는 과시적인 방법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별로 주목받지 못하지만 그러나 끊임없이 점진적인 방식으로 임한다. 하나님의 나라의 이러한 특징은 겨자씨 비유(4:30~32)에서 잘 설명될 것이다.
제자들을 부르신 사건이 복음서 이야기 전개에서 맨 앞에 나온 것은 주목할 만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며,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의 선교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사실 마가복음 전체를 통해, 제자들은 이 시점으로부터 겟세마네에 이르기까지 줄곧 예수님을 수행하고 있다. 마가복음의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과 더불어 언제나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비록 그들이 연약하고, 따라서 실수할 수밖에 없지만, 예수님은 바로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왕권을 시행해 나가신다. 그리고 마가는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그의 독자들도 (그리고 오늘날 독자들도) 자신들의 제자도를 점검해 보도록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17
본 단락은 제자도와 관련하여 세 가지 사실을 보여 준다. 첫째,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풍습과 달리, 제자들이 선생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이 제자들을 선택한다(1:17, 20). 둘째, 제자들은 제자도를 위하여 두 가지를 시행한다. 그들은 먼저 자신들의 삶의 방식과 관계들을 버려야 한다(1:18a, 20b). 이는 복음서 전체를 통해 강조되는 제자도의 대가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예수를 따라야 한다(1:18b, 20c). 이는 그의 삶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그들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한다(1:17). 제자들은 예수를 수행할 뿐 아니라, 그의 선교 사역에 동참할 것이 기대되는 것이다(참조. 3:14; 6:7).18
(2) 권위 있는 가르침과 귀신 축출(1:21~28)
본 단락과 다음 세 단락은 가버나움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만 하루의 시간 범위 내에서 기술하고 있다(참조. 1:29, 32, 35). 이들 네 단락에는 예수의 갈릴리 사역의 특징을 이루는 네 가지 요소들이 모두 나타난다: 가르침(1:21~22, 27), 귀신 축출(1:23~26, 32, 34, 39), 치유(1:30~31, 32~34), 선포(1:38~39). 이처럼 이 단락들은 예수의 전반적인 사역의 그림을 하루의 일과 가운데 인상적으로 그려 나간다.
본 단락은 예수를 무엇보다도 ‘선생’으로 제시한다(1:21). 바로 앞에서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의 모습이 ‘선생’으로 묘사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 제자들은 무엇보다도 예수로부터 그의 가르침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그는 단순히 많은 선생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그는 당대의 랍비들이나 서기관들과는 다른 선생으로서, 그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는 새로운 가르침인 것이다(1:22, 27).
그의 ‘선생’으로서의 권위는 그의 귀신 축출 기적에 의해 입증된다(1:27). 귀신 축출은 예수에 관한 마가의 기술에 있어서 아주 두드러진 일면이다.19 마가복음에는 네 개의 귀신 축출 이야기들이 있는데(1:23~27; 5:1~20; 7:24~30; 9:14~29),20 이들 중 두 개는 예수와 귀신(들) 사이의 대화를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그 대화들은 예수의 신분에 대한 귀신들의 놀라운 지식을 드러내 보여 준다(1:24; 5:7). 특히 본 단락에서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1:24)라는 귀신의 진술은, 1장 1절의 표제와 1장 11절의 하나님 자신의 선포에 의해 확증된 예수의 신분이, 이제 귀신에 의해서까지도 인정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사실 이 귀신 축출 기적은 이미 1장 12~13절에서 예시되었던 사단에 대한 예수의 전쟁을 구체적으로 기술해 주는 예수의 첫 번째 기적이다. 예수의 귀신 축출 기적이 갖는 메시아적 전쟁으로서의 의미는 3장 22~30절에서 예수와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온 서기관들 사이의 대화에서 명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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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귀신 축출은 사단의 속박, 즉 사단에 대한 예수의 메시아적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다(참조. 마 12:28; 눅 11:20). 그 결과 무리들은 다 놀라며, 서로에게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라고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1:27). 마가복음의 이야기 흐름에서 계속 제기되어 나갈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이미 그 첫 번째 이야기에서 무리들에 의해 공개적으로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의 제기와 더불어 그의 명성은 갈릴리 전역에 널리 퍼져 나가게 되었다(1:28). 사실 첫 번째 대단락에서는 그의 명성에 대한 언급들이 자주 나타난다(1:33, 37, 45; 2:1~2, 3:7~9).
마 가복음의 전형적인 비밀 주제(1:24~25; 참조. 1:34; 3:11~12)와 더불어, 인기 있는 선생과 치유자 주제 또한 함께 공존하며 흘러가고 있음은 흥미롭다. 하지만 이러한 대중적인 열광은 진정한 이해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피상적인 이해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이 4장(특히 4:10~12)에서 명확해질 것이다.21
(3) 베드로의 장모 치유(1:29-31)
귀 신 축출 이야기에 이어, 이제 치유 이야기가 제시된다. 흥미롭게도 이들 두 이야기 바로 뒤(1:32~34)에서는 치유와 귀신 축출 기적들에 대한 요약적인 언급이 뒤따라오고 있다. 그렇다면 본 단락은 앞 단락과 더불어 예수의 그러한 일반적인 활동들에 대한 구체적인 예들을 제공해 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본 치유 기적 이야기는 앞의 귀신 축출 이야기와 여러 가지 면에서 대조를 이룬다. 앞 단락은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시는데, 본 단락은 육체적인 문제를 해결한다. 앞 단락은 공개적인 상황을 다루는데, 본 단락은 집안에서의 상황을 다룬다. 앞 단락은 열광적인 질문과 반응으로 종결되지만, 본 단락은 차분한 섬김으로 종결된다. 두 예들의 이와 같은 차이는, 예수의 기적들이 어떤 정형화된 형식에 따라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기술(技術)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필요를 채우시는 예수의 메시아적 관심과 권위의 문제라는 사실을 보여준다.22
‘회당에서 나와 곧 … 집에 들어가시니’(1:29)라는 마가의 진술을 이 치유 기적이 안식일에 일어났음을 시사해 준다.
예 수께서 안식일에 치유하는 것이 적법한가의 문제는 3장 1~6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제기될 것이다.23 그러나 예수는 이미 여기에서 그 자신이 전통적인 안식일 규례에 저촉을 받지 않으심을 그의 치유 시행을 통해 명확히 하고 계신다.24
(4) 치유 및 귀신 축출 사역 요약(1:32-34)
특 정한 귀신 축출과 치유 기적들에 대한 기술에 뒤이어, 이제 마가는 예수의 구속적 기적들에 대한 보다 일반적인 요약적 기술을 제공한다. 본 요약적 기술은, 다른 요약적 단락들(1:39; 3:10~12; 6:53~56)과 더불어, 복음서에 제시된 구체적인 기적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 중 지극히 제한된 몇몇 예들일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사실 본 단락의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1:32), ‘온 동네’(1:33), ‘각색 병든 많은 사람’(1:34), ‘많은 귀신’(1:34) 등과 같은 표현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이 얼마나 많고 다양하였으며, 얼마나 폭넓게 행해졌는가를 인상적으로 확인시켜 준다.
‘저 물어 해 질 때에’(1:32)라는 마가의 언급은 흥미롭다. 특히 ‘해 질 때에’는 앞의 사건들이 진행된 안식일의 종료를 의미하며, 따라서 이와 때를 맞춰 사람들이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데리고 온 것은, 그들 입장에서 안식일을 범하지 않기 위한 관심의 결과로 보인다.25
예수 자신은 안식일에 귀신 축출이나 치유 기적을 행하시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으시지만(1:21~28, 29~31), 무리들은 아직도 안식일 규례에 제재를 받고 있는 모습은 흥미로운 대조를 이룬다. 예수는 이와 관련하여 2장 23절 ~ 3장 6절에서 안식일을 성취하신 안식일의 주로서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밝히실 것이다.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1:34)는 마가의 진술은 앞의 1장 24~25절의 경우보다 명확히 메시아적 비밀 주제를 도입해 준다(참조. 1:44; 7:36; 8:30 등). 예수의 명성은 널리 퍼져 나가지만, 정작 예수 자신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 보이지 않으려 하신다. 이 두 가지 상황은 마가복음의 이야기가 전개되어 나가는 동안 계속해서 하나의 긴장을 형성해 나간다.
(5) 갈릴리에서의 지속적인 설교 사역(1:35~39)
본 단락은 1장 21절에서 시작된 예수의 24시간 가버나움 사역을 마무리짓는다. 분주한 하루의 사역 후 예수는 좀더 쉬어야 하셨을 것이지만, 그는 자신의 그러한 육체적 필요를 뒤로하시고, 주변의 분주함과 번잡함을 피하여 이른 아침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신다(1:35; 참조. 6:46; 14:32~42).
예수의 기도 내용이 무엇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그의 겟세마네 기도(14:32~42)로 미루어 볼 때, 자신의 사역에 있어서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간구였을 것이다. 본 단락은 예수의 계획과 제자들의 기대 그리고 무리들의 관심이 얼마나 다른지를 잘 보여준다. 그 차이는 예수께서 제자들보다 한 걸음정도 앞서가시는 그러한 차이가 아니다. 하나님의 왕권을 시행하시려는 예수의 관심은 제자들의 기대와 그 본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26 제자들은 세상적인 흐름에 따라 인기와 성공을 향한 계획을 한 단계씩 진척시켜 나가고자 한다: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1:37).
그러나 예수는 그것이 자신의 사역의 목적이 아님을 분명히 하신다: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1:38). 제자들의 성공 지향적 관심과 하나님의 왕권을 시행하시려는 예수의 관심 사이의 차이는, 이후 이야기가 진행되어 감에 따라, 보다 더 분명해질 것이다(참조. 특히 8:31~33; 10:42~45).
(6) 문둥병자의 치유(1:40~45)
본 단락은 문맥상 이중적 기능을 한다. 한편으로, 본 단락은 1장 21~45절 대단락의 절정을 형성한다. 그에 대한 소문은 온 가버나움(1:21~34)에서 그 주변 도시들(1:35~39)로, 그리고 이제는 갈릴리 모든 도시들에까지 퍼져 나가서, 예수는 더 이상 도시들에는 들어가지 못하시고, 한적한 시골들로 피해 다니셔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1:45). 다른 한편으로, 본 단락은 2장 1절~3장 6절(12) 대단락을 위한 도입 역할을 한다. 본 단락은 율법 문제와 관련된 긴장(1:41, 44)과 무리들의 왜곡된 기대로 인한 압박(1:45)을 시사함으로써, 2장 1~3장 6절(12)에서 발전되어 나갈 논쟁과 충돌 이야기들의 분위기를 조성해 준다.27
문둥병자의 치유는 단순한 질병 문제뿐 아니라, 정결 문제까지를 포함한다. 예수는 문둥병자를 만지심으로써(1:41), 그 자신이 더 이상 정결 관련 율법(레 14:46~47; 참조. 레 11:24~40; 민 19:11~16 등)에 얽매이지 않으심을 시사하신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입장을 7장 1~23절에서 보다 일반적인 정결례와 관련한 말씀에서 명확히 밝히실 것이다. 하지만 그는 깨끗케 된 자에게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1:44)라고 명령하심으로써, 정결 관련 율법(레 14:1~32)을 전적으로 무시하지는 않으셨음을 시사해 준다. 물론 예수 자신은 정결 관련 율법을 지키는데 아무런 관심도 없으시다. 그러나 그는 그 깨끗케 된 자가 당시 유대 사회의 일원으로 돌아가는데 필요한 율법 조항은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율법에 대한 자유가 오히려 사람에게 불편과 불이익을 가져다주는 굴레가 되도록 하지는 않으시는 것이다.
한편 예수의 문둥병자 치유는 그 종말론적 의미가 두드러진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문둥병은 하나님만이 치유하실 수 있는 병으로 간주되었다. 그 결과 문둥병자의 치유는 다른 몇몇 기적들과 더불어 메시아 시대의 특징으로 기대되고 있었던 것이다(참조. 마 11:5//눅 7:22).28) 그렇다면 본 단락은 앞에 기술된 예수의 가르침과 귀신 축출 및 치유 기적들과 더불어 1장 14~15절에서 선포된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보다 확고하게 입증해 준다.
주註
1. 서언의 범위를 1~13절로 할 것인가 아니면 14~15절도 포
함시킬 것인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이견들이 있다. 전자의
견해는 Cranfield, France, Hooker, Lane, Lohmeyer,
Schniewind, Schweizer, Taylor 등에 의해 받아들여지
고 있으며, 후자의 견해는 Anderson, Gnilka,
Grundmann, Guelich, Mann, Pesch 등에 의해 받아들
여지고 있다.
2.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본 단락은 요 1:1~18의 역할과 유사
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본 서언은 이야기 체로 되어 있고
요한복음의 서언은 철학적 진술로 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언들은 공히 앞으로 두 복음서들이 제시할
예수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해 주는 것
이다(예. 하나님의 아들/로고스; 「세례 요한과의 비교 및 우
월성」). 참조. M.D. Hooker, The Gospel according to
Mark (BNTC; London: A & C Black, 1991), p. 31.
3. 물론 1:35, 45; 6:31, 32, 35, 35에서도 에레모스가
사용되지만, 그곳들에서는 명사형(’광야’)으로서
가 아니라 형용사형(’한적한’, ‘외딴’)으로 사용되고 있다.
본 서언에서 ‘광야’가 갖는 신학적 의미에 대해서는 R.T.
France, The Gospel of Mark (NIGTC; Carlisle:
Paternoster Press, 2002), pp. 56~59를 보라.
4. 다른 구약 인용들은 대개 예수님 자신의 인용들(예. 4:12;
7:6~711:17; 12:10~11; 13:24~25; 14:26)이거나
다른 사람들에 의한 인용들(예. 11:9~10)이다.
5. 참조. Hooker, Mark, pp. 31~32.
6. 속격 예수 크리스투는 주어적 용법이나
목적어적 용법으로 공히 이해될 수 있다. 혹자들은 이 두 용
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만(예. R.A.
Guelich, Mark 1~8:26 「WBC, 34a; Dallas: Word
Books, 1989」, p. 9), 상당수의 학자들은 이중적 용법의
타당성을 설득력 있게 제안한다; H. Anderson, The
Gospel of Mark (NCBC; London: Marshall, Morgan
& Scott, 1976), p. 67; France, Mark, p. 53.
7.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묘사들은 신 6~8장을 보다 명시적
으로 반향함으로써, 예수의 광야 시험과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사이의 관계를 보다 인상적으로 강조해 준다.
8. 참조. C.E.B. Cranfield,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rk (The Cambridge Greek Testament
Commentar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7 [1959]), p. 33.
9. 본 단락이 이끄는 대단락이 어디까지인지에 대해서도 의견
들이 나뉘어 있다. 1:14~3:6 - Cranfield, Mark, pp.
11~12, 61; 복음서 전체(1:14~16:8) - Guelich,
Mark, pp. 41~42; 참조. A.M. Ambrozic,
The Hidden Kingdom. A Redaction-Critical Study of the References to the Kingdom od God in Mark’s
Gospel (CBQMS, 2; Washington: The Catholic
Biblical Association of America, 1972), pp. 3~31.
10. 참조. Ambrozic, Kingdom, pp. 3~31; France,
Mark, p. 90.
11. 페플레로타이에 대한 한글개역의 ‘찼다’라는 번역은
오역은 아닐지라도, 구약 예언의 ‘성취’라는 개념을 반영
하는데는 미흡한 번역이다.
12.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근대적 논의에 대해서는 많은 책들이
나와 있는데, 한국말로 번역되거나 집필된 것들로 다음을
들 수 있다: 죠오지 래드,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 (이태훈
역; 서울: 엠마오, 1985 [1974]); 헤르만 리델보스, 「하나
님 나라」 (오광만 역; 서울: 엠마오, 1987 [1950]); G.R.
비슬리-머리, 「예수와 하나님 나라」 (박문재 역; 서울: 크리
스찬 다이제스트, 1991 [1986]); 노먼 페린, 「예수의 가르
침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이훈영, 조호연 역; 서울:
솔로몬, 1992 [1963]); 김균진, 「역사의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4) 등.
13. Ambrozic, Kingdom, p. 23; Guelich, Mark, pp.
43~44; France, Mark, pp. 91-93. 사실 이 동사가 이미
현존해 있는 상황을 진행적으로 묘사하는데 사용되는 다른
예를 막 14:42~43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말씀하실 때에 곧 열 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 이 경우 예수께서 ‘가까이 왔다’고 말씀
하시는 시점과 유다가 ‘온’ 시점이 실제로 겹치고 있음을
주목하라.
14. Guelich, Mark, pp. 44~45; France, Mark, pp. 93~
94.
15. 사실 죄인들과 병든 자들을 포함한 무리들은 예수의 사역
에 대해 놀람과 더불어 어느 정도 긍정적인 반응을 한 것으
로 보인다(1:22, 27~28, 32~33, 37, 39, 45; 2:1~2,
12, 15~16).
16. 참조. Hooker, Mark, pp. 52~53.
17. 참조. France, Mark, pp. 94~95.
18. Guelich, Mark, pp. 52~53.
19. 예수의 기적은 크게 네 가지 종류로 분류될 수 있다: 귀신
축출, 치유, 죽은 자를 살리심, 자연 기적. 마가복음에서 기
적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그 처음 10장
의 47%정도가 기적들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 분명해 진다. 참조. Cranfield, Mark, p.
82.
20. 마가는 이들 네 개의 이야기들 외에도 보다 일반적인 귀신
축출 기적들에 대한 언급들을 제공해 준다: 1:32~34,
39; 3:11~12; 참조. 3:22~30.
21. 참조. France, Mark, p. 106.
22. 참조. France, Mark, p. 107.
23. 3:1~6에 대한 필자의 자세한 논의에 대해서는 양용의,
「예수와 안식일 그리고 주일」 (서울: 이레서원, 2000), pp.
297~327을 보라.
24. 양용의, 「예수와 안식일 그리고 주일」, pp. 378~81.
25. 참조. 양용의, 「예수와 안식일 그리고 주일」, pp.382~84.
26. France, Mark, p. 111.
27. Guelich, Mark, p. 73.
28. Guelich, Mark, pp. 74, 78.
예수의 카리스마적 리더십과 마가공동체
서 중 석
Ⅰ. 서 언
'카리스마'라는 용어는 우선 개인의 인격과 관련된 어떤 자질을 의미한다. 흔히 그것은 신적 능력을 직접적으로 받음으로써 얻게 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카리스마의 정당성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카리스마적 권위 아래 있게 되는 추종자들이 그것을 얼마나 인정하느냐하는 문제이다. 카리스마적 자질을 가진 사람에 대한 추종자들의 전적인 헌신이 있을 때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그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따르는 추종자들은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사람들이 아니다. 지도자와 추종자 사이에는 임명이나 해고같은 것은 없다. 단지 지도자의 '촉구'와 그 촉구에 대한 추종자의 '응답'이 있을 뿐이다. 촉구나 응답은 주로 '포기'와 '순례'의 형태로 나타난다.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사회적·정치적 리더십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나 삶의 의미나 목적의 전통적 근거가 파괴될 때 대두된다. 또한 사람들이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권력상실감이나 자아상실감을 느낄 때 나타난다.
마가복음서는 주후 66년에 촉발된 유대-로마 전면전쟁의 끝자락에서 씌여졌다. 그 소위 '전쟁 복음서'에는 예수 이야기와 마가공동체의 이야기가 상호 밀접히 관련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본 소론은 예수의 촉구는 마가공동체의 행태를 반영하는 동시에 그것을 강화하기도 한다는 전망을 채택한다. 본 소론의 목적은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전형을 마가의 예수 이해의 한 측면에 적용하고, 이를 마가공동체와 밀접히 관련시켜 그 공동체의 특성을 부분적으로 파악하려는 것이다.
Ⅱ. 카리스마와 주변성
비교적 큰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그들이 다시 안도감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의 필요와 관심에 부응한다. 일차적인 문제들에 대한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적절한 답변으로 말미암아,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결국 궁극적인 문제들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뢰가 형성된다. 사실상 문제라는 것 자체가 기존의 가치 체계와 해답들에 대해서 그 지도자가 제시하는 새로운 해석에 의해 완전히 제거되기도 한다.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가르침에 의해서 추종자가 가지고 있는 과거의 정체성이 강제적으로 파괴된다. 새로운 정체성이 추종자들에게 선포되고 주어진다. 이것을 녹(A. D. Nock)은 "개인의 영혼 재교육"이라고 명명하고, 몰(H. Mol)은 "새로운 시각이 정서적으로 인격 안에 자리잡게 된 회심"이라고 명명한다. 또한 오디(T. O'Dea)는 이것을 "새로운 그룹과 그 그룹의 가치에 자신을 일치시킴으로써 생긴 인격의 재편"이라고 명명한다.
그러나 과거의 정체성(패턴)과의 분리 과정은 대개 "전통적 사회 구조를 포기하기 때문에 생긴" 심각한 불안을 야기한다. 왜냐하면 과거의 신념은 거의 사라져가고 정체성의 새 초점은 아직 충분히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새로운 불안을 창출한다. 새로운 정체성은 와해되기가 쉽기 때문이다. 몇몇 추종자들은 이전에 포기했던 과거의 신념으로 다시 돌아가기조차 한다. 따라서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전형적으로, 새로운 정체성이나 새로운 세계관이 추종자들에게 주어지기 이전, 추종자들이 과거에 가졌던 신념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적합하지 못한 것이었는지 재차 확인하도록 부추긴다.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추종자들이 과거의 가족 유대와 새로 규정된 가족(새 공동체) 사이를 철저히 분리하도록 요구한다. 또 이전의 모든 일과 완전히 결별할 것을 요구한다. 추종자들에게는 새로운 공동체에 전적으로 헌신할 것이 촉구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정체성은 집단의 유대를 강화시키는 기능을 하는 제의에 의해서 효과적으로 공식화되고 강화된다. 이러한 제의가 계속 실행됨으로써 사회의 주변에 있는 추종자들은
높은 종교적 지위를 낮은 사회적 지위와 바꾸기 시작한다. …… 한 때 가난하고 경멸을 받고 부랑아였던 자신이 어느날 하나님의 성스러운 자들 중 하나가 되는 최고 중의 최고로 여김을 받게 된다.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변화된 것을 체험하게 된다.
추종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방식으로, 강력하고 저항할 수 없었던 세계를 극복한 사람들이다.
카리스마적 지도자라는 표현은 마가가 그리고 있는 예수의 모습을 비교적 잘 나타내 준다. 카리스마적 지도자에게 필수적인 자격 요건이 되는 신적 능력이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분명히 나타난다. "……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그 위에 비둘기처럼 내려오면서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막 1.10-11). 마가는 이 사건을 일반 사람은 가질 수 없는 신적 능력과 카리스마적 자질을 예수가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암묵적인 표징으로 이해했다. 더구나 예수의 첫 시험기사 보도(막 1.12-13)는 예수를 백성의 실제적인 지도자로 부각시킨다.
예수의 초기 정황에 관한 마가의 언급들은 예언자적, 묵시적 인물인 세례 요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예언자적 사상을 종말론적으로 철저화 한 것이다. 세례 요한의 옷과 음식(막 1.6)은 금욕주의라는 견지에서만 설명될 수는 없다. 곧 그것은 종말론적 생활 스타일로 이해될 수 있다. 메뚜기와 석청은 "전형적으로 사막에서 유랑하는 부족들이 먹었던 음식"이다. 세례 요한의 삶은 종말론의 영향으로 인하여 세상적 가치 체계를 포기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고 또한 유력하다. 세례 요한은 그 시대에 유명한 카리스마적 지도자였다. 따라서 세례 요한의 외모에 대한 묘사는 마가에서 전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는 슈바이쩌(E. Schweizer)의 주장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활동하는 곳에 예수의 첫 등장을 설정한 것은, 마가가 자신의 공동체로 하여금 앞으로 있을 예수의 메시지, 생각, 활동을 예측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부름에 응하는 사람들은 대개 소외된 그룹의 사람들이다. 소외된 그룹은 스스로 사회적 주도 세력의 특권에 접근할 권리를 박탈당했다고 생각한다. '소외 그룹'은 다른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릴 수 있다. 파슨스(Talcott Parsons)의 '상대적 비특권 그룹', 윌슨(Robert R. Wilson)의 '주변 그룹', 몰의 '변두리 그룹'이 그것이다. 이러한 정의에는 약간의 개념 차이가 있으나 그 차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특히 몰의 '변두리'라는 용어는 인종관계와 관련된 사회학적 문헌에서 빌려온 것인데, 사회적 경계선상, 또는 규모가 큰 집단의 경계선상에 위치하고 있어 완전히 소속된 것도 아니고 철저히 배척 당하지도 않는 사람들이나 그룹들에 적용된다. 주로 이들이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부름의 대상이다.
그러나 몰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은, 그들의 부름에 응하는 대상 그룹들과는 달리, 그 사회의 '외부'에서 들어온 변두리의 인물들보다는 그 사회의 '내부'에서 주로 생겨난다고 주장한다. 몰에 따르면, 변두리적 인물은 엄밀하게 말해서 대개 지도자로서 유능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있었던 이전의 세계와 그가 현재 자신을 발견하는 새로운 세계 모두에 대해 확신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몰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들'과 사회적 변두리성을 연결시키고 싶지 않다고 역설한다.
이 주장이 일반적으로 타당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마가의 예수에는 적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멸시당하고 힘없는 곳인 갈릴리의 조그만 마을 나사렛 출신이기 때문이다(막 1.9; 1.24; 10.47; 14.67; 16.6). 갈릴리 사람들은 피의 순수성을 자랑하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의 모욕적인 태도로 인하여 오랜 세월동안 멸시를 당해왔다. "……갈릴리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는다"(요 7.52)는 조롱이 이러한 갈릴리의 변두리성을 잘 보여준다.
갈릴리의 작은 마을들과 도시들 중에서 특히 나사렛은 "구약성서나 요세푸스, 그 문제에 관한 탈무드의 침묵, 예수 시대의 일반적 견해가 나타내 주듯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장소로 간주되었다. 신약 시대에 그 곳은 그 지역의 주요 도시인 세포리에 가려져 있었다". 더욱이 마가의 예수는 회당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한다.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이고 야고보……의 형제인 목수가 아니냐?' 그리고 그들은 예수를 배척하였다"(막 6.3).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것은 그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갖지 못한 예수의 모호한 탄생을 경멸하고 있었던 분위기를 반영한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어머니의 이름이 아닌 아버지의 이름은 전형적으로 한 개인의 근본을 나타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마가가 요셉이라는 이름을 마리아의 남편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마태가 그 이름을 11회, 누가가 8회 언급하고 있는 것과 날카롭게 대조된다. 이 구절에서 마가는 예수가 비특권적이고 주변적이고 멸시당하는 그룹 출신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알리려고 했다. 마가에는 예수가 규모가 큰 사회 '내'의 특권 그룹 출신이라는 증거가 하나도 없다. 이 점 역시 마태가 그린 예수와 현저한 차이를 보여준다. 마태의 예수는 첫 장의 족보가 보여주듯이 왕가 출신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Ⅲ. 혈연의 단절과 소유의 포기
예수를 카리스마적 지도자로 묘사하려는 마가의 전략은 예수가 제자들을 부르는 모습에서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소명 장면에 나타나는 몇가지 공통된 요소들이 있다. 예수의 부름은 평범한 일상성을 뚫고 들어온다. 추종자들은 예수의 부름에 대한 자신들의 결정을 유보할 수 없다. 그 부름이 뜻밖에, 그리고 준비 없이 찾아오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마가에는, 예수가 부른 사람들이 전에 세례 요한의 제자였거나, 예수의 설교나 활동을, 이전에 들었던 적이 있었다는 아무런 암시도 없다. 이것이 요한복음서와 현저하게 다른 점이다. 예수는 갑자기 나타나서 제자들을 부르고 즉시 응답할 것을 요구한다. 예수의 부름에 대한 마가의 보도에서 응답도 거부도 아닌 중립적 태도란 있을 수 없다.
마가에서 예수를 따른다는 사상은 여러 가지로 표현되어 있다. 1장 20절의 'aperkesthai', 8장 34절의 'erkesthai', 2장 14절 이하와 8장 34b절의 'akolouthein'이 그것이다. 마가에서 '…를 따르다'라는 단어는 제자도를 가리키는 전문 용어이다. 유대 랍비들 역시 자신의 학생들이 있지만 랍비 모델은 '따르다'와 '제자도'를 설명하지 못한다. 랍비 이야기의 '부름'과 '따름'은 마가의 것과 유사한 점을 갖지 않는다.
마가가 본 예수는 유대교의 랍비와는 다르다. 이점은 마태복음서와는 구별된다. 예수에게는 학교 수업의 분위기, 즉 단계적 교수법, 잘 정리된 암기술, 여러 해에 걸친 집중 연구, '40세에 토라에 입문하여 13년 후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토라를 가르쳤다'라는 독특한 경력에 관한 유대교적 서술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모습이 없다. 또한 추종자의 경우에도 장차 유명한 선생이 되고자 하는, 학생의 목표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또한 랍비의 학생은 때때로 선생을 바꾸라는 권고를 받기도 한다. 이점에서 예수와 추종자의 관계는 랍비와 학생의 관계와 구별된다. 예수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일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예수는 그가 선택한 사람들을 부르지만 랍비는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마가가 본 예수의 경우, 제자가 되는 것은 항상 그가 어떤 사람을 보고 그를 부르는 데서 시작한다. 이것 또한 요한복음서의 일부 보도와는 구별된다. 곧, 그 복음서에는 추종자들이 주도권을 갖고, 예수가 부르기 전에 그들이 먼저 그를 찾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령, 베드로의 경우가 그러하다(요 1.42-43).
그러나 마가에서는 예수가 주도권을 갖고 있다. 거라사의 귀신들린 자를 치료해 준 이야기(막 5.1-20)는 이러한 예수의 주도권을 가장 잘 나타내 주고 있는 본보기들 중 하나이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청했으나 그(예수)가 거절하였다(막 5.18-19)". 이것은 마가공동체의 멤버십이 누가공동체의 그것과 비교해볼 때 제한되어 있음을 반영한다.
그 부름을 받아들이는 경우, 충실히 제자직을 수행할 것이 예수의 추종자들에게 요구된다. 이 과정에서 어느 것이 중요한가에 대한 우선권이 바뀐다. 새로운 사고와 행동 양식이 제자직을 행하는 데 요구된다. 제자들이 예수를 따르는 일 이외에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수의 부름에 응하려면 모든 세상적인 관심을 포기해야 한다. 제자직의 철저성은 모든 일반적인 인간적 유대와 이전에 했던 일을 포기하라는 예수의 분명한 요구에 명백히 나타난다. 'afieimi'라는 단어는 마가에서 자주 '떠나다', 혹은 '포기하다'(15회), '허락하다'(10회), '용서하다'(9회)로 사용된다. 이 모든 것은 결단력을 전제하고 고된 훈련을 필요로 한다. 어부들은 가족들을 남겨 두었다. 마가는 "그들은 그 아비 세베대를 버려두고 떠났다"고 보도한다. '가족'이라는 것은 개인이 그 안에서 자신의 진정한 사회적 정체성을 발견하는 중요한 기본 단위이다. 일반적으로 고대 사회에서 계급적 지위는 개인적 현상이기보다는 가족적 현상이다. 그것은 또한 일단 획득되면 몇 세대동안 상속, 유지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우 가족이나 친족은, 한 개인이 사회적 정체감을 구축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된다. 가족 유대의 파괴는 가족 유대가 매우 강조되는 가치 체계를 경시하는 결과를 산출해 낸다. 마가는 개인의 참된 모습은 혈연의 가족 개념에서가 아니라 새로 정의된 가족, 즉 새 공동체에서 찾아야 한다고 설명한다(막 3.31-35; 10.29-30).
어부들은 예수를 따르기 위하여 가족들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물과 배도 버렸다. 생계의 수단(그물, 배, 직업)을 버리라는 말에는 지도자를 따르겠다는 결심이 철두철미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 추종자들은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막 10.28). 부자가 예수를 따르는 데 실패한 것은 그가 기꺼이 자기 재산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으로 설명된다. 따라서 마가의 예수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막 10.25)고 경고한 것은 당연하다. 이 말씀은 부(富)가 아니라 가난이 마가 제자도의 중심임을 나타내 준다. 또한 그것은 부나 소유에 관심이 없는 마가공동체의 현재 상태를 반영한다.
일반적으로 부는 삶의 선택의 폭을 넓히고, 생활 스타일이나 기회를 다양하게 한다. 부는 폭넓은 선택의 가능성들을 제공한다. 부의 소유 자체가 소유자에게 특권을 준다. 더구나 일반적으로 부는 성공과 힘의 상징이다. "소유는 단순히 인간의 내적인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권력 게임에 기초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소유는 권력의 표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권력을 나타내고, 무엇보다 인간의 가치를 상징적으로 측정하는 이 부는 "재정적인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에도 위기를 초래하기 쉽다." 마가의 예수는 이 부와 소유를 포기하고, 비난할 것을 요구한다. 실제로 마가공동체 멤버들은 그럴 자격이 있다. 왜냐하면 소유도 없고 빵이나 주머니도 없고 한 벌 옷만 가진(막 6.8-9), 가난한 사람,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떠돌아 다니는 사람(막 6.10-11)만이 부자와 재산의 소유에 관해서 진정으로 비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떤 개인이 자신의 소유를 포기했을 때만이 가능할 것이다. 소유를 포기하는 것은 제자직을 온전히 수행한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중요한 표시들 중 하나이다. 소유를 버리는 것은 세상적인 권력에 대한 애착과 욕망의 상징을 버리는 것을 뜻한다. 마가는 재물은 자라나는 말씀의 씨를 막아서 결실하지 못하게 하는 가시처럼(막 4.19) 사람들을 기만한다고 판정한다.
문제는 이러한 소유를 포기하는 태도가 과연 마가 10장 28-30절에 기록된 "이 세대"에서 그 포기한 것과 유사한 대치물로 보상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그에게 말하기 시작하였다. '주여,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랐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였다. '진실로 내가 너에게 이른다. 나와 복음을 위해서 집이나 형제,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들이나 토지를 버린 자는 이 세대에 핍박과 함께 집들과 형제들, 자매들과 어머니들과 자녀들과 토지들을 받고 내세에 영생을 얻지 못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
타이센(G. Theissen)은 "지역 공동체에서의 동조자들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이 문제에 해답을 시도한다. 타이센에 따르면, 예수 운동과 복음 전승을 카리스마라는 견지에서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방랑하는 카리스마들과 함께 안정된 동조 그룹들인 '지역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이다. 마가 13장 14절 이하는, 타이센에 따르면, 지역 공동체의 심리 상태를 파악하는 데 빛을 던져 준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집을 버릴 준비가, 보이지 않게 내재되어 있고, 사람들은 그들이 곧 집을 잃고 정처없이 떠돌아다니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 운동을 지원하는 자들에게서 그들이 남겨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백 배의 보상을 찾는다고 타이센은 해석한다.
그러나 이러한 타이센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여기(막 10.30)에서 강조하는 것은 동조자들(또는 지원자들)로부터의 지원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사회적 손실에 대한 심리적 보상에 있기 때문이다. 곧, 그 보상은 타이센의 가정과는 달리, 문자 그대로의 물질적, 가시적 보상이 아니다. 그 보상은 새로 정의된 가족, 즉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만 주어질 수 있다. 이러한 반론은 잃어버린 것과 새로 얻은 것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버린 것은 그의 '어머니'(10.29)이지만 현재 보상으로 받은 것은 '어머니들'(10.30)이다. 여기서 '어머니들'은 혈육이 아니라, 공동체 '내부'의 어른 여성들을 나타낸다. '외부'의 지원자는 '어머니들'로 불리어 지지 않는다.
원래 아내들과 자녀들과 세상의 재물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일들은 새로운 언약 백성들의 새로운 현실에 의해 충족된다.
타이센의 가설의 문제점은 '토지' 항목에서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곧, 토지를 버린자는 토지를 백배나 받는다는 말씀은 타이센의 가설 대로라면, 실제로 지역 지원자들로부터 가시적인 토지를 받는다는 뜻이 되어야 하나, 이러한 보상은 가능하지 않다. 오히려 이 말씀은 마가공동체의 순례적 성격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말을 바꾸면, 이 말씀은 이곳 저곳 순례하는 토지 모두를 너희들의 것으로 간주하고 살라는 새로운 정신 세계를 제공한다. 더구나, 이러한 보상 품목들을 '핍박을 겸하여'(10.30) 받는다는 보충이 타이센의 가설을 어렵게 한다. 곧, 지역 지원자들이 마가공동체 멤버들을 지원하면서 핍박을 함께 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가 10장 28-30절은 "형제들이나 자매들이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들"이 죽임을 당하는 유대-로마 전쟁 기간 중에 마가공동체가 엄청난 사회적, 정신적 피해를 입었음을 반영해준다. 마가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목자 없는 "양과 같다"(막 6.34). 그들은 각기 "흩어진 양"(막 14.27)으로 묘사된다. 목자 없이 흩어진 가련한 양으로 공동체의 멤버들을 묘사한 것은 전쟁으로 인한 재난의 상황과 걸맞는다. 이 주장은 "핍박과 함께"(막 10.30)라는 마가의 편집구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새 공동체가 주는 보상은 "핍박과 함께" 주어진다. 이 구절은 전쟁 동안 계속 핍박을 받고 있었던 마가공동체의 불안한 정황을 반영한다.
Ⅳ. 고난과 순례의 길
마가의 예수는 끊임없이 순례한다. 그는 자신의 '고향으로 갔다'(막 6.1). 그는 '달마누다 지방으로 갔고'(8.10), '가이사랴 빌립보 여러 마을로 갔다'(8.27). 그는 높은 산에 올라갔다, 내려왔으며(9.2,9), 여리고를 들려 베다니로 갔다(10.46; 11.1). 결국, 그 길은 겟세마네로 이어진다(14.32). 이러한 현상은 마가의 반복되는 '길' 주제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마가복음서의 첫 성경 인용은 '길'에 관한 것이다(1.2-3). 세례요한이 예비할 것은 주의 길, 곧 이 경우에는 예수의 길이다. '길에서'(en te hodo)도 마가의 주요 주제이다(8.27; 9.33,34; 10.52). 이러한 예수의 순례성에 관한 묘사는 마가공동체의 순례적 특성을 보다 더 강화 시켜준다.
마가공동체는 선교 여행을 위하여 고향을 떠날 것을 요구받는다. 마가 6장 7-13절에는 마가공동체 멤버들의 순례적 특성과 그 고달픔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했다. …… "너희가 들어가는 집에서 그 곳을 떠날 때까지 머물러라. 만일 어떤 곳이든 너를 영접하지 않고 네 말을 듣지 않으면, 떠날 때 그들이 너를 거부한 증거로 네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려라"(막 6.8, 10-11)
선교 여행 과정에서의 거부가 빈번히 예견되고 있다. 추종자들은 "그들의 나라나 친족, 집"에서 환영받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참조. 막 6.4). 왜 그런가? 그들은 고향, 친척, 집과 결별하였고 이들에 대한 책임을 이미 소홀히 하였기 때문이다. 혈연과 지연이 매우 강조되었던 전통 사회에서 이러한 순례적 성격은 예수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버림을 받았던 그 가족들에게는 거의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예수 운동에 가담했던 추종자들의 가족들은 예수에 대해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예수 자신도 그의 친속에 의하여 미친사람으로 취급당했을 정도이다(막 3.21).
추종자들은 이 마을이나 저 마을에서 거절당하고 핍박받게 될 것으로 예고된다. 마가공동체의 이러한 철저성과는 대조적으로, 누가는 (물론 그가 여전히 마가의 극단적인 요소들 중 많은 부분을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그 날카로운 끝을 무디게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너희들을 지갑이나 주머니나 신발 없이 보내었을 때,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그러나 이제 지갑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갖게 하고 가방도 갖게 하라. 그리고 검이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서 검을 사게 하라"(눅 22.35-36).
타이센은, 누가는 이 단락에서 예수가 급진적인 요소들을 폐지하기 위해서만 그 급진적인 자료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눅 22.35-36). 타이센에 따르면 이렇게 폐지하는 것은 누가의 삶의 정황을 반영한다. 즉 누가는 자신의 교회를 괴롭혔던 최초의 순례하는 카리스마들의 후손들에 대하여 논쟁한다. 그러나 타이센의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왜냐하면 누가 22장 35-36절은 급진적인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가가 마가의 반세속적 관심의 날카로운 끝을 무디게 한 것은 아마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누가공동체의 사회-경제적 수준이 상승하는 만큼 그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비특정 그룹에서 열 둘을 선택한 마가(막 3.13-19)와 달리 누가 6장 12절 이하에서는 12사도가 "그의 제자들" 중에서 선택된다. 누가에서 제자는 12사도를 뜻하지 않는다. '제자'라는 용어는 이제 큰 규모의 그룹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된다. 심지어 누가는 "제자의 허다한 무리"를 언급한다. 극히 드문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예수를 믿는 자와 따르는 자는 모두 제자로 불린다. 그 그룹의 크기는 일정하게 고정되어 있지 않다. 누가는 그의 독자들을 전체적으로 그 제자들과 동일시하고자 하였다. 제자들은 누가 시대의 교회를 나타내는 커다란 포괄적인 그룹이다. 누가에서 철저성이 약화된 것은 다른 가치 체계를 가진 다양한 사람들을 포괄하고 있는 누가공동체의 큰 규모에 걸맞는 일이라 하겠다. 마가공동체는 이러한 누가공동체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추종자들의 순례 성격에 대한 마가의 기술은 마가공동체가 현재 순례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마가복음서에서 무리는 예수가 여행하는 동안에 동행자가 된다. 때때로 무리는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는 상태로 "이미 사흘"을 예수와 함께 있기도 하였다(막 8.2). 그들 중에서 몇 사람은 멀리서 오기도 하였다(8.3). 예루살렘에서 올라가는 도중에(10.32; 11.1), 그리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활동하는 가운데(11.18) 그들은 예수의 믿음직한 동행자가 된다. 그들 중 일부는 그(예수)가 갈릴리에 있을 때 그를 따르고 섬기던 자들인 "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15.40 이하)를 포함한 여인들이었다. 또 "그(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15.41) 다른 많은 이름 없는 여인들도 함께 순례에 참여한다.
마가공동체의 순례적 성격은 농촌 배경과 잘 어울린다. 예수 생애의 마지막 기간 중 예루살렘에서 보낸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마가의 예수는 거의 팔레스틴의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닌 것으로 묘사된다. 마가복음서에는 명백하게 도시에 대한 반감이 나타나 있다. 마가의 예수는 특색있게 "언덕 위에서"(막 3.13; 9.2; 13.3)나 "바닷가에서"(1.16; 4.1; 5.1,12), "푸른 잔디"에서(6.39), "광야"에서(1.12; 1.35; 1.45; 6.31f; 8.4) 가르치고 활동하였다. 마가는 그의 편집구에서 예수가 도시를 피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서게 될 때, 도시 대신에 예루살렘 밖에 있는 산이 바람직한 피난처로 제시된다(13.14). 또한 "들에 있는"(13.16) 농부에게 도시에 있는 집으로 피난하지 말라는 경고가 주어지고 있다. 마을과 들판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여러 곳에). 도시는 마가의 예수가 물러난 장소이다.
그리고 저녁이 되자 예수는 도시 밖으로 나갔다(막 11.19)
큰 다락방에서 은밀히 모임을 가질 때(14.5)를 제외하고, 예수는 예루살렘 밖, 마을에서 살았다. 도시는 예수에 대한 부당한 재판과 처형에 책임을 져야할 곳으로 제시된다. 마가는 예수를 마을사람들의 접대로 생계를 잇는 순례하는(마을들이나 작은 고을들 사이를) 인물로 묘사한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서 일어나 두로와 시돈 지역으로 갔다. 그리고 어느 집으로 들어갔다(7.24)
그가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할 때 ……(14.3)
마가의 예수는 그의 선교를 갈릴리에서 시작하여(1.14) 예루살렘 밖에 위치한 골고다에서 끝마친다(15.22, 24). 이러한 마가의 반-도시적 경향은 바울의 친-도시적 경향과 날카롭게 대조된다. 바울은 소아시아 중앙에서 마게도니아를 거쳐 남으로 펠로폰네소스에 이르는 길을 따라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여행하였다. 규모 면에서 '바울의 도시들은' 빌립보처럼 약간 작은 도시에서부터 에베소, 고린도처럼 길게 뻗어 있는 도시들까지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통치기구, 문화, 주민들의 의식 측면에서 모두 도시(적)이다.
이러한 바울의 친-도시적 경향은 마가의 반-도시적 태도와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 마가복음서에서의 반-도시적 경향은 마가공동체가 로마나 안디옥같은 대도시에 위치하였을 것이라는 추정을 불가능하게 한다. 마가복음서가 농촌의 특징적인 모습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그 공동체가 도시를 순회지역으로 삼는 데 반대하였음을 말해 준다. 마가공동체가 팔레스틴과 시리아의 시골과 작은 마을들을 오고가는 순례하는 그룹이라는 주장이 적절한 것으로 여겨진다면, 마가공동체의 순회지역들을 한 장소(예를 들면, 로마, 안디옥, 갈릴리)로 고정시키려는 노력들은 허사가 될 것이다. 마가의 예수가 도시를 회피하는 경향을 가졌던 근본적인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예수가 도전하였고, 그를 처형시킨 세상의 "권력"이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농촌을 배경으로 한 마가의 예수가 행한 이러한 카리스마적 순례는 마태의 분위기와 비교해 볼 때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슈바이쩌에 따르면 마태공동체는 예수의 부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가족 유대와 세상적 관심을 버리고 순례하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로서의 예수의 생활과 "유사한" 생활을 시작한 일군의 크리스천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빗나간 것이다. 왜냐하면 마태는 마가의 철저한 순례적 경향을 상당히 수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Ⅴ. 결 어
마가의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과거의 가족유대로부터의 단절과 생계의 수단이나 부와 같은 소유의 포기를 촉구한다. 마가공동체 멤버들은 이 촉구를 자신들과 연관지어 이해했다. 그러나 마가공동체 멤버들은 옛 예수의 이 촉구를 자신들에 대한 직접적인 촉구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더 이상 포기할 가족이나 소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이 촉구를 자신들의 현 상황에 대한 정당화로 이해하고 위로를 받는다.
한편, 마가의 예수가 보여준 끊임없는 순례의 모습은 마가공동체 멤버들을 위한 직접적인 모델이 된다. 마가공동체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과 함께 순례의 길을 떠나도록 촉구한 카리스마적 지도자 예수를 '탈사회화'의 모델로 인식하고, 이러한 태도를 자신의 선교 활동에 이용한다. 이러한 의도적인 '탈사회화' 현상은 아노미 상태와는 다르다. 오히려 그러한 '탈사회화'는 아노미 상태에 대한 마가공동체의 가장 효과적인 방어책이다. 왜냐하면 일단 의도적인 '탈사회화'가 이루어지면, 그것이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한, 공동체를 내적으로 강화시키는 강력한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서 도처에서 예수는 주로 '길에서' 있었던 것으로 보도된다.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갖지 말고, 오직 신만 신으라"(6.8-9)고 요구한 카리스마적 지도자 예수의 순례성은 주후 66년에 촉발된 유대-로마 전쟁으로 집과 혈육을 잃은 채 처참하고도 불안한 상태에서 함께 여행하는 마가공동체 멤버들의 순례적 성격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 성격을 정당화하고, 강화해 나갔을 뿐만이 아니라, 그들에게 새로운 사회적 정체감과 심리적 안정감을 제공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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