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김동수
< 본문> 눅 5:1-11
I. 들어가는 말
1. 헬라어는 알파벳만 정확히 알면 알파벳이 곧 발음 기호이기 때문에 읽기 쉽습니다. 사실 읽는데 예외 법칙이 거의 없습니다. 예외는 서 너 가지에 불과합니다. 그것만 익히면 발음 공부는 끝입니다. 그런데 알파벳 자체의 발음을 정확히 익히지 못하면 어쨌든 단어도, 변화표도 암기할 수 없기 때문에 따라오지 못합니다. 수업을 잘 따라오지 못하는 또 한 부류의 학생은 공부하면서 앞에서 배운 것을 잊어버린 학생입니다. 그런 학생은 간단합니다. 앞에 것을 다시 복습하면 됩니다.
2. 저는 신앙에도 이와 비슷한 면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첫째, 헬라어의 읽기처럼 생기초가 안되어 있으면 그 뒤에 어떠한 노력을 해도 신앙이 자라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그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합니다. 둘째, 본래 기초는 쌓았지만 그것을 잊어버리고 더 높은 차원으로 가서 하려고 해도 잘 안 되는 경우입니다. 신앙에서도 기초는 확립했지만 나중에 그 기초는 잊어버리고 너무 높은 차원에서만 가 있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도 노력해도 신앙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3. 그렇다면 그 기초가 무엇일까요? 저는 신약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인물을 통해서 그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바로 베드로입니다. 우리는 누가가 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서 베드로가 어떻게 신앙이 성장해 가는 가를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성숙한 모습은 오순절 날 성령충만을 받은 후 제자들의 대표로서 오순절 날 유대인들에게 그 사건을 설명하고 이어서 예루살렘에서 여러 사역들을 감당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행전 1-11장에 걸쳐 나와 있습니다. 나중에는 헤롯에 의해 체포되었었지만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기도로 풀려납니다.
4. 베드로의 중간 단계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신앙고백입니다. 누가복음 9장 20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이니이다.” 두 번째 장면은 베드로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는 장면입니다(눅 22:54-61). 여기에는 베드로 신앙의 긍정적인 것도 볼 수 있고, 또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다는 것도 봅니다.
5. 그렇다면 첫 번째 장면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어부였던 베드로가 게네사렛, 즉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다 예수를 만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이야말로 베드로 신앙의 기초석이 된 사건입니다. 후에 베드로가 체포당함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또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병자를 일으키고, 예루살렘에서 놀라운 사역을 했지만 베드로에게는 그의 신앙의 고향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예수님과의 만남 장면입니다. 누가복음 기록에 따르면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한 다음 “밖에 나가 심피 통곡하니라.”(눅 22:62)고 했습니다. 그 때는 자신이 수님을 부인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베드로는 무엇을 더 생각했을까요? 아마도 예수님과의 첫 만남을 회상했을 것입니다. 그 때로 돌아가야 하는데, 일신의 안위를 위해서 예수를 배반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크게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II. 베드로 신앙의 기초
1.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을 꼼꼼히 고찰해 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중에 현재 매우 고차원의 신앙에 이르러서 하나님의 사역을 열심히 감당하고, 큰 일을 하는 분이 있을지라도 처음을 잃어버렸다면 그 사람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처음이 없었다면 그 처음이 여러분 삶 속에서 생겨나야 합니다.
2. 베드로와 예수님의 첫 만남은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다가간 것입니다. 베드로와의 첫 만남은 예수님이 베드로의 배를 잠시 빌려 쓴 것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 예수님은 사람들을 육지에 앉히고 배에서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말씀하시는데 매우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바다같이 큰 갈릴리 호수에서 바람이 대개 호수 안에서 육지로 불기 때문에 마이크가 없던 당시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잘 들렸을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말씀을 마치시고, 배를 공짜로 빌려 쓴 것이 미안했던지 베드로에게 고기를 많이 잡게 해 줍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 이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 전문가요, 베드로는 이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인데 예수님이 말씀 이야기가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베드로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대 인간으로는 잘 일어나지 않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인 단순한 사람 대 사람의 일이라면 예수님은 결례를 행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전공을 무시하고 끼어들은 것입니다. 대개 자기 일에 전문적이지 않은 사람이 다른 분야의 전문가를 무시하는 경향성이 있듯이 예수님도 그런 형국입니다.
4. 어쨌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4절) 이것이야 말로 비전문가가 전문가에게 한 수 코치하는 것인데 이 세상에서는 그렇게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베드로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지 않고 그대로 따랐다는 것입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저는 이것을 참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베드로가 미쳤었나? 왜 어부도 아닌 사람의 말을 듣고 그물을 내렸을까? 여기서 “선생님”이라는 말은 8절에 나오는 “주님”이라는 말과는 다른 말입니다. 거기에서는 신앙고백적으로 예수님께 신성이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그냥 상대방을 존중하는 뜻으로 쓰는 “선생님”입니다. “또 말씀에 의지하여”라는 말도 우리가 흔히 쓰는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의지하여”라는 말은 아닙니다. 상대방을 존중해서 그냥 그렇게 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5. 저는 베드로가 특별히 순종적인 사람이고 좋은 사람이라서 이렇게 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이 신앙적으로 보았을 때에도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베드로는 보통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 따를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어차피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노력했지만 수확이 없었는데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 사람의 이야기를 그냥 들어보자 하는 것입니다. 밎져 보았자 본전이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는 자신이 배를 빌려주는 동안 베드로도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한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생긴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이면 내가 그분의 말대로 할 수 있겠다. 아마도 베드로의 마음 속에는 위의 감정이 병존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베드로가 아직 시앙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께 호의적으로 대하고 그 말대로 그냥 따라 해 본 것입니다.
6. 우리 중에도 아직 이 단계에 머문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누구의 소개로 교회에 나와 보니 참 좋은 말씀이 있고, 한번 그 말씀대로 해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아직 여기에 목숨을 걸 수는 없지만 여기에는 뭔가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잘은 모르지만 일단 한 번 그대로 따라 해 보면 좋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100% 믿어지지 않아도 말씀을 듣고 긍정적으로 그대로 한 번 해보는 것입니다.
7. 백 퍼센트 순도의 믿음은 아니었지만 베드로의 이런 행동에 예수님은 놀라운 일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 지라.”(6절) 아마도 베드로는 지난 밤에 예수님이 그물을 던지라고 한 쪽으로도 그물을 내려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대로 했더니 고기 한 마리도 잡히지 않던 것이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힌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잡혔든지 자기 배와 동료의 배에 고기를 다 채우자 배가 가라 않을 정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III.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의 죄 문제 해결
1. 오늘 본문의 초점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고기가 많이 잡혔더라가 아닙니다. 바로 그 다음에 이것을 베드로가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였는가에 초점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때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어 해 보았더니 그대로 되네. 이 분 점장이가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다면 그 다음 장면이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어부였지만 다른 유대인들처럼 메시아를 고대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로마의 치하에서 이방인의 명령에 따라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아름다운 삶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아를 고대했는데, 베드로는 이 장면에서 바로 자기가 만난 분이 메시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줄 수 있는 분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마 그 이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2.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8절)라고 한 것입니다. 이 장면은 구약 이사야서 6장에서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 벌벌 떨고 있는 이사야를 생각나게 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내가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5절) 베드로는 신현현 앞에 저절로 무릎이 꿀려졌고 구약에서 하나님 앞에 선 모든 사람이 그렇게 했듯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기를 간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인임을 자동적으로 알고 고백한 것입니다.
3. 이것은 베드로에게 하나님을 만난 사건이었습니다. 10절에 보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현현 앞에 무서워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눅 1:13, 30; 행 18:9; 27:24). 이것이야 말로 베드로 신앙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것이 있었기 때문에 후에 공식적인 신앙고백도 했고, 잠시 예수님을 부인했다가도 다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 때 같이 있었던 야고보와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장면이 없이 돈 궤를 맡아 이익을 얻으려고 처음부터 예수를 좇아갔던 가룟 유다는 결국 자살하고 만 것입니다.
4. 여기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베드로가 처음으로 고백한 것,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의식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후예가 되는 우리 각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에 앞서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첫 과정이요 단추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영국에서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과 같은 인물로 넬슨 제독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프랑스와의 ?? 전투를 승리로 이끈 사람인데, 런던의 가장 중심지인 트라팔과 광장에 가면 이 사람의 동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죽기 전에 목사님을 청해서 고민을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교리적으로는 많이 들었지만] 제가 죄인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었다면 이 사람은 불세출의 영웅이었지만 예수님의 제자는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5.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이 첫 번째로 느끼는 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요즘에 사람들은 설교자가 청중을 향해 “당신들은 죄인입니다.”라고 선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도 예수 믿고 어떤 일이 잘되고, 기분이 좋아지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듣기 좋아합니다. 요즘 유명한 설교자 중에 죄에 대한 깊은 터치가 별로 없습니다. 신앙은 죄의 문제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죄를 느끼지 못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마음 속 깊이 깨닫지 않으면 신앙의 문에 아직 못 들어간 것입니다. 한 마디로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죽으면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느끼고, 깨닫고, 해결한 사람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6. 어떤 사람은 저에게 와서 이런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남의 물건을 도둑질 한 것도 아니고, 사기를 친 것도 아니고, 폭력을 행사한 것도 아닌데 내가 무슨 죄인이야?” 우리는 죄인하면 형사 사건에 연루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죄수를 생각합니다. 감옥소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물론 그들도 법을 어긴 죄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죄인으로 확정되기 까지는 법정에서 오랜 시간 동안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판사는 증거와 정황을 참작하여 법이 정한 벌을 내립니다. 하지만 죄가 많은 데도 처벌받지 않은 사람이 이 세상에는 많고, 반면 제가 적은데도 상대적으로 크게 처벌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피의자가 좋은 변호사를 살 수 있는 능력과 힘이 있는 사람인가와도 관계가 있지만, 또 한 가지는 검사와 판사가 전능하지 않기 때문에 그 정확한 마음과 행동을 100% 알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는 분이 아니라 마음을 보는 분이시기 때문에 누구라도 어떤 구체적인 일을 행하지 않았어도 마음 속에 벌써 더 나쁜 마음을 먹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죄를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좌 앞에서는 복잡한 심문 절차와 기간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은 곧바로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아시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 곧바로 유/무죄 판결을 내릴 수 있습니다.
7. 우리가 죄인임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무디어진 증거입니다. 1) 알람 시계를 처음에는 들리지만 매일 울리다보면 그냥 알람시계가 울려도 잠이 듭니다. 2) 노동자들이 손을 많이 사용하면 굳은 살이 생겨 감각을 잘 못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3) 남도 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옆에 사람을 보고 위안을 받고 자신이 정당하다고 계속해서 마음 속에 mind-control을 합니다. “너는 죄인이 아니야. 그만하면 훌륭해.”
8. 죄라는 것은 특정한 잘못을 저지른 것에 대한 것만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6:7에는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사역 가운데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신다는 말씀이 있는데, 거기에서 그 죄는 바로 “믿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이 세상의 약자들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죄라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합니다. 이 모든 죄는 무슨 특정한 잘못을 했다기보다 마음 속이 올바르지 않아서 무슨 올바른 일을 하지 않을 것에 대한 것입니다.
9. 우리는 죄를 어디에다 대 보아야 합니까? 1) 형법? 2) 양심의 법? 3)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의 하나님의 말씀?-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깨끗하게 하얀 가를 대 볼 때 먹지와 대보지 않습니다. 회색지에 대보지도 않습니다. 백지에 대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백지는 말씀 밖에 없습니다. 우리 각자는 말씀 앞에 자신을 대 보면 금방 자신이 죄인인 것이 자명하게 드러납니다. 베드로처럼 무릎을 꿇고 죄인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 중에 자신이 죄인임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옆 사람에게 대 볼지 모릅니다. “내가 제 보다는 낫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를 대 보아야 합니다.
IV. 나가는 말
1. 우리 중에는 베드로와 같은 죄의 고백을 한 경험이 있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올챙이 적을 잊어버리고 자신이 죄인임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저도 그 후보 가운데 하나로 넣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심각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의인이라는 의식을 가질 때 이미 교만해 진 것이고, 갈릴리 사건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가서 놀다가 정작 복음서의 첫 사건 즉 갈릴리 사건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본문> 눅 16:19-31
I. 들어가는 말
1. 오늘 설교 본문은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입니다. 내용 중 약간 의아한 것은 부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거지의 이름은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말로 표현하면 ‘한 분당 재벌과 그 집 거지 동수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주인공은 거지가 아니고 부자입니다. 부자가 죽어 음부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음부란 유대교에서 본래 지하라는 뜻으로 땅 속을 뜻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신약 성서에서는 지옥이라는 말의 동의어로 쓰였습니다. 이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 중에 자신의 형제들이 여기에 오지 않도록 나사로를 세상으로 다시 보내달라고 간절히 청원했지만 낙원에 있는 아브라함은 그것은 소용이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들어주지 않는 것이 주 내용입니다.
2. 저는 이 본문의 설교를 백 번쯤은 들었을 것입니다. 설교 내용도 똑 같은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본문은 감리교 교리와 장정에 나오는 추도예배 본문인데, 저의 선친께서 추도예배 때마다 거기에 나와 있는 대로 이 본문을 읽고 설교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 있을 때 회개하고 예수 믿어 부자처럼 음부에 가지 말고 나사로처럼 낙원에 가자는 것이 설교의 요지였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이 본문으로 설교하는 것을 보기 어렵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요즈음에 사람들이 사후세계 보다는 현실 세계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풍족하고 성공하는 삶을 살면 여기가 곧 천국 같기도 한 것입니다. 또 “지옥 등을 말하는 것은 부흥사나 하는 이야기이지 사랑의 하나님이 지옥을 만드실까?”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 이야기는 신도림동에서 피켓 들고 전도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3. 아닙니다. 천국와 지옥의 문제는 우리가 꼭 집고 넘어가야 하는 중요한 것입니다. 과연 천국은 있는 것인지, 또 있다면 어떤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인지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II. 천국은 있는가?
1. 먼저 천국과 지옥은 정말 있는 것인가 라는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옛날에 한 구 소련 우주 비행사가 우주에 가 보았더니 천국은 없더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또 한 미국 비행사는 우주에 가 보았더니 정말 우주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라고 믿어지더라는 고백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천국이 있다는 것도 또 없다는 것도 증명할 방법은 없습니다. 또 천국에 갔다 온 사람의 간증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도 100% 신뢰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어떻게 말하는 지가 중요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것이야말로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그런데 의외로 성경에는 장소적인 천국 개념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많이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 천당(天堂)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 말은 불교에서 온 말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신약에서 천국은 낙원(Paradise)이라고 표현되어 분명히 나옵니다. 이곳은 사후에 신자가 들어갈 곳입니다.
1)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자신을 의탁한 같이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십니다(눅 23:43).
2) 바울은 스스로 “낙원”에 이끌려 간 체험을 고린도후서 12:4에 이야기합니다.
3) 요한계시록 2:7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4) 또 요한복음 14:1 이하에도 예수님은 고별 설교를 통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5) 오늘 본문에서는 음부와 반대되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천국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3. 성경에서는 낙원보다는 지옥 혹은 음부에 대해서 더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는 내세 사상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과 지옥 개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죽어서는 땅 속인 음부로 내려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말하는 음부는 지옥이 아니라 땅속입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음부는 낙원의 대척어로 쓰입니다(마 11:23; 16:18; 눅 15:23; 행 2:27, 31; 롬 10:7; 계 1:18; 6:8; 20:13, 14). 또 예수님은 지옥이라는 말을 사용하십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게헨나’라고 하는데 이것은 히브리어 ‘게힌놈’(힌놈의 골까지)이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이곳은 자녀들을 불로 지나게 하는 인신 제사가 이루어지고 우상 숭배의 장소였습니다. 본래는 죽어서 들어갈 곳이라는 뜻은 아니었지만 신약에서는 심판을 받기 위해 죽어서 들어가는 곳으로 쓰입니다. 여기에서는 불의 고통이 있습니다.
1) 불꽃 가운데 괴로워하는 곳. 눅 16:24
2) 불이 계속 타는 곳. 마 5:29
3) 꺼지지 않는 불 막 9:43
4) 구더기도 죽지 않는 곳. 막 9:48
5) 꺼지지 않는 불로 소금치듯 당하는 곳. 막 9:48-49
6)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 마 25:30
7) 마귀와 그 사자들을 향하여 예비된 곳. 마 25:41
8) 영원히 불타는. 곳 마 25:41
9) 유황 불붙는 곳. 계 19:20
10) 바깥 어두운 곳. 마 8:12
11) 둘째 사망의 불 못. 계 20:15
12) 영벌 받는 곳. 마 25:46
13) 영원한 멸망의 형벌 받는 곳. 살후 1:9.
4.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상 지옥은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 반대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막론하고 하나님은 악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으시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개념과 조금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나약한 연민이나 감정이 아니라 바로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III.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1. 그러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교리적으로 보면 간단합니다. 예수 천국, 불신지옥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이유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냥 거지였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거지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또 부자가 음부에 들어간 것도 예수 믿지 않아서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냥 부자로서 호화롭게 즐기는 삶을 산 것 밖에 없습니다. 혹시 이 사람은 부자라서 음부에 들어간 것일까요?
2. 먼저, 이 이야기는 신약의 신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유대인 이야기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만약 내세가 있다면 자신들 모두 거기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당시 유대인 중에는 내세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도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기에서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예수를 믿는 신앙, 불신앙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대로 어떻게 올바로 사는 것인가를 이야기 한 것이고, 여기에서 출발하여 어떤 사람이 낙원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신앙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3.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사후 세계에서는 부자와 거지의 처지가 역전되었다는 것입니다. 25절에 보면 부자가 고통을 받는 것이 이 땅에서 단지 부자로 살았기 때문이고, 나사로가 위로를 받는 것은 이 땅에서 고생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앞뒤 문맥을 보면 부자는 16:13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는데, 많은 부자들이 재물의 종이 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의 이런 말씀을 비웃습니다. 바로 이런 문맥에서 예수님은 부자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16:19에 보면 이 부자는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도 하지 않고 호화로운 옷을 입고 자신의 인생만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4. 16:30에 보면 천국에 들어갈 자는 바로 회개한 자입니다. 앞에서는 자세히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부자의 말을 통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편지나 예수님의 다른 말씀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천국은 회개하는 자가 들어가는 곳입니다.
5. 그렇다면 누가 회개한 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성경 본문에서는 공개적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을 회개라고 봅니다. 또 어떤 곳에서는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돈지갑이 거듭난 것을 회개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말로 회개했다고 해도 과연 돈지갑이 회개했는지를 보아야 그 사람이 참으로 회개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여기서 부자는 회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나사로 같은 거지는 염두에 두지도 않고 홀로 독존하여 자신의 삶을 즐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2) 바로 앞 구절에 나오는 바리새인들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재물을 섬길 수 없다”고 선언하십니다(눅 16:13). 이에 대해서 누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바리새인들을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눅 16:14). 누가는 대단히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사람의 회개가 재물관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꿰뚫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경건하고 재물에 욕심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누가는 이들이 사실은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예화) 참으로 아이러니 중의 하나는 성직자는 돈과 상관없이 살 것 같은데 요즘 메스 미디어에 보도되는 것을 보면 대교회 목사님들이야말로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3) 가난하다고 모두 ‘나사로과’는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이 돈에 대해서 포기하고 선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부자를 몰아내고 가난한 사람들이 정권을 잡은 것이 공산당인데 사실 여기에 부패가 더 심했습니다. 이들도 부를 싫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난한 것이 싫었던 것이고 기회가 되니 도로 부자가 된 것입니다.
6. 여러분이 진정으로 회개했는지를 보려면 물질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신앙적으로가 아니더라도 어떤 사람의 인품을 보려면 그 사람의 돈 씀씀이를 보면 됩니다. 어디에, 어떻게 쓰는 가가 그 사람의 인격입니다. 사실 우리는 많은 영적인 것을 이야기하지만 그 뒤에는 검은 돈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예수 믿고 구원받는다고 해 놓고 물질적으로는 어떻게든 부유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본문에 나오는 부자의 태도입니다.
IV. 나가는 말
1. 오늘 본문은 어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가 보다는 어떤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는가에 대한 본문입니다. 나사로처럼 가난하게 살면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 아니라 부자처럼 살면 음부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앞의 문맥에서 보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면서 또한 돈을 섬긴 사람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2. 어제 방영된 ‘뉴스후’를 보면서 두 가지를 느낍니다. 1) 세상은 교회를 오해하고 곡해하고 미워하고 있구나. 2)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물욕에 사로잡힌 교회의 행태가 많이 있구나. -누구를 탓하기에 앞서 저 자신을 깊이 돌아보기 원합니다. 없는 사람이 있는 사람 탓하는 것은 질투심에서 발로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 사람도 기회가 되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어쨌든 스스로를 깊이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 묵상
1 사람들이 그분께 몰려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할 때에 그분께서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배 두척이 호숫가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시니라. 그러나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 자기들의 그물들을 씻더라.
‘게네사렛 호수’는 갈릴리 호수의 또 하나의 명칭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에게 모여들었다. 갈릴리 호숫가에 많은 배들이 있었겠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시몬 베드로의 배와 야고보와 요한의 배에 있으셨다.
3 그분께서 그 배들 중 하나에 오르 셨는데 그것은 시몬의 배더라. 그분께서 그가 뭍에서 조금 나갈 것을 그에게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사람들을 가 르치시더니 4 이제 말씀을 그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너희 그물들을 내려 한번 끌어당기라, 하시매
베드로는 형제 안드레의 증거를 따라 이미 예수님을 알았던 자이었다(요 1:41-42).
5 시몬이 응답하여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밤새도록 수고하였어도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들이 이 일을 행하니 심히 많은 물고기가 잡혀 그들의 그물이 찢어지니라.
밤새도록 헛수고를 했던 터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거부할 수도 있었겠지만, 시몬 베드로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그의 말씀을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7 그들이 다른 배에 있던 동료들에 게 손짓하여 그들이 와서 자기들을 도와주기를 바라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배들이 가라앉으려 하더라.
8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이르되,
오 주여, 내게서 떠나소서. 나는 죄 많은 사람이니이다, 하니
처음에 예수님을 ‘선생이여’라고 불렀던 그는 지금 그를 ‘주여’라고 불렀다. ‘주’라는 말은 ‘선생’이라는 단순한 존칭어를 넘어서서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고백하는 뜻을 가진 것 같다.
9 이는 그와 또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이 잡은 물고기들을 끌어당김으로 말미암아 놀랐기 때문이더라. 10 세베대의 아들들로서 시몬의 동료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더라.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이제부터는 네가 사람들을 낚으리라, 하시니 11 그들이 자기들의 배들을 뭍에 대고 모든 것을 버린 채 그분을 따르니라.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다.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의 참 목적과 관심은 그들을 제자로 삼는 데 있으셨다. 그들은 다 주의 영광을 보았고 그를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시몬과 그 친구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복음은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또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증거한다(마 4:20, 22). 예수님을 따르려는 전임(專任)전도자들은 이 처음 제자들의 행동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세상의 것을 구하는 길과 다르다. 세상의 것을 구하는 자는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살 수 없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자는 누구든지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그를 따라야 한다.
12 ¶ 그분께서 어떤 도시에 계실때에, 보라, 온 몸에 나병이 있는 사람이 있더라. 그가 예수님을 보고 얼굴을 대고 엎드려 그분께 간청하여 이르되, 주여, 주께서 원하시면 나를 정결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매
나병 혹은 한센병은 피부를 붓게 하고 모양을 보기 싫게 만들고 피부색이 변하는 병이다. 이 병은 얼굴과 팔과 다리 표면의 신경에 영향을 미쳐 감각을 잃게 함으로써 피부가 데거나 상처가 나도 깨닫지 못하게 한다. 그는 ‘온몸에 문둥병이 들린’(플레레스 레프라스)[나병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13 그분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정결할지어다, 하신즉 곧 나병이 그에게서 떠나니라. 14 그분께서 그에게 명하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하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에게 네 자신을 보이고 또 네가 정결하게 되었으므로 모세가 명령한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증거로 삼으라, 하시니라.
예수께서는 “내가 원하노니 정결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그 병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셨다. 모세는 자기를 비방하다가 하나님의 징벌로 나병에 걸렸던 누나 미리암의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하였었다(민 12:13).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시고, “내가 원하노니 정결할지어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나병이 곧 떠났다. 이것은 그의 신적 능력을 나타내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다. 그의 치료는 즉각적이었고 완전하였다. 하나님의 치료만이 즉각적이고 완전할 수 있다.
15 그러나 그분의 명성이 더욱 널리 퍼지매 큰 무리들이 함께와서 말 도 듣고 또 그분을 통해 자기들의 병약함도 고치려 하더라. 16 ¶ 그분께서 광야로 물러가사 기도하시더라.
예수님의 소문이 더욱 퍼지자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왔으나 예수께서는 물러가셔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은 분명히 병을 고치는 데 있지 않으셨다. 그는 세상적 명예나 인기를 구하는 자도 아니셨다. 그의 하실 일은 다른 것이었다. 그의 기도 생활은 우리에게 본이 된다. 우리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시시때때로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조용한 곳을 찾아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의 힘을 얻어야 한다.
17 어느날 그분께서 가르치실때에 갈릴리의 모든 고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율법 박사들이 곁에 앉았는데 주의 권능이 거기있어 그들을 고치더라.
18 ¶ 보라, 사람들이 마비병에 걸린 사람을 자리에 누인채 안으로 데려와 그를 그분 앞에 놓으려고 안으로 데려갈 방법을 구하였으나
19 무리로 인해 어떤 길로 그를 안으로 들여 놓을지 방도를 찾지 못해서 지붕에 올라가 지붕 덮개를 통해 그를 자리에 누인 채 한가운데로 예수님 앞에 달아 내리거늘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했다
.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사람을 예수께로 인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장애물이 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 병자를 데리고 온 그들은 낙심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다. 당시의 유대인들의 집 구조는 가운데 뜰이 있고 그 주위로 방들이 있고 뜰 지붕은 천이나 얇은 기와로 되어 있고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외부에 있었다. 예수께서는 집의 가운데 뜰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고 그들은 외부 계단을 사용하여 지붕으로 올라가 가운데 뜰 위의 기와를 벗기고 예수 앞으로 그 병자를 달아 내렸다고 보인다. 그들에게는 친구에 대한 사랑이 있었고 서로 간의 협력이 있었고 또한 믿음과 수고와 용기가 있었다.
20 그분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사람아, 네 죄들을 용서받았느니라, 하시니라. 21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따져 보기 시작하며 이르되, 신성모독하는 말을 하는 이 사람이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들을 용서하 겠느냐? 하거늘
22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응답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마음속으로 무엇을 따져 보느냐? 23 네 죄들을 용서받을지어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쉬우냐?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셨다.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마음으로 생각한 것은, 예수의 말이 참람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 외에는 죄를 사할 수 있는 자가 없는데, 예수가 사람으로서 그런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중요한 진리가 있었다. 만일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죄사함의 일을 예수께서 하실 수 있다면, 즉 예수께 사람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으시다면, 예수님은 단순히 사람이 아니시고 하나님이심이 증명되는 것이다.
24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들을 용서하는 권능을 가진 줄을 너희가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마 비 병 환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네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가 즉시 그들 앞에서 일어나 자기가 누웠던 것을 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떠나가니 26 그들이 모두 놀라 하나님께 영 광을 돌리며 두려움에 차서 이르되, 우리가 오늘 이상한 일들을 보았다, 하니라.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 쉬운 말은 아니지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말이다. 그것은 사람이 감히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일어나 걸어가라”는 덜 어려운 말보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더 어려운 말을 하셨다. 그것은 자신에게 죄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인격이시지만, 사람이신 그가 참된 신성을 가지신 분이시며 신적 사역을 하셨다.
27 ¶ 이 일들 뒤에 그분께서 나아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금 받는 곳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일어나 그분을 따르니라.
29 레위가 그분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푸니 세리들과 또 그들과 함께 앉은 다른 사람들의 큰 무리가 거기 있더라. 30 그런데 그들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대며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하매
31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온전한 자들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으나 병든 자들에게는 필요하니 32 나는 의로운 자들을 부르러 오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신 것은 전도적 관심과 사랑의 차원이었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께서 레위가 베푼 큰 잔치에 죄인들과 함께 앉으신 것도 전도적 관심과 사랑에서이었다. 전도를 위해서는, 우리가 그 어떤 죄인과도 만나야 하고 함께 음식을 먹기도 해야 한다. 전도적 차원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여러 가지 죄악에 빠져 있는 자들과 만나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사명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는 일이며, 신약 교회는 그의 사명을 이어받아야 한다. 오늘날 교회의 사명은 영혼 구원의 전도이다. 우리는 죄인 한 사람을 외면하지 말고 그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힘과 물질을 다 사용해야 한다. 교회는 이 일을 완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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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가 높아지면 자기 안에 사나운 개가 날뛴다TTimes=신수정 KT 부사장(엔터프라이즈부문장)
얼마 전 어떤 분과 대화하는데 이런 말을 한다. "A사의 B는 과거 같은 업계의 같은 팀장이어서 저와 친했습니다. 자주 대화도 하고 운동도 했죠. 그런데 그분이 맡은 사업으로 계열사 사장이 되고 IPO를 하고 큰돈을 만지고 유명해지게 되더니 저와 만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레벨이 달라졌다는 것이죠. 높아지면 다들 변하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높아지면 사람은 변할까? 뇌과학에 의하면 '변한다'가 맞다. ‘승자의 뇌’라는 책을 쓴 뇌신경 심리학자 이안 로버트슨은 이렇게 말한다.
"성공하면 사람이 변한다고들 하는데 맞는 말이다. 권력을 잡게 되면 호르몬을 분출시키고 이것이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 분출을 촉진해 보상 네트워크를 움직인다. 그래서 사람을 더 과감하고, 모든 일에 긍정적이며, 심한 스트레스를 견디게 한다. 또한, 권력은 코카인과 같은 작용을 한다. 중독된다는 얘기다.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지 않고 오만하게 만든다. 권력은 시야를 좁게 만든다. 권력은 다른 사람의 시각에서 나를 바라보기 어렵게 만든다. 권력자의 자아는 개와 같다."
권력이 많아지면 기본적으로 오만하게 변한다.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자신을 타인과 구별한다. 급이 안되는 사람들을 만나려 하지 않는다. 물론, 점점 바빠지기에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을 만날 여유도 없다.
그러므로 높은 위치에 오르는데도 겸손과 공감을 유지할 수 있는 분들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뇌의 자동적 반응을 극복한 사람이니 정말 인격자라고 할 수 있다. 산속에 홀로 살며 득도하는 것보다 세상 속에 뒹굴고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겸손하기가 수천 배 더 어렵다.
진정한 승자는 자신의 위치가 아무리 대단하다 하더라도 이러한 것을 인식한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자신 안에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사나운 개가 날뛴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한다. 이를 길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의 오만함을 다스린다.
당신이 리더이고 높은 위치에 있다면, 자아에 도취되어 살 것인가? 자아를 길들이며 살 것인가? 이 또한 자신의 선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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