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4복음서 연구

마가복음 연구

by 은총가득 2021. 4. 12.

마가복음 연구

 

Ⅰ. 서 론

 

A. 문제제기및 목적

역사비평학의 도래이후 마가복음은 방대한 사도적 전승을 기록된 형식을 축소한 최초의 복음서로 평가되었고 마가 우선론에 한 설득력 있는 해명을 주었다. 그래서 마가복음은 한 전승과정의 종결이며 복음서 저술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런데 마가 이전에 예수 전승은 약 40년에 걸친 초기 교회 공동체들의 다양한 양식 즉 설교, 교리문답과 예배의식등을 통해 구전으로 전승되었다. 그러나 최초의 복음서 저자인 마가는 예수의 공생애와 저자의 기록 사이에 전승되어 온 수많은 자료들을 모아 집필함으로서 복음서라는 문학 장르를 만들었다.


이러한 창작 과정에서 마가는 저자가 갖는 한계를 직시하면서 자신의 공동체에 옳바른 예수관을 전하려고 하였고, 그는 아주 한정된 틀속에서만 그리고 전해진 전통들의 틀에 맞게 전승을 편집한 보수적인 편집자이었다. 그래서 마가의 일차적인 의도는 예수에 관한 전승들을 전하려는데 있다. 그의 과제는 전승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가받은 전승을 변화시킴없이 이 전승들을 복음서라는 하나의 틀속에 엮어 넣어 자신의 신학을 우려 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마가복음서를 연구할 때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들을 도외시 한다. 이 문제들은 복음서의 본질에 관계되며 무엇보다도 전승들이 격언의 수집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통일된 문학 양식으로서 복음서를 집필한 저자의 의도와 관계되고 있다.


그러므로 복음서를 집필하게 된 저자의 원초적 동기와 의도가 무엇이었는가 하는 문제와 저자가 구전 전승자료를 어떠한 구조적인 틀속에 어떤 방법으로 선택하고 결합하였는가 하는 두 문제를 푸는 것이 마가복음을 이해하는 중심적인 주제로 대두된다. 그렇다면 저자의 집필 의도와 마가복음의 구조는 무엇일까? 이것이 본 논문이 제기하는 문제이다.
사실 초대 교회의 예수 이해, 선교활동, 그리고 삶의 역사적 정황등이 마가복음의 전구조속에 반영되어 있다. 마가복음의 중심 인물이 나사렛 예수이므로 예수이해는 마가복음의 중심 문제이다. 그래서 예수의 문제를 푸는 것은 마가복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예수 문제가 저자 마가의 집필 동기와 의도가 되며 마가복음의 구성방법을 결정시켜준 주제이다.


따라서 필자는 고전 15:3-5에 나오는 최초의 신앙고백 형식이 마가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모티브라고 보면서 무엇보다 마가의 중심이 예수 이해에 있다고 본다. 이러한 저자 마가의 신학을 밝히기 위한 전제는 마가복음의 이야기(Narrative)에 나타난 구조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가복음에서 예수 이해는 단편적인 주제와 칭호로 전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로 전개되고 있으며 이야기 자체가 마가의 기독론이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마가는 무엇보다 그의 공동체에 역사적 예수의 참된 모습을 전함으로 예수는 누구인가를 알리려고 한다.


그래서 본 연구는 마가복음에 나타난 저자의 신학의 중심이 예수 이해에 있다고 보고 이를 전개한 마가의 방식이 어떤 구조속에서 전개되고 있는가를 밝힘으로서 마가의 신학을 찾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다면 마가는 어떻게 예수를 이해시키려고 했는가? 지금까지의 단편적인 예수 이해와는 달리 마가는 기독론을 이야기(Narrative)로 전개시키고 있다. 이러한 마가의 예수 이야기가 마가의 신학적 동기에 따라 배열되고 구조화되어 있는데 필자는 그 구성 방식이 키아즘 구조로 되어 있음을 밝히려고 한다.


그러므로 본 논문은 마가복음의 이야기(Narrative)의 구조 분석을 통해 마가복음이 키아즘 구조로 구성되어 있음을 밝히고 이 구조를 통해 기독론을 전개시키려고 한 것이 마가의 신학이라고 밝히려한다. 그래서 이 키아즘 구조속에 나타난 고난받는 메시야 이야기로서 마가의 예수 이해는 마가 공동체를 위한 삶의 모델이었음을 밝힘으로서 이야기(Narrative)가 청중들에게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의 빛에서 그들 자신에 관한 판단을 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고찰하려고 한다.


이러한 필자의 연구 결과는 이야기(Narrative) 기독론으로서 마가복음 이해가 지금까지 마가의 기독론을 이해했던 단순한 메시야 칭호의 수집 혹은 추상적인 기독론이 결코할 수 없는 한계를 극복시켜준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래서 본 연구는 예수의 정체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백부장의 판단(15:39)이 마가의 독자들에게 자신의 판단이 되도록 하듯이 오늘날의 청중들에게도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한다.

 

Ⅱ. 마가복음 연구사

 

A. 초대교회에서 편집비평

초대교회에서 19세기까지 소홀히 다루어진 마가복음은 가장 주목받는 복음서가 되었다. 세 복음서의 문학적 관계를 연구함으로 이루어진 복음서 연구에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은 역사적 예수에 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홀쯔만의 "두 문서가설"로 인해 공관복음서 문제는 마가우위설로해결되었다. 그 결과 마가복음이 예수의 생애에 일어난 연속적인 사건으로 인식되어 역사적 예수의 생애에 관한 기사는 마가복음의 순서를 따르게 되었다. 양식비평과 편집비평의 등장으로 전승의 수집가와 그리고 신학자로 보게됨으로서 마가 이해의 새로운 시도가 있었다. 이와같이 마가복음이 이해된 역사적 개관을 살펴보자.

 

1. 초대교회에서 홀츠만의 마가가설

a.초대교회이후 어거스틴
마가복음의 역사는 집필이래 소홀히 취급된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의 분명한 사실은 이 복음서가 처음부터 권위있는 저술로 인정되었다는 점이다. 마가복음은 베드로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파이아스의 언급으로 "베드로의 비망록"이라 불린다. 실제로 초대교회 전승은 마가복음서의 저자를 베드로의 도역자( )고 베드로와의 관련성을 주장한다.그렇지만 초대교회에서 마가복음이 사복음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마태의 빛에서 이해됨으로 마가는 마태의 축소판으로 간주되었다.


어거스틴은 [공관복음문제]에 관하여 "마가는 마태를 추종하여 그의 복음서를 축소한 자이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은 구약사상과의 밀접성때문에 최초의 복음서이며 사도의 이름을 갖고 있었기에 마가는 마태를 사본하여 축소했다"고 장하였다. 이와같이 어거스틴은 마태 우선설을 주장한다. 그렇지만 어거스틴은 마가가 목격자의 개인적인 회상을 기록했다는 교부들의 증언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마가가 베드로의 증언이었다면 마태를 사본하고 축소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실제로 병행기사에서 마가가 마태보다 더 길고 상세한 묘사가 있음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막4:35-41과 마8:23-27비교) 그러므로 초대교회에서 홀즈만이 "마가가설"을 세우기 까지 에반스(C. F. Evans)가 표현했듯이 "마가복음은 살아있었지만 음지에서 살았다"는 현이 마가복음의 연구사를 대변해 주는 말일것이다.

 

b.라이마루스에서 홀쯔만
마가복음의 최초의 문서 복음이며 역사적 예수 생애의 사실적 기록이라는 두가지 전제를 바탕으로 한 "마가가설"이 고착되기까지에는 마가복음이 "고난의 복음"이듯이 험난한 길을 걸어 왔다.
마가복음서의 현대적 연구는 계몽주의의 합리주의 영향아래에서 성서 해석에 있어서 역사-비평 방법의 발전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마가에 대해 철저히 문서비평을 적용시키게 하였다. 라이마루스는 예수 생애의 집필문제에 관해 말한 최초의 인물로 슈바이처는 "라이마루스 이전에 아무도 예수 생애의 역사적 개념을 만들려고 시도한 적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라이마루스의 마가복음서에 대한 태도는 완전히 부정적인 것으로 마가복음이 역사적으로 무가치한 기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라이마루스이후 레싱(G. E. Lessing)은 1778년 저술에서 예수가 죽은후 곧 사도들의 구전에 기초한 "익명의 복음서" 가설을 주장하였는데 이 가설은 자료분석과 사복음서 이전에 기독교의 존재를 증명한 원-정경적 복음 주장으로 그리스바하의 공관복음가설에서 전개되었다. 바르트는 원-복음가설이 "성서이전의 증언의 힘을 가진 역사적 진리를 증거할 필요가 있었다는 전제이었다"고 한다. 레싱이후 라흐만(K. Lachmann)은 1835년 논문에서 두문서가설의 기초를 준비했으며 공관복음서의 병행적인 관계성에 초점을 두어 세복음서가 "원복음"에서 나왔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바이쎄(C. H. Weisse)는 파피아스가 언급한 예수의 어록인 "logia수집물"이 있었다는 슐라이에르마허의 입장을 받아들여 마가의 원본성을 이끌어 내었고 마가와 로기아 Q의 두 자료설의 인정하였다. 이러한 두 자료설을 근간으로 마가복음의 중요성은 홀쯔만에 의한 마가 가설로 절정에 이른다.


결론적으로 홀쯔만이후 마가복음은 음지에서 빛의 세계로 솟아오른 태양이었고 마가복음서와 저자에 관한 관심은 극적인 시작을 알리게 되었다. 라이마루스에서 홀쯔만까지 마가복음이 주목받기까지 14C동안 어거스틴의 "마태의 축소판으로서 마가"이론은 정설로 받아들여졌지만 교부들의 전승과 본문 자체의 비평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사도적 역사의 배후를 연구함으로서 깨어지게 되었다.

 

c.홀쯔만의 마가가설
홀쯔만의 [공관복음서](1863)의 출판으로 인해 "예수전 연구 시대"로 접어들었다. 홀쯔만은 바이스의 마가와 로기아가 근본문서라는 가설과 레싱의 익명의 "원복음"을 원 - 마가(Ur- Markus)라 하여 "마가가설"을 세웠다. 이는 마가복음에 역사적 신뢰성을 부여했고 그 결과 마가 전승의 구조가 예수전 집필자들에게 예수 생애의 재구성을 위한 근본 자료가 되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이 마태나 누가보다 더 역사적이고 확실성이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다른 한편 홀쯔만 재구성은 복음서에 있는 예수에 관한 심리학적, 영적인 연구를 촉발시킴으로서 자유주의 신학의 날개를 펴게 하였다. 물론 이 "예수전"운동은 마가복음서가 무시된 이후에 복음서에 대한 새로운 연구의 결과로 마가복음을 최고의 위치로 올려놓는데 공헌하였다.


그렇지만 예수전 학파의 목표는 순수한 인간 예수를 묘사하는데 있었다. 이러한 예수의 인간성 연구는 예수와 하나님의 일치성에 강조를 둔 요한의 예수가 칼케톤의 예수라고 못박음으로서 예수를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단절하는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이 주장은 하르낙의 신학에서 절정에 이르렀는데 그는 "예수가 선포한 것처럼 복음은 유일하신 아버지와 관계이지 아들과 관계가 없다"고 선언하게 된다.

 

2. 마가 가설에 관한 비판

 

a.켈러( M. K hler)의 마가복음 이해
켈러( M. K hler)의 저서 [소위 역사적 예수와 역사적, 성서적 그리스도](1896)는 마가가설을 공격하는 전위대였다. 켈러는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주의를 비판하여 그러한 시도가 성서적으로 그리스도의 초월적인 모습을 잘못 그리게 된다고 반박하였다. 또한 그는 살아계신 주는 사도적 선포의 그리스도라고 못박고 당시의 역사 편찬적인 방법과 신학적 전제에 대하여 반대하였다.


그의 마가 이해에서 켈러의 가장 중요한 확신은 복음서가 예수 생애의 전기적 연대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가복음에 관한 근본적인 시야를 "확대된 서론으로된 수난기사"라는 말로 표현하여 마가복음이 구세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일깨우고 초기 기독교 설교의 내용을 포함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와같은 켈러에 의한 논쟁의 결과 마가복음이 해석되지 않은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는 마가가설에 대해 심각한 반론이 제기되었다. 그의 영향은 곧 브레데(W. Wrede)에 이어지게 되었고 마가복음에 대한 또한번의 새로운 평가가 진행된다. 다른 한편 켈러의 마가복음 이해는 후기-불트만 학자들의 역사적 예수 탐구를 위한 선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b.브레데의 신학적 이해와 그 비판


브레데는 마가복음이 역사적 예수 생애가 연속적 구조로 되어 있다는 마가 가설을 완전히 뒤집었다. 그는 마가복음서가 역사적이라기 보다는 더욱 신학적인 성격을 가졌다고 주장함으로 마가복음도 역사적 예수를 보여주지 못하는 단순한 전승의 수집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예수가 자신을 결코 메시야로서 생각했던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는 그를 메시야라고 인식하였다는 것이 그의 전제이었다.


그는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 있는 동안에도 예수의 참된 본성을 깨닫는데 실패했던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 마가복음서는 바로 이 수수께끼를 설명하기 위한 시도로서 집필되었다. 그래서 그는 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가의 신학적 동기로서 메시야 비밀의 모티브를 이용한다.


마가복음안에 있는 예수의 기적에 대한 침묵명령은 예수의 메시야성에 관한 신앙을 설명하기 위한 저자의 신학적 의도이며, 또한 역사적이고 교리적인 요소들이 결합된 것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은폐하려고한 마가의 의도였다. 왜냐하면 예수는 철저하게 귀신들에게 비밀을 명령하고 그의 생애 동안 제자들에게 비밀 교훈을 하였지만 제자들은 예수를 이해하는데 실패했기 떄문이다.


이러한 브레데의 메시야 비밀로서의 마가복음에 대한 신학적 이해는 예수 생애에 관한 메시야적 전승과 비메시야적 전승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브레데의 마가복음에서의 신학적 경향의 발견은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비메시야적 전승의 존재 가설은 역사적 증거가 없다. 오히려 그 전승은 부활이후의 전승이기에 비메시야적 전승일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메시야 비밀론에 관한 설명들은 제고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지상의 예수는 결코 부활의 빛에서만 비로소 조명받는 것이 아니다. 만약 예수의 사역이 메시야적이지 않았다면 어떻게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신앙이 메시야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에로 이끌 수 있었겠는가? 부활신앙은 예수에 관한 전승을 변화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가 침묵을 명령한 이유는 그의 메시야성이 백성들의 기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개념때문이었다. 예정한 메시야는 자신의 정체가 폭로되어서도 안되고 하나님꼐서 메시야로 취임시킬 때까지 숨겨져 있는 성격을 갖고 있다(시2:7; 110:1). 예수는 침묵을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과 빌라도앞의 심문에서 메시야라고 단정적인 선언을 하였고 십자가 사건을 통해 숨겨진 사실이 폭로되었다.
이와같이 예수는 처음부터 메시야적 권위를 갖고 사역을 했으며 그래서 자의식으로서 메시야에 관한 새로운 해석으로 자신을 인자라고 칭했던 것이다.

 

3.불트만의 양식비평

 

마가복음이 더 이상 역사적 예수에 관한 정보의 근원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면 마가복음에 포함된 정보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의 문제에 양식 비평가들은 관심을 기울였다.
먼저 K.L.슈미트는 마가의 독립적 이야기들을 연결시킨 마가의 연결 구조를 탐구하여 마가복음이 역사적 회상과 시간적 지리적 언급과는 관계가 없다고 하였다. 그는 "마가복음에는 전기적 의미에서 예수의 생애가 없고 연대기적 성격도 없으며 오직 구조안에 삽입된 개별단화들 뿐"이라고 결론 지었다. 그러므로 각 단화들의 문학적 신학적 맥락은 초대교회의 역사적 "삶의 정황"과 관계된다.


이러한 마가 가설의 파괴는 첫째 마가의 역할이 이야기와 말씀을 수집하는 일로 제한 되었고, 둘째 베드로 목격의 증언으로서 마가 이해는 빛을 잃고 초대 교회의 프리즘을 통해 마가복음이 이해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불트만의 입장은 최고의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근거가 케리그마에서 살아있는 "부활의 그리스도"임으로 하나님의 종말론적 예언자로서 예수의 출현인 "그리스도-사건"을 제외하고는 어떤 신학적 중요성도 없다고 하였다. 그는 오직 단순한 "사실(das Dass)"만이 있으므로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 확실성에 의존할 수 없고 교회의 선포에서 그리스도와의 실존적 만남 속에 있다. 오직 예수와 케리크마 사이의 "본질적 관계성"만 예수의 실존을 보증하는 연속이다.


그러나 케리그마가 역사적 예수를 전제한다는 것은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사적 예수를 신화화하였다. 그래서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사이에는 어떤 연속성도 없다. 그렇지만 역사적 예수가 없이는 케리그마도 없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T.W 맨슨은 "불트만은 눈물없는 기독교를 우리에게서 얻으려하고 그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기독교 없는 눈물"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래서 각 사건들은 양식에 따라 범주화되었고 초대 교회의 삶으로 소급되어 교회의 활동과 관계된 것으로 보여졌다. 이와함께 예수 - 전승의 발전의 역동적 개념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마가복음서에 관계되는 한 복음서의 골격은 해결되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마가의 이야기들은 신학적으로 혹은 역사적으로 해석되던지 간에 더 이상 연속적인 사건으로 이해되지 않게 되었고 서로 분리된 독립구절들로 연구되었다.

 

4.막센의 편집비평

 

복음서의 집필동기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됨으로서 마가에 관한 논의는 다시한번 회귀하여 복음서가 전체로서 보여진다. 마가복음서의 통일성은 무엇에 근거하고 통일성이 어떻게 표현되어지는가? 이러한 문제제기로 인해 복음사가는 전승 수집가로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가지 작품을 창작했던 복음서 저자로서 인식되었다. 그결과 전승 배열에서의 저자의 역할이 강조되므로 편집비평이 시작되었다.
이 편집사 운동은 브레데의 메시야 비밀이 마가의 집필 동기가 된 마가의 신학을 탐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까지 소급되어진다. 다른 한편으로 양식비평이 마가 이전의 구전 자료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배제했던 마가 공동체의 자료로 간주되어지는 신학적 요소에 관심을 기울였다.


마가연구는 마르크센의 저서 "Der Evangelist Markus(1956)"에서 근본을 뒤흔드는 제안으로 인해 양식비평에서 벗어나 편집비평으로 이동되었다. 양식비평연구는 복음서를 형성시킨 마가의 문학적 구조와 개별 단화의 유형에 관심이 있었기에 마가의 분류와 분석작업을 하였다. 그렇지만 개별적인 단화들이 느슨하게 결합되어 독립군으로 존재한다면 복음사가의 작품은 창조적인 저자라기 보다는 수집가에 지나지 않는다.


보른캄은 "복음서 저자는 단순히 전승의 수집가와 전수자가 아니라 전승의 해석자이다"라고 편집비평의 의미를 함축하였다. 저자의 역할이 강조된 편집비평의 의도는 호스킨스와 데이비의 명제인 "복음사가는 신학자로서가 아니라 역사가로서 집필했다"는 주장을 뒤집어서 복음서 저자를 신학자로 바꾸려는 것이다.
막센은 복음서의 "제3의 삶의 정황" 즉 복음사가 자신의 작품에 제공된 해석적인 맥락의 정황을 탐구하였다. 막센은 복음사가 복음이라는 문학 작품을 집필케 한 역사적 신학적 배경을 연구하였다. 그는 근본적으로 다른 자료가 복음서에 통일성 있게 들어온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하였다.

 

5. 소결론

결론적으로 "마태의 축소판으로서의 마가"로 초대교회이래 무시되어온 마가 복음은 마가가설로 최고의 위치로 옮겨졌다. 그후 마가가설은 예수의 전기를 집필하려는 자유주의적 시도의 주요한 지탱자이었다. 그러나 양식비평의 대두로 말미암아 마가복음은 전기적 원류로서의 성격을 잃게 되고 개별이야기와 말씀들의 단위로 연구되었다. 더욱 최근에 마가복음은 통일성 있는 작품으로서 저자의 전승배열, 편집에 관심을 둔 편집비평의 신학적 노력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요약하면 역사적 사건들의 기록에 기초한 책으로서 마가복음은 수많은 기복을 겪었다. 첫째로 자유주의적 평가는 인간예수의 순수한 기독론과 모습에 중대한 가치를 부여했고 둘째로 양식비평은 교훈 복적으로 소중했던 교회전승들의 보고로 보여졌고 세째로 편집비평의 손에서 저장의 의도를 나타내기 위한 창조적 신학자의 역사 집필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증언의 문제에서 마가의 가치가 어떤 것인가를 묻는 것이 최대의 이슈로 남게 되었다.

 

B. 최 근 동 향

편집비평은 각 저자의 의도와 신학적 관점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게 하였다. 저자가 집필한 공동체의 상황은 무엇이며 저자가 구성한 방식에 의해 무엇이 전달되며 저자는 그의 복음서를 편집한 전승들로 부터 물려받았던 자료들을 배열하기 위해 무슨 예수상을 이용하는가? 이러한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은 저자가 그의 전승자료를 이용한 방법을 끊임없이 탐구함으로 가능해진다.


첫번째로 마가복음을 비교할 문서가 없기 때문에 마가가 의존한 초기 전승들에 관한 양식비평적 분석을 사용해야 한다. 두번째로 본문에 대한 문학적 분석방법에 의존하여 해야하고 세번째로 구조분석에 의존하여 전체로서 마가복음의 구성에 나타나는 마가의 신학적 관점을 이끌어 내어야 한다. 필자는 이러한 세접근법을 종합적으로 사용함으로서 마가 설화의 기독론의 문제를 탐구할 것이다.


신학자들은 마가설화에 비밀요소와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침묵명령이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은 부인하지 않는다. 브레데 이후 "메시야 비밀"은 마가기독론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메시야 비밀의 모티브가 마가복음서안에 있는 유일한 기독론적 관점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페쉬는 종말론적 예언자, 왕국의 전수자, 궁극적 의미의 인자로서 예수의 표상을 주장한다.
문학적 관점에서 볼때 비밀의 모티브는 마가 설화의 문학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저자는 청중과 비밀을 공유해야 한다. 그러므로 비밀은 마가의 신학적인 구성에서 중심적 특징으로서가 아니라 [저자 - 청중]의 설화표상의 역동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1.편집사적 접근

H . 코에스터(Koester)는 "복음사가가 공동체에 속해 있는 사람들에 의해 수용되고 공동체의 자료속에 함축되어 있는 예수이해에 반대하여 전승들을 수집했다"고 페쉬의 그릇된 기독론에 대한 반론으로서 마가의 집필동기를 주장하였다. 그의 이 가설은 신적 능력이 충만한 기적 - 행위자로서 예수 이해를 반대하는 것으로 마가복음안에 있는 기적 전승들에 촛점을 모은다.


한편 마가복음에서 제자들은 그릇된 기독론적 관점을 가진 대표자로 나타난다. 제자들은 고난받은 인자로서 예수를 결코 바라보지 못한다. 이러한 제자들의 몰이해는 특히 소경을 고친 두 이야기(8:22-26; 10:46-52)에 구조화되어 있다. 그것은 예수로 부터 직접적으로 제자의 길이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난의 길이라는 교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각 수난 예고는 예수가 그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8:31-33 , 9:30-32 , 10:32:34) 그러므로 마가의 구조에서 소경치유 이야기들은 예수의 적대자로 등장한 제자들과 아이러니칼한 대조를 이룬다.
그러므로 편집비평은 양식비평의 작업에 의존하여 원-마가 단계를 자료로 받아들이고 마가가 수집하고 변화시켰던 방법을 연구하였다.


먼저 마가가 단화를 결합한 연결층들을 마가의 언어적 특성들을 찾기 위해 조사한다. 과 는 조동사로 이용되었다. 둘째로 마가의 모티브 혹은 주제들을 조사한다.


편집적인 방법으로 볼 때 마가는 종종 간결한 설명 구절들을 삽입한다. 이 구절들은 a (for)라는 용어로 도입되는데 그 예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16에서 "for they were fisherman"는 사람에게 그물을 던진다는 것이 희랍어에서는 일상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에 부가적 설명없이는 로마독자들에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7:3 이하에서 발견되는 잔과 주발에 관하여 유대인의 손씻는 습관에 관한 부가적 설명이 있다. 유대 풍습에 대한 마가의 설명을 삽입한다.
㉢11:14은 "for it was not the season for figs"라는 간결한 절을 첨가한다. 여기에서는 문자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비유적 의도를 갖고 있다.
㉣14:31 마가는 부가적 정보를 주기위해 단화에 간결한 결론적인 구절을 덧붙인다. 베드로의 부인에 대한 예언의 말미에 그는 예수를 부인하지 않고 "and they all said the same"이라는 사실을 베드로 고백 후에 첨가한다.
㉤14:50에서 체포기사 말미에 그는 "and they all forsook him and fled"를 첨가한다.

 

2.사회학적 접근법

a.키이(H.C.Kee)
마가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법은 다양한 예수이해의 문제에 대해 "정통과 이단"이라는 도식으로 구분하지 않고 접근한다. 대표적인 학자인 H.C.Kee는 마가를 묵시적인 역사라고 봄으로서 카리스마적인 기적 행위와 비밀/고난의 모티브를 함께 묶고 마가에 접근한다. 즉 그의 관심은 마가복음 집필 배후에 있는 의도를 발견하려는 것 이었다.
마가에서 제자들은 기독교 청중들을 대표한다. 그런데 마가에 있는 예수상은 고도로 양식화되어 있는데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순회교사로 나타나며 하나님의 뜻에 대한 해석은 예수의 기적에서 나타난다. 이는 동시에 청중은 악에 대한 참된 승리가 고난 받는 것임을 배운다


마가복음에서 교회론과 기독론은 분리되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는 유대 율법에서의 철저한 해방과 이방인에 대한 개방으로 새 공동체의 설립자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가는 예수의 활동을 제자들의 것과 구별시키지 않는다. 제자들은 예수같이 카리스마적 순회교사로서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기적과 비밀 그리고 고난등이 마가 공동체의 특징들이 되며 그 공동체는 유대 혁명 기간을 포함한 혼란의 시대 가운데 있는 묵시적 종파이다. 그래서 귀이는 마가가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이전 수년전에 남부 시리아에 있었던 묵시적 공동체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마가의 장르와 목적에 대한 해석은 메시야 비밀에 대한 열쇠로서 고난받는 인자에 촛점을 맞추고 구원의 핵심으로서 십자가를 이해하는 기독론과는 아주 다르다. 반면에 예수는 제자직의 모델로 나타났다. 카리스마적 능력으로 그의 제자들은 악에 대해 승리한다. 그들은 고난과 낮아짐이 세상의 권세를 잡으려는 것이 아님을 알고 예수가 하나님의 메시야로서 재림할 것을 안다. 따라서 마가는 유대 묵시 문학처럼 신실하게 남은 자들에게 희망을 준다. 왜냐하면 마가 복음에 있는 공동체는 나사렛 예수가 이 시대의 역사를 종말로 끌고 가는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b.사회학적 방법에 대한 비판
악테마이어는 사회학적 접근법이 너무 포괄적이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한다. 사회학적 접근은 마가의 예수이해로 부터 반 기독론적인 예수상들을 구별하지 않으므로 p.J. Actemeier는 "우리가 마가의 목적과 그의 기독론에 관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면 마가자료의 편집에 대한 증거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고난의 제자도는 분명히 마가복음서의 중심적인 모티브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관심은 수난 예고들과 그 예고를 뒤따르는 "누구든지"라는 예수 말씀에서도 명백하다.(8:34-38) "누구든지"라는 말은 저자가 다른 어떤 기독론적 칭호들 보다 인자 칭호를 더 좋아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가는 이 칭호를 묵시적인 함축때문이 아니라 수난과의 연관성때문에 좋아한다.


Kee의 접근법에서 강조된 묵시적 특징은 마가의 예수가 제자들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령한 말씀(막13:37)이라는 사실에 기초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재림의 가까움에 대한 기대는 9:1 과 13:30에 반복적으로 나타남으로 논쟁적이다. 이것은 덷전4:13-18에서와 같이 많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죽음으로 인해 관심을 일으킨 문제였다. 그러므로 마가는 이 말씀들을 재림에 관해 불확실한 크리스챤들을 재보증하기 위해 형식화하였다.
따라서 마가복음에서 예수의 권능의 행위들이 핵심적인 예수상을 나타내지 않는다. 마가는 항상 권세있는 교사로서 예수를 이해하는데 관심이 있다. 그래서 마가는 2:27-28에 있는 안식일에 관한 말씀에서 예수의 말씀들이 율법보다 더 큰 권위를 갖고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마가의 기적에서 치유받은 자들은 신앙을 갖는 대신에 오히려 예수의 적대자들이 된다. 마가는 1:21-28(21-22,28절)에서 예수의 교훈이 그의 기적에서 나타났던 것과 동일한 권세임을 의도하려고 편집한다.


마가복음은 예수에 의한 여러 교훈군들을 제시한다. 그 교훈은4:1-34, 7:1-23, 9:30-50, 10:17-31,11:27-12:8, 13:1-37등이다. 막 8:38은 인자 칭호를 예수의 가르침에 적용시키고 그 가르침은 예수가 수난전에 그의 적대자들과 부딪히게 한다.(11:27-12:44)
악테마이어는 마가 공동체안에서 순환되고 있던 예수 전승들이 기적 행위자로서 예수를 강조했다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인자로서 마가의 예수 표상은 기적 행위자로서 예수 이미지를 수정한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예수의 권세는 기적 행위뿐만 아니라 교훈에서도 명백해진다는 것이 마가의 논점이다.
그러므로 교사로서 예수 이미지는 Kee의 예수상과 다르다. Kee는 예수를 정착된 사회적 경제적 삶의 경계를 초월하여 제자들을 묵시적 종파 - 카리스마적 예언자들의 공동체의 급진적 제자도- 에로 부르신 카리스마적인 순회하는 교사로서 예수상을 그린다.

 

4. 문학적,수사학적 접근

a.니켈스부르그의 문학적 접근
문학적 법근은 마가 신학에 대한 단서로서 전승과 편집에 덜 관심하는 접근법이다. 이 접근법은 마가의 중요한 구성 방법을 찾아 전체로서 마가의 의도를 결성하는데 열쇠를 제공할 것이다. 비록 복음 장르에 대한 선례들을 찾는 것이 전체로서 마가복음의 구조에 빛을 던져 주는 것은 아니지만 마가 설화의 여러 부분들과 비슷한 문학 양식을 찾는 것은 가능할 수도 있다.


물론 C.H.Talbert는 복음장르의 선례를 찾으려고 시도했으나 그 역시 장르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었다. 한편 G.Nickelsburg는 마가복음11-15장을 해석함에 있어서 이 수난사 배후에 헬레니즘적 유다이즘안에 있는 전형적인 박해이야기의 양식들이 발견된다해도 많은 문제점들이 발생한다고 한다. 이는 창 37장이하,Ahikar, 단3장,6장, Susanna,솔로몬 지혜서 2-5장, 마카비 2서 7장, 마카비3서 등에 기초하여 장르의 유형론 구성한다.


이 패턴의 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1.도입(Introduction):주역들이 소개되고 갈등의 상황이 설정된다. 마가복음 1-10장이 도입으로 역할한다.
2.자극(provocation):주인공에 의한 특별한 행위는 대적자들에게 적개심을 불러 일으킨다. 11:15-18에서의 성전 정화는 최초의 적대 행위이다. 14:3-9의 베다니에서의 기름부음도 이에 속한다.
3.공모(conspiracy):자극에 대한 반응은 주인공을 죽이려는 시도로 나타난다. 최초의 사건인 성전 정화는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를 죽일 모의를 하게 한다.(11:18,12:12-13,14:1-12) 또한 베다니사건은 유다에게 음모에 참여케 한다.(14:10-11)
4.결심(Decision):주인공은 하나님께 신실한 자로 남을 것인지 혹은 압력에 굴복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대제사장앞에서의 둘사이의 대조는 주인공의 결심을 강조하는데 예수의 메시야적 주장은 그의 운명을 결정한다. 15:29-32의 십자가위에서의 조롱과 예수의 말씀은 인간보다 하나님을 따르려는 예수의 결심에 대한 최후의 결심이다.
5.신뢰(thrust):주인공의 결심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기인한다.
6.순종(Obedience):하나님에 대한 순종은 의인의 운명을 결정한다. 마가는 믿음과 순종을 독립적으로 주제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예수의 결심기사에 함축하고 있다.
7.고소(Accusation):주인공에 대한 고소는 진리일 수도 있고, 마가복음에서와 같이 진리의 왜곡일 수도 있다.
8.재판(Trial):주인공에 대한 형식적인 소송 절차가 있다.
9.유죄선고(Condemnation):소송 절차는 주인공에 대한 사형선고에로 이끈다. 마가복음은 2 회의 고소,재판,선고가 반복된다. 대제사장 앞에서의 선고는 14:62에서 참 메시야 주장을 포함하고 빌라도 앞에서의 정치적 재판은 진리의 왜곡일 뿐이며 "네말이 옳도다"라고 예수는 응답한다.
10.항의(protest):무죄에 대한 공식적인 항의는 마가에 빠져 있지만 재판 절차는 그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11.기도(prayer):주인공은 신적인 복수의 기도형식으로 무죄를 항의한다. 14:62에 있는 심판의 말씀은 신적 복수에 대한 요청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15:34의 십자가상의 말씀은 도움에 대한 기도로 이해될 수 있다.
12.도움(Assistance):무죄한 주인공을 도우려는 시도가 있는데 예수를 도우려는 시도는 15:9-14에 나타난다. 제자들의 도망은 예수를 도우려는 시도와 날카롭게 대조된다.
13.시련(Ordeal):주인공의 주장에 대한 진실은 주인공이 겪어야 하는 시련에서 증명된다. 마가 수난사는 메시야적 시련으로 나타나있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 시련의 일부분의 역할을 수행한다.
14.반작용(Reactions):주인공의 행동에 대한 반작용이 수난사에서 강조된다. 대제사장은 14:63에서 그의 옷을 찢고 15:5에서 빌라도는 예수의 침묵에 기이히 여긴다.
15.구출(Rescue):죽음의 순간에 주인공은 구출될 수 있다. 예수는 자신을 구원하도록 조롱받는다.
16.변호(Vindication):장르에서 본질적 요소들은 결국 주인공이 변호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15:39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백부장의 인식으로 소개되어 있다. 마가에서 근본적인 변호의 순간은 예수가 그를 부인했던 모든 사람에게 심판의 주로 재림할 때이다.(14:28,14:62,16:7)
17.승귀(Exaltation):세상 법정에서의 이야기는 주인공을 높은 위치로 승귀시킨다. 솔로몬 지혜서 2-5장에서 죽은 의인은 천상의 법정에서 높은 지위로 승귀된다.
18.취임(Inverstiture):승귀는 15:16-20의 왕의 취임식으로 나타난다.
19.환호(Acclamation):취임식과 환호 둘다 마가에서 아이로니칼한 면을 갖고 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는 예수를 십자가에서 왕으로 즉위케 하고(15:26) 백부장에 의해 확증된다.(15:39)
20.반응들(Reactions):의인의 승귀를 본 자들은 여러 반응을 보인다.
21.징벌(Punishment):주인공의 죽음에 책임있는 자들은 벌을 받는데 마가는 그 징벌이 재림때에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마가 이야기는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른다.


마가 수난 설화의 장르는 자극으로서 성전에서의 말씀에 주목한다. 전형적인 장르면에서 예수의 말씀은 14:58의 재판에서 거짓고소로 그리고 15:29-30에서 군종들에 의해 왜곡된다. 장르는 그러한 고소자들이 거짓이라고 분명히 하기 때문에 마가 설화를 일으켰던 상황에 대한 열쇠로서 거짓 고소를 이용한다. 막13장이 그 단서를 제공한다.
메시야라고 주장하는 자들 그리고 그들의 주장을 기적으로 증명하려는 자들은 계속 나타날 수 있다. 그들은 임박한 성전의 종말론적 파괴를 선언하고 있다. 마가의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사람들을 따르거나 유대를 도망하기를 거절해야 한다. 고난과 증거에 대한 경고는 그 거부의 결과들에 대해 언급한다. 그래서 수난사는 따르는 제자도의 모델을 제공한다. 그들은 예수의 공개적인 변호가 미래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b.'Rudolph Pesch'의 "Stichometry"구조
그는 고대 문학의 특성과 다양한 문화의 민속문학의 경향을 연구하여 이 구조에서 일종의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보았다. 그는 문학작품속의 다양한 단편들이 동일한 길이의 분량을 갖고 있는 경향을 발견한다. 달리 생각하면, 동일한 수의 줄들이 설화의 각 부분에 충실해 있다. 각 줄들을 계산함으로(이 기법은 stichometry라 불린다) 마가복음의 구조를 완성할 수 있다. 각 부분들이 조화롭다면 하나의 골격은 체크할 수 있다. 문학의 건축술이 식별될 수 있다면 저자가 그의 자료를 이해했던 방법에 대한 하나의 단서를 줄 것이다.
설화안에 신호로 변화할 수 있었던 그래서 여러 조각 사이를(예, 3:6과 7:8절 혹은 8:26과 27절) 나눌수 있다는 마가의 실마리에 근거하여 페쉬는 다음의 Stichometic outline of Mark에 이른다. 그는 여섯 부분으로 분리시킨다.
그의 골격은 다음과 같다.

 

Ⅰ.1:2-3:6 → 1:2-34; 1:35-45; 2:1-3:6
Ⅱ.3:7-6:29 → 3:7-4:34; 4:35-5:20; 5:21-6:29
Ⅲ.6:30-8:26 → 6:30-7:13; 7:14-23; 7:24-8:36
Ⅳ.8:27-10:52→ 8:27-9:29; 9:30-50; 10:1-52
Ⅴ.11:1-12:44→ 11:1-26; 11:27-12:12; 12:13-44
Ⅵ.14:1-16:8→ 14:1-52; 14:52-15:5; 15:6-16:8

 

각 부분에 있는 주요 단락들은 각 단편 조각들에 상응하는 두개의 긴구절안에 많은 구절들을 갖고 있는 세개의 더 작은 조각들 즉 긴 것(long), 짧은 것(short)과 긴 문장(long passage)로 나누어 질수 있다.

이를 달리 분석을 하면 Ⅰ,Ⅲ,Ⅴ단락들은 Ⅱ,Ⅳ,Ⅵ보다 짧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약 더 짧고 긴 부분들이 세개의 더 길게 분류하면 다음의 구조에 이른다.


더 긴 것 더 짧은 것 더 긴 것
(longer) (short) (longer)
A.1:2-6:29 → 1:2-3:35 4:1-12 4:13-6:29
B.6:30-10:52 → 6:30-8:26 8:27-9:13 9:14-10:52
C.11:1-16:8 → 11:1-12:44과 14:1-11 14:12-25, 14:26-16:8

 

다시말해 위의 A,B,C는 6등분 한것 보다 그 자체에서 더 길고 더 짧고 그리고 더 긴 구절을 포함한다. 이 배열에 의하면 "중앙"에 있는 것은 8:27-9:13이다.
마지막으로 페쉬는 마가복음이 세 부분들 더길고 더 짧고 더 긴 구문들로 분리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1:2-8:26, 8:27-30, 8:31-16:8 여기의 각 부분의 줄수는 708,10,708 줄(line)이다. 그래서 마가의 stichometric 구분은 마가복음의 중심이 건축학적으로 완전히 다른 방법들을 사용할 때 이 구분은 흥미로운 것이며 주의할 만하다. 그가 segment, 혹은 sections, 혹은 divisions를 나누는 점은 탁월하다.
그러나 하나의 문제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 모든 계산에서 13장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만약 13장이 포함되어진다면 페쉬의 형식은 무너진다. 그것은 둘중의 하나를 의미한다. 그 형식이 인위적인 것이라는 것 아니면 마가가 나머지 15장을 계획하고 집필한 후 13장을 첨가했다는 것 둘 중 하나이다. 물론 페쉬는 후자를 따른다.
틀림없이 13장은 후에 마가복음에 포함되었던 다른 종류의 자료이다. 그것은 마가복음이 완성된 후에 마가가 그의 설화에 삽입했던 묵시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마가 골격의 만족스러운 해결도 발견되어져야 한다. 아마 마가 설화에 대한 충분한 주의를 한다면 마가가 그의 설화를 형성할 때 그의 마음의 중심에 무엇을 기본으로 삼았는지 생각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단락별로 그의 복음서의 신화적 절정뿐만아니라 연대기적 절정으로 움직인다면 마가의 신화적 motifs과 problems로 중점적으로 연구하면 가능하다.

 

Ⅲ. Narrative 기독론으로서의 마가복음

마가복음은 분명히 여러 에피소드로 분류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함께 묶고 결합시킨 발전때문에 통일된 이야기인 것은 분명하다.

 

A. 마가의 Narrative 구성 방법

만약 마가복음 이전에 'gospel'(복음)으로 알려진 문학장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이야기(Narrative)의 창작 그 자체는 예수 전승들을 해석하는 새로운 방식의 시도를 의미한다.
마가는 개별 전승들을 나자렛 예수의 생애라는 전체적 해석의 통제 원리하에 배치시켰다. 마가는 전승들이 예수의 생애라는 더 광범위한 이해에 이를수 있는 설화의 골격(framework)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마가는 배열 구성 요약이라는 세 방법을 사용하여 이야기로서 마가복음을 창조한다.


첫째로 마가는 전승되어온 개별적인 이야기들을 자신의 신학에 따라 배열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마가복음에 포함되어 있는 대부분의 이야기들과 말씀들은 특별한 맥락없이 원시 기독교 공동체안에서 순환된 전승들이다. 그래서 최초의 복음서 저자인 마가는 자유롭게 그 전승들을 수집하여 배열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마가가 그 이야기를 배열한 순서에 대해서 심사숙고한다는 것은 마가복음서를 해석하는데 기본적인 전제이다.


둘째로 마가는 개별전승들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개별전승 자체를 단순히 개별적인 단위로서 보다는 긴 이야기의 일부로 역할할 수 있도록 이 개별전승들을 긴 이야기로 만들었다. 따라서 개별 이야기에 관한 세밀한 연구는 그러한 형태가 일어났던 방식을 지시해 줄 것이다. 이것은 마가가 어떻게 그의 설화들이 이해되어지도록 의도했었는가에 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세째로 마가는 간결한 요약문과 해석학적 주석들을 이용함으로 이야기를 구성한다. 마가는 그의 이야기에 대한 연속성을 제공하기 위해 "짧은 요약문과 해석학적 주석"을 삽입하였다.
한편 마가 저자에 의한 이야기 구성에 주의함으로서 저자의 의도를 찾기 위한 또 하나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마가가 초기의 예수 전승들로부터 "복음"이라는 문학 장르를 창작했던 방법을 찾는 것은 마가복음의 전체적 구조와 신학적 의미에 관하여 질문하는 것과 동일하다.

 

1.전승의 배열(Arrangement)
마가는 수집된 전승들을 배치함으로 이야기를 창조하였다. 그는 그 전승들을 상호간에 병렬시킴으로서 전승들을 해석한다. 저자 마가는 전승들을 배열시킬 때 예수 전승의 모체를 변화시킴 없이 기록하고 동시에 그의 의도에 따라 신학적으로 배치하였다. 그는 전승에 대해 자유로왔지만 전승의 참된 존경자로 충실히 보존한 자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드시 전제해야할 것은 초기의 예수전승들에 대한 마가의 태도가 보수적인 성향으로 전승등을 재기록하는 것과 같은 해석의 방식을 채택하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마가는 자신의 의도를 전승들을 자유롭게 배열하는 방식으로 말한다. 다음의 예에서는 마가가 사용한 "전승들의 병렬법"(juxtaposition of tradition)을 보여줄 것이다.
막 11:12-25에서 마가는 예수의 최후 예루살렘 방문 기간동안 성전청결 사건과 무화과 나무 저주사건이 있었다고 보도한다. 마가는 성전정화 기사를 무화과 나무 저주의 이야기와 결합시켰다. 여기에는 두 이야기들을 서로 연관된 것으로 이해되어지게 할려는 저자의 숨은 의도가 있다. 그런데 무화과 나무 저주 기사안에서 몇가지 문제들이 발생한다.


첫째로 예수가 무화과 나무에서 찾았던 열매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과 둘째로 13절에서 무화과 나무의 때가 아니었다는 진술이 문제된다. 그러므로 예수가 나무에 저주했다는 것은 더욱 불합리한 것이다. 왜 때가 되지 않아 열매 맺지 않은 나무에 저주했을까?
이러한 모순을 풀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는 이 기사의 결론이 11:22-24의 신앙에 관한 말씀과 11:24-25의 기도에 관한 말씀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마가는 이 두기사를 신앙과 기도에 적용시킴으로서 그 주제가 무화과 나무 이야기도 아니요 성전정화의 기사도 아님을 나타내려 한다. 그러므로 이 기사는 전승의 배치에서 나타내려한 마가의 해석학적 의도때문에 결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성전정화 기사는 신앙과 기도의 교훈이외에도 더욱 광범위한 함축적 의미를 갖고 있다. 본문에는 그러한 의미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지만 돈바꾸는 자나 상인들에 관한 예수의 공격은 성전 뜰에서 그러한 활동의 부당함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 기사에서 마가는 예수의 예언자적 행위를 기술함으로서 정상적인 성전예배의 기능이 종말로 다가왔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의도한다.


예수의 예언자적 행위로 말미암아 성전에서 희생동물이 구입될 수 없다면 희생제사는 수행될 수 없고, 돈 바꾸는 자가 없다면 반세겔을 내고 성전에 들어갈 세금을 낼 수 없고 또한 주발이 성전안으로 이동될 수 없다면 성전에서 모든 제의적 행위가 멈추어져야 한다. 그래서 성전의 기능과 제사장직의 역할은 종말을 고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예수가 성전을 은유한 '강도의 굴혈'은 강도들이 범죄를 저지른 후에 숨을 장소를 가리킨다는 렘7:8-11의 의미에서 보아야 한다. 이와같이 강도의 굴혈 (den of robbers)로 성전을 묘사하는 것은 예레미야에서 빌려온 것이다. 백성들은 성전예배가 계속되는 한 그곳으로 피신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마가가 성전청결의 전승을 예수 행위로서 배열한 의도가 숨어 있다.


한편 마가 전승안에만 "만민을 위한(for all mations)"라는 말이 있는데 사 56:7"My house shall be house of prayer for all nations"에서 인용된 것이다. 따라서 성전정화 전승은 마가복음에서 성전안에서 제의적 예배의 종말에 관한 예수의 예언자적 상징적 행위를 나타낸다. 여기에서 마가는 무화과 나무 저주 기사를 성전정화 기사와 결합시킴으로서 저자 자신의 의도를 재강화하려 한다.
무화과 나무는 예수가 "저주했던" 성전의 상징으로 분명히 성전이 파괴되어질 것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13:2) 이러한 의미는 그의 재판시에(14:58) 그의 십자가에서 동반된 비유에서(15:29) 분명하다. 성전이 AD 70년에 파괴되어질 것처럼 성전은 예수가 죽을 때 상징적으로 이미 파괴되었다.(15:38) 무화과 나무의 운명은 성전의 운명이었다. 그러므로 마가는 무화과 이야기를 예수의 예언적 상징의 중요성을 해석하는데 이용하였다.
첫째 "무화과 나무의 때"(11:13)에 관한 언급은 성전에서 예수의 행위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한 저자 마가의 이해였다. 둘째 "만민"의 삽입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 이방인들이 포함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마가의 예수는 '유대'경계밖으로 여행한다.(7:24,31; 8:27) 한편 소묵시록 13장에서 "만민(=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선포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선결조건이라고 진술한다.(13:10) 마가의 의도에 의하면 성전예배는 이방인들을 포함시키지 않기 때문에 성전은 더 이상 어떤 다른 역할을 할 수 없다. 마가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성전은 그 계획을 완성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 기사의 결론부분에서 마가가 기도와 신앙에 관한 말씀을 포함시킨 것은 마가의 의도이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그 전승들 중 일부를 다른 문맥에 혹은 완전히 빼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는 말씀들이 원초적으로 독립적인 것이었음을 마태와 누가는 다른 자료들로 부터 알고 있다. 이 결론 부분에서 마가는 구원의 장소가 성전에서 예수로 변천되었으므로 성전예배가 아닌 신앙과 기도가 하나님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마가에서 신앙은 예수와의 관계에서만 이해되어질 수 있 다. 이 사실은 1:15의 예수의 설교의 요약에서 분명히 나타난다.(복음=예수와 그의 생애)
결론적으로 마가는 두 사건의 전승들을 배열함으로서 상호 해석케하여 유대교 삶안에서 성전예배의 역사적 중요성에 반대하고 예수의 중심성에 대해 강조하려고 한다. 이와같이 초기 전승들에 대한 배열과 병렬은 최초의 복음서 저자의 주요한 해석학적 방법이었다. 따라서 마가의 전승의 배열 순서는 마가의 주요한 신학적 모티브들을 이해하려할 때 필연적인 요소이다.

 

2.전승의 개작(Adapting)
마가는 전승들은 단순히 수집, 배열, 병렬 시키는 방법에 의해서만 아니라 전승들을 개작하였다. 그는 전승을 도입부와 결론부등의 큰 맥락안에 삽입함으로서 예수 이야기를 구성한다.
먼저 서론(Introduction)에 도입된 예는 지리적 표시를 나타내는 7:24,31에 있다. 7:24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의 치유 이야기를 도입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기사앞에 나타나는 마지막 지리적 언급은 6:53의 게네사렛인데 이는 예수가 갈릴리 지역을 떠나 두로와 시돈지역으로 여행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언급이다. 그래서 이 기사가 지리적 언급과는 별도로 전승되었다는 사실을 그 이야기 자체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7:26에 보면 예수께 찾아온 여인은 한 '수로보니게인'과 동일시된다. 그런데 예수가 수로보니게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그 여인을 수로보니게인이라고 저자가 말하였다고 하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그러므로 7:31의 지리적 언급은 실제적 여행에 대한 언급이라 할 수 없고 비유대 지역에서 예수 여행을 구성하려는 마가의 의도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24,31절은 마가에 의해 두전승을 결합하는데 이용되었고 유대지경을 넘어 예수가 짧은 여행을 했다는 방식으로 결합되었다.


다음으로 마가의 전승의 개작은 결론부에 있는데 2:27-28의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안식일날에 밀밭사이로 지나가는 이야기에 안식일에 관한 예수의 말씀을 첨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수는 안식일의 주인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예수처럼 안식일날 자유롭다. 사실 예수는 25-26절에서 충분히 자신을 변호했기 때문에 이 결론 부분 없이도 본문의 이야기는 아주 완전하다. 여기에서 마가는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라는 접속 공식으로 연결시킨다.
세째로 서론과 결론 양쪽 모두에 말씀을 삽입함으로 전승을 연결시킨다. 1:21-28에는 예수의 최초의 두 축마행위에 대한 기사가 결합되어 있다. 23-26절에서 마가는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의 이야기를 취하였으나 도입과 결론(21-22,27-28)부분에 개작한 이야기를 삽입함으로 구조화하였다. 즉 축마자로서 예수의 능력에 대한 기사에서 마가는 도입과 결론부분을 삽입함으로 그 이야기의 요점을 교사로서 예수의 능력에 대한 설명으로 바꾸었다.

 

3.간결한 요약문과 해석학적 주석
전승의 병렬과 개작이외에 마가는 요약문과 해석학적 주석의 로 예수 전승을 해석하였다. 마가는 이 요약문들을 복음서의 곳곳에 배치하였는데 그러한 요약들은 전형적으로 마가의 언어를 포함한다는 사실에 의해 인식될수 있다. 왜냐하면 요약문들이 마가 이전에 독립적으로 순환되었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먼저 8:19-21(예수가 제자들에게 무리들을 먹이심에 관한 질문)은 마가안에 이미 서술된 두 급식사건(6:35-44, 8:1-10)을 전제한다. 두 사건에서 '광주리'에 대한 용어가 다르게 사용되고 있는데 그 차이는 8:19과 6:43에 있는 예수의 질문에 반영되어 있다. 또한 8:28에 사용된 광주리도 8:8의 용어와 상응한다.


그러므로 그 요약은 마가에서 현재 사건의 순서뿐만 아니라 희랍어 산문의 형태들을 전제한다. 그래서 마가는 그가 이미 서술했던 사건의 의미에 주의하면서 이 설화 - 요약(Narrative-Summary)을 창작했다.
다음으로 1:32-34, 2:13, 3:7-12, 6:54-56에서 예수는 마가에 묘사된 것 이상의 치유와 교훈을 행했지만 마가는 예수의 생애에서 몇가지 예만을 선택하고 있다. 물론 마가는 예수의 명성이 지리적으로 직접 다닌 지역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기 원한다. 여기에서 마가가 전승들에 사용한 서론적 자료들은 중요하다.
그러므로 마가는 전승들을 배열하고 구조화하고 창작하는 방법으로 복음서를 기술하였다. 그는 종종 자신의 고유한 창작들을 이야기안에 삽입시켰다. 마가는 자신이 나타내기 원했던 새로운 방식 즉 예수에 관한 연속적인 이야기로 전승들을 해석하려고 했다.

 

B. 마가복음 구조의 양식적 특성

 

마가로 하여금 "복음서"를 집필케한 마가의 신학적 의도로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마가가 예수 전승들을 배치시켰던 전체적 구조를 이해한다면 일보전진하게 될것이다. 이미 필자는 마가가 전승들을 병렬시키고, 구조화하고 요약문들을 작성한 것을 검토함으로 마가의 집필의도를 발견했었다.


마가의 신학적 의도를 찾는 한 방법으로서 마가의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는 필연성은 마태와 누가보다 마가에서 더욱 절실하다. 마태와 누가는 이미 마가라는 근원자료(source-material)을 가지고 있기에 그들이 신학적 동기에 의해 자료를 다루었던 방식을 관찰 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마가에 대한 근원자료(source)를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마가가 자료들을 사용했던 방법을 찾음으로서 그러한 자료들을 현재의 마가복음에서 구별지을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마가의 경우에 마태와 누가에서 얻을 수 있는 신학적 목적에 대한 의미심장한 단서들을 찾을 수 없기때문에 마가복음의 전체구조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문제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나 마가복음의 구조에 대한 완전한 일치는 없다. 즉 마가가 사용했던 그의 자료를 창작하고 배열케 한 신학적 동기에 대하여 어떤 일치도 없다. 신학자들이 동의할 수 있는 마가복음의 구조적 특징들을 찾는 것이 마가연구의 출발점으로서 가장 좋다.

 

1.삽화적인 구조(삽입구조)
마가복음의 구조적 특징들 중의 하나는 한 전승을 이등분하여 다른 전승을 삽입함으로서 하나의 전승으로 구성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인 특징은 지금까지 진행되던 이야기의 연속이 끊어지고 전혀 다른 이야기가 한동안 삽입되어 진행되다가 그 이야기가 종결된 후에야 다시 본래의 연속으로 되돌아가 앞의 이야기가 연속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마가의 이야기에는 꼭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삽입법은 긴장을 고조 시키는 고도의 화술 기교이다.
그 예로서 첫째, 3:21-22의 예수의 가족이 예수를 강제로 집으로 데리고 가려한 이야기(3:21)는 예루살렘의 지도자가 예수를 귀신에 잡혔다는 다른 상황으로 전개된다(3:22).


둘째, 5:21-43의 야이로의 딸의 소생이야기에 혈루증 여인의 이야기를 삽입했다. 그 이야기들이 서로 다른 독립적인 형태이었다는 사실은 두 이야기의 헬라에 양식의 분석에 의해 드러난다. 그들은 문법적으로 수와 분사의 사용, 문장구조의 길이등에 있어서 아주 다르다. 그런데 마가가 그 이야기들을 구성하기 전에 이미 결합되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 그러므로 마가가 그 자료들을 결합한데 대해 책임이 있는지에 대한 것은 논쟁적인 문제로 남는다.
마가는 어린 소년 치유 이야기에 5:25-34의 여인 치유 기사처럼 한 전승안에 다른 전승을 삽입한다. 예수에게 야이로의 딸이 죽게 되었다는 전갈이 온다(5:23). 그러나 예수는 가던 길을 멈추고 혈루증 여인을 고친다(5:34). 다시 야이로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이와같이 5:21-24은 5:35-43에서 계속된다. 이 기사에서 공통적인 요소는 둘 모두 여인이라는 것과 한 여인은 "12해" 혈루증을 앓았고, 소녀는 "12세"라는 점이다. 그러나 마가가 한 이야기 안에 다른 이야기를 삽입한 것은 에피소드를 결합시키는 것 이상의 신학적 의도를 갖는다.


세째, 6:7-31의 예수의 제자들의 파송에 관한 기사와 그들의 복귀기사가 헤롯과 세례요한에 관한 두 전승과 하나로 묶여 있다.
네째, 8:20-35의 예수와 바알세불의 관련성을 주장한 어떤 바리새인들의 기사가 예수의 가족들에 의해 오해된 기사와 하나로 묶여 있다.
다섯째, 성전정화이야기를 무화과 나무를 저주한 예수에 관한 이야기에 삽입했다. 11:15-19의 성전 정화 기사는 11:12-14의 무화과 나무 저주 기사와 11:20-25의 말라버린 무화과 나무 기사사이에 삽입되어 있다. 그러나 마가의 특수한 구조와 연결된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 동일층 자료가 함께 묶여 있는 자료를 해석한다는 것은 성전기사에서 분명하다. 저주되어 말라버린 무화과 나무는 예수가 하나님에 대한 더욱 좋은 예배를 계속할 수 있도록 성전을 정화한 것이 아니다. 무화과 나무는 열매맺지 못하기 때문에 전지한 것이 아니라 그 나무를 죽여 버린다. 마찬가지로 성전에서의 행위가 종말의 예고로서 이해되어진다는 것은 마가에게 분명하다.
여섯째, 14:53-72의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뜰안으로 들어간 이야기(14:54)는 즉시 예수의 재판이야기로 반전한다(14:55). 예수의 재판이 매듭되는 단계에 다시 베드로의 이야기로 돌아온다(14:66). 이 두가지 사건은 단상과 단하의 두자리에서 예수와 베드로의 재판이 동시에 이중적으로 진행된 극적인 묘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삽입으로 두 사건이 병행될 때 두 사건은 상호간의 비교되는 위치에 선다. 예수가 정신병자라고 한 가족의 왜곡은 귀신에 사로 잡혔다는 율법학자드릐 중상과 비교되고(3:21-22), 야이로의 믿음은 혈루증 여인의 믿음과 비교된다. 마찬가지로 무화과 나무의 죽음과 성전 청결 사건은 비교되어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과 성전종교 모두를 심판할 것이라는 저자의 의도로 볼 수 있다.
마가는 두 사건의 동시적인 제시를 통해 자신의 의도를 돋보이게 하려 한다. 제자들을 전도로 보낼 때 아무런 물질적 보상이 없는 것은 헤롯 잔치의 풍성함과 대조되고 베드로의 부인은 예수의 재판시에 보이신 자기선언의 용기와 대조된다.

 

2.대칭적 구조
대중에게 행한 공적 교훈과 제자들에게 행한 사적 해석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구조형식은 막4:1-12, 7:14-23, 9:14-29, 10:1-10, 13:1-8에 나타난다. 마가는 제자들이 예수로부터 직접 사적인 교훈을 받았기 때문에 제자들이 예수가 행하고 말씀하셨던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있었음을 강조하려고 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의 교훈에서 6:52,8:21,9:32의 예에서 처럼 그러한 사적 교훈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그들은 모두 예수를 버린다.

 

3. 3중적 반복구조
마가 구조의 세번째 특징은 전승양식의 3중적 반복으로 마가복음의 이야기 구성에서 같은주제나 갈등같은 인물의 배역이 3번 반복되는 구조적 특징이다.
첫째로 이 형식은 예루살렘으로 향하신 여행중에 말씀하신 예수의 수난예고에서 시작 된다. 여기의 3중적 형식은 상당한 시간의 거리를 두고 3번 연속 반복되는 경우이다. 예수는 3번이나 자신의 수난에 대해 예고 하지만 매번 제자들은 불신앙의 반응을 보이고 예수는 그때마다 진정한 제자도에 대해 교훈하신다.


①예수는 고난받고, 죽어야 하고, 부활할 것이라고 예언한다(8:31,9:30-32,10:30-34).그런데 이 예고에 이어지는 3중적 전승은 어떤 면에서 제자들이 예수를 진실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는다.
㉠8:32-33에서 예수가 고난 당해야만 한다고 말했을때 예수를 붙들고 간한자는 바로 베드로이었다. ㉡9:33-34에서 누가 크냐에 관해 제자들은 논쟁하는데 그들은 예수의 위대함이 예수의 임박한 죽음에 대해 겸손히 받아들이는데 있음을 망각했던 것이다. ㉢10:35-41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요구한 자는 야고보와 요한이었다. 그들은 예수의 영광이 죽기전에는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② 이 형식에 속하는 것은 예수의 제자도 본질에 관한 말씀이다.(8:34-38, 9:35-37, 10:42-45) 예수가 고난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제자들에 의해 거부되거나 망각되어질 때 실현된다.


③ 이 3중적 형식은 ㉠9:2-8의 변화산 이야기에서 ㉡9:38-41의 귀신을 축출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이용된 예수 이름의 능력에 대한 시험에서 ㉢10:46-52의 소경 바디매오의 치유이야기에 나타난다.


④ 예수는 세번 제자로 하여금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하신다.

첫번째는 네 사람의 제자에게 따르라고 하신다.(1:16) 두번째는 열두제자를 선정하시고 따르게 하신다.(3:14) 세째는 전도의 치유를 위하여 파송하신다.(3:15)


⑤ 예수와 제자간의 배안에서의 논쟁이 3회 반복된다(4:37, 6:51, 8:14). 그리고 떡이 주제가 된 예수와 제자들 간의 유사한 논쟁이 3회 반복된다(6:37, 8:4, 8:17)). 이러한 두 종류의 3연속이 반복된 것은 역시 떡이 주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때문이다.


⑥ 예루살렘에 온 예수는 연속적으로 3일간 연속적으로 성전에 들어 가신다. 첫번째는 둘러보러 가고, 두번째는 청결케하시고 세번째는 성전의 멸망을 예언한다.
둘째로 동일기사에서 3회 반복되어지는 예는 다음과 같다. ⊙막14:42-50의 게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예수는 잠자는 제자에게 3번 돌아온다. ⊙막14:62-72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세번 부인한다. ⊙15:1-12에서 빌라도는 군중에게 3번 질문한다. ⊙십자가의 시간이 제9시 낮 제3시로 3시간의 간격으로 세번 나온다.


그런데 8-10장은 제자들과 대중들에게 행한 예수 교훈의 활동과 관련된 전승들과 관계있다. 8-10장 앞부분에서 예수는 기적을 행하는자(miracle worker)로 주로 묘사되어져 있다. 11장에서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마지막 주간의 설화가 시작된다. 마가 복음전체에서 예수가 맹인을 치유하는 이야기는 둘밖에 없다. 8:22-26과 10:46-52에 있는데 예수의 교훈활동의 처음과 끝에 위치해 있다.


그러한 양식들은 마가설화에 있는 일종의 순환구조이다. 이 순환구조는 예수에 관한 전승들에 대한 마가의 재해석의 전체적 의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마가의 전체적 구조는 무엇일까?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마가복음의 신학을 이해하기 어렵다.
이를 풀기 위한 광범위한 하나의 형식은 "the Son of God"(하나님의 아들)칭호와 관계 된다. 이 칭호는 먼저 1:9-11의 요한에 의한 세례의 기사에서 나타난다.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는 예수를 시2:7,사42:1에서 처럼 예수를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과 동일시한다. 두번째로 9:1-12의 변화산 기사에서 들려온 하늘의 음성은 예수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과 동일시하고 있다. 세번째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로마 군대의 지휘관이던 백부장이 십자가에서 예수가 죽는 마지막 순간에 그를 하나님의 아들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칭호는 마가설화의 서두에, 중간에, 그리고 결론에 나타나며 그래서 마가복음의 배열되어진 것은 기독론적 구조인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가복음서에서 이칭호는 중요한 사건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마가에게는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하늘의 음성은 세례와 변화산의 기사와 다르기 때문에 3중적 구조로 확정짓기는 어렵다. 'Son of God'과 God's Son은 세례와 변화산 기사에는 나타나지 않고, "내 사랑하는 아들(my beloved son)"으로만 나타난다. 마가가 그 음성을 신적인 권위로 이해 했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과 동일시되어진다는 추론은 정당하다. 마가의 예수 이해에서 백부장의 고백이 중요하지만 그것은 처은 두 기사들이 설명한 설화에서와 같이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백부장은 예수가 죽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며(15:40-41) 그의 고백은 성전 휘장의 찢어짐과 그 의미를 해석한다. 아마도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 칭호는 이 3중적 구조에 제한되어 있지 않다. 사실 마가가 완전한 형식으로 그 용어를 사용하였던 것은 단 한번뿐인데(정관사가 백부장의 고백에서 빠져있다) 마가는 그것을 귀신들이 예수를 알아차린 칭호로 요약하여 사용하였다.(3:11)


그 칭호는 5:7에서 "Son of Most High God"의 형식으로 귀신에 의해 말하여졌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연속적인 실패, 즉 배안에서의 갈등과 떡의 문제, 수난 예고에 대한 저항, 베드로의 3중 부인등은 독자에게 암담한 감회와 솔직한 인간의 모습을 전달하려 한다. 따라서 이러한 3중적 반복구조는 반복만이 아니라 갈등의 발전을 보여준다. 이러한 연속적인 사건은 동질성의 의미가 심화되고 발전된다.

 

4.재확대 형식(A second broad pattern)
베드로의 신앙고백(8:27-30)의 설화가 제2의 광범위한 양식이다. 마가는 긴 그의 복음서의 중심에 이 고백을 위치시킨 것이 그의 복음서의 이해의 중심이라고 의도했는가? 아니면 우연인가? 예수는 군중들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시도가 실패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 조차도 그가 말하고 있었던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선포로 군중들을 사로 잡으려는 시도를 버렸고 그의 제자들에게 사적 교훈에 몰두하였다. 이 방법만으로만 에수는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관계성을 실현할 수 있었다. 예수는 군중을 복음화 시키기 위해 기적이 강조된 시도를 버릴 뿐만 아니라, 갈릴리 마저도 버렸다. 8:27에서 예수는 비밀을 지킬 것을 요구하고서 9:30-21a에서 계속하여 제자도에 관한 교훈을 하신다. 예루살렘에 들어간 후 계속된 예수 사역의 두번째 국면은 체포되고, 재판받고, 사형에 처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골격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한편으로 그러한 골격이 역사적 예수의 생애를 반영한다는 전제이다. 그런데 그러한 전제는 마가가 정확한 지리학이거나 연대기를 만드는 구조에 어울리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베드로의 고백후 초기 설화에서 예수를 뒤따랐던 군중들이 사라졌고 그때부터 예수는 제자들에게 사적 교훈에 몰두하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예수는 동일하게 대중적으로 교훈하고 군중들에게 둘러싸여져 있다. 예수는 9:14에서 그의 제자들과 군중들 사이의 공적 논쟁에 참여하며, 9:17-29에서 공적 기적을 행하신다. 10:1에서 예수는 군중들에게 "그의 습관이었던 것처럼" 설교하고(11:17,12:1.35.38), 성전에서 그는 예전에 회당에서(1:21.39,6:12)와 바닷가에서(4:1) 가르쳤던 것처럼 가르치시고, 그리고 가이사랴 빌립보 사건이후에 갈릴리에서 처럼(2:15,3:1) 유대교 종교지도자들과 논쟁한다고 마가는 말하고 있다. 더우기 예수는 그 사건전(4:10,7:17)과 후(9:28,10:10,13:3) 모두 사적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요약하면 막8:27-30의 마가의 예수 생애의 상에서 전환점을 나타낸다는 주장을 정당화시킬만한 어떤 문학적 증거도 없다.
이 화제(단화)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 때문에 복음서의 중심으로 보여질 수 없다. 그 칭호는 마가의 예수 이해에 핵심적 역할을 하지 않는다. 베드로와 타인에 의한 적극적인 그리스도 고백이 이어지는 설화가 보여 주듯 베드로의 고백의 부정적인 색조를 뒤집을 만한 것이 아니다. 마가가 8:32-33에서 분명히 주장하듯이 베드로에 의해 의도된 그의 고백은 처음 부터 고난받는 인자의 다가오는 운명을 선포하기 위해 예수의 무대를 제공하는 것이다. 만약 그 고백이 어떤 기독론적 의미를 갖고 있다면 그 고백은 마가가 예수를 묘사하기에 더욱 적절한 것을 발견하는 것 같은 칭호에 의해 교정되어질 것이다.

 

5.키아즘 구조
마가복음에는 교차대칭구조가 나타난다. 이는 마가복음에서 볼수 있는 구조 방법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각 구절들은 중심에 있는 자료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으며 그 중심 자료와 연관되어 있다. 처음과 같은 서로 연관되며 동일 성격을 가진 말이 나타난다.


A. 8:10-13.
s, 10 ..... 12
11 s 13
10 12
11 13
위와 같은 마가가 교차대구법을 사용할 때 12절에서 처럼 한 구절안에 이중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B.3:31-35
모친 ... 형제 A(31절) A'(35절) 형제... 모친
보라, 모친 형제 B(32절) B'(34절) 보라 모친 형제


C(33절)
누가 모친이며 형제인가
C. 13:24-27.
해 달 A(24-25절) A'(27절) 바람, 땅, 그리고 하늘
별... 하늘


B(26절)
인자가 .... 구름타고

B'. 예수의 갈릴리 사역(2:1-3:6)

A'.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곱 지도자와 당국과의 충돌

 

C. Narrative 기독론으로서의 마가복음

구조분석의 추상적인 범주들이 내용의 특성과 신학자들의 관심사를 회피할 수 있게 하지만 이야기(Narrative)에 대한 관심의 요구는 이야기안에 구체화되어 있는 기독론의 문제를 다루게 한다. 니켈스부르크의 수난사 분석은 마가기사의 초기요소들이 이야기안에 관계성을 고찰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많은 마가의 분석을 통해 발생하는 한가지 문제는 청중의 정체성의 문제이다. 이야기(narrative)는 청중들에게 무었이 일어났는가에 대하여 판단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러한 정체성은 청중이 제자들안에서 자신들을 볼수 있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R.탄네힐(R.Tannehill)은 복음서 안에서 발생하는 상호작용에 촛정을 맟춤으로서 복음서 이야기의 역동성을 인식할 수 있는 접근법을 형성하였다. 이방인 백부장의 고백은 전체 이야기가 독자에게 준 충격이 무었이었는가에 대한 해석의 열쇠이다. 그 고백은 단순히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자신의 활동은 극적으로 변화된다. 그의 사역은 능력과 활동의 사역이지만 체포후에 그의 사역은 이상할 정도로 수동적이다. 그러나 예수에 대한 기독론적 칭호의 공개적 사용은 예수가 14:61-62의 최초의 재판 장면에서 고백과 함께 시작된다.


복음서 안에서의 상호작용은 예수를 만난 모든자들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 예수임을 보여 준다.
1. 사탄은 패배한다. 사탄의 패배는 단순히 종말론적인 표적만이 아니라 예수교훈의 권위를 강조하는 것이다.(1:22, 27)
2.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처음부터 예수에 대한 적대자들로서 역활한다. 그들은 예수께서 죄인들을 용서한 것과 그의 새로운 종말론적행위 때문에 적대시 한다. 이와같은 사실은 2;1-3:6에서의 안식일보다 인간의 우위성에 대한 선언에서 명백한다. 최종적인 만남(11:27-12:44)에서 예수의 권세있는 말씀으로 그들은 절망한다.
그러나 예수의 수난 기간동안 제자들의 오해가 예수에 대한 적대행위로 나타난 반면에 이 적대자들은 아이로니칼하게도 고난의 메시야직에 대한 예수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렇지만 이야기 자체에서 예수는 결코 그를 배신한 어떤 자들에 대해서도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3. 간청자들이 예수께 와서 치유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치유는 오직 예수의 공생애사역기간에만 일어나며 예수의 침묵에 대한 금령은 자신이 그들에 의해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4. 제자들은 최초에 긍정적인 빛으로 묘사되었다. 청중들은 제자들과 동일시 된다. 그러나 제자들의 자기애와 두려움의 패턴이 세개의 배이야기(4;35-44, 6:45-52, 8:14-21)에서 부터 발전한다. 이 패턴은 나머지 이야기를 통해서 전개 된다. 또한 8:27에서 부터 수난의 케리그마는 메시야직과 제자직이 역설적인 개념에서만 공식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는 고난받고 섬기는 메시야이며 고소자들에 의해 예언을 성취하도록 조종받는 예언자이다
이러한 이야기의 관점은 마가의 기독론이 한 주제 혹은 한 칭호로 제한되지 않는 다는 것을 우리가 보기를 원한다. 예수의 칭호들중 어떤 칭호도 그이야기 안에 형상화된 역설을 나타낼 수 없다. 그러나 이야기의 최종적 확신은 신앙없는 제자들이 신앙인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그들에게 놓였있는 길을 따를 것이다(14:28,16:7). 청중들은 예수를 과거에 신실하게 보았던 것처럼 예수를 신뢰할 수 있다.

 

Ⅳ.키아즘적 구조로


본 마가복음

A.마가복음의 구조

저자 마가는 세례요한의 활동을 예수의 활동앞에 놓음으로서 복음서 저술을 시작하였다. 세례요한에게서 처음으로 예수를 보며 십자가와 부활에서 예수의 마지막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복음서의 ⅓에 해당되는 앞부분의 갈릴리 사역 그리고 또 ⅓이 되는 예루살렘에서 죽음으로 끝나는 수난사는 마가복음의 수난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이는 유대 당국자들이 3:6에서 예수를 죽일 결안을 하고 11:2의 모의에서 분명하다. 첫번째 결의는 갈릴리에서 적대자들과의 논쟁의 말미에 둘째 결의는 수난사에 계속 이어진다.(11:18, 12:12, 14:1-2) 예수의 길에는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또한 마가의 구조에서 하나님의 아들 칭호가 복음서 전체를 하나로 포괄하고 있다.(1:1,11; 15:39) 특히 15:39의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론적 백부장의 고백은 저자가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곳이다. 이것은 마가의 예수이야기에서 계속되는 모든 찬송과 이사람이 누구냐라고 하는 질문을 총괄하는 그리스도론적 결론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가복음의 중심으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제안하면서 동등한 분량의 두부분으로 나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 축으로 볼수 있는 곳은 8:21의 결정적 질문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를 첫 단락의 종결적인 질문으로 보아 2등분하는 것이 더욱 세련되게 보여질수 있다.


첫부분(1:1-8:21) "갈릴리"에서 예수의 출현과 그의 선포로 서문은 종결되고, 마가복음 전반부를 통하여 갈릴리 바다는 중요한 많은 에피소드의 무대로 나타난다. 첫제자들의 소명으로 시작하여(1:16-20) 그 바다위 배안에서 예수와 제자들의 논쟁으로 끝이 난다.(8:14-21) 그들이 벳세다에 도착한 후에(8:22) 갈릴리 호수에 대한 언급은 사라진다.
갈릴리 바다는 1:16-3:19에서 제자들의 소명과 최종적인 선택이 이루어 지고, 4:35-41의 바다에서의 폭풍, 6:45-52의 예수가 물위에 나타나심의 기사에서 보듯이 각 단락들의 중심적인 사건의 무대이다. 그러므로 전반부는 갈릴리 바다를 중심적인 무대로 하여 마가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후반부(8:22-16:8)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리적 무대는 예루살렘이다. 첫단락(8:22-11:10)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여행중에 무대가 설정되며 중간단락(11:12-14:50)은 예루살렘 주위에서의 예수 사역에 관심하고 마지막단락(14:52-16:8)은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발전은 마가의 분석을 위해 좋은 안내자이지만 신학적 발전의 전개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마가 자료의 구조를 지리적 발전에 따라 배치했고 세밀한 주의를 기울인 것을 볼 수 있다.


B. 본문에 관한 키아즘적 분석

1.서언(1:1-15):복음의 시작

제목:1-2
+---------------------+-------------+-----------------------+
| a | b | a' |
+---------------------+-------------+-----------------------+
| 요 한 |예수와 요한 | 예 수 |
+---------------------+-------------+-----------------------+
| (1:3-7) | (1:8-10) | (1:11-15) |
+---------------------+-------------+-----------------------+
|3절-"소리"(a voice) | 8-물,성령 |11-"소리" (a voice) |
|4절-무대설정(setting)| 9-예수,요한 |12-무대설정(setting) |
|5절-결과 |10-물,성령 |13-결과(results) |
|6~7a-"선포하라" | |14-"선포하라"(prodaims)|
|7b-선포(Proclamation)| |15-선포(Proclamation) |
+---------------------+-------------+-----------------------+

 

1-2절은 복음서의 제목을 나타내는 것으로 독립적인 단위로 간주되는데 "시작"이라는 명칭을 붙일 수 있다. 1-2은 서문에 뒤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소개하고 또한 전 복음서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를 알려준다.
첫째 a, a'는 서문에서 시작되며 다음에 이어지는 모든 것은 동일한 순서에 따라 배열되어 있다. 따라서 마가는 그러한 배열법을 사용함으로서 예수의 탁월한 역할을 자연스럽게 강조한다.
둘째는 예수의 우월성을 표현시키기 위해 가능한한 축약적인 방식으로 간결하게 두 인물사이의 만남을 중심부분으로 하여 묘사한다. 두 인물사이의 대조적인 모습은 8절의 "물"과 10절의 "성령"사이의 대조로 말미암아 분명해 진다. 10절에서 a.a'의 순서와는 반대로 요한앞에 예술르 언급하는 것은 두 인물의 순ㅅ를 반점시킴으로서 예수가 중심임을 내려는 의도가 있다.


2.전반부(1:16-8:21)

전반부는 갈릴리 바다에서 일어난 사건을 서술하는데 예수 사역의 시작과 끝이 모두 갈릴리 바다를 무대로 설정되어 있다. 이후로 갈릴리 호수 언급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a.소단락 Ⅰ(1:16-3:19)

+---------+-------------+-----------+-------------+---------+
| a | b | c | b' | a' |
+---------+-------------+-----------+-------------+---------+
|1:16 - 20|1: 21 - 2: 12|2 : 13 - 17|2: 18 - 3: 12|3:13 - 19|
+---------+-------------+-----------+-------------+---------+
|처음 네제|연속적인 치유|레위를 부르|연속적인 갈등|12제자를 |
|자를 부르|기사,마지막에|심 |기사,마지막에|선택하심 |
|심 |갈등포함 | |치유 포함 | |
+---------+-------------+-----------+-------------+---------+

 

첫째로 b.b'의 자료에서 중심인물은 예수로 갈등의 연속에서 예수는 "말씀"에 권세있는 자로 나타나는 반면에 치유기사의 연속에서는 능력 "행함"에 권세있는 자로 나타난다.
치유기사가 3:1-6에서 최종적인 갈등의 무대를 제공하는 것처럼 갈등은 2:1-12의 마지막 치유기사에 나타나 있다. 치유이적의 자료군은 6:7-12의 예수 권세를 생각케 한다. 그렇지만 15:39의 골고다에서 "최후의 갈등"에 앞서 귀신들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3:11) "라고 예수에 대해 언급한다. 하지만 갈등의 요소는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다.

 

둘째로 a, c, a': 제자들의 선택에 관한 사건들은 예수에 관한 전승들에 연속적인 구조를 제공한다. 처음 네 제자의 부르심과 레위의 부르심은 바다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a'의 12제자 선택은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3:7) 갈릴리 호수를 떠난 후에 산에서 일어난다. 또한 예수의 자비로운 치유에 관한 요약은 12제자의 선택을 준비시키게 한다. 이장면은 2중적 역할을 수행하는데 처음 네제자의 소명은 그들의 배에서 떠나가기를 요청했던 제자들이 배안에 나타난 선생과 함께 8:14-21의 전반부의 결론 장면과 연결 구조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b.소단락Ⅱ(3:20-6:6)

+----------+------------+----------+-----------+------------+
| a | b | c | b' | a' |
+----------+------------+----------+-----------+------------+
| 3:20-35 | 4:1-34 | 4:35-41 | 5:1-43 | 6:1-6 |
+----------+------------+----------+-----------+------------+
|예수의 참 |교훈들 |갈릴리바다|치유들 |예수의 가족 |
|가족 |4:1-20 |를 잔잔케 |5:1-20 | |
| |연속적인교훈|하신 예수 |귀신 축출 | |
| |4:21-34 | |5:21-43 | |
| |다른 교훈 | |연속적 치유| |
+----------+------------+----------+-----------+------------+

 

예수는 또다시 교훈에 있어 말씀에 능력있는 교사와 행함(치유)에서 권세있는 자로 보여진다. 그의 권세는 풍랑이는 바다와 동요하는 제자들을 잔잔케 하신 사건에서 명백하다.


그는 혈연 관계와 친족에 대조하여 진정한 가족에 대해 말한다.
첫째로 C에서 예수의 권세는 갈릴리 바다에서 나타난다. 예수가 바다를 잔잔케 함으로서 제자들은 경탄한다. 여기에 나타나는 예수의 이중질문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는 마가 특유의 수사학적 기교이다.

 

둘째로 b.b'에서 예수의 말씀과 행위는 예수를 드러내게 하는데 이자료군은 키아즘 구조를 갖고 있다. 씨의 비유와 그 비유를 해석한 예수의 연속적인 교훈은 치유기 사안에 삽입된 혈루증 여인의 치유와 상관관계를 갖고 있다. 이부분(4:1-34)과 5:1-43의 세개의 기적 기사와의 연관성은 4:1-2와 4:35-36사이의 시간적, 장소적 일치에서 볼 수 있다. 4:21-34의 또 다른 교훈들은 씨의 비유를 해석하기 위해 사용되어진다. 동일하게 5:1-20의 거라사인 귀신 축출은 계속 이어지는 치유 이적을 해석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4:41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은 수사학적으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의 응답을 촉구한다.

 

세째로 a, a': 이 부분은 소단락을 구분짓는데 이용되며 또한 발전된 구조롤 역할한다. 왜냐하면 a'의 예수 가족 단락은 서기관의 신성모독주장은 예수의 가족에 대한 언급과 일관되어 진다.(3:20-21과 3:31-35) 그러므로 첫 단락은 마지막 단락에서 중심적인 거부를 준비케 한다. 안의 자료는 서문에서 "와 보라 능력 많으신 이"라고 불린 예수(1:7)의 주제를 발전시킨다.

 

c.소단락Ⅲ.(6:7-8:21)

+-----------------+------------------+----------------------+
| a | b | a' |
+-----------------+------------------+----------------------+
| 6:7-33 | 6:45-52 | 6:53-7:37 |
+-----------------+------------------+----------------------+
|"헤롯의 누룩" |예수가 바다위를 걸| "바리새인의 누룩" |
| |으심 | |
+-----------------+------------------+----------------------+
| 6:34-44 | 결 론 | 8:1-9 |
| 오천명을 먹이신 | 둔하여진 마음 | 사천명을 먹이신 |
| 급식 기사 | | 급식 기사 |
+-----------------+------------------+----------------------+

 

8:10-13은 표징을 요구하는 불신앙을 언급하는 것으로 전반부의 결론을 유도하는 부분이다. 종결장면인 제자들의 몰이해(8:14-20)는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에 대한 경고와 관련되어 있다. 소단락Ⅲ에서 강조되는 것은 제자들의 "둔해진 마음"이다. 이 주제는 갈릴리 바다 배안에서 예수와 함께 있는 동안의 "떡에 관한 논쟁"의 끝 장면에까지 계속이어진다.
첫째로 a,a'에서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에 대한 경고와 함께 두 금식기사는 소단락Ⅲ전체를 조직하는데 단서를 제공한다. 제자들의 선교와 그들의 복귀기사안에 헤롯의 사악함에 대한 기사가 있다.(6:14-29) 바디위를 걸으심 기사가 그 다음에 이어지고 그후 바리새인의 완악함에 대한 기사는 6:53-56의 게네사렛에서 병고침의 기적에 관한 언급과 7:24-37의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과 귀먹고 어눌한 자의 두번의 치유이야기 안에 삽입되어 있다. 그런데 두 치유기사중 7:24-30의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의 치유는 이방인 지역 두로에서 일어난 것으로 마가는 이 기사를 "부정한 것"과 "깨끗한 것"에 대한 바리새인과의 갈등 무대 다음에 배치시키고 있다.


헤롯이나 바리새인을 다룬 양쪽 부분은 두 급식기사가 따른다.

첫번째 오천명을 먹이신 급식이적은 유대인을 먹이신 것으로 12제자의 설교와 헤롯에 대한 언급에 의해 강조되어 있다. 두번째의 사천명을 먹이신 급식이적은 이방인을 먹이신 것으로 이방인 지역에서 일어난 치유와 정결함에 과한 논쟁에 의해 강화되어 있다.


바리새인들의 표적요구(8:10-13)는 전반부의 마지막 장면으로 무대를 이동시키는 역할을 한다. 마가는 마지막 장면의 중요성을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이와같이 구성하였다.
8:14-21에서 마가는 전반부가 갈릴리 바다에서 시작되었듯이 마지막 무대를 갈릴리 바다로 설정한다. 여기 8:176,21의 제자들의 이해 부족에 관한 반복된 마가의 주제(4:13,41; 6:37,52; 7:18;8:4)가 절정에 달함을 볼 수 있다. 이 부분은 마가가 순서와 숫자 그리고 "바구니"라는 정확한 두 표현에서 두번의 급식기적을 축어적으로 회상하고 있다. 바리새인의 헤롯의 누룩에 주의하라는 예수의 말씀에 반하여 제자들의 눈은 어두워 진다. 누룩과 두 급식기적에 대한 언급으로 이 장면은 소단락Ⅲ을 끝맺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의 전반부는 갈릴리 바다 배위에서 끝맺는다. 또한 이 장면은 눈이 어두운 벡성들에게 시력을 회복시킴으로 시작하여 끝맺는 후반부가 시작됨을 알려준다.

 

3. 후반부(8:22-16:8)

전반부에서 처럼 마가복음의 후반부는 세개의 소단락으로 분류되어진다. 또한 전반부에서의 모든 것이 갈릴리 바다 근처에서 일어났듯이 후반부의 각 부분과 단락은 지리적인 이동으로 분류되어 진다.

소단락 Ⅳ(8:22-11:11) - 갈릴리에서 예루살렘
소단락 Ⅴ(11:12-14:52) - 예루살렘안과 지경
소단락 Ⅵ(14:53-16:8) - 최후의 시간 골고다

 

a.소단락 Ⅳ(8:22-11:11)

A. 8:22-26: 벳세다에서 소경이 눈을 뜨게 되어 보게 된다.
8:27-30: 예수가 누구인가: 베드로의 신앙고백 - "그리스도"
B. 예수의 수난 예고와 교훈

+----------+-------------+-----------+-----------+----------+
| a | b | c | b' | a' |
+----------+-------------+-----------+-----------+----------+
|8:31-9:10 | 9:11-29 | 9:30-50 | 10:1-31 | 10:32-45|
+----------+-------------+-----------+-----------+----------+
|ⓐ수난예고| |ⓐ수난예고 | |ⓐ수난예고|
| (8:31) | | (9:30-32)| |(10:32-34)|
|ⓑ제자들의| |ⓑ제자들의 | |ⓑ제자들의|
|오해 | 엘 |오해 | 모 |오해 |
|(8:32-33) | |(9:33-34) | |(10:35-41)|
|(베드로의 | |(누가크냐는| |(영광을 구|
| 간청) | |논쟁) | |한 제자) |
|ⓒ제자도에| 리 |ⓒ제자도에 | |ⓒ제자도에|
|관한 교훈 | |관한 교훈 | |관한 교훈 |
|(8:34-91) | |(9:35-37) | |(9:42-44) |
|자기십자가| |어린아이 | | 섬김 |
|ⓓ메시야의| 야 |ⓓ요한의 질| 세 |ⓓ메시야의|
|역할 강조 | |문과 예수의| |역할 강조 |
|(9:2-10) | |교훈 | |(10:45) |
|변화산사건| |(9:38-50) | | 대속물 |
+----------+-------------+-----------+-----------+----------+

 

A'. 10:46-51: 여리고 에서 맹인 치유 이야기


11:1-10: 예수는 누구인가: 예루살렘입성때의 환영 - "호산나" 찬송.

소단락에서 예수 자신의 세 수난 예고를 축으로 하여 구조화되어 있다.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면 첫째로 8:22-30의 벳세다에서의 맹인 치유이적과 베드로의 메시야 고백과 둘째로 8:31-10:45 세 수난 예고를 중심으로 하여 제자들의 오해, 오해에 대한 예수의 교훈, 메시야의 역할에 대한 통찰등의 세 주제가 또한 반복되어진다. 세째로 10:46-11:10의 여리고에서 맹인 치유 이야기와 예루살렘 군중의 호산나 고백이 교차대칭 구조로 나타난다.


첫째로 A(8:22-30)는 벳세다에서 맹인치유가 베드로의 메시야 고백과 연관되어 있어 무지한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나타나 있다. A에서 같이 A'(10:46-11:10)에서도 소경 바디매오의 치유 이야기가 예루살렘 백성들의 눈을 뜨게 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11:9-10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시는 우리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는 예수에 대한 칭호가 백성들의 고백이다. 이와같이 A와 A'는 상호 교차 대칭적으로 구성되어 예수 이해가 중심 주제를 이룬다. 또한 A의 "메시야" 칭호와 A'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의 칭호는 각 단락의 결론적인 의미에서 등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11:1-10은 예루살렘의 입성이전의 사건 묘사이며 실제적인 입성은 11:11에서 이루어 진다. 그래서 11;1-10사건은 다음 단락으로 이어주는 연결적인 역할을 한다.


둘째로 B(8:31-10:45)는 교차 대칭적 구조로 되어 있다. 예수는 고난 예고를 하고 즉시 제자들의 오해가 뒤따른다. 제 1 수난 예고후 베드로는 예수에게 전하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을 말하고 제2 수난 예고후 제자들은 누가 크냐에 관한 논쟁을 하고 제3수난예고후 요한, 야고보가 주의 영광중 좌우의 자리를 요구함으로 제자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다. 마가의 구조에서 제자들의 오해는 예수의 수난을 증폭시키며 예수만이 유일하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들의 오해에 직면한 예수는 제자들에게 참 제자도에 관한 교훈을 한다. 베드로의 오해후에 예수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제자도에 관한 교훈을 말하며, 누가 크냐의 논쟁후에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자가 나를 영접하는 것임을 말한다. 또한 영광을 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는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할 것임을 말한다. 이러한 제자들의 오해와 예수의 교훈은 평행선을 긋는 구조로 되어 있어 마가는 적대자들이 바로 제자들이었음을 말함으로서 예수 수난의 필연성의 모티브를 제공한다.


이어 마가는 예수의 메시야적 역할을 강조하는 사건과 말씀을 배치시키고 있다. 변화산사건은 제2수난예고의 결혼으로서 예수의 하나님 아들의 영광을 나타낸다. 제2수난예고에는 하나님 나라와 지옥의 반제가 중심이 된 그리스도에 속한 자의 도에 관한 말씀을 결론으로 삼는다. 제3수난예고에는 "인자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오신 예수의 메시야적 역할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세째로 b와 b'는 엘리야와 모세 전승으로 세 수난 예고를 세 단락으로 나누도록 배열되어 있다. 엘리야와 모세 전승군들은 각 전승들을 묶고 있다. 그런데 이 두 전승을 배열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요소가 있다. 그것은 9:2-10의 변화산 사건이다. 변화산에서 예수께서 모세와 함께 나타난 엘리야 즉 율법과 예언의 대표자들이 b와 b'에서 전개될 엘리야와 모세 전승을 예시해 주는 단서이다.
여기에서 또 한가지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은 엘리야가 모세 앞에 나타나도록 마가가 배치했다는 점이다. 이는 독자들에게 흥미와 흥분을 자아내게 하는 구성이다. 변화산에 나타난 두 인물에 대해 9:4에서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라는 언급은 마가의 구조적 단서를 제공해 준다.


9:11-13에서 논쟁은 엘리야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다음에 이어지는 9:14-29은 엘리야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엘리야의 사역이 암시되어 있다. 여기에서 예수의 첫 이적은 벙어리 귀신들린 아들의 치유기사인데, 그 구성이 엘리야가 사르밧 여인의 아들을 살린 기사(왕상17:7-24)와 유사하다. 엘리야는 세번 기도를 했고, 아들이 다시 살아났을 때 여인은 엘리야에게 "주의 말씀"은 진실하다고 고백을 한다. 이와같이 예수는 벙어리 귀신들린 아들의 치유를 토해 이런 이적이 기도외에는 불가능하다 결론짓고 아버지의 믿음의 고백을 듣는다.
10:1-31의 전승 자료는 10:3에 분명히 언급된 모세와 관련을 맺고 있는데 심지어 10:19에는 모세의 율법이 인용되어 있다. 이 모세 전승에서 예수의 이혼에 관한 말씀(10:1-12)과 한 부자에 관한 이야기(10:17-31) 둘사이에는 어린아이에 관한 말씀(10:13-16)이 중심 에피소드로 삽입되어 있다.


11:11은 실제로 예루살렘 입성을 표현한다. 이 구절은 앞부분과 뒷부분을 갈라 놓는 역할을 한다. 이 구절로 말미암아 예수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여행인 소단락Ⅳ는 종결되고 예룻라렘안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단락Ⅴ의 단계가 설정된다.

 

b. 소단락Ⅴ(11:12-14:52)

소단락 ⅴ의 교차 대칭 구조는 다음과 같다.

+--+-----------+------------------+--------------+--------------+
| | a | b | c | d |
+--+-----------+------------------+--------------+--------------+
| |11:12 - 25 | 11:27- 12:37 | 12:38-13:2 | 13:3- 37 |
+--+-----------+------------------+--------------+--------------+
|1| | | |문제설정(13:3-|
| | | | |4)감람산위의 |
| | | | |네제자와의대화|
|α|무화과 나무|유대당국자들과권세|바리새인에대한|말세의 징조 |
| |비유(14:12-|논쟁(11:27-33) |예수의 비난 |(13:5-23) |
| |14) | |(12:38-40) | |
|β|성전정화이 |포도원농부비유 |과부의연보행위|인자의 재림 |
| |야기(14:15-|(12:1-12) |에피소드삽입 |(13:24-27) || |18) | |(12:41-44) | |
| '|무화과나무 |5회에 걸친 예수와 |예루살렘멸망 |무화과나무 비 |
| |마른사건 |유대 당국자의 논쟁|예언(13:1-2) |유와 임무맡은 || |베드로의 대|(12:13-37) | |종의 비유 |
| |화 | | |(13:28-36) |
| |(14:19-25) | | | ||2| | | |결론(13:37) |
| | | | |깨어 있으라 |+--+-----------+------------------+--------------+--------------+


+--+-----------+------------------+--------------+
| | c' | b' | a' |
+--+-----------+------------------+--------------+
| |14:1-11 | 14:12-31 | 14:32-52 |
+--+-----------+------------------+--------------+
|α|유대 당국 |유월절 음식 준비 |겟세마네의기도|
| |자의 예수를|(14:12-16) |14:32-42) |
| |죽일모의 | | |
| |(14:1-2) | | |
|β|여인의 베다|최후 만찬 |예수의 체포 |
| |니에서 기름|(14:17-25) |(14:43-49) |
| |부음(14:3-9| | |
| '|유다의 배신|감람산에서의 베드 |모든제자들과 |
| |(14:10-11) |로의 부인 예고 |한 청년의 도망|
| | |(14:26-31) |(14:49-52) |
+--+-----------+------------------+--------------+

 

이 단락은 가장 고도로 조직화된 가장 긴 단락이다. 13장의 예수의 종말론적 강화는 이 단락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며 13장의 결론 부분에 있는 "깨어 있으라"는 비유의 말씀은 이 단락을 일관하는 구조적인 실마리를 제공한다.


(1) 종말론 강화
13장의 종말론적 강화는 소단락 Ⅴ 전체의 배열을 지배하고 있다. 삽입되어 있는 각 에피소드는 이 강화를 위해 구조화 되어 있고 그것의 의미에 주의 하고 있다. d의 종말론적인 강화는 세부분으로 나누어 질 수 있다.

 

첫째 부분(13:5-23)은 사슬 구조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처음과 끝부분에 "주의 하나"( ) 말로 구성되며 각 부분의 중심에도 주의하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다.
(주의 하나) 5 23 (삼가라)
거짓주장과 미혹케 함 6 21-22 거짓 주장과 미혹케 함
너희가 ~ 들을 때 7-8 14-20 너희가 ~ 볼때
11-13
너희를 넘겨줄때에

둘째 부분(13:24-27)은 감람산에서의 예수 강화중에 인자의 재림에 관한 중요한 약속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에는 세계 창조에 등장하는 요소들이 언급되고 있으며 이와 연관되어 창조의 주의 나타남(26절)에 대해 구조화하고 있다.
세째 부분(13:28-36)에서 무화과 나무의 비유(28:29절)와 책임 맡은 종의 비유(34-36)는 인자의 재림의 때에 관한 교훈을 말하는데 이용되고 잇다. 33절의 "주의 하나"는 최후의 경고는 37절의 결론적인 진술을 예비케 한다. 그리하여 "주의 하라"는 말은 종말론적 건강화의 중심부분에 삽입되어 있다.

 

(2) C와 C'는 종말론적 강화(13:5-36)의 앞뒤로 구조화되어 있는데 한 과부의 두렙돈을 연보궤에 넣은 기사와 한 여인의 기름 부음 기사의 두여인의 행위는 종말론적이다. 이 두 사건을 통하여 마가는 위선과 유다에 의한 배신에 대해 예수는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보여주려 한다.

 

(3)a. a':무화과 나무 비유는 무화과 나무 저주와 연결되고 성전 정화 기사가 삽입된다. 여기에서 무대는 성전으로 옮겨진다. a'의 종의 비유는 14:32-42의 겟세마네 사건에서 실현되어지며 14:42절에 예고된 체포는 14:43-50에서 실현된다.
예수는 겟세마네에서 세번 돌아왔지만 두번의 기도만 나타난다. 아마도 이 에피소드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돌아온 잠자는 것을 보았듯이 13:34-36의 타국에 간 종의 주인 비유를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13장의 강화에서는 중심적 요소로서 "인자"의 영광으로 오심에 대해 선언한 반면에 겟세마네 사건에서는 "인자의 넘겨짐"이 중심적 요소로 선포되어 있다.

(4)b,b': 두부분은 상호 병행 구절이 아니지만 연속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첫부분에서 예수의 권위에 대한 도전에 대해 예수는 5회의 "응답"을 한다. 둘째 부분에서 유월절 식사 준비와 최후만찬은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하는 에피소드와 연속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c. 소단락 Ⅵ(14:53-16:8)

+----------------+------------------------+-----------------+
| a | c | b' |
+----------------+------------------------+-----------------+
|공회앞에선 예수 |심문자들 앞에선 베드로 |빌라도앞에선 예수|
|14:53-59 | 14:66-72 | 15:1-5 |
|53,54- 정황 | 67-질문 | 2a - 질문 |
|55-59-사형선고 | 68-응답 | 2b - 응답 |
| 증언 | 70a - 무응답 | 5 - 무응답 |
| | | |
| b | | a' |
| 14:60-65 | 70b - 질문 | 15:6 - 15 |
| 61a - 무응답 | 71- 응답 | 6- 8 - 정황 |
| 61b - 질문 | | 9 - 15 사형선고 |
| 62 - 응답 | | |
+----------------+------------------------+-----------------+

 

예수는 종교지도자와 빌라도에 의해 질문을 받는데 각 에피소드는 베드로가 그와 예수의 관계에 관해 질문 받는 장면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 또한 이 중심부분은 막13:11-13에서의 제자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관한 종말론적 강화와 연관된다.

 

첫쨰로 C단락은 베드로가 구경꾼들에게 심문받는데 첫째 질문에서베드로는 붕니하는 응답을 하지만 두번째 질문에서 부인은 하지만 응답의 내용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세번째의 심문에서 그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다.

 

둘째로 a와 a' 단락에서 a'의 서두는 a자료군의 마지막 장면과 관계되어 배치되어 있다. a단락의 상황 설정 부분인 14:54에서는 베드로의 모습이 소개되어 있고, 14:66-72의 베드로 부인 장면과 연결되어 있다.

 

 

2. 골고다에로의 길(15:16-24)
이 부분은 전승의 재배열을 암시한다. 15:16-20의 군병들의 희롱은 15:18의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정점으로 교차 대칭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구레네 시몬(15:21)은 골고다의 길에 등장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실제적인 십자가 지심의 간결한 요약으로 끝맺는다.
그러나 계속해서 강조되는 것은 군병들의 행위이다. 즉 예수에 대한 조롱, 구경꾼들의 모욕, 신포도주를 먹이심, 예수의 옷을 제비뽑기함 등이다. 요19:24의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는 이 부분을 갈결하게 요약해 주는 진술이다.

 

3.십자가에서 최후의 순간들(15:25-47)
+-----------+-----+--------------------------+------------------+
|Ⅰ 15:25-32|제3시|25-27:십자가에 못박는 행위|29-32:반응(지나가 |
| | | |는 자,대제사장,서 |
| | | |기관) |
|Ⅱ 15:33-41|6-9시|33-34:십자가위에서예수의 |35-36:반응Ⅰ(신포 |
| | |행위Ⅰ |도주를 먹임) |
| | |37-38:십자가위에서 예수의 |40-41:반응Ⅱ(여인 |
| | |행위Ⅱ |들) |
|Ⅲ 15:42-47|저녁 |42:46:요셉의 행위 |47:반응(여인들) |
|Ⅳ 16:1-8 |다음 |1-7: 여인들의 행위 |8:반응(여인들) |
| |아침 | | |
+-----------+-----+--------------------------+------------------+

 

마가복음의 클라이 막스 장면은 그 사건이 일어난 "시간"을 언급함으로 시작되는 연속적인 시험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단락별로 일련의 행위가 있은 후에 구경꾼들에 의한 일련의 반응들이 구조화되어 있다. 처음의 세단락에서의 반응은 여러 부류의 사람에 의해 이루어 지는데 조롱자들, 구경꾼들과 다수의 사람들, 신앙고백을 한 백부장등으로 나타난다. 마지막의 세반응은 "예수를 따랐던 여인들"에 의한 것이며 그들의 반응은 죽음, 매장 그리고 빈무덤을 보는 것이었다. 빈무덤에서의 반응은 그들이 받은 예수 부활의 메시지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십자가 사건은 마가가 기록한 34절의 유일한 십자가위의 말씀, 매장에 관한 설명, 그리고 한 청년에게서 메시지를 받은 빈무덤의 발견등으로 연속적인 구성을 하고 있다.


또한 각 사건의 반응에서는 예수를 따르지 않던 사람들의 행위가 서술된다. 첫째 반응(29-30)은 적개심을 두번째 반응(35-36)은 오해를 세번째 반응(39)은 신앙고백의 선언이다.
다른한편 예수를 따랐던 여인에 대해서 그들은 각 사건들을 "보는 것"( )으로 마지막 빈무덤은 여인들에게 두렵고 당황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16:8의 "무서워하며( )"는 복음서에서 반복되는 "도망"의 모티브 즉 14:50의 제자들의 도망, 14:51-52의 한 청년의 도망등과 같이 한 사건의 종결을 의미한다.

 

 

Ⅴ. 마가의 신학적 모티브와 예수이해

마가복음을 분석할 때 예수의 사역에 관한 두가지 신학적 모티브가 있는데 그것은 첫째로 예수의 논증거부와 침묵의 모티브와 둘째로 고난과 죽음에 대한 동의의 모티브이다. 이 두 모티브는 마가의 의도뿐만 아니라 문학적 구조를 결정시켜준 요소들이다. 왜냐하면 마가는 그의 복음서를 특수한 상황 아래에서 신학적이고 목회적 목적으로 집필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 당시 예수는 참인간이며 동시에 완전한 신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교회의 위험한 경향을 제거하기 위해 예수의 생애를 설명하기 원하였다. 또한 마가는 예수를 영광과 타계적인 인물로서의 과도하게 강조한 가현론적인 경향의 희랍사상에 대항하여 기적을 행하는 예수상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예수의 사역을 계획하였다. 그러므로 신학자로서 마가는 거짓 교훈을 비난하고 주에 관한 옳바른 신앙을 교회에 세우기를 원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사가로서 마가는 시험과 박해에 직면한 공동체에 대해서 예수의 교훈을 제시함으로서 이겨낼 수 있도록 하는데 목회적 관심을 갖고 있다. 교회에 두 기둥인 베드로가 바울이 순교한 것은 하나님의 목적과 모순되지 않는 사건이라는 것을 논증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고난받는 메시야직의 예수 이야기와 십자가를 따르는 제자들만의 영광에 이를 수 있다는 예수의 교훈의 골격안에 교회의 박해를 자리매김 하였다.
마가에서 신학은 기독론인데 그 기독론은 교회의 삶과 밀접하 게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교회의 길은 주가 이미 받은 고난의 길을 따른 것이기 때문이었다.

 

A. 표적과 기사를 거부하는 예수

 

1.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에 관한 거부(8:11-13)
a. 본문주석
본 구절은 주제가 앞부분과 관련되지 않기 때문에 독립구절이다. 11절의 "바리새인들"은 대표적인 "논쟁의 참여자"로 소개되어 있다는 볼트만의 제안은 정당한 것이다.
12절에 있는 "이 세대"( )는 바리새인에 대한 언급없이 불신앙에 대해 말하고 있으므로 "예수는 개인보다는 백성을 향해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바리새인"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마가는 이 단화를 사천명을 먹이신 급식 이야기(8:1-10)과 바리새인들의 "누룩"에 관한 교훈(8:14-15) 사이에 위치시켰기 때문에 논쟁 이야기로서 보다는 선포 이야기로 분류하는 것이 더 옳다. 이 구조에서 볼때 예수는 참떡을 나누어 주시는 분이기에 "누룩"의 비유로 적대자들의 거짓 교훈에 대해 경고한다.


8:17과 21에 있는 제자들의 애해부족 역시 표적에 대한 요구와 연관되어 있다. 이 구절은 공관복음 전승과 비교했을 때(마12:38,39, 16:1-4,눅11:16,29-32,12:54-56)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어떤 표적도 주지 않을 것이나"(8:12)는 말씀은 발전되었다. 절대적으로 표적에 대해 거부하는 마가의 본문은 가장 원상태의 전승으로 보존되어 있다. 먼저 12절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는 예수 자신에게 소급되어지는 권위있는 진술의 형식으로 되어있다.
둘째 "어떤 표적도 주지 않을 것이다( )"에서 첫단어 는 강한 부정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에서 빌려온 말이다. 마가는 이 용법을 예수의 표적에 대한 거부에 사용한 것이다.
세째 수동형 동사 (주지 않을 것이다)는 마 7:7에서 신의 호칭에 대한 완곡어법에 이용되는데 거절이 더욱 강조되게 한다.
네째 마가의 전승에서 "요나의 표적 외에는"이라는 말이 왜 마가에 빠져 있는냐는 점에 마가의 원본성의 근거가 있다. 페린은 그 이유를 "예수의 메시야직데 대한 유일하지만 완전한 증명으로 예수의 기적 행위를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마가는 "기적행위( s)"와 "표적( )" 사이를 구별한다. 이 구별이 마가의 교훈의 요점이다. 만약 요나의 표적을 언급한 Q의 형식(마 12:39 = 눅 11:29)이 원형이라면 왜 마가가 "악하고"를 뺐는지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Q의 "요나의 표적외에는"은 마16:4의 확장이며 눅 11:32에서 처럼 요나의 표적은 예수의 설교이었다. 그 확대는 눅 11:30과 17:22에서 인자의 재림과의 연구성에서 이루어져 있고, 마태 12:40에서는 인자의 수난, 장례와 부활이 요나의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b. 표적의 의미
하늘로 부터 오는 "표적"에 대한 요구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첫째로 표적에 대한 요구는 지금 까지 수행했던 것보다 더 큰 기적에 대한 요구, 둘째 바리새인의 요구는 예수의 메시야적 권위에 대한 본질 증명에 대한 요구 등인데 후자의 해석은 마 16:1의 본문을 마가에 적용시킨 것이다.
린톤(O. Linton)은 이 맥락안에서 기적의 개념이 없고 예수의 권위 문제가 중심이슈라고 보았다. 막 12:30에서 "요한의 세계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에게로서냐?"는 질문에서 처럼 초자연적인 능력이 아니라 참된 자라는 하늘로 부터 온 권위를 바리새인들은 구하고 있다.


반대로 슈바이쩌(E. Schweizer)는 당시의 기적 행위자들이 전혀 모방할 수 없는 놀라운 기적을 수행하기를 바란 것이었다고 한다. "하늘로 부터 '오는'"은 묵시적 성격의 우주적 기적을 의미한다.
또 다른 주석은 본문의 맥락에서 "신적 권위를 가진"의 의미인데 하나님으로부터 보냄받은 자란는 예수의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는 하나님에 의해 인가된 합법적인 표적을 요구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바리새인이 원했던 것은 예수의 기적이 아니라 사 40-66장(특히 61:1) 전승에 있는 복음의 선포자로서 자신을 확증할 수 있는 종말론적 예언자를 기대했다.
마가는 이미 1:15의 예수의 선포에서 이 개념을 이용했다. 마가는 1:1에서 복음을 집필한 의도를 밝혔고 그는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사자와 신적 대리자로서 예수를 그린다. 그래서 이 단화에서 중심문제는 예수가 무슨 권위를 소유하고 있는가의 문제를 푸는 것이다. 마가에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선동자로서 그의 칭호를 요구한 것인가? 분명히 마가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왜 예수는 마가복음에서 단호히 거부했는가? 저자 마가는 표적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요구가 예수를 거부해야했던 유혹이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먼저 마가가 "구하니"( ) 동사를 사용한 것은 마가의 의도의 일부분이다. 이 동사는 주로 예수를 죽일려고 한 적대자의 적대감(11:18, 12:12, 14:1,11,15)을 언급하는데 사용된다. 1:37에서 베드로는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라고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고, 3:32에서 "모친과 형제들이 밖에서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 16:6에서 " -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 그래서 그들 모두는 잘못 구하는 것에 대해 책망받는다.
둘째 "시험하여( )"(11절)는 1:13에서 사탄에 의해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사용된 용어이다. 그 시험이 사탄적이던지 혹은 인간에서 기원된 것이던지 마가의 목적은 예수의 전 사역이 악에의 시험에 지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데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예수께 속한 것이었다. 마찬가로 8:11에서 바리새인들이 매혹적인 내용으로 접근하지만 선택은 예수께 있다. 그러므로 "시험하여"라는 말은 더 강한 의미의 악에 유혹이었다.
세째 8:12의 "마음속 깊이 탄식하시며"는 마가에서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성령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2:8과 9:19에 있는 것과 같은 예수의 절망을 강조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대화는 돌발적으로 예수가 그 장소를 떠남으로서 깨어지기 때문이다.

 

c. 마가의 의도
마가는 예수의 이적 사역과 그의 참된 권위 사이에 확고한 구별을 위해 이 짧은 단화를 삽입하였다.
첫째, 마가는 예수의 이적행위( s)의 의미와 표적( )의 가치 사이를 구별하기 원한다. 마가복음에서 이적의 역할은 여러가지인데 6-8장의 이야기군에 속한 s의 개념을 분류할 수 있다. 그런데 이 6-8장에서 기적 이야기의 중심은 현재적 구원을 구체화시키는 자로서의 예수이다. 그러므로 마가는 기독론적 의미를 나타내어 그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심을 강조하려 하고 있다.


군중을 먹이신 이야기는 유대인(6:34-44)과 동시에 이방인들(8:1-10)을 위한 예수의 현재적 구원의 표적이다. 바다위를 걸으신 이야기(6:45-52)은 제자들이 놀라게할 뿐만 아니라(51절) 예수가 고난중에 도우신다는 약속(50절)이다. 또 예수안에서의 하나님의 우주적 구원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 치유 이야기(7:24-30)에 나타난 메시지이다. 귀머거리와 벙리의 치유(7:32-37)와 벳세라의 완전한 기독론적 중요성을 서술하고 있다. 7:37의 "그가 잘하였도다"는 말은 창 1:31 (LXX)을 회상시켜 주는데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예수도 행하신다는 의미가 분명하다 귀머거리와 벙어리 치유는 사 35:5f에 있는 하나님 통치의 새 시대의 표적이다. 8:22-26의 맹인 치유는 8:18의 제자들의 무능함이 어떻게 치유될 것인가를 보여준다. 모든 사람에게 희망이 있다. 그러므로 이적행위는 예수안에 나타난 하나니의 현존과 활동의 모습이다. 그러나 마가복음에서 기적은 직접적으로 예수의 메시야직을 증명하는데 가치가 없다.

 

2. 변화산에서의 표적거부

변화산 이야기(9:2-8)은 예수의 표적에 대한 거부의 또 다른 예이다. 여기에서 마가는 엘리야와 모세의 역할을 강조하여 두사람의 역할을 예수와 연관시키면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7절)로서 예수의 유일성을 강조하려 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상대적인 관점에서 엘리야와 모세는 죽지 않고 영광중에 하늘로 직접 들림받았던 자이다. 그래서 마가의 드라마에서 예수는 마지막 시대의 종말론적 예언자이며, 그는 그의 전임자들의 범례를 따라 하늘로 올라가 종말에 재림하실 분이다.
그러나 그는 산에서 내려오고, 인자의 고난과 죽음에 관한 말씀을 한다.(9:9-13) 그러므로 변화산 기사에서 마가는 어떤 정황의 변화도 일으키지 않았다. 산 정상에서 합법적인 소리가 짧은 순간 구름속에서 들려 왔지만 예수는 그를 모욕하고 죽일 세상으로다시 내려온다. 따라서 그가 예루살렘을 향한 최후의 입성을 준비할 때까지 예수는 어떤 표적도 허락하지 않았다.

 

3. 기적행위자로서의 예수거부

13:21-23의 마가의 묵시에 의하면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일어날 때 그들은 예수가 거부했던 방식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들은 이적과 기사를 보여줄 것이지만 교인들을 혼란에 빠드리고 당황과 의심을 일으키기만 한다.
그런데 마가에서 참아들과 하나님의 궁극적 계시로서 예수상은 "표적과 기사"가 거부되어지는 곳에 있다. 왜냐하면 표적과 기사는 예수의 참된 성격을 왜곡할 뿐만 아니라 참신앙의 길을 막기 때문에 비합법적인 것이다.
마가의예수가 치유이적을 행한 동기는 "불쌍히 여기사"(1:41, 6:34, 8:2, 9:22, 10:47f)라는 말로 마가는 표현한다. 그래서 마가는 그런 기적을 예수의 권위와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기위해 이용하지 않는다. 어떤 곳에서도 마가는 기적 행하는 자로서 예수의 능력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없다.


막 6:1-6에서 예수의 권능은 나자렛 사람들의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제한되었다. 이와같이 능력은 신앙과 상관성을 갖고 있다. "듣고 놀랐던"(6:2) 사람들이 "예수를 배척했던"(6:3) 사람이었다는 곳에서 마가는 분명히 기적이 불신앙과 관계있음을 말한다. 마가복음에서 "신앙은 자신 혹은 타인을 위해 축복을 얻으려는 뼈아픈 노력으로 규정되어지고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이 인간의 요구를 채워주신다는 확신"이었다. 그러므로 마가의 예수는 거짓 예언자, 메시야로 사칭한 자가 결코 아니라 예루살렘으로의 험난한 길을 걸어가 수난을 받기를 결심했던 분이다.

 

4. 기독론적 고백에서의 예수

막 1:1의 기독론적 진술은 1:11, 9:7의 하나님의 선언과 15:39의 인간의 고백에서 예수의 참된 인격의 선포임을 보여준다. 사실 마가에게 유일한 참된 표적은 외적인 패배의 비극과 동시에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계시를 동시에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십자가뿐이다. 성전 휘장의 갈라짐을 본 백부장의 고백은 하나님의 아들의 고난받는 모습에 대한 고백이다.

 

B. 침묵하는 예수

예수의 침묵은 14:55-64에서 현저한 동기가 된다. 그런데 이 부분은 베드로의 부인기사 사이에 삽입구조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 어떤 신학적 강조점이 있다. 그것은 예수의 침묵인데 예수는 체포로 부터 죽음까지 단지 세번만 말한다.
첫째 14:62은 예수의 메시야직 선언을 받아들이는 말씀이며, 둘째 15:2의 말씀은 빌라도 선고의 정당성을 반영하는 선언이며, 셋째 15: 34은 하나님께 행한 고독한 외침이다.

 

1. 대제사장 앞에서의 심문(14:55-64)

여기에서 마가가 표현하고 있는 침묵의 요소는 가야바 앞에서 침묵하는 예수(61절)와 조롱에 대해 침묵하는 예수(65절)의 행동에 나타나 있다.
먼저 가야바 앞에 침묵하는 예수에 대한 배경은 사 53:7이다. 그런데 이 배경은 두가지 방향으로 해석되고 있다. 베스트(E. Best)는 사 53:7은 완전한 침묵을 요구했기 때문에 그 예언의 성취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마가에서의 침묵은 성서적 결정이라기 보다는 극적인 것이며 마가는 이사야의 수난의 종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 53장에서 언급한 어린양은 완전한 침묵을 강조하기 보다는 수난을 종으로서 복종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베스트의 주장은 타당한 것이 될 수 없다.


한편 린네만은 예수의 침묵의 정확한 자리는 15:5에만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공회앞에서의 심문의 지배적 동기는 사 53:7과 시 38:13-16에 예언된 예수츼 침묵이기 때문에 그의 결론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므로 61절의 "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동사는 계속적 용법으로 되어있다. 여기에서 마가는 계속해서 그의 침묵을 말하고 있다.


두번째 침묵의 요소는 65절에 나온다. "혹은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의 얼굴을 가리우고 주먹으로 치며 가로되 선지자 노릇을 하라 하고 하속들은 손바닥으로 치니나"는 이 조롱의 장면은 사11:2-4;사50:5f에 의존하고 있다. 사 11:2-4에는 선지자는 눈으로 볼 필요도 없이 냄새를 맡음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되었다. 이것이 메시야 신분을 확인하는 전통적 관례이다. 로 이어는 사 50:5f과 막 14:65 사이의 언어의 유사성을 지적하면서, 수난의 종의 역할을 하는 예수를 그리려는 것은 마가의 신학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배경은 노예를 때리거나 아이들의 몸짓으로 모욕을 주는 헬레니즘적 정황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 50자엥 기초해 있다.


결론적으로 이 65절은 58절의 성전파괴자라는 예수의 관한 선언과 관련된다. 예수의 성전 예언이 유대인의 눈에 거짓 예언으로 보였기에 65절에 있는 난폭한 행동의 성격을 밝혀준다.
따라서 마가는 이 침묵의 동기에서 모욕을 참아야 할 죄인의 겸허함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마가는 사 11:2-4와 사50:5f의 거부되는 예언자의 이야기를 선택한 것이다.

 

2. 십자가 위에서 내려오라(15:30-32)

고독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해석은 십자가위에서 절정에 이른다. 이 장면은 두 범죄자가 함께 매달리고 성전을 파괴하고 새 성전을 짓는 자라는 비난이 반복되는 장면이다.


여기에서도 나타나는 침묵의 동기는 다음과 같다.
15: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 지나가는 자들
15: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하라" - 유대인 지도자들
여기에서 마가의 강조는 동사 "우리를 보고( )"에 있다. 8:11-13의 바리새인들처럼 유대 지도자들은 여전히 표적을 갈망하고 있다. 이런 합법적인 표적의 요구는 십자가에서도 요구되었다. 십자가에서의 요구는 예수가 무엇이낙 행하거나 하나님께 무엇을 해 주기를 호소하라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조롱자들의 입들 통해 예수의 권위는 타당하게 선언되어진다. 믿음이 없는 세대에는 어떤 표적도 주어지지 않는다9:19). 표적은 신앙을 확인시켜주는 역할만을 한다.
그러므로 외적인 증거에 의한 신앙은 불신앙보다 못하다. 유대 지도자들의 표적 요구는 패배와 수치에 처해있는 십자가에서 조차도 그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비밀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슈바이쩌(E. Schweizer)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내려왔다면 놀라운 기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그가 유대인의 왕 메시야가 아니라 단지 초인이었다는 것을 증거해 줄뿐이다. 이 사실은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이나 초인과 다른가를 보여준다. 그는 스스로 주장하지 않아야 되고, 그는 권능이 있고, 대적자들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이 사실이 예수 수난의 메시지이다."
그들은 이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고 제자들은 불신앙 때문에 도주했다. 그러나 이 비밀을 벗기는 사건은 예수의 운명의 순간에 이루어진다.

 

C. 고난과 죽음에 대해 동의하는 예수

이 동기는 베다니에서의 기름부음, 최후의 만찬, 제자들의 버림과 겟세마네 장면에서 나타난다.

1. 베다니에서의 기름부음(14:3-9)
마리아가 예수의 몸에 향유를 부은 사건을 예수가 장례의식으로 해석함으로서 자신의 죽음에 대한 동의를 한다. 마가는 이 사건에서 예수의 메시야직에 대해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지 않았는가를 보여줌과 동시에 멀지 않은 죽음에 대한 예견을 하신 예수이 모습을 알리려고 한다. 예수는 자기 죽음의 의의를 말하지 앟고, 죽음의 사실만을 말한다. 이렇게 함으로 예수는 수난데 대해 동의했다.

 

2. 최후의 만찬(14:22-25)
그는 최후의 만찬에서 유월절 음식을 자신의 희생적 제물로서의 죽음과 동일시 함으로서 고난과 죽음에 대한 동의를 한다. 떡은 죽음으로 넘겨질 자신의 몸이었고 자기의 희생적 의미를 포함한다. 잔은 계약적 희생으로서의 폭력적 죽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하나님과 백성사이에 피로 맺은 언약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는 최후의 만찬에서 자신의 고난에 동의 한다.

 

3. 제자들의 버림(14:27-28)
예수는 제자들의 운명과 관계되는 것을 예언하심으로서 자신의 죽음에 동의했다. 양무리의 흩어짐은 고난의 때를 지시하고, 버림당함의 벽을 넘어 모든 이방인들을 구속하려는 약속의 말씀을 포함함으로 그는 죽음에 동의 했다.

 

4. 겟세마네(14:32-42)
여기에서 그는 죽음에 대한 최후의 동의를 한다. "잔"은 인간 예수의 고난을 의미하고, 기도 내용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 순종의 표현들이다. 마가는 이 장면에서 예수의 수난이 하나님의 뜻으로서 필연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예수는 궁극적인 복종을 함으로서 종과 신실한 아들로서 하나님에게 자신의 생을 바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운명을 인간적인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로서 맞이한다.

 

Ⅵ. 결 론

지금까지 필자는 마가복음의 중심 주제인 키아즘 구조 분석에 의한 이야기 기독론으로서의 마가복음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마가복음에 관한 기독론적 이해가 단순히 칭호 기독론을 중심으로 연구되었지만 마가복음서를 기록한 이유를 답변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마가복음서가 예수 이해와 관련이 있다고 말한 점은 하나의 연결점이 되었다.


본 논문은 저자 마가의 집필의도와 신학적 관점에 관한 문제를 제기 하였다. 필자는 제접근법들을 종합적으로 사용함으로서 마가의 이야기 기독론의 문제를 탐구하였다. 신학자들은 마가설화에 비밀요소와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침묵명령이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브레데 이후 "메시야 비밀" 은 마가기독론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메시야 비밀의 모티브가 마가복음서안에 있는 유일한 기독론적 관점인 것은 아니었다.


문학적 관점에서 볼 때 비밀의 모티브는 마가 이야기의 문학적 특성이므로 비밀은 마가의 신학적인 구성에서 중심적 특징으로서가 아니라 [저자 - 청중]의 설화표상의 역동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와같은 이야기 기독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자는 마가복음의 전체적 구조문제를 탐구하였다. 마가로 하여금 "복음서"를 집필케한 마가의 신학적 의도로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마가가 예수 전승들을 배치시켰던 전체적 구조를 이해한다면 일보전진하게 될것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마가가 전승들을 병렬시키고, 구조화하고 요약문들을 작성한 것을 검토함으로 마가의 집필의도를 발견했었다.


그런데 마가의 신학적 의도를 찾는 한 방법으로서 마가의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는 필연성은 마태와 누가보다 마가에서 더욱 절실하다. 마태와 누가는 이미 마가라는 근원자료(source-material)을 가지고 있기에 그들이 신학적 동기에 의해 자료를 다루었던 방식을 관찰 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마가에 대한 근원자료(source)를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마가가 자료들을 사용했던 방법을 찾음으로서 그러한 자료들을 현재의 마가복음에서 구별지을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마가의 경우에 마태와 누가에서 얻을 수 있는 신학적 목적에 대한 의미심장한 단서들을 찾을 수 없기때문에 마가복음의 전체구조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문제에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다. 그러나 마가복음의 구조에 대한 완전한 일치는 없다. 그러나 필자는 마가 연구의 핵심으로 신학자들이 동의할 수 있는 마가복음의 구조적 특징을 키아즘 구조에서 찾았다.


마가복음 이전에 '복음'으로 알려진 문학장르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러한 이야기(Narrative)의 창작 그 자체는 예수 전승들을 해석하는 새로운 방식의 시도를 의미한다.
마가는 개별 전승들을 나자렛 예수의 생애라는 전체적 해석의 통제 원리하에 이야기화 하였다. 마가는 전승들이 예수의 생애라는 더 광범위한 이해에 이를수 있는 이야기의 골격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마가는 배열 구성 요약이라는 세 방법을 사용하여 이야기로서 마가복음을 창조한다.
첫째로 마가는 전승되어온 개별적인 이야기들을 자신의 신학적 모티브에 따라 배열하였다. 마가복음에 포함되어 있는 대부분의 이야기들과 말씀들은 특별한 맥락없이 원시 기독교 공동체안에서 순환된 전승들이다. 그래서 최초의 복음서 저자인 마가는 자유롭게 그 전승들을 수집하여 배열할 수 있었다.
둘째로 마가는 개별전승들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개별전승 자체를 단순히 개별적인 단위로서 보다는 긴 이야기의 일부로 역할할 수 있도록 이 개별전승들을 긴 이야기로 만들었다.
세째로 마가는 간결한 요약문과 해석학적 주석들을 이용함으로 이야기를 구성한다. 마가는 그의 이야기에 대한 연속성을 제공하기 위해 "짧은 요약문과 해석학적 주석"을 삽입하였다.
한편 마가 저자에 의한 이야기 구성에 주의함으로서 저자의 의도를 찾기 위한 또 하나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마가가 초기의 예수 전승들로부터 "복음"이라는 문학 장르를 창작했던 방법을 찾는 것은 마가복음의 전체적 구조와 신학적 의미에 관하여 질문하는 것과 동일하다.


제 4장의 키아즘에 의한 본문 구조 분석에서 볼 때 저자 마가는 세례요한의 활동을 예수의 활동앞에 놓음으로서 복음서 저술을 시작하였다. 세례요한에게서 처음으로 예수를 보며 십자가와 부활에서 예수의 마지막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복음서의 ⅓에 해당되는 앞부분의 갈릴리 사역 그리고 또 ⅓이 되는 예루살렘에서 죽음으로 끝나는 수난사는 마가복음이 수난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유대 당국자들이 3:6에서 예수를 죽일 결안을 하고 11:2의 모의에서 분명하다. 첫번째 결의는 갈릴리에서 적대자들과의 논쟁의 말미에 둘째 결의는 수난사에 계속 이어진다.(11:18, 12:12, 14:1-2) 예수의 길에는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마가복음은 크게 두부분으로 나누어 지는데 첫부분(1:1-8:21)은 [갈릴리]에서 예수의 출현과 그의 선포로 서문은 종결되고, 마가복음 전반부를 통하여 갈릴리 바다는 중요한 많은 에피소드의 무대로 나타난다. 첫제자들의 소명으로 시작하여(1:16-20) 그 바다위 배안에서 예수와 제자들의 논쟁으로 끝이 난다.(8:14-21) 그들이 벳세다에 도착한 후에(8:22) 갈릴리 호수에 대한 언급은 사라진다.


갈릴리 바다는 1:16-3:19에서 제자들의 소명과 최종적인 선택이 이루어 지고, 4:35-41의 바다에서의 폭풍, 6:45-52의 예수가 물위에 나타나심의 기사에서 보듯이 각 단락들의 중심적인 사건의 무대이다. 그러므로 전반부는 갈릴리 바다를 중심적인 무대로 하여 마가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후반부(8:22-16:8)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리적 무대는 예루살렘이다. 첫단락(8:22-11:10)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여행중에 무대가 설정되며 중간단락(11:12-14:50)은 예루살렘 주위에서의 예수 사역에 관심하고 마지막단락(14:52-16:8)은 예루살렘에서의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기록하고 있다.
마가는 예수의 기적행위들 보다 예수의 교훈에 더 권위를 부여함으로 교훈의 우위성을 강조한다.(1:21-28) 이러한 방식으로 마가는 예수 기적들에 대해 재해석을 한다. 즉 예수의 기적행위안에 역사하는 능력은 그의 말씀속에 역사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 명제가 마가에게 그의 말씀과 행위들을 기사를 집필토록 결정케 했던 이유이다.
결론적으로 마가의 구조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기독론이 복음서 전체를 하나로 포괄하고 있다.(1:1,11; 15:39) 특히 15:39의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론적 백부장의 고백은 저자가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곳이다. 이 고백은 마가의 예수 이야기에서 계속되는 찬송과 이사람이 누구냐라고 하는 질문을 총괄하는 그리스도론적 결론이다.

본 연구에 대해 평가를 하면 마가 신학에 대한 다양한 접근법의 모델은 마가의 주제와 관계된 고난받는 메시야직과 제자도에 관한 광범위한 견해를 제시해 준다. 그러나 이 모든 방법들 중에는 몇가지 공통적인 경향이 나타난다.


첫째로 예수의 교훈이 아주 두드러 진다는 점이다. 그의 교훈은 그가 행한 기적에서 보다 더욱 권세와 권위를 갖고 있다. 둘째로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예수의 메시야직에 관한 문제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 무엇인가 ? "라는 제자도의 문제와 분리되어질 수 없다는 점이다. 예수는 공적으로 그의 적대자들을 대항하여 자신을 변호한적이 없없다. 결과적으로 제자들은 수난시에 서술된 예수의 승리에 대한 유일한 공적증언자 들이다.

세째로 신학자들은 점차 마가공동체의 정황에 대한 해석의 열쇠가 A D 60년대말 팔레스틴의 혼란에서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는 점이다. 결국 마가의 기독론은 거짓 메시야주의, 거짓 예언자와 고난 받는 특수한 정황의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 예시야로서의 예수에 대한 신앙 혹은 재림에 대한 신앙이 그 당시의 살아있는 기독교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 복음서의 서두에서의 예수의 권세와 영광에 관한 강조는 고난받는 에사야와 제자들의 역설적인 모습 같이 메시야로서의 예수에 대한 기독교인의 확신에 있어서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은 단순히 예수 혹은 마가의 적대자로서 취급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독자들에게 예수 이야기와 접촉하게 하는 매개자이며, 청중들이 그 이야기를 제자도의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한다.
결론적으로 이야기(Narrative)그 자체는 이야기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들의 표현의 차이는 해석학자와 방법상의 차이이다. 편집과 장르에 대한 설명은 마가이야기에 관한 주장을 제한하게 한다. 또한 이야기(Narrative)는 단순한 메시야 칭호의 수집 혹은 추상적인 표상의 기독론이 결코 할수 없는 예수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제시해 준다. 마가는 그의 독자들에게 백부장들에게 백부장의 판단이 그들 자신의 판단이 되도록 도전을 준다.

 

참고문헌

Ⅰ. 성서원문(Text)

Aland, Kurt. ed. The Greek New Testament. Stuttgart:United Bible society, 1983.

문상희. "마가복음서 연구". [기독교사상] 2, 1961:84-99.
안병무. "수난사에서 본 마가의 신학". [신학사상] 3, 1973:5-26.
채 위. "제2이사야에서에 나타난 수난의 종과 예수". [기독교사상] 7, 1965:78-87.

 

blog.naver.com/chunr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