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서언에 나타난 종말론구조
- 1: 1-13 중심으로 -
.서 론
A. 연구목적 및 연구사
작금에 팽배해 있는 극단적 종말론은 교회 회중은 물론이고 많은 비신자들의 주목거리가 되고 있다. 그 이유는 1992년 10월 28일에 휴거가 있다는 일부 극단적 종말론의 파급으로 혹은 학교, 직장과 가정을 버리고 집단 거주하기도 하고 길거리나 역(驛) 주변에 다니면서 10월 28일 휴거를 회치며 사회적인 혼란을 야기시켰으나 허위로 드러나므로 일단락 되었다. 각 신학잡지들은 종말론에 대한 특집을 낸바 있다. 이러한 때 성서 특히 신약성서 중에서 최초의 복음서에서는 어떻게 종말사상을 언급하고 있으며 종말사상에 당혹하는 성도들에게 해답을 제시한 마가의 메시지는 무엇인지를 살펴보며 연구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신약성서 전체의 기본구조는 종말론이다. 종말론이란 역사말(歷史末)과 시간말(時間末)과 관계있는 사상과 지식을 말한다. 이것은 종말에 하나님이 역사 안으로 개입하여 들어오셔서 모든 것을 종결짓는다는 사상이다. 종말의 도래는 '새로운 시작'(a new Beginning)을 의미한다. 다시말하여 하나님의 새 시대 즉 메시야 시대의 시작이다.
종말론"eschatology"(헬라어 : εσχατοS)은 마지막이라는 뜻을 의미한다. [종말론]이란 말은 세상의 종말 시에 나타날 사건들이란 뜻이지만 주석가의 해석적 입장에 따라 종말론에 대한 견해가 차이가 있다. 일찌기 슈바이츠(A. Schweitzer)은 그의 저작 <>에서 예수가 세상의 임박한 천재지변적 종국과 묵시적인 하나님 나라의 급작스런 도래를 선포하는한 유대인 묵시주의자라고 해석하였다(철저 종말론). 러나 그 예수는 종말은 오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는 잘못된 환상 속에서 죽었다고 해석하였다.
다드(C. H. Dodd)는 [실현된 종말론]을 바울로부터 예수 자신에로 소급시켰고 그것을 신약성서 신학의 중심사상으로 만들었다. 예수의 인격과 선교속에 종말론적 위기는 현존하였다는 것을 말한다. 즉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다고 하는 해석이다. 실상 바울과 초대교회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속에서 메시야 기대가 실상 시작되었다고 믿었다.
래드(G. E. Ladd)는 다드(C. H. Dodd)가 실현되지 않은 미래적인 종말론의 잔해(residue)가 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 완전히 실현된 종말론의 자기 견해를 조정했다고 말한다. 다드의 실현된 종말론을 예레미야(Joachim Jeremias)는 '실현 과정에 있는 종말론'이라고 표현할것을 제안하였고, C. H. 다드는 이 비평의 타당성을 인정하여 그의 책 [기독교의 설립자, The Founder of Christianty]에서 "하나님 나라는 현재적 경험인 반면에 또한 소망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를 초월하는 완성을 향한 소망이다"라고 초기의 그의 견해를 수정하였다.
래드(G.E.Ladd)의 불트만(Rudolf Bultmann) 인용글에게 , "예수는 단지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도래를 알리는 유대인 묵시주의자일 뿐이다. 불트만은 예수와 그의 묵시적 메시지가 신약신학의 한 부분이 아니라 유대주의에 속하는 것이다. 예수의 메시지와 다른 유대적 묵시주의자들의 메시지와의 한가지 차이점은 예수가 종말의 임박성을 주장했던 확실성(certainty)이다. 이 확실성은 너무나 강력해서 예수는 미래 하나님 나라를 실재에 돌입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현재가 아니며 그것은 밝아오는(dawning) 중이다." 불트만의 영향을 받아 수 많은 학자들이, 예수의 주된 강조는 미래의 묵시적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이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도래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종말론보다 임박성이 중심이 된다.
후기 독일신학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강조점은 하나님 나라는 묵시적이고, 미래적이며, 임박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재로 전적으로 미래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너무나 가까와서 그것의 존재가 느껴질 수 있으며 그것의 능력이 경험될 수 있다는 이 견해는 광범위하게 수용되게 되었다. 하나님 나라의 현존에 대한 말들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이미 진행 중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학자들은 이 철저 종말론과 실현된 종말론에는 양 자 모두에 진리가 있다고 인정한다. 구약성서의 희망은 어떤 실재적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설교 속에서 성취되었고 , 반면에 이 희망의 완성은 종말론적 완성을 기다린다. 이것의 의미하는 바는 구약성서의 종말론적 구원의 약속이 두가지 구원행동들 속에서 성취된다는 의미인데, 즉 역사속에서 예수의 사역과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그의 재림 속에서 완성(성취)된다는 뜻이다.
미래적 종말론과 실현된 종말론과 종합을 시도한 가장 중요한 연구서들 중의 하나가 큠멜(W.G.Kummel)의 저서 [약속과 성취 : Promise and Fulfilment]이다. 종말(eschaton)이 예수 인물 안에서 이미 현존했다는 것을 인식하였고, 그는 예수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도래를 선포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말한 사람이다. 그것은 한 세대 안에 올 것이며, 그러나 아무도 그 때를 정확히 모른다. 그렇지만 예수는 자기 자신의 인물 안에서 효력을 발하고 있는 이 미래 종말론적 완성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또 큄멜은 엄격하게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현시(顯示)를 예수의 인물에 제한시킨다. 이와같이 하나님 나라가 예수 의 인물, 행위 , 사역 안에서 인간 속으로 들어 왔다는 큄멜의 견해에 동의한다. 예수 안에 있는 그것의 현존(現存) 때문으로 인하여 그것이 그의 제자들에게 경험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본다.
예수의 세계관(世界觀)은 묵시적인 것과 완전히 대립된다. 왜냐하면 세상의 임박한 종말에 대한 그의 선포의 중요성은 묵시적 묘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종말을 준비하도록 사람들을 지금 깨우고 있다는 사실에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세우신 목표를 향해 진행하는 '역사의 종말'에 직면에 있기 때문이다. 임박성의 실재 의미는 시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확실성과 현재에 대한 그것의 영향력에 있는 것이다.
이 [실현된 미래적] 종말론의 구조는 다양한 신약성서의 사상속에 있는 통일적인 요소이다. 그것은 또한 모든 신 약성서의 진리를 성격상 본질적으로 종말론적인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B. 문제제기 및 연구방법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종말론에 관한 연구는 대개 이 종말론적인 것이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는가에 대한 시간연구에 불과하였다. 최초의 복음서의 저자 마가는 그 당시 팽배해 있던 종말사상에 직면해 있는 신자들에게 종말의 시간을 제시하려고 그 복음서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정한 종말의식이 무엇인가를 그의 복음서에서 기독론을 통해 설명하였으며 이것을 통해 신자들을 일깨워 믿음을 굳게 가질 것과 끝까지 환란을 참음으로서 구원을 얻도록 하는데 사용하였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 서언(1:1-13)에서 이미 그의 종말사상을 나타내고 있었으며, 이 종말사상은 13장에 가서 그 절정에 달한다.
첫째로 선지자 요한의 출현은 종말론적이며, 둘째로,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의 성령의 강림사건은 종말론적이며, 세째로 예수의 수세(受洗) 후 사탄과의 투쟁(鬪爭)이 종말론적이다. 이렇듯 서언에서 종말론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본 소고의 연구방법은 역사 비평 방법, 편집 비평 방법, 문헌(구조) 비평 방법과 주석적 고찰을 통해서 기술하고자 한다.
따라서 제 1장 서론에 이어서 제 2장에서는 마가복음서의 삶의 정황, 제 3장에서는 집필동기와 문학적 구조, 제 4장에서는 서언(1:1-13)의 본문주석, 제 5장에서는 서언과 13장의 관련성 연구, 제 6장에서 결론을 맺고자 한다.
II. 마가복음서의 삶의 정항
흔히 어떤 주제를 놓고 연구할 때, 그 한가지 주제 자체만으로 진정한 연구를 할 수 없다. 주제의 배경은 그 주제의 핵심은 아니나 적어도 주제의 위상을 연구하는데 불가피한 이해이다.
마가복음서를 저자가 저술할 때의 그 시대적 상황이 있고 그 속에 공동체가 존재하며 저자로 하여금 복음서를 쓰게한 것이다. 그 당시의 마가의 삶의 정황은 유대전쟁 전후로 지극히 심각한 상황이었다고 고려되며 그러한 위기적 정황에서 복음서를 저술하였을 것이다. 그러면 그 정황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신약성서 시대의 헬라 - 로마적 배경을 규명하기 위하여 첫째로 주후 1세기의 정치적 상황, 둘째로 사회적 상황, 세째로 종교적 상황과 그리고 헬레니즘의 영향을 통하여 마가복음의 삶의 정황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A. 기원후 1세기 로마제국과 정치적 상황
헬레니즘은 알렉산드 대왕(주전 356-323년)의 통일로 비롯된다. 그는 13년 만에 동부지중해 세계 전체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의 꿈은 "하나의 세계"(oicumene), 또는 한 위대한 "세계도시"(cosmopolis)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알렉산드의 정복은 결과적으로 "근동전체에 걸친 하나의 거대한 통일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헬레니즘을 보급하였으며, 비록 정치적으로는 아닐지라도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지브랄타르(gibraltar)에서 인도의 펀잡(punjab)까지 일종의 혼성 외국어인 그리스어 코이네(Koine :'공통어' 혹은 '공용어')를 사용케 함으로써 하나의 세계를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이와같이 시작한 헬레지즘화의 과정은 로마제국의 시작(주전 24년)에서 로마제국 이후까지 계속이 된다. 그 이유는 로마인들이 그리스 문화를 계속 보급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렉산드 대왕이 정복을 통하여 이루어 놓았던 거의 무한한 판도는 마케도니아의 지배자인 그가 죽음으로 곧 다시 붕괴되었다. 그렇지만 희랍어와 생활습관은 그의 마케도니아 장군들이 나누어 다스렸던 영토 내에서 계속하여 강한 영향력으로 지속되어 갔다.
로마인들은 카르타고와의 치열한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자 그들은 기원전 2세기 중엽부터 그들의 관심을 희랍과 동방으로 돌리게 되었다. 헬라주의와 만남에서 로마인들은 희랍인들의 예술과 학문을 물려 받았는데, 그들이 물려받은 유산을 보존하는 것이 로마인들의 의무로 알았다. 이 유산은 강력한 로마제국을 통해서 헬라 - 로마적인 문화와 문명으로 굳어졌으며 더 넓게 보급되었다.
로마제국의 최초의 황제 옥타비우스(Octabius)가 안토니우스(Antonius)와의 악티움(Actium)전쟁에서 승리하여 로마로 돌아오자 그는 황제(Imperator) 혹은 군대의 최고 사령관이 되었으며, 로마 원로원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Augustus : 지존자)와 프린셉스(Princeps : 원로원의 제 1인자)라는 칭호를 추가로 주었다. 이로써 명실공히 주전 27년에 로마제국이 탄생했으며, 제국을 튼튼히 한 결과 평화와 안정의 새 시대(Pax Romana)를 구축하였다. 그의 제위 기간에 나자렛 예수가 탄생하였다.
주후 14년에 그의 뒤를 이어 티베리우스(Tiberius, 주후 14-37년)가 계승하였고, 그의 통치하에서 본디오 빌라도(주후26-36년)가 유대와 사마리아의 총독으로도 임명되었으며, 이즈음에 세례요한이 팔레스틴에 등장하였으며(눅3:1), 나사렛 예수가 그 땅에서 활동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 의해서 빌라도 총독에게 넘겨져서 사형선고를 받고 치욕적인 십자가형을 받아 처형되었다.
티베리우스(Tiberius)의 조카아들 가이우스 칼리굴라(Gaius Caligula : 37-41년)가 25세에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방종한 생활과 그의 군주 지위를 神과 동일한 것으로 높이려고 유대인들을 강요하여 자신의 동상(銅像)을 예루살렘 성전 안 지성소에 세우게 한 것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성전 제단에 돼지를 제물로 바친것 만큼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는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의 계획과 통치는 끝나게 되었다. 그는 칼리굴라의 숙부 클라우디우스( Claudeus, 주후 41-54년)가 황제로 추대되었는데, 그의 재위기간에 로마에서는 반 - 유대인 정책이 있었다. 그 이유는 십자가에 달린 나사렛 예수가 이스라엘의 메시야인 그리스도라는 말은 소요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고, 클라우디우스가 즉시 추방명령을 내려 유대인들이 수도 로마에서 추방당하게 되었다. 이때 모든 유대인들이 로마를 떠났던 것은 아니더라도, 회당에 모이거나 예배를 드리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유대 기독교인들은 이 명령으로 인하여 화(禍)를 입게 되었다(행18:2). 그후 네로황제에 의해서 클라우디우스의 칙령은 철회(撤回)되어 유대인들은 다시 로마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후 54년 클라우디우스는 그의 네번째 아내 아그립피나에 의해서 독살되고, 그녀의 전 남편의 아들인 네로가 황제가 되었다. 이때 네로가 17세었으므로 처음에는 친위대의 장관들과 철학자 세네카의 도움으로 섭정하는 동안은 평안을 유지하였으나, 네로가 권력을 잡자 모든 상황은 악화되었고, 그의 권력에 방해되는 자들은 모조리 제거하였다.
주후 64년 로마에서 대화제가 발발하여 로마시의 2/3 이상이 잿더미로 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네로가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계속 퍼져가자 급기야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放火犯)으로 몰아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도록 지시하였다. E. 로제는 타키투스(Takitus)의 말을 인용하여 "기독교인들에게 동물 가죽을 씌워서 사나운 사자로 하여금 살을 물어뜯게 하면서 기독교인들을 조롱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박게도 하였으며, 콜타르를 발라 불을 피워 로마의 밤거리를 대낮 같이 밝게 하였으며, 끓는 가마솥에 집어 던지기도 하고, 어두움 속에서 갑자기 침입하여 횃불로 태워죽이기도 하였다"고 그때의 참상을 기록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65년 겨울에서 66년 봄 사이에 로마에서는 페스트가 만연하여 몇 주 사이에 약 3만명이 죽는 일이 발생하자 많은 사람들은 네로를 저주하며 이 재난(災難)은 그가 神을 거역하였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비난이 더해 갔다. 결국 사정이 최악의 사태에 이르게 되자 군사령관들이 여러 지방을 장악해 버리고, 부재 중인 네로에게 로마 원로원은 사형선고를 내렸으며, 그 소식을 전해들은 네로는 주후 68년 자살해 버렸다.
네로가 죽음으로써 율리우스 - 클라디우스 家의 통치는 끝나고, 제국내에 팽배한 불안과 로마 본토 내의 혼란은 여러 황제가 바뀌다가 주후 69년에 유다반란(주후 66-70)을 진압하기 위하여 급파되었던 사령관 베스파시안(Vespasian, 69-79년)이 절대적 지지를 얻어 황제가 되었고, 그가 통치하는 동안은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제국을 상기시킬 만큼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만들었지만, 기독교인들에게는 죽음 그 자체였다.
B. 기원후 1세기 로마제국과 사회적 상황
로마제국은 국경을 무력으로 안전하게 방어하는 세계적인 국가가 되었다. 이 세계적인 국가 안에서 헬라적이고 로마적인 유산이 합성되어 헬라주의적 - 로마 문화는 별다른 지장없이 발전될 수 있었다. 희랍어는 제국의 동부와 멀리 서부 어디에서도 지중해권의 일반적인 상용어로 사용되었다. 물론 작가들이 즐겨 사용하였으며 플라톤 시대에 아태네에서 사용된 상류사회의 귀족언어와 구분이 된 코이네가 생겨났다. 누구나 희랍어를 숙달하게 되어 야만인 소리를 듣지 않고 희랍인이란 소리를 들으려고 코이네 헬라어의 숙달을 위해 노력하였다.
헬라문화는 무역과 교통이 융합하여 부유하고 유복하게 발전될 수 있는 여러 도시들에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다. 로마인들은 정치적으로 유력한 희랍이 문화적으로는 그들 보다 우월하다고 판단하여 꺼리낌 없이 개방하여 받아들였다. 사람들은 희랍어를 배우고 희랍의 작품들을 읽었다.
한편 제국의 모든 지역들 관할하고 있던 로마의 행정은 지방관청에 자치권을 부여하였다. 그렇지만 로마의 총독은 지방 관청을 감독하였으며, 총독이 원할 때는 언제든지 간섭할 수 있었다. 그 한 예로 예수 시대에는 갈릴리와 동 요르단 북부지역의 땅은 유대인 영주의 지배하에 있었고, 반면에 사마리아와 유대와 이두매는 로마 총독의 지배를 받았다(눅3:1). 이 총독은 가이샤라에 거주하였으며, 총독이 예루살렘에 올라올 때는 대체로 유대인의 축제일이었는데, 그것은 축제일 때는 수 많은 유대인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기 때문에 많은 군중들이 선동적으로 행동할 것을 대비하여 예루살렘에 머물렀다.
하지만 최고의 권력은 황제에게 있었고 그는 총독들과 관리들을 통하여 모든 식민지에 명령하였고 현장에서 중벌을 결정하는 재판을 할 수 있게 하였다. 만일 로마 시민이 어느 곳에서 소송사건에 들어가게 되면 언제나 황제에게 호소하여 로마에서 재판을 요구할 수 있었다(행25:6-12). 헬라세계에서 크게 발전 되었던 예술과 학문은 로마인들에 의하여 그의 실제적인 면으로 발전되어 존경을 받게 되었다. 이렇듯 희랍인들은 정신적인 유산은 크게 보존될 수 있었으나, 그들의 철학, 언어 그리고 자연과학은 그렇게 오래 가지 못하였다.
C. 기원후 1세기 로마제국과 종교적 상황
황제숭배는 당시의 종교적 상황을 대표한다. 알렉산드 대왕이 그의 군대를 이끌고 동부 제국을 통과하여 승리의 행군을 하게 되자 희랍인들은 신국(神國)이라는 동양적 사상에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드 대왕이 갑작스레 죽게되자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를 숭배하는 의식이 거행되었고, 이집트에서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그를 숭배하는 의식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소아시아의 아테네에까지도 이 무적(無敵)의 신(神)을 위한 신전(神殿)이 건립되었다. 고대 희랍인들이 생각한 것 처럼 신적인 인간들이 기적적인 행동을 할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후 알렉산드를 이어 제국을 분활하여 지배하였던 장군들은 위대한 왕에게 돌려졌던 신적인 명예를 그들 스스로도 갖고자 추구하였고, 그때 이래로 참된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염원이 옥타비아누스(Actabianus)의 지배를 통해서 이루어지자 제국의 동부지역에 있는 여러 곳에서는 그의 지배를 신이 나타난 기적으로서 환영하였다. 왜냐하면 동양에서는 옛부터 평화의 군주를 구세주로서 숭배하던 풍습이 이미 있었다.
칼리굴라와 네로 황제는 스스로 신이 되기를 원했던 사람이며, 도미티안은 제국 내의 어디에서나 황제의 동상(銅象)을 세우게 하였으며, 에베소에서는 황제가 웅장한 신전을 짓게 하였다. 소아시아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주민들은 군주에게서 신성의 현현을 보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거부없이 군주를 예배할 수 있었던 반면, 기독교인들은 한 인간을 주(主) 또는 신(神)으로 부른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였다. 왜냐하면 만왕(萬王)의 왕(王)이신 그분 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계 17:14 ; 19:16).
하지만 로마제국에서 점점 확대되어 갔던 황제숭배는 주로 정치적인 목적과 상관이 있는 행위였다. 로마인들은 그들의 나라에 살고 있는 여러 민족들이 전해오는 신들을 위하여 예배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고 옛부터 가지고 온 종교들에게 자유로 허용하였다. 유대인들에게도 황제숭배에 참여하도록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유대전쟁 이후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이 서로 분리되자 그리스도인에게는 회당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상실되었다. 비록 크리스찬들은 국가의 관청을 하나님이 재정하신 질서의 하나로 인정하기는 하였으나 군주의 숭배의식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계속하여 로마 당국과 충돌하였으며 콘스탄틴 황제 밑에서 시이저가 기독교에 굴복하기까지 교회는 박해와 고난을 받아야 했다.
D. 헬레니즘
기독교의 지적토양이 된 것은 두말할 것이 없이 헬레네즘, 그 중에서도 헬라의 철학이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상당히 널히 유포되었던 철학이 있었는데, 그러한 철학들을 신봉한 사람들에게는 그것 안에 종교의 기능이 있었다.
1. 플라토 철학)Platonism)
세계에 대한 헬레니즘적인 사고의 공통된 요소는 플라토적인 "이원론"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플라톤(주전 347년)은 실재 우리가 감정을 통해서 감지하는 변화하는 물질세계는 단지 진정한 실재, 즉 이성을 통해 알려진 추상적인 관념들의 영원한 세계의 한 그림자 일뿐이라는 관점을 제시했다. 플라톤은 또한 변화화는 물질적인 몸은 신성한 불멸의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며, 그러기에 선하고 의로운 사람은 영혼의 이성적인 것으로 하여금 지식에 이르도록 몸과 감정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철학적인 이원론, 특별히 이 세상은 무상한 것이라는 견해는 신약성서의 여러 곳에서 반영되어 있는데, 지상적인 영역이 천상적인 영역의 그림자로 묘사되는 것은 히브리서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그런 사상은 역시 인간의 기원과 운명이 보다 높은 세계에 속해 있다거나, 혹은 이세상은 악하다고 강조하는 그런 종교의 초기형태는 신약성서에 직접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초대 기독교 문서들, 특히 요한복음과 바울 서신들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2. 스토아 철학( Stoicism)
사도행전에 에피큐리안주의와 함께 언급되고 있는 것은 스토아 철학이다. 이스라엘 철학은 지중해 동부에 있는 키푸리스의 제노(Zeno, B. C. 336-263년)에 의해서 기초가 세워졌다. 제노학자를 "스토아 학파"라고 부르게 된 것은 그가 아덴에서 페인트를 칠한 스토아('현관'이란 뜻)에서 가르쳤기 때문이다. 철학적 체계로서의 스토아철학은 물질주의이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의 신은 존재치 않으나 우주는 절대이성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 절대이성에 일치된 생활이 "최고의 선"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감정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완전한 자기절제를 삶의 목적으로 내세웠다.
스토아철학의 생활방식은 "자연과 함께 조화를 이루는 생활"이란 말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과 우주와의 관계를 영혼과 몸의 관계로 본다. 즉 하나님을 세계 영혼으로 봄으로써 범신론적 입장을 취한다.
3. 에피큐리안주의 ( Epiqurianism)
헬레니즘 시대에 사상적 영향을 끼쳤던 또다른 철학자는 에피큐러스 (Epicurus, B.C. 342-270경)였다. 에피큐러스의 가르침에 의하면, 세계는 원자가 유한히 결합되어진 것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에피큐러스의 우주관은 현대의 무신론적 물질주의 진화론과 유사하다. 그에 의하면 이 세계는 목적도 절대선도 없다는 것이다. 있다면 최고의 선이 있을 뿐인데, 그것은 "쾌락"이라고 불렀다. 그가 말한 "쾌락"은 감각적 혹은 개인적 쾌락이 아니라 고통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에피큐리안주의에 대해서 바울이 아래오바고에서 설교할 때 처음으로 언급하였던 것을(행 17:18) 볼 수 있다.
요약하면, 1세기 특히 중기 로마제국의 정치적 상황은 무서운 죽음의 회오리 바람을 연상케 한다. 로마 市의 대화재는 그 防火의 주범을 알 수 없는 채 화살이 기독교인들에게 돌려졌다. 극히 정신병적인 증세를 보인 네로 황제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방화의 책임을 돌리려 하자 역(逆)으로 기독교인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서 참혹한 현장을 겪게됨을 인하여 종말의식을 갖게 만들었다.
또한 유대전쟁(주후 66-70년)으로 인하여 베스바시안 황제의 특명을 받은 아들 티투스는 예루살렘 성전을 포위하여 성안에 있는 사람들이 굶어 죽게 만들었고,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는 상황에서 또 한번의 죽음의 상황을 경험한 사람들은 간절히 주의 재림을 고대하게 되었고, 그들에게 필요한 종말론적인 메시지를 원하게 되었다.
III. 마가복음의 집필동기와 문학적 구조
앞장에서 마가의 삶의 정황이 유대전쟁으로 인하여 엄청난 박해와 순교의 정황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가는 공동체들로 하여금 주님을 따라 고난을 참아야 하며, 주의 재림과 함께 나눌 영광을 위하여 현실을 초월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을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키는데 있었다.
마가복음의 문학적 구조는 유대 묵시문학을 이어받았으나, 그러나 그는 독특한 신학을 가지고 창의적인 복음서를 기술해 갔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마가복음서의 집필동기, 문학적 구조 그리고 서언의 의의를 살펴봄으로 마가복음서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A. 마가복음서의 집필동기 (저자, 저작시기, 저작장소)
1. 저 자
마가복음서는 익명으로 되어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렇게 생각 하듯이 요한 마가가 이 복음서를 기록했다고 가정한다면, 그와 관련된 다음의 몇몇 전기적(傳記的) 요소에 주목할 수 있다. 마가는 그의 별명(행12:12, 25 ; 15:37)이다.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마리아이며 적어도 주후 45년경에 예루살렘에 살았고, 그녀의 집은 기독교인(행 12:12-17)의 회합장소로 사용되었다. 마가와 바나바(Banaba)는 사촌(골 4:10)이다. 이 마가는 예수가 잡히던 밤에 '한 청년이 베 홋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했다'(막 14:51,52)는 그 청년 마가이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마가의 어머니 집에서 마지막 식사를 한 곳(막 14:12-16)으로 알려져 있다.
바울의 1차 선교여행에서 요한은 사촌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안디옥(Antiock)을 거쳐 밤빌리아(Pamphylia)에 있는 버가(Perga)까지 선교여행을 게다가 마가는 예루살렘으로 먼저 돌아 온다(행 13:2), 그후 구부로(Cyprus)를 떠날 무렵에는 바울과 그의 일행으로 종전의 바나바와 바울이라는 순서가 바뀌어서 나타난다(행13:13). 이런 주도권의 변화는 젊은 요한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그가 여기서 낙오된 것으로 본다. 2차 선교여행에서 바나바는 마가를 데려갈 것을 바울에게 제안하였으나 바울은 강력히 거절했고 그 결과 바울과 바나바는 헤어지게 되었다(행15:36-39a).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Cyprus, 행 15:39b)로 갔다. 후에 바울은 마가와 화해하였고, 한편 로마에서 바울은 마가를 자기의 동반자로 표현하고 있다(골4:10, 몬1:24).
한편 바울과 함께 있지 않은 기간에 마가는 베드로와 함께 있었으며 베드로는(벧전 5:13) '내아들 마가'라 불렸으며, 베드로는 마가의 어머니를 잘 알았으며,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풀려났을 때 마리아의 집에 갔다(행 12:12). 바울의 마지막 서신에서 디모데(Timothy)에게 마가를 데려오게 하였고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다"(딤후 4:11)고 덧붙이므로 마가의 봉사를 높인다. 이상의 성서의 內證에서 마가를 복음서의 저자로 보는 것에 큰 무리가 없는 것으로 본다. 요한은 그의 유대명이고 마가는 그의 로마명이었다.
2. 저 작 시 기
복음서에서 내적인 증거로 집필시기를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관련하여 연대측정을 하는데, 대개 예루살렘 성전파괴를 주후 70년 전후로 잡는다. 따라서 대략 주후 70년 경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3. 저 작 장 소
마가복음의 저작 장소에 관한 학자들 사이에는 이 작품이 이방 기독교 공동체를 위해 저술되었다.고 보는 점에서 간접적으로나마 폭넓은 의견의 일치를 보여 준다. 그러면 이 이방 기독교 공동체는 어디에 있을까? 마가는 그들이 희랍어로 구약을 알고 있었으며, 팔레스틴 지방의 풍습과 생활양식을 설명해야할 필요가 있는 이방인을 염두에 두고 준비하였고(7:3 ; 14:12 ; 15:42), 독자의 편의를 위하여 아람어를 번역하고 있다(3:17 ; 5:41 ; 7:11,34 ; 9:43 ; 10:45 ; 14:35 ; 15:22,34). 또한 수많은 라틴어적 표현들과 로마의 화폐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저작 장소를 로마로 이다.
B. 마가의 문학적 구조
마가의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그의 문학형식이 보여 주고 있는 특징으로 알 수 있다. 마가의 과제는 위기적 상황 가운데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일이다. 마가는 말씀하시며 행동하시는 그리스도를 제시해 주는 전승만을 선정하여 엮어 놓 았다.
마가복음서에는 어느 복음서 보다도 고통받고 수난당하는 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 예수를 강조한다. 그래서인지 많은 주석가들은 마가의 문학적 쟝르를 비극(tragedy)으로 강조하기도 한다. 아마 이것은 캘버(M.Kahler)의 말에서 마가복음은 긴 서문을 가진 "수난이야기"라고 분류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문학적 구조를 넘어서서 마가복음서 저자는 예수의 활동과 가르침에서 하나의 고통과 비극물로 제시하려는데, 목적을 두지 않았음이 복음서 전체 내용을 통해서 입증하고 있다. 마가는 오히려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복음서 저술의 핵심소제로 삼으면서, 그것을 넘어 펼쳐질 새 시대의 도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러므로 마가복음서를 비극물로 분류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오히려 새 시대를 향한 줄기찬 희망으로, 혹은 절망적인 역사현실에 도전한 저항문학이라고 본다면, 그런점에서 마가복음서는 여전히 유대묵시문학의 쟝르에 속한다고 하겠다. 전통적으로 유대 묵시문학에 반영된 역사관은 기존세계에 대한 비관적, 절망적인 역사에 대해 포기하는데 주안점을 두어 왔다. 하지만 묵시사상에 관한 사회학적 관찰은 그보다 훨씬 새로운 차원을 밝혀 준다.
유대 묵시적 저항운동은 농경사회에서 계속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 그리고 각 계층간의 긴장 속에서 추구된 새로운 '구원 조직'의 등장을 추구하였다. 이 새로운 구원조직은 바로 새로운 정치 - 경제체제 하에서 새로운 인간 공동체의 출현을 갈망하게 되는데, 곧 새로운 인간의 출현을 갈구하게 된다.
그러나 이 묵시문학적 작품이 마가와 함께 고통의 필연성, 귀신 축출을 통한 사탄의 파멸, 신적 구원의 약속 그리고 종말론적 변호의 환상들과 같은 공통된 특징들을 공유하고 있다해도 한 문학 전체로서 그의 복음서에 대한 진정한 유비란 없다. 따라서 윌더(A.N. Wilder)의 판단에 동의한다. "그의 복음서는 교회에 의해 창조된 유일하고 전적으로 새로운 장르이고 마가복음서의 저자가 그것을 창작하였다."
마가의 글 솜씨는 단순하고 직설적이다. 그의 언어는 마태나 누가보다 스타일에 있어서 덜 복잡하며 서민적이다. 마가의 문장은 쉽게 구성되어 있고 접속사 "그리고"(Parataxis)로 연결 되어 있다. 자주 "즉시"라고 하는 낱말을 사용하여 생동적인 행동감으로 이끌어 간다. 과거사건을 현재시상으로 표현하여 '역사적 현재'(historical present)로 사용한 곳이 150회나 된다.마가 이야기 전개는 생동적이며 구체적이어서 현장을 시각적으로 보고 느끼게 하는 그러한 마가의 문학양식이다.
C. 마가복음서에서 서언(1:1-13)의 의의
이 복음서는 최초의 기독론 진술이며 이 진술은 우리에게 마가복음서의 나머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예수는 성령이 머무는 유일한 곳이며, 그 분은 하나님의 인정하셨고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임을 나타내고 있다.
마가복음이 4복음서 중에 첫번째로 쓰여졌다면, 예수에 대한 복음으로 출발하는 이러한 새로운 방법을 택한 마가의 목적은 무엇이며, 그가 시도하려는 것은 무엇이며, 그가 믿었던 것은 무엇일까?
이 서론에서 마가는 맨 처음의 일종의 탐정소설의 대단원을 기록함으로서 그는 우리에게 예수의 독창성에 관한 비밀을 들어 낸다. 예수 그는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에 대한 복음을 말하려고 계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작품의 목적을 1절에서 명백히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서언이 마가복음서에서 갖는 의의는 복음서의 나머지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된다. 그 이유로서 마가는 서론에서 기독론적 지식, 즉 예수가 누구인가를 제공한다. 이제 마가의 독자는 예수가 메시야인 것과 구약의 약속의 성취인 것을 안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보다 더 능력이 많으며,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성령이 예수를 세웠으며, 예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요한의 회개 세례와는 다른 성령의 세례를 받았으며, 그는 사탄에 의한 시험에 저항하므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스스로 나타내셨다.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이러한 지식은 마가복음 1:1-13절에 마가는 우리에게 보여준다.
마가의 서막은 짧은 3가지 부분으로 구분된다.
(a) 1: 2 - 8 세례요한과 예수에 대한 관계
(b) 1: 9 - 11 예수의 세례
(c) 1:12 - 13 예수의 시험
요약하면 마가복음서의 저자는 요한이라는 마가이다. 저작시기는 유대전쟁으로 인한 예루살렘 성전파괴(주후 70년)와 관련하여 저술시기의 연대를 측정한다. 대개 예루살렘 성전파괴 전후로 보는 의견이 팽팽하기 때문에 대략 주후 70년 경으로 보는데 무리가 없다.
저술 장소는 네로의 유대인 대학살 사건과 유대전쟁의 배경을 가진 로마에서 집필한 것으로 본다.
마가의 문학적 구조는 유대 묵시적인 쟝르에 속하지만 분명한 것은 저자 마가의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것으로 본다. 복음서 서언의 의의은 마가 복음서를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해 준다. 마가는 예수가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서론에서 밝히고 있으며 그리고 종말의식에 사로잡힌 독자들을 도우기 위해 종말론적인 삶의 지침을 그의 복음서를 통하여 나타내고 있다.
. 서언(1:1-13)과 13장(13:1-37)의 관련성
앞장에서 서언을 연구하면서 마가는 그의 신학적 관심이 기독론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가의 신학사상은 기독론과 그리고 또하나 성도의 삶에 관하여 깊은 관심을 나타낸다. 예루살렘 성전파괴와 주의 재림이 언제 올 것인가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은 그 시간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러므로 깨어 있어야할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이제 서언과 13장의 관련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기독교 신학사상에서 일반적으로 이해해 온 묵시사상이란 이원론적 역사이해나 우주적 재난에 관한 환상 등, 대개 그 내용이 현세계 질서에 대해 비관적이며 부정적인 이미지를 던져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하지만 묵시적 종말사상은 그보다 적극적인 미래에 대한 비젼을 제시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기존 세계의 끝장 자체에만 관심하는 것이 묵시적 종말사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종말론적 사건을 넘어서 밝아 올 새로운 세계, 그리고 그것이 안겨줄 새로운 삶을 보다 중요한 내용으로 포함하였던 것이 유다 묵시적 종말사상이었다. 기존세계의 종말은 오직 그 이후에 펼쳐질 새 하늘과 땅을 상대적으로 더욱 새롭게 해주는 효과를 나타낸다. 더욱이 예루살렘 성전의 파멸이라는 비참한 역사적 상황을 경험한 후 그에게 전성된 유다 묵시적 천년왕국 사상이 심각한 문제에 부닥치게 되었고 그같은 정황에서 파산지경에 이른 잘못된 종말사상을 수정하여 새로운 미래에 대한 비젼을 서술하기 위하여 13장을 저술하고 있다. 마가 13장 내용이 얼핏보면 복음서 전체와 관계없는 독립된 것으로 보일수도 있겠으나, 그러나 그의 복음서 다른 부분들과 통일성을 갖도록 서술했음이 그 전체적 저술속에서 알 수 있다. 특히 서언과 13장이 어떤 맥락에서 동일성을 갖고 저술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마가 저자는 이 교훈 중에 암시한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과 예수의 죽음 사이에 관련이 있음을 지적한다. 이 신학적 이해는 바로 5-37절에 나오는 문학형식에서 알 수 있는데, 문학형식상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의 죽음 직전에 주신 교훈과 위로를 겸한 고별선언이다. 13장은 미래에 대한 예언과 함께 주님이 계시지 않을 때를 대비하여 제자들의 행위를 규제하고 권면하고 있다. 예수의 말씀이 일단락 짓고 다음으로 옮겨갈 때는 마가의 특징적인 표현인 "주의하라"(5, 9, 23, 33절)는 어구를 가지고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묵시문학적 내용은 전면을 지탱해 주는 이유로서 소개된다.
이 교훈은 5-37절에서 19개의 명령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고찰은 13장의 기본기능이 어떤 비밀적 지식을 명시하기 위함이 아니다. 좌절과 위기의 때에 신앙과 순종을 강화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예수님은 깊은 목회자적 관심으로 장차 다가올 박해와 선교가 당면한 과제가 될 미래를 위하여 제자들과 교회를 준비케 하신다.
13장의 구조분석적 연구는 필히 "이런 일들"이라고 한 열쇠가 되는 문구를 해명해야 한다. 제자들은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날 것과 이런 모든 일이 성취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습니까(4절, ... ... .)라는 질문으로 예수님의 종말론적 강화는 시작된다.
예수님은 시험기간을 끝내줄 최종적 승리에 대하여 언급을 하며(24-27절), 그와 함께 우리가 예상하여야 할 고난을 선포하고 있다(5-23절), 29-30절은 다시 이들 논점을 반복한다. 즉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다 이루어지리라"하신 말씀이 있다. 여기 29절에 나오는 "이런 일"(these things)은 특별히 14-23절과 직결이 되면서 5-23절 전체와 관련이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경고의 초점은 서론적 사건을 종말에 있을 증거와 혼돈하면 안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것이다. 주의 재림은 그 준비단계의 사건들이 발생하기 이전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 준비단계는 파루시아의 전제가 되는 전조(前兆)이다. 그러나 그 전조만으로 하나님만이 아시는 재림(파루시아 혹은 하나님나라의 강림)의 시간을 결정할 수 없다(32절). 따라서 감람산 강화에서 주신 예수님의 교훈의 주안점은 제자들이 이 예비적 표적 때문에 혼란이 생겨서는 안되며 또한 그 서론적 사건과 종말론적 사건을 혼돈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서론적 사건들이 파루시아의 시각을 엄격하게 고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자들이나 교회가 할 일은 시간의 계산이 아니라 회중들로 하여금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일반적인 비평은 13장이 마가 자신의 구성으로 보는데 그것은 마가의 편집에 의하여 유대의 묵시문학의 일부와 예수의 진정한 말씀과 기독교 예언자들의 선포가 골고루 혼합이 되어 하나의 교훈의 형식이 성립됐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마가복음의 저자의 통례적인 특징과 모순된다. 13장의 구조와 내용에서 마가의 교훈은 예수님의 교훈으로서 이전에 형성된 것(pre-formed)을 받아들었으며 그리고 본질적인 변경없이 그의 복음서 안에 포함시켰음을 지지하여 준다.
A. 성전 파괴 예고 (13: 1-4)
이러한 불행한 예고는 그전에 예수께서 성전에 대하여 주신 교훈의 맥락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데 11:17, "내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에서 성전을 잘못 사용했을때 뒤따르는 심판의 선고로 예레미야 7:11을 인용하셨다. 예레미야서의 문맥으로 봐서 당시 유다의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은 느브갓네살 왕에 의한 성전 파괴였었다(겔 7:12-14). 예수님의 예언은 주후 70년에 로마 군병에 의한 예루살렘 파괴로 성취된다.
3절의 감람산은 스가랴 14:4에 의하면 마지막에 심판하실 때 하나님이 서실 장소이므로 예수님의 묵시적 설교장소로서 알맞다. 그 새로운 장소의 표명은 새로운 이야기를 위한 전환을 시사하며 예수님이 이 감람산에 계신 자체는 성전의 종말적 운명을 시사한다.
갈릴리 호수가에서 맨 처음 불렀던 네 제자들이(4절) "그런일이 언제 일어날 것이며 ...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인지( )를 묻는다. 이 두가지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먼저 종말의 징조들에 관하여 대답하시고 (5-23)이어서 "언제"의 시간문제를 다룬다(24-37절).
B. 종말의 징조들 (5-23절)
1. 미혹에 대한 경고와 재난의 시작
5-6절과 21-23절은 앞 뒤에서 거짓 예언자들의 미혹을 그 주제로 다루고 있다. 5절에서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은 마가의 전면적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권면의 내용은 먼 미래에 있을 것을 말함이 아니라 마가시대의 기독교 회중 가운데 이미 일어나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해 주의하라는 경고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감람산 교훈의 이 첫부분의 목적은 거짓된 위기관념을 밝혀 현혹되지 않도록 하며 예루살렘 파멸직전에 있을 혼란과 긴장에 대해 깨어 있어야할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예수님께서 간곡하게 부탁하신 교훈의 기본요소는 당신의 백성을 위한 깊은 목회자적 심정으로 9절, 23절, 33절에서 "주의하라"고 거듭 부탁하고 계신다.
7-8절 종말의 징조들은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과 그에 따른 갖가지 재난의 발생이 서로 함수관계를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나라와 전쟁, 지진과 흉년 등등의 징조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계의 종말이 닥쳐온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어떠한 소문을 듣더라도 현혹받지 말고 주어진 과업에서 이탈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인 것이다.
이러한 사태의 발전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 안에 있으며 하나님이 인류의 역사적 운명을 통제하신다. 이런 일들이 반드시 일어나야 하며 이런일들이 발생하여도 종말을 뜻하지는 않으며 심지어는 종말이 가까와 졌음을 뜻하지도 않는다.
2. 박해 받는 공동체에 대한 권면( 9 - 13절)
9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이것은 공동체의 운명을 취급한 새로운 단락의 시작이다. 이 교훈을 듣는 자들이 겪을 고난의 국면을 강조하고 있다.
9-13절의 특징으로서는 공동체의 고난의 배후에 예수자신의 고난이 있다는 사실을 알져준다. 특별히 9b, 11a, 12a에서 "넘겨지다"의 동사는 수난 이야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수난 이야기에서 10번이나 나타난다. 이렇듯 박해자들의 손에 넘겨지는 공동체의 배후에는 이전에 수난 받은 예수님이 계신다. 마가는 여기서 공동체의 고난을 예수의 고난과 동일시하고 있다.
예수께서 공회에 거짓으로 고소 당하셨고, 미움을 받으셨고, 매를 맞으셨던 것처럼 그의 뒤를 따르는 공동체 역시 공회에 "넘겨지고" 미움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일러준다. 여기서 마가공동체와 예수님을 동일하게 생각하는 것은 또한 동일한 결과를 기대한다. 즉 예수의 부활에 상응하는 것을 마가는 공동체에게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11절 법정 앞에 서게 될 때에 제자들은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애굽의 법정에서나 유다의 법정에 섰을 때 할말을 하나님께서 그 입에 공급해 주셨다(출 4:12 ; 렘 1:9).
이와같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도와주실 줄 믿고 무슨 말을 할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례 받으신 후 예수님이 시험 받으실 때 함께하셨던 그 성령이 고난 당하는 제자들에게 진리의 능력으로 법정에서 해야 할 말을 일러 주실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 말고 담대할 것을 일러준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예수님 때문에(9절, "나를 인하여, 12절, 내이름을 위하여") 미움을 받게 된다. 이러한 정황적 설명이 뜻하는 바는 제자들에게 가해지는 폭행들은 사실상 예수님을 겨냥한 것이며 제자들이 당하는 박해는 그들이 예수님과 동등됨을 원하였기 때문에 비롯된다. 때문에 레인(W. Lane)은 "제자들이 당하는 고난은 고난의 예전(Communion of Suffering)으로서 예수님과 교통한다는 감각에서 초대교회에게 부여된 특전이었다"(빌 1:29f. ; 3:8-11 ; 고전 1:24)고 말한다.
3. 거짓 예언자에 대한 경고 (14 - 23절)
14 - 23절은 신성모독이라는 큰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 위험성이 너무나 위협적이어서 심각한 재난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에 도피할 것을 권면한다. 이것은 "언제 성전파괴가 일어날것인가?"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의 답변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여기 예언된 대로 유대전쟁(주후 66-70년)때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다. 14절의 요지는 난(亂)을 피하라는 명령이다. 예수께서 친히 도피의 위급성(15-16절)과 도피에 있어서 방해가 되는 상황(17-18)과 도피해야만 하는 이유(19-20)와 끝으로 도피의 최후까지 방해하는 것(21-23)을 통하여 피난의 권면이 발전되고 있다. 이 도피(逃避)의 명령은 명백히 역사적으로 일대 위기임을 나타내고 있으나 도피가 종말사건 자체는 아니다(계 6: 15-17).
"가증한 것"( )은 구약에서 혐오의 대상, 특히 손으로 만든 우상을 일컫는다. 예수님은 다니엘에서 이 용어를 인용하여(단 9:27, 11:31, 12:11) "멸망의 가증한 것"이 나타남은 성전파괴가 임박한 줄로 알고 예루살렘과 유다로부터 도피해야 할 것을 경고하셨다. 마가가 마지막 때를 위해 이런 가증한 것을 예고한 것은 40년 칼리굴라(Caligula) 황제가 자신의 초상을 성전 안에 놓으려 했던 시도에서 영감을 받았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닥쳐올 참화가 유다전역에 미칠 것이므로 산으로 도망해야 한다는 것이다. 19 - 20절, 도피가 불가피한 이유는 지금까지 선레를 볼 수 없는 재난이 박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19절은 종말 이전에 일어날 것으로 기대된 재난을 묘사하기에 적합한 말들로서 종말론적 색체를 띠고 있다.
20절의 "날의 줄임"은 묵시의 한 특징으로 이것은 공동체에게 큰 위안을 줄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악한 자'에게 기회를 주시기 위해 종말의 때를 연기할 수도 있고, '그의 택한 자'들을 위하여 환난(患難)의 날을 줄이며 종말의 때를 앞당길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심판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의 특징은 통상 보편적이면서 또한 과격한 언어로 되어져 있다. 그러한 문장의 의도는 일단의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강력하게 개입하시며 그리하여 역사의 행로를 수정하신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환난이 혹심한 것이라도 그 뒤에 즉시 세상의 종말은 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보다 작은 환란들이 또 있을 것이고, 그러므로 시간이 연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심판이 가혹한 이유는 이스라엘이 계약에 의하여 보장받은 특권을 남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의 때를 감하여 주신다는 이 개념은 구약과 후기 묵시문학(바룩 3서)에만 나오고 있다.
21 - 13절, 이 부분은 5 - 6절의 반복으로 6절에서는 현재에 대한 경고를 하였지만 여기서는 미래에 대한 경고를 말한다. 21절은 하나의 Q자료에서 온 것으로 병행귀절 즉, 누가 17:23과 마태 24:26절에 의해 입증되듯이 예수의 진정한 말씀으로 본다. 본래의 의미로서 인자의 재림은 번개와 같이 순식간에 이루어질 것임으로 헛된 메시야 소문(적 그리스도 출현 )에 흔들리지 말 것을 경고한다. 성전파괴 보다 적 그리스도의 출현이 임박한 종말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게 한다.
C. 인자의 도래와 선택한 자들을 모음(24-27절)
24 - 25절, "그 때에"( s s s)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종말론적 문맥에 자주 나오는 표현이다(렘 3:16, 18 ; 31:29 ; 33:15f. ; 욜 2;28 ; 슥 8;23). 그러나 그것 하나만 떼어 놓고 종말의 시간을 해석하려 한다면 결정적인 시간을 일러주지 않는다. 24절에 이 단어가 나오는 것은 19 - 20절에 나오는 환난(患難)의 때보다 시간 순서가 뒤에 일어난다고 하는 것 뿐이며 시차가 얼마나 되는 지는 모른다. 본문상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재림이 5-23절에 기술된 모든 예비적 사건들이 일어나기 전에 재림이 없을 것은 명백하다.
24-25절에서 하늘이 지상의 고통에 개입한다. 이것은 우주가 인간의 운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심오한 개념이다. 또 해와 달과 별들에 관한 이런 변화들은 묵시문학에서 늘상 사용되는 목록에 속한다. "모든 별들이 크게 두려워 떨며 온 땅이 놀라 떨며 겁을 낸다"(에디오피아 에녹서 102:2). 마가 본문은 "하늘의 별과 삼성성좌는 빛을 잃고 해는 뜨더라도 침침하고 또한 달도 밝게 비치지 아니하리라."는 이사야 13장 10절에 의존하고 있다. 구약에서 이런 현상은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이요, 야훼의 날, 종말의 날에 수반되는 현상을 말한다.
예수님의 해석에는 다니엘서와 같이 인자가 하나님의 권좌에 오르지 않는다. 그대신 인자는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기 위하여 강림하신다. 구약에서 이 기능은 하나님의 사역에 귀속된다(신 30:3f.; 시 50:3-5 ; 43:6, 66:8 등등).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권능과 영광 가운데에 오시는 사건의 표현은 헬라-로마세계에서 왕족이나 영웅들의 개선을 축하하는 것과 비교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강림을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흩어진 이스라엘을 모으는 것은 유대인이 간직한 종말론적 소망의 본질이다. 인자(Son of Man)로 말미암아 모이게 됨은 종말론적 공동체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천사들을 통하여 역사하실 인자의 행동의 범위는 우주이다.
서론 1:12-13절, 예수님이 세례 받으시고 광야에서 시험 받으실 때 천사가 수종들었다. 천사는 사탄을 물리쳤고 예수님은 승리하셨다. 그런데 13장에서 천사의 등장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렘 12:8 ; 신13:7f.),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신 4:32 ; 시 19;7) 모든 성도들을 모으는 일을 한다. 이 천사의 사역은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성령이 광야에서 사탄과의 투쟁에서 승리하여 에덴의 회복을 만들었던 이후 사탄은 떠나고 예수님의 수종을 들었던 천사는 이제 마지막 때 하늘의 공중 권세를 물리치고 성도들을 모아들여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게 한다. 인자가 도래하는 목적은 심판뿐만이 아니라, 그가 선택한 이스라엘을 모아들여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 곧 새로운 구원조직을 구성하는데 있다.
D. 마지막이 언제 오니이까 ? (28-31절)
여기에는 "깨어 있어야"하는 이유를 두가지 언급한다.
첫째로, 인자의 가까움과 둘째로, 그 때를 모르기 때문이다. 31절은 4절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29-30절,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하신 독특한 언어 표현이 나온다. 이 귀절은 4절, 23절과 관련지어 생각하여야 한다. 그 말씀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강림(26절) 그의 택한자들을 모으시는 일(27절)과 하늘의 이변(24-25절)과는 관계가 없다. 이 사건들은 종말을 나타내며 다른 어떤 것의 예비적 표적이 아니다.
30절, 레인(W. Lane)은 "이 세대"( )에 대한 해석이 예수님과 동시대를 가리킨다(8:12, , , 38절 ; 9:19, )고 말한다. 제자들이 속하는 그 세대가 예루살렘의 파괴를 목격하므로 예언의 성취를 이룰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세대"에 대한 쿠자(C. B.Cousar)의 해석에 의하면, "이 세대"는 예수께서 선포하실 때 들었던 사람이기 보다 마가의 독자나 그 시대의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 권면은 사실상 기대를 포기하지 말라는 뜻으로 공동체를 격려하는 초기 기독교 예언자에 의해 사용되었던 말씀이기 때문으로 해석한다. 30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과 32절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사이에는 긴장이 생긴다. 그것을 쿠자는 '이 세대'를 상대화 시키기 위한 의도로 해석한다. 마가는 그 자신의 세대까지 적용하기 위해 '이 세대'의 의미를 넓힌 것으로 해석한다.
31절은 구약에 배경을 둔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의 영원하심과 피조세계의 유한성이 비교된다(시 102:25-27 ; 사 40:6-8 ; 51:6). 하늘과 땅에서 대 이변이 일어나 파괴될 때 예수의 말씀은 영원히 정립될 것이다.
E. 공동체에 대한 경고 (32-37절)
32절, 깨어 있어야 할 필요를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응답을 끝맺는다. 아무도 하나님께서 결정적으로 언제 개입하실지는 알 수 없기 때문에 "깨어 있어라"고 강조하신 것이다. "그 날"( s s)은 종말론적인 공용어로 사용된다(암 8:3, 9, 13 ; 9:11 ; 미 4:6 ; 5:9 ; 습 1:9f. ; 3:11 ; 욜 3:18 ; 슥 9:16 등등.). 예수께서는 인자가 영광 중에 권능으로 강림하실 그 날과 그 시간에 관해서는 아무도 알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만 달렸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강조점이 아무도 모른다"에 있다. 인자나 천사들이 "그날"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 나라의 강림에 개입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피난으로 재앙을 피해야 할 예루살렘 멸망과는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 심판의 날이 너무도 졸지에... 이외의 때에 임하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아무도 예비적인 경고를 접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제자들과 교회는 깨어 있어야 한다. 30절은 예루살렘 멸망을 가리키며, 32절은 주의 날을 일컫는 것으로 두 사건은 별개의 사건이다.
요약하면, 마가는 서론에 이어 계속해서 기독론에 대해 기술하고 있으며 아울러 성도의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감람산 강화에서 주시는 예수님의 교훈의 주안점은 제자들이 이 예비적 표적 때문에 종말에 있을 사건과 혼돈하지 말라는 경고이다.
서언에서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 받으심(1:12-13)은 제자들이 무자비한 로마 병정 앞에서 고난당할 것과 대비된다. 제자들이 당할 고난은 이미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이며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은 또한 그들 제자들도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예수님은 수세(受洗) 후에 광에에서의 시험 받으실 때 천사가 수종을 들었는데,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실 때(26절) 주님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한 백성을 땅 이 끝으로부터 하늘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는 일을(27절) 하도록 하는 일은 서론과 연관되는 종말론적 사건이다.
서언에서 예수님은 성령에 의해서 세례 받으시고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나가서 시험 받으셨으나 성령의 능력으로 사탄과의 투쟁에서 승리하셨다. 13장 11절에서 예수님께 함께 하셨던 그 성령이 제자들이 시험받을 때 도와 주실 것이므로 두려워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서언과 연관되는 종말론적 사건으로 볼 수 있다.
또 한가지는 '그날'과 '그때'는 언제 임할런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깨어 있어라"는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함이다. 종말의 날을 계산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 그날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속하므로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깨어 있을 것을 강조한다.
I. 결 론
마가복음의 삶의 정황은 로마의 대화재(주후 64년)로 인한 네로의 박해와 로마 - 유대전쟁 (주후 66-70년)으로,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는 상황에서 또 한번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종말론적인 의식에 사로잡혀 주의 재림을 간절한 고대하게 되었고, 그들에게 필요한 메세지를 원하게 되었다.
이런 정황에서 마가는 이들을 필요에 의하여 복음서를 쓰게된다. 마가의 문학적 구조는 유대 묵시적인 장르에 속하지만 분명한 것은 저자 마가의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것으로 본다. 서막의 의의는 마가복음서를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해 준다. 마가는 "예수가 누구인가"를 1장 1절에서 밝히고, 또한 종말의식에 사로잡힌 독자들을 도우기 위해 종말론적인 메시지를 제공한다. 마가복음 서언에는 종말론적 구조가 있다. 과거 이스라엘에서 예언자들이 사라진 후 마지막 날이 되면 다시 선지자가 나타난다는 종말론적인 사상이 있었다. 그런데 300여 년의 침묵의 시간을 깨고 광야에 나타난 세례자 요한의 출현은 종말론적인 사건인 것이다.
예수님의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의 강림은 또하나의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구약 요엘서 2:28에서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영이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신다는 약속이 성취된다. 예수님의 세례받으심의 의미로는 예수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시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선포된 메시야이다. 예수님은 세례 받으실 때 자신의 소명을 체험하셨다. 또한 13장 11절에서 성령은 마지막 때 제자들을 도우신다.
예수님의 시험 받으심은 또하나의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이것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사단의 시험에서 실패하였으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광야에서 사단과의 대결은 에덴동산의 회복을 위한 투쟁이다. 광야는 사단의 집, 악마의 거주지며, 혼돈과 무질서의 세계의 상징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아담이 들짐승과 함께 생활한 것처럼 예수님이 들짐승과 함께 거함은 사단과의 투쟁에서 승리함으로 얻어지는 잃어버린 낙원의 회복을 가능케 한다.
13장에서는 종말의식에 사로잡힌 성도들에게 성도의 바른 삶을 일러준다. 감람산 강화에서 주신 예수님의 교훈의 주안점은 제자들이 이 예비적 표적 때문에 종말에 있을 사건과 혼돈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한다.
또 한가지는 '그 날'(그 때)은 언제 임할런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함이다. 종말의 날을 계산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 그날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있을 것을 거듭 강조한다. 또한 예수님의 광야에서의 시험받으심은 제자들이 무자비한 로마병정 앞에서 당할 것과 대비된다. 제자들이 당할 고난들은 예수께서 이미 당하신 것과 같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은 또한 그들 제자들도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예수님은 수세 후 광야에서의 시험 받으실 때 천사가 시중을 들였는데 13:27에서 천사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사방에서 모으는 일을 한다. 공관복음에서 마가와 마태에는 예수의 시험받으실 때 천사가 수종들었고, 또 인자(Man of Son)의 영광 가운데 재림하실 때 천사가 등장한다. 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두 곳 모두에서 삭제된다. 이것은 누가신학에서 천사는 메신저로서 나타나는데 저자 누가의 편집의도로 볼수 있다. 그러나 마가와 마태에서 사탄과의 투쟁에서와 마지막 인자의 재림에 천사가 참여하는 것은 서론과 연결되는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이상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마가복음 서언에는 세례자 요한의 출현에서, 성령의 강림사건에서, 예수님과 사탄과의 싸움에서, 천사의 사역에서 종말론적인 구조가 있다. 마가는 기독론 즉, "예수가 누구인가"를 알려주려 하였으며, 13장에서는 마지막 때의 성도의 삶에 관심을 두고 "그 날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분명한 것은 종말의 때는 알수 없고 다만 성도들은 깨어서 성도의 옳은 행실을 행함으로 세마포(계19:8))를 준비하는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마22:11-13).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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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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