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란트 비유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6.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17.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18.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20.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2.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4.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25.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6.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27.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14. ωσπερ γαρ ανθρωπος αποδημων εκαλεσεν τους ιδιους δουλους και παρεδωκεν αυτοις τα υπαρχοντα αυτου
15. και ω μεν εδωκεν πεντε ταλαντα ω δε δυο ω δε εν εκαστω κατα την ιδιαν δυναμιν και απεδημησεν ευθεως
16. πορευθεις δε ο τα πεντε ταλαντα λαβων ειργασατο εν αυτοις και εποιησεν αλλα πεντε ταλαντα
17. ωσαυτως και ο τα δυο εκερδησεν και αυτος αλλα δυο
18. ο δε το εν λαβων απελθων ωρυξεν εν τη γη και απεκρυψεν το αργυριον του κυριου αυτου
19. μετα δε χρονον πολυν ερχεται ο κυριος των δουλων εκεινων και συναιρει μετ αυτων λογον
20. και προσελθων ο τα πεντε ταλαντα λαβων προσηνεγκεν αλλα πεντε ταλαντα λεγων κυριε πεντε ταλαντα μοι παρεδωκας ιδε αλλα πεντε ταλαντα εκερδησα επ αυτοις
21. εφη δε αυτω ο κυριος αυτου ευ δουλε αγαθε και πιστε επι ολιγα ης πιστος επι πολλων σε καταστησω εισελθε εις την χαραν του κυριου σου
22. προσελθων δε και ο τα δυο ταλαντα λαβων ειπεν κυριε δυο ταλαντα μοι παρεδωκας ιδε αλλα δυο ταλαντα εκερδησα επ αυτοις
23. εφη αυτω ο κυριος αυτου ευ δουλε αγαθε και πιστε επι ολιγα ης πιστος επι πολλων σε καταστησω εισελθε εις την χαραν του κυριου σου
24. προσελθων δε και ο το εν ταλαντον ειληφως ειπεν κυριε εγνων σε οτι σκληρος ει ανθρωπος θεριζων οπου ουκ εσπειρας και συναγων οθεν ου διεσκορπισας
25. και φοβηθεις απελθων εκρυψα το ταλαντον σου εν τη γη ιδε εχεις το σον
26. αποκριθεις δε ο κυριος αυτου ειπεν αυτω πονηρε δουλε και οκνηρε ηδεις οτι θεριζω οπου ουκ εσπειρα και συναγω οθεν ου διεσκορπισα
27. εδει ουν σε βαλειν το αργυριον μου τοις τραπεζιταις και ελθων εγω εκομισαμην αν το εμον συν τοκω
28. αρατε ουν απ αυτου το ταλαντον και δοτε τω εχοντι τα δεκα ταλαντα
29. τω γαρ εχοντι παντι δοθησεται και περισσευθησεται απο δε του μη εχοντος και ο εχει αρθησεται απ αυτου
30. και τον αχρειον δουλον εκβαλλετε εις το σκοτος το εξωτερον εκει εσται ο κλαυθμος και ο βρυγμος των οδοντων
* 금 한달란트 = 6,000 데나리온, 1데나리온 = 남자 노동자의 하루품값.
※ 따라서 금 1달란트는 남자 6,000일에 해당하는 노동의 대가이다(약 20년 동안 벌어서 전혀 쓰지 않고 모아야 되는 매우 큰 금액이다.또 6000 데나리온 - 1데나리온을 10만원으로 계산할때 6억이 된다.
따라서 1달란트는 현 싯가 : 환화 5-6억 정도 된다고 할수 있다.
달란트 비유 (마태복음 25:14-30)
우리는 여기에서 세 종에게 맡겨진 "달란트"에 대한 비유를 찾아 볼 수 있다. 앞에 있던 비유는 우리가 기대하는 상황에 있음을 나타내어 준데 비하여 이 비유는 우리가 직무를 가지고 일하는 상황에 있음을 나타내어 준다. 앞의 비유는 늘 준비해야 할 필요성을 나타내 보여 주었지만, 이 비유는 우리의 현재 일과 봉사에 실제적으로 근면해야 할 필요성을 나타내고 있다. 앞의 비유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혼을 위해 잘 행하도록 권고를 받았지만 이 비유에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타인의 선을 위해 애쓸 것을 권고받고 있다.
이 비유에서,
1. "주인"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 그리고 특별한 의미에서 교회의 절대 소유자이시며 경영자이시다. 만물은 그의 손에 넘겨졌다.
2. 그 "종들"은 기독자들이며, 그의 자신의 종들이라고 불리워진다.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집에서 태어나 그의 돈으로 매입되었고 그를 찬양하는 데 전념하며 또한 그의 일에 고용되었다. 아마 여기에서 의도된 종은 보다 직접적으로 그를 섬기며 그에 의해 파송된 "사역자들"이 아닌가 본다. 사도 바울은 종종 그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르고 있다(딤후 2:24 참조).
우리는 이 비유에 서로 대개 세 가지 일들을 살펴 볼 수 있다.
Ⅰ. 이 종들에게 맡겨진 재산. 그들의 주인은 "그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겼다." 그들에게 일할 것을 맡기고 난 후(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종들을 빈둥거리게 내버려두지 않으시기 위해 그들을 떠나셨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그리스도의 종들은 그들의 모든 것을 그로부터 받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아무런 가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죄 이외에도 그들이 소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2.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것은 그를 위하여 우리의 일을 하기 위함이다. 우리의 특권은 우리로 하여금 일할 것을 찾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성령"이 각 사람에게 "나타난 것"은 "같은 유익을 주기" 위함이다.
3.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사용한 것으로 받은 것은 무엇이든 지간에 그 소유권은 그에게 있다. 우리는 단지 그의 땅을 관리하는 소작인, 즉 "그의 각종 은사의 청지기"에 불과하다(벧전 4:10). 그러면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어떤 경우에 이 재산이 이 종들에게 맡겨졌는가? 그 주인은 "먼 타국으로 여행을 떠났다"(엡 4:8 참조).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 가셨을 때 그는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난" 사람과 같으셨다. 즉 그는 목적을 가지시고 잠시 동안 떠나가셨다.
[2] 그가 가셨을 때 그는 자신이 없을 동안에 교회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시는데 힘을 기울이셨다. 떠나시는 것 때문에 그는 자신의 교회에 진리들과 율법들, 약속들, 그리고 능력들을 맡기셨다. 이러한 것들은 parakataqh,kh -즉 부탁한 아름다운 것들(딤전 6:20; 딤후 1:14 에 있는대로), 즉 우리에게 맡겨진 "좋은 것들"이었다. 그가 그의 성령을 자기 종들에게 보내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진리들을 가르치고 고백할 수 있도록 하며 또한 그러한 율법들을 저장하고 준수하며 그러한 약속들을 향상시키고 적용시키며 일반적이든 특별적이든간에 능력들을 발휘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자기의 소유를 그의 교회에 맡기셨다.
(2) 이 재산은 어떤 비율로 맡겨졌는가?
[1] 그는 "달란트"를 맡겼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은사들은 풍부하고 가치가 있으며 그의 피흘려 사신 물건들은 그 값을 헤아릴 수 없으며 또한 그것들 중의 어느 것도 초라한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2] 그는 어떤 사람에게는 더 많이 또 어떤 사람에게는 더 적게 주었다. 즉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또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또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는데 각자의 재능을 따라 그렇게 주었다. 신적인 섭리가 마음과 몸, 지위, 친척, 취미에 있어서 그 재능에 차이가 있게 하셨을 때 신적인 은혜는 이에 따라서 영적인 은사들을 분배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재능 자체는 그에게로부터 온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첫째, 각 사람은 적어도 한 달란트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것은 처음 장사을 시작하려고 하는 초라한 종에게는 결코 적은 자본이 아니다. 우리 자신의 한 "영혼"이 "한" 달란트이며, 그것은 우리 각자에게 맡겨져 있다. 또한 그것은 일함으로써 찾아 낼 수 있다.
Hoc nempe 뮤 homine exigitur, ut prosit hominibus; si fieri potest, multis; si minus. paucis; si minus, proximis; si minus, sibi; nam cum se utilem caeteris efficit, commune agit negotium, Et si quis bene de se meretur, hoc ipso aliis prodest quod aliis profuturum parat-즉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이 사람이 할 의무이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그에게 벅차다고 하면 몇 사람에게 하라. 또는 그의 친근한 이웃들에게 그렇게 하라. 또는 최소한 그 자신에게 그렇게 하라. 다른 사람들에게 유용한 자는 공동적인 선(a common good)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그 자신을 추천할 수 있다고 자칭할 수 있는 자는 다른 사람들의 호의로 끝나게 될 그러한 습관을 스스로 형성함으로써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Seneca de Otio Sapient).
둘째, 모든 사람은 똑같이 가지지 아니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동일한 재능과 기회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유로우신 집행자이시며, 자신이 하시고자 하는 대로 "각 사람에게 제각기 나누어주시는 것이다." 몸의 지체들처럼 어떤 사람은 이런 봉사를 위해, 또 어떤 사람은 저런 봉사를 위해 선택을 받는다. 주인은 이와 같이 그의 사무를 정리하고 나서 "곧장 여행을 떠났다. "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마치 서둘러 떠나시는 자처럼 그의 사도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나서 하늘나라로 올라 가셨다.
Ⅱ. 이 재산에 대한 상이(相異)한 경영과 발전. 여기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살펴 볼 수 있다(16 - 18절).
1. 두 종은 매우 잘하였다.
(1) 그들은 부지런하고 충성스러웠다. "그들은 바로 가서 장사하였다." 그들은 맡겨진 돈을 그 본래의 이도, 즉 물건을 사는 데 투자하여 다시 그것을 회수하는 것을 위하여 사용하였다. 그들의 주인이 떠나자마자 그들은 즉각적으로 사업에 착수하였다. 모든 기독자들이 가지고 있는 바 해야 할 수많은 일감들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은 그 일을 지체하지 말고 신속히 시작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바로 가서 장사하였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참된 기독자는 영적인 장사꾼이라는 사실이다. 장사는 "비밀"이라고 불리워지며, "경건의 비밀은 논쟁할 여지없이 큰" 것이다. 그것은 제조업이다. 우리들이 마음에 행해야 할 것이 있고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해 행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장사업이다. 덜 가치 있는 것과 더 가치 있는 것은 구별되어야만 한다. 즉 "지혜로 하는 장사"(잠 3:15; 마 13:45)이다.
장사꾼은 먼저 자신이 할 장사를 선택하고 그것을 열심히 배우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을 본업으로 삼으며, 그것을 더욱 확장시키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투자하며, 그 밖의 다른 일들은 다 제쳐두며, 그 소득에 의거하여 살아가는 자이다. 참된 기독자는 종교적인 일을 할 때 이와 같이 행한다. 우리에게는 장사할 밑천이 없고 다만 우리 주인이 가진 자본을 가지고 관리인으로 장사하는 것이다. 타고난 재능 즉 이성, 재치, 학식은 종교에 도움이 되도록 사용되어져야만 한다. 복음의 규율과 그것들을 경청하는 기회, 성경, 사역자들, 안식일들, 성례식들은 그것들이 제정된 목적을 위하여 향상되어져야만 한다. 그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유지가 되며 또한 성령의 은사와 은혜가 수행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달란트(재능)를 가지고 장사하는 것이다.
(2) 그들은 모두 성공하였다. 그들은 자본을 두 배로 늘렸고 잠시 동안에 계속적으로 돈을 모았다. "다섯 달란트"를 가지고 있었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다. 우리의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하는 것이 언제나 다른 사람의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하는 것보다 성공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성공적이 될 수 있다(사 49:4).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부지런한 자의 손은 은혜나 위로, 선행의 보화들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다. 종교적인 열심을 냄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엄청나게 많이 있다. 장사하여 남은 돈은 받은 돈의 비율대로인 사실에 유의하라.
[1] 하나님께서는 그가 다섯 달란트를 주신 자들에게서 다섯을 더 남게 할 것을 기대하시며 또한 그가 풍성하게 심은 곳에서 더욱 풍성하게 수확하시기를 원하신다. 더욱 더 큰 은사를 가진 자일수록 큰 자본을 가지고 운영하는 자들처럼 더욱 큰 수고를 해야만 한다.
[2] 하나님께서는 그가 두 달란트를 주신 자들에게서 둘만을 더 남긴 것을 원하시며, 이것은 보다 효용 가치가 낮고 적은 자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 만일 그들이 자신의 재능과 기회를 최대한으로 살려서 선을 행하는 데 전념하였다면 비록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많은 선행을 하지 못하였을지라도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2. 세 번째 사람은 잘못하였다(18절).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다." 이 비유는 셋 중의 한 사람이 불성실한 것을 나타내고 있지만 이 "비유"에 부합되는 역사를 살펴보면 다른 방법으로 전혀 불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살펴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열 문둥병자가 병고침을 받을" 때에 "열"중의 "아홉" 사람은 달란트를 감추어 두었고 "한 사람만이 돌아와 감사를 드렸다"(눅 17:17, 18). 불성실한 종은 "한" 달란트 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의심할 여지없이 다섯 달란트를 가지고 그것들을 모두 땅에 파묻어 버리는 자도 많이 있다. 훌륭한 재능, 훌륭한 장점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을 가지고 좋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우리들에게 암시하려고 하는 것은,
(1) 만일 한 달란트만을 가진 자가 그 하나를 파묻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성실한자로 여겨졌다면, 하물며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을 묻어두는 사람에 대하여는 어떻게 여겨질 것인가 ! 작은 재능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그가 가진 것으로 마땅히 더욱 발전시켜야 할 것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내버림을 당했다고 한다면, "가장 훌륭한 장점들을 발아래 짓밟아" qfl는 자가 받게 될 형벌은 얼마나 비참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2) 하나님을 위하여 해야 할 것을 가장 적게 받은 자가 종종 그들이 해야 할 일을 가장 적게 한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봉사하는 기회를 가지고 있는데 그들이 가지지 못한 것은 그들의 게으름에 대한 하나의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고 어떤 사람은 생각한다. 즉 그들은 자기들이 하겠다고 말한 것을 행할 수 있는 자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이 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을 행하려고 하지 않고 그대로 주저앉아 아무 것도 행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변명을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보관하도록 맡겨진 것이 한 달란트 밖에 되지 않을 때 그 하나를 무시해버리는 것은 실제로 그들의 나태함을 한층 더하여 주었던 것이다.
"그는 땅을 파고 그 달란트를 감추어 두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도난 당할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것을 잘못 사용하거나 악용하거나 착복하지 않고 "그것을 감추어 두었다." 돈은 똥거름(나의 스승인 Bacon은 늘 그렇게 말하였다)이어서 쌓아 두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퍼뜨려져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에게도 좋은 것이 못되는 "쌓아둔 재물"(약 5:3; 전 6:1, 2)을 해 아래서 볼 수 있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영적인 은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을 주어진 목적대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을 경건과 자비의 일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는 자들, 또는 능력과 재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살고 있는 장소에서 그것으로 종교의 발전을 도모하지 않는 자들, 재능과 선을 행할 수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일보다는 자신들의 일을 더욱 추구하는 게으른 종들인 것이다.
그는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다. 그 자신의 돈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그는 자신이 기뻐하는 대로 행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능력들과 재능들이 어떤 것이든지간에 그것들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며, 우리는 다만 그것들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우리는 그것들의 소유자이신 우리 주님에게 되돌려 주어야만 한다. 그의 동료 종들이 부지런히 장사하여 성공하였던 사실은 그의 게으름을 한층 더하게 해 주었고, 그는 그들의 열심에 자극을 받았어야만 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활동하는데, 우리는 게을러서 될까?
Ⅲ. 이러한 향상(진보)에 대한 계산(19절).
1. 재산은 지체되고 있다. 그들이 계산을 한 것은 "오랜 후"였다. 그 주인이 자신의 문제를 소홀히 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은 "그의 약속에 더디지"(벧후 3:9) 아니하시다. 아니, 그는 "심판을 예비하고 계시다"(벧전 4:5). 그러나 만사는 그 시간과 순서를 따라 행해져야만 한다.
2. 그러나 계산하는 날은 드디어 오고 만다. "그 종들의 주인은 그들과 계산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다양한 은혜를 받은 청지기는 머지 않아 "그들의 청지기 직분에 대하여 계산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계산해야만 한다. 즉 우리는 자신의 영혼에 대하여 어떤 선한 일을 행하였는가. 우리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특권들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선한 일을 했는가를 계산해야 한다(롬 14:10, 11 참조). 그런데 여기에서 보면,
(1) 충성된 종의 훌륭한 계산을 여기에서 몇 가지로 살펴 볼 수 있다.
[1] 그 종들은 "계산을 하면서"(20,22절).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또는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또는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라고 말하였다.
첫째,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들은 자기들에게 맡긴 것을 감사하면서 인정하고 있다. "주여, 당신은 내게" 이러 이러한 것들을 "주셨나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ㄱ.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에 대하여 특별히 생각(재산)을 하는 것, 즉 그가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또한 소득을 따라 알기 위하여 우리가 받은 것을 기억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ㄴ. 우리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언급 없이 우리가 향상(진보)된 것이 자신의 소유를 맡기실 때 우리에게 부여하신 명예나 또는 우리 안에 있고 우리에 의해 행해지는 모든 선의 근원인 은혜라고 여겨서는 결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더욱 일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의 봉사를 위하여 더욱 노력해야만 하는 빚을 지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은 자신들의 신실함의 증거로써 그들이 얻은 것을 내놓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는 자신의 근면함을 나타내 보이 수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너의 행위로써 너의 믿음을 내게 보이라." 선한 자는 "그것을 나타내 보이라"(약 3:13). 만일 우리가 우리의 영적인 장사에 유의를 한다면, 그것은 곧 우리에 의해 보여지게 될 것이며 또한 우리의 행위가 우리를 뒤따르게 될 것이다"(계 14:13).
성도는 대 심판날에 자신의 선행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그들의 선행을 말씀하실 것이다(35절). 그러나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곧 충성스럽게 자신의 달란트를 더 많이 번 자는 "그리스도의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될 것이라"(요일 2:28-4:17)는 사실이다. 주목할 것은 "두" 달란트 밖에 가지지 않은 자도 "다섯" 달란트를 가진 자처럼 즐거움으로 자신의 계산을 했다는 사실이다. 계산하는 날에 우리는 우리의 효용성이 아닌, 우리의 신실성에 따라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성공이 아닌 우리의 진지성에 따라 또한 우리의 기회의 정도가 아닌, 우리의 마음의 외로움에 따라 위안을 받게 될 것이다.
[2] 주인은 그들의 계산을 받고 이를 시인함(21, 23절).
첫째, 그는 그들을 칭찬하였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예수 그리스도의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인정함을 받은 자들의 근면과 성실은 정녕코 "그가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이다"(벧전 1:7). 지금 하나님을 인정하고 영화롭게 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머지 않아 인정하시고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그들의 인간됨이 받아들여질 것이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현재 자기의 종들의 성실성을 알고 계신 그분은 심판날에 그것을 증거 하실 것이다. 충성 되이 발견된 자는 그렇게 불리워지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의로운 자들"이라는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성격대로 "착하고 충성된 자"라고 부르실 것이다.
2. 그들이 행한 것은 받아들여질 것이다. "잘 하였도다." 그리스도께서는 잘한 자들만을 "착한 종들"이라고 부르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꾸준히 계속적으로 잘 함으로써' 이 영광과 명예를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만일 우리가 구한다면 그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선한 일을 잘한다면 "같은 칭찬"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떤 주인들은 까다롭기 때문에 비록 종들이 일을 잘 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결코 칭찬하지 않을 것이다. 꾸짖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히 여겨야만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잘한 그의 종들을 칭찬하실 것이다. 그들이 사람에게서 칭찬을 받았든지 안 받았든지 간에 그는 칭찬을 하실 것이다. 또한 만일 우리가 우리 주인에게서 좋은 칭찬을 듣는다면, 우리의 동료들이 우리에게 말한 것은 대수로운 일이 되지 못한다. 만일 그가 "잘 하였도다"고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행복하며 또한 그 때에 사람들에게 판단 받는 것은 하찮은 일이 될 것이다. 반대로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신을 칭찬하거나 이웃이 칭찬하는 자가 아나라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자이다.
둘째, 그는 그들을 보상하신다.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들은 단지 말뿐인 칭찬으로 끝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니 그들의 모든 일과 사랑의 수고는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보상은 여기에서 두 가지 방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1. 그 비유에 일치되는 표현에서, 즉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내게 맡기리라." 낮은 지위에 충성된 자를 높은 지위로 승진시키는 것은 왕궁에서나 고관들의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는 자신의 임무를 잘 수행한 그의 종들을 높이시는 주인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그를 평화롭게 한 자들을 위하여 영예를 쌓아 두고 계시다 ─ 즉 "면류관"(딤후 4:8), "보좌"(계 3:21), "나라"(마 25:34)이다. 이 세상에서 그들은 거지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통치자가 될 것이다. 의인은 통치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모두가 왕들이다.
그 일한 것과 보상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봉사하는 일은 소수에 불고하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영광을 받게 될 일은 매우 많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받은 임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 행하는 일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즐거움"에 비한다면 한낮 적은 것에 불과하다. 우리들의 봉사, 우리들의 모든 고난, 우리들의 모든 진보, 우리들이 남에게 한 선행, 우리들이 자신을 위해 얻은 것들을 모두 합친다 할지라도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너무도 적은 일이며 비교할 가치도 없을 것이요 동일한 것이라고 부르기에도 합당치 않을 것이다.
2. 이 비유에서 벗어나 언급된 다른 표현에서,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1) 축복 받은 자의 상태는 즐거움의 상태이다. 그 이유는 그때에 모든 눈물이 닦아질 뿐만 아니라 모든 위로의 샘이 그들에게 열리며 즐거움의 샘이 터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환상과 실현, 거룩함의 완전성, 그리고 축복 받은 자의 교제가 있는 곳에 완전한 즐거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2) 이 즐거움은 "그들의 주님의 즐거움"이다. 즉 주님 자신이 구입하여 그들을 위해 예비하신 즐거움이며, 구속자의 슬픔으로 매입된 구속받은 자의 즐거움이다. 그것은 주님 자신이 가지신 즐거움이며, 그가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을 때"(히 12:2) 바라보셨던 즐거움이다. 그것은 주님 자신이 샘이 되시고 중심이 되시는 즐거움이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즐거움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최상의 즐거움이 되시는 "주님 안에 있는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집의 청지기"가 충성스럽기는 하였지만 "그의 상속자"로 삼으려고는 하지 않았다(창 15:3).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충성된 종들을 그와 함께 상속자로서 자신의 즐거움에 참예할 것을 허락하고 계시다.
(3) 영광스럽게 된 성도들은 이 즐거움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 성년이 되었을 때 재산을 물려받는 상속자와 같이 또한 준비된 자가 혼인식에 들아가는 것 같이 그것들을 완전히 소유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 주님의 즐거움은 성령의 열심히 성도들에게 미치고 있다. 그러나 머니 않아 그들은 그 즐거움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며 영원히 그 가운데 즐거움이 요소들로 있게 될 것이다.
(2) 게으른 종의 악한 계산.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자신에 대한 그의 변명(24, 35절). 그는 단지 "한" 달란트만을 받았지만, 그 하나에 대하여 계산하도록 소환을 당하였다. 우리가 받은 것이 적다고 해서 그것이 계산에서 제외될 수 있는 구실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아무도 그들이 받은 것 이상으로 계산을 하도록 소환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받은 것에 대하여 우리는 계산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첫째, 그는 무엇을 신뢰하고 있는가? 그는 자신이 구상해낸 변명을 의지하고 확신 있게 계산하러 오고 있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했던 것만큼 많이 만들지는 못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모자라게 하지는 않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면 칭찬은 듣지 못해도 무사하기는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많은 사람들이 헛되고 무익한 것으로 취소되고 말 변명의 효력을 믿고 안심하면서 심판을 받으러 간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하기를 꺼리는 게으른 신자들도 종교적으로 많은 수고를 한 자들처럼 행해지기를 소원한다. 이와 같이 "게으른 자는 선히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잠 26:16). 이 종은 그의 계산이 충분히 잘 통과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여, 나는 내 지위를 남용하지 않았고 내 시간을 헛되이 소비하지 않았으며 내 안식일을 욕되게 하거나 선한 사역자와 좋은 설교를 반대하지도 않았나이다. 주여, 나는 결코 내 성경을 조롱하거나 종교를 도전하는데 전력하거나, 어떤 선한 사람을 박해하는 데 힘을 남용하지 않았나이다. 나는 결코 방탕에 빠지거나 또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들을 음주나 탐식에 낭비하지 않았으며, 내 지식이 어떤 사람을 해하지도 않았나이다." 기독자라고 불리우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계산을 할 수 있다는 가정에 근거하여 하늘나라에 큰 희망을 세우려고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국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라는 말 밖에는 되지 않는다. 마치 더 이상 요구받을 것도 없고 기대될 것도 없는 것처럼.
둘째, 그는 무엇을 고백하고 있는가? 그는 자신의 달란트를 묻어 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그는 마치 그것이 큰 잘못이 나닌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그는 그것을 안전한 곳에 묻어 두어 위험을 방지한 자신의 지혜로움에 대하여 칭찬을 받을 만하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자신들이 심판날에 정죄받게 될 일들을 가볍게 여겨버리는 것은 사람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그가 스스로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 게으른 종은 심판날에 그것을 얼마나 쉽게 깨달을 수 있게 될 것인가를 이 사실은 나타내고 있다. 거기에서는 증거를 찾을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혀가 자신들에 대하여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그는 어떻게 변명을 하고 있는가?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나는 두려워하였나이다." 하나님에 대한 선한 생각은 사랑을 낳고, 그 사랑은 우리를 부지런하고 충성스럽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굳은 생각은 두려움을 낳고, 그 두려움은 우리를 게으르고 불성실하게 만들 것이다.
1. 그의 변명은 적(원수)의 감정을 나타내고 있다. "내가 알기로는, 당신은 굳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족속이 말한 것과 꼭 같았다. 즉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겔 18:25). 이와 같이 그의 변명은 오히려 그의 거침돌이 된다. "사람의 어리석음은 그의 길을 왜곡시키며" 또한 그 때에 마치 그것이 그 일들을 개선할 수 있을 것처럼 "그의 마음이 주님을 향하여 대적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분명히 잘못을 저지른 아담과 같이 범죄를 가리는 짓이다. 아담은 자신이 지은 죄를 "당신이 내게 주신 그 여자"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가 얼마나 확신 있게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 보라. "당신은 마음이 굳은 사람인 줄로 내가 알았나이다." 그가 그러한 사람인 줄을 그는 어떻게 알 수 있었는가? "너희 열조가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느냐?"(렘 2:5) 그가 무엇을 우리에게 행하였으며, 무엇에 우리를 괴롭게 하였는가?(미 6:3) 그는 "우리에게 광야나 암흑의 땅"이셨는가?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세상을 지배하셨으며, 사무엘이 말한, "내가 누구를 속였으며, 누구를 압제하였느냐"는 것보다 더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물으시는 것이다. 온 세상이 그가 굳은 주인이 아니시며, "세상은 그의 선하심으로 가득차 있으며" 또한 그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는 분이 아니심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는 악한 자와 감사치 않은 자에게도 해를 비추게 하기고 비를 내리시며, 그들의 마음을 양식과 즐거움으로 채우시는" 분인데 누가 전능하신 자에게 "우리를 떠나소서"라고 말하겠는가?
이러한 말씀은 사악한 자들이 하나님께 던지는 일반적인 비난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들은 마치 자신들의 죄와 멸망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그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가진 일반적인 은혜를 신실하게 향상시킨 자들이 특별히 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망하게 되는 일은 결코 없다는 사실이다. 열매 맺지 않은 포도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것 이상으로 더 합당하게 많은 일을 할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벽돌을 요구하지 아니하시며, 지불하기를 거절하신다. 아니 언약에 요구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언약 속에 약속되어 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망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 때문이다.
2. 그의 변명은 노예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내가 두려워하였나이다." 하나님께 대한 이러한 나쁜 감정은 그에 대한 그의 그릇된 개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노예적인 두려움보다 더 하나님에게 무가치한 것이 없으며, 그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없다. 이것은 속박과 고통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위대한 계명이 요구하고 있는 온전한 사랑에 직접적으로 반대가 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에 대한 굳은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그를 봉사하지 못하게 하며 제한시켜 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또한 그를 섬기는 것이 헛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종교적으로 유효한 일을 전혀 할 수가 없을 것이다.
[2] 이 변명에 대한 그 주인의 대답. 그의 변명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취소되고 있다. 아니 그 변명은 그에게로 되돌아오며 그는 이로 말미암아 말을 못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유죄와 정죄에 대해 살펴 볼 수 있다.
첫째, 그에 대한 유죄 선고(26, 27절). 그는 두 가지 릴들로 말미암아 유죄 선고를 받고 있다.
1. 게으름. "악하고 게으른 종아."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게으른 종들은 악한 종들이며, 또한 그들의 주인에 의해 그와 같이 여김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일에 게으르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선한 것을 무시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악을 행함으로써 패가하는 자의 형제가 된다"(잠 18:9). 하나님의 일을 소홀히 하는 자는 마귀의 일에 분주한 자와 거의 다를 바 없다. satis est mali nihil fecisse boni ─ 즉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심각한 비난을 불러일으킨다. 생각해 버리는 것은 죄이며, 마땅히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 게으름은 사악의 길을 터 준다. 모든 사람이 "더럽게" 된 것은 "선을 행하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시 14:3). 집이 비어 있을 때 더러운 영은 점령을 한다. 자신의 영혼들의 문제에 게으른 자는 단지 게으르기만 할뿐만 아니라 더욱 나쁜 일을 하게 된다(딤전 5:13). 사람들이 잠을 잘 때에 원수는 가라지를 뿌린다.
2. 자가 당착(26, 27절).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나님에 대한 죄인들의 굳은 생각들은 그릇되고 불의한 것으로써 자신들의 죄악과 게으름을 정당화할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그것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죄악을 더욱 악화시키고 첨가시킬 것이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이것을 세 가지 면으로 취할 수 있다.
(1) "내가 그렇게 굳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면, 나를 즐겁게 하기 위하여 더욱 근면하게 주의를 기울여 일하지 않았느냐?"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면 "두려워서"라도 그렇게 네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느냐?" 만일 우리의 하나님이 소멸시키는 불이시라면 그것을 생각해서라도 그를 봉사하는 도리를 찾도록 힘쓰자. 혹은 이 말씀은,
(2) "만일 네가 나를 그렇게 굳은 주인이라고 생각하였다면, 그래서 그것을 도난 당하거나 잃어버릴 것을 두려워하여 돈을 가지고 장사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너는 그것을 취리하는 자나 금세공인(gold-smith)에게 맡기거나 은행에 맡겨 둘 수도 있었을 것이며 내가 돌아올 때(다른 달란트처럼) 장사나 무역을 해서 크게 벌지는 못하였을 것이지만 최소한도로 본전과 변리는 받을 수 있도록 해야만 할 것이 아니냐?" 아마 이러한 것은 그 당시에 흔히 있던 일들처럼 보이며, 우리 주님께서도 이를 인정하고 계시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만일 우리가 할 수 없거나 감히 할 용기가 없어 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없거나 용기가 없어 하지 못한 것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될 때 그 변명은 하등의 소용이 없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더욱 어렵고 곤란한 봉사를 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이 우리가 보다 쉽고 안전한 봉사를 하지 않은 것을 정당화시킬 수 있겠는가?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있는 것이 더 낫다. 만일 우리가 대담한 계획들에서 용기를 나타내는 데 실패한다고 할지라도 진지한 노력을 함으로써 우리의 선한 뜻을 입증하는데 실패해서는 안 된다. 우리 주인께서는 "작은 일들의 날을 멸시치 아니하실 것"이다. 또한 이 말씀은,
(3)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너에게 있어서 합당한 일이 못된다. 왜냐하면 나는 너에게 씨를 뿌렸으며, 너에게 보관시키고 더욱 불어나게 하려고 맡겼던 그 달란트는 내 돈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계산하는 날에 사악하고 게으른 종들은 변명할 여지없이 완전히 버림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시시한 변명들은 취소될 것이며 모든 입은 닫히게 될 것이다. 지금 자신의 의로움에 근거하여 서 있는 자들은 장차 스스로 한 마디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둘째, 그의 정죄. 그 게으른 종은,
1. 그의 달란트를 빼앗으라는 선고를 받고 있다(28, 29절).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으라." 그 달란트는 맨 처음에 절대 소유자인 주인에 의해 분배되었지만, 지금은 심판자인 그에 의하여 회수되었다. 그는 그 불신실한 종을 형벌하기 위하여 그에게서 이를 빼앗아, 충성된 종을 보상하기 위하여 그에게 이것을 주고 있다. 이 비유의 의미는 그 판결의 동기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곧 "가진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29절). 이것은,
(1) 이 세상에서의 축복으로 간주할 수 있다. 즉 세상적인 부귀와 재산으로 여길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맡겨진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함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이러한 목적들을 위하여 사용하는 자는 "더욱 풍족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그 재물들을 더욱 풍족하게 가지게 될 것이며, 적어도 그것들이나 더 좋은 일에 있어서 더욱 많은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없는 자," 즉 마치 그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그것들을 소모할 능력이 없거나 그것들을 가지고 선을 행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있는 자들 Avaro deest, tan quod habet, quam quod non habet ─ 즉 비참한 사람은 그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도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될 것이다.
"빼앗김을 당할 것이다." 솔로몬은 이것을 설명하고 있다(잠 11:24).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은 우리가 가진 것으로 장사하는 것이며, 그 돌아오는 것은 풍부하게 될 것이다. 통에는 밀가루가 가득하고 항아리에는 기름이 그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탐욕스럽고 인색하며 무자비한 자는 그렇게 얻은 그러한 부귀들이 "재난을 인하여 망하게되는 것"(전 5:13, 14)을 보게 될 것이다. 종종 하나님의 섭리는 이상하리만치 재산을 가지고 선한 일을 하지 않을 자들에게서 그러한 일을 행하는 자에게로 전환시킨다. 그러나 재물들은 "가난한 사람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저축이 된다"(잠 28:8) (잠 13:22; 욥 27:16; 전 2:26 참조)
(2) 우리는 그것을 은혜의 수단(방편)으로 간주할 수 있다. 자신들이 가진 기회를 열심히 활용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크게 번성케 하실 것이며, "그들 앞에 열린 문을 두실"것이다(계 3:8). 오히려 자신들의 선행을 베푼 날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눈에서 숨겨진 평화에 속한 일들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실로에 행하신 것을 가서 보라"(렘 7:12).
(3) 우리는 그것을 성령의 일반적인 은사로써 간주할 수 있다. 이것들을 가지고 또한 그것으로 선행을 베푸는 자는 더욱 풍족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은사들은 실천함으로써 향상되며, 사용함으로써 더욱 빛나게 된다. 종교적으로 우리가 행하면 행할수록 더욱 그렇게 될 것이다. 자신들 속에 있는 은사들을 활용하지 않거나 자신들의 기능을 따라 노력하지 않는 자들은 그들의 은사가 썩고 쇠하여지며, 방치해 둔 불처럼 꺼져갈 것이다. 자신의 영혼 속에 살아 있는 은혜의 원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은 미련한 처녀들의 등불이 기름이 없어 꺼진 것처럼(8절) 그가 가진 일반적인 은사를 빼앗기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의 품에 느슨하게 포개놓은 "게으른 목자"의 팔은 메말라 버리게 될 것이다. 또한 태만하고 고의적으로 감아버린 그의 눈은 완전히 어둡게 되고 말 것이다(슥 11:17).
2. 그는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도록" 하라는 판결을 받고 있다(30절).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그의 특징은 "무익한 종"이다. 다음의 사실에 유의하라.
게으르고 무익한 종들, 즉 그들이 세상에 온 목적을 전혀 행하지 않으며, 그들의 출생이나 세례의 목적에 부합되는 일을 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영광이나 타인의 선이나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아무런 봉사도 하지 않는 무익한 종들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게으른 종은 육신 가운데 마비가 된 지체이며, 포도원에 있는 열매 맺지 않는 나무이며, 꿀벌들 중에서 게으름 피우는 수벌이며, 아무 데도 쓸모가 없는 자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무익한 종들"이다(눅 17:10). 우리는 "하나님께 유익하게 할 수 없다"(욥 22:2).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우리 자신들에게는 우리가 유익한 사람이 될 것이 요구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유익 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의 종으로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다. 해를 주지 않는 것만으로는 족하지 않다. 우리는 선을 행해야만 하며, 열매를 맺어야만 한다. 이렇게 행함으로써 하나님께 유익을 주지는 못하지만 그는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요 15:8).
(2) 그에 대한 판결은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는 것"이다. 충성된 종에게 말씀하셨을 때와 같이 여기에서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 비유에서 벗어나 그와 의미상 연관된 다른 내용을 언급하고 계시는데 그것은 전체의 내용에 대한 중요한 열쇠가 되고 있다. 왜냐하면 "바깥 어두운 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설교에서 지옥에서 멸망 받을 자의 비참함에 대하여 흔히 사용하시는 완곡어법이기 때문이다.
[1] 그들의 처지는 매우 비참하다. 즉 그것은 바깥 어두운 곳이다. 어두움은 불쾌하고 무서운 곳이다. 그것은 애굽의 재앙 중의 하나였다. 지옥에는 "어두운 구덩이"(벧후 2:4)가 있다. 어두움 속에서 "사람은 일할 수가 없으며," 게으른 종에게는 매우 알맞는 형벌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바깥" 어두운 곳이다. 즉 천국의 빛에서 "바깥," 충성된 종들이 들어가도록 적용된 그들의 주인의 즐거움에서 "바깥"이다. 다시 말하면 잔치하는 데서 "바깥"이다(마 8:12; 22:13 비교).
[2] 그들의 처지는 매우 슬프다. 거기에는 큰 슬픔을 나타내는 "우는 것"과 분노와 성냄을 나타내는 "이를 갊"이 있다. 이것은 게으른 종의 분깃(차지)이 될 것이다.
달란트 비유에 대한 성경적 이해
* 달란트의 비유의 의미
많은 분들은 마25장의 달란트의 비유를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은사의 활용에 대한 상급을 다루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이 비유에 앞서 나오는 열 처녀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는 주 재림 시, 예비처에 관한 비유지만 달란트는 알곡과 가라지에 대한 비유로 구원과 연결되는 말씀입니다(마3:12).
어떤 사람들은 달란트의 비유를 은사적인 비유로 해석함으로 구원과는 별개의 말씀으로 보고 있지만 우리는 이 문제를 성경 본문에서 잘 구별하여 판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비유의 결론으로 내려진 주님의 말씀을 들어 보겠습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고 하셨습니다(마25:30).
주님이 한 달란트를 받아 땅에 묻어두었던 이 악한 종에게 내리신 선언은 이 종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을 가리킵니다. 이 선언은 지옥을 가리키는 마8:12절 말씀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는 말씀과 맥을 같이 하는 형벌의 장소를 의미합니다.
비유로 표현하고 있는 사건의 내용은 실제와는 약간 다른 형태의 표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비유는 실제적인 사건을 이해하기 쉽도록 하나의 예를 들어 풀이해 주는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달란트를 비유로 풀이할때 그 비유의 의미가 다양해 질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받은 은사로 표현할 수 있고 또 각자에게 주신 성령의 은혜로 그 사람이 맺어야할 신앙적인 열매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 비유는 결론적으로 최종적인 심판의 선언이 내려지는 장면으로 나오는데 그 자리에서 이 종에게 내려진 주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우려야 합니다. 이 종은 "악하고 무익한 종"으로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슬피 울며 이를 갈아야 하는 바깥 어두운 데로 내 쫓기는 판결을 받은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내려진 판결은 다시 회복될 여지가 없습니다. 끝에 이른 것입니다.
만약 달란트가 은사의 비유였다면 이런 판결이 나올 수 없습니다. 구원 받은 성도가 주신 은사를 활용하지 못했다고 지옥에 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은사 문제는 상급에 관한 문제지 지옥으로 내 쫓기는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성도들은 각기 받은 은혜대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롬7:4).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믿은 게 아니라 잘못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으신 사랑의 하나님으로 믿지를 않았습니다. 이 악한 종은 알곡 중에 섞여 있었지만 마귀가 심어서 키운 가라지 였습니다.
구원과 열매는 떨어질 수 없는 병행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많은 성도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마귀가 심은 가라지도 있습니다(마13:28). 심판 날에는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가른다"고 하셨습니다(마13:49). 악인은 의인 중에 속해 있을 수 없습니다. 의인과 함께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가르는 역사가 마지막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여 주여 하는 자가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백성들이 찾이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마21:43).
그러므로 달란트의 비유는 최후의 심판에서 둘째 사망에 떨어질 가라지들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하는 게 올바른 견해로 보는 것입니다.< 민병석 목사>
달란트 비유(마25:14-30)의 다양한 주석
|
달란트 비유(마25:14-30)
◈ 원문강해 ◈
종말을 예비하는 실천적 자세로서의 신앙적 열매의 삶
감람산 강화의 네 번째 비유인 본문에 있어 14절 초두의 가르(gar또)가 내용적으로 앞문장의 원인이나 추정, 계속 등을 설명하는 접속사라는 점에서 본 비유가 앞선 열 처녀 비유와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곧 전 비유가 종말을 예비하는 자의 자세를 설파한 것이라면 본문은 그 신앙적 자세에 근거한 실천적 삶의 열매란 측면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는 개인적 차원의 구원을 언급한 열 처녀 비유에 비해 더 적극적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에는 필연적인 신앙적 열매들이 함께 겸비되어야 함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편 눅19:12-27의 열 므나 비유와 유사한 본문의 내용적 강조점은 우리에게 주어진 다양한 재능들(고전12:4-30)이 종말론적으로 성취될 하나님나라의 확장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역동적으로 쓰여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1. 달란트의 부여와 활용의 두 유형(14-18절)
본문에서 달란트(talavnta탈란타)는 곧 하나님께서 성도들 개개인에게 능력대로 부여하신 각각의 재능을 상징한다. 특별히 본문은 그 부여받은 달란트(재능) 자체보다는 전적 헌신과 실천적 사역을 통한 이 재능의 활용이란 측면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주인과 종의 정황을 미루어 볼 때 이 비유가 복음 전파의 사역과 하나님 나라 확장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고 떠나신 예수그리스도와 이를 신실한 소명의식 속에서 이행해야 할 의무를 진 성도들에 대한 상징적 의미로 쓰여진 점에서 볼 때본 비유 역시 강한 종말론적 의미를 가진다.
1) 소유를 맡김
( {Wsper ga;r a[nqrwpo" ajpodhmw'n ejkavlesen...eJkavstw/ kata; th;n ijdivan duvnamin호스페로 가르 안드로포스 아포데몬 에칼레센…헤카스토 카타 텐 이디안 뒤나민;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그 재능대로, 14,15절)
달란트는 중량으로는 26-36㎏, 화폐로는 6000데나리온에 해당한다.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다. 15절의 뒤나민(duvnamin재능)은 '능력', '역량' 이란 뜻으로 달란트의 상징적 의미인 '재능'과는 달리 어떤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내적·외적 조건을 가리킨다. 따라서 '각각 그 재능대로'(eJkavstw/ kata; th;n ijdivan duvnamin헤카스토 카타 텐 이디안 뒤나민)란 말은 성도들 개개인이 모두 서로 다른 고유의 인격적, 신앙적 조건을 가지고 있으며 하니님께서는 이에 합당하게 그 맡은 자리에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달란트(재능)를 더하여 주신다는 의미이다. 실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부여받은 달란트가 큰가 작은가가 문제가 아니라 그 받은 달란트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활용하여 하나님께 그 신앙적 열매를 드리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2) 위임받은 달란트의 올바른 활용
(poreuqei;" oJ ta; pevnte tavlanta...a[lla pevnte tavlanta포류데이스 호 타펜테 탈란타…알라 펜테 탈란타;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다섯 달란트를, 16,17절)
16절의 포류데이스(poreuqei;"가서)는 부정과거분사형으로 행동의 일회적 실행을 지시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는 '바로'란 뜻의 부사(eujqevw"유데오스)와 함께 바로 가면서로 번역될 수 있고, 이는 개역 성경의 바로 가서 보다 그 의미가 더욱 강한 것으로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의 즉각적인 실천과 위임받은 달란트의 활용을 보여 준다.
한편 '장사하여'(hjrgavsato에르가사토)는 원어상 '일하다, 활동하다, 이행한다'는 (omai에르가조마이)의 부정 과거형으로 행동의 계속성을 지시하므로, 이는 그들이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지속적으로 그 맡겨진 소유를 가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또한 부정과거형 '남기고'(ejkevrdhsen에케르데센)는 그들이 그러한 지속적 노력 속에서 계속적인 신앙적 열매를 맺어 왔음을 밝힌다. 실로 그들은 즉각적인 소유의 활용과 함께 지속적인 노력으로 신앙적 열매를 맺은 충성되고 신실한 청지기들이었다.
3) 위임받은 달란트를 묻어둠
(oJ de; to; e{n labw;n ajpelqw;n w[ruxen gh'n kai; e[kruyen호 데 토 엔 라본 아펠돈 호뤽센 겐 카이 에크뤽센;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감추어 두었더니, 18절)
본문에서 아펠돈(ajpelqw;n가서)은 '떠나가다, 가버리다'란 아페르코마이(apercomai)의 부정과거분사형으로 16절의 포류데이스(poreuqei"가서)처럼 즉각적으로 실행에 옮긴 사실을 시사하나(16절) 그보다는 상당히 부정적인 뉘앙스를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부정과거형인 '파묻다'란 뜻의 호뤽센(w[ruxen)과 '감추어 두다'란 에크뤽센(ekruyen)이 시사하듯 그 종이 소유를 위탁받은 즉시부터 그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땅에 묻어두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16절). 이는 위의 충성된 두종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행동으로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주인의 의도를 곡해한 사실과(16절) 그의 악의적이고 게으른 면모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재물을 땅에 묻는 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가장 안전한 재산보관 방법이었다(마13:44).
2. 재능의 올바른 활용에 대한 평가(19-23절)
본문에서는 주인이 그 종들에게 맡긴 소유의 크고 작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위임받은 소유를 얼마나 최선을 다해 활용했는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곧 본문은 문장의 새로운 전환을 유도하는 불변사 데(de;)를 통해 본문이 14-18절 내용에 대한 결과적 평가란 사실을 시사해 준다.
한편 본문은 '주인이 돌아와'라는 구절이 상징하듯 그 종말론적 성격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으므로(마24:42,44,46), 본 비유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성도들 각각의 정황을 상징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1) 주인의 회계
(meta; de; polu;n crovnon e[rcetai oJ kuvrio" tw'n douvlwn ejkeivnwn kai; sunaivrei lovgon met j aujtw'n.메타 데 폴륀 크로논 에르케타이 호 퀴리오스 톤 둘론 에케이논 카이 쉬나이레이 로곤 메타 아우톤;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 새, 19절)
본문에서 '오랜 후'(meta; de; polu;n crovnon메타 데 폴륀 크루논)의 메타는 확실하게 정해진 시간을 가리키는 부사라는 점에서 이말은 주인의 귀환을 기정 사실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오랜 후'는 그 정확한 때를 알 수 없는 종말의 때를 상징하는 한편 그 종말 곧 그리스도 재림의 확실성을 강하게 암시하는 말이다. 한편 '회계할 새'(lovgon로곤)는 '계산한다, 장부에 단다'란 뜻을 가진 상용어로서 16절의 '장사하여'와 문맥상의 호응 관계를 가진다.
따라서 본문은 확고하게 성취될 종말로 있을 심판에 있어서 우리 행실의 결과(재능의 활용과 열매의 유무 여부)가 회계상의 엄정한 감사를 받듯이 그리스도 앞에서 판별되어질 것임을 의미한다(마18:23계20:11-15).
2) 첫 번째 종에 대한 평가
(kai; proselqw;n...ei[selqe eij" th;n cara;n tou' kurivou sou.카이 프로셀돈…에이셀데 에이스 텐 카란 투 퀴리우 수;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20,21절)
20절의 '와서'(proselqw;n프로셀돈)가 부정과거분사형으로 행동의 연속성을 지시하는 것이란 점에서 이미 16절에서도언급한 것처럼 다섯 달란트 가진 자가 자신이 맡은 바 소임을 주인이 돌아와 그 결과를 회계하는 시점까지 계속 수행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이는 그의 진술 중의 '보소서'가 특별한 주목거리나 놀람을 의미하는 이두(ijdouv보라)로 쓰여지지 않고 보편적 형태의 이데(i]de)로 쓰여졌다는 점에서 그의 충실함과 함께 그 열매의 공과를 자신의 것으로 돌리지 않는 그의 겸손함을 보여 주고 있다(Rieneker).
21절은 그에 대한 주인의 본격적인 평가가 기술된다. 여기서 '잘하였도다'(euj유)는 '좋게 행하다, 친절하게 행하다, 바로 행하다'라는 포괄적 의미에서의 '잘함'을 지시하고, 이어 언급되는 '착하고'(ajgaqev아가데)가 실천적 측면에서의 올바름을, '충성된'(ejpivojliga h\d pistov"피스테)이 종교적·도덕적 측면에서의 내적 신실함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이 말은 이들 모두의 의미를 내재한 한 마디의 극적인 칭찬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epi에피 올 리가 에스 피스토스) 앞에 나타난 전치사 에피(epi)는 '∼에 더해서' 또는 '그렇기 때문에'란 뜻을 함께 함축하며, 이는 뒤의 문장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의 이유를 제시하는 동시에 뒷 문장이 그의 신실함에 대한 신적 보상임을 암시한다.
3) 두 번째 종에 대한 평가
(proselqw;n 팪e;?...ei[selqe eij" th;n cara;n tou' kurivou sou.프로셀돈 데…에이셀데 에이스 텐 카란 투 퀴리우 수;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22,23절)
20,21절과 동일한 반복을 통해 두 달란트 가진 자의 결과적 평가가 기술된다. 이처럼 다섯 달란트 가진 자와 두 달란트 가진 자의 평가가 동일한 것은 곧 종말론으로 성도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심판적 평가가 결코 그 공과의 크고 작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가 얼마나 맡은 사명에 헌신하며 충성했는가라는 동기적 측면에 있음을 알게 한다.
3. 재능을 묻어 둔 종에 대한 평가(24-30절)
특별히 많은 부분을 할애함으로서 달란트 비유의 초점이 재능을 활용치 않고 묻어 둔 악한 종에게로 집중된다. 곧 본문의 악한 종은 열 처녀 비유에서 언급된 외형적 신앙인의 상징인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이 재능을 활용치 않고 묻어둠으로 신앙적 열매를 맺지 못한 사실은 진정한 신전의식 없이 신앙 생활을 영위한 결과적 정황과 동일한 것이다.
실로 이는 결과보다는 동기적 측면을 더 중시하시는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볼 때 심각한 범죄 행위와 같은 것이었다.
1) 악한 종의 자기 변명
(proselqwvn dev kai; oj to; e{n tavlanton eijlhfw;" ei\pen,...i[de e[cei" to;sovn프로셀돈 데 카이 호 토 엔 탈란톤 에일레포스 에이펜…이데 에케이스 토 손;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24,25절)
한 달란트 받았던 자의 '받았던'(eijlhfw;"에일레포스)이 현재완료분사형으로 동작의 완료된 상태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이 말은 그 종이 여전히 한 달란트만을 가지고 있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편 그가 자기 변명을 위해 주인을 묘사한 말 중 스클레로스(aklhrov")는 '거칠은, 잔인한, 무자비한'이란 뜻으로 이는 병행구인 눅19:21의 '엄한'(aujsthrov"아우스테로스)보다 그 의미가 한층 부정적이고 강하다(요6:60약3:4). 따라서 이러한 묘사는 부정과거형으로 쓰인 '알았으므로'(e[gnwn에그논)가 지속적이고 체험적인 앎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악한 종의 왜곡된 신관(神觀)을 드러낸다. 한편 25절의 '두려움'(fobhqei;"포베데이스)이 부정과거분사형으로 동작의 연속성을 가리킴으로 그 왜곡된 신관이 두려움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실로 그에게 있어 이 두려움은 더 나아가 그의 소극적이고 게으른 자세를 낳게 된 것이다.
2) 주인의 반응
(Ponhre; dou'le kai; ojknhre...kai; ejlqw;n ejgw; ejkomisavmhn a]n to; ejmo;n su;n tovkw/.포네레 둘레 카이 오크네레,…카이 엘돈 에고 에코미사멘 안 토 에몬 쉰 토코;악하고 게으른 종아…변리를 받게 할 것이라 하고, 26,27절)
그 종에 대한 엄중한 책망이 응답으로 주어진다. 포네레(ponhrev)는 '무가치한, 비열한, 악의적인'이란 뜻이며, 오크네레(ojknhrev)는 '싫증나는, 빈둥빈둥하는'이란 뜻으로 이들은 '착하고 충성된'(21절)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말로 그의 내적·외적 삶의 모든 부분이 무가치하며 악의적이라는 사실을 증거 해 준다.
한편 반어법적으로 사용된 완료형 시제 '네가 알았느냐'(26절)의 에데이스(hdei")는 24절에서처럼 그의 왜곡된 신관의 현재적 정황과 함께 그 정황대로 될 것이라는 심판적 경고의 의미가 함께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병행구절인 눅19:22의 삽입구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특별히 부가된 27절의 경우 '그러면 네가 마땅히'(e[dei se ou\n에데이 세 운)에서 미완료형 에데이(e[dei)는 '∼해야만 했어야 했다'는 뜻으로 이하 문장과 함께 그의 자기 변명이 모순된다는 사실과 함께 그렇게 조차하지 않은 사실로 인한 심판적 결과가 이제 결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주지시키고 있다.
3) 악한 종의 결과적 정황
(a[rate ou\n ajp j aujtou' to; tavlanton ...ejkei' e[stai oJ klauqmo;" kai; oJ brugmo;" tw'n ojdovntwn.아라테 운 아프 아우투 토 탈란톤…에케이 에스타이 호 클라우드모스 카이 호 브뤼그모스 톤 오돈톤;그에게서 한 달란트를 빼앗아…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고, 28-30절)
여기서 '빼앗아'(a[rate아라테)는 아이로(ai[rw)의 부정과거명령형으로 여기에는 그 명령을 수행할 제3자의 출현을 암시하고 있는데 혹자는 이를 심판의 집행자로 나타날 천사를 암시하는 것으로 본다(Rieneker).
한편 29절의 '없는'은 원어상 단순한 무소유를 가리키기보다는 '가지지 않은, 소유하지 않은, 관리하지 못한' 등의 의미인 메 에콘토스(mhv e[conto")로 쓰였다는 점에서 이는 위의 내용대로 그 재능을 활용하지 못하고 땅에 묻어 썩힌 사실을 지시하는 것이다. 곧 본문은 단순히 소유가 없는 가난한 자가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긴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재능(소유)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활용하지 못한 자는 그 주어졌던 최소한의 재능까지 빼앗기게 될 것이란 의미이다. 끝으로 30절은 그 악한 종의 최종적인 심판 결과를 지시하며, 여기서 '바깥'으로 쓰인 엑소테론(ejxwvteron)은 엑소(exw)의 비교급 부사로서 그 바깥의 정도를 한층 강조시키는 말이다. 따라서 이는 '내던져 버리다'란 뜻의 부정과거명령형 에크발레테(ejkbavllete내어 쫓으라)와 함께 완전한 관계의 단절과 철저한 유기(遺棄)를 시사시켜 준다(계20:10-15). 곧 이러한 결과적 정황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 그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사실(21,23절)과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
◈ 캐논주석 : 진보주의 주석 ◈
1. 재능과 달란트(14-18절)
본문의 달란트 비유와 눅19:27의 비유를 같은 비유로 여겨 하나로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Moldonatus). 반면 Gerhard는 비유의 규모와 대상 그리고 장소가 다르다는 것을 주장하며 두 비유가 서로 같은 것이 아님을 말한다. 달란트가 므나보다는 60배가 많은 돈이며, 교훈의 대상에 있어서 달란트 비유는 예수의 제자들인 데 반해 므나 비유는 제자들과 원수들과 무리가 같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달란트 비유는 감람산에서 종려주일이 지난 화요일에 언급하였고, 므나 비유는 예루살렘 가까이 오실 때에 언급된 것이다. 이런 차이에 의해 두 비유는 하나의 비유라고 볼 수 없다.
14절에는 '천국의 마치∼와 같다'라는 구절이 생략되어 있는 것과 같은데, 이는 '또'(gavr가르)라는 등위접속사가 13절과 14절을 밀접하게 연결시켰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E.Schweizer). 슈바이쳐는 누가복음의 am나 비유와 달란트 비유를 같은 전승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듯하다. 분명한 언급은 피하고 하나님의 은사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 전승 과정에서 돈의 액수를 증가시켰다고 보는 점에서, 슈바이쳐의 의도를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균등한 므나의 분배가 후대의 은사 사상의 발전에 의해 능력에 의한 분배로 나타난 것이라고 본다.
2. 회계와 주인의 계산법(19-27절)
두 종의 백 퍼센트의 이익에 대한 주인의 칭찬은 상금이나 어떤 소유물을 선물로 주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다(E.Schweizer). 이는 혹자의 표현처럼(Billerbeck) '계명을 완수한 것에 대한 보상은 계속적인 계명의 완수'이다. 두 종은 주인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음을 잘 알고 자신들의 관심을 그것에 맞추었으나, 한 종은 주인의 관심보다는 자신의 몸을 아끼는 데 더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현재의 안락함을 걸고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이 점에서 그는 종의 자격을 상실한 약한 종이라는 것이 잘 드러난다(E.Schweizer). 이제 재산의 증가에도 더욱 분명해진다. 두 종을 칭찬한 것과 한 종을 책망한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들이 윤리적 측면의 신실 성에 관한 것들임을 알 수 있다(Wycliffe). 여기서 우리는 주인이 요구하는 것이 단순한 재산의 증가만이 아니라 종들의 신실함과 충성된 노력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주인이 무익한 악한 종의 소유마저 빼앗아 보다 충성된 종에게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E.Schweizer).
3. 심판(28-30절)
한 종이 달란트를 빼앗긴 것, 아니 다시 회수당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특별한 표현이다. 하나님이 은사로 주신 것들을 활용하지 않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선물이 결코 자신의 완전한 소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30절의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쫓아내고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하는 주인의 심판은 단순한 처벌을 넘어서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한다(E.Schweizer). 왜냐하면 바깥 어두운 곳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이 있는 곳으로서 마귀와 그의 사자들이 거할 장소이며(마8:12계20:10-15), 슬피 울며 이를 가는 행위로 영원한 형벌을 나타내는 상투적인 완곡어법이기 때문이다(마8:1213:42;22:13;24:51).
◈ 캐논주석 : 보수주의 주석 ◈
1. 재능과 달란트(14-18절)
14절의 맨 앞에서 '천국은'이란 문구가 생략된 표현인데(W.Hendriksen, R.C.H.Lenski), 이는 '또'(gavr가르)라는 접속사를 사용하여 본문을 13절의 해석으로서 언급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R.C.H.Lenski).
'주인'은 어떤 사람으로 나타나는데, 본문과 평형구절로 여겨지는 눅19:12-27에 의해 왕위를 받기 위해 타국으로 떠나는 귀인으로 보기도 하고, 단순한 돈을 많이 갖고 있는 부자로 보기도 한다(R.C.H.Lenski).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상징하는 것이 승천과 재림 사이의 예수그리스도임에는 일치하고 있다(박윤선, R.C.H.Lenski, W.Hendriksen).
'달란트'(talanta탈란타)는 무게 단위와 화폐 단위로 사용되었는데, 본문에서는 화폐로 사용되었다. 달란트는 약 6천데나리온에 해당하며,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다. 즉 1달란트는 노동자의 20년 월급인 셈이다(W.Hendriksen). 그런데 주인은 종들에게 각각 차등을 두어 달란트를 지급했는데, 그 기준이 된 것은 '그들의 재능대로'(kata; th;n ijdivan duvnamin카타 텐 이디안 뒤나민), 즉 각 사람의 능력이다(박윤선).
그러므로 이 분배는 공평한 것이다(민7:4-9). 이러한 해석법에 의해 달란트가 상징하는 것은 흔히 재능이나 성령의 능력 등으로 본다(박윤선). 이 비유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충성도의 문제이다(R.C.H.Lenski).
2. 회계와 주인의 계산법(19-27절)
이윤을 남긴 두 종에게 똑같은 칭찬을 한 것은 주인이 수량의 많고 적음에 구애받지 않고 최선의 충성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R.C.H.Lenski, 박윤선). 즉 주인의 뜻을 알고 충성되게 실행하는 것만이 칭찬과 상급의 조건이다. 이는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이 왔을 때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책망받은 종은 주인의 의도를 몰랐거나 오해하였으며(박윤선) 주인의 인격을 비난하고 모독하였다(W.Hendriksen).
당시의 이자율은 로마제국 초기에는 8%였으나 점차 12, 24, 48%의 고리대금으로 발전하게 되었다(M.R.Vincent, Buckland). 예수 당대의 이율은 약 10%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당대의 유대 사회에는 이자(Interest)와 고리대금(Usury)을 구분하여 이자놀이를 하면서 율법(신23:19,20시15:5)을 교묘히 피했다(R.C.H.Lenski).
3. 심판(28-30절)
하나님은 은사를 열심히 활용하는 자는 더 부유해지고 그렇지 못한 자는 받은 은사마저 박탈당해 더욱 초라해진다(W.Hendriksen, R.C.H.Lenski). 하나님은 타인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일을 이루셔야 하기 때문이다.
29절의 격언구는 마13:12막14:25에도 나타나는데 후자는 달란트 비유와 상관없이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29절이 독립적인 격언구임을 알 수 있는데, 예수는 비유의 결론을 모두가 잘 아는 격언으로 맺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으로 끝을 맺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으로 끝을 맺으신 것은 당신의 교훈을 보다 생생하고 효력 있게 인식시키게 하시기 위해서인 듯하다.
30절의 선고는 영원한 형벌과 주인과의 영원한 단절을 의미하는 완곡어법인데(M.Henry), 24:1-13의 비유와 연결시켜 볼 때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처녀들, 즉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당하는 형벌이다(박윤선).
◈ 캐논주석 : 주석연구 ◈
온유와 충성으로 얻는 복
본 문단속에는 달란트 비유(14-23절), 악하고 게으른 종(24-28절), 그리고 의인의 복과 악인의 저주(29,30절)등 세 가지 단계적 교훈이 들어 있다. 이들 모두는 앞 문단(1-13절)의 열 처녀 비유와 다음 문단(31-46절)의 양과 염소에 대한 비유와 함께 25장 전체로서 종말의 비유를 구성하는 것들이다.
1. 달란트 비유의 배경(14-23절)
달란트는 3,000세겔(26-36㎏)의 무게(출25:39계16:21) 또는 노동자의 20년간의 품삯(6,000데나리온, 20:1-13)으로 금 한 달란트는 60므나(눅19:13) 이다.(만일 노동자 하루 품값이 10만원이면, 한달 200만원, 1년 2천 4백만원, 20년이면 4억 8천만 -즉 1달란트는 현 싯가로 약 4억8천만원-6억정도 된다). 이는 고난주간의 화요일에 예루살렘에서 종말론 교육을 위하여 제자들에게 3종류의 종과 부요한 주인의 투자(16,17절)와 회계(19절)에 관하여 행한 비유적 교훈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종의 등급을 매긴 주권자가 각각의 재능에 적합하게 맡겼고 그 재능에 성실하게 일한 결과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었다는 점이다(15-17절). 이 비유는 재능과 소명의 관계를 깨닫게 하는 교훈이다.
2. 온유함으로 충성치 아니한 악하고 게으른 종
다섯 달란트 맡은 자와 두 달란트 맡은 자는 그 재능의 규모가 달랐으나 그 성실성은 똑같이 100%이었으며 그들에게 주어진 상급도 똑같았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맡은 종은 그 재능이 적었던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의 성실성은 전혀 인정할 수 없다. 자기 방식대로 주인을 잘못 평가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의적 노력을 기울이고자 의욕을 보이지 않을 게으름뱅이이다. 회계할 때가 올 것을 알았으나 자기합리화에만 급급하였으니 악한 종이다.
3. 의인의 복과 악인의 저주(29,30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모두 작은 일(21,23절)을 통한 시험(test)에 불과하였다. 의인과 악인의 구별은 주권자에 대한 전폭적 신뢰와 자신의 역량을 아낌없이 발휘하는데 있었고 복과 저주는 바로 그러한 반응에서 얻은 열매를 기준 삼았다. 불평불만 없이 온유함 감사와 찬양으로 헌신 봉사 충성했던 자에게는 주인의 기쁨에 참여토록 허락하시는 것이다.
화폐의 형태(25:14-30) ◈ 세계배경 문화사 ◈ 동양 중국 : 중국에서는 동(銅)을 재료로 한 어화, 도화, 포화 등의 주조 화폐가 있었는데 어화는 건어를, 포화는 농구인 괭이나 쟁기를 그리고 도화는 가정용품인 작은칼을 원형으로 만들어졌다. 그밖에 사람의 얼굴 모습으로 만들어진 의비전(蟻鼻錢)등이 있다. 한나라 때는 둥근 돈(환전)이 주로 사용되다가 여러 차례의 개주(改鑄)을 걸쳐 후한 때 오수전(五銖錢)을 주조했는데 이것이 가장 많이 사용되였다. 인도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화폐로는 각인 화폐이다. 화폐의 양면에는 연화, 수목 등 인도의 상징물을 새긴 은화이다. 한때는 그리스도의 영향을 받아 화폐의 도안을 그리스 풍으로 왕의 초상이나 올림푸스 신들의 입상과 알파벳이나 카로티스 문자가 각인 되기도 했다. 쿠샨 왕조의 제3대인 카니시카 왕 시대는 동왕조의 전성기로 금·은화가 주조되었다. 화폐의 도안도 주로 왕의 초상이나 불상이 그려져 당대의 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16세기의 무굴 제국에 으르러 화폐 제도가 개혁되었다. 서양 그리스 :그리스 지역인 리디아에서 만들어진 알렉트런 화폐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화폐이며, 이후 동전 화폐가 주조되어 도시 국가에서 널리 유통되었다. 동전 화폐에는 그리스의 뛰어난 미술로 올림포스의 신을 조각했다. 특히 우수한 것은 화폐의 표면에 여신 아테네의 두부를, 이면에는 올빼미와 올리브의 그림을 나타낸 각인이 있는 4드라크마짜리 온화이다. 로마 :로마에 있어서는 B.C.340년 전후 아스(as)를 단위로 한 대형의 청동화가 주조되었고, 이후 은을 재료로 한 데나리우스 은화가 주조되었다. 이 화폐의 표면은 로마의 여신과 기타의 신들이나 인물을, 이면에는 종교적·역사적 사건이 나타나 있다. 헤롯 1세(Herod I 36-34 B.C.) 때의 화폐는 예전에 주로 사용했던 상징물, 즉 풍요의 쌍뿔(cornucopia;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어린 제우스신에게 젖을 먹인 양 아말테의 뿔)이나 양귀비 머리 모양을 주로 각인한 화폐가 주종을 이루었다. 또한 최초로 동전에 날짜를 찍었다. 헤롯 아그립바 1세(Herod Agrippa I A.D.37-44)는 자신의 두상을 각인 한 주화를 만든 최초의 통치자였다. 그후 금화가 많이 주조되었는데 금화에 당시 정치가의 두부를 각인 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근동 : 당시 팔레스틴 지역은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 화폐가 널리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화폐를 발행하는 데도 허락을 받아야했다. 유대 요한 힐카누스 대제사장은 화관 무늬로 각인 한 고대 히브리어를 사용해 단조로운 화폐를 구조했다. 근동 지역의 주화는 많은 양의 납을 합금 하여 주조했기 때문에 상태가 매우 불량하다. 특징으로는 일곱 가지로 갈라진 촛대를 화폐에 각인 한 것인데 이는 성전의 거룩한 촛대를 의미한다. 성경적 접근 : 화폐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사용하도록 우리에게 주신 경제적인 한 매개물이다. 이런 화폐는 금, 은, 동(창20:16대상21:25막6:8) 등으로 만들었다. 화폐는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기 위함이고, 양식을 구입하는데 사용되었다. 또한 성전을 수리하거나 세금을 내는 단위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화폐를 부의 척도 기준으로 삼고 있으며, 화폐를 통한 부정부패가 인간 사회에서 성행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돈을 사랑하지 말 것을 경고하셨다(딤전3:3히13:5). 왜냐하면 돈은 모든 악의 근본이고, 탐욕이 생기며, 남을 속이기 때문이다(왕하5:20-27암8:5딤전6:10). 따라서 우리는 돈을 사용함에 있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하게 해야 함은 물론이고 돈보다는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세가 되면 돈을 사랑하게 된다고 경고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
◈ 구속사 강해 : 사단의 활동사 ◈
불순종의 원인(25:14-30)
관계가 악화되고 불행해지는 원인 중 한가지는 오해하거나 곡해했기 때문이다. 주인의 뜻에 불순종한 결과 버림받는 종에게서 불순종의 원인을 살펴보자.
1. 불만 때문
악한 종은 주인에게 당신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24절) 사람이라고 원망했다. 이 말은 아주 조금 주고 많은 것을 요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즉 자신에게 겨우 한 달란트 준 처사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이요 그러기에 받자마자 땅을 파고 돈을 묻었던 것이다(18절). 감사함 없는 신앙은 원망과 불만으로 행할 수밖에 없다.
2. 오해했기 때문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29절). 이것이 주인에 대한 종의 인식이다. 굳은 사람이라는 말은 인색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종은 주인이 풍성한 상급 주기를 기뻐하는 분임을 알지 못하여 오해한 것이다. '주지는 않고 요구만 하시는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오인하는 사람들이 많다. 유대의 율법주의 종교인들의 그릇된 신앙의식을 주님께서 정확하게 진단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 은혜 속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올바로 인식할 수가 없다.
3. 불 신앙 때문
결국 종은 주인을 신뢰치 못하고 '두려워하여'(25절) 불순종의 길로 간 것이다. 경외하는 것과 맹목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사랑의 하나님께 대한 참된 경외요 후자는 불신의 다른 얼굴이다.
복음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무서워하는 종의 영(롬8:15)을 지니고 산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신뢰치 않기에 그저 무섭게만 여겨지는 것이요, 그 결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진정한 순종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 구속사 강해 : 하나님의 역사 ◈
천국 삶의 특성(25:14-30)
공산주의 국가의 삶의 특성과 민주주의 국가의 특성은 다르다. 전자는 사상과 혁명을 강조하고 후자는 개인의 능력과 자유를 강조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천국의 삶의 특성은 무엇일까? 달란트 비유 속에서 복음 진리 속의 천국 삶의 특성이 나타난다.
1. 상호 신뢰하며 사는 삶
주인이 타국으로 가면서 그 종들에게 재산을 맡겼으며 종들은 거의가 그 맡은 재물을 활용하여 주인의 뜻에 순종했다. 마치 종과 주인 사이가 아니라 아버지와 자녀 사이처럼 상호신뢰의 인격적인 관계임을 시사해 준다.
법적인 관계가 아니라 사랑과 신뢰로 이루어진 믿음의 관계가 바로 천국 삶의 특성인 것이다. 온전한 사랑과 신뢰가 천국의 법이다.
2. 적극적인 의식이 요구되는 삶
종들은 주인이 맡긴 것보다 남기는 삶을 살았다. 이를 위해서는 적극적인 행동과 사고가 요구된다. 재물을 땅에 묻어 둔 종처럼 도피적이거나 소극적인 삶은 천국에 어울리지 않는다. 천국은 무엇 무엇을 하지 않는 삶이 아니다. 무엇 무엇을 행하는 삶이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사는 삶인 것이다. 율법에 얽매여 이것도 않고 저것도 않는 삶의 양식은 기독교인의 삶이 될 수 없다. 적극적으로 진리와 선과 의를 추구하는 삶이 천국의 특성이다.
3. 상급이 주어지는 삶임
주인은 돌아와 그 뜻대로 행한 종들에게 의외의 상급을 준다. 그들이 남긴 이익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내용, 즉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특권을 준 것이다. 결국 주인이 바란 것은 작은 이익이 아니었다. 자신의 종들에게 상주려는 것이 주인의 종국적인 의지였음을 들어 난다. 하늘의 영생과 유업의 상급이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나라! 그것이 천국만의 특성이다.
달란트 비유의 의도
마태복음 25:14-30
◈ 주제 : 어떤 재능을 갖고 있느냐보다 재능을 어떻게 사용했느냐가 중요합니다.
◈ 그림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참으로 익숙한 말씀입니다.
본문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에 종들을 불러서 자기의 재산을 각기 재능대로 맡겼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5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2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1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5 달란트 맡은 자와 2달란트 맡은 자는 바로 가서 장사를 하여 5, 2달란트를 남겼습니다.
1 달란트 맡은 자는 땅을 파고 돈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 결산을 하자고 종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5 달란트, 2 달란트 맡은 종은 각각 5 달란트, 2 달란트를 남겼다고 보고하여 주인에게
◈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 칭찬을 받습니다.
하지만 땅 속에 감추었다가 가져온 1달란트 맡은 자는 [악하고 게으른 종]- 책망받습니다.
있는 것도 빼앗고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심판받는다.
본문 앞에 열 처녀 비유는 개인적 차원의 구원을 준비하는 자세라면, 달란트 비유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에 필연적인, 신앙 열매들이 함께 겸비되어야 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 1. 달란트는 개개인에게 부여한 재능입니다.
본문에 달란트는 하나님께서 성도 개개인의 능력대로 부여하신 각각의 재능을 상징합니다.
특별히 본문은 그 부여받은 달란트(재능) 자체보다는, 전적 헌신과 실천적인 사역을 통한 재능의 활용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복음 전파와 하나님나라 확장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고 떠나신 것과, 이 명령을 이행해야 할 의무를 가진 성도들에 대한 상징적 의미로 주셨습니다.
◈ 그림(도표) 달란트는 구약에서는 무게 단위로 사용했습니다. - 1 달란트 = 34Kg
신약에서는 무게와 화폐 단위로 사용합니다. -1 달란트 = 6000데나리온 = 20년 연봉
1 달란트는 작은 돈이 아닙니다. 20년 동안 매일 일해야 벌 수 있는 큰돈입니다.
15절 [각각 그 재능대로] = [능력, 역량] - 어떤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 개개인의 인격과, 신앙적 조건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맡은 자리에서 그 역할을 합당하게 감당할 수 있는 달란트(재능)를 더하여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부여받은 달란트가 많은가 적은가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받은 달란트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어떻게 활용하여 하나님께 신앙의 열매를 드리는가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 이것이 달란트 비유의 의도요 목적입니다.
◈ 16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 헬) 바로 가면서 - 받자마자 출발했다.
[바로 가서]는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과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의 즉각적인 실천과 위임받은 달란트의 적극적인 활용을 보여줍니다.
[장사하여] = 원어에는 [일하다. 활동하다. 이행한다]의 지속적인 진행형을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그 맡겨진 재능을 지속적으로 활용하며,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남기고] = 그들이 꾸준한 노력 속에서 계속적인 신앙 열매를 맺어 왔음을 밝히는 것이다.
그들은 즉각적인 재능의 활용과 함께 지속적인 노력으로 신앙의 열매를 맺은 착하고 충성된 청지기들이었습니다.
◈ 18절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1 달란트 받은 자도 즉시 움직였습니다. - 땅을 파고 주인이 올 때까지 감추어 두었습니다.
이것은 주인의 의도를 곡해한 사실과, 악의적이고 게으른 면모를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재물을 땅에 묻는 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가장 안전한 재산보관 방법이었다(마13:44).
◈ 2. 달란트 활용에 대한 결산이 반드시 있습니다.
◈ 19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 새]
[오랜 후] = 메타 데 폴륀 크루논 = 메타 = 정해진 시간을 뜻하는 부사입니다.
이 말은 주인의 귀환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랜 후]는 그 정확한 때를 알 수 없지만, 종말의 때를 상징하면서, 그리스도 재림의 확실성을 강하게 암시하는 말입니다
[결산할 새] = [계산한다. 장부에 단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확실하게 성취될 종말에 있을 심판 때에, 우리 믿음의 활동과 열매가 그리스도 앞에서 판별되어질 것을 의미합니다.
◈ 마 18: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 감사받음
◈ 20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 22절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와서] = 이 두 사람은 맡은 바 소임을 주인이 돌아와 결과를 회계하는 시점까지 계속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보소서] = 이두(놀람, 주목, 자랑을 위해), 이데(지시에 의한 순종으로 보여드림)
이것은 열매의 공적을 자신의 것으로 돌리지 않는 그들의 겸손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 21절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 23절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이 두절의 말씀에는 단 하나의 토시도 틀리지 않고 똑같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은 분명하게 각각 다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향한 주인의 칭찬은 한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해 줍니다.
◈ 하나님은 최고가 아닌 최선을 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은 최고이지만, 하나님은 최선을 다했느냐에 관심을 두신다는 것입니다.
마라톤에서 1등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그러나 더 큰 박수를 받는 사람은 최선을 다한 사람이며, 그를 통해 더 진한 감동을 받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24~30절에 1 달란트 받았던 자에 대한 결산을 합니다.
특별히 많은 부분을 할애함으로서 달란트 비유의 초점이 재능을 활용하지 않고 묻어 둔 악한 종에게로 집중됩니다.
이것은 결과보다는 동기와 과정을 더 중요하게 보시는 그리스도의 입장에서 볼 때, 심각한 범죄 행위입니다.
1 달란트 받은 자는 왜? 불순종 했을까요?
◈ 1) 불만 때문입니다.
◈ 악한 종은 주인에게 24절 [당신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사람이라고 원망했습니다.
이 말은 아주 조금 주고 많은 것을 요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자신에게 한 달란트를 준 처사에 불만을 품고, 받자마자 땅을 파고 돈을 묻었던 것입니다.
감사함이 없는 신앙은 원망과 불만으로 행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줍니다.
◈ 2)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 24절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 이것이 주인에 대한 종의 인식이었다.
[굳은 사람이라] = 인색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종은 주인이 풍성한 상급 주기를 기뻐하는 분임을 알지 못해서 오해한 것입니다.
[주지 않고 요구만 하시는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오인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유대의 율법주의 종교인들의 그릇된 신앙의식을 주님께서 정확하게 진단하신 것입니다.
◈ 3) 불신앙 때문입니다.
◈25 [두려워하여] - 종은 주인을 신뢰하지 못하고 두려워하여 불순종의 길로 간 것입니다.
경외하는 것과 맹목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다릅니다. - 경외(사랑) VS 심판의 두려움
◈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복음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지니고 삽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신뢰하지 않기에 그저 무섭게만 여겨지는 것이요, 그 결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진정한 순종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한 주인의 평가입니다.
◈ 26절 [악하고 게으른 종아] -
[악하고] = [무가치한, 비열한, 악의적인]이란 의미입니다.
[게으른] = [빈둥빈둥하는, 싫증나는]라는 뜻입니다.
이 사실에 대한 주인의 판결입니다.
◈ 28절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 29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없는 자] = [가지지 않은, 소유하지 않은, 관리하지 않은]이라는 뜻입니다.
본문은 단순히 소유가 없는 가난한 자가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긴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재능(달란트)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활용하지 못한 자는 그 주어졌던 최소한의 재능까지 빼앗기게 될 것이란 의미입니다.
- 믿음을 유지할 만한 조건도 빼앗기게 된다는 뜻
◈ 30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내쫓으라] = [내던져 버리라]라는 뜻입니다.
[내쫓으라]와 [바깥]이라는 말이 함께 사용된 것은 [완전한 관계의 단절]을 표현합니다.
이것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 그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는 사실과 극적인 대조를 이룹니다.
◈ 말씀을 정리합니다.
주인과 관계가 악화되고 불행해지는 원인은 불만하거나 곡해했기 때문입니다.
5 달란트 맡은 자와 2 달란트 맡은 자는 그 재능의 규모가 달랐으나 그 성실성은 똑같았었으며 그들에게 주어진 상급도 똑같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작은 일을 통한 테스트였습니다.
의인과 악인의 구별은 주권자에 대한 확실한 신뢰와 자신의 재능을 성실하게 감당하는데 있었고, 복과 저주는 얻은 열매를 기준 삼았습니다.
저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도 작은 일에 믿음과 성실함으로 최선을 다해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칭찬받고,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cafe.daum.net/J.G.king-voice
달란트 비유
(마 25 : 14-30)
주인이 종들의 능력에 따라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각각 주고 먼길을 떠났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계산을 하는데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열심히 일을 해서 받았던 돈의 갑절의 이윤을 남겨 주인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기뻐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리니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25:21) 하며 칭찬을 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주인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있었던 까닭에 그 돈을 활용하지 못하고 그대로 땅속에 묻었다가 주인이 돌아왔을 때 꺼내 놓았습니다. 주인은 그것을 보고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는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에게서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25:26-28) 하며 심히 책망을 했습니다. 결국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문 밖으로 쫓겨나 이를 갈며 통곡했다는 것이 이 비유의 줄거리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달란트의 많고 적음의 문제, 금전의 가치에 대한 문제 이전에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와 시간을 잘 활용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우리 신앙 생활은 기회와 시간과 매우 중요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말에는 시간이라는 단어가 한가지 뜻으로만 풀이되어 있지만, 헬라어에는 시간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 두 가지로 나뉘어 쓰이고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라는 말인데 이것은 '흐르는 시간' 을 의미합니다.
연대로 보는 시간 관념입니다. 내가 30세가 되고 50세가 되고 80세가 됐다는 말은 크로노스의 시간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이 출옥할 날을 손꼽아 세는 것, 잠을 이루지 못해 고통을 받으며 빨리 아침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과, 교통체증 때문에 제시간에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해 차 안에서 시계를 보며 초조하게 있는 것모두 크로노스의 시간 개념입니다.
또 하나는 '카이로스'라는 말인데, 이것은 질적인 시간으로서, 의미 있는 시간, 가치있는 시간, 보람있는 시간, 생동하는 시간,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를 맺는 영원한 시간, 감격의 순간들이 모두 이에 속합니다.
크리스챤의 삶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았느냐 하는 것보다도 시간 시간을 얼마나 값있고 질적으로 의미 있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 신앙 생활을 평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나 있는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바꾸지 못했기 때문에 주인으로부터 책망을 받았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의 실패 원인이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하면서 영적인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받은 달란트를 소중히 여기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과소평가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 가정의 곤란한 것, 잘못된 것은 확대해 보면서 다른 가정의 모든 것을 좋게 생각하는 것은 미성숙한 삶의 태도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가정, 자기에게 주어진 자식, 자기에게 주어진 아내, 남편, 직장 등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은 한 달란트 받았던 종과 같이 실패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불평과 원망과 구실만을 찾습니다. 우리 나라가, 우리 사회가, 우리 가정이 잘못됐기 때문에 내가 못산다고 하면서 모든 책임을 회피하고, 또한 자기에게 주어진 무한한 가능성과 달란트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여 실패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농부가 오랫동안 좋은 농장을 가꾸면서 행복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갑자기 자기의 농장이 싫증이 나서 이것을 팔고 다른 환경의 새 농장을 사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부동산 중개소에 자기의 농장을 내놓았습니다. 부동산 중개소에서는 여러 곳에 광고를 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넓고 기름진 땅, 좋은 농가, 큰 곡식 창고, 이상적인 위치, 최신식 농기구를 갖춘 농장을 팝니다."
신문 광고를 보다가 이 농부는 "이 농장이 바로 내가 원하는 농장이구나"하고 생각하고서 위치를 자세히 보니까 바로 자기 농장을 광고한 것이었습니다. 그때야 농부는 자기 농장이 가장 이상적인 농장임을 깨닫고 매물로 내놓았던 것을 취소하고 그 농장을 잘 가꾸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얘기입니다.
남의 떡이 커 보입니다. 남의 과일이 크고 좋아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천부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한 달란트도 소중합니다. 비록 가진 것 없고 못났다 하더라도 내 아내가, 내남편이, 내 자식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나에게만 주어진 은사를 고맙게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소중히 여길 때 그는 성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2. 주신 달란트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주어진 것을 순종함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는 변경시킬 수 없는 상황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어진 것은 받아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키가 165CM 인데 180CM 로 만들려고 애를 써도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여자가 남자가 되겠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전혀 불가능합니다. 지구의 인력을 내 마음대로 할 수도 없습니다. 한번 내뱉은 말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우리의 과거 역사를 변경시킬 수가 없습니다. 나이를 먹지 않으려고 흘러가는 세월을 멈추게 하거나 지연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눅12:25)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앞에 닥친 죽음은 받아들어야 합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한계 상황을 받아들일 때에 그 사람은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로부터 무한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모든 동물을 다스리고 모든 과실을 마음대로 먹으며 낙원인 에덴 동산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중앙에 있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행복한 환경은 보지 아니하고 "먹지말라"는 그 나무 실과를 따먹으므로써 범죄하고 만 것입니다. 선악과는 피조물과 창조주의 한계선이었습니다. 그것을 뛰어넘으려 하는 인간의 교만한 마음이 인류에게 무서운 타락의 죄악을 가져오게 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한계를 인정하지 못할 때 범죄의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요즈음에도 보게 됩니다.
유전자 공학자의 말을 들어 보면 인간이 완전히 성장하는 데 20년정도 걸리므로 보통 그 7배수인 140년은 넉넉히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40에 죽고, 또 어떤 사람은 50,60에 죽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순리를 무시하여 교만하게도 그것을 파괴하고 한계를 넘으려는 생각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일생동안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더욱이 그것은 나에게만 주어진 소중한 것으로 알고 잘 활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만일 내가 저 사람과 같은 가정에 태어났지만'.'만일 저 사람과 같은 머리를 가졌다면'.'만일 내가 저 사람과 같은 학교를 나왔다면'하고 '만일에...,만일에...'를 연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다가는 선한 일도, 생산적인 일도, 창조적인 일도, 의미 있는 일도 하지 못하고 일생 동안을 허송 세월할 뿐만 아니라 불평과 원망을 일삼고 책임을 회피하다가 실패를 거듭할 것이 분명합니다.
3. 주신 달란트를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이 달란트를 활용하지 못하고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며 땅에다 파묻었습니다. 이 사람은 모험심도, 용기도 없었기에 시도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일생 동안 자기의 달란트를 활용해 보려고 시도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땅에 파묻어 버리고는 잃어버릴까 그 주위를 맴돌다가 일생을 탕진하고 마는 사람들을 우리는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을 활용하려고 시도할 때에 성공의 기회가 우리 앞에 활짝 열려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목사님이 부흥되지 못하는 2백 교회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 중의 한 교회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왜 이 교회가 부흥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그 목사님은 "말도 마십시요 우리 교회에서는 헌금이 많이 걷히지 않아 선교비도 없어도. 그리고 교회에 인재다운 인제가 없어도. 그러니 이 교회가 부흥이 되겠습니까?"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슐러 목사님은 "아닙니다. 이 교회는 돈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고 당신에게 아이디어(idea)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당신에게 모험심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라고 그 목사님에게 충고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어진 달란트를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속담에 "말로 배워서 되로 쓰는 사람이 있고, 되로 배워서 말로 쓰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받은 달란트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느냐를 가르치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미국 일리노이 주에서 정년 퇴직할 때까지 우체부 생활을 하던 프리슬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은퇴할 때 매달 받을 얼마의 연봉과 은혜에 예금해 놓은 1,200달러가 그의 전 재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은퇴한 우체부는 언제나 선한 마음을 가지고 동네 사람들에게 친절하게도 자기가 알고 있던 꽃을 가꾸는 방법이라는가 새를 키우는 방법 등을 가르쳐 주면서 즐겁게 지냈습니다. 이웃 사람들도 은퇴한 이 우체부를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어느날 프리슬리는 이웃들을 위해 도울 일이 없을까 생각하다 일리노이 주 사람들은 바다와 멀리 떨어져 생활하기 때문에 바다 구경을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프리슬리는 그들에게 바다 구경을 시켜 주리라 결심하고 바다에 관한 책을 읽으며 사람들에게 설명해 줄 자료를 준비한 후 바다 관광을 할 사람들을 모집했습니다. 수백 명이 몰려왔습니다. 그 사람들을 버스에 싣고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 비치에 데리고 가서 구경을 시켰습니다. 바다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관광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다음 번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바다 관광을 가겠다고 신청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돈을 벌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사람들은 프리슬리에게 바다만 구경시켜 줄 것이 아니라 다른 관광 명소도 안내를 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제 프리슬리는 폴로리다 주뿐만 아니라 미국 전지역을 커버하는 관광 회사를 설립하고 많은 사람을 위해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은퇴한 후에 쭈그려 앉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노력한 결과 82살 난 프리슬리는 재산이 7백만 달러나 되는 거부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내 지식과 내 노력을 남에게 나눠주는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질적인 축복을 허락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달란트, 그것이 비록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충실히 활용하게 될 때에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시며 하나님께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축복을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1) (마 25:14-23)
(마 25장)에는 말세 때에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를 설명하는 세 가지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그 비유들 중에서 첫 번째 비유인 10처녀 비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10처녀 비유는 재림의 날을 알지 못하는 성도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재림을 준비하는 지혜의 필요성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재림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오래 지연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낙심하거나 좌절에 빠져서 영적인 잠을 자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성도들은 영적으로 잠들지 않도록 영적으로 각성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종말을 사는 성도들은 하나님께 지혜와 성령충만을 구해야 하며,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10처녀 비유에 이어서 나오는 두 번째 비유인 달란트 비유에는 10처녀 대신에 주인을 기다리는 3명의 종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10처녀가 늦게 오는 신랑을 기다리듯이, 이 비유에서 3명의 종들은 먼 곳에 간 주인을 기다리며 맡겨진 일에 충성해야 했습니다. 이 비유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게으르지 말고,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충성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 맡겨진 돈과, 돈 맡은 종들의 반응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14),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15),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16),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17),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마 25:14-18)...."
주님은 천국은 한 사람이 타국으로 떠나면서 그 종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긴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주인은 특별한 일로 일정한 기간 동안 집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가야 했습니다. 그는 타국으로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서 자기의 여행 계획을 밝히고, 현금화 할 수 있는 재산을 정리해서 종들에게 나누어 맡겼습니다. 주인의 재산은 전부 "금 여덟 달란트"에 해당했습니다. 그 주인은 종들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능력에 맞게 돈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달란트"(talent)라는 말은 오늘날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리키는 말로 종종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예술가의 달란트를 가졌다"는 말은, 그가 예술가로서의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본문에 기록된 "달란트"는 돈을 가리키는 일종의 화폐 단위였습니다. 은으로 된 한 달란트는 당시에 6000드라크마의 가치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한 드라크마는 일반 노동자의 하루 임금에 해당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은 한 달란트는 일반 노동자가 20년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었습니다. 또한 본문에 나온 금 한 달란트는 은 한 달란트의 15배의 가치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본문에서 주인이 종들에게 맡긴 돈은 당시에 매우 큰 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주인은 자기 종들이 맡겨진 재산을 잘 관리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자기 재산을 종들에게 맡겼습니다. 그는 종들이 자기 돈을 잘 관리해서 재산을 증식시켜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 주인은 후에 돌아와서 종들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그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려고 생각했습니다. 그 주인은 첫 번째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었고, 두 번째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었으며, 세 번째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아마도 당시의 관습에 따라 주인과 돈을 맡은 종들 간에는 적절한 계약서가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주인은 그 종들의 노력에 대해 적절한 보상을 해주기로 약속을 했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종들은 일종의 동업을 통한 이익 배당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종은 다섯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하여 열 달란트를 만들었습니다.
두 번째 종도 받은 두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하여 네 달란트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충성스러웠고, 신실했으며, 또 지혜로웠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종은 받은 돈으로 장사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어쩌면 그는 다른 사람보다 적게 받은 것을 인해 자존심이 상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는 주인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인을 매우 엄한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원금을 잃으면 엄한 주인에게 큰 책망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는 가만히 앉아서 이익을 얻으려는 주인의 태도에도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열심히 일을 해서 이익을 얻어도 결국 그 돈은 주인의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위험을 무릎쓰고 모험을 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주인에게 받은 돈을 땅에 묻어 버렸습니다. 그는 안전하게 원금을 보관했다가, 그것을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주려고 생각했습니다.
* 충성되고 신실한 종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쌔(19),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20).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21),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22).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마 25:19-23)..."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마침내 타국으로 갔던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주인은 종들에게 맡긴 돈을 결산하기 위해서 종들을 불렀습니다. 주인 앞에서 회계 장부가 펴졌으며, 각 종들은 주인에게 받은 돈에 대해서 보고했습니다. 첫 번째 종은 자신이 받은 다섯 달란트 외에, 장사를 해서 번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왔습니다. 그는 주인에게 다섯 달란트를 받았지만, 열 달란트를 돌려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신뢰한 주인에 대해 신실함과 충성으로 보답했습니다. 그는 주인에게 아무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단지 장사를 해서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다고만 보고했습니다.
그때에 그 주인은 충성되고 신실한 종을 아낌없이 칭찬하면서 적절한 상급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첫째로 그 주인은 그 종에게 "잘했다"고 칭찬했으며, 둘째로 그 종을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셋째로 그 주인은 그 종에게 "많은 것을 맡길 것을 약속했고, 마지막으로 그 종을 만잔에 초대하여 "주인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게" 했습니다. 주인의 식탁에 함께 앉는 것은 주인과 동등한 입장에서 기쁨을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 종 역시 첫 번째 종처럼 자기가 받은 두 달란트 외에 장사를 해서 번 두 달란트를 더 가져왔습니다. 그 종 역시 아무 자랑도 하지 않고, 자신이 장사를 해서 두 달란트를 남겼다고만 보고했습니다. 주인은 두 번째 종에게도 첫 번째 종처럼 크게 칭찬을 했습니다. 그 주인은 그 종을 칭찬했으며,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불러 주었고,그에게 더 많은 것을 맡길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주인은 그 종에게 주인의 잔치에 참석하여 자신과 함께 기쁨을 누리자고 말했습니다.
1. 10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의 내용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말해보자.
2. 주인의 돈을 받은 세 종은 어떻게 반응을 했는가? 우리는 이 세 종 중에서 어느 종에 가까운 지 솔직하게 말해보자.
3. 각 종들에 대한 주님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이러한 주인의 반응과 장차 하늘나라에서 주님이 나타내실 반응이 어떻게 같은 지 말해보자.
달란트 비유(2) (마 25:24-30)
주님은 마지막 때에 천국은 마치 한 주인이 타국으로 가면서 자기의 종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긴 일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주인은 타국으로 떠나기 전에 자기 종들을 불러서, 자기의 재산을 정리해서 맡겼습니다. 그 주인은 각 종들의 능력에 따라 첫째 종에게 금 다섯 달란트, 둘째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그리고 셋째 종에게는 금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바로 가서 장사하여 다섯 달란트를 남겼으며, 두 달란트 받은 종도 장사를 하여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원금을 잃을 것을 염려하고, 또 자기가 수고해서 번 돈이 주인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땅을 파고 주인이 준 돈을 파묻어 버렸습니다.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장사를 하여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긴 종을 크게 칭찬했습니다. 그 주인은 작은 일에 충성한 종들에게 더 많은 것을 맡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주인은 신실한 종들을 주인과 함께 잔치 자리에 앉아 즐거움에 참여하게 하였습니다.
* 게으르고 악한 종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24),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마 25:24-25)."
세 번째 종이 주인과 결산할 차례가 왔습니다. 그 종은 장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땅에 묻었던 원금만을 주인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는 다른 종들처럼 주인의 관대함을 찬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주인을 가리켜 완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주인이 자신들을 신뢰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주인의 책망을 듣지 않으려고 모험을 회피했습니다. 그는 주인이 씨를 뿌리거나 심지 않고 거두는 자, 즉 불로소득을 원하는 자로 알았습니다. 그는 주인이 자기를 시켜서 돈을 벌려고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열심히 일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모험을 해가면서까지 돈을 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인이 준 원금만을 땅에 묻었다가 고스란히 주인에게 반납했습니다. 그는 주인이 원금을 잘 보관한 자신을 칭찬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주인이 준 돈을 잃어버리지 않고 잘 보관한 일을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 주인의 반응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26)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27),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28).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29).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마 25:26-30)."
그러나 그 주인은 세 번째 종의 말을 듣고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 주인은 그 종을 가리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주인은 그를 도덕적으로 악하고 게으르기 짝이 없는 종으로 간주했습니다. 그 때에 그 주인은 그 종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정말로 내가 불로소득을 원하는 자로 생각했다면, 최소한 원금을 은행에 맡겨서 이자라도 받게 했어야 하지 않는가?" 물론 그 종도 돈을 금융기관에 맡기면 원금과 이자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돈을 빌려주었다가 못받을 것을 염려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자기에게 적은 돈을 맡긴 주인에게 앙갚음을 하기 위해서 일부러 이렇게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결국 그는 주인에게 원금만을 가져왔습니다.
그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 변명을 늘어놓는 것을 보고 엄하게 대했습니다.
첫째로 그 주인은 그 종에게 한 마디의 칭찬도 하지 않았으며,
둘째로 그 종을 가리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셋째로 그 주인은 그 종의 태만과 불충성을 책망했으며,
넷째로 그 종에게 주었던 한 달란트를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그 주인은 열심히 일해서 많은 것을 남긴 자는 더 많은 것을 받아 풍족하게 해주었고, 게으르고 나태하여 이익을 남기지 못한 종은 가졌던 것까지 빼앗고 말았습니다. 또한 그 주인은 주인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않는 악하고 게으른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쫓아 버렸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그 종이 주인과의 주종관계가 단절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 자기 식탁에 앉아서 기쁨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주인은 그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던져서 슬피 울며 미련한 행동을 후회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 달란트 비유의 의미와 결론
달란트 비유는 주님의 재림 때에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기 위한 비유였습니다. 열 처녀들이 신랑을 기다렸던 것처럼, 이 비유에 나오는 종들도 주인이 없는 동안 주인을 위해서 충성을 다해야 했습니다. 이 비유는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주님의 재림 때까지 받은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그들이 받은 은사와 재능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주님은 신실하고 충성된 종들을 칭찬해 주시고, 더 많은 것을 맡겨 주실 것이며, 주님과 함께 천국의 상속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지 못하고 쾌락을 추구하며 게으르게 살던 사람들은 주님의 책망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완고한 독재자로 생각했으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수고하는 일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을 엄히 책망하실 것이며, 그들에게 주었던 것을 빼앗고, 어두운 곳으로 내던지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곳에서 슬피 울면서 자기의 어리석은 행동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비유는 주님 당시에도 적용되는 비유였습니다. 주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한 달란트를 받은 자들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받은 것을 보관하기에만 급급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서 이웃 나라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선민의식에 사로 잡혀서 이방 민족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전파하기 보다는 보존하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유대민족에게 주신 보물을 잘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모든 보물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주었던 보물을 빼앗아서 새로운 교회인 자기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최선을 다해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수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장차 그들을 주님과 함께 천국 잔치에 참여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또한 이 비유는 종말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종말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의 은사와 재능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각 성도들은 그 은사와 재능을 가지고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충성스럽게 일을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실하고 충성스럽게 맡겨진 일을 완수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마지막 때에 그들을 칭찬해 주시고,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맡겨 주실 것이며, 주님과 함께 천국 잔치에 참여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주님이 주신 은사와 재능을 가지고 복음을 위해 일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모험하는 일을 회피하고, 복음을 위해 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에 주님은 그들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간주하시고, 그들에게 주었던 것을 빼앗고, 바깥 어두운 곳에 내던지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곳에서 슬피 울면서 자기의 무지한 행동을 울면서 뉘우치게 될 것입니다.
1. 세 번째 종은 주인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했는가? 그의 태도와 모습을 우리의 태도와 모습과 비교하고 비슷한 점은 없는지 솔직하게 반성해 보자.
2. 주님은 악하고 게으른 종을 어떻게 대접했는가? 실제로 주님은 마지막 때에 신실하지 못한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3. 달란트비유를 통해서 주님께서 주신 교훈이 무엇인지 자세히 말해보자.
<최영찬 목사>
[질문] 달란트 비유의 구체적인 뜻이 무엇인가요?(마25:14-30)
달란트의 비유에서 달란트가 진정 무엇인가요? 목사님들마다 해석이 다릅니다.
또 한 달란트 가진 사람은 내어 쫓겨 슬피 운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구원의 잃음과 관련이 있습니까?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가요?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쌔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마25:14-30)
[답변]
열 처녀 비유에서 말씀 드린 바 있는 예수님 비유의 해석 기준에 따라 먼저 생각해 본 후에 특별히 지적하신 세 가지 질문에 답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비유의 문화적 배경
고대 사회에선 주인은 맡긴 일에 대해 종에게 상당한 권한과 책임을 주었습니다. 주인이 종에게 돈을 맡기면 종은 자기 재량으로 장사를 하여 주인에게 이윤을 보게 합니다만 여전히 그 재산의 원 소유권은 주인에게 있었습니다. 또 간혹 종에게 재산을 나눠 주기도 하고 심지어 자기 자식이 없거나 자식이 똑똑하지 않을 때는 종에게 자신의 기업을 상속시키기도 했습니다.
달란트는 원래 무게를 재는 단위였지만 금과 은을 저울로 달아 화폐처럼 통용하다 보니 나중에는 무게와 화폐 단위 두 가지로 다 사용되었습니다. 본 비유에선 화폐 단위를 의미하는데 한 달란트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데나리온으로 따지면 6천 데나리온에 해당됩니다. 현재 미국의 최저임금을 간단하게 시간당 5불로만 잡아도(실제는 이보다 높지만) 5불/8시간으로 하루 40불이 한 데나리온인 셈이고 그 6천배는 24만불에 해당할 정도의 고액이 되듯이 예수님 당시에도 한 달란트만 해도 엄청난 돈입니다.
본문의 비유에서도 주인이 아마 전 재산일지도 모르는 엄청난 돈을 집사 세 사람에게 나눠 맡기고 각자 자기 지혜와 노력으로 돈을 관리하라고 한 후에 안심하고 타국으로 떠나 버립니다. 오랜 후에 돌아 올 동안 주인은 전혀 간섭이나 확인을 하지 않았고 대신에 집사들도 자기 책임 하에 그 돈을 불려 놓아야만 했던 것이 당시 관습이었습니다.
반면에 게으른 종이 땅에 한 달란트를 파 묻은 것은 당시에 돈 같은 귀중품은 땅에 파 묻어서 보관했던 관습에 따른 것입니다. 예수님의 천국에 관한 다른 비유에서도 ‘밭에 감추인 보배’(마13:44)라는 표현이 나오듯이 땅 속에 보관하는 것은 당시로선 안전하게 보관하는 방법이었습니다.
2. 문맥에서 살펴 볼 문제
예수님은 불시에 오는 마지막 심판에 대해 신자들이 어떻게 대비하고 있어야 할지 다섯 가지 비유(마24:42-25:46)로 말씀하셨는데 이 비유는 네 번째 교훈에 해당합니다. 그 주제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에게 받은 각각의 재능들을 성실히 활용하여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 처녀의 비유에서 살펴 본 대로 열 처녀 모두가 구원 받은 신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처음부터 예수님과 진정한 관계를 갖지 못한 불신자를 뜻했던 것이지 신자가 신앙 생활하면서 특별히 심판을 앞두고 게으름 부린 것을 비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세 종들이 다 이미 구원 받은 신자를 뜻하지 않습니다. 물론 다섯 비유로 가르침을 받을 대상은 신자이고 그 주제도 모두 신자에게 재림에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비유의 주제가 그러하듯이 이 비유 또한 천국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신자와 불신자를 예를 들어 대비 시켰습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마지막 때를 잘 대비했기에 천국을 갔고 잘 대비하지 못한 신자는 지옥 갔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라면 당연히 마지막 때를 잘 대비해야 하고 불신자 또한 마지막 때에 관한 믿음이 없어 당연히 잘 대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마지막 때와 심판에 관한 인식과 믿음을 갖고 항상 자기 가진 재능을 다 동원하여 최선을 다해 주님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비유의 구체적인 뜻과 질문에 관한 답변
질문자께서 일반적으로 제기되는 의문을 정확하게 지적해 주셨기에 그 세 질문만 따져 보아도 이 비유의 뜻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3.1. 달란트의 뜻은 무엇인가?
세상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자기만의 강점, 특기, 재능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약점이 많고 무능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반드시 나름대로 장점이 있습니다. 달란트가 물질적 소유 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비유의 성격상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화폐 단위를 예로 든 것에 불과합니다. 각 개인이 갖고 있는 특유의 성격, 지성, 감성, 의지, 체격, 환경 등 모든 장점을 말합니다. 그런 장점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선물로 받은 것이며 인간이라면 신자 불신자를 막론하고 누구나 최선을 다해 잘 가꾸고 열매를 맺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다섯, 둘, 한 달란트 식으로 다르게 주었다는 것이 특정인을 편애하거나 차별해서 질과 양을 다르게 준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고유의 능력과 재능이 다 다르다는 것을 달란트라는 단위로 표현하다 보니 수치적으로 차이가 진 것 뿐입니다. 모든 인간이 인격과 역할이 서로 다른 독특한 존재로 이 땅에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은 이 비유의 달란트가 신자가 믿고 난 후에 받는 고전 13장에 나오는 방언이나 신유 같은 성령의 카리스마적인 은사와는 다릅니다. 그런 외적 은사는 하나님이 교회의 덕을 세우고 하나님의 일을 더 활발하게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는 은사입니다. 방언 기도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매번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바깥 어두운 데로 내칠 리 없지 않습니까?
그런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그 은사가 갖는 특성상 자진해서 열심을 내어 일을 하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엡3:7)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는 대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은사)이 발휘되어 복음 전하는 일에 자신이 쓰임 받았다는 것입니다.
또 달란트가 신자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섬기는 은사, 화해시키는 은사, 찬양의 은사, 가르치는 은사들 같이 남이 갖지 못하거나 남보다 뛰어난 능력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이 신자가 되었으므로 사역에 쓰라고 따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된 후 주신 것은 앞에서 말한 성령의 외적 은사뿐으로 특정한 일군으로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평신도가 말하는 그런 일반적인 은사들은 신자가 되기 전부터 각자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자기만의 재능, 특기, 장점으로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자가 되기 전에는 그것들을 잘 모르고 있었거나 알아도 세상의 형통을 향해 발휘되다가 신자가 된 후에 하나님 뜻 안에서 그 의미를 제대로 발견하고 주님을 위해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은사들이 각자 누구나 갖고 있는 장점이며 바로 본 비유에서 말하는 달란트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이 비유가 말하는 대로 따르면 신자가 된 후에 자기에게 찬양의 은사, 섬기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같은 것이 있음을 발견하고도 제대로 교회와 성도를 위해 쓰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바깥 어두운 데로 내쳐야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만큼 절대 옹졸하지 않습니다.
물론 신자가 자기 은사와 재능을 발견하고도 고의로 게으름을 부리거나 그 은사가 필요한 사람이나 일을 외면했을 때는 하나님의 징계가 따르거나 나중에 주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움을 면할 수는 없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갖고 있는 재능을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제대로 쓰지 않고 묵혀 두었다고 심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본 비유가 가르치는 바가 아닙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은 각 종에게 달란트를 나눠주고 떠나 버립니다. 자신의 권위와 지혜로써 분배한 후에는 각 종들의 자유의지에 맡긴 것입니다. 인간을 공장에서 찍어내는 상품(merchandise)이 아니라 단 한 사람도 심지어 일란성 쌍둥이도 서로 똑 같지 않은 걸작품(masterpiece)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내신 분의 뜻과 계획에 맞게 살아야 할 책임이 인간에게 있지만 하나님은 절대 강요하거나 간섭하지 않습니다. 비유대로 타국에 가서 오랫동안 있다 심판 때에 만 다시 오실 것입니다.
3.2. 한 달란트 가진 사람은 구원을 잃게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히 나옵니다. 만약 달란트가 신자에게만 준 특별한 은사라고 해석하면 필연적으로 한 달란트 가진 사람은 신자가 된 후에 게을렀기 때문에 구원을 잃었다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반대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특유의 장점이라고 해석하면 그 사람은 구원을 잃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못 얻는다는 뜻이 됩니다. 어차피 구원을 못 얻으니 같은 뜻이라고 해석해선 안 됩니다. 신자가 믿은 후에 저지른 잘못이나 게으름 때문에 구원이 취소된다는 것과 처음부터 불신자였으니까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그 의미에 엄청난 차이가 발생합니다.
제가 하는 해석이 맞으려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불신자였다는 증거를 찾아 내어야만 합니다. 역으로 또 그것이 증명되면 달란트가 신자의 은사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장점이라는 3.1.의 해석도 자동으로 한 번 더 확인됩니다.
흔히 이 종을 두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게으르게 달란트를 땅에 파 묻었다는 행위만 자꾸 문제 삼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더러 교회 일과 전도에 열심을 내라고 독촉하는 구실로 삼습니다. 이 종이 그렇게 한 이유가 특별히 돈을 벌기 싫어한 것인지 불명하지만 돈을 허랑방탕 써버리거나 그 돈으로 손해 보거나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로선 가장 안전하게 돈을 보관하는 방법인 땅에 파 묻었습니다. 나름대로 자기 할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 그대로 했습니다.
문제는 그런 행동을 한 배경의 생각입니다. 모든 행위는 생각에서 나오지 행위가 생각을 좌우하지 않습니다. 그는 어떤 생각으로 그렇게 했습니까? 주인을 오해 한 것입니다.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24절)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여기서 ‘굳은 사람’은 박정하고 포악하며 거칠고 무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또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는 질이 나쁜 구두쇠나 돈을 모으는 데만 집착하며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해 불로소득을 탐하는 파렴치한 인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의 뜻은 심지어 남의 것을 빼앗아 치부하는 자로 몬 것입니다. ‘헤치지’는 당시 타작 마당에 곡식을 늘어 놓고 말린 후에 키를 헤쳐서 곡식을 모으는 동작을 나타냅니다. 타작을 안 하고도 모으는 것은 남이 타작한 것을 뺏는 수 뿐입니다.
비유에서 주인은 당연히 예수님과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럼 그 종은 하나님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인간의 제물과 치성을 받아 먹기만 하고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진노의 벌을 내리며 인간이 처해 있는 형편이 어떠하든지 아무 상관을 하지 않는 포악한 독재자로 본 것입니다. 불신자나 이방인들이 그저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면서 모든 정성과 열심을 바쳐 어떡하든 그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여 세상에서의 액운을 피하기 위해 불안하게 모시는 그런 신입니다. 이는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 이 종은 주인을 무섭게 본 정도를 넘어서 주인 앞에다 대고 은근히 비난하며 대적했습니다. 세상의 어느 종이 주인을 포악한 파렴치 강도라고 표현하겠습니까? 아마도 그런 비난을 한 까닭은 자신이 받은 달란트가 다른 사람에게 비해 훨씬 작다고 생각해 불만에 가득 찼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재능은 그 특성과 역할이 다 다름에도 단순히 양적 기준으로만 비교하여 하나님이 자기를 남보다 차별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종은 25절에서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관습이 주인이 종에게 재산 증식에 대한 전적인 재량권을 주었으므로 비록 소유권은 주인에게 있지만 종은 그 돈을 자기 돈이나 다름 없이 아끼고 귀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종은 그 돈을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강조해서 자기가 아무 일을 하지 않은 것을 당연시 하고 나아가 주인에게 당신 것이니 당신이 알아서 하라고 빈정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인간의 자세가 아니기에 신자일 수는 없습니다.
이 비유가 단순히 하나님의 일을 했느냐 안 했느냐, 얼마나 많이 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신자가 교회 행사나 전도에 조금 등한시 하거나 불참한 것을 따지는 문제도 아닙니다. 각 개인이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어떠하며 나아가 그 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사는가 하는 근본적인 신앙 상태에 관한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진 것입니다.
반대로 착하고 충성 된 종의 경우를 봅시다. “바로 가서”(16절) 또 “그 같이 하여”(17절)라고 했습니다. 주인에 대한 전적 신뢰가 바탕이 되어 즉각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지금 자기가 받은 달란트가 누구의 것이며 그것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그 분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아서 받은 바 그것을 동원해 주인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에 헌신한 것입니다.
여기서 누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여 얼마나 많은 성과를 내었는가 따질 수는 없습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 벌었고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두 달란트의 성과를 내었습니다. 받은 재능 그대로 다 동원하여 성실하게 사용했기에 받은 만큼의 결과가 나왔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두 달란트 받은 자가 다섯 달란트 내었거나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세 달란트 벌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만 다섯 달란트 받은 자니까 당연히 다섯 달란트 버는 것이고 두 달란트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한 달란트 받은 자도 주인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 있었다면 바로 가서 한 달란트 벌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 착한 종에게 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했다고 칭찬했지 큰 일을 했다거나 차별을 두고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의 관심이 돈을 얼마나 벌었나 하는 계산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을 제대로 알고 무슨 일에도 성실하게 순종하는 가를 본 것입니다.
이럼에도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을 신자로 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신자가 교회 일이나 선행에 열심을 내지 않으면 구원이 취소된다는 해석이 맞을까요?
3.3.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제 마지막으로 해결할 문제가 하나 남았습니다. 불신자를 구원하지 않으면 되지 왜 있는 것까지 빼앗으며 또 신자는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만 하면 되지 왜 신자에게 그 뺏은 것을 더 주어야 하는가? 그것도 작은 일에 충성했다고 해놓고 신자에게만 더 큰 특혜를 주어야 하고 불신자에게 불행이 겹쳐져야 한다면 그 말과 모순되지 않는가? 분명히 좀 난해한 말씀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어떤 성경구절로도 교회 안에서 열심을 내는 자는 하나님이 복을 시쳇말로 따블로 더 부어 주시고 게으른 자는 반대로 깐 이마를 또 까시는 분이라는 식의 해석은 배제하셔야 합니다. 혹시라도 교회에서 목사님이 그런 뜻의 말씀을 하시더라도 어디까지나 신자의 열심을 독촉하고 또 열심을 내는 것 자체가 신자의 축복이 되니까 권하는 말씀으로 이해하고 넘어 가시기 바랍니다.
대신에 항상 하나님의 품성,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인자가 무한하시며 화 내기를 더디 하시며 우리를 향한 생각이 재앙이 아니라 구원이십니다. 독생자와 맞바꾸어 우리 영혼을 구원해 주실만큼 우리를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키시길 원하시기에 신자에게 이미 성령을 부어 주셨으며 당신의 열심과 의지로 우리를 영광된 자리로 반드시 인도하실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는 일 하나하나로 비례해서 상벌을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면 이전 불신자 시절에 생각했던 진노와 신경질의 하나님으로 되돌리는 결과가 됩니다. 무익하고 게으른 종이 그 주인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과 같아져 버립니다.
무익한 종에게 맡긴 한 달란트는 아무런 소득을 낳지 못해 주인이 그 종에게 가졌던 계획과 뜻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세월만 지체 시킨 결과를 나았습니다. 그 달란트를 빼았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는 것은 비록 하나님의 계획이 불신자에 의해 조금 지연 되었다 치더라도 당신이 정하신 때와 방법대로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반드시 성실히 충성하는 종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당신의 일의 시기와 그 수확량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단 한 사람이라도 신령한 자를 찾아 내어 그 영혼을 구원하는 데만 당신의 관심을 쏟는다는 것입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라는 말씀은 따라서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은 신령한 자는 그 일을 하는 것 만으로도 넘치는 축복을 이미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하면 할수록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은혜가 단순 비례가 아니라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나아가 나중에 천국 잔치에 참예할 때에도 당연히 주님의 큰 칭찬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비유에서 말하는 주제입니다.
게으른 종이 하나님을 직접 대적하진 않았지만 대신에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 다시 성도가 교회 일이나 봉사를 등한히 한 것으로 이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불신자들 스스로는 자기들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알고 심지어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착각입니다. 저들은 단지 자기들의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위해 빌지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마6:32,33) 하나님으로부터 각자 고유의 재능과 은사를 충분히 다 받았음에도 그것들을 사용해 하나님의 일을 해야겠다는 인식이 전혀 없습니다.(롬1:21) 오직 자기에게 큰 일이 생기지 않기만 빌 뿐입니다. 무익한 종이란 바로 그런 자입니다.
대신에 충성된 두 종이 바로 가서 자기 할 바를 성실히 수행했듯이 신자는 주님의 재림이 언제 올지 모르고 또 더디 올지라도 그런 것과는 상관 없이 언제나 자기 받은 것이 충분하기에 감사히 생각해고 그것으로 주의 일을 해야 합니다. 신자란 더 이상 심판이 두려워서나 혹은 심판 때에 상급을 더 받으려고 주의 일을 하는 자가 아닙니다.
신자란 누구나 제사장 나라의 직분을 감당하도록 부름 받았고 세상으로 보내어진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신자에게 충분하고도 완전한 달란트를 이미 다 주었습니다. 최고로 많이 주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각 신자에게 갖고 계시는 주님의 계획과 뜻에 쓰임 받는데 각 자가 받은 재능이 절대 부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에게 현재 맡겨진 바로 그 일을 통해 주님을 증거하셔야 합니다.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그 일을 성실히 수행 할 때에는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능력이 그 일을 감당케 해 주십니다. 상급을 얼마나 받을 것인가 혹시라도 잘못해 벌 받지 않나 염려하는 것은 참 신자가 할 일이 아닙니다. 바로 이것이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는 신자가 가져야 할 태도이자 이 비유의 주제입니다. www.nosuchjesus.com
달란트 비유 (마25:14-30)
- 은사 사용에 관한 본문인가?
14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15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달란트”라는 말처럼 교회 안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말도 흔치 않겠지만, 또 이만큼 사람들에게 잘못 알려져 있는 비유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혹은 성경이 말하는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그 말씀이 어떤 내용 속에 들어 있는 말씀인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집사님이 일전에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아는 교인 한 사람이 이웃과 싸우게 되었는데, 이 집사님이 그 분에게 “믿는 사람이 좀 참아야지. 먼저 가서 미안하다고 해요”라고 화해를 권고했습니다. 그러자 이 분이 집사님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성경 말씀에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했으니 나는 화해할 수 없소”
성경말씀은 올바른 문맥의 의미를 놓쳐 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면, 못 끼워 맞출 내용이 없어질 정도로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다양성의 관점에서 다 인정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성경을 읽는 자의 입장에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성경을 쓰신 원저자이신 하나님의 의도에 맞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한 경우에 우리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고, “그것은 본문의 원 의미를 나타내지 못했으므로 틀렸습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달란트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달란트 비유는 보편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재능을 잘 활용하여야 한다”는 방향으로 해석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이것을 거의 정설로 받아들이고, 이 비유의 뜻이 이렇다고 단정을 내리는 정도까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이 비유가 “어떤 이의 재능에 따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잘 남기자”는 것을 말하는 본문일까요? 사실 여기에서 ‘재능’을 유추해낼 수 있는 부분은 유일하게 15절 한 부분입니다.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그러나 본문 전체에 비추어 볼 때 이 말이 전체의 주제를 쥐고 뒤흔들만큼 중요한 구절일까요?
불행히도 그렇지 않습니다. 이 본문은 이 ‘그 재능대로’라는 구절에 중요성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재능대로라는 그 한 구절에 중요성을 두고 있지도 않을뿐더러, 문맥 전체에서 볼 때의 전체 주제에서도 이 사실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왜 한국교회 내에서는 달란트 비유가 이것을 뜻하는 것으로 거의 고정화되어 버릴 정도가 되었을까요?
이유는 사실 간단합니다.
한국 교회의 많은 성경 해석자들이 “성경이 정말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보다는, “성도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야 동기유발이 될까?” 라는 실용적인 측면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 나라는 이런 나라입니다” 라고 말해주는 것보다, “당신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시오” 라고 말하고 싶어했습니다. 이런 의도를 가지고 성경을 보면, 자기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성경 본연의 내용에는 관심이 없어집니다. 어떻게든 “성도들이 교회에 충실하게끔” 만드는 데에 온 목적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간단하게 이 재능에 관한 주장이 거짓이라는 점을 증언할 수 있는 요소를 먼저 말씀드리고 본 내용으로 들어갑시다. 이를 위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 비유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내용입니다. 이 비유의 마지막 부분에는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의 결국에 대해 이렇게 씌어 있습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 부분에 주목해 보십시오. 우리가 일반적으로 잘 알고 있듯이 “바깥 어두운 데에 내어 쫓겨 슬피 울며 이를 간다”는 표현은 통상적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자,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자”에 대한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이 본문의 주제를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가지고 봉사해야 한다”라고 읽어 버린다면, 이렇게 행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심판은 어이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잘 활용하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못 간다는 말씀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성경 어디에! 교회에서 자기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까? 혹! 이 본문을 재능에 관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계신 분들 중에 누구든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활용하지 않으면 지옥에 가게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것은 성경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재능에 관한 것”으로 읽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이 본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읽기 위해 선입견을 버리고 다시 본문을 봅시다.
먼저, 이 본문은 무엇에 관한 것입니까?
이 비유의 제일 첫 구절은 “또” 라고 시작합니다. 이는 앞의 본문과 이 본문이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앞의 본문은 무엇입니까? 앞의 본문은 열 처녀 비유입니다.
두 비유가 붙어 있고, 두 번째 비유는 “또” 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왜 앞의 비유는 “천국비유”인데, 그 뒤의 비유는 “재능에 관한 비유”가 되는 것입니까? 문맥상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5장의 문맥은 예수님께서 “천국에 관하여” 설명하시는 부분입니다. 천국에 관하여,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설명하시는 부분에 왜 갑자기 재능에 관한, 교회 열심히 충성하라는 이야기가 들어가겠습니까? 전혀 그럴 수 없습니다.
따라서 달란트 비유는 “천국비유” 이며, “하나님 나라”와 관련되어 있는 비유입니다.
그리고 나서, 본문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본문의 내용 역시 재능과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비유의 주제는 “하나님 나라는 목이 곧은 자에게는 열리지 않을 것이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해석은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고정관념 때문에 성경이 보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함께 말씀의 내용을 보십시오.
14-15절에 주인은 자신의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기고 타국으로 떠납니다. 16절과 17절에서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열심히 장사하여 그것을 남겼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것을 땅에 묻어 두었습니다(18절). 중요한 구절은 주인이 돌아와서 이 한 달란트 받은 종과 이야기하는 대목입니다. 주인과의 대화는 이렇습니다.
앞의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이 칭찬을 받고 나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심지도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도 않은 데서 모으는 사람인 줄을 내가 알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달란트를 내가 땅에 묻어 두었습니다”
주인이 대답합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내가 심지도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도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렇다면 네가 은행이나 돈놀이 하는 사람한테라도 맡겨서 이자라도 받게 했어야 할 것이 아니냐!”
이 대화가 무슨 내용입니까? 내용은 어렵지 않습니다. 성경의 주제를 곡해한 뒤 성경을 보려하니 잘 안보일 뿐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말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주인님! 당신은 심지도 않고 거두려 하는 사람이요, 덤불을 헤치지도 않고 거기서 나는 곡식들을 거두려 하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생각하는 주인은 “노력도 하지 않고 거두려고 하는 나쁜 놈”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종은 달란트를 가지고 주인이 원하는 대로 “노력도 하지 않고 거두게” 해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땅에 갖다 묻었다는 것입니다.
주인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종아! 네가 정말 내가 그런 노력도 않고 거두려는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더냐? 만약 그렇다면, 네가 나를 두려워했다면 도리어 나한테 이자라도 주도록 은행이나 돈놀이 하는 사람들에게라도 맡겼어야 되는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다.
이 본문의 주제는 “고의적으로 불순종하는 종”에 관한 것입니다.
종은 주인이 어떤 사람인 줄 알고, 거기에 고의적으로 불순종하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종은 주인의 의도에 맞추어 놀아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에 불순종하기 위하여 달란트를 땅에 묻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달란트 비유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주제는 무엇입니까? 왜 이것이 천국 비유 가운데 들어 있는 것입니까? 본문의 주제는 아까 살펴본 대로 마지막에 있습니다.
“이렇게 불순종하는 종은 결코 내 나라에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이놈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다!”
즉, 이 말씀은 “천국은 하나님께 고의적으로 불순종하는 자는 결코 들어갈 수 없다” 는 것이 주제입니다. 이 비유는 재능에 관한 본문이 전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전해 주셨을 때는 다분히 옛 이스라엘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도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는 완악한 자들! 그들을 향하여 “불순종하는 자에게는 천국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끝으로 한 가지만 더 첨언하고 마칩시다.
과연 한 달란트 받은 종이 파악한 주인이 옳았을까요? 과연 우리의 하나님은 “심지도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도 않은 데서 모으려 하시는 분” 이십니까? 성경이 보여주는 바에 의하면 우리 하나님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재판관 비유를 들 때, “악한 재판관도 이렇게 하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를 듣지 아니하시겠느냐?”(눅18:6-7)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땅의 아버지와 하늘의 아버지를 비유하시면서도,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마7:9-10)고 물으시면서, 악한 너희도 아들에게 좋은 것을 주려하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당연히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라고 반문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좋으신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이 종은 이 사실을 오해하였고, 하나님께 고의적으로 불순종하였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천국의 문은 닫힐 것입니다. lovereformed.com
cafe.daum.net/correcttheology
'4복음서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태가 새롭게 풀어놓는 구약 이야기 (0) | 2021.05.24 |
---|---|
하나님 나라- 김 세윤 敎授 (0) | 2021.05.17 |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0) | 2021.04.22 |
마가복음 1장 연구 / 예수의 카리스마적 리더십과 마가공동체 (0) | 2021.04.22 |
마가복음 연구 (0) | 2021.0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