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이름(10) : 여호와 샬롬 / 삿 6:11-24
모든 사람은 평화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렇지만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는 전쟁의 역사였습니다. 과거 노르웨이 과학연구원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기원전 3,600년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14,531건 이상의 전쟁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죽은 사람이 36억 4천만명이나 된다고 했습니다. 이 숫자는 미국 전체 인구의 17배가 되는 숫자입니다. 우리 민족도 지리적인 위치로 반만년의 역사에서 크고 작은 전쟁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약 1천번으로 평균적으로 매 10년마다 한 번씩 외세의 침략이 있었다고 합니다.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과 전쟁으로 우리 민족에게는 아주 독특한 인사말이 있습니다.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평안하셨습니까? 잘 주무셨습니까?식사하셨습니까?”그러니까 우리 민족에게는 밤새 안녕하지 못한 날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음 놓고 평안하게 잠을 자지 못하는 세월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리적으로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때문에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듯이 수많은 전쟁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남쪽에서 애굽의 세력이 강해지면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이스라엘을 쳤고, 북쪽에서 앗수르 제국과 바벨론 제국 등이 힘이 강해지면 이스라엘을 침공해서 지배를 했습니다. 이러한 지리적인 위치로 인해 끊임없이 전쟁을 겪어야만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단어가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아마 그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만장일치로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샬롬!” 그들에게 가장 낯익은 단어, 그러면서도 엄청나게 신비한 단어, 그들의 모든 꿈과 이상을 포함하고 있는 소중한 단어가 ‘샬롬’이라는 이 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가장 간결한 사전적인 정의는 물론 ‘평화’입니다.
그러나 히브리 학자들은 예외 없이 ‘평화’라는 번역은 본래 ‘샬롬’이라는 단어가 포함하고자 하는 의미를 다 담아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보통 전쟁이 끝이 난다든지, 또는 갈등이 조정된 상태를 가리켜서 ‘평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샬롬’이라는 단어는 ‘평화’라는 의미보다 훨씬 더 깊고, 훨씬 더 적극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본래 이 단어는 “완전하다, 건강하다, 성취하다”라는 말의 명사형입니다. 한 신학자는 ‘샬롬’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샬롬이란 우리를 둘러싼 모든 삶의 마당, 모든 인간 관계 속에서 통전적이며 궁극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충만하고도 온전한 은혜의 상태이다.”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평강이 임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다양한 하나님의 이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호와 이레 : 준비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야훼) : 현존(영원, 신실)하시는 하나님. 엘로힘 : 창조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라파 : 치료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닛시 :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나의 깃발이신 하나님. 엘 샤다이 : 전능하신 하나님. 엘 올람 :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카데쉬 : 거룩하신 하나님. 엘칸나 : 질투하시는 하나님. 오늘은 하나님의 이름 10번째 시간으로 ‘여호와 샬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설교 듣고 가셔서 “오늘 무슨 설교 들으셨어요?”하고 물었더니 “목사님이 하나님 믿으면 죽을 놈이 아니고 살 놈이래.”샬롬이 될 줄로 믿습니다. 평강이 임한다는 말씀이지요? 여호와의 평강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평화를 누리기 원하십니다. 요 16:33절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가 어떻게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까? 시력을 잃은 상태에서, 명작 ‘실낙원’을 쓴 존 밀턴의 말을 인용합니다. “평화란 내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섭리와 다투지 않는 데서 얻어지는 결과이다.” 평화는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평화는 나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받아들일 때 옵니다. 평화는 내 주장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옵니다. 하나님은 대제사장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렇게 축복하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평강을 기원하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어느 집을 가든지 평안을 기원하라고 하셨습니다. 마 10:12-13절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평안을 비는 게, 우리 습관이 되면 좋겠습니다. 남편 또는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축복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OOO에게로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자녀들의 이름을 부르며 축복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OOO에게로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노아 홍수 이전까지는, 모든 동물이 초식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서로 잡아먹거나 잡아먹히는 세상이 아닙니다. 힘 있다고 힘없는 짐승을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세상이 아닙니다. 너무나 평화로운 세상입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세상이 평화를 잃고 말았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서로 원수로 지내고, 서로 물고 뜯고 하다가, 결국은 둘 다 망하는 일들이 빈번해졌습니다. 평강을 외치고 샬롬을 부르짖지만, 평화와는 거리 먼 세상이 되었습니다. 남북화해를 말하고, 동서화합을 외치고, 국론통합을 부르짖지만, 샬롬의 나라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샬롬이라고. 샬롬은 지도자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지도자는 오히려 내편, 네편 편 가르기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샬롬은 국민들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은 국민들이 냉전 사고에서 많이 깨어나긴 했지만 아직 멀었습니다. 샬롬은 오직 여호와께로부터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 11:6-8절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여기서 그때가 언제입니까? 2절 끝부분에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샬롬은 하나님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샬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샬롬은 우리 안에 성령으로 충만할 때 이루어집니다.
그럼 왜 평화가 깨지게 되었습니까? 이 땅에서 샬롬이 사라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그게 죄 때문이라고 알려줍니다. 죄가 샬롬의 세상에 들어옴으로, 평화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과 샬롬 관계가 깨졌습니다. 하나님과의 샬롬 관계뿐 아니라, 부부 사이에도 샬롬 관계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더 나아가 가인과 아벨, 곧 형제간의 샬롬 관계도 깨지고 말았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절대로 샬롬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를 지을 능력만 있지, 죄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죄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호와 살롬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매우 어둡고 혼란스러웠던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사시대를 이렇게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삿 21:25절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습니다. 왕도 없고, 법도 없으니,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분명한 삶의 원칙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규정한 법을 주셨습니다. 그 원칙과 법이 무엇입니까? 율법과 계명입니다. 곧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소견대로 살았습니다. 아무리 옳은 것도, 자기 소견에 싫으면 틀린 것입니다. 아무리 틀린 것도, 자기 소견에 좋으면 옳은 것입니다.
사사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이 설자리를 잃은 시대, 하나님의 말씀이 외면당하는 시대였습니다. 레위인들에게 말씀을 맡기고, 전국으로 흩어져 살게 하면서,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할 사명을 주었는데,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말썽의 중심에 레위인들이 있었습니다. 자연히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샬롬 관계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과의 샬롬 관계를, 어떻게든 복원시키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매를 드셨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다짜고짜 매부터 들지는 않으십니다. 말씀으로 경고하십니다. 또한 환경으로 주의를 주십니다. 그래도 알아듣지 못하고 눈치 채지 못하면, 매를 드십니다. 그러면 삶에 고난이 찾아오게 됩니다. 고난에 처하게 되면, 깨닫고 주께로 돌아옵니다. 고난의 시기에 하나님의 음성이 더 크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확성기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고난을 허락하셨습니까? 미디안의 침략을 받게 하셨습니다. 미디안 족속은 약탈 민족이어서, 어느 민족보다 잔인하게 괴롭혔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의 등쌀에 못 이겨, 이스라엘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을 쳐서, 동굴과 산성에서 살았습니다. 그나마 산도 안전하지 못했습니다. 약탈의 손길이 산에도 미쳤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때서야 하나님께 두 손을 들었습니다. 삿 11:6절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궁핍함이 심한지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그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그때라도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징계 앞에서도, ‘나도 한 고집한다. 누가 이기나 보자’하고 하나님한테 버티는 사람은, 매를 버는 사람입니다. 아예 죽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도 살릴 방법이 없습니다.
숱한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죽을 사람도 회개하면 살 길이 열린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한 왕 아합을 보십시오. 왕상 21:27-29절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남왕국 유다에서 가장 악한 왕 므낫세를 보십시오. 대하 33:11-13절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의 군대 지휘관들이 와서 치게 하시매 그들이 므낫세를 사로잡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간지라. 그가 환난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이 두 왕 이야기를 통해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죄인이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 아닙니까?
인생은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수리형 인생’과 ‘정비형 인생’입니다. 수리형 인생은 고장 난 다음에야 수리하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정비형 인생은 평소에 정비를 해두어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대비하는 사람입니다. 수리형 인생은 삶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나서 기도합니다. 꼭 삶의 고통이 닥치면 그때가서야 무릎을 꿇습니다. 그전에는 그렇게 기도하라고 해도, 기도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정비형 인생은 평소에 기도합니다. 삶이 순탄할 때, 미리미리 기도로 준비합니다. 누가 기도하라고 하지 않아도, 새벽을 깨우고 순간순간 기도합니다. 우리가 어떤 인생에 속하는지 생각해봅시다. 나는 수리형 인생에 속하는가요? 아니면 정비형 인생에 속하는가요? 수리형 인생이라면 정비형 인생으로 전환하기 바랍니다.
11절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이스라엘이 위급한 처지에서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로 하셨습니다. 원래 밀 타작은 바람이 부는 큰 마당이나 넓은 들판에서 하고, 포도즙을 짜는 것은 광이나 잘 안 보이는 구덩이에서 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고 있습니다. 조금 수확한 밀을 그나마 빼앗길까봐, 숨어서 타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드온 하면, 대단한 용사인 줄로 아는데, 그건 사실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미디안에 대해 두려워하고 무서워서, 숨어 일하는 겁쟁이를 부르신 것입니다.
12절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매’ 겁쟁이인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큰 용사여”라고 부르며, 이스라엘 구원자로 삼겠다고 하십니다. 기드온은 민족의 시련 앞에서, 개인의 생활고 앞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 왔습니다. 정작 하나님이 자기를 부르시니까, 어떻게 나왔습니까?
13절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 마치 하나님 때문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다소 불만 섞인 떨떠름한 표정입니다.
14절 ‘여호와께서 그를 향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 하지만 하나님은 그를 달래셨습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달래십니까? “내 대책이 바로 너 기드온이다. 네가 이스라엘을 미디안 손에서 구원하라.”
15-16절 ‘그러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 기드온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17절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만일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 기드온은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지만,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얼마나 믿음이 부족했는지를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못미덥다며, 표징을 보여달라고 조릅니다. 이쯤 되면 아무래도 하나님이 사람을 잘못 보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기드온은 아무리 봐도, 큰 용사 이미지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를 큰 용사라고 하시며,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지금은 비록 큰 용사가 아니지만, 앞으로 큰 용사가 될 것을 보신 것입니다. 그 사람의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시는 하나님입니다. 현재 상태만 놓고 보면 영 아닌데, 포기하지 않고 붙드시는 하나님입니다. 끝내 하나님은 나약한 기드온을 들어, 큰 용사로 사용하셨습니다. 기드온 뿐입니까? 성경에 보면 수많은 사람들을 그렇게 쓰셨습니다. 우상쟁이의 아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사용하셨습니다. 평범한 농부에 불과했던 엘리사를 위대한 선지자로 사용하셨습니다. 뽕나무를 재배하던 아모스를 정의의 선지자로 사용하셨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질하던 베드로를 수제자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평범하다 못해 부족한 우리를 사용하고자 하십니다.
기드온을 잘 보세요. 그가 거부해 봤자입니다. 그가 뒤로 빼 봤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결국은 순종해야 했습니다. 우리 역시 거부해 봤자입니다. 뒤로 빼 봤자 소용없습니다. 결국은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제자 삼는 사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야 할 사명자들입니다. 가족을 이웃을 지인을 구원으로 인도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먹다 자는 인생, 먹다 죽는 인생이 될 수 없습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예수 믿는 목적이 돼서는 안 됩니다. 구원의 확신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언제라도 흔들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맹신은 위험합니다. 무턱대고 믿어버리는 것은, 정말이지 위험합니다. 아무 것이나 믿는 것 역시, 얼마나 위험한지 모릅니다. 그런 점에서 기드온은 맹신하지 않았습니다.
18-20절 ‘내가 예물을 가지고 다시 주께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리기까지 이 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너 돌아올 때까지 머무르리라 하니라. 기드온이 가서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고 가루 한 에바로 무교병을 만들고 고기를 소쿠리에 담고 국을 양푼에 담아 상수리나무 아래 그에게로 가져다가 드리매, 하나님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고기와 무교병을 가져다가 이 바위 위에 놓고 국을 부으라 하니 기드온이 그대로 하니라.’ 기드온은 말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표징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 단계를 거치고 나서, 그는 확신의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렇듯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 맞는가 하고, 분별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 확실한가를 확인하는 단계를 따져봐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운명을 거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에 순종하며 따라가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분별하는 과정에서,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말씀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해 객관성을 잃고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자기 포기가 없이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기적인 생각 앞에서는, 전혀 맥을 추지 못합니다. 그렇게 자기 믿고 싶은 것만 골라서 믿고 “아멘”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감당하기 힘들어 하십니다. 기드온이 말씀을 확신하고 나서,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24절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제단 이름을 “여호와 살롬”이라고 했습니다. 샬롬을 선포한 것입니다. 아직 현실은 미디안의 압제 아래 있습니다. 기드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평강을 선포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샬롬은 환경의 지배를 당하지 않습니다. 평탄한 환경에만 여호와 샬롬이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모든 곳에, 여호와 살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희생 제사 후에, 여호와 샬롬이 왔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평화에는 대가지불이 필요합니다. 가족의 평화에는 대가지불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평화에는 더 큰 대가지불이 필요합니다. 남북의 평화에는 더더욱 큰 대가지불이 필요합니다.
25-27절 ‘그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 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또 이 산성 꼭대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하시니라. 이에 기드온이 종 열 사람을 데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가문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 여호와 샬롬을 경험한 이후의 기드온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바알의 단을 헐며, 단 곁의 아세라 상을 찍어 번제를 드릴 때 장작으로 썼습니다. 물론 겁났을 것입니다. 그 일을 두려워서 낮에 하지 못하고 밤에 했다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쨌든 했다는 게 중요합니다. 두렵고 마음에 부담이 돼도, 어떻게든 순종하는 게 중요합니다. 부담스러운 말씀을 들으면, 두 가지 반응이 일어납니다. 그래도 순종하는 사람이 있고, 불순종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일 앞에서 겁을 내느냐, 겁을 내지 않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겁나는 일 앞에서 겁내는 것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문제는 겁이 나도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용기 있는 사람입니까? 겁나는 일인데도 겁을 안 내는 사람이, 용기 있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겁은 나지만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이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여호와 샬롬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막힌 담을 허실 때, 우리에게 여호와 샬롬이 이뤄졌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여호와 샬롬을 전해야 하는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가족에게 이웃에게 지인에게, 여호와 샬롬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담돼도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키지 않아도 순종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샬롬은 우리에게 축복이요, 세상을 향한 주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드온의 두려움의 삶이 소망의 삶으로 바뀌게 된 것은, 그의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도 아닙니다. 불만족인 기드온의 삶이 만족한 삶으로 바뀌게 된 것은, 그가 능력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은 더더욱 아닙니다. 여전히 기드온은 두려움 가운데 있었고, 그의 나라와 가정의 환경도 불안한 상태였습니다. 그런 기드온이 달라진 것은 여호와 샬롬이신 하나님 한 분 때문입니다. 두려움과 걱정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여호와의 평강입니다. 여호수아 리프맨이 쓴 ‘마음의 평안’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젊은 주인공이 어떤 노인을 찾아가서 자기의 소원을 말합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 젊은이가 자기 소원을 말합니다. ‘첫째는 건강이고, 둘째는 재물이며, 셋째는 미모이며, 넷째는 재능, 다섯째는 권력, 여섯째는 명예입니다.’이 소원을 말하는 청년을 지긋이 지켜본 노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젊은이, 그러나 평안이 없이는 아무것도 즐길 수가 없다네.’평강은 우리의 삶에 가장 본질적인 축복입니다. 평강은 우리의 삶의 즐거움이며, 소망의 삶으로 우리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한들, 평강이 없다면 가장 불행한 인생을 살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삶에 기쁨과 소망이 없습니까? 여호와의 평강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평안하십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삶의 환경이 평안이 없고,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 평안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평강이 없는 이스라엘과 기드온에게 하나님께서 찾아가심으로 그들에게 살롬이 시작되었듯이, 오늘 여러분들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진정한 만족과 평안, 곧 살롬을 누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의 이름(11) : 여호와 로이 : 시 23:1-6
요즘에는 주보를 교회에서 복사하지만, 예전에는 주보 원고를 인쇄소에 보냈습니다. 오랫동안 어떤 교회의 주보를 담당했던 인쇄소의 집사님은, 주보 원고에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항상 설교 제목이 길었는데, 이번 주에는 짧았던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목사님의 성향을 잘 아는 그 집사님은, 분명 설교 제목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모르니까 목사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목사님, 설교 제목이 다른 때보다 짧아서 확인 차 전화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게 다입니까?”목사님이 웃으면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네, 그거면 충분합니다!”집사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보 인쇄에 들어갔습니다. 목사님이 주일 아침에 일찍 나와서, 목양실에서 주보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곤 눈물이 핑 돌았고, 설교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주보에 실린 설교 제목 때문입니다. 주보에 실린 설교 제목은 이랬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네, 그거면 충분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면, 그거로 충분합니다. 거기 뭐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면 그거로 충분합니다. 거기 뭐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거면 충분합니다”가 되어야 합니다.
시 23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시 중에 하나입니다. 이 시는 너무나 평온하고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푸른 풀밭”이 나오고, “쉴 만한 물 가”가 나옵니다. 하얀 뭉게구름이 떠 있는 하늘 아래,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고, 그 옆으로 잔잔한 시냇물이 흘러가고, 양떼들이 평화로이 풀을 뜯는 장면을 연상하게 만드는 목가적인 시입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지역을 생각하면, 우리가 빗나간 상상을 한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도, 우리가 상상하는 곳이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지역은 초원이 아니라 광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목동들이 양떼를 치는 곳은, 푸른 풀밭보다는 광야입니다. 모세가 양을 치던 곳이 광야였습니다. 다윗이 양을 치던 곳도 광야였습니다.
‘광야’하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실제로 그렇기도 합니다. 광야는 메마르고 건조하며, 황량하고 거친, 그래서 살기 힘든 고통의 장소입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양을 치며 살아가던 곳은, 결코 산 좋고 물 좋은 곳이 아닙니다. 광야는 불안정한 곳입니다. 광야는 변화가 계속되는 자리입니다. 비가 쏟아지면, 갑자기 길이 사라지는 곳이 광야입니다. 그 길은 곧 급류가 쏟아지는 계곡으로 변해버리곤 합니다. 또 광야는 바람이 불면 있던 언덕이 없어지기도 하고, 또 없던 언덕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광야가 1년 내내 황무지인 것은 아닙니다. 광야에 비가 내리면, 순식간에 시냇물이 흐르고, 푸른 풀들이 돋아나고,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납니다. 비오기 전의 광야가 황무지라면, 비온 뒤의 광야는 눈부실 정도의 찬란한 초원으로 바뀝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입니다. 비가 그치고,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면, 풀과 꽃은 금방 시들어 버립니다.
이 광야야말로 인생의 축소판입니다. 시 23편도 자연을 노래한 것이 아닙니다. 전원을 꿈꾸는 노래가 아닌, 인생을 노래한 것입니다. 광야 같은 곳을 지내는 인생이, 목자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것을 노래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을 인생의 목자로 만났습니다. 이건 평범한 사건이 아닙니다. 인생 혁명, 그 정도로 엄청난 일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예수 밖에 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인생이란 광야에서, 갈 길 몰라 헤매던 양이었습니다. 어디론가 열심히 가기는 가는데,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내 영혼을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원수가 기다리고 있는 곳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목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될 뻔했습니까? 생각만 해도 끔찍스럽습니다.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습니다.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두루 찾는 마귀의 먹잇감이 된 자신을 생각해 보세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일입니다.
혹시 어떻게 죽음을 면했다고 해도, 하루도 한 나절도 한 시도 평안하게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늘 불안 속에서, 마음 졸이며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어느 정도는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어느 정도입니다. 하지만 태양이 이글이글 타고, 샘이란 샘은 다 말라 버려 마실 물조차 찾기 어려울 때는, 양이 어떻게 살아남겠습니까? 꼼짝없이 죽게 됩니다. 이게 목자가 없는 인생의 최후 운명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가 예수 믿은 것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럼 그것으로 다 된 것입니까? 우리는 목자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되었습니다. 순전히 목자의 수고로, 우리는 이렇게 살게 되었습니다. 그럼 전에 함께 길을 헤매던, 그 친구는 어떻게 됩니가? 나라도 살았으면 됐지, 그 친구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을까요? 지금도 잃은 양으로 어디선가 헤매고 있을지 모르고, 어떤 바위틈에 끼어 있을 지도 모르는, 예수 밖의 친구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외면해선 안 됩니다. 어쩌면 그건 목자의 분노를 살 일입니다. 만약 내가 친구 있는 곳을 알면서도, 그 친구를 죽도록 외면하고, 나 혼자 살겠다고 했던 것이 알려지면,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목자에게 꾸지람을 듣는 게 당연합니다.
잃어버린 양을 안고 있는 목자의 그림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자 품에 안겨 있는 양이 자기라고 생각합니다. 그 양이 왜 목자에게 안겨있습니까? 특별히 사랑스러워서입니까? 아님 특별히 예뻐서입니까? 아닙니다. 잃었다가 찾은 양이기 때문입니다. 길 잃고 헤매다가 혹시 다쳤을지도 모릅니다. 며칠 동안 먹지 못하고 굶었을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많이 놀라서 안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럼 그 양이 언제까지 목자 품에 안겨 있을 거 같습니까? 잃은 양이 생기면, 목자는 지금 안고 있는 양을 내려놓고, 잃은 양을 찾으러 갈 것입니다. 목자에게 안겨있는 것이 좋은 게 아닙니다. 그게 자랑스러울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끄러워 할 일입니다. 다른 양들이 쳐다보며, 뭐라 할 거 같습니까? “와 정말 부럽다. 야, 나도 목자 품에 안기고 싶다.”그럴 거 같습니까? 아니면 “야, 너 목자 속 좀 썩이지 마라. 너 때문에 목자가 얼마나 고생한 줄 아니?”그럴 거 같습니까? 이해가 됩니까? 그러니까 빨리 내려와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양들과 함께 어울려야 합니다. 다시는 길을 잃어 목자의 품에 안기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은 지 꽤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목자에게 안겨있으면서 그것이 행복인 줄 안다면 철부지 양입니다. 목자가 언제까지 자기만 안아주기를 바라고, 잃은 양이 더 이상 발견되지 않기를 바란다면, 목자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양입니다.
지방 도시의 어느 교회에 목사님이 부임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목사님께, 이런 이색적인 요구를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우리한테 전도하라고 하지 마세요.”예전 목사님이 하도 전도하라고 해서 데였는지, 아니면 자기들만 구원받겠다는 심보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후자라면 그들은 선한 목자이신 주님과 상관없는 양들일 것입니다. 그들이 그런 마음에서 돌이키지 않는 한 복과는 거리가 멀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 생각에 머물러 있다면, 그들은 정말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말은 히브리어 성경에는 간단히 두 단어로 되어져 있습니다. “여호와 로이.”‘여호와’라는 이름 뒤에 붙여지는 이름들은 모두가 역사적인 어떤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계시하신 이름입니다. 따라서 ‘여호와 로이’라는 하나님의 이름도 다윗이 경험했던 삶의 현장에서 고백되어진 이름입니다. 다윗의 삶의 현장은, 양치던 목동시절, 사울왕에게 쫓겨다니던 시절, 그리고 아들 압살롬을 피해 도망가던 경험 중 하나가 이 시의 배경으로 생각됩니다. “여호와 로이”여기에서 ‘여호와’는 성경에 계시된 가장 보편적인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의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선택하셔서 언약을 맺으셨으며,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심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라는 이름 뒤에 복합적으로 붙여진 이름이 ‘로이’입니다. ‘로이’라는 말의 원형인 ‘라아’는 ‘먹이다, 돌보다, 양육하다’또는 ‘다스리다, 관계를 맺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호와’는 ‘하나님’이시고, ‘로이’는 ‘나의 목자’이십니다.
다윗은 시 23편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비유했습니다. 다윗뿐 아니라 성경 곳곳에, 하나님을 목자로, 사람을 양으로 비유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목자는 양 한 마리 한 마리를 알고 있고, 각각의 특성까지도 알고 있습니다. 다 그놈이 그놈처럼 보이지만, 목자는 한 마리 한 마리를 다 구별해 냅니다. 목자는 어느 양이 배탈이 났는지, 어느 양이 상태가 안 좋은지, 척 보면 알았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예수님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요 10:14절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여기서 안다는 것은, 그냥 막연히 아는 것이 아닙니다. 더불어 정을 통해 안다는 뜻입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안다는 뜻입니다. 강점과 약점, 장점과 단점까지도 속속들이 안다는 뜻입니다. 15절을 보면, 그 뜻이 보다 분명해집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성부가 성자를 알고, 성자가 성부를 아는 것처럼 안다고 했습니다. 100% 안다는 뜻이고, 완벽하게 안다는 뜻입니다. 그럼 목자들만 양을 아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양들도 목자를 잘 압니다. 양은 자기 목자가 아니면 절대로 따라가지 않습니다.
성경 연구차 팔레스타인에서 머물고 있던 한 신부님이, 양치기들의 삶과 양떼들의 생태를 알기 위해서, 한동안 그들과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런 기상 변화로 심한 폭풍우가 몰아쳐서, 양들을 동굴로 피신시켜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부근에는 동굴이 하나밖에 없어서, 두 무리의 양떼가 한 동굴 안으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비가 그치고 떠날 때, 어떻게 이 많은 양떼들이 서로 섞이지 않고 자기 목자를 따라갈까 궁금해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의문은 너무도 쉽게 풀렸습니다. 폭풍우가 그치자, 양치기 한 사람이 먼저 일어나 나가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자 한 무리의 양떼들만 일어나서 그 목자를 따라가고, 다른 양떼들은 그대로 동굴에 남아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모습에 감탄한 그 신부님은 양치기에게 노래를 배워 양치기더러 숨어있으라고 하고, 자기가 노래를 부르며 앞장서 걸어보았습니다. 결과는 아무 양도 자기를 따라오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양들은 노래의 멜로디가 아닌,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아는 대로, 양은 머리가 나빠서인지, 눈이 안좋아서 인지 길을 잘못 찾습니다. 그런데도 목자의 음성만은 기가 막히게 알아듣습니다. 자기 목자의 음성만 들을 줄 압니다. 그게 양의 생존 비결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가요? 양보다 모든 면에서 탁월한 우리는 어떤가요? 주님의 음성만 듣습니까? 주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입니까? 혹시 내 이익을 위해서, 주님의 음성을 무시할 때는 없습니까? 당장의 유익을 위해서, 주님의 말씀에 잠깐 귀를 막을 때는 없습니까?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지혜는,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2절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목자는 양을 인도합니다. 푸른 풀밭으로,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합니다. 푸른 풀밭이 바로 앞에 있는 게 아닙니다. 쉴 만한 물 가가 바로 건너편에 있는 게 아닙니다. 어느 날 깻묵을 보관하던 헛간에 불이 붙었습니다. 양떼들이 깻묵 타는 고소한 냄새를 맡고 달려와, 불타고 있는 깻묵더미 앞으로 자꾸만 가려고 했습니다. 이를 본 목자는 급히 양떼들을 불구덩이에서 떼어놓기 위해서, 막대기를 휘둘러 댔습니다. 한 무리를 떼어놓으면, 다른 무리가 불을 향해서 달려들고, 다른 무리를 떼어 놓으면, 또 다른 무리가 달려들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다행히 불길이 잡혀서 양들이 살긴 했지만, 뜨거운 불기운의 영향 때문에 양들이 며칠을 고생했습니다. 도대체 왜 양들이 불에 타 죽는 것도 모르고, 불길을 향해 돌진했을까요? 자기 목자의 음성을 그토록 잘 알아듣는 양인데, 목자가 막대기를 휘두르면서 가로막는데도, 왜 불로 뛰어들려고 했을까요? 그건 깻묵 때문입니다. 양들은 고소한 깻묵 냄새만 맡을 줄 알았지, 뜨거운 불길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우리의 모습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깻묵에 집착해, 불길을 보지 못하고 달려드는 양과, 눈앞의 욕심에 눈이 멀어,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우리와 흡사합니다. 탐욕만큼 무서운 게 없습니다. 욕심은 모든 죄의 기본입니다. 골로새서 3:5절에서, 바울은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2:15절에서 주님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탐욕으로 인해, 영혼 구원을 뒤로 미루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 않는지, 자신을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눈앞의 먹고 사는 문제에 집중하느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상급인 복음전파에 무관심하지 않는지,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목자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분명히 의의 길이지 편한 길이 아닙니다. 바른 길이지 안락한 길이 아닙니다. 의의 길은 지름길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에게 좋은 길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넉넉잡아 한 달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무려 40년 동안 가게 하셨습니다. 모세가 길눈이 어두워 40년 걸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직접 인도하신 거였습니다. 징계도 포함되긴 했지만, 의의 길이 곧 지름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탄한 길을 걷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 생각은 다릅니다. 우리는 탄탄대로를 달리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은 달리 생각하십니다. 좀 힘들더라도 의의 길을 걷길 원하시고, 좀 더디더라도 정도를 걷길 원하십니다. 왜 그래요? 그게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결국엔 그 길이 우리에게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나 자신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하나님이 더 잘 알고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이게 양이 목자에게 갖는 믿음입니다. 양이 목자에게 갖는 믿음은,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는, 절대 의탁의 믿음입니다. 자신의 미래와 목숨까지도 맡기는, 절대 의존의 믿음입니다. 그럴 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도, 주저하지 않고 따라갈 수 있습니다.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본문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원래 원문에서는 “깊은 어둠의 골짜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 성경이 처음 기록된 팔레스타인에 가보면, 특히 예루살렘에서 사해로 내려가는 유대 광야 같은 곳에는, 앞이 보이지 않고 가파른 골짜기들이 도처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지역에 한 계곡의 길이는 무려 약 7km에 달하며, 양쪽 협곡의 높이는 450m 이상의 높이가 되고, 바닥의 폭은 3-4m나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바닥은 많은 경우 비로 침식되어 수렁을 이루기도 합니다. 만약에 어떤 양이 발을 잘못 디디어 미끄러지면, 이런 무서운 협곡에 떨어져 죽음의 공포와 싸워야만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그림이 아닙니까? 인생 도처에 이런 골짜기, 이런 협곡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의 골짜기와 협곡의 두려움을 이용하여 발달한 현대적인 산업이 바로 보험입니다. 건강을 상실할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의료보험이나 건강보험에 듭니다. 집을 잃을 두려움 때문에 주택보험이나 화재보험에 듭니다. 생명을 잃을 두려움 때문에 생명보험에 듭니다. 자동차 사고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서 자동차 종합보험에 듭니다. 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암 보험에 듭니다. 유명한 축구선수들은 발 보험에 든다고 합니다.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은 손가락보험에 든다고 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절대적인 신뢰관계가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따라가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당장 자기에게 해가 미칠 수 있는데, 목자만 믿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인생의 깊은 밤을 가리킵니다. 그게 질병일 수도 있습니다. 그게 경제적 어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그게 외로움일 수도 있고, 배척당함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잘 믿는 것을, 다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복받는 것을, 누구나 좋아할 거라고 보면 안 됩니다. 물론 박수쳐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비난하고 배 아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주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입니다. 양에게 가장 큰 고통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아니라, 목자가 없는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도, 주님과 함께라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습니다.
예전에 많이 불렀던 ‘주와 함께라면’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1. 주와 함께라면 가난해도 좋아, 참 된 부요함이 내 맘에 가득하니까 때로는 날 유혹하려고 세상 바람 휘몰아 쳐와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어 자비로운 주의 음성을 2. 주와 함께라면 병들어도 좋아, 참된 강건함이 내 맘에 가득하니까 때로는 날 넘어뜨리려 거친 파도 휘몰아 쳐 와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어 따사로운 주의 손길을 3. 내 맘 아시는 주 항상 함께 계셔, 약한 내 영혼에 위로와 능력주시네 가난해도 병이 들어도 시련의 밤 어둡고 깊어도 나는 결코 떠날 수 없어 아름다운 주의 나라를 왜 요즘에는 잘 불려지지 않을까요? 단순히 곡이 옛날 거여서 그럴까요? 요즘 시대와 맞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요즘 시대 그리스도인들의 심성과 맞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실제로 이런 고백을 하는 게 두려워서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에서는, 아들이 어느 정도 자라 성인식을 치를 때가 되면,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칠흑같이 어둔 밤 밀림 속으로 가서, 칼 한 자루만을 주고 돌아온다고 합니다. 아들은 밀림 속에서 혼자 밤을 새워야 하는 것입니다. 맹수들의 울음소리, 풀벌레 소리,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두려움에 떨면서 뜬눈으로 긴긴 밤을 보내게 됩니다. 그렇게 밤이 가고, 어렴풋이 주위를 분간할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아이는 소스라치게 놀라게 됩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아버지가 완전무장을 하고,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서 무서운 밤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아버지가 내 옆에 함께 있으면서 밤새 나를 돌보아주셨구나!’그후에 그 아이는 어디를 가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비록 아버지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어딘가에서 항상 자기를 지켜봐 주고 돌봐주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우리에게 그 아이의 아버지보다, 더 확실하고 믿음직한 아버지가 계십니다. 하늘 아버지, 곧 목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생의 굽이굽이에서,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 인생의 여정에서, 영원한 목자가 되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네, 그거면 충분합니다!’ 우리는 목자이신 하나님을 만나 행복합니다. 그분은 원수의 목전에서 보란 듯이 상을 차려 주십니다. 기름을 내 머리에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내 인생의 잔을 넘치게 하십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니...내 잔이 넘치나이다!’
6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목자이신 하나님을 따라가면, 우리는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게 됩니다. 양은 목자를 끝까지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언젠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게 됩니다. 우리가 선한 목자 예수님을 만나서, 살아생전에는 여호와의 집인 교회에 거하고, 죽어서는 주님과 영원히 천국에 살게 됩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목자로 사는 것입니다. 목자가 부담스럽다면, 목동으로 사는 것입니다.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를 흉내라도 내는 것입니다. 인생길 험하고 마음 지쳐, 살아갈 용기 없어하는 영혼들에게, 우리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어떤 소년이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모가 여러 가지를 해 주지만 그 위로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너무 안쓰러운 마음이어서 아들 곁에서 성경 말씀을 읽어줍니다. 시편 23편을 읽어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이 말씀을 꼭 기억해야 돼. 네가 힘들 때, 아파질 때 이 말씀을 생각하거라. 여호와는 너의 목자시다! 여호와는 너의 목자시다! 하나님이 너의 목자가 되고 나의 목자가 된다면, 그 하나님이 인도해 주신다면,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거야.”“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말이 영어로는 다섯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The Lord is my shepherd.”그래서 엄마가 아들의 손가락을 어루만지면서 이야기합니다. “얘, 너의 다섯 손가락처럼 하나님이 이 말씀을 주신 거야. 꼭 기억해. The Lord is my shepherd. 하나님이 네 목자란 것을 기억해.”그런데 어느 날 너무 아파하는 것을 보고 엄마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준비했던 링 반지를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주면서 말합니다. “네 번째가 제일 중요해. 주 여호와는 ‘나의, 나의, 너의’ my, my shepherd, ‘너의 목자야. 하나님이 너의 목자다’ 이것만 확신한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거야.” 어느 날 아들이 몹시도 아파하면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냥 자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보니까 벌써 아들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아들의 얼굴을 보고 손을 보다가 엄마가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뜻밖에도 이 세상을 떠나간 어린 아들은 오른손으로 자기 왼손에 엄마가 늘 짚어주던 네 번째 손가락, 링이 끼워진 그 손을 잡고 숨을 멈추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집, 저 영원한 천국으로 떠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천국의 소망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목자가 되셨습니까? 두려움에 잡힌 나, 죄로 더럽혀진 나, 방황하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의 인생의 목자로 영접하셨습니까? 하나님이 내 인생의 목자가 되신다면, 우리는 죽음의 다리도 찬양하면서 건너갈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우리가 무엇을 염려하겠습니까?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목자로 받아들인다면, 여러분은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고 앞으로의 남은 생애도 그분을 바라보며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 로이, 목자 되신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험악한 세파 속에서 구원하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내 인생의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 그 분이 여러분의 인생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목자이신 주님의 보살피심 속에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의 이름(12) : 여호와 체바오트 / 시 84:1-12
우리 신앙인들이 제일 많이 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뜻’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할까요?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 그 뜻을 알기 원하나요? 아니면 내가 살아가는 길이 뭔가 잘 안 풀려서, 하나님의 뜻이 아닌지 궁금해 하는 것은 아닐까요? 또 하나의 물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잘 풀린다.”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물음들은 아주 근본적인 신앙의 질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라고 말했을 때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뜻이 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뜻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뜻이란 우리가 우겨서 행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악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하나님의 허락을 받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결혼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면 힘든 시간을 살아야 합니다. 참아내야 하는 일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가는 길이 악한 길은 아니지만,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갈 때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돌아오려면 어려움을 당해봐야 아는 것입니다. 스스로 깨달아야 발견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종종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왜 그런 길을 그냥 놔두셨나요?”라고 불평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일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가 ‘하나님의 주관하시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이 길은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마치 바닷가에서 서핑을 하는 사람처럼 파도를 탄다는 것은, 우리가 파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파도에 우리의 몸을 맡기는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아주 적절한 예가 될 듯합니다. 하나님의 주관하시는 뜻에 우리의 몸을 맡기면 엄청난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특징은 순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예상할 수 없는 삶의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헌법 39조를 보면 ①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 ② 누구든지 병역의무의 이행으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 대한민국 남자들은 누구나 군필을 해야 합니다. 군필은 군대를 다녀오거나, 정당한 사유로 면제받은 것도 포함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정당한 사유입니다. 모병제가 아닌 징병제 국가에서, 우리나라처럼 지도자들이 불분명한 사유로 군대를 갔다오지 않는 경우도 드뭅니다. 불분명한 사유로 군대를 피한 사람이, 어느 날 대통령이 되어 국군통수권자가 되는 것도 이상하고, 무슨 낯으로 군대 사열을 받을까 싶은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또 그 자녀들은 어떤가요? 청문회를 하거나, 중요한 선출직에 나갈 때, 꼭 걸리는 것이 자녀 군대 문제입니다. 하긴 자기도 안 갔다 왔는데, 자녀를 군대 보내고 싶겠습니까? 남자들이 모여서, 군대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모여 군대 이야기 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지만, 남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합니다. 남자들이 군대 이야기에 목을 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만큼 그 시간들이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그만한 자극적인 경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성찬의 유머집 ‘너희가 군대를 아느냐?’에 훈련의 유래가 나옵니다. “뺀질거리는 서울 군바리들 때문에 인원파악이 생겼고, 동작 느린 충청도 군바리들 때문에 선착순이 생겼고, 탈영하는 호남 군바리들 때문에 불침번이 생겼고, 말 안 듣는 경상도 군바리들 때문에 줄 빳다가 생겼고, 물에 사는 제주도 군바리들 때문에 도하훈련이 생겼고, 비탈진 곳에 사는 강원도 군바리들 때문에 유격훈련이 생겼다.” 군바리 10대 불만이란 게 있습니다. “잠들 만하면 기상, 먹을 만하면 식사 끝, 쉴 만하면 집합, 움직일 만하면 동작 그만, 놀 만하면 휴식 끝, 정들 만하면 전출, 휴가갈 만하면 비상, 편지 쓸 만하면 소등, 공부할 만하면 작업, 편할 만하면 전역”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오래전 군대 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깊은 공감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성경에도 군대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여호와 체바오트, 만군의 여호와” 모든 군대를 거느린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만군의 여호와”라는 표현이 271회나 등장합니다. 모든 군대를 거느린 하나님이라고 해서, 옛날 군사정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옛날 정치 군인들이 무력으로 정권을 잡고, 독재까지 해서 군인들의 이미지를 버려 놓은 면이 있습니다. 본래 군대는 백성을 돌보는 사람들입니다. 군가 ‘진짜 사나이’ 노랫말처럼, ‘산봉우리에 해 뜨고 해가 질 적에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 그런데 백성을 지키라고 손에 들려준 총칼로, 백성들을 위협하여 지배했던 암울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다시는 되풀이 돼서는 안 될 우리의 아픈 역사입니다.
1-7절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만군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여호와 체바오트’라고 부릅니다. ‘만군’에 해당하는 ‘체바오트’는 ‘군대들’ 또는 ‘많은 군대’를 의미하는 말로써, 일반적으로 번역하자면 “하나님은 군대들의 주인이시다”는 뜻입니다. 곧 ‘여호와 체바오트’의 역사적인 의미는 ‘만 명의 군인을 거느린 여호와’라는 말로서, 어느 누구도 감히 대적할 수 없이 힘 있는 분이심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이 이름이 등장하는 경우에는 거의 예외 없이, 하나님은 천군 천사들을 군대로 부리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또한 본문에서 시인은 만군의 여호와를 돌보시는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한 순간 한 순간을 돌봐주실 뿐 아니라, 우리의 전 생애를 돌봐주시는 분이십니다.
어느 목사님의 유학 시절의 간증을 소개하겠습니다. 그가 유학 시절에 걱정이 되는 문제가 십일조 문제였다고 합니다. 장학금으로 공부를 하는 입장인데, 그것으로 생활하기가 빠듯한데, 거기서 십일조를 낸다는 것은 너무 힘겨웠습니다. 첫 번째 장학금을 받았는데, 그걸로 녹음기를 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강의 내용이 잘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일조를 내고 나면, 녹음기를 살 여유가 없어서, 당분간 십일조를 보류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주일 아침이 되었습니다. 예배 중에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비록 녹음기는 못 사는 한이 있어도, 말씀대로 십일조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난 후, 목사님께서 한국 부인 한 분을 소개시켜 주었는데, 그 분이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식사를 마친 후에, “혹시 녹음기가 필요하지는 않으세요?” 물었습니다. 자신이 유학시절 쓰던 것인데 없으면 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날 밤 기숙사에 돌아와서,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했다고 합니다. 자기는 어느 누구에게도 녹음기가 필요하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말씀에 순종하여 십일조를 했더니, 자기가 필요한 것을 구체적으로 이루어 주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감격했던 것입니다. 중고 녹음기를 주셨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까지 헤아리고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에 감격하여, 힘든 유학을 잘 마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그래서 때를 따라 돌봐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를 처음으로 부른 사람은,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입니다. 한나는 사사시대의 말기에, 제사장인 엘가나의 사랑 받는 아내였습니다. 하지만 아픔이 있었습니다. 멀쩡한 몸으로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요즘에는 결혼을 하고도, 부부가 합의하여 일부러 아이를 낳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이때는 아이를 낳지 못하면 큰 흠입니다. 한나는 남편의 또 다른 아내 브닌나로부터, 많은 멸시와 괴로움을 당해야 했습니다.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래서 한나가 어떻게 했느냐입니다. 그녀가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만 있었습니까? 자신을 향한 한탄과, 타인을 향한 원망으로, 귀한 인생을 허비하고 있었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돌보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삼상 1:11절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아이를 못 낳는 것은,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한나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기도였습니다. 그녀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을 돌보시고,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나의 고통을 돌봐주시고 기억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기도한 사무엘 뿐만 아니라, 구하지 않았던 두 아들과 두 딸까지 덤으로 주셨습니다. 물론 한나가 사무엘을 받고는, 자신이 한 서원을 갚는 것을 확인하시고, 다른 아이들을 주신 게 분명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 6:26절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30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기꺼이 돌보아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게 하고, 하루하루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만군의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돌아서서 남몰래 흘리는 눈물까지도 지켜보시는 분입니다. 고통을 혼자 감내하면서 삭이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건 하나님을 의붓아버지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마음을 섭섭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돌보시는 만군의 하나님을 의지하기 바랍니다.
8-12절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만군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만군의 하나님은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돌보시되,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십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는 사람은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내 고통을 돌보시는 분이라고 믿으면,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먼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그리스도인은, 일단 기도부터 하고 보는 사람입니다. 만군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삶의 우선순위에 놓고 사는 사람입니다.
세계적으로 많이 읽혔던 ‘Chicken Soup for the Soul,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실화로 소개된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고든과 신디라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들 부부에게는 어린 딸 타냐가 있었습니다. 어린 딸 타냐가 어느 날 자신의 집 부엌 오븐 옆에서 놀다가, 마침 오븐 위에 올려놓았던 펄펄 끓는 물 냄비를 건드려서, 그 물이 얼굴에 쏟아져 중화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어린 딸 타냐는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고, 수술을 받았습니다. 대수술입니다. 수술 시간도 길었습니다.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는 부부에게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은, 큰 흉터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말뿐입니다. 수술실에 들어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다급해진 엄마 신디는 소파에 엎드려서,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수님, 어떻게 해요. 예수님이 직접 들어가 주세요. 예수님이 만져 주셔요. 예수님이 고쳐주세요. 예수님이 직접요.’ 한 참 기도를 하는데, 누가 와서 툭 건드렸습니다. 눈을 들어보니 자기 교회 목사님입니다. 목사님이 교인 두 사람과 함께 와 있었습니다. ‘소식을 듣고 기도하러 왔습니다.’ 부부의 손을 잡고 기도하던 목사님이, ‘제가 들어가 보지요.’ 하고, 자신이 목사라고 신분을 밝히고, 잠시 수술실의 허락을 받아, 목사님이 교인 두 사람과 함께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고 나와서, ‘걱정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다려 보십시다.’ 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일행은 떠나갔습니다. 하루 밤을 지샌 다음, 그 이튿날 아침 부부는 타냐가 입원하고 있는 병실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타냐가 잠들어 있는데, 딸의 얼굴을 보고는 부부가 깜짝 놀랐습니다. 화상이 씻은 듯 흔적을 감추었습니다. 아주 얼굴이 깨끗했던 것입니다. 부부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이 놀라운 기적 앞에,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목사님께 달려갔습니다. 목사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함께 와서 기도해 주신 두 분이 누군인가를 물었습니다. 그 두 사람한테도 감사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좀 의아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저는 집사님 한 분하고 들어갔었는데요.’ ‘아닙니다, 목사님. 목사님과 두 분이 함께 오셨잖아요. 여보, 그렇잖아요?’ 남편도 고개를 끄덕이며 확인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은 아니라고, 자신은 집사님 한 분하고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이냐, 세 사람이냐를 놓고 한참을 실랑이하다가, 목사님이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 그렇군요. 또 한 분은 예수님이 직접 오셨거나, 예수님이 보내신 천사인 게 틀림없습니다.’ 그러자 타냐 엄마 신디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참, 맞아요, 목사님. 저도 깜빡 잊었네요. 제가 기도하면서 예수님이 직접 오셔달라고 했거든요.’
여러분, 다시 기도줄을 붙잡기를 바랍니다. 언제부턴가 느슨해진 기도줄을 다시 붙잡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여호와 체바오트, 만군의 하나님이십니다. 기도에 문제가 생겼다면, 그분이 무력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약해져서입니다. 시인이 고백한 대로입니다. 11절하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분입니다. 무엇이 아까워서 주시지 못하겠습니까? 혹시 기도의 통로가 막혀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해 보십시오. 그리고 막혀 있으면 토해내야 합니다. 기도가 영혼의 호흡 아닙니까? 기도를 쉬고 있는 상태를, 심정지처럼 심각하게 받아드려야 합니다. 심정지 상태에서 골든타임을 4분으로 봅니다. 심정지 후 4분이 지나면, 심폐소생술을 실시해도 뇌손상으로 인해 식물인간이 된다고 합니다. 영혼의 호흡인 기도에도, 골든타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얼마간 기도를 쉬었다면,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럼 아무리 기도를 하려고 해도, 기도가 잘 되지 않습니다. 만군의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를 돌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만군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싸워주시는 분입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오랜 숙적입니다. 블레셋에는 힘센 왕이 있어, 한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혀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왕이었지만, 자기들에게도 인간 왕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어서, 사무엘에게 왕을 구했습니다. 사무엘은 속이 상했지만, 더 속상하신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초대 왕이 된 것입니다. 사울이 처음에 제법 리더십을 발휘했을 때, 백성들은 왕을 구한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은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골리앗을 앞세운 블레셋 앞에서는, 사울도 꼼짝하지 못했습니다. 무려 40일 동안이나, 거인 골리앗의 위세 앞에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삼상 17:10-11절 ‘그 블레셋 사람이 또 이르되 내가 오늘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와 더불어 싸우게 하라 한지라.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 누구 한 사람 나타나 “내가 한 번 싸워보겠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결과가 너무나 뻔했기 때문입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에서는 천불이 나지만, 어찌할 도리가 있었습니다.
그 때 소년 다윗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형들 안부를 알아보라는 아버지 심부름 왔다가, 얼떨결에 개입하게 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벌벌 떨고 있는데, 소년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은 물론이고, 이스라엘 장수들과 모든 군대가 떨고 있는데, 소년 다윗은 용기백배했습니다. 이 차이가 어디서 왔는가요? 이스라엘 군대는 실제로는 만군의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년 다윗은 만군의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믿었습니다. 이 차이가 결정적입니다. 다윗은 나무라는 큰 형의 만류를 뿌리치고, 사울 왕을 찾아갔습니다. 자기가 골리앗을 상대하겠다고 했을 때, 사울도 처음에는 말렸습니다. 아무리 나라가 위태한 상황이지만, 아직 앳된 얼굴의 소년을 백전노장 골리앗에게 보내는 것은, 어른으로서 못할 짓 같았습니다. 하지만 다윗과 면담을 한 후에, 마음을 바꿨습니다. 다윗을 이스라엘 대표 선수로 출전시키기로 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도구인 물매와 돌 다섯 개를 주어서, 골리앗 앞에 나아가며, 겁도 없이 소리쳤습니다. 삼상 17:45절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이런 무모할 정도의 용기가 어디서 나왔을까요? 다윗은 전쟁의 승패가 칼과 창에 달려 있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전쟁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줄로 믿었습니다. 다윗은 자기 능력이 아닌,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나아갔습니다. 다들 다윗이 상대가 안 될 거라고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고 나아간 다윗이 거구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그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군의 하나님을 전혀 안 믿었는가요?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막연하게 믿었습니다. 다윗은 그들과 다르게 믿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믿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실제로 믿었습니다. 오늘도 살아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믿었다는 증거가 무엇인가요? 믿음으로 행동한 것이 증거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골리앗에게 나아간 것이 증거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세상이란 골리앗 앞에서는 침묵하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참된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울 때, 하나님이 우리 삶에 개입하신다는 것을 믿기를 바랍니다. 다윗이 직접 나아가는 믿음이었다면, 히스기야는 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다윗과는 좀 다른 방식으로, 히스기야에게 역사하셨습니다. 히스기야에게는 천군천사를 동원하시는 방법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사 37:36절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 히스기야를 치러 왔던 산헤립의 군대가, 하나님이 보내신 천군천사들에 의해, 하룻밤 사이에 18만 5천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럼 히스기야는 아무 것도 안 하고 놀았습니까? 사 37:21절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사람을 보내어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네가 앗수르의 산헤립 왕의 일로 내게 기도하였도다 하시고’ 히스기야가 아무 것도 안 한 게 아닙니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네가 앗수르의 산헤립 왕의 일로 내게 기도하였도다’고 하나님이 인증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가 기도할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천군천사를 보내어 산헤립 군대를 물리쳐주신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는, 다윗에게처럼 역사하실 수도 있고, 히스기야에게처럼 역사하실 수도 있습니다. 내가 직접 싸워서 승리하게 하실 수도 있지만, 천사를 보내 대신 싸워서 승리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개입하시는 방식은 다르지만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그건 만군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싸워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만군의 하나님이란 뜻이, 모든 군대를 거느린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만군의 하나님은 하늘 군대의 사령관이십니다. 인생의 위급한 상황에서, 그분께 구조 신호인 SOS를 보내야 합니다. 그렇다고 위급할 때만 하나님을 찾지 말고, 평소에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내야 합니다. 시인처럼 주의 장막을 사모하는 삶을 살기 바랍니다. 여호와의 궁정에 거하기를 사모하는 인생, 목마른 예배자로 살기 바랍니다. 오늘도 그분은 “여호와 체바오트”이십니다. 우리를 돌봐주시는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 우리를 위해 싸워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 체바오트, 만군의 여호와’ 권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도 자신의 백성들이 힘들고, 아프고, 어려워하는 삶의 자리에서 부르면 천사를 대동하고 달려오셔서 우리를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고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의 이름으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금년 한 해, 아니 우리의 일평생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 이 시간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나약한 관계를 회복하십시오. 하나님과의 어리석은 관계도 회복하십시오. 하나님과의 어색한 관계도 회복하십시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 육신의 아버지와 든든한 관계를 맺듯이 내 생명의 아버지이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과의 든든한 관계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는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언약을 지키시는 신실한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이름이 ‘여호와 체바오트,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천군천사를 통한 군대를 보내어 에워싸고 보호하시고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의 이름을 찬양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을 목소리 높여 불러보십시오. “여호와 체바오트! 만군의 여호와여!”
우리 인생의 성패는 여호와께 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역사의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을 의지하고 그 분의 이름을 높이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반드시 축복하십니다. 돈의 힘이나 능력과 머리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능력이요 힘이 되시는 줄 믿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갑시다. 여호와께서 의로운 오른 손으로 우리를 붙드시고 승리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자들을 도우시는 만군의 여호와를 찬양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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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름(13) : 여호와 치드케누 / 렘 23:1-8
어느 마을 한 영감님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꿩알을 주웠습니다. 나무도 하고 꿩알도 주운 영감님은,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마을 한 청년을 만났습니다. 청년이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나무해 가지고 오세요?” “꿩알이다.” “할아버지, 나무해 가지고 오시냐구요?” “열 두 개다.” 그러자 청년이 다시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아니, 할아버지. 나무해 가지고 오시냐구요?” “이놈아, 그런다고 내가 안 먹고 너 줄 것 같으냐?” 영감님과 동네 청년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소통이 안 된 것입니다.
예전에 미국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가, 수많은 장애물 때문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넘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재선까지 성공했었습니다. 그건 그가 국민들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당내 대통령 후보 경선 초기, 민주당은 이라크 전쟁 문제로 찬반이 나눠져 있었습니다. 오바마는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우리 민주당에는 두 그룹의 애국자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라크 전을 반대하는 애국자이고, 다른 하나는 이라크 전을 찬성하는 애국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들과도 소통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들을 적을 만든 것이 아니라 동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소통이 역사를 만든 것입니다.
두 사람이 카페에서 서로 마주보고 앉았습니다. 잠깐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이내 핸드폰에 손이 갑니다. 쉴 새 없이 연락이 오는 메신저로 댓글을 답니다. SNS에 지금 어느 카페에 왔는지, 누구와 있는지, 어떤 기분인지, 올리느라 바쁩니다. 잠시 뒤에 올린 글들에 대한 댓글이 옵니다.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알림이 울어댑니다. 그렇게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서로 핸드폰만 보다가 갑니다. 미국 MIT대 사회심리학자 셰리 터클은, 이런 모습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함께 있지만 따로 있는 새로운 형태의 고독이다.’ A. W 토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사소통의 수단은 점점 발달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관계의 깊이는 점점 얕아져만 간다.’
소통이 중요합니다. 서로 말이 통해야 숨 쉴 수 있습니다. 한 집에 살면서도, 말이 통하지 않으면, 얼마나 답답한지 모릅니다. 가정의 문제를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그 중의 가장 큰 문제는 의사소통의 장애입니다. 부모와 자식이 말이 안 통하고, 부부 간에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럼 천국 가정은 아닙니다. 주일에 교회는 나옵니다. 정기적으로 예배는 드립니다. 귀를 기울여 설교는 듣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소통은 단절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느냐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신앙의 초점이 나한테 맞춰져 있어서입니다. 모든 게 자기중심적이어서 그렇습니다. 일방적인 신앙이요, 제 나름대로의 신앙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제로는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은 멀쩡히 있습니다. 여전히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가 드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영혼이 안전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는, 유다의 죄악을 고발하면서,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특히 지도자들의 죄악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1-2절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목장의 양 떼를 멸하며 흩어지게 하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내 양 떼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 때문에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말씀만 놓고 보면, 지도자들에게만 화를 선포하는 거 같은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백성들 역시 죄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당시의 거짓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공박하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말했습니다. “이 나라는 하나님이 도와주시니까 절대로 안전할 것이다.” 여전히 죄의 자리에 있으면서,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에 귀를 막고 있으면서,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철썩 같이 믿었습니다.
예레미야 당시의 거짓 선지자들의 외침이, 오늘날엔 사라졌을까요? 그렇게 볼 수만은 없습니다. 회중의 귀에 거슬려도 진리를 선포해야 하는데, 강단에서 그런 메시지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제대로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는 점점 밀려나고, 하나님의 축복의 메시지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회개, 거룩, 의”란 단어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복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살겠습니까? 우리가 축복의 통로가 되려면, 우리가 먼저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복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우리는 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 없는 복이 있을까요? 거룩한 삶이 없는 복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의가 빠진 복은 진정한 복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진짜 복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신령한 복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선적으로 하늘에 속한 복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중년부인이 지하철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자리가 나니까, 많은 사람들을 헤집고 잽싸게 그 자리를 차지하고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걸 지켜본 한 신사가, 그 부인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아까 기도하시는 것 같던데, 뭐라고 기도하셨습니까?’ 그 부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뭐라고 기도하긴요. 하나님, 자리 주셔서 감사합니다 했죠.’ 신사는 그 말을 듣고서 신앙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을 헤집고 잽싸게 지하철 빈자리를 차지할 정도면, 노약자도 아니고 허약자도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신앙인의 바른 자세일까요?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요? 빈자리가 났을 때,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 양보하고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 아닐까요? “주님, 제게 서서 갈만한 건강을 주신 것 감사합니다.” “주님, 양보할 수 있는 작은 사랑의 마음을 주신 것 감사합니다.”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자기중심적일 때가 있습니다. 신앙조차 자기중심적인 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기적인 생각이 배어 있습니다. 이기적인 신앙에서 좀체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나를 중심에 놓고, 하나님도 생각하고 다른 사람도 생각해서 그럴 겁니다. 하나님이 중심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근간을 하나님의 말씀에 둬야 합니다. 우리는 부단히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위에 서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자기 백성에게 의로운 삶을 요구하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요시야가 유다 왕으로 있을 때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요시야가 유다 왕위에 오르기 100년 전에, 앗수르에 의해 이미 망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남 왕국 유다가 각성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아니 그들만이라도 말씀대로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들의 죄에서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망한 북 왕국 이스라엘 못지 않았습니다. 대하 36:15-16절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 부지런히 그의 사신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어 이르셨으나,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사신들을 비웃고 그의 말씀을 멸시하며 그의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그의 백성에게 미치게 하여 회복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성전을 아끼셨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선지자들을 보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비웃고 욕했습니다. 그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기회를 주셨지만, 그들은 거부했습니다.
그 무렵 요시야가 남 왕국 유다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요시야는 유다에 하나님의 의를 일으키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우상을 제거하고, 악을 도말했습니다. 다시 율법을 지켰고, 사회를 정화시켰습니다. 사람들의 대화가 하나님과 그분의 일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히스기야에 이어 유다에 다시 한 번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요시야의 부흥의 불꽃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왕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지, 진심으로 하는 회개가 동반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요시야가 므깃도에서 애굽의 바로느고를 막다가 죽자, 개혁은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부흥의 불꽃은 금방 식고 말았습니다. 남 왕국 유다는 다시 요시야 이전 우상숭배의 자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유다가 급격히 쇠해졌고, 얼마 후 바벨론에 의해 망하고 맙니다. 유다가 망하는 과정입니다. 대하 36:17-20절 ‘하나님이 갈대아 왕의 손에 그들을 다 넘기시매 그가 와서 그들의 성전에서 칼로 청년들을 죽이며 청년 남녀와 노인과 병약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으며, 또 하나님의 전의 대소 그릇들과 여호와의 전의 보물과 왕과 방백들의 보물을 다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또 하나님의 전을 불사르며 예루살렘 성벽을 헐며 그들의 모든 궁실을 불사르며 그들의 모든 귀한 그릇들을 부수고, 칼에서 살아 남은 자를 그가 바벨론으로 사로잡아가매 무리가 거기서 갈대아 왕과 그의 자손의 노예가 되어 바사국이 통치할 때까지 이르니라.’ 이게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게 의로우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 치두케누”는 ‘의로우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모든 속성 중에서, 기초가 되고 기반이 됩니다. 흔히 하나님의 속성하면, 전지전능, 무소부재, 사랑, 거룩, 불변 등이 있는데, 이 속성에서 하나님의 의가 빠지면 하나님의 절대 권위는 무너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권위가 무너지면, 하나님이 통치하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말씀에 불복종하게 되고, 진리를 거리낌 없이 거스를 것입니다.
일본의 저명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만을 강조하면 사랑은 식는다. 사랑은 의가 없으면 번영하지 않는다. 의가 없는 사랑은 햇빛이 없는 습기와 같다. 결국 곰팡이가 나고 나무를 썩게 한다. 만일 하나님이 사랑의 성품만 소유하시고 의가 없으시다면, 우리는 벌써 멸망하고 사라졌을 것이다. 만일 기독교가 사랑만을 가르치고 의에 대해서 잠잠했다면, 사회에 수없는 악을 끼쳤을 것이다.” 정확한 통찰입니다. 시편의 시인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 7:11-12절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하나님의 의에서 강조되는 것이 심판일 수밖에 없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사람들의 재판장이 되십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그 속성상 잘못된 것을 그냥 놔두실 수가 없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하십니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불순종하였습니다. 어쩌다 한 번 한 것이 아닙니다. 계속하여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그런 행동을,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덮어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은혜로 봐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말씀에 불순종하여, 니느웨의 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향하는 배를 타고 도망칠 때, 하나님이 그를 물고기 밥이 되게 하셨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3일 동안 회개한 후에야, 겨우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끝끝내 회개하지 않았다면, 물고기 뱃속에서 영영 못 나왔을 것입니다.
택한 나라 이스라엘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을 때, 남과 북으로 찢어지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우상숭배를 그치지 않자, 어떻게 하셨습니까?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남 왕국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각각 망하게 하셨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다시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망했고, 남 왕국 유다는 70년간 포로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이 불순종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것입니다. 믿음 성장을 위해서만,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순종한 대가는 괜한 것입니다. 괜히 고생만 하고 얻는 건 별로 없습니다. 몸만 축나고 재물만 날리지, 아무 보람도 없습니다. 불순종한 대가에서, 이거 하나는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일에 허허실실하고 그냥 넘어가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해도 하나님의 의지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정말이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역사를 보는 방법, 첫째가 헬라적 역사관입니다. 역사를 하나의 사이클로 보는 것입니다. 윤회적 사관입니다. 헬라의 대표적인 철학자 플라톤은, “역사는 끊임없이 돌고 돈다”고 했습니다. 역사를 보는 방법, 둘째가 히브리적 역사관입니다. 역사를 일직선으로 보는 것입니다. 반복이 아니고 앞을 향해서 꾸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천지창조에서 시작하여 종말에 이르게 되는 역사관입니다. 역사의 종말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크게는 우주적 종말이 있습니다. 우주는 종말을 향하여 쉼 없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태양도 수명이 있다지 않습니까? 태양이 영원히 불탈 것 같지만, 차갑게 식을 때가 옵니다. 또한 개인의 종말이 있습니다. 우리 개인 역시도 종말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늘 우리가 기억하고 망각해서는 안 될 사실이 있습니다. 나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하세요. “나는 언젠가 죽는다! 당신도 언젠가 죽습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실로암 망대가 갑자기 무너지면서 18명이 압사를 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사람들이 수군거리기를, ‘그들이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길래 저런 저주를 당하나’ 했습니다. 그때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눅 13:5절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회개를 강조하면, 율법주의 신앙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주님이 회개를 강조하셨습니다. 주님의 공생애 최초의 일성이 무엇입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회개였습니다. 그분이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입을 뗀 첫 마디가 무엇입니까?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회개였습니다.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오니까, 지금의 불의한 삶을 청산하라는 것입니다. 죄인으로서 다가오는 하나님나라를 맞기 위해서는, 회개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울어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되며, 참아도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5-6절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5절과 6절의 말씀은 성경에서 아주 유명한 예언의 한 대목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세우실 지도자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지혜롭고 공의롭게 지도자로서 백성을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6절에서 그의 이름이 바로 ‘여호와 치드케누, 공의로운 여호와’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성경은 아주 흥미로운 단어의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유대의 마지막 지도자요, 마지막 왕의 이름이 ‘시드기야’입니다. 우리말로는 ‘시드기야’가 히브리어로는 ‘치드키야후’입니다. 그러니까 ‘의롭다’ 또는 ‘정의롭다’는 뜻의 ‘차디크’와 ‘여호와’의 축약형인 ‘야흐’가 결합되어 ‘여호와는 정의롭다’ 또는 ‘여호와는 의로우시다’라는 뜻이 됩니다. ‘시드기야’라는 이름의 ‘치드키야후’와 ‘의로우신 여호와’라는 뜻의 ‘치드케누’. ‘치드키야후, 치드케누’ 좀 비슷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전혀 감각이 없습니까? 사실은 ‘시드기야’라는 단어와 ‘치드케누’라는 이 두 단어가 ‘체덱’(tsedek)이라는 같은 어근에서 나옵니다. ‘체덱’이라는 단어에서 ‘치드케누’라는 단어가 나온 것이고, ‘치드키야’ 또는 ‘시드기야’라는 단어도 거기서부터 유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 시드기야에게 실망했지? 그러면 내가 치드케누가 되어 줄게.” 이런 말입니다.
여호와의 의가 누구를 통해 임한다고 했습니까?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는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가 임합니다. 여호와의 의가 언제 임한다고 했습니까?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의 날입니다. 죄인이 의인이 되는 방법은, 유일하게 하나님의 의를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내 의로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구약에 능통했던 바울이, 하나님의 의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롬 3:21-22절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의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예수 때문에 얻는 의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불의한 인간들을 위해, 하나님의 한 의를 준비하셨습니다. 그 준비하신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롬 3:25-26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의 피에 나타났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드린 화목제물에 나타났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도 의로우신 분이시고, 예수 믿는 사람도 의로운 자가 되었습니다.
고대 말크스의 프루투스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회가 너무나 문란하고 기강이 해이해지자, 이런 법령을 제정해서 공포했습니다. “범법자는 두 눈을 뽑겠다.” 그런데 최초의 범법자가 왕의 아들입니다. 그의 신하들은 폐하의 아들만큼은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거듭 상소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프루투스 왕은, 이런 말로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법은 형평성을 유지해야 한다. 국법대로 처벌하라.” 순간 주위는 쥐죽은 듯 고요해졌습니다. 왕은 보좌에서 내려오더니 말했습니다. “내 눈 하나와 아들의 눈 하나를 빼라.” 왕으로서의 권위와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함께 실천에 옮긴 것입니다.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가 있습니다. 골고다의 언덕에 우뚝 세워진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지만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3-4절 ‘내가 내 양 떼의 남은 것을 그 몰려 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다시 그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의 생육이 번성할 것이며,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거나 잃어 버리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7-8절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집 자손을 북쪽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 것이며 그들이 자기 땅에 살리라 하시니라.’ 예레미야의 메시지 안에 회복이 담겨 있음을 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는, 흥분을 감출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눈물로 예배하고, 사랑으로 헌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10대 소녀가 친구들과 놀다가, 그만 너무 늦고 말았습니다. 친구 중에 하나가 “밤을 새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 때 “나는 10시까지 집에 꼭 가야 돼”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들이 “왜? 아버지가 그렇게 무섭니?” 하고 물었습니다. 그 말에 소녀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야, 무서워서가 아니라, 아버지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지.”
우리가 의를 행하는 것이, 하나님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해서여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 혼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해서여야 합니다. 우리가 영혼 구원의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해서여야 합니다. “여호와 치드케누”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상한 갈대도 쉽게 꺾지 못하시는, 마음 약하신 분입니다. 꺼져가는 심지도 끄기를, 몇 번이고 망설이시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 소통하기를 힘쓰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은, 나를 비우고 예수 영으로 충만할 때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코로나19로 힘든 세상입니다. 그래서 목마르고 배고픈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백신을 곧 맞을 수 있고, 치료제도 개발되고 있으니 희망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의 주관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에 희망입니다. 그렇다면 주님 앞에 오십시오.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참으로 의지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런 고백이 가능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신이 바로 나의 의가 되십니다. 당신이 나의 구원이 되십니다. 당신이 나의 희망이 되십니다.” 그때 여러분의 심령에는 세상의 그 무엇으로 대체할 수 없고 빼앗아 갈 수 없는 영원한 기쁨으로 꽉 차게 될 것입니다. 아씨시의 성자 프랜치스코도 이 예수님을 만나 더 깊은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구도인생을 위해 자신의 모든 소유를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주고 길을 떠나면서 비슷한 고백의 기도를 남깁니다. ‘나의 사랑이신 예수여, 당신은 나의 의, 나의 구원, 나의 전부이십니다. 이제 나는 당신 외에 아무것도 구함이 없나이다.’ 2천년 전 이런 목마름, 배고픔의 인생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이 예수가 오늘 여러분들의 여호와 치드케누가 되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의 이름(14) : 여호와 삼마 / 겔 48:30-35
시인이요 극작가요 문학비평가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T. S 엘리엇은,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후에 영국으로 귀화하였습니다. 덕분에 삼위일체론의 교리를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며, 오직 하나님의 신성만을 인정하는 이단 교파인 유니테리언에서, 성공회 교인으로 개종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시 한 편을 소개하겠습니다. 항상 당신 곁에 걷고 있는 그 사람은 누구요 세어보면 언제나 당신과 나 둘 뿐인데 내가 이 하얀 길을 내다보면 당신 옆에는 언제나 또 한 사람이 갈색 망토를 휘감고 소리 없이 걷고 있네 두건을 쓰고 있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간 당신 곁에 있는 그 사람은 누구요 ‘그 사람은 누구요’라는 시입니다. 엘리엇이 말한 그 사람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모릅니다. 그가 누구를 염두에 두고 그 시를 썼는지도 100%는 모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엘리엇이 나를 찾아와서 “항상 당신 곁에 걷고 있는 그 사람은 누구요”라고 읊으면, 나는 지체하지 않고 “그는 예수님입니다”라고 답할 것입니다. 엘리엇이 계속해서 “세어보면 언제나 당신과 나 둘 뿐인데, 내가 이 하얀 길을 내다보면, 당신 옆에는 언제나 또 한 사람이 갈색 망토를 휘감고 소리 없이 걷고 있네. 두건을 쓰고 있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간 당신 곁에 있는 그 사람은 누구요”라고 읊조리면, 나는 더 큰 목소리로 “그는 예수님입니다”라고 답할 것입니다. 언제나 내 곁에 계신 주님을 믿으십시오. 하여간 내 곁에 주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믿기 바랍니다.
에스겔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1-32장까지이고, 두 번째 부분은 33-48장까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첫째 부분인 1-32장까지의 메시지는 “여호와가 거기에 계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며 이스라엘이 몰락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두 번째 부분인 33-48장에 들어가면 “여호와가 거기에 계시다”는 중심 메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합니다. 이스라엘이 다시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인 32장이 끝나고 33장에 들어가면, 21절에서 결정적으로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예루살렘 성이 몰락하는 모습을 보고하게 됩니다. 21절 “우리가 사로잡힌 지 열두째 해 열째 달 다섯째 날에 예루살렘에서부터 도망하여 온 자가 내게 나아와 말하기를 그 성이 함락되었다 하였는데.”성이 함락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적의 수중에 떨어져 함락되었고, 이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 드라마의 마지막은 결코 아닙니다. 몰락과 함께 그 성을 회복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시작이 됩니다. 36:33절은 시온 땅인 예루살렘의 회복을 예언해 주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너희를 모든 죄악에서 정결하게 하는 날에 성읍들에 사람이 거주하게 하며 황폐한 것이 건축되게 할 것인즉.” 황폐하고 황무한 그 땅이 다시 건축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사람들이 다시 모여 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회개하면 회복이 이루어진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회복의 절정으로써 예루살렘 성이 다시 재건되고, 하나님께서 그 성에 충만하게 거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 도시에 새로운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 도시의 이름을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여호와삼마”라고 부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삼마”
35절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여기에서 “삼마”라는 말은 “거기”라는 뜻입니다. “여호와 삼마,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거기’는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임한 ‘새 예루살렘 성’입니다. 그런데 이 성의 이름을 그렇게 지으신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 또한 “여호와 삼마, 거기에 계시는 여호와”이십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성경에 보면 여러 하나님의 이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들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당신의 이름을 통해서 스스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스스로 계시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간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함께 살펴볼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 삼마”입니다. 여호와 삼마의 뜻은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입니다. ‘거기 계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의 다른 이름이 나옵니다. 23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임마누엘과 비슷한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 삼마입니다. ‘여호와 삼마’는 ‘여호와께서 거기 계십니다.’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무엇인줄 압니까? “God them”입니다. “God them”이 무슨 뜻이길래, 그렇게 싫어할까요? “하나님이 너를 떠나기를 원한다”는 뜻이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독실하게 믿지 않아도, 심지어 아예 믿지 않아도, 그들은 그 말을 저주로 이해합니다. 반면 그들이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은, “God with you”입니다. “God with you”가 무슨 뜻이길래, 그렇게 좋아할까요?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시기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떠나는 것이 끔찍한 저주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1985년 6월 14일, 트랜스월드항공 847기의 기장 존 테스트레익은, 자신이 모는 비행기가 테러범에게 피랍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공항에 착륙시키려고 시도했습니다. 그가 비행기를 베이루트 공항 쪽으로 접근시키자, 테러범은 그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면서,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으려고 했습니다. 성실하게 믿음 생활을 해왔지만, 그는 죽음의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죽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야. 죽은 뒤에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그러자 갑자기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음속에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이후 17일 동안, 전 세계가 847기의 피랍 때문에 경악했지만, 정작 그는 승객들과 가족의 안전에 대해서만 염려했습니다. 그는 당시 일을 이렇게 떠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죽지 않기를 원하신다면, 테러범이 나를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수류탄이 터지지 않고, 방아쇠가 당겨지지 않도록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내가 죽도록 허용하셨다면, 그것은 곧 나를 위해 마련하신 더없이 좋은 그분의 계획이었을 것입니다.”그는 여호와 삼마의 복을 누렸습니다. 그는 그토록 급박한 상황에서도 임마누엘의 복을 누렸습니다. 그는 몇 차례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승객과 승무원은 물론 자신까지 모두 무사히 구조되었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망했습니다. 135년이 지난 후, 남왕국 유다마저 바벨론에게 망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은 파괴되고, 하나님의 성전마저 무너졌습니다. 그들은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경고를 들어왔습니다. “여호와께 돌아오라. 모든 죄악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오라. 여호와께 돌아오지 않으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치실 것이다. 지금이라도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아주 망하기 전에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 숱한 경고를 전했지만, 그들은 죄의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죄의 낙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알과 아세라가 주는 쾌락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끝내 망하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망하게 하셨지만, 망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은 아닙니다. 그래서 유다가 완전히 망하기 전에, 미리 소년 다니엘과 젊은 선지자 에스겔을 바벨론에 보내놓으셨습니다. 다니엘은 궁중에서 자기 역할을 감당했고, 에스겔은 백성들 안에 거하면서 목이 터져라 여호와 삼마를 외쳤습니다. 에스겔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강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신다.’그런 이름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포로 생활 가운데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게 되었는데 바로 그 이름처럼 이스라엘을 점점 회복시켜 주시고 강하게 하시는 그 은혜를 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망에 빠져 있는 유대 백성들은, 에스겔의 예언을 믿지 않았습니다.
에스겔이 피토하는 심정으로 외치는 여호와 삼마가, 자신들을 조롱하는 소리로 들릴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젊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자기들을 이렇게 종으로 넘기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하는 마음으로, 선지자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에스겔은 그들이 던진 돌팔매에 맞아, 이마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죽었습니다. 전해지는 글에 의하면, 그는 쓰러져 죽어가면서도 “여호와 삼마”를 외쳤다고 합니다. “여호와 삼마! 여호와 삼마! 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그들은 부정했지만, 그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시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여호와 삼마는 이름입니다. 여호와 삼마는 도성 이름입니다. 여호와 삼마는 새 예루살렘 성의 이름입니다. 이 성에 이름을 붙여주신 분이, 다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을 보여주시고, 이름을 여호와 삼마로 붙여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면 이름이 주어집니다. 그걸 본명이라고 합니다. 예술가가 되어 활발하게 활동할 때 예명이 생기고, 문필가가 되어 유명해졌을 때 필명이 생깁니다. 불교에 귀의하면 법명이 주어지고, 가톨릭에서 영세를 받으면 세례명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새로 얻게 된 이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 이름이 얼마나 귀하고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이름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 이름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이름에 걸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 이름을 주신 하나님께 누를 끼치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예술가가 아니면 예명을 가질 필요가 없고 문필가가 아니면 필명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여호와 삼마라는 이름을 꼭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여호와 삼마’조금 변형을 하면 ‘그 안에 여호와께서 계신 사람’이런 뜻이 됩니다. 여호와 삼마에는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신 사람’이란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알면, 함부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자기 맘대로 살 수 없습니다. 자기 뜻대로 자기 계획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여자가 몸에 아기를 갖게 되면, 여러 가지로 조심합니다. 자기가 아무리 좋아하는 음식도, 태아에 좋지 않다면 먹지 않습니다. 자기가 시끌벅적한 곳을 좋아해도, 그게 태아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고 하면 가지 않습니다. 자기가 록음악을 좋아해도, 태아 때문에 클래식을 듣습니다. 영화도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것은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뱃속에 있는 태아를 의식해서입니다. 하물며 자기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면,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도, 옆에 누가 타느냐에 따라 신경이 쓰입니다. 혼자 갈 때야 안전을 위한 목적 외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운전을 즐깁니다. 그러나 곁에 다른 사람이 타면 조심스럽습니다. 안전뿐만 아니라, 최대한 편하게 모시려고 힘씁니다.
자기 안에 하나님이 없을 때는, 막 살 수 있습니다. 닥치는 대로 살아도, 별다른 통제를 받지 않습니다. 그건 자기가 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는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나의 왕 나의 주인이 되십니다. 그럼 우리는 성질도 죽여야 합니다. 악습도 버려야 합니다. 더러운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바울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그 안에 성령이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성령님이 내주하십니다. 문제는 그분이 어떻게 내주하시느냐 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속에 편안히 거하시게 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사용하시기에 불편하지 않아야 합니다.
“누가 주인인지 모르겠다”는 말이 있습니다. 혹시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가 그렇지 않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십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가 주인의 자리에 떡~하니 앉아 있다면, 한 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우리 집의 이름도 여호와 삼마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이 여호와 삼마로 이름 지어져야 합니다. 우리 가정을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신다면 여호와 삼마입니다. 명문가가 있습니다. 이름 있는 집안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 가정은 여호와 삼마라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가정,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가정”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우리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되고 즐거운 하루하루’세상에 이보다 좋은 이름이 있겠습니까?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이제부터 우리 가정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이제부터 내가 일하는 생업의 현장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우리가 가고 머무는 곳이 여호와 삼마로 바뀌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삼마는 교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거기 계시는 곳, 그곳은 바로 교회입니다. 요즘엔 교회 이름을 특색 있게 짓습니다. 교회명은 지역의 이름을 따 짓는 것이 제일 무난합니다. 원래 초대교회는 지역이름을 따라서 지었습니다. 하지만 지역명을 따기는 힘들 정도로 수가 많아지다 보니, 교회 이름에 설립 이념을 담아서 짓습니다. 이런 교회를 세우고 싶다는 바람을, 교회 이름에 담아냅니다. 우리 갈보리교회는 지역과 성서적인 뜻이 다 담겨있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교회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사랑이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게 교회의 본질인가요? 교회에 은혜가 있어야 하지만, 은혜가 있다고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가 행복해야 하지만, 행복하다고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가 사랑이 풍성해야 하지만, 사랑이 풍성하다고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기 거하셔야 교회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잘 지으면 뭐합니까? 하나님이 거기 계셔야 합니다. 아무리 교회가 지역봉사 잘하면 뭐합니까?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아무리 교회가 지역사회에 영향력 있으면 뭐합니까? 하나님이 계셔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헤롯 성전이, 얼마나 웅장하고 화려했습니까? 당대에 지어진 최고의 건축물입니다. 온갖 비싼 것으로 화려하게 안팎을 장식했습니다. 거기에 제사장들이 있었고, 율법학자들이 있었고,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시시때때로 드려지는 제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있어야 할 게 없었습니다. 없으면 안 되는 결정적인 것이 없었습니다. 뭐가 없었습니까? 여호와 삼마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성전은, AD 70년에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우리 갈보리교회가 여호와 삼마가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의 결론이 여호와 삼마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의 일생은 결론이 여호와 삼마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지금까지 여호와 삼마,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셨습니다. 지금도 여호와 삼마, 하나님은 이 순간에도 나와 함께 하십니다, 앞으로도 여호와 삼마, 천국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실 것이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정경주 사모가 쓴 ‘하나님이 하셨어요’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녀는 책에서 하나님의 기이한 역사와 도우심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대한항공 국제선 승무원 시절의 어느 날, 비행기가 일본 상공 위를 지날 즈음입니다. 갑자기 조종실에서 안내방송이 나왔습니다. ‘승객 여러분, 여객기 우편 날개 엔진에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승무원과 승객 전원은 비상착륙 준비를 마치고 착석해 안전벨트를 매 주십시오.’ 그때 평소 그녀의 신앙을 못마땅해 하며, 신은 없다고 떠들던 남자 승무원이 달려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으며 애원했습니다. ‘미스 정! 기도해줘요. 미스 정! 부탁이에요. 날 위해 기도해줘요.’그녀는 그와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아멘’소리가 끝나자마자, 안내방송이 다시 들려왔습니다. ‘승객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여객기 우편 날개 엔진의 원인 모를 불이 저절로 꺼졌습니다. 곧 김포공항에 안전하게 도착하겠습니다.’승객들은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그 남자 승무원인 미스터 김은, 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이 하셨어요. 하나님이 하셨어요”고백하며, 그 남자 승무원과 함께 울었다고 합니다.
에스겔서의 내용은 참으로 복잡합니다. 에스겔서에는 그 뜻을 알기 어려운 환상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상징적인 행동도 많이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을 담당한다는 뜻으로, 왼쪽으로 390일, 오른쪽으로 40일을 누워 지내기도 합니다. 머리털과 수염을 깎아, 삼분의 일을 불사르고, 삼분의 일은 칼로 치고, 삼분의 일은 바람에 흩어버리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예언활동을 하는 중에, 아내가 세상을 떠나는 일도 겪습니다. 예언의 분량도 짧지 않습니다. 48장이면 적은 분량이 아닙니다. 예언의 내용도 다양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이제부터 여호와께서 여기 계신다고 하리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복잡합니다. 날이 갈수록 더 복잡해지는 것 같기만 합니다. 신앙을 지키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거 같습니다. 그럴수록 우리의 입술에 여호와 삼마가 있어야 합니다.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여호와 삼마”하나님께서 하루 동안 나와 함께 계셨습니다. 한 달을 마치고 새 달을시작 할 때도 “여호와 삼마”하나님이 한 달 동안 나와 함께 계셨습니다. 한 해를 마치고 새로운 해(신년)를 시작할 때도 “여호와 삼마”하나님이 일 년 동안 나와 함께 계셨습니다. 일생을 마치고 천국 문에 들어설 때도 “여호와 삼마”하나님이 내 일생동안 나와 함께 계셨습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는, 1791년 3월 2일 오전 10시에 88년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열흘 전 마지막 설교를 하고, 기력이 쇠해져서 병석에 누웠습니다. 병석에서 무엇을 쓰려고 했는데, 펜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비서인 릿치 양이 ‘선생님, 무슨 말을 쓰시려 합니까? 제가 쓰지요’했습니다. 웨슬리는 ‘별로 쓸 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 밖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기도하고 찬송해 달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기도할 때, 웨슬리는 큰 소리로 ‘아멘’했습니다. 임종이 가까운 것을 보고, 사람들이 웨슬리가 누운 방으로 들어 왔습니다. 웨슬리는 사람들을 보고 두 손을 들고, ‘제일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라’했습니다. 영국 교회를 대표하는 웨스터민스터 사원에는, 요한 웨슬리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거기에 두 구절이 새겨져 있는데 하나는 요한 웨슬리가 평소 부르짖었던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는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가 임종할 때 남긴 ‘제일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임을 믿습니까? 여호와 삼마가 복입니다. 임마누엘이 최고의 복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수도사 타울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주님이 없는 황금의 천국에 가는 것보다, 주님과 함께 불구덩이 지옥에 있는 것이 더 낫소.”좀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맞는 말입니다. 찬송가 324장 작시자 블랜디도 그렇게 고백한다. 1.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려네 2. 피땀 흘린 동산까지 주와 함께 함께 가려네 3. 심판하실 자리까지 주와 함께 함께 가려네 후렴> 주의 인도하심 따라 주의 인도하심 따라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려네
독일이 폴란드에 세운 오슈비엥침(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던 곳입니다. 그 참혹한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은 눈물을 뿌리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그들의 피맺힌 절규는, 연합군이 독일을 물리치고 수용소를 탈환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드디어 전쟁이 끝나 연합군이 수용소를 점검하러 들어갔을 때, 한 병사가 한쪽 벽에 희미하게 적혀 있는 문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괴로운 시절 지나가고 땅 위의 영화 쇠할 때...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가사입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도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나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여겨질 때, 삶의 희망은 보이지도 않고, 견딜 수 없이 외로움이 밀려 들 때, 사람들에게서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조차 잊혀졌다고 느껴질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우리 인생은 때로는 그런 험난한 고난의 순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어떤 영적인 삶 속에서, 아니면 물질적인 경제 문제로 사람들이 외면하고 무시하고 그런 답답한 상황을 만나는 경우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럴 때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 삼마의 은혜입니다. 에스겔서를 통해서 마지막 절 끝나는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결론은 그 성읍에 이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남은 인생이 여호와 삼마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가정에 여호와 삼마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생업의 현장에 여호와 삼마가 있기를 바랍니다.우리교회가 여호와 삼마가 되기를 바랍니다.우리 모든 것의 결론이 여호와 삼마가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 웨슬리의 고백이 우리 고백이 되기 바랍니다. “제일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라.”죽음의 수용소에서의 한 신앙인의 고백이 우리 고백이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기에도 계십니다.” 이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이 우리 교회와 함께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이 우리 교회와 성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영원히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주만 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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