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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번제와 속죄제의 의미

by 은총가득 2021. 3. 15.

 

번제의 의미

 

 

 

 

 

 

 

 

 

 

 

 

 

 

 

 

 

 

 

 

 

 

 

번제의 신학적 의미

 

번제의 형식 : '번제'(히, 올라)는 제사의 종류중 하나로서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제물을 전부 태워 드리는 형식의 제사이다. 제물을 계층에 따라 어린 양이나 비둘기를 택하였고 의식은 제물드리는 자가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 후 성소입구 제단 북쪽에서 짐승을 잡아 각을 뜨고 내장과 다리를 씻으며 피를 뿌리고 제물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드린다(burned whole). '희생'은 보통 '속죄'를 위한 것이라 언급되어 있다(레 1:4). 그런데 '속죄'란 말은 '덮는다', '씻어 버린다', '속전하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씻어 버린다'는 현대의 학자들이 선호하는 것이며, '속전한다'는 성경에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레 17:11). 제사 의식의 모든 면들은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모두 중요한데, 희생 제물의 죽음이나 제물의 피를 뿌리거나 처분하는 일련의 의식들은 속죄함을 받는데 모두 중요했다. 대속 이론은 인격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반면, 다른 관점들은 인격적 관계를 부차적으로 생각하거나 심지어는 마술적인 차원으로 내려가는 경향을 띤다. 속죄 제물 중에 제사장이 먹은 것이 있었다는 사실이 대속 이론을 무효화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의식적으로 더 거룩한 제사장이 동물에 전가된 죄를 '흡수했다'는 것으로, 혹은 희생의 죽음이 전가된 죄를 이미 '상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번제의 기원 : 번제는 레위기의 5대 제사 가운데 가장 첫번째로 나오는 기본적인 제사이며 중심을 이루고 있다. 성경에서 기록된 번제의 최초의 기원은 창8:20절에서 노아가 드린 것이다. 물론 창4:4절에서의 아벨이 하나님께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다는 기록이 있다. 창22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고, 이삭 대신 드린 수양을 번제로 드렸다. 창46:1절에서도 야곱이 희생제사를 드리는 모습이 나온다

 

번제의 어의 : 번제는 히브리어로 '올라'로 "올라간다" "승강한다" "기어오른다" 등의 의미로 Hiphill 형에서는 "가져온다" "드린다"의 의미를 갖고 있다. 번제는 제물이 불로 태어지면서 연기로 하나님께 올라가 드려지는 것이다. 곧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 인 것이다(레1:9).

 

번제의 목적 : 번제는 자유로이 드리는 제사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 가운데 하나를 무심코 깨드린 것을 속죄하기 위한 제사인 속죄제나, 하나님의 성물이나 타인과의 직접적인 관계의 죄를 속하는 속건제와 같이 분명한 목적이 없어도 하나님께 자신 전체를 온전히 드린다는 헌신의 의미에서 바치는 제사이다. 이 제사는 소제, 화목제와 더불어 강제적인 조건 없이 누구든지 드릴 수 있는 제사이다. 이 제사 역시 일종의 속죄 제사이다(4절). 그러나 이 속죄의 의미는 속죄제나 속건제가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Keil은 이 제사가 하나님께 완전한 항복, 헌신 하나님에게 기뻐하는 삶의 행동이라고 한다. Clement과 Dillmann은 번제의 속죄가 속죄제나 속건제와 달리 더욱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죄에 대한 속죄라고 하였다. 이것은 죄를 제거하거나 인간의 죄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죄악된 인간과 거룩한 하나님의 사이의 가능한 교제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죄를 반대하는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는 것이다.2

 

번제의 방식 : 누가 - 대상:누구든지(2절), 집례:제사장(5절)
언제 - 본문 의미상으로 때가 없음
무엇을 - 생축 중에 소나 양의 수컷(2,3절)/ 새이면 산비둘기나 집비둘기(14절)
왜 - 죄를 사하기 위해서(4절)
어디서 - 잡는 장소- 회막문 앞, 드리는 장소- 회막문 앞 단/ 양이나 염소는 단 북편

 

구약 속의 번제에 대한 요약 : 번제는 구약 제사의 가장 공통적인 것이다. 이것은 주된 기능은 하나님의 진노를 달램으로서 인간의 죄를 속죄하는 것이었다. 동물의 제물에 안에서, 가장 대중적인 것은 양,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상징화되어졌고, 그 동물은 인간을 대신해서 고통을 받았다. 예배자는 동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죄를 고백함으로서 그의 죄와 죄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였다. 양은 인간의 죄를 위한 몸값으로 받아들여졌다. 성전이나 장막에서의 예배에서 매일의 희생의 관습은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끝임 없는 상기였다. 그래서 이러한 관습들은 질병이나 출생, 맹세 후 수시로 행해졌다. 제사를 드리는데 있어서 사람은 자신의 죄성과 범죄를 인정하였다. 그는 주님 안에서 그의 신앙과 과거의 은혜에 대한 감사, 그리고 그의 삶 전체에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따라 살기로 한 결심을 공개적으로 고백한다.19

 

번제와 신약과의 관계 : 신약에서 번제는 단지 두 구절에서만 명백하게 언급되었다(막12:33;히10:6-8). 이 둘은 구약으로부터의 인용이나 구약의 부연이었다. 다른 경우들에 있어서는 번제에 대한 표현은 암시적이다(눅2:24,17:14;행21:26). 이러한 지나가는 참조는 신약신학에 있어서 번제의 중요성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이것은 십자가 위에 그리스도가 자신을 희생 제물로 묘사하곤 했던 많은 표현들 중의 하나이다. 예수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왔다고 말했다(막10:45). 레위기에서 빌려온 말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고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5:2)라고 말했다. 베드로 역시 구약을 반향 하였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과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1:18-19). 히7:27에서도 구약의 제사장들은 날마다 제사를 드렸지만 그리스도는 한 번 제사를 드렸다.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G. Verme는 예수가 세상 죄를 짊어진 한 번의 참된 제사였다는 생각은 아마도 예수 그 자신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다. 일찍이 번제에 대한 유대인들의 토론에서 하나의 경우가 특별히 의미 있는 것으로 눈에 뛴다. 그것은 이삭의 제사였다.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적어도 죄의 속죄를 진정으로 지불 보증하기 위하여 제사 드려졌던 이삭의 자진하는 마음이었다. 매일의 번제와 유월절 어린양들은 하나님에게 이삭의 자신을 드림을 상기시키는 것들이었다. 하나님에 의해서 후의 제사들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의 업적들 때문이었다. 복음서들 안에서 우리는 유대교 신학에서 이삭에게 주어진 자리를 예수가 취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세례에서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cf막1:11;눅3:22). 창22:16절과 사42:1에서 문장의 혼합이다. 유사하게 세례요한도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으로서의 예수를 큰 소리로 불렀다. 요한이 유월절 양으로 언급하든 번제의 양으로 언급하든 이삭의 그것과 거의 차이점은 없다. 왜냐하면 둘 다 가장 크게 보상하는 제사의 상기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신약 신약에서 예수는 성부 하나님이 역할을 하는 동안 이삭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한 생각은 요3:16절 이나 롬8;32처럼 잘 알려진 구절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게다가 신약성경은 아주 다른 방법으로 번제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교회 안과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봉사는 제사로서 비교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13:15-17; cf. 빌4:18; 벧전2:5). 죄를 대속하는 유일한 제사는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신들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제단으로 그들의 양을 가져올 필요가 없다. 그러나 제물을 가져온다는 것은 그의 은혜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기 위한 의지를 선포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제는 동물 제사는 폐기되었다. 그들 자신에 의한 찬양과 선행은 기독교인으로서 간주되어지는 적합한 제사를 구성한다.20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번제의 의미 :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유일하게 충분한 "번제"는 한 번에 모두를 위해 드려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사를 예시했던 동물제사는 폐기되었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번제를 드릴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의 피흘림은 완벽한 몸값의 지불이었다. 그는 구약 성경에서 소들과 양들이 그리했던 것처럼 아버지의 진노를 감당하였다. 그렇게 때문에 인간의 죄를 불구하고 죄악된 인간이 하나님의 현존을 즐거워하며 그들의 기도들이 응답되어진다.


레위기에서의 법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했는가 우리를 상기시킨다. 그것들은 심각한 죄의 결과와 그것들의 확산을 우리에게 역시 상기시킨다. 죄는 오직 죽음으로만 속죄 받을 수 있다. 예배자는 그가 희생되어지기 위한 선택된 양을 위하여 돈을 지불했었을 때 매우 많이 빼앗기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물들은 그 자신의 생명 대신에 몸값으로, 대체적인 지불이라는 것을 그에게 상기시킨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는 그의 자비 안에서 한 마리 양이라는 하나의 값 싼 대안을 마련하였다. 신약 시대에는 값없는 구원이 가능해졌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번제는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는 매일 바쳐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도 매일 용서함을 위한 필요를 의식해야 한다. 예배자가 그의 죄를 고백해야 하고 그가 그의 동물을 바칠 때 하나님의 길 안에서 걸어가겠다는 그의 의지를 선포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해야 한다. 요일1:7-9절에서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서로가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번제는 정상적인 예배에서 그 날의 첫 번째 제사이다. 이것은 죄의 용서는 참된 예배의 전제가 되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오직 죄를 용서함 받은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교제를 즐길 수 있고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찬양을 드릴 수 있다.


구약성경의 희생제사의 형태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예배의 형태를 제공한다. 예배는 찬양과 간구를 시작하기 전에 죄의 고백과 그리스도의 죄 용서에 대한 주장 그리고 하나님의 섬기는 일에 전적인 재헌신과 함께 시작하여야 한다.21

 

 

레위기의 속죄제 연구 / 김의원

 

많은 학자들은 레위기를 체계가 없고 모세 당대의 기록물이 아니라 후대의 첨가된 작품으로 본다. 그러나 레위기는 단지 이스라엘 민족역사의 일부이거나 히브리 종교의 고대 제사 자료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계명의 말씀을 자기 백성에게 계시하셨던 내용이다. 그렇기에 레위기 제사신학은 자료비평에서 말하는 제사의 기원에서 출발하기보다는 모세 오경의 전체적 틀에서 보아야 하며 특히 출애굽 신학과 민수기 신학의 전후 맥락과 밀접한 상관관계에서 파악해야 한다. 이런 문맥에서 볼 때 레위기 제사신학은 출애굽 신학의 시내산 언약과 성막 건립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1. 첫 질문: 레위기에 나타난 제사에 관한 자료층 - P문서와 연대 문제

 

1.1 대부분의 학자들이 오경 내에서 창세기와 신명기를 분명하게 하나의 독립된 책으로 보고 있듯이, 레위기도 오경 내에서 하나의 구분된 책으로 볼 수 있는가? 보수주의 학자들은 성경적 보증에 따라 레위기를 하나의 구분된 책으로 본다. 렌토로프와 같은 유대학자도 랍비문헌(참. Rentorff 1966:23.)과 헬라어 '오경'이란 용어에서 교리적 보증을 찾아내어 레위기를 그 자체로 하나의 책으로 본다(Rendtorff 1996:23). 그러나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문서설에 기초하여 레위기를 하나의 책으로 보지 못하고 P ('Priestly code' or 'source') 자료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1.2 '문서설' 혹은 'Graf-Wellhausen 가설'은 지난 세기 동안 오경연구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문서설은 Astruc, Eichorn, de Wette, Graf, Wellhausen에 의해 발전되면서 J-E-D-P의 연대순서로 정착되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대부분의 레위기는 제사장 자료(P)에 속하며 P 저자들은 자연발생적인 종교를 형식화한 자들로 이를 작성하는데 수많은 자료들을 사용하였다. 그 결과 레위기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 주전 5세기 중엽 에스겔 선지자의 제사신학(참 겔44장)의 영향을 받은 P 저자에 의해 문서화된 단일 자료로 평가되어 왔다. P의 전통적 연대는 6세기 중반의 포로기로 본다.
그러나 최근 이런 공감대에 두 개의 도전이 주어졌다. 첫째, P의 연대를 포로기 이전으로 보아서는 안되는가에 의문을 갖게 되었다. 둘째, P라는 자료가 존재하였는가?

 

1.3 첫째, P의 연대는 언제인가? 레위기는 성전 제의를 기술한 것인가 아니면 단지 논리적 문서, 프로그램, 환상적인 글인가? 일부학자들에 따르면 P의 서술은 전적으로 가설적 혹은 유토피아적이다. 이상적인 제의의 이상을 가진 제사장들이 모세의 영도 하에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다는 식으로 이를 기술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레위기에 기술된 많은 제의적 절차는 본질적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변화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고 보아, 이는 실제적인 제의 관습의 변화와 발전을 대변한다고 본다. 곧 레위기의 텍스트는 실제 성전이나 성소에서의 제의활동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여기에 P의 연대를 둘러싼 여러 학설이 있다: 1) P를 포로 후기 시대로 보는 자들은 제사장적 자료들은 초기 페르시아 시기에 세워진 제2성전의 상황을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2) 만약 P가 포로기의 것이라면 이는 예루살렘의 갱신된 제의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볼 것이다. 3) 그러나 최근의 논의에 따르면 P 연대는 포로기 보다 이르다. 이런 학적 공감대를 깨트린 사람은 Kaufmann(1960:175-211)이다. 그는 P를 신명기층(D)보다 이른 포로기 이전 시기로 끌어올렸다.

 

1.4 이런 도전은 주로 두 개의 근거 하에 이루어진다. 1) 역사-비평적 방법으로 Haran(1978)이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하게 된다. 그는 40년간의 광야에서의 장막 전승을 검토한 뒤 이 전승의 상당부분이 왕정시기, 때로 초기 왕정 내지는 심지어 더 이른 시기와 실제로 관련되었다고 주장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P는 제사장직의 초기 산물이나, 제사장들의 제한된 영역에서만 보존되었으며 히스기야 시대의 실패한 종교개혁의 근거로 사용되었다고 논의하였다. 2) 최근 언어적으로 P 연대를 초기로 본다. 이 견해는 Hurvitz(1982; 또한 Zevit 1982)는 언어연구를 통해 P에 사용된 일부 용어들이 포로기 이후시기에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고 논의한다. 그에 따르면 에스겔 언어(전통적으로 포로기로 본다)를 P의 언어와 비교할 때 제사장문헌의 언어는 분명히 이르다. P의 상당히 많은 고대 형태들이 있지만 어느 것도 전적으로 후기의 것들은 없다는 것이다.


최근 밀그롬이 레위기 주석(1991)에서 이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그는 언어와 사회적 문맥을 검토한 후 레위기의 상당 부분은 후대의 편집된 것으로 제의역사의 발전을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위기에 기록된 수많은 P 규례는 큰 나라에 적합하지 않고 작은 영토에 국한된 작은 공동체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P에 전제된 작은 성전 '국가'는 페르시아의 속국인 유다가 아니고 이스라엘이 왕정이 시작되기 전 실로와 관련된 지파 공동체로 본다. 그는 레위기에 서술된 제의는 제2성전과 관련되었다기보다는 제1성전 보다 앞선 것으로, 예루살렘 성소가 설립되기 전의 실로에서 수행된 것을 주로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밀그롬의 논의에 많은 학자들이 따르고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학자들이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이런 논의는 계속되고 있을 따름이다.

 

1.5 둘째, P 문서가 실제로 존재하였을까? P 연대의 재구성을 둘러싼 논의의 초점에는 오경에 P가 하나의 독립된 문서로 있었는가에 있다. 독립된 P 문서 개념에 대한 최근의 도전은 두 개의 형태로 나타난다. 1) 첫째, 최근 일부 학자들은 문서설에 근거하여 오경의 많은 자료들이 벨하우젠의 주장보다 더 후대의 것으로 보고 있다. 2) 둘째, P의 옛 공감대에 대한 또 다른 도전은 문서설로 보지 않고 특별한 특징을 지닌 편집층으로 보는 것이다. 문서설 전체를 의문시하여 Rentorff(1977)는 J-E-D-P 각 문서들 사이에 원래 구분되었다고 보았던 일련의 자료들이 그 자체로 전승과 통일성을 지닌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P를 독립된 문서가 아닌 전승의 하나의 편집층으로 보았다. 또 크로스는 P가 독립된 문서라기보다는 일련의 편집과 JE의 보완으로 본다.


Whybray(1987)은 오경과 관련하여 자료비평과 전승사 비평의 제안들은 부적절하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Rendtorff와 Van Seters의 논의를 힘입어 기록된 문서들이 복사되고 하나로 묶어졌나를 묻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그는 오경도 여러 자료(구전 혹은 문서)를 사용하여 기록하였으나 그 자체로 전체로 읽어야할 Herodotus의 글과 비교할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참. Whybray, 1995). 헬라 역사가는 일부 기록되고 일부 구전으로 주어진 많은 자료들을 사용하였으나 이를 그냥 꿰매어 놓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를 소화하여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을 담아 새롭게 구성하였다. 문서설에서 주창하는 것처럼 헤로도투스의 자료들을 여러 개의 자료층으로 구분해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는 문서설에서 제안하는 것처럼 이를 구분해내기에는 너무 재구성되었다고 한다.

 

1.6 Rendtorff(1985:4)는 레위기 주석에서 분명한 해석학적 원리를 제시하였다. "텍스트의 전 단계의 '재구성'은 ... 대부분의 경우 매우 억측이다. ... 여기에 사용된 해석학적 원리는 현재 주어진 성경의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이 주해의 주된 임무이다." 최근 학자들은 레위기를 포함한 오경의 문학적 통일성을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Radday (1982:480-481)는 컴퓨터로 언어통계적으로 연구하여 "문서설은 제거되던가 적어도 철저하게 개정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 예를 들면 D. Hoffman, W. H Gispen, R. H. Harrison과 S. R. Kuelling과 같은 학자들은 오경의 자료들은 마지막 형태가 아니더라도 모세에게 돌려야 한다는 전통적 견해를 고집한다. 한때 학자들은 자료비평으로 레위기를 수평적으로 조각내어 자료들의 층으로 여겨 잡다한 것들의 체계없는 구성물로 보았다. 그러나 이제 문학접근법을 통해 레위기를 완전히 구도화되어 저자가 의도를 갖고 체계있게 저작되었다고 여긴다. 해석자들은 이 책의 단계와 연대가 어떠하든 성경의 마지막 형태를 연구의 주된 논의로 삼아야 한다.

 

2. 둘째 질문: 레위기는 오경기사의 연속인가 아니면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책인가?

 

2.1 레위기는 모세 오경으로 알려진 "토라"의 다섯 책 중 중간에 위치한 책으로 오경 내에서 하나의 문학적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 오경은 모세를 중심하여 크게 두 개로 나뉜다: 창세기와 출애굽기-신명기. 창세기는 모세 이전 시대, 즉 모세의 이야기를 위한 서론에 해당된다. 반면 출애굽기-신명기는 모세의 시대, 즉 모세의 일대기가 본문의 이야기의 틀로서 모세의 탄생 보도(출1장)로부터 시작하여 모세의 죽음보도(신34장)에 이르는 기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출애굽기-신명기의 구조는 Knierim(1985b:396)이 지적하였듯이 두 곳의 특정한 지점-시내산과 모압-을 축으로 해서 짜여져 있다. 모세 기사를 두 지점을 축으로 하여 볼 때 출애굽기-신명기 본문은 애굽에서 해방으로부터 시내산에 이르는 이주(출1:1-민10:10)와 시내산으로부터 모압에 이르는 이동(민10:11-신34:12)으로 구분된다.


이 구도의 핵심은 시내산 단락(출19:1-민10:10)으로 출애굽 기사(출1-18장)와 광야유랑 기사(민10:11-36:13) 사이에 끼여 있다. 곧 a. 시내산으로의 여행(출1-18장), x. 시내산 단락(출19-민10:10), a'. 시내산에서 모압으로의 여행(민10:11-36:13). 시내산 단락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장막을 치고 머무름"(출19:1-2)과 "장막을 걷고 떠남"(민10:11-12) 사이에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처럼 시내산 단락은 시내산 앞 장막을 치고 머물고 있었던 기간에 일어났던 사건을 보도한다. 시내산 단락에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밑에 머물면서 경험하였던 여러 가지 사건들이 소개되어 있다. 즉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과 계약을 맺는 일, 성소-회막을 짓는 일, 제사를 드리라는 규례들, 정 부정에 관한 규례들, 성결해야 될 것을 강조하는 규례들이 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레위기의 내용은 시내산 언약 전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2.2 시내산 단락은 연대기적 어구를 통해 하나의 통합된 단락을 구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연대기적 어구(백성들은 출애굽 첫 해 "제삼월"에 시내산에 도착하였으며 [출19:1], "제이년 이월 이십일"[민10:11]에야 이곳을 떠난다)는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2년 동안 머물면서 율법과 장막에 관한 말씀을 청취하였음을 말해준다.
시내산 단락은 크게 출19:3("그리고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갔다[ ]...여호와께서 '산에서' 모세를 부르셨다[ ]")의 표현을 통해 출19:1-2 // 출19:3-민10:10으로 나눌 수 있다. (출19:3a)라는 동사를 통해 이제까지 수평적으로 이동하였던 모세가 산에 오르는 사실을 언급 할 뿐 아니라 라는 동사를 통해 산 위에 계신 여호와께서 산아래 있는 모세를 큰 소리로 부르셨다고 한다. 이제 3a 이후의 사건은 더 이상 이주여정이 아니고 정주 기사임을 암시하여 새로운 단락이 시작되었음을 말해준다. 이제까지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백성들을 시내산으로 인도하셨던 여호와께서 이제 시내산 위에 거하시면서 모세를 부르시고 백성들에게 언약의 말씀을 주신다.


다시 시내산 단락은 출19:3-40:38 // fp1:1-27:43 // 민1:1-10:10으로 삼분된다. 레위기의 첫 글자 (와우 미완료 연속법)는 앞 절, 출40:38과 직접 연결됨을 표시한다. 그러나 레위기는 단지 출애굽기의 연속만은 아니고, 출19:3-민10:10을 가르는 분수령이다. 왜냐하면 레위기는 '부르시다'라는 동사와 더불어 여호와의 새로운 거주 장소, '회막'을 언급한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 모세를 부르시고." 시내산에 거하시던 하나님이 이제 회막에서 말씀하신다. 레위기 1:1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장소의 변화를 강조한다. 이전(출19:3-40:38)까지는 여호와께서 산에서 말씀하셨으나, 이제부터 회막에서 말씀하신다(레1:1-민10:10). 앞선 모든 사건들은 산에서 듣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하고 있다면 레1:1-민10:10은 성소, 곧 회막에서 듣는 여호와의 말씀이다. 다시 민수기 저자는 동일한 여호와께서 시내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신다고 전한다(민1:1). 이는 레1:1과 더불어 두 개의 병행된 구조적 지시를 나타냄으로 레위기를 하나의 책으로 묶어 놓고 있다(참. Smith 1996:19). 여기에 분명하게 레위기는 민수기나 출애굽기에 속하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레위기의 끝이 분명하게 밝혀져 있다.


요약하면 출애굽기 후반부에 장막이 어떻게 먼저 세워지고 민수기 전반부는 이를 분해하여 이동하는 것을 준비시키기 위한 준비를 언급한다. 이 둘 사이에 있는 레위기는 처음에 세워진 장막에서 하나님이 주신 법규들을 보여주고 있다. 시내산 단락의 이런 두 구조는 하나의 근본적인 신학적인 프로그램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이 두 곳-산과 회막-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다는 사실은 과거의 모든 사건들은 산에서 이루어졌으니 이제부터 모든 것이 회막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여기에 레위기의 모든 가르침들이 시내산 단락, 아니 전체 오경의 핵심임이 드러난다. "시내산 단락은 레위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책은 오경의 중심이다"(Knierim 1985b: 405).

 

3. 셋째 질문: 레위기 통일된 구조에 대한 질문

 

3.1 성경을 자료층으로 보아 세분하였던 학자들의 주장을 살피면 레위기 구도 연구에 공통된 견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학자들에 따라 텍스트를 개념론적/주제로 작은 단락으로 나누는데 그 숫자가 2, 4, 5, 6, 7, 8, 9이나 11개 등으로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나 있다(참. Warning 1997:16). 그러나 최근 몇몇 학자들은 오경의 세 번째 책인 레위기를 면밀하게 구성된 통일된 작품으로 본다.

 

3.2 여러 학자들이 본 레위기의 통일된 구조들
(1) Bullinger, ed., The Companion Bible (Reprint 1974)

(2) 더글라스(1993:3-23; 1996:239-256)의 구도: 그녀는 레위기의 시적 구도와 그리스 고전에 나오는 환(環) 구조(ring composition)에 비교하였고, 환 구조를 "전체를 통합시키는 포괄적인 병행법"(1993:10)이라고 정의하였다. 27장을 빗장으로 19장을 중간점으로 1-18장과 20-26장이 서로 면밀하게 대칭을 이루는 것으로 보았다.
(3) Smith(1996:19)의 구도: 그는 레위기의 큰 단락을 7개의 부분으로 된 구조를 보여준다고 한다(1996:22): 법규(1-7장), 기사(8-10장), 법규(11-15장), 기사(16장), 법규(17:1-24:9), 기사(24:10-23), 법규(25-27장). 그의 주장의 특징은 레16장을 '기사'로 본 점이다. 그는 '본토인'과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16:29)의 언급을 레16장과 이방인과 본토인의 동동성을 언급한 기사체인 24:10-23 사이의 연결로 해석한다.

 

4. 레위기에 나타난 속죄제

 

어느 구도를 취하든 많은 학자들은 여러 종류의 제사규례를 다루고 있는 레위기 1-7장을 하나의 단락으로 본다. 레위기 4:1-5:13에서 '하타아트'( , 속죄제)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성경 전반에 걸쳐 고대 이스라엘 종교상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문제이다.

 


최근 '하타아트'의 개념이 정결제인 아니면 속죄제인가, 또 성소만을 정화시키는가 아니면 죄인의 개인적 속죄도 포함되는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 한때 학자들은 속죄제는 개인의 죄를 속하기 위해 유용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속죄제에 대한 해석에 강하게 반대한 사람은 밀그롬이다. 속죄제의 피는 "예배자로 인하여 성소에 부착된 불결을 정화시키기 위해 제사장에 의하여 사용되는 제의용 세척제이다"(Milgrom 1976:392). 만약 '하타아트'의 피가 성소의 불결만을 정화시키고 제사를 드리는 개인을 속죄하지 않는다면 신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대속에 관한 교리가 문제가 된다. 성경은 "인자의 온 것은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고 말한다. '하타아트'는 속죄제는 개인의 속죄를 성취시킬 뿐 아니라 성소를 정화시킨다. 이런 해석적 차이의 주된 논점은 속죄염소 제의에 대한 해석에 달려 있다.

 

4.1 최근의 논의
밀그롬은 '하타아트'를 정화제라고 번역하여(1971:237). '하타아트'의 번역을 "속죄제"로 하는 것은 문맥상으로나 형태론적으로나 어원학상으로 부정확하다고 주장한다(1982:67-69; 1971:237-239). 그는 이 제의에서 죄라는 개념을 부인한다. 그는 죄를 성소에 '자석처럼'(magnet-like) 달라붙어서 더 이상 하나님을 그곳에 계실 수 없게 하는 독기로 보았다. 이를 정화내지는 제거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은 '하타아트'의 피를 드린다. 그는 어원연구를 통해 kipper 동사의 기본적 의미를 '지운다, 정화한다'로 해석하였다.


밀그롬은 '하타아트'를 속죄제로서 예배자의 죄를 속하는 것이 아니라 피를 바르는 대상 즉 성소와 성물을 정화시키는 정화제라고 주장한다. 그의 논지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하타아트'의 피는 결코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고, 성소, 성소 기구와 번제단에만 국한되어 사용되었다(예. 8:15). 이는 kipper가 사람을 직접 목적어로 취한 적이 없고 다만 제단이나 성전과 같은 물건에 국한된 사실에서 확증된다. 후자의 경우 이 동사는 직접 목적어와 전치사구를 취할 수 있다: 직접 목적어를 취할 경우 정화되어지는 것을 표시하고, 전치사구(`al, 혹 be)를 취하면 정화가 집행되는 장소를 표시한다. 그러므로 밀그롬은 생각하기를 성전 정화(kipper)는 문자적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한다: 이는 휘장 앞 바닥 위(on, `al), 향단 위, 속죄소 위와 지성소 안(be)에서 일어난다. 대속죄일에 방 전체가 정화되어진다(예. 출30:10; 레6:23; 16:14, 18-19). 2) 죄의 종류에 따라 오염되는 장소의 차이가 있다. 개인의 비고의적인 죄는 제단을 오염시키고, 회중이나 제사장의 비고의적인 죄는 성소(향단)를 오염시킨다. 고의적인 죄는 가장 큰 죄로서 지성소(법궤)를 오염시킨다(1976a:390-399; 1976b: 333-337; 1983:75-84). 비고의적인 죄는 죄인이 죄를 회개하고 정화제를 드려 제단과 성소의 오염된 것을 씻을 수 있으나, 고의적인 죄로 더럽혀지는 지성소는 아무도 회개하지 않아 오염된채로 방치되었기에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 희생짐승의 피로 오염을 씻어낸다. 3) 제사는 개인의 속죄를 위해 요구되지 않는다. 개인의 육체적 부정일 경우 물로 제거할 수 있다(레15:8; 참. 12:6-7, 8; 14:9, 20). 개인적 정화는 회개를 통해 성취될 수 있다. 무고한 죄, 무지와 태만의 원인들이 사람 내부에 있다고 보았기에 정화는 본질상 내적이고 영적인 것이어야 한다(Milgrom 1976c:3-12). 죄인이 정화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죄를 고백하고 뉘우치는 일뿐이다. 죄인이 제물을 준비해서 제사장에게 정화제를 드리는 것은 죄인 자신을 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성소 오염을 정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그는 하타아트는 죄의 속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정화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타아트'가 정화시키는 것이 성소만으로 볼 때 문제가 된다. 밀그롬에 따르면 '하타아트' 제물을 가져오는 죄인은 죄가 나쁜 부정의 원인이지만 자신이 제의로 깨끗케 되지 않고, 오히려 그의 뉘우침과 회개만으로도 개인적 정화는 충분하다는 것이다. 밀그롬은 구체적 제의에서 영적 과정을 분리시키는데 이같은 주장은 잘못이다. 성소의 정화뿐 아니라 죄인의 개인적 정화도 '하타아트' 제의에 포함되어야 한다.


밀그롬의 이런 주장에 강하게 반박한 사람은 Zohar(1988)이다. 그는 희생제물의 피 가운데 가장 적은 양만이 성소로 가져가고 사체는 외부에 남겨진다는 관찰에서 시작하였다. 피를 '제의용 세척제'로 보아, 부정으로 야기된 오염을 제거하는 힘을 가졌다면, 피가 정화하는 큰 힘을 가졌는가? 또 동물의 피와 사체는 부정하게 되어 이를 만지는 모든 자를 오염시킨다고 하는데(예. 레6:27-28), 만약 성소가 부정의 유일한 장소라면 어떻게 제사용 짐승의 '고기'와 (성전 정화에 사용되지 않은) 피의 나머지도 또한 오염되어지는가? "어떻게 그리고 왜 오염이 내적 성소에서 바깥에 있는 사체로 껑충 뛰어 오를 수 있는가"(Zohar 1988:612)?


조할의 논지(1988: 165ff.)는 다음 두 개로 요약할 수 있다: 1) 부정은 '하타아트' 짐승의 살과 피에 존재하고 있는데, 이는 성소에 피의 일부분을 뿌린 결과가 아니고 그 단계 이전에 배경으로 주어진다. 만약 부정이 성소의 짐승에게서 오지 않으면 어디서 기원하는가? 부정(죄)은 성소의 정화가 되기 전에 시점에 사체와 피에 옮겨져야 한다. 분명한 원천은 죄인 자신이다. 그는 짐승의 사체와 피는 예배자가 짐승에게 안수를 거행할 때 오염되었다고 제안한다. 곧 부정이 죄인에게서 희생제물로 전이되는 방법과 시점에 관심을 가졌다.


① 죄인은 짐승을 조달하여 머리에 손을 얹음으로 자신의 죄-오염을 전가시킨다.

② 다음에 짐승은 죽임을 당하고 관심은 이제 죄-오염이 피에 주어진다. 죄인은 자신의 죄를 후회하고 부정이 제거되기를 바라며 피가 죄-오염을 갖는다고 본다.

③ 다음으로 죄인은 하나님에게 와서 용서를 구하여 후외와 죄의 분리를 보여야 한다. 만약 죄가 밀그롬이 말하는 '자석과 같이' 성소에 부착되는 오염이라면 제의용 세척제로 씻어내면 될 것이다. 그러나 제사를 드려 적절한 곳에 피만 뿌리면 자동적으로 제거되는 마술적인 것이 아니고 피에 옮겨진 죄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속죄가 이루어진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제거한다.


2) 조할은 이같은 결론을 위해 대속죄일의 속죄염소 규례를 활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죄인에게서 제사용 짐승에게로 전이되는 방법이나 순간을 밝혀낼 수 있다. 첫째 대속죄일은 그런 전이의 분명한 모습을 보여준다: 대제사장은 [속죄]염소 머리에 손을 얹음으로 백성들의 모든 죄를 염소에 놓는다. 그러나 안수의 유사한 행위가 (설명이 없이) 하타아트[속죄제]에 지시되었고 실제로 모든 제사에게 그렇다 .... 적어도 하타아트 문맥 자체에서 손을 얹음은 기초적으로 대속죄일 [속죄양] 제의에서와 같은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Zohar 1988:612-3). '하타아트' 제의에서 손을 얹는 일은 기본적으로 대속죄일에 행한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는 죄-오염을 사람에게서 짐승에게로 전이시키는 것을 표시한다. 오염이 짐승에게 전가될 때 죄인 자신을 오염시켰던 것처럼 짐승도 오염시킨다. 즉 죄는 짐승 전체에 들어가 이를 오염시킨다. (손을 얹음으로) 오염을 짐승에게 전달하는 방법 뿐 아니라 영적 본질을 전가하는 방법이 다른 문맥에서도 발견된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신34:9).


속죄제의 의미를 둘러싸고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이 주어진다. 1) 속죄염소 제의를 '하타아트'의 의미를 규명하는데 파라다임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 2) 두 손을 머리에 얹는 속죄 염소 제의는 한 손만을 사용하는 '하타아트' 제의와 다른가? 전자의 질문에 관하여 많은 학자들은 속죄양 제의를 유대교 밖 이교적인 것으로 보아 레위기 신학을 대변할 수 없다고 한다(Kaufmann 1960:114; Noth 1965:124; de Vaux, 507-508; McLean 1991:351ff.).이뉴는 '아사셀'을 고유이름, 곧 광야의 약령으로 간주하여 공동체의 죄를 속죄염소에게 전가한 뒤 메신저는 속죄염소를 예루살렘에서 광야로 끌고 가 그곳에 거하는 '아사셀'에게 버린다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 일부 학자들은 희생제물의 머리에 얹은 손이 하나와 두 개 사이의 차이점을 구분하여 대속죄일의 제의에 나타난 죄의 전가로서의 개념을 속죄제에 적용시키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뒤에서 다루겠지만, 레위기 16장의 구도를 살펴 볼 때, 속죄염소가 광야로 보내어지는 것이 일종의 속상적 제사로서 악령에게 드려진 것으로 생각되지 않으며, 면밀하게 구성된 병행법을 통해 '하타아트' 제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둘을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3) 레위기 16장을 살피면 또 다른 문제가 대두된다. 대속죄일에 두 마리 속죄염소가 각각 여호와와 '아사셀'에게 보내어지는데, 이를 두 개의 다른 악을 제거하기 위한 두 개의 다른 제의인가 아니면 한 제의에 대한 두 국면을 강조하는 것인가? 일부 학자들은 대속죄일의 제의를 두 개의 다른 악을 제거하기 위한 두 개의 다른 제의로 해석한다. '하타아트'로 사용된 첫 염소는 성전에서 오염을 정화시키고(레16:16), 두 번째 염소-속죄염소-는 백성들의 '고의적 범죄'를 제거한다(레16:21). 그는 두 개의 다른 제의로 해석하여, 레16:20에 '하타아트'로 드려진 염소의 기능이 속죄염소의 것과 대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4.2 레위기 16장 연구

4.21 레16장의 문학적 구도를 살펴보면 다양한 단락이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차대구와 동의적, 반의적, 종합적 병행법이 전 장을 통해 드러나 있다. 이 장을 읽으면 역사적 배경(1-2절)과 결론적 어구(34d)가 문학적 봉투를 형성하여 16장 전체를 하나로 묶고 있다. 모세는 여호와의 명을 받아 무엇인가 해야했으며 마지막에서 명하여진 것을 정확하게 행하였다. 16장은 5개의 단락으로 나뉘어지며 각 단락은 잘 구조되어 있다. 1) 3-5절, 서론; 2) 6-10절, 첫 전개; 3) 11-22절, 두 번째 전개; 4) 23-28절, 결론적 제의적 행위들; 5) 29-34c, 제의의 제도화.


또 일련의 행위들이 어떻게 도입되고 종결되는가를 16장 전체가 통합되었음을 알 수 있다. 1) 번제: 3절, 5절에서 시작되었고 별다른 언급이 없다가 24절에 끝난다. 2) '아사셀' 염소: 5절에 소개되고 구체적인 염소 선별은 10절에 기록되었다. 손을 얹고 죄를 전가시키고 이를 광야로 보내는 일은 20b-22절에 나타난다. 3) 속죄제: 3절에 소개되고 희생제물은 6절에 제시되고 11절에 죽이고 피 처리는 14절에 기록되었으며, 기름을 불태우는 것은 25절에, 마지막으로 27절에 제물의 고기를 처리하는 일로 종결되었다. 4) 백성들의 속죄제: 이것이 소개되고(16:5), 여호와께 드려지며(16:9), 죽이고, 피 처리가 수행되고(16:15), 기름이 불태워진 뒤(16:25), 마지막으로 고기 처리를 다룸으로 종결되어진다(16:27).

 

4.22 서론(3-5절): 이 단락의 구조는 용어 '하타아트'와 '번제'의 반복에 기초하여 종합적 병행법을 통해 아론의 '통과제의'에 필요한 기본적 요소를 정의한다.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가지 위한 준비로 목욕을 하고 특별한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또 모든 제사를 끝낸 뒤에 다시 대제사장은 특별한 옷을 벗고 목욕을 하여야 한다(23ff). 목욕과 이런 종류의 옷은 대속죄일에 '통과제의'에 직접 관련되어 있다. '통과제의'는 특별한 수의 제물을 드려야 한다. 먼저 아론을 위한 속죄제물과 번제물이 언급되었고 뒤이어 회중을 위한 속죄제물과 번제물이 언급되어 각각 병행을 이룬다. 또 5절에 회중을 위한 속죄제물로 수염소 둘과 번제물로 수양 하나가 도입되는데, 수염소 둘은 속죄제물('하타아트')이란 용도로 지적되었다.


4.23 첫 번째 전개(16:6-10):

이 단락은 서론(3-5절)에서 다루었던 아론과 회중의 속죄 제물이 반복되면서 약간 상세하게 다루어진다. 곧 아론을 위한 속죄제사를 언급한 뒤에 곧이어 회중을 위한 속죄제사가 함께 언급되었다. 이 단락은 정확한 교차대구로 구성되어 있다. 교차대구의 시작과 끝은 두 개의 정반대 개념으로 윤곽을 이룬다. 하나는 여호와께 보내어지고 다른 하나는 멀리 보내어지는데 좀 더 낳게 표현하면 여호와께로부터 영구적으로 분리되게 한다. 교차대구 단락들에서 6, 10절은 동사 를 갖고 있다. 10절에서 은 해석하기 어렵다. 이 경우 전치사는 수단을 의미하여 "...으로"(by means of) 번역되어야 하며 이 어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지워 광야로 보내어짐으로 이를 통해 속죄가 시행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Peter-Contesse, 253-254). 이 구도의 절정은 교차대구 중심에 있는 병행법에 있다(8절). 병행법은 여호와와 관련하여 두 번 사용되고 아사셀과 관련되어 두 번 사용된 이란 용어로 만들어진다. 5절에서 도입된 두 염소들은 이제 구분되고 각각에게 구체적인 기능이 부여되었다.


여기에서 두 염소의 기능에 대한 여러 해석들이 있다. 두 염소 모두 '하타아트'를 구성하는가(예. Snaith 1977:112)? 아니면 8절에 따라 여호와를 위한 염소만이 '하타아트'인가(Rodriguez 1979:113; 참. Gorman 97)? 5절에서 두 염소는 '하타아트'로 드려지도록 지정되었기에 구분되지 않고 계속하여 '하타아트'로 보아야 한다(Kiuchi, 148-149). 첫 전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여호와께 드릴 염소와 '아사셀'에게 드릴 염소를 선별하는 제비뽑는 일이다.


해석의 초점은 '아사셀'이다. 교차대구 중심에 여호와와 '아사셀'이 놓임으로 많은 학자들은 '아사셀'을 여호와와 병행된 인격체로 해석한다. 곧 그들은 서로 정 반대로 보이는 다른 영역에 거한다고 본다. 여호와는 그의 백성들과 함께 거하나 '아사셀'은 진영 밖 광야에 위치한다. 그러나 필자는 '아사셀'을 여호와와 대칭되는 인격체로 보기보다는 '가는 염소'로 해석하려 한다. 오히려 염소는 '가는 염소'라는 의미로 단지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영역으로 쫓아냄으로 부정이 확산되지 않도록 하였다. 여기서 대칭되는 것은 여호와께로 드려지는 염소와 밖으로 가는 염소이다. 한 염소는 속제죄로 드리고(9절) 다른 한 염소는 "산 대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 광야로 보낼지니라"(10절). 제비로 다른 역할을 맡는 염소를 구분하는 것은 대속죄일의 주된 요소로서 서로 상호적으로 배타적 역할을 하게 한다. 곧 이 둘은 하나의 제의로서 기능상의 차이를 언급할 따름이다. 두 염소 모두 속죄와 관계된 것으로, 전자의 염소는 정화용이고 후자의 염소는 제거용이다(Rodriguez 1996:274, n.10).


속죄제를 통하여 성소의 부정을 정결케 하는 것과 살아있는 염소를 통하여 백성들의 죄를 정결케 하는 것의 구분은 현재 형태인 레16장의 텍스트에 나타나지 않았다(Rodriguez 1996:286). 이는 두 개의 제의로 해석하기보다는 한 제의의 강조점의 차이로 보아야 한다. 두 염소 모두 회중들의 죄를 정화내지는 제거하기 위함이다. 레위기 16장의 구도를 살피면 속죄염소 제의를 이교적인 것으로 구분되기보다는 병행법을 통해 '하타아트' 제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이 둘을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4.24 두 번째 전개(16:11-22)

이는 16장의 중심 단락으로 여기에 대속죄일 제의가 상세하게 묘사되었다. 이 단락의 구도는 기본적으로 교차대구이다. 서론에 언급된 순서대로 아론의 속죄제를 언급하고 뒤이어 회중이 드리는 속죄제 가운데 여호와께 드려지는 부분을 말한다. 각각 피의 처리를 언급하면서 문학적 구도를 사용하고 있다. 단락의 중심에 있는 C행은 이 단락 뿐 아니라 이 장 전체의 중심이다. 여기서 속죄일에 시행되는 제의들의 중심을 다루고 있다. C는 다시 3개의 주된 단락으로 나뉘어진다: C1(16절)은 병행을 통해 성소와 회막이 속죄되며, C2(17절)은 병행을 통해 아론과 그의 가족, 그리고 회중의 속죄된다고 말한다. C3(18-19절)는 교차대구법을 통해 소와 염소의 피로 성소와 제단이 정화되어진다고 말한다. 반면에 C'(20a)는 앞서 말한 것을 요약하고 새로운 전개를 도입하는 전환적 구절이다. 그래서 새로운 요소를 도입할 필요가 없다.
B'행은 20b에서 시작한다.

 

처음에 염소는 아론에게 가져온다(B1); 이 단락의 말미에 있는 B1" 밑에 이것은 광야로 보내어진다. 첫 교차대구 중앙(B3)에 고백이 주어져 이 문학적 구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이미 첫 교차대구에 포함된 것의 발전인 둘째 교차대구에서 중심(B2")에 죄를 짊어지고 광야로 가는 염소에 대한 묘사로 차 있다. 두 개의 교차대구는 다르나 서로 보완적 개념을 강조한다. 첫 것은 손을 얹고 고백의 행위를 통해 염소에게 죄의 전가의 개념이 중심적이고, 둘째 것은 그 강조를 광야로 가는 염소를 통해 죄의 제거에 둔다(Rodriguez 1996:280). 전이하고 제거하는 두 행위는 '제거제의'(elimination rite)의 본질이다. 염소를 광야에 보내는 것은 제거제의의 종결을 의미한다. 여기서 죄와 부정은 제거되어 여호와와 완전히 무관하게 된다.


일부 학자들은 희생제물의 머리에 얹은 손(B2)이 하나와 두 개 사이의 차이점을 구분하려 한다. 구체적으로 두 손을 얹는 일을 보고하는 텍스트에 따르면 이 행위는 권위(신34:9) 혹 죄(레16:21; 참. 24:14-15)와 같은 것을 한 생명에서 다른 생명으로 전이하는 것을 표시한다: "아론은 두 손으로 산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고하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레16:21). 이와 대조되어 속죄제의 경우에는 한 손만이 사용되었다(예. 레1:4; 3:2, 8, 13; 4:4, 24, 29, 33). 그러나 한 손 혹은 두 손을 사용하는 것의 차이는 전혀 공통점이 없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정도'에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Zohar 1988: 613, n. 24). 레위기 16장을 보면 제비는 어느 것이 성전 정화에 사용되고 어느 것이 백성들의 죄를 제거하는데 사용되느냐를 결정짓기 위해 사용되기에 두 염소 모두 제사적 관점에서 보면 흠이 없다: 제비를 뽑기 전에 어느 것이 여호와께 드려지는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제의적 관점에서 이 둘은 동일한 성격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염소는 동일한 성격을 가지며, 한 손으로 안수하는가 두 손으로 안수하는가는 동전의 앞뒤면과 같다. 전자는 정화제의의 면을 강조하고 후자는 제거제의의 면을 강조할 따름이다.

 

5. 결론

 

레16장의 현재형태에서 이 장의 내용, 구도, 목적을 파괴함이 없이 속죄일의 전체 사역들 중에서 이 제의들을 구분해내는 것은 실제 거의 불가능하다. 이 장 초두에 뒤에 세부적으로 전개될 것의 짧은 요약이 있으며, 뒤 부분은 요약에 사용된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고 또 새 요소를 도입하고 있다. 레16장은 두 개의 속죄제물과 함께 수행되는 여호와께 드려지는 정화용 제의와 광야로 보내는 제거용 제의를 잘 균형잡힌 개념적 대칭으로 기록되었다. 대제사장은 자신과 백성들을 위해 성소에서 죄와 부정을 제거하는 정화제의를 수행하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며 광야로 보내어지는 염소를 통해 죄와 부정들을 진영에서 제거한다. 곧 광야로 보내어지는 염소에 놓인 죄와 부정은 정화용 제의를 통해 성소에서 제거된 모든 백성들의 모든 죄/부정이다(Rodriguez 1996:286). <글: 김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