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이름(6) : 엘샤다이 / 창 17:1-8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을 세우실 때, 반드시 수반되는 세 가지 중요한 시기가 있음을 성경에서 자주 봅니다. 그것은 하나의 공식과 같은 것입니다. 먼저는 꿈, 약속입니다. 그 다음에 골짜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약속에 대한 성취입니다. 꿈이 있고, 골짜기가 있고, 그 다음에 성취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식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약속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비전을 주시고 소원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꿈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 사람으로 하여금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게 하십니다. 거기서 좌절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절망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오랜 침묵의 시간이 흐릅니다. 바로 이 골짜기에서 하나님은 그 사람을 당신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식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요셉입니다. 그는 17세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큰 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13년 동안 어두운 골짜기를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어 꿈을 이루었습니다. 그와 같은 모습들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다루시는 모습에서도 잘 볼 수 있습니다.
케네스 E. 해긴이란 분이 있습니다. 그는 1917년 8월 20일 텍사스 주의 매킨리에서 기형 심장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는 뛰지 못했고 빠르게 걷지도 못했습니다. 15세에는 완전히 침대에 누웠고, 몸은 거의 마비가 되었고, 의사로부터 죽음을 선고받았습니다. 마음에 죽을 준비를 하고 있던 중에, 믿음으로 이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막 11:23-24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그때 케네스 해긴의 나이가 17세였고, 하나님의 극적인 치유를 받은 후, 70년간 왕성하게 사역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가 책을 썼는데 책 이름을 ‘충분하고도 넘치는 하나님 엘 샤다이’라고 했습니다.
“엘 샤다이”란 하나님의 이름은,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이름이 또 있습니다. 여호와 이레입니다. 여호와 이레는 하나님의 이름 강해 1번으로 살펴봤습니다. 하지만 시간적으로는 엘 샤다이가 여호와 이레보다 앞섭니다. 엘 샤다이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겠다는 약속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여호와 이레는 이삭을 제단에 바치는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 하나님보다, 엘 샤다이 하나님을 먼저 만나고 체험한 셈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99세 때에는 엘 샤다이로 당신을 보여주셨고, 십몇 년이 흐른 후에는 여호와 이레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엘 샤다이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분위기(아우라)가 느껴집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나이가 되도록 자녀가 없었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울타리입니다. 물론 자녀가 어릴 때는, 부모가 자녀의 울타리입니다. 그러다 부모가 나이가 들면, 자녀가 부모의 울타리가 되어줍니다. 하나님은 울타리도 없이 사라와 덩그러니 살아가는 75세의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창 12:1-4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모태신앙도 아닌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난 점은, 위대한 결단이자 순종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아브라함의 모습은 조금은 실망스럽습니다. 오락가락한 면을 보이고, 믿음도 불안 불안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간섭이 없었다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열심이 빚어낸 작품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작품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이 정도 목사라도 된 것은, 하나님의 열심 덕분입니다. 이 정도 장로라도 된 것은, 이 정도 권사, 집사라도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열심 덕택이라고 믿습니까? 바울도 그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고전 15:10절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 이 고백이 성도 여러분들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어느 덧 아브라함의 나이 99세가 되었습니다. 99세는 75세하고 또 다릅니다. 75세는 가능성이 열려있습니다. 당시 수명이 오늘날보다 길었으니까, 75세도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99세는 자녀의 꿈을 접어야 하는 나이입니다. 그 나이가 되도록, 아직 자식 하나 얻지 못하고, 제대로 된 상속자도 없이, 인생의 꿈을 접어야 하는 아브라함입니다. 물론 그에게 살붙이가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부르심을 받은지 10년이 되었을 때, 여종 하갈을 통해서 얻은 이스마엘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얻기 전에는, 청지기인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고자 했고, 살붙이인 이스마엘이 나자 그를 상속자로 삼고자 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그걸 허락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걸 걸고 따라 나섰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엘리에셀은 물론이고, 아브라함 몸에서 난 이스마엘도 상속자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곤란한 상황입니까? 그 무렵에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1절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엘 샤다이로 나타나셨습니다. 엘 샤다이는 전능한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분이 전능하신 것 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분이 전능하심으로, 그분이 우리를 위기에서 건져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이 전능하시지 않다면, 우리가 위기에 있을 때 마음뿐입니다. 위기에 있을 때 발만 동동 구를 뿐이지, 구해주실 수 없습니다. 자녀가 안타까운 상황에 있을 때, 부모로서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 못할 때, 보호자로서 무력감을 느낍니다. 부모로서 한계를 느낍니다. 하나님께 자녀를 맡길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지금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위기를 겪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엘 샤다이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지금 내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곤경에 빠져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엘 샤다이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의 최대의 희망은 아들을 얻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그건 상속자를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런 희망을 꺾지 않으셨습니다. 그에게 상속자를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사라를 통한 아들 약속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 성취가 이상하게 지연되었습니다. 1년이 가고, 2년, 5년이 지났습니다. 75세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기준으로 하면 무려 24년이 지나, 어느덧 아브라함의 나이 99세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아브라함이지만, 사라가 89세가 되었습니다. 당시 사라의 몸 상태를,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창 18:11절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로마서에서도 같은 증언을 한다. 4:19절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사라의 나이도 나이지만,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습니다. 태가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자녀를 생산할 능력이 없는 몸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도,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습니까? 창 17:16-17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웃어버렸습니다. 왜? 너무 잘 아니까요?
그럼 아브라함만 웃었습니까?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마음에 확신했습니까? 창 18:10-12절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사라도 신랑 닮아서 웃어버렸습니다. 부부가 일체의 희망을 접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희망이 끊어져 버린 절망의 상태였다는 말입니다. 그 무렵에 하나님이 엘 샤다이로 등장하십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희망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희망 끝”이라고 선언하기 전에는 끝난 게 아닙니다. 그전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엘 샤다이’이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절대 희망만 있습니다.
창 18: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하나님이 사라가 웃은 것을 지적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장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와서,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했습니다. 그 때 마리아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그러자 천사가 뭐라고 했습니까?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역시 엘 샤다이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서울에 예능교회가 처음 설립될 땐 연예인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를 시작한 고 하용조 목사님이 전도사 때 당시 꽤나 유명한 연예인들을 모아 성경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마침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구약엔 할머니가 애기 낳은 사건이 있고, 신약엔 처녀가 애기 낳은 사건이 있습니다’하고 동정녀 탄생을 가르쳤습니다. 그때 젊은 한 연예인이 ‘그게 말이 되느냐? 그걸 어떻게 믿느냐?’며 꼬투리를 잡고 늘어졌습니다. 이때 당시 믿은지 얼마 되지 않은 구봉서가 “야 임마, 지 서방인 요셉이 믿었다는데 니가 왜 난리야.”라고 말했답니다. 그래서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고, 이 젊은이는 웃다가 하나님을 믿었다고 합니다.
엘 샤다이를 만나기 전에는, 아브라함은 희망 제로 죽은 상태였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이 엘 샤다이를 만남으로, 죽었던 희망이 되살아났습니다. 롬 4:19-21절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믿음은 희망을 줍니다. 믿음에 희망이 따라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절대 희망이 있습니다. 사람은 위로는 줄 수 있고, 격려는 해줄 수 있으나, 참된 희망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사람도 거짓 희망을 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주는 희망은, 대부분 희망고문으로 끝나곤 합니다.
‘엘 샤다이’는 ‘엘’과 ‘샤다이’라는 두 단어의 결합입니다. 엘(EI)만으로도 능력의 하나님, 강하신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샤다이’라는 단어가 붙었습니다.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샤다이라는 말이 히브리어 단어의 어근인 ‘샤드’에서 왔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샤드’는 본래 어머니의 젖가슴이나, 깊은 계곡이 있는 높은 산을 뜻하는 말에서 나온 단어라고 말합니다. ‘젖가슴’이라는 단어와 연관하여 ‘샤다이’라는 이름은 ‘양육하는, 공급하는, 만족하게 하는’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엘 샤다이는 전능자 하나님이란 뜻 이전에 ‘젖먹이는 어머니의 품’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젖먹이는 어머니의 품은 아이의 울음을 달래줍니다. 젖먹이는 어머니의 품은 아이에게 평안을 줍니다. 젖먹이는 어머니의 품은 아이에게 잠을 줍니다. 젖먹이는 어머니의 품은 불편한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줍니다. 젖먹이는 어머니의 품엔 생명이 있습니다. 젖을 빠는 아이에게 적어도 그 어머니는 전능한 존재입니다. 아기에게 전혀 불가능한 일들이 어머니의 품에선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미하는 “엘”이라는 단어와 함께 결합될 때 그것은 “양육하고 공급하며 만족하게 하기에 능한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좌절과 깊은 절망에 빠져 있는 이들 아브람 부부를 이해하시고 그들 곁에 따뜻하게 다가와 그들을 건져내시는 어머니 같고 태산 같은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엘 샤다이”라는 이름은 특별히 사람과 언약을 세울 때 사용되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따라서 “당신이 약속하시거나 하시겠다고 하신 것은 능히 이루실 수 있는 분”임을 계시해 주고 있는 이름이 바로 “엘 샤다이”입니다.
우리의 신앙이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능력으로 도무지 불가능한 것들이 하나님에겐 너무 자연스런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분 앞에서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그분 앞에서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그분 앞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그분은 풍랑을 잔잔하게 하고 물위로 걸으셨습니다. 그분의 말씀 앞에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그분 안에서 이 모든 일은 쉽고도 자연스런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엘 샤다이를 만난 사람은 항상 내 눈, 내 시각으로만 세상을 보지 않습니다. 그분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분의 눈으로 문제를 볼 줄 압니다. 엘 샤다이의 관점으로 내가 나를 바라볼 때에 내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기대되는 존재인지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들어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고백할 때 사용하는 사도신경의 첫 마디가 이렇습니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모성적인 면은, 상대적으로 덜 강조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이 점을 역이용한 얄궂은 이단에서는, 어머니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뜻한 가슴을 지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좌절을 이해하십니다. 사라의 아픔을 깊이 공감하십니다. 그리고 그들 곁에 다가오셔서, 그들을 따뜻한 가슴으로 품어주십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위로해주십니다. 그들을 위기로부터 건져내주십니다. 우리 인생은 위기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인생 여정에서, 크고 작은 위기와 맛딱드리곤 합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위기가 있습니까? 가정적인 위기입니까? 배우자의 위기인가? 자녀의 위기입니까? 경제적인 위기입니까? 직장의 위기인가? 일터(사업장)의 위기입니까? 사회적인 위기입니까? 관계의 위기입니까? 위기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문제는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입니다. 내가 당하는 위기를, 아무도 몰라준다고 생각이 되면, 힘이 빠집니다. 그런 나를 격려로 기도로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힘이 절로 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주는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군가 내 곁에서 힘겨워하고 있을 때, 가만히 지켜봐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나는 당신을 응원합니다”라고 말해주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나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나는 당신을 앞으로도 기도로 응원하겠습니다.”
그런데 세상인심이란 게 돌변하곤 합니다. 어느 한 순간 등을 돌리며 돌아서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 내가 세상 헛살았구나!’하는 탄식이 나옵니다. 그럴 때 눈을 들어 위를 보기 바랍니다. 엘 샤다이 하나님을 보기를 바랍니다. 99세의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엘 샤다이를 보기를 바랍니다. 아무런 꿈도 없이 지내는 사라에게 찾아오신 엘 샤다이를 보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따뜻한 가슴을 지닌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엘 샤다이가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서 엘 샤다이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이 욥기입니다. 엘 샤다이가 구약 전체에 48회 나오는데, 그중에 무려 31회가 욥기에 나옵니다. 고난 당하는 욥을, 엘 샤다이로 만나주신 것입니다. 세상 누구보다 큰 고난을 겪는 욥을 엘 샤다이로 함께 해주셨습니다.
나 혼자 당하는 고난이 아닙니다. 나 혼자 고난의 현장에 내던져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엘 샤다이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고난 중에 있습니까? 엘 샤다이를 부르기 바랍니다. 희망이 멀어져 갑니까? 믿음으로 엘 샤다이를 부르기 바랍니다. 엘 샤다이 하나님은 위기를 당한 사람 편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문제 해결사로만 여기면 안됩니다. 우리가 고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자로만 여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미래를 인도해 가십니다. 엘 샤다이는 과거에 우리와 언약하신 것을, 오늘 지켜나가시고, 미래에 이루어 나가십니다.
2절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6-8절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엘 샤다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다.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 아브라함이 99세인데 아들이 없습니다. 이스마엘이 있지만, 사라를 통해서 낳은 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약속하신 아들이, 24년이 지났는데도 없습니다. 그런데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고 합니다. 엘 샤다이, 따뜻한 가슴으로 찾아와 주신 것 감사합니다. 그러나 크게 번성한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현재 상황과는 상관 없이 말씀하십니다.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이는 믿음으로 받아야 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나를 용서하시고 용납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오늘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미래의 나를 크게 번성하게 하실 분입니다.
대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게 있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하나님 앞에서 행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항상 너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코람데오’의 삶입니다. 신전의식으로 사는 삶입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은 흠없이 살라는 말입니다. 허물 많은 우리가 어떻게 흠 없이 살겠습니까? 그럼에도 “완전하라”는 말씀은, 엘 샤다이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 때, 완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원칙적으로는 맞는데, 현실적으로는 어렵게 느껴지긴 합니다.
3-5절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미래의 번성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본명은 아브람입니다. 아브람의 뜻은 “높으신 아버지”입니다. 그만하면 이름으로서 좋은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새 이름 아브라함의 뜻은 “많은 민족의 아버지”입니다. 훨씬 큰 이름입니다. 자신의 가족, 가문을 넘어서는 이름입니다. 더 나아가 민족을 넘어서는 이름입니다. 열국의 아버지, 열방의 아버지로 세우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세계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의 수도 우르에서, 남부럽지 않게 문명을 누리며 살던 아브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순종하고 따른 지 24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이제 100세를 앞두고 있습니다. 자기를 이을 상속자도 없이, 어느덧 그 나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 그를 붙들고, 하나님이 이름을 바꿔주셨습니다. 새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아직 높으신 아버지도 아닌데, 그를 향해 많은 민족의 아버지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이 “아멘”했다면,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럼 실제로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었습니까? 역사 속에서 그대로 실현되었습니까? 물론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므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도시 문명을 누리며 사는 75세의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는, 그를 높은 아버지가 아닌 많은 민족의 아버지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높은 아버지를 존경받는 아버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존경 받는 부모는, 이 땅에 사는 모든 부모의 소원입니다. 존경 받는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원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존경 받을 만한 인생을 추구해야 합니다. 돈 있는 것과 존경 받는 것은 다릅니다. 많이 가진 것과 존경 받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사실이지 존경 받는 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존경 받는 인생을 넘어, 가치 있는 인생을 추구해야 합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치 있게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의 순간순간이 예선이 없는 결승전 인생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치 있게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가장 가치 있게 사는 것이 어떤 삶일까요? 아브람이 아닌 아브라함으로 사는 것입니다. 존경 받는 삶을 살 거면, 아브람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가치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아브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반드시 아브라함이 되어야 합니다. 열국의 아버지,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선교사로 전도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한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세상에 없습니다.
예전 교회학교에서 많이 부르던 찬양이 있습니다. ‘왕왕왕왕 나는 왕자다. 하나님 나라에 나는 왕자다. 내가 비록 어릴지라도 나는 왕 나는 왕 나는 왕자다. / 공공공공 나는 공주다. 하나님 나라에 나는 공주다. 내가 비록 어릴지라도 나는 공 나는 공 나는 공주다.’ 하나님은 우리가 왕자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으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공주에 만족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왕자나 공주보다 가치 있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원하십니다.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는 선교사로 전도자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엘 샤다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엘 샤다이, 하나님은 따뜻한 가슴을 지닌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엘 샤다이, 너로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약속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엘 샤다이, 새 이름을 주신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은 전능하신데 우리는 그 하나님의 능력을 너무 제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너무 초라하지는 않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엘 사댜이,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한계에 갇혀서 살지 마십시오. 자신의 이성적 한계 안에 하나님을 가두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초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네 한계를 벗어나서 내가 네게 지시한 인생을 살아라. 나는 너의 전능한 하나님이다. 엘 샤다이!” 시간마다 때마다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서서, 그분을 의식하는 가운데 그분만을 의지하고 신뢰하십시오. 그리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부름 앞에 내 생애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애로 나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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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름(6) : 엘샤다이 / 창 17:1-8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을 세우실 때, 반드시 수반되는 세 가지 중요한 시기가 있음을 성경에서 자주 봅니다. 그것은 하나의 공식과 같은 것입니다. 먼저는 꿈, 약속입니다. 그 다음에 골짜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약속에 대한 성취입니다. 꿈이 있고, 골짜기가 있고, 그 다음에 성취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식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약속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비전을 주시고 소원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꿈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 사람으로 하여금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게 하십니다. 거기서 좌절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절망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오랜 침묵의 시간이 흐릅니다. 바로 이 골짜기에서 하나님은 그 사람을 당신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식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요셉입니다. 그는 17세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큰 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13년 동안 어두운 골짜기를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어 꿈을 이루었습니다. 그와 같은 모습들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다루시는 모습에서도 잘 볼 수 있습니다.
케네스 E. 해긴이란 분이 있습니다. 그는 1917년 8월 20일 텍사스 주의 매킨리에서 기형 심장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는 뛰지 못했고 빠르게 걷지도 못했습니다. 15세에는 완전히 침대에 누웠고, 몸은 거의 마비가 되었고, 의사로부터 죽음을 선고받았습니다. 마음에 죽을 준비를 하고 있던 중에, 믿음으로 이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막 11:23-24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그때 케네스 해긴의 나이가 17세였고, 하나님의 극적인 치유를 받은 후, 70년간 왕성하게 사역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가 책을 썼는데 책 이름을 ‘충분하고도 넘치는 하나님 엘 샤다이’라고 했습니다.
“엘 샤다이”란 하나님의 이름은,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이름이 또 있습니다. 여호와 이레입니다. 여호와 이레는 하나님의 이름 강해 1번으로 살펴봤습니다. 하지만 시간적으로는 엘 샤다이가 여호와 이레보다 앞섭니다. 엘 샤다이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겠다는 약속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여호와 이레는 이삭을 제단에 바치는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 하나님보다, 엘 샤다이 하나님을 먼저 만나고 체험한 셈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99세 때에는 엘 샤다이로 당신을 보여주셨고, 십몇 년이 흐른 후에는 여호와 이레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엘 샤다이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분위기(아우라)가 느껴집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나이가 되도록 자녀가 없었습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울타리입니다. 물론 자녀가 어릴 때는, 부모가 자녀의 울타리입니다. 그러다 부모가 나이가 들면, 자녀가 부모의 울타리가 되어줍니다. 하나님은 울타리도 없이 사라와 덩그러니 살아가는 75세의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창 12:1-4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모태신앙도 아닌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난 점은, 위대한 결단이자 순종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아브라함의 모습은 조금은 실망스럽습니다. 오락가락한 면을 보이고, 믿음도 불안 불안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간섭이 없었다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열심이 빚어낸 작품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작품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이 정도 목사라도 된 것은, 하나님의 열심 덕분입니다. 이 정도 장로라도 된 것은, 이 정도 권사, 집사라도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열심 덕택이라고 믿습니까? 바울도 그렇게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고전 15:10절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 이 고백이 성도 여러분들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어느 덧 아브라함의 나이 99세가 되었습니다. 99세는 75세하고 또 다릅니다. 75세는 가능성이 열려있습니다. 당시 수명이 오늘날보다 길었으니까, 75세도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99세는 자녀의 꿈을 접어야 하는 나이입니다. 그 나이가 되도록, 아직 자식 하나 얻지 못하고, 제대로 된 상속자도 없이, 인생의 꿈을 접어야 하는 아브라함입니다. 물론 그에게 살붙이가 전혀 없지는 않습니다. 부르심을 받은지 10년이 되었을 때, 여종 하갈을 통해서 얻은 이스마엘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얻기 전에는, 청지기인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고자 했고, 살붙이인 이스마엘이 나자 그를 상속자로 삼고자 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그걸 허락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모든 걸 걸고 따라 나섰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엘리에셀은 물론이고, 아브라함 몸에서 난 이스마엘도 상속자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곤란한 상황입니까? 그 무렵에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1절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엘 샤다이로 나타나셨습니다. 엘 샤다이는 전능한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분이 전능하신 것 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분이 전능하심으로, 그분이 우리를 위기에서 건져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이 전능하시지 않다면, 우리가 위기에 있을 때 마음뿐입니다. 위기에 있을 때 발만 동동 구를 뿐이지, 구해주실 수 없습니다. 자녀가 안타까운 상황에 있을 때, 부모로서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 못할 때, 보호자로서 무력감을 느낍니다. 부모로서 한계를 느낍니다. 하나님께 자녀를 맡길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지금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위기를 겪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엘 샤다이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지금 내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곤경에 빠져 있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엘 샤다이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의 최대의 희망은 아들을 얻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그건 상속자를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런 희망을 꺾지 않으셨습니다. 그에게 상속자를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사라를 통한 아들 약속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 성취가 이상하게 지연되었습니다. 1년이 가고, 2년, 5년이 지났습니다. 75세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기준으로 하면 무려 24년이 지나, 어느덧 아브라함의 나이 99세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아브라함이지만, 사라가 89세가 되었습니다. 당시 사라의 몸 상태를,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창 18:11절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로마서에서도 같은 증언을 한다. 4:19절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사라의 나이도 나이지만,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습니다. 태가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자녀를 생산할 능력이 없는 몸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도, 아브라함이 어떻게 했습니까? 창 17:16-17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웃어버렸습니다. 왜? 너무 잘 아니까요?
그럼 아브라함만 웃었습니까?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마음에 확신했습니까? 창 18:10-12절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사라도 신랑 닮아서 웃어버렸습니다. 부부가 일체의 희망을 접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희망이 끊어져 버린 절망의 상태였다는 말입니다. 그 무렵에 하나님이 엘 샤다이로 등장하십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희망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희망 끝”이라고 선언하기 전에는 끝난 게 아닙니다. 그전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엘 샤다이’이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절대 희망만 있습니다.
창 18: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하나님이 사라가 웃은 것을 지적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장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와서,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했습니다. 그 때 마리아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그러자 천사가 뭐라고 했습니까?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역시 엘 샤다이 하나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서울에 예능교회가 처음 설립될 땐 연예인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를 시작한 고 하용조 목사님이 전도사 때 당시 꽤나 유명한 연예인들을 모아 성경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마침 하나님의 전능성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구약엔 할머니가 애기 낳은 사건이 있고, 신약엔 처녀가 애기 낳은 사건이 있습니다’하고 동정녀 탄생을 가르쳤습니다. 그때 젊은 한 연예인이 ‘그게 말이 되느냐? 그걸 어떻게 믿느냐?’며 꼬투리를 잡고 늘어졌습니다. 이때 당시 믿은지 얼마 되지 않은 구봉서가 “야 임마, 지 서방인 요셉이 믿었다는데 니가 왜 난리야.”라고 말했답니다. 그래서 모두 배꼽을 잡고 웃었고, 이 젊은이는 웃다가 하나님을 믿었다고 합니다.
엘 샤다이를 만나기 전에는, 아브라함은 희망 제로 죽은 상태였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이 엘 샤다이를 만남으로, 죽었던 희망이 되살아났습니다. 롬 4:19-21절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믿음은 희망을 줍니다. 믿음에 희망이 따라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절대 희망이 있습니다. 사람은 위로는 줄 수 있고, 격려는 해줄 수 있으나, 참된 희망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사람도 거짓 희망을 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주는 희망은, 대부분 희망고문으로 끝나곤 합니다.
‘엘 샤다이’는 ‘엘’과 ‘샤다이’라는 두 단어의 결합입니다. 엘(EI)만으로도 능력의 하나님, 강하신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샤다이’라는 단어가 붙었습니다.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샤다이라는 말이 히브리어 단어의 어근인 ‘샤드’에서 왔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샤드’는 본래 어머니의 젖가슴이나, 깊은 계곡이 있는 높은 산을 뜻하는 말에서 나온 단어라고 말합니다. ‘젖가슴’이라는 단어와 연관하여 ‘샤다이’라는 이름은 ‘양육하는, 공급하는, 만족하게 하는’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엘 샤다이는 전능자 하나님이란 뜻 이전에 ‘젖먹이는 어머니의 품’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젖먹이는 어머니의 품은 아이의 울음을 달래줍니다. 젖먹이는 어머니의 품은 아이에게 평안을 줍니다. 젖먹이는 어머니의 품은 아이에게 잠을 줍니다. 젖먹이는 어머니의 품은 불편한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줍니다. 젖먹이는 어머니의 품엔 생명이 있습니다. 젖을 빠는 아이에게 적어도 그 어머니는 전능한 존재입니다. 아기에게 전혀 불가능한 일들이 어머니의 품에선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미하는 “엘”이라는 단어와 함께 결합될 때 그것은 “양육하고 공급하며 만족하게 하기에 능한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좌절과 깊은 절망에 빠져 있는 이들 아브람 부부를 이해하시고 그들 곁에 따뜻하게 다가와 그들을 건져내시는 어머니 같고 태산 같은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엘 샤다이”라는 이름은 특별히 사람과 언약을 세울 때 사용되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따라서 “당신이 약속하시거나 하시겠다고 하신 것은 능히 이루실 수 있는 분”임을 계시해 주고 있는 이름이 바로 “엘 샤다이”입니다.
우리의 신앙이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능력으로 도무지 불가능한 것들이 하나님에겐 너무 자연스런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분 앞에서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그분 앞에서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그분 앞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그분은 풍랑을 잔잔하게 하고 물위로 걸으셨습니다. 그분의 말씀 앞에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그분 안에서 이 모든 일은 쉽고도 자연스런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엘 샤다이를 만난 사람은 항상 내 눈, 내 시각으로만 세상을 보지 않습니다. 그분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분의 눈으로 문제를 볼 줄 압니다. 엘 샤다이의 관점으로 내가 나를 바라볼 때에 내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기대되는 존재인지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들어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고백할 때 사용하는 사도신경의 첫 마디가 이렇습니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모성적인 면은, 상대적으로 덜 강조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이 점을 역이용한 얄궂은 이단에서는, 어머니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뜻한 가슴을 지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좌절을 이해하십니다. 사라의 아픔을 깊이 공감하십니다. 그리고 그들 곁에 다가오셔서, 그들을 따뜻한 가슴으로 품어주십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위로해주십니다. 그들을 위기로부터 건져내주십니다. 우리 인생은 위기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인생 여정에서, 크고 작은 위기와 맛딱드리곤 합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위기가 있습니까? 가정적인 위기입니까? 배우자의 위기인가? 자녀의 위기입니까? 경제적인 위기입니까? 직장의 위기인가? 일터(사업장)의 위기입니까? 사회적인 위기입니까? 관계의 위기입니까? 위기는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문제는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입니다. 내가 당하는 위기를, 아무도 몰라준다고 생각이 되면, 힘이 빠집니다. 그런 나를 격려로 기도로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힘이 절로 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주는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군가 내 곁에서 힘겨워하고 있을 때, 가만히 지켜봐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나는 당신을 응원합니다”라고 말해주기를 바랍니다. 따라서 “나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나는 당신을 앞으로도 기도로 응원하겠습니다.”
그런데 세상인심이란 게 돌변하곤 합니다. 어느 한 순간 등을 돌리며 돌아서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 내가 세상 헛살았구나!’하는 탄식이 나옵니다. 그럴 때 눈을 들어 위를 보기 바랍니다. 엘 샤다이 하나님을 보기를 바랍니다. 99세의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엘 샤다이를 보기를 바랍니다. 아무런 꿈도 없이 지내는 사라에게 찾아오신 엘 샤다이를 보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따뜻한 가슴을 지닌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엘 샤다이가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서 엘 샤다이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이 욥기입니다. 엘 샤다이가 구약 전체에 48회 나오는데, 그중에 무려 31회가 욥기에 나옵니다. 고난 당하는 욥을, 엘 샤다이로 만나주신 것입니다. 세상 누구보다 큰 고난을 겪는 욥을 엘 샤다이로 함께 해주셨습니다.
나 혼자 당하는 고난이 아닙니다. 나 혼자 고난의 현장에 내던져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엘 샤다이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고난 중에 있습니까? 엘 샤다이를 부르기 바랍니다. 희망이 멀어져 갑니까? 믿음으로 엘 샤다이를 부르기 바랍니다. 엘 샤다이 하나님은 위기를 당한 사람 편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문제 해결사로만 여기면 안됩니다. 우리가 고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자로만 여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미래를 인도해 가십니다. 엘 샤다이는 과거에 우리와 언약하신 것을, 오늘 지켜나가시고, 미래에 이루어 나가십니다.
2절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6-8절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엘 샤다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다.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 아브라함이 99세인데 아들이 없습니다. 이스마엘이 있지만, 사라를 통해서 낳은 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약속하신 아들이, 24년이 지났는데도 없습니다. 그런데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고 합니다. 엘 샤다이, 따뜻한 가슴으로 찾아와 주신 것 감사합니다. 그러나 크게 번성한 것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현재 상황과는 상관 없이 말씀하십니다.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이는 믿음으로 받아야 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나를 용서하시고 용납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오늘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미래의 나를 크게 번성하게 하실 분입니다.
대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게 있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하나님 앞에서 행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항상 너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코람데오’의 삶입니다. 신전의식으로 사는 삶입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은 흠없이 살라는 말입니다. 허물 많은 우리가 어떻게 흠 없이 살겠습니까? 그럼에도 “완전하라”는 말씀은, 엘 샤다이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 때, 완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원칙적으로는 맞는데, 현실적으로는 어렵게 느껴지긴 합니다.
3-5절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미래의 번성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본명은 아브람입니다. 아브람의 뜻은 “높으신 아버지”입니다. 그만하면 이름으로서 좋은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새 이름 아브라함의 뜻은 “많은 민족의 아버지”입니다. 훨씬 큰 이름입니다. 자신의 가족, 가문을 넘어서는 이름입니다. 더 나아가 민족을 넘어서는 이름입니다. 열국의 아버지, 열방의 아버지로 세우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세계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의 수도 우르에서, 남부럽지 않게 문명을 누리며 살던 아브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순종하고 따른 지 24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이제 100세를 앞두고 있습니다. 자기를 이을 상속자도 없이, 어느덧 그 나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 그를 붙들고, 하나님이 이름을 바꿔주셨습니다. 새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아직 높으신 아버지도 아닌데, 그를 향해 많은 민족의 아버지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아브라함이 “아멘”했다면,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럼 실제로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었습니까? 역사 속에서 그대로 실현되었습니까? 물론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므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도시 문명을 누리며 사는 75세의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는, 그를 높은 아버지가 아닌 많은 민족의 아버지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높은 아버지를 존경받는 아버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존경 받는 부모는, 이 땅에 사는 모든 부모의 소원입니다. 존경 받는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소원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존경 받을 만한 인생을 추구해야 합니다. 돈 있는 것과 존경 받는 것은 다릅니다. 많이 가진 것과 존경 받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사실이지 존경 받는 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존경 받는 인생을 넘어, 가치 있는 인생을 추구해야 합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치 있게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의 순간순간이 예선이 없는 결승전 인생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치 있게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가장 가치 있게 사는 것이 어떤 삶일까요? 아브람이 아닌 아브라함으로 사는 것입니다. 존경 받는 삶을 살 거면, 아브람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가치 있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아브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반드시 아브라함이 되어야 합니다. 열국의 아버지,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선교사로 전도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한 생명을 살리는 일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세상에 없습니다.
예전 교회학교에서 많이 부르던 찬양이 있습니다. ‘왕왕왕왕 나는 왕자다. 하나님 나라에 나는 왕자다. 내가 비록 어릴지라도 나는 왕 나는 왕 나는 왕자다. / 공공공공 나는 공주다. 하나님 나라에 나는 공주다. 내가 비록 어릴지라도 나는 공 나는 공 나는 공주다.’ 하나님은 우리가 왕자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으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공주에 만족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왕자나 공주보다 가치 있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원하십니다.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는 선교사로 전도자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엘 샤다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엘 샤다이, 하나님은 따뜻한 가슴을 지닌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엘 샤다이, 너로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약속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엘 샤다이, 새 이름을 주신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은 전능하신데 우리는 그 하나님의 능력을 너무 제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너무 초라하지는 않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엘 사댜이,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한계에 갇혀서 살지 마십시오. 자신의 이성적 한계 안에 하나님을 가두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초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네 한계를 벗어나서 내가 네게 지시한 인생을 살아라. 나는 너의 전능한 하나님이다. 엘 샤다이!” 시간마다 때마다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서서, 그분을 의식하는 가운데 그분만을 의지하고 신뢰하십시오. 그리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부름 앞에 내 생애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애로 나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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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름(7) : 엘올람 / 창 21:22-34
많은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새로운 세상, 그것도 가급적이면 이상적인 세상이 도래하기를 기원합니다. 인류 역사에 가장 간절한 어떤 염원이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이상적인 세상, 소위 ‘유토피아’가 이루어지기를 열망해 온 것입니다. 아마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사람이 만든 단어 가운데 가장 역설적인 단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이상향’이라는 단어로 번역되지만, 본래 이 단어의 어원은 ‘그런 것은 없다’라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토피아’라는 말은 1516년 영국의 사상가였던 토마스 모어가 쓴 ‘유토피아’라는 책의 제목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섬을 만들어 놓고, 그 섬의 이름을 ‘유토피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어인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없다’는 뜻의 ‘유’(eu)라는 단어와 ‘장소’라는 뜻을 가진 ‘토피아’(topia)의 어원인 ‘토포스’(topos)라는 두 개의 단어가 결합된 것으로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유토피아는 ‘현실에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사회’를 일컫는 말입니다.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이 책을 썼던 토마스 모어는 영국의 헨리 8세가 통치하던 시절에 대법관까지 올랐습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살고 있는 조국의 현실이 그가 기대한 것처럼 유토피아적으로 진행되지 않자, 그 현실을 비판함으로써 반역죄로 체포되고 투옥되어, 마침내 사형 언도를 받고 참수되는 그런 일생을 마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이 그토록 이상향을 열망하면서도 그런 이상향을 실현할 수 없는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이러한 물음에 대해 성경은 매우 단순하고 직설적인 대답을 줍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죄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바깥에서 전개되고 있는 세상의 모든 시끄러운 문제의 실상은 그 기본적인 원인이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야고보서 4:1절에서 이 사실을 명쾌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우리 안에 있는 정욕과 욕심이 모든 문제의 발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직면하는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고자 할 때 그것을 구조적으로 밖에서만 해결을 시도하는데는 항상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근본적인 인간성은 전혀 변화되지 않은 채 구조적인 변화만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인간의 죄성, 또는 죄인됨을 겸손히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안에 있는 죄와 정욕을 잘 다스릴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 문제들을 해결하고 이상향까지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보다 나은 세상, 보다 밝은 세상, 보다 나은 현실을 꿈꿀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성경이 보여주는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이라고 믿습니다.
오늘은 7번째로 하나님의 이름 ‘엘 올람’(El Olam)을 살펴보겠습니다. ‘엘’(El)은 ‘하나님’이라는 말이고, ‘올람’은 ‘영원’을 뜻하는데, ‘엘 올람’이라는 호칭은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영원성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본래 ‘올람’이라는 단어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오랜 기간’을 나타낼 때 쓰입니다. 그렇지만 이 단어가 하나님과 함께 나올 때는 문자 그대로 ‘영원함’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시간의 하나님’이라는 뜻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해서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번역할 때 ‘엘 올람’은 ‘영원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하나님, 영생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첫째로, 엘 올람의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도, 계속하여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목축업이란 직업 특성상, 떠돌이 생활은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떠돌이 생활을 하는 이유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는 고향을 떠날 때부터 확실한 목적지가 없었습니다.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어찌 보면 막연한 말씀을 따라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정착할 땅을 빨리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모처럼 한 곳에 오래 머물며 안정된 생활을 한 곳이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그랄입니다. 그는 그랄에서 안정과 여유를 누렸습니다. 그곳에서는 아브라함에게 시비를 거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처음에 그랄 땅에 이사 왔을 때, 그곳에서 오래 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랄 사람들을 별로 좋게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도덕도 없고, 윤리도 모르는, 그야말로 무지몽매한 백성들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혹 사라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을까 싶어,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던 곳이 그랄입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건 순전히 아브라함의 오해였습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은 인간 됨됨이가 괜찮은 사람이었고, 그곳 사람들도 비교적 좋은 사람들입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함께 살자고 제안했고, 아브라함은 못 이기는 척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랄에서의 삶이 시작되었고, 그곳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머물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처음에 비겁자로 통했습니다. 겁쟁이 영감으로 비춰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무시당하지 않도록 지켜주셨습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그곳에 머물라고 하긴 했지만, 그의 존재가 조금은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사는지를 주시했습니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를 축복한 사람들이 복을 받고, 그를 저주한 사람들이 저주를 받는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러자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소문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무슨 조치라도 취해둬야 훗날을 위해서 좋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22절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보다 군사력이 강했고, 재산도 훨씬 많이 가진 사람입니다. 상식적으로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을 찾아가고, 적게 가진 사람이 많이 가진 사람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찾아갔습니다. 그것도 군대 장관까지 대동하고, 손수 찾아와 조약을 체결하자고 합니다. 강자가 약자에게 통상조약을 맺자고 하면 이해되지만, 평화조약을 맺자고 하니 이상합니다. 그럼 아비멜렉이 과연 무엇 때문에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평화조약을 맺자고 제안을 했을까요?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아브라함이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는 일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 대한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확인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란 성공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당연히 유능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인정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도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불신자들에게도 인정받는 것이, 신앙인의 삶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둘 다에게 잘하고 인정받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어느 하나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생활과 가정생활과 사회(직장)생활이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교회 밖에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거룩이 있지만, 교회 밖에서는 거룩이 없습니다. 교회 일은 성스럽게 하지만, 직장 일에는 불성실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교회생활을 잘해야 하는 것은 따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정생활에 충실해야 하는 것도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또 하나의 생활 영역이 있는데 그게 직장생활입니다. 우리가 교회생활과 가정생활에 비해, 직장생활을 신앙의 영역에서 제외시키면 안 됩니다. ‘직장생활에서 기독교 윤리를 적용하는 것은 힘들 것이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교회생활과 가정생활을 하면서도 말씀으로 살기가 어려운데, 직장생활에서까지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꿈같은 것으로 여깁니다.
그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모든 삶에 관심을 표하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에 이런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마 5:16절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의 예배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직장에서, 친구관계에서, 물질관계에서도, 영광을 받기 원하신다는 말 아닙니까?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예수 믿는 사람이 불신자들로부터, 이 말을 듣는 것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결코 우리에게 꿈같은 얘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믿습니까?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찾아와서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는 말을 할 정도라면, 그들의 눈에 아브라함이 얼마나 존귀하게 비쳤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23절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그들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약속을 받아내려고 합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요구한 것입니까? ‘당신은 우리에게서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혹시라도 당신 마음이 변해서 우리를 배신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니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우리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아브라함은 지금 나그네입니다. 남의 나라에 와서 얹혀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 주인이 와서 하는 말이, “내가 당신에게 잘 해준 것처럼 당신도 내게 잘 해 달라”고 부탁하는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참 부러운 생각이 듭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습니까? 세상 앞에서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세상 가운데서 우리 한국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의 숫자가 많다고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재물이 많다고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인의 숫자가 많다고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변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자기들의 눈으로 확인하고 인정할 때입니다. 우리는 크게 유력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사회 유명 인사들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 역시 규모가 작고 여러모로 부족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으로,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로, 분명하게 드러난다면 세상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과 동맹을 맺지 않고 살기에는, 뭔가 불안했던 모양입니다. 그랬기에 자기 나라 땅에 와서 더부살이하고 있는, 별볼일 없는 아브라함을 직접 찾아와서, 동맹을 맺자고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랄 땅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임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겁쟁이 영감 아브라함으로 출발했으나, 이제는 누구로부터도 무시당하지 않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이게 우리가 추구해야할 삶입니다. 예수를 처음 믿을 때는, 누구 한 사람 우리를 주시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에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오히려 우리가 세상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세상과 맞서 영향력을 끼쳐야 할 우리가, 오히려 세상에 물들어가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24절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맹세하리라 하고’ 아비멜렉의 요구에 아브라함은 순순히 응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유연성을 발견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 주저 없이 계약을 합니다. 그는 배타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랄 사람들과 더불어 살 줄 안 것입니다. 보통 예수 잘 믿는 사람 하면,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그게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델 예수님을 보세요. 주님은 사람들이 만나기를 기피하던 창녀, 죄인, 세리, 귀신들린 자, 나환자 등, 누구나 가리지 않고 만나셨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신앙의 배타성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신자는 물론이고, 같은 교회 안에서도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배타적인 태도를 갖기 쉽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는 방해 요인이 됩니다.
베드로의 환상 이야기를 기억합니까? 그가 어느 날 기도하다가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웬 보자기가 내려왔습니다. 거기에는 율법에서 말하는 부정한 짐승들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걸 잡아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명하셨는데도 먹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재차 잡아먹으라고 하셨고, 베드로는 먹지 못하겠다고 하고,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이런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역정을 내셨습니다. “이봐 베드로, 아니 내가 깨끗하다고 한 것을, 왜 네가 더럽다고 하는데?”
우리는 신앙에 유연성을 좀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가 다른 사람과도 사이좋게 지낼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서 12:18절 기억합니까?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여기 모든 사람 안에는, 불신자들, 타종교인들, 심지어 누구까지 포함됩니까? 이어서 말씀을 좀 더 보겠습니다. 롬 12:19절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원수까지 포함됩니다. 우리는 공동선을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과도 연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좁은 생각으로 크신 하나님을 제한시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선교적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이 달리 보입니다. 예수믿지 않는 사람들이, 단순히 불신자로 보이지 않고, 선교대상자로 보입니다. 불신자와 선교대상자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접근 방법이 달라집니다. 사이좋게 지내는 목적이 달라집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선교적 시각으로 바꾸기 바랍니다. 그러나 너무 티내지는 말아야 합니다.
25절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의 우물을 빼앗은 일에 관하여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책망하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되, 옳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따졌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을 왕으로서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그러나 왕이기 때문에 무조건 복종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 대꾸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조약을 체결한 것이 아닙니다. 아비멜렉에게 잘 잘못을 분명히 짚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전에 자신이 판 우물을, 아비멜렉의 부하들에게 몇 차례 빼앗긴 적이 있었습니다. 우물 파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또 판다고 무조건 물이 나은 것도 아닐텐데, 어렵게 판 우물을 빼앗길 때 아브라함은 항의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그랄에 얹혀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의 집에 사는 사람이, 큰소리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기회가 왔습니다. 아비멜렉이 평화조약을 맺자고, 제 발로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좋은 기회다 싶어, 그 문제를 꺼내서 마침내 자기 권리를 되찾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 할 말도 못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부정한 것을 보고도 아무 소리 못하고, 오해를 받고도 한 마디도 못하고 속으로 울음을 삼켜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을 때, 말할 수 있는 때를 주십니다. 분명히 따져서 자신의 권리를 되찾을 수 있는 때가 반드시 옵니다. 그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기다려야 할 때가 있고, 나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기다려야 할 때 의협심으로 나섰다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고 많은 어려움만 겪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의 행위가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당당히 따질 수 있는 기회를 주실 때까지,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보다 현명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26절 ‘아비멜렉이 이르되 누가 그리하였는지 내가 알지 못하노라. 너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나도 듣지 못하였더니 오늘에야 들었노라’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말에 뭐라고 대답합니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아브라함의 말에,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어색해졌을 것입니다. 당황한 아비멜렉은 자기는 금시초문이라고 잡아뗍니다. 진짜 못들은 것인지, 아니면 듣고도 오리발을 내미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아브라함 앞에서 면목이 없으니까, 적당히 둘러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둘째로, 엘 올람의 하나님은 관계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7절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가져다가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이제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이 언약을 체결하는 장면을 보겠습니다. 당시에 언약을 맺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엄숙한 맹세는 짐승을 죽여 양쪽으로 갈라놓고, 두 사람이 그 사이를 통과하는 것입니다. 그 맹세에는 이런 뜻이 있습니다. ‘만약 이 맹세를 내가 깨뜨린다면 내 몸을 쪼개서 내 시체를 공중의 새와 들짐승들이 뜯어먹게 해도 좋소.’목숨을 걸고 하는 맹세이기에, 진지하고 엄숙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평화의 조약을 맺을 때에는,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굉장한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음식을 함께 나눈 사람을 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함께 떡을 뗀 사람을 공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선물을 주고받음으로써, 언약이 체결될 때도 있습니다. 양과 소를 주고받음으로써 맹세가 성립됩니다. 아브라함은 이 방식을 취했습니다. 이건 아브라함이 그랄 왕 아비멜렉의 권위를 인정한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시지만, 자신은 나그네요 객임을 그들 앞에서 인정한 것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래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사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어른 대접해 주지 않는다고 호통만 칠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꼭 필요한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원망만 할 것이 아니라, 직장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조약을 체결하는 모든 비용을 한 사람이 부담하고 있습니다. 누가 부담하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전적으로 부담하고 있습니다. 한 때는 자기밖에 모르던 이기주의자 아브라함이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이게 은혜받은 자의 삶입니다. 아비멜렉이 가난해서 아브라함이 양과 소로 그를 도와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선을 베풀고 싶어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이렇게 베풀고 싶어 하고 무엇이든 나누고 싶어 합니다.
28-30절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냐?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아비멜렉과의 조약을 체결한 후, 암양 새끼 일곱을 따로 구분했습니다. 아비멜렉에게 줄 선물이니까, 아마 가장 좋은 것으로 구분했을 것입니다. 앞에 조약이 평화조약이고, 아비멜렉의 요구로 이뤄진 것이라고 한다면, 이번에는 아브라함의 요구로 이뤄지는 조약입니다. 그러니까 또 다른 조약을 맺은 것입니다.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 우물을 아브라함 자신이 판 것이라는 증거를 확실히 해두고자 함입니다. 아브라함이 애써 판 우물을 몇 차례 빼앗겼음을, 아비멜렉에게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우물을 파고 빼앗겼을 때, 사실 보복이 두려워 말은 못하고, 심적으로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이번 기회에 그랄 왕에게 확실한 보장을 요구한 것입니다.
31절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평화조약도 체결했겠다, 생각지도 않았던 선물도 받았겠다, 기분이 좋아진 아비멜렉은 ‘그것 좋은 생각이라’며 맹세를 했습니다. 두 사람은 맹세를 하고, 그 우물의 이름을 브엘세바라고 불렀습니다. 브엘세바란 뜻은 맹세의 우물입니다.
세 번째로, 엘 올람의 하나님은 예배자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2절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갔고’ 언약을 체결한 아비멜렉 일행은, 흡족하여 자기 땅으로 돌아갔습니다.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고 선물까지 받아 챙겼으니,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달성한 것입니다. 그들의 돌아가는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아브라함이 어떤 일을 했습니까? 브엘세바에 나무 한 그루를 심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일종의 기념식수를 한 셈입니다.
33절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기념식수를 위해 선택된 수종이 무엇입니까? 에셀 나무입니다. 에셀 나무는 사막의 건조한 곳이나 염분이 많은 곳에서도 잘 자라며, 재질이 단단하고, 수명이 긴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그 땅에서 가장 잘 자랄 수 있는 나무, 가장 오래 사는 나무를 심었던 것입니다. 그럼 아브라함이 그 많은 나무 중에, 왜 하필 에셀 나무를 선택했을까 하는 것이, 어느 정도 짐작이 갈 것입니다. 아비멜렉과 체결한 조약이 깨지지 않고,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였고, 또 확실한 물증을 남겨 놓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것을 볼 때, 아브라함은 철저히 미래를 준비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당대만 보지 않았습니다. 그 자녀들의 시대를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훗날 그 땅을 자손들에게 주실 것을 믿고, 그곳에 나무를 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셀 나무는 아브라함의 꿈이 담긴 나무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셨다는 증거의 나무입니다. 하나님이 자기편이 되어주셨다는 신앙고백의 나무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이 대단한 것은, 기념식수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기념식수를 마친 후 어떻게 했습니까?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건 공식적으로 하나님께 예배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물을 다시 찾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우물을 자기와 자기 자손에게 영원히 허락하심을 찬양했습니다. 얹혀살면서 겪어야 했던 그 동안의 설움 때문에, 눈물이 있는 예배였을 것입니다. 눈물로 드린 감격적인 예배였을 것입니다. 그는 이제 완전히 안정을 찾았습니다.
34절 ‘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더라.’ 나그네요 객인 것은 변함이 없지만, 누구도 부럽지 않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상당 기간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곳에서 풍요롭고 안정된 생활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전에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시련이 있었고, 또한 많은 연단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연단 뒤에 안정이 찾아오는 평범한 진리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연단만 하시는 분이 아니란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혹 이제는 좀 삶이 안정되었다며, 안심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땅에서는 영원히 안정적인 삶은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더 커다란 시험이 기다리고 있을 수 있음을 명심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살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살게 한 주위 이웃들과 사이좋게 지내며, 약한 사람을 붙들어주는 삶을 살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셀나무 우거진 그곳에서 아브라함은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확실한 많은 증거를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증거 했습니다. 믿음과 삶이 곧 하나였습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에 간격이 없었습니다. 일터가 곧 예배 처소였으며, 그가 드린 예배는 그 삶을 변화시키는 그런 살아있는 예배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일국의 왕까지라도 찾아와서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감탄을 금하지 못하게 했던 그 비밀입니다. 바라기는 이런 놀라운 역사가 바로 오늘도 하나님께 나아와서 경배하는 여러분, 또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증인되어야 하는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의 이름(8) : 여호와 카데쉬 / 레 11:44-45
청교도 시대가 남기는 에피소드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그 교회의 구성원이 되려면, 거의 예외 없이 일종의 입교문답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우리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것인가를 심사하는 위원회가 있어서, 이 교회 위원회와 한 자매가 문답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자매가 교회의 나이 든 장로님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자매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자신이 죄인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세요?” “네, 물론입니다.”그러자 장로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지금 예수를 믿은 후에는 자신을 어떻게 느끼세요?” “네, 지금은 전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느끼고 있습니다.”자매의 지혜로운 대답에 장로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은 후에 달라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네, 전에는 제가 ‘죄를 향해 달려가는 죄인’이었지만, 지금은 ‘죄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죄인’입니다.” ‘죄를 향해 달려가는 죄인, 죄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죄인’예수를 믿기 전의 상태를 묘사할 때는 죄를 향해 달려가는 죄인이었지만, 구원받은 후에 예수를 믿고 나서는 아직도 죄인이기는 하지만, 죄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죄인, 기본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에는 다를 것이 없지만, 의미상으로는 굉장한 차이가 나는 말입니다. 여러분, 죄가 느껴집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지금 죄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죄로부터 도망가고 있습니까? 이 시간 옆에는 분들에게 한 번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죄를 향해 달려가십니까, 아니면 죄를 피해 도망가고 계십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틀림없는 성경적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해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죄 문제와의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순간부터 사탄의 공격은 보다 더 치열해집니다. 사탄은 우리를 파괴하기 위해서 아주 집요하게 유혹하고 공격해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자체가 일종의 영적 전쟁입니다. 그리고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가 죄로부터 도망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죄와의 싸움을 고상하게 표현하면, ‘거룩해지는 일’이다. 이것은 매우 소극적인 표현입니다. 거룩해지는 것, 신학자들은 이 단계를 가리켜서 ‘성화의 단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거룩해짐의 교리를 ‘성화의 교리’라고 일컫습니다. 신학자인 헨리 할러먼 교수는 이 성화를 가리켜서 “오늘날 잊혀진 축복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특별히 년말 연시가 되면 행복을 원하고 축복을 받기를 소원하지만, 거룩해지기 위해 기도하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래서 ‘잊혀진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중요한 성경의 가치관에서 가장 앞에 와야 할 것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목표가, 언제부턴지 모르겠지만 행복으로 바뀌었습니다. 행복하기 위해 예수를 믿는 게 맞는 걸까요? 아, 물론 예수 믿으면 행복해집니다. 거짓 행복, 일시적 행복은 다른 것으로 가능할지 몰라도, 참된 행복은 예수로만, 예수를 믿어야만 가능하다. 그렇다고 해도 행복하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은 아닙니다. 행복이 예수 믿는 이유의 전부가 돼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목표는 어디까지나 거룩이어야 합니다. 성화가 우리의 목표가 돼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을 원하지만 행복보다 훨씬 중요한 가치관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거룩이어야 합니다.
어느 교회학교 교사가 아이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착한 일을 많이 하면 천국 가나요?”아이들은 일제히 “아니요”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 천국 가나요?”아이들은 또 일제히 “아니요”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럼 어떻게 해야 천국 가나요?”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죽어야 천국 가요.” 맞습니다. 죽어야 천국 갑니다. 자아가 죽으면 이 땅도 천국이 됩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죽는 것이 거룩의 길입니다. 내가 죽어야 내 안에 거룩하신 예수님이 삽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죄와 친분이 깊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죄와 어울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새사람은 숨 막혀 죽으려고 합니다. 우리 안에는 죄와 거룩이 함께 거할 수 없어서입니다.
거룩, 그러면 먼저 부담이 됩니다.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들으면, ‘그래, 내가 거룩하게 살아봐야지’하는 열정보다는, 부담이 앞서는 게 사실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소수의 그리스도인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거룩에 부담을 느끼는 그리스도인들이, 다수를 차지할 것 같습니다. 이 시간 말씀 앞에 솔직하게 반응해 봅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이 말씀을 듣고, 그렇게 은혜가 되어 감사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살전 5:23절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이 말씀에 너무 감동이 되어, 눈물이 핑~ 돌아본 적이 있습니까?
오늘 거룩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거룩하다”고 할 때, 우선 어떤 생각이 듭니까? 거룩이 추상명사이다보니 머릿속에는 있는데,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확실한 것은 “속되다”와는 반대되는 뜻입니다. 그럼 거룩한 것은 무엇이고 속된 것은 무엇일까요? 교회는 거룩하고 세상은 속된 걸까요? 교회 안의 일은 거룩하고, 교회 밖의 일은 속된 걸까요? 교회 안에 있으면 거룩하고, 생업 현장에 있으면 속된 걸까요? 성경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성도’곧 ‘거룩한 무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것에는 100%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모든 사람을 성도, 곧 거룩한 무리라고 하는 것은, 조금 과장된 표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거룩하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왜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을 성도라고 부를까요? 우리가 왜 성도가 되냐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분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예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성령의 인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살아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죄된 세상을 떠나 살아서가 아닙니다. 거룩의 근거는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거룩한 삶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거룩하게 살아서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이기 때문에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성도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면, 거룩은 저절로 따라 오는 것입니다. 평신도가 성도이고, 집사 권사 장로는 그 위인줄 알면 안 됩니다. 장로도 성도입니다. 목사도 성도입니다. 장로 이전에 성도이고, 목사 이전에 성도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알면, 자신을 성도로 부르신 분의 목적에 따라 살게 됩니다. 따라서 “나는 성도입니다.”옆 사람에게 “당신도 성도입니다.”
알렉산더의 군대에, 알렉산더라는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생활이 형편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알렉산더라는 이름이 아무렇게나 마구 불렸습니다. 이 소문이 알렉산더 대왕의 귀에까지 들려왔습니다. 그 소문을 들었을 때 기분이 나쁜 것은 물론입니다. 그래서 알렉산더 대왕이, 그가 근무하는 막사를 예고도 없이 방문하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잔뜩 겁에 질려 경례를 하는 알렉산더 병사를 향해, “네가 알렉산더라지.?” “네.” “그래. 내가 명령한다. 네 이름을 바꾸어라.” “네?” “이름을 바꾸기 싫거든, 네 삶을 바꾸어라.”
우리가 왜 예배해야 합니까? 사 43:21절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우리가 예배하는 것이, 우리를 지으신 분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롬 12: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성도는 예배자여야 합니다. 예배자로 사는 것이, 자신이 성도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배는 축도와 함께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 핵심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바로 이것입니다. 주일 한두 시간 예배한 것을 두고, 거룩하게 살았다고 생각한다면 위대한 착각입니다. 거룩은 예배 이후에도 계속되는 것입니다. 거룩은 성도의 가정에서도 성도의 일터에서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연말연시 자선냄비로 유명한 구세군의 창시자 윌리암 부스(William Booth) 얘기입니다. 그가 말년에 안질로 고통하다가 진단을 받은 후, 의사는 부스의 아들에게 부스가 시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아들은 오래 주저하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습니다. “아버지 눈 상태가 좋지 않으시데요.” “그럼, 내가 시력을 잃게 된다는 말이지?” “죄송해요. 그런 것 같아요.”한참을 침묵하던 부스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두 눈을 가지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겨왔는데, 이젠 두 눈 없이 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방안을 찾아야겠구나!” 이런 정신이 거룩입니다. 흰옷 입고 때묻을까봐 가만히 있는 게 거룩이 아닙니다. 윌리엄 부스야말로 거룩한 삶의 표본을 보여줍니다. 거룩한 길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거룩한 사람이 걷는 길이 거룩의 길입니다.
벤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교수인 양승훈 박사가 쓴 책에 실린 내용입니다. 자동차 서비스 회사에 근무하는 동생이, 오랫동안 서울 본사에서 근무하다가, 일산에 있는 회사의 부품 창고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울적해진 동생은 기분도 달랠 겸, 창고 옆에 오리를 키울 수 있는 작은 수영장을 만들었습니다. 수영장이래야 꼬마들이 물장구나 치며 놀 만한 크기의 널찍한 물통이 전부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퇴근하기 전에 오리 농장에 달려가, 청둥오리 한 마리를 사서 물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밤새 안녕할 것을 기대하며 출근을 해 보니, 오리가 물통 속에서 죽어 있는 게 아닙니까! 깜짝 놀라 오리를 이리저리 뒤척여 봐도, 짐승에게 물린 흔적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수영이 ‘전문’인 오리가 물통 턱을 기어 올라오지 못하고, 30cm도 안 되는 얕은 물에 빠져 죽었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결국 오리 농장에 가서 주인에게 따져 물었습니다. 하지만 자초지종을 들은 농장 주인은 ‘아니 그것도 몰랐냐’는 듯이 말했습니다. “이 오리는 오리 농장에서 부화하고 키운 오리입니다. 그래서 수영을 할 줄 모르지요. 게다가 이 오리는 어릴 때부터 물속에 집어넣지 않았기 때문에, 깃털에 기름이 분비되지 않아, 물에 잘 뜨지도 못합니다.”양승훈 박사는 이 책의 제목을 이렇게 붙였습니다. ‘물에 빠져 죽은 오리’외모가 오리라고 수영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거룩하게 살 때,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레위기입니다. 레위기는 구약에서 창세기, 출애굽기 다음에 나오는 세 번째 책입니다. 창세기를 가리켜 우리는 흔히 시작의 책이라고 말합니다.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창세기는 또한 무엇보다 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 다음의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된 상태에서 어떻게 해방이 되었는가? 그 해방의 기록을 적은 책으로서, 이것은 죄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책입니다. 그래서 구속의 책, 해방의 책이 출애굽기의 성격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레위기는 죄로부터 해방되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거룩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책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나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이름 8번째 시간입니다. “여호와 카데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카데쉬’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의 ‘카도쉬’(Kadosh)라는 단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카도쉬’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번역될 때 영어에서 ‘holy’ ‘거룩한’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카데쉬’라고 하면 ‘거룩하게 하시는 여호와’라는 뜻입니다.
44-45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오늘의 본문과 같은 내용인 레위기 20:7-8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 거룩은 하나님의 마음이란 걸 알아야 한다. 여기에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고 하십니다. 거룩은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하나님의 마음은 알겠는데, 하나님의 심정은 이해하겠는데, 그럼에도 부담스러움을 떨쳐버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위해서 그런 측면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기도에도 나타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주의 기도는 크게 하나님을 위한 기도와, 우리를 위한 기도로 나뉩니다. 하나님을 위한 기도 첫 번째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시 23편에도 나타난다.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닙니다. 거룩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거룩하게 살아야, 우리에게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거룩하게 살지 않으면, 우리가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상,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거룩에 대해, 조금은 오해한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하실 때, 그 게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성을 벗고, 신성을 가질 수 없는 존재임을 아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신 같은 존재가 될까 염려하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원죄 아닌가요? 원죄의 기원을 기록한 창세기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창 3:5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뱀이 하와를 꾀었습니다. 하와가 네가 하나님처럼 된다는 뱀의 말에 넘어갔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게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원죄의 출발입니다. 하나님을 흉내 내는 것이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입니다. 창조 때 사람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사람이 거룩한 존재였다는 말입니다. 거룩한 사람이란 타락 이전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거룩이란 진정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과 능력 행함의 은사가 나타나 전능하신 하나님을 흉내내는 것은 거룩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신이자 완전한 인간이십니다. 우리가 거룩해진다는 것은,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을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우리에게 요구되는 거룩함은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디까지나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된 경우는, 역사 상 딱 한 번입니다. 성육신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가 사람의 아들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이 된 경우는 없습니다. 하나님 흉내를 낸 가짜 하나님, 사이비 교주는 무수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심판받은 이들은 많지만, 사람이 진짜 하나님이 된 경우는 없습니다. 교주들은 자기밖에 못 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추종자가 늘어나면, 자기가 뭐나 되는 줄 착각합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날 우연히 랍비가 매우 인색하고 이기적인 부자를 만났습니다. 부자는 너무도 만나고 싶었던 유명한 랍비를 만나 너무도 기뻤습니다. ‘랍비님, 부디 제가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는 큰 교훈을 주십시요.’ 그러자 랍비는 창가로 그를 데리고 갔습니다. ‘무엇이 보이십니까?’그러자 부자는 보이는 데로 말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입니다.’이번에는 그 부자를 큰 거울 앞으로 데려갔습니다. ‘이번에는 무엇이 보이십니까?’ 그러자 이번에도 부자는 보이는 데로 말하였습니다. ‘제 얼굴이 보이는데요.’ 그러자 랍비는 그 부자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창문과 거울은 다 똑같은 유리이지요. 다만 거울은 수은이 칠해져있어 밖이 안보이고, 오로지 자신만 보이는 것이지요.’
자기라는 거울에 갇혀 있는 사람은, 자기밖에 못 봅니다. 영 안에 수은칠이 되어 있어서, 하나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이 되고 맙니다. 혼날 줄 모르고, 아니 죽을 줄 모르고 하나님의 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해, 우리는 언제라도 하나님이 될 수 있으므로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또한 거룩은 특수한 것도 아닙니다. 거룩은 유별난 것도 특별한 것도 아닙니다. 거룩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은 아주 정상적인 삶을 말합니다.
바울을 통해, 거룩이 어떤 의미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살전 4:3-6절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언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라.’ 거룩함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거룩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성 곧 섹스에 대한 것입니다. 성은 거룩과는 거리가 멀 거 같은데, 성에 거룩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섹스가 있고, 거룩하지 못한 섹스가 있다는 말입니다. 자기 아내를 몸으로 사랑하는 것이 거룩입니다. 그게 정상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6절에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는 말은, 동성애를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동성애는 기도하고 해도 거룩할 수 없습니다. 비정상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전 믿음의 선배들은 잠자리를 멀리하는 것이 거룩인줄 알았습니다. 자녀를 얻기 위한 목적이 아니면, 배우자와 잠자리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부부관계가 거룩성을 훼손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침실에서 사랑하는 것이 거룩입니다. 꼭 부부관계 전 기도하지 않아도, 부부간의 사랑 자체가 거룩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성 자체가, 아름답고 거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룩은 이상한 게 아닙니다. 거룩은 유별나고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정상이 아닌 게 거룩하지 않은 것입니다. 성욕은 식욕 수면욕 같은 본능에 속한 것이지 죄가 아닙니다. 성욕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자기 배우자가 아닌 사람을 통해 성욕을 충족시키거나, 동성을 보고 성욕을 품는 것이 죄입니다.
먹는 것도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이 나온 말씀의 배경이, 어떤 짐승을 먹을 수 있느냐를 말하던 중에 나왔습니다. 먹는 것을 거룩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딤전 4:3 -5절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모든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함으로 받으면, 문제 될 게 없습니다. 어떤 음식이라도,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한다면 거룩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산해진미 음식을 앞에 놓고, 다투거나 불평한다면 거룩과 먼 것입니다. 고전 10:31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이 말씀이 나온 배경을 아는가요? 바울이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를 다루던 중에 한 말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의 배경도 먹는 문제에서 나왔고,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의 배경도 먹는 문제입니다. 살전 4:3절의 하나님의 뜻으로 제시된 거룩함도, 그 배경을 보면 성 문제에서 나왔습니다. 거룩이 일상생활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거룩을 너무 이상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상적으로 사는 것이 거룩입니다. 특히 거룩이 우리의 몸과 관련 있음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1:15절에서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따라 우리의 모든 행실에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삶에서 거룩함을 나타내야 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크게 두 가지를 말씀 드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말과 마음에서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말에서부터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에 반은 입으로 하는 것입니다. 입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말 한마디를 해도 실수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말에 실수가 없이 온전한 사람,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지 않고 정직하고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생활에서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 몸을 움직여서 활동하는 모든 부분에서, 그것이 가정이든 직장이든 학교이든 거룩한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거룩한 장소는 교회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교회만 제한해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이렇게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일주일의 시간을 놓고 계산해 볼 때에 교회에서 생활하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일주일이 168시간인데 그 중에서 주일날 2시간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린다면 1.2%밖에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나머지의 시간은 가정과 직장과 학교에서 보냅니다. 만일에 우리가 교회에서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린다면 우리의 몸을 1.2%만 거룩하게 드리는 것이 됩니다. 수요예배, 새벽기도회 다 합해서 10시간이라 해도 6%이니까 주일까지 합쳐도 7.2%입니다. 나머지 92.8%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대단한 모순입니다.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 100%를 거룩하게 드려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하나님께 구별되어 드려질 때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사람도 그렇지만 물건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시대에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것은 거룩한 것입니다. 성찬식을 할 때 사용하는 떡과 포도주는 마켓에 가면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과 성찬식에 사용되어지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구별되게 드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는 거룩하여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따라 거룩해진 성도들이 거하는 집과 공부하는 학교와 일하는 직장, 모두는 구별되어진 거룩한 장소입니다. 그곳은 구별된 성도들이 거하기 때문에 거룩한 하나님의 제단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내 몸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일을 하고 공부를 하고 잠을 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만 거룩한 산 제사가 되기를 원하고, 나머지는 거룩하게 살지 않기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1.2%, 7.2%의 거룩한 삶이 아니라 100%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호와 카데쉬,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거룩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도가 된 것입니다. 성도된 우리를 향해,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하여 이 말씀을 하십니다. 거룩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노력해야 합니다. 거룩한 능력을 옷 입기 위하여 구별된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말도 구별하고 장소도 구별하고, 먹는 것까지도 구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옷 입기 위하여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읽고 기도하며 감사하는 생활을 쉬지 않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을 마음과 입과 삶의 자리에서, 언제나 깨끗하고 정직하게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혼탁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닮아서 거룩하게 되어 세상에 빛을 비추며 세상을 밝히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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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름(9) : 엘칸나 / 신 6:4-15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기억력이 깜박깜박 거려서 무엇인가 곧잘 잊어버리고 ‘벌써 내가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하고 속으로 웃어본 일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기억상실증이라고 하는데 기억상실증에는 나타나는 현상에 따라서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잘 기억하지 못하거나 잊어버리는 정도가 심한 병적인 상태. 시간이 조금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곧 잊어버리는 것을 전진성 건망증이라고 합니다. 대개 열병이나 중독상태에 있는 정신착란 같은 경우에 많이 나타납니다. 그런가하면 외상을 입었거나 졸도하였거나 머리에 전기충격을 받았을 때에 나타나는 역행건망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일단 기억해내기는 하지만, 얼마 지나서 재생하려고 하면 과거를 더듬어 한참 동안 이것저것 따져야만 생각해내는 것입니다. 그 밖에도 어떤 일정한 시기에만 나타나는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의 경우는 그것만이 잊혀지는 부분건망증도 있습니다. 이런 것을 합해서 국한성 건망증이라고 하는데, 대개 그 원인이 정신적인 면에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다른 것은 다 잊어도 하나님 섬기는 것만은 잊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다양한 하나님의 이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호와 이레 : 준비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야훼) : 현존(영원, 신실)하시는 하나님. 엘로힘 : 창조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라파 : 치료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닛시 :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나의 깃발이신 하나님. 엘 샤다이 : 전능하신 하나님. 엘 올람 :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카데쉬 : 거룩하신 하나님.
오늘은 하나님의 이름 9번째 시간으로 엘 칸나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런데 ‘엘칸나’라는 이름은 다른 이름들과는 성격상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고유 명사가 아니면서도, 하나님께서 직접 지으셔서 알려주신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이름은 다른 이름처럼 그렇게 자랑스럽고 영광스런 이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떻게 보면 수치스럽고 창피한 이름입니다. 그 뜻이 바로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성경을 보면 질투는 타락한 인간의 욕망에서 나오는 심리상태입니다. 창 4장을 보면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살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살인이 일어난 동기가 바로 질투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동생 아벨의 제사는 기뻐 받으셨지만 자기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때 그 마음에 질투가 일어났고, 그 질투를 이기지 못하고 동생을 죽이고 만 것입니다. 또한 성경을 보면 질투는 악령에 사로잡힐 때 일어나는 인간 심리상태입니다. 삼상 18장을 보면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로 작정하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골리앗을 죽이고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옵니다. 7절을 보면 이때 여인들이 이렇게 노래하며 환영했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사울의 마음에 질투가 불일듯 일었습니다. 그런데 악령이 사울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자 질투심은 극에 달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들어 던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질투는 타락한 인간, 악한 영에 사로잡힌 인간의 연약한 모습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친히 이 수치스런 표현을 쓰시면서 이름을 지어 부르라 하셨습니다. ‘엘칸나’곧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 부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한을 통하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밝히셨습니다. 요일 4:7-8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하나님에 대해 이보다 간단하면서도 정확하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자신이 섬기는 신을 사랑으로 정의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섬기는 신 하나님은 특별한 분이십니다. 여기서 특별하다는 말은 유일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4절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모세도 하나님의 그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세상에 신이란 존재는 수없이 존재합니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만 해도, 신의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라고 크게 다르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별의별 잡신을 다 섬겨왔습니다. 종교학대사전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가정 내의 수호신이나 성주의 지배하에 있어서 형벌을 집행하는 젊은 여성 신이 있었는데, 그 신이 바로 변소 신이라는 것입니다. 옛 어른들이 변소를 사용할 때 헛기침을 했습니다. 그 이유가 변소 신의 기분을 나쁘게 하지 않도록, 헛기침을 해서 ‘저 들어갑니다’알리는 거라고 합니다. 이렇게 웃지 못할 신까지 섬기고 살던 이 나라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선교사들을 보내주셨고,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성경부터 들어오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샤머니즘이 아주 사라지지 않았고, 민간 신앙으로 전통 문화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음을 볼 때, 샤머니즘이 어지간히 질깁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면, 샤머니즘에 사로잡혀 지낼 뻔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할 일인지 모릅니다. 유일한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신을 지성을 다해 섬긴다고 생각해보세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우상과 잡신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고전 8:5-6절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우리는 유일한 하나님 한 분만 바라보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과 바알 아세라를 기웃거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한 발, 세상에 한 발을 딛고, 줄타기 곡예를 부리면 안 됩니다. 그건 너무나 위험한 줄타기 신앙입니다. 우리는 견고한 반석 신앙이어야 합니다.우리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를 섬기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신명기는 가나안이 보이는 모압 평지에서, 모세가 광야 2세대들에게 한 설교입니다. 비록 자신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지만, 머잖아 가나안에 들어가게 될 광야 2세대를 보니,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후 당부하는 심정으로 설교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오직 유일한 여호와라는 것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아는 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5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나님의 유일성을 인정하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하나님은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하라고 했습니까?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라.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 원어의 의미를 살려서 다시 번역하면, ‘너의 최선의 마음을 가지고, 너의 최선의 뜻을, 너의 최선의 힘을 가지고 사랑하라’입니다. 최상급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세 가지 표현을 중복시켜,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태도와 그 정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매우 강렬하게 말씀하고 있음을 봅니다. 공동번역성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여기에 다른 어떤 것도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친절하게 안내해주고 있습니다.
6절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자기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말씀을 내 마음에 새기자!”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고 하니까, 일회적 행위로 들리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을 한 번 듣는다고 바로 새겨집니까? 반복적으로 듣고 또 듣고, 읽고 또 읽고, 묵상하고 또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내 마음 곧 인격에 영향을 주고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을 통해 확인해 주셨습니다. 요일 5:3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말씀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7절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녀에게 말씀을 강론해야 합니다. “자녀에게 말씀을 강론하자!” 자녀에게 말씀을 강론하라는 말은, 당대만 잘 믿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계승을 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내 자신이 말씀대로 사는 것도 힘듭니다. 자식까지 믿음으로 살게 하는 건 정말이지 힘듭니다. 잘 믿는 자녀를 둔 목사님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습니다. 자녀들이 나보다 더 잘 믿게 해달라고, 기도는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기도만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님을 알기에, 부담을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 애들만 해도, 내가 붙들고 입으로 교육할 나이는 이미 지났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배웁니다. 예수 잘 믿는 뒷모습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대로 잘 사는 뒷모습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대를 이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문이 되는 것입니다.
8-9절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가까이 두어야 합니다. “말씀을 가까이 두자!” 예전에는 말씀이 귀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나 말씀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종교개혁 이전까지만 해도, 평신도들은 성경을 갖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너무 흔해서 문제입니다. 말씀의 홍수 가운데 살아서, 말씀이 귀한 줄 몰라서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말씀을 가까이 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너무 흔해서, 말씀의 홍수 가운데 살아서, 말씀을 멀리하는 역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도 “하나님 중심, 말씀중심, 교회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자고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중 제일 중요한 것이 말씀중심입니다. 말씀을 알아야 하나님을 알고, 교회를 제대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말씀으로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말씀 운동이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말씀 운동은 말씀을 가까이 두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일찍이 모세는 가나안 입성을 목적에 두고, ‘그곳에 들어가면 재미있고 흥미있는 것이 많이 있을텐데, 그때 그것에 빠지면 안 된다. 어떻게든 말씀을 가까이 두라’고 신신당부한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의 거리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측정할 수 없다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나와 말씀의 거리가 곧 나와 하나님의 거리입니다. 내가 말씀과 가까운 만큼, 딱 그 정도 하나님과 가까운 것입니다.
10-11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과 경고가 있습니다. 10-11절에 먼저 약속이 나옵니다. 그 약속은 한 마디로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떠돌이 백성이 아닌, 정착민으로 살게 될 거라는 약속입니다. 갖은 설움을 겪으면서 셋방살이를 떠돌다가, 어엿한 자기 집을 장만하여 들어갔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날 밤 잠이 오겠습니까? 애굽에서 종살이 430년에, 광야생활 40년, 도합 470년을 떠돌이 백성으로 살다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때 이걸 잊어서는 안 된다고 12-14절에 경고하십니다.
12-14절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르지 말라.’ 어려울 때는 하나님 잊어버리지 말라고 경고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생이 힘겨울 때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려야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잊으면 죽는다는 것을 아니까요. 그런데 잘 될 때는 다릅니다. 자기가 잘해서 잘된 줄 압니다. 자기가 잘 살아서 복을 받은 줄 압니다. 자기가 잘 믿어서 하나님께 복 받은 줄 압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입성을 목전에 두고 있고, 모세는 천국 입성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모세가 보기에 광야 2세대는, 아직 어리기만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잊어버릴까봐 노심초사했습니다. 그래서 부탁하고 또 부탁했습니다. “하나님 여호와만 경외하라. 오직 하나님 여호와만 섬기라. 가나안 백성의 신들을 따르지 말라.” 15절 ‘너희 중에 계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소개합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 : 엘칸나’입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 왠지 잘 안 어울리는 거 같지 않습니까? 그럼 질투하는 하나님이란 표현이, 성경 이곳에만 나올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출 20:5절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십계명 제2계명입니다.) 출 34:14절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신 4:24절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신 5:9절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십계명 제2계명입니다.) 수 24:19절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질투하는 하나님으로 표현한 구절이, 생각보다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질투하는 하나님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인 게 맞습니다. 질투도 그냥 질투가 아닌 불같은 질투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질투”그러면, 시기와 함께 부정적인 의미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신성한 하나님을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했는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질투의 국어사전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부부 사이나 사랑하는 이성 사이에서, 상대되는 이성이 다른 이성을 좋아할 경우에 지나치게 시기함’입니다. 곧 질투는 사랑의 다른 이름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고 말씀하실 때 그 질투가 일반적인 사람들의 질투와 그 성격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동생이 태어나는 것은 어른들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 위기입니다. 그 동안 독점적으로 누리던 엄마 아빠와 가족들의 관심과 배려와 사랑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충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동생을 때리고 꼬집고 학대합니다. 때론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갑자기 아기티를 냅니다. 안 물던 우유병을 빨고 옷에 오줌도 싸고, 한 마디로 동생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경우에 아이는 동생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동생이 자기가 받아 누리던 가족들의 사랑을 다 빼앗아가 버렸기 때문에 밉습니다. 이 아이는 동생이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질투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저 자기의 욕심 때문에 질투를 느끼게 됩니다. 좀 크거나 가족들의 세심한 배려를 받게 되면 가족들이 자기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 질투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질투는 다릅니다. 질투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합니다. 밉고 화가 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미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질투는 연인 사이의 사랑의 질투와 같은 것입니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그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우리 마음에 질투가 불처럼 일어납니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랑이 클수록 그 질투는 억제하기 힘들 정도로 폭발합니다. 그래서 신학자 제임스 파커는 하나님의 질투라는 이 말, 이 표현 속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관계가 연인 관계로 드러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질투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뜻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연인이라는 뜻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질투할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질투하는 분으로 표현한 것은, 그분이 우리를 질투할 정도로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그 질투가 얼마나 강렬하냐면, 그 질투 때문에 독생자를 죽는데 내어주실 정도였습니다. 사실 쉽게는 죄를 범한 인류, 타락한 인간을 사탄에게 내어주면 됩니다. 그건 포기입니다. 포기하는 것은 이처럼 쉽습니다. 하나님은 보다 쉬운 포기를 선택하지 않고,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질투하는 하나님을 잘 아는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롬 5: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질투는 열정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질투는 헬라어로 젤로스입니다. 젤로스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질투라는 의미고, 다른 하나는 열심, 열정이라는 의미입니다.
웅진그룹 윤석금 회장은 그의 책에서 잊을 수 없는 한 일본 여성을 소개합니다. 아라카와라는 60대 여성인데, 한 건강식품회사의 세일즈 매니저로 근무하는 여성입니다. 수만 명의 세일즈맨을 제치고 늘 좋은 성과를 거두는 이 여인은 놀랍게도 맹인입니다. 그녀는 하루 660㎞, 한 달 평균 2만㎞를 달린다고 합니다. 주문을 받기 위해 왕복 7시간 거리도 기쁘게 달려갑니다. 이것은 택시기사의 운행 거리를 훨씬 넘는 수준인데, 아들이 운전을 대신 해준다고 해도 고령의 맹인 여성이 감당할 수 없는 분량입니다. 실제보다 10년은 더 젊어 보이는 이 여성을 향해 윤 회장이 세일즈 성공의 비결을 물었다고 합니다. 대답이 걸작입니다. “가슴과 사랑으로 팔았지요!”가슴과 사랑은 다른 말로 열정입니다.
춤꾼인 가수 비와 그의 스승인 박진영이 31일 춤대결을 한다고 합니다. 가수 비가 이런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모든 사물을 보면 저것을 춤으로 출 수 없을까 생각해요.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들고 가시면, 지팡이로 출 수 있는 춤을 만들 수 없을까? 차를 탈 때도, 차타는 방법으로 무언가 춤을 만들 수 없을까 생각해요.”가수 비한테는 모든 것이 춤으로 연결됩니다. 그게 비가 가진 열정입니다. 세일즈를 하든지, 춤을 추든지, 무엇을 하든지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에나 열정이 담기면 감동이 있습니다. 그런데 열정이 빠지면 생명력이 사라집니다. 열정이 빠진 세일즈가 돈벌이에 불과하듯, 열정이 빠진 신앙은 종교생활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는 감동을 합니다. 그분의 생명을 바친 열정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한때 사랑의 열병을 앓아본 사람은, 질투하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열병은 죽도록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목숨을 기꺼이 맞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죽느니 사느니 할 때, 다른 사람들이 조언합니다. “야야, 세상에 여자는 쌨고 쌨어. 지구 위에 반이 여자야. 꼭 그 남자여야만 해? 그 남자와 인연이 아닐 수도 있잖아?”그런 소리가 그 사람 귀에 들어올까요? “나는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 나는 그 사람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이게 열병을 앓는 사랑입니다. 이게 질투할 정도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질투라고 하면, ‘오직 못 났으면 질투를 해’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질투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추한 모습이 나올 수 있어서입니다. 그럼에도 질투의 동기는 정당한 것입니다.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와 지나치게 가까이 지내는 것을 보고, 남편이 질투하는 게 속좁은 마음이라 그럽니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우리는 서로에 대해 무관심하기로 했어’한다면, 그걸 정상적인 부부라고 할 수 있습니까? 부부에게 질투는 당연한 것입니다. 결혼한 순간부터, 부부에게는 질투할 권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영접한 순간, 우리는 예수님의 신부가 됩니다. 그럼 우리는 하나님만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신랑만 사랑해야 합니다. 어린애가 과자 준다고, 아무 아저씨나 따라가면 되겠습니까? 예쁜 여배우한테 멋진 남배우한테 마음을 빼앗겨, 잠꼬대를 하면서 그 배우 이름을 부르면 되겠습니까? 사랑은 나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아이가 엄마를 50% 사랑하고, 아빠를 50% 사랑합니까? 엄마를 사랑할 때 100%로 하고, 아빠를 사랑할 때 100%로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50% 사랑하고, 세상을 50% 사랑할 수 있다? 없다? 없습니다. 있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을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나눌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아끼고 더 집착하는 것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지 우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의 사랑에 빠지는 것을, 성경이 뭐라고 했습니까? 약 4:4절 ‘간음한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니라.’영적 간음이라고 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봅니다. 약 4:5절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눈을 떼어 세상에 한눈을 파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질투가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주범은, 큰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 나와 하나님 사이에, 뭔가 끼어드는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도 그렇습니다. 부부 사이에 뭔가 끼어들면, 틀림없이 문제가 생깁니다. 부부 사이에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녀도 끼어들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틈새가 생기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 틈새를 마귀가 교묘하게 비집고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엡 4:27절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혹시 우리 중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틈새가 생겨서, 마귀에게 틈을 주고 있는 분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불같은 질투를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엘 칸나 : 그분은 질투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버리신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마귀가 질투할 정도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출처:전주 갈보리 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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