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을 떠나시는 여호와
(겔 10:18-19, 37:24-28)
하나님께서는 에덴을 창조하시고, 에덴 동산을 거닐며 사람들과 교제하셨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권위를 짓밟아 버렸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반역자를 에덴 동산에서 내 보냈다(창 3:23).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와 교제가 끊긴 것이다.
아담의 범죄는 전 세계적으로 오염되고 확장되며 그 죄질은 더욱 지능적이고 과학적이며 악랄하여져서 하나님은 그의 영이 이들과 영원히 함께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신다(창 6: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이들과 먼저 교제를 다시 시작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을 그의 사랑과 권능으로 구출하시고, 이들을 그의 백성으로 삼기 위하여 시내 산에서 언약을 맺으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찍부터 이 언약이 여호와 하나님과 자기들 사이에 부부관계를 맺는 혼인 서약이라고 믿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 시내산 언약이 결혼식었음을 명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렘 31:31-34).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여호와께서는 신랑으로서 신부와 동거하기 위하여 성막을 만들라고 명하신다(출 25:8).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명대로 성막을 만들었을 때 구름이 회막을 덮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다(출40:34). 하나님의 영광은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을 인도하였다(출 40:36-38).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거처(dwelling place)가 된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고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지성소에 가져다 놓았을 때 여호와의 전은 여호와의 영광으로 가득찼다(왕상 8:10-11).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않으면 언제든지 그가 만든 성전을 떠나고, 그것을 진멸해버릴 것을 경고하셨다(왕하 9: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타락하고 악행을 자행했다. 결국 하나님은 이들을 버리셨다.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게 망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과의 결혼 관계가 파괴된 것이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에스겔은 여호와께서 성전을 떠나시는 모습을 환상가운데 보았다. 그가 이 환상을 본 날자를 에스겔 8:1에 보면 제 6년 6월 5일이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여러 학자들의 의견대로 주전 592년, 아직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되기 이전이다.
여호와의 손이 그의 머리털을 한 움큼 잡아 그를 땅과 하늘 사이로 들어 올려 이스라엘이 행하고 있는 여러 가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시고, 에스겔에게 말씀하셨다.
“인자야, 그들이 무엇을 행하는지 네가 보느냐?
이스라엘 족속이 여기서 심히 역겨운 일들을 행하여 나를 내 성소에서 멀리 떠나게 한다.”(겔 8:6).
여호와께서는 에스겔에게 보여주시는 그 역겁고 혐오스러운 모습 때문에 이스라엘을 떠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는 예루살렘에 심판을 퍼부으시고 (9:1-11), 11장에는 성전을 떠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성전 문지방을 나와 바퀴달린 그룹을 타시고 땅으로부터 떠올랐다(10:18-19).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난 것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그의 백성을 떠난 것은 마치 목자가 맹수들 앞에 울타리를 거두고 고집센 양떼만을 남겨 놓은 체 떠나버린 모습과 다름없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에스겔은 여호와께서 다시 그의 성전으로 돌아오시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마른 뼈와 같은 이스라엘을 그의 말씀으로 다시 살리시고(겔 37:1-10), 그들에게 새언약을 주셔서 그들의 고토에 돌아오게 하시고, 다윗을 영원한 목자요, 왕으로 세워 영영토록 왕노릇하게 하시며, 하나님께서는 영영토록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약속을 주신다.
“내 처소가 그들에게 있을 것이며,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내 성소가 영원히 그들 가운데 있을 것이니, 내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것을 열국이 알 것이다.”(겔 37:24-28)
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 때문에 성전을 떠나셨던 여호와께서 다시 돌아와 그의 처소를 그의 백성 가운데 두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예언은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찾아 오심으로 실현되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오심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펴시니(ε′σκη′νωσεν)”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글 성경에서 우리 가운데 “계시다” 혹은 “거하시다”고 번역하고 있는 헬라어 “에스케네센”(ε′σκη′νωσεν)은 구약성경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다”(to dwell)라는 의미로 사용된 “샤켄”()을 헬라어로 차용한 어휘이다.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성막(tabernacle)을 의미하는 “미쉬칸”이라는 말도 바로 히브리어 동사 “샤칸”에서 파생한 말이다. 예수께서는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심으로 그가 바로 이스라엘의 신랑,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다 (손석태 저, “여호와, 이스라엘의 남편” 참조).
그후 예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이것을 삼일 만에 세울 것이다.”(요 2:19)라고 선언하신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제자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이것이 바로 성전된 자기 몸을 가리켜 하신 말씀인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요 2:19-22).
물을 포도주로 만든 천지창조의 능력을 가지신 예수께서 신랑으로서 그의 백성들 가운에 거주하기 위하여 육신의 몸으로 찾아오시어, 그의 육신을 바쳐 새로운 성전을 친히 지으려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만드신 성전은 눈에 보이는 건물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 안에 거하여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겠다”(요한 15:4)
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아예 우리 안에 그의 거처, 곧 보이지 않는 성전을 마련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께서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고 우리를 일깨워 준다.
이처럼 신비한 연합관계는 사람의 지혜나 능력으로 될 일이 아니고 오직 성령으로 될 일이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 성도들의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연합(the union with Christ)과 동거(the indwelling in the Holy Spirit)가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나무와 돌로 만든 성막이나 성전이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이 아니라 완전한 성막과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며, 예수님과 사귐을 갖는 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이다. 예수님과의 교제는 말씀이신 예수님과의 교제이며, 말씀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성령은 그 말씀과 함께 우리 안에 거하시며, 온갖 신령한 열매을 맺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돌과 나무로 지은 건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것 같다. 구약성경의 성전 중심적인 예배와 성전중심적 신학과 신앙생활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신앙이 잘못 되었을 때, 자기의 성전이라도 아끼지 않고 진멸하시고 떠나시는 분이다. 신앙의 본질은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요 17:21) 있는 이 신비한 연합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본질을 외면한 체 구약성경의 이스라엘을 닮아가기 위해서 힘쓰는 것은 아닌가? <손석태 박사>
하나님의 성호와 우리의 신앙(겔48:30-35)
(겔43:1)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향한 문이라 (겔43:2)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 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인하여 빛나니(겔43:3) 그 모양이 내가 본 이상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에 보던 이상 같고 그발 하숫가에서 보던 이상과도 같기로 내가 곧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더니 (겔43:4)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으로 말미암아 전으로 들어가고(겔43:5) 성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더라(겔43:6) 들은즉 누구인지 전에서 내게 말하더니 사람이 내 곁에 서서 (겔43:7)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 영원히 거할 곳이라 이스라엘 족속 곧 그들과 그 왕들이 음란히 행하며 그 죽은 왕들의 시체로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겔43:8) 그들이 그 문지방을 내 문지방 곁에 두며 그 문설주를 내 문설주 곁에 두어서 그들과 나 사이에 겨우 한 담이 막히게 하였고 또 그 행하는 가증한 일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으므로 내가 노하여 멸하였거니와 (겔43:9) 이제는 그들이 그 음란과 그 왕들의 시체를 내게서 멀리 제하여 버려야 할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거하리라
(겔48:30) 그 성읍의 출입구는 이러하니라 북편의 광이 사천오백 척이라 (겔48:31) 그 성읍의 문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따를 것인데 북으로 문이 셋이라 하나는 르우벤 문이요 하나는 유다 문이요 하나는 레위 문이며(겔48:32) 동편의 광이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요셉 문이요 하나는 베냐민 문이요 하나는 단 문이며(겔48:33) 남편의 광이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시므온 문이요 하나는 잇사갈 문이요 하나는 스불론 문이며(겔48:34) 서편도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갓 문이요 하나는 아셀 문이요 하나는 납달리 문이며(겔48:35)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지금까지 우리는 구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성호에 대해서 배워왔습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 시간으로 ‘여호와 삼마’(거기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첫째, ‘여호와 삼마’ 약속의 역사적 배경
‘여호와 삼마’라는 이름은 바벨론 포로 생활중에 망국의 슬픔과 절망 가운데 있던 백성들에게 주신 위로와 소망이 되는 약속 가운데서 게시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서 빈천한자 외에는 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고 폐허가 된 예루살렘이 새롭게 복구되고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임하겠다는 약속 가운데서 계시된 이름입니다. 그 역사적인 의미는 ‘여호와께서 거기에 게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의역을 하면 ‘거기에 계시는 여호와’가 됩니다.
여기에서 ‘거기’란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임한 ‘새 예루살렘’ 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새 예루살렘에 계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새 예루살렘은 어떤 도성입니까? 그 문제는 결론 부분에서 말씀드리기로 하고, ‘거기(새 예루살렘)에 계시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약속되고 계시된 역사적인 배경을 좀더 생각하겠습니다.
◈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 활동
이 이름은 에스겔서 마지막 장 마지막 절(48:35)에 나옵니다. 에스겔은 유다 왕국에 대한 바벨론의 제2차 침입시(B.C.597년) 느부갓네살에 의해 여호야긴 왕과 방백들과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갈 때 함께 끌려갔던 사람입니다(왕하24:4). 그는 제사장의 가문에서 부시의 아들로 태어나 성전 곁에서 제사장으로 자랐으며, 에레미야 선지자가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자라 왔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성군 요시야 왕 13년에 소명을 받아 바벨론의 제3차 침입시 시드기야 왕과 함께 포로로 끌려가 1년 더 예언하기까지 40년 6개월 정도 선지활동을 했기에, 에스겔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외치는 회개의 촉구와 장차 있을 망국에 대한 슬픈 소식을 들으며 자라 왔습니다.
그리고 여호아하스 왕이 폐위되어 애굽의 볼모로 끌려가고, 여호야김 왕은 바벨론의 제1차 침입 때에 포로로 끌려간 비운의 시기에 자랐으며, 자신도 역시 바벨론의 제2차 침입시 여호야긴 왕이나 권세자들과 많은 백성들과 함께 포로로 끌려갔던 것입니다. 그는 포로 기간중 그발 강가에 있는 텔아비브에서 거주하였으며(1:1-3), 거기서 여호와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가 소명을 받을 때는 여호야긴 왕이 포로로 잡혀간 지 5년 후인 B.C.593년(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기 7년 전)이며, 그의 예언 활동은 22년 동안(B.C.570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징계로 인하여 이국 땅에 포로된 몸으로 끌려와 나라 잃은 슬픔과 절망 가운데 있는 백성들을 대상으로 선지활동을 하였습니다. 에스겔이 전한 메시지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 입니다. 22년의 사역 기간 동안 크게 세 시기에 메세지의 내용이나 전달 방식이 달라지고 있을을 볼 수 있습니다.
사역의 초기, 즉 예루살렘이 망하기 7년 전부터 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기까지의 기간에는 적극적인 말로 회개를 외치지 않고 주로 침묵을 지키면서(3:26-27) 단지 상징적인 행동으로 전했습니다.
그렇게 에스겔을 이스라엘 백성의 책망자가 되지 못하게 하셔서 말로 전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면서 상징적인 행동으로 회개를 촉구하게 하신 이유는, 포로로 끌려온 백성들이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된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이 건재(健在)한 당시에는 예루살렘이 패망하리라는 에스겔의 예언을 믿지 않을 것을 아시고 그에게 다만 상징적 행동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것을 명하셨던 것입니다. 아무리 말로 전해 봐야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니까 상징적인 행동, 즉 소극적인 행동을 통해서 그들로 하여금 뭔가 생각케 하신 것입니다(4, 12, 15, 17, 18, 23장).
그리고 에스겔의 상징적인 이상한 행동에 대해서 물을 때에는 그 의미에 대해서 설명해주는 정도로만 말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상징적인 행동들을 통해서 패역한 예루살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여 임박한 심판을 면하도록 하고, 포로된 백성들에게는 헛된 소망과 우상 숭배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돌아옴으로써 새 삶을 살도록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예루살렘 성은 함락되었고, 그 소식이 바벨론에 있던 에스겔과 포로된 백성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예루살렘 함락의 소식이 전해진 후에는 포로된 백성들의 모든 희망이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할 것입니다(20:1).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이 보다 구체적인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그의 닫혔던 입을 여십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새로운 계시를 주시기 위해 그의 입을 열어 주십니다(24:26-27, 33:21-22).
그 새로운 계시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유다와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이방 나라들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내용이요(25-32장), 다른 하나는, 유다와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33-39장). 예루살렘 멸망 직전후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혔던 이방 나라들(암몬, 모압, 에돔, 불리셋, 두로, 시돈, 애굽)이 심판을 받게 되고, 유다와 이스라엘은 회복될 것이라는 내용을 전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역 중기의 메세지 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멸망한지 14년이 되었을 때(포로된지 25년 1월 10일에), 즉 에스겔 사역의 말기에는 예루살렘 성곽과 성전이 복구되고 여호와의 영광이 돌아와서 거기에 영원히 계시겠다는 내용을 전하였습니다(40-48장). 에스겔에게 마지막으로 임한 계시는 바벨론에 의해서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애굽이 심판 받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29:17-21).
이렇게 해서 에스겔이 전할 메시지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사역초기에는 포로로 끌려 와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막연히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헛된 기대만 가지고 있는 백성들을 향하여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예루살렘이 완전히 망할 것임을 침묵을 지키며 상징적이고 극적인 행동으로 전하였고, 사역의 중기, 즉 예루살렘이 완전히 망하게 될 직전과 망한 직후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혔던 이방 나라들이 심판을 받게 되고 예루살렘이 회복될 것이라는 소망의 약속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사역 말기에는 예루살렘이 망한지도 14년이 지난 오랜 세월의 포로생활로 인하여 절망 가운데 있던 백성들에게 예루살렘과 성전이 회복되어 복구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와서 거기에 영원히 계실 것이라는 희망의 약속을 전한 것입니다.
◈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고(겔9-11장), 다시 돌아오는(43장) 환상을 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본 여러가지의 환상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여호와의 영광에 관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서 떠나 가는 모습과 다시 돌아 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직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전, 사역 초기에는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환상 가운데 예루살렘으로 이끌어 가셔서 북향문 앞에 서게 하셨습니다. 그때 에스겔은 북향문에 투기게 하는 우상이 있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이 가증한 일을 행아여 당신의 영광을 성소에서 멀리 떠나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겔8:6)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행하는 일을 보느냐 그들이 여기서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 너는 다시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그리고 이제 여호와의 영광이 서서히 떠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지성소 안의 그룹 위에 머물러 있던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거치고(9:3, 10:4), 동문을 거쳐(10:19), 성읍 동편 산으로 떠나 가서 머무는 환상을 보여 줍니다(11:23).
이 슬픈 장면을 환상 가운데 보면서 에스겔 선지자의 가슴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그의 성전과 그의 이름이 새겨진 도시를 떠나기 싫어하시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차마 떠나지 못하고, 그 백성의 후회의 눈물과 잘못했다는 자백과 용서 구함을 애타게 기다리고 계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예루살렘을 떠날 준비를 하실 때, 에스겔이 엎드리어 부르짖고 여호와께서 응답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십시요!
(겔11:13) 오호라 주 여호와여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다 멸절하고자 하시나이까 하니라
(겔11:16)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고 열방에 흩었으나 그들이 이른 열방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겔11:17) 너는 또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열방 가운데서 모아 내고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다 하라(겔11:18) 그들이 그리로 가서 그 가운데 모든 미운 물건과 가증한 것을 제하여 버릴지라(겔11:19)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겔11:20)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비록 지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과 예루살렘을 떠나지만, 그들이 이른 열방에서 여호와께서 잠간 성소가 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 올 것이라는 암시를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과 예루살렘을 떠나 가는 환상과 같이 불과 몇 년만에 예루살렘과 성전은 다 파괴되고 여호와의 영광이 떠났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떠난지 십년이 넘어 프로된 백성들은 더이상 소망이 없이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의 절망적인 모습을 시137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시137: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137: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시137: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시137:4)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이렇게 절망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떠난지 13-14년이 되었을 때에 에스겔 선지자는 새롭게 회복된 예루살렘과 성전의 환상을 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다시 예루살렘과 성전으로 돌아오는 환상을 보고, 그렇게 회복된 예루살렘과 성전 가운데 여호와께서 영원토록 거하리라는 약속의 음성을 듣습니다.
(겔43:1)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향한 문이라 (겔43:2)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 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인하여 빛나니(겔43:3) 그 모양이 내가 본 이상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에 보던 이상 같고 그발 하숫가에서 보던 이상과도 같기로 내가 곧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더니(겔43:4)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으로 말미암아 전으로 들어가고(겔43:5) 성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더라
(겔43:9) 이제는 그들이 그 음란과 그 왕들의 시체를 내게서 멀리 제하여 버려야 할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거하리라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의 죄악을 버리면 여호와께서 그들 가운데 영원토록 거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면서 백성들에게 새 성전의 구조와 치수, 형상 등을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주라고 하십니다. 새 성전의 구조와 치수, 형상 등을 통해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나타내셔서 그들의 죄를 부끄러워 하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성전을 위해서 거룩한 곳을 분활하고 지파별로 나눠 주도록 하라는 분부를 받습니다.
그리고 공의롭게 행하며, 여호와 절기를 거룩히 지킬 것을 명하십니다. 각종 제사의 규례에 대해서 알려 주시고, 특히 왕이 자신의 재산을 처분하는 방법에 대해서 일러 주십니다. 왕이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나눠 주신 산업을 빼앗아서 자기의 아들에게 기업으로 물려 줄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46:18). 유다와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왕들이 백성들의 산업을 불의와 불공평으로 착취하였던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규례를 정해 주신 것입니다.
이어서 에스겔은 물이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 나와서 점점 불어나 헤엄할 물이 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성전 문지방 밑에서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러 모든 생물이 살고 고기가 많게 될 것이라는 예고를 듣습니다. 그 바다는 죽음의 바다로 알려져 있는 듣습니다.
그 바다는 죽음의 바다로 알려져 있는 사해인데, 성전에서 흘러 나온 생명수가 흘러 들어가서 소성케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사해와 같이 이방 나라에서 죽은듯이 짓밟혀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부터 흘러 나오는 은혜로 인하여 생명을 얻고 다시 소성(蘇醒)케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47:1-12).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회복하게 될 땅의 경계와 열두 지파가 나눠 가질 지계(地界)를 일러 주시고, 제사장들에게 줄 거룩한 땅과 레위인들에게 돌아갈 분깃, 성읍의 기지, 왕에게 돌릴 땅을 각각 정해 주십니다. 그리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문이 동서남북 각 세 지파씩 있게 될 것이라고 일러 주십니다(48장).
그렇게 회복된 새 예루살렘성을 가리켜 ‘여호와 삼마’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시고 예고하십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한 성읍’을 가리켜서 그렇게 부르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이름에서 ‘거기에 계시는 여호와’라는 성호가 생겼습니다.
둘째, ‘여호와 삼마’ 약속의 역사적 성취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이 복된 약속은 여러 단계를 거쳐서 성취되어 왔고, 앞으로 온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이제 그 약속이 과거에 어떻게 성취되어 왔으며, 지금 어떻게 성취되어 가고 있으며, 마침내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를 살펴 보면서, 그 약속을 믿는 우리의 신앙은 어떠해야 하겠는지 큰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 예루살렘성과 성전의 복구로 성취됩니다.
이 약속은 우선 에스겔 선지자에게 환상 가운데 보여주신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함으로 일차적으로 성취되는 것 같습니다. 70년간의 바벨론 포로 후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돌아와 에스라와 스룹바벨 아래에서 성전을 재건축했고,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에서 성전을 재건축했고, 느혜미야의 지도 아래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그러나 두번째 지은 성전이 솔로몬 성전의 영광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통곡했습니다. 새로 지은 예루살렘 전에 지은 예루살렘과 갖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또 다시 우상숭배와 온갖 죄악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에스겔 48:35의 약속의 성취는 미래의 일로 예고됩니다. 포로 이후의 선지자인 스가랴나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슥2:10)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슥2:11)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여 내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네 가운데 거하리라 네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네게 보내신 줄 알리라 (슥2:12) 여호와께서 장차 유다를 취하여 거룩한 땅에서 자기 소유를 삼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니 (슥2:13) 무릇 혈기 있는 자들이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 하라 하더라
(말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성취됩니다.
그 약속대로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돌아오셨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자기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 하였습니다(요1:11). 물론 시므온과 같이 극소수의 사람은 그분을 알아 보았습니다(눅2:28-32). 주께서 12살 때에 성전에 다시 오셨지만, 유대인들은 기이히 여기기는 했어도 그들이 그때 ‘여호와 삼마’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것은 깨닫지 못했습니다(눅2:42-47). 30세의 나이에 ‘여호와 삼마’께서는 그들 사이에서 가르치기를 시작하신 것입니다(눅3:23).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을 보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들은 ‘여호와 삼마’, 주님이 거기 계심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여호와이심을 믿는 대신에 돌을 들어 치려 하므로 예수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셨습니다(요8:59). 주님은 33년 동안 성전을 드나드시며 팔레스틴에 계셨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주의 영광이 다시 성전을 떠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23: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마23: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마24: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에수님 당시의 예루살렘성은 더이상 여호와께서 거하실 만한 거룩한 성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영광이 떠나게 하고 심판을 받아야 할 도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인격 자체가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는 ‘여호와 삼마’이셨습니다. 따라서 당시로서는 여호와께서 예수님을 모신 제자들 가운데 계셨습니다. 거기 계시겠다고 하신 ‘여호와 삼마’의 약속은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지체된 성도의 몸으로 성취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호와 삼마’의 약속을 영원히 성취하시기 위해서, 즉 그분이 우리 가운데 영원히 거할 처소를 준비하러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보혜사 성신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지금 여호와께서는 성신님으로 거듭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성도의 몸 가운데 거하시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가운데 거하십니다. 우리 성도 각자의 몸이 성신님의 전이요, 교회가 하나님의 전으로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지금 ‘여호와 삼마’의 약속은 중생한 성도의 몸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성취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성신님을 모신 성도 가운데 계시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가운데 계십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점점 더 거룩한 형상을 회복해 가는 성도, 거기에 여호와께서 계십니다. 그리고 거룩한 품성을 서로 주고받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새로운 사회인 교회, 거기에 여호와께서 계십니다. 그러나 교회, 거기에 여호와께서 계십니다. 그러나 ‘여호와 삼마’에 대한 약속의 성취는 이 땅에서는 온전히 기대할 수 없습니다.
◈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 예루살렘성으로 온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온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구원받은 성도의 무리 전체를 가리킵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장차 영화로운 몸을 입게 되고, 한 무리가 되어 신랑을 위해 단장한 신부와 같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될 것입니다. 영화로운 몸을 입어 여호와의 영광을 충일하게 반영하는 성도들의 무리, 거기에 여호와께서 영원토록 계실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무리 전체가 곧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될 것입니다.
(계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계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셋째, ‘거기에 계신 여호와’와 우리의 신앙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거기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계시는 ‘거기’는 어디입니까? 에스겔 선지자에게 어떤 성읍을 보여주시면서 ‘거기’라고 하셨습니까? 여호와께서 어디에 영원토록 거하시겠다고 하셨습니까?
(겔43:9) 이제는 그들이 그 음란과 그 왕들의 시체를 내게서 멀리 제하여 버려야 할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거하리라
여호와께서 영원토록 거하시겠다고 하신 ‘거기’는 새롭게 된 예루살렘성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한 거룩한 성읍입니다. 과거에 우상숭배와 온갖 죄악으로 인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혀서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고 심판을 받았던 성읍이었는데, 이제는 우상숭배를 버리고 여호와의 영광이 돌아온 새 예루살렘 성읍입니다. 온갖 우상숭배를 버리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 만을 섬기며,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하게 들어나는 새 예루살렘 성읍입니다. 에스겔 선지자에게 새롭게 된 거룩한 성 예루살렘,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한 성읍을 보여주시면서 거기에 계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새 예루살렘 성읍은 지금 우리 신약 시대에는 새롭게 거듭난 성도의 몸이요, 새로운 사회인 교회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새롭게 거듭난 성도와 새로운 사회인 교회, 거기에 계십니다. 우리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들은 이 땅에서부터 여호와를 모시고 살아가며, 여호와의 영광을 충만히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인 교회도 이 땅에서부터 여호와를 모신 사회로서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한 성도와 교회, 거기에 여호와께서 계십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버린 교회는 이미 교회로서의 존재 의의나 성격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여호와 삼마’, 즉 거기에 계시는 여호와로 믿는 우리의 신앙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고, 여호와의 영광이 충일하게 드러나게 될 그 날을 기대하면서, 지금 이땅에서부터 성도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여호와를 모시고 여호와의 영광을 충만히 드러내어야 합니다.
성도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여호와께서 거하실 만한 ‘거기’, ‘거룩한 성읍’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온갖 우상을 버리고, 오직 여호와만을 경외하는 거룩한 성읍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나 제물, 우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하여 충만히 발휘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여러가지의 우상과 더러움이 가득하면, 여호와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겠습니까? 도무지 함께 하실 수 없어서 떠나가실 것입니다. 우상숭배와 온갖 죄악으로 가득한 솔로몬의 성전과 예루살렘 성에 여호와의 영광이 더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어서 떠나셨던 것과 같이 떠나실 것입니다(겔9-11장).
그러나 우상숭배와 죄악을 버리고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며 여호와의 거룩한 품성을 따라 살아가는 성도나 교회, 거기에는 여호와께서 영원토록 거하십니다.
맺 는 말
오늘은 ‘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거기에 계시는 여호와)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여호와께서 계실만한 거룩한 성읍, 새 예루살렘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하여 여호와께서 계실만한 ‘거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도의 마음속에 여호와의 거룩하신 품성들이 가득하고, 교회 가운데도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하여 여호와께서 계시는 ‘거룩한 자리’, ‘거기’가 되어야 합니다. <장수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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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의 성전 환상으로 본 하나님의 회복 약속
서론
에스겔이 본 성전환상은 아홉 개의 장 (40-48장)으로 내용이 길고, 해석이 쉽지 않다.
이 내용의 핵심: 성전의 회복, 예배의 회복, 이스라엘의 회복 => 즉 회복이다, 소망이다.
내용이 어려워서 유대인들도 서른 살이 되기 전까지 에스겔 40~48장을 읽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이 본문을 읽고 무슨 뜻인지 물어보면, 부모들은 엘리야 선지자가 오면 가르쳐 줄 것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했기 때문에, 피해서 지나가거나 무시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다.
에스겔 40~42장을 특히 중심해서 에스겔 선지자가 받은 새 성전 비전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함께 고민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여 하나님께서 이 본문을 통해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내용의 시작
환상중에 하나님이 에스겔을 극히 높은 산에 내려놓으신다. 곧 시온산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시온산은 해발 750m. 실제로 높은 산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 진리가 나오는 곳이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온산을 높은 산으로 이해하고 있어왔다.
에스겔이 높은 산에서 본 성읍같은 형상 - 성전을 말한다.
놋(Blonze)같이 빛나는 사람이 손 들고 있는 것 - 삼줄과 장대 (line of flax and a measuring rod).
삼줄은 짧은 것을 잴 때, 장대는 긴 것을 잴 때 사용하는 고대 근동의 측량기구이다.
장대의 길이: 여섯 척 (6 cubits)
한 척은 약 45Cm인데 거기에 손바닥넓이가 더해진다고 했으니 여기서의 한 척은 55Cm (왕실 규격이라고 함) 그러므로 여섯척은 대략 3.3m
놋 (Blonze)같이 빛나는 사람 - 천사,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등 의견 분분. 중요한 것은 영적인 존재이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존재
새 성전의 이상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
담: 동서남북 정사각형, 한 면이 500척 (약 275m), 높이와 넓이 (폭)이 모두 6첫 (약 3.3m)
참고, 만리장성의 높이는 약 7m, 폭은 대략 6m정도.
지금 에스겔이 보는 환상은 성 (Catsle)이 아니고 성전 (Temple)이니까 성전으로서는 매우 큰 사이즈의 담.
동문, 남문, 북문이 있고, 서쪽에는 성전이 있기 때문에 문이 없다.
여기서의 문은 door이 아니고 gate이다. 바깥문과 안문이 있다. 그리고 바깥문과 안문 사이 (문간 - between gates)의 길이가 50척 (약 27.5m)
문간에는 방이 양쪽으로 각각 세개씩 있어 총 6개의 방. 이 방은 문지기가 사는 곳
성전에 담을 쌓은 목적: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 (겔42:20) 즉, 새성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거룩한 사람들.
동문, 남문, 북문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일곱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문을 지나면 뜰이 있어 바깥뜰, 안뜰, 성전뜰로 구분.
안뜰에서 성전뜰로 들어가는 문도 역시 동문, 남문, 북문의 세 개가 있다. 바깥문과 동일한 구조. 그리고 안뜰 문간 (문과 문 사이)에는 제사장이 살고 있다. 그리고 안뜰에서 성전뜰로 들어가는 계단은 여덟계단.
여덞계단을 올라 문을 통과해서 안 뜰로 들어가면 거기에 제단과 성전이 있다.
성전: 세로가 100척 (55m), 가로가 20척 (11m). 그리고 성전의 2/3은 성소, 1/3은 지성소.
성전 좌우에 많은 방이 있고, 이 방이 제사장이 사는 곳, 그리고 방뒤에 또 방이 있는데 제사장의 부엌.
그리고 백성들은 제사장의 부엌이 아닌 네 귀퉁이마다 있는 부엌을 사용.
그리고 성전안에는 무수한 벽화들이 있음. 벽화들은 종려나무 그림들.
종려나무: 생명, 풍요, 영광, 승리를 상징
참고, 이스라엘의 성전.
제1성전: 솔로몬의 성전 (BC 587년 바빌론 느부갓네살왕에 의해 파괴됨)
제2성전: 스룹바벨 성전 (BC 516년 페르시아 고레스칙령으로 돌아와 학개, 스가랴등의 영적 지도와 스룹바벨의 지휘로 세워짐)
제3성전: 헤롯성전 (예수님시대에 헤롯왕이 스룹바벨 성전을 크게 증축)
이스라엘의 이 성전들과 (에스겔이 환상으로 볼 때의 당시는 제1성전인 솔로몬의 성전이 무너진지 13년후, 따라서 제2성전, 제3성전에 대해서는 에스겔은 아는 바 없음)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성전의 차이.
첫째, 뜰이름이 차이가 있다.
이스라엘의 성전은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제사장 (혹은 남자)의 뜰로 나뉨.
그러나 에스겔 성전은 바깥뜰, 안뜰, 성전뜰.
즉, 이방인과 유대인의 구별이 없어짐, 남여의 구별이 없어짐. => 하나님은 이방인과 유대인, 남과 여를 구별하여 구원하시지 않으신다.
둘째, 에스겔의 성전에는 떡 상, 금 촛대, 분향 단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떡이요 및이 되시며 또한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이다.
셋째, 에스겔의 성전에는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이 없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 하나님은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을 위 아래로 찢어 버리셨다. 성소와 지성소의 구분이 없어진 것이다.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면 성소로 나아갈 수 있다.
넷째, 에스겔의 성전에는 언약궤가 없다.
언약궤 안에 들어있던 것 - 십계명의 두 돌판, 아론의 싹이난 지팡이, 광야의 만나
예수님 자신이 율법의 완성이었고, 예수님을 믿고 바라보면 우리의 생명이 회복되며, 예수님 자신이 만나가 되어주시기 때문.
다섯째, 물두멍이 없다. 손과 발을 씻는 곳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는 이미 정결함을 입었다.
즉, 에스겔의 환상으로 본 성전은 구약의 성전이 아니라 예수님 이후의 성전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알 수 있는 내용들이다.
새 성전의 실천적 의미
환상에서 본 바와 같이 새 성전은 담으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분리되었다. 성전안에는 거룩한 사람만 들어올 수 있다. 우리가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거룩이란 구별됨을 뜻한다. 세상의 관점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관점으로 사는 삶이 거룩의 삶이다.
우리가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환상속에 있는 벽화이다. 종려나무 벽화가 성전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영원한 생명, 복, 승리는 새성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성전에 들어오는 방법은 '문'을 통해 들어오는 것이다. 문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성전, 즉 거룩한 곳, 영원이 있는 곳, 승리가 있는 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성전에 들어오면 바깥뜰, 안뜰, 그리고 성전뜰이 있다. 이것은 신앙생활의 성장이 필요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바깥뜰에만 머무는 신앙이 아니고 안 뜰로 올 수 있는 성장을 해야 하겠고, 성전뜰로 올 수 있는 성장을 해야 한다.
결론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유다백성들은 앞으로 70년후에 이스라엘로 돌아간다는 예언의 말씀을 들었으나 큰 위로가 될 수 없었다. 70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길기 때문이었다. 그 전에 죽을 사람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40장-48장까지의 에스겔의 환상은 성전에 관한 것이었고, 에스겔은 비록 우리가 현재 바벨론에 포로 신분이지만 이 성전에 거할 백성이라고 선포하였다. 이것이 백성들에게는 소망이 된다.
COVID19시대, 교회가 많이 바뀌었다. 한국은 이제 다시 전처럼 모여서 예배드릴 수 있다고 하지만, 이곳 캐나다는 아직도 온라인 예배가 진행된다. 예배드릴 장소에 모일 수가 없는 이 상황, 우리에게도 낙심과 절망이 찾아오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시대에 교회가 소망이 되어야 한다.
실제 물리적인 교회가 교회가 아니라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가 되어야 한다. 거룩의 삶을 살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시선을 잃지 않는 삶을 살 때 우리가 교회가 될 수 있다. 교회는 생명이 있는 곳이다. 승리가 있는 곳이다.
모여서 예배드리는 교회를 사회가 모이지 못하게 한다고 사회와 싸우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는 아닐 것이다. 세상에 위협이 되는 모임이 참교회일 수 없다. 교회에서 생명이 넘쳐야 하고, 승리가 있어야 하며, 세상에 소망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환상으로 본 성전의 모습인데 에스겔을 환상을 통해 너무나도 정확하고 detail한 성전을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처럼 정확하신 분이시다. Detail한 분이시다. 이미 창세전에 모든 것을 계획하셨고, 계획하신 대로 - 때로는 인간들이 자유의지에 의해서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는 상황에서도 그 악한 상황을 선으로 바꾸어 가며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오늘 이 순간도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선한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정확한 방법으로 이끄실 것이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세상에 소망의 빛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교회가 되는 삶, 하나님의 교회에 주시는 마음을 중심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성전의 삶에서 바깥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안뜰로 들어가고 성전뜰까지 나아가는 삶을 살 때 하나님 안에서 성장하게 되고, 거룩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을 수 있을 것이다. [작성자 Hayden Choi]]
에스겔 10장.
<그림: https://cafe.daum.net/happymaker.turk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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