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오쿠스 3세 다니엘 11:10-21
출몰년도: 기원전 241- 기원전 187년 7월 3일
출생지 :페르시아 수사
사망지 : 페르시아 수사
지 위 : 메가스 바실레우스
국가 : 셀레쿠스 왕조
가족관계 : 셀레쿠스 2세 칼리니쿠스 (아버지)
라오디케 2세(어머니)
셀레쿠스 3세 케라우노스(형)
라오디케 3세(안티오쿠스 3세의 아내)
안티오쿠스(장남)
셀레쿠스 4세 필로파토르(차남)
라오디케 4세(삼녀)
클레오파트라 1세(사녀)
안티오키스(오녀)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삼남)
주요 전투지: 마그네시아 전투
재위기간 : 기원전 223년 ~ 기원전 187년 7월 3일
전임자: 셀레우코스 3세 케라우노스
후임자: 셀레우코스 4세 필로파토르
첫째로 안티오쿠스 3세의 개략
안티오쿠스 3세는 다니엘 11:10-19에 이르는 많은 구절에서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그 만큼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성경은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피파네스의 아버지입니다.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등장하게 될 원인자인 것입니다. Antiochus Megas(영어)
Ἀντίoχoς Μέγας (그리스어)
안티오쿠스 3세는 셀레쿠스 왕조의 여섯번째 왕(BC 223~187 재위)입니다. 셀레쿠스 왕조의 최대의 군주이면서 동시에 제국 쇠망의 단초를 만든 인물로 지목되기도 합니다. 알렉산더 3세 대왕을 제외 한다면, 역대 그리스인 중 그보다 넓은 영토를 통치한 그리스인은 없었습니다. 그는 그의 치세에 막 카르타고를 이겨 지중해 세계의 최강자로 떠오른 로마에 대항하는 모든 이들의 우상이었습니다. 셀레쿠스 제국의 최대 영토를 실현한 것은 바로 그이며, 동시에 제국의 남은 200여년의 방향을 결 정한 것 역시 그의 치세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는 죽은 이후에도 지중해 세계에서 최고의 명성을 누렸으며, 로마에 대항하는 반란자들은 그를 모방해 자신을 새로운 안티오쿠스 메가스라고 선포하곤 했습니다. 그 자신, 또 그가 남긴 옥좌가 지닌 이런 불멸의 마력은 셀레쿠스 제국이 로마에 최종 멸망 하는 그 날까지 로마인들이 두려워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쪽인 이란 지역에서 제국을 재건한 반면 소아시아 지역과 유럽에 대한 로마의 지배권에 도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주(州)의 크기를 줄여 제국을 행정적으로 개혁하고, 군주숭배 의례(자기와 부인 라오 디케를 신으로 받드는 것)를 창시했으며, 주변 국가의 군주들과 자신의 딸들을 결혼시킴으로써 관계 를 개선했습니다
불안한 제국의 정세
셀레쿠스 2세 칼리니쿠스가 죽자 그의 장남인 셀레쿠스 3세 케라우노스가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셀레쿠스 2세가 사망하면서 소아시아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케라우노스는 번개같이 그들을 진압 하러 직접 군대를 이끌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군대의 반란으로 암살당하고 동생인 아 직 어린 안티오쿠스 3세가 왕위를 계승합니다. 안티오쿠스 3세는 총리에 헤르미아스를, 소아시아 총독에는 아카이우스, 메디아의 총독에 몰론과 페르시아 등 동부 속주들의 총독으로 알렉산드로스 형제들, 이들은 선왕(先王)이 임명했던 대로 유임시키고 반란자들의 척결에 나섰습니다.
안티오쿠스 3세가 즉위할 당시 셀레쿠스 제국은 잇따른 반란과 외적의 침입으로 제국 개국 이래 최 대의 난관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서쪽에서는 프톨레미 왕조, 로도스 공화국, 페르가몬 왕국, 폰투스 왕국 등이 제국의 국경을 위협하고 있었으며, 동쪽에서는 박트리아가 독립의 움직임을 보이고, 파르 티아가 침입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선왕의 살해자들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게다가 소아시아는 폰투스 왕인 미트리다테스 2세의 딸과 결혼한 장군 아카이우스 휘하에서는 반란을 일으 켰고, 안티오쿠스 3세의 승인 없이 자체적으로 주화까지 발행하는 반역 행위까지 저질러가며 독자적 으로 페르가몬 왕국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선왕 살해자들은 안티오쿠스 3세가 즉위 하자마자 권력을 쥐고 있는 대신 헤르미아스의 도움으로 말끔히 처단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헤르미아스는 원래 간신으로 유명한 사나이였지만, 안티오쿠스 3세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자신이 권 력을 쥐기 위해 그를 열성적으로 후원했습니다. 사실, 몰론과 알렉산드로스, 아카이우스의 반란은 그 가 정권을 마구 휘두르면서 자초한 결과였던 것입니다. 몰론은 메디아,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의 총독이었는데 그들은 안티오쿠스 3세가 직접 임명한 장군들이었습니다. 당시 안티오쿠스 3세는 실 권이 없었고 간신 헤르미아스가 권력을 쥐고 있었는데, 그들(몰론과 알렉산드로스, 아카이우스)은 아 직 어린 왕(안티오쿠스 3세)을 대신 헤르미아스의 간섭에서 해방시킨다는 것을 명목을 내세워 중앙 정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몰론과 알렉산드로스의 반란은 안티오쿠스 3세에게 자 신이 은혜를 베푼 장군에게도 배신당할 수 있다는 경각심과 대신에게 의지하면 안 된다는 자립심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안티오쿠스 3세는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헤르미아스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그 반대파 당수였던 제욱시스의 진언에 따라 진두지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결과 셀레쿠스 제국군은 사기가 올라 몰론과 알렉산드로스의 반란군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 반란군은 기세를 올려 제국의 대부분을 장악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헤르미아스에 대해 반란 의 기치를 들었기 때문에, 군대가 그들에게 대거 호응한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헤르미아스만 제거 하면 반란은 사그라들 것 같았습니다. 당시 안티오쿠스 3세는 안티오키아에서 웅거하고 있었는데, 왕이 없는 셀레우키아는 반란군의 수중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자신들의 군대의 힘을 알고 나자 두 형제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셀레우키아에서 왕을 참칭하고 안티오쿠스3세에게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한 것입니다.
반란자들의 군대 역시 헤르미아스라면 이를 갈았으나, 두 형제와는 다르게 안티오쿠스3세에게는 대 항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반란군은 속속들이 안티오쿠스3세에게로 투항하고 두 형제는 반란군 내 에서도 고립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몰론은 군대를 이끌고 직접 티그리스 강을 도강하여 북상해 안티오쿠스3세가 직접 이끄는 니시비스 방면 군대와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몰론은 이 간헐적인 전 투에서 안티오쿠스3세에게만 너무 집중한 나머지 자기 군대의 좌익이 고립되어 투항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이후 안티오쿠스 3세의 승승장구가 이어졌고, 마침내 몰론과 알렉산드로스는 BC 220 년에 자결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습니다.
그리고 안티오쿠스 3세는 BC 220년에 메디아의 북서부 지역인 아트로파테네까지 정복했습니다. 한편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기회만 엿보던 헤르미아스는 마침내 반역을 꾀하기 시작했는데, 이 음모가 안티오쿠스 3세의 측근에게 걸려들고 말았습니다. 이 음모가 발각됨으로써 그는 국왕파의 자객에게 같은 해(BC 220)에 살해당했습니다. 이로써 제국 내에서 그의 왕위에 의문을 제기하는 세력은 소아시아에서 자신이 왕임을 주장하는 아카이우스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둘째로 제4차 시리아 전쟁(다니엘11:10-12),
‘10 그러나 그의 아들들이 전쟁을 준비하고 심히 많은 군대를 모아서 물이 넘침 같이 나아올 것이며 그가 또 와서 남방 왕의 견고한 성까지 칠 것이요’
BC 219년, 안정된 제국을 갖게 된 안티오쿠스 3세는 이집트의 혼란한 내정을 기회로 팔레스타인 지방으로 세력을 넓히기 위해 시리아 남부로 진격했고 이리하여 제4차 시리아 전쟁이 발발합니다. 이 거국적인 전쟁은 제 3차 시리아 전쟁의 복수전이기도 했기에 이제 겨우 21세가 된 젊은 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진격했습니다. 처음에는 안티오쿠스 3세 측이 유리했습니다. 전쟁을 하는 동안 그는 셀레우키아, 피레우스, 티레, 프톨레마이스와 같은 동부 지중해의 주요항구들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습니다.
BC 218년 코일레-시리아(레바논), 팔레스타인, 페니키아를 손에 넣었습니다. 특히 겨우 3년 전에 이집트의 대왕 프톨레미 3세 에우에르게테스가 사망했고, 그의 어린 아들 프톨레미 4세 필로파토르 가 즉위한 지 얼마 안되어 왕권이 매우 미약한 때였습니다. 반면 안티오쿠스 3세의 셀레쿠스 제국군 은 얼마 전 몰론의 반란을 진압한 것으로 기세가 올라 있었고, 그는 티레를 비롯한 팔레스타인의 거의 모든 도시를 장악했습니다. 그는 이 지역을 완전히 제국령으로 만들고자 했기 때문에 1년 가까이를 이곳에서 소모했습니다.
이집트의 권력을 쥔, 그 때까지 부패의 전형으로 여겨져 오던 간신 소시비오스는 단기 결전으로는 셀 레쿠스 제국군을 이길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지구전을 계획했고, 그는 말 잘하는 특사를 보내 이집 트가 곧 항복할 것처럼 꾸미게 하고, 안티오쿠스 3세에게 타결될 듯 타결되지 않는 협상을 진행시켜 그의 진군을 지체시켰습니다. 그 동안 소시비오스가 군대를 다시 불러모으고, 용병도 최대한 긁어모 아 BC 217년 팔레스틴 수복을 위해 진군시켰습니다. 소시비오스의 진언에 따라 프톨레미 4세는 직 접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했습니다. 소시비오스의 책략에 놀아나 필요 이상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시간 을 보낸 안티오쿠스3세는 아직 안정되지 않은 팔레스타인의 방어를 위해 라피아(팔레스타인 지역의 가사 근방)로 진군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라피아 전투는 헬레니즘 세계의 전투 중, 입소스 전투 이후 가장 큰 전투라고 일컬어집니다. 셀레쿠스 군은 약 7만명, 프톨레미군은 약 8만명에 달하는 인원이 투입되었습니다. 코끼리도 투입되었는데, 안티오쿠스 3세와 프톨레미 4세는 코끼리를 양익에 나누어 배치했습니다. 코끼리 간의 서전에서 셀 레쿠스 제국의 인도 코끼리는 프톨레미 왕조의 아프리카 코끼리에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산병 부대와 팔랑크스(그리스 7m의 긴 창 부대)들도 이집트군을 향해 기세 좋게 공격했습니다. 이집트군은 대혼 란에 빠졌습니다. 안티오쿠스 3세는 이집트의 파라오를 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적진으로 너무 깊이 진군했고 그 사이, 좌익을 희생양으로 삼고 제정신을 차린 이집트군은 우세한 숫자로 셀레쿠스군에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중앙에서 점차 셀레쿠스군의 패색이 짙어졌고, 좌익 역시 프톨레미 측에 가담한 그리스 용병 들의 분전으로 괴멸되었습니다. 그 때까지 전장을 지키고 있던 프톨레미 4세는 무사히 후방으로 빠 져나갔습니다.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자 안티오쿠스 3세는 자신이 패배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 습니다. 결국 셀레쿠스군은 라피아의 참패를 뒤로 하고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했습니다. 그러나 라피아 전투의 여파는 아이러니컬합니다. 그 여파란 양 제국의 약화를 초래한 것이지만, 그 약화의 정도가 프톨레미 왕조가 훨씬 컸습니다. 이집트는 긴 내분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중앙에서 마케도니아인과 함께 활약한 토착 이집트인이 전우들을 배반하고 상 이집트에 독립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이집트는 이 내전이 장기화 됨으로 인해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안티오쿠스 3세는 프톨레미 제국이 내분에 빠 져있어 자신을 추격하지 못하는 틈을 타 사르디스에서 여전히 반란군을 이끌고 있는 아카이우스에게 로 진군했습니다. 셀레쿠스 니카토르의 차남인 아카이우스의 손자인 아카이우스는 그의 반란은 사 실 셀레쿠스 제국에 대항한다기보다는 자구책적인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는 사실 마음속으로는 셀레쿠스 제국에 계속 충성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미 한 번 왕을 칭했고, 주화까지 주조했으므로 반란 행위가 명백한 그를 안티오쿠스 3세가 용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약 2년간의 저항 끝에 붙잡힌 그는 안티오쿠스 3세의 명령으로 야만적으로 처형 당했습니다. 이로써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반란군 세력은 말끔히 제거되었습니다. 폰투스 왕국의 공주 였던 그의 미망인은 안티오쿠스 3세에게 투항했습니다.
제4차 시리아 전쟁 이후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1세와 동맹을 맺은 안티오쿠스 3세는 BC 213년 아 카이오스 2세를 그의 수도 사르디스 에서 사로잡아 야만적인 방법으로 처형했습니다. 소아시아 지방 을 안정시킨 뒤 그는 유명한 동방 원정에 착수하여 멀리 인도까지 진출했습니다. BC 212년 안티오 쿠스 3세는 여동생 안티오키스를 아르메니아의 크세르 크세스 왕과 결혼시켰고 크세르크세스는 그 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조공을 바쳤습니다. 파르티아 왕 아르사케스 3세의 수도 헤카톰필로스를 점령 하고 BC 209년 그에게 동맹을 강요했습니다. 이듬해에는 박트리아의 에우티데모스를 격파했지만 그의 칭호와 통치권은 인정해주었습니다. BC 206년 안티오쿠스 3세는 힌두쿠시 산맥을 가로질러 카불 계곡으로 진출했고 인도의 왕 소파가세노스와 우호관계를 새로이 했습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사르디스에 그대로 머무르면서, 이 지역의 통치권을 재정비하는 일에 착수했습니 다. 그는 함부로 군대를 움직이고 싶지 않았기에 별 수 없이 페르가몬, 비티니아, 카파도키아, 폰투스 가 자신의 통치권 밖에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년 후인 BC 212년 그는 군대를 동 쪽으로 출발시켰습니다. 그 성과로 아르메니아의 오론테스 왕조 제10대 국왕인 크세르 크세스에게 자신의 종주권을 강요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바실레이오스 메가스 다시 말해 대왕 이라는 명칭을 선사할 동방 원정에 착수하였습니다. 우선 준비 운동 격으로 BC 209년에는 군대를 이끌고 원래는 셀레쿠스 제국령이었으나 지금은 파르티아의 수도가 되어 있는 헤카톰필로스를 함락시키고 히르카 니아(이란의 카스피해 연안)까지 그들을 쫓아냈습니다. 파르티아의 왕인 아르사케스 2세는 사자를 보내 안티오쿠스 3세에게 종주권을 인정하겠다고 하며 평화를 구걸했습니다.
다음 차례는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이었습니다. 박트리아 왕국은 원래 셀레쿠스 제국령이었으나, 총 독이었던 디오도토스 1세가 제국에 반란을 일으키고 독자적인 왕국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디오도토 스 1세의 아들은 에우티데모스에게 왕위를 빼앗깁니다. 에우티데모스가 디오도토스 왕가를 멸한 지 약 20년째 되었을 때 셀레쿠스 제국군의 침공을 받았습니다. BC 209년, 파르티아를 복속시킨 셀레 쿠스 제국군은 격전 끝에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아리우스 강 전투에서 박트리아 기병 1만명을 몰살 시키고 번개같이 진격하여 그 수도인 박트라(후일 발흐)를 포위했습니다. 이리하여 발생한 안티오쿠 스 3세의 박트라 공성전은 유명합니다. 2년간의 공성전에도 박트라가 함락되지 않자, 빨리 이 곳에 서 떠나 지중해로 돌아가고 싶었던 안티오쿠스 3세의 속은 타들어가기만 했습니다. 에우티데모스도 이 공성전을 더 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양자는 곧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데 합의를 보았습니다.
셀레쿠스 제국과 박트리아 왕국이 맺은 조약의 내용은, ‘반역자 디오도토스를 처단한 공로로 박트리 아 왕위에 에우티데모스를 승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에우티데모스가 어디까지나 셀레쿠스 제국을 상위 군주로 섬겨야 한다는 내용이 전제된 것이지만, 어차피 셀레쿠스 제국을 섬긴다고 해도 그것은 안티쿠스 3세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한 형식적인 것입니다. 에우티데모스는 평화 협상이 진행되는 도 중 갑자기 놀랄만한 제안을 했습니다. 바로 지난날의 원한을 씻게 되었으니,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와 안티오쿠스 3세의 딸을 혼인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 안티오쿠스는 고민 끝에 이를 응낙하기로 하고, 날을 잡아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습니다. 이리하여 박트리아와 셀레쿠스 제국은 완전히 화해했습니다.
안티오쿠스 3세는 동방으로 좀 더 나아가기로 했습니다. BC 205년에는 알렉산더(대왕) 3세의 원 정로를 그대로 따라 카불 계곡과 힌두쿠시 산맥을 지나 인도에 다다랐습니다. 그곳에서 마우리아 제 국의 왕족이었던 소파가세노스로부터 코끼리를 선물받습니다. 그리고 셀레쿠스 1세 때부터 내려오 는 전통적인 동맹관계를 더욱 강화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 케르만 고원을 거쳐 셀레우키아로 입성했습니다. 이 성과는 그리스인들에게 매우 고무적이었고, 그는 “대왕”이라는 호칭을 얻게 됩니다. 이는 안티오쿠스 4세 시대에 본격적으로 이 지역에 그리스인의 식민이 이루어지는 배경이 됩니다.
셀레우키아에서 그는 또 새로운 동방 원정을 준비했습니다. 이번에는 원정 방향이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페르시아 만의 남쪽 연안을 따라 남하하는 것입니다. 이 원정의 주 목적은 제국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아라비아 유목민의 중심 도시인 게라(Gerrhae)를 복속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원정은 게라에서 셀레쿠스 제국의 영향력이 재건되는 것으로 짧게 끝났습니다.
BC 205년(혹은 BC 204년), 라피아의 영웅인 프톨레미 4세 필로파토르가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다 니엘 11:12), 아직 7세에 불과한 프톨레미 5세 에피파네스가 즉위했습니다. 안티오쿠스 3세는 이것 을 좋은 기회로 여기고, 마우리아 제국과 함께 셀레쿠스 제국의 중요한 맹우(盟友)였던 마케도니아 의 필리포스 5세와 손을 잡았습니다. 두 군주는 이집트, 페르가몬, 트라키아를 서로의 이해 관 계가 충돌하지 않는 선에서 분할하고, 서로가 필요하면 즉시 군대를 지원해 주기로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페르가몬이나 로도스 등이 셀레쿠스 제국이 팔레스틴을 손에 넣는 것을 방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BC 200년, 안티오쿠스 3세는 아르메니아를 침공해 오론테스 왕가를 멸망시켰습니다. 앞으로 10년간, 아르메니아 고원은 안티오쿠스 3세의 지배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거대한 봉신국 체계를 수립한 안 티오쿠스 3세는 '대왕'이라는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의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그를 알 렉산더 대왕에 비유하여 그에게도 '대왕'이라는 별칭을 붙였습니다.
안티오쿠스 3세와 필리포스 5세의 계획을 로마가 알게되었습니다. 로마는 사절을 보내, 이집트 그 자체만은 침공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두 군주는 그런 요구에 흔쾌히 응했고, 로마의 사절은 그런대로 만족하면서 돌아갔습니다. 같은 해인 BC 200년, 안티오쿠스 3세는 드디어 팔레스틴을 침 공했습니다. 그러나 아이톨리아 출신의 유능한 프톨레미 제국 장군, 스코파스의 눈부신 활약은 안티 오쿠스 3세를 또다시 좌절시키는 듯 했습니다. BC 199년에는 스코파스의 지휘 하에 이집트 군은 팔레스틴에서 셀레쿠스 제국군을 거의 몰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코파스의 운명은 여기서 끝이 었습니다. BC 198년, 오늘날 요르단인 파니온에서 셀레쿠스 제국군과 프톨레미 제국군의 대규모 전 투가 벌어졌습니다. 다니엘11:13-19. “13 북방 왕은 돌아가서 다시 군대를 전보다 더 많이 준비하였 다가 몇 때 곧 몇 해 후에 대군과 많은 물건을 거느리고 오리라.’
또한 그는 딸 클레오파트라를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결혼시켰습니다. 이집트는 사실상 셀레쿠스 왕조의 보호국이 되었습니다. 다니엘 11:17, ‘17그가 결심하고 전국의 힘을 다하여 이르렀다 가 그와 화친할 것이요 또 여자의 딸을 그에게 주어 그의 나라를 망하게 하려 할 것이나 이루지 못하리니 그에게 무익하리라.’
셋째로 로마와 대전한 마그네시아 전쟁
그러나 동시에 그런 영광과 함께 암울한 소식 역시 존재했습니다.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5세가 로마와 대결하여 키노스케팔라이에서 대패한 것이었습니다. 필리포스 5세는 펠라에 틀어박혀 나오 려 하지 않았습니다. 로마군은 그 동안 필리포스가 애써 키워놓은 마케도니아의 촌락을 약탈하고 다 녔습니다. 필리포스는 이런 손실을 감내하면서까지 항전한 이유는 안티오쿠스 3세의 개입을 기다리 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티오쿠스 3세는 마침 팔레스틴에서 중대한 국면에 접어들어 있던 상 황이었고, 페르가몬 왕국에 군대를 보내었던 상황이었습니다. 필리포스를 도울 수 있는 여유가 없었 습니다. 필리포스는 안티오쿠스 3세에게 실망감을 감추려 하지 않았고, 로마에 항복하여 그 보호국 이 됨으로써 동맹을 바꾸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필리포스는 곧 로마에 더 큰 실망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는 그리스 내의 분쟁에서 언제나 필리포스의 반대편을 들었고, 이런 불만은 계속 쌓여가 종국에는 셀레쿠스 제국과 안티오쿠스 3세는 반(反)로마의 기치 아래 다시 비밀리에 우호 관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와의 일전(다니엘 11:18, ‘18그 후에 그가 그의 얼굴을 바닷가로 돌려 많이 점령할 것이 나 한 장군이 나타나 그의 정복을 그치게 하고 그 수치를 그에게로 돌릴 것이므로 19그가 드디어 그 얼굴을 돌려 자기 땅 산성들로 향할 것이나 거쳐 넘어지고 다시는 보이지 아니 하리라.’
BC 196년, 시리아 전쟁이 매듭지어졌습니다. 프톨레미 5세는 안티오쿠스 3세의 딸 클레오파트라 와 결혼하고, 시리아 경영에서 영원히 손을 뗀다는 내용의 조약을 맺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파니온 전투로 인해 역전된 역학관계는 셀레쿠스 제국이 메소포타미아를 상실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BC 198년, 시리아 전쟁과는 별도로 안티오쿠스 3세는 페르가몬 왕국을 공격했습니다. 이는 오히려 그 들이 로마에 도움을 청하여 로마와의 관계가 악화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BC 197년에는 이오니 아 도시국가가 거이 모두 안티오쿠스의 수중에 들어갔는데, 이들 중 몇몇이 로마에 지원을 청했고, 양국의 적대감이 본격화 되었습니다. BC 196년, 안티오쿠스 3세는 트라키아에 상륙했고, 여기서 자신의 종주권을 선언했습니다.
셀레쿠스 제국의 최대 영토는 바로 이 시점이었습니다. 그리스는 권력의 공백상태로 안티오쿠스 3세 의 트라키아 합병 선언에 아무것도 대응할 수 없었습니다. 트라키아를 합병한다고 선언함으로써 로 마와 셀레쿠스 제국의 관계의 악화가 상당히 심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보 속에서 양국 관계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한니발이 셀레쿠스 제국의 궁정에 망명 신청을 낸 사건이었습니다. 안티오쿠스는 제2차 포에니 전쟁 기간 중 한니발의 활약에 관해 들어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에 대해 최고의 예우 를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한니발은 이것이 그 자신에 걸맞은 대우라고 생각지는 않았습니다. 한니발 은 군대를 이끌고 싶어 했으나 그가 나중에 이끈 것은 육군이 아닌 해군이었습니다.
BC 191년, 때마침 로마에 불만이 많던 아이톨리아 동맹이 사령관으로 안티오쿠스 3세를 선출하자 안티오쿠스 3세는 군대 1만명을 이끌고 그리스 본토에 상륙했습니다. 안티오쿠스 3세는 지난날 스 파르타군이 페르시아군을 이겼던 바로 그 테르모필라이에서 로마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로마군은 숫 자도 많았고 셀레쿠스 제국군은 포위당했으므로, 1만명이 거의 다 죽는 참사 끝에 안티오쿠스만 병 사들의 희생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져 아시아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한니발 에게는 페니키아 해군이 맡겨졌습니다. 로마의 충실한 동맹자였던 로도스는 당시 최강의 해군을 가진 국가로, 만만치 않은 상대인 페니키아 해군을 에우리메돈 해전에서 격파했습니다. 한니발의 패배를 접하자 안티오쿠 스 3세는 해군 제독 폴리크세니다스의 지휘 하에 함선 90척을 맡겨 미오네수스 해전을 이끌게 했습 니다. 그러나 비슷한 수의 로마-로도스 연합 선단과의 싸움에서 안티오쿠스 3세의 해군이 처참한 패 배로 끝났습니다. 이제 셀레쿠스 제국이 로마군의 아시아 상륙을 제지할 방도가 없어졌습니다. 양군 은 마그네시아에서 충돌했습니다. 이를 마그네시아 전투라 합니다.
안티오쿠스 3세가 직접 이끄는 셀레쿠스 제국군은 총 7만 명 규모로, 카타프락트를 포함한 기병이 1만 2천 명이었으며, 낫 달린 전차, 코끼리 54마리 등 제국 내에서 징집할 수 있는 병종은 모두 모 았습니다. 총 5만명 규모인 로마군은 스키피오 장군이 이끄는 로마-그리스의 혼합 병종으로 무장했 으나, 대부분이 로마군이었고 그리스인은 주로 펠타스토이와 호플리타이(아태네, 스파르타의 중무장 보병)로 전투에 참가한 듯 합니다. 기병은 5천 명 가량이었습니다. 결전 장소인 마그네시아는 개활지 가 아니라서 기병을 활용하기 적합지 못한 장소였습니다. 셀레쿠스 제국군은 좌익에서 스스로 혼란 에 빠졌습니다. 전차가 기병의 진군을 방해한 것입니다.
그러자 우익에서 왕 자신이 이끄는 카타프락트 부대가 돌격을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흥분한 나 머지 로마군 측면을 공격하는 대신 로마군의 캠프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전장을 뜻하지 않게 이탈했고, 그와 동시에 페르가몬 왕으로 로마의 동맹 기병을 담당한 에우메네스 2세가 혼란에 빠져있던 셀레쿠 스 제국군의 좌익으로 돌격하여 그들을 괴멸시켰습니다. 중앙에서는 로마군이 코끼리를 겁먹게 하는 데 성공하여 그와 함께 팔랑크스의 측면을 찔러 그들이 마지막으로 무너졌습니다. 전투는 셀레쿠스 제국의 진지가 함락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셀레쿠스 제국군은 무너진 이후였습니다.
안티오쿠스는 결국 로마군에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BC 188년, 안티오쿠스 3세는 로마인들 과 아파메아에서 조약을 맺었는데, 그 내용이 매우 가혹했습니다. 셀레쿠스 제국은 1만 5천 탤런트 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소아시아의 모든 영토를 포기해야 했던 것입니다. 새로운 국경선으로 타우루 스 산맥이 설정되었습니다. 제국 해군의 규모 역시 로마의 규제를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또 후일 안 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되는 자신의 삼남 안티오쿠스 4세를 로마에 인질로 보낼 수밖에 없었습 니다. 안티오쿠스 3세는 제2의 알렉산더 대왕이 되려 했던 자신의 야망을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제국의 주요 수입원은 시리아 북부와 바빌로니아였기 때문에 무거운 배상금이나 소아시아 포 기는 그리 큰 손실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제국의 위신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는 점 입니다. “안티오쿠스 메가스”의 권위를 선언한 지 불과 10년만에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속주들은 곧바로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 아르메니아 출신의 장군인 아르탁 시아스가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아르메니아가 제국에서 분리되어 나갔습니다. 또, 파르티아가 공격해 오기도 했습니다. 제국의 동부 속주는 또다시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안티오쿠스 3세는 다시 동방 원 정을 떠날 결심을 했습니다.
시리아와 바빌로니아는 제국에 충성하고 있으므로, 셀레우키아에서 출발하여 이란 고원의 독립적인 세력들을 토벌하고 이 지역에 다시 제국의 권위를 세우고 싶었습니다. 그는 다시 원정군을 꾸려 셀레 우키아를 출발했습니다. 처음에는 원정이 순조로웠습니다. 그러나, 안티오쿠스 3세가 여기에서 최후 를 맞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는 셀레우키아에서 가까운 자그로스 산록의 바알 신전 을 약탈하라는 명을 내렸을 때, 갑자기 암살자가 뛰쳐나와 그를 찔렀습니다. 치명상을 입은 안티오쿠 스 3세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습니다.
넷째로 안티오쿠스 3세의 사후
그가 사망하자 셀레우코스 제국은 장남 셀레쿠스 4세 필로파토르(BC 187~175)가 통치했습니다. 그 는 긴축 정책을 취하여 로마나 주변국과의 우호관계를 증진시키는 데 힘썼습니다. 셀레쿠스 4세는 후일 데메트리오스 1세가 되는 아들을 로마에 인질로 보내고, 그 대신 동생인 안티오쿠스 4세를 데 리고 왔습니다. 셀레쿠스 4세는 로마에 배상금을 모두 갚고, 제국의 재정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기 때문에, 셀레쿠스 제국은 다시 지중해와 중동의 강자로 떠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셀레쿠스 4세 는 재정장관 헬리오도루스에게 암살당하고, 그에 편승하여 왕위를 얻은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 의 통치가 이어지게 됩니다. 안티오쿠스 4세는 다시 셀레쿠스 제국을 초강대국으로 키우는 데 성공 했으나, 그리 길지 않은 통치 끝에 그가 병으로 사망하면서 셀레쿠스 제국은 그 자신을 파멸로 이끌 긴 내분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와 적그리스도 (다니엘 11:21-45)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에 대해서는 다니엘8:23-25수양과 수염소 그리고 한 작은 뿔의 환상에서도 언급했으며 특히 11:20-45절에서 길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안티오크스 4세 에피파네스는 헬라제국의 4대 분할 중 하나인 시리아 왕국의 셀류쿠스 왕조 제 8대 왕입니다. 그의 예루살렘 성전 모독 사건을 살펴 보면, 이는 역사적으로는 유대를 독립시킨 마카비 혁명(BC 166년)의 기폭제가 된 것으로 그 의의가 참으로 큰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구속사적으로 볼 때 이는 종말에 적그리스도가 자신을 하나님이라 칭하면서 성전에 ‘멸망의 가증한 것(마24:15)을 세우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모독할 것에 대한 예표적 사건으로서도 그 의의가 큰 사건이었습니다.
따라서 비록 본문은 본 사건이 실제로 발발하기 약 400 년 전에 주어진 예언이지만 이 사건을 살펴보는 것은 일차적으로 다니엘의 예언이 얼마나 정확하게 성취되었는가를 확인케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말세에 등장할 적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경계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안티 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위대한 정복자 안티오쿠스 3세의 셋째 아들로서 그의 형 셀류쿠스 4세 필로파토르의 뒤를 이어 셀류쿠스 왕조 제 8대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에피파네스는 왕이 되기 전에 14년 동안 로마에 인질로 잡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부친 안티오쿠스 3세가 BC 190년 카르타고의 장군인 한니발과 연합하여 로마와 벌린 서머나전투에서 크게 패한 후에 20명의 볼모와 함께 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에피파네스는 로마에서 14년 동안 살면서 헬라문화에 깊이 심취했었습니다. 때문에 그가 왕이 된 후에 정치, 경제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황을 바로 잡고 정치적 파벌싸움을 잠재우기 위 하여 강력한 헬라화 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는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상의 모습 을 따서 자신의 우상을 만들고 백성들로 하여금 숭배하게 했습니다. ‘에피파네스’란 이름은 ‘명백 히 나타난 신’이라는 의미의 헬라어 ‘데오스 에피파네스’에서 따온 것으로 자신을 신격화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에게 ‘에피마네스’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는데 그것은 ‘미 친놈’, ’정신병자’란 뜻입니다.
그러던 중에 BC 170년 에피파네스는 이집트를 침공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이집트 왕국 의 왕인 프톨레미 6세 필로메토르가 과거 안티오쿠스 3세에게 빼앗긴 코엘레 시리아 땅을 되찾 으려고 전쟁을 준비한다는 사실을 에피파네스가 미리 알고 선제 공격을 했던 것입니다. 이 전쟁 에서 에피파네스는 이집트를 완파하여 이집트를 멤피스와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양분하고 프 톨레미 6세의 동생인 프톨레이 7세 피스콘을 또 다른 왕으로 세워 두 정부가 서로 경쟁하도록 만들어 놓고 본국으로 귀환하였습니다.
그 후 1년 뒤인 BC 169년에 이집트의 두 형제 왕은 에피파네스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연합 왕정 을 수립하게 됩니다. 이에 에피파네스는 재차 이집트 정복에 나서게 되는데(28절), 먼저 프톨레 미 6세가 다스리는 멤피스를 정복하고 거기서 다시 진군하여 프톨레미 7세가 다스리는 알렉산 드리아를 점령하기 직전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이집트를 즉각 철수하라는 최후통첩을 받게 됩니 다. 로마에서 인질로 14년 동안 살았던 그는 로마제국의 막강한 군사력을 보았었기 때문에 감히 그 최후 통첩에 항거하지 못하고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에피파네스가 군대를 철수하여 자국으로 돌아가고 있을 무렵 유대 땅에서는 말하자면 에피파네스가 전쟁에서 죽었다는 유언비 어가 돌았습니다.
그리고 BC 167년에는 드디어 유대인들이 조상 대대로 지켜오던 율법 준수를 금지하기에 이르렀 습니다. 즉 안식일 준수, 절기 시에 행하는 축제, 번제 제사, 어린아이의 할례 등을 금지시켰습니 다. 그리고 율법서(Torah)를 모두 불태우며 성전 제단에서 부정한 제물로 우상을 숭배하게 하고 유대인들에게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리고 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어기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가차 없이 사형에 처하게 했습니다. 이 같은 가증스런 행위가 절정에 이른 것은 BC 167년 12월 16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제사를 매월 25일에 지내게 했는데, 이 날은 에피파네스의 생일이었습니다. 결국 유대인들로 하여금 에피파네스 자신을 위해 제우스 신상 앞 에서 제사를 드리게 한 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에피파네스의 크나큰 실책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종교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습니다. 또 그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전통이 마치 이집트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 각하여 무조건 독단적으로 이를 폐지하고 헬라화시키도록 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감정을 극 도로 자극한 것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마카비 혁명이라는 유대 독립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다니엘 예언대로 BC 167년 에피파네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더럽혀 지는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했습니다. 이처럼 다니엘에 의해 성전 모독 사건이 예언되고 이것이 역사적으로 분명히 성취된 사실은 비록 표면적으로 볼 때에 역사가 마치 권력을 가진 이 세상의 악한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배후에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의 손길이 작용함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에피파네스의 성전 모독 사건은 궁극적으로 세상 끝날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신성 을 모독하고 도전할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적그리스도의 모독도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가만히 보고만 계시기 때문이 아니라 이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여 최종 심판하실 날까지 잠정적으 로 허용하심 때문이며 이에 성도들은 결코 놀라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처럼 모든 역 사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 성도들은 환난 가운데서도 오히려 소망 중 에 주님을 찬양하는 역동적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21또 그의 왕위를 이을 자는 한 비천한 사람이라 나라의 영광을 그에게 주지 아니 할 것이나 그가 평안한 때를 타서 속임수로 그 나라를 얻을 것이며 22넘치는 물 같 은 군대가 그에게 넘침으로 말미암아 패할 것이요 동맹한 왕도 그렇게 될 것이며23 그와 약조한 후에 그는 거짓을 행하여 올라올 것이요 소수의 백성을 가지고 세력을 얻을 것이며…’
첫째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유대인 박해(다니엘 11:21-35)
21절부터는 “작은 뿔”로 상징되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대한 예언입니다. 에피파네스는 14년 동안 로마에 볼로로 잡혀 있을 때에 간계를 써서 자기 형인 필로파토르의 장자인 데메트 리우스를 로마로 불러들였으며 그를 자기 대신 로마에 볼모로 남겨둔 채 조국 시리아로 돌아 옵니다. 조카 데메트리우스에게는 너를 왕위에 오르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돌아오는 도중에 마침 헬리오도루스가 셀류쿠스 4세를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이 소식을 들은 에피파네스는 지체하지 않고 왕궁으로 달려가 헬리오도루스를 물리치고 왕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 BC 175). 21절에서 성경은 에피파네스를 비천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비천하다는 말은 신분이 비천하다기 보다 그의 인격이 비천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일에 있어 계략과 모략과 속임수로써 해결했습니다. 에피파네스가 불법으로 왕위에 오르자 모든 신하들은 에피파네스가 왕위 계승권자가 아니므로 로마에 볼모로 잡혀 있는 이미 20세를 넘어 왕권을 계승해야 할 데메트리우스를 데려와 왕으로 삼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때 데메트리우스1세는 로마에 있었기 때문에 삼촌으로부터 죽음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서 안티오쿠스4세에 대하여 “그가 평안할 때를 타서 속임수로 그 나라를 얻을 것이며(11:21)”라고 예언한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22넘치는 물 같은 군대가 그에게 넘침으로 말미암아 패할 것이요 동맹한 왕도 그렇게 될 것이며’헬리오도루스를 비롯한 시리아의 대신들은 합법적인 왕위 계승권자가 아닌 에피파네스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반대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패배하였고, 이 사건 이후 에피파네스의 왕위는 안정 궤도에 올랐습니다. 여기 ‘동맹한 왕’은 당시 유대의 대제사장이었던 오니아스 3세를 가리킵니다. 오니아스는 왕이 없던 유대의 실질적인 지배자로서 헬리오도루스의 편에 서서 에피파네스에게 대항하였습니다. 그러나 에피파네스는 헬리오도루스와 오니아스 3세가 이끄는 동맹군을 격파하였으며, 이 사건은 에피파네스가 유대 민족을 살륙하고 핍박하게되는 빌미가 되었습니다.
‘23그와 약조한 후에 그는 거짓을 행하여 올라올 것이요 소수의 백성을 가지고 세력을 얻을 것이며’
에피파네스는 역시 자기 조카이며 시리아의 정당한 왕위 계승자인 데메트리우스를 속여서 왕이 되었고 또한 클레오파트라의 아들인 조카 애굽의 프틀레미 6세와 거짓 평화조약을 맺음으로써 그를 방심하게 한 뒤 약속을 어기고 애굽을 침공하여 그를 사로잡은 사건을 가리킵니다.
‘24그가 평안한 때에 그 지방의 가장 기름진 곳에 들어와서 그의 조상들과 조상들의 조상이 행하지 못하던 것을 행할 것이요 그는 노략하고 탈취한 재물을 무리에게 흩어 주며 계략을 세워 얼마 동안 산성들을 칠 것인데 때가 이르기까지 그리하리라.’
에피파네스가 프톨레미 6세와 평화조약을 체결한 뒤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서 애굽의 비옥한 지역을 침략하였던 사건을 지칭합니다. 모략에 의해 왕위 계승자가 뒤바뀐 일과 시리아가 애굽 본토를 공략한 일은 모두 에피파네스 이전의 시리아 역사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일이므로 조상이 행하지 못하던 것으로 부르기에 합당합니다. 에피파네스는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반대파들과의 전쟁과 그리고 애굽과의 전쟁을 통해 얻은 전리품을 자신의 지지자들 및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는 정책적으로 재물을 나누어주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음으로써 자신의 지지 기반을 굳혀 나갔습니다. 역사가들은 에피파네스가 자신의 지지자 들에게는 재물을 아낌 없이 나누어 주는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에피파네스의 비열한 면을 잘 드러내 줍니다.
‘때가 이르기 까지 그리하리라’는 말은 자신의 세력 기반이 어느 정도 확고하게 구축될 때까지 라는 말입니다. 에피파네스가 지지자들에게 전리품을 나누어 주는 선심을 베푼 것은 그의 집권 초기에 국한 된 일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지지자들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아닌 더 큰 지지를 얻어 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 했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표 대로 세력 기반을 다진 후에는 곧 잔인한 폭군으로 변하였습니다. 에피파네스는 여우처럼 들어와 사자처럼 다스렸던 것입니다.
‘25그가 그의 힘을 떨치며 용기를 다하여 큰 군대를 거느리고 남방 왕을 칠 것이요 남방 왕도 심히 크고 강한 군대를 거느리고 맞아 싸울 것이나 능히 당하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계략을 세워 그를 침이니’에서 에피파네스는 BC170년에 애굽을 침략하였습니다. 침공해 오는 에피파네스를 막으려고 프톨레미 6세는 모든 저항을 다 했으나 애굽의 군대는 에피파네스의 모략을 당하지 못하고 자멸하고 말았습니다. 애굽을 자멸하도록 만든 간교한 에피파네스의 모략은 26절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26그의 음식을 먹는 자들이 그를 멸하리니 그의 군대가 흩어질 것이요 많은 사람이 엎드러져 죽으리라’
여기 ‘그의 음식을 먹는 자’의 그는 프톨레미 6세를 말합니다. 프톨레미 6세의 진미를 먹는 자들이란 그의 측근들을 말합니다. 이 예언대로 에피파네스는 애굽 왕의 모사들을 포섭하여 프톨레미 6세를 배반하게함으로써 애굽을 내란에 빠뜨렸습니다. 이 틈을 타서 에피파네스는 파죽지세로 애굽 군을 격파하고 프톨레미 6세를 포로로 잡습니다. 이로써 애굽은 에피파네스의 손에 넘어 갑니다.
‘27이 두 왕이 마음에 서로 해하고자 하여 한 밥상에 앉았을 때에 거짓말을 할 것이라 일이 형통하지 못하리니 이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애굽을 점령한 에피파네스는 애굽을 두 개의 왕국으로 분할함으로써 그 힘을 반분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에피파네스는 프톨레미 6 필로메토르가 지배하는 왕국과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동생 프톨레미 7세 피스콘이 지배하는 왕국으로 애굽을 불할하는 조건을 프톨레미 6에게 제시합니다. 이에 자구책을 모색하던 프톨레미 6세는 에피파네스의 제안을 받아드려 일단 위기를 모면한 뒤 다시 분할된 애굽을 통합하여 힘을 키우면 된다고 생각하고 에피파네스가 제시한 평화협정 문서에 서명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조약문서는 위에서 밝힌 대로 프톨레미 6세의 거짓 맹세와 이를 미리 간파한 에피파네스의 제 3차 애굽 침공으로 말미암아 아무런 의미도 없는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상과 같은 예언의 말씀들을 통하여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사악한 자로서 말세에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모형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 언급하고 있는 본문만을 볼지라도 그의 본성은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는 야심을 가지고 조카를 대신하여 섭정 왕이 되었으나 그의 왕권을 되돌려 주지 않았고 오히려 스스로 왕이 되었으며, 또한 그의 조카들(필로메타, 피스콘, 이들의 어머니인 클레오파트라가 프톨레미 5세의 아내였으므로)의 나라인 프톨레미 왕가를 지배하기 위하여 온갖 음모를 꾸몄으며, 또한 유다를 자신의 지배아래 두고 거룩한 언약을 거슬리고(11:28) 뇌물에 따라 제사장직을 주고 빼앗았고, 성전을 더럽힘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11:28-35. ‘28 북방 왕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가리니 그는 마음으로 거룩한 언약을 거스르며 자기 마음대로 행하고 본토로 돌아갈 것이며’
그는 애굽으로부터 탈취한 많은 재물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28절의 예언이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 줍니다.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중 중간 귀착지인 예루살렘에서 잠시 머뭅니다. 그 때에 에피파네스는 자기의 승전에 도취되어 교만해져 율법에 아론의 자손 만이 할 수 있고 사람이 임으로 세우거나 폐할 수 없는 유대의 대제사장 직을 자기 마음대로 교체하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 때에 유대의 대제사장은 야손이었습니다.
여기 성전 모독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안티오쿠스4세는 야손이라는 이름의 대제사장계 젊은이로부터 당시의 대제사장이었던 오니아스 3세를 축출해 주면 그것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 준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야손은 헬라식 이름이고 히브리식은 여호수아입니다. 이 사람은 헬라화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안티오쿠스는 그의 제안대로 오니아스를 대제 사장으로부터 축출하고 야손을 그 자리에 앉혔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메넬라우스는 안티오쿠 스 에게 더 많은 대가를 약속하고 야손을 축출하고 그의 대제사장직을 얻었습니다(B.C.172).
이 사람은 아론 자손이 아닌 베냐민지파였습니다. 이러므로 아론 이래 천여년간 지속되어 오던 유대인의 여호와 신앙 전통을 뿌리 채 뒤흔드는 행위였습니다. 메넬라우스는 뇌물에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봉헌물과 성전 기구 등을 팔았습니다. 이런 신성 모독에 대하여 이미 면직 된 오니아스는 항거했고 메넬리우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그를 죽여 버렸습니다. 이처럼 메넬라 우스의 악행은 예루살렘 백성들을 동요하게 했고 그들은 대표단을 안티오쿠스에게 보내어 메넬라우스를 고발했습니다. 안티오쿠스는 그들의 고발에 따라 오니아스를 죽인 네넬라우스의 부하를 처형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메넬라우스는 뇌물로 인하여 자리를 지킬 수 있었고 오히 려 그를 고발했던 예루살렘 대표단은 두로에서 안티오쿠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28절 하반절 “그는 마음으로 거룩한 언약을 거스르며 자기 마음대로 행하고 본토로 돌아갈 것이며”에서 “거룩한 언약”은 하나님의 율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하나님을 모독하고 성전 예배를 금지하므로 이스라엘의 신앙에 큰 해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29 작정된 기한에 그가 다시 나와서 남방에 이를 것이나 이번이 그 전번만 못하리니’
여기 ‘작정된 기한’이란 하나님께서 에피파네스에게 애굽의 프톨레미 6세를 치도록 작정하신 때를 말합니다. 에피파네스는 자신의 애굽 분할 계책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프톨레미 6세가 자신에게 진심으로 승복하지 않는 것을 알고 다시 대군을 이끌고 애굽을 침공합니다. 그러나 그의 대대적인 침공을 1차 침공 때보다도 못한 결과를 초래하였는데 그 원인은 애굽의 배후에서 시리아를 견제하고자 하는 로마의 협박 때문이었습니다. 30절의 깃딤은 본래 구브로로 오늘날의 키프러스 섬에 위치했던 도시국가를 뜻합니다. 성경에서는 종종 마케도니아 지역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에피파네스는 지중해에 있는 해상 요충지인 구브로섬을 점령하여 애굽 침공을 위한 중간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로마는 당시 로마의 휘하에 있던 ‘깃딤의 배들’인 마케도니아 함대를 원군으로 보냈으나 에피파네스의 군대는 구브로에서 애굽 본토인 알렉사드리아로 진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때 제 3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사기 충천해 있던 로마는 포필리우스 레나스를 사절로 보내어 에피파네스에게 애굽에서의 철수를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거만한 로마 사절 포필리우스는 에피파네스를 만나 에피파네스의 주위에 원을 그리고 그 원 밖으로 나오기 전에 애굽에서의 철수 여부를 대답하도록 위협했습니다. 이에 로마의 위세에 눌린 에피파네스는 굴욕적인 요구에 굴복하여 애굽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에피파네스는 로마군의 간섭으로 인해 애굽 정복에 실패한 후 본국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시리아와 로마 사이에 있는 완충지대에 있는 유대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유대의 헬라화 작업을 급격히 진해하게 됩니다. 로마의 위세에 굴복하여 패전한 것이나 다름 없는 상태에 있었던 그가 승리했을 때 보다 더 심한 악행을 유대 민족에게 저질렀던 것입니다. 로마에게 매 맞고 유대에 화풀이를 한 것입니다. 에피파네스의 유대인 핍박은 주로 종교적인 분야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헬라화 정책에 대한 유대 지도자들의 반대 이유가 종교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애굽과의 싸움에서 애굽을 지원하기 위하여 파견 된 로마군에게 패배를 당한 후 퇴각하여 예루 살렘 근처에 진을 치게 되었습니다. 당시 야손은 안티오쿠스가 애굽과의 전쟁에서 전사했다는 그릇된 소식을 듣고 메넬라우스를 축출하기 위하여 지지자 1,000명을 이끌고 메넬라우스를 붙잡아 예루살렘성에 가두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안티오쿠스는 보복하기 위하여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해 8만 여명을 학살하고 1,800달란트에 상당하는 성전의 금 그릇과 물건들을 약탈해 갔습니다.
‘30그가 낙심하고 돌아가면서 맺은 거룩한 언약에 분노하였고 자기 땅에 돌아가서는 맺은 거룩한 언약(율법, 토라)을 배반하는 자들을 살필 것이며 31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을 세울 것이며’
그는 특별히 30절에서 “거룩한 언약을 배반한 자”는 메넬라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안티오쿠스가 성전의 기명을 약탈해 갈 때에도 자신들을 지지해 준 그들을 막지 않았습 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신앙의 양심을 기꺼이 억눌렀던 것입니다. 31절은 안티오쿠스의 군대들이 성소를 약탈함으로 더럽힌 것과 제사를 폐한 것 그리고 성전에 우상을 세운 것 등을 말하고 있습니다. 31절은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한 것은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자 마자 자신의 군대를 성전 남문에 주둔시킴으로 인해 성전 바깥 부분은 물론 성소마저 잔인하고 무식한 군인들의 군화에 짓밟히고 더럽혀졌습니다. 또 31절에서, 에피파네스는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였습니다. 유대교의 제사 금지 조치는 에피파네 스가 강력하게 추진하던 유대의 헬라화 정책 중 하나였습니다.
또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을 세울 것이라’한 것은 안티오쿠스가 유대인의 신앙을 완전히 없애고 그들을 헬라화하기 위하여 성전에 우상(제우스 신상)을 세운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 끝 날에 이루어 질 일들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다니엘이 예언 한 바로 이 예언의 말씀을 인용하셨음(마24:15)을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번제단이 있던 곳에 제우스 우상을 세운 후에 번제단에 돼지고기를 바쳤습니다.
‘32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하는 자를 속임수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떨치리라.’에서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하는 자는 에피파네스가 유대의 배교자들을 감언이설과 달콤한 말로 꾀어 하나님을 모욕하고 유대의 전통과 자존심을 무너뜨리 도록 획책하였던 사실을 예언합니다. 이와 같은 시대 배경 가운데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거룩한 언약을 배반하고 안티오쿠스 편에 붙어 유다의 헬라화를 가속화한 자들에 반하여, 유대 가운데 영웅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잃어버렸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회복하려는 거룩한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 운동은 당시 제사장이었던 맛디야를 중심으로 일어난 하시딤(신성하고, 거룩하고, 충성된 자들) 운동이었습니다. 그들은 에피파네스에게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돕는 유대인 협력자들에 대해서까지 반대하였습니다. 그 후에 하시딤의 일부는 바리새 분파(페루쉼, 분리된자들)가 되었고, 또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는데 이들은 엣센파였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분리주의를 따랐습니다.
33 백성 중에 지혜로운 자들이 많은 사람을 가르칠 것이나 그들이 칼날과 불꽃과 사로잡힘과 약탈을 당하여 여러 날 동안 몰락하리라.’
여기 ‘지혜로운 자’는 에피파네스의 회유나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유대적 전통을 사수하려던 일부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안티오쿠스 4세의 유대인 박해 정책은 이들의 헬라화 정책에 동조하여 이권을 얻으려는 일부 몰지각한 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대인 들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성전과 율법을 모독한 사건(31, 32절)은 유대인들의 민족적, 종교적 자존심을 송두리째 무시해버리는 행위였으며 시리아에 대한 전국적인 저항운동 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조직적이고 무력에 의한 저항을 본격화하기 이전에 유대인들은 먼저 고의적으로 에피파네스가 금지한 율법을 가르치고 유대교 의식을 공개적으로 행하여 에피파네스에 대한 저항의 뜻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저항을 이끈 이들은 회당의 서기관들과 경건파 하시딤이었습니다.
하시딤 운동에 참여한 자들이 안티오쿠스의 박해 기간 동안 유다의 애국자들은 백성들에게 이방의 더러운 것을 버리고 회개하고 구원의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로 인하여 생명의 위험까지 감수해야 했고 실제로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재산과 생명을 잃었 습니다. 실제로 이런 예언이 성취 된 해는 B.C.168년 이었습니다. 이 해는 모데인 (Modein) 이라는 도시의 제사장이었던 맛다냐에 의해 폭거가 일어난 해였습니다. 맛다냐와 그의 다섯 아들들(요한 갓디스, 시몬 닷시, 유다 마카비, 엘르아살 아바란, 요나단 압프스)은 우상숭배에 대한 새로운 칙령을 강요했던 안티오쿠스의 관리를 살해한 후 대원들을 이끌고 산으로 피해 유다 많은 성으로부터 지지자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안티오쿠스 군대와 첫 번째 싸움에서 많은 희생자를 내었습니다. 이들은 안식일 에는 공격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방어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식일에 공격해 오는 안티오쿠스군에게 참혹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그들은 후에 정책을 바꾸어 불가피한 전쟁은 안식일에도 허용하였습니다. 이후로 그들은 안티오쿠스의 우상숭배의 법령에 복종한 유대인들을 징계했고, 또한 안티오쿠스의 군대와 싸울 때에도 영웅적으로 싸워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특별히 맛다냐가 죽은 후, 하시딤 운동은 그의 능력 있는 아들들의 지도력에 의하여 계속 되었습니다. 특별히 맛다냐가 죽은 후 군대의 지도권은 그의 아들들 가운데 유다 마카비에 위임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때부터 마카비 시대 또는 전투라는 이름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마카비는 예언의 성취를 이루었던 것이다.
‘34 그들이 몰락할 때에 도움을 조금 얻을 것이나 많은 사람들이 속임수로 그들과 결합할 것이며 35 또 그들 중 지혜로운 자 몇 사람이 몰락하여 무리 중에서 연단을 받아 정결하게 되며 희게 되어 마지막 때까지 이르게 하리니 이는 아직 정한 기한이 남았음이라”
마카비 가문의 사람들에 의해 주도된 대 에피파네스 항거가 성공을 거두자 마카비 혁명에 동참하게 될 것을 말합니다. 마카비 무리들은 처음에는 적은 무리였으나 점점 강성하여 안티오쿠 스의 군대뿐만 아니라 유대인들 가운데 헬라주의에 동화되었던 사람들까지 위협을 받게 되자 헬라주의에 동화되었던 자들이 이번에는 또 다시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하시딤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카비 가문의 승리 이후에 대 시리아 항거에 동참한 대부분은 단지 마카비 군이 에피파네스에게 동조하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것을 무서워하여 마카비 혁명에 동참하였거나, 아니면 마카비 혁명이 성공하여 많은 사람이 모여들므로 하나님의 힘보다 모여든 사람들의 힘으로 혁명을 성취시켜 보려고 하는 인본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처럼 대의를 위하여 살지 않고 자신의 탐욕에 이끌리는 자들은 정함이 없는 자들이고 그들은 신뢰할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언제든지 신의를 저버릴 수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후에 그들은 또 다시 하시딤을 배반하고 적들에게 도움을 주는 자들로 변신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전투에서 이 영웅적인 애국자들이 승리한 것은 아닙니다. 안티오쿠스의 군대와의 전쟁에서 때로는 승리를 얻기도 했고 패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와 같은 전쟁의 반복을 통하여 결국 안티오쿠스 군대를 유다로부터 몰아내고 유다의 독립 왕국을 이루었습니다. 이 최초의 왕국은 시몬 마카비우스의 아들 요한 힐카누스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그의 호전적인 아들 알렉산더 자나에우스(B.C.104-78)때 전성기를 이룹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두 가지 사실을 교훈 받습니다. 하나는 마지막 때가 가까워 올수록 믿음의 사람들은 신앙으로 인하여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로운 자들이 승리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믿음에 따라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 세상으로부터 오는 불신앙의 도전과 유혹으로부터 승리하기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지혜를 줍니다. 즉 이 교훈들은 믿음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이 고난의 길을 피하고자 한다면 그는 반드시 패할 것이지만 고난을 당할지라도 믿음을 지킨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은 신앙으로 인하여 고난을 받으려고 하기 보다는 세상적인 것들을 더 많이 얻음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안락한 삶을 살기 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신앙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할 때 견디지 못하고 세상과 타협하므로 신앙에서 떠납니다. 그러나 이런 자들은 정함이 없는 자들로서 마치 맛을 잃은 소금처럼 하나님에게도 쓸모 없는 자들이 되고 세상 사람들에게도 쓸모 없는 사람들이 되어 밖에 버려져서 사람들에게 밟힐 것입니다.
둘째로 에피파네스가 하나님을 대적함(다니엘 11:36-39)
다니엘 11:36. “36 그 왕은 자기 마음대로 행하며 스스로 높여 모든 신보다 크다 하며 비상한 말로 신들의 신을 대적하며 형통하기를 분노하심이 그칠 때까지 하리니 이는 그 작정된 일을 반드시 이루실 것임이라”
다니엘 11:21-35절까지는 에피파네스가 유대인들을 박해할 것에 대한 예언이었고, 36-39절까지는 에피파네스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모독할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러므로 이 36-39절은 에피파네스가 행할 행동이 마지막 때에 나타날 적그리스도가 행할 일에 대한 예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들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에피파네스의 행위를 통하여 장차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행태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편 본절은 에피파네스가 자신을 살아 있는 현인신(現人神)으로 섬기도록 강요함으로써 궁극적 으로 하나님께 정면으로 대적하는 범죄를 저지르게 될 사실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현신인 은 헬라어로 데오스 에피파네스입니다. 이 현신인 시도는 에피파네스의 선조 대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셀류쿠스 1세의 손자인 시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2세, 에피파네스의 할아버지 역시 자신과 왕비를 신이라 여기도록 했습니다. 에피파네스는 실제로 스스로 신이라고 자처하여 자신의 초상이 그려져 있는 동전을 만들고 그 안에 ‘신’이라는 의미를 가진 ‘데오스’ 라 는 문구를 새겨 넣었습니다. ‘비상한 말로 신들의 신을 대적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계시록 13:5,6 에, ‘5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6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 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에서 다니엘 11:36의 비상한 말 로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말이 계시록 13:5, 6의 적그리스도와 일치합니다. 다니엘 11:36의 ‘신들의 신을 비상한 말로 대적한다’에서 이 ‘신들의 신’은 하나님을 가리 키는데 하나님을 말로 대적합니 다. 다니엘 11:36을 영어성경으로 읽어 보겠습니 다. ’36 The king will do as he pleases. He will exalt and magnify himself above every god and will say unheard-of things against the God of gods. He will be successful until the time of wrath is completed, for what has been determined must take place.’
언제까지 에피파네스가 이렇게 악행을 하게 되느냐 하면 ‘형통하기를 분노하심이 그칠 때까지 하리니 이는 그 작정된 일을 반드시 이루실 것임이라.’라 했습니다. 이것은 에피파네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분량이 극에 달하여 심판하시기에 합당한 때가 될 때까지 입니다. 에피파네스는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분노가 극에 찰 때까지 악행을 중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어떤 병으로 죽게 됩니다(45절).
‘37 그가 모든 것보다 스스로 크다 하고 그의 조상들의 신들과 여자들이 흠모하는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며 어떤 신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38 그 대신에 강한 신을 공경할 것이요 또 그의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신에게 금 은 보석과 보물을 드려 공경할 것이며’ 에서 에피파네스는 스스로 자신을 모든 것보다 크다 하며 35절에서, ‘스스로 높여 모든 신보다 크다 하며’에서와 같이 두 번이나 자신을 헬라인들이 섬겼던 모든 신보다 자신이 더 크다고 합니다. 셀류쿠스제국의 왕인 에피파 네스는 헬라인입니다. 헬라인들의 신은 제우스, 아폴론, 포세이돈 등일 것입니다. ‘그의 조상들의 신들’이란 헬라 사람들이 섬기던 이런 신들을 말합니다. ‘여자들이 흠모하는 것’이란 아폴론의 쌍둥이 여형제 아르테미스(다이아나)는 처녀의 수호신인데 이 아르테미스를 의미할 지도 모릅니다. 그 뒤에 ‘어떤 신도 돌아보지 않는다’고 하므로 여자들이 흠모하는 것도 신을 의미합 니다.
그 대신에 38절에서 ‘강한 신을 공경할 것’이란 말은 자신이 오직 숭배하던 제우스를 말하는데 그것은 제우스가 헬라의 주신(主神)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권력의 신만 숭배한다는 것은 모든 나라를 정복하여 신처럼 군림하고자 하는 야망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신에게 금 은 보석과 보물을 들려 공경한다’란 자신의 조상들이 섬기던 여러 신들이 아닌 자기가 만들어 섬기는 권력의 신, 무력의 신 즉 제우신을 빙자한 신(곧 자기 자신)을 받들어 섬길 것을 말합니다. 고대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에 승리하면 자신들의 신이 전쟁에서 이기게 해주었다하여 신전에 탈취한 보물들을 바쳤던 것입니다.
‘39그는 이방신을 힘입어 크게 견고한 산성들을 점령할 것이요 무릇 그를 안다 하는 자에게는 영광을 더하여 여러 백성을 다스리게도 하며 그에게서 뇌물을 받고 땅을 나눠 주기도 하리라’ 이 말은 이방신이란 자신이 숭배하던 제우스를 말하며 ‘크게 견고한 산성들을 점령한다’는 것으 무력으로 예루살렘과 유대의 여러 도시와 요세들을 점령한 그곳에 제우스신상(자기 자신을 신으로 형상화 한 것)을 세워 유대인 들에게 숭배를 강요함으로써 유대 땅은 물론 유대인들의 마음까지도 정복하려 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무릇 그를 안다 하는 자에게는 영광을 더하여 여러 백성을 다스리게 하며’는 에피파네스에게 아첨하고 그의 헬라화 정책에 동조하여 이방신을 받아들인 유대인 변절자들을 말합니다. 에피파네스는 자신을 지지하는 유대인 배교자들에게서 뇌물을 받고 권력과 땅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셋째로 에피파네스의 말로(다니엘 11:40-45)
다니엘 11:40-45. “40 마지막 때에 남방 왕이 그와 힘을 겨룰 것이나 북방 왕이 병거와 마병과 많은 배로 회오리바람처럼 그에게로 마주 와서 그 여러 나라에 침공하여 물이 넘침 같이 지나갈 것이요’
‘마지막 때’란 직접적으로는 에피파네스의 죽음이 임박한 시점을 가리킵니다. 궁극적으로는 종말 에 있을 마지막 때를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남방 왕이 그와 힘을 겨를 것이나’에서 남방왕은 애 굽의 프톨레미 6를 말하며 북방 왕은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를 말합니다. 프톨레미 6세와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와의 4차 전쟁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는지에 대해 논란이 많습니다. 그런데 에피파네스의 말년의 행적에 관한 기록이 현재는 없다 하더라도 언젠가 나타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그런 일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너진 여리고성 성터나 트로이 목마 도 나중에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성경이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40절의 예언에 따라 에피파네스의 애굽 4차 침공도 충분한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 에피파네스는 로마의 압력 때문에 애굽 정복을 포기하고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0절). 그러자 애굽의 프톨레미 6세가 로마를 등에 업고 에피파네스에게 보복하기 위해 시리 아를 침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역부족으로 실패하고 도리어 에피파네스에게 애굽을 침공할 빌미 를 제공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에피파네스는 자신이 점령한 각 지역에 있는 신전의 재화를 징발 하여 군비를 확보한 다음 기마 부대와 전함을 동원하여 애굽으로 진군하게 된 것입니다.
‘41 그가 또 영화로운 땅에 들어갈 것이요 많은 나라를 패망하게 할 것이나….’에서 여기 ‘영화로 운 땅’은 유대인이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땅을 말합니다. 애굽의 선제 침공에 대하여 반격하고 나 선 에피파네스가 애굽과 함께 유대 지역까지 공격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많은 나라를 패망 케 할 것이라’는 것은 전쟁을 위해 출전하는 정복국이 지나가면 식민지는 여지없이 군비와 노역 을 징발당하기 마련이며, 직접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은 완전히 초토화 되는 것입니다. 지배국인 에피파네스의 군대의 행군로 도중에 있는 여러 나라가 그의 군대로 인하여 큰 피해를 입게 될 것 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41절, ‘….오직 에돔과 모압과 암몬 자손의 지도자들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에서는 에피파 네스가 에돔과 모압과 암몬의 귀족들을 건드리지 않은 것은 이들이 위치상 보다 내륙에 위치하여 에피파네스의 정복전쟁에 있어서 최대 목표인 애굽을 징벌하는 진군로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 입니다. 또 그들은 에피파네스의 헬라화 정책에도 적극 동참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다신 우상 숭배자들이기에 헬라의 여러 신들을 섬기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섬기는 많은 신들 중에 헬라 신들을 하나 더 보태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 민족은 유일신 여호와 하나 님을 섬기는 자들이기에 다른 신들을 섬길 수 없었습니다.
‘42 그가 여러 나라들에 그의 손을 펴리니 애굽 땅도 면하지 못할 것이니 43 그가 권세로 애굽의 금 은과 모든 보물을 차지할 것이요 리비아 사람과 구스 사람이 그의 시종이 되리라.’는 에피파 네스는 프톨레미 6세가 마련해 준 절호의 기회를 이용해 애굽 본토 전역을 초토화시켰으며 그곳 에 있던 수 많은 보화들을 전리품으로 가져갔습니다. 43절에 또한 ‘리비아 사람 구스사람이 그의 시종이 되리라는 것은 리비아는 애굽의 서북쪽 현재의 리비아이며, 구스는 애굽의 남쪽에 위치한 지역으로서 지금의 에디오피아인데 이들은 애굽과 동맹국이었는데 애굽이 점령되면서 함께 에피 파네스에게 항복하였던 것입니다.
‘44 그러나 동북에서부터 소문이 이르러 그를 번민하게 하므로 그가 분노하여 나가서 많은 무리 를 다 죽이며 멸망시키고자 할 것이요’
에피파네스로 하여금 이렇게 분노하고 번민케 한 동북에서 온 소문은 시리아의 동북 쪽에 있던 파르티아와 아르메니아의 반란 소식을 가리킵니다. 파르티아와 아르메니아의 반란군은 에피파 네스의 시리아 왕궁을 공격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에피파네스는 애굽과 인근 지역을 완전히 정벌하려던 모든 계획을 포기하고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본국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었 습니다. 에피파네스는 파르티아와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자신의 군 대 절반을 그 곳으로 파견하는 한편, 유대 내에서의 불리해진 상황을 반전 시키고 나아가 유대를 완전히 점령 하기 위해 남은 절반의 자기 군대로 예루살렘 근처에 군진을 설치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45절의 ‘그가 장막 궁전을 바다와 영화롭고 거룩한 산 사이에 세울 것이나’에서 ‘장막 궁 전’이란 왕이 거하는 천막을 말합니다. 이것을 오홀레라고 하는데, 한편 여기서 ‘바다’라고 하는 것은 지중해를 말합니다. ‘영화롭고 거룩한 산’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산으로 취급되었던 시 온산을 말하며 곧 예루살렘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의 궁전 장막을 바다와 성산 사이에 세웠다는 말은 에피파네스의 군진을 예루살렘 근처 지중해가 바라 보이는 곳에 세웠다는 것입니다. 에피 파네스가 이처럼 유대를 재 공격하려 했던 것은 마카비가 이끄는 독립전쟁이 본격화되어 유대 내에서 자신의 세력이 점차 격퇴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45 그가 장막 궁전을 바다와 영화롭고 거룩한 산 사이에 세울 것이나 그의 종말이 이르리니 도 와 줄 자가 없으리라.’유대를 멸절시키려던 에피파네스는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도와 줄 자가 없다’는 말은 그의 죽음이 어떤 수단에 의해서도 막을 수 없는 것임을 나타내 줍니 다. 다니엘 8:23-25의 예언과 일치합니다. ‘…한 왕이 일어나리니 그 얼굴은 뻔뻔하며 속임수에 능하며 24그 권세가 강할 것이나 자기의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며 그가 장차 놀랍게 파괴 행위 를 하고 자의로 행하여 형통하며 강한 자들과 거룩한 백성을 멸하리라. 25그가 꾀를 베풀어 제 손으로 속임수를 행하고 마음에 스스로 큰 체하며 또 평화로운 때에 많은 무리를 멸하며 또 스스 로 서서 만왕의 왕을 대적할 것이나 그가 사람의 손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깨지리라.’한 예 언이 다니엘 11:45의 도와 줄 자가 없이 죽을 것이란 말은 다니엘 8:25의 ‘그가 사람의 손으로 말미 암지 아니하고 죽임을 당하리라는 말을 가리킵니다.
다니엘 8:23-25, 다니엘 11:21-45에서 이렇게 길게 에피파네스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것은 에 피파네스가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관계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입니다. 이어 다니 엘 12:1-4로 연결되면서 성경 예언의 오묘한 복합성을 반영하여 대종말 직전에 대한 예언으로 비약합니다. 구약시대 선민의 박해자로서 적 그리스도의 예표였던 에피파네스에 대한 예언이 동 시에 대 종말 직전의 말세에 유대인들을 포함한 전 성도의 핍박자로 등장할 적 그리스도 자체에 대한 예언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 끝 날에 대환난이 있을 것이나 오히려 이는 선민의 구원의 완성 을 위한 최후의 관문이며 궁극적으로 부활과 상급 그리고 영생이 있을 것을 선언함으로써 역사는 결국 선민의 구원과 승리로 종결될 것임을 밝힙니다. 할렐루야 아멘
구약성경은 말라기서에서 끝납니다. 그리고 신약의 마태복음으로 연결됩니다. 구약과 신약의 400년 동안은 중간기요 과도기요 암흑기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간 동안의 유대인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만 이 다니엘서를 통해서 우리는 이 기간 동안의 유대인 역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최후의 대 환난과 선민의 최종 승리 다니엘 12:1-12
다니엘 10:1에서 다니엘은 BC 536년에 바사왕 고레스 3년에 힛데겔 큰 강가에서 3주간의 금식 기도 중에 받은 다니엘의 제 4묵시인 ‘힛데겔 강가의 묵시’를 기록한 다니엘 10:1-11:45에서 힛 데겔 묵시의 배경를 기록한 서론에 이어 바사 제국의 발흥과 멸망, 그 이후에 등장한 헬라 제국의 발흥과 4대 지역으로의 분열과 그리고 분열 이후에 등장한 4대 분열왕국 중 하나인 시리아 지역 의 셀류쿠스 왕조 제 8대 왕인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의 정복 활동과 하나님의 성전 모독 및 유대인에 대한 핍박 사건을 예언했습니다. 다니엘 11:40-45에서 시리아의 셀류쿠스 왕조와 애굽 의 프톨레미 왕조 사이의 제 4차 전쟁에서 승리한 셀류쿠스 왕인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전리품들을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 가는 길의 도중에 팔레스타인 땅의 예루살렘에 들려 장막 궁전 을 치고 유대를 제 공격할 차비를 갖출 때에 동북 지방인 파르티아 아르메니아에서 반란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군대의 절반은 이 지역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하고 남은 절반의 군대로 자신은 유 대를 멸절시킬 계획이었습니다. 이 때의 유대는 마카비 독립전쟁이 본격화 되면서 유대 내에서 시리아 세력이 점차 격퇴당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에피파네스는 유대 내에서의 불리해진 상황을 반전 시키고 나아가 유대를 완전히 점령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군진을 설치하였던 때입니다. 유대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불과 같은 순간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에피파네스는 원인 모를 병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죽게 됩니다. 그리고 다니엘 12:1-4이 전개 됩니다.
첫째로 최후의 대환난과 선민의 최후 승리 (다니엘 12:1-4)
다니엘 12:1-4에서는 갑자기 시대를 뛰어넘어 세상 끝 날에 있을 대 환난과 선민에 대한 미가엘 천사의 보호 및 종국적인 선민의 구원을 예언하고 모든 죽은 자의 부활과 그리고 의인의 영생과 악인의 영벌에 대한 예언입니다.
‘1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 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 라.’
‘그 때’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유대인들과 성도들에게 닥칠 대환난의 때를 말합니다. 곧 다니 엘이 예언한 70이레 예언의 마지막 후 주간 중 후 삼일 반 즉 후 삼년 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요 한계시록의 7년 환난의 후 삼년 반과도 동일한 기간입니다. 이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라 했습니다. 미가엘은 유대민족의 수호천사입니다. 다니엘 10:13, 21에서 도 등장합니다. ‘13그런데 바사 왕국의 군주가 이십일 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 왕 국의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가장 높은 군주 중 하나인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 주므로, …… 21오직 내가 먼저 진리의 글에 기록된 것으로 네게 보이리라 나를 도와서 그들을 대항할 자는 너 희의 군주 미가엘뿐이니라’에서 미가엘 천사는 이스라엘의 수호천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은 미가엘 천사장이 유대백성이 에피파네스에게 결정적인 파 멸을 당할 직전에 그를 처치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셨듯이 종말 때에 대 환난의 때에도 적 그리스도에게 극심한 전대 미문의 환난과 핍박을 받을 후 3년 반 동안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 할 것을 가르쳐 줍니다. 계시록 12:7-9말씀에 하늘에서 제 2차 우주 전쟁이 있게 될 것을 예언하 고 있습니다. 제 1차는 사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그 졸개들과 함께 하나님께 도전하다가 하나님 면전에서 쫓겨 난 때요 제 2차는 계시록 12:7-9사건 때인데 이 전쟁으로 인해 사탄이 지구로 쫓 겨 내려와 적그리스도에게 자신의 권세와 능력을 주어 후 3년 반이 시작됩니다(계 13:1,2)입니다.
‘7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8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9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 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그러므로 성도는 어떤 환난과 핍박을 받게 되든지 두려워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의 뒤에는 우리를 보호하는 하나님의 능하신 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에서 이 환난은 후 삼년 반에 있을 환난을 말합니다. 이사야26:20에서도 예언되고 있습니다. ‘20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 그러나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운 것 같이 이런 다니엘서와 계시록에서 보여 주는 대 환난이 있을 것을 알고 있는 성도들은 이런 환 난이 오면 아!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구나 생각하고 믿음 준비하고 주님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것 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대 환난이 와도 우리 성도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이 있기 때 문입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생명책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리 적 그리스도의 핍박이 극심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택하신 성도들로서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 록된 자는 반드시 핍박을 이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을 다니엘서에서 소개되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다니엘과 같이 끝까지 우리의 신앙지조 를 사수하겠다는 각오를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평소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2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 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여기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란 인생은 흙에 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가는 자들인데 아담 이후 이 세상에 왔다가 죽어간 모든 인생들을 말합니다. 이 모든 인생들이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의 법입니다(히9:27). 그런데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부활의 과정이 있습니다. 죽은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다시 부활하게 됩니다. 그런데 부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입니다. 요한복음 5:28-29에, ‘28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했습니다.
선한 일이란 예수님을 믿어 거듭난 자들을 말하며 악한 일을 행한 자란 이생에서 사는 동안 예수 님을 믿을 기회를 거부한 자들을 말합니다.이런 자들은 영원한 부끄러움을 당할 자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계시록에 의하면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계시록 20:4에서 천년 왕국 전에 주님의 공중 재림 때에 부활하여 공중에 들림 받아 어린 양의 혼이 잔치에 참여하는 자들이요, 악한 일을 행한 자, 심판의 부활에 참여할 자들은 천년왕국이 지난 후 백보좌 심판대 앞에서 심판 받기 위해 부활하는 자들입니다.
계시록 20:4, 5과 20:11-15, ‘4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 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 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 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11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
‘3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 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여기에서 ‘지혜 있는 자’란 아담 이후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거듭난 자들을 말합니다. 인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많은 핍박과 박해가 있었 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불과 같은 시험을 통과한 모든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세상의 향락이나 돈이나 명예, 권력을 취하기 위해 믿음을 등한시 한 모든 자들은 미련한 자들입니다. 다 니엘서 11장에서 현실과 타협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고 헬라화 되어갔던 자들은 지혜롭지 못 한 자들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자들인데 그렇게 하 여 어떤 핍박 박해 가운데서도 믿음을 굳건히 지키도록 하게 한 자들일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 늘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41에서는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 다’한 것과 같이 이들의 영광이 다른 성도들 보다 탁월할 것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이 마지막 때는 종말의 때를 가리킵니다. ‘이 말’이란 바사제국의 멸망과 헬라제국의 발흥과 4대 지역에로의 분열 및 시리아왕 에피파네스가 유대인들을 핍박할 것을 예언한10:1-12:3까지 뿐만 아니라 본서 전체를 가리킵니다. 한편 ‘봉합하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탐’은 감추어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 잘 보관하여 이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지켜 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5:1-2과 6:1에서 이 인봉한 책의 인을 떼라고 하십니다. 이 인봉한 책을 떼시 는 이는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 인으로 봉하였더라 2또 보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기를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 하나,,, ‘계시록6: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시는데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렛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해서 일곱 인봉한 두루마리들을 하나 씩 떼시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다니엘 시대로부터 이 봉한 책이 떼어지는 때가 언제인가를 보여 줍니다. 그 때가 언제냐 하면 ‘많은 사람들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할 때부터’라고 다니엘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가 언제인가 하면 유럽에서 구텐베르크에 의해 금속활자가 발명되어 성경을 번역하여 각 민족어 로 보급되어 종교혁명이 일어날 때부터 인간들의 지혜가 밝아지고 그 때로부터 역사상 전에 없었 던 지식 확장이 빨리 전개되기 시작했습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그 때까지는 가장 빠른 것 이 말(馬)이었는데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증기 기선, 증기 기차, 자동차, 비행기, 제트기, 미사일들이 등장하므로 인간의 걸음이 급속도로 빨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하여 모든 사람들의 지식이 급속도로 팽창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무 엇인가 알고 싶어도 책이나 백과사전을 손 쉽게 구할 수가 없었지만 이젠 무슨 문제든지 알고 싶 으면 인터넷에서 치면 그에 해당하는 지식들이 바다 물결 같이 넘치도록 쏟아져 나옵니다. 사람 들의 지식이 엄청나게 더하여져 가고 있습니다. 콤퓨터 때문에 책 쓰기가 너무 쉽고 간편하고 빨 라졌습니다.
바로 이 때에야 말로 일곱 인봉한 두루마리가 떼어지고 그 속의 내용들인 말세의 일들이 밝혀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계시록은 봉한 책이 아니라 누구든지 읽어야 하고 이해해야 하고 배워야 하고 가르쳐야 할 때입니다.
둘째로 강변의 두 천사의 결론적 예언(다니엘 12:5-13)
이 단락은 다니엘 자신이 직접 꿈과 환상을 통해서 받은 네 개의 묵시를 통하여 대 제국의 흥망사 를 중심으로 하여 메시야 왕국이 도래할 세상 끝 날까지의 세계사 전개 과정을 다중적으로 보여주 는 다니엘서 후반부 제 7-12장까지의 일련기사의 종결부분임과 동시에 다니엘서 전체의 종결 부 분입니다. 이제 두 천사가 대 종말의 사건들이 있을 때가 언제인가에 대해 서로 묻고 있는 대화의 장면이 전개됩니다. 그러나 그 대화의 의미를 잘 깨닫지 못한 다니엘이 다시 한번 더 그 때에 관해 천사에게 묻는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천사의 답변과 마지막으로 다니엘에게 주는 위로와 축복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5나 다니엘이 본즉 다른 두 사람이 있어 하나는 강 이쪽 언덕에 섰고 하나는 강 저쪽 언덕에 섰더 니 6그 중에 하나가 세마포 옷을 입은 자 곧 강물 위쪽에 있는 자에게 이르되 이 놀라운 일의 끝이 어느 때까지냐 하더라’ 두 천사가 힛데겔 강변 양 편에 서서 종말의 때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 받습 니다. 이 천사들이 강물 위에 있는 자, 예수 그리스도께 계시의 결국에 관한 것을 묻고 있습니다.
‘7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쪽에 있는 자가 자기의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원히 살아 계시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 가 다 깨지기까지이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 8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 지라 내가 이르되 내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나이까 하니 ’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시는 이유는 그가 말씀하시는 내용 즉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본서에 기록된 예언이 성취되리라는 말씀의 확실성을 보증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 한 때 두 때 반 때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에 있을 7년 대 환난의 후 반부에 해당하는 후 3년 반을 말합니다. 다니엘이 이처럼 듣고도 깨닫지 못한 이유는 이 ‘때’가 뜻하는 바를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결국 종말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가 얼마나 심오하고 깊이 있는 가를 보여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연구하면서 깨달아지지 않는 것은 자의로 이해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겸손 히 주님께 그 해석을 의뢰해야 할 것입니다.
‘9그가 이르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10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환난 날에 선인과 악인에게서 각각 나타날 차이점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똑같이 환난을 당할지라도 의인은 이를 선용하여 연단의 기회로 삼아 더욱 정결한 신앙을 유지할 것이나, 악인은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육신을 위하여 악을 행함으로 닥친 고난을 회피하려 하는 것입니다. 의인들은 다니엘서에 기록된 예언이 진실된 것임을 더욱 밝히 깨닫는 계시가 될 것입니다.
‘11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울 때부터 천이백구십 일을 지낼 것이 요2기다려서 천삼백삼십오 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할 가증한 것을 세울 때부터’는 직접적으로는 에피파네스가 행한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운 사건을 말하는 것이나(단11:31), 궁극적으로는 종말에 적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금지하고 하나님 대신에 우상을 숭배하도록 강요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계 13: 4).
계시록 13:4, ‘4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계시록 13:12, ‘12그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 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계시록 13:14-15 , ‘14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15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이 짐승의 우상이 란 적 그 리스도의 형상을 본뜬 로봇이거나 적 그리스도의 인간복제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적 그리스도의 뇌와 연결시킨 적 그리스도와 생각이 똑 같은 로봇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적 그리스도 자신인 것입니다. 이것을 성전에 세워 사람들로 경배하게 하는 것입니다.
’천 이백 구십일’은 고대 근동의 일반적인 날짜 계산법에 따라 한 달은 30일, 일년을 열 두달, 360 일로 계산 했을 때 삼년 반에 한 달이 더해진 기간입니다(1260+30). 이것은 직접적으로는 안티오 쿠스 에피파네스가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율법에서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돼지 고기를 제 우스에게 바치기 위해 성전으로 가지고 오는 등의 성전 모독사건이 발생한 때로부터 마카비 혁명 에 의해 성전이 회복되기까지의 기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다니엘 8:14의 2300주야와 본절의 1290일을 비교해 보면 2300주야는 에피파네스의 유대인 핍박 전 기간을 나타내며, 1290일은 그 중에서도 특별히 성전을 더럽힌 기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다 궁극적으로는 말세에 있을 적그리스도가 후 3년 반에 돌입하여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 어 성전에 자신의 로봇(혹은 인간복제)우상을 세우고 유대인들로 경배하도록 하게 될 때를 시점으 로 후 3년반이 시작되는 기간이 될 것입니다. 적 그리스도가 전 3년 반 동안에는 유대인들과 평화 조약을 세우는 등 유대인들을 위하는 것 같았으나 그 동안 자신의 세력을 완전히 확보한 때부터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유대인들을 핍박하고 박해하며 성전의 제 사를 폐하고 자신의 우상을 성전에 세우게 될 것입니다. 이 때를 두고 주님은 마태복음 24:15에 예언하셨습니다.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마 24:15,16)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다음의 다니엘서의 일부를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은 다니엘의 70이레 예언 중에 마지 막 한 이레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가 장차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맺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단 9:27)했는데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하는 미 운 물건을 세울 것이며”(단 11:31)한 것은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행한 일들을 예언한 것인데 역사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또한 말세에 적 그리스도가 행할 일들을 예언한 것인 데. 그 때에 에피파네스가 성전에 제우스 신상(자신의 형상으로 만든 우상)을 세웠던 것처름 적그리스도가 이것을 모방할 것입니다.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이백구십 일을 지낼 것이 요”(단 12:11)
이 때로부터 후 3년 반이 끝날 때인 주님의 지상재림 시에 있을 아마겟돈 전쟁이 종결되고 적 그리 스도와 거짓 선지자가 불못에 떨어지고(계19:19-21), 계시록 20:1-3에서 사탄이 무저갱에 갇히 는 그 때를 말합니다. 1260일은 후 3년 반, 42개월의 정확한 기간입니다(계11:2, 3, 12:6). 이 기간 내에 아마겟돈 전쟁이 끝나 거짓 선지자나 적그리스도를 불못에 가두고 전쟁으로 어려워진 지역을 정리하고 예수님이 예루살렘 감람산에 서셔서 천년왕국을 선포하기까지의 기간을 75일로 볼 수 있습니다.
‘12기다려서 천삼백삼십오 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으리라. 13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 리라 이는 네가 평안히 쉬다가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임이라.’ ‘일천 삼백 삼십 오일’이라는 기간 은 11절의 1290일에 45일이 많은 기간입니다. 아마도 이 기간은 ‘견디면 복이 있으리라’는 내용 으로 보아 이 1335일이 지나면 적 그리스도의 박해 기간이 끝나고 예수님이 천년왕국을 수립하 시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기간은 성도가 극심한 환난을 겪을 기간인 후 3년 반(1260일)에 한 달을 더한 (1260일 + 30일) 기간에 또한 45일을 더 한 기간입니다(1260일 + 30일 + 45일= 1335일). 1335일은 11절의 1290일과 중첩되는 기간입니다. 11절의 1290과 12절의 1335일 순차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12절의 1335일 기간 중에 11절의 1290일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아마도 1260일은 후 3년 반의 적그리스도가 통치하는 기간이요 1260일 끝나면서 주님의 지상 재림과 아마겟돈 전쟁이 30일 동안 계속되면서 실제적으로 적그리스도의 유대인과 성도들에 대한 박해가 완전히 끝나는 기간이 30일 것이며 그래서 11절의 1290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겟돈 전쟁이 끝났지만 전쟁 수습기간과 천년왕국 수립 기간이 필요할 것인데 그 기간이 45일이 걸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1335일이 되면 지상에 남아 있던 성도들이 변화되고 천년왕국 시대에 들어 가게 될 것입니다.
이 두 기간 사이의 간격이 45일인데 이 기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부터 승천 때 까 지의 기간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으로 보아 이것이 성도 개개인이 적 그리스도의 핍박을 받다가 그 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궁극적 승리를 얻기까지의 기간을 나타낸 것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끝까지 경외하며 하나님의 백성들 을 다시 고토로 돌아가도록 충성을 다해 주도했으므로 다니엘에게 충분한 보상이 주어질 것을 확 증 하는 말씀입니다. 또한 끝날에 영생과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통한 영광을 누리리라는 언약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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