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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바벨탑 공중정원

by 은총가득 2021. 2. 23.

 

바벨론의 공중정원은 필론의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서도 가장 환상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SF영화에 자주 나오는 장면처럼 공중에 높이 떠 있는 궁전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중정원은 실제로 공중에 떠 있는 것이 아니라 높은 곳에 정원이 있다는 의미이다. 연속된 계단식 테라스로 된 노대(露薹, 발코니)에 풀과 꽃 · 수목을 심었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마치 삼림으로 뒤덮인 작은 산과 같았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계단식 아파트의 발코니에 꽃과 커다란 나무들을 심은 것과 유사하다.

 

공중정원이 있었다는 바빌론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수도이다. 유프라테스 강변에 있던 고대 도시 바빌론은 바빌로니아 제1왕조 시대부터 역사에 등장하며 세계 4대 문명의 발생지로서 더욱 유명하다.

 

바빌로니아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남부 지역의, 갈대로 뒤덮인 늪지대와 습지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황량한 벌판으로, 생활여건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기후는 건조하고 더웠으며 광물 자원도 없고 건축용 석재나 목재도 거의 없었다. 더구나 터키의 아라라트산이 수원지인 두 강은 상류가 해빙기가 되면 강물이 급격히 불어 급류를 이루었고 하류에서는 거의 매년 홍수가 일어났다. 홍수가 끝나면 가뭄이 계속되었다.

 

큰 강은 고대인들에게 고통을 주는 동시에 만족도 주었다. 비가 많이 오면 홍수를 일으키지만 상류로부터 기름진 흙을 실어주었기 때문에 토질이 비옥해져 농사짓기에 유리했던 것이다. 농사가 잘 지어져 먹을 것이 풍족해지면 자연히 문화가 꽃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두 강 유역에서는 자연재해를 막기 위해 둑을 쌓고 저수지와 운하를 만드는 등 치수사업에 온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런 대규모 사업은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집단끼리의 협동과 단결이 촉진되었고 그 결과 통일된 정치조직이 일찍부터 발달해 강력한 중앙집권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세계 4대 문명 모두가 강 유역에서 탄생하게 된 이유이다.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남쪽에 있는 바빌로니아 유적지

이 유적지 어딘가에 공중정원이 있었다.

필론은 공중정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공중정원이라 함은 공중에 식물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땅 위의 지붕에 나무들이 있다는 뜻이다. 돌로 된 기둥들이 정원을 지탱하고 있다. 간격이 매우 좁은 들보는 야자수 나무로 만들어졌다. 이 나무는 썩지 않는 유일한 나무이다. 습기가 빠진 나무에 압력을 가해서 아치처럼 꾸부러지게 한 후 외부와 조화가 되도록 적절한 간격으로 고정했다.

 

상당한 깊이로 흙이 채워져 있으며 이곳에 나뭇잎이 많은 식물들과 수많은 종류의 꽃들로 채워졌다. 이런 풍경이야말로 간단하게 말해 눈을 즐겁게 하고 조경을 아름답게 만든다. 이것은 보통 들에서 식물을 기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단지 지붕 위에 비옥한 땅이 있다는 것뿐이다.

 

정원의 경계에 있는 흙으로 덮인 땅은 경작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 위로부터 물이 내려오는 수로가 있는데 완만한 경사를 통해 물이 흐르며 다른 쪽에서는 압력에 의해 물이 올라가는데 이것은 중단되지 않고 계속 작동된다. 수로의 기계적 성질은 연속적으로 물이 돌게 하는 나선형이다. 옥상의 커다란 집수장에서 공급되는 물이 정원에 심긴 식물들의 뿌리를 적셔 습기를 유지하게 한다.

 

정기적으로 물이 공급되므로 가물지 않고 또 배수가 잘되어 뿌리가 썩지 않게 만들므로 식물들이 항상 아름답게 키워진다. 이것이야말로 걸작 중의 걸작이며 진실한 궁전의 공간이다.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과일들은 방문자의 머리 위에 항상 열려 있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전기를 쓴 퀸트 퀴르스는 공중정원에 대해 필론과 유사하게 적었다. “도시의 가장 높은 곳은 공중정원으로 성벽의 정상부분이다. 여러 가지 나무와, 그 때문에 그늘이 생겼고 기둥들 사이에는 네모난 돌이 깔려 있다. 두터운 흙이 깔려 있고 배수구가 있다. 나무들이 있는 테라스는 50피에(1피에는 약 30센티미터)와 8쿠데(1쿠데는 50센티미터)의 두께를 갖고 있는데 어떠한 과일도 천연 조건과 같이 생산할 수 있었다.”

 

 

 

공중정원을 상상한 그림

 

공중정원 건설과 관련해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이야기가 전한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바빌론의 왕이 되자 메디아왕국의 아미티스를 왕비로 맞았다. 그러나 산과 꽃이 풍성한 메디아에서 자란 왕비는 평탄하고 비가 잘 오지 않는 바빌론에 마음을 두지 못한 채 항상 고향의 푸른 언덕을 그리워했다. 이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왕은 왕비를 위해 메디아의 어떤 정원보다도 아름다운 정원을 바빌론에 만들기로 결심했고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공중정원이라는 것이다.

 

 

공중정원에 대한 자료는 별로 없다. 바벨탑을 발굴한 독일인 건축가 콜데바이가 1899~1917년 바빌론을 발굴할 때 디오도로스가 기술한 것을 근거로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성벽 안에서 공중정원의 위치를 찾았다. 학자들은 텔아무란이븐알리(추장의 언덕)를 공중정원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는데 이곳이 공중정원에 대한 기록과 가장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는 예전의 모습이 아직 남아 있는데 이라크 정부는 이 지역을 집중적으로 복원하고 있다.

 

바빌론의 공중정원이 다른 불가사의보다 더 유명해진 것은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바벨탑과, 로맨틱한 분위기를 갖고 있는 공중정원의 전설이 혼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공중정원은 다른 불가사의처럼 인간을 압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으로 이루어진 건축물이라는 데 더욱 매력이 있다. 천하의 영웅 알렉산드로스가 자신이 죽을 장소로 바빌론을 지목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작성자 항해자


형제간의 살인사건은 성서속의 가인과 아벨만 있는것이 아니라, 이집트종교의

오시리스와 쎄트의 형제지간의 살인사건은 가인과 아벨의 사건과 거의 같습니다 .

 

오시리스는 풍요의 신이요, 쎄트는 전쟁과 분쟁의 신인데 이들은 여동생 이시스를

서로 사랑하여 동생인 쎄트가 형인 오시리스를 죽여 갈기갈기 찢어 42조각을 내어

이집트전역에 뿌리듯 버립니다. 이에 이시스는 그 조각을 남김없이 주워 맞추고 꿰매서

부활을 시킵니다 (위 사진은 오시리스, 밑은 쎄트) 그후 오시리스는 예수님과 흡사한

기적과 이적을 행하는데, 이 부분을 갖고 "예수는 신화다" 라고 밀어붙이고

부활론은 오시리스를 모방했다고 하니...어이가 없다. 모든 신화가 우리에게 읽혀지게

된것은 AD 40년에 태어난 플다크에 의해 기록된 그리스 신화 와 이집트 신화 때문인데,

이때는 기독교가 영지주의와 로마와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을때였기 때문에 그다지 신빙성이 없다.

만약, 이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기독교는 이때 없어지고 영지주의가 등극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지주의는 AD 4세기 경에 소멸 됐다.

 

 

 

오시리스 신화는 이집트 상형문자에 기록되어 오늘날 까지 전해 옴으로 성서와 이집트신화중

어느것이 먼저인지 학자들의 논쟁이 뜨겁다. 물론, 성서는 구전이기 때문에 연대를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집트신화는 성서의 함의 후손인 니므롯과 쎄미라미스가 이집트 식으로 변형된

종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다수이고 보면 성서의 가인과 아벨이 먼저인 것은 사실로 인정된다.

그러나 그들이 "신" 으로 추앙 받게된 여러가지 정황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숙제다.

 

아래그림은 슈메르인들의 농경생활상이 토판에 새겨져 있는걸 발굴해 낸 것이다.

여기서 많은 자료들이 가인과 아벨의 살인사건을 잘 설명해 주는데....

 

 

 

( 점토판에 새겨진 슈메르어 설형문자 )

 

 

 

 

당시 목축업과 농경업간에 서로 앙숙이 될수밖에 없는 이유를 슈메르 토판에서 찾아냈다.

그 이유는 목축업의 양이나 기타 가축들이 멀리있는 풀보다는 가까이 있는 농산물을 뜯어

먹기때문에 서로 연일 다툼이 벌어졌고 결국엔 서로 앙숙이 되고 말았다는 기록이 있다.

 

가인과 아벨도 아무리 형제지만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번제때 아벨은 튼실한 새끼양을

바쳤지만, 가인은 좋은것을 바칠수가 없었던 것이, 좋은것은 이미 가축들이 다 뜯어먹고

난 뒤였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가인은 날이 갈수록 아벨을 증오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살인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성경에는 단지 무성의한 가인의 제물번제 로 기인한 증오와 질투로 오해할수 있도록 기록 됐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가인은 하나님께 의지하는 믿음이 적은고로, 기도보다는 분노와 질투로 한포기의 농작물 생산에 매달리는

딜레머적 우상에 빠져 성격이 포악하게 변하여 살인까지 하게 되었지만 하나님은 이부분에 대해 타인이 가인을 해치지 못하도록 증표를 해줬다 한다. 그러나 어떤 증표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사진은 "길가메시"의 용맹을 상징하는 유적 )

 

 

 

슈메르의 라가시 왕조때 만들어진 독수리 석비, 적을 무자비하게 대하는 형상을 볼수 있다. 슈메르인은 검은 머리털을 가진 동방에서 온 민족이라 하는데 그들의 언어속엔 우리말과 너무도 같은 말이 많으므로 우리 민족이라고 성급한 판단을

하는 분들도 다수 있다. 예로서 환국시대 때 12제국을 거느렸는데, 그중 수밀이국이 바로 슈메르 란 것이다 .

 

 

바벨탑과 바벨론 의 공중정원

 

 

바벨탑은 노아의 장남 함의 후손 니므롯[Nimrod]이 악카드왕조에게 빼앗긴 언어와 영토를

되찾기 위해 저항운동을 전개하며 다시 나라를 빼앗기는 불상사가 없도록 축조한 거대한 기념탑

인데, 일부에선 니므롯이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께 반란을 일으킨 루시퍼가 승리 하도록 음모를

꾸미고 바벨탑을 쌓았다 한다 ,

 

성경의 창세기10:8-9 절에도 니므롯이 영걸 이라고 인정하고 있는걸 보면 힘도세고 잔인하며

지략이 뛰어난자 임엔 틀림없는 것 같다, 더우기 그는 젊은나이 에 다른 남자의 아내였던

세미라미스[Semiramis]와 불륜에 빠져 그녀를 자신의 소유로 만들었다고 고대 비문에

기록돼 있다, 바벨탑은 시날 평지에서 벽돌을 굽고 역청을 사용하여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도록

쌓아 그들의 이름을 온 천지에 알리고 더 큰세력을 규합하는데 이용하기 위해쌓았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강림하셔서 이들의 행위를 보시고 언어를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혼돈 시킨후

흩으시매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다고 했다,

 

그러나 심각한 것은 이미 니므롯은 그들에게 절대적인 지상의 신중의 신으로 추대되어 숭배의 대상이 된것이다,

바알[Baal], 마르두크[ Marduk]로 인간이 고대 바빌로니아의 수호신이 된 것이다, 벨루스[Belus]와 바알[Baal]은 모든 신들의 아버지 니므롯 이며 벨티스[Beltis]는 바알의 아내, 바알티[Baalti]와 같은 말로 여신을 지칭하는데 세미라미스를 가리킨다,

 

바벨탑으로 인하여 언어의 혼란이 오자 각기 다른말을 하며 모두 흩어져 니므롯과 세미라미스는 다양한 언어의 무수한 이름의 신으로 알려져 전파 됐다,

니므롯이 젊은나이에 요절하자, 여신으로 등극한 세미라미스는 실질적 다산의식의 창시자로

남편보다 42년이나 더 오래 살았다 한다, 그녀는 죽기전에 어머니와 아들의 신앙을 만들어 냈는데,

많은 종교에큰 영향을 주었다, 미트라교의 성모와 인도의 크리슈나성모, 켈트족의 흑성모,

이집트의 이시스[Isis]와 오시리스[Osiris], 로마의 훠트나[Fortuna]와 쥬피터-퓨어[Jupiter-Puer],

그리스의 세레스[Ceres]와 플루투스[Plutus]의 뷔너스의 아들, 큐핏[Cupid],자유의 여신 훼로니아[Feronia]와 쥬피터[Jupiter]등 셀수도 없는 골치아픈 이름들이 즐비하다,

 

천주교의 성모 마리아도 니므롯의 아내 세미라미스가 모델이라고 비아냥 거리는 사람들도 있다.

강력한 사냥꾼 오리온은 니므롯이며 반인 반수 켄타사우르스[Centaur]와 이집트의 반인반수 콘스[Khons]도 니므롯이다 ,

 

이밖에 많은 이름으로 니므롯은 신성시 되었으며 신중의 신으로 군림 했었다,

이는 바빌로니아의 흥망에 따라 이들의 숭배는 번창과 몰락이 거듭되며 무수한 이름들이 재창조 되어 이어져 왔다 ,

 

 

 

분명한 것은, 바벨탑은 신과 인간이 동등한 입장이 되려는 인간의 허황된 욕망이 빚어낸

도전적 산물이며 신은 이를 용서치 않은 것이다, 그러나 사악한 것이 인간이라 또하나의

무섭고 어리석은 바알이라는 우상을 창조해 낸 것이다,

바빌로니아의 공중정원은 공중에 떠있는 것이 아니라 높이 치솟듯 연속된 계단식 테라스로

층층이 흙을 쌓아 풀과 나무 덩굴 등 식물원을 방불케하는 식물들을 심어 멀리서 보면 마치

삼림으로 뒤덮인 작은 산과 같다고 한다, 밑의 사진은 상상해 그린것인데 실제와 근접한 것인진

모르겠으나 굉장히 거대하며 오밀조밀한 한폭의 환상적인 정원이었으리라 상상만 된다,

 

이는 세계 7대 불가사의중 하나로 유프라테스 강물을 인력과 동물을 이용하여 펌프로

끌어 올린후 커다란 물탱크를 만들어 정원 꼭대기의 각 수로마다 물을 배분하는 형식으로

항상 정원에 물이 마르지 않도록 공급을 했다하니 동력이 없는 시대에 얼마나 불필요한

낭비였을 까? 우린 바벨탑을 인간이 만든 것중 제일 으뜸으로 꼽는 재앙이라 한다,

 

이 공중정원도 예외는 아니다, 이 방법이 발전하여 운하의 핵심적인 기술이 됐기 때문이다,

높은 산을 뚫어 수로를 만든다음 낮은 곳에서 동력을 이용해 물을 채워 배를 산을 뚫은 높은

수로로 올려 운행하는 힘들고 어려운 소모적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만드는것 보다 관리가 더 힘든 공사이기 때문에 수반되는 부작용이 많은 사업이다,

 

 

 

BC[기원전] 5-600년경, 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느브갓네살] 2세가

왕비 아미티스를 위하여 수도인 바벨론 성벽에 건설한 기이한 정원으로 마치 공중에

떠 있는것 처럼 보였기 때문에 공중정원 이라 불리운게 아닌가 싶다, 우린 바벨탑과

공중정원을 같은 것으로 혼돈해선 안될것 같다, 바벨탑은 고대 바빌로니아 이전의

산물이고 공중정원은 엄연히 함무라비 왕조 몰락후 신 바빌로니아의 느브갓네살 2세때

축조된 것으로 시대와 연혁이 너무 다르다, 그러나 완공되지 않은 바벨탑을 완공시켰을 경우나

미완의 바벨탑이 유실되지 않고 보존됐다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BC479 년 침공하여

바벨탑을 철저히 파괴했다는 기록이 맞아 떨어진다

 

그러나 느브갓네살 2세가 건설한 바빌로니아 성읍안에 공중정원과 더불어 자기네

위대한 조상이며 신격화 된 니므롯을 숭배하기 위한 또 하나의 바벨탑을 쌓았을 수도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이지만...가능한 것은 바알을 섬기던 때에 조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건축물 쯤은 국가사업으로 축조가 가능했다는 생각을 떨칠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가설은 미완의 바벨탑 위에 문제의 공중정원을 건설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초가잔빌 [Tchogha Zanbil]

 

이란 후제스탄주의 고대도시 유적지로 BC 13세기 중반 엘람 왕국의 왕 운타시 갈(Untash Gal : BC 1250경 재위)이 건설한 도시이다. 수도인 수사 남쪽에 있으며 당시에는 '두르운타시'라고 불렸다. 수소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신 인슈시나크를 모신 성소로서 엘람 왕족의 묘지가 있는 성도이다. BC 640년 무렵 아시리아의 침입으로 수사와 함께 파괴되었으나 1935년 유전탐사로 인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도시는 2중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외벽 총길이는 약 4km이고 안쪽에는 내벽이 둘러쳐져 있다. 내벽 안쪽은 가로 470m, 세로 380m, 면적 약 18ha로서 성역으로 여겨졌다. 이곳에는 성탑 지구라트, 신전, 안뜰, 무기와 장식품을 보관하는 창고 등이 세워져 있었다.

 

지구라트 북서쪽 벽으로 둘러싸인 사각 모양의 공간에는 남신 이슈니칼랍·나피리샤와 여신 키리리샤를 모신 3개의 신전이 있다. 각 신전에는 안뜰 지성소·공물보관소 등이 설치되어 있다. 건물 기단은 불에 구워 만든 벽돌, 건물 위쪽은 햇볕에 말린 어도비 벽돌로 지었으며 벽에는 엘람어로 된 비문이 새겨져 있다. 유적 중앙에 있는 지구라트는 서아시아 최고의 규모로서 현재 높이 28m이다. 초가잔빌은 원래 5층이였으나 현재 3층까지만 남아있으며 원래 높이는 60미터로 추정되나 현재는 25미터이다. 밑면은 한 변의 길이가 102미터인 정사각형 모양이다. 4모퉁이가 동서남북을 정확하게 가리킨다. 1935년 앵글로 이란 석유회사가 지역조사를 하던 중 우연히 발견되었다. 고대 이란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산을 신성시 했었다. 하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산이 없어서 산의 형상을 만든 것이 이 초가잔빌의 지구랏트로 알려져 있다. 1979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지구라트

 

BC 3000년대 전반 이전의 기단이 있는 신전에서 그 원형을 볼 수 있으며, 우르(Ur) 제3왕조의 수립자인 우르남무(Ur―Nammu)의 지구라트에서 기본적인 형을 거의 갖춘 것으로 보인다. 우르남무는 우르·우르크·니푸르(Nippur)·에리두에 지구라트를 세웠는데 이 중 유명한 우르의 지구라트는 3층의 기단 윗부분에 主神 난다에게 봉헌한 신전을 배치하고 정면과 양 측면에는 계단을 배치한 구조이다. 이러한 형태의 지구라트는 카시트시대(BC 2000년대 후반) 두르쿠리갈주에서도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기단 위의 신전과 같은 신을 모시는 신전이 산기슭에 세워져 있다. 이것은 신이 있는 곳(높은 곳의 신전)과 인간이 예배를 드리기 위한 장소(낮은 곳의 신전)라는 종교개념의 확립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 뒤의 지구라트 양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시리아 시대(BC 1365∼BC 609), 북메소포타미아의 각 도시에 조영(造營)된 지구라트에는 계단 대신에 경사로가 설치되었다. 6개의 신전에 부속되어 있는 코르사바드의 지구라트는 4층만 남아 있는데 그 당시는 7층으로 채색되어 있었다고 한다. <바벨탑>으로 유명한 바빌론의 지구라트는 신바빌로니아시대(BC 625∼BC 538)에 속한다. 주신 마르두크의 신전에 이르려면 계단과 경사로를 지나가야 하는데, 여기에도 채색이 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밖에 엘람에서도 초가잔빌에 BC 13세기에 5층의 기단이 있는 인슈시나크神의 지구라트가 건조되었다. 이와 같은 지구라트를 축조할 때에는 속에는 햇볕에 말린 벽돌을, 겉마무리 쌓기에는 구운 벽돌을 쓰고, 역청 등을 모르타르로 사용하였다.

또한 표면의 채색은 채유(彩釉) 벽돌로 하였다

 

우르의 지구라트

 

서기전 2100년경 건설된 우르의 지구라트는 지금까지 발견된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중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전된 것이다.당시 우르 제III 왕조의 왕 우르-남무는 이 도시의 수호신 난나(Nanna)를 모신 신전을 좀 더 높은 곳에 세워 도시의 중심적인 상징으로 만들고자 했다.창세기에 등장하는 바벨탑의 원형이기도 한 지구라트는 원래 꼭대기의 신전을 받치기 위한 받침대에 불과하다.따라서 비록 지구라트가 이집트의 피라미드로부터 그 건축적인 아이디어를 빌려왔지만 이곳에서는 무덤이 아닌 신전 받침대로 활용됐다.재질이 약한 흙벽돌을 주로 건축자재로 사용했기 때문에 강도를 높이기 위해 역청을 사이사이에 깔았고 어떤 경우에는 갈대로 엮은 매트리스를 일정 간격으로 흙벽돌 사이에 끼워넣기도 했다.

 

이라크의 지구라트

 


바빌로니아 전승에 의하면 이 탑은 원래 니므롯이 축조했다고 한다. 아랍인들은 오늘날까지도 이 탑이 있는 지역을 Birs Nimrud, 즉 '니므롯의 땅'이라고 부른다. 이 탑은 옛날 하나님이 중단시킨 바벨탑과 동일한 유형의 것이지만 그 보다는 훨씬 작다. 바빌로니아의 신전을 지구라트라고 한다. 그 신전 중 제일 큰 것으로 보이는 탑이 근래에 와서 발견되었다. 바빌로니아 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바빌로니아의 최고 왕이 느부갓네살이고, 예루살렘을 함락한 것이 기원전 586년인데 그 당시에도 이미 지구라트는 오래 된 탑이었다. 역사가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 건축물은 서로 맞물리는 여덟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주위에는 꼭대기에 오르기 위한 나선형의 길이 나 있으며, 그 꼭대기에는 거대한 신전, 바빌로니아의 신의 집을 지어 놓았다고 기록하였다. 이 거대한 건축물은 210m 이상의 높이를 가졌고 한 층을 약 3m로 잡으면 70층이 된다. 수천년 전에 만들어진 이 벽돌 한 장 한 장에는 놀랍게도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자기들이 섬기던 신의 이름인 '마르둑(Marduk)'이라고 쓰여 있다

 

바빌론의 지구라트

 

바빌론의 지구라트는 신바빌로니아시대(BC 625∼BC 538)에 속한다. 주신 마르두크의 신전에 이르려면 계단과 경사로를 지나가야 하는데, 여기에도 채색이 되어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바빌론에는 위대한 신들을 위한 신전 53개, 마르둑신을 위한 예배당 55개, 대지의 신들을 위한 예배당 3백개, 하늘의 신들을 위한 예배당이 6백개가 있었으며, 여러 신들을 위한 제단이 4백개가 있었다. 이 중에는 ‘신의 문’이라는 뜻의 바벨탑이 있었는데, 이 탑은 7층으로 높이가 90m이며 8천5백만개의 벽돌을 사용했다. 나보포라싸왕은 ‘마르둑신이 나에게 에테메난키(바벨탑)의 기초를 지구 중심까지 닿도록 단단하게 만들라고 명령했다. 그래야만 하늘까지 오를 수 있는 건물을 만들 수 있다’고 적었다.

 

Tower of Babel (바벨탑)

 

바벨탑의 기사는 창 11:1-9에 보이는데, 홍수 후의 인간의 문명의 하나의 도달점이 간결한 기사로 훌륭히 설명되어 있다. 여기에는 의미심장한 두 가지의 물음에 대한 답이 보인다. 제1은, 어찌하여 지상의 민족은 종류가 다른 말을 쓰고 있는가, 제2는, 어찌하여 고대 바빌로니아의 주민은 오늘날도 아직 남아 있는 거대한 구운 벽돌의 탑 지구라트(Ziggurat)를 세웠는가의 물음인데, 이 물음과 답에서 성서기자는 심원한 영적 교훈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탑은, 인간이 자기의 위대함과 하나님 없이 인간의 일치를 만들 수 있다는 인간의 세속적 야심을 상징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교만에 심판을 내리시는데, 그것은 어떤 폭력적 수단에 의하지 않고, 다만 언어를 혼란케 하시는 방법을 취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상호 이해의 수단을 잃고, 각자 흩어졌다는 것이다. 오순절의 일은, 이 바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역(逆)이었다(행 2:1-11). 여기서는 하나의 말이, 언어를 달리하는 사람에게 모국어로 말하듯이 이해되었다. 바벨에서는 하나의 언어가 사용됐지만, 형제는 서로 이해치 못했다.

 

그러나 오순절에는 많은 다른 언어의 사람들이 서로 형제처럼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이 있었다.

[하나에서 여럿으로]가 바벨의 분열의 비극이고, [여럿에서 하나로]가 오순절의 축복이다.

성령에 의한 참 일치야말로 하나님의 목적이시다(창10장과 행2장에 여러 민족의 列記가 있는 것은 주의할 만하다).

 

바벨탑의 기원은 바빌로니아 도시국가의 특징으로 되어 있는 지구라트(Ziggurat)이다.

이것은 피라미트 형(形)의 높은 탑으로서 보통 7층루(七層樓)로 되어 있으며, 신원(神苑)의 중앙에 세워졌는데,

정상에는 신전이 만들어지고, 거기서 제의가 행해졌다. 7층루는 일곱 가지 색으로 칠해지고,

5개의 유성과 태양, 태음, 또는 그것에 상당하는 신신의 상징으로 다음과 같은관계였다.

 

제1층 토성(土星)ㆍㆍㆍㆍ니니브(Ninib)ㆍㆍㆍㆍ흑색(黑色)

제2층 목성(木星)ㆍㆍㆍㆍ(마르두크Marduk)ㆍㆍ등황색(橙黃色)

제3층 화성(火星)ㆍㆍㆍㆍ네르갈(Nergal)ㆍㆍㆍ심홍색(深紅色)

제4층 태양(太陽)ㆍㆍㆍㆍ샤마슈(Samas)ㆍㆍㆍ황금색(黃金色)

제5층 금성(金星)ㆍㆍㆍㆍ이슈타르神(Istar)담황색(淡黃色)

제6층 수성(水星)ㆍㆍㆍㆍ느보神(Nebo)ㆍㆍㆍㆍ남색(藍色)

제7층 태음(太陰)ㆍㆍㆍㆍ신神(Sin)ㆍㆍㆍㆍ백은색(白銀色)

 

바벨론 발굴의 결과, 바벨탑은 마르두크의 신전 에사길라(Esagila=머리를 높이 든 자의 집)의 북방 에테메난키(Etemenanki=하늘과 땅의 기초의 집)라고 불리는 지구라트로 동정된다.

 

이것은 슈메르인에 의해서 기공된 것인데, 셈족의 침입으로 준공하지 못했다. 이 거대한 미완성 탑은 오랫동안 고대세계의 불가사의 중 하나였다.

산헤립(Sennacherib 기원전 704-681)이 바벨론을 점령했을 때 이 유물을 제거하려 했으나 성공치못했다.

에살핫돈(Esarhaddon 기원전 680-669),앗슈르바니팔(Asshurbanipal 기원전 668-631)등도 재축(再築)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어서 나보폴랏살(Nabopolassar 기원전 626-605)도 공사를 계속했으나 성공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그 완성은 겨우 느브갓네살 2세(Nebuchadnezzar Ⅱ 기원전 605-562)에 의해 이룩되었다.

 

그의 비분에는 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다. 탑의 지계(地階)는 91.4㎡이고, 높이 36.5, 제2층의 주변은 지계(地階)보다 좁고, 높이는 20m, 제3층에서 6층까지는 각 층 모두 높이 6.4m, 그 주변은 층을 거듭함에 따라 좁아지고, 제7층 즉 최상탑은 높이 17m, 그 가운데 신전이 세워져 있으며 탑 전체의 높이는 98.5m에 미치고 있었다.

바벨론 멸망 후 이 폐허는 주변 주민의 흙벽돌 절취장(切取場)으로 되어버렸다.

옛 탑의 기초였던 부근은 현재 불과 91.5㎡의 구덩이로 되어 있다. <작성자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