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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하나님의 이름 시리즈(1-5)

by 은총가득 2021. 3. 2.

하나님의 이름(1) : 여호와 이레 / 창 22:1-14

 

오늘부터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 말씀을 증언하겠습니다. 여러분의 귀에 가장 익숙한 여호와 이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의 뜻을 잘 이해해 두어야 할 까닭은,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실체, 곧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되기 때문이고, 또한 하나님의 속성 또는 하나님의 성품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여러 이름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이름은 ‘여호와’라는 이름인데, 여호와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에는 ‘영원자존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곧 여호와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또한 ‘한 번 언약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하나 하나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아가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이레는 무슨 뜻입니까? ‘여호와께서 준비하심’입니다. ‘하나님이 보신다’입니다. ‘준비하시는 하나님, 보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말을 바꾸면 하나님은 보시고, 예비하시고,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크고 작은 위기들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위기의 대부분은 우리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찾아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찾아오는 이런 인생의 위기들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위기를 만났을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위기라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을 아주 힘들고 곤고하며 절망스럽게 할 수 있지만, 반면에 새롭게 도약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한자로 ‘위기’(危機)라는 말이 ‘위’자가 위험을 의미하지만, ‘기’라는 단어는 새로운 기회를 의미합니다.

 

근래의 세계 역사에서 인류가 경험한 가장 끔찍한 비극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독일 나치에 의해 6백만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한 사건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나치의 비인간적인 인간 학대의 가장 상징적인 비극의 장소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던 사람들 가운데 오스트리아의 정신의학자였던 빅터 프랭클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수용소로 수감되면서 자기가 연구하던 논문을 속옷 가장 깊은 곳에 감추어서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것만은 자신의 삶에서 포기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용소에 수감되면서 속내복까지 다 벗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 그는 결국 그 원고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삶의 이유요, 생존의 목적이었던 원고를 빼앗긴 것입니다. 이제 삶의 유일한 희망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원고를 잃어버리고 모든 자유를 빼앗기는 아우슈비츠에 수감되는 그 순간,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모든 자유는 사라진 것일까?”물론 그는 수용소에서의 행동이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할 것이고, 원고도 마음대로 쓰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자기에게 남아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닥쳐온 비극 앞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이것은 아직도 자신의 자유에 속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자유로 절망하는 대신에 희망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희망을 가지고 기다려보기로 결심합니다. 그의 모든 옷이 벗겨지고 수용소에서 준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주머니를 뒤지다가 구겨진 종이 한 장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종이 한 장을 보니까 놀랍게도 거기에는 성경 말씀이 쓰여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아주 좋아하는 성경 말씀인 신명기 6:4-5절의 말씀이 거기에 기록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쉐마 이스라엘”로 알려져 있는 “이스라엘아 들으라”로 시작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갑자기 전율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여기에도 계시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으셨구나.”그래서 그는 이 수용소 속에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붙들고 살라는 계시의 말씀으로 그것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런 결심을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이 감옥을 나의 연구실로 삼겠다. 그래서 수용소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새롭게 다시 논문을 쓰겠다. 원고지는 없지만 조각조각 휴지를 모아서 다시 계속해서 연구를 하겠다.”그 결단과 함께 “하나님, 도와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를 합니다. 바로 그 기도와 결단을 통해서 그는 아우슈비츠라는 비참한 장소에서 견딜 수 있는 힘을 얻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상상을 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비록 휴지 조각이지만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해서 이것으로 연구 결과를 완성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서 살아남게 되면 나는 나가서 온 세상을 상대로 이론을 펼칠 것이다.”드디어 2차 대전이 끝나고 그는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그는 휴지 조각들 위에 써놓은 기록들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삶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유명한 책을 발간합니다. 의미를 붙들고 있으면 인생은 어떤 고난도 극복할 수가 있다는 소위 ‘의미요법’이라는 정신의학사에 매우 중요한 공헌을 하는 대학자가 탄생하는 그런 순간입니다. 그에게 위기가 닥쳐왔지만 하나님을 새롭게 만남으로써 그의 위기는 오히려 새로운 인생의 미래를 여는 놀라운 기회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 말씀에도 비슷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아브라함입니다. 사실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애에서 이보다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시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동방의 거부였습니다. 수많은 양떼들을 거느린, 팔레스타인 인근에서는 가장 강력한 부자였습니다. 창 14:14절에 의하면 양떼와 소떼를 거느린 목동의 수만도 최소한 318명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100세에 그토록 소원하던 아들을 얻었습니다.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이때보다 더 행복했던 때가 있었을까요? 하나님께서 기업을 이을 아들을 주셨으니 그 아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대견해 보였겠습니까? 아마도 아브라함은 자신이 살아오면서 지금보다 더 행복했던 때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때를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브라함에게도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1절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오늘 말씀 앞 장인 21장에서,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이 이삭이 번제에 쓸 장작을 지고 갈 정도로 자랐습니다. 그럼 십 몇 년이 지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실 때가 언제였는가 하면, 18장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입니다. 이삭이 태어나기 열 달 전입니다. 창 18:10절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그리고 이제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십 몇 년 만에, 아브라함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21장 끝부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예배한 것으로 보이긴 합니다. 그러나 확실하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얻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약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도 한두 달이 아니고, 일이 년이 아닙니다. 무려 십 몇 년입니다. 그때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만 살아가고 있었던 아브라함입니다. 이삭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손자뻘에 해당합니다. 100살 차이가 나는데, 누가 아들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니 얼마나 사랑스러웠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이삭 보는 재미로 살았습니다. 아주 입이 귀에 걸려 있었습니다. 이 장면을 하나님이 물끄러미 보고 계셨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이다. 한참을 뜸들이다가 부르신 것이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부르신 것이다. 물론 부르신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을 테스트할 목적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믿음 테스트입니다. 믿음에 따른 순종 테스트입니다. 이건 아브라함의 인생이 걸린 테스트입니다. 이건 하나님의 자존심이 걸린 테스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아브라함은 즉각 응답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화들짝 놀랐을 거 같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하나님께 덜 집중하며 살았습니다. 이삭이 태어나고는, 거의 그래왔었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덜컥 하나님이 찾아오셨으니,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아브라함의 심장을 멈추게 할 정도였습니다.

 

2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세상에 무슨...’아브라함도 처음엔 자기 귀를 의심했을지 모릅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들을 얻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애가 생기는데 도움이 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봤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애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어느덧 아브라함의 나이도 75세가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자손을 약속하셨습니다. 창 12:2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말씀하셨습니다. 창 12: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그랬어도 아브라함에게 자녀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믿음이 굳건하지 못했던 아브라함은 흔들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서, 보다 실감나게 시청각 약속을 주셨습니다. 창 15:5절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최초 자녀 약속을 하신지 1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라가 희망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아브라함에게 하갈을 첩으로 줬습니다. 더 이상 아브라함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고두고 문제가 된 이스마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십 몇 년이 흐른 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창 17:1절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그러나 아브라함의 반응은 신통하지 않았습니다. 창 17:17절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긴 밀당이 이어진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그랬으니 이삭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존재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전부였습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마음을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안에는 하나님이 거할 자리조차 없어졌습니다. 이러면 문제가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리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다는 말은, 하나님 자리를 다른 어떤 것으로도 채워서는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삶에, 시험을 통하여 간섭하셨습니다. 그것도 크고 어려운 시험입니다. 일생에 한 번 있을까 하는, 인생 시험을 하신 것입니다.

 

3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아브라함은 그날 밤 잠을 못 이뤘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습니다. 아내에게도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두 종과 아들 이삭에게만 전날 미리 말해 놨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이 어디 좀 가야한다”고, 미리 귀띔을 해두었습니다. “며칠 걸릴지 모르니까 알아서 짐을 챙기라”고 해두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표정은 애써 내색을 안 하려고 했지만, 굳어 있었습니다. 두 종은 물론이고, 이삭은 자기에게 일어날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버지랑 어디 놀러가는 줄 알고, 해맑은 표정입니다. 그게 아브라함을 더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속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집을 떠날 때에는 아들과 함께 하지만, 집에 돌아올 때는 혼자 와야 합니다. 그때 아내 얼굴은 어떻게 볼 것이며, 생각만 해도 머릿속이 복잡해집니다. 본래 장작을 쪼개는 것은 종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브라함이 직접 준비를 했습니다. 종들이 자기들이 하겠다고 하니까, 한사코 괜찮다며 이건 내가 해야 한다고 해서, 종들도 의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두 종을 재촉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얼마쯤 걸었을까, 다리가 아픈지 이삭이 물었습니다. “아버지, 아직 더 가야 합니까?” “그래, 아직 멀었다.”어느덧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 어둑해졌습니다. 종들이 물었습니다. “주인님, 이쯤 해서 하룻밤 묶고 가시겠습니까?” “그래, 그러자구나!” 다음날도 또 그렇게 했습니다.

 

4절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집을 나선지 삼일 째가 되었습니다. 삼일이면 마음이 변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화장실 갈 때 맘과 나올 때의 맘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 시간이라고 해봐야, 불과 10여분 길어야 20분입니다. 그 짧은 시간에도, 사람의 마음이 변할 수 있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삼일 길입니다. 번민과 번뇌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솟아올라오는 번민과 번뇌를, 믿음으로 누르면서 삼일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이제 드디어 목표지점이 저 멀리 눈앞에 보입니다. 아브라함의 심장은 더 바쁘게 뜁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립니다. 아브라함은 잠시 심호흡을 가다듬으며, 모리아산 정상을 올려다봅니다. 비장한 순종의 결심을 다져봅니다.

 

5절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두 종에게 말했습니다. 종들은 짐 걱정이 되어, 자신들도 같이 가겠다고 했습니다. 주인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이 짐을 짊어진다는 건 어렵다고 봐야 합니다. 아들 이삭은 나이가 어립니다. 지금까지 이런 짐을 짊어져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종들이 걱정이 된 것입니다. 본래는 주인이 종을 걱정해야 하는데, 종이 주인을 걱정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태도가 너무나 단호했습니다.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종들이 더 이상 말을 붙일 수 없었습니다.

 

6절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종들이 쭈뼛거리고 있는 사이에, 아브라함의 손이 바빠졌습니다. 종들이 도우려고 했지만, 자기가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삭은 처음 져보는 짐이어서 그런지, 몇 번이고 어깨를 움직였습니다. 종들은 이삭이 짐을 지고 산에 오를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긴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불과 칼을 손에 들고 산을 올랐습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실 이삭에게 할 말이 없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저 앞만 보고 묵묵히 걷고 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가 평소와는 좀 다르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7절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한참을 걷다가, 이삭이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고 물었습니다. 이삭이 아버지를 부를 때 ‘이놈이 혹시’했습니다. 그런데 ‘역시’그 질문을 했습니다. 이삭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걸 모를 리가 없습니다. 제사한다면서 모든 걸 다 준비했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제물이 없습니다. 산을 오르기 전 동네에서라면, 제물을 살 수라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산 위입니다. 제사할 산에 거의 올라왔습니다. 그럼에도 번제할 양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질문에, 순간 마음이 휘청거렸습니다.

 

8절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아브라함은 심호흡을 길게 한 후, 이삭에게 대답했습니다. 사실상 믿음으로 선포했다고 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삭한테 대답할 말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우리 중 누가 이렇게 답할 수 있을까요? 우리 중 누가 이렇게 믿음으로 선포할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의 아브라함의 믿음은 불안정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기에는, 다소 부족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크고 어려운 시험 앞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믿음의 고백을 들으시고는, 다소 마음이 놓였을 것입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은, 하나님을 조마조마하게 했습니다. 언제 어떤 실수를 하게 될지, 지켜보는 하나님의 마음이 도무지 놓이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이런 성숙한 믿음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9절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드디어 두 사람이 번제할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번제를 드릴 준비를 마치고는, 이삭에게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는 그를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삭이 어린 애가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제사에 쓸 나무를 짊어지고 산꼭대기에 오를 정도의 나이입니다. 그러면 적게 잡아도 15-16살 정도는 된다고 봐야 합니다. 학자들마다 조금 다르지만 많이 잡아도 20세 전후일 것입니다. 그럼 아브라함의 나이는 115-120살입니다. 이 정도 나이인 이삭이 버티었다면, 아브라함이 힘으로 이삭을 제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노망했다고 대들면, 자칫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삭은 아버지가 지금 칼 들고 장난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번제를 어떻게 드린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자기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짐승처럼 각이 떠져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각이 떠진 채 불에 태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자기가 너무나 끔찍한 일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결박할 때, 순순히 응했습니다. 자기를 결박하여 번제할 나무 위에 올릴 때, 잠잠히 있었습니다. 이삭은 눈을 감고, 자기의 최후를 기다렸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동안 수많은 제사를 드려봤습니다. 오늘 제사는 다른 때의 제사와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비오듯 쏟아지는 땀으로 온몸이 흥건하게 젖었습니다. 거기다 애써 참아온 눈물이, 두 볼에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이제 잠시 후면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태워드려야 합니다. 그와 함께 한 행복했던 시간들이 순간 필름처럼 지나갔습니다. 순간 자기도 모르게 “아!”하는 깊은 신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10절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아브라함은 손에 칼을 잡았습니다. 그 동안 짐승을 제물로 잡던 바로 그 칼입니다. 이제 그 칼로 독자 이삭을 제물로 잡으려고 하는 순간입니다. 칼을 잡은 아브라함의 손 뿐 아니라, 온몸의 신경이 떨리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보다 집중하여, 칼자루에 힘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막 이삭을 칼로 치려고 하는 순간입니다.

 

11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바로 그 때였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였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아브라함은 그 소리에 하마터면, 칼을 놓칠 뻔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칼을 든 채 대답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아브라함은 얼떨떨했습니다. 일단 대답은 했지만,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이 이처럼 절묘합니다. 1초도 아닌 영점 몇 초만 늦었어도, 이삭은 죽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이 절묘할 정도도 정확하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깜박 잊어 약속을 어기거나, 깜박 졸다 약속을 놓치거나, 너무 바빠서 약속을 잊거나 하는 분이 아닙니다.

 

12절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은 기어이 우리의 생애에 이런 시험을 하십니다. 성격은 다르지만, 마침내 우리를 이 지점까지 끌고 오셔서, '이것까지 바칠 수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이것까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는 순종을 하나님은 지켜보십니다. 이것을 여호와 이레라고 합니다. "준비하시는 하나님"정확한 표현은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볼 것이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보실 때, 놀라운 축복으로 역사 하십니다.

 

13절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이 아름다운 광경을 하나님이 흐뭇하게 지켜보셨습니다. 문득 아브라함이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뒤에 숫양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뿔이 수풀에 걸려 있어 꼼짝하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그 양을 준비해두셨다는 것을, 그래서 그 숫양을 잡아서 번제로 드렸습니다. 이삭도 아버지가 제사 드리는 것을 곁에서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너무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이게 감격에 빠진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14절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아브라함은 그 땅을 특별한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여호와 이레”여호와 이레는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이레는 아브라함의 신앙고백입니다. 그가 75세에 부르심을 받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호와 이레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정에서 순간순간 실수를 할 때도, 여호와 이레로 역사하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쓸 것을 미리 아시고 준비하셨다가, 때를 따라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 6:32절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예수님이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빌 4:19절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바울 사도를 통해 주신 말씀입니다.

 

‘여호와 이레’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준비하시는 역사를 체험하였던 모리아산을 향하여 불렀던 이름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다”는 이 말을 들으면 우리는 힘이 납니다. 그리고 “여호와 이레”라는 하나님의 이름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일들에서 우리의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주시는 분으로 믿습니다. 여기에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여호와 이레”가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여호와 이레”, “여호와께서 준비하시리라”고 하면 자기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구하면서도 하나님이 친히 다 준비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바칠 어린 양을 준비하셨지만, 그것이 어떤 경우에 준비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독자 이삭까지도 아끼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으로, 이삭 대신에 어린 양을 준비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독자 이삭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아브라함을 위해서 어린 양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시고, 제공해 주시는 은혜가 풍성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서 준비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을 준비하시고 제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결코 자기의 영광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자들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고 제공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이끄심과 준비하심은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자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이방인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분이십니다.

자신의 가장 귀한 것, 자신이 가장 아끼는 것까지 드려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는 자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 이분을 저와 여러분이 우리의 인생 속에 인생의 주인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우리 자신을 기쁘게 드리기로 결단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약속한 자유가, 그분이 약속한 새로운 인생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놀랍고 새로운 인생이 열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2) : 여호와 / 출 3:13-15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이 잘못 불려지면 섭섭하게 생각하거나 기분 나빠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놀리면서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어른이 지을 때의 마음을 생각하며 진실한 마음으로 불러주는 것이 인간관계의 기초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이름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우리의 자아상을 만들어갑니다. 그 이름으로 우리는 다른 이름들과 관계를 만들어갑니다. 어떤 이름들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름은 우리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남기기도 합니다. 아내의 이름, 남편의 이름, 자녀들의 이름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그날부터 우리는 새로운 이름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그리고 성경에 나타난 여러 하나님의 이름들입니다. 엘로힘, 엘 샤다이, 여호와 등.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사실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은 사람들이 자기 편의대로 아무렇게나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은 진공 상태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냥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학문적 상아탑에서 논의되는 이름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구체적이고 절박한 상황에 있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찾아오셔서, 스스로 당신이 어떤 분이신가를 계시해 주신 이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름을 옳게 알고 부릅니까?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이름을 옳게 알고 부르는 것은 믿음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폭정으로 고난을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모세를 찾아오셔서 전적인 헌신을 부탁하십니다. “가서 내 백성을 거기에서 데리고 나오너라.”그런데 모세는 이런 저런 이유를 둘러대면서 하나님의 요청을 완곡하게 거절합니다. 사실 모세는 40년 전에 화려한 애굽의 왕궁에 살 때,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을 폭행하는 애굽 사람을 때려 죽였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그곳에서 이스라엘 사람 둘이 싸우는 것을 보고 말렸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전날에 죽은 애굽 사람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던 그 사람일 것입니다. 결국 이 일이 바로가 알게 되면서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와야만 했습니다. 미디안 광야는 애굽의 밖에 있습니다. 그가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갔다는 것은 갈데까지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민족을 도우려고 했다가 그 민족으로 인해 갈데까지 도망을 가야만 했던 모세는, 그곳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양들만 보고 살았습니다. 그런 자신의 처지를 놓고 생각했을 때, 스스로 보기에도 형편없는 존재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애굽에 가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 이제는 열정이고 뭐고 다 시들었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양무리의 문을 열고 닫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입이 둔하여 말을 잘 못합니다. 대중 연설도 못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선동적인 연설은 더더욱 못합니다. 그러니 저는 당신의 그 일에 적격자가 못됩니다. 사람을 잘못 선택하신 것 같습니다.”그렇지만 하나님은 끈질기셨습니다.

 

13절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결국 모세는 마지못해 하나님의 요청을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그의 마음에는 확신이 서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막바지에 아주 당돌하게도 하나님의 이름을 묻습니다. 요즘말로 하자면 이렇게 요청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의 명함 한 장 주세요!” 하나님의 명함!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를 향해 친절하게도, 그리고 모세로서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놀라운 명함 한 장을 건네주셨습니다. “야훼, 여호와.”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이 이름을 알아보기 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왜 이러한 이름을 주셨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애굽에서 오랜 세월동안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향해 아마도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너를 이곳에 보내어 우리를 구원하려고 한다는 말인가? 어느 신이 우리의 구원자가 된다는 말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진 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질 하나님의 이름은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과 관련이 있는 의미를 담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은 별로 감동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고된 노역에 시달리며 신음하던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듣는 순간 그 이름이 주시는 메시지를 통해 큰 위로와 힘을 얻어야만 그 이름이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14절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강제 노역에 신음하며 울부짖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해 주신 이름이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는 말씀이 히브리어로는 세 글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건네주신 명함입니다.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인 ‘에흐예’라는 말은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나는 지금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를 ‘아쉐르’라는 관계사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사용해서 계시된 이름이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한글 성경에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고 했습니다. 밑에 관주에서는 “나는 나다”라고 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는 이 말씀이 바로 “나는 야훼, 여호와다”라는 말입니다.

 

15절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여기에 보면, ‘야훼, 여호와’의 이름이 “영원한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또 “대대로 기억해야 할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이 이름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시리즈로 시작하면서 두 번째 시간으로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엘로힘’이라는 단어가 구약성경에 약 2,500번 나오는데, 반면에 ‘야훼’곧 ‘여호와’라는 단어는 구약에만 무려 6,823번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가장 보편적으로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이름이 바로 ‘여호와’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여호와’라는 단어가 가장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이 창세기 2:4절입니다. 창세기 4:26절에 보면 사람들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최초로 부른 것은 셋이 에노스를 낳은 이후였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15장에도 보면, 아브람이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르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야훼’ ‘여호와’로 알려주시기 이전에 무려 160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애굽기 6: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그러니까 이전의 족장들에게서도 ‘여호와’라는 이름은 불려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과 출애굽기 6:3절에 의하면, ‘여호와’라는 이름이 모세에게 처음으로 계시된 이름으로 말씀하십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6:3절의 말씀은 족장들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이름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족장들도 하나님을 ‘여호와’로 불렀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부른 것은 ‘엘 샤다이’전능한 하나님인 ‘여호와’였습니다. 그것이 모세에게 와서, 그리고 모세 이후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를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의 본질적인 의미가 알려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본문 이전에는 그 어디에서도 ‘여호와’라는 이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해 주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야훼, 또는 여호와로 계시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첫째로,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일반적으로 성경학자들은 히브리어로 ‘야훼’또는 ‘여호와’라는 단어는 영어로 표기하자면, 아마도 이 단어의 어근이 “to be”일 것이라고 합니다. “to be,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존재한다”는 단어의 어근에서 ‘여호와’라는 단어가 나왔을 것이라고 주장을 합니다. 히브리어로 ‘야훼’라는 말로 발음되는 이 단어는 본래 히브리어에 네 개의 자음 글자로 형성이 됩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영어로 표기를 할 때는 “YHWH”라는 자음으로 표기를 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JHVH”로 표기하기도 합니다.

 

요즘은 듣기가 어렵지만 우리 문화에는 웃어른들을 존경한다는 의미로 그 이름을 직접 말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함자’(銜字)를 언급했습니다. 그래서 “네 아버님 함자가 어떻게 되시느냐?”라고 물으면, “제 아버지의 함자는 임자, 종자, 진자입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냥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우리 아버지 이름은 임종진입니다”라고 대답을 했다가는 엄청 야단을 들어야 했습니다. “가정교육을 못 받았다느니, 버릇이 없다느니, 뼈대가 없다느니.”웃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가볍게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그런 존재였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 너무나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히 직접 부르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YHWH”라는 자음이 나오면 유대인들은 발음하지 않고 우물우물 넘어갔습니다. 성경을 필사하다가도 “YHWH”라는 자음이 나오면 가서 씻고, 옷을 갈아입고, 다른 붓으로 글을 쓴 후에 그 붓을 바꾸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읽는 것이 외람 된다는 생각에 다른 이름을 대입시켰습니다. 그렇게 해서 대신 사용한 이름이 “아도나이”(ADONAY)입니다. ‘아도나이’라는 말은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도나이라는 단어를 보면 거기에 모음이 세 개가 들어가 있습니다. 처음에 ‘아’(A)는 모음입니다. ‘D’는 자음이고, ‘O’가 모음입니다. 그리고 ‘N’은 자음이고, ‘A’는 모음입니다. 그러니까 모음이 세 개가 있습니다. 아-오-아(A-O-A).

 

그런데 1세대, 2세대, 10세대가 넘어가고 천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님의 이름은 그 음가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히브리어 “YHWH”라는 단어에 대해서 아무도 본래의 발음을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야훼’라는 발음을 하기 위해서, 아도나이의 세 개의 모음을 대입시켰습니다. 그래서 야훼 하나님을 자음 글자로 YHWH 사이에다가 모음 세 개를 집어넣었습니다. Y다음에 a, H다음에 o, W다음에 a를 넣었습니다. “YaHoWaH.” 그러면 발음이 어떻게 됩니까? “야호아, 여호와”하고 비슷합니다. “야훼”라는 이 단어를 “JHVH”라고 표기할 수 있는데 여기에 세 개의 모음을 대입시킵니다. “JaHoVaH”그러면 “자호바”라고 읽혀지게 됩니다. 영어를 사용하는 구미 사람들이 ‘여호와’라는 발음을 “자호바”라고도 발음을 합니다. 그런데 이 ‘야훼’를 우리말 성경에는 풀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있는 자”그러니까 ‘야훼’를 다른 말로 “스스로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 대목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I AM WHO I AM.”또는 “I AM THAT I AM.” 그런데 성경학자들은 이렇게 표기를 해도 되지만, 또 하나의 가능성이 있는 표기법으로는 이렇게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I will be who I will be.” 무슨 말입니까? “I AM”은 “나는 있다”는 뜻입니다. “I will be”라고 하면 “나는 있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나는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그러니까 “나는 영원히 있을 것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야훼’는 바로 “나는 영원자다”라는 말입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의 특성을 이야기할 때, 그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속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속성에도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이 있습니다. ‘공유적 속성’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도 있고, 하나님에게도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이 속성은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는 부분입니다. 여기에는 ‘거룩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사람은 거룩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이 거룩성을 우리가 공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참되심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닮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가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가 다 공유적 속성입니다.

 

반면에 ‘비공유적’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절대로 공유할 수 없는 속성을 말합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과 다릅니다. 여기에는 ‘전능성’이 있습니다. 사람은 전능합니까, 전능하지 않습니까? 전능한 사람이 있습니까? 절대로 없습니다. 하나님만 전능하십니다. 이것은 사람과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속성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전지성은 또 어떻습니까? 인간들 가운데 전지한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가 흔히 그냥 사람들끼리 말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모르는 게 없어. 만물박사야,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야.”그러나 그것은 순 뻥입니다. 모르는 것이 왜 없습니까?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모르는 것이 없는 분은 딱 한 분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홀로 전능하시고, 전지하십니다. 전능성, 전지성은 비공유적 속성입니다. 이것은 닮을 수가 없습니다. 닮으려고 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닮으려고 하면 큰 일 납니다. 그러면 내가 신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 가운데 하나가 ‘영원성’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한계를 가진 존재입니다. 성경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 한계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야훼, 여호와의 이름은 영원하신 이름입니다. 지상에서 모든 이름이 잊혀져도, 저 영원까지 기억될 이름은 야훼, 여호와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바로 스스로 존재하시는 영원한 하나님이신 것을 믿기 바랍니다.

 

여호와를 통해서 계시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둘째로 그는 언약을 반드시 지키시는 불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 가운데 하나가 불변성입니다. “하나님이 불변하시다.” 이것은 나누어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어떻습니까? 사람은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말라기 3:6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그렇습니다. 그분은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도 변합니다. 인생도 변합니다. 세상천지가 다 변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 그분 홀로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끊임없이 마음이 불안하고 흔들리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세상에 믿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 변합니다. 영속적인 것이 없습니다. 보십시오. 직장, 믿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직장도 없어질 수 있습니다. 잘릴 수도 있습니다. 직장을 믿을 수 없습니다. 직장의 상사는 믿을 수 있을까요? 직장의 동료는 믿을 수 있을까요? 국민연금, 믿을 수 있습니까? 2056년 되면 바닥이 된다고 하니 믿을 수 없습니다. 은행 보험은 믿을 수 있습니까? 믿기 어렵습니다. 일가친척은 믿을 수 있습니까? 형제자매는 믿을 수 있을까요? 형제들을 고발하는 것을 보니까 형제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함께 살아가는 배우자는 믿을만 합니까? 믿을 수 있습니까? 정말 내 배우자를 믿을 수 있다면, 인생은 장밋빛 인생일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이 장밋빛 인생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믿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그러잖아요. 이런 인생의 소위 불확실성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쉴 줄을 모릅니다. 우리의 마음은 늘 방황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인생이 불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안에 닻을 내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그분 안에서 쉴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보십시오. 그냥 하나님이 “나 여호와가 보낸다”고 하셔도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부연하시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너를 보내셨다고 말하라”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신 분은, 그들에게 전혀 낯선 분이 아니라 그들의 조상들이 섬겼던 그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과 맺은 약속이 있습니다. “내가 그 약속을 있지 않았다. 나는 약속을 기억하고 있어. 나는 약속을 반드시 지켜! 그러니 너는 나를 믿을 수 있어야 돼.”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노예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고된 노역으로 탄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약속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시온의 땅에서 백합꽃을 피우며, 아름다운 생수의 강에서 살 것이라고 약속했는데, 그 약속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울부짖음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15절에서 모세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의 조상과 맺은 약속을 내가 기억하고 있어. 나는 변하지 않아. 나는 한결같아. 너희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면 반드시 돌아올 거야.”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자신이 족장들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미래에도 변함없이 그렇게 하실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불변하시는 분이시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결코 자신의 백성들을 떠나시거나 버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사실을 ‘여호와’라는 이름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은 다시 한 번 그의 변하지 않는 속성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한결 같이 너희들을 사랑하고 지켜보고 있는 거야.” 성서신학자들의 해석에 의하면 ‘여호와’라는 표현을 세 가지의 시제로 번역할 수 있다고 합니다. “나는 나였다, 나는 나이다, 나는 나일 것이다.”이러한 해석에 의하면 ‘여호와’라는 이름 속에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분 여호와, 어제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도 영원히 계실 분, 한결 같이 변함없이 존재하시는 그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믿기 바랍니다.

시편 89:3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나는 내 언약을 절대로 깨뜨리지 않는다. 변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시편 기자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시편 110:4절상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그렇습니다. 여호와, 그분은 변하지 않으시며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아무 것도,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고 느낍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정말로 필요하신 분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믿기 바랍니다. 그분 앞에 나와야 됩니다. 그분만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들에게 약속하신 것은 결코 변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을 통해서 계시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세 번째로, 그는 현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여호와 하나님이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생각했습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와 다른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의 초월하심을 느끼게 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을 초월하여 계신 우리와 다른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은 저 멀리 높고 높은 곳에 계시면서 인간사를 방관하시고 구경만 하시는 그런 하나님이실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잘 듣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초월하여 계시지만, 하나님은 초연하여 계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하나님께서, 영원하지 못하고 변하고 흔들리며 이 땅에서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셨을 때, 그는 우리 곁에 다가오시며 인생의 삶의 자리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저 주어진 이름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고난당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해 주는 생수와 같은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자체가 복음이고 희망이며 위로의 원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은 ‘복음’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름을 건네주셨을 때 모세도 알았고, 고난의 풀무 속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알아야만 했던 메시지가 그 이름 속에 담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메시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너와 함께 그곳에 있을 하나님이 바로 나다! 이 사실을 믿어라! 네가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이 그곳에 너와 함께 있을 하나님이 바로 나, 여호와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은 당시 죽음과 학대와 어둠의 땅 애굽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듣고 싶어 했던 복음, 그리고 반드시 들어야만 했던 좋은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너희가 어느 곳에, 어떤 환경에 있다고 할지라도 결코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곳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도 함께 있을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본문 앞의 7절은 오늘 본문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구절인데,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여기에 보면 중요한 동사가 나옵니다. “보고, 듣고, 알고.”하나님은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고통을 세밀하게 지켜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는 신음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과 슬픔을 아셨습니다. “보고, 듣고, 알고.”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삶의 모습을 불꽃같은 눈동자로 세밀하게 지켜보시며,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누구보다 그의 백성들을 잘 아십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힘들어하고 비틀거리고 아파하고 방황하는 모습을 여호와 하나님, 그분이 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작은 신음 소리조차도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얼마나 인생에서 힘들어하며 비틀거리는지 우리의 좌절과 아픔을 아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들으시고 아시는 하나님, 뿐만 아니라 그래서 우리 곁에 다가와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이십니다. ‘여호와’를 영어 성경에서 표기할 때는 “I AM WHO I AM, I AM THAT I AM”입니다. 그것을 짧게 말하면 그냥 “I AM”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짧게 말하면 “I AM 하나님”이십니다. “I AM 현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약 성경의 그 여호와께서는 인생들의 죄와 고통을 보시면서 너무 안타까워하신 나머지, 어느 날 우리 인생을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육신을 입고 오신 여호와,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가 육신을 입으신 사건을 우리는 성육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죄 많은 역사의 한복판에 들어오셔서 우리 곁에 더불어 현존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사실은 요한복음을 읽어보면 요한복음의 기자는 일곱 번에 걸쳐서 예수님을 “I AM”으로 소개합니다. “I AM 생명의 떡이다.” “I AM 세상의 빛이다.” “I AM 양의 문이다. “I AM 선한 목자다.” “I AM 부활이요 생명이니.” “I AM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I AM 참 포도나무다.”그런데 이 때 사용되는 “I AM”은 그냥 자기를 소개하기 위해서, 단순히 문법적으로 사용하는 주어 동사로서의 “I AM”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I AM”은 매우 독특한 표현입니다. 헬라어에서는 “I AM”을 “에고 에이미”(Ego eimi)라는 단어로 표시합니다. “에고 에이미”이것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자기 계시의 표현이요, 구약에 여호와의 신학적 현존을 뜻하는 중요한 단어가 바로 “I AM”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I AM 되시는 그분, 여호와 하나님은 여러분이 특별히 힘들어 할 때, 고통스러워 할 때, 아파할 때 우리의 삶의 자리에 찾아오시고, 거기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며, 우리 곁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기 바랍니다. 그냥 내가 아니라,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찾아오신 하나님, 지금도 내게 다가오시는 여호와 하나님! 여러분은 바로 그 여호와 하나님이 어제도 오늘도 동일하심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지금 인생의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고 고통을 당하고 어쩔 줄 몰라 할 때, 그가 동일하게 여러분 곁에 다가와서 “안심해. 나야”라고 말씀하신다면, 우리의 인생이 달라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여호와, I AM, 바로 그 하나님이 지금도 여러분 곁에 다가오시고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신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온갖 풍랑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인생은 살 만한 인생이라고 고백할만 하지 않을까요? 그분이 정말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풍랑의 바다 저 건너편을 바라보면서, 아직도 인생의 항해를 계속할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여호와 하나님이 정말 함께 하신다면, 인생의 풍랑에도 불구하고 이 풍랑과 더불어 싸우면서, 다시 한 번 인생을 불태워 버릴 그런 각오가 우리에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내 삶의 장에서 쓰러지고 넘어져서 삶에 대한 기력을 잃어버리고, 희망을 잃어버리고, 비전을 잃어버린 여러분의 곁에 다가오시면서, 우리를 만지시고 내게 말씀하시는 그분의 음성이 들립니까? “안심해, 나야! 나 여호와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개입하지 않는 ‘기계적인’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만나는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신 동시에 우리 인생에 직접 개입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며,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며,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영혼이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강건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3) : 엘로힘 / 창 1:26-28

 

도장 새기는 집에 한 손님이 왔습니다. “도장 하나 새기는데 얼마입니까?” “예, 천원입니다.” “한자나 한글이나 값이 같습니까?” “예, 같습니다.” “이름자가 길건 짧건 값이 같습니까?” “아, 물론이죠”이 말을 듣자 손님이 도장에 새길 이름을 내 놓았다고 합니다. 한 참을 들여다 본 도장집 주인이 묻습니다. “어느 것이 이름입니까?” “그게 다 이름인데요?” “이게 한 사람 이름입니까?” “그렇다니까요?” “아니 선생님, 이런 긴 이름이 어디 있습니까?” “있습니다. 제 아들입니다.” “선생님, 혹시 저를 놀리시는 것 아닙니까?” “놀리다니요 분명히 제 아들 이름인데요”도장 집 주인이 계속 못 믿는 표정을 보이자 손님은 주민등록등본을 보여 주었다고 합니다. 도장집 주인은 입을 다물지 못하는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원, 세상에 이렇게 긴 이름이 호적에 오르다니.”거기에 적힌 이름은 “밝 차고 나온노미 새미나”였다고 합니다. “복을 차고 나온 것을 남들이 샘낸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황금독수리 하늘을 날며 세상을 놀라게하다’입니다. 18자죠. 그리고 여기에 견줄만한 이름이 있습니다. ‘박하늘별님 구름햇님보다 사랑스러우리’입니다. 17자죠.

이 이름이 나오기 전에는, 이름에 몇 글자가 들어가든 제한이 없었는데, 주민등록증에 다 기록할 수 없다는 불편함이 생겨서, 1993년부터 성을 제외하고, 다섯 글자이내로만 만들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법이 바뀌지 않는 한, ‘황금독수리 하늘을 날며 세상을 놀라게 하다’라는 이 이름은 최고의 기록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가장 긴 이름을 가진 사람은 누구일까요? 피카소입니다.(2위) 보통 우리가 피카소의 이름을 표기할때는 ‘파블로 루이즈 피카소’라고 합니다만, 사실 이것은 그의 이름 첫 단어와 마지막 단어만 표기한 것입니다. 실제로 그의 이름은 ‘파블로-딩고-호세-프란시스코-드파우라-호안-드로스-레메디오스-크리스피노-드라산티스마-트리니나드-루이즈-피카소’입니다. 피카소의 성격과 기질상 그런 이름을 가질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름은 캐럭터 곧 성격이요 기질이요 품성입니다. 참, 이름도 별 이름이 다 있다 싶을 정도로 듣기에 이상한 이름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긴 이름뿐만 아니라 좋은 이름을 짓기 위해 애를 씁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은 이름을 잘 짓기 위해 예쁘게 짓기 위해 그렇게 애를 쓸까요? 이름은 그 사람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을 자녀에게 지어준 부모는 나름대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지어 주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우리 하나님도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의 뜻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 이름과 뜻을 잘 알고 믿는 것이 당연지사가 아닐까요? 우리의 하나님은 저 높고 높은 곳에 가만히 앉아 계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찾아오기를 바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로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이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유한한 우리 인간이 자신들의 노력으로 무한하신 하나님을 찾아가야 한다면 그것은 절망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붙잡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허망한 우상일 것입니다. 이것이 어거스틴이 체험했던 교훈입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알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노력으로 부지런히 하나님을 알아가려고 했지만, 결국 그가 붙잡았던 것은 우상이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한계와 연약함을 아십니다. 무엇보다 죄로 오염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타락한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을 알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우리들에게 찾아오시고, 우리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직접 알려주시면서, 그 이름을 통해 하나님을 보다 더 알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아무에게나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길을 걸어가는 어떤 낯선 사람을 붙잡고 “아저씨, 내 이름이 임남수요”라고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웃이나 친구로 사귀고 싶은 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아무에게나 알려주시지 않습니다. 그가 선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셨다는 것은, 우리와의 인격적 관계를 기대하시고,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복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보다 바르게 알고, 그분을 높여드리며, 예배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시편 9:10절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여기에 보면, ‘주의 이름을 아는 자’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름은 단순히 호칭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름은 그 이름으로 대변되는 존재의 전 인격을 나타낸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곧 한 개인의 이름은 그 이름을 지닌 존재의 성품과 능력, 인격 등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는 자’는 체험적으로, 관계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지적으로 아는 자들이 아니라, 그분을 믿고 삶의 현장 속에서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불의한 자들로 인해 견딜 수 없는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에게로 달려가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환난의 때에 피할 요새가 되시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를 의지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이름을 체험적으로 아는 자들은 고난의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 거룩한 이름을 힘입어 도움과 보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을 아는 사람, 주님을 아는 사람이 주님을 신뢰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은 위기와 환난의 때에 우리가 달려가 피할 안전한 바위요, 피난처가 되신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알아 가기를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세 번째로 살펴보게 될 하나님의 이름은 ‘엘로힘’입니다. ‘엘로힘’의 어근인 ‘엘’이라는 뜻은 ‘강한 자, 능력 있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끝에 ‘im’이라고 해서 영어로 ‘him’을 붙입니다. 그래서 ‘엘로힘’이 됩니다. ‘엘로힘’이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하나님의 이름 가운데 하나입니다. ‘엘’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성경에 200회 이상 등장하고, ‘엘로힘’이라는 복수로는 구약성경에 2,500 번이나 등장합니다. 창세기 1장에만 엘로힘이라는 단어가 무려 31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이 엘로힘이라는 단어로 도배가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창세기 1장부터 10장에 나오는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모두 ‘엘로힘’입니다. 창세기 1:1절을 아십니까? 이것은 다 외우실 것입니다. 창세기 1:1절을 다같이 암송하도록 하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여기에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바꾸어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태초에 엘로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렇다면 ‘엘로힘’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첫째로,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1:1절에서 ‘태초에’라는 말은, 시간이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한 시간의 출발점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경은 천지 창조의 사건이 일어났던 시간의 기원을 제시하면서, 천지 창조의 주체가 엘로힘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엘로힘의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선언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단어가 그냥 ‘엘’이 아니라 ‘엘로힘’이라고 해서 복수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권세 있고 힘있는 뛰어난 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엘로아흐’의 복수형입니다. ‘엘’이라는 단어도 ‘God’으로 번역되는데, ‘엘로힘’을 영어로 정확하게 번역하면 God에 s자를 붙여서 ‘God's’가 됩니다. 그러니까 복수라는 말인데, 여기에 힘(him)을 붙이면 세 개 이상의 존재를 나타냅니다. 둘도 안 되고, 세 개 이상의 존재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는 이것을 가지고, 자유주의 신학자들 가운데는 성경이 고대 중동의 다른 종교들처럼, 다신 숭배사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이들의 주장처럼 성경은 정말 다수의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이시니”라고 하면서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문장 구성에서 주어에 해당되는 ‘엘로힘’에 바로 이어서 사용된 ‘창조하시니라’라는 동사는 분명히 단수 형태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수의 하나님이 있다는 이들의 주장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복수가 사용되었을까요? 그것은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그러니까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엘로힘이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복수어미라고 해서 다수의 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한 분의 인격체 안에서 세 위격이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계속해서 읽어 내려가면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26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여기에 보면, ‘우리’라는 1인칭 복수 대명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여기에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라는 단어를 쓰셨을까요? 인간 창조에 있어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우리’라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최고의 걸작품인 인간을 창조함에 있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가 되시는 하나님이 일체가 되어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히브리어에서는 복수형을 사용할 때 복수를 쓰면, 그것은 아주 대단한 능력과 위엄을 나타내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이라고 하지 않고 ‘물들’, 영어로 ‘water’이라고 하지 않고 ‘water's’라고 쓰면 ‘거대한 물’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아주 위대한 위엄, 초월적인 능력을 나타낼 때 복수어미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단수로 쓰지 않고 엘로힘,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계시는 분으로 복수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매우 일관성 있게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과 지혜의 결과로 만물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1:20절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누군가 무엇을 만들게 되면, 거기에는 그 사람의 능력과 개성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림이나 조각품만을 보고서도, 그것을 그리거나 만든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알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만물에도, 하나님의 능력이나 신성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피조 세계를 통해, 당신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을 알 수 있도록 계시하셨다고 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아름답고 장엄한 자연을 보면서 그 자연에 압도당할 때가 있습니다. 자연 속에 깃들어 있는 기가 막힌 조화와 질서를 발견하면서, 위대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찬양하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창조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시인 브레이크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한 알의 모래를 보고 우주를 생각하고, 한 송이의 꽃을 보고 천국을 생각하였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조금만 열린 마음으로 자연을 바라본다면,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하고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과 짐승과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당한들 변명의 여지는 없을 것입니다. 심판의 날,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창세로부터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소위 과학의 발달을 말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현대 과학이 발달되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극히 일부분 밖에는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의 영역은 아직도 건드리지 못한 신비한 영역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창조의 신비를 알면 알수록, 그리고 느끼면 느낄수록,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을 경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찬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이 어마어마한 놀라운 만물을 하나님이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왜 하나님을 경배합니까? 그가 만물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그분을 찬송합니까? 그가 만물의 창조자, 엘로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엘로힘의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1장이 우리들에게 계시하고 있는 엘로힘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두 번째로,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엘로힘 하나님의 창조 사역 가운데 절정에서 창조하신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엿새 동안 만물을 창조하셨는데, 마지막 여섯째 날에 창조하신 순서가 짐승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 마지막에 창조의 최고 클라이막스에서, 하나님이 최고의 정성을 들여 창조하신 걸작품이 바로 인간입니다.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하나님이 자신을 닮은 존재로 지으신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존재를 생각하면서 그 신비로움 앞에 경탄해 보았습니까?

 

유명한 그리스도인 의사 가운데 ‘폴 브랜드’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가 필립 얀시와 함께 지은 ‘오묘한 육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자기가 의사로서 처음 현미경으로 살아있는 세포를 관찰했을 때의 충격과 감동을 평생 잊어버리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살아 있는 한 세포의 존재, 그 신비를 들여다 본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신비 앞에 놀라서 온 종일토록 경탄과 감격을 말해도,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것이라고 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생애 중 누구라도 이 세포의 신비를 설명하는데 성공할 수 있다면, 나는 공중 광고문을 내는 비행기를 전세 내어 하늘 높이 날으며, 내 돈이 바닥 날 때까지 이 하늘의 모든 공간마다 감탄 부호를 계속 그릴 것이다.”그만큼 세포 하나의 존재의 신비를 감격해 하는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그리고 아홉 달에 걸쳐서 정교한 방법으로 그 기능을 나누는 세포들, 수십억 개의 혈구가 생겨나고, 수백만 개의 간상체와 원추체가 생겨나는데, 단 하나의 수정란 세포에서 십조 개에 이르는 세포가 생성되고, 그리고 마침내 한 생명이 태어난다. 아기다. 인간이다. 도대체 그 무엇으로 이 생명의 신비를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다만 시편 기자와 더불어 감격하고 감탄하며, 그리고 감사할 따름이다.”

 

시편 기자가 시편 139:14절에서 이렇게 고백을 하였습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솜씨가, 인간의 능력으로 능히 이해할 수 없고, 공포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위대하고 놀랍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여러분, 주변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한 번 잘 살펴보세요. 하나님이 얼마나 기묘하게 지으셨는지를 말입니다. 이 시간 옆에 있는 분을 자세히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해 보기를 바랍니다. “정말 기묘하시네요.”정말로 잘 보세요. 기묘하게 생겼습니다. ‘기묘하심이라’라는 단어를 영어번역본에서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나는 두렵고도 경이롭게 만들어졌습니다.” “wonderfully made.”가만히 생각해 보면, 인간의 창조는 정말로 wonderfull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 기묘하게 생긴 옆 사람을 보시면서 슈돌(슈퍼맨이 돌아왔다)에 나오는 건후의 버전으로 이렇게 감탄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와~”폴 브랜드 박사의 이야기는 주로 인간의 육체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은 얼마나 더 신비로운 것입니까? 인간의 영혼이야말로 하나님의 인격과 품성이 깃들어 있는 존재의 지성소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엘로힘’다음으로 많이 나오는 단어가 ‘이르시되’라는 말입니다. 그 다음으로 많이 나오는 단어가 ‘그 종류대로’라는 말입니다. 그 종류대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말은 말 같이, 소는 소 같이, 개는 개 같이. 하나님께서 그 종류대로, 종자대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람에게 오면서 달라집니다. 사람은 사람 같이가 아닙니다. 사람만은 하나님 같이 지으셨습니다. 이것이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차별화 되는 인간 창조의 독특성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품성을 이어받아 자신을 닮은 존재로 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알고, 느끼고, 판단할 수 있는 지성과 감성을 가지고 있는 인격적인 존재이신 것처럼 우리 인간을 알고 느끼고 판단할 수 있는 존재, 사랑할 수 있는 존재, 그리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닮아서 창조가 가능한 존재, 그래서 그 창조성을 가지고 과학과 문화를 발달시킬 수 있는 놀라운 존재로 지어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요, 특별한 기대의 대상인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바로 엘로힘 하나님의 기대를 이루어드리는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엘로힘 하나님의 기대를 이루어드리는 삶을 살 수가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엘로힘 하나님의 그 기대를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하나님과 교제를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사귐의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교제하십니까? 얼마나 자주 교제를 하십니까?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타락의 상태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은 구원 자체의 목적이 아니라, 우리가 구원을 받음으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사도 바울은 우리를 불러서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엘로힘의 하나님은 여러분으로부터 경배를 받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와 인격적인 교제를 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경배를 기다리시고, 교제를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1장이 계시하고 있는 엘로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실까요?

셋째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인간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8절“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에게 복을 주시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제일 먼저 하신 일은 축복하신 일입니다. 이 대목이 영어 성경에 보면 ‘God blessed them’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셨다.” 기독교 문화의 영향을 받은 서구권에서는 만났을 때 서로 인사를 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God bless You!”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사건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셨다.”그렇습니다, 엘로힘의 하나님은 축복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축복은 나만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축복을 받아서 그 축복으로 자녀를 키워서, 다음 세대에 넘겨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기대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축복하시면서 그 축복에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땅을 정복하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땅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축복한다. 나에게 받은 그 축복으로 네가 걸어다니고 살고 있는 그 땅을 축복되게 하여라!”

 

우리를 축복하시고 우리를 통해서 그 축복이 흘러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인생의 범죄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축복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사람이 범죄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회초리로 우리를 때리십니다. 징계하시고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가 아닙니다. 예레미야애가 3:33절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통해 그들을 징계하십니다. 그리고 고생하는 그 백성들을 보시면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희들이 고생하는 것은 나도 마음이 아프다. 내가 원해서 너희들을 이렇게 때리겠느냐? 그것은 내 본심이 아니다. 너희들이 고생하도록 내버려 둔 것은 내 본심이 아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징계는 결코 본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축복인 것을 믿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엘로힘의 하나님은 인생들이 회개하고 돌이킬 때마다 축복을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노아의 시대에 사람들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홍수를 내리시고 심판하셨습니다. 그런데 홍수 심판이 지나가자마자 창세기 9: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심판이 끝나자마자 축복을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너희들을 축복하고 싶었어. 이것이 나의 본심이야.”이것이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분을 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경배를 받고 싶어 하시는 엘로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교제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축복하고 싶어 하시고, 우리가 그분에게 받은 축복을 우리의 이웃들과 열방을 향해 나누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엘로힘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들에게 주는 실질적인 중요성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우리는 왜 엘로힘 하나님을 자랑하고, 그분의 이름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창조자라고 한다면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신 분은 누구일까요? 전능하신 하나님 엘로힘입니다. 왜 창조하셨을까요? 하나님 그분을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온 천하보다 귀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창조물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놀랍고도 경이롭게 만들어진 존재라는 사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또는 반대로 하나님이 만드신 존재인 나 자신을 보면서 멸시하거나 부끄러워하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애굽에서 고난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라고 하시니까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 4:10) 이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출애굽기 4:11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조엘 오스틴 목사님이 쓴 ‘긍정의 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오스틴 목사님은 이 책에서 이런 흥미 있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밤중에 밤바다에 배 한 척이 항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배 한 척이 칠흙 같은 어둠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갑자기 강한 불빛이 앞에 나타납니다. 너무나 놀라서 긴급하게 타전을 했습니다. 선장의 시야에 너무 밝은 불빛이 들어오니까 상대방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방향을 동쪽으로 10도만 트십시오.’그랬더니 상대방으로부터 즉각적인 답신이 돌아왔습니다. ‘그럴 수 없소. 당신이 서쪽으로 10도를 트시오.’ 화가 난 선장이 다시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나는 해군 함장이다. 명령이다. 항로를 변경하라. 이곳은 나의 통치 아래 있다.’몇 초 후에 다시 메시지가 들어왔습니다. ‘저는 이등 수병입니다. 하지만 방향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함장님이 항로를 먼저 바꾸셔야 합니다.’화가 극도로 치민 이 함장은 최후의 통첩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이 배는 전투함이다. 앞으로 전진한다.’그러자 아주 퉁명스러운 메시지가 즉각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함장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여기는 등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사는 줄을 아십니까? 맨날 우리의 남편을 보고 “당신 좀 바꿔!”아니면 아내보고 바꾸라고 합니다. 자기는 돌 바위처럼 전혀 바뀌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바꾸어야 하는 것은 아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일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배우자가 바꾸기를 원하십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 자신이 먼저 바꾸라고.”내가 먼저 인생의 항로를 바꾸셔야 합니다. 그러면 가정이 달라집니다. 교회가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스타일대로 살기로 인생의 스타일을 바꾸어 보십시오. 항로가 달라집니다. 그러면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비난과 비판과 저주 속에 살아왔던 인생이, 이제는 하나님의 축복의 메시지를 받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인생을 살기로 한 번 결단해 보십시오. 그를 예배하며, 그와 더불어 교제하며, 나를 축복하신 하나님의 의도대로 축복을 나누며 사는 존재로 결단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그 순간부터 여러분의 인생은 엘로힘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경험하는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힘들고 어려울 때, 내 삶이 지치고 곤고할 때, 견고한 망대이신 엘로힘 하나님께로 달려가십시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어둠 속을 방황하며 헤맬 때, 인생의 방향을 바로 잡고 엘로힘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십시오. 잊지 마십시오. 엘로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을 닮은 존귀한 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존귀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존귀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도록 지음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하나님의 가족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오직 주님을 목적하고 살아야만 합니다. 그의 거룩한 나라가 임하도록 기다리며, 경건한 삶을 살고 부지런하여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4) 여호와 라파 / 출 15:22-27

 

‘적극적 사고방식’이라는 책을 저술한 ‘노만 빈센트 필’박사가 어느 날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 중에 식당 칸에서 식사를 하는데, 바로 옆자리에 아니 든 부부가 앉아 식사를 하면서 부인이 계속적으로 불평을 합니다. “야채가 신선하지 않은 것 같다. 고기가 너무 오래된 거 같다. 날씨가 왜 이렇게 변덕스럽냐. 아무래도 오늘 이 여행은 잘못 떠난 거 같다.”고 계속 불평을 합니다. 남편이 민망해서 안절부절 하다가 양해를 구합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제 아내의 직업이 그래서요.”이 말에 도대체 직업이 뭔데 이렇게 불평을 할까싶어서 “무슨 직업인데요?”하고 물었더니 “제조업입니다.”더 궁금해서 “무엇을 만드는데요?”하고 물었더니 남편은 심각한 얼굴로 아주 미안하게 대답합니다. “죄송합니다만 불평제조 공장을 하고 있습니다.”하더랍니다.

 

전문상담가인 ‘아돌프 퀘자다’라고 하는 사람이 현대인은 하나같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혼돈과 불평과 후회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게 현대인의 병이라는 것입니다. 먼저는 자신의 존재자체에 대한 혼돈과 불평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우선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불평이 있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키가 작을까? 왜 난 이렇게 클까? 왜 나만 이렇게 못생겼지?’거울을 볼 때마다 불평하는 못 고치는 병이 있습니다. 이게 성형중독이라는 새로운 병을 만들기도 하고요. 그런가하면 자기 성격에 대해서도 불평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인데도 마음에 안들 때가 있잖아요. 내가 생각해도 참 못돼먹었다 싶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런가하면 자기의 능력에 대해서 항상 불만족합니다. 나는 이것도 못났고 저것도 못났고, 이것 밖에 안 된다는 자기 존재에 대한 불평이 많습니다. 또 하나 내 존재 위치에 대한 불평이 있습니다. “누워서 침 뱉기”라는 말 아시지요? 자기 소속, 자기 거처에 대해서 불만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가족에 대해서 불평하고, 부모에 대해서 불평하고, 내가 낳은 자식에 대해서도 내가 불평 해봤자 이거야 말로 누워서 침 뱉기입니다. 내가 속해 있는 교회를 실컷 욕하고, 교회에 대해서 불평을 죽 늘어놓고 나면 내 얼굴에 침 뱉는 것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습니까? 또 한 가지는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해서 후회할 때가 많습니다. 사실은 누구나 자기의 일에 대해 만족하는 사람이 드뭅니다. 지나고 나면 항상 부족한 것만 생각나거든요. 그래서 스스로 불평합니다. ‘좀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더 열심히 할 걸.’이런 생각에 매여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반성차원이라면 괜찮겠습니다만 습관이면 안 됩니다.

이에 ‘아돌프 퀘자다’박사는 이러한 것들로부터 구제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느냐를 말하면서 첫째 과거와 화해하라는 재밌는 말을 합니다. 지난날에 대해서 너무 아파하지 말라고 합니다. 과거 때문에 현재를 망가뜨리며 살지 말란 것입니다. 또 과거의 일을 가지고 현실에 자꾸 어렵게 적용하려거나 억지로 맞추려고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비현실적인 기대를 버리고 실제에 대해서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허황된 꿈을 꾸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언제까지 환상 속에서 헤매고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의 나를 행복한 나로 내가 스스로 인정할 수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도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난 불행하다 하면서 끝없이 허황된 행복만 찾고 있다면, 나도 불행하거니와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전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중요한데 ‘아돌프 퀘자다’박사는, 지금 모든 상황 속에서 그리고 내 자신의 존재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내 형편, 내 처지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확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형편이 인간적으로야 어떻든지 간에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이것도 하나님의 사랑이다.”라고 할 때만이 혼돈과 불평과 후회 속에서 그 사람이 구제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증, 하나님의 자녀 됨에 대한 긍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라는 아주 신앙적인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제임스 휴스턴이 쓴 ‘기도-하나님과의 우정’이란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스위스 어느 요양원의 한 의사는 환자들을 보러 가기 전에 이런 기도를 드리곤 했다고 합니다. “오, 하나님, 만일 이 사람이 치유를 받아서 당신을 더 영화롭게 할 것이라면, 여기서 우리를 그를 치유하는 도구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오, 하나님, 만일 이 사람이 병든 채로 남아 있어서 당신을 더 영화롭게 할 것이라면, 그를 병든 채로 내버려 두옵소서.” 참으로 지혜로운 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건 그 의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았기에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인 ‘여호와 라파’는 ‘여호와는 치료하시는 자’란 뜻입니다. 치유의 하나님을 일컬을 때, ‘여호와 라파’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생을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든 환경을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치료하시는 자로 호칭하는 것은, 이미 질병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질병이 있습니까? 질병이 어디서부터 왔습니까? 성경은 죽음이 죄의 결과라는 것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롬 6:23절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그럼 병은 어떻습니까? 병도 죄의 결과이긴 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질병을 징계의 도구로 사용하시곤 합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히스기야를 질병으로 치셨습니다. 왕하 18:3-7절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히스기야는 아주 뛰어난 왕입니다. 세상에 그런 왕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다윗에 비길만한 왕입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질병으로 쓰러져 죽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성경에 이렇게 나옵니다. 대하 32:24-25절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므로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고 또 이적을 보이셨으나,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리게 되었더니’ 히스기야가 첫 번째 질병에서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교만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이 그를 여지없이 치셨습니다.

 

모든 질병이 죄의 결과로 오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병에 걸리게 되면, 먼저 할 일은 자신을 영적으로 돌아보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았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도 질병이 범죄의 결과로 인해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요 9:2절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오늘날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마 그게 사람들의 보편적인 심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모든 질병을 하나님의 징계로 볼 수만은 없습니다. 그건 주님의 대답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 9:3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그럼에도 이건 특수한 경우로 봐야 합니다. 드물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질병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벧전 2:24절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이게 하나님의 보편적인 섭리입니다. 우리가 병에서 낫는 것이 하나님의 보편적인 섭리입니다. 고후 12:7-9절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이것 역시 특수한 경우입니다. 자기가 질병에 걸렸을 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하며 바울 흉내 내면 안 됩니다. 그 전에 바울이 목숨을 건 세 번의 간구를 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막 16:17-18절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약 5:14-16절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우리는 이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병든 나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뿐더러, 병든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병들었을 때, 쉽게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가 병든 것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자기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일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유전적인 요인일 수도 있습니다. 아주 드물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일 수도 있습니다. 이걸 누구도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렵습니다.

 

류익태 목사가 쓴 ‘질병은 하나님의 뜻이 담긴 교과서이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내용 중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질병은 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증거물이고,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게 하는 잘 그려진 약도이다.”저자는 책의 결론을 이렇게 맺고 있습니다. “질병은 고통이요 좌절이요 고독이요 손실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인생에 플러스다.” 자기 일에 몰두하여 정신없이 달려가던 사람이, 덜컥 병에 걸려 입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럼 병문안 가서 뭐라고 합니까? “이제까지 너무 앞만 보고 살아왔으니, 이제 좀 쉬면서 좌우도 살피면서 살라”고 합니다. 아니면 “하나님이 강제적인 쉼을 허락하신 모양이다. 이번 기회에 좀 쉬면서 충전을 하라”고 조언합니다. 앞만 보고 열심히 뛸 때는 모릅니다. 멈춰 서면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쉼은 방향을 수정하거나 점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류익태가 책으로 전한 말이 맞습니다. “질병은 고통이요 좌절이요 고독이요 손실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인생에 플러스다.”

우리 중에도 질병으로 연약함으로 고생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신을 돌아볼 수 기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렇다고 병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치료 거부를 해서는 안됩니다. 의술도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 속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강건하게 살기를 바라신다. 요삼 1: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우리 평생에 하나님의 전인적인 치유가 나타나기를 바란다.

 

22-23절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오늘 말씀은 여호와 라파의 배경이 되는 말씀입니다. 홍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애굽 군대를 수장시키며, 자신들을 극적으로 구원하시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너무나 감격하여, 하나님께 승리의 찬가를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하심이 기뻤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한 길이 탄탄대로일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을 가기 위해서는, 광야를 거쳐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군소리하지 않고 따라갔습니다. 처음해보는 광야 생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첫날은 무척 힘들었습니다. 이튿날은 조금 적응이 되어 견딜만했습니다. 사흘째가 되었습니다. 홍해를 건너 한 60km쯤 걸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물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광야에서 물은 생명과 직결됩니다. 물이 없다는 것은, 생명을 부지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찬양하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고, 얼굴에 두려움과 절망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에 누군가 전방에서 물을 발견하고 소리쳤습니다. “물이다!”그들은 이제는 우리가 살았다는, 안도의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깐입니다. 먼저 물을 마셨던 사람들이 물이 써서 마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뒤에 도착한 사람들은, 처음에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갈증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물을 보고도 마실 수 없는 지금의 고통은, 더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24절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그러자 그들의 주특기가 나왔습니다. 그들은 바로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향해 원망을 늘어놓았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만 놓고 보면 원망한 것도 아닙니다. 귀에 담지 못할 욕을 해댔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을 믿고 따라온 우리가 잘못”이라며, 인격적 모욕을 줬을 것입니다. 홍해를 건넜을 때만 해도 “당신이 최고”라고 치켜세울 때는 언제고, 지금은 “당신 때문에 우리가 죽을 지경이 되었다”며 원망하고 있습니다. 위기 앞에서 그들 안에 잠재되어 있던, 부패한 성품들이 나왔습니다. 그동안 종노릇할 때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생각이 튀어나왔습니다. 그들은 행군할 기력도 상실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25절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백성들의 원망을 듣고, 모세가 어떻게 했습니까? 사실 물이 쓴 게 모세 탓입니까? 모세인들 그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모세는 지금 난처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지도자가 백성들과 덩달아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백성들에게 “나도 뭐 당신들의 지도자가 되고 싶어서 된 줄 아냐”며 항변할 수도 없습니다. 그때 모세는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모세는 쓴물을 앞에 두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백성들의 탄식하고 원망하는 소리를 뒤로 하고,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사실 그 상황에서 모세가 뭘 할 수 있었겠습니까? 모세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할 수 있는 게 기도밖에 없을 때는, 기도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라고 했습니다. “부르짖다”는 말은 원문에서는 ‘차아크’인데, 이것은 커다란 고통 가운데서 도움을 요청하며 부르짖거나, 몹시 흥분하여 절규하는 모습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창세기 4:10절에서 죄 없이 죽은 아벨이 너무나 억울한 자신의 사정을 하나님께 쉬지 않고 계속해서 ‘호소했다’는 단어와 같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cried out”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내 속에서 터져 나오는 모든 것들을 다 쏟아내는 것입니다. 지금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방금 전에 홍해가 갈라져서, 자신들이 그 바다를 건너 구원받게 되었던 구원의 역사를 체험하고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원망하는 상황을 놓고 하나님께 애절하게 부르짖은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많은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모세처럼 하나님 앞에 나와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다가오는 인생의 염려나 걱정, 불안을 속으로 집어넣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와 다 쏟아내며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 온전히 의탁하는 집중적인 기도입니다. 인생의 쓴물이 있는 마라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도하는 것입니다. 목이 타들어가는 죽을 것 같은 환경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물론 보통 때도 기도를 우선해야 합니다. 더구나 인생의 위기 앞에서, 기도보다 앞세울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보통 때 기도를 멀리한 사람이, 위기 앞에서 기도를 앞세울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모세가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해결책을 제시하셨습니다. 곁에 있는 나무를 물에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 나무가 해독제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 나무 자체에서 쓴물을 단물로 만드는 효력이 나왔을 수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위기 앞에서 모세가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 해결의 열쇠가, 기도 후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쓴물을 치료하실 나무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단지 기도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기도 대신에 원망을 했습니다. 하지만 원망의 대열에 동참하지 않고, 홀로 기도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기도의 사람 모세였습니다. 하나님이 기도의 사람 모세에게, 문제 해결의 열쇠를 맡기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위기 곧 육체적인 질병, 정신적인 문제, 환경적인 문제의 해결의 열쇠를, 하나님이 쥐고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도,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걸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열쇠를 다른 누구도 아닌, 기도하는 사람의 손에 주십니다.

 

26절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그런데 덮어놓고 치료하는 여호와가 아닙니다. 앞에 단서가 있습니다.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성경의 모든 기적은 순종하는 자에게 나타났습니다. ‘여호와’라는 말은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라파’라는 말은 “치료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라파’라는 말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고통 중에서 그들이 만난 하나님은 여호와 라파,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도 여호와 라파,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만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가운데, 내 마음의 고통과 육신의 질병까지도 온전히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샘안양병원장 박상은 박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의대에 입학한 후, 우쭐대는 마음으로 2년 간의 예과시절을, 교회를 멀리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며, 세상의 쾌락을 추구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그의 몸에 이상한 피부병이 생겼습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비늘 같은 것이 생겨, 약간만 건드리기만 해도 주위가 온통 하얀 비늘로 뒤덮일 정도였습니다. 유명한 대학병원 피부과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아토피성 피부염이라는 말만 할 뿐, 전혀 치료 효과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토록 사람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던 그가, 1년 동안 사람을 피해 다니며 집에만 틀어박혀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가복음을 읽던 중, 자신이 죄인임을 다시금 깨닫고, 자신의 교만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앞에 자신의 모든 죄악과 이기적인 마음을 회개하자, 주님께서는 그를 용서해주셨고, 그날부터 피부가 깨끗해진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그가 고백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질병을 가질 때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질병의 의미를 깨닫기만 한다면, 그 질병은 더 이상 우리에게 머무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말씀에 대한 순종은 인생의 고통과 관련하여 이중의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방의 축복이요, 두 번째는 치유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면 고통에서 지킬 수가 있습니다. 예방의 축복입니다. 쉽게 이렇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때때로 운전을 하면서 교통 법규를 거추장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 법규를 없애버리면 편하겠습니까, 아니면 얼마나 많은 사고가 일어나겠습니까? 교통 법규가 때로는 나의 행동을 제한하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 교통법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들에게는 축복입니다. 사고를 예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 때 그것이 나를 예방하는 것입니다. 고통에서 나를 지켜주고 내 삶을 거룩하게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예방하고 보호할 뿐만 아니라 내가 인생을 살다가 고통과 어려움에 빠질 때에도 말씀대로 살기로 결단할 때 내가 너희를 치료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을 배우십시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단해 보십시오. 이런 사람들은 고통이 지나갔을 때 영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고통에서, 아니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인생의 현장에서 경험하는 고통은 영적 성숙을 위한 성장의 고통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경험되는 고통은 영적으로 성숙시키기 위해서 허용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믿는다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원망하고 불명하지 말고, 일어나 광야의 길을 계속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27절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그들은 마라를 지나고 얼마 후 엘림이란 곳에 이릅니다. 그곳은 물이 넘치는 오아시스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고고학자들이 마라와 엘림의 위치를 신빙성 있게 알려줍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마라에서 엘림까지 거리는 약 11㎞입니다. 30리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마라에서 엘림까지 도보로 이동하면 약 반나절 거리입니다. 그렇다면, 지도가 있다고 가정하고 이스라엘의 행로를 상상해 봅시다. 광야를 거쳐 사흘 만에 마라에 이르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쳐 있었고, 물이 모자랄 수도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다 마라에서 쓴 물을 마시자, 그들의 공포는 놀라울 정도로 증폭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다음 날 그들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엘림’이라 불리는 어마어마하게 큰 오아시스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샘이 열두 개나 있고, 종려나무도 70그루가 웅장하게 서 있습니다. 커다란 오아시스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결국 불평과 불만을 쏟아냈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나흘만 참았더라면, 아니 이때 하루만 더 참았더라면 어땠을까?’아마도 나흘만 참았더라면 그들은 찬송에서 찬송으로 이어지는 노래를 부르며 기뻐 뛰었을 것입니다.

 

나흘 전에 그들은 홍해에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애굽의 온 군대를 홍해에 잠기게 하신 하나님의 기적을 목도하면서 찬양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나흘 후에는 엘림에서 또다시 풍성한 물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흘만 참았더라면, 마라에서 불평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깊이 생각하다 보면, ‘우리의 믿음이 사흘 분밖에 되지 않는가?’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나흘 분의 믿음만 있어도, 우리에게 부끄러운 불평과 고통스러운 외침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사흘 분밖에 되지 않는 믿음만 있기에,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하나님께 불평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바닥을 드러내는 물통만 봐도 하나님과 모세에게 원망을 쏟아낸 이스라엘 백성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이 원래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나흘 길을 걸어 엘림에서 쉬도록 하시려는 계획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세밀한 계획입니다. 그런데 그 계획을 이루는 과정에서 수르광야를 거쳐야 했고, 쓴 물을 내는 마라도 거쳐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그곳을 거치기는 하지만, 그곳에 장막을 치는 건 아닙니다. 다음 목적지인 엘림으로 향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멋진 것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쓴물의 마라는 잠깐입니다.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 오아시스 엘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난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질병으로 인한 고통도 영원하지 않습니다.이런저런 환경으로 인한 고통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가족 구원을 위한 눈물의 기도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혼의 오아시스 엘림의 은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도 마라에서 쓴 물을 들이키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처럼 원망하지 말고, 모세처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순종하여 ‘여호와 라파’를 내 몸에 흔적으로 남기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5) : 여호와 닛시 / 출 17:8-16

 

기독교 역사를 통해 우리 시대에 이르러 그 중요성과 본질을 광범하게 깨닫게 된 진리 하나가 있다면 '영적 전쟁'에 대한 것입니다. 물론 과거 청교도 시대에도 이미 요한 번연의 '천로 역정'같은 작품이 등장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경험되는 여러 유형의 여려움을 영적싸움으로 묘사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시대만큼 설교, 성경공부, 세미나등을 통하여 신앙의 삶을 영적 전쟁의 측면에서 보편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로 보여집니다.

 

나폴레옹이 전쟁에 나가려는데 부하가 "각하, 목사님을 모셔다가 기도를 하고 나가시지요"하고 말했습니다. 나폴레옹이 대답했습니다. "그런 건 필요 없어. 전쟁은 내가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야. 전쟁과 하나님은 아무 상관이 없어."나폴레옹은 전쟁에서 패했습니다. 수많은 부하들이 죽었고 나라도 망하고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영국의 해군 제독 넬슨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있음이 허사로다"(시 127:1)라는 성경 말씀을 외우며 믿었고, 전투에 나가기 전에 군목과 함께 갑판 위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전쟁을 이기게 하셨고 그 결과로 영국이 살고 자기도 살고 부하들도 살았습니다. 같은 장군이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장군과 자기를 의지하는 장군의 종말은 하늘과 땅처럼 달랐습니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시 91:15)

 

여러분 세상적인 싸움이든지 아니면 영적인 싸움이든지 어떤 싸움이든,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싸움의 대장이십니다. 그분만 앞에 모시고 가면 어떤 전쟁에도 승리합니다. 세상적인 전쟁애서는 방해물은 물러가고 물질과 사람은 다가 옵니다. 영적 전쟁에서 그분을 앞에 모시고 나아가면, 우리를 괴롭히고 넘어뜨리는 사탄 마귀의 역사는 결박 당하고 물러 갑니다. 한길로 왔다고 일곱길로 도망칩니다. 벼락이 터져서 모든 물건을 쌔까맣게 태워 버리는 것 처럼 완전히 태워 버리십니다. 주님 앞세우고 나가면 적들은 산산히 흩어집니다.

 

우리가 어렸을때 누구한테 얻어 터지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너 우리 엄마 한테 일러 버려”이말을 힘주어서 말하고 나면 시원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후렷합니다. 그리고 정말 우리 엄마가 저놈을 혼내줄 것을 생각하니깐 힘이 납니다. 내가 맞은 것 100배로 갚아 주실 엄마를 생각하면 정말 없던 힘이 납니다. 그런데 우리 엄마는 연약한 분입니다. 그리고 선하디 선하신 분입니다. 때리기는 커녕 욕한번 안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100배로 때리다뇨?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아니 혹시 우리 어머니가 아들이 맞는 것을 보고 분하게 여겨서 때린다 할지라도 약하디 약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나를 대신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어린 우리에게는 어머니처럼 강하신 분이 아무도 없습니다. 어머니 처럼 힘이 많으신 분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엄마 앞세우고 나가면 겁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엄마가 위대하다는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사실 힘이 있으십니다. 가장 강하신 분입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도와주기를 원하고,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지금도 하나님 그분을 앞세우고 나가면 그 앞에 당할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렘 10:10절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이방이 능히 당하지 못하느니라.’

 

오늘은 하나님의 이름 다섯 번째 시간으로 ‘여호와 닛시’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와 닛시는 ‘하나님은 나의 깃발이십니다.’또는 ‘하나님은 나의 승리이십니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아랍간의 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승리 원인을 크게 세 가지로 봅니다. 유일신 신앙, 국론통일, 제공권 장악이 그것입니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우리는 공개할 수 없는 최신 무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 무기 때문에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기염을 토했습니다. 이에 전 세계 군사 전문가들과 미국의 정보당국은, 극비리에 그 정체를 밝히기 위해 나섰습니다. 하지만 그 최신 무기의 실체를 밝히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이스라엘이 밝힌 최신 무기는, 그들의 ‘신앙’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들이 홍해를 건넌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들이 한 것이라고는 갈라진 바닷길을 지나간 것 뿐입니다. 홍해를 앞에 두고 애굽 군대의 추격을 받았을 때, 그들이 얼마나 원망했습니까? 출 14:11-12절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그러다가 바다가 갈라지자, 바다를 마른땅처럼 걸어갔습니다. 자기들을 잡으려고 추격해 왔던 애굽의 군대는, 바다에서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께 소리 높여 찬양했습니다. 출 15:1절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마라에서 겨우 물을 발견했는데, 물이 써서 도저히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의 주특기가 나왔다.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그러자 하나님께서 그 물을 마실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한 고비를 넘겼는가 싶었는데, 신 광야에 이르자 이번에는 먹을 게 떨어졌습니다. 그때도 이스라엘 백성의 주특기가 나왔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출 16:3절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그러자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 그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신 광야를 떠나서, 르비딤에 도착하여 장막을 쳤습니다. 그런데 마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역시 물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 때도 이스라엘 백성은 주특기를 발휘했습니다. 모세와 다투었습니다. 출 17:2절상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매번 당하기만 했던 모세가 이번에는 가만히 있지 않고 한 소리 했습니다. 출 17:2절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그럼 그들이 가만히 있을 사람들이 아닙니다.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출 17:3절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그들이 “여호와 라파”를 경험한지 며칠이나 지났습니까?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지, 수일이 지난 게 아닙니다. 사실 모세는 속으로 짜증이 났습니다. 하지만 백성을 상대로 짜증을 내지는 못했습니다. 그 짜증을 하나님께로 가져갔습니다. 출 17:4절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이게 기도입니까, 아닙니까? 어찌 보면 기도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아닌 거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건 기도입니다. 문제를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자신의 마음을 토해낸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정직하게 말입니다. 고상하게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심정을 표출해냈습니다.

 

모세의 리더십은 기도에서 나왔습니다. 그 원망하는 200만명을 이끄는 지도력은, 다름 아닌 부르짖는 기도에서 나왔습니다. 물론 모세 리더십의 뿌리는 하나님의 세우심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모세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조건 하나님께 엎드렸던 것입니다. 어쩌면 직분으로 리더십을 발휘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목사라고 무조건 순종하고, 장로라고 무조건 순복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주어진 권위만 갖고는 리더십을 발휘하기가 힘든 시대입니다. 획득된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영적 권위를 획득하는 방법이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기도를 뺄 수 없습니다. 이제 직분보다는 오히려 은사로 달란트로 일하는 시대입니다. 직분이든 은사든, 기도 없이는 어떤 것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모세에게 있어 최고의 무기는 기도였습니다. 모세에게 최고의 자산은 기도였습니다. 모세는 인생의 중요한 승부처에서마다, 기도를 승부수로 던졌습니다. 그 때마다 승리를 거둔 것은 물론입니다. 모세가 부르짖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이 모세를 호렙산 반석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게 하여,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만난 문제는 지금까지 만나왔던 문제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8절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여기서 "그때"는 반석에서 물이 나온 때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다투기도 하고, 모세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반석에서 물을 얻었습니다. 또 한 번 엄청난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들은 그 기적을 통해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아 하나님이 우리 중에 거하시구나!’하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시험했던 것이, 조금은 머쓱해졌습니다. 그러던 차에 아말렉이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가지고 온 금은 보화가 탐이 났을 수 있습니다. 아말렉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창 36:12절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아다의 자손이며’ 아말렉은 에서의 핏줄입니다.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아들이니까, 에서의 손자인 셈입니다. 에서가 누구입니까? 야곱의 형 아닙니까? 이스라엘과 아주 남남은 아닙니다. 이들은 유목민으로서, 당시 상당한 세력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싸움을 걸어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같은 사건을 기록한 신명기 25:17-18은 보다 구체적인 정보를 줍니다.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들이 이스라엘과 전면전을 치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진의 후미를 쳤다. 행진하다보면 피곤해서 뒤쳐지는 약한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친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전투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사탄이 누구를 공격하겠습니까? 뒤쳐진 약한 자입니다. 뒤에 쳐져서 불평하는 자입니다. 동물의 왕국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맹수가 어떤 동물을 노립니까? 공동체에서 이탈한 자입니다. 저만치 혼자 떨어져서 놀고 있는 자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도 함께 있어야(인사이더) 합니다. 홀로(아웃사이더) 있다가는, 자칫 바깥으로 튕겨져 나갈 수 있습니다. 예배도 앞자리를 사모해야 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앞자리에서 예배드려야 합니다. 뒷자리는 아무래도 집중이 안 됩니다.

 

아말렉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것을 보면 압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환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존경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 질서를 존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나보다 잘나지 못해도, 그가 나보다 사회적인 지위가 낮아도,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합니다. 그게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표시입니다.

 

전라북도 김제의 금산교회 일명 ‘ㄱ자형 한옥교회’는, 아름다운 일화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조덕삼 장로와 그의 마부였던 경상남도 남해 출신 이자익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이자익은 여섯 살 때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서 살았지만, 농촌에서 과중한 노동과 배고픔에 시달렸습니다. 곡창 전라도에 가면 머슴을 살더라도 배는 곯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김제평야 금산을 찾아갔습니다. 주인인 조덕삼과 하인인 이자익은, 데이트 선교사에 의해 함께 세례를 받고, 함께 집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교회를 건축하고 난 다음 해인 1909년, 장로를 뽑는 투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교인들과 마을사람들은, 당연히 조덕삼 영수가 장로가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주인인 조덕삼 영수는 안 되고, 그의 마부인 이자익 영수가 장로로 선출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잠시 침묵하고 있던 조덕삼 영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교인들을 향해 인사를 하였습니다.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나는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조덕삼이 인간적으로 그렇게 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교회공동체를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의 이익보다 교회의 덕을 구합니다. 그런 사람은 마귀가 쉽게 공격하지 못합니다.

 

아말렉과의 전투는 내부 문제가 해결되니까, 외부에서 문제가 터진 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에 접어들고는, 첫 번째 맞이하는 전쟁입니다. 무엇이든지 처음 하면 실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신을 집중하고 바짝 긴장을 하는데도 실수를 하게 됩니다.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데뷔전은 부담스러워 합니다. 선수는 데뷔전에서 죽을 쒀도 다음 기회가 있습니다.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다릅니다. 단 한 번의 실수가 곧 죽음으로 연결됩니다. 그러니 모세도 다소 긴장했을 거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술렁거렸을 것입니다. 전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이었기에, 전쟁이란 말만 들어도 오금이 저렸을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진에는 군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노약자와 어린아이들 그리고 여자들도 같이 있습니다. 아무튼 이번 전쟁은 여러 가지 조건으로 볼 때, 만만하지 않은 전쟁이 될 게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객관적인 전력상 열세를 딛고, 이스라엘이 승리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실력 외적인 요소가 작용했다는 말입니다. 보이지 않은 플러스 알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라고 단답형으로 답하고 넘어갈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승리를 주실 때, 쓰임 받았던 사람들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9-10절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먼저 말씀에 순종한 여호수아입니다.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고 했지만, 그들이 군사훈련을 한 번이라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그저 20세 이상의 남자로 선발되어 나갔지만, 어떻게 싸워야 할지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아마 전술이란 말도 전략이란 말도 들어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어떻게 합니까? “아니 이런 사람들을 데리고 어떻게 전쟁합니까? 제대로 된 무기도 없이 전투하란 말입니까?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나가라면 죽으라는 말밖에 더 됩니까?”이렇게 물었습니까? 그는 모세의 말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이스라엘 승리의 원동력이 순종에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겁을 내고 있는데, 만약 여호수아마저 겁을 먹고 뒷걸음질을 쳤다면, 그 전쟁은 해보나 마나였을 것입니다. 한 사람의 순종이 이스라엘 전체의 사기를 올렸습니다.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순종하면 물론 좋습니다. 다는 아니라도 다수가 순종하면, 목회자가 기운이 납니다. 그러나 때로는 한 사람의 순종이 교회 전체를 살릴 수 있습니다. 순종하는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순종하는 한 사람이 이스라엘 전체를 살렸습니다. 순종하는 한 사람 여호수아가 되어, 승리하는 인생이 되기 바랍니다.

 

10-11절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다음은 기도의 손을 든 모세입니다.

이스라엘 승리의 원동력 첫째가 순종이었다면, 둘째는 기도였습니다. 오합지졸을 이끄는 여호수아 혼자 고군분투한다고 이길 수 없습니다. 그의 배후에서 기도의 손을 든 모세가 있어야 합니다. 언뜻 생각해 보면, 모세 자기는 편한 것하고, 여호수아에겐 힘든 걸 시킨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전쟁의 승패가 결정적으로는 모세의 기도에 달렸습니다.

 

어떤 일을 추진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태도가 그것입니다. 모든 일의 성패는, 그 일을 놓고 기도할 때, 이미 결판난다는 것입니다. 훈련 때 땀 한 방울 더 흘리면, 전시에 피 한 방을 덜 흘리게 됩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씨를 뿌리면,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됩니다. 훈련 때의 땀 한 방울, 눈물을 흘리면서 씨를 뿌리는 것, 여러분 이것이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심는 것입니다. 기도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루 쯤 기도 안한다고 해도 크게 표 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한 주간 기도와 담쌓고 살아도 별로 티 나지 않습니다. 겉으로 봐서 표 나지 않고, 티 나지 않을 뿐이지, 사실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도는 호흡입니다. 기도가 힘겹게 느껴진다면, 산소호흡기로 호흡하는 것입니다.

 

내가 제일 부러워하는 교회는, 성도들이 기도 많이 하는 교회입니다. 새벽이든, 낮이든, 밤이든, 교회에 와서 기도하는 성도들이 많은 교회가 정말 부럽습니다. 세상의 VIP(very important person)도 있고, 교회의 VIP(very important prayer)도 있습니다. 따라서 합니다. ‘나는 우리교회의 VIP입니다.’옆사람에게 ‘당신은 우리교회의 VIP입니다.’기도는 교회의 엔진입니다. 교회의 힘이 바로 기도에서 나옵니다. 기독교에 기적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도가 약해졌습니다. 하나님은 기도라는 수단을 통해 기적을 주십니다.

 

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때는 8월이었고 굉장히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었는데, 선교사인 어머니가 중병에 걸렸습니다. 어린 딸은 의사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네 어머니는 지금 열병으로 몸이 불덩이 같다. 어머니를 구하려면 얼음이 있어야 하는데….”그러나 얼음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어린 딸은 의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사 선생님! 엄마가 돌아가시면 안돼요. 어떻게든 얼음을 구해야만 해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어요. 제가 하나님께 얼음을 달라고 기도하겠어요.” 어린 딸은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쉴 줄 모르고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오후 늦게 시커먼 구름이 피어오르고, 처음엔 비가 내리더니, 비는 굵은 우박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우박은 하늘로부터 내린 얼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녀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그의 어머니는 생명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어제 오후에 전화로 기도부탁, 16살 변산서중, 변산 주사랑교회. 이민영에서 이찬으로 개명) 기도하는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기도하는 한 사람이 이스라엘 200만명을 살렸습니다. 기도하는 한 사람 모세가 되어, 승리하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12-13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마지막으로 협력한 아론과 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승리한 원동력이, 여호수아의 순종과 모세의 기도, 그리고 아론과 훌의 협력에 있습니다. 아론과 훌은, 모세나 여호수아에 비하면, 눈에 덜 띄는 게 사실입니다. 공도 적게 세운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들의 공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모세의 손은 피곤을 느끼는 손입니다. 그의 손을 붙들어 주는 또 다른 손이 있어야 합니다. 아론과 훌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의 승리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아론과 훌 같은 협력자들이 많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모세나 여호수아가 될 수 없습니다. 모세는 한 사람이면 됩니다. 여호수아도 한 사람이면 됩니다. 아론과 훌 같이 협력할 줄 아는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아론과 훌은 열두제자 중 안드레 같은 사람입니다. 바울을 도운 바나바 같은 사람입니다. 이들은 숨은 공로자들입니다.

한 대기업에서 세계 일류가 되겠다는 자신들의 각오를 담아, 기업 이미지 광고에 사용했던 카피 문구가 있습니다. “아무도 2등을 기억하지 않습니다.”사실 세상은 1등만 기억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1등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2등도 기억해주십니다. 심지어 최선을 다한 꼴찌도 기억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 1인자였던 베드로나 바울 같은 사람을 보내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바나바, 가이오, 스데바나 같은 사람을 보내달라고 합니다. 누가, 디모데,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같은 사람을 보내달라고 합니다. 이들은 주연이 아니라 조연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세계 복음화에 위대한 기여를 했습니다. 협력자가 중요합니다. 협력하는 사람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협력하는 아론과 훌이 되어 승리하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14-16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승리를 기록으로 남겨놓게 하셨습니다.

모세가 쌓은 제단 이름이 여호와 닛시입니다. 여호와 닛시는 ‘여호와는 나의 깃발, 여호와는 나의 승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면 승리의 깃발을 흔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참된 승리자이기 때문입니다.

 

줄리안이 잠시 왕위에 올랐습니다. 원래 기독교 신자였으나, 황제가 된 후 권력과 영예와 영광을 누리게 되자, 예수님을 배교했습니다. 로마군과 페르시아군 사이게 전쟁이 발발해, 페르시아로 돌진해 갈 때였습니다. 쥴리안 황제는 길가에서 믿음이 독실한 군인을 비웃었습니다. “네가 믿는 그 목수 노릇하던 예수가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느냐?”그러자 군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 그분이야 폐하가 말씀하시듯 목수이니까 목수일이나 하고 계시겠지요. 아마도 관을 짜고 계실지도 모르지요.” 그 후 쥴리안은 전쟁에서 부상해 죽기 전에, “오, 갈릴리 사람이여! 당신이 결국 승리하였습니다”라며, 자기의 배교행위를 괴로워하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찰스 엘리웃이라는 아이가 얼굴에 큰 반점이 생겼습니다. 자라면서 친구들이 흉을 보았습니다. 하루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들이 나와 놀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 어머니가 ‘얘야 걱정하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라. 그리하면 언젠가 너의 점이 내 생애 속에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채워져서 귀한 점으로 반드시 바꾸어 주실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찰스 엘리웃은 후일에 미국에 하바드대학 총장이 되었습니다. 총장이 되었더니 모든 친구들과 사람들이 엘리웃의 저 반점은 복점이라고 했답니다. 여러분! 내 모습속에 내 인격속에 결함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서 이것이 큰 영광과 축복으로 바꾸어지기를 기도하기 바랍니다.

나치 수용소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던 코리텐 붐 여사는 음식이 없어서 바퀴벌레를 먹으면서 생명을 연명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서전에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기차가 터널 속에 들어갔을 때 어두워졌다고 뛰어내리지 마세요.” 그렇습니다. 인생의 어두운 긴 터널을 지나갈 때 포기하지 마세요. 환난과 고통의 어둠속에서 포기하지 마세요. 낙심하지 마세요. 뛰어내리지 마세요. 잠시후에 승리의 아침이 올 것을 믿습니다. 주님 영광의 찬란한 시온의 아침이 떠오를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영원히 싸워 주심을 믿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대신 싸워 주심으로 영원히 승리자가 되시는 것을 믿기를 바랍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한 사람, 기도하는 한 사람, 서로 협력하는 사람이 되어, 남은 삶 동안 여호와 닛시를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전주 갈보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