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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에스겔 성전 - 구속사적 측면에서

by 은총가득 2021. 3. 5.

에스겔 성전

 

에스겔 성전이 주목받는 이유

에스겔 성전은 종말에 세워지며 성도들이 들어가야 할 곳이라고 성경은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그 장소가 어디인지, 누가 들어가는지, 어떻게 들어가는지, 성전의 식양이 가리키는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이 인봉한 책처럼 감추어져 있었다. 예수님 이후로 지금까지 2,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히브리 원문에 근거하여 완벽하게 밝혀낸 사람이나 저서는 없다. 구속사 시리즈 제11권에서는 에스겔 성전을 인류 구원 역사, 곧 구속사적 관점에서 해석한 내용이 소개될 예정이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성전 계시를 보여준 시기

BC 573년 정월 10일이다.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으로 잡혀온 지 25년째 되는 해에 성전의 계시를 받는다(에스겔 40:1). 에스겔 선지자는 제2차 바벨론 포로(BC 597년)로 잡혀왔다. 제1차 바벨론 포로(BC 605년)로 왔던 사람들의 처지에서는 포로생활 33년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소망의 등불이 꺼졌던 때이다.

 

에스겔 성전이 세워질 장소

지극히 높은 산, 거룩한 곳, 세상의 중앙이라고 에스겔서는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이스라엘의 가장 높은 산으로 데리고 와서 마지막 성전 지을 장소를 보여 주셨다
(에스겔 40:1-2). 이사야 선지자도 마지막 날이 올 때 세워질 여호와의 성전의 산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곳이라고 예언했다(이사야 2:2). 이는 말일에 예수님이 임재하실 때 세워질 새 예루살렘을 가리키고 있으며, 큰 임금의 성이라고 성경은 증거한다(마태복음 5:35).

 

에스겔 성전의 계시를 보여준 목적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거룩한 성전 제도와 설계도, 출입하는 것, 모든 규례와 법도를 알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지은 죄를 부끄럽게 하여 회개시키는 목적이다(에스겔 43:10-11). 에스겔 성전은 죄가 침범할 수 없도록 지극히 높고 거룩한 곳에 세워진다. 마지막 날에 죄를 회개한 거룩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음을 알려준다.

 

에스겔 성전을 쉽게 이해하려면

담(혹은 벽), 문, 방, 창, 현관을 잘 구분해야 한다. 에스겔 성전은 전체가 담과 문과 방, 창과 현관으로 가득 차 있다. 담은 거룩한 곳과 속된 곳을 완전히 구분한다(에스겔 42:20). 문은 하나님의 성전에 출입하는 일을 철저히 통제한다. 방은 맡은바 사명 완수를 위한 거룩한 장소이다.


‘창’은 환기, 빛을 받기 위한 곳, 밖을 내다 볼 수 있는 통로이다. 또한 안과 밖의 차단 역할을 한다(닫힌 창, 에스겔 40:16).
현관은 원어에 따라 크게 세 가지 종류가 기록되어 있는데, 일반적인 현관(에스겔 40:7-8)이나 기둥들로 이루어진 지붕 덮힌 회랑(에스겔 40:30), 혹은 기둥 자체를 가리킨다. 에스겔 40장 14절에서 히브리 원문은 ‘기둥’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관으로 잘못 번역되었다. ‘20척’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쉿심 암마’는 ‘60척’(KJV)이다. 그런데 현관 너비가 60척(31.92미터)이나 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20척’(10.64미터)이라고 인위적으로 고치고 ‘광이(너비)’를 삽입했다.
에스겔 성전의 담은 속된 것은 통과시키지 않는다. 회개 없이는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각 방의 역할과 각 문의 역할과 각 방에서 이뤄지는 모든 사역은 뚜렷하게 성소와 지성소에 집중되어 있다.

 

에스겔서의 구조

에스겔서는 1장 1절부터 48장 35절까지 1,273구절로 이루어져 있다. 에스겔서는 1,273구절 가운데 한 마디라도 빠지면, 전체가 무너질 만큼 매우 완벽하고 안정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

 

 

에스겔 선지자가 소명을 받을 때 하늘이 열렸다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는 순간 하늘이 열렸다. 이때가 BC 593년 에스겔 선지자 30세 때다. 동서남북 사방이 다 막혀 있는 암울한 현실이지만, 하나님께서 하늘을 열어 이스라엘 구원 역사를 시작하신다는 말씀이다. 다 망해 버린 민족을 일으켜서 다시 시작하신다는 놀라운 섭리를 나타낸 것이다. 성경에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큰 징조로서 하늘이 열리는 역사가 있었다. 하늘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영역으로서, 하나님의 구속 경륜이 이 땅에 이루어질 때 열렸으며, 특히 때가 찬 경륜을 따라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셨을 때 집중적으로 기록되어 있음이 의미심장하다. 이는 새 성전에 들어갈 종말에 사는 성도들에게 주는 교훈이 매우 크다. 인간의 생각으로 절망과 낙담 속에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올지라도 하나님의 주권 속에 하늘 문을 열어 주실 때, 보잘것없는 우리 자신을 다시 들어 새로운 시작을 하신다는 교훈을 준다. 하늘의 개폐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에 달렸으며(열왕기상 17:1), 하나님은 하늘의 역사를 붙잡고 계시는 주권자이다. 주님 말씀과도 같이, 하늘에서 뜻이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겠기 때문이다(마태복음 6:10).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그분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은 성도에게 큰 소망의 빛줄기요, 유일한 기쁨의 통로요, 하나뿐인 위로자요, 생명 양식이 된다.

 

 

※ 성경에서 하늘이 열리는 순간

 

 

이스라엘의 죄악과 에스겔 성전을 통한 회복의 역사

1)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남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을 떠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의 북향(北向)한 문에 우상을 세우는 악을 행했다(에스겔 8장). 하나님은 더 이상 성전에 머물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 안(에스겔 10:4) → 성전 문지방(10:18) → 동문(10:19) → 동편 산(11:23)으로 점점 떠나가게 된다. 우상 숭배의 죄가 하나님이 떠나는 것을 자초했고, 결국 이스라엘을 멸망하게 했다.

 

2) 에스겔 성전을 통한 회복의 역사
하지만 회개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회복됨을 보여 주었다. 하나님의 영광은 동편(에스겔 43:2) → 동문(43:4) → 마침내 성전에 가득하게 된다(43:5). 성읍 동편에 머물러 있던 하나님의 영광이 에스겔 성전으로 돌아오는 회복의 역사다. 에스겔 선지자는 새 성전을 통해 회개를 촉구하고 소망의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새로운 성전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예배의 역사가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도 이 땅에서 신령한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시작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 때 종말에 에스겔 성전에 들어갈 자격자가 된다.

 

에스겔 성전과 새 예루살렘

에스겔 성전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은 실제로 이 땅에 한 번도 지어진 적이 없다. 에스겔 성전과 새 예루살렘은 주님이 재림할 때 변화되는 사람, 거듭난 사람만이 볼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네모 반듯한 에스겔 성전

1) 동서남북 사방이 완전히 똑같은 정방형(正方形)의 구조로서, 변함없는 하나님의 공의를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임을 히브리서 13장 8절에서 증거하고 있다.

2) 예수님께서 만인간의 죄를 위해서 피를 흘리신 속죄 사역이 모든 만민에게 평등하게 적용된다는 구속의 섭리를 가르쳐 준다. 인간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높은 사람과 천한 사람, 부자와 가난한 자,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을 차별하고 서로 다르게 대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우리 마음도 하나님처럼 네모 반듯해져야 한다. 차별하지 말고, 눈 흘기지 말고, 길고 짧은 것이 없어야 한다.
3) 에스겔 성전은 악하거나 속된 것이 절대 들어오지 못한다는 완전 보호의 성전이다.

 

※ 네모 반듯한 에스겔 성전의 치수(길이×너비)가 동일하여 정방형의 구조로 되어 있다.

 

※ 에스겔 성전을 척량한 단위인 ‘장대’는 히브리어 ‘카네’로 갈대, 지팡이를 뜻한다. 영어성경에서는 rod(지팡이)나 reed(갈대)로 번역됐다. 히브리어 ‘카네’는 헬라어(신약성경을 기록한 언어)로는 ‘카논’인데 ‘자, 표준, 규례, 경계’의 의미이다. 즉, 측량의 도구는 성도의 규례와 법도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 단어들은 현대 영어로도 그대로 이어져 ‘canon’은 ‘규범, 계율, 성경의 정전(正典)’을 뜻하며 ‘cane’은 ‘지팡이’라는 뜻이다.

 

 

거룩하게 드릴 땅을 나누는 역사

하나님께 예물로 드려지는 거룩한 땅의 장과 광이 모두 25,000척이고, 이 땅은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땅을 받은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공통점은 성전에서 수종 드는 일이었다.

 

에스겔 성전 ‘척량’의 의미는?

에스겔 성전의 척량은 곳곳마다 치수가 정확하다. 에스겔 성전에 나오는 독특한 단어가 ‘척량(尺量)’이다. ‘척량’은 에스겔 성전과 새 예루살렘 성전에서 많이 등장하는 단어로서 종말적 심판과 연관된 것이다. 이는 이전의 성전과 성막 역사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척량하고 죄를 깨달아 부끄러워하고 회개할 때 그 사람에게만 말씀을 주라는 것이다. 말씀을 주어도 머리로만 하나님을 알고 행동이 없는 자들, 하나님 없는 생활을 하는 자는 마지막 때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에스겔 성전도 볼 수 없다. 우리도 속사람과 겉사람이 모자람이 없이 하나님의 척량에 합격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에스겔 성전은 하나님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상(vision)을 통해 속속들이 모습을 보이시고 곳곳의 치수를 직접 척량하여 그 정확한 치수를 세밀하게 알려 주셨다. 그러나 에스겔 선지자에게 처음 이상을 보여 주실 때부터 ‘지으라’는 말씀은 없었으며, 잘 듣고 보고 ‘백성들에게 모두 고하라’는 명령만 있었다(에스겔 40:4). 이처럼 실제로 지어진 적이 없는 성전이어서 ‘이 땅에 주소 없는 성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 2013년 1월 23일 수요예배 설교 ‘종말 성도에게 주시는 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2월 17일 주일 2부 예배 설교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 속에 주신 마지막 성전’과 2013년 2월 24일 주일 2부 예배 설교 ‘왜 척량했는가? 그리고 각 집회마다 에스겔 성전에 대해 증거된 말씀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에스겔의 생애와 성전

‘메소드 연기’라는 말이 있다. 배우가 배역에 완전히 몰입해 실제 인물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각본을 뛰어넘어 극중 캐릭터를 완전히 이해하고 연기를 펼친다는 것이다.
때로는 성경에도 ‘메소드 읽기’가 필요하다. 복잡한 현실을 글로 요약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데, 다시 번역까지 하면 본래의 의미를 이해하기 더 어려워진다. 이럴 때 성경의 저자가 느꼈던 현실 상황에 몰입해 보면, 저자가 어떤 심정과 상황에서 말씀을 증거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아마도 에스겔서는 ‘메소드 읽기’가 가장 어려운 책일 것이다. 저자의 상황이 매우 복잡하며, 행동도 이해하기 어렵다. 에스겔서의 히브리어 문체는 구약 성경에서 해석하기 가장 어려운 것으로 꼽히며, 번역도 쉽지 않다. 이 모든 난제들의 해석은 에스겔이 살아갔던 삶의 배경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된다.

 

 

에스겔 20세, 성전 봉사를 꿈꾸며 훈련을 받다

 


에스겔은 제사장 부시의 아들이다(겔 1:3). 만약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그는 자연스레 제사장이 되었을 것이다. 에스겔 1:1의 ‘제삼십 년’은 에스겔의 나이이다. 에스겔이 하늘이 열리며 이상을 보았던 때가 30세라는 뜻이다. 이때는 주전 593년으로,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주전 597년에서 5년째가 되는 해였다. 그러므로 에스겔은 약 26세의 나이에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혀갔으며, 사로잡혀간 지 5년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본래 레위 지파는 25세부터 회막 봉사를 시작해 5년간 훈련을 받고 30세부터 본격적인 직분을 수행했다(민 4:3, 23, 30, 35, 39, 43, 47, 8:24). 다윗은 훈련 기간을 늘려 10년간 제사장 직분을 훈련하게 했다(대상 23:27-32).

그러므로 에스겔이 성전에서 봉사를 시작했을 때는 20세인 주전 603년경이었을 것이다. 주전 605년 제1차 바벨론 포로의 충격적인 사건이 있은 지 2년이 지난 시기였다. 당시 바벨론은 성전의 기구들을 빼앗아갔다(왕하 24:1, 대하 36:6-7). 아마도 청년 에스겔은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며 성전의 회복을 간절히 바라는 열망을 가지고 제사장 직분을 준비했을 것이다.

에스겔 26세, 꿈이 좌절되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다

 

 

주전 597년, 제2차 바벨론 포로로 다시 한 번 성전의 보물과 금기명이 약탈당했고, 에스겔 자신도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왕하 24:10-13, 대하 36:10). 당시 26세로 한창 성전의 직무를 배워가던 에스겔에게는 소명의 길이 끊어지는 좌절의 순간이었다. 올림픽 출전의 부푼 꿈을 안고 운동에 전념하다가, 대회를 눈앞에 두고 출전하지 못하게 된 선수의 마음을 생각해보라. 시편 137편에서는 바벨론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슬피 노래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차라리 악기를 나무에 걸고 노래하는 재주조차 잊어버리기를 바랄 정도로 고통을 호소했다(시 137:1-6). 삶의 중심을 예루살렘과 그 중앙의 성전에 두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그곳에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은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었다. 제사장의 소망을 가지고 청년 시절을 보내던 에스겔에게는 더 큰 아픔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에스겔 30세, 선지자로 세움받다

사로잡힌 지 5년째, 에스겔은 30세가 되었다. 만약 그가 사로잡히지 않고 예루살렘에 거하고 있었다면 제사장으로 사역을 시작했을 때이다. 그에게는 잃어버린 꿈을 곱씹으며 괴로워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해 4월 5일,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땅 그발 강가에서 에스겔에게 하늘을 여시고 여호와의 권능으로 임재하셨다(겔 40:1). 소명과 비전을 모조리 상실했던 에스겔이 한순간에 하나님의 사명자로 거듭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제사장 대신 선지자로 부르시고, 이스라엘의 멸망 직전에 그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다.

 

 

 


​선지자 에스겔의 사역은 가시밭길이었다. 사역을 시작하면서 충격적이게도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는 입이 열리지만, 평소에는 입이 닫혀 사람들에게 온갖 오해와 고초를 당해야만 했다.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듣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우치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고 부정한 것을 먹으며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해야만 했다. 심지어 예루살렘의 함락을 믿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우치기 위해 사랑하는 아내까지 잃어야만 했고, 아내의 죽음을 슬퍼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에스겔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모든 명령에 오직 아멘으로 순종하며 맡겨진 사명을 완수해 나갔다.

에스겔 50세, 새 성전의 이상(異象)을 보다.

 

 

이런 배경에서 에스겔의 사역 말기에 주어진 새 성전의 이상을 다시 생각해 보자. 에스겔에게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는 일은 극도의 절망이었다. 37세의 한창 젊은 나이에는 성전이 파괴됐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자신의 예언이 이뤄진 것이지만, 비통한 마음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로잡힌 지 25년이자 예루살렘이 멸망한 지 14년째, 에스겔에게 새 성전의 이상을 보여주셨다(겔 40:1). 이스라엘의 범죄로 완전히 파괴되고 다시는 만날 수 없을 줄 알았던 성전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과거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웅장하고 장엄한 모습으로 눈 앞에 나타났다! 예루살렘은 우뚝 솟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 되어 있고, 광야 한복판에 지어진 성전에서 생명수 강물이 흘러나와 좌우에 과실을 맺는 나무가 가득하였다. 에스겔의 마음에 바라던 모습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광경이 이상 속에서 펼쳐진 것이다. 당시 에스겔의 나이는 50세이다. 그가 제사장으로 부름받았다면 사명을 다하고 마무리하는 해이다. 에스겔은 그 후 2년 뒤까지 선지자 사역을 계속했지만(겔 29:17), 에스겔서의 결론이 ‘새 성전 계시’라는 사실은 이것이 그의 사역의 정점임을 보여준다.

 

 

 에스겔이 전하는 소망의 메시지

성경의 저자들도 오늘날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다(행 14:15, 약 5:17). 에스겔이 선지자라고 해서 무감각하게, 혹은 손쉽게 사역에 순종했던 것이 아니다. 그 역시 인생의 굴곡을 맛보며 깊은 심적 고통 가운데 오직 믿음으로 사역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나 에스겔 사역의 전체가 고통은 아니었다. 에스겔서의 마지막은 거대한 소망과 벅찬 감동으로 가득하다. 메마른 광야 높이 솟은 산, 그곳에 지어진 성전에서 생명수 강물이 흘러 나왔다. 그리고 그 물은 발목과 무릎을 지나 허리까지 차고, 마침내 헤엄쳐야만 할 정도로 사람을 덮는 거대한 강물이 되었다. 발목과 무릎 높이의 물은 인간의 힘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벽을 세워 막을 수 있다. 허리 높이의 물도 힘은 조금 들겠지만 충분히 거스를 수 있다. 하지만 사람 정수리를 삼키는 거대한 강물은 사람을 강 흐르는 대로 몰아쳐간다. 비록 에스겔이 보았던 이스라엘의 과거가 계속하여 생명수 강물을 거스르고 벽으로 막아버리는 악한 행위로 가득했다고 해도, 마침내 생명수 강가가 이스라엘과 온 열방을 덮어버리고 가는 곳마다 죽은 바다가 살아나는 강권적인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놀라운 소망의 역사이다.


글_정디모데 전도사, 삽화_박희영


에스겔 성전 투어 가이드
< 1. 베힌네 하이라이트 코스 >

1. ‘베힌네’ 하이라이트 코스

2. 에스겔 성전과 4대강
3. 에스겔 성전의 ‘시그니처’, 종려나무
4. 에스겔 성전과 새 예루살렘
5. 에스겔 성전과 희년
6. 에스겔 성전, 이것만은 없다

 

 

3D로 재현된 에스겔 성전 영상을 모리아 성전 대형 스크린으로 보면 가슴이 벅차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러니 2,500년 전 성전의 모습을 직접 본 에스겔의 감격은 어느 정도였을까. 그는 차오르는 감격을 “베힌네!”라는 히브리어 감탄사로 토해냈다. 번역하면 “그리고 보라!”, 요즘 영어로는 ‘Oh My God!’이나 ‘Wow!’의 느낌과 통하려나. 구속사 시리즈 제11권上 ‘여호와 삼마, 에스겔 성전’은 에스겔의 심정을 이렇게 묘사했다. “에스겔 성전은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신비롭고 장엄하며 엄청난 규모의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성전의 모습을 하나하나 보여 주실 때마다 에스겔 선지자는 너무 놀라서 충격에 사로잡혔습니다.” 가는 곳마다 경이(驚異)에 사로잡혔던 에스겔이 그중에서도 “베힌네!” 하며 감탄을 참지 못한 14곳을 소개한다. 이곳들은 ‘특별히 주목해야 할 중요한 곳’을 의미하기도 한다. 에스겔 성전의 하이라이트 투어 코스라고도 할 수 있겠다. 14곳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에스겔이 그곳의 어떤 포인트 때문에 그처럼 감격하고 놀랐는지 그 심정을 헤아려보는 것도 좋겠다.

 

01. 모양이 놋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 있는 모습 (겔 40:3)

02. 그 장대로 집 바깥 사면 담을 측량하니 두께가 한 장대(3.192m), 높이도 한 장대인 모습 (겔 40:5)

03. 바깥뜰로 들어가니 뜰 삼면에 박석 깔린 땅이 있고 그 땅 위에 30개의 방이 있는 모습 (겔 40:17)

04. 남향한 문간 (겔 40:24)

05. 바깥뜰로 향한 방의 장이 50척(26.6m), 성전 앞을 향한 방은 100척(53.2m)인 모습 (겔 42:8)

06.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이 그 영광으로 인해 빛나는 모습 (겔 43:2)

07. 안뜰에 들어가니 여호와의 영광이 전(殿)에 가득한 모습 (겔 43:5)

08. 산꼭대기 지점의 주위가 지극히 거룩한 모습을 보고 “전(殿)의 법은 이러하니”라고 외침 (겔 43:12)

09. 북문을 통해 전 앞에 이르러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한 모습 (겔 44:4)

10. 제사장의 북향한 거룩한 방에 들어가니 그 방 뒤 서편에 한 처소가 있는 모습 (겔 46:19)

11. 바깥뜰로 나가서 뜰 네 구석을 지나가는데 그 뜰 매 구석에 또 뜰이 있는 모습 (겔 46:21)

12. 성전 문지방 밑에서 생명수가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는 모습 (겔 47:1)

13. 북문으로 나가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문에서 보니 생명수가 동향한 바깥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는 모습 (겔 47:2)

14. 생명수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은 모습 (겔 47:7)

지금 우리에게는 에스겔의 ‘베힌네’의 감격이 있는가? 예수님을 만난 뒤 “와 보라”고 동네 사람들을 전도했던 수가성 여인의 ‘베힌네’(그리고 보라)가 있는가?

 

구속사 시리즈 제11권上 ‘여호와 삼마, 에스겔 성전’(도서출판 휘선, 박윤식 저) 내용 일부를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에스겔 성전 투어 가이드
<2. 에스겔 성전의 ‘시그니처’ 종려나무>

1. ‘베힌네’ 하이라이트 코스
2. 에스겔 성전의 ‘시그니처’ 종려나무
3. 에스겔 성전과 4대강
4. 에스겔 성전과 새 예루살렘
5. 에스겔 성전과 희년
6. 에스겔 성전, 이것만은 없다

에스겔 성전의 시그니처(signature: 상징물)를 꼽으라면 단연 종려나무다. 외관의 상징인 6개의 출입문에는 문벽과 현관 문벽마다 종려나무가 새겨졌고, 성전의 심장 격인 내전과 외전(지성소와 성소)도 온통 종려나무 형상으로 뒤덮여 있다. 골방과 나무 디딤판에까지 종려나무가 새겨졌다. 종려나무가 대체 무슨 의미기에?

 

종려나무는
종려나무(palm tree)는 야자과에 속하는 대추야자나무다. 히브리어로 ‘똑바로 세우다’라는 뜻의 ‘타마르’다. 8m 넘게 자랄 정도로 키가 크고 줄기 꼭대기에서 3-4m 길이의 잎들이 무성하게 자란다(참고-아 7:7-8). 열매를 맺기까지는 40년 넘는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일단 열매를 맺기 시작하면 150여 년의 오랜 기간에 걸쳐 한 송이에 1,000여 개씩, 한 그루에 14-22kg의 열매를 맺는 왕성한 생산력을 자랑한다. 열매는 꿀처럼 매우 달고 가지는 바구니나 지붕을 만드는 데 쓴다. 기둥도 집을 지을 때 사용돼 무엇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종려나무는 생명력이 강하다. 소금기 있는 땅에서도 매우 잘 자란다. 줄기를 베고 남은 그루터기를 불로 태워도 다시 싹이 날 정도다.

 

종려나무의 성경적 의미
이런 특징 때문에 종려나무는 풍요,번성,승리,영광을 상징한다(민 33:9, 왕상 6:29-35, 계 7:9). 에스겔 성전 곳곳에 종려나무를 새긴 것은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생명과 풍요와 영광의 근원이심을 보여준다.

 

시편 92:12 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큰 무리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구원하소서)를 외쳤다. 종려가지를 흔드는 것은 정복자와 승리자를 환영하는 당시의 관습이었다(참고-마카비상 13:51,마카비하 10:7).

 

요한복음 12: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성경의 3대 절기의 하나인 초막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1주일 동안 광야로 나가 종려나무 가지로 초막을 짓고 거했다(출 23:16,레 23:33-43,신 16:13,느 8:14-15). 구속사(救贖史)의 완성을 상징하는 초막절과, 종말의 성전인 에스겔 성전에 모두 종려나무가 등장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특히 지성소(至聖所)는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재림의 최종적 장소를 의미한다. 그런 지성소에까지 종려나무가 새겨진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열매를 맺기까지 40년 이상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재림이라는 승리의 날에 동참하기 위해 성도들에게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는 뜻이다(약 5:7-8, 단 12:12-13). 요한계시록에는 환난을 통과한 큰 무리가 종려가지를 들고 하나님과 어린양의 영원한 승리를 찬양하는 모습이 기록돼 있다. 이것은 장차 예수님께서 재림하심으로 성도들에게 영원한 승리가 주어질 것을 의미한다.

 

요한계시록 7:9-10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에스겔 성전에는 ‘핀 꽃’ 형상이 없다
에스겔 선지자가 에스겔 성전을 계시받기 386년 전에 지어진 솔로몬 성전에도 지성소,성소의 사면 벽에 그룹과 종려나무와 핀 꽃 형상이 새겨졌다(왕상 6:29). 그러나 에스겔 성전에는 그룹과 종려나무만 새겨지고 꽃은 없다. 꽃은 열매 맺기 전에 피는 것이다. 에스겔 성전은 종말적 성전으로 이미 믿음의 열매를 맺은 성도만 들어갈 수 있으므로 꽃을 새기는 것은 의미가 없다.

베드로전서 1:24-25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구속사 시리즈 제11권上 ‘여호와 삼마,에스겔 성전’(도서출판 휘선, 박윤식 저) 내용을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에스겔 성전 투어 가이드
<3. 에스겔 성전과 에덴 동산의 네 강>

 

1. ‘베힌네’ 하이라이트 코스
2. 에스겔 성전의 ‘시그니처’ 종려나무
3. 에스겔 성전과 에덴 동산의 네 강
4. 에스겔 성전과 새 예루살렘
5. 에스겔 성전과 희년
6. 에스겔 성전, 이것만은 없다

에스겔이 본 성전의 환상은 ‘강’으로 대단원을 이룬다. 에스겔 성전의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이 물은 강을 이루고,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이지 않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는다(겔 47:1-12).

이 모습은 구속사의 완성을 기록한 요한계시록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종말 성전인 에스겔 성전의 기록은 필연적으로 종말의 기록인 요한계시록과 일치할 수밖에 없다.

 

 

 

 

요한계시록 22:1-2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에스겔 성전과 에덴 동산
구속사의 완성은 에덴 동산의 회복을 의미한다. 겔 47장에 기록된 ‘성소에서 흘러나온 물이 큰 강을 이루는 모습’은 에덴에서 강이 발원해 동산을 적시고 네 강을 이루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창 2:10-14, 시 46:4). 창세기는 에덴의 네 강이 흐르는 지역과 그곳에 무엇이 풍부한지 매우 사실적으로 밝혀놓았다.

 

비손강은 ‘뛰다, 점프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푸쉬’에서 유래. 창일하다, 풍부하게 흐르다 라는 의미이다(창 2:11-12).

기혼강은 ‘터져 나오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기아흐’에서 유래. 넘쳐서 터지고 나온다는 뜻이다(창 2:13).
힛데겔강은 ‘찌르다’, ‘찔러넣다’ 라는 뜻의 히브리어 ‘헤데크’에서 유래해 ‘화살처럼 빠르고 급하다’는 의미이다(창 2:14上). 이 강은 티그리스강이라 불리며, 다니엘서에는 ‘내가 힛데겔이라 하는 큰 강가에 있었는데’라는 기록이 나온다(단 10:4).

 

유브라데강은 ‘솟아나오다’라는 뜻을 갖는 오늘날 사용하지 않는 말의 어근에서 유리해 ‘달다, 비옥하다, 번창하다’는 의미이다(창 2:14下).

 

유브라데강은 힛데겔강(티그리스강)과 함께 현재까지 존재하는 강이다. 서아시아 최대의 강으로 길이가 2,850km이며 하류에서 합류하는 티그리스강과 더불어 메소포타미아의 수운(水運)과 농업 발달의 원동력이 되었고, 그 유역은 고대 문명의 발상지가 됐다. 이처럼 에덴에서 발원한 강이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됐다(창 2:1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예수님의 한 벌의 겉옷이 네 깃으로 나눠져 흩어진 것은 구속사적으로 많은 것을 시사한다(요 19:23).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모든 사람을 살리는 영원한 생명수가 됐다.


에스겔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로 강 좌우 가에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란 모습(겔 47:7, 12)은 에덴 동산에 각종 나무가 열린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창 2:9, 16). 에스겔서 47:12의 ‘각종 나무’는 히브리어 ‘콜 에츠’로, 에덴 동산을 묘사한 창세기 2:9의 ‘나무’(콜 에츠), 16절의 각종 나무(콜 에츠)와 정확히 일치한다. 하나님은 에스겔 성전의 계시를 통해 에덴동산의 회복까지 보여 주신 것이다.

 

1) 인류의 4대 문명도 4대 강(유프라테스강, 나일강, 인더스강, 황하)에서 비롯됐다. 역사학자들은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문명은 BC 4000년경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에서 시작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며, 다른 세 문명은 BC 3000-2000년 사이 태동한 것으로 추정한다(‘아틀라스 세계사’(지오프리 파커 저)).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발상한 BC 4000년은 아담 창조(BC 4114)와 비슷한 시기이고, 나머지 3대 문명이 발상한 시기는 인류가 각처로 흩어진 바벨탑 사건이 있었던 벨렉(BC 2357-2118)의 시대와 부합한다. 아담과 벨렉의 연대는 ‘구속사 시리즈 제1권 ‘창세기의 족보’(박윤식 저) 참조

 

생명수 강물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나온다.
생명수 강물이 흘러나오는 에스겔 성전은 바로 하나님의 보좌다. 요한계시록에도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에서 나온다(계 22:1). 세상을 살리는 생명수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요 4:10-11, 14, 7:38, 참고 슥 14:8).

 

요엘 3:18 “여호와의 전에서 샘이 흘러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

요한복음 4:13-14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한복음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수의 근본 출처이다. 우리는 수가 성(城) 여자처럼 세상의 물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수를 마시고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한다. 참된 교회는 말씀의 기갈의 시대(암 8:11-13)에 생명수의 역사를 일으켜야 한다. 성전 문지방에서 나온 물이 처음에는 ‘스미어 나올’ 정도로 미약했지만, 순식간에 헤엄을 쳐야 하는 거대한 강물이 되어 온 땅을 덮는 것처럼, 영원한 생명수 말씀의 역사는 하나님의 때가 되면 순식간에 온 우주에 창일해질 것이다(사 11:9, 66:12, 18-19, 합 2:14, 슥 8:20-23, 마 24:14, 계 10:1-11).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처음에는 미약해 보여도 그 작은 시작을 무시하거나 간과해서는 안 된다(마 13:31-32, 막 4:30-32, 눅 13:18-19).

 

구속사 시리즈 제11권上 ‘여호와 삼마,에스겔 성전’(도서출판 휘선, 박윤식 저) 내용을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에스겔 성전 투어 가이드
<4. 에스겔 성전과 새 예루살렘>

1. ‘베힌네’ 하이라이트 코스
2. 에스겔 성전의 ‘시그니처’ 종려나무
3. 에스겔 성전과 에덴 동산의 네 강
4. 에스겔 성전과 새 예루살렘
5. 에스겔 성전과 희년
6. 에스겔 성전, 이것만은 없다

 

예루살렘
구약부터 예수님까지 구속사(救贖史)의 중심 무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곳, 다윗의 도읍, 솔로몬의 성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곳이 모두 예루살렘이다. 오늘날 예루살렘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모두 성지로 여기며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제1의 후보지로 꼽힌다.

 

새 예루살렘
하나님은 사도 요한에게 계시로 이 땅의 예루살렘이 아닌 ‘새 예루살렘 성’을 보여주셨다. 구속사는 한마디로 ‘예루살렘 회복’의 역사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구속사를 완성하실 때 우리에게 주어질 천국을 뜻한다.

 

에스겔 성전
하나님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계시로 보여주신 종말의 성전. 구속사가 완성될 때 이뤄질 성전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으로 파괴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소망을 주기 위해 보여주신 성전이며, 위치도 예루살렘이다.

 

에스겔 선지자가 성전 계시를 받은 것은 BC 573년(티쉬리력 기준), 사도 요한이 새 예루살렘에 대한 계시를 받은 것은 AD 100년 이전으로, 700년 가까운 연대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에스겔 성전과 새 예루살렘의 기록은 놀랄만큼 일치한다.

 

공통점 1. 생명수의 강

 

에스겔 47: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요한계시록 22:1-2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에스겔은 계시를 통해 성전의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으로 흐르기 시작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처음 1천 척(약 532m)을 지났을 때는 발목까지 차던 강이 불과 4천 척(약 2.128km) 지나서는 헤엄쳐야 건널 수 있는 큰 강을 이룬다.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겔 47:1-12). 에스겔이 묘사한 생명수의 강과 사도 요한이 묘사한 생명수의 강은 문장까지 거의 똑같다.

 

하나님의 말씀은 온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젖줄이다.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치료하는 놀라운 생명수다. 생명수는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사 55:1, 계 22:17). 하나님의 말씀이 이르는 곳마다 성령 충만함을 입고(행 4:31, 10:44), 죽은 자가 살아난다. 생명수의 말씀은 서서히 조금씩 흐르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순식간에 오대양 육대주를 적시고 전 세계 열방에 가득해진다. 더 나아가 온 우주에 창일(漲溢) 해진다 (사 11:9, 66:12, 18-19, 합 2:14, 슥 8:20-23, 마 24:14, 계 10:1-11).

 

공통점 2. 열두 지파의 이름이 기록된 열두 문

에스겔 성전의 토대를 이루는 여호와 삼마 성읍은 동서남북으로 문이 각각 세 개씩 있고, 문마다 열두 지파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겔 48:31-34).

새 예루살렘 성도 동서남북으로 문이 각각 세 개씩 모두 열두 문이 있고, 그 위에 열두 지파의 이름이 쓰여 있다(계 21:12-13).

양자는 완벽한 일치를 이룬다. 다만 여호와 삼마 성읍은 북편 세 문에 르우벤, 유다, 레위 지파, 동편 세 문에 요셉, 베냐민, 단 지파, 남편 세 문에 시므온, 잇사갈, 스불론 지파, 서편 세 문에 갓, 아셀, 납달리 지파의 이름이 기록됐다고 명시했고, 새 예루살렘 성에는 구체적 기록이 없다.


열두 문은 세상과 동서남북 사방으로 통하는 연결점이다. 성문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잠 8:3), 재판이 이뤄지는 곳(신 21:19, 22:15), 율법을 읽어 들려주는 곳이다(느 8:1-8). 장이 서는 곳(왕하 7:1), 모든 물질과 정신이 교통하는 곳이다. 그래서 문은 동서남북으로 열려야 하고, 이 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과 권능이 온 세상을 향해 퍼져나가야 한다. 이 문을 통해 온 세상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온다(사 26:2, 60:11, 62:10). 죄를 철두철미하게 회개하고 거룩해진 자만이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계 22:14, 참고-단 12:10).

공통점 3. 네모반듯한 형상

에스겔 성전은 정방형(正方形), 즉 네모반듯한 형상이다. 4면 담으로 둘러싸인 성전 전체의 길이와 너비가 각 500척(266m)이며(겔 45:2), 성전 안 지성소(至聖所)의 크기는 가로, 세로 각 20척(10.64m)이다(겔 41:4). 성전 외곽 담도 3,000척(1,596m)으로 모두 정방형이다. ‘하나님께 예물로 드리는 땅’은 가로, 세로 25,000척(13.3km), 성전 남쪽에 위치한 여호와삼마 성읍은 가로, 세로 5,000척(2.66km, 외곽 목초지 포함)이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성도 정입방형이다(계 21:16).

 

 

요한계시록 21: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長)과 광(廣)과 고(高)가 같더라.

1스다디온은 185m로 알려져 있으므로 12,000스다디온은 2,200km로 한반도 종단 거리의 약 2배에 해당한다. 네모반듯한 형상은 모세의 장막 성전, 솔로몬 성전 등 하나님이 지시하신 성전 식양(式樣)의 기본 특징이다. 성품이 곧고 바른 사람을 ‘반듯하다’고 말한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안정적이며, 누구에게나 공평한 ‘네모반듯함’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통치가 완전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밖에도 에스겔 성전과 새 예루살렘 성은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공통점이 많다. 에스겔 성전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다시 가득하게 됐듯이(겔 43:5), 새 예루살렘 성도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하다(계 21:11, 23). 하나님은 새 예루살렘 성이 영원한 성이듯, 에스겔 성전과 성읍도 영원한 곳임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다. 장차 예수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새 예루살렘 성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 에스겔 성전이다.

박윤식 著, 구속사 시리즈 제11권上 「여호와 삼마 에스겔 성전」(서울: 도서출판 휘선, 2019) 내용을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에스겔 성전 투어 가이드
<5. 에스겔 성전과 희년>

1. ‘베힌네’ 하이라이트 코스
2. 에스겔 성전의 ‘시그니처’ 종려나무
3. 에스겔 성전과 에덴 동산의 네 강
4. 에스겔 성전과 새 예루살렘
5. 에스겔 성전과 희년
6. 에스겔 성전, 이것만은 없다

 

신구약 성경에서 ‘구속사(救贖史)의 완성’을 상징하는 것이 ‘희년(禧年)’과 ‘에스겔 성전’이다. 희년이 시간적 개념이라면 에스겔 성전은 공간적 개념이다.

 

희년은 7년마다 맞이하는 안식년이 7번 지난 뒤에 찾아오는 50번째 해이다. 희년에는 모든 종들이 해방되고, 모든 빚이 탕감된다(레 25:10-13, 28-33, 40, 50-55). 너무나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자유와 해방의 규례이기에 실제 이스라엘 역사에서 한 번도 실행된 적이 없다. 오직 하나님 나라가 완성됐을 때만 실제로 이뤄질 수 있는 개념인 셈이다. 영원한 희년은 주님이 재림하심으로써 이뤄진다(참고: 사 61:1-2, 눅 4:18-19, 21, 계 1:5下). 그래서 희년은 구속사의 완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에스겔 성전은 마지막 때 성도가 들어가야 할 ‘구속사 완성의 성전’이다.

에스겔 선지자가 설계와 수치까지 세밀하게 계시 받아 에스겔서 40-48장에 낱낱이 기록했지만,

실제로 이 땅에 건축된 적은 없다. 이 역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됐을 때 우리 앞에 펼쳐질 성전인 것이다.


에스겔 성전과 희년의 오묘한 일치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상징하는 ‘희년’과 ‘에스겔 성전’이 놀랍게도 절묘한 일치를 이룬다는 사실은 구속사 시리즈 제11권上 ‘여호와 삼마 에스겔 성전’(박윤식 저,도서출판 휘선)을 통해 유구한 역사 속에 처음으로 밝혀졌다. 에스겔 성전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50’이라는 숫자와 그 절반인 ‘25’라는 숫자로 이뤄져 있다. 에스겔 성전에서 50은 10번 사용됐으며(겔 40:15,21,25,29,33,36,42:2,7,8,45:2), 25는 7번 사용됐다(겔 40:13,21,25,29,30,33,36). 둘을 합치면 성경에서 승리를 의미하는 수인 ‘17’번이다.

50이나 25가 아닌 에스겔 성전의 수치(數値)들도 실은 50에서 파생된 숫자들이다. 예컨대 여호와삼마 성읍의 기지는 장이 25,000척, 광이 5,000척이다. 에스겔 성전의 외곽 담은 500장대(3,000척)이고 성전의 사면(四面) 담은 500척이다. 모두가 50의 배수에 해당한다.

하나님은 에스겔 성전의 기본 구조를 50과 그 절반인 25를 통해 구성하심으로써 우리가 간절히 대망(待望)하는 희년이 바로 에스겔 성전이라는 힌트를 남겨놓으신 것이다.

 

성전의 역사는 희년의 역사다

하나님이 희년의 규례를 처음 선포하신 때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해인 BC 1446년이다. 다음해인 BC 1445년에 최초의 ‘가시적 성전’이라 할 수 있는 모세 장막성전이 지어졌다.

 

BC 1445년부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公生涯)를 시작하신 AD 26년까지의 전체 기간 1,470년을 희년의 10주기인 490년1) 으로 나누어 보면 정확히 3등분 된다. 그 기준은 ‘성전’이라 할 수 있다. 첫 490년간은 모세 장막성전이 이스라엘의 신앙적 중심이었다. 두 번째 490년간은 솔로몬 성전이 이스라엘의 신앙 구심점이 됐던 시대이다. 세 번째 490년간은 스룹바벨 성전이 그 역할을 했던 때이다. 그리고 마침내 ‘참 성전’으로 이 땅에 오신(요 2:19) 예수님의 공생애 첫 설교는 바로 희년에 대한 말씀이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 희년의 성취자임을 밝히신 것이었다(눅 4:16-21). (이상 구속사 시리즈 저자인 휘선 박윤식 목사의 2014년 1월 15일, 1월 22일 설교 ‘희년의 성취자 예수 그리스도’ 중 발췌)

이처럼 희년의 주기는 성전을 통해 구분돼 왔다. 그리고 에스겔 성전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성전의 결정판, 즉 최종적 완성의 성전이다. 에스겔 성전과 희년이 만나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완성되는 것이다.

 

이 글은 구속사 시리즈 제11권上 ‘여호와삼마 에스겔 성전’ (박윤식 저,도서출판 휘선)의 내용을 발췌,정리한 것입니다.

1) 희년은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이 7번 지난 뒤인 50번째 해이지만, 그 희년을 포함해서 다음 안식년을 계산하기 때문에 희년이 10번 지나면 500년이 아닌 490년이 된다. 490년은 70 이레이다. ‘이레’는 7년을 뜻한다. 성경은 종말의 때를 ‘70이레’ 로 표현하고 있다(단 9:24-27).*2020년 11월호 =


에스겔 성전 투어 가이드
<6. 에스겔 성전, 이것만은 없다>

1. ‘베힌네’ 하이라이트 코스
2. 에스겔 성전의 ‘시그니처’ 종려나무
3. 에스겔 성전과 에덴 동산의 네 강
4. 에스겔 성전과 새 예루살렘
5. 에스겔 성전과 희년
6. 에스겔 성전, 이것만은 없다

구속사救贖史의 완성을 상징하는 에스겔 성전은 가장 완벽 하고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이지만, 앞선 시대에 건립됐던 모세의장막성전이나솔로몬 성전과 비교할때 없는것이 있다. 무엇이 없을까? 그것은 하나님의 실수인가?

 

휘장이 없다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구분하는 커튼이다. 지성소(至聖所)는 오직 대제사장만, 그것도 1년에 단 한 번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마 27:51). 이 휘장은 예수님의 몸을 가리킨다(히 10:20). 예수님의 몸이 찢어짐을 통해 이제 성도들이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 섬길 수 있게 됨을 의미한다. 요한계시록 7:14-15에서는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된 성도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라고 말씀하신다(히 10:19). 에스겔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통해 최종 완성되는 세계를 상징하므로 휘장이 없는 것이다.

​분향단과 향, 그리고 진설병이 없다

향은 성도들의 기도다(시 141:2, 계 5:8, 8:3-5). 에스겔 성전에 향이 없고, 향을 사르는 분향단(焚香壇)도 없는 것은 하늘나라에서는 성도들이 직접 하나님과 만나고 교제하기 때문에 굳이 기도로 물을 필요가 없음을 나타낸다(계 22:3-4).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계 21:3)

에스겔 성전에는 나무 제단이 있는데(겔 41:22), 이것은 히브리어로 ‘하미즈베아흐 에츠’로 분향단(미즈바흐 하케토레트)과 다른 것이다. 이 나무 제단의 다른 이름은 ‘여호와 앞의 상’(겔 41:22)이다. 이 ‘상’은 히브리어 ‘슐한’으로 장막 성전이나 솔로몬 성전에 있었던 ‘진설병 상’에 쓰인 단어다(출 25:30). 즉 ‘나무 제단’은 진설병 상으로 보는 것이 옳다. ‘진설병(陳設餠) 상’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떡[餠]을 놓는[陳設]하는 상(床)이다. 그런데 장막 성전, 솔로몬 성전과 달리 에스겔 성전의 진설병 상에는 떡이 놓이지 않았다. 예수님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신령한 떡이기 때문이다(요 6:41, 48, 50-51, 58).

​금등대가 없다

장막 성전과 솔로몬 성전에는 순금으로 만든 아름다운 등대의 불빛이 비쳐 성전 안을 찬란하게 빛냈다. 그러나 에스겔 성전에는 금등대가 없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다(요 8:12, 9:5). 그러므로 세상 빛이 필요하지 않다(계 22:5, 사 60:19-20).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계 21:23)

​언약궤가 없다

지성소 안에 놓인 언약궤는 성전의 심장이다. 그러나 에스겔 성전에는 언약궤가 없다. 예수님은 언약궤 안에 있는 세 가지 성물(聖物)의 실체이다. 두 돌판이 뜻하는 하나님의 사랑(마 22:37-40, 막 12:30-34, 눅 10:27, 롬 13:8-10, 갈 5:13-15),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뜻하는 부활(요 11:25, 롬 1:4, 고전 15:4), 항아리에 담긴 만나가 뜻하는 하늘 양식(요 6:35, 47-51, 55-58)은 모두 예수님을 가리킨다.

 

요한계시록 11:19에는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고”라고 기록돼 있고, 요한계시록 21:22에는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이는 서로 상충되는 표현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과 ‘언약궤’는 바로 우리 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 장막 성전과 솔로몬 성전을 통해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시길 원하셨다. 에스겔 성전에 없는 휘장, 분향단, 향, 진설병, 금등대, 언약궤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의 실체 이심을 웅변한다. 에스겔 성전은 성전의 실체이신 주님과 영원토록 함께하는 위대한 비전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이 글은 구속사 시리즈 제11권上 ‘여호와삼마 에스겔 성전’(박윤식 저, 도서출판 휘선)의 내용을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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