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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묵상

여호와의 이름 / 여호와 삼마

by 은총가득 2021. 3. 2.

한정건(구약학) 교수

 

들어가는 말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름이 많다는 것은 단지 불려지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나타내어 주기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름이 큰 의미를 가진다. 이름과 그 사람의 인격체는 불가분의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그 이름이 그 사람의 인격과 성격을 대변하기도 한다. 특히 구약에서의 이름은 인격의 본질이자 내적존재(內的存在)의 표현이다. 에서는 자기 아우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의 이름을 야곱이라 함이 합당치 아니하니이까? 그가 나를 속임이 이것이 두 번째니이다”(창 27:36). 아비가일은 그의 남편을 위해 이렇게 변명한다: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삼상 25:25). 이와 같이 이름은 그 사람을 구속(拘束)할 수 있는 고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름은 그 이름의 소유자의 본질적인 특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구약은 이름이 변하면 그의 인격도 바뀌는 것으로 인식한다. 대표적으로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 경우를 볼 수 있다(창 32:28). 이로써 그의 인격이 변하게 된다.

 

하나님에게 이름이 붙여질 때에, 그 이름은 일차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본성과 성격을 드러낸다. 따라서 하나님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그 이름의 의미를 밝힐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이름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가장 보편적인 이름으로 엘로힘 (!yhila>), 엘(lae), 엘 올람(!l;/[ lae, “영생하시는 하나님”, 창 21:33), 엘 엘리온(@/yl][, lae,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창 14:18-20,22) 등이 있다. 그 이름 중에서도 “여호와”(hwhy)라는 이름이 대표적이며, 또 가장 많이 나타난다. 구약성경에 여호와 이름이 6,823회 나온다.

 

“여호와”의 이름은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직접 자신의 이름을 밝히시고 그것을 기억하기를 원하셨던 이름이다(출 3:15). 그러면 여호와란 이름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이 이름의 의미를 잘 파악하면 우리는 그만큼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지를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1. 번역성경에서 여호와 이름에 대한 번역의 문제

‘여호와’라고 불리는 하나님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네개의 문자 이름”(nomen tetragrammaton)으로 불려지고, 현대 문자로는 YHWH(히, hwhy)로 표기된다. 그 정확한 발음을 신약 이전에 이미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바벨론 포로 이후(제2 성전시대) 이미 그 이름은 너무 거룩하여 부르기를 꺼려하였다. 비록 사적으로는 간혹 불렸겠지만, 공적으로는 부르기가 금지되었다. 유대인들은 이 네 개의 문자를 발음하지 않고 대신 아도나이(yn"doa})로 발음하였다. 그 이름이 너무 거룩하였기 때문이며, 행여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가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신 5:11)는 계명을 범할 수가 있음을 우려한 때문이다. 오랫동안 이 이름이 불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정확한 발음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맛소라 학파들이 본문에 모음을 찍어넣을 때에 YHWH가 나오는 곳에는 아도나이의 모음을 붙여놓았다. 그런데 YHWH가 아도나이와 함께 나올 때에는 아도나이 아도나이로 반복하여 읽을 수 없으므로 이때에 YHWH를 엘로힘(합하여 아도나이 엘로힘으로 읽음)으로 읽었다.

 

구약성경에 YHWH 이름이 6,823회 나온다. 맛소라는 6518 곳에 아도나이(yn"doa})의 모음을 찍어 ‘여호와”(hwO"hy])로 표기하였고, 305 곳에는 엘로힘(!yhila>)의 모음을 빌려와 찍었다.

한글 성경들에서는 개역성경이 그 이름을 ‘여호와’로 표기하였고, 공동번역이 ‘야훼’로 바꾸어 부르다가, 표준 새번역 성경은 네 개의 문자를 “주” 혹은 “하나님”으로 번역하였다. 표준 새번역 성경의 번역을 주관한 민경진 박사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밝힌다:

 

① 유대교 회당에서는 오래 전부터 이제까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 네 글자를 절대로 직접 발음하여 읽지 아니하였다.

 

② 고대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본들이 거의 주(主)로 번역하였다. 고대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 역본이 kurio"(주)라고 번역하였고, 라틴어는 Dominus(주), 루터의 독일어역도 der Herr(주)로 번역, KJV도 the LORD(주)로 번역하였다.

 

③ 여호와라는 이름은 중세기에 인위적으로 만든 이름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오랫동안 잊어버렸으며, 많은 학자들은 원래 이름이 야훼일 것으로 본다.

 

④ 신약에서 kurio"로 사용했다.

표준 새번역이 여호와의 이름을 성경에 쓰기를 거부하였지만, 여섯 곳은 여호와란 이름을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창 22:14; 출 3:15; 6:2; 17:15; 삿 6:24; 겔 48:35). 그것은 여호와라는 이름이 없이는 말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3:15을 개역성경은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라고 번역한다. 표준 새번역은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한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바로 너희가 대대로 기억할 나의 이름이다”로 번역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여호와”라고 스스로 부르시면서, 이것은 이스라엘이 대대로 기억할 “이름”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만약 “주”로 대치한다면, 어떻게 이 “주”가 여호와의 독특한 그분을 대변할 수 있으며, 또 그것이 이스라엘이 대대로 기억해야할 “이름”이 될 수 있겠는가? 이런 어려움 때문에 표준 새번역도 예외적으로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출애굽기 6:3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엘 샤다이(전능의 하나님)와 여호와 두개가 서로 비교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 경우에도 만약 여호와를 주로 바꾸어버리면 두 이름을 대조시킨 의미가 없어져버린다.

 

번역성경들이 YHWH 이름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그 이름의 의미를 무효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취급하는 바른 태도일 수가 없다. 우리는 그 부당성을 지적하기 위해 표준 새번역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출애굽기 6:3의 경우에 영어번역 성경들도 고민한 흔적을 볼 수 있다. 미국에서 출판한 유대인 성경 TANAKH the Holy Scripture는 이 부분에서 네 문자를 “주”라는 말 대신 YHWH로 표기함으로써 히브리어 자음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비단 위의 구절들만이 여호와라는 이름이 꼭 사용되어야 할 구절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신명기 5:11에 개역성경이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번역하는 대신 표준 새번역은 여호와의 이름을 생략하고, “너희는 주 너의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고 번역했다. 그 이름을 밝히지도 않고 어떻게 그것을 함부로(혹은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고 하는가? 출애굽기 33:19에서 개역성경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라고 번역되었다. 반면 표준 새번역은 “... 나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할 것이다. 나는 주다”라고 번역하였다. 하나님이 자신의 거룩한 이름을 선포하신다고 하고서는 그것을 “주”라고 한다. “주”가 어떻게 그의 거룩한 이름이 될 수 있는가? “주”는 존칭이지 명칭이 아니다. 출애굽기 34:5에는 개역성경은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반포하실쌔”라고 번역하는 반면, 표준 새번역은 “때에 주께서 구름에 싸여 내려오셔서, 그와 함께 거기에 서서, 거룩한 이름 '주'를 선포하셨다”로 번역한다. 여기에서 거룩한 이름을 “주”라고 번역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주”는 그에 대한 존칭이지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의 두 곳은 모두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분명히 알리고 선포하는 장면이다. 따라서 양자 모두 통일하여 여호와 이름을 사용했어야 한다.

 

시편 83:18에서도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하소서”하였는데, 표준 새번역은 “하나님의 이름은 '주'이시며, 온 세상에서 주님만이 홀로 가장 높은 분이심을 알게 해주십시오”라고 번역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주’이시다”는 말은 맞지 않는다. 호세아서 12:5에 개역성경은“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라고 번역하는 대신 표준 새번역은“주는 만군의 하나님이다. 주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그분의 이름이다”라고 번역한다. 본문은 에브라임이 하나님을 버리고 앗수르와 또 애굽과 언약을 맺음을 책망하고 그들을 징계하실 것을 말하면서, 그러나 옛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기억하고, 또 자기의 이름 여호와를 기억하심으로써 하나님이 그들에게 돌아와서 다시 인애를 베푸실 것임을 말하는 구절이다. 본 구절의 문맥 전후에서 주어가 인칭 대명사가 아닌 여호와라는 이름을 반복하여 사용함으로써 강조하고 있으며, 이 여호와의 이름은 그가 계속 기억하고 있는 이름임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을‘주’라고 바꾸어 버리면 ‘주’라는 이름이 그가 계속 기억하는 이름이 될 수 있겠는가? 아모서 9:6에 개역성경은 “그 전을 하늘에 세우시며... 하는 자니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라”고 번역하는데, 표준 새번역은“하늘에 높은 궁전을 지으시고... 쏟으신다. 그분의 이름은 주이시다”로 번역한다. ‘주’는 이름이 될 수 없으며, 또한‘주’라는 말을 6절에 묘사된 그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의 능력에 합당한 이름이 될 수가 없다.

 

구약 성경에는 자주 여호와의 이름의 독특함이 강조된다. 이사야서의 일부에서만 그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사야 24:2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나와 함께 한 자없이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베풀었고...”; 45:1,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45:5,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사 45:18,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여 땅도 조성하시고.... 나는 여호와라 나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48:1-2, “...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등등. 위의 구절들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독특함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이 “여호와” 이심을 밝히신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명칭은 이스라엘에게만 사용했으며, ‘주’는 일반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단어이다. 따라서 ‘주’라는 말은 하나님의 독특한 이름으로 사용하기에는 부족하다.

 

The American Standard Version(ASV)은 네 개의 문자를 여호와(Jehova)로 번역하고, 그 외에도 네 개의 문자를 여호와 혹은 야훼(Yahweh)로 표기하는 성경들을 다음과 같이 들 수 있다: Jerusalem Bible(야훼), Emphasized Bible(야훼), Translation of OT Scriptures (by H. Spurrel), Holy Bible containing OT and NT (by American Baptist Pub), A Rendering of the Book of Psalms (by J DeWiitt), Young's Literal Trans. of H.B. (by R. Young), 한글 공동번역성서(1977년도판, 야훼).

 

여호와 이름을 주로 바꾸어 성경을 번역하는 문제는 또 다른 어려움을 낳는다. 여호와 이름이 들어간 합성어의 경우에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이다. 결국 표준 새번역은 이러한 경우에 여호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여호와 이레, 여호와 닛시 등).

 

또한 아도나이와 네 문자의 이름이 함께 사용된 경우에는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도 있다. 영어는 아도나이 YHWH는 “the Lord GOD”(RSV, 창 15:2,8; 수 7:7; 삿 6:22 등)으로, YHWH 아도나이는 “GOD, the Lord”(시 68:20; 합 3:19 등)로 번역했다.

 

KJV(1611)와 NEB(1970) 등은 대부분 YHWH를 LORD라고 번역하면서도 출 6:3 등 몇 곳에서는 JEHOVAH로 쓰고 있다. 그리고 이들 번역들은 여호와 이름이 들어간 복합 고유명사에서도 여호와를 살려, “Jehovah Jireh"(창 22:14), "Jehovah-Nissi"(출 17:15) 등으로 번역한다.

 

이상에서 볼 때에 여호와 이름을 사용하지 않을 때에 어려움이 있음이 드러났다. 어차피 일부에서 여호와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라면 그 이름을 전체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게 된다.

‘주’는 타 종교에도 사용할 수 있으며, 종교가 아닌 문학작품에서도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여호와’는 분명 타 종교에서 사용할 수 없는, 이스라엘 종교에서만 특별하게 사용되는 신의 명칭이다. 따라서 여호와 이름 대신 공통적인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이 독특성을 없애버리는 것이며, 또 이스라엘 종교를 일반종교화 시키는 결과를 만드는 것이 된다.

 

우리는 다른 종교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스라엘 종교의 독특함을 그의 이름에서 다시 찾아야 한다. 그 이름의 진정한 의미를 바로 밝혀내고, 그 이름을 부름으로써 우리가 믿는 여호와 종교의 참 의미를 회복할 수 있다.

 

 

2. YHWH 이름의 발음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유대인들이 네 문자의 이름을 오랫동안 불러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름의 발음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성경을 읽을 때에 네 문자가 나오면 아도나이(yn"doa})로 대신 읽었다. 주후 5세기부터 시작된 맛소라 학파들이 히브리어 성경에 모음을 붙일 때에 원래의 이름을 잃었기 때문에 네 문자에다가 아도나이의 모음을 붙여 ‘여호와’로 발음하도록 하였으며, 만약 네 문자가 아도나이와 함께 나타날 경우에는 엘로힘의 모음을 붙였다. 따라서 ‘여호와’라는 발음은 원래의 이름이 아닌 것이 거의 확실하다.

 

우리는 그 이름의 원형(모음이 붙은)을 찾기 위해 성경 안에서와 밖에서의 다양한 참고자료를 살펴보아야 한다. 발음의 근거로서의 첫 번째의 자료는 여호와 이름의 단축형에서 찾을 수 있다. 여호와 이름의 단축형이 출애굽기 15:2과 17:16에 yāh(Hy:)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은 또한 할렐루야 시에서도 나타난다(시 68:4,18[히, 5,19절]). 구약성경에 이 형태가 50번 나타난다. 그 외에도 사람의 이름에서도 이 단축형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여호나단(@t;n:/hy] = “여호와께서 주셨다, 삼상 14:6,8)과 여호사밧(fp;v;/hy] = “여호와가 심판하신다”, 왕상 22:42 등).

 

이 단축형은 고어로써 최초의 형태라는 견해와, 또한 그 이름이 너무 거룩하여 전체를 부르지 못하고 약식으로 단축하여 불렀다는 견해로 나뉜다. 이러한 단축형은 우갈릿어에서 y로, 아랍어에서 yā로도 나타난다. 또한 아람어로 쓰여진 이집트 파피루스에서도 yh와 yhw로 나타난다. 이집트의 엘피판틴 문서(페르시아 시대)에는 합성어에서 접미어로 -yāhȗ 혹은 -yāh로 나타나기도 한다.

 

앗수르의 자료에서 아하스의 이름이 ia-ú-ḥa-zi로 쓰였는데, 이것을 히브리어로 옮기면 yahū-ḥaz로 음역되며, 아사랴의 이름이 az-ri-ia-a-ú로 쓰였는데, 히브리어는 azri-yahú가 된다. 히스기야의 이름도 나타나는데, 그것을 히브리어로는 ḥāzaqi-yahū가 된다. 이 이름들이 모두 여호와 이름의 약칭이 들어있는 형태로 여겨진다. 유대인 디아스포라 지역인 주전 5세기의 닙불(Nippur)에서 발견된 기록에 여호와 이름과 관련되었다고 생각되는 여러 이름들이 나타난다. ia-a-ḥ-u-natan은 히브리어로 음역하면 yahū-nāṯan가 되고, 또 이름의 끝글자에 -ia-a-wa가 나타나는데, 히브리어는 -yaw에 해당한다. 이 단축형에서 우리가 관심을 끄는 것은 그의 이름의 첫글자가 야(yāh, Hy:)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성경 외의 고대 문서들에도 그 이름에 대한 많은 참고자료들이 있다. 고대 헬라어 문서에 하나님의 이름이 iaoue 혹은 iabe가 자주 등장하고, 또한 iaō로도 나타난다. 또 교부들의 글에도 iaō, iaōou, iau, ieou, ieaō, iaou 등의 발음으로 나타난다. 라틴어에서는 yaho가 발견된다. 이것들은 당시 그 이름을 약자형인 YHW로 사용한 것이다. 이상의 증거들에서 히브리어로 복원해 본다면 야호(/hy:) 혹은 야후(Why:)가 된다.

 

YHWH(hwhy)의 어근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하야(hy:h;) 동사에서 파생되었다고 본다. 그것에 대한 가장 강력한 성경적 근거는 출애굽기 3:14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네 개의 문자 YHWH(hwhy)는 하야 동사의 미완료형 삼인칭 남성 단수형이 되어야 한다. 미완료 삼인칭 남성 단수형에서 접두요소 야(y:)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사역형(힙일) 밖에 없다. 따라서 네 개의 문자의 발음은 야훼(hw)

 

우리는 하나님의 그 이름을 가능한 정확하게 재생하여 부를 수 있으면 좋겠다. 따라서 가능성이 가장 높은 야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야훼도 정확하다는 확증이 없는 이상, 반드시 야훼라고 부르기를 강요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일단 맛소라 성경이 여호와로 부르고 있으며, 또 수세기 동안 여호와로 불러왔기 때문에 계속 여호와로 부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름의 정확한 발음은 사실 그 나라 사람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최’씨를 영어는 ‘쵸이’(Choi)라고 발음한다. 그렇다고 꼭 ‘최’라고 발음하기를 강요할 필요는 없다. 예수는 헬라어로 ‘예수스’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라고 발음하며, 영어는 ‘지저스’(Jesus)라고 발음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영어를 하는 사람에게 예수의 이름이 틀렸으니 바로 고치라고 강요할 필요가 없다.

 

이름을 부를 때에 발음이 어떠하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더 정확하게 발음하는 것이 최선의 것이지만,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불러오던 것을 바꾸도록 강요할 필요는 없다. 더욱이 맛소라 학자들이 ‘여호와’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름을 부르느냐 부르지 않고 존칭(‘주’)으로 대체하느냐 하는 것이며, 그 다음으로는 그 의미를 바로 알고 사용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발음이 정확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차선의 선택으로 여호와 그 이름을 불러야 할 것이며, 또한 그 이름의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본 논문에서 우리는 맛소라 본문이 표기한 ‘여호와’라는 발음을 계속 사용하도록 하겠다.

 

3. 여호와 이름의 의미

 

여호와 이름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참고구절은 출애굽기 3:14과 6:3절이다. 우리는 이 두 구절을 통하여 여호와 이름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3.1. 출애굽기 3:14

 

출애굽기 2장 마지막에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고역으로 인해 탄식하며 부르짖는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3장에서 그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모세를 부르셨다. 3:10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고 하였다. 그때에 모세가 하나님에게 “만약 내 백성들이 당신을 보낸 자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내가 어떻게 대답하리이까?”(13절)라고 물었다. 하나님은 그 질문에 대하여 이중으로 대답하신다. 첫째,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히, hy,h]a, rv,a} hy,h]a,)(14절)라고 하셨고, 둘째로,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로로 기억할 나의 표효니라”(15절)고 말씀하셨다. 이 두 구절은 이중 혹은 반복으로 볼 수 있다. 전자에서 그는 자신의 이름의 의미를 밝히시고, 후자에서 그 이름 자체를 바로 밝혔으며, 또한 그 이름에 대한 설명이 덧붙여졌다. 이 구절들을 합하여 살펴보면, 그는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로 밝혔으며, 그 뜻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임을 알 수 있다. 즉, “여호와”라는 이름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구절의 축약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은 것에 대하여, 그들이 그 이름에 대해 무지(無知)했는지, 아니면 그 이름의 의미를 확실하게 알아내기 위해 질문했는지 단정하기 힘들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오랫동안 지내지 않았으며, 또 그들이 애굽의 우상들을 떠나지 않았던 것(겔 20:8) 등을 보아 하나님의 이름을 잃어버렸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모세가 족장시대 보다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 혹은 그의 구원사역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얻어내기 위해 질문했을 수도 있다.

 

하나님이 대답하신 구절 중 히브리어 hy,h]a, rv,a} hy,h]a,를 한글 개역성경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번역하였고, 영어 성경은 대체로 “I am that I am” 혹은 “I am who I am”으로 번역한다. 이 번역에 의하면 이 문구는 하나님 자신의 존재하심을 나타내는 듯하다. 즉,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며, 전에도 계시고 지금도 계시며, 앞으로도 계실 분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실존하는 하나님이다”(I am He who is)로 번역할 수도 있다. 이것은 전통적인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실존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카슈토(U. Cassuto)는 출애굽기 3:12절에서 하나님이 이미 밝힌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니라”(&M;[i hy

 

기스펀(W. H. Gispen)은 15절과 연관지어 하나님은 족장들과도 함께하셨던 것처럼, 이제 이스라엘과도 함께 하실 것이라는, 현존하는 자신의 존재를 이스라엘에게 알리신 것으로 이 구절을 풀이한다. 아이히로트는 여호와 이름은 “존재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꼭 들어맞는 이름으로써, “나는 스스로 존재한다”는 말에서 그는 언제나 그러했듯이 진정으로 존재하고 앞으로 존재하여 그들을 도울 준비가 되었음을 알리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여호와 이름을 부를 때에는 하나님의 “실제적인 임재”를 언제나 상기시킨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영어번역 성경과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 이름의 의미를 존재론적으로 이해한다. 사실 하야(hy:h;) 동사는 존재를 뜻하는 ‘being’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순수존재(pure being)라기보다는 ‘활동하시는 존재’(active being)라고 말할 수도 있다. 과연 여호와 이름을 순수 존재의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어떠한 의미로 파악하는 것이 옳은 지를 밝히기 위해서는 출애굽기 6:3을 함께 풀어야 할 것이다.

 

3.2. 출애굽기 6:3

 

출애굽기 5:1에 모세는 아론과 함께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고 말했다. 그때에 2절에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했다. 바로는 모세의 그 거만한 소리를 듣고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학대하였다. 학대가 더 심해지자, 백성들이 모세를 만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5:21)고 원망하였다.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항의하였다: 첫째로, “하나님이 왜 나를 보내어 이 백성으로 더 큰 학대를 당케 하십니까?”(5:22); 둘째로, “왜 약속한 대로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십니까?”(23절).

 

출애굽기 6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대답했다: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너가 보게 될 것이다”(1절)고 말씀하시고는, “나는 여호와로라”(2절)고 자신을 밝히신 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히, 엘 사다이, yD;v' lae)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라고 하셨다(3절).

 

여기에서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족장들에게 알리지 아니했다고 했는데, 과연 조상들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몰랐는가? 그러나 창세기에서 여호와 이름도 자주 사용되었다. 창 12:1과 출 3:12 사이에 여호와란 이름이 160회에 걸쳐 나타난다. 그 중에 40회 이상이 족장들의 입에서, 또는 그들의 대화 중에서 발견된다. 아브라함은 친히 여호와 이름을 부른 것으로 나타난다(창 12:8; 15:2, 8 등등). 또 하나님도 족장들에게 말할 때에 여호와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창 15:7; 18:14 등등).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 구절에서 문서설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단서를 잡는다. 창세기의 저자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출애굽기 6장은 여호와의 이름을 몰랐던 E 문서, 혹은 P 문서 그룹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하며, 이 그룹의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이전에는 몰랐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근본적으로 문서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면 족장들이 그 이름을 알았다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자기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했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출애굽기 6:3절에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세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3.3. 두 본문 해석에서 고려해 보아야 할 점들

 

첫째, 본문에서 두 이름이 대조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앞에서 고찰하였듯이, 이름은 인격, 특성, 속성과 인격의 본질을 담고 있다. 특히 본문에서 두 이름이 대조를 이루고 있음은 이 이름들이 불려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인격적 특성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것임이 분명하다.

 

엘 샤다이

 

엘 샤다이(전능의 하나님)는 성경 다른 곳에서보다 창세기 족장들의 기사에서 가장 자주 사용되었고, 욥기서에서 약 31회 가량 사용되었다. 샤다이는 일반적으로 앗수르-바벨론 단어 šadȗ에서(산)와 šaddai(산의 신)에서 나왔다고 보기도 하고, 우가릿어의 ṯdy (산들) 혹은 šd (가슴)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게하르더스 보스는 샤다이와 히브리어 동사 샤닫(dd'v;, 지배하다, 파괴하다)와 관계를 찾으려 하였다. 그는 이 이름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초자연적인 활동을 강조한다. 그는 능력으로 자연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으로 본다. 하나님의 창조 활동과 자신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역사 속에서 능력으로 활동하시는 분이시다는 것이다. 기스펜은 샤다이의 어근적 의미를 “to be strong”으로 보며, 그를 “전능(Almighty)의 하나님”으로 번역한다.

 

엘 샤다이는 창세기에서 족장들과 관계되어 여섯 번 사용되었데, 이때에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써 족장들에게 엄청난 일을 해 줄 수 있는 분으로 강조되었다. 자연을 지배하시는 그러한 능력으로 그는 족장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수립하고, 또 실천하신다. 그러기 때문에 엘 샤다이는 “자연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그들에게 알려졌다. 족장들은 말씀을 통하여 엘 샤다이로서의 하나님의 계획을 들었으며, 그의 축복을 경험하였다. 이러한 축복은 족장들의 이웃에게 넘쳐흐르기까지 하였다.

 

족장들의 기록 외에도 엘 샤다이는 오경의 다른 곳에서 3회, 선지서에서 4회, 그리고 시편 68:15(히); 91:1; 룻기 1:20-21에 나타난다. 이 기록들에서도 족장시대의 그 용도에 일반적으로 부응한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의 목적과 계획에 따라 부름을 받는 자들과 그가 사랑하시는 자들을 위하여 활동하시는 위대한 통치자이시다.

결론적으로 엘 샤다이는 두려움의 대상이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 그리고 그러한 그의 능력을 앞세우고 자기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엘 샤다이 이름이 족장들에게 현실성이 있는 적절한 이름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브라함과(창 17:1) 야곱에게(35:11) 직접 엘 샤다이로 밝히셨다. 족장들도 엘 샤다이 이름을 의미있게 사용하였다.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면서 엘 샤다이의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였으며(창 28:3), 하나님이 야곱을 이스라엘로 축복하시면서 자신을 엘 샤다이 하나님으로 선언한다(창 35:11). 야곱이 자신의 아들들을 보호하실 분으로 엘 샤다이를 언급한다(창 43:14). 야곱이 그 아들들에게 유언할 때에 자신을 보호하신 하나님을 엘 샤다이로 말하기도 한다(창 48:3). 야곱이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엘 샤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창 48:14-22). 이상의 예들에서 볼 때에 족장들에게는 엘 샤다이가 자신들을 도우시는 하나님으로서 친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호와

물론 여호와의 이름이 창세기에서 엘 샤다이보다 더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여호와의 이름이 창세기에서는 출애굽기 이후의 책들보다 훨씬 적게 사용된 것도 사실이다. 창세기에 여호와란 이름이 146번, 엘로힘이란 이름이 164번 나타나는 반면, 출애굽기와 여호수아에는 엘로힘이 125번, 여호와가 1,800번 나타난다. 출애굽기 이후에 여호와의 이름이 월등하게 많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볼 때에 족장들에게 여호와 이름의 의미는 모세 이후의 사람들에게보다 약하였다고 할 수 있다.

 

여호와의 약자인 야(yah)나 요(yo)가 모세 이전에는 개인적인 이름을 구성하는 요소로 나타나는 일이 없다는 사실도 족장시대에는 이 이름이 흔하게 사용된 것이 아닌 증거가 될 수 있다. 모세 이후는 이러한 형태의 이름이 흔하게 사용된 점을 보아, 이 사건 이후에 여호와의 이름이 즐겨 불리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모세는 눈의 아들 호세아(['ve/h)를 여호와의 이름이 들어간 여호수아(['vu/hy])로 바꾸도록 하였다(민 13:16).

 

이상은 모세 이전에도 여호와의 이름을 알고 불렀지만, 그 풍부한 의미를 몰랐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그들이 즐겨 불렸던 이름이 되지 못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모세시대에 경험을 통하여 그들이 여호와 이름의 의미를 확실히 알았으며(경험적으로), 그래서 이제는 그 이름을 즐겨 부르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로, 이름이 브(B])라는 전치사와 함께 사용되었다.

카슈토는 출애굽기 6:3의 구절에서 만약 문서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론이 맞으려면 “나의 이름, 즉 여호와가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라는 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주어가 여호와의 이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내”가 주어이며, 이름은 서술어에 위치해 있다. 엘 샤다이 앞에 전치사 브(B], by)가 있다. 이 전치사는 “...으로써”(as)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이것은 그의 신분을 담고 있다. 다시 본문을 번역하면 “내가 나의 이름을 그들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yD;v' laeB], as El Shadai) 나타났으며, 내가 나 자신을 여호와라는 이름으로는 그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했다”이다. 즉, 본문은 하나님의 이름 자체를 나타낸 것이 핵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어떠한 분으로 나타내셨느냐에 있다. 이름은 그 분의 인격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그 이름을 통하여 자신의 인격, 그리고 자신이 어떠한 분이심을 나타내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름 자체를 그들이 알았다거나 몰랐다는 문제가 아니라, 이름을 통하여 그분을 어떻게 알았느냐는 것이 핵심된 사안이다. 즉 “엘 샤다이의 신분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나를 여호와라는 신분으로 그들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셋째, 동사 야다([d'y:)의 용도를 바로 알아야 한다.

출애굽기 6:3은 두개의 단순재귀동사형(닢알)인 애라(ar;ae)와 노다티(yTi[]d'/n)가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내가 알리지 아니했다”로 번역되는 노다티의 원형 야다([d'y:, 알다)는 지식적으로 아는 것보다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조상들은 전능의 여호와라는 이름을 지식적으로는 알았지만, 아직 그 이름을 경험적으로는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여호와라는 이름에 걸맞은 일을 하실 것이고, 이스라엘은 그러한 경험을 할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알게하겠다”란 말은 그들에게 ‘경험하게 하여 확실하게 깨닫게 하겠다’는 의미이다. 에스겔 20:4과 22:2에는 같은 단어가 그들이 그 죄에 대한 값을 톡톡히 치루게하여 경험을 통하여 알게 하겠다는 의도로 사용되었다.

이제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걸고 무엇인가 하고자 한다. 그 일을 그들이 경험하고 난 후, 비로소 여호와라는 이름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될 것이다.

 

 

넷째, 이름을 묻는 장면에서 묻는 장면에서 마(hm;, 무엇)가 사용되었다.

출애굽기 3:14에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는 장면에서 미(ymi, 누구)가 사용되지 않았고, 마(hm;, 무엇)라는 의문사가 사용되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미는 사람의 명칭(칭호)를 요구하는 반면, 마가 이름과 결부되었을 때에 그 이름 안에 있는 인격적인 특징, 그리고 힘과 능력을 찾아내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따라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존재론적인 의미, 즉 존재의 정적(靜的) 개념이 아니라, 무엇을 하시는 분, 즉 동적(動的)이며 활동적인 그의 임재(presence)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제 곧 모세와 이스라엘은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그의 임재를 곧 경험함으로써 그를 알게 될 것이다.

 

 

3.4. 이름을 걸고 하나님께서 하신일

 

그러면 여호와라는 이름에 걸맞게 하시겠다는 일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여호와라는 이름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두 가지로 대변된다. 첫째로, “너희들을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빼어내어 구속하겠다”는 것이며(출 6:7); 둘째로, “약속의 땅을 주어 너희들의 기업이 되게 하겠다”(8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미 창세기 15장에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서 약속하신 것이며, 이제 그것을 이루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호와”라는 이름은 언약과 관계된 이름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출애굽기 6:8절에, 결론적으로 “나는 여호와로라”고 다시 자신의 이름을 확인한다.

 

성경은 이 일들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계속하여 기록한다. 첫째 그가 하실 행동은 자기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시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신 일, 그 중에 특히 마지막 재앙으로서 유월절에 행하신 일은 여호와의 이름에 걸 맞는 일임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풀어주어 떠나기를 허락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출발하던 아침, 애굽 사람은 통곡하였고, 이스라엘 사람은 당당하게 찬양하며 떠났다. 그때 그들은 여호와라는 이름이 어떠하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출애굽의 절정은 홍해사건이다. 출애굽기 14장에,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나서서 행진을 할 때에 바로의 마음이 또 다시 강퍅해져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죽이려 쫓아왔다(14:5이하). 이스라엘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았고, 뒤에는 애굽 군대들이 맹렬히 따라왔다. 두려워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는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외쳤다(13절). 모세가 지금 홍해 가에서 즉 “여호와의 구원”(hwhy t['Wvy])을 보라고 할 때에 과연 어떤 구원을 말하는가? 출애굽기 14:14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즉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향하여 나가서 싸워서 자기 백성을 구해내는 그러한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홍해를 가르셔서 자기 백성들을 지나게 하셨고, 애굽 사람들이 들어 왔을 때에 물이 그들을 삼키도록 했다. 하나님이 물을 그들 위에 덮칠 때에, 그들은 이렇게 외쳤다: “여호와가 그들을 위하여 싸워 애굽 사람들을 치는 도다”(14:25). 애굽 사람들은 “물이 우리를 덮친다 도망하자”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여호와가 우리를 치는 도다”고 외쳤다.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애굽 사람과 싸우셨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30절), 이스라엘은 바닷가에 흩어져 있는 애굽 사람들의 시체를 보았다. 구원의 상황이 끝났다.

 

출애굽기 15장에 구원받은 백성들이 즐겁게 노래한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1절).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 시로다”. ‘용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이쉬 미르하마(hm;j;l]mi vyai)인데 직역하면 “전쟁의 분이시니” 이다. 그가 이루신 구원은 전쟁을 통하여 대적을 물리치고, 자기 백성을 무사히 출애굽시키신 분이시며, 또한 그 백성을 자기의 땅으로 들이신 그러한 구원이다.

 

출애굽기 15:3 하반절에 그들은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고 고백한다. 그들은 이제야 여호와란 이름을 의미있게 부르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제야 여호와라는 이름이 어떠한 것인지를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족장들은 이러한 체험을 하지 못하였기에 그 이름의 의미를 충분히 알 수 없었던 것이다.

 

 

3.5. 여호와 이름의 정의

 

이제 다시 “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를 위해 6장으로 돌아가서 살펴보자. 하나님께서는 “나는 여호와로라”하시고는(6:2),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1절)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무엇인가 하실 준비가 되셨음을 말하는 모습이다. 3절에, 전에는 족장들이 “전능의 하나님”, 즉 엘 사다이로 경험을 했지만, 이제는 다른 이름, 즉 ‘여호와’라는 이름을 그들이 곧 경험할 것임을 말한다. 이제 곧 구원의 약속을 하나님이 이루실 것이며, 그 일이 이루어 질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로서의 이름이 어떻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준비가 되셨음을 알리는 이름이다. 두 가지 구속의 일을 하실 준비가 되셨다는 것이다. 출애굽의 구속과, 가나안 땅을 주는 구속이다. 6:1-3에서 이제 그는 이 일들을 시작할 준비가 되셨음을 알리시면서 자기 이름을 밝히시는 것이다.

 

다시 3:14에 가서, 여호와라는 이름의 뜻을 풀이한 단어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 that I am)라는 번역은 좋지 못하다. 존재를 의미하는 상태적인 해석보다는 역동적인 해석(a dynamic interpretation)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행동할 그러한 하나님, 즉 행동하심으로써 자신이 어떠한 분이시다는 것을 밝히실 분이시다.

출애굽기 6:1-3은 또한 이러한 행동이 임박했음을 보여준다. 1절에“너는 이제 곧 보리라”고 말씀하셨고, 2절에는“나는 여호와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혔으며, 3절에서는 “이제 너는 경험적으로 내가‘여호와’임을 알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임박한 미래에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실 것을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행동이 준비되었음을 알리는 것이다. 그래서 hy

 

여호와의 이름은 존재론적인 칭호나 존재의 정적(靜的) 개념보다 동적(動的)이면 활동적인 현존에 대한 약속이 담겨있다. 그래서 “여호와”라는 말 속에는 미래, 곧 임박한 미래가 또한 내포되어 있다. 그가 곧 어떠한 일을 행하실 것이라는 의지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어떤 일을 위한 ‘준비되었음(readiness)’을 알리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이름이다. 어떤 일인가? 구원의 약속을 이루실 일이다.

유월절과 홍해의 구원을 경험한 이스라엘, 바닷가에 부셔진 마차와 적군의 시체를 바라본 이스라엘, 이제 그들은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라고 고백한다.

 

결론

 

히브리인들의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을 대변한다. 이것은 하나님에게도 적용된다. 하나님이 “내가 내 이름을 거기 두겠다”고 하시는 말씀은 친히 그가 거기에 계신다는 말과 같다. 하나님의 이름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 중에 가장 많이 사용된 “여호와”라는 이름이 그를 가장 잘 대변하는 이름이다.

 

이 여호와의 이름은 성경에 가장 많이 나타나고, 또 하나님이 친히 자신이 어떠한 분이심을 강조할 때에 사용한 이름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대 번역성경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그 이름 대신 ‘주’라는 존칭으로 바꾸었다. 그것은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계명에 근거하여, 그 이름이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아무나 함부로 부르기를 조심하였던 유대인의 전통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한 유대인들의 습관 때문에 여호와 이름이 잊게 되었으며, 70인역을 비롯하여 번역성경들에서 그 이름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많은 성경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전혀 사용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 이름을 부를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도록 명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곳에서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밝히면서 어떠한 독특한 일을 하고 계심을 밝히시기 때문이다. 만약 그 이름을 무시한다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그러한 독특한 일도 무시하는 결과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이름을 복원할 뿐만 아니라, 그 의미도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름은 그분의 인격을 대변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하시는 일을 또한 대변하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3:14은 그 이름의 의미를 알 수 있는 성경에서 가장 핵심되는 구절이다. 그 해석에서 일반적으로 그 이름의 의미를 순수존재(pure being)로 해석하지만, 그러나 ‘활동하시는 존재’(active being)의 의미로 보아야 한다. 그러한 의미는 출애굽기 6:1-3을 통하여 확실히 찾을 수 있다. 이스라엘은 곧 경험적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가진 그에 대하여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족장들에게 약속하신 출애굽과 땅을 기업으로 받는 그러한 구원의 일들을 경험하고, 그들은 여호와 이름의 위력을 깨닫게 될 것이다.

 

 

출애굽기 6:3을 통하여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을 역동적인(a dynamic interpretation) 의미로 해석해야한다. 우리는 그 본문에서 임박한 미래를 바라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어떠한 일을 할 준비가 되었음을 알리는 것이 여호와라는 이름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이 이름을 가장 즐겨 불렀다. 그 어떠한 이름보다 가장 많이 그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때에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어떤 일, 곧 구속의 일을 곧 하실 것(readiness)을 생각했을 것이다. 여호와 이름을 부르는 자가 누리는 그 엄청난 혜택을 우리도 또한 그 이름을 부름을 통해 누려야 하겠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라고 하셨다(출 3:15). 하나님은 오늘도 자신의 이름,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 자기 백성을 위해 일하실 준비가 되신 분이시다.

 


여호와삼마(설교)

소강석 목사 새에덴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

설교 한눈에 보기

간추린 내용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던 비운의 시대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여호와삼마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 말씀을 믿지 못한 사람들은 에스겔의 메시지를 믿지 못하고 에스겔을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대로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을 재건하셨고 이스라엘을 위해서 여호와삼마의 새 도시를 계획하시고 이루셨다. 이 여호와삼마의 성읍은 오늘날에도 교회와 성도들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하는 하나님의 언약이다.

설교의 목적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로 하여금 여호와삼마의 성읍을 이루어가는 도구로 쓰임받는 삶을 살도록 도전한다.

청중의 적용 포인트
나는 내 삶속에서 여호와삼마의 도성을 이루어가고 있는가?


【에스겔 40장 1-4절, 48장 35절】
“우리가 사로잡힌지 이십 오년이요 성이 함락된 후 십 사년 정월 십일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그 땅에 이르러 나를 극히 높은 산 위에 내려 놓으시는데 거기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나를 데리시고 거기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서 있더니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찌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할찌어다 하더라.”
“그 사면의 도합이 일만 팔천척이라 그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유대인의 제사장이요 이스라엘의 젊은 청년이었던 에스겔은 참으로 비운의 시대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성전의 제물을 먹고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성년이 되어 영광스런 제사장 위임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 위임을 받은 지도 얼마 안 되어서 나라가 멸망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의 계속적인 범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내려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모든 성읍은 바벨론 군사에 의해 불타버렸고 휘황찬란하던 예루살렘 성전도 비참하게 파괴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뿐입니까? 모든 예루살렘의 거민은 바벨론에 노예로 끌려갑니다. 이스라엘 왕은 두 눈이 뽑힌 채 피를 철철 흘리며 끌려가고 궁중의 대신이나 율법 학사나 성전의 제사장들도 종의 신분으로 끌려가는 비극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에스겔도 사슬에 묶인 채 눈물을 흘리며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스겔의 개인적인 비운이었고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 절망의 깊은 먹구름 속에서도 약속의 땅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픈 향수의 본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벨론의 그발강가에 모여 앉아 수금을 타며 구슬픈 곡조로 본향의 노래를 부르곤 하였습니다.


에스겔도 그 무리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바로 그런 에스겔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에스겔을 이스라엘의 선지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에스겔의 눈을 열어 주시고 하늘 보좌의 신령한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두렵고 떨리는 광경이었습니다. 과연 이스라엘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바로 그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원인이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그들이 이제라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에겐 절대적으로 희망이 없다고 에스겔로 하여금 예언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계속해서 바벨론의 종노릇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스라엘 멸망이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에스겔 2장부터 36장까지 계속해서 이런 예언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은 그런 에스겔에게 또 하나의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과 예루살렘성의 재건에 관한 환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수많은 해골들과 마른 뼈들이 있는 골짜기로 데리고 갔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수많은 해골과 마른 뼈들이 여호와의 말씀과 생기로 인하여 다시 살아나 여호와의 큰 군대를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에스겔에게 보여주셨습니다(겔 37장). 그리고 그 능력으로 다시 살아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다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여 새로운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도성을 회복할 영광의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겔 40-48장). 에스겔은 먼저 예루살렘 시온산 위에 세워질 찬란한 성전의 영광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웅대하게 재건되어 있었습니다. 야곱의 열두지파, 곧 야곱 총회의 기업들이 다시 회복되었고 이 영광스런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거대한 도시로 건설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고 이름 하여 주셨습니다(겔 48:35).



여호와삼마의 의미

여호와삼마! 이 말은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다’는 말입니다. 성전에 계시던 하나님께서 성전을 중심으로 세워진 새 예루살렘 도성에도 똑같이 계신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여호와삼마는 에스겔 선지서의 중심사상이었습니다. 이것이 에스겔 선지서의 목표였고 이것이 에스겔 선지서의 핵심이며 결론이었습니다.


젊은 선지자 에스겔은 오늘날 저 이라크의 바그다드인 바벨론 땅에서 목이 터져라 여호와삼마를 외쳐댔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절망에 지쳐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겔의 예언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피를 토하도록 외치는 에스겔의 여호와삼마의 소리가 자신들을 조롱하는 소리로만 들릴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젊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자기를 이렇게 종으로 버리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적하는 마음으로 돌을 던졌습니다. 에스겔은 그들이 던진 돌에 맞아 이마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죽습니다. 그러나 전설에 의하면 그때 그는 쓰러져 죽으면서도 여호와삼마를 외쳤다고 합니다. “여호와삼마! 여호와삼마!”


이 비운의 선지자 에스겔! 그는 절망의 먹구름 속에 살면서도 먹구름 속에 감추어져 있는 은빛 광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 백성들의 회복의 비전과 축복의 환상을 외치며 죽어갔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죽었지만 그 입술 속에서 선포되었던 여호와삼마의 복음은 아직도 지구촌을 메아리치고 있고 하늘 보좌를 진동하도록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호와삼마는 바벨론 해방 이후에 실제로 역사적으로 성취되었고 신약의 교회시대에 영적으로 성취되었으며 또한 종말론적으로 궁극적인 성취가 이루어져 가는 가운데 있습니다.


여호와삼마! 이것은 바벨론 포로 시절 하나님의 회복을 기다리던 에스겔 선지자의 소원이었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소망이었습니다. 또한 이것은 현대를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이기도 하며 종말론적으로는 전 시대, 전 역사 속에 살았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 소망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여호와삼마란 구체적으로 어떤 축복을 말하는 것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지금 선민 이스라엘이 처한 역사적 정황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모든 것을 다 놓치고 빼앗기고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과연 그들의 처지는 마치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본 것처럼 마른 뼈와도 같았고 마른 해골들과도 같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좌절과 비탄 속에 젖어 암흑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여호와삼마를 외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삼마! 하나님은 죽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떠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분은 반드시 우리를 바벨론에서 해방해 주셔서 우리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고 그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여호와삼마의 성읍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 일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전능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삼마의 복음으로 당신의 구원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여호와삼마의 구원은 그냥 보통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구원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아무리 지금 너희의 처지가 골짜기에 누워있는 해골들과 같고 마른 뼈다귀와 같다 할지라도 내가 너희를 구원하면 된다. 아무리 너희에게 돌파구가 없고 희망이 없어 너희가 절망의 산으로 첩첩이 싸여 있다 할지라도 내가 너희를 구원하면 할 수 있단 말이다. 내가 누구란 말이냐? 하늘과 땅을 지으신 전능자가 아니더냐? 천지의 역사를 주관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더냐? 그러므로 너희는 못해도 나는 할 수 있다. 너희는 포기하여도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반드시 때가 되면 내가 너희를 바벨론에서 구원해 내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여호와삼마의 성읍을 재건하여 여호와 삼마의 축복을 누리게 하리라.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니까 말이다.” 할렐루야!

셋째, 임마누엘의 언약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여호와삼마! 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주실 뿐만 아니라 구원해 놓은 그들과 그들의 장막, 아니 그들의 성읍에 영원히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영원히 축복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아!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원수들이 에워싸고 군대가 너희를 향해 진 칠지라도 내가 너희와 함께 해 주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볼지어다. 세상 끝날 까지 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하여주리라.” 이것이 바로 여호와삼마의 복음이요 축복의 메시지였습니다.

여호와삼마의 신도시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고 하나님을 반역하자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성전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에 끌려가 종노릇을 하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번에도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다시 재건하고 회복시키는 여호와삼마의 신도시를 계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으로 한 도시! 하나님의 성전에 의해 다스려지고 축복을 받는 도시! 하나님은 실제로 이 도시를 이루셨습니다. 기어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에서 해방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해서 성전을 건축케 하였고 느헤미야를 통해서 예루살렘 성벽과 도시를 재건하도록 했습니다. 한마디로 여호와삼마의 도시를 이룬 것입니다.


물론 이 여호와삼마의 도시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인 예언이요, 환상이었습니다. 종말에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예루살렘을 목표로 한 예언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여호와삼마의 성읍은 오늘날도 교회를 통해 우리들에게도 영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은 계속해서 종말을 향해 궁극적으로 이루어져 가야 합니다. 살아있는 교회라면 성도들에게 영적인 여호와삼마의 도성을 이루어 주어야 합니다. 참된 교회란 주일날 모였다가 흩어져도 영적으로는 언제나 교회와 성도 간에 영적인 네트워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결과 성도는 교회를 통해 은혜를 받고 신앙의 지도를 받으며 내 자녀, 내 가정, 내 직장과 사업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신도시, 여호와삼마인 것입니다. 더 위대한 여호와삼마의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더 온전한 여호와삼마를 이루어 갑시다.


[여호와 이름] “여호와 삼마”(겔48:35)

 

 

“여호와 삼마겔 48:35)

 

♣명제: 여호와께서는 새 예루살렘에 거주하시는 분이다.

♣목적: 여호와께서는 거듭난 자의 심령의 성전에 거주하신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서의 마지막 장이며 마지막 구절입니다. 에스겔서를 마지막으로 끝내면서 ‘여호와 삼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제사장 가문의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세상을 바라보게 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나라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죽고 난 후에 나라가 두 동강이가 나서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나라가 나누어졌는데도 이 백성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북이스라엘의 왕국은 하나님을 전혀 섬기지 않고 악한 왕들이 나타나면서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그러다가 가장 악한 왕이 나타나는데 아합 왕입니다.

 

이때에 음녀인 이세벨과 결혼함으로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제사장들이 종교를 장악하고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핍박하게 됩니다. 이렇게 북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악하게 살다가 결국 앗수르에 의하여 B.C. 722년에 나라가 몰락되어 멸망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북이스라엘이 멸망당하는 것을 보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동족이 하나님께 진노받는 것을 보았으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악한 왕들이 나오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면서 살아가다가 남 유다도 바벨론에 의해 B.C. 586년에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남 유다가 멸망을 당할 때에 예루살렘의 성전도 함께 무너지고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가 흩어지게 됩니다.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고통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음란한 유다 백성들을 심판하시고 회개할 수 있는 기간을 주시기 위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통이 찾아온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세상에서 이방인들에게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세상에서 고통당하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바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생겨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방인의 땅인 바벨론에 잡혀가서도 하나님의 선지자 사역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언의 말씀을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은 이곳에 계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화려하게 만들었던 여호와의 성전이 처참하게 파괴되어 도저히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장소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파괴된 성전을 보면서 슬퍼하게 되었고 모두가 흩어져서 인생을 살아가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이 완전하게 파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실의에 빠져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상을 보여주시면서 새로운 성전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아야 할 새로운 땅까지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첫 번째 성전은 완전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며 이것은 유형의 교회를 상징해 주고 있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유형의 교회를 상징하기 때문에 영원하지를 못합니다. 이 세상에도 많은 유형의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완전하지 못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백성과 구원받지 못한 백성들이 함께 공존하는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주님이 재림하시면 완전히 무너질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확신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부활되어 영원히 새 예루살렘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솔로몬 성전이 무너지고 난 후에 새로운 땅과 새로운 성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를 통해서 분배받은 땅을 소유하고 지금까지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유형의 것이기 때문에 이방민족에 의하여 모두 멸망당하고 빼앗겼습니다. 이 땅의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고 영원한 새 예루살렘에서 땅을 분배받아 살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땅을 지파별로 분배하여 주시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새로운 성전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곳에 계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무형의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겔48:35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새 예루살렘을 만드시고 이곳에 성전을 건축하여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문을 만들었습니다. 이 문은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습니다. 동서남북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을 만들었습니다.

 

계21:10-12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에스겔 선지자가 보았던 예루살렘의 성읍은 사도 요한이 보았던 새 예루살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도 성령에 이끌려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이 성은 하나님의 영광이 있고 빛이 지극히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다고 말씀합니다. 크고 높은 성곽에는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는 열두 천사가 있고 문들 위에는 이름을 썼는데 이스라엘 자손의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 쓰여 있습니다. 이 거룩한 성이 바로 새 예루살렘입니다. 영원한 무형의 교회입니다. 이곳은 온전히 구원받은 백성들만 있는 곳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들어가는 곳입니다.

 

‘여호와 삼마’ (예호와 삼마 3074) 여호와 삼마이며, (여호와 3068) 여호와라는 뜻과 (샴 8033) 거기, 그때, 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삼마는 ‘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 라는 뜻입니다. 그럼 여호와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보여주신 예루살렘의 성읍에 계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만들었던 성전에 계시지 않고 새로운 성전에 영원히 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첫 번째 성전은 율법을 중요시하면서 율법에 매여 있던 성전입니다. 이 성전은 이 땅에서 멸망당하여 파괴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적인 교회는 하나님께서 임하실 수가 없고 거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이 땅에는 많은 율법적인 교회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지 않고 자신의 영광들만 취하는 교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임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고 함께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보여준 새로운 성전에 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는 바로 부활되어 가는 무형의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선포하여 구원받은 백성들이 많이 생겨나는 교회입니다.

 

요2:19-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그럼 무형의 교회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솔로몬 성전이 무너지고 다시 바벨론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성전을 건축하게 됩니다. 이 성전이 스룹바벨 성전입니다. 이 성전이 시간이 지나면서 허물어졌고 예수님 당시에 헤롯이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려고 화려하게 헤롯 성전을 건축하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이 이 성전을 보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성전을 헐어버리면 주님께서는 사흘 동안에 세우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콧방귀를 내면서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는데 네가 어떻게 삼 일 동안에 세우겠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보이는 육적인 성전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이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된 새 예루살렘의 성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시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기 위해서는 어떠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곧 심판받고 무너질 성전입니다.

 

고전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우리들은 내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내 안에 계신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힌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의 삶에 찌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성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께서 멸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우리들도 거룩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시는 것을’ (샤칸 7931 동사, 칼, 분사능동, 남성, 단수) 정착하다, 거주하다, 머물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 가운데 거주하셔서 머물러 계시는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성령이 함께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정착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한 사람은 주님을 영접하게 되어 끝까지 부인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까지 가게 됩니다. 그래서 ‘샤칸’이라는 단어는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장막과 같은 나의 몸과 영혼에 함께하셔서 임재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자들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자들입니다. 이전 땅과 이전 하늘은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율법의 장막에 있는 자들은 심판을 받아 고통당하는 삶을 살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거듭나서 부활된 자들은 새 예루살렘에서 상급을 받아 새 땅을 분배받아 살게 됩니다. 이런 자들이 바로 복음 안에 있는 자들이며 새 언약에 있는 자들입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새 언약을 받은 자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그 성전에 함께 계시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고 아버지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 것이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자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가운데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거하셨다고 했습니다. ‘거하시매’ 라는 단어가 ???(샤칸 와우접속사, 동사, 칼,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즉시 임하여 거주하시고 정착하셔서 더 이상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나와 함께하시며 하나님의 나라까지 인도하셔서 영원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늘로부터 거듭난 자들은 구원이 취소가 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새 예루살렘의 성읍을 보여주시고 이 성읍의 이름이 여호와 삼마라고 불렀습니다. 그럼 이렇게 부름을 받은 자들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자입니다.

 

요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가셔서 살리려고 할 때에 예수님이 너의 오라비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하자 마르다는 마지막 부활의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을 안다고 말했을 때에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면서 네가 이것을 믿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이 시간 우리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이것을 정말 믿습니까?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새 언약을 받은 백성입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시며 생명이시고 죽었던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아나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아만 539 정관사, 동사, 히필, 분사능동, 남성, 단수) 확실하게 하다, 지지하다, 충실하다, 믿다, 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은 부활하시고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하게 믿어 그분을 의지하고 지지하며 충성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나를 이렇게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믿는 자들은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신 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 이유가 정관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만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믿음을 자신이 믿고 싶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음을 허락해주셔서 부활하신 주님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히필 사역 능동과 분사 능동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여호와 삼마’로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아만 539 동사, 히필, 미완료, 여성, 3인칭, 단수, 공성, 1인칭, 단수) 신뢰하다, 견고하다, 확신하다, 바라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내가 부활이며 생명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신뢰할 수 있냐고 묻고 있습니다. 죽어도 살아나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 이것을 믿으며 마지막 날을 바라보면서 살아갈 수 있냐고 묻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직접 마르다에게 말씀하시면서 계속해서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나를 믿을 수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히필 사역 능동과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 시간 나에게도 묻는 질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함께 하시며 영원히 떠나지 않고 부활될 것과 죽어도 살아나는 이 놀라운 사실을 어떠한 세상의 외부적인 환경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고 믿음이 확고하여 주님만을 따라갈 수 있느냐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저와 여러분들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입니다.

 

‘여호와 삼마’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기 계신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거기 있다는 것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들의 심령의 성전에 계시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절대 떠나지 않습니다. 복음으로 구원을 받아 확신을 얻은 자들에게는 떠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이 취소된다는 이런 것에 미혹되어 믿음이 흔들릴 필요가 없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의 말에 믿음이 흔들려 나의 행위의 의로 하나님 앞에 나가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은 거짓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들에게는 계시지 않습니다. 솔로몬 성전을 파괴하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새 예루살렘 성전에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절대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저와 여러분들은 여호와께서 삼마 하시는 자가 되었습니다.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는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내 몸의 성전을 더럽히지 마시고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

 

겔 48:30~35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
하나님은 생명의 강으로 되살린 이스라엘 땅을 열두 지파에게 분배하시고 그들 가운데 ‘여호와 삼마’로 거하십니다.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은?


1.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43:1~12)
에스겔서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의 커다란 주제입니다. 겔 4~24장까지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장면이 묘사되었구요. 겔 33~48장은 하나님의 영광이 돌아오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감히 측량하고 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빛나는 영광입니다. 이 영광의 하나님께서 패역한 이스라엘 때문에 열방에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버리고 버러지만도 못한 우상들에게 엎드려 절하며 그들의 운명을 맡겼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을 떠납니다. [겔 11:23]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가운데에서부터 올라가 성읍 동쪽 산에 머무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떠난 후에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고 성전은 파괴되었으며, 백성들은 이방 나라의 포로로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금 새 성전에 임재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겔 43:4,5]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 이를 통해 새롭게 창조된 이스라엘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서 열납되는 영적 예배를 드리게 되고, 완전한 헌신을 통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2. 땅을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48:1~29)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증거로 백성들에게 땅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신 선물입니다. 처음부터 아브라함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일방적으로 가나안 땅을 줄 것을 약속하셨고(창 12:1~3),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의 선물로 가나안 땅을 선물로 분배받았습니다(수 1:2~9). 이제는 기회를 잃은 자격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균등하게 땅을 나누어 받습니다(1~29절). 하나님의 백성은 가나안 땅이 언제나 가리켰던 하늘 나라, 즉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시작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마 11:28)들에게 안식을 주시는 그 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입니다(히 3:18~19; 4:2~3). 신약성경에서 그 땅을 기업으로 받는 자는 온유한 자들이며(마 5:5), 열방으로부터 모인 양들입니다(겔25:32~34).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될 자들은 단순히 육체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된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는 자들입니다(계 21:7).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을 지배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오직 영적인 자들만이 ‘하나님의 땅’(Land)을 갈망합니다. 그들은 땅을 침노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그들은 그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지 그들 자신의 노력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에스겔이 했던 것처럼 약속의 땅을 계속해서 바라봅니다. 우리는 기초석이 있는 미래의 도성,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의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그곳을 고대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와 고통과 질병이 없고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보좌에 둘러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소유가 된 영적인 축복을 유산으로 받게 될 그곳을 바라봅니다.


3. 여호와 삼마(35절)


‘여호와 삼마’는 에스겔서 전체의 최종적인 결론이기도 하며, 성전 재건과 땅의 분배의 최종적 목적이기도 합니다. 즉, 구원역사의 최종적인 목표는 하나님이 백성들 가운데 영원히 거하며 충만하고 생명력 넘치는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에스겔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여호와 삼마’는 그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구원과 회복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을 의미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여호와 삼마’는 현재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께서는 종말에도 동일하게 임하실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나라를 가지고 이 땅에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우리 성도는 영원히 하나님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계시록에서 성도들이 바라보는 성읍은 이제 ‘여호와 삼마’라 불리지 않고 ‘새예루살렘’이라고 불립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직면한 위험은 그들이 그 ‘땅’(land)보다는 ‘세상’(earth)에 더 끌리며, 하나님을 구하기보다 세상에 안주하고 이 땅의 재산을 소유하는 데 더 관심이 있곤 합니다. 성도는 주님과 항상 영적으로 동행하고, 그의 영광과 은혜와 권능 있는 증인이 되면서 이 땅에 나그네와 행인으로 살아야 하는데, 세상에서 풍요롭고 안락하고 쉬운 삶을 더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본향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 이방인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자비와 은혜로 우리를 위해 쌓아두신 영광의 기업을 기다리면서 새 언약의 성전이신 예수님께 온전히 중심을 둔 삶을 살아야 합니다(히 12:22~28).<수정만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