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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묵상

거짓 목자 vs. 참된 목자(에스겔 34:1-16) 외

by 은총가득 2021. 3. 2.

거짓 목자 vs. 참된 목자(에스겔 34:1-16

 

[ 성경본문 배경 ]

33:21-33 ; 에스겔이 예루살렘 함락 소식을 전달받게 되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이제 본격적인 예언 활동을 하게 된 일환으로서 유다 본토 잔류민들과 바벨론 이주민들 각각에 대하 여 죄악을 지적하고 심판을 선언하는 내용

34:1-16 ; 유다 백성들이 당하는 흩어짐과 수난이 이스라엘 목자들의 악함 때문임을 지적하고 그들의 책임을 추궁하며 파면을 선언한 후 여호와께서 직접 목양하실 것과 이로 인하여 양들이 복락을 누릴 것을 예고

33장에서 선민 회복 예언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으나, 33장은 회복보다는 경고의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본격적인 선민 회복 예언은 34장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단락은 여호와의 무조건적 은혜에 의하여 선민 회복을 예언하는 제33-39장의 내용이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유다 지도자들의 잘못은 다음 세 가지로 제시될 수 있다.

/ 첫째, 그들은 백성을 먹이는 것이 마땅함에도 오히려 백성들을 괴롭히고 잔인하게 착취하였다.

/ 둘째, 백성들 가운데서 특별히 약하고 무력한 자들을 돌보지 않았다.

/ 셋째, 백성들을 안전하게 지키지 못하고 온 땅에 널리 흩어지게 만들며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다(Taylor).

/ 즉 유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 데에만 급급하여 자신들이 돌봐야 할 양떼에 대하여는 소홀히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사회적 약자들은 삶을 영위하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였다.

/ 아울러 이들 목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미련하게도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 바벨론에 끊임없이 대항하여 나라 전체를 하나님을 거역하는 심판의 자리로 내몰고 만 것이다.

/ 결국 이스라엘 목자들은 그들의 잘못으로 바벨론의 공격으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고 그들 자신만 파멸에 이른 것이 아니라 백성들로 하여금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처량한 신세에 처하게 된 것이다.

[ 성경묵상 ] - 복있는사람 묵상지

하나님께서는 친히 목자가 되셔서 악한 목자들(왕이나 지도자)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질문 ; 거짓 목자와 참된 목자의 차이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4, 16)

거짓 목자들(1-10)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영적. 사회적)을 목자에 빗대어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십니다. 목자는 목자인데 거짓 목자라는 것입니다. 목자의 첫째이자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양들을 먹이는 겁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양들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양들을 잡아먹습니다(3). 심지어 병든 양이 있으면 치료해줘야 하는데 방치하고 죽게 만듭니다(4). '양을 위한' 목자가 아니라 '자기를 위한' 목자, 목자의 허울뿐인 악한 자인 겁니다. 이렇듯 제대로 된 목자가 없으니 양들은 유리방황하면서 결국 들짐승들(이방 나라)의 먹이로 전락하고 맙니다. 바벨론의 포로로까지 끌려간 겁니다. 이 정도 되었으면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야 하지 않을까요? 못된 지도자들 때문에 약한 백성만 골병이 듭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정, 교회, 사회)의 지도자들은 어떠합니까? 거짓 목자들이 되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나 또한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바른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기도함시다!

질문 ; 자신의 양을 찾아오는 참된 목자는 누구를 말할까요? (11, 15)

참된 목자 (11-16) 목자들이 제대로 역할을 못하니 이제 하나님이 나섭니다. 하나님이 친히 목자가 되시겠다 하십니다. 이제 되었습니다. 믿지 못할 거짓 목자 대신에 참된 목자가 나서시니 양들은 안심입니다. 이 좋으신 목자는 양들을 좋은 꼴, 살진 꼴이 있는 곳으로 인도합니다(14). 그동안 배 곪고 힘들었었는데 배부르게 그것도 제대로 좋은 것으로 먹게 되었습니다. 거기다 병든 양들은 싸매시고, 돌봐주어 다시금 회복되게 하십니다. 이런 참된 목자, 좋은 목자가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도저히 감당 못할 죄로 인해 죽어가던 우리 네 인생을 직접 싸매시고 고쳐주시려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위해 자신의 살과 피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를 완전히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목자가 오늘도 나의 목자가 되어 주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 맘에 들지 않고 내 생각과 들려도 그분이기에 의지하며 끝까지 따르시렵니까?

[ 복있는사람, 2019년 9,10월호 ]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2.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사람아, 너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규탄하여 예언하여라. 너는 그 목자들을 규탄하여 예언을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목자들이란 양 떼를 먹이는 사람들이 아니냐?

목자(2) ; 고대 근동지역의 문헌이나 성경에서 목자라는 명칭은 지도자나 왕을 지칭할 때 사용하였다(참고, 겔 37:24 ; 민 27:17).

본문은 2절 이하에서 선포되는 내용을 가장 먼저 들어야 하는 일차 대상이 이스라엘의 거짓 목자들임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거짓 목자들이 들어야 하는 바는

/ 그들 자신들의 탐욕과 방임에 의하여 이스라엘 양떼가 흩어지고 수난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고발(1-6절)만 아니라

/ 그들의 잘못을 추궁하고 파면을 선언하며 참 목자가 와서 이스라엘의 양들을 먹이시고 회복시키실 것 이라는 내용(7-16절)도 포함된다.

/ 이를 분명히 하고자 7절과 9절에도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올 들을지어다’라는 내용이 제시된다.

거짓 목자들은 자신들이 유다 백성들을 악하게 인도한 것만 아니라 선한 목자가 유다 백성을 회복하는 내용까지 들어야 하였다.

/ 이는 거짓 목자들의 악행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 곧 더 이상 그들이 양들을 학대하거나 방임하지 못하도록 파면하신다는 의미를 함의하는 것이기도 하다.

/ 아울러 이는 악한 목자들의 온갖 죄악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백성을 회복 시키시려는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의 은혜와 열정을 강조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3.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그런데 너희는 살진 양을 잡아 기름진 것을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기는 하면서도, 양 떼를 먹이지는 않았다.

4.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너희는 약한 양들을 튼튼하게 키워 주지 않았으며, 병든 것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을 싸매어 주지 않았으며, 흩어진 것을 모으지 않았으며, 잃어버린 것을 찾지 않았다. 오히려 너희는 양 떼를 강압과 폭력으로 다스렸다.

5.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목자가 없기 때문에, 양 떼가 흩어져서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6. 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 떼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

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모든 높은 언덕에서 헤매고, 세계 각처에까지 흩어지게 되었는데도, 그 양 떼를 찾으려고 물어 보는 목자가 하나도 없었다.

7. ○그러므로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러므로 너희 목자들아, 너희는 나 주의 말을 들어라.

8.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 양 떼가 노략 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 떼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한다. 내 양 떼가 약탈을 당하고, 참으로 내 양 떼가 온갖 들짐승에게 공격을 당하고 살육당하여 그것들의 먹이가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다. 내 목자들이라고 하는 자들은 내 양 떼를 찾으려고 나서지 않았다. 그 목자들은 양 떼를 잡아서 자기들의 배만 채우고, 내 양 떼는굶겼다.

9. 그러므로 너희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러므로 목자들아, 너희는 나 주의 말을 들어라.

10.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 떼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도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먹이가 되지 아니하게 하리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그 목자들을 대적하여 그들에게 맡겼던 내 양 떼를 되찾아 오고, 다시는 그들이 내 양을 치지 못하게 하겠다. 그러면 그 목자들이 다시는 양 떼를 잡아서 자기들의 배나 채우는 일은 못할 것이다. 내가 이렇게 그들의 입에서 내 양 떼를 구출해 내면, 내 양 떼가 다시는 그들에게 잡아 먹히지 않을 것이다."

11.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참으로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나의 양 떼를 찾아서 돌보아 주겠다.

12.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양 떼가 흩어졌을 때에 목자가 자기의 양들을 찾는 것처럼, 나도 내 양 떼를 찾겠다. 캄캄하게 구름 낀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내 양 떼를 구하여 내겠다.

흐리고 캄캄한 날(12) ; 주전 586년 여름, 예루살렘이 함락된 날(심판의 날)을 말한다.

13. 내가 그것들을 만민 가운데에서 끌어내며 여러 백성 가운데에서 모아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산 위에와 시냇가에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되

내가 여러 민족 속에서 내 양 떼를 데리고 나오고, 그 여러 나라에서 그들을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이스라엘의 산과 여러 시냇가와 그 땅의 모든 거주지에서 그들을 먹이겠다.

14.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 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좋은 초원에서 내가 그들을 먹이고, 이스라엘의 높은 산 위에 그들의 목장을 만들어 주겠다. 그들이 거기 좋은 목장에서 누우며, 이스라엘의 산 위에서 좋은 풀을 뜯어 먹을 것이다.

15.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직접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직접 내 양 떼를 눕게 하겠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16.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

헤매는 것은 찾아오고, 길 잃은 것은 도로 데려오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은 싸매어 주며, 약한 것은 튼튼하게 만들겠다. 그러나 살진 것들과 힘센 것들은, 내가 멸하겠다. 내가 이렇게 그것들을 공평하게 먹이겠다.

잃어 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겔 34:1~16절)

다시 에스겔 묵상이 시작되면서 우리는 파수꾼으로 세워진 에스겔 앞에 놓인 현실을 보았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나라가 멸망하고 황폐한 땅에 살면서도 선민 타령을 늘어놓으면서 온갖 우상숭배와 범죄를 계속하고 있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노랫소리처럼 들으면서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유익을 좇아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목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 목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미 나라가 멸망했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포로기 70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전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임했습니다.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언의 제목은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입니다. 목자와 양이라는 관계는 성경에서 너무 자주 하나님과 그의 백성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 23편은 목자와 양의 대표적은 은유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런 목자와 양의 관계를 풍성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와 안전하고 평화로운 인도 하심, 그리고 그에 부응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절대 순종과 신실한 의뢰라는 측면을 강조한 비유입니다. 그러니까 양은 목자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목자는 양을 위해서 생명을 버리는 것이 양과 목자의 관계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목자로 이스라엘 백성을 양으로 묘사한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참 목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실천해야 하는 목자의 사명을 위임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열방이 왕들이 백성을 노예처럼 대하는 것과는 너무 다른 관계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목자와 다르게 행동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은 그런 목자들의 악생을 7~10절은 그런 그들에게 심판이 있을 것과 양들을 그의 손에서 찾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만 먹는 목자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첫째 양 떼를 먹이는 대신 오히려 목자 자신의 배를 채우는 데만 급급하다(4절)고 말씀합니다. 즉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철저히 이기적이고 계산적으로 목자의 임무를 수행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목자를 삯꾼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가끔 동역자들에게서 아르바이트생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영혼을 다루는 이 소중한 일을 아르바이트생이 아르바이트비를 받기 위해서 하는 것처럼 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이런 태도는 아이들에게도 자신에게도 불행한 일입니다.

둘째 양 떼를 온전히 인도하는데 필요한 성품과 자질이 절대 부족한 자들이었다고 말씀합니다. 4절입니다.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다고 말씀합니다.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이 부분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포스트모던한 사회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의 팽배로 심방도 싫어하고 목회자가 자신의 생활에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과거와는 목회적 패러다임이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과연 이런 시대에 목자는 어떤 모습으로 목양을 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셋째 그들은 자신들의 도움이 필요한 양 떼를 버려둠으로써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목자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양 떼의 생명에 위협을 주고 양 떼를 절망 가운데 빠뜨린 도적이요 강도며 삯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는 목자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마다 유리되었고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다고 한탄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7~10절에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10절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 떼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도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먹이가 되지 아니하게 하리라.” 그럽니다. 하나님께서 건져내어 다시는 먹이가 되지 않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거짓 목자들에게 책임을 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실 지도자의 타락은 백성들을 어렵게 합니다. 마침 오늘 투표하는 날입니다. 올바른 지도자를 잘 뽑아서 진정 국민을 위할 수 있는 지도자를 투표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호와께서 진정한 목자가 되어 주심(11~16절)

궁극적으로 이 단락은 진정한 목자이신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23절부터 31절은 참 목자의 인도를 받는 양들의 평화로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참목자이신 하나님의 성품과 이상적인 목자로 이 땅에 오실 메시아의 등장과 그 사역, 그리고 메시아 왕국의 영광된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11~16절은 하나님께서 진정한 목자가 되셔서 양들을 모으실 것에 대해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양을 찾고 찾아서 돌보시겠다고 말씀합니다. 12절입니다.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그럽니다. 하나님께서 양을 찾아서 건져내시겠다는 것입니다. 13~14절은 다시 “내가 그것들을 만민 가운데에서 끌어내며 여러 백성 가운데에서 모아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산 위에와 시냇가에 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되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그럽니다. 이미 이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15절입니다.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을 누워 있게 할지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럽니다. 주님이 친히 목자가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

처음 다시 에스겔 묵상을 33장부터 유다의 회복에 관한 예언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거짓 목자들로 들끓고 있는 이스라엘의 참 목자가 되셔서 하나님의 양들을 먹이시고 싸매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뒤에 이어지는 말씀들은 거짓 양들도 역시 골라내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황폐한 예루살렘이나 바벨론에 있는 기막힌 성도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목자들이 양을 돌보지 않는 기막힌 상황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양들을 하나님께서 직접 모으시고 목자가 되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영원한 천국도 바라보고 있습니다. 16절의 상황은 주님 다시 오셔서 완성된 천국에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택한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봅니다.

그렇지만 오늘 말씀은 근본적으로 “너는 좋은 목자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 좋은 목자가 되기 위한 노력과 기도를 지속해야 한다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화평의 언약(에스겔 34:17-31)

 

[ 화평의 언약 ]

화평의 언약(25-31절) ;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과 ‘화평의 언약’(베리트살롬)을 맺으신다. 이 언약은 악한 짐승을 ‘그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안전히(개역한글은 “평안히") 거하게 하며, 잠을 자게 해 주고(25절),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개역한글은 “내리며"), ‘비를 내려 주신다’(26절). 즉 ‘화평의 언약’은 말 그대로 ‘살롬’임을 말해 주듯이, 안녕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삶과 목자의 보호하심(25절), 복 주심(26절)이다. 또 이런 복은 열매와 소산을 맺는 풍성한 삶을 허락하고, 땅에서는 안전을 약속하신다. 이 복은 영적, 물질적 안정도 허락하신다(27절). ‘화평의 언약’에서 핵심은 ‘베타흐’(안전, security)라는 단어가 25,27,28절에 세 번이나 사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통한 ‘안전’을 말씀하신다.

[ 성경묵상 ] - 복있는사람 묵상지

양떼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목자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 목자를 세워 언약을 맺으시고, 양떼들이 잘 살도록 주변을 정리하고 마련해 주십니다.

질문 ;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누구를 세우십니까? (23-24)

양떼를 위한 목자(17-24) 제대로 된 목자가 없는 양떼만큼 불행한 무리도 없지요.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소위 목자 축에 끼는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배만 위하고 양떼를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34:1-8). 그러니 양떼는 양떼대로 그 속에서 서로 자기만 살거라고 아귀다툼을 합니다. 좋은 꼴을 만나면 자기만 먹고 남은 먹지도 못하게 마구 밟아 버리고(18), 어깨를 부딪치고 뿔로 받아 맘에 들지 않는 양들을 무리에서 쫓아냅니다(21). 이러니 목자 없는 양같이 배회하며 힘겹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실정입니다. 이제 이들을 어찌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이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마침내 제대로 된 목자, "다윗"이라 이름붙인 목자를 보내십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목자 없이 헤매는우리네 인생에 참 목자이신 주님을 통해 모두를 구원하고 온 양떼의 질서를 세우시는 목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참 목자 되신 예수님을 의지하며 살아갑니까? 참 목자 되신 예수님 때문에 옆의 형제를 형제로 여기며 위하고 섬기고 있습니까?

질문 ; 하나님께서 그들과 맺으시는 언약은 어떠합니까? (25-30)

양떼를 위한 마련(25-31) 이제 목자를 세웠으니 다음은 양들이 평안히 먹고 지낼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하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은 양떼인 이스라엘 백성이 안전하게 거할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으면서 말입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양들의 안전을 위해 악한 짐승을 쫓아내는 일과 그들이 안전하게 먹을수 있는 풀과 각종 나무와 열매가 가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을 안전하게 바벨론의 포로에서 해방하여 그들의 땅으로 옮겨주고, 다시는 이방 나라의 노략거리가 되지 않도록 적들로부터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만 경배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단, 언약의 당사자인 그들 이스라엘 백성이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다시는 다른 이방 신들에 현혹되지 않고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회복시키실 완전한 나라를 꿈꾸고 있습니까? 내게 회복되어야 할 영역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 복있는사람, 2019년 9,10월호 ]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7.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의 양 떼 너희여 내가 양과 양 사이와 숫양과 숫염소 사이에서 심판하노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 양 떼야, 내가 양과 양 사이와, 숫양과 숫염소 사이에서 심판하겠다.

솟양과 숫염소(17) ; 가난한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하는 힘과 영향력이 있는 자들이다.

18. 너희가 좋은 꼴을 먹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꼴을 발로 밟았느냐 너희가 맑은 물을 마시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혔느냐

살진 양들아, 좋은 초원에서 뜯어 먹는 풀이 만족스럽지 않아서, 먹다 남은 풀을 발로 짓밟느냐? 너희가 마시는 맑은 물이 만족스럽지 않아서, 마시고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혀 놓느냐?

19. 나의 양은 너희 발로 밟은 것을 먹으며 너희 발로 더럽힌 것을 마시는도다 하셨느니라

내 양 떼는 너희가 짓밟은 풀을 뜯어 먹으며, 너희가 발로 더럽혀 놓은 물을 마시고 있다.

20.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 곧 내가 살진 양과 파리한 양 사이에서 심판하리라

그러므로 나 주 하나님이 그들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직접 살진 양과 여윈 양 사이에서 심판하겠다.

21. 너희가 옆구리와 어깨로 밀어뜨리고 모든 병든 자를 뿔로 받아 무리를 밖으로 흩어지게 하는도다

너희가 병든 것들을 다 옆구리와 어깨로 밀어내고, 너희의 뿔로 받아서, 그것들을 바깥으로 내보내어 흩어지게 하였다.

22. 그러므로 내가 내 양 떼를 구원하여 그들로 다시는 노략 거리가 되지 아니하게 하고 양과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그러므로 내가 내 양 떼를 구해 주어서, 그것들이 다시는 희생을 당하지 않도록 하겠다. 그리고 내가 양과 양 사이에서 심판하겠다.

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내가 그들 위에 목자를 세워 그들을 먹이도록 하겠다. 그 목자는 내 종 다윗이다. 그가 친히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 것이다.

24.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 때에는 나 주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의 왕이 될 것이다. 나 주가 말하였다.

25.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내가 그들과 평화의 언약을 세우고, 그 땅에서 해로운 짐승들을 없애 버리겠다. 그래야 그들이 광야에서도 평안히 살고, 숲 속에서도 안심하고 잠들 수 있을 것이다.

화평의 언약(25) ; 예레미야가 예연한 새 언약(렘 31:31-34)으로, 궁극적으로 화평을 바라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되었고, 지금도 최종적인 완성을 고대한다.

26.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

내가 그들과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려 주겠다. 내가 때를 따라 비를 내릴 것이니, 복된 소나기가 내릴 것이다.

27. 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 내가 그들의 멍에의 나무를 꺾고 그들을 종으로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겠고

들의 나무가 열매를 맺고, 땅은 그 소산을 내어 줄 것이다. 그들이 자기들의 땅에서 평안히 살 것이다. 그들이 멘 멍에의 나무를 내가 부러뜨리고, 그들을 노예로 삼은 사람들의 손에서 그들을 구하여 주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28. 그들이 다시는 이방의 노략 거리가 되지 아니하며 땅의 짐승들에게 잡아먹히지도 아니하고 평안히 거주하리니 놀랠 사람이 없으리라

그들이 다시는 다른 나라에게 약탈을 당하지 않으며, 그 땅의 짐승들에게 잡아 먹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이 평안히 살고, 놀랄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다.

29. 내가 그들을 위하여 파종할 좋은 땅을 일으키리니 그들이 다시는 그 땅에서 기근으로 멸망하지 아니할지며 다시는 여러 나라의 수치를 받지 아니할지라

내가 그들에게 기름진 옥토를 마련하여 줄 것이니, 그들이 다시는 그 땅에서 흉년으로 몰살을 당하지도 않고, 다른 나라에게 다시 수모를 당하지도 않을 것이다.

30. 그들이 내가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며 그들과 함께 있는 줄을 알고 그들 곧 이스라엘 족속이 내 백성인 줄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나 주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다는 것과, 그들이 내 백성 이스라엘 족속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31.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내 양 떼요, 내 목장의 양 떼다.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살진 양과 파리한 양 사이에서(겔 34:17~35절)

33장이 시작할 때 예루살렘의 황폐한 땅에 거주하면서 여전히 우상 숭배하고 음행하면서도 우리는 선민이라는 허탄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났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은 무슨 말 하는가 들어보자면서 말씀을 노랫소리처럼 취급했습니다. 거짓 목자들이 양 떼를 노략질하고 있는 상황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양이 양을 해치는 이리같은 양도 있다는 것입니다. 기막힌 상황이지만 교회에는 항상 이런 양도 존재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양과 양 사이에서 심판하시고 참된 양들을 회복하셔서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그런 양들을 보호하시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체 묵상의 방향을 하나님의 회복하시는 은혜에 있지만, 묵상의 저울추는 좋은 꼴을 먹는 것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악한 양에게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5절을 보면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당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그럽니다. 여기서 그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앞 단락에서 “나의 양과 양 사이 숫 양과 숫 염소 사이에서 심판하노라.” 그럽니다. 그러니까 양이면 다 같은 양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17~24절까지는 이렇게 양을 탈을 쓴 이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앞 단락의 거짓 목자들과 같은 부류입니다.

좀 과격한 비유이기는 합니다만 옛날 교회에는 ‘늙은 닭’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원래 늙은 닭은 저도 모이를 먹지 않고 다른 닭들도 먹지 못하도록 심술을 놓는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오래된 성도가 말씀도 듣지 않고 새로 온 성도들을 쫓아 보낸다는 의미로 사용된 말입니다. 그런데 18~1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좋은 꼴을 먹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꼴을 발로 밟았느냐? 너희가 맑은 물을 마시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혔느냐? 나의 양은 너희 발로 밟은 것을 먹으며 너희 발로 더럽힌 것을 마시는도다 하셨느니라.” 그럽니다. 좋은 꼴을 먹고 맑은 물을 마시는 것은 좋은 말씀을 먹고 복음의 맑은 물을 마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 좋은 생명의 말씀을 저도 먹지 않고 다른 사람도 먹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는 양이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를 해치는 암적인 존재입니다. 양의 탈을 쓰고 있지만, 사실은 양이 아닌 이리와 같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교회에는 의외로 이런 양 같은 이리가 존재합니다. 안타깝지만 그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이 양 같은 이리 때문에 진짜 양들이 발로 밟은 것을 먹으며 발로 더럽힌 물을 마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양들이 파리해졌습니다. 오늘 제목인 산진 양과 파리한 양은 바로 이렇게 양의 탈을 쓴 이리와 그런 고약한 양 때문에 파리해진 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살진 양과 파리해진 양 사이에서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 양의 탈을 쓴 이리들이 하는 행동을 보십시오. 21절입니다. “너희가 옆구리와 어깨로 밀어뜨리고 모든 병든 자를 뿔로 받아 무리를 밖으로 흩어지게 하는도다.” 그럽니다. 이 양은 진정한 양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22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양 떼를 구원하여 그들로 다시는 노략 거리가 되지 아니하게 하고 양과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그럽니다. 진짜 양을 구원하고 양과 양 사이에서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 들어와 있다고 모두가 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골라내는 심판이 있다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더 과격하게 표현하면 교회를 출석하고 있다는 것이 곧 믿음의 표지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는 이렇게 진짜 양을 더 힘들게 만들고 교회를 해치는 못된 양도 있다는 말입니다. 목회하다 보면 꼭 이런 이리 같은 양이 있습니다. 그것도 항상 있습니다. 한 사람이 지나가면 꼭 그 자리를 다른 사람이 대신합니다. 그래서 아마 이런 이리 같은 양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와 함께 존재할 것입니다. 다만 내가 그런 양이 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늙은 닭처럼 교회를 해치는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날마다 말씀 앞에서 우리 속사람들 살피고 또 살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이 없이는 누구나 이런 삶을 피할 수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원래 양보다는 이리에 더 가까우니 말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믿었다는 입술의 고백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 입술의 고백이 삶이 될 때까지 부단히 말씀 앞에서 애쓰고 노력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불쌍한 양들을 위해서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우시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내 종 다윗이라고 말씀합니다. 다윗이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약 40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무슨 다윗이 목자가 되어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여기 다윗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왕이자 참 목자이며 대제사장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처럼 대속 제물이 되신 분이기도 합니다. 사도 요한이 말씀했던 양을 위하여 생명을 버리는 참 목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리 같은 양이 아니라 참된 양을 먹이시고 돌보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화평의 언약을 맺고(25~31절)

그래서 25절부터는 모든 초점이 진정한 양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25~31절에서는 참 목자의 인도를 받는 메시아 왕국의 평화로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참 목자 되신 하나님의 성품과 이상적인 목자로 이 땅에 오실 메시아의 등장과 그 사역 그리고 메시아 왕국의 영광된 모습까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돌보실지에 관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25절입니다.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그럽니다. 이 화평의 언약은 진실한 양들과 맺은 언약입니다. 즉 진정한 성도와 맺은 언약입니다. 저는 이런 말씀을 읽을 때마다 도대체 이 땅에서 언제 이런 날이 올 것인가를 질문하게 됩니다. 사실 본문에서 답이 나와 있기는 합니다.

26~27절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내 산 사방에 복을 내리며 때를 따라 소낙비를 내리되 복된 소낙비를 내리리라. 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 내가 그들의 멍에의 나무를 꺾고 그들을 종으로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낸 후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겠고 그들이 다시는 이방의 노략 거리가 되지 아니하며 땅의 짐승들에게 잡아먹히지도 아니하고 평안히 거주하리니 놀랠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그들을 위하여 파종할 좋은 땅을 일으키리니 그들이 다시는 그 땅에서 기근으로 멸망하지 아니할지며 다시는 여러 나라의 수치를 받지 아니할지라. 그들이 내가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며 그들과 함께 있는 줄을 알고 그들 곧 이스라엘 족속이 내 백성인 줄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럽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어도 이런 나라는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회복에 관한 말씀이 분명하지만, 완전한 회복과 영원히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날은 주님 다시 오셔야 이루어질 일이기도 합니다.

31절입니다.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럽니다. 이 양들에 관한 이야기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참된 양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화평의 언약을 맺고 영원히 그들과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 오늘을 참된 양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좋은 꼴을 먹는 것을 하찮게 여기는 양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맑은 물을 마시는 것을 방해하는 양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양은 천국을 상속받을 수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생명의 양식을 달게 먹는 귀한 양들이 많아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에돔에 대한 경고(에스겔 35:1-15)

 

[ 성경묵상 ] - 복있는사람 묵상지

아무리 못나도 자식은 자식입니다. 못난 자녀들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을 이방나라가 괴롭히면 하나님은 그들을 가만 두지 않으십니다. 에돔에게도 그러하십니다.

질문 ; 하나님이 에돔에 대해 경고하시는 이유가 뭔가요? (5. 15)

에돔에 대한 경고(1-9)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 큰 잘못을 저질러도 그들을 벌할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모르고 하나님의 백성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세일 산으로 대표되는 에돔이 그들입니다. 유다가 멸망하려 할 때, 이 때다!' 싶어 바벨론의 편에 들어 유다가 망하도록 도운 에돔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이들을 가만 두실까요? 아닙니다. "가만 두지 않겠다"라시며 자신의 삶을 두고 맹세까지 하십니다. 그들은 피로 망하게 될 것이고(6), 황무지와 폐허가 되어(7) 결국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되게 하시겠다 선언하십니다(9). 그리고 에돔은 역사에서 사라지지요. 그러니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이들을 너무 버겹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곧 그분이 개입하실 것이니까요.

오늘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를 대적하는 이들로 인해 너무 힘들어 할 필요가 있을까요? 인내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래도 지나가지 않을까요?

질문 ; 에돔이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가진 적대감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나요? (10)

엉뚱한 기대와 사라진 기회(10-15) 에돔 사람들은 유다가 망하자 엉뚱한 기대를 합니다. 이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망했으니 그 땅이 모두 자신들 차지라 여겼던 겁니다. 엉뚱해도 이렇게 엉뚱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는데(10), 어디 감히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를 넘본단 말입니까?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이 엄히 경고하십니다. 그런 헛된 기대조차 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망하게 하시겠다. 자신들의 죄로 인해 망해버린 이스라엘, 그들의 실패와 좌절을 악의적으로 이용하고 조롱했던 그들에게 똑같이 갚아주시겠다고 하십니다(14-15). 단, 그들에게는 망하고 나면 회복될 기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황폐케 하셨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기" 당신의 백성과 함께 계신데도 불구하고 하나님 없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지 않나요? 엉뚱한 기대를 하며 형제의 고통을 나의 이익의 도구로 만들지 맙시다. 작은 것이라도.

[ 복있는사람, 2019년 9,10월호 ]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2. 인자야 네 얼굴을 세일 산으로 향하고 그에게 예언하여

"사람아, 너의 얼굴을 세일 산 쪽으로 돌리고, 그 곳을 규탄하여 예언하여라.

세일 산(2) ; 에돔 민족의 중심지로서 에서의 후손을 상징한다. 에서와 야곱의 해묵은 싸움은(창 25:19-26) 역사 속에서 두 민족 간의 싸움으로 계속 이어진다.

3.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세일 산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내 손을 네 위에 펴서 네가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할지라

너는 그 곳을 규탄하여 말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세일 산아! 내가 너를 대적한다. 내가 내 손을 펴서 너를 치고, 너를 황무지와 폐허로 만들겠다.

4. 내가 네 성읍들을 무너뜨리며 네가 황폐하게 되리니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내가 네 성읍들을 폐허로 만들면 너는 황무지가 될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는,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5. 네가 옛날부터 한을 품고 이스라엘 족속의 환난 때 곧 죄악의 마지막 때에 칼의 위력에 그들을 넘겼도다

네가 옛날부터 이스라엘에 한을 품고 있더니, 이스라엘 백성이 재난을 당할 때에, 그들이 그 지은 죄로 심판을 받을 때에, 너는 그들 위에 칼을 휘둘렀다.

6. 그러므로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너에게 피를 만나게 한즉 피가 너를 따르리라 네가 피를 미워하지 아니하였은즉 피가 너를 따르리라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내 삶을 두고 맹세한다. 내가 너를 피투성이가 되게 하며, 피 비린내 나는 일이 너를 뒤쫓아 다니게 하겠다. 네가 남 죽이기를 좋아하니, 피 비린내 나는 일이 너를 뒤쫓아 다닐 것이다.

7. 내가 세일 산이 황무지와 폐허가 되게 하여 그 위에 왕래하는 자를 다 끊을지라

내가 세일 산지를 황무지와 폐허로 바꾸어 놓고, 그 곳을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게 하겠다.

8. 내가 그 죽임 당한 자를 그 여러 산에 채우되 칼에 죽임 당한 자를 네 여러 멧부리와, 골짜기와, 모든 시내에 엎드러지게 하고

내가 세일의 모든 산을, 칼에 찔려 죽은 자들로 가득 채워 놓겠다. 네 언덕과 골짜기와 모든 시냇물에는, 칼에 찔려 죽은 자들이 널려 있을 것이다.

9. 너를 영원히 황폐하게 하여 네 성읍들에 다시는 거주하는 자가 없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내가 너를 영영 황무지로 만들어 버리고, 네 성읍들에서 다시는 사람이 살 수 없게 하겠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희는,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10. ○네가 말하기를 이 두 민족과 두 땅은 다 내 것이며 내 기업이 되리라 하였도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셨느니라

너는, 나 주가 유다와 이스라엘을 돌보는데도 감히 말하기를 그 두 민족과 그 두 나라가 네 것이 되고, 네 소유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11. 그러므로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그들을 미워하여 노하며 질투한 대로 내가 네게 행하여 너를 심판할 때에 그들이 나를 알게 하리라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한다. 네가 그들을 미워하여 분노를 터뜨리고 질투를 한 것과 똑같이, 나도 네게 보복하겠다. 내가 너를 심판할 때에야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모두 알게 될 것이다.

12. 네가 이스라엘 산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저 산들이 황폐하였으므로 우리에게 넘겨 주어서 삼키게 되었다 하여 욕하는 모든 말을 나 여호와가 들은 줄을 네가 알리로다

그 때에야 비로소 너는, 내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이다. 네가 또 이스라엘의 산을 가리켜 말하기를 저 산들이 황폐해졌으니 너희의 것이 되었다고 말하며, 조롱하였지만, 내가 너에게 보복하는 날, 너는, 네가 조롱하는 소리를 내가 다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3. 너희가 나를 대적하여 입으로 자랑하며 나를 대적하여 여러 가지로 말한 것을 내가 들었노라

너희가 입을 벌려 나를 거슬러 허풍을 떨고, 나를 거슬러 빈정대는 말을 내가 직접 들었다.

14.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온 땅이 즐거워할 때에 내가 너를 황폐하게 하되

그러므로 나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를 황폐하게 만들 때에, 온 땅이 기뻐할 것이다.

15. 이스라엘 족속의 기업이 황폐하므로 네가 즐거워한 것 같이 내가 너를 황폐하게 하리라 세일 산아 너와 에돔 온 땅이 황폐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무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스라엘 족속의 소유가 황폐하게 되었다고 네가 기뻐했던 것과 똑같이, 나도 너를 그렇게 만들어 놓겠다. 세일 산과 에돔 온 땅아, 네가 황폐하게 될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나는 여호와이니라(에스겔 35:1~15절)

아마 오늘 묵상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에돔에 대한 심판이 왜 유다의 회복이라는 문맥에 들어있느냐일 것입니다. 이미 열방에 대한 심판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 열방 가운데 유독 에돔 족속만을 따로 배어서 심판의 말씀을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에스겔서 33~39장은 앞부분에서 일관되게 예언되어왔던 패역한 유다와 이방 열국에 대한 심판이 일단락되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이 새롭게 회복될 것이라는 내용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언은 장차 모든 성도가 경험하게 될 메시아 왕국의 영광을 예언하는 마지막 단락인 40~48장으로의 전환을 돕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겔 35장은 본격적인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언하기에 앞서 야곱과 에서의 갈등(창 25:22~34) 이후 역사적으로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 대해 계속 적대 행위를 해 온(민 20:14~21; 왕상 11:14~22; 대하 28:17) 에돔의 범죄 행위를 들어 그들에게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에돔의 멸망을 예언하는 내용은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에서 이미 언급된 바 있습니다(25:12~14). 그러나 여기서 보다 자세히 이에 대해 예언하는 것은 에돔이 혈연적으로 이스라엘과 가까운 형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을 적대하는 대표적인 세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이스라엘 회복을 예언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구속사를 거역하는 세력의 멸망을 선언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에돔의 멸망이 이스라엘 회복의 전제로 예언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 나라의 융성은 이 땅에서 왕노릇하던 사단 세력의 위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침노’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천국은 세상 나라를 침노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결사 항전을 하는 것입니다.

에돔 족속의 근거지는 원래 세일 산이었습니다. 셰일 산은 사해 남쪽 아라비아 사막의 동부에 있는 산악 지대로서 족장 시대부터 이스라엘과 오랜 적대 관계에 놓인 에서의 후손들이 살아왔습니다(창 32:3). 이들은 과거 역사 가운데서 여러 차례 이스라엘을 괴롭혔으나 남왕국 유다가 막강한 바벨론의 침략에 무릎을 꿇게 될 당시에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벨론을 도와 유다를 괴롭혔을 뿐 아니라 힘을 잃은 유다 백성의 땅을 차지하는 실로 야비한 죄악을 범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당시 유다가 하나님 앞에서 심히 범죄 했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괴롭힌 이러한 에돔에 대해서 엄정히 심판하심으로 당신의 공의를 나타내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세력을 멸절시킴으로써 택한 백성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더욱 분명히 밝히고자 하셨습니다. 결국, 에돔은 이러한 예언에 따라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에게 침략을 받았습니다. 그 후 나바테야 사람들 (Nabataeans)에 의해 자신들의 영토를 잃고 완전히 역사 가운데서 축출되고 말았습니다. 훗날 역사가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에돔 족속이 거했던 세일 산은 철저히 황폐해져 그 자취조차 찾을 길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는 에스겔에게 네 얼굴을 세일 산으로 향하고 그에게 예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만납니다. 철저하게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믿든 믿지 않든 세상 역사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일 산을 대적하여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럴 때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세일 산을 황무지와 폐허가 되게 하여 그 위에 왕래하는 자를 다 끊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심판은 철저하게 내가 여호와인 것을 알게 하시겠다는 말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9절까지의 심판에 대한 예언은 앞서 설명한 이유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10절부터는 구체적인 심판의 이유가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에돔의 과도한 탐욕과 교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에돔 족속이 멸망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에서의 후예로서 이스라엘의 형제 민족이라 할 수 있는 에돔 족속이 외세의 침입으로 고난받는 유다를 돕기보다는 오히려 대적인 바벨론과 손을 잡았습니다. 10절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이 두 민족과 두 땅은 다 내 것이며 내 기업이 되리라 하였도다.”그럽니다. 여기서 ‘두 민족’과 ‘두 땅’은 B.C.930~586년의 기간 동안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분리되어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과 그 두 왕국 백성이 거주하던 땅을 의미합니다. 에돔은 바벨론과 협공하여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를 정복한 후에 그 땅과 그 백성을 자기들의 나라에 편입시킬 것을 느부갓네살과 협상했습니다. 험준한 산악 지대에 거하여 비옥한 땅을 별로 갖지 못하였던 에돔 족속으로서는 그들의 땅에 비교해 비옥했던 이스라엘 땅을 옛날부터 탐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에돔이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바벨론과 협약한 것은 다른 이의 불행, 특히 형제의 불행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유익을 얻으려 하는 악한 행위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에돔은 이스라엘 땅 모두를 차지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B.C. 586년에 유다가 멸망당 한 후 그 땅 전부를 차지하지 못하고 겨우 유다 남쪽 지방만을 그들의 정착지로 얻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거기 계셨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궤계가 형통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심판의 맹세를 하십니다. “네가 그들을 미워하여 노하며 질투한 대로 내가 네게 행하여 너를 심판할 때에 그들을 나를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2~13절에는 또 다른 이유가 설명됩니다.

“네가 이스라엘의 산들을 가리켜 말하기를 저 산들이 황폐하였으므로 우리에게 넘겨 주어서 삼키게 되었다 하여 욕하는 모든 말을 나 여호와가 들은 줄을 네가 알리로다. 너희가 나를 대적하여 입으로 자랑하며 나를 대적하여 여러 가지로 말한 것을 내가 들었노라.” 그럽니다.

‘내가 들었노라’가 핵심입니다.

‘이스라엘 산들’이라는 말은 에돔을 세일 산이라 표현한 것과(2절)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넘겨주어 삼키게 되었다는 것은 유다가 멸망한 후 에돔이 이스라엘 전 지역을 마치 배고픈 자가 음식물을 탐하듯이 모두 삼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한 말입니다. 이 말은 에돔 족속이 대대의 원수로 생각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이 패하고 예루살렘이 정복되었다는 사실을 기뻐하면서 패전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극도의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고 하나님까지 모독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고대에 국가 간의 전쟁은 그 국가들을 지키는 신들 간 싸움의 대리전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승전국은 패전국의 주신(主神) 우상을 탈취하기도 하고 그 신에 대해 모욕을 퍼붓기도 했던 것입니다. 블레셋이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다가 다곤의 신전에 두었던 것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쨌든 에돔은 이런 관례에 따라 하나님을 모독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13절의 자랑이라는 말과 연결하면 확연해집니다. 남 왕국 유다가 멸망한 것은 그들이 믿고 섬기던 하나님이 죽은 신이요 무능한 신이라고 자랑했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에돔 족속은 남유다 왕국이 멸망한 이유가 그들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단지 하나님이 무능하므로 그 백성이 멸망한 것이라고 자랑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심판을 받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런 이들의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극한 교만이요 불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이 심판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네가 즐거워한 것같이 너와 온 에돔이 황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여호와인 줄을 무리가 알리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말씀은 표면적으로는 에돔 족속처럼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형제의 나라 유다의 멸망을 기뻐하며 자신들의 탐욕을 이루는 기회로 사용하려 했던 에돔처럼 사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내 주변에 어려움을 당한 사람에 대해서 에돔 사람처럼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에게 더 어려움을 주는 말이나 행동을 자제해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울어줄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에돔 족속의 말을 들으셨습니다. 거기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심판하신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귀와 눈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찰하신다는 표현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감찰하십니다. 에돔 족속의 교만도, 그들이 한 탐욕스러운 말도 다 들으시고 거기 계십니다. 그리고 때가 차면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라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우리 모든 삶을 감찰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오늘도 우리 삶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시대에 거대 여당 시대를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 나라가 이런 거대 여당 시대를 통해 올바른 개혁이 이루어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이 사회 곳곳에 썩은 것들이 드러나고 개혁되어서 깨끗한 나라 부정부패가 없는 나라로 가는 기회이기를 기도해 봅니다.


교만하면 죽는다!(에스겔 28:1-10)

들어가며

성경은 교만에 대해서 매우 강하게 경계합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 18:12)는 한 구절만 보더라도 하나님이 교만을 얼마나 미워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교만해지기 참 쉽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인해 교만해지는 것이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교만을 너무나 싫어하시는데 우리는 너무 쉽게 교만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이 얼마나 무서운 덫인지를 잘 말해줍니다.

오늘 두로 왕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교만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교만을 경계하고 겸손을 훈련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 속으로

1. 하나님은 두로 왕의 어떤 모습을 책망하십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두로 왕이 어떤 존재라고 말씀하십니까? (1-2절, 6절)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거늘”(1-2절)

하나님은 인자, 즉 에스겔을 통하여 두로 왕에게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로 왕은 자신이 신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바다 가운데를 왜 하나님의 자리라고 말할까요?

두로는 흔히 시돈과 더불어 고대에 해상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도시 국가였습니다. 그 막대한 부와 그것에 기초한 국력으로 인해 마음이 교만해졌기 때문에 두로 왕은 자신을 신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두로의 부는 해상 무역으로 인한 것이었기 때문에 두로 왕은 하나님의 자리가 곧 바다 가운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두로 왕에게 2절 가장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거늘.” 두로 왕이 제 아무리 스스로를 신인 것처럼 생각해도 어찌 그가 신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눈에는 얼마나 가소롭게 보였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두로 왕에게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두로 왕의 말과 자세에서 교만의 본질을 깨닫습니다. 교만은 자신을 신과 같은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해 감사하기보다는 과시하고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자신이 계획하고 결정합니다. 자신이 신과 같은 존재이니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가 없는 것, 그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은 가진 사람에게도 찾아올 수 있지만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도 찾아올 수 있습니다. 가지지 못했는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살아가려는 것도 교만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교만이란 자신의 삶에 하나님이 없어도 된다는 것, 자신이 신처럼 모든 것을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 자신이 모든 것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두로 왕에게 하신 말씀, 즉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거늘”이라는 말씀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신이 아니고 신이 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 두로 왕이 교만하게 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는 무엇 때문에 교만해졌습니까? (3-5절)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다니엘보다 지혜로워서 은밀한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 없다 하고.”

두로 왕은 스스로 다니엘보다 지혜롭다고 생각했고 은밀한 것을 깨닫지 못할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물론 두로 왕이 두로라는 지역의 특성과 관련해서 상업과 무역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많고 지혜로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자신을 다니엘보다 지혜롭다고 여긴 것은 교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실은 다니엘과 비교해서만이 아니라 누군가와 비교하면서 자신의 잘난 점을 과시하는 것 자체가 교만입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우월감을 가지기 시작했다면 교만해졌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4-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으며 금과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으며 네 큰 지혜와 네 무역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말미암아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4-5절) 앞서 말씀드린 대로 두로는 해상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습니다. 그 부가 바로 두로 왕이 자신을 신처럼 여기는 교만에 빠지게 만든 원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은 두로 왕처럼 교만에 더 쉽게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돈이든 학문이든 권력이든 직분이든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우월해 보일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겸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겸손하면 더욱 아름답고 귀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더 많이 가졌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습니까? 교만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 돌아보기 바랍니다.

나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들, 나보다 덜 가졌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고 그 사람들에 비해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합니까? 이미 교만해졌습니다. 그러니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해지길 기도하기 바랍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우월하다고 느끼는 점이나 다른 사람이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것이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은 교만한 두로 왕을 그냥 놔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두로 왕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까? (6-10절)

7-10절은 하나님이 두로 왕에 대해서 선언하신 심판의 내용입니다. 그 말씀을 상세하게 살펴보기 전에 먼저 6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하였으니.”(6절)

“그러므로 … 하였으니”라는 6절의 말은 하나님이 7-10절에서 선포하실 두로 왕에 대한 심판의 근본적인 이유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 한 것입니다. 바로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두로 왕의 교만에 대해 심판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교만을 혹은 교만한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교만에 대해서 심판하시고 교만을 심판하십니다.

어떻게 심판하실까요? 7-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내가 이방인 곧 여러 나라의 강포한 자를 거느리고 와서 너를 치리니 그들이 칼을 빼어 네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치며 네 영화를 더럽히며 또 너를 구덩이에 빠뜨려서 너를 바다 가운데에서 죽임을 당한 자의 죽음 같이 바다 가운데에서 죽게 할지라.”(7-8절)

하나님은 이방인 즉, 여러 나라의 강포한 자를 거느리고 와서 두로를 치겠다고 하셨습니다. 쉽게 말하면 두로가 다른 나라의 침공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10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이방인의 손에서 죽기를 할례 받지 않은 자의 죽음 같이 하리니 내가 말하였음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셨다 하라.”(10절) 두로 왕은 이방인의 손에 비참하게 죽을 것입니다. 그 이방인들은 칼을 빼어서 두로 왕의 아름다운 것을 치고 그 영화를 더럽히며 두로 왕을 구덩이에 빠뜨려서 그를 바다 가운데서 죽임을 당한 자의 죽음 같이 바다 가운데에서 죽게 할 것입니다.

8절에서 ‘바다’라는 말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두로 왕이 교만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해 준 것이 해상 무역을 통한 부였습니다. 바다가 두로 왕의 주 무대였고 그를 부요하게 해준 터전이었습니다. 그래서 2절에서 하나님은 두로 왕에 대해서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도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바다에서 두로 왕이 죽게 될 것입니다. 교만의 원인이 되었던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원인이 됩니다. 그를 교만하게 했던 것이 곧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뜻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너를 죽이는 자 앞에서도 내가 하나님이라고 말하겠느냐 너를 치는 자들 앞에서 사람일 뿐이요 신이 아니라.”(9절) 이 말씀은 조롱하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을 죽이는 자들 앞에서도 두로 왕이 자신을 신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 비참한 처지에서는 자신이 신이 아니라 사람임을, 그것도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임을 뼈저리게 느낄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교만하게 만든 것이 사라지면 비참해집니다. 돈이 많아 교만해진 사람은 돈이 사라지면 원래 가진 게 적었던 사람보다 더 비참해집니다. 미모로 인해 교만한 사람은 노화나 질병 등으로 인해 미모가 사라지는 것으로 비참해집니다. 권력이나 인기로 인해 교마해진 사람은 그런 것들이 사라지면 삶의 의미를 잃는 것처럼 슬퍼합니다. 안타깝지만 교만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이 자랑했던 것들을 잃을 때가 옵니다. 그 때야 비로소 자신이 연약한 인간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혹시 다른 사람에 비해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것 때문에 교만해지면 바로 그것이 사라질 때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당혹감에 빠지게 됩니다. 따라서 내가 다른 사람에 비해서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해 교만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교만하지 말고 감사하십시오. 교만에는 비극적 종말이 있지만 감사는 영원한 만족과 행복으로 이어집니다.

두 가지를 부가적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는, 내가 갖지 못한 것으로 인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이 오히려 나를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겸손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면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부디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복을 받으시고, 그 복으로 인해 교만하지 않고 겸손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서로의 생각을 진솔하게 나누어 보십시오.

한 주간의 실천/ 내가 더 많이 가진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감사하기

마무리하며

“교만하면 죽는다!”라는 제목은 성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서론에서 살펴보았듯이 잠언도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라고 말하고 있고 두로 왕 역시 교만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을 걸고 교만하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해지는 것, 그것이 내가 살고 나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얻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출처 : 복있는사람, 2019년 9,10월호]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닮아가는 목자(에스겔 34:1-16)

 

 

 

 

들어가며

성경에는 리더십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지만 리더십에 관해서 매우 중요한 교훈을 풍성하게 제공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리더로 세우신 사람의 역할과 책임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영적 리더로 세우신 모든 사람은 자신이 맡은 역할과 책임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고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에 최선을 다해야만 합니다.

에스겔 34장은 ‘목자의 장’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자의 장’에서 핵심이 되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목자로 세우신 사람들, 영적 리더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교훈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경 속으로

1.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하여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4절)

2절 상반절에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으로부터 이어지는 구절들은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목자들이란 영적, 사회적 지도자들을 모두 가리킵니다. 즉, 왕들과 관리들, 선지자들과 제사장들 모두를 포함하는 말이 ‘이스라엘 목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로 하여금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고 주신 말씀은 2절 하반절부터 시작됩니다. 2b-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2-4절)

하나님은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자는 양을 쳐야 하는 사람인데,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양은 치지 않고 자기들만 먹었습니다. 목자가 양떼를 먹이는 것이 너무나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목자들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습니다. 맡은 양들에 대한 책임도, 맡은 직분에 대한 책임도 감당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만 생각하고 자기의 유익만 추구한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 목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로 부름 받았지만 목자의 역할을 하지 못한 사람들, 양들을 돌보기보다는 자기 유익만 앞세운 사람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의 목자들로 인해서 그들에게 맡겨진 양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5-6절)

5-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 떼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5-6절)

5절에 있는 “목자가 없으므로”라는 말이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이스라엘에 목자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기만 알고 자기 배만 채우는 악한 목자들이었기 때문에 없는 것과 같은, 아니 없느니만 못한 셈이었습니다.

그런 목자들로 인해서 양들은 보호와 인도를 받지 못하고 필요한 것을 공급받지 못해서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양 떼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마다 유리되었고 온 지면에 흩어졌습니다. 그들을 찾는 자도 없었습니다.

6절에 있는 ‘내 양 떼’라는 말은 매우 주목할 만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맡겨두신 양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양 떼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런 소중한 사람들이 목자들이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함으로 인해 큰 비극에 처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목자들을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양 떼들을 믿고 맡겼는데 그 양들을 돌보지 않고 방치했으니 어찌 그 목자들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3. 하나님은 맡겨진 양떼를 돌보지 않은 이스라엘의 목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7-10절)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 양 떼가 노략 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 떼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8절)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고 율법을 버렸기 때문에 바벨론의 침공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포로가 되어서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하나님의 양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나 큰 괴로움과 곤경에 빠졌습니다. 하나님은 그 책임을 이스라엘의 목자들, 즉 지도자들에게 돌리십니다. “내 양 떼가 노략 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 떼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라는 책망의 말씀은 무시무시하게 들립니다.

10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목자들에게 다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 떼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도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먹이가 되지 아니하게 하리라.”(10절)

하나님은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라고 하셨고 “내 양 떼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목자들은 양을 먹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목자들이 다시는 자기도 먹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하나님이 맡기신 양들 중에서 살찐 양을 잡아서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었지만(3절) 하나님은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먹이가 되지 아니하게 하리라”라고 하심으로써 다시는 목자들이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목자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목자들에게서 목자의 자격을 박탈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엄하게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은 사람들의 영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의 모든 직분자는 다 목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나 장로, 목자(혹은 구역장), 교사 등은 얼마나 목자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한 직분입니까? 또 가정에서는 부모가 자녀의 목자입니다.

목자의 역할을 맡는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동시에 무거운 책임이 따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책망하신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내게 맡겨진 사람들의 영혼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목자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가정이나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직분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 직분을 통해서 그들에게 얼마나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4. 악한 목자들로 인해 고통 받고 온 지면에 흩어졌던 양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11-16절)

11-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내가 그것들을 만민 가운데에서 끌어내며 여러 백성 가운데에서 모아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산 위에와 시냇가에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되.”(11-13절)

하나님은 사람 목자들의 악함과 무책임으로 인해 온 지면에 흩어진 당신의 양 떼들을 다 찾아내어서 본토, 즉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 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14절)

하나님은 단지 양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양들에게 좋은 꼴을 먹이고 높은 산에 좋은 우리를 만들어서 편안하게 살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15절이 말하는 것처럼 당신께서 친히 당신의 양들의 목자가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약속해주셨습니다.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기는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진 자와 강한 자는 내가 없애고 정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15절)

양들에게는 얼마나 소망이 되는 말씀입니까?

이 말씀은 분명 메시아이신 예수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오늘 말씀이 약속한 대로 우리를 대해주십니다. 그 주님만 단단히 붙잡고 살아가면 우리에게는 부족할 것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혹은 직장이나 사회에서 누군가에게는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친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목자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가 영향을 끼치는 그 사람에 대해서 말입니다.

부모라면 자녀에게, 목자(혹은 구역장)라면 목장 식구(혹은 구역 식구)에게, 목회자나 장로라면 성도에게 목자입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은 사람들의 영혼에 깊은 영향을 남긴다는 측면에서 교회에서 직분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목자입니다.

목자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목자들처럼 행하지 않고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닮아서 좋은 목자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 많은 사람에게 선한 영향을 끼쳐 그들이 풍성한 삶을 살아가고 하나님께는 영광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어떤 목자라고 생각합니까? 그 주님을 닮기 위해서 어떻게 힘써야 하겠습니까?

한 주간의 실천/ 나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여 실천하기

마무리하며

오늘 말씀은 목회자나 장로, 목자(혹은 구역장)나 교사 등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의 영혼에 영향을 끼치는 직분을 가진 사람들 모두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악한 목자들처럼 양들에게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닮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는 좋은 목자로, 좋은 리더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를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 ; 복있는사람, 2019년 9,10월호

[출처] 나눔,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닮아가는 목자(에스겔 34:1-16)|작성자 청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