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움 받은 에스겔(에스겔 3:16-27)
[ 성경묵상 ]
[ 질문 하나 ]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서 에스겔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가?(17-21절)
하나님은 에스겔을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우셨다. 파수꾼의 역할은 다가오는 적의 공격을 미리 간파하고, 백성에게 경고의 나팔을 불어서 죽음을 피하게 하는 것이다. 파수꾼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않으면 백성은 생명을 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파수꾼은 백성이 듣든지, 안 듣든지 경고의 나팔을 불어야 한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내 말로 그들을 깨우치지 않는다면, 그들이 비록 자기 죄로 죽는다 해도 그들의 피값을 너에게서 찾겠다고 말씀하셨다. 파수꾼이 제 역할을 하지 않으면 백성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망하는 것이다.
악인에게는 18,19절의 말씀대로, 의인에게는 20,21절의 말씀대로 실천해야 한다.
민족의 파수꾼인 교회가 사명이 얼마나 막중한가? 아울러 사역자들의 파수꾼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지 인식하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하는 자로 살아가자.
[ 질문 둘 ] 하나님의 대변인으로서 에스겔은 어떤 엄격한 제약을 받는가?(25-27절)
성령의 권능에 붙들린, 파수꾼의 사명을 받은 에스겔에게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난다. 스스로 가택연금이 될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묶여 출입을 제한당한다. 또 그의 혀가 입천장에 달라 붙어 말을 못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
선지자일 뿐 아니라, 제사장으로서 에스겔은 백성을 중보하고 위로하는 사람인데 그 일을 못하게 막으셨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고, 하나님의 의지가 확고하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너무 커서 이제 하나님의 자비와 오래 참으심이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대변인으로서, 하나님이 입을 열어 주실 때 하나님이 전하라고 하시는 말씀만 전해야 한다. 가장 수동적이고 제한적인 상태에서, 가장 적극적인 말씀의 대언자가 되어야 한다.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1-3:15에서 에스겔이 패역한 선민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다.
3:16-24:27에서는 에스겔이 ‘타락한 유다가 당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대하여 예언하였다. 이는 본서 후반부에 제시될 예언의 내용인 다른 ‘열방에 대한 심판 예언’이나(25:1-32:32) 예언의 주제가 다른 ‘선민의 영광스러운 회복에 대한 예언’(33:1-39:29)과 비교되는 예언이다.
유다의 심판에 대한 본격적인 예언은 4:1-24:27에 제시되며 3:16-27은 이같은 본격적 예언이 주어지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패역한 선민을 향하여 파수꾼으로서의 에스겔의 임무를 강조하고 한시적으로 그의 사역을 보류하는 내용이다.
그 가운데 전반부인 16-21절은 여호와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파수꾼(watchman)’으로 세우셨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가 파수꾼으로서 갖추어야 할 면모와 임무 수행의 자세를 강조한다. 이러한 내용은 선민의 영광스러운 회복을 예언하는 33:1-39:29의 서두에 나오는 33:1-9에서도 진술되어 있다.
에스겔이 자기 동족의 파수꾼으로 감당해야 할 사역의 핵심은 그들로 하여금 바른 길과 잘못된 길을 정확히 분별하도록 가르치고, 그들이 죄악을 범치 않도록 진리를 증거하며, 그들에게 임하는 심판의 재앙을 미리 경고해 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명령을 생명처럼 지켜야 할 무서운 책임이 그에게 있음을 말씀한다. 파수꾼이 성벽 위에 세워진 높은 망대에 서서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주변의 동태를 주시하며 외적이 침입해 오면 이를 재빨리 고지하여 성내에서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해야 하듯 하나님께서 파수꾼으로 세우신 선지자들 또한 이 사명을 성실히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파수꾼이 적군이 오는 것을 보면서도 또 알면서도 이를 말하지 않거나 외치지 않는다면, 이는 파수꾼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들어야 할 사람들까지도 망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렇기에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할 파수꾼들이 그 책임을 망각하고 이를 바르고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범죄로 인해 심판에 이를 때 파수꾼으로 세움을 입은 선지자들에게도 책임을 물으시는 것이다.
오늘날 복음 사역자들 역시 시대의 징조를 예언의 말씀에 영적 안목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가 먼저 깨달은 진리에 입각해 영적으로 잠들어 죄악의 길에 들어선 이들을 깨우쳐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할 책임을 갖고 있는 것이다.
16. ○칠 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이레가 지난 다음에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에스겔이 참담한 심정으로 할 말을 앓고 앉아 있던 칠 일이 다 마치자 마자 매우 중요한 어떤 일,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다. 그 칠 일의 기간은 에스겔을 고통스럽게 했던 두려움이 어느 정도 누그러지도록 했을 것이다. 즉 그 시점에 에스겔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평정심을 되찾아 여호와의 사역을 감당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자, 죄악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할 자가 갖추어야 할 준비가 무엇인지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먼저 자신이 나아가야 할 사명의 장소인 세상이 얼마나 사악하고 불의한지를 철저히 절감해야 한다. 이를 절감하는 자는 에스겔이 그랬던 것처럼 심령의 통분함과 민망함, 안타까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그처럼 죄악된 세상으로 인해 느끼는 마음의 요동과 분노, 안타까움을 다스릴 줄도 알아야 한다. 그리할 때 한편으론 열정적으로, 한편으론 냉철하고 혼들림 없는 한결함으로 하나님의 일일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가 칠 일 동안 아무런 말씀도 전하지 않고 그냥 앉아 있는 것올 허용하셨다. 여호와께서 만약 그것을 허용하지 않으셨다면, 칠 일이 끝나기 이전에 급히 말씀하셨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 선지자가 그 마음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은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기간은 무한히 연장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었다고 판단되는 시간에 나타나셔서 계시의 말씀을 내려 주신다. 이 경우 에스겔에게는 칠 일 전파 같이 신비스런 환상이 없이 그냥 말씀만이 임하였다.
17.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하여라.
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할 때에, 네가 그 악인을 깨우쳐 주지 않거나, 그 악인에게 말로 타일러서 그가 악한 길을 버리고 떠나 생명을 구원 받도록 경고해 주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신의 악한 행실 때문에 죽을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을 너에게 묻겠다.
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그러나 네가 악인을 깨우쳐 주었는데도, 그 악인이 그의 악한 행실과 그릇된 길을 버리고 돌아서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의 악행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네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20. 또 의인이 그의 공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의 공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니라 그는 그의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의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또 만약 의인이 지금까지 걸어온 올바른 길에서 떠나서 악한 일을 할 때에는, 내가 그 앞에 올무를 놓아, 그 의인 역시 죽게 할 것이다. 네가 그를 깨우쳐 주지 않으면, 그는 자기가 지은 그 죄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이미 행한 의로운 행실은 하나도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은 내가 너에게 묻겠다.
21.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하지 아니하게 함으로 그가 범죄하지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
그러나 의인이 범죄하지 않도록 네가 깨우쳐 주어서, 그 의인이 범죄하지 않았으면, 그는 경고를 달게 받았기 때문에 반드시 살게 되고, 너도 네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16-21절은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패역한 선민을 위하여 세워진 선지자로서 파수꾼의 임무를 부여받았음을 밝히고 그 임무 수행 의무를 강조하셨다. 이제 본절 이하 27절에서는 에스겔이 구체적으로 사역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여호와께서 그를 보호하시기 위해 한 시적으로 사역을 보류할 것을 통보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22.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거기서 내게 임하시고 또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들로 나아가라 내가 거기서 너와 말하리라 하시기로
거기서 주의 능력이 내 위에 내렸다.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들로 나가거라. 거기에서 너에게 할 말이 있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서 말하라고 명령하신 것을 고려할 때, 상당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은 25절과 26절을 숙고할 때 어느 정도 해결된다. 즉 여호와께서 에스겔올 집안에 칩거하게 하실 것인데, 그 때에 그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그를 결박하여 선지자로 활동하지 못하도록 괴롭힐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행동을 통하여 에스겔을 통해 전파되는 여호와의 뜻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의 입을 닫으심으로 그 들이 원하는 대로 계시의 축복이 선포되는 것을 막으셨다. 그러나 때가 되면 다시 에스겔의 입을 여심으로 말을 하게 하셔서 정상적인 사역을 감당하게 하실 것이다.
22,23절은 여호와께서 에스젤에게 한시적으로 사역을 보류하게 하시고자 그의 업을 닫으시기 전에 그를 들로 데리고 나가신 사실을 소개한다. 이때 여호와께서는 그발 강가에서 에스젤에게 권능을 부어 주셨듯이(1:3) 들로 데리고 나가시는 상황에서도 동일하게 권능을 베푸신다.
'일어나 들로 나아가라' 여호와께서는 단도 직업적으로 ‘너는 일어나라’와 ‘너는 나아가라’로 직역되는 ‘룸’과 ‘체’라는 명령형 동사를 사용한 이중 명령을 내리신다. 여기에서 ‘일어나’에 해당하는 ‘룸’은 문자적으로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서는 동작을 나타낼 뿐 아니라 비상한 결단력을 가지고 그 결단을 실행에 옮기는 의미까지 나타낸다. 에스겔은 여호와의 또 다른 계시를 받기 위해 자신의 몸을 또다시 움직여 나가는 결단을 내려야했다.
그가 나간 곳으로 언급된 ‘들’에 해당하는 원문 표현은 ‘합비크아’이다. 이는 두 개의 산 사이로 평평하게 펼쳐져 있는 골짜기를 의미한다(37:1). 여기서 정관사가 부착된 것은 그곳이 에스젤에게 잘 알려진 익숙한 장소임을 나타낸다. 그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며, 에스겔이 혼자 조용히 묵상할 때 가끔씩 머물렀던 곳으로 여겨진다. 그곳은 고독의 장소이지만 그와 동시에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여호와의 계시를 선명하게 받을 수 있는 장소였을 것이다.
23. 내가 일어나 들로 나아가니 여호와의 영광이 거기에 머물렀는데 내가 전에 그발 강 가에서 보던 영광과 같은지라 내가 곧 엎드리니
그래서 내가 일어나 들로 나가서 보니, 그 곳에는 주의 영광이 머물러 있었는데, 전에 그발 강 가에서 보던 영광과 똑같았다. 나는 땅에 엎드렸다.
24. 주의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고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네 집에 들어가 문을 닫으라
그 때에 주의 영이 나의 마음 속으로 들어오셔서 나를 일으켜 세우시고, 나에게 이렇게 일러주셨다. "너는 집으로 가서 문을 잠그고 집 안에 있거라.
"너는 가서 네 집에 들어가 문을 닫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하여는 다음 네 가지 해석의 방편이 제시된다.
첫째는 에스겔이 일정 기간 동안 공적인 사역, 곧 선지자로서의 직무를 전혀 수행하지 않게 될 것임을 상징하는 행동으로 해석하는 것이다(Lange, Cooke, Plumptre).
두 번째 견해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이 악독하게 선지자를 핍박함으로 인하여 그 핍박을 피하라는 의미로 보는 견해이다(Ewald).
세 번 째는 하나님께서 그를 능력 있는 선지자로 훈련시키며 영적 능력을 갖추게 하기 위하여 일정 기간 동안 외적 사역을 하지 못하도록 방 안에만 칩거하라는 명령올 하신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Hitzig).
마지막 넷째는 4:1-3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어떤 상징적 행위를 하여 이스라엘 족속에게 어떤 중요한 메시지를 보여주고자 하셨던 것으로 볼 수 있다(Klief oth KeiD. 즉 앞으로 몇 년 후에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완전히 포위 당하여 함락될 것이라는 사실을 에스겔이 자기 집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칩거하는 모습으로 나타내게 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중 두번째 견해는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을 선포해야 할 것을 암시하는 2:6 및 본장 25절의 내용과 모순되므로 타당하지 않으며 세번째 견해 또한 에스겔의 선지자직이 중단되었음을 함축함으로 적합하지 않다. 그러므로 다수의 학자들은 첫째와 마지막 견해가 타당한 것이라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예루살렘 포위가 임박한 당시 정황, 이어지는 4,5장의 내용이 전체적으로 예루살렘 포위와 연루된 내용이란 점에서 마지막 견해에 가장 큰 무게를 싣고 있다.
25. 너 인자야 보라 무리가 네 위에 줄을 놓아 너를 동여매리니 네가 그들 가운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라
너 사람아, 사람들이 너를 포승으로 묶어 놓아서, 네가 사람들에게로 나가지 못할 것이다.
'무리가 네 위에 줄을 놓아'란 이스라엘이 이방인에게 포로로 잡혀 결박당하는 상징적인 이미지인 동시에 , 하나님께서 에스겔의 사역을 말 그대로 제한하시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대변인으로,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에 머물러야 하고, 철저히 하나님께서 일하게 하시는 말씀만 전해야 한다.
‘너 인자야 보라’란 에스겔로 하여금 주의를 집중하여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경청해야 한다는 촉구의 말로 시작되는 본절은 에스겔 선지자가 자기 동족 들에게 미움을 받으며 고난을 당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무리가 네 위에 줄을 놓아 너를 동여매리니"는 문자적으로 ‘그들이 네 위에 맛줄들을 줄 것이고, 그들이 그것들로 너를 동여밸 것이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3인칭 복수인 그들은 바멜론 땅에 포로로 끌려온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을 지칭한다. 에스겔을 묶어 활동하지 못하게 하는 자들은 대부분 유다 땅에서 종교적 · 정치적으로 높은 직책에 있었던 사람들로 추정된다.
그들이 그처럼 에스겔을 박해한 것은 에스겔이 예루살렘의 완전한 멸망을 예언하고(4:1-3), 그들의 죄를 지적하며 그 내면에 찔림올 주는 여호와의 말씀을 가감없이 증거하는 것을 듣기 싫어했기 때문이다. 본문의 예언을 에스겔이 말올 못하게 되는 것(26절)과 관련하여 에스겔 스스로 자기 자신올 제어하여 활동을 하지 않는 상태로 들어갔다는 은유적 측면으로 해석하는 것도 배제할 수 없겠 지만(Taylor), 본절의 주어가 3인청 복수라는 사실, 그리고 사람올 묶을 때 사용하는 밧줄을 의미하는 ‘아보팀’이 명시척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본문은 에스겔이 선지자 활동을 하는 것 때문에 동족으로부터 에스겔이 당할 핍박을 예언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26. 내가 네 혀를 네 입천장에 붙게 하여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그들을 꾸짖는 자가 되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
더욱이 내가 네 혀를 입천장에 붙여 너를 벙어리로 만들어서, 그들을 꾸짖지도 못하게 하겠다. 그들은 반항하는 족속이기 때문이다.
"내가 네 혀를 네 입천장에 붙게 하여"란 여호와께서 에스겔을 영원히 벙어리로 만들어 버리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는 일정 기간이라도 장애자인 벙어리처럼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신다는 의미도 아니다. 세례 요한의 부친 사가랴의 경우 성전에서 봉사할 때, 그에게 임한 예언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부터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비록 한시적이기는 하지만, 벙어리가 되었다(눅 1:20-22 ; 1:62-64).
그러나 에스겔의 경우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복종하여 에스겔이 의지적으로 말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혀가 입천장에 붙다’라는 표현에서 유추될 수 있다. 이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모두 4회 사용되었는데, 본문 외의 나머지 3회는 사람들이 권위자 앞에 감히 말을 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는 것(욥 29:10), 바벨론에서 시온의 노래를 부르라는 바벨론 사람들의 강요를 거부하면서 침묵하는 것(시 137:6), 젖먹이가 어미 젖을 먹지 못해 목이 심히 마른 상태(애 4:4)를 각각 묘사한다. 위의 세 가지 용례 중 어느 하나도 신체 장애자로 서 벙어리의 상태를 묘사하지 않는다.
에스겔이 말을 하지 않았던 기간과 관련하여 혹자는 여호와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말을 하지 않도록 만드시되, B.C. 593년부터 586년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까지 칠 년 동안 그렇게 하셨다고 추정하며(Block), 그 철 년이라는 기간은 에스겔이 여호와의 소명에 분노하여 칠 일 동안 할 말을 잃은 채 앉아만 있었던 것(3:15)에 대한 형벌의 차원에서 부가한 시간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에스겔이 칠 일 동안 할 말올 잃고 앉아만 있었던 것(3:15)은 자신올 패역한 선민올 향한 선지자로 부르신 여호와에 대한 분노 때문이라기보다 그가 사역해야 할 사람들의 심각한 영적 상태 때문이다. 물론 여호와를 대하여 패역한 태도를 보였다면, 그러한 패역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스라엘 족속에게 본으로 보여주기 위해 에스겔을 벙어리 상태로 만들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에스겔이 말을 하지 못하도록 억제된 것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본으로 보이도록 제시된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선지자 개인에게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혹자는 에스겔 이 벙어리 됨이 예루살렘의 멸망 직전 약 8개월 정도 집중해서 일어났으며(24:27; 33:21,22), 그 동안 여호와께서 말씀을 주실 때에 간간히 선포 사역을 했다(5:5)고 주장한다(Wright).
또한 에스겔이 말하지 않은 상태는 일상 생활에서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여호와께서 말하라고 명령하실 때에만 특별히 입을 열어 말을 하는 상태였다고 추정한다. 이는 그가 하는 모든 말이 다 여호와의 말씀이 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즉 에스겔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은 다 여호와의 계시의 말씀이며, 그는 문자 그대로 여호와의 대변인이었던 것이 된다. 그가 말할 때에는 여호와께서 말하게 하시기 때문이요, 그가 침묵할 때에는 여호와께서 침묵하도록 하셨기 때문이었던 것이다(Taylor).
이러한 견해가 상당한 셜득력을 지닌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본절과 더불어 27절의 ‘그러나 내가 너와 말할 때에 네 입을 열리니’라는 표현을 감안할 때 본문의 말을 하지 않은 상태는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다시 말올 하시는 시점까지 한정된 일시적 현상이라 볼 수 있다.
또한 그 기간도 에스겔이 선지자로서의 소명올 받은 이후 얼마간의 기간으로 보인다. 즉 하나님께서 에스겔로 하여금 자기를 성찰하고 자신을 선지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깊이 묵상하게 하신 후 그에게 찾아 오셔서 다시 계시를 주시고, 그 이후 에스겔은 왕성하게 선지자로서 사역을 수행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27. 그러나 내가 너와 말할 때에 네 입을 열리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듣기 싫은 자는 듣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니라
그러나 내가 너에게 다시 말할 때에, 네 입을 열어 줄 것이니, 너는 주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들을 사람은 들을 것이고, 듣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거절할 것이다. 그들은 반항하는 족속이기 때문이다."
[ 복있는사람, 2018년 11,12월호 ]
파숫군 에스겔 ( 3:16-21 )
이 계속되는 지시는 '칠일 후에' 즉 그가 환상을 본 후 칠일째 되는 날에 다시 내려졌다. 지난 번 환상을 보여 주셨던 날이나 본문의 지시를 내리신 이 날은 모두 안식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칠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이셨던 일들에 대하여 일주일 내내 골똘히 생각하고 묵상하며 지내왔었기 때문에, 안식일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또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에 합당한 상태였다. 에스겔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는 사실을 비유를 통하여 분명하게 듣게 된다.
1. 선지자가 부름을 받은 직무(16,17)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17절). 그는 파숫군인 것이다. 침략을 당한 나라나 포위된 성읍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고 위험이 올 때 경종을 울리는 진지의 파숫군처럼 양떼를 살피는 파숫군처럼 그 성읍의 파숫군으로 임명된 것이다. 이 말은 이스라엘 족속이 전쟁 중에 매우 교활한 적에게 노출되어 있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파숫군들은 항상 적에게 목숨을 잃을 위험에 놓여 있다.
적들은 보초만 죽이면 목적을 쉽게 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죽는 한이 있어도 감히 자기들의 위치를 이탈할 수 없으며 근무지를 이탈할 경우 상관으로부터 죽음을 당하게 된다. 그러한 딜레마는 교회의 파숫군들에게도 있다. 만일 교회의 파숫군들이 자기 직무에 충실하다면 사람들이 그들을 저주할 것이요, 불성실하다면 하나님께서 저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2. 파숫군의 임무(18-21)
파숫군의 임무는 동태를 살펴서 전달하는 것이다.
(1) 파숫군으로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이 민족에게 대하여 하시는 말씀을 먼저 인지하여야 한다. 그러나 에스겔은 다른 파숫군들처럼 위험을 탐지하고 정보를 얻기 위하여 두리번거릴 필요가 없고 하나님만 주시해야 했다.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17절). 그 외에 것은 살필 필요가 없었다.
(2) 그는 자기가 들은 내용을 자기의 이름으로나 자기에게서 나온 듯이 말해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으로 전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악인들이 계속해서 죄를 범하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꼭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으며 지금도 여전히 말씀하고 계신다. 악인의 죄악은 틀림없이 자기의 멸망이 되고 말 것이다.
만일 악인이 그 죄에서 돌이켜 악한 길에서 떠난다면 그는 살게 될 것이요 이미 경고받은 멸망까지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알고 그렇게 행할 수 있도록 악인은 처해 있는 위험에 대하여 경성함을 받는다. 죄의 위험에 대하여 죄인들을 경성시키는 일과 죄인들에게 회개의 특혜에 대하여 확신시켜 주는 것이 사역자의 임무이다. 신실한 사람들은 비록 성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보답을 받게 될 것이다.
에스겔이 접해야 했던 사람들 중에는 의로운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의에서 돌이키지' 말라고 경고를 해야 했다(20,21절). 넘어지지 않는 좋은 방법의 하나는 넘어지는 일에 대하여 '두려움'을 갖는 것이다(히 4:1). 사람이 의에서 떠나면 곧 불법을 행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소홀히 하고 그러한 의무를 등한시하게 되며 쉽게 시험하는 자의 희생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중도에서 의를 포기하는 자들은 그것을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의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악에게 아부를 해서도 안되겠지만, 의가 마치 어디에서고 전적으로 안전한 것처럼 의에게 아부해서도 안된다. 지혜로운 책망을 순종하는 귀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 이는 듣고 따르는 자는 경고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살게 될 것이고, 견책을 한 사람은 그 사람의 영혼을 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나타난 여호와의 영광 ( 3:22-27 )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선지자들에게 나타내신 이 모든 계시와 충분한 지시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는 그의 부름에 비례할 만큼의 역할을 못해낸 듯하다. 선지자가 여러 난관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광에 대한 또 다른 환상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말씀하시기 위하여 그를 들로 불러내신다(22절). 비천한 포로일 뿐만 아니라 죄인이요, 하나님의 지시에 근심하는 마음으로 간 사람이며 게다가 이번 경우엔 자기 임무에 대하여 의욕이 없는 그런 사람과 대화하시기 위하여 이와같이 자기를 낮추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라. 하나님과 의논을 하고 그 분에게 말씀드리기 위하여 세상에서 물러나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대단히 큰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선지자는 많은 백성들 사이에서, 오히려 이보다 더한 외로움을 맛보았었기 때문이다.
에스겔은 포로들 가운데로 들어갔을 때보다 훨씬 즐겁게 평원으로 나아갔다(15절). 선지자는 평원에 나아가 그가 이전에 그발강 강가에서 보았었던 환상과 동일한 환상을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야기를 해주기 위하여 선지자를 불러 내셨던 것이지만 그에게 자신의 영광도 보여주셨다(23절). 지금은 우리가 그러한 환상들을 기대할 수 없지만 우리가 여호와의 영광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그의 신으로 말미암아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된다면 우리에게 이미 그러한 은혜가 주어졌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혹자는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곧장 군중들이 모여있는 광장 한가운데에 보내 그들이 선지자와 선지자의 전갈을 받아들이도록 만드시고, 에스겔이 자기에게 넓게 열려져 있는 기회를 갖게 하셨을 것이라고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에스겔이 들은 내용은 이와는 정반대였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공공 회합에 파견하시는 대신에 집안에 있으라고 명하셨다. 너는 가서 네 집에 들어가 문을 닫으라(24절). 에스겔은 공중 앞에 나서기를 꺼려했을뿐더러 나서더라도 백성들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과 그 백성들에 대하여 정당한 책망을 하신다. 에스겔은 수줍어하는 태도에 대하여 책망을 받았고 백성들은 냉담한 태도에 대하여 책망을 받았다. 이로써 에스겔은 공중 앞에 나가는 것이 금지된다. 따라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또 다른 계시를 받기 위하여 문들 닫고 집안에만 있어야 하였다.
우리는 유다의 장로들이 에스겔을 찾아와서 그 앞에 앉아 그가 환상을 보느라고 무아경에 빠지는 것을 직접 목도하였음을 볼 수 있다(8:1). 에스겔은 11:25에 가서야 포로된 자들에게, 여호와께서 자신에게 보이셨던 모든 일을 비로소 말해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그 백성들에게 보내시면 그들은 에스겔에게 존경과 사랑을 주는 대신 평화를 어지럽히는 자라는 구실로 그를 '줄로 동여매' 결박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25절). 그 백성들은 자기들이 선지자들을 핍박하였던 탓에 바벨론에 사로잡힌 몸들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곳에서도 선지자들을 핍박한다. 그들은 미쳤다는 명목으로 에스겔을 포박해 버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찬송을 드러내도록 에스겔의 입술을 열어 주는 대신에 적절한 시가가 오기까지는 말하지 말도록 침묵을 요구하셨다(26절). 최상의 것을 말할 수 있는 그에게 전혀 말하는 것이 금해진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들 자신에게 보내진 사람에게 '패역한 족속'이기 때문이며 그런 사람을 '책망자'로 가질 만한 하등의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을 때, 즉 그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계획하셨던 때가 이르면 그의 입을 열어 주실 것이다(27절). 언제든 에스겔이 백성들에게 말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성공에 대한 확신을 해주는 대신에 그 문제를 불투명하게 남겨 놓으신다. 그리고 에스겔은 그 문제로 인하여 당황하거나 마음에 동요를 일으켜서는 안되며 그 문제가 앞으로 어떻게 되든지 그대로 버려두어야 했다.
출처 ; 메튜헨리 주석
에스겔을 파송하시는 하나님 ( 3장 )
본장의 전반부는 전장의 내용에 이어 계속해서 부르심을 입은 에스겔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파송받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본장의 후반부는 에스겔이 드디어 하나님의 말씀을 처음으로 전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편 본장의 마지막 부분은 에스겔이 잠시 동안 대언을 하지 못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에스겔 파송의 준비
1) 말씀을 익힘
에스겔은 파송을 받기 전에 그가 받은 말씀 전파의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몇 가지 준비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 준비 과정의 첫번째 것은 전달해야 할 말씀을 완전히 소화하여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달하는 자가 자기가 전달해야 할 사항을 숙지하지 못한다면 전달 사명은 온전히 성취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에스겔은 말씀을 먹어 그의 것으로 하도록 명령받았습니다.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3:14)
2) 말씀 전파 대상의 확인
에스겔이 파송의 준비 단계로서 두번째 행한 것은 말씀 전파 대상을 다시 한번 더 확인받은 것입니다. 에스겔은 2장에서 그가 말씀을 전파할 대상이 패역하고, 강퍅한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은 말씀 전파 사명을 정확히 수행하기 위해 전파 대상을 다시 확인받는 철저한 준비 과정을 거쳤습니다.
?다른 백성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겔3:5)
3) 말씀의 권능을 줌
에스겔이 전파 대상으로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이 곧고 무례하여 포악한 백성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에스겔의 사명이 순탄하지 않을 것임을 말해 줍니다. 따라서 에스겔에게는 강하고 담대한 성품이 요두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이 그의 사명을 끝까지 잘 수행하도록 에스겔에게 말씀의 권능을 주었습니다.
a.금강석 같은 이마(겔3:9)
b.성령의 권능(행1:8)
2. 에스겔 파송의 실행
1) 성신의 인도로 선교지에 파송됨
효과적인 사명 수행을 위한 준비 과정을 마치자 에스겔은 드디어 선교 임지로 파송되었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로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보냄을 받을 때에 에스겔은 하나님의 신이 임함으로 그 성신의 힘에 이끌리는 가운데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에스겔이 파송되는 순간까지도 하나님의 인도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a.신이 들어올림(겔3:14)
b.성령의 인도(행16:6)
2) 감동을 입음
에스겔은 파송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영의 권능에 이끌리어 임지로 이동했을 뿐만 아니라 임지로 이동하는 순간까지도 하나님의 영의 감동하심을 입었습니다. 에스겔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힘으로 하나님에 의해 그의 사명을 감당하는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우리는 부르심을 입어 일꾼으로 나아갈 때에 이처럼 은혜를 입음으로 나아가는 축복되고 성공하는 일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a.성령 충만한 제자들(행2:4)
b.성령 충만한 베드로(행4:8)
3) 전파 대상 가운데서 일정 기간 거하면서 파수꾼 됨을 인식함
그런데 에스겔은 임지에서 바로 말씀을 전파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임지에서 다시 칠 일 동안 침묵하는 가운데 자신의 사명을 가다듬고 전파 대상을 연구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는 것은 이처럼 어려운 과정을 필요로 하므로 우리는 그 일에 부름을 받을 때 신중하고 경건하게 수행해야 하겠습니다.
a.모세의 수련(히11:27)
3. 말씀의 내용
1) 악인을 깨우쳐 구해야 함
에스겔은 오랜 준비 과정을 거쳐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그가 드디어 입을 열어 말한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 가운데 첫번째 것은 악인을 깨우쳐 그 죄 가운데서 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따라서 대언자는 그 누구보다도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그들이 돌아오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이 그 말을 듣고 돌이키면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듣지 않을 경우 전달자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전달자는 전달의 책무를 다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전하지 않으면 악인은 악 가운데서 죽거니와 그 피 값은 전달자가 담당합니다.
a.악인에게 전파한 경우(겔33:8)
b.악인에게 전파하지 않은 경우(겔33:9)
2) 의인을 깨우쳐 악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함.
말씀 전파자는 죄인에게만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그가 평생 악의 길에 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항상 악에 빠질 가능성 앞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 경우에도 전파자가 전하면 그 결과가 어떻든지 전파자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반면에 전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악에 빠지면 전파자에게 피값이 전가됩니다.
a.의인에게 전하지 않은 경우(겔3:20)
b.의인에게 전한 경우(겔3:21)
3) 백성이 듣지 아니하므로 선포하지 못하게 하심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그대로 전하였으나 이스라엘 백성이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징계의 일환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조차 못하도록 에스겔의 입을 막았습니다. 본장은 이 내용으로 막을 내립니다.
?예언을 봉함하라(단12:4)
결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는 자기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그 불충성의 죄값을 반드시 치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가운데 전달자는 오직 말씀 전파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출처 ; 메튜헨리 주석
겔-5, 남유다의 멸망과 예루살렘 함락에 대한 예언(에스겔 3:16-7:27)
남유다 패망 전후 시대에 걸쳐 주어진 예언들의 모음집인 에스겔서는 B.C. 586년 예루살렘 함락을 기점으로 하여 자연스럽게 그 이전에는 주로 심판 관련 예언이, 그 이후에는 주로 회복 관련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기준으로 하면 에스겔서는 에스겔의 선지자 소명 장면을 기록한 서론부(1:1-3:15), 그리고 전기 심판 예언(3:16-32:32)과 후기 회복 예언(33-48장) 등 전3부로 구분할 수 있다.
한편 이 가운데서 전기 심판 예언 3:16-32:32은 B.C. 586년 예루살렘 함락 이전에 주어진 예언들로서 주로 남유다 멸망 예언을 수록한 전반부 3:16-24:12과 남유다 멸망을 전후하여 남유다를 적대한 주변국들에 대하여 선포한 심판 예언을 수록한 후반부 제25-32장으로 나누어진다.
이 중 먼저 전반부 3:16-24:12을 보면 남유다 왕국과 선민의 수도인 예루살렘이 저지른 패역한 범죄를 조목조목 밝히고 그에 따른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다양한 각도에서 거듭하여 예언하고 있다.
이러한 남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멸망의 심판 예언은 에스겔서와 그 시대적 배경이 상당 부분 중첩되는 예레미야서의 전체 내용과 기본적으로 그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예레 미야가 참혹한 하나님의 심판의 참상을 직접 당해야 할 당사자였던 남유다 본토인을 향하여 그 비극의 현장인 예루살렘에서 예언한 반면 에스겔은 같은 남유다 백성들이지만 머나먼 이방 땅에서 한 발 비켜서서 본국의 멸망을 바라보아야 하였던 바벨론 포수민들을 향하여 예언하였다. 바로 이런 점에서 본서 3:16-24:12의 예언 내용과 예레미야서의 예언 내용은 여러가지 뚜렷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에스겔의 기본 이해’ 부분을 참조하라.
본문은 이처럼 전기 심판 예언 중에서도 B.C. 586년 예루살렘 함락 이전에 기록된 예언들로서 주로 남유다 멸망 예언을 수록한 전반부 3:16-24:12의 개시 부분이다. 이러한 본문은 에스겔이 선지자로 소명을 받은 때로부터 7일 후인 B.C. 593년 4월 12일에 받은 일련의 계시들이다.
이를 개관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3:16-27은 패역한 선민에 대한 에스겔 선지자의 파수꾼 임무 강조와 한시적 사역 보류 명령을 보도한다.
앞서 소명 기사에서 패역한 이스라엘 족속에게 에스겔을 파송하심을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여기서는 에스겔을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우셨음을 밝히며 당신을 대신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깨우칠 것을 명하신다(16,17절). 그리고 그의 파수꾼 임무 수행 여부에 따른 책임 소재 규명을 통하여 그의 파수꾼 임무 수행 의무를 강조하신다(18-21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에스겔의 파수꾼 임무 수행을 강조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족속의 패역함을 이유로 당신의 말씀이 다시 그에게 임하기까지 그의 선지자 사역을 한시적으로 보류하고 칩거하라고 명하셨다(21-27절). 그리하여 에스겔은 예루살렘 함락 소식이 그에게 전해진 당일인 B.C. 585년 10월 5일까지는 하나님의 계시가 임할 때에 한해서 제한적으로 예언적 상징 행위와 말로써 메시지를 선포하였다(24:25-27 ; 33:21,22).
4:1-5:4은 남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첫 심판 멸망 예언으로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예루살렘 심판 멸망의 면면을 예고하는 네 가지 상징 행위를 명하신 사실을 보도한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명하신 네 가지 상징 행위는 예루살렘 성의 포위 장면을 예고하는 토판 그림 제작(4:1-3), 선민의 범죄 기간과 심판 기간을 상징하는 좌 · 우편 모로 눕기(4:4-8), 선민의 범죄로 야기된 예루살렘 심판 멸망 전후의 극심한 기근을 예고하는 부정한 떡의 취식(4:9-17), 예루살렘 함락 당시의 처처의 살육과 일부 남은 자의 보존을 예고하는 터럭의 분산 처리(5:1-4) 등이다.
5:5-17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선민의 수도 예루살렘이 앞서 네 가지 상징적 행위에 나타난 것과 같이 처참하게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된 원인을 제시하고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이방 앞에서 철저하고도 확실하게 집행하실 것임을 강조한 사실을 보도한다.
끝으로 6:1-7:27의 세 문단은 선민의 대표적 범죄인 우상 숭배와 관련한 심판 예언을 보도한다.
이를 좀더 상술하면 6:1-14에서는 우상 숭배에 대한 현장 심판 예언을 통하여 유다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을 모든 재앙이 그들의 죄악 특히 가증한 우상 숭배에 그 근본 원인이 있음과 우상 숭배의 허망함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7:1-13에서는 선민의 가증한 행위에 대한 긍휼 없는 징벌이 집행될 선민 심판의 임박성에 대한 삼중 경고를, 7:14-27에서는 여호와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선민에게 닥칠 참상에 대한 삼중 경고를 통하여 가증한 우상 숭배를 행한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엄정한 심판을 받아 처참한 파멸에 이르게 될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우리는 이상의 본문에서 다음 사실들에 주목해야 한다.
먼저,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우침으로써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할 것과 그 사명 수행 여부에 따른 책임 소재를 말씀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위기 상황을 깨우쳐 그들로 하여금 그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에스겔의 사명 수행 여부는 이수라엘 백성들의 삶과 죽음, 구원과 멸망을 좌우하는 아주 중요하고도 절대적인 문제였다. 따라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그 책임이 실로 막중하였다. 만일 그가 파수꾼의 사명을 잘 수행한다연 그는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에서 돌이키지 않아 멸망 한다고 해도 그 책임을 면할 수 있었지만 만일 그가 파수꾼의 사명을 잘 수행하지 아니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이 처한 심각한 위기 상황을 깨닫지 못함으로 멸망한다면 그에 따른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의 사명과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를 잘 가르쳐준다.
오늘날 말씀을 맡은 자라고 하면 일단 전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목회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궁극적인 운명을 결정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처한 상황을 분명하게 파악하여 그들을 깨우침으로써 파수꾼의 사명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은 비단 목회자만이 아니다. 성도들 또한 넓게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멸망의 심판 위기에 처한 이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멸망의 길에서 구원의 길로 돌이키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당신의 말씀을 맡은 이상 성도들에게서도 파수꾼 사명과 관련하여 최후 심판 날에 그 책임을 따지실 것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부르실 때 ‘인자(人子, son of man)'라는 호칭을 사용하시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람의 아들이란 의미의 인자는 후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칭호로 사용되었다. 복음서를 보면 그리스도는 어느 칭호보다도 인자라는 칭호를 자신에게 많이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에스겔에게 적용된 ‘인자’라는 칭호는 동족의 구원을 위한 에스겔의 사역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기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예표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구약 특히 본서에서 ‘인자’란 인간의 연약한 측면을 강조하는 칭호이다. 즉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인자로 부르신 것은 하나님은 연약한 인간을 들어 당신의 위대한 구원 사역올 이루어 가심을 나타내기 위함인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실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구원 사역에 관한 한 인간을 통하여 이루어 가기를 기뻐하셔서 역사 속에서 인간들을 당신의 종으로 부르심으로 그들로 당신의 영광스런 구원 사역에 동참케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연약한 인간에게 당신의 권능을 입혀주심으로 당신의 일을 능력 있게 감당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자신을 불러주사 영광스런 당신의 구원 사역에 동참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할 능력도 공급하여 주심을 깨달아 힘을 내어 충성스럽게 사명을 수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셋째,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절대 공의의 속성에 대하여 주목해야 한다.
본문은 하나님의 선민의 나라인 남유다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성이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초토화될 것임을 예언하고 있다. 이는 죄에 대해서 그 어떤 예외도 없이 심판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절대 공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실로 이 세상의 역사는 인간의 범죄와 이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또는 심판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태초에 아담이 당신과의 언약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는 범죄를 저질렀을 때 하나님께서 이를 징계하신 일로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재림과 죄인들에 대한 마지막 대심판으로 구속사가 종결되는 그 때까지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하여 순종하는 삶을 지속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지 않아야 할 것이다.
넷째, 하나님께서 만민 중에서 특별히 구별하시어 놀라운 이적으로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당신과 당신의 율법을 계시하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시시때때로 역사 속에서 그들에게 각종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유다가 그 놀라운 사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허망한 우상을 숭배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이른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의문을 가지는 한 가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고 엄청난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상 숭배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으로 인하여 많은 사랍들이 이스라엘 민족은 다른 민족에 비하여 더 악하고 패역하였던 것으로 여기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민족에 비하여 더 악하거나 패역하여 우상 숭배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이는 아무리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도 조금만 방심하면 사단의 흉계에 빠지며 멸망에 이르게 된다는 교훈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선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압도적인 축복을 경험하고서도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한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름답게 창조한 축복의 땅 에덴 동산에서 살면서도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은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실로 하나님 축복의 다소(多少)가 아니라 인간의 영적 방심이 죄로 나아가게 하는 첩경이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서 눈을 돌리는 그 순간이 바로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는 타락과 파멸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된 것처럼 우리 성도도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는 그 순간이 바로 영적 실패로 나아가는 첩경이 됨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온 몸으로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스겔 4:1-17)
[ 성경묵상 ]
4:1-5:4은 남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첫 심판 멸망 예언으로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예루살렘 심판 멸망의 면면을 예고하는 네 가지 상징 행위를 명하신 사실을 보도한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명하신 네 가지 상징 행위는 예루살렘 성의 포위 장면을 예고하는 토판 그림 제작(4:1-3), 선민의 범죄 기간과 심판 기간을 상징하는 좌 · 우편 모로 눕기(4:4-8), 선민의 범죄로 야기된 예루살렘 심판 멸망 전후의 극심한 기근을 예고하는 부정한 떡의 취식(4:9-17), 예루살렘 함락 당시의 처처의 살육과 일부 남은 자의 보존을 예고하는 터럭의 분산 처리(5:1-4) 등이다.
에스겔은 임박한 심판의 구체적 내용을 온 몸으로 전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는 430일간을 옆으로 누워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를 담당하며, 고통의 빵과 음식을 먹었다.
[ 질문 하나 ]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메시지를 어떻게 전하게 하셨는가?(1-6절)
에스겔은 하나님의 심판의 구체적 내용을 무언극으로 전한다.
먼저, 그는 석판 위에 예루살렘 지도를 그린 후, 흙으로 그 성을 둘러싸서 포위 공격을 받는 모습을 연출한다. 그 다음 철판을 가져와 자기 얼굴과 예루살렘 성 사이에 두고 성을 공격하는 동작을 한다.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이어서 그는 모형 예루살렘 옆에 왼쪽으로 390일을 누워서 이스라엘의 죄를 담당하고, 40일을 오른쪽으로 누워서 유다의 죄를 담당한다. 이스라엘이 솔로몬 이후 하나님을 배교했던 햇수와, 그 결과로 당할 시련, 곧 포로생활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온 몸으로 전한 메시지는 누구나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 온 몸을 던져 백성의 죄와 고통을 담당하는 선지자의 모습에서 우리의 고통을 체휼하신 그리스도가 보인다.
[ 질문 둘 ] 에스겔은 또 어떤 방식으로 예루살렘 백성이 겪을 고통을 예언하였는가?(9-13절)
에스겔의 고난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은 390일 동안 에스겔이 하루 떡 반 조각과 물 반병으로 버티게 하신다. 굶어 죽는 것을 겨우 면한 극한의 절식이다. 예루살렘이 포위되는 과정에서 백성이 겪어야 할 기아와 고통을 예언하며 미리 체휼하게 하신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인분으로 보리떡을 구워 먹게 하신다. 정결함을 지켜야 할 제사장이 인분에 구운 더러운 보리떡을 먹는다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에스겔이 그것 만큼은 못하겠다고 항변하자, 인분을 쇠똥으로 대신하게 한다. 이 역시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땅에 포로가 되어 '부정한 음식'을 먹게 될 것을 온 몸으로 예언한 것이다.
이것은 선지자의 체면을 구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에 온 몸으로 동참하는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찢어지는 마음ㄴ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3:16-27 단락은 에스겔이 여호와로부터 패역한 선민을 향한 선지자로 소명받았음을 밝힌 1:1-3:15과 관련하여 그의 파수꾼으로서의 임무 수행 의무를 강조하고 에스겔이 동족으로부터 고난을 받을 것을 통보 받았음과 동족들로부터 보호를 위하여 한시적으로 선지자 사역 수행을 보류할 것을 명령받은 내용이다.
이러한 내용에 이어지는 5:1부터 24:27까지는 선민에 대한 에스겔의 본격적 예언이 소개된다.
먼저 4:1-5:4은 에스겔이 여호와의 특별한 명령에 순종하여 네 가지 상징적 행위를 통해 여호와의 메시지를 전달하였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5:5-17은 그 상징적 행위에 나타난 심판의 원인과 심판의 집행에 대하여 설명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4:1-5:17의 상징적 행위와 이에 대한 설명은 이후 제24장까지 계속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악 및 심판에 대한 예언의 서론적 성격을 띠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에스겔을 통해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는 일련의 행위들올 통해 앞으로 몇 년 이내로 예루살렘이 필연적으로 멸망할 것올 예고하신 것이다. 어떻게 보면 바벨론 땅에 있는 자들에게 고국의 멸망을 예언하는 것이 실익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행위 예언들을 통하여 멸망을 고지하시는 것은 이들 역시 예루살렘 멸망의 원인인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므로(2:3 ; 18:20) 그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어쩌면 이들은 자신들이 포로의 신분에서 해방되어 곧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지자는 이와 같은 예언들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지 않은 오도된 헛된 소망을 버리고 이곳 바벨론 땅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순히 받으며 하나님께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제시하시는 것이다.
네 가지의 상징적 행동 가운데 4:1-3의 토판 제작 행위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완전히 에워싸여 함락될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하며 4:4-8의 에스겔이 좌우편으로 누워 지내면서 이스라엘 족속이 범한 죄악을 대신 담당하는 행위는 그들이 사로잡힐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하고, 4:9-17의 부정한 떡을 먹는 행위는 장차 예루살렘이 극심한 기근, 곧 먹을 음식이 없어서 혹독한 고통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하고, 5:1-4의 터럭 분산 소각 행위는 유다 백성 삼분의 일이 성의 함락을 통해 온역과 기근으로 죽고 삼분의 일이 칼에 베임을 당해 죽고 나머지 삼분의 일이 흩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징적 행위에는 모두 에스겔 선지자의 고난이 수반된다. 그는 사람들에게 미쳤다고 능멸을 당할 만한 기이한 행위들을 하면서까지 여호와의 메시지를 전해야 했다. 그것은 여호와의 사역자들이 어떤 자세로 복음 사역을 감당해야 할 것인지를 교훈해 준다. 그들은 하나님이 무엇을 지시한다 할지라도 그대로 순종하는 태도로 복음 사역에 임해야 한다. 창조주이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명령을 피조된 인간이 자기 소견의 틀에 맞추어 선별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 위에 올라 서려는 교만한 태도인 것이다.
그러나 에스겔은 그러한 행위들을 거부하지 않았으며 또 그것으로 자신이 비록 조롱과 능멸을 당한다 할지라도 가감없이 실행함으로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마땅히 취할 합당한 태도를 보여준 것이다.
1. 너 인자야 토판을 가져다가 그것을 네 앞에 놓고 한 성읍 곧 예루살렘을 그 위에 그리고
"너 사람아, 너는 이제 흙벽돌을 한 장 가져다가 네 앞에 놓고, 한 성읍 곧 예루살렘을 그 위에 새겨라.
1-3절까지는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로 하여금 마치 어린 아이들이 하는 소꿉장난과 같이 토판 그림을 제작하는 행위를 통해 예루살렘의 포위와 함락의 사실을 예언하라고 명령하시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에스겔의 이러한 순종은 이를 목도하는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미래에 이루어질 예루살렘 심판 사실을 보다 생생하게 각인시켜 주었을 것이다.
선지자의 이러한 행동이 이채로운 면도 있는 것이 사실이나 이는 결코 낯설거나 유별난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바벨론 지역에서의 고고학적 발굴품들 중에 그 표면에 지도나 어떤 건축물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벽돌이나 기와 등이 무수히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Craigie).
여기에서 ‘토판’으로 번역된 ‘레베나’는 진흙을 빚어 만든 평평하고 앓은 토판이다. 앗수르와 바벨론 사람들은 그 위에 개인적인 계약서나 역사적인 기록, 혹은 기타 다양한 자료들을 기록하여 보관하였으며,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그런 것들이 많이 발견되었다(Feinberg).
에스겔이 토판에 무언가를 새기는 것 자체는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토판에 새긴 것은 바벨론 포로민들에게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사랑하는 성읍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 눈에 그가 토판에 새기는 성읍이 자기들이 그토록 애절하게 사모하며 소중히 여겼던 예루살렘임을 알아보고 이후 에스겔이 행하는 행동에 더 큰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을 것이다.
2. 그 성읍을 에워싸되 그것을 향하여 사다리를 세우고 그것을 향하여 흙으로 언덕을 쌓고 그것을 향하여 진을 치고 그것을 향하여 공성퇴를 둘러 세우고
그 다음에 그 성읍에 포위망을 쳐라. 그 성읍을 공격하는 높은 사다리를 세우고, 흙 언덕을 쌓고, 진을 치고, 성벽을 허무는 쇠망치를 성 둘레에 설치하여라.
본문은 예루살렘이 공격을 받되 거주민들이 외부로 도망가거나 양식이나 혹은 기타 물자를 공급받을 수 없도록 철저하게 포위되어 궁지에 몰린 상황이 될 것임을 나타내도록 하라는 명령이다.
에스겔 선지자가 이와 같은 하나님 명령을 수행한 상징적 행위로 예루살렘성을 에워싼 시점은 B.C. 593년으로서 유다에서는 시드기야 재위 제5년째였다. 당시 바벨론으로 끌려온 사람들은 이미 두 번의 포위와 포수(B.C. 605년, 597년)를 경험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에스겔의 그러한 상징적 행위가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당할 마지막 포위(B.C. 588년, 시드기야 재위 제9년)는 예루살렘을 완전히 멸망(B.C. 586년)으로 이끌 포위가 될 것이다. 에스겔은 그 사건이 일어나기 약 5년 전에 그것을 알리는 상징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이제 더 이상 예루살렘에 희망이 없음을 포로민들에게 미리 선언하였던 것이다.
3. 또 철판을 가져다가 너와 성읍 사이에 두어 철벽을 삼고 성을 포위하는 것처럼 에워싸라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리라
너는 또 철판을 가져다가 너와 그 성읍 사이에 철벽을 세워라. 그 도성을 포위하고 지켜보아라. 네가 그 도성을 포위하고 있거라.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 주는 징조다.
에스겔이 연기하는 무언극에서 맡은 배역은 하나님이다. 에스겔이 예루살렘 성의 포위 장면을 연출했을 때, 사람들은 곧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예루살렘을 지켜 주시고 적의 공격을 막아 주실 것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에스겔은 스스로가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는 연기로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적이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임을 보여 주었다.
에스겔의 소끌장난과 같은 이 행위를 본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이를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고 지나치거나 어리석은 행 동으로 비웃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약 5년 후 실제로 그 일이 발생하여 예루살렘성 이 포위된 지 2년이 채 되지 않아 바벨론 군대에 의해 완전히 함락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33: 21).
4. ○너는 또 왼쪽으로 누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짊어지되 네가 눕는 날수대로 그 죄악을 담당할지니라
너는 또 왼쪽으로 누워서,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네 몸에 지고 있거라. 옆으로 누워 있는 날 수만큼, 너는 그들의 죄악을 떠맡아라.
앞선 1-3절은 예루살렘성이 포위 당할 것을 상징하는 토판 그림 제작 명령이었다. 이어지는 4-8절은 선민의 범죄 기간과 심판 기간을 상징하는 좌 · 우편 모로 눕기 명령이다.
이러한 본단락에서 좌 · 우편 모로 눕는 기간인 390일과 40일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그러나 그중 이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는 그만큼 이 본문이 난해하여 그 의미를 무엇이라 단정짓기 어렵기 때문이다. 성경 자체에서 제시되는 해석의 원칙은 하루를 일년으로 계산하는 것이다(5,6절). 그러므로 390일은 곧 390년이 되며, 40일은 곧 40년이 된다. 또한 390년은 북이스라엘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40년은 남유다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숫자의 구체적인 의미에 대한 대표적인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칼빈(Calvin)은 390년에 대해, 북왕조 여로보함이 반역한 B.C. 930년부터 예루살렘이 황무한 B.C. 539년까지를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로는 북이스라엘이 그 창건자 여로보암이 르호보암에게 반기를 든 때부터 계속 율법을 어기고 이방의 미신과 우상을 따르는 등 여호와 하나님 앞에 죄악을 범했다는 것을 제시한다. 그러나 남유다와 관련된 40년이 어떤 성격의 기간인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견해를 제시하지 못한다.
짐멀리(Zimmerli)는 390년이 솔로몬의 등극해인 B.C. 975년부터 예루살렘 멸망의 해인 B.C. 586년까지 모두 389년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쿠퍼(Cooper)는 390년과 40년을 더한 430년을 기준으로 계산하는데, 전통적인 견해와 달리 에스겔이 제2차 포로로 끌려온 B.C. 597년부터 마카비 반란이 일어난 B.C. 167년까지의 총 430년의 기한을 지칭한다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혹자는 430년을 과거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았던 기간을 대표하는 시간으로 생각하며, 어떤 특정 기간을 지칭하기보다 이스라엘 족속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패역한 모든 기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또한 헬라어 구약 성경 번역본인 칠십인역(LXX)은 에스겔이 누웠던 모든 날수를 다 합한 기간을 190년이라고 기록하고 북이스라엘을 위한 기간은 150년이고, 남유다를 위한 기간은 40년이라고 한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면 북이스라엘의 경우 그 150년은 앗수르의 디글닷빌레셀(Tiglath-pileser)이 북이스라엘을 공격하여 맨 처음 포로 이송을 시작한 B.C. 734년부터 유다 예루살렘이 멸망한 B.C. 586년까지의 약 148년이 되며, 남유다의 경우 40년은 대략 한 세대를 대표하는 기간으로서 예루살렘이 멸망한 B.C. 586년부터 해방의 기틀이 마련된 B.C. 539년까지 대략 47년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혹자는 여기에서 합산한 430년의 기간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한 B.C. 967년부터 예루살렘이 완전히 황폐화되었던 기간이 마쳐진 B.C. 539년까지의 428년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위에 제시한 여러 견해들 가운데 어느 한 견해도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해 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우리는 그 기간이 정확히 언제인지를 규명하는 것보다 에스겔이 자기 동족들의 죄악을 대신하여 고난을 당했다는 사실 및 그들이 여호와 앞에 범죄한 시간이 결코 짧지 않았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길 필요가 있다. 나아가 북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서는 390일 동안 누워야 하는 반면, 남유다의 죄악에 대해서는 40일 동안 누워야 한 것은 두 왕국이 죄악의 경중에 있어 상당한 차이를 지니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실제로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반란을 일으켜 B.C. 722년에 멸망할 때까지 단 한 사람의 의로운 왕도 일어나지 않아 왕조 내내 우상 숭배와 타락이 끊이지 않았다. 반면 남유다의 경우에는 히스기야, 요시야 등 다윗의 길을 따라 여호와 앞에 정직하게 행하며 위대한 종교 개혁을 단행한 왕들올 비롯하여 아사, 웃시야, 여호사밧 등 비교적 여호와의 뜻대로 행하려고 노력한 왕들이 북왕국에 비해 많았다. 사실상 남유다가 북왕조보다 약 140년 정도 왕국의 생명을 더 연장할 수 있었던 것도 그와 같은 차이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에스겔이 무려 430일 동안이나 누워 있었는데, 밤에는 집에 들어가 갔을 것이며, 오직 낮에만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아울러 이는 그가 그 기간 중에 먹을 것이나 마실 것을 위하여 준비하거나 몸을 움직이는 일을 전적으로 하지 않고 오로지 누워만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 기간 중 그가 해야 할 다른 일들 곧 활동하고 말하며(7절)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준비하는 등(9-17절)을 포함한 일들이 있었다는 것은 매우 명확한 사실이다(Craigie).
아울러 에스겔이 왼편으로 누웠다는 것은 사실상 자기 몸을 북쪽으로 향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고대 근동에서 왼편은 북쪽과 동일한 방향이었고, 오른편은 남쪽과 동일한 방향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의 몸과 얼굴이 해가 뜨는 방향인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로부터 방향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동쪽을 향하고 있는 상태에서 양팔을 좌우로 뻗었을 경우, 왼편은 북쪽이 되며, 오른편은 남쪽이 되는 것이다. 왼편, 즉 북쪽은 북이스라엘을, 오른편, 즉 남쪽은 남유다를 각각 상징한다. 그리고 에스겔이 오랜 기간동안 한쪽 방향으로만 계속 누워 있어야 했던 것은 앞서도 다룬 것처럼 자기 동족의 죄악 때문이었다.
에스겔이 동족의 죄악올 짊어지고 고난을 당한 것은 장차 메시야가 인류의 죄악을 지고 대속 고난을 당할 것을 예표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메시야의 경우 자신의 희생을 통해 인류의 죄과를 없애 주셨지만, 에스겔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의 고난이 ‘대속 고난’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가 고난 당함으로써 자기 동족의 재앙을 면제해 주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유다 백성들 각자는 자신들의 죄악에 대한 비참한 결과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에스겔이 좌편과 우편으로 누워 자기 동족의 죄악을 담당한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것은 아마도 그들의 죄악의 결과를 그 자신도 직접 함께 경험해 본다는 의미이며, 나아가 그들의 죄악을 그들이 분명히 알 수 있도록 그들에게 드러내 보여준다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5. 내가 그들의 범죄한 햇수대로 네게 날수를 정하였나니 곧 삼백구십 일이니라 너는 이렇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고
나는 그들이 범죄한 햇수대로 네 날 수를 정하였다. 그러니 네가 삼백구십 일 동안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떠맡아야 할 것이다.
6. 그 수가 차거든 너는 오른쪽으로 누워 유다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라 내가 네게 사십 일로 정하였나니 하루가 일 년이니라
이 기간을 다 채운 다음에는, 네가 다시 오른쪽으로 누워서, 유다 족속의 죄악을 사십 일 동안 떠맡고 있거라. 나는 너에게 일 년을 하루씩 계산하여 주었다.
7. 너는 또 네 얼굴을 에워싸인 예루살렘 쪽으로 향하고 팔을 걷어 올리고 예언하라
너는 이제 예루살렘의 포위망을 응시하면서, 네 팔을 걷어붙이고, 그 성읍을 심판하는 예언을 하여라.
8. 내가 줄로 너를 동이리니 네가 에워싸는 날이 끝나기까지 몸을 이리 저리 돌리지 못하리라
내가 너를 줄로 묶어서, 네가 갇혀 있는 기한이 다 찰 때까지, 네가 몸을 이쪽 저쪽으로 돌려 눕지 못하도록 하겠다.
9. ○너는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리를 가져다가 한 그릇에 담고 너를 위하여 떡을 만들어 네가 옆으로 눕는 날수 곧 삼백구십 일 동안 먹되
너는 밀과 보리와 콩과 팥과 조와 귀리를 준비하여 한 그릇에 담고, 그것으로 빵을 만들어 네가 옆으로 누워 있는 삼백구십 일 동안 내내 먹어라.
패역한 선민의 대언자로 부름을 받은 에스겔을 향하여 예루살렘의 심판과 멸망의 면면올 예고하는 네 가지 상징적 행위를 명령하는 4:1-5:4 가운데 9-17절은 장차 예루살렘 심판 멸망 전후에 있을 극심한 기근을 예고하는 세번째 상징적 행위를 다루고 있다.
즉 예루살렘성이 바벨론 군대에 완전히 포위 당하여 성밖으로 출입할 수 없는 상태로 인해 발생할 식량의 부족과 성 함락 이후 있게 된 침략군의 약탈은 실로 어떤 것도 남겨져 있지 않은 혹독한 고난의 자리로 그들을 몰아갔을 것이다. 이같은 극심한 기근을 예고하기 위해 본단락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부정한 떡을 취식할 것을 명하신 것이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제4차 공격을 받아 포위 당한 때는 시드기야 왕 재위 제9년 10월 10일이었으며, 그 상태는 그의 재위 제11년까지 계속되었고 그로 인해 그 마지막 해 4월 9일에 성내에 식량이 완전히 바닥나고 말았다. 여호와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선민 범죄 기간을 상징하는 390일의 옆으로 누워 있는 동안 제한적인 취식을 명령하심으로써 장차 예루살렘에 먹을 음식이 없어서 거민들이 고통을 당하는 날이 이를 것을 사람들에게 행동으로 예언하고자 하셨던 것이다.
본장에서 계속되는 에스겔의 상징적 행위들(1-3절 ; 4-8절 ; 9-17절)은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멸망 약 4-6년 전에 이미 예루살렘의 멸망을 이미 바벨론에 포로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생생하게 예고하기 위한 예언이자 경고라 할 수 있다. 이는 그의 백성들이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자기들의 죄악에서 돌이켜 회개하여 멸망을 피하도록 하려는 의도가 내포된 조치였을 뿐 아니라, 그들이 회개치 않아 예언대로 멸망을 당할 경우에도 그들이 몰라서 회개하지 못했다는 핑계를 대지 못하게 하는 조치였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의 의로운 선지자 에스겔이 고난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한편 본절은 에스겔을 향하여 여호와께서 주신 여섯 가지 곡물을 한꺼번에 섞어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명령이다. 혹자는 두 종자를 한 밭에 섞어 뿌리지 말라는 레 19:19와 신 22:9의 규례를 잡곡밥이나 잡곡떡을 먹는 것까지 포함하는 금지 규례로 해석하여, 본절의 행위가 율법에 저촉되는 행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상의 두 구절은 문자 그대로 한 밭(혹은, 땅)에 두 종류의 종자를 함께 뿌리지 말고 오직 한 종류의 종자만 뿌려 한 종류의 곡식만 자라게 하라는 명령이지, 곡물을 섞어 먹지 말라는 명령이 아니다. 곡물을 섞어 먹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허용된 일이었다(Feinberg). 단지 금지된 것은 부정한 음식을 먹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13절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부정한 떡’이라는 표현은 잡곡으로 만들어서가 아니라 율법에서 부정한 것으로 규정된 인분으로 구울 것이기 때문에 사용된 표현이다. 이러한 사실은 쇠똥으로 인분을 대신하라는 15절의 명령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즉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것이 부정하게 되면 그 음식은 먹을 수 없었으나, 여호와께서는 예루살렘의 기아(飢餓)에 관해 특별한 교훈을 주시기 위해 에스겔에게 13절에서 상식에 벗어난 명령을 특별히 내리신 것이었다.
한편 여섯 가지 곡물을 한 그릇에 담아 그것으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명령에는 장차 예루살렘에 입할 기아 상태가 극심할 것이라는 의미가 함의되어 있다. 특히 밀을 제외한 보리, 콩, 팔, 조, 귀리 등을 섞어 떡을 만들어 먹는 것은 식량이 극히 부족할 때에만 볼 수 있었던 광경이었다(Keil). 식량이 풍족할 경우에는 밀과 보리를 먹었을 뿐 콩이나 팥, 해리 둥 다른 곡물은 섞어 먹지 않았다.
특히 ‘콩’과 ‘팔’으로 떡을 만들 경우 맛이 좋지 않아서 심지어 개들조차도 입에 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Talmud). 그리고 ‘귀리’는 밀이나 보리에 비해 품질이 훨씬 떨어지는 곡물로서 일반적으로 가을에 파종해 봄에 수확하였다.
10. 너는 음식물을 달아서 하루 이십 세겔씩 때를 따라 먹고
너는 음식을 하루에 이십 세겔씩 달아서, 시간을 정해 놓고 먹어라.
11. 물도 육분의 일 힌씩 되어서 때를 따라 마시라
물도 되어서 하루에 육분의 일 힌씩, 시간을 정해 놓고 따라 마셔라.
12. 너는 그것을 보리떡처럼 만들어 먹되 그들의 목전에서 인분 불을 피워 구울지니라
너는 그것을 보리빵처럼 구워서 먹되, 그들이 보는 앞에서, 인분으로 불을 피워서 빵을 구워라."
13. 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여러 나라들로 쫓아내어 흩어 버릴 이스라엘 자손이 거기서 이같이 부정한 떡을 먹으리라 하시기로
주께서 또 말씀하셨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다른 민족들 속으로 내쫓으면, 그들이 거기에서 이와 같이 더러운 빵을 먹을 것이다."
14. 내가 말하되 아하 주 여호와여 나는 영혼을 더럽힌 일이 없었나이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스스로 죽은 것이나 짐승에게 찢긴 것을 먹지 아니하였고 가증한 고기를 입에 넣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래서 내가 아뢰었다. "주 하나님, 저는 이제까지 저 자신을 더럽힌 일이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저절로 죽거나 물려 죽은 짐승의 고기를 먹은 적이 없고, 부정한 고기를 제 입에 넣은 적도 없습니다."
15.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쇠똥으로 인분을 대신하기를 허락하노니 너는 그것으로 떡을 구울지니라
그러자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좋다! 그렇다면, 인분 대신에 쇠똥을 쓰도록 허락해 준다. 너는 쇠똥으로 불을 피워 빵을 구워라."
16.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예루살렘에서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리니 백성이 근심 중에 떡을 달아 먹고 두려워 떨며 물을 되어 마시다가
주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내가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의지하는 빵을 끊어 버리겠다. 그들이 빵을 달아서 걱정에 싸인 채 먹고, 물을 되어서 벌벌 떨며 마실 것이다.
17. 떡과 물이 부족하여 피차에 두려워 하여 떨며 그 죄악 중에서 쇠패하리라
그들은 빵과 물이 부족하여 누구나 절망에 빠질 것이며, 마침내 자기들의 죄악 속에서 말라 죽을 것이다."
[ 복있는사람, 2018년 11,12월호 ]
포위당한 예루살렘의 징조 ( 4:1-8 )
여기에서 선지자는 징표를 사용하여 '예루살렘이 에워싸인' 모양을 표현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것은 일종의 예언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1) 선지자는 흙벽돌(한글 개역에는 '박석')위에 예루살렘을 그리라는 명령을 받았다(1절).
예루살렘이 순결을 지키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그의 '손바닥에 새겼다'는 사실은 예루살렘의 명예였다(사 49:16).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각 지파들의 이름들이 대제사장의 흉패에 달린 보석에 새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신실한 성읍이 매춘보가 되어 버려 전혀 가치도 없는 박석이나 벽돌 위에 새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2) 선지자는 이 성읍 도면 둘레에 작은 성벽을 건설하고 포위한 자들이 만들어 세운 '공성퇴'를 만들어 놓으라는 명령을 받았다(2절).
그리고 그 성읍과 포위군 사이에 철벽을 본따서 철판(한글 개역은 전철)을 세우라는 명령도 받았다(3절). 이 철벽은 양측의 단호한 결의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갈대아 사람들은 정복할 때까지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다는 결심이었으며, 유대인들은 결코 포로는 될 수 없다는 결심이었던 것이다.
(3) 에스겔은 그 성읍 그림의 앞에 옆으로 누우라는 명령을 받는데 말하자면 그 성을 에워싸라는 명령이다.
이는 갈대아 군대가 그 성 앞에 진을 쳐서 모든 교통을 차단시키는 것을 상징한다. 그는 좌편으로 '삼백 구십일'을 누워있어야 했다(5절). 이것은 약 13개월에 해당하는데 예루살렘의 포위 기간은 약 18개월(렘 52:4-6)로 추정되어 5개월 정도의 차이가 난다. 그러나 애굽의 바로의 군대가 진격해 와서(렘 37:5-8) 포위군들이 잠시 철수했었던 5개월을 빼면 완전히 포위되었던 기간은 삼백 구십일 정도가 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것은 또한 삼백 구십일은 삼백 구십 년을 의미한다는 다른 의미도 가지고 있다. 선지자가 옆으로 그렇게 삼백 구십일을 누워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집이 즉 열지파가 삼백 구십 년 동안 지었던 죄책을 감당하는 것이다. 여로보암의 통치 아래 그들이 처음으로 변절했던 시기부터 예루살렘의 멸망까지의 기간을 계산하면 삼백 구십 년이 된다.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유다에 빌붙어 살고 있었던 약간의 이스라엘 잔류 백성들은 완전히 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우편으로 사십 일 동안 누워있어야 했다. 이는 유다의 집의 죄악, 두 지파로 된 왕국의 죄악을 견디는 기간을 나타낸다. 이 사십일은 그들의 죄가 포로되기 전 마지막 사십년 동안에 해당하는 것임을 나타낸다. 요시아라는 선한 왕과 예레미야라는 훌륭한 선지자를 가지고 있었던 유다 왕국은 이스라엘이 했던 것보다 훨씬 짧은 기간에 자기의 죄악의 양을 채웠던 것이다. 여기서 선지자가 밤낮으로 누워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고 하루 중 정해 놓은 어떤 시간 동안만 매일 누워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를 찾아온 사람들은 그가, 좌편으로 삼백 구십일, 우편으로 사십일 동안 누워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것이 예루살렘 성의 포위를 의미하는 것임을 이해하였을 것이다.
(4) 에스겔은 그 포위를 굳게 지키라는 명령을 받는다(7절).
너는 또 에워싼 예루살렘을 향하여. 이는 지금 갈대아인들이 하듯이 모든 생각을 거기에 집중하라는 의미이다. 느부갓네살은 자기와의 동맹을 깨뜨린 시드기야의 배신에 매우 분개하여 이번 포위를 더욱 굳게 하여 신의없는 왕과 백성들을 정벌하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갈대아 군대는 포위에 만전을 기하였다. 선지자는 그의 팔을 걷어 붙이고 나섬으로써 이를 나타내었다. 이사야 52:10에는 '여호와께서 그 팔을 나타내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간단히 말해서 갈대아 사람들은 자기들의 일을 끝까지 관철시키고자 결심하고 성심껏 노력하는 사람들처럼 진행할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하나의 징조'로 나타내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다(3절). 즉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있는 자들이나 고국에 남아있는 자들에게 공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선지자는 벙어리가 되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겔 3:26) 하나님께서는 증거하지 않도록 내버려두시지 않고, 징조를 만들어서 자기의 마음(곧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무감각과 어리석음에 빠져 아동들처럼 그림으로 배워야 하는 백성들에게 나타내 알게 할 것을 그에게 분부하셨다.
혹은 그리스도께서 비유를 사용해서 말씀하셨던 이유과 똑같이 선지자가 징조를 사용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선지자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예언하였다(7절).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제시될 때 훨씬 깊은 감동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경우는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형상이 말이 줄 수 있는 것 이상의 깊은 감동을 주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거룩한 일들을 예시하기 위하여 성례식이 제정되어 있는 것이다. 상상력이 바르게 사용되어 진다면 그리고 그것이 이성과 믿음의 지시와 훈도를 받는다면 경건한 사랑을 타오르게 하는데 유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공상이란 불과 같아서, 선한 종이 되기도 하며 악한 주인이 되기도 한다. 이일 전체가 유치한 듯하고 피곤한 일처럼 보이지만,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안락은 희생시켜야 하며, 하나님께 봉사는 일을 결코 어려운 일이라 불러서도 안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성읍인 예루살렘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이 선지자에게는 대단히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는 한 사람의 선지자로서 자기가 즐겨하는 것을 따를 것이 아니라 받은 지시를 따라야 하는 몸이요, 그가 진심으로 바라고 있는 바는 예루살렘의 흥왕이지만 죄가 많은 땅은 반드시 멸망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전파하여야 하는 몸이었다. 선지자 에스겔이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하여 그 백성의 자손들 앞에 보여주는 이 모든 것은 그들로 회개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형벌의 하루는 죄의 일년에 해당한다. 내가 네게...정하였나니 일일이 일년이니라. 포위는 삼백 구십일 동안의 재앙이었다.
기근의 예고 ( 4:9-17 )
예루살렘의 파멸에 대한 에스겔의 예언 중 이 부분에 대하여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하여 슬퍼하는 예레미야의 애가에 잘 표현되어 있다(애 4:3,4;5:10).
(1) 선지자 에스겔은 다가올 기근에 대하여 미리 보여 줌으로써 백성들에게 자극을 주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삼백 구십일 동안 질이 좋지 않은 음식에 부족한 식량, 볼품없는 의복으로 생활해야 했다. 이는 예루살렘 성읍의 백성들에게 음식물과 연료가 떨어질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1) 에스겔이 먹는 음식은 밀과 보리, 콩과 팥, 조와 귀리로 만든 아주 질이 안좋은 떡이었다. 이는 말이나 돼지에게 사료로 주는 먹이와 같은 것이었다. 또한 거지들이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얻은 것을 섞어놓은 것 같은 것이었다(9절).
2) 선지자는 하루에 이십 세겔 무게의 떡만을 먹어야 했다(10절). 이는 약 십 온스에 해당하였다. 그리고 물도 육분의 일 힌씩만 마셔야 했다. 이것은 팔 온스에 해당하는 반 파인트였다(11절). 선지자는 바벨론에서 충분히 먹고 남을 만한 식량을 가지고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예언을 확증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의 징조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그에게 이렇게 궁핍하게 살도록 지시하신 것이다. 자연은 적은 것에도 만족하고 은혜는 보다 적은 것에도 만족하나, 욕망은 어떤 것에도 만족할 줄 모른다. 반드시 절약해야 할 경우를 대비해서 그러한 상황을 잘 견뎌낼 수 있도록 일부러 절제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3) 선지자는 인분으로 떡을 구워야 했다(12절). 그 인분은 그릇을 데우기 위한 연료로 사용되어야 했다. 선지자는 이런 식으로 구워진 형편없는 떡을 마치 '보리떡처럼' 먹어야 했다. 에스겔은 이런 메스꺼운 떡쪼가리를 사람들의 '목전에서' 공개적으로 먹여야 했으니, 이는 그들로 다가올 재앙에 대하여 더욱 깊이 느끼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심한 기근이 닥쳐오면 맛있는 진미는 고사하고 음식이란 구경도 못하게 될 것이다.
4) 징조를 보여주어야만 하는 상황에서도 선지자는 인분으로 떡을 구워야하는 일은 제외하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기를 겸손히 원하였다(14절). 그러한 일은 의식법상 부정한 것이었던 것처럼 보였다. 율법 중에는 인분은 흙으로 덮어야 한다는 법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처소에서 더러운 것을 일체 보지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신 23:13-14). 그런데 에스겔이 가서 그토록 비위를 상하게 하는 물건을 끌어 모아다가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가 먹을 음식을 요리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는 말인가? 에스겔은 말한다. 오호라 주 여호와여 나는 영혼을 더럽힌 일이 없었나이다. "이 일로 내 영혼이 더럽혀질까 두려워하나이다." 죄로 말미암아 영혼이 더럽혀지는 것은 선량한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바이다. 그렇지만 예민한 양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때때로 합법적으로 적당한 일인데도 여기서의 선지자처럼 까닭없이 주저하고 두려워한다. 이 선지자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아직까지는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던 것이다(마 15:11). 에스겔이 양심이 매우 예민해서 이 문제를 가지고 우물쭈물하자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제거해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인분 대신에 쇠똥을 사용해도 좋다고 에스겔에게 양보하셨다(15절).
(2) 이 징조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징해준다.
1)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자들은 생필품의 결핍으로 극단적인 도탄에 빠지게 될 것이다. 포위군들로 인해서 공급품이란 공급품은 죄다 끊어질 것이며 예루살렘 성내에서는 떡부스러기조차 떨어질 것이다(16절). 남아있던 사람들 중에 대부분이 기근으로 죽되 죽어가는 것을 느끼면서 서서히 죽게 될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 이러한 슬픈 재앙을 가져오는 것은 바로 죄이다. 백성이...그 죄악 중에서 쇠패하리라(17절).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서 우리의 정욕의 양식과 연료로 삼는 쾌락들을 빼앗아 가시는 일은 정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이방인들 중에서 강제로 부정한 떡을 먹게 되리라는 사실을 상징해 준다(13절). 유대 교회의 율법에 따라 만든 음식이 아니라, 부정하다고 교육을 받아온 이방인의 음식을 먹게 되리라는 것이다. 또는 그들을 포로로 잡아간 사람들이 노예에게 주는 음식이나 이전에는 만지기도 꺼려했던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뜻일 수도 있다.
출처 ; 메튜헨리 주석
심판의 세 상징 ( 4장 )
앞 장인 제삼장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패역한 족속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그들의 죄악을 지적하여 회개하게 하려고 보낸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도 핍박하는 악한 백성임을 말하였습니다. 본장에서는 그처럼 악한 유다 백성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멸망을 당하고 고통을 받을 것을 세 가지 행동의 비유를 통해 예언하고 있습니다.
1. 전쟁의 징조
1) 바벨론의 침공
예레미야는 사람들 앞에서 박석과 흙을 가져다가 예루살렘 성이 적군에게 포위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모형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이 한 나라에 의해 침공을 받아 포위당할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성을 공격하여 포위한 나라는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은 세 번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세 번이나 예루살렘을 에워쌌습니다. 이로 보건대 예레미야의 행동은 바벨론의 침공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될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a.바벨론 침공 예언(렘38:3)
b.하나님의 도구(겔17:20)
2) 예루살렘의 함락
예레미야는 바벨론군이 예루살렘 성을 에워싸는 모형을 만들 때 성 앞에 운제와 토둔, 공성퇴 및 전철을 세웠습니다. 운제는 성안에 있는 적의 동정을 살피는 망루이고, 토둔은 성으로부터 날아오는 화살을 막는 동시에 높은 위치에서 성안으로 활을 쏠 수 있도록 성 주위에 쌓은 인공 산입니다. 공성퇴는 오늘날의 대표와 같은 것이며 전철은 과자를 굽는 후라이팬과 같은 그릇입니다. 이 모든 것은 바벨론 군대의 가공할 힘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이 힘 앞에서 예루살렘 성이 함락될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 줍니다.
a.함락(렘39:2)
b.함락의 소식(겔33:21)
3) 살육
직접적으로는 드러나고 있지 않지만 바벨론군의 포위, 그 군대가 가진 강력한 군사력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 등의 상징은 모두 유다 백성이 바벨론군에 의해 패배함으로 무참히 살육 당할 것을 암시해 줍니다.
a.쳐죽임(왕하25:21)
b.살육(렘39:6)
2. 포로 됨의 징조
1) 누움
두번째 상징으로 예레미야는 밧줄에 동인 채로 누워서 왼쪽으로는 삼백구십 일 동안, 오른쪽으로는 사십 일을 꼼짝 못하고 눕습니다. 이 상징이 보여 주는 첫 번째 의미는 예루살렘이 전쟁 앞에서 무력하게 대처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레미야가 누워 있었다는 것이 그 상징입니다. 전사는 싸울 때 서서 달리며 싸웁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누워 있었으니 예레미야로 상징되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은 그 행동대로 무기력하게 있게 될 것입니다.
a.도망(왕하25:4)
b.비굴(렘35:5)
2) 줄로 동임
예레미야는 누워 있되 포승줄로 묶여 있었습니다. 이것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멸망당할 때에 무기력하게 멸망당하되 멸망당하고 나서도 승전국의 포로로 잡혀 갈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북이스라엘 앗수르에 의해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그들의 포로로 끌려 갔습니다(참조, 왕하17:6).
a.본토를 떠남(왕하25:21)
b.포로됨(렘39:9)
3) 날수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족속에 대하여는 왼편으로 삼백구십 일을 유다 족속에 대하여는 오른편으로 사십 일을 포승줄에 묶인 채 누워 있었습니다. 이 행동을 취한 기간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각각 삼백구십 년과 사십 년 동안 앗수르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있을 것을 의미합니다. 한편 하나님에서 이처럼 포로의 기간을 정하신 것은 첫째, 범죄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영원한 것이 아니며, 둘째, 하나님의 징계는 자기 백성을 회개케 함으로 더 나은 백성이 되도록 연단하는 기간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함입니다.
a.사백년 동안(창16:13)
b.하루를 일년으로(민14:34)
3. 기근의 원인
1) 기근의 원인
예레미야는 세번째로 그가 누워 있던 날수와 같은 날수 동안 곡식을 먹되 적은 양을 일정하게 달아 먹었으며 또 더러운 떡을 고의적으로 만들어 먹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들이 포위되는 날부터 다시 회복되는 날까지 배고픔의 고통을 당할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런 고통을 주신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배를 채워 주는 양식을 의뢰했기 때문입니다(참조, 렘4:16). 하나님은 이처럼 그들이 의뢰하는 양식을 끊음으로써 그들이 의뢰하는 양식이 의뢰할 것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동시에 그렇게 함으로써 양식이라는 우상을 숭배한 대가로 고통을 주시고 하셨던 것입니다.
a. 양식을 의뢰함(레26:26)
b.의뢰하는 양식(겔5:16)
2) 극심한 양식 부족
예레미야가 소량의 양식을 저울에 달아 일정량을 먹었다는 것은 양식이 극심하게 부족할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 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은 포위되던 날 배급된 양식을 먹었으며 급기야는 그것도 없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고통을 참아야 했습니다. a.양식이 진함(왕하25:3)
b.아미를 먹음(왕하6:29)
3) 부정한 양식
예레미야는 말린 똥으로 구운 떡을 먹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이 굶주릴 때에 양식을 구워 먹을 연료가 없어 사람의 똥을 말린 것으로 연료를 삼아 양식을 구워 먹을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피하는 부정한 것입니다. 그들도 그러한 것을 기피함으로 자신들이 거룩한 백성이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러한 더러운 것으로 만든 부정한 것을 먹게 만들므로 그들의 잘못된 정결 의식에서 깨어나도록 의도하셨습니다.
a.부정한 자는 허물이 있음(레5:2)
b.위선(사65:4-5)
결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육신을 위한 삶을 살면 그 결과는 본장의 세 상징이 보여 주는 것처럼 전쟁과 기근에 의한
죽음과 고통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하여 헛되고 무익한 세상 것을 의뢰하여 고것을 추구하지 말고 오직 인생의 참된 의뢰자가 되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의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하겠습니다.
출처 ; 메튜헨리 주석 <청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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