겔-1, 에스겔의 기본 이해
바벨론 포수지에서 선포된 남유다의 패망과 회복 예언 및 종말론적 선민 왕국의 환상
무릇 모든 예언 행위와 그 기본 주제는 각 예언이 선포되던 당시의 시대 배경이나 그 예언의 일차 수신자들의 상황과 필연적으로 상관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구약 예언서들올 연구하고자 할 때에 무엇보다 먼저 그 시대 배경과 그 일차 수신자들의 정황이 어떠했는가를 살펴 보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서를 살펴보기에 앞서 보다 폭넓은 시야를 갖기 위하여 소위 구약 4대 예언자들의 주요 활동 장소와 시기를 간략히 비교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이샤야 : 남유다, B.C. 740-680
•예레미야 : 남유다, B.C. 627-561
•에스겔 : 바벨론 델아빕, B.C. 597-571
•다니엘 : 바벨론, B.C. 605-536
이사야(Issaiah)는 다른 세 선지자들에 비하여 거의 삼 · 사 세대를 앞서 있는 반면 예레미야(Jeremiah)와 에스겔(Ezekiel)은 거의 동시대에 활약하였고 다니엘(Daniel)은 활동 개시 시점은 비슷하지만 본격적 활동 시기와 종료 시점상으로는 약 한 세대 정도 후대에 활동하였다. 그리고 시기상 서로 가장 근접한 시기에 활약한 예레미야와 에스겔도 보다 정확히 살펴보면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즉 예레미야는 거의 모든 활동이 B.C. 5861년의 예루살렘 멸망 이전과 그 직후에만 집중되어 있는 반면 에스겔은 그 이전과 그 이후에 걸쳐 고르게 활동하였다. 또한 주요 활동 장소의 측면에서는 이사야와 예레미야가 선민의 영원한 수도인 유다 땅 예루살렘에서 활동한 반면 에스겔과 다니엘은 바벨론 포수지에서 활동하였다. 보다 정확하게는 에스겔은 바벨론 제국의 남부 지방의 유다인 포로 공동체 안에 살면서 활동하였고 다니엘은 바벨론 제국의 수도였던 바벨론 도성에서 제국 중앙 정부의 고위 관료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다.
이와 같은 구약 4대 예언자들의 시대척, 공간적 차이는 그들이 기록한 예언서들이, 모든 구약 예언의 양대 분수령이라 할 수 있는 B.C. 586년의 예루살렘 멸망과 B.C. 538년의 유다인 포로 해방을 중심으로 드러내 보이는 동일성과 다양성의 근본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양대 사건과 가장 멀리 떨어진 시대의 이사야서는 비단 이 양대 사건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이를 기점으로 시작된 신약시대, 그리고 종말론적 메시야 왕국에 이르기까지 가장 폭넓은 스펙트럼의 예언을 그 유명한 미려한 필치로 파노라마식으로 펼쳐보인다.
또한 예루살렘 멸망 이전에도 활약하기는 하였으나 본격적으로는 포로시대 중 · 후반기에 바벨론 황실(皇室)을 배경으로 예언하였던 다니엘이 남긴 다니엘서는 물론 여호와의 선민(選民) 이스라엘 민족을 그 중심축에 두면서도 인류 역사 전체가 영원한 종말론적 메시야 왕국에 이르는 단계별 과정과 각 단계별 핵심 세력의 정체 그리고 각 시대의 대사건들을 매우 웅대한 스케일로 예언하고 있다.
반면 예레미야서와 에스겔서는 기본적으로는 양자 모두 예루살렘 함락을 정점으로 한 남유다의 패망과 B.C. 538년의 바사 왕 고레스의 칙령을 기점으로 한 선민의 회복 사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면서도 또다시 예레미야서가 예루살렘 현장에서 예루살렘 함락 이전의 상황에 주로 치중하여 이들 양대 사건의 면면들을 예언하고 있는 반면 에스겔서는 선민을 향한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심판이 집행될 현장인 가나안 본토(本土)에서 멀리 떨어진 바벨론 포수지에서 그 예루살렘 함락 이전과 이후의 상황을 골고루 반영하고 있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두 책 사이의 차이는 추후 설명될 두 책 사이의 뚜렷하고도 다양한 차이로 나타나고 있다. 어쨌든 이러한 4대 예언서들간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발견하고 동시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각 예언서들 고유의 메시지를 인식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작업인 동시에 구약 예언서 전반에 담긴 하나님의 섭리와 교훈을 입체적으로 깨닫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이제 관심을 본서에 집중하여 보자면 에스겔서는 저자 에스겔이 그의 나이 30세 되던 해에 장엄한 영광의 형상으로 현현(顯現)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선지자의 소명을 처음 받았던 B.C. 593년부터 그의 나이 52세 되던 해인 B.C. 571년까지 22년간 주어진 여호와의 예언 계시를 기록한 책이다.
이 시기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한 722년으로부터 130여 년이 지난 때였다. 또한 남왕국 유다도 바벨론 제국의 제4차 침입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됨으로써 마침내 완전히 패망한 B.C. 586년을 전 · 후한 시기였다. 바멜론 제국은 예루살렘을 초토화시켜 남유다 역사를 완전히 종결시켜버린 이 제4차 침입 이전에도 남유다에 대한 대규모 공세만 B.C. 605년, 그리고 B.C. 602년과 597년 등에 걸쳐서 세 차례나 감행하였었고 그때마다 남 유다의 종교 지도자, 관료, 군인, 각종 기술자, 유력 가문 자제 등 유력 인사들을 일종의 볼모이자 포로로 자신들 제국의 수도인 바벨론과 통제 가능한 인근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었다.
에스겔 자신도 이중 제2차 포수에 해당하는 B.C. 597년에 25세의 나이로 남유다의 유력 가문 출신 즉 사독 계열 제사장 가문의 부시의 아들로서 바벨론으로 끌려온 강제 이주민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 이들 유다 출신 포로들은 대부분 유프라데스강의 주요 지류인 그발 강가의 닙푸르(Nippor) 근처의 임시 정착촌에 배치되었다. 아마도 이들은 유프라테스강과 바벨론 주요 도시들을 연결시키는 대규모 운하 공사에 동원되었을 것이다. 에스겔이 처음 예언 활동올 시작한 B.C. 593년은 그가 바벨론으로 잡혀온 이후 5년여 지난 때였고. B.C. 586년의 남유다 패망까지는 아직 약 7년이 남아 있던 때였다. 에스겔은 이때부터 시작하여 B.C. 586년 이전에는 7년간 그리고 이후에는 15년간 선지자로서 고루 활동하였다. B.C. 586년은 남유다가 여호와의 심판으로 마침내 완전히 패망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결정적 분기점이 된 시점이었으므로 그 이전과 이후의 예언은 뚜렷한 대비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또한 에스겔은 자신의 예언서를 거의 대부분 각 예언이 주어진 순서대로 정리 배열하였다. 따라서 에스겔의 예언 활동 자체는 물론 그가 기록한 에스겔서도 B.C. 586년을 기준으로 전기의 심판 관련 예언과 후기의 회복 관련 예언으로 뚜렷이 구분되어 있다.
B.C. 593년에서 586년까지의 7년간은 에스겔의 예언 활동의 전반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는 이제 남유다가 더 이상 돌이킬 가능성조차 없이 오직 멸망으로 향하여 치달아가는 시기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계시된 에스겔서의 전반부 예언은 자연히 남유다의 심판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이 전반부 심판 관련 예언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선민 전체를 향한 것이었으나 당장 일차적으로는 에스겔과 함께 포로로 본토에서 끌려와 바벨론에서 살아가고 있던 당시의 포수민들을 향하여 선포된 예언들이었다. 즉 에스겔은 이제 자신들의 고국은 더이상 걷잡을 수 없는 멸망의 길에 접어들었고, 자신들은 이방 땅에서 아직 온전히 뿌리내리지 못한 채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고 있던 바벨론 유다 포로 공동체를 향하여 자신들 고국의 불가피한 멸망을 예언하면서 그 진정한 원인과 결과를 직시하고 이를 수용하는 바른 자세를 갖추도록 이끌고 있다.
당시 남유다가 끝내 하나님께 심판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게 만든 근본 원인은 선민의 정체성과 축복의 근원인 여호와 절대 순수 신앙의 변질과 타락이었다. 이것은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극단적 양상으로 표출되었다.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주변 강대국이나 그들 나라의 우상을 자기들의 신으로 섬기는 영적 반역 또는 간음 행위였다.
둘째는 선민으로서의 영적, 도덕적 순결과 의무는 내팽개친 채 다만 여호와의 성전(聖전)이 자신들에게 있으므로 유다는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맹신하는 형식주의적 미신적 신앙 행태였다.
에스겔 전반부는 바로 이런 왜곡된 시대 정신에 물들어 있던 바벨론 포수민들을 향하여 이제 남유다는 여호와의 심판으로 필연적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면서 그 심판 멸망의 주요 측면들을 예언하였다. 그리하여 이를 통하여 특히 바벨론 포수민의 입장에서 남유다 멸망의 전과정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바탕 위에서 그 시대의 최선책을 강구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즉 남유다는 이제 여호와 앞에서 범죄하여 돌이킬 길없이 필히 멸망할 것이므로 더이상 머지 않아 본토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부질없는 기대를 품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쳤다. 동시에 여호와는 선민의 범죄를 미워하시고 선민이 역사상 한 시기에 세웠던 나라를 무너뜨림으로써 일시적으로 정벌하신 것이지 아예 선민 자체를 영원히 버리신 것은 아니므로 이제 선민의 영광과 축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먼저 선민의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절대 순수 신앙에 바탕을 둔 바른 관계를 회복할 필요가 있음을 각성시키고 있다.
B.C. 586년에서 571년까지의 15년간은 에스겔의 예언 활동의 후반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는 이미 유다의 타락과 범죄에 상응하는 정벌은 예루살렘 함락을 정점으로 남유다가 멸망함으로써 현실로 실현된 이후이므로 이제 자연히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에 의한 선민의 회복에 초점이 모아졌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예언의 일차적 수신자의 범위가 이방 땅 바벨론에서 강제 이주민의 신세로 본토의 몰락을 지켜보아야만 하였던 기존의 바벨론 포수민 중심에서 최근 바벨론으로 새로 끌려온 제3차 포수민들과 본토의 남유다 잔류민들은 물론 전날 앗수르에 의해서 이미 패망하여 곳곳으로 흩어졌던 북이스라엘 출신까지 포함한 선민 전체로 확장된다.
이와 같은 에스겔의 후반기 회복 관련 예언들에서는 그 전반에 걸쳐서 당대의 남 · 북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 모든 시대의 성도가 결코 놓쳐서는 안되는 단순하고도 중요한 두 가지 신학적 명제(命題)가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서 반복 강조되고 있다.
첫째는 전날 선민의 패망은 그 자신들의 범죄에 대한 당연한 결과였으나 장차의 선민의 회복은 더이상 낮아질 수 없도록 낮아지고 이제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그 무엇하나 시도할 가능성조차 남아있지 않은 선민들의 어떠한 기여나 공로가 전혀없이 오직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와 주권적 섭리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명제이다.
이는 하나님 당신께서 선민의 주로서 당신의 양떼를 직접 키우시겠다는 의지의 표명과 오직 당신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선민을 회복시키겠다는 일방적 선언 그리고 당신의 선택된 백성이었으면서도 당신께 배역하고 패망한 이스라엘과 다시금 새 언약을 세우시겠다는 약속의 형태 등으로 수차 언급되고 있다.
둘째는 여호와께서 무조건적 은혜를 먼저 베푸사 선민이 회복될 길을 제시하기는 하나 선민 공동체와 그 안의 각 개인은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정결을 회복하여야만 비로소 그 축복에 온전히 동참할 수 있다는 명제이다.
이는 당신의 무조건적 회복의 은혜를 약속하시면서도 수차에 걸쳐서 여호와 당신을 향한 선민의 간구와 회개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함께 지적한 점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으로는 여호와께서 이 후반부의 말미에서 에스겔의 신비체험을 통하여 장차 선민이 들어갈 영원한 종말론적 왕국의 대환상을 보여주시면서 그 종말론적 선민 왕국의 본질을 여호와의 새 성전을 중심으로 새 제사가 드려지는 곳으로 묘사하셨다는 사실을 통해 선명하게 표출되고 있는데 이는 결국 선민의 모든 종말론적 축복도 오직 새 성전에서의 참제사를 통하여 여호와와의 바른 관계가 먼저 수립될 때에만 가능하다는 진리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 어떤 자구책이나 소망도 꿈꿀 수 없는 절망의 심연으로 떨어진 타락한 죄인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선도적으로 무조건적 은혜를 베푸셔서 구원의 길을 여시나 인생 각자는 순결한 믿음 위에서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정결을 회복할 때에만 여호와의 구원으로 인한 축복에 동참할 수 있다는 명제는 태초에서 종말로 이어지는 구속사의 근본 진리요 기본 패턴이다.
에스겔은 본서 전체에 걸쳐 자신을 인자(人子)라고 지칭하면서 일인칭 화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 각 예언이 주어진 시간순으로 본서를 기록하고 있음으로 해서 에스겔서는 자서전적 예언서 혹은 수납 일지형(受納 日誌形)예언서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한 본서에는 에스겔서의 트레이드 마크라고까지 할 수 있는 역동적이고도 찬란한 여호와의 영광의 현현에 대한 대환상, 골짜기의 마른 뼈들의 군대 소생 환상, 종말론적 왕국의 새 성전의 환상 등의 소위 에스겔서의 삼대 환상이 수록되어 있다. 그 이외에도 여러 환상과 상징적 행동들 그리고 많은 비유가 등장하며 또한 성경 고유의 종말론과 관련하여 여타 예언서들에서도 등장하는 주요 이미지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리하여 본서는 다니엘서, 스가랴서, 신약의 요한계시록과 함께 성경의 대표적인 묵시 문학(默示文學)작품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출처 ; 옥스퍼드 주석. pp. 24-27.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땅을 그린 14셰기 프랑스 사본 성경 삽화 ; 선민(選民) 이스라엘의 우상 송배로 더럽혀진 명으로부터 사라졌던 하나님의 영광이 종말론쩍 새 성전의 재건에 때맞추어 다시 동편에서부터 들어와 새 성전에 염원토륙 머무시리라고 에스웰은 장엄하게 선포했다(겔 43:1-5). ‘많은 물소리’ 같은 하나님의 융성이 그룹들의 나래질로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그렇다 ! 모든 빛의 근윈이신 하나님이 함께 하는 땅만이 진정으로 빛으로 충만한 공간일 수 있다.
겔-2, 에스겔의 내용 구조
본문 기타 기능
에스겔서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그 내용 구조를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에스겔서의 연대순 기록 형식에 따른 분류 방법이다. 에스겔은 자신의 예언서를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각 예언이 여호와로부터 계시된 시간순으로 배열하였다. 또 각 첫머리에 그 시점을 먼저 밝혀 두었다. 그래서 이를 기준으로 총 48장의 에스겔서 본문올 21편의 중 · 단편 예언집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둘째는 기본 주제별 분류 방법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남유다 패망 전 · 후 시대에 걸쳐 고루 주어진 예언들의 모음집인 에스겔서에서는 B.C. 586년의 남유다의 패망을 기점으로 하여 자연스럽게 그 이전에는 주로 심판 관련 예언이 그 이후에는 주로 회복 관련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를 기준으로 하면 에스겔서는 에스겔의 선지자 소명 장면을 기록한 서론부, 그리고 전반기 심판 관련 예언과 후반기 회복 관련 예언 등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전반기 심판 관련 예언과 후반기 회복 관련 예언은 각각 그 안에서 다시 전반부와 후반부 두 부분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상과 같은 두 가지 분류 방식을 함께 사용하면 에스겔서를 보다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먼저 첫째 방식에 따라 에스겔서 본문의 연대순 분류표를 제시하고 난 후에 주제별 분류에 따른 에스겔서의 내용 구성도 개략하였다.
여|루힐램 동문 / 소우| 황금의 문이라 볼리는 문으로 메시아가 이 문율 통해 성전에 들어간다는 유대인 들의 전통으로 인해 예루살렘올 점형했었던 아랍인들이 막아 열 수 없다. 메스겔은 여호와의 영광이 동 문을 통해 성전므로 롤어카는 흰상올 보았다(겔 44:1, 2).
에스겔 본문 연대순 분류표
1. 593년 4월 5일 - 여호와의 영광의 현현과 에스겔의 소명(1:1-3:15)
2. 593년 4월 12일 - 파수꾼 임무 강조, 예루살렘 함락 장면 및 우상 숭배 지적 등(3:16-7:27)
3. 592년 6월 5일 - 성전에서의 우상 숭배와 심판 집행의 환상(8-11장)
4. 592년 6월 5일 - 거짓 예언자들의 행위 지적과 심판 예언(12-13장)
5. ? 선민 멸망과 회복 과정의 개략과 심판의 개별성 지적 등(14-19장)
6. 591년 5월 10일 - 과거 타락의 역사와 현재 타락상 요약 및 칼과 두 여인의 비유 등(20-23장)
7. 588년 10월 10일 - 예루살렘 포위 당일의 예루살캠 최종 멸망 예언(24장)
8. ? 암몬, 모압, 에돔, 블레셋 등 주변 4국 심판 예언(25장)
9. 587년 10월 12얼 - 애굽에 대한 일차 심판 예언(29:1-16)
10. 586년 모월 1일 - 두로와 시온 심판 예언(26-28장)
11. ? 애굽 멸망의 애가(30:1-19)
12. 586년 1월 7일 - 애굽 바로의 패배와 백성의 이산 예언(30:20-26)
13. 586년 3월 1일 - 앗수르 멸망과 대비된 애굽 멸망 예언(31장)
14. ? 파수꾼 사명 재강조와 회개 촉구 말씀의 전달 명령(33:1-20)
15. 585년 10월 5일 - 예루살렘 함락에 즈음한 본토민과 포수민들 각각 경고(33:21-22)
16. ? 무조건적 은혜와 주권적 구원 행동에 의한 선민 회복 예언(34-37장)
17. ? 세상 끝날 선민의 최후 원수인 곡의 침략과 멸망 예언(38-39장)
18. 585년 12월 1일 - 애굽 왕 바로에 대한 애가(32:1-16)
19. 585년 모월 15일 - 애굽 백성들의 살육 예언(32:17-32)
20. 573년 1월 10일 - 절대 신앙의 회복을 중심한 종말론적 선민 왕국의 대환상(40-48장)
21. 571년 1월 1일 - 바벨론을 위한 보상으로서의 애굽 정복 허락 예언(29:17-21)
1. 서론(1:1-3:15) - 여호와의 영광의 현현과 에스겔의 소명
각 개별 실제 예언의 기록에 앞서 에스겔의 선지자 소명(召命) 기사가 일종의 서론으로서 먼저 등장한다 구약 4대 예언서끼리만 비교해 보아도 네 예언서 모두에 각자의 소명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사 6:1-13 ; 렘 1:1-19 ; 단 10:1-21). 네 대예언자들은 모두 제각각 다양한 문맥에서 자신들 각자의 기이하고도 고유한 소명 체험을 기록함으로써 자신의 예언이 사람인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서 신적 권위를 가진 말씀이라는 공동의 근본 전제를 확립하는 동시에 각각의 고유한 메시지를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에스겔의 경우에는 이처럼 가장 앞부분에, 네 생물의 수종을 받으시며 궁창 위 보좌에 장엄하고도 찬란한 형상으로 현현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았던 에스겔 본인의 선지자 소명 장면을 본서 전체의 서론으로 삼고 있다. 이를 통하여 에스겔은 이하 기록될 자신의 예언의 신적 권위를 사전에 확보하는 동시에 영광과 능력의 하나님께서 이후 기록될 여러 예언들 안에 담겨 있는 심판과 구원의 말씀을 역동적이고도 장엄하게 직접 실현하실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영광의 현현과 여호와와 그의 사자들에 의한 놀라운 환상들과 기이한 영적 체험들은 본서 전체를 거쳐 거듭 반복되는 핵심 모티브의 하나이다.
2. 전반기 심판 관련 예언(3:16-32:32) - 남유다의 멸망과 주변국 심판 예언
이는 B.C. 586년 이전에 계시된 예언들로서 주로 남유다 멸망 예언을 수록한 전반부(3:16-24:12)와 남유다 멸망 전 · 후에 즈음하여 남유다를 적대한 주변국들에 대한 심판 예언을 수록한 후반부(제25-32장)로 나누어진다.
전반부 3:15-24:12의 경우 에스겔과 가장 근접한 시기에 활동한 선지자로서 남유다의 멸망에 대한 가장 많고, 가장 구체적인 예언을 남겼던 예레미야의 남유다 멸망 관련 예언 부분과 비교하면 그 특징이 확연히 드러난다. 전술하였듯이 이 양자의 모든 차이는 한마디로 예레미야는 그 참혹한 여호와의 심판의 참상을 직접 당해야 할 당사자였던 남유다 본토인들을 향하여 바로 그 예루살렘 현장에서 예언한 반면 에스겔은 같은 남유다 백성들이었지만 머나먼 이방 땅에서 한 발 비껴서서 본토의 멸망을 바라보아야 하였던 바벨론 포수민들을 향하여 예언 활동을 하였던 사실에 기인하고 있다.
그리하여 예레미야와 에스겔 모두 기본적으로는 일단 남유다 백생들의 범죄의 일면을 지적하고 그에 상응하는 징별로서의 심판의 일면을 서로 짝을 지어 예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으나 다음과 같은 여러 차이점도 뚜렷이 드러나고 있다.
•예레미야는 당시 예루살랩을 중심으로 한 현장의 여러 인물들과 주요 정치적. 종교적 실제 사건들을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반면에 에스겔은 대강의 관련 사항과 그 영적 본질만을 원론적으로 기술하거나 아니면 비유나 상징을 통하여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 예레미야는 심판과 회복 예언을 뒤섞어 예언하고 있으나 에스겔은 몇몇 예언의 뒷 부분에 첨가 기록 형식으로 부기된 내용을 제외하고는 이 전반기 심판 관련 예언 부분에서는 철저하게 심판 관련 사항만 예언하고 회복 관련 사항은 이후 후반기 부분에서 따로 다룸으로써 분명하게 구분 제시하고 있다.
•예레미야서에서는 선민 범죄 행위들의 지적과 그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의 주요 내용들이 빠른 템포로 반복, 중첩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이제 곧 가공할 여호와의 심판이 집행될 현장의 한가운데 서서 피를 토하는 듯한 격앙된 감정에서 우러나온 경고가 논리적, 사실적 설명보다 우선시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에스겔서 경우에는 반복이나 중첩이 거의 없이 순서대로 조목조목 비교적 차분히 정리되어 제시된다. 여호와의 심판 집행의 장면을 묘사함에 있어서도 예레미야서의 경우에는 여호와의 폭발적 진노에 대한 저자 자신의 주관적 경악과 공포가 여과없이 표출되고 있다. 또 여호와의 심판 행위로 선민들이 당할 처참하고도 두려운 고통의 참상이 세부적으로 생생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에스겔서의 경우에는 주로 심판을 집행하시는 여호와의 권능에 초점이 맞춰지고 그 총체적 진행 상황만 객관적으로 기술되고 있다.
•예레미야의 경우는 거의 대부분 선민 공동체 전체의 시각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올 논하고 있으나 에스겔은 각 개인 차원에서의 심판파 구원의 개별성을 직 · 간접적 으로 수차에 걸쳐서 보다 뚜렷이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예레미야서와 대비되는 에스겔서의 이같은 특징들은 결코 바벨론 유다 포로 공동체에 속한 자신들은 직접 그 무서운 심판을 겪지 않을 것이라는 비겁한 안도감을 반영한 것이거나 무책임하게 조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이스라엘 선민 모두를 향하신 여호와의 심판의 원인과 과정을 보다 폭넓은 시각에서 근원적으로 인지하고 자신들 역시 머나먼 이방 땅에서나마 선민의 후예로서의 바른 신앙관과 역사관을 차분하면서도 결연하게 재정립해야만 하였던 당시 바벨론 유다인 포수 공동체의 시대적 사명을 깨닫게 하고 또 선민에게 닥쳐올 새로운 역사의 지평에 눈뜨게 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후반부 제25-32장은 남유다 멸망에 즈음한 주변국 7개국에 대한 심판 예언을 수록하고 있다. 앞서 게재된 에스겔 본문 연대순 분류표를 보면 알수 있듯이 이 부분은 에스겔서 전체에서 각 예언이 계시된 시간순 기록 원칙을 가장 많이 무시하고 각 주변 국가별로 선민을 적대하고 해악을 끼친 악행에 대한 관련 심판 예언을 한곳에 모아 제시하고 있다 이 부분은 심판 예언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남유다를 적대한 열방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을 선언함으로써 결국은 선민에 대한 여호와의 사랑을 반증(反證)하고 있다. 그리하여 곧 이어질 선민 회복 예언을 위한 전환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선민에 대한 자세 여부에 따라 모든 열방을 심판하신다는 선언은 여호와께서는 선민이 아무리 타락하고, 아무리 초라하더라도 그 언제나 한결같이 오직 한번 택하신 선민을 중심으로하여 이 땅의 역사를 이끌어 가실 것이며 여호와는 선민 뿐만 아니라 전세계 만민에 대하여 주권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다.
3. 후반기 회복 관련 예언(제33-48장) - 선민의 회복 예언과 거룩한 종말론적 선민 왕국의 이상
이는 대개 예루살햄 함락을 정점으로 한 남유다 패망 이후 즉 B.C. 586년 이후에 계시된 예언들의 모음집으로서 다시 여호와의 심판으로 멸망하였던 선민의 회복 자체를 말하는 전반부(제 33-39장)와 선민이 장차 이 세상 끝날에 들어갈 영원한 종말론적 왕국의 대환상을 보여주는 후반부(제40-48장)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전반부 제33-39장의 키 포인트는 한마디로 오직 여호와의 무조건적 은혜에 의하여서만 현재 심판받아 멸망하여 있는 선민의 회복이 가능하며 또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에 의하여 지금은 그 어떤 희망의 싹조차 없는 것처럼 보이는 선민의 회복이 분명히 실현될 것을 집중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비단 에스겔서뿐만 아니라 모든 예언서들이 B.C. 538년에 일어난 바사 왕 고레스의 유다인 포로 해방과 본토 귀환 허가 칙령의 발표를 기점으로 한 선민의 귀환과 회복을 예언함에 있어서 전날의 선민의 심판과 멸망이 그 자신들의 죄에 대한 당연한 결과였던 반면 선민의 회복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무조건적 은혜로 크신 사랑과 용서를 베푸셨기 때문임을 분명하게 밝혀두고 있다. 그러나 에스겔의 이 부분에서처럼 선민 회복의 시기와 방법, 또한 그 전개 과정에 대한 예언 등은 거의 완전 생략하고 오직 선민의 회복이 여호와의 무조건적, 주권적, 선도적 은혜에 의하여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에만 집중하는 경우는 없다. 에스겔은 이 사실을 이스라엘 거짓 목자 파면과 직접 목양, 당신의 이름의 명예를 위한 일방적 선민 회복 약속, 세상 끝날의 곡의 침략과 멸망의 주도를 통한 선민의 영원한 회복 약속 등에서 직설적으로 표명하거나 골짜기 마른 뼈의 소생과 군대 형성의 환상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등 거듭 강조하고 있다.
끝으로 후반부 제40-48장은 장차 선민이 영원히 거하게 될 종말론적 새 왕국의 대환상을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훗날 선민의 영원한 새 왕국의 본질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과 선민의 종교적, 영적 관계의 온전한 회복을 담보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선민의 영원한 나라에 세워져 선민의 삶의 중심이 될 새 성전과 그곳에서 여호와께 바쳐질 새 제사의 규례 등이 집중 조명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역으로는 장차 선민이 거할 영원한 왕국은 새 성전과 새 제사를 중심으로 여호와와 선민의 관계가 먼저 온전히 회복된 이후 오직 이를 근거로 하여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역설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점이 먼저 강조된 후에 이어서 이제 선민이 안전하게 거할 터전으로서 새 땅이 선민 모두에게 나누어져서 영원히 보장된다는 예언이 이어진다. 이는 여호와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인 성전을 중심으로 한 바른 선민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여 결국 처참히 심판당하고 이방 땅으로 끌려간 당시의 선민들에게 무엇보다 먼저 가슴에 다가오는 선민의 종말론적 왕국의 면모였을 것이다. 전날 이사야는 자신의 책에서 종말론적 왕국의 면모를 기록하면서 그곳에서의 기쁨과 평화를 주로 노래하였고 신약 시대의 요한 계시록은 새 예루살렘의 아름다움과 풍요 등의 적극적인 면모를 주로 강조하였다. 이들과 대조하여 보면 예루살렘 함락의 공포와 아픔이 채 가시지도 않았던 시대의 에스겔이 자기 세대를 향하여 선민이 영원히 거할 저 소망의 영원한 왕국을 예언하면서 새 성전을 중심으로 한 새 제사의 회복과 선민이 영원히 안전하게 거할 수 있는 새 땅의 보장 등의 소극적인 측면을 우선 강조한 그 의미가 더욱 선명히 드러난다.
에스겔서가 이처럼 여호와와 선민 사이의 거룩하고도 친밀한 관계가 회복되고 나아가 인생의 궁극적 복락이 실현될 터전인 종말론적 선민 왕국의 대환상으로 종결되는 것은 그 첫머리가 찬란하고도 역동적인 여호와의 영광의 현현으로 시작된 사실과 대칭을 이루어 일종의 수미쌍판의 틀을 형성하는 것이다. 또한 영광과 권능의 여호와께서는 비록 못나고 범죄하여 정벌에 처해진 당신의 백성이라도 궁극적으로는 당신의 저 거룩하고도 장엄한 영원한 새 왕국으로 이끌어 주실 것을 보여준다. 이는 에스겔 당대의 선민들에게는 물론 모든 시대의 성도들에게 원대한 종말론적 비전과 소망을 가지고 여호와를 경외하며 믿음과 순종의 삶을 살아가라고 외치는 사자후(獅子吼)이기도 하다.
출처 ; 옥스퍼드 주석. pp. 28-32.
-3, 에스겔 메시지 요약
1. 패역한 시대를 향한 선지자 파송
제1장에서 신비롭고도 놀라운 영광으로 현현하신 하나님께서 2:1-3:15에서는 에스겔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당신의 말씀을 대언할 선지자로 임명하고 파송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대상인 이스라엘 족속에 대하여 거듭하여 ‘패역한 자들’임을 지적하시고 있다. 에스겔을 파송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 2:1-3:15 사이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에 대하여 ‘패역한 족속’ 또는 그와 유사한 표현을 무려 10회나 사용하실 정도로 이스라엘 족속의 패역함을 강조하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지적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이스라엘 족속은 패역하기 그지없는 족속이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가히 하나님께 대한 배반과 불순종의 역사라 할 만하다. 이스라엘 족속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열방 중에서 택하여 선민으로 삼아 주시고 이방인들이 누리지 못한 엄청난 은혜와 특권을 허락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불순종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각 시대마다 선지자들을 보내어 책망하기도 하고 징계하기도 하셨으나 그들은 패역한 습성을 버리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이방 땅으로 포로로 잡혀가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심지어 그들은 이방 땅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였다. 이 얼마나 패역한 모습의 극치인가!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족속의 패역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다시금 선지자를 파송하여 당신의 말씀을 대언하며 이스라엘 족속으로 당신께 돌아오도록 촉구하게 하신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족속의 패역함과 대조되는 것으로서 자기 백성을 결단코 포기할 줄 모르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극치라고 아니할 수 없다. 정녕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포기할 줄 모르시는 무한한 사랑을 소유하신 분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버려도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패역한 자기 백성이 돌이킬 때까지 기다리시며 당신의 말씀에 순종할 때까지 당신의 종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우리는 포기할 줄 모르는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 우리는 얼마나 많이 이스라엘 족속의 패역함을 닮아 있는가! 이스라엘 족속의 패역함을 비난하면서도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들의 자리에 서 있는가!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도 외면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당신의 종들을 끊임없이 보내시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응답하여 하나님께로 돌이키자. 모든 패역함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의 기뻐하는 백성들이 되자.
2. 선민의 끝없는 타락에 대한 직설적 지적
3:16-24:27은 남유다 왕국과 선민의 수도인 예루살렘이 저지른 패역한 범죄를 조목조목 밝히고 그에 따른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다양한 각도에서 거듭하여 예언하는 내용이다. 이 부분을 대할 때 놀라게 되는 것은 선민의 타락의 충격적 실상이다. 남유다 백성들은 남유다 땅과 예루살렘 곳곳에서는 물론 가장 거룩하게 보존되어야 할 하나님의 성전까지도 이방 우상을 위한 만신전(萬神展, Pantheon)으로 만들어 가장 추악하고 가증스런 곳으로 만들어 버렸다. 어디 이뿐이랴. 남유다 백성들은 하나님 대신 이방 강대국들을 의지하였고 살인과 간음과 탈취와 압제, 폭력 둥 온갖 도덕적 악행을 저지르기에 빨랐다. 실로 선민의 타락은 그들이 과연 선민인지 의구심을 가지게 할 정도로 끝을 모를 지경까지 이르렀다. 에스겔은 선민의 이러한 타락의 실상을 조금도 숨기거나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직설적이면서도 아주 진솔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는 선민의 치부를 드러내어 그들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거나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데에 궁극적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선민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악된 실상을 분명하게 직시하게 함으로써 결국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데 궁극적 목적이 있다. 아울러 선민의 끝없는 타락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고 그들을 징계한 후에 다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원대한 사랑을 드러내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의 선민인 우리는 구약 선민이었던 남유다 백성들과 얼마나 다른가? 우리도 끝없이 타락하기는 남유다 백성들과 다를 것이 없다.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고도 진지하게 돌아본다면 우리 역시 남유다 백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부끄러운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끝없이 타락한 구약 선민을 완전히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신 것처럼 신약 선민인 성도 또한 완전히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구약 선민의 타락에 대하여 그들을 엄중하게 징계하신 것처럼 우리의 타락에 대하여도 엄중하게 징계하실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구약 선민을 회복시키신 것처럼 우리를 징계하신 후에는 다시 회복시키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두려워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구원의 소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징계를 받을 때에 죄악에서 돌이키고 인내로써 징계를 극복해야 한다. 아울러 하나님의 종들로부터 죄에 대하여 지적과 책망을 받을 때에는 그것이 사람의 비난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지적과 책망인 줄로 알고 겸손하게 수납해야 한다.
여호와의 영광의 현현과 에스겔의 소명 장연의 불완전 상상도 /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녀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녀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겔 3:1,2)
3. 이중적 관점에서의 선민의 때늦은 각성 경고
에스겔서에서 가장 특징적 말씀은 ‘그 때에야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이다. 이 말씀은 6:7을 필두로 하여 본서에서 무려 70회 가량 반복적으로 사용된 말씀으로 본서의 핵심 주제 또는 목적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이 말씀은 특히 선민에 대한 심판 예언 부분에서 집중하여 나타나고 있는 바 하나님께서 선민을 심판 하시는 목적을 밝히는 문구이기도 하다. 여기서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상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만물의 근원자요 창조자로서 참되시며 유일하신 신이시며 영원히 살아계셔서 당신의 언약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임을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때에야’ 비로소 선민이 당신을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그 때’란 과연 언제를 말하는가?
그 때는 선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들이 섬기던 우상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영원히 살아계시며 당신의 언약을 이행하시는 진정한 신이심을 각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민의 때늦은 각성을 말씀하는 이 문구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동시에 내포 되어 있다.
첫째는 경고의 의미이다. 즉 하나님을 참되고 유일한 신으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비록 심판을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바르게 알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타락한 선민을 심판하시는 것은 그들의 죄악을 응징하는 데 그 일차적 목적이 있다. 그러나 타락한 선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궁극적 목적은 그들로 하나님을 여호와로 알고 섬기게 하는 데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생들 각자 모두에게 기대하시는 소망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때로는 은혜를 때로는 심판을 베푸시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여호와이심을 알고 그 지식에 근거하여 삶을 영위해야 한다. 인생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을 여호와로 알지 못하는데 그 원인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여호와로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여호와로 아는 때늦은 각성을 하게 될 것이다.
4. 선민을 중심으로 한 여호와의 역사 전개
3:16-24:12의 선민에 대한 심판 예언 뒤에는 곧 바로 유다 주변의 열방들에 대한 심판 예언이 이어진다(제25-32장). 여기에 심판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열방은 모두 7개국으로 이들은 모든 열방을 대표한다. 이들에게 심판 예언이 주어진 것은 물론 그들이 악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 7개국 가운데 뒤에 나오는 3개국인 두로와 시돈, 애굽은 교만이 심판의 핵심 원인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본서에서 이들 모든 나라에 대한 심판의 공통적 원인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선민에 대하여 적대적 태도를 취하였거나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암몬과 모압과 에돔과 블레셋은 남유다 멸망 전후를 즈음하여 남유다에 대하여 적대하였거나 남유다의 멸망을 기뻐하였을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도 끊임없이 선민을 괴롭혀온 나라들이다. 그리고 두로와 시돈은 상업적 이유로 유다의 멸망을 기뻐하였고 선민의 우상 숭배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애굽은 유다를 유혹하여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신들을 의지하게 하였고 정작 유다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에는 돕지 아니하여 유다가 멸망하는데 결정적 원인을 제공하였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하나님은 이들 나라들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선민을 중심으로 역사(歷史)를 전개하여 나가신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선민의 타락과 그 들에 대한 심판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그들을 중심으로 역사를 전개하신다. 실로 선민은 세상 역사의 중심이다. 비록 타락하여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못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올 받는다고 해도 선민이 세상 역사의 중심이라는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다. 이는 오늘날에 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택한 백성으로서 신약 선민인 교회와 성도들을 중심으로 역사를 전개하여 나가신다. 비록 교회가 초라하여 보잘것없고 심지어는 타락하여 그들을 심판하신다고 해도 하나닙은 교회와 성도들을 중심에 두고 역사를 전개하여 나가신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들은 자신이 역사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역사 속에서 책임 있는 행동과 당당함을 함께 지녀야 할 것이다.
5. 단독자로서의 각 개인을 향한 심판과 구원의 철저한 개별성
왕국 말기의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과 관련하여 두 가지의 매우 잘못된 생각과 태도를 취하였다. 하나는 당연한 위기와 자신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은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그들 조상들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생각과 태도를 보이며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다고 불평한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생각과 태도는 그들 사이에 마치 속담같이 회자되었던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는 말에 잘 반영되어 있다(18:2 : 렘 31:29). 즉 죄는 조상들이 범하였는 데 그에 대한 징벌은 자신들이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생각과 태도는 제2계명과 관련하여 주신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라는 말씀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혼의 독립성을 근거로 하여 각 개인 및 아비와 아들의 사례를 통한 심판의 개별성(個別性) 원칙을 명확하게 말씀하신다(18:5-32).
한편 유다 백성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위기와 고통은 조상들의 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 자신들은 의로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심판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는 모순적 생각과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즉 유다 백성들은 조상들의 죄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으려고 하면서 조상 아브라함의 의의 혜택은 누리고자 하는 매우 모순된 태도를 보인 것이다. 이에 하나님은 성경에서 의인으로 추앙을 받는 노아, 다니엘, 욥 세 사람이 그들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오직 자기들만 구원할 것임을 거듭하여 강조하심으로 심판 뿐만 아니라 구원 역시도 심판과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개별성을 띠게 됨을 분명히 천명하신다(14:12-23). 실로 모든 사람은 구원과 심판에 대하여 철저하게 단독자(單獨者)로 하나님 앞에 선다. 즉 모든 사람은 오로지 자신의 행위에 따라 구원과 심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의인의 자손이나 자녀가 악을 행하면 심판에 이르고 악인의 자녀나 자손이 의를 행하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악한 왕 아하스의 아들인 히스기야가 그 의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반면 의로운 왕 히스기야의 아들인 므낫세가 그 악행으로 심판에 이른 사실은 이에 대한 좋은 실례가 된다. 따라서 성도 각자는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서 있음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그 자신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뿐만 아니라 온 세대가 다 타락한다고 할지라도 그 가운데서도 자신을 거룩하게 보존해야 할 것이다.
6. 구원의 현재성
바벨론 땅에 포수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처지와 형편을 비탄해 하며 자포자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허물과 죄가 있고 그로 말미암아 자신들은 그 가운데서 쇠퇴하고 있으며 결국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조상들의 죄가 자기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그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며 쇠퇴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처럼 그들은 죄와 허물이 자신들 가운데 있고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 하였기에 선지자의 회개 촉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며 자포자기한 상태에 있었다. 동시에 그들은 조상들의 죄로 인하여 자신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공평하 못한 분이라고 불평을 일삼았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당신이 공평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바르지 않기 때문임을 지적하시며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33:11)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고통의 원인이 그들의 죄에 있음을 분명하게 하심과 동시에 그들이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으면 완전한 멸망에 이르게 될 것임을 시사하셨다. 아울러 비록 과거에 의인이었던 자라도 범죄하면 그의 과거의 의가 그를 구원하지 못하며, 비록 과거에 악인이었던 자라도 회개하고 의를 행하면 구원을 얻게 됨을 말씀하심으로 구원은 과거의 상태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에 따라 결정되는 일임을 분명히 하셨다(33:12-20). 즉 구원은 하나님의 심판 날을 기준으로 철저하게 현재성(現在性)을 띤다는 것이다.
이는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두 가지 태도를 명확히 제시한다. 즉 의를 행함에 있어 일시적이 되어서는 안되고 끝까지 의를 행해야 한다는 것과 더불어 연약함으로 죄를 범하였을 때에는 즉시 회개하고 다시금 의의 길로 돌이켜야 한다는 것이다.
7. 선민을 향하신 여호와의 목양의 열정
하나님의 양 무리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위하여 세운 목자들과 양들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방 땅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말하자연 하나님의 양 무리인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잃어버린 양과 같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이들을 다시 찾아 목양하시되 이전의 악한 목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한 의로운 목자를 통하여 그들을 목양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34:1-31). 이는 자기 양에 대한 하나님의 목양의 열정을 잘 보여준다. 주님의 잃어버린 양 비유(눅 15:3-7)가 시사하여 주듯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양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양이 어떠한 처지와 상태에 놓여 있든지 그들을 반드시 찾아 목양하심으로 그들에게 안식을 허락하신다.
사실 선민의 실패는 하나님께 수치스런 일이다. 그들의 실패는 곧 하나님의 실패로 비춰질 수 있기 때 문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실패하시는 법이 없지만 선민의 실패는 곧 하나님의 실패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실패한 당신의 양인 이스라엘을 버리실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와 같이 실패한 선민을 버리지 않고 다시 찾아 회복시키며 좋은 꼴로 먹이며 안식을 누리게 하실 것임을 천명하고 계신 것이다. 참으로 선민을 향한 하나님의 목양의 열정은 가히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다. 바로 이러한 자기 양에 대한 불타는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실패를 거듭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망하지 않고 마침내 다시는 실패가 없는 영원한 구원과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남는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사 37:32)고 하였고, 바울 사도는 “너회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7)고 선언하고 있다.
8. 심판과 구원에 대한 여호와의 절대 주권과 권능
에스겔서는 심판과 구원에 대한 예언이 거듭 반복된다. 제1-32장까지의 전반부가 심판 예언의 거듭된 반복이라면, 제33-48장까지의 후반부는 회복과 구원 예언의 거듭된 반복이다. 이러한 심판과 구원 예언의 거듭된 기술은 그저 무의미한 반복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렇게 심판과 구원 예언을 거듭하여 반복하는 것은 그 일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권능으로 반드시 성취될 일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특히 이는 당시의 선민은 물론 후대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확실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에스겔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겔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에스겔이 선포한 그대로 성취되었다. 이는 결국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에스겔 시대에 많은 약속을 주시고 그것을 그대로 성취하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많은 약속을 주셨다. 그러한 약속들 가운데에는 이미 성취된 것도 있고 성취 중에 있는 것도 있으며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들도 있다. 특히 아직도 대종말의 때에 성취될 일들은 미래의 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약속들 또한 대종말의 때가 이르면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권능으로 말미암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성취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에스겔 시대에 주어지고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된 하나님의 약속을 보면서, 또한 다른 선지자들에 의해 주어지고 역사 속에서 분명하게 성취된 하나님의 약속을 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종말론적 심판과 구원에 대한 약속도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굳게 확신해 야한다.
9. 선민의 종말론적 축복의 핵심이자 조건으로서의 신앙 생활 유지
제40-48장은 종말론적 선민 왕국에 대한 대환상을 다룬다. 그런데 여기서는 종말론적 선민 왕국의 복락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이는 같은 묵시 문학(默示文學)으로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대한 대 환상을 다루는 요한계시록과 대조된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장차 도래한 신천신지(新天新地)와 그 안에 건설될 새 예루살렘의 한란한 영광과 그곳에서 누리게 될 하나님의 백성들의 복락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에 반해 본서에서는 종말론적 새 성전의 건설과 제사 제도의 회복에만 집중하고 있다. 이는 선민의 종말론적 축복의 핵심이자 조건으로서의 신앙생활 유지를 보다 선명하게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선민의 종말론적 축복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에서 그들이 누리는 복락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회복이다. 선민이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는 복락은 축복의 원천이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회복의 자연스런 결과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나라가 멸망하고 성전마저 파괴되는 비참한 운명을 맞아야 하였던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생활을 유지하지 못한 까닭이다. 본서 제40-48장은 바로 그처럼 선민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하였던 원인의 제거라는 측면을 강조하여 간접적으로 선민의 종말론적 축복 상태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실로 바른 신앙생활의 유지는 그 자체가 축복의 핵심이자 조건이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며 천국의 구체적인 복락을 기대하기에 앞서 하나님께 대한 바른 신앙생활을 유지하기에 힘써야 할 것이다. 바른 신앙생활의 유지 그것이 바로 축복의 핵심이자 조건임을 기억하라.
출처 ; 옥스퍼드 주석
겔-4, 에스겔 선지자의 소명(에스겔 1: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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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서는 남왕국 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이 바벨론 군대의 제4차 침공으로 말미암아 함락됨으로써 남유다가 완전히 패망한 B.C. 586년을 전후로 한 시기인 B.C. 593년부터 571 년까지 약 22년간 에스겔이 바벨론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기록한 책이다. 그리고 에 스겔서는 타락한 선민에 대한 공의의 심판으로서의 남유다 멸망과 여호와의 무조건적 주권에 의한 선민 회복 예언 및 종말론적 선민 왕국에 대한 대환상을 주된 내용으로 한다. B.C. 586년은 남유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마침내 완전히 패망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결정적 분 기점이 된 시점이다. 따라서 에스겔의 예언 활동은 물론 그 예언 내용 또한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뚜렷한 대비를 이룰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에스겔서는 두 가지 방식으로 그 내용의 분류가 가능하다.
첫째는 계시가 주어진 시점에 따라 그 내용을 분류할 수 있다. 에스겔서가 다른 예언서들과 구별되는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계시가 주어진 시점이 대개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에스겔은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하기에 앞서 그 계시가 주어진 시점을 밝히고 있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총 48장으로 이루어진 에스겔서는 21편의 중 · 단편 예언집으로 분류할 수 있다. 에스겔은 이러한 예언들을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각 예언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시간적 순서에 따라 배열하고 있다.
둘째는 기본 주제별로 그 내용을 분류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에스겔은 자신의 예언을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시간적 순서에 따라 배열하였지만 모든 예언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배열한 것은 아니다. 에스겔은 일부이기는 하지만 먼저 주어진 예언을 뒤에 배열하기도 하였고 후에 주어진 예언을 앞에 배열하기도 하였다. 에스겔이 이처럼 일부 예언에 대하여 예언이 계시된 시점을 무시하고 순서를 바꾸어 배열하기도 한 것은 자신의 예언을 기본 주제별로 배치하기 위함 이다. 따라서 에스겔서의 내용을 분류함에 있어서는 예언이 계시된 시점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그 내용을 기본 주제별로 분류하여야 한다. 이에 따라 에스겔서를 보면 남유다 패망 전후 시대에 걸쳐 주어진 예언들의 모음집인 에스겔서는 B.C. 586년 예루살렘 함락을 기점으로 하여 자연스럽게 그 이전에는 주로 심판 관련 예언이, 그 이후에는 주로 회복 관련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기준으로 보면 에스겔서는 에스겔의 선지자 소명 장면을 기록한 서론부(1:1-3:15), 그리고 전기 심판 예언(3:16-32:32)과 후기 회복 예언(33-48장) 등 전3부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하의 1:1-3:15은 본서의 제1부 곧 에스겔의 소명 장연을 기록하고 있는 서론부이다.
이를 개관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1:1-3은 에스겔이 여호와의 영광의 환상 중에 선지자 소명을 받은 때와 장소, 그리고 선지자로서 자신을 향한 여호와의 말씀과 권능 부여를 강조한다. 구약 예언서의 저자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기록한 예언서의 모두(冒頭)나 중간에 자신들 각자의 고유한 소명 체험을 기록함으로써 자신의 예언이 사람인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서 신적 권위를 가진 말씀이라는 근본 전제를 확립하는 동시에 각각의 고유한 메시지를 강조한다. 에스겔 또한 여호와 계시를 본격 소개하기에 앞서 자신의 기이하고도 놀라운 소명 체험에 대하여 기록함으로써 자신의 메시지에 대한 신적 권위와 그 자신의 고유한 메시지의 특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네 생물의 수종을 받으시며 궁창 위 보좌에 장엄하고도 찬란한 형상으로 현현하신 환상 체험에 대한 기록은 이후 기록될 여러 예언을 주시는 주체이신 능력과 영광의 하나님께서 그 예언틀 안에 담겨 있는 심판과 구원의 말씀들을 역동적으로 실행하여 나가실 것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에스겔은 유다 제19대 왕인 여호야긴과 그 자신이 바멜론에 포로로 잡혀온 지 제5년 4월 5일(2절)에 바벨론 포수민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그발 강가에서 그의 소명과 관련한 일련의 장엄한 환상을 보고 여호와의 말씀과 권능이 그에게 임하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된다. 여호야긴 왕은 B.C. 598년 말에 유다의 제19대 왕으로 즉위하고 3개월만인 B.C. 597년 초에 제3차로 유다를 침공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폐위되어 바벨론 땅에 포로로 잡혀가게 된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이때 유다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였던 사람들 1만 명 이상을 함께 포로로 잡아 가게 되는데(왕하 24:9-17) 거기에는 사독 계열의 제사장 가문 출신으로서 당시 25세였던 에스겔도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에스겔이 소명 체험을 한 제5년은 그의 나이 서른이 되던 해로서 B.C. 593년이다. 여기서 에스겔이 소명 체험을 한 그발(Kebal) 강가는 티그리스 강과 함께 메소포타미아의 주요 두 강 중 하나인 유프라테스 강의 주요 지류이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 사랍들은 이곳에 거주하며 유프라테스 강과 바벨론의 주요 도시들을 연결시키는 대규모 운하 건설 공사에 동원된 것으로 여겨진다.
다음 1:4-28은 에스겔이 1절에서 보았다고 진술한 환상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은 네 생물의 수종을 받으시며 궁창 위 보좌에 장엄하고도 찬란한 형상으로 현현하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것이다.
에스겔은 환상 중에 먼저 네 생물의 환상을 본다(4-14절). 네 생물은 북쪽에서부터 오는 폭풍과 큰 구름 가운데 매우 빛나는 모습으로 있었다. 그들은 모두 기본적으로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고 각각 네 개의 얼굴과 네 개의 날개와 손, 곧은 다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네 개의 얼굴은 각기 사람, 사자, 소, 독수리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또 네 날개 중 둘로는 나는데 사용하고 둘로는 몸을 가리는데 사용하였으며 마치 타는 숯불과 횃불과 같은 광채를 발하며 번개와 같이 빠르게 왕래하고 있었다. 에스겔은 이 네 생물의 환상을 제10장에서 다시 한 번 보게 되는데 그곳에 의하면 이 네 생물은 천사들의 한 부류로서 하나님을 가까이서 수종하는 네 그룹으로 그 정체가 드러난다. 이러한 네 생물은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환상 중에 보았던 네 생물(계 4:6-11)과 아주 유사하다.
에스겔은 네 생물에 이어 네 생물에 부속된 것으로 여겨지는 네 바퀴에 대한 환상을 본다(15-21절). 그 바퀴들은 네 생물의 얼굴에 따라 하나씩 있었는데 모두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바퀴의 재질은 황옥처럼 보였고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과 같은 구조를 하고 있었다. 또 바퀴들은 생물의 얼굴에 따라 사방으로 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한 방향으로만 움직였고 그 둘레는 높고 무서우며, 그 네 둘레로는 눈이 가득하였다. 그리고 바퀴들 가운데에는 생물들의 영이 있어서 생물들이 하나님의 영에 따라 움직이면 바퀴들도 그에 따라 움직였다.
이러한 네 바퀴의 환상 후에 에스겔이 본 것은 앞서 본 네 생물들의 머리 위로 보기에 두려울 정도의 신비로운 수정같은 궁창이 펼쳐져 있고 그 아래에서는 생물들이 웅장한 소리를 내며 운행하고 있다가 궁창 위에서 한 음성이 발하여지자 운행을 중단하고 멈추어 서는 광경이다(22-25절). 그리고 이러한 광경을 본 후에 비로소 에스겔은 궁창 위 보좌 위에 앉으신 찬란한 여호와의 영광의 현현을 목도하게 된다(26-28절). 생물들의 머리 위의 궁창 위에는 남보석과 같은 한 보좌의 형상이 있었는데 그 보화의 형상 위에 사람 모양의 한 형상이 있었다. 그 한 형상은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으로서 그 허리 위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같았고 그 허리 아래 모양도 불같아서 사방으로 광채가 났는데 그 광채는 마치 비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와 같이 아름다웠다.
끝으로 2:1-3:15의 두 문단은 신비하고도 놀라운 영광으로 현현하신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패역한 이스라엘 족속에게 당신의 말씀을 대언할 선지자로 임명하고 파송하신 사실을 진술하고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당신을 배반한 패역한 선민에게 에스겔을 보내심을 말씀하시며 패역한 이스라엘 자손이 듣든지 듣지 않든지 곧 이스라엘 자손들의 반응에 개의치 말고 당신의 말씀을 전하여 그들 가운데 선지자가 있음을 알게 하도록 하라고 거듭하여 명하신다(2:1-7 ; 3:4-11). 그리고 에스겔로 하여금 당신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 책을 취식하게 하신다(2:8-3:3). 이처럼 하나님께서 에스겔로 하여금 당신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 책을 먹게 하신 것은 선지자가 선포하는 메시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형식적, 피상적으로 취하지 말고 그것을 마치 음식을 먹듯이 영혼 깊숙이 받아들이고 저장하여 그것으로 사역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두루마리에 기록된 내용이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라는 사실(2:10)은 에스겔이 선포할 메시지가 주로 심판 관련 메시지라는 것을 나타내준다. 한편 에스겔을 선지자로 부르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으로 그를 들어 올려 그로 하여금 천상의 기이한 체험을 하게 하고 근심하며 분한 마음으로 행하는 그를 당신의 권능으로 감동하셨다(3:12-15). 이는 패역한 선민을 상대로 선지 사역에 임할 에스겔에게 힘과 확신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이상 본문에서 다음의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먼저는 하나님과 영적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식의 한계성을 인지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에스겔이 환상을 통하여 목도한 영적 세계와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은 참으로 신비하고도 난해하여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는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본 환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사실 환상을 직접 체험한 에스겔조차도 처음에는 그가 본 네 생물의 정체조차 알지 못하였다가 후에 그것이 천사들의 한 부류인 그룹인 것을 겨우 알았다. 이렇게 인간이 영적 세계와 하나님에 대하여 온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경은 영적 세계나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기록된 책이 아니다. 성경은 인간의 구원에 필요한 구속사적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 기록된 책이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영적 세계에 관련한 사실이나 하나님에 관한 사실은 제한적이고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영적 세계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자신의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와 관련해서는 성경에 기록된 계시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각별하게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성경에서 정말 집중해야 하고 지식을 얻어야 하는 것은 구원에 필요한 진리이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분으로서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 직접 개입하시는 섭리자라는 사실이다. 에스겔이 환상 중에 본 네 생물과 그에 부속된 네 바퀴의 특성은 네 생물 위 보좌에 계시며 네 생물이 수종을 드는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한다. 그리하여 이들 네 생물과 네 바퀴의 특성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하신 분으로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실 뿐만 아니라 친히 인간의 역사를 당신의 뜻대로 이끌어 가시는 섭리자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는 네 생물과 네 바퀴의 특성으로만 확인되는 사실이 아니다. 이는 성경이 일관되게 증거하는 진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하는 자만이 비로소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는 물론 자기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진다는 사실에 입각하여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노력을 기울이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처럼 역사와 인생 각자에 대한 주관자요 섭리자이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인하여 비로소 삶의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패역한 세대를 향해 선지자를 파송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족속에 대하여 거듭해서 패역한 자들 임을 지적하시고 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없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불순종한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열방 중에서 택하여 선민으로 삼아 주시고 이방인들이 누리지 못한 은혜와 특권을 허락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불순종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각 시대마다 선지자들을 보내어 책망하기도 하고 징계하기도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패역한 습성을 버리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이방 땅으로 포로로 잡혀가는 신세로까지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방 땅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였다. 이 얼마나 패역한 모습의 극치인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족속의 그러한 패역함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그들을 향해 선지자를 파송하신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족속의 패역함과 대조되는 것으로서 자기 백성을 결단코 포기할 줄 모르는 지극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극치라고 아니할 수 없다. 정녕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포기할 줄 모르는 사랑을 소유하신 분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버려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패역한 자기 백성이 돌이킬 때까지 기다리시며 당신의 말씀에 순종할 때까지 당신의 종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우리는 포기할 줄 모르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귀를 닫고 불순종하는 패역한 자들이 되지 말고 겸손히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사랑받는 백성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 ; 옥스퍼드주석<청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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