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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묵상

에스겔이 본 네 생물 환상(에스겔 1:1-14) - 3장

by 은총가득 2021. 3. 1.

 

에스겔이 본 네 생물 환상(에스겔 1:1-14)

 

[ 성경묵상 ]

[ 질문 하나 ] 에스겔이 어디에서 어떤 형편에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과 비전이 임하였는가?(1-3절)

에스겔은 바벨론 땅에 포로로 잡혀 와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 땅에 끌려와 수치와 모욕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힌 지 5년째 되는 날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스라엘을 떠났고 그들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
포로된 땅은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시는 절망과 눈물의 땅인데도, 그곳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선지자의 눈 앞에 나타났다.
비록 죄로 멸망한 백성이지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과 긍휼을 거두지 않으시고, 언약을 기억하신다. 절망 가운데 있을지라도 한 줄기 희망을 여전히 가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 질문 둘 ] 에스겔이 본 하나님의 영광은 어떤 모습이며, 어떻게 움직였는가?(4-9, 12절)

에스겔이 본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은 이스라엘의 대적이 있는 '북쪽'에서부터 폭풍과 함께 오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움직이는 목적이 심판을 위해서라는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신비스럽고 두려운 네 생물(스랍)의 엄호를 받으며 일제히 앞을 향해 직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뜻은 돌이키거나 우회하는 법 없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움직이신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부동의 존재가 아니라, 역사와 나라들과 만물을 움직여 나가시며 새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왜 자기 백성에 대한 심판이 먼저일까?
죄로 부패한 부분은 깨끗이 도려내야 다시 새롭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회개가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깨끗하게 하신 후에 새로운 것으로 채워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구원과 재창조, 회복의 역사는 심판과 회개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때는 제 삼십년 넷째 달 오일이었다. 그 때에 내가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과 함께 그발 강 가에 있었다. 나는 하나님이 하늘을 열어 보여 주신 환상을 보았다.

2.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 년 그 달 초닷새라
여호야긴 왕이 포로로 잡혀 온 지 오 년째가 되는 그 달 오일에,

3. 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주께서 바빌로니아 땅의 그발 강 가에서 부시의 아들인 나 에스겔 제사장에게 특별히 말씀하셨으며, 거기에서 주의 권능이 나를 사로잡았다.

4. ○내가 보니 북쪽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방에 비치며 그 불 가운데 단 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그 때에 내가 바라보니, 북쪽에서 폭풍이 불어오는데, 큰 구름이 밀려오고, 불빛이 계속 번쩍이며, 그 구름 둘레에는 광채가 나고, 그 광채 한가운데서는 불 속에서 빛나는 금붙이의 광채와 같은 것이 반짝이었다.

4-14절에서는 여호와를 수종드는 네 생명의 환상을 소개한다.

그 가운데 본절은 네 생명 이 자리잡은 기이한 공간에 대하여 묘사한다. 이러한 내용이 시작되는 본문의 ‘내가 보니’라는 말을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그리고 내가 보았다. 그런데 보라(KJV, And I looked, and, behold)’이다. 이러한 원문의 뉘앙스를 개역 개정판 성경은 잘 드러내지 못하고 있지만, 원문으로는 에스겔 선지자 자신이 본 이상에 대해 스스로 매우 놀랐다는 사실과 함께 독자들에게 그것을 주목해서 자세히 살펴보라고 권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에스겔이 본 환상은 열린 하늘에서 펼쳐져 보인 환상으로서, 실제 모습이 아니었다. 따라서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원 저자의 의도를 왜곡하게 된다. 그것은 네 생물의 환상(4-14절), 네 바퀴의 환상(15-21절), 네 생물 머리 위에 펼쳐진 궁창의 환상(22-25절), 궁창 위 보좌 및 거기에 앉으신 여호와의 영광의 환상(26-28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환상은 에스겔 이전의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하였으며 에스겔 자신이 본 그 내용을 문자로 정확하게 묘사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무척 난해하다. 칼빈 (Calvin)도 이 에스겔의 환상의 진정한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고백했다. 따라서 세부적인 진술에 대해 일일이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이라든지,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은 지양(止揚)되어야 하며, 이 환상에서 에스겔 선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전체적인 메시지를 찾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이와 유사한 환상은 제10장에서 또 한 번 언급되는데(10:1-22), 그곳에서는 이곳의 환상이 여호와의 영광과 깊이 관련된 것으로 해셜한다(10:18-20). 순수한 영(靈)이신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인간이 절대로 볼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다른 형태를 빌어 나타내기도 하는데, 이를 신학적 용어로 ‘신현(theophany)’이라고 칭한다. 본 환상도 이러한 신현과 관계된 것이다(Wright).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보였던 영광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 및 자신의 초월적 존재 방식을 이 1:4-28절의 환상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셨을지도 모른다. 이스라엘 자손의 범죄가 너무나 극심하여 넘칠 정도가 되어 그분의 영광은 더 이상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시며 그들을 떠나 버리셨는데(10:18 ; 11:22-24), 성전을 떠났던 그 영광이 이곳 포로들이 거주하는 이방 식민지에 환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는 여호와께서 아직도 그의 언약 백성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으로 여겨진다(Cooper). 당시 바벨론에 거주하고 었던 이스라엘 자손들은 세상의 진정한 주권자가 여호와가 아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인 것으로 여기고 절망감에 휩싸여 하루하루 무기력하게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에스겔 선지자는 그발 강가에서 본 여호와의 영광의 환상을 통해 그들 위에서 절대 권능으로 역사를 주관하는 이는 느부갓네살이 아닌 하늘 높은 곳에 영광 중에 좌정하사 그 백성들에게 당신의 뜻을 계시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과거 시내산에서는 모든 이스라엘 족속이 여호와의 신현을 다 목도했지만(출 19:16 ; 20:18-20), 이곳에서는 오직 에스겔 선지자만이 그것도 환상의 형태로 목도했다. 여호와께서는 비록 그의 백성에 대한 관심을 계속 가지고 계시고 그들에 대한 주권을 철회하지 않았지만, 범죄하여 그 형벌을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은 영광스러운 여호와의 신현으로서의 환상을 목도할 수 있는 영적 상태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선지자로 소명 받은 에스겔은 그 환상을 보기는 하였지만, 천상에서 임한 영광스러우며 신비로운 환상을 인간의 언어로 충족하게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 역시 그 세부적인 내용을 다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사실을 전제하고 이 환상을 마주해야 할 것이다(신 29:29 ; 롬 11:33,34).

"북쪽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는 여호와의 임재, 혹은 영광이 북쪽에서부터 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본 끓는 가마의 환상 역시 북쪽과 관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문맥에서 북쪽은 북방 바벨론 세력이 예루살렘으로 진격해 오는 것과 관련된 반면(렘 1:13-15), 에스겔 선지자가 본 환상에서 북쪽은 여호와의 처소를 나타낸 것이며 그분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방향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여호와는 북쪽으로부터 오시되 폭풍과 큰 구름 가운데 싸여 오신다. 폭풍과 큰 구름은 성경에서 종종 여호와의 임재시에 동반되어 일어나는 자연 현상으로 소개되었다(출 19:16-18 ; 20:18-20 ; 삼하 22:12-15 ; 욥 38:1 ; 사 29:6 ; 렘 23:19). 인간은 그 폭풍과 구름을 볼 수 있을 뿐, 그 가운데 엄재해 계시는 초월적 존재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 목도할 수는 없다.

폭풍과 큰 구름은 일반적으로 번쩍이는 불과 조요한 광채, 그리고 불 가운데서 보석의 눈 같이 빛나는 것을 수반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인간의 육안으로는 식별하기 힘든 광경이었다. 여기에서 개역 개정판 성경이 불에 달구어져 빛을 내는 쇠의 이미지를 벌어 ‘단 쇠 같은 것’이란 문자적으로 황갈색의 보석인 ‘호박의 눈 같은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본문에서 나타나는 영상, 즉 번쩍이는 불과 빛나는 광채 등과 함께 인간의 육안으로는 감히 쳐다 볼 수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의 외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불이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시에 나타날 때에는 보호와 심판이라는 이중적 상징성을 갖는다(창 19:24 ; 출 14:24 ; 40:38 ; 사 30:30 ; 66:15).

또한 문자적으로 ‘광채’에 해당하는 ‘노가’는 원래 빛 가운데 둘러싸여 있는 여호와(딤전 6:16)의 임재 자체로 인해 발하는 눈부신 광채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10:4 ; 삼하 22:13 ; 겔 10:4). 본장에서 이 단어는 모두 4회 사용되어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보다 현저하게 묘사하고 있다(4,13,27,28절).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란 하나님이 강한 용사가 되심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악을 심판하시고 보복하시는 강한 용사이시다. 언약을 깨뜨린 백성은 하나님의 임재 속에 위로를 얻기 이전에, 죄에 대한 경각심과 회개의 눈물을 먼저 배워야 한다.


5.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 그들에게 사람의 형상이 있더라
그러더니 그 광채 한가운데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습은 사람의 형상과 같았다.

생물의 전체적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그 움직임(movement), 혹은 속도(speed)는 번개처럼 빠르며(14절), 날개를 모두 네 개 가지고 있으며(6절), 그 중 날개 둘로는 몸을 가리고(11절), 날개 둘로는 날며(9절), 날 때에는 신비스러운 소리를 내며(24절), 전후좌우로 모두 얼굴을 가지고 있는데, 그 얼굴은 각각 사람의 얼굴, 사자의 얼굴, 소의 얼굴, 독수리의 얼굴이고(10절), 다라는 견고하고 곧게 뻗어 있으며(7절), 마광한 구리 같이 빛나는 재료로 된 송아지 발바닥 같은 발바닥을 가지고 있다(7절). 그 생물은 온통 불과 햇불 같은 것으로 싸여 있으며(13절), 그 안에서 번개가 치며(13절), 그 움직임이 아무리 빠르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임의로 움직이는 법이 없이 영이 지시하는 대로만 움직이며(12,20절), 바퀴가 그 생물과 함께 있고(15절), 바퀴와 생물은 절대로 따로 움직이는 법이 없다(19절). 그리고 그 생물의 머리 위로 수정 같이 말은 궁창이 펼쳐져 있고(22절), 그 궁창 위쪽으로 보좌가 있고(26절), 그 보좌 위에 사람의 모양 같은 형상이 있다(26절). 그 사람의 모양 같은 형상은 전체가 다 용광로에 벌겋게 달군 쇠와 이글거리는 불과 같은 모습으로 되어 있으며(27절), 그 사면으로 무지개 같은 광채가 나오는데(28절), 그 보좌 위의 형상이 곧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이며(28절), 거기에서 에스겔에게 주시는 말씀이 나왔다(28절).

여기서 네 생물의 형상 위에 궁창의 형상이 있고 그 궁창의 형상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이 있다는 사실은 이 생물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수종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 생물이 모두 넷으로 되어 있고, 이 넷은 각각 전후좌우를 향하고 있으며 그것이 하나로 묶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5,10절). 따라서 이 생물은 동시에 동서 남북 사방을 볼 수 있으나 어느 한 방향으로만 움직인다. 동시에 네 곳을 볼 수 있고, 얼굴들이 각각 전후좌우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든 곳을 동시에 볼 수 있고 통제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초월적 · 절대적 주권을 연상케 한다(Wright).

한편 이러한 네 생물의 환상은 계 4:6-9에도 나오고 있다.
그런데 하나 다른 점은 여기의 생물들이 날개를 네 개씩 가지고 있는 반면, 계시록 환상에 나오는 생물들은 날개를 여섯 개씩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계시록의 생물들은 영광과 존귀를 받기에 합당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세세토록 찬양하는 천사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반면 여기의 생물들은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내고 그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수종자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6. 그들에게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얼굴이 각각 넷이요, 날개도 각각 넷이었다.

7. 그들의 다리는 곧은 다리요 그들의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광낸 구리 같이 빛나며
그들의 다리는 모두 곧고, 그 발바닥은 송아지의 발바닥과 같고, 광낸 놋과 같이 반짝거렸다.

8. 그 사방 날개 밑에는 각각 사람의 손이 있더라 그 네 생물의 얼굴과 날개가 이러하니
그 생물의 사면에 달린 날개 밑에는 사람의 손이 있으며, 네 생물에게는 얼굴과 날개가 있었다.

9. 날개는 다 서로 연하였으며 갈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그들의 날개 끝은 서로 닿아 있으며, 앞으로 나아갈 때에는 몸을 돌리지 않고, 각각 앞으로 곧게 나아갔다.

10.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왼쪽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그 네 생물의 얼굴 모양은, 제각기, 앞쪽은 사람의 얼굴이요,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왼쪽은 황소의 얼굴이요, 뒤쪽은 독수리의 얼굴이었다.

11. 그 얼굴은 그러하며 그 날개는 들어 펴서 각기 둘씩 서로 연하였고 또 둘은 몸을 가렸으며
이것이 그들의 얼굴 모양이었다. 그들의 날개는 위로 펼쳐져 있는데, 두 날개로는 서로 끝을 맞대고 있고, 또 두 날개로는 그들의 몸을 가리고 있었다.

12. 영이 어떤 쪽으로 가면 그 생물들도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그들은 영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갈 때에는, 각각 앞으로 곧게 나아갔다. 그들은 몸을 돌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13. 또 생물들의 모양은 타는 숯불과 횃불 모양 같은데 그 불이 그 생물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며 그 불은 광채가 있고 그 가운데에서는 번개가 나며
그 생물들의 모양은 마치 활활 타는 숯불이나 횃불과 같이 보였다. 그 불은 그 생물들 사이를 오가며 빛을 냈고, 불 속에서는 번개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14. 그 생물들은 번개 모양 같이 왕래하더라
그 생물들은 이쪽 저쪽으로 번개처럼 빠르게 달렸다.

[ 복있는사람, 2018년 11,12월호 ]

 

제사장 에스겔에게 환상이 임함 ( 1:1-3 )

에스겔이 보았고 또 그 가운데서 사명을 위임받았던 환상에 대한 상황 설명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는 그 기록이 사실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서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의 영혼에 자신을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셨는가를 기록해두는 것은 대단히 쓸모있는 일이다.

(1) 에스겔이 이 환상을 본 시기는 '제 삼십년'이었다(1절).

어떤 사람들은 이 삼십년이라는 말이 에스겔의 나이 삼십 세 되는 해라고 생각한다. 즉 에스겔이 한 사람의 제사장으로서 제사장직을 완전히 수행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은 이 삼십년이 느부갓네살의 부와 나보폴라살의 재위 삼십년 째 되는 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갈대아 역본에는 다른 시대로 봐서 '요시아 왕 시절에 한밤중 달이 뜬 후에 제사장 힐기야가 성소에서 율법서를 발견한 해로부터 삼십년 째 되는 해'라고 말하고 있다. 에스겔이 이 환상을 본 때는 6월에 해당하는 사월, 오일이었다(2절). 이 날은 아마도 안식일이었던 것 같다. 이는 3장 16절에 칠일의 마지막날(한글 개역은 '칠일 후'-역주) 즉 다음 안식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그에게 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서 존귀케 하셨을 때 그는 음울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발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여호야긴왕이 사로잡힌 지 오년 그 달 오일이라.

1) 당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갈대아인들의 땅에서 포로가 되어 있었다.

유대국가의 몸체는 여전히 유대 땅에 존속하고 있었지만 이 사람들 초기에 포로가 된 것이다. 이들 중에는 매우 우수한 사람들도 있었다. 교훈의 말과 시정의 매는 서로 서로 보완해 가며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준다. 교훈의 말은 매의 까닭을 설명해주며, 매는 훈계를 보강하여 주는 것이고 이 둘은 공히 지혜를 가져다 준다. 그들이 포로 있는 동안에는 그들 심령을 위한 일반 은총이 결핍될 수 밖에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특별 은총을 그들에게 베푸셨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막히게 되면 다른 방법으로 교육받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조국에 남아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예레미야가 있었으며 포로로 잡혀간 자들에게는 에스겔이 함께 하게 도니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흩어져 있는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께서는 마땅한 선생님을 세워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2) 선지자는 그발강 가의 포로들 가운데 있었다.

성경 학자들도 이 그발강이 어떤 강인지에 대하여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가장 선량하고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죄악 때문에 당하는 공적 심판, 혹은 국가적인 심판을 함께 당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한 죄악을 전혀 짓지 않은 사람들도 그 고통을 같이 느끼는 것이다. 포로가 된 사람들은 자기들과 함께 포로가 되어 같이 슬픔을 나누는 사람의 훈계는 잘 받아들일 것이다. 어느 곳에서든지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지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이 갇힌 자가 되었을 때도 복음은 자유로이 갈 길을 갔다.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유폐되어 있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 곳까지 그를 방문하셨었다.

(3)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자기를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다.

여기에서 선지자는 그가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1) 그는 '하나님의 이상'을 보았다(1절).

하나님을 직접 보고 살아 남아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상, 곧 교훈을 주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현시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었다. 에스겔의 임무는 백성들의 마음을 돌려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는 일이었으므로 하나님의 이상을 보아야만 했다. 그러한 일을 하나님과 가까이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과 하나님께 대한 지식에 감동된 사람들, 즉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사랑으로 인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그가 그 이상을 볼 수 있도록 '하늘이 열렸다'. 즉 그가 그 이상을 가리고 있던 흑암의 격의(distance)가 물리쳐진 것이다.

2)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3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분명하게 임하였다. 그리고 그가 본 것은 앞으로 들을 내용을 위하여 그를 예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여호와의 말씀', 곧 본질적인 말씀이요(이렇게 해석하기도 한다), 그 자체가 말씀이신 그 분이 에스겔에게 사명을 주어 보내시기 위하여 임하셨다.
3) 환상을 보도록 두 눈을 여시고 말씀을 듣도록 두 귀를 여시며 그 모두를 깨달을 수 있도록 마음을 여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그는 느꼈다.


네 생물의 환상 ( 1:4-14 )

이 환상의 모습과 의도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선지자가 소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대하여 보다 높고 존귀한 생각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선지자가 보고 있는 것은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28절)이었다. 이와 같이 크신 하나님은 경건한 마음과 두려운 마음으로 섬김을 받으심이 마땅하다.

둘째, 시온에 남아 있거나 이미 바벨론에 잡혀 왔으나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경고를 무시하는 죄인들에게 경고를 주기 위함이었다. 이 환상이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내용이라는 것은 43장 3절로 미루어 보아 분명히 알 수 있다.

셋째,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권능의 손 아래 자기를 낮추는 자들에게 위로를 말씀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비록 바벨론에 잡혀와 포로의 신세가 되어있지만 하나님께서 저들과 가까이 계심을 알릴지니라. 즉 성소가 저들에게 없지만 성소의 하나님께서 저희와 함께 계심을 알릴지니라. 교회가 오랫 동안 이방 땅에 세워져 있는 때라도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처음으로 교회를 세우셨을 때 하셨던 것처럼 그들의 한가운데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라."

환상의 첫 번째 부분은 하나님의 일군인 수많은 천사들이 명령을 이행하고 그 분의 말씀을 청종하면서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시중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1) 천사들에 대한 이 환상이 도입은 장엄하며 눈이 번쩍 뜨이게 한다(4절).

선지자는 하늘이 열리는 것을 바라다 보았다. 그가 보니 앞에 가리우고 있는 안개를 내몰 듯 길을 훤히 내기 위하여 '북방에서부터 폭풍이' 몰려 왔다. 하나님께서는 폭풍을 사용하시사 하늘과 공기를 깨끗케 하시며 우리가 하늘과 교제를 나누기에 필수적인 마음의 청아함을 주실 수 있다. 이 폭풍은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에스겔에게 다가왔다(엘리야에게도 이 일이 일어났었다, 왕상 19:11).

(2) 환상의 내용을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안식하고 계시는 궁창, 즉 하나님께서 타고 다니시는 병거는 '흑암과 공중의 빽빽한 구름'(시 18:11;104:3)이다. 구름에는 불이 따르게 마련이다. 하나님께서 구름 사이에 거하고 계셨던 시내산 정상에도 불이 나타났었다. 그 여호와의 영광은 '맹렬한 불'과 같았다(출 24:16,17). 그리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에도 불타는 떨기 나무의 불꽃 가운데 나타나셨던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기 때문이다. 그 불은 영광으로 둘러싸여 있다.

빛이 그 사면에 비취며(4절). 우리가 비록 그 불 속을 들여다 보지도 못하며 완전하게 하나님을 발견할 수도 없으나 그 불 주위에 밝은 빛은 볼 수 있다. 모세도 하나님의 등을 볼 수 있었지만 얼굴은 뵙지 못하였었다. 하나님을 느끼기는 매우 쉽지만 그 분이 어떠하시다라고 묘사하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불 가운데에서 나온 생물들은 스랍(태우는 자)들로서 실제로 생물이 아니고(천사는 영이기 때문에 볼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인도하시기에 적절한 형상을 입고 있을 뿐이었다.

그 불가운데...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이 환상에 대하여는 선지자가 직접 해설해 놓은 부분이 있다. '그들이 그룹들인 줄을 내가 아니라'(참조. 겔 10:20). 그들은 생물, 곧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그 손으로 직접 만드신 것들이었다. 태양은 불덩어리로 둘러 싸인 화염이지만 생물은 아니다. 선지자는 그들이 하늘의 사방으로 보내진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임을 깨달았다(참조. 마 24:31).

스가랴는 동서 남북을 향해 나아가는 네 대의 병거를 보았다(슥 6:1).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방에 보낼 심부름꾼들을 가지고 계신다.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이들은 이성과 지성을 갖추었고 여호와의 등불이라 일컬어지는 사람의 영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사자들 즉 천사들은 사람의 모양을 하고 나타난다. 이는 때라 이르렀을 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그 형상으로 나타나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속성도 지니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 네 생물 모두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5절). 그러나 그 외에도 사자, 소, 독수리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각각 종류별로 가장 뛰어난 것으로서 사나운 짐승에서는 사자를, 유순한 짐승 가운데에서는 소를, 날짐승 가운데에서는 독수리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10절). 지상의 생물들이 가지고 있는 부분적인 완전함이 하늘의 천사에게서 한꺼번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천사들은 사람의 명철을 갖고 있으나 실상은 훨씬 능가한다. 천사들은 또한 부드러움과 인간성에 있어서 사람과 비슷하다.

사자는 그 힘과 용감함에 있어서 사람을 능가한다. 따라서 이 점에 있어서 사자와 비슷한 천사들은 사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소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수행하는 근면과 끈기에 있어서 사람보다 뛰어나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는 일을 하는 천사들은 소의 얼굴을 하고 있다.
독수리는 날렵함과 꿰뚫는 듯한 눈길, 치솟는 그 높이에 있어서 사람들을 능가한다. 따라서 위에 것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깊은 신비를 멀리까지 보는 천사들은 독수리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6절). 신앙과 소망은 영혼의 날개로서 영혼은 그 날개로 치솟아 오른다. 또 경건하고 헌신적인 사랑은 앞으로 전진해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하나의 날개이다. 그들의 날개는 완전한 연합과 일치를 표시하기 위하여 연결되어 있었다(9-11절). 그들의 날개 중 두 개는 그들의 몸 즉 그들이 입고 있던 영의 몸을 덮는데 사용하였다.

그들의 다리는 곧았다(7절). 즉 그들은 바르고 확실하며 굳건하게 서 있었다. 그들의 발은 날아 다녔다(70인역은 이렇게 되어 있다). 즉 그들은 너무나 신속하여 마치 날아 다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움직이기 위한 손도 가지고 있었다(8절). 그것은 사람의 손이었다. 그 손은 봉사를 하기에 적합하도록 놀랍도록 잘 만들어졌고 이성과 명철에 의해 통제를 받는다. 송아지의 발은 그들의 동작이 신속함을 의미한다. 그 생물들은 활동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봉사해야 할 일이 있으면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였다(9,10절). 만약 우리의 눈이 이와 같이 단 하나라면 우리의 몸 전체는 빛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눈이 하나라는 이야기는 마음의 진실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일제히 자기의 이를 향해 앞으로 곧게 나아갈 뿐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다.

행할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9,12절). 그것들의 마음은 분산되는 법이 없었다. 그것들은 돌이키지도 아니하였으며, 옆으로 비키지도 아니하였다. 신이 어느 편으로 가려면 그 생물들이 그대로 가되(12절). 하나님의 신이 가라고 하는 곳으로 그것들은 나아갔다.

선지자는 그 생물들을 그것들 자체의 빛으로 말미암아 보게 되었다(13절). 그것들은 마치 불타는 '숯불'같은 모양이었다. 선지자는 '그 생물들 사이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는 매우 발은 불을 보았는데, 그 빛으로 해서 생물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광명의 천사들은 언제나 빛 가운데 있으나 우리는 그들과 그들이 행하는 일들을 등불에 의해서 즉 그들 사이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등불의 희미한 빛에 의해서 볼 수 있을 뿐이다. 날이 밝고 어둠이 사라지는 날이 오면 그때 우리는 그들을 분명하게 보게 될 것이다.

출처 ; 메튜헨리 주석

라파엘로 / 에스겔이 본 환상

 

 

네 바퀴 환상 및 여호와의 현현(顯現)(에스겔 1:15-28)

 

[ 성경묵상 ]

하나님은 사방에 눈이 가득한 수레바퀴를 타고 온 세상을 살피신다. 궁창 위 구름과 폭풍 속에 좌정하신 그 분에게서 무지개가 사방으로 뻗쳐 나오며 두려움과 희망을 보여준다.

[ 질문 하나 ] 네 생물들의 곁에 있는 네 바퀴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17-20절)

에스겔이 본 환상은 매우 난해하다. 그러나 날개를 가진 네 생물(스랍)과 네 바퀴(수레)가 보여주는 분명한 메시지는 하나님의 보좌가 '성전'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수레바퀴 둘레에 눈이 가득한 것은 하나님이 모두 보신다는 뜻이다. 역사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도 그분의 눈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온 세상을 살피는 눈을 가진 수레를 움직이는 것은 네 생물이고, 그들은 하나님의 영의 의지대로 움직인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정관념이나 오랜 관습에 매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하나님의 주권) 역사를 움직여 가신다. 그 하ㅏ님이 용사와 같이 오고 있다는 것은 큰 도전을 준다.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가가 아니라, 오늘 우리가 그의 편에 서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야 한다.

[ 질문 둘 ] 네 생물들의 머리 위에는 무엇이 있는가?(22,26-28절)

네 생물의 머리 위에는 수정 같이 맑은 궁창이 펼쳐져 있고 하나님의 보좌가 그 위에 있다. 그리고 보좌에 계신 이에게서는 사방으로 무지개와 같은 광채가 난다.

에스겔이 본 '궁창'과 '많은 물소리' 그리고 '무지개'는 모두 창조 기사를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이다. 동시에 그 이미지는 노아의 심판을 떠올리게도 한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죄로 망가진 세상을 심판하며 새로운 창조를 행하는 분이시다.

무지개가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며,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가져오실 구원과 회복이다. 그러나 무지개가 있기 전에 먼저 비가 있다. 새창조가 있기 전에 심판이 있다는 의미이다. 이 땅의 없어질 것들에 헛된 희망을 두고 살아가기 쉬운 우리에게 큰 경각심을 일깨워주며, 두려움 너머의 참 희망을 보여주기도 한다.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4-14절 ; 에스겔이 선지자의 소명을 받기에 앞서 본 환상 / 여호와께 수종드는 네 생물의 환상

5-21절 ; 네 생물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는 네 바퀴 환상

그 바퀴는 네 생물의 전후좌우 네 얼굴을 따라 하나씩 있고, 그 바퀴들 안에 또 바퀴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그 바퀴 둘레로 무수히 많은 눈이 박혀 있었으며 그 바퀴 안에 이 네 생물을 움직이는 영이 있었다. 이와 같은 모습은 네 생물의 모습만큼이나 기이하여 인간의 언어로 정확하게 묘사하거나 그 묘사된 것을 보고 그 모습을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생물의 영이 움직이는 대로 생물이 따르듯이 이 바퀴들 역시 그 움직임을 따라 행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여호와의 뜻에 따라 철저히 순종하는 생물과 바퀴의 모습을 강조해 준다.

이 단락에서 ‘바퀴’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명확하게 해석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이와 관련해 유대인 신학자 파인버그(Feinberg)는 이를 시간의 순환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즉 바퀴는 하나님의 우주에는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이 계속해서 진행한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해석한 것이다. 시간 가운데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멈춤없이 진행하는 것이 사실이란 점에서 이 견해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15. ○내가 그 생물들을 보니 그 생물들 곁에 있는 땅 위에는 바퀴가 있는데 그 네 얼굴을 따라 하나씩 있고

그 때에 내가 그 생물들을 바라보니, 그 생물들의 곁에 땅 위에는 바퀴가 하나 있는데, 그 바퀴는 네 얼굴을 따라 하나씩 있었다.

원문을 보면 개역 개정판 성경이 번역하지 않은 ‘례힌네’로 시작하고 있는데 이는 ‘그런데 보라!’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감탄사는 에스겔 선지자가 북방에서 오는 폭풍과 큰 구름을 보았을 때에도 사용한 단어로서(4절), 현재 그의 눈앞에 펼쳐진 환상이 매우 놀랍고 기이하여 그 자신도 정신이 현황해질 정도였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한편 혹자는 네 바퀴의 환상이 마차나 수레를 나타내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Matthew Henry). 그러나 에스겔이 본 바퀴는 네 생물을 지탱하고 있지 않고 그 곁 땅에 있었다는 점에서 수레나 마차의 모양과는 다르다. 실로 이것은 인간의 상상력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기이한 모양올 띄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16-18절 ; 에스겔이 환상 중에 목격한 네 바퀴의 기이한 형상과 구조 기술

16. 그 바퀴의 모양과 그 구조는 황옥 같이 보이는데 그 넷은 똑같은 모양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모양과 구조는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으며

그 바퀴의 형상과 구조를 보니, 그 형상은 빛나는 녹주석과 같고 네 바퀴의 형상이 모두 똑같으며, 그 구조는 마치 바퀴 안에 바퀴가 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황옥’(타르쉬쉬) ; 스페인 등지에서 나는 토파즈(topaz), 즉 불그스름한 황금색을 띤 보석 / 원문을 보면 이 단어 앞에 ‘케엔’이란 단어가 있는데 이를 직역하면 ‘눈 같다(like eye)’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엔’이라는 단어는 ‘눈’을 의미하는 것이기보다 ‘색깔(NKJV, color)’, 혹은 ‘번쩍거림(NJB, glittering)’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이는 그 바퀴들이 진한 황금색을 하고 광채가 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혹자는 이 ‘엔’이라는 단어가 눈의 형태를 띠고 있는 진귀한 조약돌이라 주장하기도 한다(Block). 이는 이 단어의 아카디아 어원 ‘이누’가 원래 ‘돌’을 의미하는 단어였다는 데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고려 될 수 있는 주장이기는 하나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으며"에서 유래한 영어 표현 ‘wheels within wheels'이 이해할 수 없는 바를 나타낸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본문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혹자는 본문의 ‘빼토크’의 원형 ‘타웨크’를 3차원적 공간의 내부가 아니라 2차원적인 의미에서의 ‘중앙’이라는 의미로 이해하기도 한다.

즉 큰 바퀴의 내부 공간에 또 다른 작은 바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큰 바퀴의 외부면 한복판에 작은 바퀴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본다. 이는 오늘날 자동차의 바퀴에 바퀴의 큰 원을 고무 타이어가 형성하고 내부의 작은 원을 축과 덮개가 형성하고 있는 것과 같은 모양으로 보는 것이다.

이와 다르게 칼빈(Calvin)은 본문에서 말하는 바는 두 바 퀴의 크기가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두 바퀴가 연결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렇게 두 바퀴가 연결된 것은 세상 역사의 다양한 진행 과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역본은 개역 개정판의 번역의 입장을 취한다. 아마도 하나님의 세상 역사 진행 과정에 감취어진 섭리가 있다는 사실 혹은 섭리에 대해 인간이 다 파악할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단언하기 어렵다.

17. 그들이 갈 때에는 사방으로 향한 대로 돌이키지 아니하고 가며

그 바퀴들은 사방 어디로 가든지, 방향을 돌이키지 않고서도 앞으로 나아갔다.

네 바퀴 역시 앞선 9절과 12절에서 소개된 네 생물이 진행할 때와 같은 방식으로 진행한다. 진행 방향을 바꿀 때에도 회전할 필요 없이 즉각적으로 방향을 바꾸어 이동할 수 있다.

‘돌이키다’는 의미로 번역된 ‘잇쌀부’의 원형 ‘싸바브’는 원을 그리며 회전하는 동작을 나타내는 동사로서 12절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18. 그 둘레는 높고 무서우며 그 네 둘레로 돌아가면서 눈이 가득하며

그 바퀴의 둘레는 모두 높고, 보기에도 무서우며, 그 네 둘레로 돌아가면서, 눈이 가득하였다.

17절은 바퀴의 몸체 모습이 이 땅에서는 볼 수 없는 기이하며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형상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 둘레’에 해당하는 ‘갑베헨’의 원형 ‘까브’는 원래 둥근 테(rim)를 의미한다(왕상 7:33). 본문에서는 이것이 바퀴 자체의 테두리인지, 아니면 그 바퀴 위쪽으로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어떤 몸체의 테두리를 가리키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10:12에 따르면, 그것이 단순히 바퀴의 외곽 테두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복수형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각 바퀴마다 모두 이 둥근 형태의 외곽 테두리가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다. 그것들은 높고 두려운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고 기록된다.

바퀴가 높다는 것은 곧 공중에 떠 있어 높다는 표현으로 이해되기보다 그것이 땅에서 볼 때에 올려다 보아야 할 정도로 매우 크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는 ‘무서우며’란 표현을 한 번 더 강조하는 것으로 그 위용이 대단함을 나타낸 것으로 풀이된다.

바퀴의 둘레에 가득한 수많은 ‘눈’은 모든 곳을 다 보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감찰하심(대하 16:9)과 모든 사상을 아시는 여호와의 전지성(omniscience)을 상징한다.

19. 그 생물들이 갈 때에 바퀴들도 그 곁에서 가고 그 생물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 바퀴들도 들려서

그 생물들이 나아가면, 바퀴들도 생물들의 곁에서 함께 나아갔고, 생물들이 땅에서 떠오르면, 바퀴들도 함께 떠올랐다.

16-18절에서는 네 생물에 따른 네 바퀴의 기이한 형상과 구조가 소개되었다. 이제 19-21절에서는 네 바퀴가 생물의 영에 따라 움직이며 네 생물과 동일하게 운행된다는 사실을 밝힌다.

먼저 이 단락의 서두에 나오는 본절은 네 생물과 바퀴들의 행동에 있어서의 일체성을 강조하는 문장이다.

여기 에서 ‘들릴 때에(우베힌나세)’와 ‘들려서(인나세우)’에 해당하는 단어들은 각각 원형 ‘나사’의 수동태(Niphal) 부정사형과 수동태 미완료형이다. 여기에서 수동태는 그것들이 스스로 공중으로 뜨는 것이 아니라, 바퀴 안에 있는 영의 지시 혹은 조종에 의해 땅 위 즉 공중으로 들린 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다. 여기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그의 수종자들의 철저한 순종이 암시되고 있다.

20. 영이 어떤 쪽으로 가면 생물들도 영이 가려 하는 곳으로 가고 바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들 가운데에 있음이니라

그 생물들은 어디든지, 영이 가고자 하면, 그 영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갔다. 바퀴들도 그들과 함께 떠올랐는데, 생물들의 영이 바퀴 속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20절은 12절과 거의 유사한 의미를 전달한다. 그러나 추가된 것이 있다면 바퀴들 역시 영이 주관하는 대로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이며 그 바퀴들 안에 영이 있다는 사실이다.

‘영’에 해당하는 ‘루아흐’는 12절에서도 사용된 바 있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의지 혹은 생물과 바퀴를 움직이는 원동력을 상징한다.

‘생물의 영’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생물의 영’이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으며 혹은 생물올 다스리고 인도하는 하나님의 의지 혹은 원동력을 의미하는 의미로 볼 수 있다.

후자의 의미에 따르면 ‘생물에게 있는 영’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이해하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따름을 나타낸다는 점은 동일하다.

‘영’이라는 실체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뉵 24:39). 그런데도 그 영이 바퀴들 안에 있다고 표현한 것은 에스겔이 본 그 영이 어떤 형체를 가진 영이란 의미가 아니라, 어떤 형체가 없는 찬란한 광채나 빛과 같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영’에 해당하는 ‘루아흐’는 단수이지만, 그 영이 존재하고 있는 ‘바퀴들 가운데’에 해당하는 ‘빠오판님’은 복수형 명사이다. 그렇다면, 네 개의 바퀴들 각각의 내부에 한 영씩 모두 네 영이 있었다는 것인지, 그 네 개의 바퀴들이 서로 교차하는 어떤 한 부분이 있어서 한 영이 그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이처럼 모호한 묘사는 본장의 환상 자체를 에스겔이 인간의 이성이나 지식, 언어 을 가지고 그대로 옮길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여기의 바퀴들 안에 있는 한 영의 모습 역시 불가해한 표현으로 남겨두어야 할 것 같다.

한편 칼빈(Calvin)은 이렇듯 바퀴가 생물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철저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다스림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의미로 본다면 아무리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세상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믿으며 하나님을 묵묵히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를 믿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성령님이 내주하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21. 그들이 가면 이들도 가고 그들이 서면 이들도 서고 그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는 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영이 그 바퀴들 가운데에 있음이더라

생물들이 나아가면 그 바퀴들도 나아갔고, 생물들이 멈추어 서 있으면, 바퀴들도 멈추어 서 있었다. 또 생물들이 땅에서 떠오르면, 바퀴도 그들과 똑같이 떠올랐는데, 생물들의 영이 바퀴들 속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본절은 네 생물과 네 바퀴의 운행이 일치함을 밝히는 19,20절의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한 부분이다.

그런데 본절의 주어는 모두 남성 3인칭 복수 형태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 개역 개정판 성경이 ‘이들도’로 번역한 ‘하오판님’은 남성 복수 명사로서 문자적으로 ‘그 바퀴들(KJV, the wheels)’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표현을 볼 때 먼저 행하고, 먼저 그치고, 먼저 들리는 것들이 비록 남성 복수형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앞선 5,13,15,19절의 네 생물을 지칭하는 여성 복수 명사 ‘하하요트’임이 거의 확실하다(Block). 히브리어에서는 여성형 선행사를 남성형 대명사로 받는 것이 문법적으로 허용되기에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

어쨌든, 본절은 바퀴 안에 있는 영의 움직임, 혹은 조종에 따라 생물과 바퀴가 일사불란(-絲不亂)하게 함께 움직인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수종자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4-21절 ; 에스겔이 선지자 소명올 받기에 앞서 목격한 여호와 영광의 현현 기사 전반부 / 여호와께 수종드는 네 생물의 환상과(4-14절) 네 생물에 따 른 네 바퀴의 환상(15-21절)

22-28절 ; 여호와 영광의 현현 기사 후반부 / 네 생물의 머리 위에 존재하는 수정 궁창 환상(22절) 및 그 궁창을 배경으로 장엄하게 운행하는 네 생물 환상(23-24절) 그리고 궁창 위에서의 한 음성의 발현과 네 생물의 정지(25절) 그리고 궁창 위 보좌에 앉으신 여호와의 영광의 현현 환상 등(26-28절)을 소개한다.

후반부의 환상들은 철저하게 지상의 모든 것들을 초월해 존재하시는 여호와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나아가 이러한 환상들이 바벨론의 이스라엘 백성 식민지에 나타났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 바벨론 땅 위에 초월적으로 존재하시면서 온 세상을 통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야곱이 벧엘에서 꿈에 나타나신 여호와 하나님을 보고 그가 과연 거기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창 28:16)을 통해서도 암시되듯이, 여호와는 단지 예루살렘 성전에만 좌정해 계시는 편협한 지역신이 아니라, 그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간 식민지에서도 만나뵐 수 있는 분이시며 실로 온 세상 가운데 편재하신 분이시다. 여호와는 땅의 어느 한 곳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며 세상을 초월하여 궁창 위 보좌에 계시며 온 땅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분이시다.

22. ○그 생물의 머리 위에는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이 있어 보기에 두려운데 그들의 머리 위에 펼쳐져 있고

그 생물들의 머리 위에는 창공 모양의 덮개와 같은 것이 있는데, 수정과 같은 빛을 내서, 보기에 심히 두려웠으며, 그 생물들의 머리 위에 펼쳐져 있었다.

본절은 에스겔 선지자가 본 네 생물 머리 위의 존재하는 수정 궁창에 대한 환상을 소개한다.

여기서 ‘궁창’에 해당하는 ‘라키아으’는 어원적으로 ‘넓게 펼쳐진 것’을 나타내고 ‘광활한 공간’, ‘창공’ 등을 나타낼 때 사용되며, 창조 기사에서는 대기권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창 1:6,7,8). 본절에서 에스겔은 그 궁창의 ‘형상’이 있으며, 그것이 마치 ‘수정’ 같다고 기록한다. 이러한 기록은 본문의 ‘라키아으’가 오늘날 대기권이 아닌 다른 신비스런 무엇임을 암시한다. 이는 반구형의 둥근 천장(dome) 모양의 창공을 암시하여,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발등상으로 여기는 청옥을 편듯한 하늘 같이 청명한 것(출 24:10)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Brwonlee).

여기에서 ‘수정’으로 번역된 ‘학케라흐’의 원형 ‘케라흐’는 구약 성경에서 모두 7회 사용되었으며, 본절을 제외한 나머지 6회는 모두 추위 및 얼음과 관계된 의미로 사용되었다(창 31:40 ; 욥 6:16 ; 37:10 ; 38:29 ; 시 147:17 ; 렘 36:30). 그래서 NIV와 YLT는 본문의 ‘라키아으’도 ‘얼음(ice)’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한 얼음으로서의 뉘앙스보다 맑고 투명한 뉘앙스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궁창은 네 생물과 궁창 위에 있는 보좌 사이를 분리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다. 사도 요한이 환상 중에 본 천국의 모습 가운데에는 여호와의 보좌 앞에 있는 ‘수정 같은 유리 바다’ 가 있었다(계 4:6). 이것이 본절의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과 동일한 것이라 유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궁창은 에스겔 선지자가 보기에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바퀴의 둘레가 두려운 것(18절)과 같다. ‘두려움’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한노라’의 원형 ‘야레’는 18절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된 단어로서 공포심과 더불어 경외심을 불러 일으키는 뉘앙스를 지닌 단어이다(창 3:10). 에스겔 선지자는 기이한 형상을 환상으로 보면서 그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길도 찾지 못하였으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두려운 감정을 느꼈다. 이는 그 궁창이 피조물이 범접할 수 없는 거룩하신 여호와의 임재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이기 때문이다.

23. 그 궁창 밑에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향하여 펴 있는데 이 생물은 두 날개로 몸을 가렸고 저 생물도 두 날개로 몸을 가렸더라

그런데 창공 모양의 덮개 밑에는 그 생물들이 펼친 날개가 서로 맞닿아 있었다. 이쪽 생물들이 두 날개로 자기의 몸을 가리고 있고, 저쪽 생물들도 두 날개로 자기의 몸을 가리고 있었다.

24. 생물들이 갈 때에 내가 그 날개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와도 같으며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으며 떠드는 소리 곧 군대의 소리와도 같더니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내렸더라

그들이 움직일 때에는, 나는, 그들이 날개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마치 힘찬 물소리와도 같고, 전능하신 분의 천둥소리와도 같고, 떠드는 소리, 곧 군인들의 함성과도 같았다. 그들은 멈추어 서 있을 때에는 날개를 드리웠다.

에스겔 선지자는 그 생물들이 행하면서 내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 소리는 이 세상에서 들어본 적이 없는 신버스런 소리였다. 그러므로 에스겔은 그 소리를 정확하게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고, 다만 독자들이 최대한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비유법을 사용하여 그 소리가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수많은 군대의 떠드는 소 리와도 ‘같고’,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다’라고 표현하였다.

에스겔은 생물들의 날개 소리를 ‘많은 물소리’에 비유하였다. 구약 성경에서 ‘많은 물소리’는 43:2에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나왔고, 시 93:4에서는 자연의 일렁거리는 바다 파도 소리 혹은 여호와를 대적하는 인생의 완악한 태도들을 빗댄 것으로 사용된다. 본문에서는 생물들이 내는 그 많은 물소리 같은 소리가 곧 하나님께서 발하시는 음성을 반영하는 소리라는 사실을 43:2의 용례를 통해 알 수 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환상 중에 본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 역시 ‘많은 물소리 같은’ 음성이었다(계 1:15).

생물들의 날개 소리가 ‘전능자의 음성’으로 비유된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음성이 어떤 소리인지는 알 수 없으나 43:2을 고려하면 많은 물소리 같은 음성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마지막으로 생물들의 날개 소리는 ‘떠드는 소리, 곧 군대의 소리’로 비유된다. 이는 진중에서 수많은 군사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를 의미한다. 그러한 소리는 듣는 자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는 소리이다. 에스겔 선지자는 생물들이 날개를 부딪치면서 내는 이와 같은 소리들을 들으면서 정신이 현황해졌을 것이며, 그 소리가 여호와의 영광을 반영하는 어떤 소리 또는 천상의 존재에 가까운 어떤 소리라고만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선명하게 그의 감각 작용으로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인간이 가진 청각 기관인 귀는 물리적인 소리, 곧 자연계에서 자연 현상과 더 불어 들을 수 있는 소리, 인간이 의사소통하는데 상대방의 언어에만 반응하기 때문이다.

25.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서부터 음성이 나더라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내렸더라

그들의 머리 위에 있는 창공 모양의 덮개 위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멈추어 서 있을 때에는 날개를 드리웠다.

26.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또 그들의 머리 위에 있는 창공 모양의 덮개 위에는, 청옥처럼 보이는 보석으로 만든 보좌 형상을 한 것이 있었고, 그 보좌 형상 위에는, 사람의 모습과 비슷한 형상이 있었다.

보좌 위의 한 형상이 있으며, 사람의 모양 같다는 것은 그것이 정확하게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단지 에스겔이 목격한 존재가 이 지상의 사람의 모양을 닮았다는 것에 강조점이 있다. 본절 상반절 강해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 형상은 성육신하기 전 천상에서 신적 신분으로 존재하셨던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사람’에 해당하는 ‘아담’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든 ‘사람’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단어이다(창 1:26). 이 동일한 단어가 보좌 위에 계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사용되었다는 것은 그가 장차 그런 사람의 모습으로 성육신하실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빌 2:8). 종교 개혁자 칼빈(Calvin)은 본절의 경우와 더불어 구약 시대 하갈과 기드온과 삼손의 부모와 다니엘 둥에게 나타났던 신적 존재(창 16:7 ; 삿 6:11 ; 13:3 ; 단 10:5)가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본체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의 현현(顯現)이었다고 주장하였다.

27. 내가 보니 그 허리 위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 같고 내가 보니 그 허리 아래의 모양도 불 같아서 사방으로 광채가 나며

또 나는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그 위쪽에서 금붙이의 광채와 같은 것이 불꽃처럼 안팎으로 그를 둘러싼 것을 보았는데,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그 아래쪽에서도, 나는 불꽃과 같은 모양을 보았다. 이렇게 그는 광채로 둘러싸여 있었다.

여기에 묘사되고 있는 사람 모양 같은 형상, 즉 성육신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다니엘이 헛데겔 강가에서 보았던 그 형상과 외관이 유사하며(단 10:5,6), 본서 8:2에 기록된 여호와의 권능의 현현을 묘사한 것과도 유사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는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모습(딤전 6:16)을 연상시키는 표현이기도 하다.

또한 불 같은 것이 온 외관을 감싸고 있는 이 모습은 13절에 묘사된 네 생물의 외관과도 홉사하다. 한편 여기서 ‘불’에 해당하는 ‘에쉬’는 육신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위엄과 두려움, 심판 등을 상징한다.

그리고 본문에서 ‘그 속과 주위’란 표현은 그 사람 모양의 형상이 온통 불같은 것으로 휩싸여 있다는 사실올 강조해 준다.

‘단 쇠 같아서’에 해당하는 어구 ‘케엔 하쉬말’은 4절에서도 사용된 어구로서 문자적으로는 ‘호박의 눈 같은’ 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번쩍거리는 호박 같은 것(NRSV, like gleaming amber)’ 또는 ‘이글거리는 금속 같은 것(NIV, like glowing metal)’이란 의미를 지닌 표현이다. 이 역시도 사람의 육안으로는 감히 쳐다볼 수조차 없는 하나님의 영광을 묘사한 것이다.

따라서 에스겔 선지자는 이를 그대로 묘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주님의 영광의 광채를 감히 똑바로 쳐다보고 완벽하게 묘사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누구이겠는가!

"사방으로 광채가 나며"는 4절의 ‘빛이 그 사방에’에 해당하는 원문과 동일하다. 신적 존재 자체가 찬란한 광채를 발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서 본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은 모습을 보고서 엎드러지고 말았다(계 1:16,17), 사람의 모양 같은 형상에서 이처럼 눈부신 광채가 비추는 것은 그가 빛 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기 때문이며(히 1:3), 그 자신 역시 그 빛을 반영하는 빛과 동일한 존재이신 성육신 이전의 성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요 1:9-12),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의 현현은 그분의 찬란한 영광만 아니라 그분의 빛으로만 이 세상의 어두움이 소멸될 수 있음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요 8:12).

28. 그 사방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

그를 둘러싼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 속에 나타나는 무지개 같이 보였는데, 그것은 주의 영광이 나타난 모양과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그 때에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내가 들었다.

무지개는 하나님이 노아 이후 노아와 맺어주신 새 언약의 증표로서, 새로운 창조와 희망의 상징이다(창 9:12-17). 그러나 무지개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다는 것은 홍수의 심판이 먼저 있을 것임을 보여 준다. 그분의 백성이나 심지어 성전조차 예외가 아님을 경고한다.

에스겔은 보좌 위에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 주위에서 발하는 현란한 광채의 모양은 마치 무지개의 모습과 같았으며, 그것이 곧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과 같은 모양이었다고 묘사한다.

여기서 ‘무지개’는 원래 비가 그친 직후 수많은 작은 물 알갱이가 태양 빛올 받아 사람의 육안에 일곱 빛깔로 보이는 자연 현상이다. 그런데 여기서 특별히 무지개가 '구름에 있는'으로 묘사된 것은 노아 홍수 직후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는다는 표시로 ‘구름 속에 무지개를 두었다’는 사실(창 9:13,14,16)을 연상케 한다.

이러한 무지개가 거룩한 보좌 사방에 빛나고 있다는 것은 그 보좌가 인간 구원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은혜로운 보좌임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혹자는 그 보좌 주위에 무지개 같은 것이 비쳤다는 사실에 대해 에스겔에게 보여진 환상이 단색의 무미건조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총천연색의 화려함으로 나타나 에스겔을 압도했다고 해셜하기도 한다(Block). 이 무지개 모습의 사면 광채가 보좌에 계신 분의 위엄과 화려함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하였을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에스겔 선지자는 바로 그 무지개 모양의 총천연색 광채를 내뿜는 보화 위의 그 형상이 곧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고 기록한다. 이것은 에스겔이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 보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26절 상반절 강해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여호와와 동일 본체이신 성육신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은 문자적으로 ‘형상의 모양, 여호와의 영광’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그 형상의 모양이 곧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말한다. 즉 그는 여호와의 영광올 나타내는 분이라는 사실에 대한 또 다른 증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며 본체의 형상이신(히 1:3) 성자 하나님의 영광과 그 보좌가 바벨론에 포로된 유다 사람들 가운데 거하는 선지자에게 환상으로 보였다는 것은 하나님 임재의 상징적 처소였던 성전을 떠난 그분의 영광(10:18)이 그의 언약 백성을 완전히 떠나 버린 것이 아님을 함의한다. 곧 하나님께서는 범죄로 인하여 징계하셨지만 고통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들과 여전히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를 온전히 앙망하며 그에게 돌이킨다면 언제든 회복의 소망은 남아 있는 것이다.

에스겔 선지자가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 같은 모습만 보았어도 그 즉시 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본문에서 ‘엎드려’는 문자적으로 ‘그래서 내가 내 얼굴을 떨어뜨렸다(NKJV, 1 fell on my face)’라는 의미이다. 구약 성경에서 ‘얼굴을 떨어뜨린다’는 표현은 종종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셜 때에 하는 행동으로 나타난다(창 17:3 ; 신 9:18 ; 수 7:6). 에스겔은 여호와의 영광의 광채를 감히 두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그는 그것을 보면서 즉각적으로 여호와의 임재와 관련된 어떤 것임을 확실히 깨닫고 자신의 얼굴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에스겔의 행동들은 신적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의 태도임과 동시에 그 대상을 경배하기 위한 자세였다. 그리고 그 때에 그 보좌에서 음성이 들렸고, 그는 그 음성을 귀 기울여 들었다. 그 음성은 생물들이 내는 소리와 다른, 에스겔에게 소명을 주시는 여호와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3,25절 ; 2:1,2).

본문에서 ‘들으니라’는 말씀을 귀 기울여 들을 뿐 아니라 그에 부합하는 순종까지도 내포하는 의미의 표현이다(신 6:4). 에스겔의 이러한 자세는 앞서 그가 환상 중에 목격한 네 생물들의 태도와 일치하는 것이며, 여호와 말씀에 대한 모든 성도들의 마땅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삼상 3:10). .

[ 복있는사람, 2018년 11,12월호 ]

하나님의 병거 ( 1:15-25 )

1. 바퀴의 환상(15-21)

하나님의 영광은 윗 세상의 광채 속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결같이 통치하고 계시는 여기 이 아랫 세상에서도 나타난다. 선지자가 그 생물들을 바라보고 그 영광을 바라보고 있을 때, 이 환상이 그의 눈 앞에 전개되었다. 하나님의 섭리가 시행되는 방식들이 여기에서는 바퀴들, 즉 병거의 바퀴에 비유되고 있다.

바퀴는 그 생물들같이 제 스스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지만,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바퀴들이 그 생물들 곁에 있다고 기룩되어 있다. 생물들과 바퀴 사이에는 대단히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함께 움직이고 함께 멈춘다. 생물들이 움직이면 바퀴가 그 곁에서 함께 나아갔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일을 하실때에는 제2의 원인들 즉 부수적인 것들이 모두 그 일을 돕게끔 하신다. 만일 그 생물들이 땅에서 위로 올라가면 즉 자연의 추세를 뛰어 넘어 어떤 일을 하려 한다면, 바퀴도 그 생물들과 함께 움직여 그 뒤를 따라 올라간다(19-21절). 그 까닭은 그 '생물의 신'이 바퀴에 있기 때문이었다. 즉 천사들을 이끌고 통어하시는, 하나님의 지혜, 권능, 성결이 아랫 세상에 있는 피조물들의 모든 움직임도 똑같이 규율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영혼으로서 윗 세상과 아랫 세상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사, 마치 육체의 상체와 하체가 조화를 이루며 움직이듯,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며 운행하도록 하신다. 그리하여 '어디든지 신이 가려 하면'(즉 하나님께서 행하시고자 원하시고 뜻하신 것이면 무엇이든지) '생물의 신'도 그 곳에 가도록 하신다.

바퀴는 각기 네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네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쓰여 있다(15절). 이는 하나님의 섭리가 동서 남북 어느 쪽에서도 행사되며, 가장 멀리 있는 구석에까지 이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에 에스겔은 그것을 하나의 바퀴 곧 하나의 구체로 보았다. 그러나 곧 그것이 네 개이면서도 모두 같은 모양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16절). 이것은 다양한 사건이 한 가지의 뜻을 이루는 것을 나타내 준다.

바퀴들의 형상과 구조는 '황옥'같았다. (어느 역본에는 '다시스의 색깔'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바다색을 의미한다). 이 세상 만물의 본성은 바다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즉 끊임없이 유동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계속 변함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바닷물이 밀려 들어오고 밀려 나가듯, 섭리도 순서에 따라 진행된다. 우리의 안목은 좁아 전체를 보지 못하고 극히 일부밖에 보지 못하기 때문에 하늘이 푸르게 보인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시종'을 알 수가 없다(전 3:11).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심히 세미한 소리'밖에 들을 수 없으므로(욥 26:14) 그 너머에 있는 모든 것을 단지 푸르게만 보일 뿐이다. 그 행사는 우리가 볼 수 있는 영역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다.

그 형상과 구조는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으며. 이것은 감히 수치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방법은 언뜻 보기에 복잡하고 난해하며 헤아릴 수 없는 듯이 보이지만 결과를 보면 모두 지혜롭고 질서 정연하게 배치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바퀴들의 동작은 변동이 없고 지속적이다. 행할 때에는...돌이키지 않고 행하며(17절). 이는 그 바퀴들이 결코 일을 그르치는 적이 없을 것임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면전에서 일을 처리하시며 계속 진행시키신다. 심지어 우리가 보기에는 뒤로 후퇴하는 것같이 보일 때라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 바퀴들은 신이 지시하시는 대로 행하기 때문에 돌이키는 법이 없다. 만일 우리가 오로지 신의 인도하심을 받고 그의 지시를 따른다면 뒤로 돌이키는 경우가 생기지 않을 것이고 어긋난 길로 갔을 때라도 회개함으로 다시 바른 길로 향하게 될 것이다.

생명의 신('생물의 신'을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이 바퀴 가운데 있어서 바퀴들을 용이하고 평탄하게 움직였다. 바퀴 주변에는 '눈'이 가득하였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섭리는 무한한 지혜로 일일이 지시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다. 만물의 결국은 눈먼 운수, 즉 행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온 땅을 두루 다니시며 모든 장소에 거하시면서 선과 악을 판단하시는 여호와의 눈동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2. 생물들의 머리 위에 있는 궁창(22-25)

선지자는 그 생물들의 머리 위에 궁창이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은 하늘 아래서, 즉 하늘의 감시와 영향 아래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수정같은 궁창의 형상이 펴 있어 보기에 심히 두려우며. 그는 그 궁창의 광대함과 밝음으로 인해 크게 놀라 심히 큰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궁창 위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시며 찬사들은 궁창 아래에 있다. 이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지자는 또한 천사들의 날개짓 소리를 들었다(24절). 이는 선지자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궁창에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한 소리였다(25절). 선지자는 궁창에서 나오는 소리, 즉 보좌 위에 좌정하신 이로부터 나오는 음성을 들었다(25절).

무감각한 세상을 일깨워 놓은 뒤에 천사들은 깊은 고요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보다 잘 들리도록 하기 위하여 '날개를 드리웠다.' 하나님께서 미리 섭리하시는 이유는 말씀하시는 분의 음성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의 환상 ( 1:26-28 )

에스겔이 본 환상의 다른 부분들은 이 부분에 대한 서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부분들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천사들의 주시오, 이 아랫 세상의 제반사에 대한 최고의 주재자로 나타내셨었다. 지금 선지자에게 신성한 계시가 주어지고 있다. 우리는 생물들이나 바퀴들보다 더 위의 것들을 바라야 하고 영원한 말씀이신 분으로부터 계시받기를 소원해야 한다.

에스겔은 궁창에서 음성이 들려오자, 사도 요한이 그랬듯이 자기에게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쳐다보고 저기에서 '인자같은 이'를 보았다(계 1:12,13). 선지자가 본 그리스도의 이 영광은 생물들의 머리 위에 있던 궁창의 위에 있었다(26절). 구세주가 성육신하기 이전에 가지셨던 이 엄위과 권세는 성육신하시고 난 후의 그의 겸손을 훨씬 돋보이게 하고 있다.

그가 처음에 본 것은 '보좌'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왕의 권위를 지니고 임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보좌 위에 앉아 계신 것을 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가져야 한다. 사도 요한이 그의 환상 가운데에서 처음 본 것도 하늘에 있는 보좌였다(계 4:2). 그 보좌는 영광의 보좌, 은혜의 보좌, 개선의 보좌, 통치의 보좌 그리고 심판의 보좌이다. 선지자는 그 보좌 위에서 사람같은 형상을 보았다. 궁창 위에 있는 보좌에 곧 그렇게 지고한 상태에서조차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는 이가 앉아있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선지자는 인간의 영광을 능가하는 왕이시며 심판자되신 이께서 보좌에 계신 것을 보았다(27절). 하나님께서는 빛 가운데 거하시며 옷을 걸치듯 빛으로 옷을 입으신다. 허리 이상의 모양을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같고. 불이 속에 감싸여져 있었다. 허리 아래에 있는 불은 밖으로 비쳐나왔다.

어떤 사람들은 단쇠(흠정역에는 호박이라고 나와 있다)모양 안에 감추어져 있는 전자의 불이, 아무도 본 적이 없으며 볼 수도 없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또는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영광이 되었던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다름 아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요 1:14)인 것이다.

보좌는 무지개로 둘러 싸여 있다(28절). 이는 사도 요한의 환상에서도 그러하였다(계 4:3). 무지개는 위엄의 현시이면서 동시에 자비의 보증이다. 무지개는 은혜로운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에 대한 확증인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이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고 있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무지개를 모시고 그 언약을 기억하신다(레 26:42).

이 환상의 결론이 나온다.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처음부터 그랬듯이 선지자는 신중하게 하나님께 온갖 인간적인 상상을 배격하고 있다. 선지자는 '이것이 바로 여호와이시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호와의 영광'이라. 여호와께서는 그 영광 안에서 자신이 영광스런 존재임을 드러내시기를 기뻐한다. 그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아니며, 그 영광을 미미하게 반사하고 있는 '영광의 형상'이라. 아니 '그 영광의 형상'도 부적절하며, '그 형상의 모양' 즉 '참 형상'이 아니요 그 형상의 '그림자'라"(히 10:1).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선지자는 그 영광의 형상의 모양에 압도되었다. 그는 자기의 마음이 거룩한 경외감으로 가득찼다는 표시로 땅에 엎드렸다. 그가 본 이 모든 것은 앞으로 들어야 할 내용을 위해 그를 준비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교훈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출처 ; 메튜헨리 주석

 

새창조의 사역자로 부름 받은 에스겔(에스겔 2:1-10)

 

[ 성경묵상 ]

2장 요약 ; 본장은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사명을 부여하신 데 대한 기록이다. 환상으로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을 본 에스겔은 사명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용기를 불어 넣으신 후 안팎으로 재앙의 말이 기록된 책을 받아 먹게 하셨다.

2:1-10 ; 하나님은 에스겔을 택하셔서 포로된 유다 백성들에게 유다의 궁극적 종말을 선포하도록 하셨다. 비록 유다 백성들이 그의 말을 거역하더라도, 그는 끝까지 그들에게 슬픔과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여야 했다. 이제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을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감된 메시지를 선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명자가 가야 할 곳에 있는 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첫째, 패역한 백성,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3절)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조상들이 내게 범죄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나니

둘째,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4절)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셋째, 선지자의 말을 배척하는 자(5절)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

사명자가 지켜야 할 일은 무엇인가?

첫째,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6절).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둘째, 듣든지 안 듣든지 전해야 한다(7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셋째, 패역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먹어야 한다(8-10절).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 질문 하나 ] 하나님은 에스겔을 누구에게 보내셔서 말씀을 전하게 하셨는가?(3-4절)

에스겔은 절망적인 시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말씀과 비전을 받고, 성령으로 일으킴을 받아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하신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려는 사람들이다. 이들 패역한 백성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듣든지 안 듣든지 선지자는 가야 하고, 말씀을 전해야 한다. 귀가 닫힌 사람들, 변화되지 않을 사람들에게 보냄을 받은 것이 선지자의 운명이다. 참 슬픈 일이지만 해야 한다.

터키 땅에서 선교의 일을 하는 분들은 다 이러한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 자들이다. 하나님, 이들의 사역 위에 열매가 열리게 하시고, 그들에게 기쁨을 주옵소서.

[ 질문 둘 ] 이스라엘 자손이 아무리 패역한 백성이라 해도 선지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6-8절)

에스겔은 가시와 찔레 같은 백성에게 둘러싸여 있더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에스겔은 어둠과 혼돈 속에서 말씀을 받아 새 창조의 사람이 되도록, 아담의 창조 때와 같이 성령으로 일으키심을 받았다.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음으로 언약을 깨뜨렸다. 그러나 에스겔은 하나님이 먹으라고 하신 두루마리를 먹음으로 언약을 지켜야 했다. 모든 사람이 듣지 않아도 하나님의 선지자는 순종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사역에 동참해야 한다.

두루마리를 든 에스겔 / 미켈란젤로 / 바티칸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벽화 / 프레스코화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

그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일어서라.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에스겔 선지자가 너무나 찬란한 여호와의 영광의 현현 앞에 엎드려 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러일으키시고 선지자의 소명을 주셨다. 여호와께서는 에스겔이 계속해서 엎드려 있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여호와의 영광의 위엄에 압도되어 엎드려 있는 것은 변화산에서 영광에 도취되어 그곳에 초막올 짓고 떠나지 않기를 바라는 제자들의 태도(마 17:4)와 그 차원이 다르다. 하지만 에스겔이 속히 일어나 여호와의 사명을 받아 사역의 길로 나가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변화산의 영광에 도취된 상태에서 깨어나는 것만큼이나 시급한 일이었다. 여호와께서는 그에게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면서 그의 영올 통해 에스겔을 일으켜 세워 주신다(2절).

2.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그가 나에게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영이 내 속으로 들어와서,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그가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계속 듣고 있었다.

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조상들이 내게 범죄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나니

그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곧 나에게 반역만 해 온 한 반역 민족에게 보낸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처럼 이 날까지 나에게 죄만 지었다.

'패역한’에 해당하는 ‘함모레딤’과 ‘배반하는 자’에 해당하는 ‘마레두’의 어근은 ‘마라드’로서 동일하다. 이 단어는 원래 국제 정치적 역학 관계에서 봉신국(封臣國)이던 나라가 본래 섬기던 봉주국(封主國)을 배반하는 경우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인데(창 14:4 ; 왕하 18:7 ; 대하 36:13 ; 렘 52:3), 본문에서는 언약 백성 이스라엘의 여호와에 대한 태도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에스겔이 정치적 반역을 강조하는 단어인 ‘마라드’를 여호와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역을 묘사하는 데 사용한 이유는 이 단어가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와 사이의 언약 관계를 선명하게 부각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Wright).

고대 근동에서 봉주국과 봉신국 사이에 체결되었던 언약, 혹은 조약은 봉주국이 봉신국을 모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대신 봉신국은 봉주국을 충성을 다해 섬길 의무를 지도록 규정했다. 이와 관련하여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과 언약올 맺으셨고(출 19:5,6) 그들의 하나님이 되사 그들을 모든 어려움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고 오래 동안 보호해 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모든 의무를 방기해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열강을 의존하는 등 여호와를 배반하고 말았다. 바로 이와 같은 정황을 나타내기 위해 정치적 관계에서의 반역을 강조하는 ‘마라드’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패역함을 설명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본문 표현은 본서 20:38에서도 반복되고 있으며, 거기서 여호와께서는 그처럼 당신을 반역한 모든 자들을 심판하사 제거해 버리실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4.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진 바로 그 자손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너는 그들에게 주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 하고 말하여라.

5.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

그들은 반항하는 족속이다. 듣든지 말든지, 자기들 가운데 예언자가 있다는 것만은 알게 될 것이다.

6.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너 사람아, 비록 네가 가시와 찔레 속에서 살고, 전갈 떼 가운데서 살고 있더라도,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들이 하는 말을 너는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얼굴 앞에서 너는 떨지 말아라. 그들은 반항하는 족속이다.

전갈 ; 거미류에 속하는 동물 / 성경에서 전갈의 침은 선지자의 말을 거절한 고통스런 상황을 일컫는다.

7.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그들이 듣든지 말든지 오직 너는 그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여라. 그들은 반항하는 족속이다.

8.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너 사람아,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들어라. 너는 저 반항하는 족속처럼 반항하지 말고, 입을 벌려,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을 받아 먹어라."

9.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그래서 내가 바라보니, 손 하나가 내 앞으로 뻗쳐 있었고, 그 손에는 두루마리 책이 있었다.

에스겔은 환상 중에 자기를 향해 뻗친 한 손을 보았으며, 그 손 안에는 두루마리 책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이와 같은 사실을 묘사하면서 에스겔은 ‘보라(Behold)’라는 의미를 지닌 감탄사 ‘힌네’를 두 번이나 사용하였다. 이는 난데없이 공중에서 손이 나타난 것도 놀라울 뿐 아니라, 그 손 안에 두루마리 책이 들려 있는 것도 기상천외(奇想天外)할 정도로 놀랄만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놀라 쳐다본 장면을 독자들도 깊은 관심올 가지고 묵상하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힌네’라는 감탄사를 두 번이나 사용한 것이다.

‘두루마리’에 해당하는 ‘메길라트’는 ‘구르다(roll)'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어원 ‘깔랄’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둘둘 말린 형태로 된 고대의 문서나 책을 의미한다. 이 두루마리 책은 부드러운 양의 가죽을 말려 무두질해서 여러 가닥올 실로 꿰매어 길게 연결한 양피지 두루마리와 애굽의 삼각주 습지 등에서 많이 생산된 파피루스(papyrus)라는 갈대 줄기를 얇게 불여서 만든 파피루스 두루마리가 있었다. 오늘날 유대인의 회당에서는 아직도 가죽 두루마리 성경이 이용된다.

당시 에스겔 선지자가 본 그 두루마리 책은 양피지 두루마리라기보다는 파피루스 두루마리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Block). 왜냐하면 10절에는 글이 두루마리 안팎으로 기록되어 있었다고 하였는데, 에스겔 시대의 양피지 두루마리에는 내부에만 글이 기록되어 있고 외부에는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0.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그가 그 두루마리 책을 내 앞에 펴서 보여 주셨는데, 앞뒤로 글이 적혀 있고, 거기에는 온갖 조가와 탄식과 재앙의 글이 적혀 있었다.

하나님이 먹으라고 하신 것은 첫 사람 아담에게 유혹적이었던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열매'가 아니었다. 그러나 에스겔은 말씀대로 그 책을 받아 먹음으로, 첫 사람 아담과 이스라엘의 실패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새롭게 회복하는 새창조의 사람으로 쓰임받게 되었다.

[ 복있는사람, 2018년 11,12월호 ]

책망할 일을 부여받은 에스겔 ( 2:1-5 )

하나님께서는 그를 '인자'(1,3절) 곧 아담의 아들, 땅의 아들이라 부르고 있다. 이 호칭은 하나님께서 그를 겸손케 만드는 명칭으로 볼 수 있다. 에스겔이 풍성한 계시를 받았다고 해서 자고해지지 않도록 그가 여전히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려는 것이다. 달리 높이 올려 주는 명칭으로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명칭은 구약에서 메시야에 대하여 사용한 칭호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단 7: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1) 에스겔은 일으켜 세움을 받고(1,2절) 사명을 부여받는다.

1) 에스겔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일으켜 세워졌다. 인자야 일어서라. 엎드린 자세는 큰 경외를 표시하는 자세이지만 일어선 자세는 일을 하기 위하여 준비된 자세를 가리킨다.

2) 에스겔은 그 명령에 수반되어 온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일으킴을 받게 되었다(2절).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켜 세우셨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 일어날 기력도 없었으며 그 환상을 다시 쳐다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따라서 신이 그에게 임하여 일으켜 세우셨다. 신이 그를 일으켜 세우시사 그가 분부받은 대로 설 수 있게 하셨다. 인자야 일어서라...나를...세우시기로.

(2) 에스겔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냄을 받는다(3절).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보내노라.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온 사람들을 능욕하였기 때문에 포로 신세가 되어 유배당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곳에도 선지자를 보내 주셨다.

1) 이 사자가 보냄을 받은 곳에 있는 백성들의 패역함이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소위 '이스라엘 자손'이라 불리고 있다. 이렇게 경건한 조상의 이름으로 불리긴 했으나 그들은 타락하여 '고임'(이방 나라라는 뜻)이 되어버렸다. 이 고임이라는 말은 보통 이방인들에게 사용되었던 단어였다. 그들은 계속 패역한 세대로 이어졌으며 그 패역을 고집하였다. 그들과 그 열조가 내게 범죄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나니. 현재 그들은 강퍅하고 '얼굴이 뻔뻔하며' 옹고집이었다.

2)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4절). 선지자가 그들에게 하는 모든 말은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권세로 하는 것이어야 했고, 또한 그에게서 나온 말씀이어야 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의 기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해야 마땅하다. 사람들의 마음이 그 말씀 아래 소멸되고 고집이 그 말씀에 꺾이게 될 때, 그들은 선지자의 말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고 그 사실에 대하여 증인이 될 것이다. 만약 그들이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은, 양심의 가책과 선지자를 거절한 대가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정당한 심판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이 무시했던 그 사람이 진정 선지자였음을 알게 될 것이다.

선지자에게 내린 훈령 ( 2:6-10 )

선지자는 사명을 받은 후 다음과 같은 권면을 받는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1) 담대하라는 권면을 받는다.

인자야 너는...그들을 두려워 말고(6절). 선지자가 파송되는 곳의 사람들은 그가 어느 방향으로 몸을 돌리든지 괴롭히는 '찔레와 가시들'같은 존재들이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찔레와 가시들이다. 그들은 독을 머금은, 무서운 전갈들이다. 전갈의 쏘는 독은 가시보다 수천 배의 상처를 낸다. 환상중에 천사들과 대화하고 있었던 에스겔은 그 환상에서 깨어나면 자신이 '전갈 중에 처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가 선지자 노릇을 포기하도록, 아니면 적어도 하나님의 심판을 가지고 자기에게 위협을 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를 괴롭히고 협박할 것이다.

(2) 신실하라는 권면을 받는다(7절).

1) 그는 자기를 파견하신 그리스도께 대하여 신실함을 지켜야 한다.

2) 그는 위하여 보내심을 받은 자들의 영혼에 대하여 신실해야 한다. "그 백성들이 심히 패역한 자라는 것은 불문지사니라. 그러니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만 말할지니라."

(3) 하나님의 지시를 준수하라는 권면을 받는다.

1) 선지자 앞에 펼쳐진 책에 지시되어있는 사항을 준수하라는 것이다(10절). 두루마리는 '그 안팎에' 즉 안쪽 면에도 바깥쪽 면에도 글이 기록되어 있었다. 한쪽 면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이 소상히 적혀 있었으며, 다른 쪽 면에는 그 죄악에 대한 벌로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들이 적혀 있었다. 그는 슬픈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다. 책에 담겨져 있는 내용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었다. 거룩하고 복된 백성이 그러한 죄와 비참함 속에 빠져 들어가는 사실을 보는 것보다 더 슬프고, 더 눈물이 나오고, 더 무서운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2)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전달함에 대한 하나의 분명한 분부가 주어진다. 선지자는 부지런히 그 말씀을 경청해야 한다.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8절). 만약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죄를 묵인하고 그들이 불쾌해 할 것을 두려워하는 죄인들을 만족시켜 주려고 한다면, 그들은 죄인들의 죄악에 대하여 책임을 물어야 한다.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들을 뿐만 아니라 너의 입을 열어 내가 주는 것을 먹으라. 그것을 즐겨 맛있게 먹으라."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지자 앞에 가져와 펼쳐 보이셨는데, 이는 선지자로 하여금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 자기의 것으로 만들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출처 ; 메튜헨리 주석

에스겔을 부르신 하나님 ( 2장 )

본장은 제1장에서 나타나신 거룩하고 전능하시며 지극히 영화로우신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있으면서도 회개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하나님께 대적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에스겔을 보내는 장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본장은 영광 가운데서 심판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 에스겔을 대언자로 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시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소명자 에스겔에게 주신 것

1) 말씀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에스겔은 보냄을 받기 전에 소명자로서, 대언자로서 몇 가지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에스겔이 받은 첫번째 것은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자로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a.말씀이 임함(겔3:16)

b.주께서 분부하신 것(마28:20)

2) 권능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무엇, 즉 하나님의 권능을 필요로 합니다. 거룩한 말씀, 거룩한 사역은 거룩한 능력으로서만이 전해지고 성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도 그가 받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권능을 부여받았습니다. 에스겔은 부르심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신으로부터 일으킴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입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힘으로써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을 입음으로 하여야 할 것입니다.

a.보혜사를 통해 함께하심(행1:8)

b.권능을 받음(요14:16)

3) 말씀 선포의 사명

에스겔은 막연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라는 명령을 받은 채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은 사생 결단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라는 중대한 사명을 받은 후 보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일꾼을 뽑으실 때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는 식으로 뽑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반드시 이루도록 하시는 가운데 자기 종을 부르시고 보내십니다. 오늘 우리도 부르심을 받고 보냄을 받았다면 필사 각오의 자세로 맡은 바 소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a.지상 명령(막16:15)

b.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8)

2. 소명자가 보냄을 받은 대상

1)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도록 소명을 받았을 때 그 임무를 수행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께 범죄하고 돌아선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도 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를 막은 채 하나님께 거역할 자세만을 취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보냄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에스겔에게 주어진 사명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a.패역하여 율례를 버림(겔20:13)

b.안식일을 더럽힘(겔20:21)

2) 옛부터 지금까지 배반한 백성

에스겔이 말씀을 전파하는 대상은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선 백성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이방의 신들을 섬긴 배반하는 백성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의 신들, 앗수르의 신들, 가나안의 신들, 바벨론의 신들을 섬김으로써 그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패륜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a.이스라엘의 우상 숭배(겔16:36)

b.가증한 제사(겔20:28)

3)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김으로 범죄하고 더 나아가 이방의 신들을 섬기는 배반의 죄를 저지르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악을 지적하고 회개를 종용하는 선지자들을 보내어도 그들은 그 마음을 굳게 할 뿐 돌이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처럼 뻔뻔하고 강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의 사명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이루기 매우 힘든 사명이었습니다.

a.이스라엘의 뻔뻔함(겔16:28)

b.이스라엘의 강퍅함(겔20:32)

3. 소명자 에스겔이 취할 자세

1) 말씀을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함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받은 에스겔은 몇 가지 사명자가 취해야 할 자세를 하나님께로부터 요구 받았습니다. 그 첫번째 자세는 말씀을 받되 파상적으로 받지 말고 온전히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에스겔은 말씀을 송두리째 먹을 것을 요구받은 것입니다. 실로 전해야 할 말씀을 온전히 이해해야 하는 것은 사명자에게 마땅히 요구되는 자세입니다

a.두루마리를 먹으라(겔3:1)

b.책을 먹으라(계10:9)

2)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들은 바를 전해야 함

에스겔이 요구받은 두번째 자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듣든지 듣지 않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말씀 전달의 사명을 받은 자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이상 인간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선포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포된 것이 반응을 얻을 것인지 아닐지는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전달자는 오직 전해야 할 뿐입니다.

a.내 말로 고하라(겔3:4)

b.듣든지 아니 듣든지(겔3:11)

3) 듣는 자에게 아무리 나쁜 내용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함

거짓된 전파자의 특징은 전하는 대상으로부터 이익 얻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 대상에게 해가 되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자는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달합니다. 에스겔도 하나님의 예언자로서 그것이 나쁜 내용일지라도 그대로 전달받을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a.재앙의 말이 기록된 책(겔2:10)

b.거짓 선지자의 특성(겔13:10)

결론

하나님의 대언자가 대상으로 하는 인간들은 악하고 강퍅하고 뻔뻔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대상들에게 그들이 듣든지 안듣든지, 내용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전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전달자는 그 명령에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명령에 따르면 전달자는 그의 임무를 성취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그에게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르심을 입으면 순종함으로 맡은 바 사명에 충성해야 하겠습니다.

출처 ; 메튜헨리 주석

여호와의 영광의 현현과 에스겔의 소명 장연의 불완전 상상도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녀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3: 1,2)


선지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스겔 3:1-15)

 

[ 성경묵상 ]

에스겔은 부시의 아들로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신다'이다(겔 1:3).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난 에스겔은 30세에 부르심을 받아 파수꾼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는데 왼쪽으로 누워 390일, 오른쪽으로 누워서 40일을 지내고(겔 4:4-8) 머리털과 수염을 깎거나(겔 5:1-4) 손뼉 치고 발을 구르면서 말하기도 했다(겔 6:1-11). 에스겔은 그룹의 환상(겔 1:4-28), 성전 환상(8-11장), 불에 탄 포도나무 환상(겔 15장), 마른 뼈 환상(겔 37장) 등 여러 가지 환상을 보았다.

그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전에는 심판과 회개에 대해, 함락 후에는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에 대해 전했던 선지자였다(렘 1-33장).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선지자로는 다니엘, 하박국, 예레미야가 있다(렘 34-48장).

- 선지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먹음으로(1-3절)

둘째, 말씀의 담대함으로(4-11절)

셋째, 성령의 권능과 겸손으로(12-15절)

에스겔은 심판의 말씀이 기록된 책을 받아 먹고, 마음이 굳은 백성에게 선포해야 한다. 말씀과 성령의 권능이 그를 힘있게 한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하며, 말씀이 주시는 담대함으로 전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권능과 겸손한 마음을 갖고 사역을 감당해 나가게 된다.

[ 질문 하나 ] 하나님은 에스겔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기 전에 무엇을 먹으라고 명령하시는가?(1-3절)

에스겔은 애가와 심판의 말씀이 기록된 책을 하나님께 받아 먹었다. 놀랍게도 전혀 '달콤해' 보이지 않던 그 책이 그의 입에 꿀과 같이 달콤하다. 그는 이 책을 먹고 가서 메시지를 선포한다.

선지자는 말씀을 먹음으로 살고, 먹은 말씀을 다시 뱉음으로 사명을 이루는 사람이다. 말씀이 좋아 보이던, 좋아 보이지 않던 모두 다 달게 먹고 소화하여 전해야 한다. 선지자는 말씀이 사람을 먹이고 살리는 생명의 양식임을 앞장서 경험하는 사람이다.

[ 질문 둘 ] 하나님은 마음이 굳은 백성에게 가서 말하도록 에스겔을 어떻게 도우시는가?(8,12,14절)

에스겔은 마음이 굳어 귀가 닫힌 자기 동족에게 보냄을 받는다. 차라리 언어가 다른 이방인들에게 갔더라면 훨씬 많은 열매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스겔이 마음이 굳고 귀가 닫힌 백성 앞에서 결코 위축되지 않게 하신다.

또한 에스겔을 일으키시고 이끌어 가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천사들의 찬송을 들으며 여호와의 권능으로 힘있게 나아간다.

그에게는 주님의 불타는 마음이 있다. 패역한 백성을 향한 근심과 분노의 마음이다. 또한 백성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심판 앞에 두려워 떨고 있다.

선지자에게는 권능과 겸손이 함께 있어야 한다. 성령의 권능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고, 겸손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기 때문이다.

두루마리 성경을 먹는 에스겔 / 하이몬의 에스겔 주석서 삽화 / 파리 국립도서관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그가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에게 보여 주는 것을 받아 먹어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알려 주어라."

2.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그래서 내가 입을 벌렸더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먹여 주시며,

3.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너의 배를 불리며, 너의 속을 그것으로 가득히 채워라." 그래서 내가 그것을 먹었더니, 그것이 나의 입에 꿀같이 달았다.

4.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그가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어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가 하는 바로 이 말을 그들에게 전하여라.

5.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운 백성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내는 것이라

나는 너를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낸다. 어렵고 알기 힘든 외국말을 하는 민족에게 내가 너를 보내는 것이 아니다.

이방인과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이 굳고 귀가 닫힌 이스라엘을 대조하고 있다. 차라리 이방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들을 것이다. 원래는 이스라엘을 '백성(암)'이라고 부르고, 이방인을 '족속(고임)'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을 '족속(고임)'으로 이방인을 '백성(암)'으로 부른다.

6. 너를 언어가 다르거나 말이 어려워 네가 그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할 나라들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면 그들은 정녕 네 말을 들었으리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 알기 힘든 외국어를 사용하는 여러 민족에게 내가 너를 보내는 것이 아니다. 차라리 너를 그들에게 보내면, 그들은 너의 말을 들을 것이다.

7.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너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온 이스라엘 족속은 얼굴에 쇠가죽을 쓴 고집센 자들이어서, 나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8. 보라 내가 그들의 얼굴을 마주보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마주보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

내가 네 얼굴도 그들의 얼굴과 맞먹도록 억세게 만들었고, 네 얼굴에도 그들의 얼굴과 맞먹도록 쇠가죽을 씌웠다.

8-11절에서는 앞선 2:6,7에 이어 에스겔로 하여금 패역한 선민올 향하여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말씀을 선포할 것을 재당부하신다.

그 가운데서도 8절과 9절은 여호와께서 극도로 완악한 이스라엘 족속을 상대할 수 있을 만큼 에스겔올 담대하고, 당당하게 세우셨기 때문에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굳은 얼굴과 굳은 이마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강조한다. 여호와께서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여호와의 종에게(사 50:7),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에게(렘 1:18; 15:20) 각각 이와 같은 영적 무장을 시켜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께서 완악한 자들에 대해 선지자가 사역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도록 변화 시키시는 것은 그들의 완악한 마음이 아니라 선지자의 마음의 태도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신다면 그들을 순한 양처럼 만드실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이는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완악함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원치 않는 자들에게 억지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 아니다(롬 1:28). 대신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자들에 대해 사역을 하는 그의 선지자가 낙심하지 않고, 주눅 들지 않고, 두려움으로 물러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과 정신적, 영적으로 싸워 이길 정도로 그를 강하게 만드신다. 이러한 사실은 사사 시대에 미디안 족속을 두려워해 감히 마당에서 타작하지 못하고 포도주 틀에서 밀 타작을 하고 있던 유약하기 짝이 없던 기드온을 큰 용사라 부르시며 그를 담대하게 만들어 주신 사건을 통해서도 입증된다(삿 6:11-40).

9. 네 이마를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반역하는 족속이라도 두려워하지 말며 그들의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라 하시니라

내가 네 이마를 바윗돌보다 더 굳게 하여, 금강석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들은 반항하는 족속이니,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얼굴 앞에서 떨지도 말아라."

10.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

그런 다음에, 그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내가 너에게 하는 모든 말을 마음 속에 받아들이고, 귀를 기울여 들어라.

11.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그리고 가서, 포로로 끌려간 네 민족의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전하여라. 그들이 듣든지 말든지 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12. ○때에 주의 영이 나를 들어올리시는데 내가 내 뒤에서 크게 울리는 소리를 들으니 찬송할지어다 여호와의 영광이 그의 처소로부터 나오는도다 하니

그 때에 주의 영이 나를 들어 올리시는데, 주의 영광이 그 처소에서 나타날 때에, 내 뒤에서 지진이 터지는 것같이 크고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13. 이는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와 생물 곁의 바퀴 소리라 크게 울리는 소리더라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와, 생물들의 곁에 달린 바퀴들의 소리가, 그렇게 크고 요란하게 들렸다.

14. 주의 영이 나를 들어올려 데리고 가시는데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가니 여호와의 권능이 힘 있게 나를 감동시키시더라

주의 영이 나를 들어 올려서 데리고 가실 때에, 나는 괴롭고 분통이 터지는 심정에 잠겨 있었는데, 주의 손이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본문은 여호와의 영이 에스겔을 환상 중에 들어 올려 인도하는 과정에서 에스겔이 매우 격노한 상태로 심령의 쓰라fla을 느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본문에서 ‘마음으로’에 해당하는 ‘루히’는 문자적으로 ‘나의 영(my spirit)’이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의 원형 ‘루아흐’는 에스겔을 들어 올려 데려간 그 ‘영'을 나타내는 단어와 동일하다. 그리고 이는 에스겔이 여호와 하나님과 영적 교통을 하는 자신의 영을 통해 매우 격노하여 쓰라린 섬령을 느꼈음을 나타낸다.

본문에서 ‘근심하고 분한’에 해당하는 ‘마르 빠하마트’는 문자적으로 ‘격노함 안에서 쓰라린’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타오르는 격분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여기서 ‘마르’는 어원적으로 맛이 매우 쓴 상태를 의미하는 말로서(출 15:23), 동생의 속임과 간계로 장자의 축복을 빼앗겼을 때 느꼈던 에서의 쓰라린 마음(창 27:34), 대적 브닌나에게 자식올 낳지 못한다고 모욕을 당할 때 한나가 느꼈던 심적 고통(삼상 1:10), 이방 땅에서 유다 민족이 전멸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대성통곡하면서 괴로워했던 모르드개의 쓰라린 마음(에 4:1) 등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

또한 ‘빠하마트’의 어근 ‘헤마’는 매우 뜨거운 상태를 나타내는 어원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자기 축복을 야비하게 가로채 버렸던 야곱에 대해 품었던 에서의 분노(창 27:44), 뱀의 치명적인 독(신 32:33), 죄악을 행하는 유다 백성에 대한 여호와의 타오르는 진노(왕하 22:13), 왕후를 능멸한 하만에 대한 아하수에로 왕의 무서운 분노(에 7:10) 등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용례를 고려할 때 ‘마르 빠하마트’는 폭발 일보 직전의 다이너마이트나 폭발 직전의 화산과 같은 상태, 즉 분노로 가득 찬 에스겔의 심경을 잘 묘사해 준다. 에스겔이 그런 심령을 가졌던 것은 그가 불의함에 대하여 의로운 분노를 발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선지자 역시 자기 동족에 대해 여호와께서 느끼시는 분노를 강렬하게 느낀 적이 있었다(렘 6:11). 이처럼 여호와의 말씀올 전하는 사역자는 단지 입술에 여호와의 말씀을 담고 이를 외치는 자가 아니라 가장 먼저 그 심령으로 여호와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한다. 여호와께서 죄악에 대해 분노하실 때에, 여호와의 사역자 역시 동일한 마음을 품어야만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신약 시대 하나님의 참 사역자의 모본이라 할 수 있는 바울 사도는 친히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고 선언하였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할 것을 권면했던 것이다(빌 2:5).

"여호와의 권능이 힘 있게 나를 감동시키시더라"를 원문에 근거해 다시 번역하면 ‘그리고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서 강했다(NASB, and the hand of the Lord was strong on me)’가 된다.

‘힘있게 감동시키다’는 ‘감동시키다’는 의미보다는 ‘강하게 하다’, ‘견고하게 하다’라는 의미가 더 강한 말이다. 성령의 감동(inspiration)이라는 측면보다 에스겔을 담대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낸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은 에스겔이 패역한 백성들을 상대로 죄를 지적하고 하나님의 의로운 말씀을 전하는 등의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사역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사역을 실패하지 않고 성공적으로 이끌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그를 강하게 사로잡아 주셨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15. 이에 내가 델아빕에 이르러 그 사로잡힌 백성 곧 그발 강 가에 거주하는 자들에게 나아가 그 중에서 두려워 떨며 칠 일을 지내니라

나는 델아빕으로 갔다. 그 곳 그발 강 가에는 포로로 끌려온 백성이 살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이레 동안 머물러 있었는데, 얼이 빠진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2:1-3:14에서 에스겔은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패역한 선민을 향하여 하나님 말씀을 선포할 선지자로서의 소명을 부여하셨음을 말하였다.

이제 이러한 내용은 에스겔이 선지자 소명을 부여받은 후 델아빕으로 장소를 옮겨 거기서 7일간 대기하였음을 밝히는 본절로 마감된다. 에스겔은 여호와의 영광의 환상을 보고 선지자의 소명을 받은 후 그발 강가를 떠나 델아빕에 있는 동족이 거주하고 있던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델아빕’ ; 문자적으로 ‘푸른 이삭의 언덕’이라는 의미를 지닌 땅이다. / 원래 ‘홍수로 인한 잔해 더미’를 뜻하는 ‘틸 아부비’라는 메소포타미아의 지명으로부터 유래하였다고 전해지며(Block), 이 ‘틸 아부비’는 커다란 대홍수로 인해 쌓인 잔해 더미, 혹은 둔덕을 지칭한다. 이 텔 아비브는 원래 앗수르의 도시였는데 신 바벨론 제국이 앗수르를 무너뜨리면서 닙푸르(Nippur) 부근의 텔 아비브 지역올 완전히 파피하여 사람이 거주할 수 없올 정도의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그 후, 바벨론 왕은 그곳에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유다의 포로들올 그곳에 정착시켜 살게 하였을 것이다. 또한 텔 아비브는 그발 강가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그곳에 거하는 사람들은 흔히 ‘그발 강 가에 거하는 사람들’로 일컬어졌다.

당시 에스겔이 자기 동족에게로 가서 곧바로 말씀을 전한 것이 아니라 할 말올 잊은 채 무려 칠 일 동안이나 앉아 있었다.

개역 개정판 성경에서 ‘두려워 떨며'로 번역하였고, 한글 개역 성경에서 ‘민망스러울 만큼 걱정되어 가슴이 답답함’이란 의미를 지닌 ‘민답히’로 번역하였다. 이는 완전히 황폐한 상태(민 21:30 ; 사 49:8), 도저히 눈을 뜨고는 볼 수 없는 광경 앞에서 대경실색(大驚失色)할 정도로 크게 놀라는 모습(욥 21:5 ; 시 143:4) 등을 나타낸다.

특히 스 9:3에서 이 단어는 거룩한 유다 공동체가 가증한 이방인들과 통혼을 하면서 거룩성을 크게 훼손한 사실로 인해 지도자 에스라가 자신의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까지 뽑으면서 ‘기가 막힌’ 심정으로 앉아있었던 모습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으며, 시 143:4에서 이 단어는 원수가 핍박하며 생명을 짓밟아 버리려고 하는 상황에서 다윗의 마음이 심히 ‘참담하였다’는 의미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을 감안할 때 당시 에스겔이 자기 동족들의 삶의 현장에서 보고 들은 것으로 인하여 참담하다 못해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어버린 상태에 처해 있음을 나타내준다. 즉 에스겔은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동족의 죄악상이 훨씬 더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고 깊은 충격과 좌절, 낙담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에스겔이 그같은 상태로 앉아 있었던 기간은 무려 칠 일이나 되었다. 이는 욥의 재앙 소식을 듣고 달려온 세 친구들이 그 참혹상을 보고서 할 말을 잃고 그와 더불어 칠 일 동안 앉아 있었던 사실(욥 2:13)을 연상시킨다. 또한 에스겔이 원래 제사장 출신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1:3), 그 칠 일이라는 기간은 에스겔이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마치 제사장이 꼬박 칠 일 동안 성막 밖을 나가지 않고 성막 안에서 위임식올 치러야 했던 것을 연상케 한다(레 8:33). 이와 연관시켜 생각해 보면 본문의 철일은 에스겔이 선지자로 위임받은 이후 그가 말씀을 증거할 대상들인 선민의 실상을 뼈저리게 인식하고 여호와의 구체적인 계시의 말씀을 기다리면서 할 말올 잊은 채 앉아 있었던 기간으로 볼 수도 있다(Taylor).

[ 복있는사람, 2018년 11,12월호 ]

두루마리를 먹는 선지자 ( 3:1-15 )

어떤 주석가들은 본문이 앞의 환상의 계속이므로 전장들과 연결시켜서 생각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1) 에스겔은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야 했는가(1절).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그 두루마리를 네 마음에 새기라. 그것을 먹고 네 영혼이 양분을 얻으며 기력을 얻으라. 음식물로 네 배를 채우듯이 그 두루마리로 네 배를 채우라." 우리는 하나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지, 즉 말씀이신 그 분이 우리에게 가져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불평없이 영접해야 한다.

만일 두루마리를 펴시고 그의 신을 통하여 그 내용을 우리 앞에 보이시는 분이 우리의 명철을 열고 성령을 통하여 그에 대한 지식을 주시지 않고 우리로 그 두루마리를 먹게 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두루마리에 대해서는 영원히 이방인이 되고 말 것이다. 그 두루마리는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가득 차 있었지만 선지자에게는 그것의 달기가 꿀과 같았다.

(2) 선지자는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계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야 했다(1절).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가서 갈대아 사람들의 죄를 책망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집의 죄를 책망하라는 것이다. 이는 자녀가 탈선한다면, 아비는 타인의 자녀를 훈계하는 대신에 그 자녀를 훈계하여 돌이키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자기가 가서 말할 대상이 이스라엘 족속 곧 하나님과 선지자 자신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했다. 그 대상자들은 같은 민족일 뿐만 아니라 시련을 함께 당하고 있는 동족들이었던 것이다.

선지자 에스겔은 자신이 보내질 곳의 사람들의 성품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내용을 기억해야 했다. 이는 혹시라도 낙담하거나 실망할 일을 만날 때에 상처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7절) 죄에 대한 어떤 책망도 그들을 부끄럽게 하지 못하므로, 어떤 위협적인 경고도 그들을 떨게 만들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그 자체에 대해서 목이 굳은 자들이었다. "이스라엘 족속이 네 말을 듣지 않더라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이는 그들이 나의 말을 듣지 아니하려는 것이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법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시행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일을 잘 해낼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내가 그들의 얼굴을 대하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내가 너를 아주 굳세고 담대하게 하였노라. 하나님을 배격하는 사악한 자들이 강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백성들은 더욱 마음을 열고 단호하게 실천하고 방어해야 한다. 악이 대담해 진다고 해서 덕이 움츠러 들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대적자들의 어떤 비난이나 위협에도 신경을 쓰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할 일을 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그들이 성난 얼굴로 힐난한다고 할지라도 책망의 말을 조금도 늦추지 말아야 했다.

에스겔은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의 내용 뿐만 아니라 여호와께서 직접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말해야 했다.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11절). 우리의 사역의 성패가 어떤지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는 없겠지만, 그 성과가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는 할 일을 다하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법이다.

에스겔은 '크게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12절). 그것은 마치 천사들이 예언자의 취임식을 보기 위하여 모여들면서 내는 소리 같았다. 그는 천사들이 날개치는 소리와 천사들과 마주 움직이면서 어울리는 섭리의 바퀴들의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이 모든 소리는 찬미의 소리로 끝을 맺었다. 그는 천사들이 '여호와의 처소에서 나는 영광을 찬송할지어다'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선지자는 주저하였으나 하나님의 신의 강력한 감화로 임무 수행에 들어갔다. 하나님의 신이 강한 손으로 그를 인도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라 명하였지만 에스겔은 하나님의 신이 그를 '들어 올려 데리고 가실'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14절). 에스겔로서는 자기가 보고 직접 들은 내용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었겠으나 예언의 추진력이 그를 움직이므로 그는 사도들 처럼 자기가 '보고 들은 내용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행 4;20).

그는 슬픈 마음으로 따라갔다. 주의 신이 나를 들어올려 데리고 가시는데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행하니. 그는 아마,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얼마나 어려운 일을 맡았으며 얼마나 부당한 대접을 받았었는지 또한 결국 그가 행한 일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을 보았었을 것이다. "나는 요나처럼 하늘의 지시에 불복종하거나, 할 일을 발뺌하지 않고, 비록 근심하여 전혀 즐겁지 못한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수행하기 위하여 갔다." 에스겔은 실망할 것을 미리 알고 '분한 마음'으로 갔지만, 여호와의 손은 그가 만날지도 모르는 난관을 이겨내고 분발하도록 강력하게 그 위에 임하셨다.

그리하여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자신의 임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일에 자신을 몰두하였다. 이에...그 사로잡힌 백성에게 나아가 그 중에서 민답히 칠일을 지내니라(15절). 이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며 무슨 행동을 하는지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여호와의 말씀이 자기에게 임하기를 기다렸다. 그는 그 곳에서 백성들의 죄악과 불행에 대해 슬픔에 쌓이기도 하고 자기가 보았던 환상에 압도되기도 하며 '민답히' 지냈다.

출처 ; 메튜헨리 주석

여호와의 영광의 현현과 에스겔의 소명 장연의 불완전 상상도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녀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녀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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