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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연구

히브리서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윌리엄 L. 레인(William L. Lane)/

by 은총가득 2021. 2. 18.

히브리서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목회와 신학)

히브리서가 어려운 3가지 요인

윌리엄 L. 레인(William L. Lane)/웨스턴켄터키대학 종교학 교수

이 글은 Southwestern Journal of Theology (Vol. 28, no.1, Fall, 1985)에 실렸던 것으로, Southwestern Journal of Theology지의 허락을 받아 번역 게재하였습니다.

히브리서가 유별나게 어려운 책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설교나, 성경공부 그리고 헌신적인 성경읽기에서 히브리서는 자주 외면당했다. 이렇게 된 데는 다음의 세 가지 요인이 특별히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첫째, 히브리서의 형식이 특이하다. 둘째, 어떤 배경에서 쓰여졌는지 확실하지 않다. 셋째, 히브리서의 논의에 익숙하지 않다.

Ⅰ. 히브리서의 형식

1. 전통적으론 편지로 분류된다

히브리서는 전통적으로 신약성경의 서신서로 분류되었다. 우리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혹은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서간문’이라는 말을 쓴다. 신약성경 문서들의 정경 순서도 이러한 이해를 반영하고 있다. 바울이 쓴 13개의 편지 뒤에 히브리서가 오고, 그 다음에 야고보의 편지, 베드로의 편지, 요한의 편지, 그리고 유다의 편지, 마지막으로 계시록이 온다. 계시록은 편지의 형식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로마령의 아시아에 있는 교회 중심부에 보내는 일곱 개의 편지를 포함하고 있다. 신약성경의 편지들 가운데 히브리서가 놓여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히브리서를 편지로 읽게 된다.

헬라어의 사본 전통에 따르면, 히브리서는 오직 바울의 편지들과만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3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가 이 문서의 가장 오래된 사본인 체스터 비티 파피루스에서는(Chester Beatty Papyrus, P46), 바울의 편지들이 ‘로마인들에게’ ‘고린도인들에게’ 또는 ‘갈라디아인들에게’로 표시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히브리인들에게’로 밝히고 있다. 이 초기의 사본에서 히브리서는 로마서 뒤에, 그리고 고린도전서 앞에 놓여 있다. 후기 언셜자체(uncial, 4~8세기의 둥근 대문자 필사체) 사본인 알렙(Aleph, 히브리어 첫 글자), B, A, C, 그리고 H에서는, 히브리서가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들 뒤에 놓여 있는데, 데살로니가후서 뒤에 그리고 디모데전서 앞에 놓여 있다. 히브리서는 분명히 편지로 여겨졌다.


2. ‘권고’로 시작되는 설교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고대 편지의 형식을 띠고 있지 않다. 전통적인 편지의 규정에서 벗어나 있고, 일반적으로 이 시기의 보통 편지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 하나도 없다.1 도입부에서 저자는 자기 자신이나 이 편지를 받는 대상도 밝히지 않고 있다. 은총과 평화를 비는 기도도 없고, 감사나 축복의 표현도 없다. 이 문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확정적인 말씀을 주신 그 아들의 초월적인 위엄을 찬양하는 장엄한 문장을 주기적으로 기록함으로써 시작하고 있다(히 1:1~4). 이 도입부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 앞에 어떠한 규정도 용납하지 않는, 진짜 서론이다.2 이 서두의 진술은 집중을 요구하고 있다. 즉각적으로 독자 혹은 청취자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설교처럼 시작한다.

이러한 인상이 옳다는 것은 저자 자신에 의해 확증되고 있다. 마지막에 덧붙인 간략한 개인적인 글에서 저자는 히브리서를 ‘권고의 말’로 설명하고 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13:22).3

이 설명적 문장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회당장들이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읽고 난 후에 바울과 바나바에게 “형제들아 만인 백성을 권할 말이 있거든 말하라”(행 13:15)라고 청한 말을 생각나게 한다.

‘권고의 말’이라는 표현은 헬라의 회당에서 율법과 선자자의 글을 읽고 난 후에 설교나 건설적인 강연을 알리는 데 쓰이던 관용어구인 것 같다.4 히브리서의 저자가 청중에게 말할 때 “내가 여러분을 위해 준비한 권고의 말을 듣기를 부탁드립니다”라고 한 것은 설교에 대한 관습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회당의 예배형태는 성경을 청중 앞에서 읽고 나서 설교를 하는 것이었는데, 이 형태를 초대교회가 받아들였다. 그 증거는 디모데전서 4장 13절에 나오는데,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권하는 것’이라는 표현은 설교의 동의어이다. 그것은 특별히 모여있는 청중 앞에서 읽은 성경의 강해와 적용을 일컫는 말이다.

권고는 큰 격려와 도움이 되는 경고로 구성되었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서의 성격이다. 저자는 자기가 목회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가정교회의 회원들에게 큰 소리로 읽혀져야 한다는 의도를 가지고 이 설교를 준비했다.

‘권고의 말’(히 13:22)이라고 하는 묘사적 문구는 문서형식의 설교에 적합한 것이며, 설교자는 여기에다가 몇 가지 개인적인 말을 마지막에 덧붙인 것이다. 히브리서는 우리가 1세기의 설교를 접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3. 구두로 전달하고자 했다

히브리서가 설교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마땅히 관심이 쏟아지는 것은 문서의 중요한 문체와 구조의 특징이다. 설교자는 능숙하게 자기가 청중과 함께 있다는 것과 자기가 준비한 설교를 실제로 그 자리에서 전달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그는 글을 쓰거나 읽는다는 행동을 언급하는 것을 조심스럽게 피함으로써 자기와 청중을 분리시키고 있는 거리감이 강조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그 대신에 그는 말하고 듣는 행동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것은 대화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설교를 하고 있는 상황에 적합한 행동들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 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2:5).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5:11).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6:9).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8:1).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9:5).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11:32).

설교자는 자기와 청중들을 분리시키고 글로 쓸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거리감을 감소시키기 위해 대화하는 말투를 쓰고 있다. 저자는 자기의 작업을 연설로 생각하고 있다. 말하는 것과 듣는 것에 주목하게 해서 청중과 함께 있다는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저자는 설교의 은사가 있는 사람이었다. 히브리서는 두운법과 웅변적인 명령법, 음운이 조화를 이루는 문장, 평범하지 않은 단어 배열, 그리고 수사학적인 효과를 강화시키기 위해서 고안된 문학적 장치들을 능숙하게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해석과 권고를 번갈아 사용한 것은 히브리서의 문학적 구조의 특징인데,5 이것은 구두적(口頭的) 충격을 주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고 있다. 히브리서는 특정한 공동체에게 주는 설교로서 구두로 전달하기 위해 준비된 것이다.

4. 유대-헬레니즘 전통의 설교다

기독교 1세기에 가까운 시기의 설교나 설교형식에 대한 가장 철저한 연구는 하트윅 타이엔(Hartwig Thyen)의 연구이다.6 다음의 요인들 때문에 그는 히브리서를 유대-헬레니즘 전통의 설교로 분류하였다.

(1) 저자는 많은, 그리고 다양한 수사학적인 장치들을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다. 게다가 1인칭 복수 대명사 ‘우리’에서 2인칭 복수 대명사 ‘너희’로, 또 거기서 1인칭 단수 대명사 ‘나’로 자주 바뀌는 것은 설교자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2) 특징적으로, 유대-헬레니즘의 설교들의 원천은 70인역이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70인역에 대해 놀라울 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오직 그것만을 사용하고 있다.7

(3) 유대-헬레니즘의 설교들은 모세오경과 시편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이것은 히브리서도 마찬가지이다. 히브리서가 구약을 인용한 방식들은 유대-헬레니즘 설교들에서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형식을 따르고 있다.

(4) 묵시적인 제재(題材)들이 유대-헬레니즘 설교에서 자료로 사용되었다. 비록 대부분의 묵시 문서들이 원래 팔레스타인에서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기록되었지만, 그것들은 이내 헬라어로 번역되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다. 묵시 문서가 히브리서에 미친 영향은 명백하다.

(5) 유대-헬레니즘의 설교문학에서는 자료들이 수사학적인 질문으로 종종 소개된다. 이러한 장치는 히브리서에도 나타난다(1:5, 13; 3:16~18).

(6) 히브리서가 유대-헬레니즘의 저서들과 많은 교류를 하고 있다는 점 -특히 필로(Philo)와 솔로몬의 지혜서- 과 성경을 사용한 점, 그리고 히브리서에 사용된 해석방법 모두가 저자가 헬라계의 유대인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7) 히브리서 11장은 헬라의 회당이 구약 증인들의 목록을 나열해서 논지를 충분히 입증하는 방법을 취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두드러진 예이다.

(8) 유대-헬레니즘의 설교는 권면적(paraenetic) 교훈으로 마무리된다. 히브리서 10장 19절~13장 21절이 이러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히브리서에서 권면(paraenesis, 파라이네시스)이 사용된 방법은 필로가 쓴 창세기의 풍유적 주석과 비슷하다.

타이엔은 13장 21절 뒤에 나오는 몇 개의 구절을 제외하고는, 히브리서는 디아스포라의 회당에서 했던 유형이면서 세심하게 구성된 설교라고 결론지었다. 사실상 히브리서는 이 시기의 ‘완전하게 보전된 유일한 설교의 예’이다. 히브리서를 제대로 읽는 방법은 그것이 초기 기독교의 설교라는 것을 인식하고, 격려와 경고를 받을 준비를 하고 읽는 것이다.

5. ‘지금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신다’

이 설교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히브리서는 과거에 자기 백성에서 말씀하셨던 하나님, 그리고 지금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시작한다(1:1~2a). 그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통해서 하신 말씀을 들으라고 하는 긴급한 요청이다. 아들의 초월적인 위엄을 증거하고 난 후에 설교자는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2:1).

‘들은’ 것은 아들을 통해서 가장 먼저 알려진 복음의 말씀인데,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표적과 기사로 자격을 인증받은 사람들에 의해 공동체에 전해졌다(2:3~4).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한 강조는 히브리서 전체에 꾸준히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3장 7~19절에서 시편 95편의 인용은 마지막 때의 구원의 약속에 민감하라는 권고의 기초를 제공해 준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히 3:7~9).

시편 95편 7~9절에서 인용한 이 구절은 금요일 저녁과 안식일 아침에 회당에서 예배를 드릴 때, 예배의 부름으로 관습적으로 사용되던 구절이다.8 따라서 히브리서의 설교를 듣는 대상으로 지칭되었던 공동체가 시편의 세부적인 내용에 친숙했다는 것은 사실상 확실하다. 설교자는 이 인용구절을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들에서 주요 주제로 발전시키고 있다.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히 3:15).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 하였나니”(4:7).

시편 95편에서 인용한 구절로 시작된 문단이, 설교자가 통찰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진지한 논평을 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진다(히 4:12~13). 설교자는 성경이라는 선물을 통해서 보존되어 온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청중에게 요구한다.

설교자는 성경을 인용할 때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주제를 놓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이 과거에 하셨던 말씀을 오늘날 다시 한번 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현재시제를 즐겨 쓴다. 예를 들어,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시 95:7~11의 인용](히 3:7).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시 40:6~8의 인용](히 10: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렘 31:31~34의 인용](히 10:15).


현재시제를 사용하게 되면, 성경 본문을 히브리서가 지칭하는 공동체의 현재적인 경험으로 이끌게 된다. 설교자는 ‘지금’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12:25)라는 날카로운 경고로 이 설교를 절정에 이르게 하면서 설교자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각인시킨다.

설교 전체를 통해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이 현재, 자기 백성들의 상황을 새롭게 지적하시면서 그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백성은 반드시 들어야 하고 순종으로 반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Ⅱ. 히브리서의 배경

1. 실제 배경은 알 수 없다

우리는 누가 이 설교를 썼는지 모르며, 기독교 공동체 중 하나가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가 어디에서 일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히브리서의 저작을 둘러싼 실제 상황들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설교자가 전에 함께 일하던 동역자나 친구로부터 편지를 받았을까? 어느 날 갑자기 심부름꾼 하나가 와서는 그에게 이런 사실들을 불쑥 알려 주어서 그가 펜을 들도록 부추긴 것일까? 우리는 알 수 없다. 이 문서는 실제 배경이 없는 듯하다.

우리는 설교자가 지칭한 사람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단지 암시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어디에서 살고 있었나? 그들은 어떤 압력을 받았나? 그들이 기독교인이 된 지는 얼마나 오래되었나? 그들이 믿음의 새로운 위기를 견디어 냈을 때 그들의 체험은 얼마나 풍부했나?

설교 자체에서 얻어야 하는 증거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히브리서를 알기 쉽게 도와주는 인생의 상황에 대한 어떠한 재구성도 연구중인 제안 정도로 시험적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이 임무는 바닥에서 주운 깨어진 거울 조각들을 짜맞추는 것과 비슷하다. 재구성이 완성된 후에도 중요한 조각들은 여전히 없을 수 있다. 히브리서는 배경을 찾고 있는 설교이다.

2. 대상은 헌신된 청중들이다

한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히브리서는 제자도의 대가와 연관이 있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의 대가로 씨름하고 있는 그리스도인 그룹을 지칭하고 있다. 히브리서를 주의깊게 읽어 보면 이 설교가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보내졌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그들에게 아무런 특권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새로운 고난을 받을 운명을 지닌 듯이 보인다. 그들에게 있어서 제자도의 대가는 재산을 잃고 자유를 잃고, 심지어 생명까지 잃을 위협에 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10:32~34; 12:4).

히브리서는 특정한 지역의 청중을 위해서 준비된 것이 분명하다. 설교자는 확실히 이 설교의 청중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고, ‘우리’라는 인칭대명사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는 그들을 곧 다시 방문하기를 바라고 있다(13:19, 23).

몇 부분에서 그는 그들의 과거 경험에 대해 퍽 상세히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그들이 나사렛 예수의 말을 들은 제자들의 설교를 듣고, 믿음으로 응답해서 기독교인들이 되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2:3~4). 그는 그들이 신자가 된 지 꽤 오래되었고 사역에 참여할 능력이 있는데도,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으로 성숙하지 못한 것 에 대해 주의를 주고 있다(5:11~14). 그는 또한 그들이 기독교인의 사랑으로 다른 기독교인들의 필요를 채워 주었던 이타적인 자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6:9~11).

3. 큰 시련을 겪은 가정교회이다

이 설교의 대상은 가정교회를 이루었던 것 같다. 그들은 작은 그룹이었고, 한 가정과 그들의 가까운 친구들 몇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의 수는 아마도 15명에서 20명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9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10:24~25)는 권고는 그들이 기독교인으로서 직면하는 지속적인 싸움으로 지쳐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들은 무관심과 냉담의 징조를 보이고 있었다. 교회의 일부 교인들은 집회에 참석하지 않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히브리서가 지칭하는 기독교인 모임은, 로마나 로마 근처에 있는 이탈리아 남부의 중심지에서 살았다는 의견이다. 마지막 문단에 설교자는 자기와 함께 있던 이탈리아 기독교인들의 인사를 전하고 있다(13:24). 이 본문을 읽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은 저자가 당시에 이탈리아를 떠나 있었고, 로마 혹은 로마 근처에 사는 신자들의 모임을 위해 이 설교를 준비했다는 것이다.10

이러한 제안은, 이 가정교회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들이 겪었던 제자도의 대가를 설교자가 언급하는 중요한 대목에서 어느 정도 지지를 얻고 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10:32~34).

가정교회의 일원들은 자기들의 담대한 믿음의 결과를 용감하게 받아들였고, 자기들의 입장을 지켰다. 그들은 공개적인 모욕을 당하는 것과 옥에 갇히는 것, 그리고 재산을 잃는 고난을 당했다.

고난을 견뎠다는 것은 AD 49년에 로마 황제 클라우디오(Claudius)에 의해 추방당한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겪은 압제와 일관성이 있다. 우리는 AD 2세기 초의 로마 작가로서 율리우스계 황제들의 전기를 준비했던 수에토니우스(Suetonius)를 통해서 이러한 시련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클라우디오의 전기에서 사회적 혼란이 되었던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크레스투스(Chrestus)의 선동으로 유대인 지구에서 폭동이 있었다. 그 결과 클라우디오는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했다”(「신격화된 클라우디오의 생애」(Life of the Deified Claudius 25:4).

 

‘크레스투스’는 흔한 노예 이름이었는데, ‘착한 사람’(the good one)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수에토니우스는 그 이름을 가진 한 개인이 이 폭동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대체로 그가 사실을 혼동했다고 본다. 수에토니우스의 자료에는 ‘크레스투스’가 아니라 ‘크리스투스’, 그러니까 그리스도(Christ) 또는 메시아가 언급되어 있었던 것이다.11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유대인 지구 중 하나에서 설교의 사역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던 메시아라고 그들이 단언하자 논쟁이 폭동으로 이어졌다. 사회적 평화를 방해하는 소동이 일어나자 공권력이 개입하게 되었고, 클라우디오는 회당과 이 소동에 책임이 있는 교회지도자들을 추방했다. 추방명령(제명 포고)에는 대개 모욕, 박해. 그리고 재산몰수12가 뒤따랐다. 만약에 이 증거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면, 설교자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로마에서 추방당하는 고통을 겪은 몇몇 유대인 기독교인들(행 18:1~2)을 위해서 설교를 준비한 것이다. 그들은 실제로 제자도의 대가를 체험한 것이다.
 
4. 로마의 화재 참사로 핍박받다

그러나 이 글이 쓰여진 때는 아마도 15년 정도가 지난 후일 것이다. 그때의 그 기독교인들은 이제 15살을 더 먹었다. 그들은 갑자기 제자도의 대가를 한번 더 직면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AD 64년에는 영원한 도성을 재와 파편더미로 만들려고 위협했던 파괴적인 화재의 해로 기억되고 있다.13

그 불은 서커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 주변의, 어지럽게 밀집된 빈민가 사이로 질서 없이 늘어선 가게들이 있는 인구과밀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바람이 한번 일자 불길은 옆에 있는 팔라틴 언덕(Palatine hill)구(區)로 옮겨갔고, 거기서부터 빠른 속도로 도시 전체에 퍼져 버렸다. 도시에 있는 14개 구에서 오직 네 개만이 불길을 피할 수 있었다. 세 개는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러한 참사가 일어나자 네로는 집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비상 숙소를 마련해 주고, 이웃 도시에서 사들인 곡물의 가격을 내리도록 명령을 내려 대책을 세웠다. 그 후 몇 달 동안 그는 정부 비용으로 정교한 도시 재건 프로젝트를 짜는 일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가 어떠한 대책을 세우건 대중적인 지지를 얻을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황제가 이 불에 대한 범죄적 책임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들의 의혹은 네로가 불길이 한창 치솟을 때 자기 개인 무대에 올라가서 불에 타는 고대 도시 트로이에 대한 노래를 부르면서 이 참화(慘禍)를 축하했다고 하는 끊이지 않는 소문 때문에 더욱 증폭되었다.

이러한 소문을 잠재우고 관심을 돌리기 위해 네로는 제국 병사들에게 기독교인들을 대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타키투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 소문을 막기 위해서 네로는 희생양을 만들어 내었고, 아주 정교하게 계획을 짜서 불량하기로 악명 높은 기독교인들(그들이 흔히 불렸던 이름이다)을 벌했다”(「로마 연대기」 Annals of Rome 15.44).

기독교인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은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그들이 준 정보에 따라 다른 사람들도 검거되어 사형을 당했다. 방화라는 범죄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인에 대한 대중적인 편견 때문에 기독교인을 모욕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황제의 무모한 행동으로 사람들이 확신을 잃는 분위기 속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카타콤(지하묘지)으로 도망갔다.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체포와 순교를 실제로 겪게 되었다.14

그 도시에는 몇 개의 가정교회가 있었는데, 히브리서에서 지칭하는 그룹은 아직 이러한 황제의 행동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히 12:4). 그러나 체포와 난폭한 죽음의 위협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설교자는 그들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오는 무기력증을 겪고 있었다(2:14~15). 연약한 중에도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하지 않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들은 후퇴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고(5:11~14), 어떤 경우에는 가정교회에서 아예 빠져버렸다(10:25).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공개적으로 인정하게 되면 그들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물러서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그 가정교회의 남은 회원들이 이 설교를 듣기 위해 모인 것이다.


Ⅲ. 히브리서의 논의

1. 목회자의 마음으로 썼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목회자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친구들이 처한 위험을 이해했고, 그들에게 신경을 많이 썼다. 그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 참으로 헌신된 사람이었다. 그는 만약 이 기독교인들이 체포된다면 그들은 로마가 제시하는 석방의 조건 -즉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부인하는 것- 을 받아들일지도 모른다고 염려했다(6:6; 10:29).

우리가 예수님이나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해서는 안된다고(막 8:34~38) 경고하면서, 예수님이 제자도를 위해 제시하신 지불조건을 인정했다. 그는 기독교인이 자기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끄러워할 수 있는 한 가지 상황은, 자신이 예수님이나 다른 기독교인들과 연관된 것 때문에 자신의 목숨이 위협 당하게 되는 상황 속에서라는 것을 알았다.

설교자의 목회적 관심이 히브리서에서 아주 잘 나타난다. 그는 친구에게 편지를 쓰듯이 쓰고 있다. 그는 두려워하는 이 사람들을 걱정했기 때문에 연민을 가지고 설교를 준비했다. 그는 상황이 급박했기 때문에 글로 설교했다.

그가 직접 방문해서 개인적으로 그들에게 힘을 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믿음 안에 굳건히 서도록 격려하고, 미성숙한 상태로 머물게 될 경우 그들이 처하게 될 위험에 대해 경고하기 위해서 이 글을 썼다. 그는 기독교인으로서의 헌신을 저버리면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히 10:29~31, 35~39).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격려는 자기 친구들에게 그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예수님을 그들의 승리자로 새롭게 묘사하고 있으며, 그들과 같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시켜 주신 분으로 그리고 있다(2:10~16).

로마의 치안판사 앞에 서게 된다면, 기독교인들은 우리 믿음의 승리자이자 완성자이신 예수님께 눈을 고정시켜야 한다(12:2). 그들은 혼자서 경기장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피를 흘리신 분,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분에 의해 견뎌내게 될 것이다(12:2~4).

2. 위대한 대제사장이 함께 하신다

그는 또한 예수님을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으로 묘사한다(2:17~3:1; 4:14~5:10). 예수님은 죽음의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고난받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다(2:18). 예수님은 죽음까지도 체험하셨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겪는 인간적인 연약함에 공감하실 수 있다(4:14~15). 그 다음 문단에서 설교자는 자기 친구들에게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다’(5:7)고 상기시킨다. 그러나 그 기도와 눈물에 대한 응답은 고난과 죽음을 겪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었다(13:20~21).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 되셨다. 설교자는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셨다’(6:20)고 강조한다. 멜기세덱과 같은 대제사장으로 예수님을 묘사한 것은, 죽음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자기의 직위를 영원히 가지고 있는 왕의 제사장으로 나타내는 설교자의 방식이다(7:1~3, 16, 23~24). 그는 재빨리 덧붙인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7:25). 예수님을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그린 것은 주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시고 그들에게 힘을 주실 것이라는 점을 확증하는 것이다. 바로 이 메시지가 가정교회 일원들이 들어야 했던 메시지였다.15

설교자는 하나님의 하신 말씀을 자기 친구들에게 남긴다.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신 31:6, 8). 그는 확신을 얻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보일 수 있는 승리의 반응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5~6).

역경과 위기를 겪을 때 이것이 바로 적합한 믿음의 대답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서는 실제생활에 뿌리를 둔 설교이다. 이 설교는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자신이 압도당할(penetrated)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설교이다. 히브리서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연약한 감정에 대한 섬세한 대답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히브리서는 제자도의 대가에 대한 자각으로 흥분하고 있다.

히브리서는, 큰 화재가 가져온 참사 이후에 제국의 수도가 평정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쇠약해진 믿음에 대한 생생한 목회적 대답이다. 히브리서는 불안정한 세상 속에서 기독교인으로 살면서 때때로 부딪히게 되는 가혹한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 있다.

윌리엄 L. 레인(William L. Lane)/웨스턴켄터키대학(Western Kentucky University)의 종교학 교수. 「헌신에의 부르심: 히브리서의 메시지에 응답하기」(Call to Commitment: Responding to the Message of Hebrews)가 토마스 넬슨에 의해 출간되었고, 히브리서에 대한 포괄적인 비평주석인 「국제성서주석」(WBC, Word Biblical Commentary)의 47번째 책으로 1986년에 출간되었다.


주(註)

1. 최근 연구 중에서 도움이 될 만한 개요는 W.G. Doty, Letters in Primitive Christianity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3), 특히 pp.21~47을 보라.

2. A. Vanhoye, Situation du Christ, Hebreux 1~2 (Paris: Cerf. 1969), pp. 14~15를 보라.

3. “Brothers and sisters, I urge you to bear with my word of exhortation, for I have written to you briefly.” 본문의 영어 번역은 필자 자신이 한 것이다.

4. 팔레스타인의 배경에서 비슷하게 쓰인 언어 용례를 찾으려면 2 Macc. 15:8~11을 보라. 마카베의 유다(Judas the Maccabee)가 “자기 사람들을 권고하고…율법과 선지자의 글로 격려하고…적절한 위로의 말로…그들을 무장시켰다.” 여기서 묘사된 것은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기초한 권고이다.

5. 특히 A. Vanhoye, La structure litteraire de l’Epitre aux Hebreux, 2d ed. (Paris: Desclee de Brouwer, 1976)을 보라.

6. Der Stil des j disch-hellenistischen Homilie (Gottingen: Vadenhoeck & Ruprecht, 1955). 타이엔(Thyen)은 필로의 창세기에 대한 풍유적 주석, 클레멘트1서(1Clement), 마카비4서(4Maccabees), 야고보서, 히브리서, 마카비1서(1Maccabees)와 마카비3서(3Maccabees)의 일부분,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연설, 디다케(Didache) 1~6 그리고 16, 열두 족장들의 성서(the Testaments of the Tweleve Patriarchs), 그리고 솔로몬의 지혜서를 기초해서 연구했다. 각각의 자료들에 대해, 그는 냉소적 - 스토아적인 통렬한 비난의 연설(설교를 하는 특별한 형식)에서 받은 영향, 구약성경의 사용, 그리고 권면적(paraenetic)이나 실용적인 전통이 취급된 방식을 추적하려고 애썼다.

7. H. Thyen, p. 17, 62. 이 저널의 다른 곳에 나오는 R. Clements의 에세이 “The Use of the Old Testament in Hebrews”를 보라. 히브리서에서 구약을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들도 도움이 된다. M. Barth, “The Old Testament in Hebrews: An Essay in Biblical Hermeneutics,” in Current Issues in New Testament Interpretation, ed. W. Klassen and G. F. Snyder (New York: Harper & Row, 1962), pp. 53~78, 263~73; D. M. Hay, Glory at the Right Hand: Psalm 110 in Early Christianity (Nashville: Abingdon, 1973); G, Hughes, Hebrews and Hermeneutics: The Epistle to the Hebrews as a New Testament Example of Biblical Interpretation (Cambridge: CUP, 1979); F. Schroger, Der Verfasser des Hebraebriefes als Schriftausleger (Regensburg: Pustet, 1968); J. Swetnam, Jesus and Issac: A Study of the Epistle to the Hebrews in the Light of the Aqedah (Rome: Biblical Institute Press, 1981); K. J. Thomas, “The Use of the Septuagint in the Epistle to the Hebrews” (Dissertation, University of Manchester, 1959).

8. I. Elbogen, Der judische Gottesdienst in seiner geschichtlichen Entwicklung 3d ed. (Frankfort: Kaufmann, 1931), pp. 82, 108, 113. 이 시편의 전반부는 이스라엘에게 찬양과 경배를 드리라고 요청하지만(시 95:2, 6), 후반부는 광야 세대가 보여준 강퍅한 마음을 쫓아가서는 안된다고 경고한다(시 95: 7~11).

9. 이러한 초기 가정교회에 대한 도움이 될 만한 연구를 위해서는 R. Banks, Paul’s Idea of Community: The Early House Churches in their Historical Setting (Grand Rapids, Mich.: William B. Eerdmans, 1980)(로버트 뱅크스, 「바울의 그리스도인 공동체 이상」, 여수룬 펴냄), 특히 pp. 37~42, 50, 121, 199; J. Murphy-O’Connor, St Paul’s Corinth (Wilmington, Del.: Glazier, 1984), pp. 153~61을 보라.

10. 이 표현과 밀접한 언어적 대비는, 아굴라를 ‘이달리야’에서 온 유대인으로 묘사한 사도행전 18장 2절을 보라. 히브리서 13장 24절의 표현에 대해서는 C. F. D. Moule, An Idiom Book of New Testament Greek 2d. ed. (Cambridge: CUP, 1969), pp. 71~72를 보라. 히브리서가 로마로 보내진 글이라고 변호한 글로는 R. E. Brown and J. P. Meier, Antioch and Rome: New Testament Cradles of Catholic Christianity (New York, NY: Paulist Press, 1983), pp. 139~51을 보라.

11. 수에토니우스의 본문은 많은 논의가 있었던 글이다. 특히 F. F. Bruce, “Christianity under Claudius,” Bulletin of the John Rylands Library 44 (1961/62): 309~18; H. Janne, “Impulsore Chresto,” Melanges Bidez. Annuaire de L’Institute de Philologie et d’Histoire Orientales 2 (1934): 531~53; S. Safrai and M. Stern, editors, The Jewish People of the First Century, Vol. 1 (Philadelphia, Penn.: Ortress, 1974), pp. 160~70, 그리고 특히 pp. 180~83 (with Bibliography); V. Scramuzza, The Emperor Claudius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40), pp. 145~56, 283~91; R. E. Brown and J. P. Meier, Anticoch & Rome, pp. 100~102을 보라.

12. 재산몰수를 말할 때, 위반행위에 대해서는 무거운 벌금을 부과하거나 재산을 몰수했던 재판관들의 공식적인 사법행위를 반영한 것인지, 아니면 집 주인이 감옥에 가거나 이사를 가고 나면 그 집이 약탈당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첫번째 경우일 가능성에 대해서는 Philo, Against Flaccus 20를, 두번째 경우일 가능성에 대해서는 Philo, Against Flaccus 56: “그들의 적이 이제는 비어버린 집을 침입하여 약탈하기 시작했고, 마치 전리품처럼 그 내용물을 나누기 시작했다”를 보라.

13. 자세한 내용을 위해서는 Tacitus, Annals of Rome 15. pp. 38~44를 보라.

14. 수에토니우스가 “기독교인들이 벌을 받았다. 기독교인이란 문제가 있는 새로운 미신에 중독된 사람들이다”(Life of Nero 16.2)라고 한 것은 아마도 같은 사건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박해에 대해서는 T. D. Barnes, “Legislation Against the Christians,” Journal of Roman Studies 58 (1968): 32~50; A. N. Sherwin-White, “The Early Persecutions and Roman Law Again,” Journal of Theological Studies 3 (1952): 199~213을 보라.

15. 이 주제에 대한 강해에 대해서는 W. L. Lane, Call to Commitment: Responding to the Message of Hebrews (Nashville: Thomas Nelson, 1985)를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