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경: [히7:1]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제사장 멜기세덱] ꃨ 이 멜기세덱은...복을 빈 자라 - 본절은 창 14:17-20에 대한 언급으로, 저자는 멜기세덱에 대해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ꃨ 살렘 왕이요 - '살렘'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스키토폴리스'(Scythopolis)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Westcott). (2) 혹자는 세겜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XX 창 33:18, Kirland). (3) 혹자는 예루살렘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시 76:2, Morris, Lane, Vincent, Winter). 이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타당하다.
ꃨ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 제정(祭政)이 분리되지 않았던 고대에 왕이 제사장 직책을 수행한다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최고의 하나님'이란 의미로(Hewitt) 하나님의 초월적인 신성을 암시한다(Lane, Hanlon, Philo).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였고 이에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을 제사장으로 인식하여 십일조를 그에게 바친다(창 14:19,20).
ꃨ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 창 14:17-20(LXX)에서는 '아브람'으로 되어 있으나 본절에서는 '아브라함'('A )으로 되어 있다. 이런 변화가 있다 할지라도 저자는 본절의 내용을 70인역에서 인용한 듯하다(Lane). 한편 저자는 인용 과정에서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연합한 왕들을 물리치고 돌아올 때에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라함을 영접한 부분은 삭제하고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사건과 아브라함이 얻은 것의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준 사건(2절)만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변개를 통해서 저자는 4-10절에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탁월함을 강조한다(Lane, Williamson).
성 경: [히7:2]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제사장 멜기세덱] 저자는 본절에서 멜기세덱의 두 가지 칭호를 제시한다. ꃨ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 '멜기세덱'은 '나의 왕'을 의미하는 '말키'(*)와 '의'(義)를 의미하는 '체뎌'(*)이 결합된 형태로 문자적인 의미는 '나의 왕은 의롭도다'이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미래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여호와 우리의 의'(렘 23:6)로 부른 것과 연결된다. ꃨ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 '살렘'이라는 지명(地名)은 '평강'을 의미하는 '샬롬'(*)과 동일한 어근에서 비롯된 단어로 '평화'로 번역될 수 있다(Morris). 장차 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평강의 왕'(사 9:6)이라 칭한 것과 연결된다. 저자는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통하여 멜기세덱과 그리스도와의 관련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참된 평강을 주러 오셨으며(마 11:28), 자신의 의를 통하여 공의가 넘치는 나라를 완성하며 다스리신다(사 9:7;11:1-5).
성 경: [히7:3]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제사장 멜기세덱] ꃨ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파토르 아메토르'(*)는 사생아나 천한 신분의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으며 경우에 따라 성적(性的)인 것을 초월하여 태어난 신적인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하였다(Morris). 이것은 저자가 멜기세덱을 천사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성경에 멜기세덱의 부모에 대한 언급이나 족보에 대한 기록이 없음을 나타낸다(Lane). 멜기세덱의 부모와 족보가 없다는 사실은 그의 탄생이 기적적으로 되어졌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제사장적인 특질을 설명하려는 것으로서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이 탄생이나 족보와 같은 외적인 조건에 의해서 확립된 것이거나 레위계통의 제사장직의 승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것임을 나타낸다(5:5, 6, Lane, Horton)
ꃨ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 저자는 멜기세덱의 탄생과 죽음에 관한 언급이 창세기에 기록되지 않은 사실에 착안하여 그의 제사장직이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한 것임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임을 나타낸다. 저자는 이러한 예표와 강조를 통해서 멜기세덱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과는 다른 제사장임을 진술한다(Spicq). '방불하여'의 헬라어 '아포모이오메노스'(*)는 '유사하여'라는 의미로 멜기세덱과 하나님의 아들이 외형적인 형태에 있어서 유사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ꃨ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 본문은 창 14:18-20의 내용에 대한 해석인 시110:5(LLX)의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저자는 시110:5(LLX)의 '영원한'(*, 에이스 톤 아이오나)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항상'(*, 에이스 토 디에네케스)으로 변형시켰다. 이런 변형은 저자가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멜기세덱의 제사장인 그리스도가 영원하다는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음을 시사한다(Lane).
성 경: [히7:4]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제사장 멜기세덱] 4-10절까지는 멜기세덱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우월함을 논증한 진술이다. ꃨ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 '어떻게 높은 것을'에 해당하는 헬라어 '펠리코스'(*)는 영탄법(詠嘆法)으로 멜기세덱의 위대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쳤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2절에서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일체의 십분의 일'을 주었다고 기술되고 있다. '노략물 중 좋은 것'의 헬라어 '아크로디니온'(*)은 '가장 높은 곳'을 의미하는 '아크로스'(*)와 '무더기'를 뜻하는 '디스'(*)의 합성어로 문자적으로 '쌓인 것들 중에 가장 높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진리품 중에서 가장 좋은것을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주었다는 표현으로 전리품 중 가장 좋은 것을 받은 멜기세덱의 권위를 시사한다. 아브라함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대표하고 상징하는 존재이다. 이런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주었다는 사실은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이 멜기세덱에게 조상 아브라함을 통하여 십일조를 드렸음을 나타내며, 멜기세덱이 레위계통의 제사장들보다 위대하고 우월함을 암시한다(Cockerill).
성 경: [히7:5]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제사장 멜기세덱] ꃨ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 저자는 본절과 6절에서 십일조에 관한 문제를 놓고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과 멜기세덱을 비교하여 멜기세덱의 우월성을 논증한다. 율법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를 바칠 것을 명시하고 있으며(민 18:21, 24), 레위인들은 다시 그들의 십일조를 제사장들에게 주도록 의무화하고 있었다(민 18:26). 이런 제도는 바벨론 유수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느 10:38,39). 이와 같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모두가 백성에게서 십일조를 받아 기업으로 삼았다. 한편 '허리에서 난 자'에서 '허리'의 헬라어 '오스퓌오스'(*)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활동을 위한 준비 태세'나(왕상18:46) '힘의 근원'(나 2:1)을 의미하기도 하나 본절에서는 잉태와 출산에 관련된 생식 기능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문은 백성들이 아브라함의 직계 자손이라 할지라도 제사장들은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일조를 취했음을 나타낸다. 즉 제사장들이 백성보다 우월한 존재가 아니라 형제로서 본질적으로 동등한 존재이며 그들이 십일조를 걷을 수 있는 것은 단지 율법이 그렇게 명시하고 있기 때문임을 나타낸다(Morris).
성 경: [히7:6]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제사장 멜기세덱] ꃨ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십분의 일을 취하고 -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율법에 의해 십일조를 거두었으나 멜기세덱은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하였을지라도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았다(2절; 창 14:18-20). 저자는 앞절과 본절에서 레위 계통의 제사장과 멜기세덱을 십일조를 받는 문제로 비교하여서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멜기세덱이 훨씬 우월한 존재임을 진술하고 있다. ꃨ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 '그 약속 얻은 자'는 아브라함을 가리킨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십일조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복을 빌어 주었다(1절;창 14:19,20). 고대 사회에서 축복의 행위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서 신분상(身分上)으로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Morris).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리고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준 사실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우월한 존재임을 드러낸다.
성 경: [히7:7]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제사장 멜기세덱] ꃨ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빎을 받느니라 - '폐일언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리스 데 파세스 안틸로기아스'(*)는 파피리(Papyri)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관용구로서 저자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의 확실성을 강조할 때 사용된 표현이다. 한편 '높은'의 헬라어 '크레이트토노스'(*)는 비교급으로서 '더 나은', '더욱 탁월한' 혹은 '더욱 위대한'이란 의미로 본서에 자주 사용된 용어이다(19,22절;8:6;9;23;11;40). 본절의 이런 '비교급' 표현은 창 14:18-20의 내용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1절)이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보다 더욱 위대한 존재였음을 암시한다(Cockerill).
성 경: [히7:8]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제사장 멜기세덱] ꃨ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 6,7절에서 멜기세덱을 아브라함과 비교하여 멜기세덱이 더 위대함을 논증한 저자는 본절에서 레위 계통의 제사장을 가리키는 '여기는'(*, 호데)과 멜기세덱을 가리키는 '저기는'(*, 에케이)을 통해서 표현된다.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으로서 십일조를 백성에게서 받았으나 멜기세덱은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로서 십일조를 받았다. 여기서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는 저자가 3절에서 언급한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표현이다. 성경은 멜기세덱의 죽음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이러한 멜기세덱과 죽을 수 밖에 없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을 비교하여 멜기세덱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우월한 존재임을 드러낸다.
성 경: [히7:9]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제사장 멜기세덱] ꃨ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있나니 - 레위인들은 십일조를 받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멜기세덱 제사장에게는 아브라함을 통해 십일조를 바쳤다. '할 수 있나니'의 할라어 '호스 에포스 에이페인'(*)은 신약성경에서 본서에만 등장하는 저자 특유의 표현이다. 본서의 저자는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길게 다루지 않고 주위를 환기시켜 간결하게 끝맺고자 할 때 이런 표현을 주로 사용하였다(Lane, Westcott, Morris).
성 경: [히7:10]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제사장 멜기세덱] 개역성경에는 '가르'(*,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절이 앞절에서 언급된 '레위가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는 진술에 대한 이유임을 시사한다. ꃨ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을 때 레위는 태어나지도 않았었다. 그러기에 레위가 직접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고 할 수는 없으나 레위를 대표하는 조상인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쳤으므로 그것은 곧 레위가 바친 것과 같은 행위라고 할 수 있다(Lane).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는 레위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동시에 아브람함의 후손(後孫)임을 암시한다. 비록 레위는 태어나지 않았고 직접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치지 않았다 할지라도 성경에서 유대인들이 조상을 말할때 그의 후손까지 포함하였기 때문에(창 25:23; 고전 15:22) 레위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은 레위가 바친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저자는 그리스도의 모형인 멜기세덱의 우월성을 강조하여 결국에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시사하고 있다(Morris).
성 경: [히7:11]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ꃨ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 본절은 '에이'(*, '만약')로 시작하는 가정법으로 율법과 연관된 레위 계통의 제사장 직분이 불완전함을 나타낸다. '온전함'의 헬라어 '텔레이오시스'(*)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혹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온전한 행위를 뜻한다(Lane, Robertson). 레위 계통의 제사장 직분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게 하는 데 실패하였다(Moffatt). 왜냐하면 레위 제사장들의 제사 행위로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죄악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9:9;10:1) 사람들이 그들에게서 받은 율법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 해줄 뿐 그것을 완전히 준수해서 의롭다 함을 얻게 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롬5:20). 그래서 아론을 좇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 대신에 멜기세덱을 좇는 별다른 제사장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별다른'의 헬라어 '헤테론'(*)은 '전혀 다른 종류'를 의미하는 것으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새 제사장이 과거 아론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과는 전혀 다른 존재이며 아론 계통의 제사장들이 할 수 없었던 '온전케 함'을 하시는 분이심을 암시한다. ꃨ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 '그 아래서'(*, 에프 아우테스)에서 '그'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우테스'(*)는 본절 상반절의 '레위계통의 제사 직분'을 가리키는 말이며 '아래서'의 헬라어 '에프'(*)는 '...을 근거로 하여'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을 근거로 하여 율법을 받았으니'라는 의미로 제사장직과 율법이 서로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시사한다(Morris).
성 경: [히7:12]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ꃨ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 제사장 직분과 율법은 불가분리(不可分離)의 관계를 맺고 있다(11절).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이 불완전하여 백성을 온전케 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제사장 즉 멜기세덱 계통의 제사장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제사장직과 관련된 율법도 불완전하여 바뀌어야 함을 시사한다.
성 경: [히7:13]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ꃨ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 본절은 12절에서 언급된 '율법의 변역'에 대한 내용이다. 율법은 오직 레위 지파만 제사장직을 감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새로운 제사장은 율법에 규정된 레위 지파가 아닌 다른 지파 곧 유다 지파에 속한 제사장이었다(Morris).이 유다 지파는 제사장 지파가 아닌 왕족 지파였기에 저자는 이 지파 사람 중 어느 한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았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는 유다 지파에 속했던 다윗과 솔로몬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음이 나타난다(삼하 6:13,17,18:24:25; 왕상 3:4;8:62). 이러한 경우 다윗과 솔로몬이 직접 제사 의식을 집행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희생제물을 준비하고 제사장이 제사를 행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Morris).
성 경: [히7:14]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ꃨ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 본절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레위 계통의 제사장이 아닌 다른 지파의 제사장임을 나타낸다(Morris, Bruce, Hewitt). 신약성경은 예수께서 유다 지파에서 나셨음을 계속 증거하고 있다(마 1:2,3;2:6;눅 3;33;행 2:29-36;롬 1:3;딤후 2;8;계 5;5;22:16). 예수께서 레위 지파에 속하지 않고 유다 지파에 속한다는 사실은 그의 대제사장직이 혈통적인 것에 의존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질서(秩序)에 의해서 결정되어진 것임을 시사한다. 한편 '좇아 나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테탈켄'(*)은 70인역이나 헬라 고전에서도 어떤 가문의 후손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다. '아나테탈겐'은 70인역에서 새로운 별이 나타나거나 가지에서 새로운 싹이 돋아나옴을 의미하는 말도 아마도 저자는 메시야를 예언한 구약의 예언들을 상기하면서 본 단어를 사용한 듯하다(민 24:17;렘 23:5, Schlier, Buchanan, Cockerill). ꃨ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 오직 제사장은 레위 지파에서만 나오는 것으로 언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 지파에 속한 예수께서 대제사장이시라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심을 암시한다.
성 경: [히7:15]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ꃨ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은 시 110:4의 인용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킨다(11절). '더욱 분명하도다' 에서 그 분명한 내용에 대한 견해는 세 가지이다. (1) 혹자는 11절에서 말한 레위 계통의 제사장 직분이 그 효능을 상실하게 된 사실이 분명하게 되었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Westscott). (2) 혹자는 모세 율법이 폐지되었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Lane). 이러한 세 가지 견해는 모두 나름대로의 타당성를 지닌다.
성 경: [히7:16]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ꃨ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 본문은 11절의 부정적인 표현 곧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와 동일한 의미로 11절에 대한 보충 설명이다(Lane).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은 포괄적으로 모세의 율법을 뜻하는 것으로 레위 계통의 합법적인 후손, 혹은 어떤 신체적 자격 요건 등을 가리킨다(Michel).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이 되신 것은 율법에 나타난 바대로 레위 자손의 혈통이나 외적 조건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다.
ꃨ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 본문은 11절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과 연관된다. 저자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과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대조시켜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이 썩거나 죽을 수 밖에 없는 제한된 육체의 계명 즉 율법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된 것임을 강조한다(시 110:4,Lane). 그리스도는 성경이 증거하는대로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만세의 왕'으로서(딤전 1:17) 그의 제사장직은 영원한 생명를 부여하는 영원한 것이다.
성 경: [히7:17]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ꃨ 증거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 본절은 시110:4의 인용으로서 16절에서 저자가 말한 것 곧 그리스도가 무궁한 생명을 소유했다는 것에 대한 성경적 근거이다. 저자가 본절에서 '증거하기를'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르튀레이타이'(*)를 사용한 것은 저자 자신이 시 110:4을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에 관한 말씀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시사한다(Lane).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이 불완전한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과 무관하며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제사장직임을 나타내어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완전함을 암시한다.
성 경: [히7:18]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ꃨ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 본절과 다음절은 저자가 11절부터 언급한 내용의 결론이다. '계명'은 문맥상 제사장직에 관련된 율법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있느나(Lane), 16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모세의 모든 율법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타당하다(Morris). 한편 '연약하며'의 헬라어 '아스데네스'(*)는 율법자체가 연약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연약하여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의미한다(Lane). 또한 '무익하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노펠레스'(*)는 율법이 단지 사람의 외형적인 것만을 정결케할 뿐 그 내적인 양심(良心)을 깨끗게 할수 있는 능력은 없음을 시사한다(9:9,10,14,23;10:14, Hewitt).
성 경: [히7:19]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ꃨ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 '온전케'로 번역된 헬라어 '에델레이오센'은 인간이 하나님과 더불어 이루는 온전한 관계를 의미한다(11절). 율법은 단지 외형적인 것만 깨끗하게 하고 내적인 양심은 깨끗게 할 수 없어서(9:9,14) 사람들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과 더불어 올바른 관계를 형성할 수 없었다. 즉 사람들은 제사장직이나 성결 의식과 같은 율법적인 제도에 의해서는 하나님과 더불어 온전한 관계를 이룰 수 없었다(Riggenbach , Michel).
ꃨ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리라 - '더 좋은'(*, 크레이트토노스)이란 표현은 히브리서 저자의 독특한 표현이다(19, 22절;8:6;9:23). '더 좋은 소망' 즉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였으며, 레위적인 율법 제도로는 결코 이룰 수 없었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Lane).
성 경: [히7:20]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ꃨ 또 예수께서 제사장 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 본절과 다음절은 새로운 제사장이신 예수와 레위 계통의 제사장 사이의 비교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엄숙하신 맹세로 말미암아 제사장으로 지목된 반면에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맹세없이 율법에 근거하여 제사장직을 부여받았다(28절). '맹세없이 된 것이 아니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 코리스 호르코모시아스'(*)는 시 110:4의 추론으로 하나님의 맹세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대한 확고한 보증이 됨으로 신자들은 그의 제사장직에 소망의 닻을 드리울 수 있음을 시사한다(6:18-20,Schneider, Thompson).
성 경: [히7:21]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ꃨ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는 시110:4의 인용이다(17절).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하나님께서 맹세하심으로 부여된 것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이 맹세하신 약속의 신실성으로 인해(Cockerill) 보증된 것이다. 반면에 율법하에서 이루어진 레위인의 제사장직은 하나님의 맹세나 약속 혹은 보증이 없이 이루어진 것으로 다만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16절)을 좇아 이루어진 직분에 불과하다. 이러한 두 제사장직의 차이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보다 우월하며, 완전할 뿐만 아니라 더 나은 언약에 대한 보증임을 암시한다(22절).
성 경: [히7:22]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특성] ꃨ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 저자는 '언약'의 헬라어 '디아데케스'(*)를 본서에서 17회나 사용하여 중시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처음 나타난다. '디아데케'는 '유언', '서약', '의지'라는 의미로 70인역(LXX)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이고도 은혜로운 '의지'를 가리킨다(Lane). 동시에 그 단어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가 함축되어 있다(Morris). 문맥상 본절의 언약은 제의적(祭儀的)인 것으로(Lane) 옛 언약 즉 구약의 제의는 하나님께가까이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었으나 외형적인 것만 정결케 하고 내적인 양심은 정결케 할 수 없는 불완전한 것이었다(18절).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언약을 수립하시고(8:8-10;9:15-20), 새 언약을 통해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온전히 나아올 수 있도록 하셨다(25절;9;14,15). 새 언약은 구약의 옛 언약보다 '더 좋은 언약'이다. 한편 '더 좋은 언약'인 새 언약에 대한 '보증'은 영원한 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이시다(19절;13:20). '보증'에 해당하는 헬라어 '엥귀오스'(*)는 '보증인'이라는 의미로 이 보증인은 '중재자'의 뜻인 헬라어 '메시테스'(*)와는 달리(8:6;9:15;12:24) 보증인 자신의 인격과 생명을 담보로 자신이 행한 말에 대해 보증한다는 강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Michel). 그리스도는 자신을 믿고 의지하는 백성들의 구원에 대한 담보로 구원의 영원한 보증이 되신다.
성 경: [히7:23]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특성] ꃨ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 저자는 새 언약의 제사장은 예수 한분 뿐인 반면에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그 수효가 많음에 주목한다.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아론부터 시작해서 A.D. 70년 예루살렘멸망에 이르기까지 83명의 대제사장들이 취임했었다고 한다(Antiq. 20,227).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의 수효가 많다는 것은 그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이며 그들이 행하는 제의가 불완전함을 반영한다(1:1;10:1-4, Michel, Thompson).
성 경: [히7:24]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특성] ꃨ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죽음을 인하여 제사장직을 감당할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였던 반면 예수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시므로 뒤를 이을 다른 제사장이 필요하지 않다. 그리스도를 뒤이을 제사장이 필요치 않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이 필요치 않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으로 행하신 사역의 완전성과 영원성을 '아파라바톤'(*)은 70인역에서 드물게 나타나는 단어로 제사장이 그의 의무를 계속한다는 의미이다(Josephus). 예수의 영원성은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의 일시성과는 달리 그의 제사장직이 영구적임과 동시에 최종적(最終的)인 것임을 시사한다(Lane).
성 경: [히7:25]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특성] ꃨ 그러므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덴'(*)은 본절이 23,24절의 논리적 귀결임을 나타낸다. ꃨ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 '온전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토 판텔레스'(*)는 '완전히', '절대적으로'라는 의미로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으로는 결코 이를 수 없는 구원의 완전성을 뜻한다. 한편 '구원하실'의 헬라어 '소제인'(*)은 현재시상이다. 본서에 나타나는 '구원'이 미래에 있을 종말론적인 유업을 가리키는 반면(1:14;5:9;9:28) 본절의 '소제인'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음, 그리고 승천으로 말미암아 현재에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고 있는 '구원'을 시사한다(2:3,4;6:4,5,9, Lane). 그리스도는 옛 언약의 제의 행위에 의지하지 않고 새 언약인 자신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자에게 현재 구원에 참여케 하며 동시에 종말론적 구원에의 참여를 보증하신다.
ꃨ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 '간구하심이니라'의 헬라어 '엔튕카네인'(*)은 '중재하다'라는 의미로 예수께서 하나님께 특별한 복을 내려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좌정하심을 가리킨다(Lane, Snell, Morris). 이러한 그리스도의 중재 사역으로 인해 사람들은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할때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된다.
성 경: [히7:26]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특성] ꃨ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 '이러한 대제사장'이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영원하시며(24절), 자기를 의지하는 자들은 온전히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25절), 항상 살아서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께 중재할 수 있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새 언약에 합당한 제사장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갈수 있도록 모든 길을 마련해 놓으신 분이다. 저자는 영원한 구원의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신 대제사장 그리스도에 대해 다섯 가지로 묘사한다. 이 다섯 가지는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대제사장으로 지녀야 할 성품과 지위를 나타낸다(Hauck).
ꃨ 거룩하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시오스'(*)는 70인역에서 '충실한'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시 12:1).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활 가운데서 보여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나타낸다(5:7,8). ꃨ 악이 없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카코스'(*)는 '교활하지 않은', '순수한'이라는 의미로 예수께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순수하셨으며 어떠한 악과도 접촉하지 않으셨음을 시사한다(Moffatt, Grundmann, Bruce).
ꃨ 더러움이 없고 - 이의 헬라어 '아마안토스'(*)는 '더럽혀지지 않은', '순결한'이라는 뜻으로 제의적 순결성을 나타낸다(마카비 2서 15:34).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제의 의식을 통해서 외적으로 더럽혀진 자신을 깨끗이 하였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전혀 더럽혀지지 않은 온전한 도덕적 순결성을 소유하셨다(Morris).
ꃨ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 이것은 앞서 언급한 그리스도의 세 가지 성품과 연결된다.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는 도덕적으로 죄인들과 분리되어 있어 근본적으로 죄인인 인류와는 다른 존재이시다(Buchanan, Peterson). ꃨ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 '하늘보다 높이'의 헬라어 '휩셀로테로스 톤 우라논'(*)은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키는 표현이다(Lane). 예수께서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과는 달리 승천하셔서(4:14)곧바로 하나님 존전에 나아가신 대제사장으로서 완전한 중재자가 되신다(Morris).
성 경: [히7:27]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특성] ꃨ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 레위 계통의 대제사장들은 속죄일에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해 속죄 제사를 드리기에 앞서 항상 자기 죄를 위한 속죄 제사를 드린다(5:3;레 4;3-12;16:6-10). 왜냐하면 레위 계통의 대제사장도 역시 불안전한 인간으로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번 자신과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희생 제사를 드렸으나 저자는 본절에서 '날마다'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저자 자신도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 속죄일에 희생 제사를 드린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드리는 것으로 표현한 이유는(9:7,25;10;1) 대제사장이 제사를 매일 드렸다는 의미보다는 그가 부주의로 죄를 범했을 때 매일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할 필요가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Bruce).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시므로 자신의 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으실 뿐만 아니라(4:15)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반복적으로 제사를 드리실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가 드린 한 번의 제사는 하나님의 독생자 되신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친 완전한 제사였기 때문이다.
ꃨ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 저자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사실을 그의 대제사장직의 핵심적인 기능으로 제사한다(Zimmermann). 죄 없으신 완전한 대제사장인 그리스도가 완전한 자신을 제물로 드린 그의 속죄사역은 일시적인 레위 계통 제사장들의 속제 사역과는 달리 한 번으로 영구화(永久化) 될 수 있었다. 저자는 본절을 통해서 레위 계통의 대제사장들의 불완전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을 제물로 바친 그리스도의 속죄의 완전성을 설명하고 있다.
성 경: [히7:28] 주제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그리스도] 주제2: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특성] ꃨ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 저자는 본장을 결론지으면서 사람인 제사장과 온전하신 제사장이신 그리스도와 세 가지 차이점을 제시한다. (1) 율법과 맹세의 말씀. 옛 언약에 속한 레위 제사장들은 '율법'에 근거하여 제사장직을 물려받았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맹세하셔서 약속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신실한 맹세의 약속을 성취하였으며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다. (2) 사람과 아들. 옛 언약의 제사장들은 유한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반복적이고 일시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 영원히 살아계셔서 온전한 중재 사역을 행하셨다. (3) 약점을 가진 자와 온전케 되신 자. 옛언약의 제사장은 약점을 가져서 불완전한 사역을 행할 수 밖에 없었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온전하셔서 지상 생활의 고난 가운데서도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모든 믿는 사람의 구원의 근거가 되셨다(2:10;5:8,9)
|
히브리서 7장 주석
●멜기세덱의 제사직(히브리서 7:1-10)
전 장은 전에 인용한 시편 110편 4절을 다시 반복 인용함으로 끝나고 있다. 즉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는 말씀으로 전 장은 종결되었다. 이제 본장은 6장 20절의 내용을 본문으로 한 설교와 같다고 볼 수 있겠다. 본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앞에서 말한 질긴 고기를 히브리인들 앞에 내놓는다. 그는 그들이 더욱 노력함으로 이 고기도 소화시킬 수 있기를 바랐다.]
Ⅰ. 첫 번째로 바울은 "멜기세덱이 누구인가?"하는 문제로 다루었다. 구약에서 멜기세덱에 관해 설명해 준 곳은 창세기 14장 18절 이하와 시편 110편 4절이 전부이다. 우리는 정말로 멜기세덱에 대해서 모르는 점이 너무 많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멜기세덱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을 합당하게 여기셨던 것 같다. 그 이유는 이 멜기세덱이 바로 그리스도에 의하여 보다 생생하게 부각되게 하시기를 바라셨기 때문이었다. 이같이 구약이 나타내 주고 있는 멜기세덱에 대한 묘사가 불분명하므로 주어진 계시 즉 그리스도에게서 멜기세덱의 참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가 누구일까 하는 끊임없는 상상의 미로를 방황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멜기세덱을 천사라고 상상할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은 성령이라고 상상할 것이다.
1. 이 멜기세덱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냐에 대한 구구한 의견들이 많이 있다. 그 중에서 우리가 고찰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1) 유대의 랍비들과 대부분의 유대 저작자들은 멜기세덱을 노아의 아들인 셈이라고 생각한다. 이 셈은 그들의 선조들의 왕이요 제사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셈을 구태여 멜기세덱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불렀겠느냐 하는 것이요, 또 한 가지 이유는 셈이 가나안에 정착해 살았었다는 설명이었기 때문이다(이에 비하면 멜시세덱은 가나안에 정착한 것으로 창세기에 되어 있다).
(2) 많은 그리스도인 저자들은 그를 예수 그리스도가 생각한다. 이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에 대한 특별한 우호의 표시로 그에게 나타난 것이요, 이 그리스도를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요한 복음 8장 56절에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라는 말씀을 통해 입증된다고 보았다. 이런 입장에 대해서는 구구한 견해들이 가능하리라고 본다. 사실 3절에서 언급된 내용을 볼 때 이 멜기세덱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유형으로 나타나셨다고 보는 데는 무리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3) 가장 일반적인 견해는 멜기세덱이 가나안의 왕이라는 점이다. 그는 살렘을 다스렸고 참된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신앙을 지켰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의 한 유형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였고 그러기에 아브라함에 의하여 그런 영광을 받았다는 것이다.
2.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이러한 추측을 벗어나서 바울이 이 멜기세덱에 대하여 본문에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또 바울이 이 멜기세덱을 통해 그리스도를 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를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1-3절).
(1) 멜기세덱은 왕이었으며 주 예수 또한 왕이었다. 즉 하나님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신 것이다. 정사(政事)가 그의 어깨 위에 있으며 또한 그는 자기 백성들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사람들을 다스린다.
(2)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었다. 그의 이름이 "의로운 왕"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의로우시고, 의로운 왕이시다. 그의 이름이 의롭고 또한 그의 다스림이 의로우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의 구세주이시다. 그는 모든 의를 완성하셨고, 영원한 의를 수립하셨으며, 또한 의와 의인을 사랑하시고 불의를 미워하신다.
(3)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이었다. 즉 평화의 왕이었다. 그는 의의 왕인 동시에 평화의 왕이시다. 우리의 주 예수 역시 평화의 왕이시다. 그는 그의 의로 인하여 평화를 이룩하셨다. 의의 열매는 평화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평화를 말씀하시고, 평화를 창조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평화의 창조자이신 것이다.
(4) 멜기세덱은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 제사장"이었으며 이방인의 제사장으로 특별한 자격이 주어졌고 또 특별한 방법으로 기름 부음이 주어졌다. 주 예수 역시 그러하시다. 그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그리고 이방인들은 주 예수를 통하여서만이 하나님께 이를 수 있다. 우리가 죄의 용서와 화해를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의 제사장직을 통하여서인 것이다.
(5)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으시다"(3절). 이 구절은 문자 그대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다만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성경은 멜기세덱을 특별한 사람으로 우리에게 소개하고자 한다는 사실만 인식하면 족하다. 본문에서 멜기세덱을 그렇게 소개한 것은 멜기세덱이 그리스도의 유형으로서 확실히 인식시키기 위해서였다. 사실 그리스도께서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아버지 없이 태어나셨고 그가 신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는 어머니 없이 태어나셨던 것이다. 그의 제사장직 역시 계승된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에게 상속된 것도 아니도 그로부터 다른 사람에게 상속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으로 그의 독점물로 영원히 그의 것이다.
(6) 멜기세덱은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였다." 이 기사는 창세기 14장 18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과 그의 종들이 피곤하고 지쳤을 때 빵과 포도주를 가져다 주어 기운을 회복하게 하여 주었다. 멜기세덱은 왕의 입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먹을 것을 주었으며, 제사장의 입장에서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여 주었다. 이와 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는 자기 백성들을 만나시고, 그들을 회복하여 주시며, 그들의 원기를 새롭게 하시고 축복하여 주신다.
(7)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다(2절)". 즉 그의 전리품 가운데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이 자기를 위하여 행한 일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준 것이며"라고도 할 수 있겠고 또는 왕이신 멜기세덱에게 복종과 신하의 예절을 표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또는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한 예물을 제사장인 멜기세덱을 통해 하나님께 바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와 같이 우리도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풍부하고 거룩한 은총에 대하여 주 예수께 사랑과 감사로 보답해야 할 것이며, 또한 우리의 왕이신 그에게 충성하고 복종해야 할 것이며, 우리의 모든 예물을 그에게 맡김으로 아버지께 봉헌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8)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으신다." 멜기세덱은 경건성과 권위에 있어서 하나님과 방불하시었다. 불멸하는 대제사장이었다. 또한 멜기세덱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하신 외아들이시며 영원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고대의 유형인 것이다.
Ⅱ. 이제(사도 바울이 충고하는 대로) 이 멜기세덱이 얼마나 위대하였고, 또 그의 제사직이 아론의 제사직의 계열보다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하여 보기로 하자(4,5절). 바울은 본문에서 "이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생각하라"고 하였다. 멜기세덱의 인격과 그의 제사장직의 위대성은 다음 사실로 나타난다.
1. 아브라함이 자기의 모든 전리품 가운데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드렸다는 사실을 통해 나타난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바쳤으므로 따라서 그의 후손인 레위도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린 것이 되는 것이다(9절). 레위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대제사장직을 부여받아 백성들로부터 십분의 일을 받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더욱 높고 위대한 제사장인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바쳤던 것이다. 따라서 멜기세덱의 원형으로써 후에 나타난 대제사장인 그리스도는 레위대제사장들보다 높은 대제사장인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레위인들은 아브라함을 통해 그리스도의 위형인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하여 선조들이 행한 의로움이나 또는 불의로운 일이 다 그 후손에게 물려진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따라서 아담 안에서 우리도 범죄한 것이며 그의 범죄를 통해 우리도 그와 함께 타락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이미 그의 허리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선조가 우리에게 물려 준 인간성을 물려받았고 또 그와 함께 죄와 부패를 물려받은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 죄와 부패는 본래적으로 주어졌다고 하겠다. 인간들이 모두 그 죄된 특성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한 얘기이다. 따라서 이런 죄된 특성이 죄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은총의 행위에 의해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2.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 축복하였다는 사실을 통해 나타난다. 이에 대해 본문은 "멜기세덱이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다니,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빎을 받느니라(6,7절)"고 하였다. 여기서 다음의 것을 알 수 있다.
(1) 아브라함이 지닌 놀라운 특권 즉 그는 약속을 받은 자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계약 관계를 맺은 사람이며 하나님 그에게 대단히 위대하고 귀중한 약속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손수 축복하시고 또 그 축복을 보증해 준 사람은 진정 부자이며 행복한 자이다. 이 하나님의 약속은 현세와 내세에 대한 약속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모든 자들은 이 약속을 얻게 된다. 예수 안에서 모든 약속은 틀림없이 실현되는 것이다.
(2) 아브라함보다 더 큰 특권을 지닌 멜기세덱. 그는 아브라함을 축복할 위치에 있었고 또 그런 특권이 그에게 있었다.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빎을 받는다"(7절)는 것은 불변의 진리인 것이다. 축복을 주는 사람은 축복을 받는 자보다 위대하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의 원형이시오 그보다 더 공로가 크시며 인간들에게 모든 축복을 주시는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는 아론의 계열에 속한 모든 제사장들보다 위대하심에 틀림 없는 것이다.
●멜기세덱과 그리스도(히브리서 7:11-28)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아니하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다른 제사장이 일어나야 하는 필요성이 본문에 말씀되고 있다. 그 이유는 레위 제사직에 의해 인간의 완성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었으므로 이것을 이룰 또다른 제사장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Ⅰ. 레위 계통의 제사직분과 율법으로는 완전함을 기할 수 없음이 주장된다. 레위족 제사장들은 그들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전해 준 아름다운 축복들을 그들로 완전히 누리게 해 줄 수는 없었다. 다만 그들은 그리로 이르는 길을 보여 줄 수 있을 뿐이었다.
Ⅱ. 그러므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또다른 제사장이 세워져야만 했다. 그를 통해 또 그의 믿음의 계율을 통해 그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완전함이 성취될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따라서 은혜의 언약 가운데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한 거룩성과 완전한 축복을 소유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케 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이런 특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도록 하자.
Ⅲ. 제사장직이 변화되어야 하므로 따라서 율법도 변화될 필요성이 있음이 주장되고 있다. 제사장직과 율법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다른 제사장직 아래서는 다른 계율 아래서 시행되어져야만 하며, 다른 방법으로 역사하여야 한다. 이 제사장직은 그 제사직의 성격과 계열에 합당한 계율에 의해 관리되어야 한다.
Ⅳ. 제사장직과 율법이 바뀌어야만 된다는 것이 주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 입증되고 있다(13,14절). 그것에 의해 완전히 도래될 수 없는 제사장직과 율법은 폐지되어야 한다. 또한 그에 의하여 참된 믿음을 가진 자들이 완전케 되는 것이다. 제사장이 일어나고 다른 계율이 있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제사직의 어떤 변화가 있는가를 살펴 보자.
1. 제사장직이 계승되는 지파가 변하였다. 이전에는 제사장직은 레위 족속에서 속해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위대한 대제사장은 유대 지파에서 세워지셨는데 모세는 이 지파에게서 제사장이 나리라고 말한 적은 결코 없었다. 이같은 제사장 가문의 계울이 바뀌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2. 제사장을 세우는 순서와 형식이 변하였다. 이전에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을 때 그들은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절차를 따라 제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위대하신 대제사장은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쫓아 제사장이 되셨다. 레위 제사직에 대한 규례는 아버지가 죽을 때 그 직분을 큰아들에게 계승되도록 정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부모가 없이 또 족보가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고 따라서 부모 없이 대제사장되는 것은 불가능 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신 가운데 생명과 불멸성을 지니고 있지 못하였다. 그들에게는 생명의 시작과 생명의 종말이 있었다.
그래서 육체에 상관된 계명 또는 장자의 상속법을 마치 시민권이나 유산이 상속되는 것처럼 제사직도 상속되도록 규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을 제사장으로 그 계율은 "무궁한 생명을 좇아" 정해진 것이었다. 그리스도 자신이 가지고 계시는 생명과 불멸성이 그에게 제사장의 칭호와 권리를 부여해 주었고 그것은 결코 전의 제사장들에게서 계승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사실은 제사장직과 그 제사직의 경륜의 커다란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 이런 사실은 그리스도의 그의 복음의 무한한 우수성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레위 지파에서 제사장을 세우도록 정하고 있는 율법은 제사장들이 연약하고 가시적이며 피조물이며 그들 자신의 본래적인 생명을 보존할 수도 없으며 다만 자기들을 계승할 후손이 있는 것으로 만족히 여겨 기뻐해야 하는 존재들임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권세나 능력으로는 자기들에게 오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거나 영적인 생명을 공급해 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고백이 대상이신 대제사장께서는 그분 안에 영원한 생명의 능력을 지니고 계신다. 즉 그는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보존하실 수 있을 뿐 아니라, 그의 희생과 중보에 의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적이며 영원한 생명을 전달해 주실 수도 있는 분이신 것이다. 어떤 주석자는 "육체의 상관된 계명"이라는 말을 형식적인 봉헌 의식과 또한 물질적 제물에 규정된 계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궁한 생명의 능력"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된 영적이고도 영원한 특권을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
3. 제사장직을 통해 주어지는 효능이 변하였다. 전자는 연약하며, 유익을 주지 못하고, 아무것도 완전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는 더 나은 희망과 가져다 주는 것으로 그것에 의해 우리들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18,19절). 레위인들의 제사장직은 아무것도 완전하게 할 수 없다. 그것은 죄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면케 함으로 인간을 의롭게 하지도 못하며 인간을 죄로 깊이 오염된 상태에서 끄집어내어 거룩하게 할 수도 없다. 또한 그것은 예배자들로 죽음에 이르는 행실을 떠나게 해 주지도 못한다. 그것은 다만 사람들을 그것의 원형인 그리스도에게도 안내할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더나은 희망을 우리에게 가져다 준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품고 있는 용서와 구원에 대한 모든 희망의 참된 근거를 보여 준다. 또한 그 제사장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용납 받을 수 있다는 강하고 생명에 넘치는 희망을 지니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 이 희망을 통하여 우리는 용기를 내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며 하나님과의 계약을 맺게 되며 하나님과 교통하며 친교하는 생활을 살게 되는 것이다.
4.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악한 것을 내어버린 참 마음과 믿음의 큰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레위 제사장직은 다만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했고 영적인 속박상태에 머물게 하였던 것이다. 이 제사장직을 시행하신 하나님의 방법이 변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 대하여 맹세하시었다. 그러나 그는 아론의 반열에서 나온 어떤 제사장에게도 맹세하신 일은 없으셨다. 하나님은 아론의 반열의 제사직이 영원하리라는 것을 확언하지도 않으셨고 그들의 제사장직이 영원할 것이라고 맹세하거나 약속하신 적이 결코 없었다. 따라서 그들이 그들의 제사직이 영속하리라는 기대를 지닐 까닭은 없었다. 다만 그들은 그것을 일시적인 계율로 생각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하나님의 서약에 의해 보증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본문에 "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21절)"라고 하였다. 이같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영원성과 효력의 탁월성 그리고 불변성을 맹세로써 보증하였다.
5. 계약의 내용이 변하였다. 이제 제사장직은 안전하게 되었고 제사장은 보증인이 되셨다. 율법의 섭리에 비하여 복음의 섭리를 좀더 완전하고 자유로우며 명료하고 영적이며 능력이 있게 되었다. 이제 그리스도는 이 복음의 계약에 의해 하나님께 우리의 보증을 서 주셨고 또 인간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보증이 되시었다. 그는 이 복음의 계약이 양쪽에서 다 유효하게 하시었다. 그는 양쪽의 보증을 다 세시기 위해 그분의 인격안에 신성과 인간성을 동시에 지니고 계셨으며, 그것으로 화해의 보증이 되신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보증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을 영원한 언약의 끈으로 함께 묶으시었다.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그들의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도록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주신 그의 언약을 지키실 것을 탄원하신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권세와 영광이 손상되심이 없이 즉 자신의 중보자로서의 입장을 십분 발휘하여 이 일을 행하신다.
6. 제사장의 수효가 변하였다. 아론의 반열에는 많은 수의 제사장과 대제사장이 있었다. 그들은 단번에 대제사장이 된 것은 아니고 계속적으로 제사장직은 후대에게 계승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일회적이며 변함이 없으시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레위인의 제사장들은 숫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직분이 아무리 높고 영예로운 것이라고 할지라도 죽음으로부터 그들의 직분을 보존할 수도 없다. 제사장이 죽으면 반드시 다른 사람이 그 뒤를 계승했고 그가 죽으면 또 다른 사람이 계승하였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의 수효는 무수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대제사장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그의 대제사장직은 avpara,baton ─ 즉 갈리지 아니한다.
그것은 레위인 제사장직같이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대제사장직은 항상 같은 분의 손 안에 있다. 이 제사장직은 비어 있는 일이 없다. 따라서 그의 백성들은 이 제사장이 없이 하늘나라와 영적 관계를 맺게 되는 법은 결코 없다. 제사장직이 공석으로 있게 된다면 사람들은 대단히 불리하고 위험스러운 지경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그리스도가 제사장직을 맡으신 후에는 이런 제사장직의 공백은 없게 되었다. 즉 항상 살아 계신 이 대제사장께서는 언제나 어느 경우에나 매순간마다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나오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다(25절).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도 좀더 나은 변화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7. 제사장의 자격 또한 변하였다. 아론의 반열에 의해 제사장된 사람들은 죽어야 할 존재들일 뿐 아니라 죄된 존재들이었다. 즉 그들의 인간적인 허약성을 지니고 있었을 뿐 아니라 죄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우선적으로 자기들의 죄를 위하여 속제물을 바치고 그리고 백성들을 위하여 속제물을 드려야만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맹세로써 세우신 우리의 대제사장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제물을 드릴 필요는 없고, 오로지 백성들만을 위하여 제물을 드리면 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분의 직분 자체가 불변적인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인격 또한 변함이 없이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이러한 대세사장은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26-28절)라고 한 것이다. 다음을 유의하라.
(1) 죄인으로서의 우리는 우리를 중보하시고 속죄해 주실 대제사장을 필요로 한다.
(2) 그분의 인격 안에 완전한 의를 가지고 계시는 그리스도 이외에는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기에 충분하거나 또는 적당한 제사장이 없다. 이러한 제사장은 자신이 먼저 의로와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제사장은 우리의 죄에 대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도 없고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의 대변자가 될 수도 없는 것이다.
(3) 주 예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바대로 그러한 대제사장이시다. 왜냐하면 주 예수께서는 인격적 거룩성과 절대적인 완전성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거룩성이 여러 가지 용어로 표현되고 있음을 유의하자.
[1] 그리스도는 거룩하시다. 즉 죄의 습관과 죄의 본질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우시다. 그리고 그분의 품성 안에는 최소한의 죄에 대한 성향도 있지 아니하시다. 그리스도의 안에는 아무런 죄도 거하지 아니하신다. 비록 가장 선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그의 안에는 죄의 성향이 죄가 있게 마련이지만 그리스도 안에는 적은 죄된 성향도 찾아 볼 수 없다.
[2] 그리스도는 악이 없으시다. 그는 모든 종류의 악행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우시다. 그는 죄를 범하신 일이 없으시며 그의 입에는 제사가 없으시며, 하나님과 인간에게 최소한의 잘못도 하지 아니하셨다.
[3] 그리스도께는 더러움이 없으시다. 그는 다른 사람의 죄를 도웁지도 아니하셨다. 가장 선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다른 사람의 죄를 방관한 죄를 용서하여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가 있다. 우리 자신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으로 죄를 짓도록 간접적인 방법으로 도웁거나 또는 그들이 죄를 짓지 아니하도록 방지하지 못하므로 결국 그들의 죄에 대한 책임을 나누어지기가 십상인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더러움이 없는 분이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으니, 그분은 결코 우리의 죄와 잘못에 연루되시지는 않으셨다.
[4]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로부터 떠나 있으시다. 그는 그의 지위에 있어서 흠이 없으시며(그러므로 그는 더러운 것을 결코 들어 갈 수 없는 지성소에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들어가실 수 있었다) 그의 인격에 있어서도 순수하시다. 그가 죄인들과 합세하신 적은 없으셨다. 그는 본성적으로도 죄가 없으시며 죄인들과 결속하신 일도 없으시다. 원죄는 그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아담에게서 태어났고 또 아담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원죄는 우리에게 전달되었다. 우리는 평범한 아담의 후예인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동정녀에게서 나심으로 죄인들로부터 떠나서 존재하시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참 인성을 취하셨으나 기적적인 방법에 의해 수태되심으로서 다른 모든 인류들과는 구별되시는 것이다.
[5] 그리스도는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시이다. 대부분의 주석자들은 이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하늘나라에서 영광을 받으신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즉 그가 제사장직의 계획을 완성시키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다는 말씀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구드윈(Dr. Goodwin) 박사는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적 거룩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그리스도의 인격적 거룩성은 천사들의 거룩성보다 더 완전하고 위대한 것이다. 비록 거룩한 천사들은 죄에서 자유로웁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죄의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니(욥 4:18)"라고 한 것이다. 즉 하나님은 그의 천사들까지도 연약하다 하시며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신다는 말이다.
이 영적인 존재들인 천군은 한 순간에는 천사 노릇을 하다가 다음 순간에는 악마로 변모될 수도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 실상 많은 천군들이 이러한 잘못을 범하였다. 현재 타락되지 않은 거룩한 천사들은 그들의 본성이 흠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천사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천사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하는 말씀을 억지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영광 받으심으로 보기보다는 그리스도의 품격의 완전한 거룩성을 말함으로 이해함이 옳은 것이다. 또한 26절의 모든 내용의 레위 제사장들의 죄된 허약함에 비해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거룩함을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이 말씀이 그리스도의 인격적으로 완전한 거룩하심을 말하는 것임이 분명한 것이다.
그는 이같이 완전하셨으므로 자신을 위해 희생 제물을 바치실 필요가 없었다. 그의 중재는 전적으로 남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비를 내려 주실 것을 간구하셨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자비가 있었어야 했다면 그는 인간편에 가까운 속성을 지니셨다고 할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그는 중보자가 되실 수 없었을 것이었다. 또한 그가 이같은 죄인이었다면 죄인들을 위한 대변자가 되실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제 그의 중보가 공평한 것이요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기 위해 당장에만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필요로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한 결코 이러한 자비를 받아야할 위급한 입장에 처하시지도 않을 것임이 규명되어야 한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현재에 자신을 위해 은총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지만 내일이나 미래의 어떤 날 자신을 위해 은총을 필요로 할 것을 알고 계셨다면 그는 자신을 위한 유익을 도모하셨을 것이며 그랬다면 그는 일면 하나님의 영예를 순수한 열심과 존경심을 가지고 추구했다고 할 수도 없으며 또는 가련한 죄인들에 대한 순수한 동정으로 그가 대제사장이 되셨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위의 사실들을 통하여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자신 이외에 누구도 중보자가 될 수 없음을 알았다. 왜냐하면 피조물은 그 누구도 죄의 가능성을 벗어날 수 없으며 따라서 자신도 그러한 자비와 은총이 필요한 입장에 처해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cafe.daum.net/correctthe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