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지성소와 새 언약 / Hebrews 7:26~8:13
*부활주일입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의 주님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이 말은 그분이, 무덤에 머물러 계시거나 소멸되어 사라지신 분이 아니라, 부활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권능으로 다스리시며, 만물의 마지막 때에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주님이시라는 뜻입니다.
-부활주일은 그 계산법에 따라, 빠르면 3월 22일부터 늦으면 4월 26일 사이에 위치하게 됩니다. 춘분 후 최초의 만월 다음에 오는 일요일로 정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금요일이 보름이었기에 오늘이 부활주일이 됩니다. 한국 상황에서는 추위가 사라져가는 봄에 부화주일을 경험하게 되면서, 더욱 계절의 변화와 부활의 아침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룹니다. 부활주일 아침을 맞아 속초의 공설운동장에서 연합예배를 드리던 어느 날의, 쌀쌀한 아침 공기를 저는 지금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부활주일을 보내고 한화콘도라든지 영랑호 주변으로 함께 나가 만발한 꽃들을 보면서, 그리고 하얀 한복을 입고 부활의 아침을 기념하고자 꽃무리 앞에 수줍게 서시던 노 권사님들의 사진을 한 장 남겨 드리면서, 부활주일을 보내곤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렇듯 우리에게 부활주일은 봄과 함께 기억됩니다. 부활주일이 지남으로써 비로소 봄의 중심에 들어와 있으며, 아직도 추운 줄로만 알았던 봄의 대지와 대기는 어느덧 새 생명의 활기로 꿈틀거리고 있음을 발견하곤 합니다. 하지만 올해는 그 추억의 장소들이 가슴 아픈 화재의 현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고사리순들이 생명의 기운을 꿈틀거리며 올라오듯이, 우리의 이웃들이 부활의 새 생명 가운데 다시 힘을 얻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채플 가족들도 늘 기도하고 계시고, 이런 저런 모양으로 함께 마음을 모으시는 줄 압니다. 좀 더 마음써 주시기 바랍니다.
-부활은, 부활의 아침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들에게 반드시 찾아오고 또 찾아와야 할 생명의 역사라고 저는 믿습니다. 잿더미 속에서 피어나는 한 송이 꽃과도 같은, 생명의 주님을 소망 중 바라보시는 부활주일 되시기 바랍니다.
*부활주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참 고민이 많았습니다. 히브리서와 연계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한다면 어떤 점에서 연결 고리를 찾을 것인가? 오늘은 히브리서 8장을 통해 부활의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단번에 드려진 자기 희생 제사, 십자가(7:26~28)
-히브리서 제2부(3~7장)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에 대한 것이었다면, 8장부터 시작되는 제3부는 예수님의 대제사장 사역에 대해 논의합니다. 희생 제사를 언급한 7:26~28은 단번에 드려진 자기 희생 제사를 언급함으로써 2부와 3부를 연결하는 고리가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그 희생 제사를 가장 잘 보여주는 구체적인 증거물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오늘 부활의 아침 여인들과 제자들이 만난, 비어 있던 무덤입니다.
-히브리서 8장은, 특이하게도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희생 제사를 시행하는 장소가 ‘하늘 지성소’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희생 제사가 시행되는 기반은 옛 언약을 대체하는 ‘새 언약’임을 강조합니다.
2. 땅의 지성소를 대체하는 하늘 지성소(8:1~6)
-여러분, 부활 이후 승천하신 예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그분의 실존하시는 위치는 어디입니까? 저는 부활주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하나님 우편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 우편은 축복과 권능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시121:5), “내가..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하는 말씀들이 성경엔 참 많습니다. 이처럼 오른쪽은 구원과 축복의 방향이며 권능의 팔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많은 성경 구절에서 예수님과 연관되어 ‘오른쪽’이라는 방향이 제시되기도 했습니다. 히브리서만 해도 1:3, 1:13, 10:12, 12:2 그리고 오늘 본문 8:1에 등장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말입니다.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더니 거기에 앉으셨다’고 말합니다. 바로 ‘하나님 우편’입니다.
-구약 시편 80:17에서는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 기도합니다.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가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아마도 그 손 역시 오른손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멜기세덱을 논하면서 많이 상고했던 시편 110편에서도 1절과 5절에서 주의 오른쪽 편을 언급합니다. 특히 5절은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라고 표현함으로써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을 떠올려 줍니다. 시편 80편과도 맥이 닿는 말씀입니다.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참고하면,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은 장차 구름에 휩싸여 다시 오실 것을 보여줍니다. 첫 순교자 스데반은 죽어가면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의 순교를 내려다 보시며 앉아 계실 수가 없으셨던 주님, 바로 그 하나님의 오른쪽이 바로 주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오른쪽’ 권능의 자리에 앉으신 주님은 무슨 일을 하실까요?
-로마서(8:34)는 우리를 위하여, 즉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말합니다. 부활의 주님,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영광의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는 뜻입니다. 에베소서(1:20~23)는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계신 주님을 보여줍니다. 베드로전서(3:22)는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도 그분께 복종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메시야의 왕위에 오르셨지만 그의 통치는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원수들이 그의 발등상 되기까지 다스릴 것입니다. 그분은 여전히 통치하고 계시며, 미래의 온전한 승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뭐라고 말할까요? 7:25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분을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위해 간구하신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8장과 같은 맥락입니다.
-히브리서 8장은 우리가 지금까지 탐구해 왔던 바로 그 대제사장을 모시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사람이 세운 장막이 아닌, 주님께서 세우신 지성소와 참된 장막에서 섬기고 계시다고 말합니다. 대제사장이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섬기는 장소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예물과 제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땅에는 땅의 제사장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따라 예물을 드립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대제사장 사역은 어떤 점에서, 지상에서가 아니라 천상에서 이루어졌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땅에 세워졌을지라도 그래서 예수님께서 거기에 달려 온 인류의 죽음을 대신하셨을지라도, 진정한 희생 제사는 바로 하늘의 지성소, 참 장막에서 드려졌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장막을 만들 때 임의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청사진을 보는 것처럼 철저하게 하나님이 보여 주신 대로 만들었습니다. 땅의 장막은 하늘 장막의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장막 곧 하늘의 지성소에서 단번에 자기를 드려 희생 제사를 드리신 예수님은, 6절 말씀처럼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더 나은 약속 위에 세워지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십니다.
3. 새 언약 체결되다(8:7~13)
*그래서 예레미야 31장(31~34절)에 기록된 새 언약이 인용됩니다. 옛 언약이 흠이 있었기에 하나님은 새 언약을 약속하셨습니다. 언약 자체가 흠이 있다기보다는 그 언약을 지키는 데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이 문제였습니다. 히브리서가 하나를 말한 후 그것보다 더 나은 것, 더 좋은 것으로 대체시켜 나가는 논지를 계속 사용해 왔던 것처럼, 언약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계를 드러낸 옛 언약은 아스팔트를 임시로 포장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때가 되면 말끔하고 깨끗하게 포장을 하듯이, 새 언약으로 대체되는 것입니다.
-“날들이 이르면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세울 것이다. 그것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손을 잡고 이끌어 내던 날에 맺은 언약과 다를 것이다.”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언약을 벗어난 백성들을 잠시 내버려 두셨습니다만, 이제는 새 언약을 맺을 것입니다.
*새 언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어떻게 연결될까요?
-새 언약은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①처음 언약은 돌로 된 태블릿에 새겨졌지만(그것도 한 번의 깨어짐을 거친 후), 이번에는 돌판이 아닌, 생각에 그리고 마음에 기록해 주십니다. 그 결과 새 언약은 양심을 깨끗하게 하며 진정한 영적 예배를 가능하게 해 줍니다(9:14). ②새 언약은 작은 자부터 큰 자까지 모두 하나님을 알도록 해 주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도록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결코 지적 측면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과의 충성된 관계와 순종적인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③새 언약은 백성의 불의와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이 부분은 히브리서 10장까지 이어지며 더 심도 있게 논의될 주제입니다.
*이와 같이 새 언약이 우리에게 제시되었습니다. 옛 언약은 그 한계를 드러냈고 폐지되어야 합니다. 낡고 오래된 것은 사라져 갑니다. 새로운 유언이나 언약이 발견되면 오래된 것은 무효가 되어 버립니다. 새 언약이 주어졌다는 것은 옛 언약은 낡아지게 되었고 사라질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새 언약을 약속하던 무렵, 이미 옛 언약은 그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저자가 이 글을 쓸 당시에는 성전 예배 역시 점진적으로 몰락해 가고 있었습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살고 있던 당시 성도들에게 옛 질서는 더 이상 효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4. 새 언약의 특징과 성령 충만
-낡아지고 쇠하여 가는 것을 붙잡고 있겠습니까? 없어져가는 것에 미련을 두고 살겠습니까? 아니면 새롭게 주어진 언약을 힘입어 살아야 하겠습니까?
-“내가 나의 법을 (돌판이 아닌)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말씀하신 예레미야의 선포처럼, 새 언약은 생각과 마음의 변화, 시대 정신을 따르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고 실천하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롬12:2).
*에스겔서 11장은 이것을,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제거하여 버리는 삶으로 말합니다. 주님은 변화된 새 삶을 살기 원하는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새 영을 주며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정육점에서 구할 수 있는) 아주 부드러운 살코기와 같은 마음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주님의 말씀을 지키게 됩니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11:20). 부드러운 살코기를 기억하십시오, 우리 마음과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 감각이 그렇게 부드럽게 유지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에스겔서 36장에서도 반복됩니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 말입니다. 그 다음 내용은 앞의 인용과 같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새 언약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민감함, 성령으로 충만한 부드러움, 시대 정신에 휘둘리지 않는 분별력을 가지고 이 마지막 때를 살아야 합니다.
5. 정리: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굳건히 하신 이후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좌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를 따르는 자들을 위해 간구하시며 주목하시며 중보의 기도를 지속하십니다.
-히브리서를 포함하여 신구약의 많은 구절들이 새 언약을 선포합니다. 옛 언약은 사라져 갑니다. 새 언약이 선포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그 마음과 생각에 기록해 주시는 하나님의 법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멀어진 것은 말씀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순종하기 싫어하는 우리 마음입니다. 말씀을 몰라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고집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들려 주시는 말씀들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예수 이름으로 보내신 성령께서는 부드러운 마음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주께서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요2:5) 말한 가나 혼례식 자리에서 하인들에게 분부한 마리아의 당부에서 잘 보여집니다. 바로 수용성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나 에스겔이 말한 부드러운 마음은 바로 열린 마음으로 성령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삶을 말합니다. 마음은 부드럽게 하고 귀는 열어야 합니다. 다윗을 푸대접한 나발은 심장이 돌처럼 굳어져서 열흘 만에 죽었습니다. 이와 같이 부드러운 마음의 반대는 돌 같은 마음이고 굳은 마음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제자로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예수님의 사랑 받는 성도로써,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새 언약의 백성으로서 요구되는 부드러운 마음을 간직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부활의 증인 된 삶을 사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자신의 피로, 단번에 완전히 / Hebrews 9:1~10:18
*밀착 취재-구약의 성막으로 : 몇 주 전 어느 날 채플 일정을 마치고 귀가하는 차 안에서 우리 집 막내가 언니 얼굴에 휴대폰을 들이대더니, 사진을 찍었습니다. 뭐 하는 거냐는 언니의 말에, “이게 진정한 밀착 취재지.”라고 대답해서,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히브리서 9장의 시작은 대략적이기는 하지만 카메라 감독이 ‘줌 인’ 기능을 사용해서 성막을 한번 주욱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대제사장의 동선에 따라 성소와 지성소를 보여주듯 하기 때문입니다.
1. 단번에 드려진 그리스도의 영원한 희생 제사(9:1~14)
-첫 언약이 실행된 장소, 즉 지상의 성소에는 섬기는 예법이 있었습니다. 첫째 장막 성소에는 제사장들이 드나들었고, 거기에는 등잔대와 떡상과 진설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만 1년에 한번 자신과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해 피를 가지고 들어가던 둘째 장막,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언약궤가 있었고 또 그 안에는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십계명 두 돌판이 있었습니다. 그 법궤 위가 바로 속죄소(시은소)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성소에서 지성소로 나아가는 마지막 길목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분향단을 히브리서는 마치 지성소에 있는 것처럼 표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대체로 분향단은 지성소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성소의 한 도구로 이해됩니다. 지성소와 연관된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렇듯 히브리서는 함께 묶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성소 입구의 휘장 앞에 놓였던 분향단 즉 금 향로는 기능 면에서는 지성소에 속한 성물로서, 예수님께서 성도들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드리시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구조를 통해 성령께서 보여주시는 것은 무엇인가’입니다. 이 첫째 장막은 아직 진정한 성소에 들어가는 길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왜 구약의 제사에서는 계속 제사가 이어져야 했습니까? 온전한 속죄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양심이 깨끗함을 받아야 하는데, 구약의 제사는 그것을 온전히 이룰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혁의 때까지, 즉 새로운 길이 제시될 때까지 옛 제사제도는 그 역할을 해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장막에서 온전한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새로운 길을 제시하시고 개혁의 때가 이르도록 하신 메시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손으로 짓지 않은, 처음 창조에 속하지 않은, 더 크고 더 완전한 장막을 통하여 지성소로 들어가셨습니다. 땅의 지성소가 아니라 하나님 보좌 앞 지성소입니다.
-무엇으로 이 일을 이루셨습니까?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닙니다. 자신의 피로 단번에 들어가셨고 영원한 구속을 이루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피로, 단번에 영원히(완전히) 구속을 이루셨다는 말입니다(v.12).
-그리스도의 피는 죄에 대하여 치러야 할 값을 완전히 지불하셨고, 그 효력은 영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은 대속죄일 제사의 궁극적인 목표를 성취한 것입니다. 구약의 제물과 제사도 효력이 있었는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효력이 없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14절 말씀처럼,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정결한 양심을 갖게 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이 정결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시편 50편이나 이사야 43장 말씀처럼, 성도는 제사로 하나님과 언약한 사람들이며, 하나님을 위해 창조되었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시려고 지음받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적 삶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되는 예배, 이것은 앞으로 히브리서가 다룰 중요한 화제 중 하나입니다.
2. 희생 제사와 죽음(9:15~28)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를 새 언약의 중보자로 제시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더 나은 희생 제사를 통해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어 주심으로써,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시고,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받게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 사용된 언약이라는 단어의 헬라어 디아떼케(διαθήκη)는 ‘유언’이라는 의미도 갖습니다. 16절은 유언의 뜻으로 풀어나갑니다. 유언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유언자의 죽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유언이 효력이 생깁니다. 첫 언약도 죽음 없이, 피 없이 세운 것은 아닙니다. 모세가 여호와의 뜻에 따라 시내 산에서 언약을 수립하고 제사장을 세우며 제사 제도를 마련할 때, 언약의 피라고 명했으며 장막과 섬기는 일에 그 피를 뿌렸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피로써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피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습니다. 바꿔 말하면 피흘림이 있어야 죄가 용서됩니다.
-23절부터는 모형론적 논지 전개가 이어집니다. 땅에서 이루어진 피흘림과 속죄와도 같이 하늘에서는 더 좋은 제물로 하늘 그 자체인 참된 지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자주 자기를 드렸던 땅의 제사장들과 달리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러한 일을 감당하시기 위해 세상의 끝에 사람의 몸을 입으셨던 것입니다.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일입니다. 그리고 죽음 뒤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종국적으로는 두 번째 나타나심, 곧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자신을 드리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고대하는 자들에게 진정한 최종의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3. 그리스도 희생 제사의 효용성(10:1~10)
-히10장은,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시작됩니다. 율법에 따라 드리는 제사들은 해마다 계속 드리는 반복적 성격을 띱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구약의 제사들은 죄를 없앤다기보다는 ‘죄를 기억나게 하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릴수록 인간에게는 자신들이 죄인인 것과 제사가 필요한 존재임이 부각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편 40편이 인용됩니다. 역시 구약성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LXX)의 인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않으셨고 기뻐하지도 않으셨다’라는 인용문의 본래 의미는 ‘우리가 아무리 제물과 제사를 드려도 감사와 헌신을 표현하기에는 늘 부족하다’는 것이지만, 저자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와 연관 지어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율법에 따라 드려지는 구약의 제사, 즉 첫째 것을 폐하시고 둘째 것(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세우시려 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사는 구약의 제사들과 달리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그리스도의 자발적 순종의 결과라는 점을 부각시킵니다. 십자가 위에서 드려진 영원하고 완전하고 단회적인 희생 제사로, 불완전하고 효과적이지 못한 구약 제사들은 폐지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제사는 그리스도의 몸의 제사였습니다. 이 희생은 자발적인 순종의 결과였습니다. 이 십자가는 단번에 자신을 드리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거룩함을 얻게 되었습니다(10:10).
4. 그리스도 희생 제사의 최종성(10:11~18)
-드디어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되심과 대제사장적 제사’에 대한 마지막 단락에 이르렀습니다.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던 옛 제사로는 죄를 없앨 수 없었습니다. 옛 제사장들은 서서 섬기는 자들이었지만, 영원한 한 제물을 드리신 주님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고 원수들이 굴복하여 발 받침대가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승리 역시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닌’의 측면을 보여줍니다. 한 분 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한 제물로 하나님의 백성을 영원히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14절의 ‘거룩하게 된’의 분사는 현재형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하게 되는’ 자들입니다. 여전히 진행 중임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한 제사’는 이미 그리스도인들을 거룩하고 완전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도 성도들을 거룩하게 하고 완전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수신자들은 거룩함을 계속 추구해 나가야할 입장에 있습니다. 이미 누리고 있는 그것을 온전히 완성하도록 소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는 지속적으로 성령을 언급합니다. 구약의 모든 말씀이 성령으로 기록된 것을 전제하며 말합니다. 시편 저자 다윗이든, 예레미야를 통한 말씀이든 성령께서 그들을 통해 말씀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동일한 성령께서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에게 ‘지금’ 말씀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에게 ‘이 시간에도’ 말씀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16,17절 말씀은 8장에 인용되었던 예레미야 31장의 재해석입니다. 8장 인용과 달라진 부분이 세 군데에서 보입니다. ①‘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을 ‘그들’과 맺을 언약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범주를 넘어서는 언약임을 강조합니다. ②8장에서는 ‘생각과 마음’의 순서였는데, 여기서는 주의 법을 그들의 ‘마음’과 ‘생각’에 둔다고 두 단어의 순서를 바꾸어 표현합니다. ③또한 그들의 ‘죄들’만이 아니라 ‘불법’까지도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강조하여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한 번의 제사가 죄의 문제를 얼마나 효과적이고 철저하게 해결해 주는지를, 그리고 마음과 생각의 변화 즉 내적 변화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또한 새 언약은 민족의 경계를 넘어 열방으로 뻗어나가게 될 것입니다.
*18절입니다. 8장부터 시작된 희생 제사 논의의 결론입니다. 죄와 불법 즉 죄와 악한 행동을 용서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죄를 위한 제사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라는 선언입니다. 거듭되는 논의에서 누누이 설명하였듯이, 히브리서 수신자들이 구약의 제사 제도에 얽매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제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제2부(3~7장)와 제3부(8~10장)를 끝내는 입장에서 권면과 격려를 들려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10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믿음’과 ‘인내’라는 두 개념은 11장부터 시작되는 제4부를 이끌어가는 키워드가 됩니다.
5. 정리
*단번에 드려진 그리스도의 영원한 희생 제사는 죄에 대하여 치러야할 모든 값을 완전히 지불하였고, 그 효력은 영원합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정결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게 됩니다. 그것은 개인의 경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삶으로 이어지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참된 예배자를 찾으십니다(요4:23~24).
*구약 제사에서도 피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었습니다. 피흘림이 있어야만 죄의 용서가 있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닙니다. 바로 그 피, 이 세상을 구원하실 유일한 그 보혈, 죄 없으신 우리 주님의 보혈과 십자가만이 죄에서 자유를 가져옵니다. 그분의 십자가가 있고 부활이 있으며 피흘림이 있었다는 사실은, 죄 사함의 선포에 대한 명백한 증거입니다.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그분의 희생 제사는 지금까지의 모든 제사와 앞으로 사람들이 드리려고 하는 그 어떤 제사까지도 무력하게 하는, 영원하고 완전한 단회적인 제사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며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신 것입니다. 영원한 한 제물로 드리신 한 제사는 하나님의 백성을 영원히 완전하게 하십니다. 더 이상의 제사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드려져야 할 바로 그 제사가 십자가에서 그리고 하늘의 지성소에서 온전히 드려졌기 때문입니다. 죄들과 불법들까지 기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이제는 성령을 통한 철저한 내적 변화를 이루어가며, 거룩함과 완전함의 은혜를 누리면서 온전히 성취해 가야 합니다.
*자신의 피로, 단번에 완전히 영원한 몸의 제사를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룩하게 된 우리들입니다. 믿는 자들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을 통해 마음과 생각과 삶이 변화를 받아 거룩함과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은혜를 온전히 누리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 알파 Hebrews 10:19~39
*사랑에 대해 바울이 말한 고린도전서 13장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로 끝납니다. 성도들이 견지해야 할 삶의 자세 세 가지 중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각주를 참고하면 ‘더 큰 것은’ 사랑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오래참고(고전13:4),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7) 말한 내용과, 오늘 본문이 말하는 바를 참고하여, 이 문장을 다듬으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거기에 하나 더 추가한다면 그것은 ( )니라.” 그것이 뭘까요? 그 플러스 알파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제3부의 마무리 단락인 오늘 본문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거론한다는 점에서, 6:19~20을 이어받으며 또한 4:14~16에서부터 이어지는 내용의 반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담대함을 얻은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루는 목회적 적용 단락인 셈입니다.
-오늘 본문은 내용상 셋으로 구분됩니다. 전반부(19~25)는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중간(26~31)은 ‘하나님의 언약을 거절하는 것에 대한 경고’를, 후반부(32~39)는 ‘희생을 참고 견디는 것에 대한 보상’을 다룹니다.
1. 믿음 소망 사랑(19~25)
*첫째 단락은 문법상 하나의 긴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하면서 시작되는 긴 문장의 첫 단어는 ‘갖고 있다’입니다. 성도들은 두 가지를 갖고 있습니다. 바로 ‘담대함’ 그리고 ‘위대한 제사장’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입니다. 지상의 성막에서는 휘장을 통해서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번 들어갈 수 있는 길이었지만, 예수님은 그 휘장을 찢고 새로운 길,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점에서 성도들은 또한 이것이 가능하게 만든, 바로 그 위대한 제사장을 갖고 있습니다. 갖고 있다는 말이 좀 어색하게 느껴지시면,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위대한 대제사장을 모시고 있다고 표현해 볼까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갖게 되는 담대함은 성격과 기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셔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예배하도록 돕는 바로 그분을 믿는 믿음에서 나오는 담대함입니다.
*22절부터 이어지는 세 절은 참 재미있습니다. 동사로 보면, ‘나아가자-붙잡자-숙고하자’로 이어지는 권면적 명령입니다. 한편 주제어로 보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①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맑은 물로 씻겨진 자로서, 악한 양심으로부터 마음이 깨끗하게 된 자유인으로서, 진실한 마음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감히 나아갈 수 없는 그곳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②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 그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고백한 믿음의 고백을 그대로 이루어주실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소망은 붙잡는 것입니다. 굳게 흔들림 없이 붙잡아야 할 믿음의 고백입니다.
③그러자니 연약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으로서 우리는, 서로를 어떻게 위로하고 격려할지 숙고해야 합니다. 흠이 많고 실수가 잦은 인생으로서 우리는,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권면해야 합니다. 요즘은 부끄러운 인간의 진면목이 까밝혀지는 시대입니다. 뉴스는 온통 부정과 범죄로 도배가 됩니다. 하지만 죄와 허물과 실수는 바로잡되, 사랑을 베푸는 이야기와 선한 행동에 오히려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더욱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온통 범죄 소식에만 매몰되어 이 감각이 둔감해질까 두렵습니다.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이기를 포기하지 않도록 권면하고, 그날이 가까워짐을 볼수록 더욱 권해야 합니다. 사랑은 만나는 데서 시작되며 숙고를 통해 공동체가 성숙해지기 때문입니다.
2. 네 번째 경고(26~31)
*박해의 시대가 다가옴을 느끼는 동시에 배교의 시대가 이어질 것을 예감하는 히브리서 저자는 6장에서 경고했던 내용을 상기시킵니다.
-진리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는 고의로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지속적으로 일부러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주님의 대속의 보혈을 하찮게 여기는 겁니다. 그것을 위한 속죄제사가 더 남아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27절은 속죄제사가 아니라 심판에 대한 두려운 기다림이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대적하는 자들을 삼켜 버릴 맹렬한 불이 남아 있습니다. 구약에서 모세의 율법을 어긴 자들도 두세 증인들의 증언으로 말미암아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처벌을 받았습니다. 동정의 여지없이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을 공경하지 않고 짓밟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자신을 거룩하게 해 준 언약의 피를 부정하게 여긴 사람들, 은혜의 성령을 모독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들이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습니까? 그림자와도 같은 옛 언약을 거부한 자가 동정의 여지없는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면, 실체인 새 언약을 거절한 자들이 맞이하게 될 심판은 얼마나 중한 것이 되겠습니까?
*무력한 인생은 원수 갚을 힘이 없을 때,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하나님, 나의 이 억울함을 갚아 주십시오.”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고통 당하는 당신의 백성을 위해 심판을 (원수에게) 행하십니다. 이것이 인용된 신32장의 원래 의미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서는 이제 하나님이 불순종하고 믿지 못하는 백성 자신들의 원수가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된다고 말합니다. 충격적인 일입니다. 어쩌다 이렇게 됐습니까? 왜 그들은 겁도 없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고야 말았습니까?(v.31)
-지금까지 논의해 온 것처럼 성도들은 살아계신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는 특권을 얻은 자들입니다. 성도는 그분 앞에 담대히 나아갑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태워버리는 불로 날아드는 불나방처럼 빠져들어가 타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3. 희생을 참고 견디는 것에 대한 보상(32~39)
*이렇게만 끝난다면 수신자들의 마음이 너무 무거웠을 것입니다. 저자는 32절부터 다시 소망의 말을 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기억하여라” 그들에겐 공동체적인 경험이 있습니다. 빛을 받은 이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함께 견디어 왔습니다. 그들은 바로 ‘인내’의 공동체입니다. 어떤 것은 자신들이 직접 경험하기도 했고, 어떤 것은 비록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목격한 것입니다.
①그들은 모욕을 당했고 몸의 고난을 겪었습니다. 언어 폭력에 시달렸고 육체적으로 폭행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구경거리가 되는 일은, 초대교회에서는 부지기수로 경험한 일입니다. 우린 지금 그런 일을 거의 겪지 않습니다. 물론 또 다른 폭력과 시비로 고통을 당하기는 합니다.
②그런가 하면 그들은 고난에 직면한 동료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어야 했습니다. 갇히고 끌려가는 자들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며 가슴을 쳐야만 했습니다. 침묵하시는 것만 같은 하나님을 향해 야속함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가진 것을 빼앗기기도 하고 재산 몰수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11장에서 구체적으로 이어지겠지만 그렇게 하염없이 당하기만 한 것이 다 이유가 있다고 히브리서는 말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히브리서는 부단히 ‘더 좋은 것, 더 나은 것’을 거론합니다. 그들이 이 모든 고난과 모욕을 감내한 것은 아무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그 누구도 빼앗아 가지 못할, 더 나은 재산, 영구한 소유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맘 속에 있는 참된 이 평화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네~” 하는 찬양이 생각납니다. 그렇습니다. 이 평강, 이 평화, 이 영구한 소유, 누가 빼앗아 갈 수 있을까요? 롬8장은 세상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포합니다. 그 사랑, 그 소유, 그 평강, 그 영원한 기업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땅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 목회적 적용과 제3부를 마무리하면서 저자는, 19절에서 거론했고 히브리서 전반에서 강조되는 권면을 합니다.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건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 담대함이 없으면 자신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오해나 불신앙이 가로막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믿거나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또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 담대함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하는 믿음이 우리에게 복된 결과를 가져옵니다. 히브리서는 그것을 ‘상’이란 개념으로 표현합니다. 미리 11장의 한 구절을 들여다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합니다(히11:6).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은, 그분이 계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행위이며 태도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그분 앞에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분께 우리의 심정을 토로합니다. 그분은 살아 계시기에 들으시고 움직이십니다. 상 주십니다.
-시73편은 이것을 ‘복’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73:28).”
4. 플러스 알파: 그런데 말입니다. 이 귀한 담대함, 이 귀한 믿음을 간직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플러스 알파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인내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해서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한 가지 삶의 자세는 바로 인내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삶의 태도는 인내입니다. 하박국 말씀을 인용하면서, 저자는 지체하지 않고 오실 그분을 언급합니다. 인내하는 성도들에겐 너무나 힘들고 기나긴 여정이지만, 우리 인생이 그러하듯 돌아보면 잠시 잠깐의 시간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분이 곧 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좀 더 버텨야 합니다. 많은 사람은 몰아치는 에너지 곧 힘을 능력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능력은 버티고 견디는 힘이기도 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말한 바울이 강조한 힘 역시 이러한 버티는 힘, 즉 인내입니다. 견디는 겁니다. 잊지 마십시오, 잘 버티는 것도 능력입니다.
*하박국을 공부하면서 살펴보았던 핵심 주제,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가 오늘 본문 말미에 인용됩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또는 ‘의인은 나의 믿음으로’로 제시되고 해석되는 하박국 구절이 ‘나의’의 위치가 바뀌어 인용됩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누구의 믿음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를 믿어주시는 믿음이기도 하겠지만, 문맥상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바로 그 사람의 믿음으로, 바로 그 사람이 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뒤로 물러가면 안 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지 뒤로 물러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나의 의인’이라는 의도적인 표현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향하는 저자의 애정, 하나님의 애틋함이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나의 백성, 나의 자녀, 나의 신부, 나의 의인.
*37절이 약속하신 대로 지체하지 않고 오실 하나님의 신실함을 강조한다면, 38절은 그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반응을 강조합니다. 믿음의 반응을 보이는 자는 살 것입니다. 하지만 뒤로 물러서는 반응을 보이는 자는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성도가 누구입니까?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신 그분, 영원한 대제사장 되신 그분을 마음의 주로 간직하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자입니다. 성도는 뒤로 물러가 멸망에 이를 자가 아닙니다. 오직 믿음을 가져 영혼을 보전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구원함에 이르게 하는 믿음입니다.
-성도는 뒤로 물러가는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담대함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때로는 이런 자신이 약간 뻔뻔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고 자신의 행위에 근거해서 머뭇거리기 때문임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내 손에 든 무언가가 아닌 주님이 이루신 위대한 대속적 죽음과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 되어주심을 의지하여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5. 정리: 배교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하고, 이미 시작된 기독교에 대한 부분적 박해를 경험하면서 히브리서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믿음과 인내로 오늘을 견디고 이겨낼 것을 강조하는 길고 긴 논의를 전개해 왔습니다. 이어지는 11장에서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또 다른 측면에서 다룰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은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목회적 권면과 경고의 말씀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흥미롭게도 22~24절에 나란히 배치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나아가게 합니다. 소망은 붙들어야 합니다. 사랑은 경박한 데서 나오지 않습니다. 숙고하는 삶을 통해 사랑은 현실이 됩니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갑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우리가 고백한 소망을 굳게 붙듭시다, 연약한 인간으로서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돌아보고 사랑을 베풀지 숙고합시다” 하는 권면이었습니다.
-그리고, 종말의 때를 믿음 소망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며,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로서 서로 부여잡고 살아내야만 하는 성도들에게는, 한 가지 삶의 자세가 더 요구되는데 그것이 바로 인내였습니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은, 나의 성도는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는 믿음으로 살아야 할 것이라는 말씀도 되지만, 믿음을 가지고 소망을 붙잡으며 사랑을 어떻게 실천할지 고민하는 나의 사랑스런 성도들은, 그 인내하는 삶의 자세를 잘 견지함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살게 되고, 살아 남게 되고, 산 자의 땅 우리 주님이 앞서 가신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살게 될 것이라는 위로의 말씀도 됩니다.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을 버리지 맙시다. 그리고 살리는 삶, 진정으로 사는 것처럼 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내하면서 다른 사람의 삶도 돌아보시는 여러분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 Hebrews 11:1~12:3
*지난 현충일 오후, 모처럼 가방을 둘러메고 대관령옛길을 조금 걸었습니다.
-그런데 산길로 접어들면서 이상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등산로 입구를 지나자마자 길옆의 나무들이 시들어 있었습니다. 처음엔 제초제를 잘못 뿌려서 그랬구나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풀들이 너무 멀쩡했습니다. 나무도 참나무, 싸리나무 등 다양하게 잎이 말라 있었습니다. 사진을 찍으며 올라가 중간에 있는 주막터 관리인께 여쭈어 보니, 날이 가물어 그렇다는 겁니다. 영동지방에 몇 달째 건조주의보가 내려진 상태입니다. 계곡의 물은 아직 흐르고 있고 그 물소리가 계곡 등산로에 있는 나무들에게도 들렸겠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간간이 비가 내려 산기슭에 있는 나무를 적셔 주지 않으면, 나무들도 마르고 시든다는 사실을 새로이 깨달았습니다.
-계곡의 물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건조한 날씨 속에서 어떤 나무들에게는 그 사실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흘러가는 그 물줄기가 나무에게 유익할 수 있을까요? 물을 찾아 부단히 뿌리를 뻗어야만 할 겁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고대 로마의 원형경기장, 콜로세움에 둘러앉아 있습니다. 오늘 경기에 나설 수많은 사람들은 그 이름만으로도 관중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한 사람들입니다. 사실 그 선수들이 다 소개가 될지 아니면 뭉뚱그려서 한꺼번에 다루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 믿음의 위인들을 다 소개하자면 성경 전체를 다시 다루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1장은 사실 그들 전체를 다루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그들의 삶을 다시 한번 반추하면서 우리가 어떤 통찰을 얻어야 할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의 신앙의 위인들을 다루는 이야기는, 인내와 믿음으로 고난의 때를 견뎌내기를 당부하는 맥락에서 전개됩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신앙 위인들의 삶을 하나하나 검토하기보다는 인내와 믿음이라는 차원에서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1. 11장 서론(1,2절): 3절부터 길게 이어지는 믿음의 칭송 목록을 언급하기에 앞서, 믿음의 성격을 짚고 넘어가는 1,2절을 잘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에 대한 확신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입증입니다. 과연 선조들은 이것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앞 문장은 다음과 같이 풀이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이 마침내 실체로 주어지리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다.” 따라서 이 확신은 그에 따른 행동을 수반합니다. 이것은 또한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입증’입니다. 입증 또는 증거라는 의미로 사용된 단어 엘렝코스(ἔλεγχος)는 확신을 뜻하는 단어 휘포스타시스(ὑπόστασις)를 부연 설명합니다. “이 확신은 지금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입증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는 뜻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입증. 이 말은 미래적이고 초월적인 의미입니다. 아직은 실체로 드러나지 않았기에 미래적입니다. 동시에 본래 초월적인 성격을 가진 문제이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하늘의 것들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자신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미래적이고 보이지 않는 실체에 대한 확신’은 온갖 시험과 시련을 인내하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며, 결단력 있는 행동을 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면서 믿음의 사람들에 대한 칭송 목록이 이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은 과연 누구를, 어떤 사람을 인정하실까요?
2. 칭송 목록의 전반부(3~31절)
*오늘 본문의 칭송 목록은 31절까지는 ‘믿음으로’라는 특징적인 문구로 반복되며, 32절부터는 형식의 변화를 통해 부가적인 목록이 이어집니다.
-전반부를 간략하게 구분하면, 창조에서 노아까지(3~7), 아브라함에서 요셉까지(8~22), 그리고 모세에서 라합까지(23~31)입니다. 두 번째, 세 번째 단락에서 관심이 집중되는 인물은 아브라함과 모세입니다.
①창조에서 노아까지(3~7
-구체적인 인물을 거론하기에 앞서 3절은 창조 사건을 말합니다. 모든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음을 우리는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세상은 온통 보이는 것들로 구성되고 보이는 것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처럼 보여도, 보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보이지 않고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말씀으로 지어졌으며,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예물을 받으시며 의롭다고 인정하셨고, 그는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 여전히 말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은 것도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에녹의 삶을 반추하면서 저자는 유명한 6절의 진술을 쏟아냅니다. 같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 그분의 존재를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아울러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찾는 자들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이기도 합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경고를 더욱 중하게 여기고, 그 경고가 실제로 이루어질 것을 확신했기에, 그는 방주를 준비했고 그 집을 구원에 이르도록 했습니다. 노아의 믿음은, 믿는 자에게는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게 하면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세상을 정죄하는 기능을 수행한 셈입니다. 노아의 초청을 거부한 믿음 없는 사람들에게, 심판으로서 홍수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②아브라함부터 요셉까지(8~22)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야기는 특별히 하나님의 ‘약속’에 초점을 맞춥니다. 믿음이란 현실적으로 희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이 마침내 실체로 주어지리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길을 나섰습니다. 때로 순종은 무모함을 내포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을 밟았지만 마치 그곳도 타국인 것처럼 살았습니다. 그가 받게 될 기업은 땅의 것이라기보다 하늘에 있는 거룩한 도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족장 아브라함은 장막에 머물렀습니다. 약속의 공동상속자들인 이삭 야곱과 더불어 말입니다. 히브리서는 그들이 고대하고 살았던 도성이, (땅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건축하고 창건하신 견고한 기초가 있는 도성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아내 사라도 역시 믿음으로 (처음에는 믿지 못했지만 마침내는 믿음으로)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12절은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 그의 후손에 대한 언급입니다. 그는 단지 믿음의 자손 이삭을 낳았을 뿐이지만 사라와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별과 같이 해변의 모래와 같이 후손들이 생육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무리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반드시 실현된다는 사실을 입증해 줍니다.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의 믿음과 삶은 ‘본향을 갈망하고 사모한 것’이 특징입니다. 그들은 저 멀리 보이는 약속을 환영했고, 떠나온 곳으로 회귀하기를 거부했으며,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땅의 것이 아니라 천상의 것이 더 가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그들의 하나님으로 불리기를 좋아하셔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언급하시면서, 그들을 위해 몸소 한 도시를 예비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허상이 아닌 실체를 볼 수 있는 눈을 갖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특이한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그의 말과 행동을 가만히 고찰해 보시면 그는 논리적으로 따지기를 포기하고 아들 이삭을 통해 자손들이 형성될 것을 믿고 행동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포도를 으깨면 포도즙이 나오듯, 아들 이삭을 바치는 그 자리에서 독생자 아들의 후손들이 생겨날 것을 믿었고, 그 믿음대로 그는 아들을 돌려받았습니다. 그는 죽음 그 너머를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심지어 죽음에 의해서도 무효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었던 믿음의 사람, 그가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믿음으로 이삭 역시 장래 일들에 대해 야곱과 에서를 축복했고, 믿음으로 야곱은 죽으면서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하며 지팡이 머리에 의지해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요셉 역시 믿음으로 이스라엘의 애굽 탈출과 자신의 뼈를 가지고 갈 것을 명령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돌아가야 할 나라가 있다, 여기는 거기가 아니다.”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믿음으로 한 것입니다.
③모세에서 라합까지(23~31)
*이번엔 모세입니다.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잘생긴 아들 모세를 감추었던 것은 사실 모세 부모의 믿음입니다. 약40여 년간 공주의 아들로 잘 성장했지만 그는 동족들의 삶에 개입하면서 왕궁에서의 삶을 포기했습니다. 모세의 믿음은 의지적으로 고난을 선택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기꺼이 선택하신 예수님을 미리 보여주는 예표입니다. 저자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당하는 학대를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라고 설명하면서, 모세가 이집트의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말합니다. 모세 역시 상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모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치 보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그것이 인내로 나타났습니다. 당시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바로 왕과 대결하고, 유월절 의식을 행한 것도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장자를 멸하는 그 밤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그 집들이 죽음을 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조심하십시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이 논리적이기 때문에만 따른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고, 때로는 비이성적으로 보여도 따랐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인간의 이성과 논리가 아니라 바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이삭을 결박한 사건이 그렇고 노아의 방주가 그렇습니다. 모세의 놋뱀이 그렇고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그렇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모세만이 아니라 모세 시대를 살았던 이스라엘의 믿음입니다. 그들은 홍해를 마른 땅같이 건넜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장소에서 이집트의 병거와 병력은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여리고 성을 칠 일 동안 돈 것도 믿음에 따른 순종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여리고 성의 라합은 불순종하던 자들과 함께 멸망하지 않고 이스라엘에 편입이 될 수 있었습니다. 때로 믿음은 민족의 역사를 바꾸고 약속의 계보를 바꾸며 이방인에게도 구원의 빛이 내리쬐게 합니다. 민족과 혈통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 구원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을 라합이 보여줍니다. 히브리서는 그것을 강조합니다. “불순종 때문에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믿음을 잃어버려 광야에서 멸망한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천대 받던 이방 여인이었으나 죽음의 날에 구출 받고 거룩한 계보에 이름을 올리는 자들도 있다”는 사실을 들려줍니다.
3. 부가적인 목록들(32~39)
*11장의 후반부는 여러 사람을 묶어 설명하다가 무명의 신앙 용사들로 옮겨 갑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더 이상 과거의 일이 아니라, 히브리서 수신자들이 살고 있던 바로 그 시대의 이야기가 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들 이야기는, 말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선지자들,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다윗마저도 이 대목에서는 그냥 믿음의 사람들에 함께 섞여서 넘어간다는 사실이 매우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믿음이 조상들보다 덜 하다거나 의미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을 통하여 나라를 정복하고 의를 행하고 약속들을 받았습니다. 믿음을 통하여 사자들의 입을 막고 불의 힘을 꺾고 칼날을 피했습니다. 믿음을 통하여 연약함으로부터 힘을 얻었고 전쟁에서 강하게 되고 적군을 물리쳤습니다. 언뜻 떠오르는 인물과 사건이 있겠지만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성경은 온통 이러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며, 이러한 사람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35절에서는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은 여인들의 믿음도 잠시 소개됩니다. 그러면서 과거의 이야기, 성경의 기록은 이제 박해의 시대 배교의 시대를 살아가는 히브리서 수신자들의 동시대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신앙의 위인들처럼 당시 믿음의 사람들 역시 고난과 박해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더 좋은 부활을 내다보며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던 사람들, 조롱과 채찍을 당하고 결박과 투옥까지 당한 사람들, 돌에 맞고 톱질을 당하며 칼로 죽임을 당한 사람들,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아다니면서 있는 고생 없는 고생을 겪으며 학대를 받은 사람들,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전전한 사람들, 그들은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하찮게 여길지 모르지만, 성도들은 다른 눈으로 그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지금 북녘에서 외롭고 어렵게 신앙을 사수하고 있을 우리 동포들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적으로 잘 나가고 떵떵거리며 권세를 얻는 것과는 사뭇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가 있을까요? 무엇이 그들에게 이러한 삶을 감수하게 했을까요? 3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에게 세상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과, 인류의 역사를 통해 만들어 온 문화가 본래 무가치하다는 말이라기보다는,, 더 나은 부활, 죽음 저 너머의 삶, 영원한 도성을 미리 내다보고 생각해 보니 “그렇다”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영웅들은 이렇게 극심한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이 편지를 읽고 있는 여러분, 여러분이 내려야 할 결정, 여러분이 선택해야 할 길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하고 히브리서 저자는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이제 우리를 향합니다.
*신앙의 위인들은 그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약속은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궁극적인 약속, 영원한 안식, 기업, 곧 완전한 구원을 말합니다. 그들이 뭔가를 잘못했기 때문에 받지 못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의 귀책사유를 자신에게서 찾으려고 하기 쉬운데, 때로는 그 버릇도 버려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억지로 펼 수가 있을까요? 물론 지나친 합리화도 위험합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위해, 마지막 그림을 다 펼쳐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그리스도의 단회적 제사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앞에 언급한 신앙의 위인 대다수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도 그 믿음을 따라 잘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 이후를 사는 우리들을 통해, 그들이 이루지 못하고 누리지 못한 구원의 완전함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궁극적인 약속을 받지도 못했는데도 극심한 역경 가운데 빛나는 믿음의 삶을 살았던 신앙의 위인들을 생각한다면, 이미 그 약속을 받은 우리들은 끝까지 인내하고 믿음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히브리서 11장은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4. 믿음의 완전한 모본이신 예수님(12:1~3)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누가(무엇이) 있는가? 우리가 봐야 할 모본이 누군가?
-먼저는, 여름 하늘 가득히 떠있는 뭉게구름같이 많은, 증인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언급했던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운동장에서 아주 잘 달린 경주자들’입니다. 트랙을 돌고 높이뛰기를 하고 마라톤을 하기 위해 그들은 짐보따리를 내려 놓았고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벗어던지고 잘 달렸습니다. 우리 또한 그래야 합니다. 지나친 부담들, 우리를 옭죄는 죄와 짐들을 벗어던지고 우리 앞에 놓인 트랙을 인내로 달려야 합니다. 또 믿음으로 달려야 합니다.
-더 중요하게는 우리에게는 궁극의 믿음의 모본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믿는 이 도리의 창시자이며 완성자이신(12:2) 그분, 알파와 오메가이신 그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그저 자신의 신념에 옳다고 생각해서 옳은 주장을 펴신 것만이 아닙니다. 그분은 이 구원과 믿음의 도를 성취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수치와 죽음을 끝까지 참아내신 분입니다. 누가 인내를 말하겠습니까? 그분이야말로 자신 앞에 놓인 기쁨을 위해 순종하셨고, 하나님은 그분을 보좌 우편에 앉게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은 참 어이없게도 부단히 곁길로 빠집니다. 너무나 자주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와 죽음만 인내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불순종과 연약함을 오늘도 참고 인내하시면서 우리가 옳은 데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씀을 맺습니다)
-믿음의 경주를 다 마치기 위하여 연약해진 손과 힘이 빠진 무릎을 굳세게 해야 합니다(12:12~13). 절뚝거리지 않고 바르게 걷고 바르게 달리도록 해야 합니다. 믿음과 인내로서 우리의 경주를 잘 마쳐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사람 모본들도 많이 있지만 영원한 모본이신 주님이 계십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분, 예수님을 바라보며 이 믿음의 경주를 잘 마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전정가위 / Hebrews 12:4~29
*오랜 기간 학교에 있으면서 얻은 결론중 하나는 아동・청소년 지도에는 ‘일관성’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행동하는 어른’(교사,부모)은 좋지 않은 모델입니다. 제가 잘 아는 어느 초등학교 선생님을 소개합니다. 이 선생님은 어느 학교를 가든 무서운 선생님으로 통합니다. 담당 학급의 아이들만이 아니라 전교생이 복도나 운동장에서 막 뛰어다니고 장난을 치다가도 선생님이 나타나면 안 그런 척합니다. 남의 반 아이라고 봐 주지 않거든요. 심지어는 자기 맘대로 에어컨 켜고 난방기를 돌리는 동료 교사들까지도 가끔은 변명 아닌 변명을 한답니다, “방금 틀었다”고 말이죠. 너무 심한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아이들이 먼저 압니다. 그 일관성 있는 가르침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유익했는지를 말입니다.
-엄격함 또는 일관성. 누군가를 가르치고 지도해야 할 사람이 가져야 할 아주 중요한 철학이고 원리입니다.
*오늘 본문 히브리서 12장은 이와 비슷한 문제로 먼저 출발합니다. 앞부분은 엄격한 훈련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뒷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먼저 앞부분을 보겠습니다.
1. 주님은 고난을 통해 자기 자녀들을 단련(징계,훈련)하신다(4~13)
*꾸중을 들을 때 우리는 오만가지 생각을 합니다. “이 분이 나를 정말 싫어하시나?”, “다른 사람의 실수와 비교해 볼 때 나의 행동이 정말 그렇게 심각한 것이었나?”, “나는 아무 짝에도 쓸 모 없는 인간이란 말인가?”, “이 분은 나에겐 이렇게 말하면서 자기 자신에겐 왜 저렇게 관대하실까?” 등등.
-성경에서 말하는 징계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인데, 징계, 양육, 훈련, 가르침, 교정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사 파이듀오(παιδεύω)에서 유래한 명사입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떤 사람(자녀, 제자)을 혹독하고 엄격하게 바로잡으려는 가르침을 뜻합니다. 오늘은 ‘단련’이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하겠습니다.
-오늘 5절은 두 가지 자세를 언급합니다. 단련을 받을 때, 그것을 가볍게 여기는 태도와 낙심하는 반응입니다. 두 가지 모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어떤 반응이 필요할까요? 주님께서는 사랑하기 때문에 단련을 하시고, 받아들이는 아들이기에 매를 대신다고 말합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듯이, 주님께서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기에 단련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합니다(7절).
-세상의 아버지들을 생각해보라고 합니다. 관심 없는 자식, 포기한 자식이라면 잔소리를 굳이 하지 않습니다. 입만 아프고 속만 상하니까요. 하지만, 진짜 제대로 양육하고 싶은 아들딸이라면 절대로 내버려 둘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단련, 징계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육신의 부모에게도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이 자식된 도리라면, 영들의 아버지 하나님께 더욱 복종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9절은 ‘그래야 우리가 살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단련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복종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입니다. 성도는 무엇으로 사는가, 단련을 잘 견디고, 징계하는 뜻에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으로 삽니다.
-좀더 비교해 보면, 육신의 부모는 자의적으로 자녀를 단련합니다. 또한 부모의 말이 먹히는 동안만 단련합니다. 하지만 하늘 아버지의 단련은 우리의 참된 유익을 위한 것이며, 하나님의 거룩함에 동참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단련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야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v.11).
*이 주제에 대해서는 13절에서 마무리가 됩니다.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곧은 길을 만들라고 합니다. 저는 다리를 치료하라고 합니다. 믿음의 경주, 마라톤을 완주하기 위해서는 절뚝거려서는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는 것은 위험하다(14~29)
① 추구할 것, 주의할 것(~17)
*14~17절은 성도들이 추구할 것과 주의해야 할 것을 언급합니다. 아마 이것은 앞에서 말한 ‘절뚝거림’과도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추구한다는 것은 그것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말입니다. 좋은 것을 보면 본받고, 좋지 않은 것을 보면 조심할 때 우리는 똑바로 걸을 수 있습니다.
-추구해야 할 내용은 ‘화평함’과 ‘거룩함’입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를 추구하라고 말했기에 사람들과의 관계에서의 문제입니다. 두 번째 추구할 거룩함은, 그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주제임을 보여줍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자 평화를 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 거룩함을 닮아갑니다.
-주의할 점은 무엇일까요? 아무도 a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고 합니다. 구원을 잃어버릴 위험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또한 b어떤 쓴 뿌리도 돋아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합니다.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말입니다. 세 번째는 c음란한(πόρνος) 자나 불경한 자가 없도록 주의하라고 합니다. 불경한 자, 망령된 자의 예로 에서가 나옵니다. 그는 잠시 잠깐의 배고픔 때문에 한 그릇 음식을 받고 장자의 명분을 팔았습니다. 귀한 것을 귀한 줄 몰랐습니다. 우리 역시 귀중하고 소중한 것을 잊고 살지는 않았는지 되돌아 보는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회개할 기회는 언제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도달해야 할 목표점에 도달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언약의 공동체에서 분리되는 일이 없도록, 축복 된 삶을 소홀히 하는 자가 없도록 주의하라는 말은 오늘 우리에게도 거룩한 부담을 주는 권면인 줄로 믿습니다.
② 시내 산, 시온 산(18~24)
*18~24절은 ‘not A but B’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너희들이 나아간 곳은 A가 아니라 B이다.” 먼저 A를 보아야 하겠죠?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이 나아간 곳은 시내 산입니다. 그곳은 옛 언약과 연관된 땅이요 두려움의 자리입니다. 타는 불과 어두움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씀들의 음성으로 기억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두려움을 느낀 조상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기보다 모세를 통해 듣기를 요청했습니다. 그만큼 두려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산에 올랐던 모세마저도 심히 두렵고 떨렸습니다. 이처럼 시내 산의 종교적 경험은 두려움과 격리(거리 둠)가 그 특징입니다.
*하지만 이제 새 언약의 성도들이 이른 곳은 그런 시내 산이 아닙니다. 그곳은 말하자면 시온 산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이 머무르시는 도시입니다. 곧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그곳은 잔치가 벌어지는 곳입니다. 수많은 천사들과 그리스도인 시민들로 북적대는 곳입니다. 야곱이 맏아들의 축복을 얻었듯이, 믿음으로 맏아들들이 된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두를 심판하시는데, 그 심판에 따라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완전해지고 믿음으로 의인이 됩니다. 결국 그곳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께서 계신 곳이며, 아벨의 피보다 더 훌륭하게 말하는 그분의 뿌려진 피가 있는 곳입니다. 아벨은 죽었지만 그 믿음으로 지금도 말한다는 히11:4이 생각납니다. 아벨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그 피로 호소합니다. “내 피를 보십시오. 내 피가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뜻에 더욱 신실하게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피는 얼마나 강력하고 훌륭하게 말하겠습니까? “아버지, 내 피를 보십시오. 내가 그를(그들을) 위해 이 피를 흘렸습니다.” 하고 말입니다.
*이와 같이 히브리서 수신자들은 경이롭고 감격스러운 시온 산에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여전한 두려움을 가지고 나아가겠지만, 시내 산에 나아갔던 백성들의 두려움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상상할 수도 없는 놀라운 은혜요 특권인 것입니다.
③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의 위험(25~29, 마지막 5th 경고)
*그러므로 이 은혜의 말씀에 귀를 막아서는 안 됩니다. 하늘들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수신자들은 ‘땅에서’ 그분의 말씀을 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보다 그 책임과 특권이 훨씬 더 큽니다. 우리는 몇 가지 주의해야 합니다.
-첫째,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때 시내 산 세대는 땅에서 경고하신 분을 거절했고 심판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로부터 경고하시는 분을 거역한 시온 산 세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는 땅이 흔들렸다면 장차는 하늘까지도 흔들릴 것입니다. 흔들리는 것들은 사라질 것들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것들이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둘째, 그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기 때문에 감사를 드리자는 겁니다. 은혜를 받았으니 예배와 경배를 드리자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견고한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니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자는 겁니다.
-끝으로,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 태워 없애는 불이십니다. 신4:24은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고 예배해야 합니다. 하늘 위에든지 땅에서든지 물속에서든지 어떤 형상도 우상으로 만들 수 없고,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인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분은 존귀한 이름을 가지셨을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을 향하여 베푸신 크신 사랑과 은혜에 의해서도 우리의 하나님으로서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우리에게 최고의 사랑을 주셨기에 우리 또한 최고의 사랑을 그분께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3. 맺는말(정리)
*하나님으로부터(사람을 통하여) 연단을 받고 징계를 받을 때, 성도는 그분의 본심을 헤아리며 인내로 잘 견디며 복종해야 합니다. 가볍게 여기고 한 귀로 흘려서는 곤란합니다. 낙심을 하고 좌절하는 것도 안 됩니다. 징계와 연단의 목적을 생각하고, 고통에는 뜻이 있다는 옛말처럼, 연단에 담긴 깊은 뜻을 더욱 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보고 믿으며 신앙을 갖게 된 우리 성도들은, 시내 산 백성이 아니라 시온 산의 시민임을 생각하며, 스스로의 언행을 삼가 조심하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거역하지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표현대로 우리 성도들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습니다. 그 나라 국민답게 은혜를 받고 감사할 줄 아는 성도 되시기 바랍니다.
-삶의 태도를 경건하게 하며, 하나님을 향해서는 경외함과 기쁨으로, 섬기시고 예배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은 태워 없애시는 불이십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불순한 것들은 타버리게 될 것입니다.
*정원 안에 있는 꽃과 식물을 관리하는 정원사는 식물을 그냥 방치하지 않습니다. 때로 아프고 힘들 수 있어도, 전정가위로 손질을 합니다. 목적에 맞게 손을 대고 다듬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저를 잘 다듬어 주세요.”하고 맡기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불순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순한 것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받았으므로, 우리의 사랑과 삶 역시 하나님 앞에 정결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우리 안에 남아있는 불순함들이 성령의 불로 깨끗하게 태워지기를 소망합니다.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는 주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 권면과 축도 / Hebrews 13:1~25
*돈 많은 사람인가 잘 사는 사람인가?
-어느 날 기독교방송에 출연한 모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돈 많은 사람을 ‘잘사는’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옳지 않다는 겁니다. 돈 많은 사람은 그냥 ‘돈이 많은’ 거고 반드시 잘 사는 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죠. 반면 돈은 좀 없지만 ‘잘 사는’ 사람도 있고, 돈이 있으면서도 잘 살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너무나 쉽게 ‘돈이 많다’와 ‘잘 산다’를 동일시하며 살지 않았나 하는 반성도 됩니다.
-물론 언어적으로는 ‘잘살다’라는 말이 하나의 의미망을 갖게 되면서(동사) ‘부유하게 살다’라는 의미로서의 힘을 얻었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잘사는’ 사람이 반드시 ‘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잘사는 집에도 잘못 사는 사람도 있게 마련입니다. 반대로 못사는 사람이면서 진짜 잘못 사는 사람도 있고, 비록 살림살이로는 못사는 축에 속하지만 ‘잘 사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어떤 쪽에 속하십니까? 설마 못살면서 잘못 사시는 건 아니겠죠? 잘살면서도 잘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럼 어떻게 살고 싶으십니까? ‘잘살면서’ 동시에 ‘잘 살고’ 싶겠지만, 혹시 못살더라도 ‘잘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어느 영화(베테랑)에서 배우 황정민이 그랬다면서요.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돈이 없어도 위신과 체면은 세우며 살고 싶다는 말이겠죠? 돈 없는 것까지는 참아볼 만한데, 최소한의 지켜야 할 양심, 도리, 아이덴티티까지 저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또 하
나님의 섭리를 담은 피조물이면서, 동시에 그 아들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입니다. 가오(顔) 세우고 삽시다. 성도의 얼굴 뒤에는 하나님의 얼굴이 있습니다. 그 얼굴빛 가리지 않도록,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자존감,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를 마무리하면서 ‘과연 인간은 자족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나누어 보았습니다. 자족(自足)이라고도 하고, 지족(知足)이라고도 합니다. ‘스스로 만족할 줄 안다’, ‘족함을 안다’라는 뜻입니다.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할까>라는 글에서 톨스토이는 뭐라고 말할까요? 빠홈이라는 사람에게 해가 지기 전에 걸어서 돌아온 만큼의 땅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 결과는 다 아시죠? 결국 그가 차지한 땅은 죽어서 묻힌 2미터 정도의 땅이었습니다. 여러분이었다면 욕심을 비우고 일찌감치 홈으로 복귀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사실 좀 궁금합니다.
1. 네 쌍의 권면과 자족하는 삶의 이유(1~6)
*마지막 권면 단락인 히브리서 13장은 처음 여섯 절에서 자족하는 삶의 이유를 다룹니다. 네 쌍의 권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①형제 사랑이 약해지지 않고 지속되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또한 나그네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고 말합니다(1-2). 그러다가 천사를 대접한 이들도 있답니다. 창세기의 아브라함이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②감옥에 갇힌 자들과 학대받는 자들을 기억하랍니다(3). 자유를 억압당하고 몸의 괴롭힘을 당하는 자들, 그들도 우리가 누리는 일상과 몸의 자유로움을 얼마든지 누릴 수 있도록 지음 받은 존재들입니다. 본인들의 의사와 상관 없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뭔가를 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③결혼을 귀하게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랍니다(4). 결혼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 철모르던 시절 짝을 맺어 동고동락한 아내(남편)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성 문제에 있어서 정결함을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음행하는 자, 간음하는 자, 조금 확대해석하여 영적 간음, 우상숭배를 하는 자를 하나님은 결코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결혼과 성의 문제에서도 만족할 줄 알고, 고마운 줄 아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④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권면합니다(5-6).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딤전6:10처럼 돈을 사랑하다가 일만 악을 저지르게 됩니다. 요즘의 범죄를 들춰 보세요, 대부분이 돈과 관련됩니다. 돈을 사랑하다 미혹을 받고 옳은 길을 가지 못하며 심지어 믿음에서 떠나게 됩니다. 오늘 5절은 돈을 사랑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다른 차원에서 말합니다. 돈은 정말 어렵게 우리 수중에 들어오지만, 얼마나 쉽게 ‘구멍 뚫린 주머니 속 동전’처럼 빠져나갑니까? 없을 때가 참 많습니다. 쉽게 사라집니다. 일관되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결코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버리시지도 않습니다. 돈은 우리를 쉽게 배반하지만 주님은 그러시지 않습니다. (신31:6)
-누구를 사랑하겠습니까? 돈입니까, 주님입니까? 성도들의 만족함의 근거는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고 주님의 돌보심에 있다는 사실을, 머리로만 이해하지 말고 삶에서도 증명해 보이시기 바랍니다.
*만족을 아는 삶, 자족하는 삶은 인간의 본능적인 성향, 소유욕과 탐욕을 의도적으로 멀리하는 삶입니다. 아주 사소한 영역에서라도 자족하는 삶을 실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머니가 넉넉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돕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우편에서 나를 도우시기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해♬, 하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시118:6)
2. 추가적인 권면과 삶의 예배(7~19)
①누구(무엇)를 따를 것인가(7~9)
-먼저 과거 지도자들을 기억하라고 권면합니다. 말씀을 들려주시던 분들 말입니다. 그분들의 삶의 열매가 어떠한지를 살펴보면서 그 믿음을 본받으라는 겁니다. 때로는 (속상하게도) 말년이 아름답지 못한 분들도 있고, 여전히 믿음의 옳은 길 가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나이 먹을수록 욕심과 고집을 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말과 삶의 괴리감과 불일치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분들을 포함해서 우리는 왜 이렇게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할까요? 8,9절을 참고해서 표현한다면, 그건 바로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교훈에 솔깃해지기 쉬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지킬 만한 것보다 더 지키기 어려운 것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별 희한한 기준을 자기 나름대로 정해놓고 자신도 힘들게 하고 남들에게도 강요하는 존재, 그게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우리 삶의 본이 되십니다. 사람은 한결같기 힘들지만, 주님은 한결같으시고 변하지 않습니다.
-누구를 또는 무엇을 따르겠습니까? 흔들리지 않는 목표물에 시선을 고정하시기 바랍니다.
②영문 밖으로 나가는 삶, 입술과 손의 열매(10~16)
-10절부터는 히브리서다운 화제를 다시 사용합니다. 앞에서도 종종 사용되었던 ‘우리는 가지고 있다’라는 진술로 시작됩니다. 성도들은 무엇을 가지고 있을까요? 10절은 ‘제단’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서 단번에 드려진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를 통해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옛 언약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장막에서 섬기려 하는 자들은 이 특권을 누릴 수 없습니다.
-대속죄일 제사에서 대제사장은 동물들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그 동물들의 사체는 진 밖에서 불태워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피로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영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분께서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저자는 지금 이 부분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13절에서 우리도 주님의 수치를 짊어지고 성문(영문) 밖으로 나아가자고 도전합니다. 거기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어쩌면 진 밖으로, 성문 밖으로, 낮은 곳으로, 사람들이 외면하는 곳으로 나아가기를 의미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당하신 수치를 짊어지는 삶입니다.
-루터 영화를 보셨죠? 마지막의 명대사를 기억하십니까? 독일 황제가 최종 결정을 내리던 무렵, 아이들을 모아놓고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하던 루터는, 그 아버지의 사랑을 일컫는 단어가 있다고 합니다. 바로 ‘compassion’입니다. 세상의 어떤 부자도 집 나간 자식이 돌아온다고 달려나가지 않는다고 하면서, 아버지의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열정과 감정을 함께 느끼는 것, 연민 또는 동정 또는 긍휼. 그러면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어쩌면 고통당하는 평범한 성도들에 대한 긍휼(compassion)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감독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전에 말씀드린 대로 히브리어로는 ‘긍휼’과 ‘자궁’이 어원이 같습니다. 자신의 배가 아파서 나은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부모의 마음과도 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긍휼히 여긴다는 겁니다.
-“주님이 당하신 고난이라면, 주님이 당하신 수치라면, 나 또한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영광으로 알고 기꺼이 당하겠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첫 세기를 살았던 신앙 선배들의 고백이었습니다.
-14절은 우리가 여기에 영원한 도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다가올 처소를 기다립니다.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나그네 된 삶을 살아가면서 항상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리자고 권면합니다. 노래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입으로 내뱉는 모든 고백들이 그분의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한 가지가 더 있죠. 16절이 말하듯이 선을 행하고 나누는 것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입니다. 입술의 열매와 손의 열매, 찬양하는 제사와 선을 행하는 제사. 입술의 고백과 나눔의 열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시기 바랍니다.
③기쁨으로 일하게 해 주오(17~19)
-17절은 현재의 인도자들에게 청종할 것을 말합니다. 리더의 영적 권위를 인정하고 그 권위에 복종하는 태도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합니다. 우리는 ‘리더십의 부재’ 시대를 지나, 리더십을 인정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리더를 세우시는 분도, 그에게 권위를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리더십의 타락과 악함에 대해 매의 눈으로 살필 필요가 있지만, 리더십 자체를 부인해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진정한 리더는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하나님 앞에서만이 아니라 세상 법정에라도 나서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절대로 먼저 도망가지 않습니다. 몰라라 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리더들이 어떤 마음으로 일하도록 하는 것이 현명할까요? 당연히 근심 걱정 때문이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게 해 드려야 할 것입니다.
-저자 일행을 위한 기도 요청이 이어집니다(18). 모든 일을 선한 양심에 따라 바르게 행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합니다. 그리고 수신자들 그룹에게로 속히 돌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당부합니다.
3. 문안과 축도(20~25)
*저자는 20,21절에서 수신자들을 축복합니다. 이 부분부터는 간단히 언급만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에서 가르치셨던 양용의 교수가 좀 더 쉽게 번역한 언어를 참조하여 읽어 보겠습니다.
-“평화의 하나님, 곧 양들의 위대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들로부터 이끌어 내신 분께서, 여러분이 그분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모든 선한 것으로 여러분을 갖추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그분께서 당신 보시기에 기쁘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안에서 행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분께 영광이 영원하기를! 아멘.”
*22-24은 개인적인 후기입니다. 수신자 형제들이 자신의 권면의 말에 맘 상하지 않고 잘 이해해 주기를 당부합니다. 형제 디모데가 석방된 소식을 전하며 디모데와 함께 조만간 수신자들을 방문하겠다고 말합니다. 교회를 지도하는 자들과 성도들에게 문안을 전하라고 하며, 이탈리아에서 온 무리들도 안부를 전한다고 합니다.
*25절은 짧은 축도입니다. “은혜가(지금까지 설명해왔던 바로 그 은혜)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있기를 빕니다.”
4. 닫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히브리서를 공부했습니다. 충분한 이해가 되지 못했다면 설교자의 전달력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개인적으로 히브리서를 좀 더 공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존재와도 비교될 수 없이 뛰어나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단번의 제사로 자신을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하늘 지성소, 하나님 앞에 이르는 길을 내셨습니다. 성도는, 십자가에서 단번에 드려진 그리스도의 완전한 제사를 통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된 자들입니다.
-이 담대함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입술의 열매와 나눔의 열매를 맺으심으로써 항상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작성자 땅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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