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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연구

멜기세덱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직

by 은총가득 2020. 10. 21.

멜기세덱은 누구인가? (히7:1)

 

"이 멜기세덱은 살렘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히 7:1)

멜기세덱과 그의 행한 일에 대한 역사적 언급은 창세기 14:18-20에 나온다. 그런데 히브리서 7장에서는 대제사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면서 전장을 이 멜기세덱과 비교하고 있다. 여기서 멜기세덱은 왕으로 묘사한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의의 왕이요 살렘 왕이라 하였다. 다시 말해서 평화의 왕이란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는 부모가 없으며 족보도 없고 시작과 끝도 없어서 하나님의 아들과 같으며 영원한 제사장으로 있는다 하였다(7:2-3).

그러면 여기 멜기세덱은 역사적 인물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였나? 또 역사적 인물이 아니었다면 왜 여기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과 비교하고 있는가? 그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먼저 역사적 인물로서 멜기세덱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멜기세덱의 이야기는 중간 청동기 시대로서 B.C. 1500년 이전의 일이었다. 그 시대는 다양한 도시 국가들로 나라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돌라 오멜 왕과 그 동맹군이 소돔과 고모라 왕을 사로잡고 거기서 살았던 롯도 포로로 잡아갔다. 이 소식을 듣고 아브라함이 그의 집에서 훈련시킨 318명의 사병을 거느리고 가서 그 동맹군을 격파해 롯을 구하고 탈취 당했던 물건과 많은 노략물을 얻어 돌아온다(창 14:1-16). 그러나 거기서 중심 인물은 그돌라 오멜 왕에게서 회복을 바랐던 소돔 왕과 아브라함을 축복한 멜기세덱이다. 특별히 멜기세덱은 제사장 왕으로서 아브라함에게서 1/10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분명히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은 역사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어디의 누구였는가? 멜기세덱의 뜻은 나의 왕은 의롭다거나 정의롭다는 뜻으로 합법적인 왕으로 해석하는 학자가 있으나, 의의 왕이란 해석이 적합하다.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도 멜기세덱을 평화의 왕이요 의의 왕이라 불렀다. 이 의의 왕이란 말로서는 그가 누구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살렘이란 말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이 말은 완성하다, 다 지불하다는 뜻으로 보는 이가 있으나 평화란 뜻이 옳다. 그러므로 살렘 왕은 평화의 왕이란 말이다. 그런데 사해 사본이나 랍비들 그리고 조세프스는 시편 76:2을 따라 살렘을 시온과 동일시한다. 이렇게 볼 때 멜기세덱은 시온 즉 예루살렘의 왕이었을 것이다.

또 유세비우스(Eusebius)는 아브라함이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에게서 선물을 받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해석된 그리심 산의 성전으로 한 손님을 맞이했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살렘은 그리심 산과 동일시되며 이곳에서 멜기세덱이 제사장으로 다스리며 사역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해석은 창세기 14:18의 칠십인 역을 지지한다.1)

그런데 멜기세덱은 이 사건 후에 곧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에는 사독 계열 제사장이 생겼고 이들이 아론 제사장 계열과 합치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사독과 멜기세덱은 같은 어근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또 유대주의에서는 멜기세덱에 대해 하스모니아 왕조의 유대 제사장 왕들에서 어떤 증거를 찾을 수가 있다(B.C. 164ㅡ 63)고 생각하며 거기서부터 사두개 파가 나왔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들은 제사장이요 왕이었던 멜기세덱의 후예라고 생각한다.

그 밖에 다른 견해는 사해 사본에서 발견되는데 거기서 멜기세덱은 천사장 전사로 나타난다.2)

 

이렇게 볼 때 역사적으로 멜기세덱은 살렘 즉 예루살렘의 왕이요 제사장이었다. 그는 정종이 분리되기 이전의 신정 정치체제에서 역사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볼 때 그는 분명 선민 이스라엘이 아니라 가나안의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중에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물론 그의 사역자(제사장)까지 있게 하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제사장의 직분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의 역사성에 보다는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멜기세덱을 소개하고 있다. 그를 의의 왕이요 평화의 왕이며 출생과 부모와 족보가 없으신 분으로 소개함으로써 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기에 적합한 분임을 지적하였다. 모세와 천사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는 제사장으로서도 레위 계통의 아론보다 더 근원적이시며 뛰어나신 분이시다. 그는 적어도 아래 세 가지 사실에서 레위의 제사장직을 초월하신다.

1. 그는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았다. 더 넓힌다면 레위인에게서 받은 것이다.
2. 그는 그보다 열등한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
3. 그는 레위같이 죽을 인간과는 대조적으로 영원히 사신다.3)

이렇게 하므로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의롭게 다스리시며 평화를 구축하실 것으로 기대되었던 메시아이심을 드러내고 있다(사 9:5-6; 32:17; 렘 23:5-6; 33:15; 단 9:24; 슥 9:1-10; 말 4:22).4)

 

 

멜기세덱의 신분(히 7:1-3)

 

본장은 그리스도의 큰 대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규명하는 가운데 대제사장으로서의 완전하신 자격을 논하는 일련 기사이다.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과 관련한 내용은 4장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5장 10절에서 중단 되었었다. 그런데 그 5장에서 중단 된 것을 7장에서 다시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진술된 내용을 요약하면 1절부터 3절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원형인 멜기세덱이 어떠한 특성을 지닌 인물인가를 논하는 부분이다. 그 다음 4절부터 10절은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분이 레위인들의 제사장 직분보다 우월함을 변증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어진 11절부터 25절까지는 멜기세덱의 우월성을 그리스도께 적용시켜 그리스도께서 인간 레위인들의 제사장들 보다 탁월함을 강조한 부분이다. 마지막 26절부터 28절은 결론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대제사장임을 확인하며 찬양하는 내용으로 결론짓고 있다. 그 가운데 여기서는 멜기세덱이 과연 누구인가를 밝혀주는 부분에 대한 의미를 살펴본다.


멜기세덱에 대한 언급은 처음 5장 10절에서였다. 거기서 저자는 주님의 대제사장 직임이 아론의 반차가 아닌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어간 11절에서는 수신자들의 미숙한 신앙 때문에 멜기세덱에 대한 언급을 더 이상 이야기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피력하였다. 그러면서 본장에 들어와 그 멜기세덱이 과연 누구인가를 좀 더 세밀하게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먼저 멜기세덱의 신분에 대해서는 모두 여섯 가지 특징을 들어 설명하였다.

1. 의의 왕이며 살렘 왕

저자는 멜기세덱에 대하여 1절에서 살렘 왕으로 소개한 뒤 2절에서 다시 의의 왕이요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라고 보도하였다. ‘살렘’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제롬(Jerome)이 주장한 세겜 골짜기의 살렘이란 지역이다. 제롬은 이곳에 멜기세덱의 왕궁터 유적이 있었다는 주장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 또 다른 견해는 이를 예루살렘으로 보는 견해이다. 다수의 학자들이 이를 지지하며 그 근거는 시편 76편 2절에서 예루살렘의 옛 지명을 살렘이란 별명으로 호칭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견해를 근거로 그랜드종합주석에서는 멜기세덱이 ‘예루살렘의 왕’이었다고 해석하였다. 혹자는 좀 더 구체적으로 멜기세덱이 욥이었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히기도 한다.


그러나 5장에서도 일차 설명이 있었듯이 멜기세덱을 사람으로 보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너무나도 많이 나열되고 있다. 욥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의 수명과 관계한 시대적 배경이 아브라함이 살았던 시대와 욥의 시대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음에서 연결 자체가 어려운 문제이다. 또 많은 주석가들은 욥이 살았던 시대를 모세 시대까지 늦추어 보는 경우들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볼 수 없는 결정적인 문제 역시 바로 인간의 수명 문제이다.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었을 때 이미 연로(年老)한 것으로 시사되고 있고 175세에 죽은 것으로 밝혀주고 있다. 그리고 그의 죽음에 대해서 성경은 “그가 수가 높고 나이가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열조에게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그러나 욥은 열 아들이 죽은 뒤 다시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나은 이후 “일백 사십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다”고 기록해 주고 있다. 이러한 기록에서 볼 때 욥이 살았던 시대는 노아 홍수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왜냐하면 손자 4대까지 볼 나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적게 보아도 200살은 훨씬 넘을 것으로 추정이 되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살렘’(שלם)은 ‘평화’, ‘평강’이란 뜻을 갖는다. 그러기에 평강의 왕이라고 소개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이는 지명을 가리킨 것이라기보다는 멜기세덱의 인물과 관계된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이다. 즉 멜기세덱이란 인물이 평화를 상징하는 왕이란 뜻에서 이런 표현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는 것은 살렘 왕이란 호칭이 지역이 살렘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의의 왕이요 살렘 왕이라 설명하고 있음에서도 지역 왕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또한 2절에서 또 다시 의의 왕이라 표현하였다는 것도 그러하다. 의의 왕일 수 없다. 그 이름을 번역한 그의 표상적(表象的) 개념으로 보아야만 한다면 역시 살렘도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성경해석의 원리상 합당한 것이다. 특히 의의 왕이란 인간에게 붙여질 수 있는 표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류 인간가운데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고 성경이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평화나 평강을 뜻하는 ‘살렘’도 제사장의 사역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멀어진 하나님 백성들을 하나님께 중보하는 역할이란 측면에서 충분한 의미와 연결점이 있다. 따라서 이는 주님에게 가장 적합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원죄와 자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대속의 공로를 통해서 아들의 신분으로 회복시켜 주었으니 주님이야말로 만왕의 왕이시되 평화, 평강의 왕이심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이사야는 주님을 예언하면서 이렇게 선언한 바 있다.
(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사야 선지자는 주님께서 평강의 왕이라고 찬양을 하였다. 주님께서 평강의 왕이라고 호칭한 것은 무엇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주님의 대제사장직분을 일컬은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시대 살았던 역사적 실존 인물이 아니라 주님의 현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 의의 왕, 평강의 왕이란 인간에게 붙일 수 있는 호칭이 아니기 때문이다.

2.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란 표현은 과거 구약시대의 다신론 사상과 연관이 있다. 민족들 마다 제각기 민족의 신을 두고 섬겼던 시대에서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야말로 최고의 신이셨던 것이다. 멜기세덱은 바로 그 최고의 신이신 하나님의 제사장 직분을 가진 자였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사장이란 신과 죄인 된 인간 사이에서 매개(媒介) 역할을 하는 직임이다. 그런데 그 시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그 직분을 가진 존재는 그리스도 외에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시대는 아직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던 시대였다. 따라서 제사장이란 직분 역시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났을 당시는 그 땅에 하나님 백성들도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아브라함의 조카였던 롯이 전부였다. 아직은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도 낳기 이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때는 아브라함이 직접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던 시대이다. 당시는 노아 이전시대와 마찬가지로 족장 중심의 구속사가 진행되었던 때였고, 제사장이란 직분은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부터 시작된 제도였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살았던 시대는 하나님 백성들과의 매개역할을 하는 제사장이란 직분을 가진 사람이 별도로 필요한 시대가 아니었고 실제로도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미 창세 이전부터 제사장 직분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백성을 선택하시되 창세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음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창세 이전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다는 것은 창세이전부터 그는 제사장 직분을 가졌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멜기세덱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는 것은 그가 곧 사람 제사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현현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현현에 대한 것은 성경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3장 19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노아 시대의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증거 한 것으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 56절에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기도 하셨다. 즉 아브라함이 주님을 보았음을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당시 주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자 유대인들은 네가 나이가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면서 돌을 들어 치려하였다고 기록해 주고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분명 아브라함을 보았음을 말씀하셨고 아브라함도 주님을 대면하여 보고 즐거워하였다고 하셨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주님을 보았다는 뜻의 ‘보고’로 번역된 단어는 ‘에이덴’(εἶδεν)이다. 이는 ‘호라오’(ὁράω)의 부정 과거 동사인데, 이 동사는 감각적으로 보았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직접 경험하거나 목격하였다는 의미에서 쓰이는 단어이다. 곧 환상이나 어떤 영적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의 실제적 경험을 의미하는 단어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주님을 보았다고 표현할 만한 사건은 일차적으로는 멜기세덱의 사건과 연결된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난 사건 말고는 그 보다 더 확실하게 주님을 보았다고 할 수 있는 사건이 성경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란 표현도 역시 인간 제사장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현현으로 해석됨이 합당하다.

3. 아브라함을 복 빌고 십분의 일을 받은 자

멜기세덱이 누구인가를 설명하면서 저자는 그가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준 사건을 1절 후미에서 소개하였다. 이는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멜기세덱이 바로 아브라함이 북방 4대 연합국을 물리치고 롯을 구해왔을 때 아브라함을 찾아왔던 바로 그 인물이란 사실을 밝히고자 함에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아울러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높은 신분임을 밝히려고 하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 때문에 7절에서는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는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당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었다. 때문에 아브라함은 구약의 성도들에게는 아버지란 호칭을 받고 있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의 대화가운데 유대인들에게 죄의 종이라 하니 유대인들이 그렇게 대답한 내용이 있다.
(요 8:39)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이처럼 아브라함은 구약성도들의 아버지로 인식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이 위치는 비단 유대인들만이 아니다.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7절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갈 3: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는 아브라함의 아들로 알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구원을 얻는 자들 중에서 아브라함보다 높은 자는 신구약 성도들 가운데 아무도 없다. 그는 곧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이다. 즉 믿음의 계보로 볼 때 그 조상 아브라함 보다 앞선 존재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멜기세덱이 그에게 복을 빌었고 그에게서 십일조를 받았던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믿음의 계보에서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보다 앞선 위치가 있을 수 없다면 멜기세덱은 역사의 인물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멜기세덱은 역시 그리스도의 현현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믿음의 원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에 근거한 것으로 아브라함보다 앞선 이는 오직 주님뿐이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가 없으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원리도 없고, 그렇다면 믿음의 조상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가 여기서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인간 제사장들보다 얼마나 더 우월한 존재인가를 밝히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4.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는 자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으며 족보도 없다는 것은 멜기세덱이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결정적인 근거이다. 그럼에도 그랜드종합주석 자료노트에서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318명의 가신들로 북방 4대연합국과 전쟁을 한 것이 역사적 사건이기에 그가 승전하고 돌아오는 길에 그를 영접하였던 멜기세덱이 역사적 인물임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해설하였다. 그러면서 3절의 주석에서는 멜기세덱에게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고 한 것은 단지 멜기세덱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 직을 예시하고자 한 표현으로 설명을 하였다.


그러나 멜기세덱이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인간이라면 왜 굳이 주님께서는 아론의 반차를 따르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았다고 하신 것인지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다.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직을 예시하고자 아비도 있고 어미도 있으며 족보도 있는 멜기세덱에게 없다고 하였다면 그것은 거짓이고, 그렇게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도 이유가 궁색하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어차피 그가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면 우리와 같은 죄인임 역시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아론의 반차를 따르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것이든 죄인인 인간의 반차를 따른 것으로서 전혀 다른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은 인간으로 해석되어선 안 되며, 그러기에 그는 아비도 어미도 족보도 없다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문자적인 의미에서도 그러하다. 여기서 ‘아비도 없고’로 번역된 ‘아파토르’(ἀπάτωρ)는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고아’, ‘주운 아이’, ‘사생아’, ‘불량배’ 등을 나타내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단어가 신들에게 적용될 때는 초자연적 출생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특히 헬레니즘 시대에 이 단어는 ‘어미도 없고’로 번역된 ‘아메토르’(ἀμήτωρ)와 함께 ‘신의 속성’, 즉 신성과 영원성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멜기세덱에게 이러한 수식어를 사용하였다고 하는 것은 그가 하늘에 기원을 두고 있는 존재로서 영원하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즉 멜기세덱은 아론의 반차를 따른 인간 제사장들과는 차원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존재란 사실을 말하고자 그가 사람이 아니라 영원한 존재라는 것을 이렇게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족보조차 없다는 말씀에서 좀 더 그 사실을 명확히 해주고 있다.


한편 여기서 ‘족보도 없다’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한 학자들이 이를 인간들에게 적용시켜 신약시대의 성직자들은 독신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천주교에서는 신부들의 독신 제도가 만들어졌고, 그 제도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으로 지켜오고 있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이 그야말로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가늠케 하는 중요한 대목이기도 하다.

5.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는 자

이 부분 역시도 마찬가지다. 멜기세덱이란 존재에 대하여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다고 표현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속성과 동일한 존재란 사실을 부각시키려함에 그 목적이 있다. 왜냐하면 시작한 날이 없다는 것은 스스로 계신 유일신 말고는 결코 다른 존재를 말할 수 없는 까닭이다.


실제 멜기세덱에 대한 존재는 신비에 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이 그를 실존 인물로 보고 예루살렘의 왕으로 추정을 하나 예루살렘 지역은 다윗이 그 성을 빼앗을 때까지 가나안 7족속 가운데 한 부족이었던 여부스 족속이 살고 있던 땅이었다. 그런데 다윗이 그 성을 빼앗아 다윗성으로 명명하고 유다의 수도로 삼았던 곳이다. 때문에 멜기세덱이 그 지역의 왕이 될 수는 없다.


만약 그가 그 지역의 왕이었다면 역사적으로 그에 대한 사적이 발견되어야 하고, 아울러 그의 믿음생활과 관련한 정보나 그의 백성들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들이 어떤 면으로든 남아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물론이고 그의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그 어떤 것도 발견된 것이 없다. 또한 성경에서 조차 그런 언급을 한 바가 없다.


그러기에 그의 존재에 대하여 저자는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제롬의 주장처럼 그가 나라를 다스렸던 왕궁 터가 발견되고 역사적 근거가 후대에 구전으로라도 전해진 바가 있다면 생명의 끝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끝이 있었다면 역시 시작한 날도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나 구전을 통해서도 멜기세덱은 물론이고 그의 가족, 그의 민족들에 대한 정보들 까지도 전해진 바가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멜기세덱은 실존 인물로 해석해선 안 된다.


특히 ‘시작한 날도 없다’는 표현 역시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존재에게도 사용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인 것이다. 그것은 실제 하나님 외에는 모든 존재가 시작한 날이 있기 때문이다.
모세가 애굽에 내려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누구냐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느냐고 질문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답변해 주셨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여기서 스스로 있는 자란 말은 곧 시작한 날이 없이 존재하는 자란 의미이다. 시작한 날이 없기에 역시 그 끝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멜기세덱에게 시작한 날도 없다고 표현한 것은 그가 곧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사실이 틀림이 없다.

6.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한 영원한 제사장

히브리서 저자는 멜기세덱이 누구인가에 대한 설명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는 사실과 그의 제사장 직분이 영원한 것임을 결론으로 제시하였다.
그런데 ‘방불’로 번역된 ‘아포모이오메노스’(ἀφωμοιωμένος)는 ‘같게 하다’, ‘비슷하게 하다’란 뜻을 가진 ‘아포모이오오’(ἀφομοιόω) 완료형으로 동일하게 되었다는 뜻이나 같아졌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 부분은 주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하셨기에 표현된 것으로, 실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입고 오신 그 주님과 방불하다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의 제사장직분이 영원하다는 것은 멜기세덱이 그리스도란 사실을 좀 더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인간 제사장들은 육신의 죽음으로 인하여 영원히 제사장 직분을 행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인간제사장 직분은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대속의 역사를 완성하므로 인하여 더 이상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한시적인 직분이었다. 그러나 주님의 제사장 직분에 대해서는 앞의 6장 20절에서도 언급한바 있듯이 영원한 것이다. 주님의 제사장 직분이 영원하다는 것은 주님께서 이루신 대속의 효력이 영원함을 뜻한다. 더 이상 택한 백성들이 죄의 문제로 송사당할 이유가 없고, 또 다시 죄의 문제 때문에 심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다시 10장에서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히 10:12-14)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즉 주님의 대속의 역사는 하나님 백성들에게 영원한 효력을 가져다준다는 말씀이다. 따라서 저자가 여기서 멜기세덱을 말하는 것은 그가 곧 그리스도의 현현이었음을 이야기하고자 하였던 것이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역사로 인하여 더 이상 인간 제사장 역할은 필요 없게 되었음을 밝히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


그 시대 유대교로 돌아갔던 사람들은 제사장 제도가 없는 기독교에 대하여 심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고, 이 문제가 가장 극심한 비판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동안 수천 년을 그런 제도 속에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그러한 마음은 믿음의 부실함이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러기에 저자는 믿음의 초보에 대한 문제를 6장에서 언급하였던 것일 것이다.


주님의 대속의 효력을 깨닫지 못한 결과가 감격한 감사로 받아들여야 할 은혜에 대하여 의심과 배교의 행위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얼마나 바르게 알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지는 대목이다.
그리고 우리는 심히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이란 각오도 갖게 된다. 주님의 대제사장 직분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았다는 것은 그의 중보가 완전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주님의 제사장 직분이 영원하다는 것은 주님의 대속의 효력이 우리에게 영원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멜기세덱과 십일조언약(히 7:4-10)

 

멜기세덱이 결코 인간 제사장이 아니란 사실에 대하여 매우 소상하게 설명했던 저자는 곧바로 그가 레위지파의 레위제사장들보다 월등한 존재란 사실을 논증해 가고 있다. 그리고 다시 이를 그리스도에게로 초점을 옮겨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의 월등성을 강조하는 과정으로 이어가고자 한다.
저자는 4절을 “이 사람이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는 말로 시작하였다. 이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치고 복 빎을 받았다는 사실을 통해서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분이 레위지파의 제사장들 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도입부적 성격을 갖는다. 저자는 멜기세덱이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보다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는 제목 뒤에 멜기세덱의 높음을 변증하기 위해서 4가지 사례를 진술하였다.

1. 아브라함에게 받은 십일조 사례

4절에서 저자는 멜기세덱의 높은 신분을 입증하고자 맨 먼저 아브라함이 그에게 십일조를 드린 내용을 진술하였다. 이는 멜기세덱이 제사장이란 신분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인정하였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은 내어줄 이유가 없는 까닭이다. 그리고 그것은 역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높은 신분이었음을 보증해주는 사건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논증이다.


이어진 5절에서는 레위인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받은 사례를 비유로 하여 멜기세덱의 우월함을 강조하고 있다. 5절에서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라고 한 말은 레위의 아들들이라 하여 모두 제사장은 아니었기에 한 말이다. 레위는 야곱의 셋째 아들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게르손, 그핫, 므라리 세 사람이 있었다(대상 6:1). 그러나 이들이 제사장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제사장 직분은 광야에서 처음 생겨진 제도였기 때문이다. 당시 최초 제사장은 레위의 둘째 아들인 그핫의 손자였던 아론이었다(대상 6:3). 그리고 아론의 제사장 직분은 그의 아들들, 즉 나답과 아비후, 이다말로 이어졌다. 그런데 아론의 장자인 나답과 막내인 아비후가 자식이 없이 죽게 되었으므로(레 10:1-7) 아론의 제사장직을 계승한 계보는 엘르아살이었다. 그리고 줄곧 그의 후손인 비느하스, 아비수아, 북기, 웃시, 스라히야, 므라욧, 아마랴, 아히둡, 사독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저자가 레위지파의 제사장 직분을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레벨(level)이 같은 형제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에게 십일조를 받은 사례를 말하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자라도 자기 형제들에게 십일조를 받았음을 5절에서 말하였던 것이다. 같은 사람, 같은 형제였지만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십일조를 받았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6절 상반절에서 멜기세덱은 율법이 없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여기서 멜기세덱이 레위 족보에 들지 않았다고 한 표현에는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1) 멜기세덱은 율법을 초월하여 십일조를 받았다는 뜻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받은 때는 레위의 아버지인 야곱도 출생하기 이전이고, 그의 아버지였던 이삭도 출생하기 이전이었다. 그리고 레위족속이 하나님께 선택을 받고 성전을 봉사하였던 것은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부터였다. 따라서 율법의 규정을 따른 십일조의 시행 역시 광야교회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광야에서 시행된 십일조는 레위인들의 몫으로 주어졌다. 그런데 저자는 특별히 멜기세덱이 레위 족보에 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이는 곧 십일조 규정이란 율법이 제정되기 이전 그것도 믿음의 조상격인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받았음을 말하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멜기세덱이 율법의 규정보다 우선되는 인물이라는 의미와 함께 그는 법을 초월하여 십일조를 받은 인물임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멜기세덱은 특별한 인물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 멜기세덱이 레위지파들보다 더 높은 신분이란 뜻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5절에서 레위지파가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던 자들임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허리’로 번역된 단어는 ‘오스퓌오스’(ὀσφύος)로서 엉덩이나 허리를 뜻하는 ‘오스퓌스’(ὀσφύς)의 소유격 명사이다. 이는 구약의 히브리어 ‘할라차임’(הלצם)의 역어인데, 정력의 자리, 사람의 자손이 나오는 자리, 즉 혈통과 관련하여 사용된 단어이다(창 35:11; 대하 6:9; 시 132:11). 따라서 신약 성경에서도 이 단어는 생산의 기관이 있는 곳을 완곡하게 나타내는 표현으로 쓰였다. 그러기에 10절에서는 “레위가 아브라함을 만날 때는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라”고 진술하기도 하였다.


저자가 이런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레위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멜기세덱은 그 레위의 조상격인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레위 계통의 제사장 보다 멜기세덱이 더 높은 것은 레위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 자체가 그것을 증명하지 않느냐는 논증이다. 그러기에 7절에서는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십일조를 하고 복 빎을 받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였다. 즉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멜기세덱은 아브라함보다도 더 높은 신분임을 이렇게 논증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을 크게 보고 있는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멜기세덱은 그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월등한 신분임을 이렇게 강조하였던 것이다.

3) 멜기세덱은 하나님이었다는 뜻

그것은 율법도 없는 시대에 믿음의 조상격인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받았다는 것이 그와 같은 뜻을 함유한다. 아브라함은 믿는 자의 시조란 칭호를 받았다. 따라서 믿음의 원리에서 볼 때 아브라함보다 더 높은 사람은 있을 수 없다. 그가 곧 시조요 조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율법도 없는 시대였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면서다.
그렇다는 것은 멜기세덱은 곧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시사한다. 왜냐하면 율법도 없는 시대에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받을만한 존재는 하나님 말고는 다른 인물이 있을 수 없는 까닭이다.


저자의 진술을 토대로 추론해 보면 아브라함은 자신이 북방 4대 연합국과의 전쟁 이후 그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의 도움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했기에 그것을 인정하는 표로서 자신을 찾아온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던 것이다. 아울러 아브라함은 자신을 찾아온 멜기세덱이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주님의 현현이란 사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이 된다. 주님께서도 아브라함을 보았다고 말씀하셨듯이, 그렇지 않았다면 법적 규정도 없는데 멜기세덱에게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릴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들의 시조였다. 때문에 같은 인간으로서는 아브라함보다 높은 인물이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레위인 계통의 제사장들과 멜기세덱을 비교하고 있는 것은, 멜기세덱이 율법을 초월한 신분이고, 그가 곧 하나님이란 사실을 밝히려는 저의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2. 아브라함을 축복한 사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을 설명한 저자는 다시 그의 높음을 논증하기 위해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한 사실을 증거로 제시하였다. 이와 관련해서는 6절 하반절에서 멜기세덱이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라고 진술하였고, 7절에서는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는 것이 아니냐”는 논증을 통해서 멜기세덱의 탁월함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아브라함에 대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로 소개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는 곧 아브라함이 일반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약속을 받았다는 것은 앞에서도 잠시 밝힌바와 같이 그가 믿음의 조상이며 믿는 사람들의 시조였다는 사실을 암시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이란 먼저 그의 혈통을 통해서 택한 백성들을 보내 주시겠다는 언약을 가리킨다. 이 약속에 대하여 성경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곳은 창세기 12장 2절이다. 하나님은 그때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라고 약속해 주셨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그를 통해 그의 자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해 주실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그 언약으로 인하여 그에게 붙여진 이름이 열국의 아비요 믿음의 조상이란 호칭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조상’이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원리에 따라 출생하는 택한 백성들의 조상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7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라고 선언하였다.


즉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택한 백성들의 시조라는 언약을 받은 자가 아브라함이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아브라함에게 멜기세덱이 십일조를 받고 복을 빌어 주었다는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복을 빌었나니’로 번역된 헬라어는 ‘칭찬하다’, ‘축하하다’, ‘축복을 빌다’, ‘축복을 주다’, ‘번창하게 하다’ 등의 뜻을 가진 ‘율로게오’(εὐλογέω)의 완료 능동태 동사인 ‘율로게켄’(εὐλόγηκεν)이다. 그렇다면 멜기세덱은 아브라함보다 높은 존재이며 그는 인간 그 이상의 존재란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믿는 자들의 조상, 즉 믿는 자들 가운데 가장 첫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로 말한다면 아담에게 십일조를 받고 그를 축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아담에게 십일조를 받고 그를 축복한 존재가 있었다면 하나님 말고는 다른 존재를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담은 인류의 조상이며 인류의 첫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제2기 구속사에서 첫 사람인 것이다. 그러기에 그를 믿음의 조상이란 호칭을 준 것이다. 이를 히브리서 8장 8-12절과 관련하여 설명하면 아담은 구 언약의 대표자요 시조라면 아브라함은 새 언약의 대표요 시조라고 할 수 있다. 즉 아담이 육신적 관점과 행위언약 측면에서의 인류의 시조이며 대표라면 아브라함은 믿음 언약, 즉 은혜언약과 관계된 시조요 대표인 것이다. 그런데 멜기세덱이 그런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받고 복을 빌어주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멜기세덱은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 보다는 심히 높은 신분임을 이렇게 입증해 보이고 있는 것이다.

3. 멜기세덱의 영원성

멜기세덱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해 세 번째로 든 사례는 멜기세덱의 영원한 존재성이다. 이에 대하여는 8절에서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라고 진술하였다. 8절에서 ‘여기는’으로 표현된 것은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을 의미하고, ‘저기’란 표현은 멜기세덱을 가리킨다.
그리고 ‘죽을 자들’이란 표현에는 2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첫째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죄인들이란 사실이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곧 죄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즉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을 일컬어 죽을 자들이라고 한 것은 그들은 곧 죄인이라는 옮길 수 없는 확고한 의미가 함유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가지 의미는 그들의 제사장 직분은 한시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들이 불원간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러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들이 제사장들에 대하여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그와 반대로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동일한 존재임을 부각시키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러면서 멜기세덱에 대해서는 ‘산다는 증거를 얻은 자’로 표현하였다. 이 표현 역시 두 가지 의미를 시사한다. 하나는 그는 죄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죽음이 죄의 소산인데 그에게 죽음이 없다고 하는 것은 그가 곧 죄가 없음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의미는 그는 그러기에 영원한 존재라는 뜻을 나타낸다. 여기서 ‘산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살아 있다’라는 뜻을 가진 ‘자오’(ζάω)의 직설법 현제 시제인 ‘제’(ζῇ)이다. 이 동사는 신약성경에서 언제나 죽지 않을 존재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계시록 2장 8절에서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라고 하였을 때, ‘살아나신’으로 번역 되었다. 요한복음 6장 51절에서는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라고 할 때 ‘영생하리라’란 말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멜기세덱에게 이러한 표현을 한 것은 그가 죽지 않을 존재임을 가리킨다. 즉 멜기세덱은 영원한 존재라는 뜻이다. 특히 산다란 단어가 현재 시제로 되어 있어서 그는 언제나 살아있는 존재임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이 역시 멜기세덱은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와 함께 레위지파의 제사장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신분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4. 레위지파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침

멜기세덱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한 네 번째 증빙으로 논증한 것이 레위지파의 십일조다. 저자는 9절과 10절에서 레위인들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는 원리를 소명(疏明)하고 있다. 9절에서 저자는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친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하여 10절에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 레위가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진술하였다.


여기서 ‘자기 조상’은 아브라함을 나타내고, ‘허리에 있었다’는 표현은 앞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자녀를 출산할 수 있는 남성의 생식(生殖)의 능력과 그 영역 안에 있다는 의미를 완곡하게 나타내는 히브리식 관용어이다. 즉 레위로 대표되는 레위 계통의 혈통은 생식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 역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이라는 원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레위인들은 율법에 의해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로부터 십일조를 받을 권리를 부여받은 자들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일조를 바칠 때에 그들 역시도 십일조를 드린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 시대로 볼 때 그들은 존재조차도 없었다. 그들이 태어나려면 많은 세월이 지나야만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논리를 펴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물론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은 곧 유대인들이 기독교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 때문이었다. 당시 유대교에서는 제사장들에 의해 제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제사 제도가 전혀 시행되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저자는 그럴 수밖에 없고 그리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 즉 주님의 대속의 효력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를 밝히고자 함에 최종 목적이 있다. 아울러 저자는 이를 밝혀가는 과정에서 먼저 멜기세덱이 어떤 신분인가를 진술한 다음 그가 레위지파의 제사장들보다 얼마나 월등한 신분인가를 입증하고자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칠 때 레위 제사장들은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던 자들로서 그들 역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과 같으니 멜기세덱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 보다 비교할 수 없는 우월한 존재임을 이렇게 논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기자의 진술 속에서 십일조에 대한 두 가지 매우 중요한 구속사적 원리를 깨닫게 된다.

1) 십일조 규정의 원리

즉 십일조는 하나님과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맺은 대표 언약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드린 십일조가 레위인들도 그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이라고 한 진술에 담긴 의미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드린 십일조는 그의 자손들과 연대성을 갖고 있음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레위인들이 아브라함의 십일조 행위에 연관된 것으로 말씀하였기 때문이다. 즉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리고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한 이 언약 관계는 아브라함과 멜기세덱과의 1대 1의 계약관계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아담이 구속과 관련된 행위언약의 대표였다면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은혜언약의 대표자였다. 때문에 그에게 믿음의 조상이란 호칭을 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하나님 백성들에게 대표성을 갖는 것이며 그러기에 그의 허리에 있던 레위 족보의 제사장들도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이라고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레위지파가 십일조를 드렸다고 하는 것은 역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레위지파는 이스라엘 전 민족을 대표하여 제사장 직분을 감당한 지파였기 때문이고,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 오늘 은혜언약아래 있는 우리들도 당시에는 모두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2) 십일조 규례의 영원성

즉 히브리서 기자의 이러한 진술에는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들에게 있어 십일조 언약은 영원한 것이라는 의미를 시사해준다. 그것은 역시 믿는 자들의 시조이며 대표였던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린 당시의 상황을 기록해주고 있는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린 행위가 어떤 언약관계에서 드려진 것이라는 의미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본서 기자의 설명에 의하면 그것은 단순히 개인적으로 드린 십일조가 아니었음을 피력하고 있다. 즉 하나님 백성들을 대표한 언약관계에서 드린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레위인들이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린 행위와 연결되어 그들 역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과 같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9절에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라고 한 말씀에는 모든 하나님 백성들은 이 십일조 언약아래 있음을 전제한다.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당시 아브라함의 허리에는 레위지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택한 백성 모두가 그의 허리 안에 있었기 때문이고, ‘바쳤다 할 수 있나니’란 말은 바쳐야함을 전제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십분의 일을 바쳤다’로 번역된 ‘데데카토타이’(δεδεκάτωται)는 동사 ‘십일조를 한다’는 뜻의 ‘데카토오’(δεκατόω)의 직설법 완료시제이다. 이미 십일조를 드렸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다. 그런데도 십일조를 드린 완료 시제를 쓴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곧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던 그들은 십일조를 드려야함을 전제한 표현인 것이다. 구원이 아직은 우리에게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완료시제(롬 8:30)를 쓴 것과 같은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 언약은 대대로 지켜져야 할 영원한 언약이라는 의미를 시사한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도 율법의 완성으로 인하여 구약과는 전혀 새로운 새 언약을 말씀하시면서도 십일조에 대해서만큼은 하나님 백성들이 지켜가야 할 원칙으로 말씀하셨던 것이다(마 23:23).


할례언약이 율법보다 상위법에 속하여 안식일에도 할례의식만은 시행되었던 것처럼 십일조 언약 역시 율법의 상위법에 속한 것이라는 진술이다. 그것은 이 십일조 언약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맺은 믿음 안에서의 언약이었던 까닭이다. 물론 하나님 백성들은 십일조만이 아니라 전 생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그러나 십일조는 절대성을 갖는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 백성들의 의무인 것이다. 그리고 전생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는 출발은 바로 십일조의 시행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십일조를 행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고 더군다나 자기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히 7:11-28)

 

레위지파의 제사장들보다 멜기세덱의 우월함을 변증한 저자는 11절부터 논증의 중심을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분에 대한 것으로 옮겨가고 있다. 즉 어떻게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분이 레위 계통의 대제사장들과 다른가를 설명해 가고 있는 것이다.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1.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11-19절)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분을 논하면서 가장 먼저 보도한 내용이 바로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았다는 진술이다. 진술된 내용을 정리하면 네 가지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1) 레위 지파의 제사장직의 불완전성(11)

11절은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의 불완전성을 근거로 완전한 제사장직을 수행할 그리스도의 출현에 대한 당위성과 필연성을 어필한 내용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레위 계통의 제사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다면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라고 물었다.


이를 다시 설명하면 이렇다.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이 성도들의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줄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다른 제사장을 세울 이유가 있었겠느냐는 뜻이다. 이러한 진술의 내면에는 레위지파의 제사행위로는 성도들의 완전한 죄 사함이나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을 내포한다. 그 이유에 대하여 저자는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라고 진술하였다. 여기서 ‘그’란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문자적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레위계통의 제사장에 근거하여 율법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저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율법과 레위 지파의 제사장 직분과는 밀접한 상호 관련성이 있음을 전제한다. 그리고 이러한 진술에는 두 가지 저의가 담겨 있다.


첫째는 레위 지파 역시 율법 아래 있는 자들로서 그들이 다른 사람의 죄를 온전케 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함이다. 둘째는, 그러므로 우리를 온전케 할 또 다른 제사장이 절대적으로 요구 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도 레위지파는 아담의 대표언약의 영향아래 있는 죄인이었다. 그러기에 백성들을 위해 속죄제를 드리려면 언제나 그들 자신을 위한 속죄제를 먼저 드려야만 했다. 그들 역시 죄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죄인이 다른 사람의 죄를 온전케 해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기에 저자는 11절 하반절에서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운 것이라는 설명을 반문(反問)의 형태로 진술한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레위 계통의 제사장직은 그들 스스로 죄인이기에 불완전하고 그러기에 한시적인 행사일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때문에 영원하고 완전한 제사장이 요구되었던 것이며, 그러므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전혀 다른 제사장을 세운 것이라는 설명이다.

2) 레위 지파의 제사장직의 폐지(12)

저자는 12절에서 제사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되어야 함을 진술하였다. 11절 중반에서 율법은 제사장 직분과 밀접한 연관에서 주어졌음을 설명하였다. 때문에 제사직분이 바뀌게 되면 율법 역시 바뀌는 것이 당연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유대교에서는 레위 지파, 아론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직이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으로 간주 되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하였던 근거는 레위지파의 제사장직분이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에 기초한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즉 모세의 율법을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그들은 제사장 직분도 영원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유대인들 가운데는 기독교로 개종을 하였음에도 그러한 인식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레위지파의 제사장직분이 변역되었음을 역설(力說)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저자는 제사직분의 변혁을 그 근거로 제시하였다.


여기서 제사직분의 변혁이란 제사장 직분의 변혁을 약(略)한 말이다. 저자가 제사장 직분의 변혁을 말하고 있는 근거는 그리스도의 대속사건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자기 백성들의 죄를 영원히 사하는 완전하고도 온전한 속죄제였기에 레위지파의 제사장 직분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고, 따라서 그것은 변혁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진술이다. 그리고 모든 율법이 제사장 직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제사장직에 대한 변역이 있었다면 율법 역시 변역될 수밖에 없는 것임을 논증하고 있는 것이다. 즉 저자는 제사장 직분에 대한 폐지와 제사 제도를 시행치 않는 기독교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유대교에 대한 향수를 그리워하며 옛 것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는 본서 수신자들에게 유대교의 가장 기초가 되는 제사장 제도와 율법의 변혁을 입증해 보임으로써 그들의 시도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임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3) 레위 지파가 아닌 유다 지파로서 제사장이 되신 예수님(13-17)

제사장직과 율법의 변혁을 설명한 뒤 이어진 논증은 레위지파가 아닌 전혀 다른 지파를 통해서 대제사장이 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논증으로 화제를 옮겨가고 있다. 이에 대하여 13절에서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다른 한 사람”이란 표현을 썼다. 물론 여기서 지목하고자 하는 인물은 14절에서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란 표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본래 구약시대의 제사장 직분은 율법의 규정에 따라 레위 지파 가운데서도 아론의 자손들에게만 허락되고 승계되었다(출 29:1-9). 때문에 14절 하반절에서는 모세가 유다 지파에서 제사장 직을 맡을 수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레위지파가 아니고 유다 지파로써 제사장직을 수행하셨다는 것이고, 그것은 성경의 예언에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사실을 변증하기 위해 저자는 17절에서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유다 지파를 통해 출생할 자 가운데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 나올 것이라 예언되었던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17절에서 인용한 내용은 시편 110편 4절이다. 이는 다윗이 쓴 시로써 메시아 예언시이다. 거기 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다윗의 여기서 말하고 있는 ‘내 주’란 표현은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주님께서 직접 이 내용을 인용하면서 누가복음 20장 43절에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리스도께서 그의 자손이 될 수 있느냐며 서기관들을 주장을 물리치셨던 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 사도행전 2장 35절에서도 베드로가 이 시편 기사를 인용하여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가 바로 그라는 사실을 설교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시편 4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시 110: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즉 주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 될 것임을 예언한 것이다. 따라서 레위지파의 제사장직이나 율법에는 변혁이 있을 수밖에 없고, 또한 변혁되어야 한다는 것이 히브리서 기자의 논증인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레위지파가 아닌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을 영원한 제사장이 나타날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는 레위지파가 아니라 유다지파로 예언되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14절의 표현대로 모세의 율법에는 레위지파의 제사장 말고는 다른 제사장을 말한 경우가 없다. 그럼에도 유다지파를 통해서 출생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 되었음을 논증한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앞의 6절에서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십일조를 받은 경우와 방불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율법을 초월한 특별한 역사인 것이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하여 16절에서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한 마디로 율법의 제정자이신 하나님에 의한 것이란 사실을 이렇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이 곧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제사장이란 뜻이고, 따라서 제사장직도 율법도 변혁될 수밖에 없는 것이니 율법에 대한 향수를 과감히 떨려 버리고 오직 주님을 따르고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4) 율법의 폐지와 더 좋은 소망(18-19)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 나올 것이란 시편 110편의 예언을 통해서 제사장직분과 율법의 변혁의 필연성을 설파한 저자는 이어서 또 하나의 율법의 폐지에 대한 이유와 함께 성도는 이제 더 좋은 소망가운데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었음을 논증한다.


저자는 18절에서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라고 하였다. 여기서 연약하다는 말은 구약의 제사장 직분이 인간의 죄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가리킨 표현이다. 그리고 무익하다는 것은 연약함에 대한 결과적 표현이다. 죄와 죄책에 대하여 온전한 해결을 할 수 없기에 결과적으로 그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기에 19절의 서두 괄호 안에서는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할 수 없다고 하였다.(문장을 가로 안에 둔 것은 어떤 사본에는 이 문장이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제사장 직이나 율법은 그것으로 우리를 온전케 할 수 없었기에 폐지되어야만 했고 또 폐지되었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이어진 문장에서는 그로 인하여 더 좋은 소망에 이르게 되었음을 설명한다. 즉 그것이 폐지됨으로 성도들에게는 더 큰 은혜에 이르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율법이 폐지되므로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라고 하였다. 여기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게 되었다’는 것은 구약시대의 제사장 직분과 관련된 표현이다. 과거 구약시대 백성들이 속죄제를 드리기 위해서는 언제나 제사장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권리와 특권은 오직 대제사장뿐이었기 때문이다(레 10:3).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완성으로 인하여 누구나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만인 제사장 시대가 도래 하게 되었음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대제사장 직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주님의 대속은 성도들의 모든 죄에 대하여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속량해 주는 효력을 가졌기에 더 이상 속죄를 위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따라서 율법의 폐지는 필연적이고, 그것은 곧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게 하는 더 좋은 소망을 가져다 준 것이 되었다는 설명이다.

2.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의 우월성(20-25절)

유다지파의 제사장직과 율법의 폐지를 선언한 저자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진술을 이어가고 있다. 내용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1)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은 하나님의 맹세로 된 것(20-21)

저자는 20절에서 “예수께서 제사장 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라고 보도하였다. 그리고 21절에서는 반대로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음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맹세는 결코 뉘우침이 없다는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의 온전하심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제사장이 된 것이 맹세로 된 것이라 한 말씀은 시편 110편에서 예언한 내용을 근거함이다. 110편 4절에 보면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라고 기록되어 있고, 이어서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히브리서 저자가 이 내용을 21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은 하나님의 맹세로 되었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맹세로 되었다는 것은 그 내용이 확실하고 변함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 사람들도 맹세란 보통의 약속이나 결단을 초월한다. 즉 필히 지킬 것을 강조할 때 맹세란 단어를 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은 하나님의 맹세로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비단 맹세가 아니라 하더라도 틀림없이 지켜질 말씀들이고 실제로 지켜졌다. 그런데 맹세로 약속하신 것이라면 더 이상 재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레위 계통의 제사장들은 반대로 맹세로 된 것이 아니라고 21절에서 이야기한다. 그들은 율법 중 의식법의 규정에 따라 세습적으로 제사장 직이 승계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과정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맹세로 된 것이 아니었다. 계시의 말씀에 의해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직을 수행하게 된 것이었다(출 28:1).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과 레위인의 제사장직은 근본부터 전혀 다른 차원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은 영원하기 때문(22-25)

22절에서 저자는 주님의 대제사장 직분은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음을 진술하였고, 그 이유에 대하여 24절에서 예수님은 영원하신 분으로서 그 직분 역시 영원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를 좀 더 강조하기 위해 23절에서는 예수님과 대조하여 레위 계통의 제사장 직이 영원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들은 죽을 수밖에 없었기에 많은 수의 제사장들이 요구되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므로 그의 제사장직분 역시 영원함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25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완전함이 성도들에게 어떤 효력을 가져다주었는가를 설명한다. 즉 주님은 하나님의 맹세에 의해 제사장이 되셨고, 또 영원한 제사장이시기에 주님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에 대하여는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주님께서 항상 살아 계셔서 성도들을 위해 간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그리스도는 영원한 성도들의 중재자시며 성도들을 위한 대언 자, 변호자란 표현이다. 성도들을 위해 간구하신다는 것은 그들을 변호하시고 구원의 중재자가 되어 주신다는 뜻이다.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책을 대신 감당하셨을 뿐만이 아니라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변호하고 계시기에 택한 백성들은 온전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설명이다.

3.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의 완전성(26-28절)

저자가 7장에서 마지막으로 강조한 것은 그리스도 대제사장직의 완전성이다. 제사장직의 완전성이란 주님의 중보사역으로 더 이상 인간 제사장이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일이 필요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완전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역사가 모든 죄의 문제를 완전히 속량하였음을 뜻하고, 그 효력이 영원함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의 완전성에 대한 근거는 3가지를 제시하였다.

1) 예수님은 죄를 이기시어 하늘보다 높이 되셨기 때문(26)

저자는 26절에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임의 합당함에 대하여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셨다”고 하였다. 저자가 언급한 이러한 5가지 속성은 인간에게서는 있을 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신 하나님의 속성이다. ‘거룩’으로 번역된 ‘호시오스’(ὅσιος)란 단어는 ‘경건한’, 또는 ‘신성한’이란 뜻을 가지고 있어 인간에게는 사용될 수 없는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아무리 도덕적으로 훌륭하다 하더라도 그렇게 경건하거나 신성할 정도의 거룩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류 인간은, 의인의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성경의 선언대로 악과 더러움이 없는 존재는 없다. 그러므로 인간 제사장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죄인이 다른 사람의 죄를 속죄한다고 하는 것 자체가 구속사의 원리에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다고 하였다. 이는 본래의 주님의 신성을 가리킨 표현이다. 주님은 처음부터 죄인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죄인에게서 떠났다는 것은 육신을 입으셨지만 결코 죄를 범치 않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완전한 것이다. 특히 죄인에게서 떠나 있었다고 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의 행위 언약을 온전히 지켜냈음을 뜻한다. 때문에 부활하시어 하늘로 승천하셨고, 그에 대하여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고 표현하였다. 본래부터 죄 없으신 몸으로 오셨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모든 율법의 규정들을 온전히 지켜 내심으로 승리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주님은 완전하신 제사장이라는 진술이다.

2) 자기 몸을 드려 단 번에 속죄제를 이루셨기 때문(27)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의 완전성은 또 다시 반복하여 속죄를 위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데에 근거한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27절에서 레위지파의 제사장들은 날마다 제사를 드려야 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 그것은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26절에서 설명한 대로 그리스도는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현은 구원을 위한 행위언약을 주님께서 온전히 이루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언약은 본래 은혜언약이 아니고 행위언약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첫 사람 아담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택한 백성들의 대표로서 실행한 행위언약이었기에 그의 실패는 모든 택한 백성들의 실패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 이 땅에 오시어 그 행위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이러한 승리 또한 택한 백성들의 대표로서 행하신 것이었기에 그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 백성들에게 그 효력이 미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더 이상 속죄를 위한 제사도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고, 또한 더 이상 제사장도 있을 이유가 없게 된 것이다. 때문에 저자는 이제는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음을 선언하면서 그 근거를 주님께서 단 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3) 예수님은 약점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28)

7장의 결론격인 28절은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이 왜 완전한가의 설명으로 마무리를 한다. 여기서 저자가 말한 의도는 세 가지다. 첫째는 레위지파의 제사장은 율법의 규정에 의해 세워진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맹세로 되었음을 강조한 부분이다. 둘째는 레위계통의 제사장들은 약점을 가진 유한한 인간들이었지만 그리스도는 영원토록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주님은 약점을 가진 인간과 달리 죽기까지 복종하시어 온전한 제사를 드리셨다는 진술이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온전케 되셨다는 표현을 썼다.

 

여기서 ‘온전케 되신’으로 번역된 ‘테텔레이오메논’(τετελειωμένον)은 ‘완성하다’, ‘수행하다’, ‘완전하게 하다’란 뜻의 ‘텔레이오오’(τελειόω)의 완료 수동태 이다.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이 단어가 인간의 성숙이나 완전히 자란 식물에 대하여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더 이상 자랄 수 없는데 까지 다 자랐다는 뜻한다. 식물도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자라는 것은 아니며, 사람도 성장기를 지나면 자라는 것이 아니라 퇴보의 길을 가게 되어 있다. 따라서 ‘온전케 되셨다’는 것은 그만큼 완벽함을 의미한다. 즉 일점일획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경우가 없이 완전한 순종과 복종의 삶으로 구원을 위한 행위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셨다는 뜻이다.


기독교에 제사장직을 두지 않고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은 이처럼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완전성 때문이란 사실이고, 그러므로 더 이상 속죄를 위한 제사나 제사장직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저자가 내리는 결론이다. 그럼에도 과거의 전통에 익숙해 있던 유대인들 가운데는 기독교로 개종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깨닫지 못함으로 변화된 구속사원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들이다. 교회의 전통을 벗어던지지 못하는 천주교의 행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개혁교회 안에도 진리보다 개혁자들의 주장에만 귀를 열고 그 범주 안에서만 맴돌고 있는 경우들이 허다하다. 물론 전통도 참고해야 하고, 앞선 신학자들의 연구도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최종적으로 주목해야 하고 결론지어 따라야 하는 것은 오직 성경임을 망각해서 안 된다. 왜냐하면 성경만이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cafe.daum.net/correctthe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