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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연구

히브리서 6:9 -12 주석 및 강해 모음

by 은총가득 2020. 9. 2.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성 경: [히6:9]


ꃨ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

저자는 4-8절에서 배도자들의 결국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하여 엄숙한 경고를 하였으나 본절에서 수신자들이 자신이 말한 그러한 배도자들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히 6:4-8>의 엄중한 경고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사랑하는 자들아'의 헬라어 '아가페토이'(*)는 본서에서 오직 본절에서만 사용된 표현으로 수신자들에 대한 저자의 애정어린 호칭이다.


ꃨ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

이보다 나은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 크레잇소나'(*)는 저자가 4-8절에서 언급한 배도자의 상태와 관련된 것으로 수신자들을 배도자와 비교할 때 훨씬 좋은 상태 즉 배도자들이 받는 저주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는 상태에 있음을 시사한다(Hewitt, Morris, Robertson).

 

한편 '구원에 가까운 것'의 헬라어 '에코메나 소테리아스'(*)에서 '에코메나'(*)는 '소유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에코'(*)의 현재 중간태 분사로 수신자들이 구원을 소유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수신자들은 배도할 가능성이 있었으나 결코 배도자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구원받은 것의 증거가 될 수 있는 선행의 열매가 있었다(10절).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구원받은 자임을 확신시키고 있다.


성 경: [히6:10]
ꃨ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킨다. 고대에는 '이름'이 그 이름을 소유한 자의 전인격을 대표하는 것이었다(Morris). 본서의 수신자들은 선행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 즉 그의 전인격을 나타내는 사랑으로 성도들을 계속적으로 섬겼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수신자들의 행위를 기억하신다. 저자는 하나님의 공의와 수신자들의 행위를 근거로 앞절에 언급된 확신을 소유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수신자들의 선행이 그들의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Hewitt). 그들의 선행은 자신들의 믿음이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 고백되어지는 진실한 것임을 나타내준다.

성 경: [히6: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

'간절히 원하는'의 헬라어 '에피뒤무멘'(*)은 '열렬히 바라다'라는 의미로 저자의 간절한 염원을 나타낸다.

 

저자는 '너희 각 사람' 즉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은 관심을 보이면서 그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깨어 부지런하여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부끄럼없는 삶 즉 믿음에서 난 선행을 행하며 하나님과 성도들을 섬기는 삶을 영위하기를 바라고 있다.


ꃨ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 '끝까지'의 헬라어 '아크리 텔루스'(*)는 3:14의 반복으로 종말론적인 면을 강조한다.

 

즉 이것은 '파루시아'(parousia, '그리스도의 재림')로 말미암아 그들의 소망이 완전히 실현(實現)될 때까지라는 의미이다(9:28, Lane).

 

한편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는 '온전한 소망을 지니다'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의 참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다(롬8:24,25).

본절에서 소망이 언급되어 있는 반면에 앞절에서는 '사랑' 그리고 12절에서는 믿음이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세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종종 함께 쓰여졌다(10:22-24;롬5:2-5;고전13:13;갈5:5,6;골1:4,5;살전1:3;5:8;벧전1:21,22). 이는 그리스도인들의 균형잡힌 신앙생활에 위의 세 요소가 필수불가결함을 암시한다.

성 경: [히6:12]


ꃨ 게으르지 아니하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히나 메 도드로이 게네스데'(*)에서 '게으르지'의 헬라어 '노드로이'(*)는 5:11의 '둔하므로'와 같은 단어로서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본절은 5:11의 내용을 기능적으로 보완하고 마무리하는 역할을 한다(Lane). 즉 그리스도 도에 대한 초보자들은 말씀을 듣기에 게으르고 둔하여서 해석하기 어려웠다(5:11).

그러나 저자는 수신자들에게 앞절에서 부지런하라고 권면하며 동시에 본절에서는 게으르지 아니하여 말씀을 잘 이해하고 계속 성장하여 나아가기를 권면한다(Hewitt).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이란 13절의 아브라함과 같은 자들을 말한다

(Bruce). 그런자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함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에 대해 오래참고 기다려 기업을 받은 자들이다(Lane, Grasser).

 

'기업으로 받는'이란 '확실히 소유하다'라는 의미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 즉 구원을 온전히 소유한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구약시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고 인내한 것을 예로 들어 수신자들에게 아브라함과 같이 주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믿고 인내하여 소유하는 자가 되기를 권면한다.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10 하나님이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Heb. 6:9-12 NKR)

 

성경의 수많은 구절 중에서 저를 참으로 위로하는 구절입니다.

앞에서 엄중한 경고를 발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그대로 대비가 되는 부분인데요, 이 부분을 읽기 전에 히브리서 6장 4절부터 8절까지를 마음을 다해서 읽어야 합니다. 앞 구절에서 끝나면 캄캄한 무거움에서 헤매겠지만, 이어지는 이 구절은 우리에게 밝음을 주십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타락하지 않고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다른 성도들을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헌신적인 사랑으로 섬기는 것을 통해 볼 수 있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지런하고 끝까지 인내해서 우리가 가진 소망을 끝까지 이루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죠.

어려번의 어려움이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견고하게 하고, 끝까지 인내하면서 결국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누릴 것을 소망합니다.

 

약속과 경고는 모두 신자들의 믿음을 끝까지 붙들도록 돕습니다. 앞에서 엄중한 경고였다면, 이부분은 확신을 나눕니다.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아가페토이) 라는 호칭은, 히브리서에서는 오직 여기에서만 등장합니다. 우리를 사랑한다고 불러주십니다. 사랑한다~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임을 확신하거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그 어떤 것보다도 구원에 속한 더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런데, 당장 원하는 것이 더 간절해 보입니다.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연결시켜서 하나님도 싫어지고, 하나님께 원망도 되고, 하나님과 거리를 두려고도 합니다. 그 원하는 것이 되지 않았으니까 다른 걸 기도해도 필요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확장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의 가장 좋은 것을 받은 자임을 상기시키면서 확신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으로 10절은 시작합니다.

10 (왜냐하면, 가르)하나님이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동료들에게 보여주는 수고와 사랑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현실에서의 이유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자기를 기쁘시게 하는 자들에게 합당한 상급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자들은 믿음에 따라 순종의 삶을 주변에 보여주는데요, 그것을 주님을 기억하신답니다. 공의로우시니까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는 주기도문의 한 구절이 생각이 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드러내는 순종의 삶,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더 큰 구원의 즐거움을 주실 것입니다.

 

자발적인 부지런함, 그런 행함으로 믿음의 확신은 더더욱 드러납니다.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은 자들은 그 행실로 구원받음을 증명한다는 의미입니다.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그렇게 신자들을 돌아봄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면서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 속에 거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그 사랑의 마음이 이웃으로 표현된다는 공식을 알 수 있게 하십니다. 이 나타냄은 마지막 소망이 성취될 때까지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둔하고, 게으를 때, 낙심하고 주저앉아 있을 때 이것이 길어지면 타락할 위험에 처해질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면서, 12절에서,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믿음과 오래참음은 우리만 겪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참아본 적이 있었던가요? 나의 인내의 깊이가 이렇게 낮다는 것을 매번 깨달으면서도 우리는 인내의 깊이를 더 깊게 못하고 있기도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오래참고 인내할 수 있고, 인내하면서 더더욱 우리의 믿음은 드러납니다. 먼저 걸어간 믿음의 선배들을 따르면서, 신앙의 길을 걸어갑시다<산을 넘는자>

 

 

제목 : 약속을 기업으로 얻은 자

말씀 : 히6:9~12

 

1.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조화

 

본문의 말씀에서는 말씀하신 내용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3장부터 오늘 말씀 바로 앞부분까지는 안타까움과 답답함을 토로하면서 경고의 말씀이 주어져 있다.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하라.(3:12)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3:14) 혹 너희중에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할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노라.(4:1)

 

너희가 벌써 선생이 되었어야 했을 터인데 아직도 젖이나 먹고 있구나.(5:12) 믿음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데로 나아가라.(6:1)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되고,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하면 다시 새롭게 할 수 없다.(6:4~6) 등 이미 세월이 제법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믿음가운데 있지 못하고 심지어는 배교의 위험마져 있는 유대인 크리스찬들에게 경각심을 주고 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나는 너희들이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한다. 하나님께서 너희의 행위와 성도들을 섬긴 것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너희들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을 본받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소망을 주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좀 앞뒤가 잘 연결이 안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앞에서는 그들이 너무나 연약하여 배교의 위험성이 있음을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는 반면 여기서는 그들이 구원에 속한 것을 확신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씀일까? 분명 그들 중에 연약한 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배교의 위험성이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확실한 믿음 속에 자기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였다. 물론 믿음이 연약하여 아직 부족한 사람도 많았지만 기본적인 믿음은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결코 구원에서 떨어져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좀 연약한 자들은 좀더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사람들을 본받아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즉 경고의 말씀을 통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신앙의 성숙을 꾀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록 부족하고 허물 많아도 작은 믿음 하나보시고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위로와 소망속에 풍성한 삶을 살게 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 하나님의 엄위로우심을 기억하며 그 앞에 엎드리고 거룩하고 진실하게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늘 부족하고 연약함에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인도하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해야 한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에 끝까지 구원을 얻게 됨을 감사하며, 그런 놀라운 은혜를 받았기에 더욱 주님 뜻대로 살아가야 한다. 이 두 축 즉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감사와 기쁨이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올바르고 건전하고 풍성한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너무 하나님의 공의만 강조하다보면 용기를 잃게 되고, 의기소침해지고,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누리기 어렵다. 반면 하나님의 공의는 무시하고 사랑만을 강조하다보면 방자해 지기 쉽다. 영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해이해지고, 죄에 빠지기 쉽고, 무감해지고, 그래서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멀어 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라는 두 축을 깊이 묵상하고 한편으로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말씀대로 살아가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믿음 하나 보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셔서 영원한 천국에 이르게 하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며 위로와 소망가운데 살아가자.

 

2.구원에 속했음을 기억하라.

 

히6: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할 수 없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하였으나 그러나 너희들은 그렇지 않은 줄 안다. 너희들에게 구원에 속한 것이 있는 줄 안다. 물론 소수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럴 것이니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다. 분명히 100%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록 좀 부족해도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구원을 받은 것에 만족해서는 안된다. 뒤에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부지런히 주님의 뜻대로 삶으로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야 하고,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의 삶을 본받아야 한다. 그러나 먼저 우리는 구원에 속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며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정말 힘이 있고, 위로가 넘치고 감사가 넘치며 생명력있는 삶을 살며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에도 능동적으로 힘있게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이 사실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약속안에서 우리는 구원의 은총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명심하여 좀 부족하고 어리석더라도 변함없이 우리를 살리시고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더욱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아가자.

 

3.하나님의 백성됨의 증거

 

9절에서는 히브리서 수신자들의 대부분이 구원에 속해 있음을 확신한다고 하였다. 그러면 그들이 그렇게 구원에 속해 있다는 증거는 무엇일까? 물론 첫 번째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 하였으니 믿는 자는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 그러면 믿는 자라는 표징은 무엇인가? 물론 먼저 신앙의 고백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심판 등 예수님께 대한 모든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한다. 그러면 입으로 시인한 것으로 끝인가? 그렇지 않다. 오늘 10절을 보라.

 

히6:10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너희의 행위를 알고 있다.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난 사랑으로 성도를 섬긴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이 너희들이 구원에 속해 있는 자라는 확실한 증거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들 중의 대부분은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그들은 믿음의 행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성도들을 사랑했다.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도 알고 계시고, 히브리서 기자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것을 확신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믿으면 구원받는다. 어떤 행위로도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구원이 행위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행위없는 믿음은 진정성이 결여된 것이다. 믿음으로 주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이제는 그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행위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이며 성경에 나타난 분명한 말씀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약2:26 절에서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한편으로는 나같은 죄인 구원해 주신 그 놀라운 은혜, 여전히 부족하고 미련한데도 인도해 주시는 그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며 그런 구원과 은혜를 받은 자에 걸맞은 삶의 모습으로 주께 영광을 돌려드리고 주님의 생명의 풍성한 은총을 누리며 주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삶을 살아가자.

 

4.구원받은 자의 삶

 

히6:11,12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믿음의 사람으로서의 삶의 모습이 있어야 하겠기에 11,12절에서는 그들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피력하고 있다. 그 소망은 무엇인가? 1)부지런하여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는 것. 2)부지런하고 믿음과 인내로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을 본받는 것이라고 하였다.

 

사실 이 말씀은 같은 말씀이라해도 과언은 아니다.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라. 게으르지 않고 믿음과 오래참음으로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으라. 결국 같은 말씀이 아닌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소망의 풍성함이 있다. 그것을 누리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믿음위에 굳게서야 한다. 오래 참아야 한다. 믿음의 선진들이 이것을 알고 그렇게 하였다. 우리는 그 믿음의 선진들의 위대한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안에서 소망의 풍성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어디에 소망의 풍성함이 있는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위하여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예비해두셨다. 이 영원한 영광의 나라는 세상의 것들과는 비교가 불가하다. 완전하고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평강과 위로와 소망과 사랑만이 가득하다. 어둠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다. 그곳은 오직 믿음으로 주어진다. 그러므로 일차적으로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졌으면 그 나라를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

 

그러러면 인내가 필요하다. 부지런해야 한다. 환난과 도전과 핍박과 유혹을 이겨야 한다. 마귀사탄의 방해공작이 온갖 방법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나 하나님나라를 위해서나 열심을 내야 한다. 그러려면 부지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기억하며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주님과 동행하자. 비록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주님의 은혜로 반드시 그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받아 누리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과 동행하자. 주님의 사람이라면 마땅히 주님의 사람으로서의 삶의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며 믿음의 아름다운 행실을 통하여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향기를 발하자.

 

그러려면 부지런하고 인내하고 참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며 혹시 시련이 있더라도 믿음으로 주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이겨내자.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의 나라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려면 부지런해야 함을 기억하며 무사안일과 나태에 빠지지 말고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묵상하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세상에서 거룩하고 진실하고 열심히 살아감으로 더욱 주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주님의 온총을 온전히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자.

 

 

본문 : 히 6 : 9 ~ 12

제목 :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히브리서 기자는 6장을 도전의 말로 시작합니다. 모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초보적인 신앙에서 떠나 완전한데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서 저자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신앙에서 성숙하게 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4~6절은 성도들이 왜 성숙을 추구해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받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을 체험하며,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경험하였다고 하더라도 타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6절은 그와같은 경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만일 계속해서 성숙하지 못하여 타락한 사람은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고 모욕할 수 있고, 그와 같은 상태에서는 회개하여 새롭게 될 수 없다고 경고합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가 그리스도인들도 타락할 수 있음을 강조하는 이유가 그들로 불안해 하고, 두려워하도록 하는데 있지 않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히려 본문은 성도들로 하여금 성숙하도록,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하는, 성숙을 향한 도전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8절에서 성도들로 하여금 타락할 수 있음을 경고하였지만, 사실은 성도들의 구원을 확신합니다. “사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9절) 그는 성도들로 하여금 극단적인 경고의 말을 통해서 경각심을 불러일으킴으로, 삶의 현장에서 구원의 확실함을 더욱 확실히 하고자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더 좋은 것들, 곧 구원에 속한 것들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첫째,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성도들의 구원을 확실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로부터 구원에 수반되는 행동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사랑으로 성도를 섬긴 것과, 지금도 변함없이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과 같은 열매 맺음을 통해 구원을 확신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열매맺음은 구원에 이르는 참된 믿음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보다 근본적인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불의한 분이 아니시기에 성도들의 사랑과 수고를 잊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열매맺음을 잊지 않으시고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히브리서 기자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사랑으로 성도를 섬기면서 구원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면서 살라고 권면합니다. 과연 11~12절에서 강조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라.

이는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열심이 아니라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부지런함을 계속해서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라.

끝까지 일관되게 부지런하게 행동하므로 소망으로 가득 채우라는 것입니다. 바울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고,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해 동일하게 기도했던 것입니다.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

 

12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지금껏 자신이 권면한 대로 행한다면 게으르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동일한 부지런함으로 끝까지 열심을 내면 그 사람은 게으르지 않고, 소망하는 것을 성취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과 인내함으로 주님께서 우리 앞에 열어 놓으신 길을 걸어감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상속받으라고 강조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보이지 않는 중에도 믿음으로 그 길을 걸어갔고, 그 결과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들도 끝까지 믿음과 인내의 삶을 살아서 하나님의 약속을 상속받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간절하게 원하시는 것 (히 6:9-1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부모는 자녀에게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제자들에게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목사는 성도들에게 소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우리 성도들에게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마음을 대신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1. 부지런함을 원하십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부지런함입니다. 본문에서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게으른 것을 싫어하십니다.
잠 19:15절에 보면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해태(懈怠)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게으름이 사람을 깊이 잠들게 하고 게으른 사람은 가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깊이 잠드는 것도 문제입니다.
새벽기도 나와야 할 시간에 너무 깊이 잠들면 못 일어납니다. 일터에 갈 사람이 게으름 때문에 깊이 잠들어버리면 안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깊이 잠든다는 이 이야기는 단지 육체적인 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깊이 잠들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잠든다는 것은 신앙적으로 게으름을 의미합니다. 톨스토이는 게으른 자의 머릿속은 악마가 살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마귀가 인간의 게으름을 이용하여 사람을 미혹한다는 것입니다. 옛말에 “부지런한 물레방아는 얼 새가 없다” 는 말이 있습니다.
물레방아는 부지런하게 정신없이 돌아가면 아무리 추워도 얼어붙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부지런히 주의 일을 하십시오. 사단이 틈탈 기회를 주지 마십시오. 할 일없이 빈둥거리면 불평만 생깁니다. 원망만 생깁니다. 정말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들은 불평하고 원망할 틈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부지런한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잠언 22장 29절에 보면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런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고 했고 전도서 10장 18절에는 '게으른즉 서까래가 퇴락하고 손이 풀어진 즉 집이 새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잠언 10장 4절에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고 말했습니다.


또 있습니다.
잠언 6장 6절에는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고 말했습니다.


좀더 자자, 자는 문화, 오늘 먹고 자고 놀고 이런 문화가 이 사회에 독버섯처럼 번져나가고 있습니다. 대학을 나와도 편하고 화려한 직업이 아니면 아예 일을 안 하려고 합니다. 3D 현상이라는 말이 왜 나왔습니까?
사람들의 게으름에서 나온 말입니다.
직장이 없어서 오늘 놀고먹을 지라도 힘들고 위험하고 더러운 곳에서는 일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모두 깨긋하고 편하고 좋은 일터만 있습니까?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들의 마음에 게으름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게으름 병 때문에 생겨지는 현상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도박문화입니다.

얼마 전 어느 신문에서 조사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우리나라 성인 남자의 10% 정도가 도박에 깊이 빠져있는 중독자라고 합니다. 강원도 정선에는 이미 법적으로 허가받은 도박장이 있습니다.
2002년 6,17-9,16일까지 3달 동안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그곳 VIP 룸에서 도박한 사람이 3개월동안 180명입니다. 그들은 한 사람당 평균 14억 5천만 원을 판돈으로 날렸다고 합니다.
많이 잃은 사람은 285억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석 달 동안 6백 시간을 도박장에서 보낸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도박 중독증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요즘은 도박이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지고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경마도 도박이고 경륜도 도박이고 소싸움도 도박판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이런 도박문화가 어디에서 옵니까?
게으름에서 오는 것입니다. 일 안하고 땀 안 흘리고 한탕 잡으려는 게으름에 욕심이 더해진 현상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살려고 하지는 않고 어디 가서 왕창 돈벌어 가지고 크게 이름 떨치고 떵떵거리고 좋은 차타고 행복하게 살려는 욕심이 도박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둘째는 미신 풍조입니다.

게으름 병이 우리나라에 가져다 준 현상 중에 두 번째는 미신 풍조입니다.
지난 12월 4일 수능고사를 앞두고 안산의 한 고교에서 학부모와 학생들이 수능 고득점 기원 고사를 지려고 했습니다. 학부모 10여명과 교사 10여명 그리고 3학년 12개 반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돼지 머리를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려고 하자 그 학교 교장 선생님이 비교육적이며 미신적이라는 이유로 고사를 지내지 못하게 했는데 학부모들이 그것을 문제 삼아 학교장에게 공개사과를 요구하였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미신 문화의 단면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휴대전화와 인터넷까지 이용해 역술산업이 호황을 누리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 언론 위원회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2001년 12,4-26일까지 23일간 국내 7개 일간지의 무속광고 및 운수풀이 등 미신조장 내용을 모니터한 결과 이 기간에 무려 239회나 게재 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광고의 내용은 '사주' '팔자' '예언' '운수' '꿈 풀이' '풍수지리' '궁합' '운명' 등의 이름으로 점술인들의 사진과 함께 경쟁하듯 게재되고 있으며 인간의 모든 문제를 자신들이 단번에 다 해결할 것처럼 광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무당 점쟁이를 사람취급 안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온갖 무당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신문과 월간 잡지 광고 면 마다 “생로병사 인생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그녀” “인생의 풍파를 아는 참다운 역술” “신통력이란 과연 이런 것이다” “귀신이 와도 놀랄만한 귀신” 이런 광고 문안이 온통 꽉 들어차있습니다.
왜 이렇게 이 나라가 미신 문화로 꽉 차게 되었습니까?
일은 하지 않고 앉아서 자기 팔자를 알아보고 쉽게 팔자를 고쳐보겠다는 욕심 때문입니다. 열심히 일해야 할 젊은 사람들이 팔자타령만 하고 알팍한 속임수로 팔자를 고치려고 하는 허망한 욕심이 미신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미래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 아시는 것입니다.
팔자가 나쁜 사람도 예수 잘 믿고 부지런히 살면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풍수지리에 의해 묘지를 잘 써야 복 받는 다는 생각, 집터를 잘 잡아야 복 받는다는 생각, 다 미신 문화입니다. 그리고 이름 잘 지어야 잘 산다는 생각도 미신 문화입니다. 이런 것들 버려야 합니다.
사람의 행, 불행은 묘지와 아무 관계없습니다. 이름과도 아무 관계없습니다. 성도들은 신앙적으로 뜻이 있고 부르기 쉬운 이름 지어서 부르면 됩니다. 부모님 돌아가시면 형편이 허락되는 적당한 곳에 무덤 만들면 됩니다.

미신이 창궐하게 되는 이유 역시 게으름 때문입니다. 부지런해야 복을 받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뛰는 것보다 걷는 것이, 걷는 것 보다 서는 것이 편하다. 서는 것보다 앉아 있는 것이,앉아 있는 것보다 누워 있는 것이 편하며 누워 있는 것보다 잠자는 것이 편하다.그러나 그 이상 편하려면 죽어야 한다”
결국 게으름은 죽음과 같다는 것입니다. 잠언 24:33-34절에 보면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리라" 라고 말씀했습니다. 영적으로 게을러지지 않도록 깨어있어 경성합시다.



2.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본문 21절에 보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끝까지 라는 헬라어 “아크리 텔레스”는 예수님의 재림 때 까지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 때 까지 소망을 잃으면 안 됩니다.
아무런 약속이나 보장도 없는 막연한 것을 바라는 것은 소원입니다. 즉 인간적인 자기 욕망이나 자기 기대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소망은 약속된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미래의 약속에 대한 것이므로 믿음을 동반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막연한 소원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믿는 사람들은 약속된 것을 믿으며 소망 중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소망에 풍성하기를 축복합니다. 막연한 기대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하여 소원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오실 때 까지 소망이 풍성해지기를 축복합니다. 소망이 있는 자는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고후 4:8-9절에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소망을 잃지 않고 사는 사람들을 축복하십니다.

 


‘존 방스’ 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나는 캄캄한 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새벽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태풍을 겁내지 않는다. 새벽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삶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진실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저는 하나 더 덧붙이고 싶습니다.
나는 결코 절망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소망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계신 이상 우리는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1827년 페스탈로치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동상을 세웠습니다. 동상의 모습은 무릎을 꿇은 어린이가 페스탈로치의 얼굴을 존경하듯 우러러 바라보는 형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제막식 때 친지들이 동상이 잘못 됐다고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이유는 페스탈로치의 신앙이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동상은 다시 세워졌습니다. 이번엔 무릎을 꿇은 어린이가 스승의 얼굴이 아닌 하나님께 대한 소망의 뜻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인류의 영원한 스승이라고 존경받는 페스탈로치의 소망은 하나님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로마서 15:13절에서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라고 하였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소망의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을 넘치게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느 의과대학에서 교수가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한 부부가 있는데 남편은 매독에 걸려있고 아내는 심한 폐결핵에 걸려 있습니다. 이 가정에는 아이가 넷 있는데 한 아이는 몇일 전에 병으로 죽었고 남은 세 아이들도 결핵으로 누워있어 살아날 가망이 거의 없습니다. 이 심한 폐결핵에 걸려있는 부인이 현재 임신 중인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랬더니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 답변했습니다.


"낙태수술을 해야 합니다"
그 때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방금 자네는 베토벤을 죽였네"
최악의 불행한 환경 가운데서 다섯 번 째로 아이로 태어난 사람이 그 위대한 음악의 성자 베토벤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날 의료적 판단으로는 낙태해야 한다고 결정 내릴지 모를 그 아이가 음악계의 거성이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부족하고 미련하다 할찌라도 하나님이 앞으로 어떻게 쓰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소망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붙들고 용기를 내어야 합니다. 주님 오실 때 까지 소망이 풍성한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은 간절히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3. 인내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인내의 믿음을 갖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본문 히 6:12절에서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 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간절하게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오래 참는 믿음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히 11:6절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상은 미래적인 것입니다. 상 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은 인내의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힘들고 어려워도 머지 않는 장래에 주님께서 반드시 상 주실 것을 믿는 것은 바로 인내의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천재 바올리니스트 ‘파가니니’(Niccolo Paganini 1782-1840) 가 청중들 앞에서 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주를 하는 도중 바이올린 줄 하나가 끊어졌습니다. 그 순간 청중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청중들은 그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숨을 죽여 가며 주시하고 있는데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남은 세 줄로 연주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다가 또 한 줄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파가니니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두 줄을 가지고 연주를 계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또 세 번째 줄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끊어졌습니다.
그때 그는 잠시 동안 연주를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바이올린을 한 손으로 높이 들고는 "줄 하나와 파가니니"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다시 노련한 기술과 뛰어난 솜씨로 마지막 남은 한 줄을 이용하여 곡을 완전하게 연주하였습니다. 그 순간 청중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때로는 이와 같이 줄이 계속 끊어질 때가 있습니다. 소망의 줄이 끊어지고 건강의 줄도 끊어지고, 물질의 줄도 끊어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줄만 끊어지지 않으면 됩니다. 오직 믿음의 줄을 붙들고 인내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인내의 믿음을 가집시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말세를 사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첫째가 부지런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셋째는 인내의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범사에 부지런한 성도가 됩시다. 주님오실 때까지 소망의 풍성함을 이룹시다. 그리고 인내의 믿음을 가지시고 주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고 하늘의 상급과 이땅의 축복을 동시에 누리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힘쓸 것 열가지

성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힘쓸 것 열가지

 

1.다른 사람들을 섬김(막9:37)

2.기도(요14;13-14)

3.이웃에 대한 사랑과 용서(요15:12)

4.복음 전파(행1:8)

5.사탄을 물리침(행3:6)

6.봉사(고전4:1-2)

7.교회의 덕을 세움(고전14:5)

8.하나님께 대한 감사(엡5:20)

9.범사의 언행과 일(골3:170

10.찬미의 제사(히13:15)

 

<예화>


게으른 자의 세 가지 소원
큰 빚을 지고서도 게으름만 피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보다 못해 채권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돈을 갚을 생각이 있긴 한 거요?" 그러자 "있고말고요. 당신의 돈을 갚기 위해 세 가지 방법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 세 가지가 다 쉽지 않아서 답답해하고 있던 참입니다."


채권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대체 그 세 가지가 뭐요?”
“저… 하나는 당신이 갑자기 죽어서 돈을 받을 수 없게 되면 좋겠고, 둘째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차용증서가 분실되든가 불에 타든가 했으면 하는 것이고, 셋째는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많은 돈을 주웠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운이 없는지 그 세 가지 중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는군요."
채권자는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게으른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 하시겠습니까? 사람인들 기뻐하겠습니까?

 


분수를 모르는 소원
결혼 30주년을 맞이한 60세 동갑 부부가 있었습니다.
결혼기념일에 천사가 나타나서 소원을 한 가지씩 들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아내가 먼저 "그동안 워낙 가난하게 살다보니 여행을 못했는데 세계일주 여행을 한번 해보았으면 좋겠네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천사가 그 자리에서 항공권과 여행경비를 건네주었습니다.


소원을 말하자마자 이루어지는 것을 지켜본 남편이 아내의 눈치를 슬슬 살피더니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나보다 서른 살 젊은 여자와 살았으면 좋겠네요." 그 말에 천사가 정말이냐고 물었습니다.
남편은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남편을 향해 날개를 한번 펴서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순간 예쁜 새댁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남편이 폭삭 늙어 90세의 노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분수를 모르는 사람의 소원은 허망한 욕심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아무리 좋은 소원이라도 자기 분수에 맞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소원만이 참된 소원입니다. 분수를 모르는 소원,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소원은 욕심입니다. <가져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