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초보적 단계에서 정체되어 있는 유대인들의 신앙상태를 지적한 저자는 이제 본문에 들어와 유대교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가를 밝혀주고 있다. 문맥적 의미는 다양한 측면에서 하늘의 신령한 은사를 체험한 자가 타락하게 되면 다시는 회개케 할 수 없다는 경고의 메시지다. 이러한 본문의 기사는 문맥적으로는 8절까지가 한 단락으로서 그 내용은 두 가지 실례와 하나의 비유로 구분된다. 그중 여기서는 4절부터 6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하나의 실례를 중심으로 그 의미와 교훈을 생각해 본다.
그리스도와 기독교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유대교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먼저 실례를 든 내용은 타락한 천사이다. 성경 주석가들 가운데 이 부분에 대하여 타락한 천사의 예로 해석한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대부분의 경우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가 배교한 내용으로 해석한다.
헨드릭슨 주석에서 히브리서를 주석한 죤 브라운은 이렇게 본문을 설명했다.
“그들은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 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장차 올 세상의 능력을 맛본 자들이다. 그들은 그 특권을 누렸으며 종교적으로 상당히 깊은 경지에 이르렀던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배교자, 즉 타락한 자들이다(헨드릭슨, 히브리서, p. 340).”
칼빈은 이렇게 주석하였다,
“이 문제의 중심은 ‘타락한 자들’이라는 문구 안에 있다. 누구든지 이 구절들의 힘을 이해하는 자는 모든 어려움들로부터 쉽게 탈출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이중의 타락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하나는 특수한 타락이고 또 하나는 일반적인 타락이다. 그러나 특수한 방법으로 범죄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격을 박탈당한다. 그러므로 모든 죄악들은 그와 같은 타락에서 말미암는다. 그러나 사도는 여기서 도적질, 또는 거짓증거, 또는 살인, 또는 술취함이나 간음 등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즉 죄인이 다만 하나님께 부분적으로 범죄한 타락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그의 은혜를 완전히 저버린 타락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다. ······ 즉 그들은 전에 자신들이 받아들였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떠난 배교자들이다(칼빈, 신약성경주석(10), p. 133, 134). 칼빈은 성도의 타락을 일반적인 타락과 특수한 타락으로 구분하고 본문에서 지적된 자들은 그리스도와 진리를 배신한 특수한 타락으로 규정하였다.
그랜드종합주석에서는 이렇게 설명을 하였다.
“본 단락에서는 은혜가운데 들어온 자가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면 오히려 뒤로 후퇴할 가능성, 곧 배교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신앙의 미성숙의 단계에 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경고해 주는 동시에(4-6a), 만일 기독교에 몸담았던 자가 배교하게 되면 그리스도를 두 번 죽이는 죄를 저지르는 것이므로(6b)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다시는 회복할 기회가 없는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경고함으로써(7, 8절) 독자로 하여금 배교에 빠지지 말고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결심하게 하는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옥스퍼드원어성서대전에서는 이러한 해석들에 대하여 이렇게 의문을 제기하였다.
“한 번 믿은 후 타락한 자들은 다시금 새롭게 하여 회개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이 증거는 칼빈주의 5대 원리 가운데 하나인 ‘성도의 견인’ 교리와 정면으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하나님에 의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고 예정된 자들(엡 1:4, 5)도 타락하여 멸망에 이를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면 나아가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그 분이 미리 택하시고 예정하신 이들은 이미 죄에 대해서 죽은 자들이며(롬 6:2) 결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을 성경은 반복하여 가르친다(요 6:37, 39; 10:27-30; 15:16; 요일 2:10; 5:18; 롬 8:29-39).
”
그러기에 원어성서대전에서는 이러한 설명으로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하였다.
“우리는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예수께서 들려주신 ‘파종의 비유’(마 13:1-23)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복음에 대한 네 종류의 반응이 나오는데, ‘길가’로 표현된 반응은 아예 그리스도의 진리에 무관심한 자들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본절의 논의와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돌짝밭’과 ‘가시덤불’로 표현된 반응이 본절의 논의와 관련하여 유의할 대상인데,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복음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아들였고 구원 얻은 증거도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외견상으로 그들은 확실히 구원을 얻은 것 같았다. 하지만 하나는 시험과 환난이 올 때에 믿음을 버렸고, 또 하나는 세상적인 것들에 연연해하는 바람에 믿음을 등한시 하고 말았다. 본서의 저자가 말하는 ‘한 번 비췸을 얻고···’ 에 포함되는 사람들은 바로 이들인 것이다. 결국 교회 안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는데(마 13:24-30), 알곡처럼 보이는 가라지들이 적지 않음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원어성서대전이 견인교리나 창세전 선택,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이란 측면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한 것까지는 매우 적절하였다. 그러나 본문에 대한 해석에는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언급된 다양한 은혜의 체험은 가라지, 즉 불택자들이 표면적으로나 일시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정도를 가리킨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록된 말씀에서 보면 이는 가라지와 같은 대상이나 진정한 성도라 하더라도 육신을 가진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은사의 의미를 훨씬 초월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모두 5가지다.
1. 비췸의 은사
저자는 4절 서두에서 ‘한 번 비췸을 얻고’란 표현을 하였다. 여기서 ‘비췸’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포티스덴타스’(φωτισθέντας)다. 이는 ‘비추다’, ‘조명하다’란 뜻을 가진 ‘포티조’(φωτίζω)의 과거 수동태 복수형으로, ‘조명을 받은 자들’이란 의미가 된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모두 11회 사용되었다. 요한복음 1장 9절에서는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할 때,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으로 번역되었다. 에베소서 1장 18절에서는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라고 할 때 ‘밝히사’로 번역되었다. 계시록 21장 23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고 할 때 ‘비치고’로 번역되었으며, 본서 10장 32절에서는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라고 할 때 ‘빛’으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하여 카리스종합주석에서는 “이 말은 복음의 진리를 믿고 받아들인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합당하다”라고 주석을 하였다.
아무튼 ‘비췸을 얻었다’는 문자적인 의미는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계시는 신령한 세계에 대하여 명료하게 깨달아 알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 대상에 대하여 교회 안에 들어와 진리를 믿고 받아들인 경우로 적용시켜 해석하기란 물의(物議)가 있다. 왜냐하면 ‘비췸’이란 단어가 단순히 우리 인간들이 부분적으로 진리를 깨닫거나 경험한 정도를 가리키는 의미를 훨씬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 해석해선 안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원어성서대전에서 지적하였듯이 그리되면 성경이 표방하는 견인교리와 크게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구원을 받았던 자들도 다시 구원을 상실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되어 창세전 선택의 원리나 대표언약, 그리스도의 대속의 효력 역시도 완전히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인간의 행위가 구원의 절대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2. 하늘의 은사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는 문제와 관련하여 그랜드종합주석에서는 “이러한 은사를 표면적으로만 맛본 것처럼 보였을 뿐 진실한 성도들과 같은 진정한 체험은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타락할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부분 역시 그렇게 해석할 수 없는 것은 사용한 단어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라고 할 때, ‘맛보고’는 ‘맛보다’, ‘참가하다’, ‘경험하다’란 뜻을 가진 ‘규오마이’(γεúομαι)의 과거 동사 복수형인 ‘규사메누스’(γευσαμένους)다. 이 단어가 본서 2장 9절에서는 주님께서 죽음의 고난을 맛보았다는 의미로 쓰였고, 베드로전서 2장 3절에서는 성도가 주님의 인자하심을 체험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즉 성경에서 이 단어가 나타내는 바는 실제적으로 어떤 일에 참여하고 경험하였다는 뜻을 나타낸다.
특히 그가 그렇게 경험한 것이 하늘의 은사라고 하였는데 이는 성도들이 경험할 수 있는 신령한 은사와는 그 격이 다르다. 여기서의 ‘하늘’로 번역된 ‘에푸라니오우’(έπουρανίου)는 ‘천체’, 나 ‘하늘 위’를 뜻하는 ‘에푸라니오스’(έπουράνιος)의 소유격 형용사이다. 따라서 하늘의 은사를 맛보았다는 표현은 신령한 하늘의 세계에 대하여 직접 참여하고 경험하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하나님께서 계신 천상에 세계에 대하여 직접 체험한 것을 가리킨 표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성도가 교회에서 체험한 신령한 은사에 대한 표현으로 해석해선 안 된다. 단어가 가지고 있는 뜻이 실제적인 하늘 경험과 참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성령에 동참
세 번째 이들이 받은 은혜는 성령과 함께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란 의미에 대하여 원어성서대전에서는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것과 성령의 인도를 따르는 것은 현저히 다르다”는 설명으로 성령이 베푸는 이적이나 기사를 체험하였지만 실제 성령을 따라 순종의 삶은 살지 않은 것으로 해석을 하였다. 그러나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란 말은 단순히 성령이 베푸시는 은사를 체험한 정도를 말씀하심이 아니다. 여기서 ‘참예한바’로 번역된 ‘메토쿠스’(μετόχους)는 ‘함께 나누다’, ‘동참자’, ‘동업자’, ‘참예하다’, ‘교제하다’ 등으로 쓰이는 단어이다. 따라서 성령에 참예한바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성령이 베푸는 은사를 체험한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과 직접 교제하며 성령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사역에 함께하였다는 뜻을 나타낸다. 따라서 이 부분 역시도 성도들에게 적용시켜 해석할 수 없다. 육신을 가진 성도가 성령과 직접 교제하며 하나님의 역사에 성령과 같이 참여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4.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고
이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인격적이면서도 실제적으로 그 말씀의 실체에 동참 또는 경험하였다는 뜻을 가리킨다. 특히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한 말씀’이란 표현이다. ‘선한’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칼론’(καλὸν)이다. 이는 미학적으로는 ‘아름답다’는 뜻을, 그리고 질적으로는 ‘선하다’는 뜻을, 또 용도 면에서는 ‘유용하다’라는 뜻을 나타내는 ‘칼로스’(καλὸς)의 목적격 형용사다. 70인 역에서 칼로스는 히브리어 ‘토브’(מוב)의 역어로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이는 윤리적인 측면에서의 ‘선’이란 개념이 아니라 ‘즐거운’, ‘유쾌한’, ‘유익함’이란 개념의 선함을 가리킨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한 말씀을 맛보았다는 것은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쁨으로 동참하며 체험했다는 것이 되고, 그 말씀으로 인한 유익함도 실제적으로 경험하였다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 부분 역시 표면적으로 믿은 상태나 말씀을 들은 사람이 일시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어떤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경우를 훨씬 초월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할 수는 있으나 여기서 언급된 표현처럼 선함을 맛보았다고 할 수는 없다. 선함을 맛보았다는 것은 말씀이 가지고 있는 모든 효력에 대하여 직접 경험하고 체험하였음을 시사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부분적으로 하나님 말씀에 대한 능력을 체험하고 경험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육신을 가지고 있고, 실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 이전까지 말씀이 가리키는 궁극적인 부분은 여전히 안개 속과 같은 미지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부분도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정도의 은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5.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여기서의 ‘내세’로 번역된 ‘멜론토스 아이오노스’(μέλλοντος αἰωνος)는 현 시대와 대비되는 ‘오는 시대’, 혹은 ’장차 임하게 되는 세상‘이란 뜻이다. 그리고 능력으로 번역된 ‘뒤나메이스’(δυνάμεις)는, ‘강한 힘’을 나타내는 뜻과 함께 ‘풍부하다’란 뜻도 지니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하여 그랜드종합주석에서는 “성도는 비록 현재 이 세상에서 살고 있으나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그 같은 영생을 보장받고 있는 자들이다(롬 6:17-23).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있는 자라고 일컬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부분역시 단순히 성도들이 믿음 안에서 갖게 되는 내세에 소망이나 확신을 가리킨 표현은 아니다. 그러한 의미를 훨씬 초월하여 장차 성도들이 이르게 될 그 영원한 세상의 풍성함과 그 능력에 대하여 실제적으로 경험하고 참여한 사실에 대해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더더욱 우리 성도들이 지상에서 맛 볼 수 있는 영역일 수 없다. 바울이 삼층 천에 올라가 그 세계를 바라보고 “가히 이를 수 없는 말”이라 표현한 바 있다. 그러나 그가 바라본 하늘의 세계 역시 지극히 부분적인 것에 불과한 것일 뿐이고, 더더욱 그 자체를 맛보았다고 표현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맛보았다는 단어의 의미가 ‘영양분을 섭취하다’, ‘먹다’, ‘경험하다’라는 뜻으로 실제적인 체험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세는 결코 육신을 가진 자가 체험하거나 경험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특히 성도들에게 궁극적으로 주어질 내세는 부활 이후에 주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표현된 또 다른 세계임을 밝혀주고 있다. 그러므로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는 것은 도저히 육신을 갖고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 적용시켜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처럼 여기서 언급된 다섯 가지 실례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경함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때문에 이는 타락한 천사들이 타락하기 이전 천상에서 하나님을 보좌하고 있었던 때를 가리킨 것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본문의 이 구절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창세전 선택의 원리나 견인 교리에 대하여 반박 자료의 근거로 삼기위해 언제나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시키는 성구이다. 그러나 저자가 여기서 밝히고자 함은 개인의 구원과 관련한 교훈을 주고자 함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기독교의 우월성, 특히 유대교의 실상을 밝히기 위함에 그 목적이 있다. 즉 유대교로 돌아가는 유대인 성도들에게 그 유대교는 타락한 천사가 하나님께로부터 버려짐을 당하였듯이 유대교 역시 그러함을 증명하기 위해 진술하고 있는 내용이다.
본래 천사들의 거주지는 천상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과 그 세계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확연하게 잘 알 것이기에 비췸을 입었다고 표현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영적 존재였기에 성령에 참예할 수도,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중 일부가 타락하여 하늘에서 쫓겨남을 당하였고, 그들이 이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것이며, 그러기에 이들이 대하여 6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인자들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목 박아 죽인 세력의 배후에 바로 사단 마귀가 있었기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것들이 타락한 이후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는 말씀에서도 분명하다.
성도들의 죄는 이미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모두 속죄함을 받았고, 따라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 또한 믿음에 시험이 들어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났다 하더라도 하나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다시 회개시키시어 구원에 이르게 하여 주실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구약에서의 고멜의 예나 신약에서의 탕자의 비유에서도 명명백백하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는 말씀에서 보면 한 번이 아니라 백 번, 천 번이라도 주님은 우리가 회개하면 받아주실 하나님이심이 틀림없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한 번 타락하게 되면 회개케 할 수 없다고 하셨다. 따라서 이는 성도들을 가리킨 말씀으로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다. 특히 타락한 자들은 다시 회개케 할 수 없다는 말이 앞으로 그럴 것이란 뜻이 아니고 과거 시제로 되어 있다. 즉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 있는 것은 과거에 있었던 어떤 사례를 비유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오직 타락한 천사를 가리킨 말씀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실제 그것들은 한 번 하나님을 배교하므로 영원히 하늘에서 추방을 당하였고 다시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음도 이것이 타락한 천사들을 가리킨 말씀임을 반증해 준다.
그렇다면 왜 본서의 저자가 여기서 타락한 천사의 사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을 배신한 결과의 참담함을 밝히기 위함인 것이다. 즉 유대교가 버려짐을 당하였음을 타락한 천사의 예를 통해서 설명해 줌으로서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지시키고자 함에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분량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가늠할 수 있다. 사실 천사들의 타락은 단 한 번 있었던 일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것들을 하늘에서 내어 쫓으셨고, 자기 백성들의 구원이 완성되게 되면 결국 영원한 유황 불 못에 던져 심판 하실 것으로 예언되어 있다. 그것들에게는 일말의 긍휼도 용서도 허락지 않으시는 서릿발 같은 하나님의 엄중하심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우리들에게만은 용서와 긍휼이 무한대요 제한이 없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시어 우리들의 죄의 형벌을 대신 받아주시기까지 하셨다. 때문에 창기였던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하시고,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에게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기도 하셨다. 또 십자가상에서의 예수님 한편의 강도에게는 그가 구원을 요청하자 일절의 주저함도 없이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하시며 구원을 허락해 주셨다.
단 한 번 잘못한 천사를 하늘에서 내어 쫓으시고, 거기에 더하여 회개의 기회조차 주시지 않고 영원한 흑암에 가두신 하나님의 역사에서 보면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얼굴과 천사들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큰 격차가 있음이 분명하다. 즉 천사들과 우리를 비교해 보면 우리는 너무나도 크고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왜 그런 것인가?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1장 14절로 답한다면 우리는 아들이지만 그들은 종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동안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경우나 하나님 마음을 섭섭케 해 드린 일들이 과연 얼마인가? 백 번, 천 번을 넘어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만은 여전히 사랑의 대상자로서 기회를 허락하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있는 것이다.
지은 죄로 본다면 버림을 받았어도 골백번은 더 버림을 받았어야 할 우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세상 끝 날까지 우리들을 지켜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진술한 바 있다.
(롬 8:38, 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절대 그 어떤 경우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받은 사랑의 분량은 그야말로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막물 삼아도 다 쓸 수 없는 심히 크고 큰 것임이 틀림이 없다. 더욱더 감사하고, 더욱더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할 우리라는 생각이 들어진다. 왜냐하면 천사들과 비교해 보면 우리는 그들보다 천 배, 만 배, 가히 상상을 초월한 너무너무 큰 사랑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cafe.daum.net/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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