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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연구

살렘왕 멜기세덱(창세기 14:17~24. 히브리서 7장)

by 은총가득 2021. 4. 19.

 

서론

창세기 14장은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전쟁 이야기입니다. 전쟁은 주로 돈 때문에 일어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엘람 왕 그돌라오멜에게 12년 동안 조공을 바쳤는데 13년째 배반을 했습니다. 그래서 엘람 왕이 주변의 세 왕과 함께 소돔과 고모라를 침공한 것입니다. 이에 소돔과 고모라는 주변의 세 왕들과 힘을 합쳐 맞섰지만 엘람 왕을 포함한 네 왕이 이겼습니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사람들이 잡혀가고 재물과 양식을 빼앗겼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살고 있던 롯도 잡혀가고 가지고 있던 재물도 다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당시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던 아브람은 이 전쟁에 무관심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조카의 가족이 다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아브람은 집에서 훈련시킨 318명의 가신들을 거느리고 구하러 갔습니다. 네 왕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기쁨에 밤새 술을 먹고 잠들어 있는 사이 아브람이 쳐들어가서 네 왕들을 다 죽이고 사로잡혀있던 부녀자들과 백성들 그리고 약탈당했던 재물까지도 다 찾아왔습니다.


위대한 승리자가 된 아브람이 돌아오는 길에 왕곡이라고도 불리는 사웨 골짜기에서 두 명이 아브람을 영접했습니다. 한 사람은 소돔 왕이었습니다. 사람과 재물 모두를 빼앗기고 숨어 지내다가 아브람이 다 찾아서 돌아온다는 소식에 영접하러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창 14:21). 하지만 아브람은 소돔 왕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오직 소년들의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취할 것이니라” (창 14:23~24). 소돔 왕이 자기 덕분에 아브람이 부자가 되었다고 말할까 봐 소돔 왕의 재물은 조금도 받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다만 수고한 가신들이 먹은 것과 동행한 자들의 분깃만 제하고 그 외에 나머지는 실 한 오라기나 신발끈 하나라도 받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을 영접한 다른 사람은 살렘 왕 멜기세덱이었습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자 살렘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멜기세덱은 아브람과 그 가신들을 맞이하면서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벌써 맨몸으로 나온 소돔 왕보다 얼마나 생각이 많고 사람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Ⅰ. 멜기세덱은 어떤 존재인가?

멜기세덱은 참으로 신비한 인물입니다. 창세기 14장에 갑자기 나타났다가 더 이상 언급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900여년이 지난 후 다윗 왕이 시편 110편 4절에서 갑자기 멜기세덱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시 110:4). 다윗 왕이 멜기세덱 이야기를 하더니 히브리서 5장과 7장에는 멜기세덱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멜기세덱은 어떤 존재입니까? 이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 멜기세덱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사람이라는 견해입니다. 멜기세덱은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후에 예루살렘이 되는 살렘의 실제 왕이었고 또한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멜기세덱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성육신하기 이전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견해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두 번째 견해를 더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세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 이유는 아브람에게 성육신하기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적이 한 번 더 있습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세 사람이 아브람에게 나아왔다고 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성육신하기 전의 예수 그리스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은 천사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람에게 성육신하기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수 있었다면 14장에서도 나타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만약 멜기세덱이 단순한 살렘의 왕이었다면 아브람에게 덕분에 망하지 않게 되었다며 감사해야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멜기세덱은 아브람에게 감사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람을 축복합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멜기세덱이 아브람보다 높은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히 7:7). 그리고 창세기 14장 20절에 멜기세덱은 아브람으로부터 십일조를 받습니다.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에게 십일조를 받을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분은 목사가 성도에게 십일조를 받는다고 하는데 그런 목사는 이상한 목사입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목사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십일조를 받을 권리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과 같이 위대한 분으로부터 십일조를 받은 멜기세덱은 보통의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인 것이 분명합니다.


세 번째 이유로 멜기세덱은 왕이면서도 제사장으로 두 가지 직분을 한 몸에 지닌 존재였습니다. 성경에는 왕이 제사장 직분을 겸할 수 없다고 되어있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왕과 제사장 직분을 함께 행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인 것입니다. 유다의 왕이었던 웃시야는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분향을 하려다가 그만 문둥병에 걸려서 별궁에 홀로 거하며 죽을 때가지 문둥병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예표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고 성육하기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아브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경배하며 십일조를 드렸던 것입니다.


Ⅱ. 멜기세덱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무엇인가?

멜기세덱이라는 말의 의미는 ‘의의 왕’이고 살렘 왕이라는 말의 의미는 ‘평강의 왕’입니다.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히 7:1~2). 예수 그리스도는 의의 왕이시고 평강의 왕입니다. 죄인들에게 의를 나눠주신 왕이고 죄인들에게 평강을 주시는 왕이시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스스로 천국에 들어갈 만큼 충분히 의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분명한 선언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천국에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들이고 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영혼에는 평강이 없습니다. 낮에는 웃고 다니는 사람도 밤이 되면 꿈자리가 뒤숭숭합니다. 근본적으로 영혼에 평강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에 100% 순종하셨고 그 순종을 근거로 죄인들에게 나누어주실 완전한 의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에게 나눠주신 최고의 선물은 바로 완전한 의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의가 없음을 인정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실질적으로 죄인입니다. 본인이 실질적으로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의 의로 우리 죄를 다 덮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우리를 덮어주셔서 하나님은 당신의 법정에서 우리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보시고 우리로 의인이라고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어림도 없지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그 의를 받아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의를 얻은 사람은 영혼에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완전히 제거되고 죄는 완전히 용서받고 하나님의 호의를 받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를 받게 되면 하나님의 호의의 대상이 되고 우리가 저지른 모든 죄는 과거, 현재, 미래 가릴 것 없이 다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죄의 용서와 하나님의 호의의 회복. 이 두 가지가 의를 얻은 결과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바라보실 때 찡그리실까요? 웃으실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웃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호의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좋으신 분입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많고 죄 지은 것이 많아 기도할 때마다 부끄러워도 나의 잘못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고 우리에게 호의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를 주시는 의의 왕이시며 평강을 주시는 평강의 왕인 것입니다. 이 순서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의를 얻은 사람만이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의를 얻지 못하고 불의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평강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사 57:21). 필리핀 교도소에 가보면 사람들이 무섭습니다. 다리부터 얼굴까지 문신이 다 그려져 있고 눈빛도 매섭습니다. 하지만 교도소 안에 있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얼굴부터 다릅니다. 똑같은 죄수지만 눈동자가 빛나고 얼굴이 밝습니다. 옷도 똑같은 죄수복인데 저희 의료선교팀이 만들어준 ‘Freedom in Jesus’라고 적힌 죄수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옷에 적혀진 글씨처럼 몸은 감옥에 있어도 영혼이 의를 얻었음으로 하나님과 평강을 누리기 때문에 얼굴이 달랐던 것입니다.


침례교회 조상 가운데 존 번연이라는 훌륭한 분이 계십니다. '천로역정'의 저자이신데 이분이 고민하던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받아주실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평강을 누릴 수 있을까?’ 이 두 가지 문제를 가지고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길을 걷는 도중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너의 의는 하늘에 있느니라.” 이런 음성을 듣고 존 번연은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로 믿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 1:30).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비록 실패하고 때로는 연약해서 죄를 짓지만 하늘에 계신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 의를 버리지 않는 이상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의인이 된 것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지 않는 사람은 위험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호의의 대상이 아니라 진노의 대상입니다. 언제 하나님의 진노가 떨어질지 모르는데 얼마나 위험합니까? 위험한 가운데 살지 마시고 우리의 피난처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시기를 바랍니다.


Ⅲ. 멜기세덱이 행한 일은 무엇인가?

멜기세덱은 아브람을 위해서 축복해주었습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람을 두 가지로 축복했는데 하나는 한밤중에 전쟁하느라 피곤한 아브람과 가신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준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것을 주의 만찬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주의 만찬입니까? 멜기세덱은 육신적인 필요를 채워준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종종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예수 믿으면 떡이 나오냐? 술이 나오냐?” 보십시오. 멜기세덱은 떡도 주고 술도 주지 않습니까? 포도주는 그 당시에는 술이 아니라 음료수였습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며 육신적인 필요를 공급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의도 주시고 평강도 주시며 먹을 것도 주시고 물질적인 필요도 채워주시는 축복의 구주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물질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지만 가난하고 배고픈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춥고 배고프면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물질의 복도 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이 물질의 복에 집중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복 그 자체보다는 복 주시는 하나님에게 집중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람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나는 이 복을 사랑해서는 안 되고 복 주신 하나님을 사랑해야 된다.

 

그러면 내가 복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내 믿음을 보여드려야 된다.’ 그래서 아브람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입니다. 아브람이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바친 이유는 자신의 마음이 먹고 마시는 떡과 포도주에 있지 않고 탈취한 전리품에도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자신이 받은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에게 십일조를 드립니까? 우리 마음이 물질에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받은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은 물질의 복과 함께 영적으로도 축복했습니다. (창 14: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예수님은 복 주시는 구주이십니다. 창세기 14장에 성육신하기 이전 처음으로 나타나셔서 택한 백성을 축복하십니다. 공생애를 마치고 승천하기 전 마지막에도 역시 제자들을 축복하십니다.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눅 24:50~51). 예수님은 택한 백성을 항상 축복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말처럼 복의 원천이 하나님 아버지시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 14:20).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복의 원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약 1:17)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서 “아버지 나에게 복을 주십시오. 자식의 복도 주시고 건강의 복도 주시고 물질의 복도 주시고 인기의 복도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잘 왔다. 그런데 내가 그 복들을 다 내 아들에게 맡겨 놨으니 내 아들에게 가라. 내 아들을 믿으면 그것이 나를 믿는 것이고 내 아들을 공경하면 그것이 곧 나를 공경하는 것이니라. 나는 네게 복을 주되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복을 주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3절에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요 5:23).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41장에서 애굽에 7년 풍년이 온 후 7년 동안 기근이 왔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바로 왕에게 가서 곡물을 달라고 요청하니까 요셉이 곡물을 다 가지고 있으니 그에게로 가서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메튜 헨리(Matthew Henry)라는 유명한 주석가는 이 이야기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아름답게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복의 원천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복이 우리에게로 내려오는 유일한 통로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른 통로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통로는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결론

멜기세덱은 성경에 처음으로 나타난 성육신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시며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복이 오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아브람은 사웨 골짜기에서 멜기세덱을 만나 엎드려 경배하고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골짜기는 낮은 곳을 말합니다. 아브람은 전쟁에 승리했지만 교만심을 갖지 않고 겸손한 마음으로 골짜기에서 멜기세덱을 만난 것입니다. 교만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축복을 가로 막는 최대 장애물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지 밑에서 올라오는 것이 아닙니다. 위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기 때문에 낮은 곳에 있을 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예수님과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낮아져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멜기세덱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고 경배하며 마음과 물질로 공경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공경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된 인생이 되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성도님들 모두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영육의 모든 복을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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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과 멜기세덱 창세기 14:1-24 손재호목사

아브람이 조카 롯과 헤어진 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13:14-17). 하나님께서는 사방에 있는 모든 땅을 그와 그의 후손에게 주며, 또한 그 자손으로 땅의 티끌같이 능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게 할 것이라고 아브람과 맺은 언약을 재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아브람은 그런 일이 있고 나서 가솔들을 이끌고 헤브론에 있는 상수리나무 숲 부근으로 옮겨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습니다. 아브람의 이와 같은 행동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재확인시켜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실 것을 더욱 신뢰하며, 그 언약을 따라 살 것을 고백하는 행위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 일이 있고 난 후 아브람이 전쟁에 참여하게 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전쟁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가나안 땅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이 전쟁에서 당시 소돔에 살고 있던 조카인 롯이 재산을 약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포로로 잡혀 끌려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아브람은 그를 구출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14:1-12절에 보면 가나안에 전쟁이 발발하게 된 원인은 이랬습니다. 당시 가나안과 그 주변은 여러 족속들이 나라를 이루고 지배국가와 지배를 받는 국가의 관계 속에 있었습니다. 당시 가장 강력한 국가의 왕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아래쪽 페르시아 만을 끼고 있는 엘람 제국(지금의 페르시아 지역)의 왕 그돌라오멜이었습니다. 그돌라오멜이 얼마나 강했는지 주변 국가의 왕들뿐만이 아니라 이곳으로부터 장장 1500km나 되는 먼 거리에 떨어져 있던 사해주변의 나라들까지 그에게 조공을 바칠 정도였습니다. 소돔왕 베라와 고모라왕 비르사와 아드마왕 시납과 스보임왕 세메벨과 벨라라고도 하고 지금은 소알이라고도 부르는 나라의 왕 등 다섯 나라의 왕들은 12년 동안 그에게 조공을 바쳐왔습니다. 그러다가 그돌라오멜이 엘람왕이 된지 13년째 되던 해부터는 조공을 바치지 않기로 하고 이들 다섯 나라는 지금은 사해바다 라고도 부르는 싯딤 계곡에 모여 동맹을 맺고 연합군을 만들어 엘람왕 그돌라오멜과 그와 동맹한 나라들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그돌라오멜은 자신이 엘람왕이 된지 14년 째 되는 해에 자신과 동맹을 맺은 시날(바벨론 지역)왕 아므라벨과 엘라살왕 아리옥과 고임왕 디달과 함께 연합군을 만들어 그 군대를 이끌고 자신에게 반기를 든 나라들을 정벌하기 위하여 침공하여 왔습니다. 그돌라오멜 연합군은 먼저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 족속을, 사웨 기랴다임 평원에서 엠 족속을 쓰러뜨렸습니다. 그리고 세일 산악 지대에서는 호리 족속을 쓰러뜨리고 광야 가까이에 있는 엘바란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방향을 바꾸어 북쪽으로 향하여 지금은 가데스로 알려져 있는 엔미스삿으로 쳐들어가서 아말렉 족속이 살고 있는 전 지역을 짓밟았습니다. 또한 하사손다말에 살고 있던 아모리 족속도 모조리 쓰러뜨려 점령을 하였습니다. 이에 조공을 바치다가 반기를 든 다섯 왕의 연합군이 싯딤 계곡에 모여 침공한 그돌라오멜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다섯 나라의 연합군은 침공한 그돌라오멜 연합군에 맞서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패하여 퇴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싯딤 계곡에는 역청 구덩이(도로 도장, 방부제 또는 방수제로 쓰였음)가 많아서 전투에서 패하여 퇴각하는 군사들에게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습니다. 소돔왕과 고모라왕은 역청 구덩이에 빠져 곤경에 처하였습니다. 나머지 세 나라의 왕은 산악 쪽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이렇게 다섯 나라가 크게 패퇴하자 가나안 땅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마구 짓밟혔으며 백성들은 재물과 양식을 모조리 약탈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이 난리는 소돔에 살고 있던 아브람의 조카인 롯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도 재산을 다 약탈당하고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13절에 보면 이때 전쟁에서 살아남아 도망쳐 온 한 히브리 사람이 롯이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가나안 중심지 헤브론에 거하고 있던 아브람에게 전해주었습니다. 14-16절에 보면 아브람은 롯이 붙잡혀 간 소식을 듣자마자 집에서 길리고 군사 훈련을 받은 가신 318명과 동맹을 맺은 마므레의 삼형제의 군사들과 함께 전쟁에 승리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그돌라오멜 연합군을 뒤쫓아 갔습니다. 아브람과 동맹군들은 단까지 쫓아갔습니다. 아브람은 그곳에서 가신을 나누어 밤을 이용해서 롯을 사로잡아간 군대를 급습하여 쳤습니다. 아브람의 야간 기습 작전에 놀란 그돌라오멜 연합군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쳤습니다. 그러자 아브람은 그들을 다메섹 북쪽에 있는 호바까지 쫓아가서 마침내 조카 롯을 구출하였습니다. 그리고 롯이 빼앗겼던 재산과 부녀와 그리고 함께 끌려갔던 모든 사람들도 다 구출하여 돌아왔습니다.

당시 아브람은 개인 병사를 거느릴 정도로 세력이 크게 확장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아모리 사람 마므레 삼형제와도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아브람의 존재가 가나안 땅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7-21절에 보면 그돌라오멜이 이끄는 연합군과의 싸움에서 크게 이기고 돌아오는 승리자 아브람 앞에 소돔왕 베라가 ‘왕의 계곡’이라고 불리는 사웨 골짜기까지 영접하러 나왔습니다. 그리고 또한 살렘왕 멜기세덱도 아브람을 영접하고자 나왔는데 그는 아브람의 일행이 전쟁을 치르느라 몹시 지치고 피곤할 것이기에 위로와 대접을 하고자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 살렘왕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기도 하였습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람을 맞아 하나님을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을 지으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으로 복 주시는 분이심을 말하면서 아브람의 승리가 대적을 아브람의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도우신 결과에 따른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19-20절에 보면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제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고 했습니다.

 

멜기세덱은 이번 전쟁에서의 승리가 아브람의 힘과 실력과 지략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말미암아 승리하게 되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복을 주시도록 축복 기도합니다. 살렘왕 멜기세덱이 승전하고 돌아오는 아브람을 마중 나와 축복한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멜기세덱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본문에서는 그가 살렘왕이라는 것과 또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대개 그를 실존 인물로 보지 않고 신화적 인물로 간주합니다. 심지어 보수주의 신학자들마저도 그를 실재하지 않았던 상징적 인물로 여기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실재 존재한 인물로 증거합니다.

 

히브리서 7:1-3절에 보면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한 살렘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멜기세덱을 살렘왕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평화의 왕이란 뜻으로 멜기세덱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위해 존재하는 왕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지리적으로 예루살렘과 연관이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이라는 단어 자체는 ‘의의 왕’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가 의의 왕이라는 점은 의로우신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은 당시 가나안의 모리아 산, 즉 나중에 예루살렘 성전이 건립될 지역을 포함하는 땅과 백성을 통치한 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의의 왕이자 평화의 왕인 멜기세덱은 약속의 땅에서 아브람을 영접함으로써 미래에 있게 될 메시아 왕국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은 왕이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타락한 그의 백성들 사이에 화해를 이루기 위한 제사장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아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족보도 없었습니다. 그는 출생도 없고 사망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 구절을 오해해서 멜기세덱을 잘 못 이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출생도 사망도 없다’는 말은 그의 출생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신분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런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과 같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멜기세덱에 대한 이러한 표현은 처음이요, 나중으로서 영생을 주시는 참 하나님이시며, 또한 참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모형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아브람이 얻은 승리는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확인시키면서 또한 아브람을 위하여 하나님께 복을 빌었습니다. 아브람은 멜기세덱으로부터 축복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자신보다 월등히 높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였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아는 대로 축복하는 사람은 언제나 축복 받는 사람보다 더 높고 위대한 위치에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7:7절에 보면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자기에게 복을 빈 멜기세덱을 자신보다 높은 자로 인정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멜기세덱이 살렘왕으로서 또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아브람을 위하여 복을 빌면서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이로써 아브람이 이번 전쟁에서 주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승리하게 되었음을 인정하고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면 멜기세덱의 축복에 대한 아브람의 반응이 어떠하였습니까? 20절에 보면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고 했습니다. 아브람은 멜기세덱에게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주었습니다. 이는 아브람이 이번 전쟁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셨고, 전쟁에서의 승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음을 인정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이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살렘왕 멜기세덱에게 바침으로써 멜기세덱을 ‘주’(主)의 관계에서 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이번 전쟁에서의 승리가 왕이요, 제사장인 멜기세덱의 기도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그의 등장에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왕이 제사장의 직무까지도 겸해서 같이 하였던 시대가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왕이 하는 일과 제사장이 하는 일은 나누어져서 왕은 전쟁에 나가 군대를 지휘하여 싸우고, 제사장은 제단에서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은 왕이요, 제사장으로서 전쟁터에서 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만 제사의 방식을 통하여서 하나님이 싸우시는 전쟁을 위해 기도를 할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거둔 승리는 군사가 손에 쥔 창과 칼에 의해서가 아니라 제사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의가 아브람을 대적하는 하나님의 대적자를 쳐부수어서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왕이요,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나타나 그 사실을 말해주었을 때 자신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고 인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전리품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바침으로써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또한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자신과 항상 함께 하실 것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께 의존하는 행동을 취한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바친 전리품의 십분의 일은 전쟁에서의 승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왔음과 하나님께서 자신과 맺은 약속을 신실히 이루어 가실 것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맡겨 의존한다는 신앙고백적인 표시였습니다. 그래서 이번 전쟁으로 겪은 일은 아브람에게는 ‘자손 언약’을 이루실 하나님에게 가지게 된 믿음이 한층 더 강화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멜기세덱의 등장은 이후 아브람이 더욱 큰 확신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아브람은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한없이 작아지고 낮아지는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전쟁에서의 승리가 자신의 존재와 힘과 지략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편 21절에 보면 소돔왕도 아브람을 영접하면서 포로로 잡혀갔다가 되찾아온 백성은 자기에게 보내고 빼앗겼다가 되찾은 물품은 모두 아브람이 차지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아브람의 반응이 어떠하였습니까? 22-23절에 보면 “아브람이 소돔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아브람은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손을 들어 맹세하면서 그의 호의를 거절하였습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거절한 이유는 “나는 소돔왕이 준 재물로 부자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곧 아브람이 소돔왕의 호의를 거절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였습니다. 아브람은 소돔왕이 준 재물로 부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지 않기 위해 실 한 올, 신을 매는 끈 하나라도 가져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전쟁을 치루면서 하나님에 대한 아브람의 믿음이 많이 성장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24절에 보면 “오직 소년들의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취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다만 아브람은 자신과 함께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이 먹을 것은 가져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자신과 동맹을 맺고 같이 싸우러 간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몫은 가져가도록 하였습니다.

아브람이 이처럼 소돔왕의 호의를 단호히 거절한 것은,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에게 빌미를 제공하여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마땅한 영광에 혹 누가 될 수 있을 것을 염려한 까닭에서였습니다. 사실 소돔왕은 매우 악한 왕이었습니다. 이는 창세기 13:13절에 보면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고 말해주시고 있는 데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소돔왕이 의로운 왕이었다면 소돔 사람을 악하다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앞에 큰 죄인으로 후에 불과 유황으로 멸망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창 18:32). 만일 소돔왕이 공의로 나라를 다스렸다면 온 백성은 안연히 살았을 것입니다(참조, 왕상 4:25).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아브람은 결코 그에게 어떤 빌미도 제공하지 않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아브람이 소돔왕에게서 진리품을 받았다면 아브람이 부자로 살아갈 때 소돔왕은 자신이 아브람에게 많은 재물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브람은 전쟁에서의 승리가 자신의 지혜와 힘에 의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잘 알기에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야 할 영광을 자신이 재물을 취함으로써 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전쟁에서 승리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선심을 쓰듯이 “물품은 네가 취하라”고 하는 소돔왕의 호의를 거절한 것입니다. 이로써 아브람은 그가 누릴 수 있는 부를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멜기세덱을 통해서 드러나 알게 된 천지의 주재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만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존하는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아브람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아브람이 치른 이 전쟁이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당시 아브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그가 바라보는 동서남북 사방의 모든 땅을 자기와 그 후손이 받을 것을 약속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의 실현은 아직 이루어진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은 지금 실제적으로는 자기 소유라고 말할 수 있는 단 한 평의 땅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단지 약속으로 주어질 땅이었을 뿐입니다. 이러한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를 약속의 땅에 발을 들여놓게 한 그곳을 파죽지세로 침공한 네 나라의 연합군을 쳐서 이기게 하는 것을 통하여 가나안 땅의 주도권을 아브람에게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을 통해서 아브람으로 하여금 승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온 것임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전쟁을 통해서 아브람이 믿는 하나님은 그와 맺은 언약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 믿음을 갖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해 나가게 하셨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아브람과 함께 하시고 승리를 주신 하나님은 언약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심을 믿는 믿음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 위에 굳게 서서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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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제14장 강해 - 롯의 구출과 멜기세덱

 

가나안 북부 메소보다미아 지역의 4개국인 시날, 엘라살, 엘람, 고임과 가나안 남부 사해 지역의 5개 소국인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소알의 국가 간 연합 전쟁이 처음으로 성경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전쟁의 원인은 남부의 5개 사해 동맹국들이 12년 둥안 조공을 바치며 섬기던 엘람의 맹주 그돌라오멜을 반역했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은 남부 동맹국들의 패배로 끝났고, 소돔 근처에 있던 롯도 이때에 잡혀가고 말았습니다. 아브람은 롯을 구출하기 위해 가병 300명을 이끌고 북방 연합군들을 공격하고 승리하여 롯을 구출하였습니다. 아브람이 귀환할 때에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영접하였고, 아브람은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1: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 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시날은 바벨론 지역을 의미하고 왕 이름은 ‘아브라벨’입니다. 그 뜻은 ‘신들을 지키는 간수’, ‘강한 백성’ 등입니다. 그는 시날 땅 최초의 통치자인 니므롯의 후손입니다(10:10). ‘엘라살’으 유브라데 동편 남부 바벨론이 한 성읍인 ‘라르사’로 추측합니다. 라르사는 바벨론의 요충지입니다. ‘아리옥’은 존경한다는 뜻입니다. 바벨론 남부 지역의 넓은 영역을 통치했던 막강한 실력자로 보고 있습니다. ‘엘람’은 동으로 바사, 서로 티ㅡ리스, 남으로 페르시아 만, 북으로 앗수르에 둘러싸인 산간지역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매우 호전적이어서 항상 주변 국가들에게 위협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돌라오멜’은 ‘한 웅큼의 곡식알’이라는 뜻으로 이번 원정에 참가한 4개국 중 가장 탁월한 실력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임’은 ‘열방’이라는 뜻으로 동방의 유목민들이 세운 작은 부족 국가인 듯합니다. ‘디달’은 ‘두려워하다, 빛나다, 경외’의 뜻으로, 일개 유목민을 이끌던 우두머리로서 점차 주변의 약한 족속을 침탈하여 세력을 키워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2: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소돔은 ‘큰 불’이란 뜻입니다. 이 명칭은 역청 지대인 소돔이 훗날 유황불 심판으로 멸망당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베라’는 ‘선물, 은사’의 뜻입니다. 남부 지역의 연합군 지도자 격입니다. ‘고모라 왕 비르사’ ‘고모라’는 ‘갈라진 장소, 거주, 물이 많은’ 등의 뜻입니다. ‘비르사’는 강한, 악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약탈과 전쟁에 능했던 그의 일면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드마‘는 농사짓는 성읍이라는 뜻으로, 농업 위주의 정착 생활을 하던 지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시납‘은 ’아버지의 이’란 뜻입니다. ‘스보임’은 거친 들, 작은 영양이라는 뜻으로 비옥하지 못한 고산 지대의 성읍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메벨’은 이름이 높아진다는 뜻입니다. ‘벨라’는 삼키다는 뜻이며, ‘소알’은 작다는 뜻입니다.

 

‘싸우니라’ 이는 전쟁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전쟁 기사입니다. 이 이방인들의 전쟁에 대한 기사가 굳이 아브람과 롯의 작별 사건 뒤에 언급이 되는 이유는, 첫째 탐욕의 눈으로 소돔을 향해 간 롯이 이방인들 사이의 전쟁에 휘말려 큰 고초를 겪었듯이, 세상을 좇아가는 자의 앞길은 결코 평탄하지 못하다는 것이며, 둘째 줄곧 가나안을 방랑하던 아브람이 이 전쟁으로 인해 가나안에서 확고한 위치에 올라섬으로써 가나안을 아브람에 주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차근차근 그 언약을 성취해 나가시는가를 보여줍니다.

 

3: 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 염해에 모였더라.

싯딤 골짜기는 울창한 숲으로 된 골짜기, 소금 계곡, 아카시아의 골자기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해 남쪽에 위치한 역청이 많은 지역으로 추정이 됩니다. 모세가 창세기를 기술할 당시에 싯딤 골짜기는 이미 염해로 변했습니다.

 

4: 이들이 십 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 십 삼 년에 배반한지라.

그돌라오멜은 메소보다미아 동맹국의 지도자격에 해당하는 인물론 셈 계열에 속한 자로 추정합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 중에는 그돌라오멜을 위시한 북방 4개 동맹국의 사해 5개 연합국(함 계열의 가나안 후손)에 대한 침략을 가나안 후손에 대한 노아의 예언의 선취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나안 5개국은 그돌라오멜이 통치한 지 제13년에 조공을 거부하고 반역을 했습니다. 그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12,13장에 나오는 아브람과 롯이 겪었던 기근과 관계가 있을 수 있다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계속되는 기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가중되는 조공 부담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모반을 꾀했을 것입니다.

 

5: 제 십 사 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동맹한 왕들이 나와서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 족속을, 사웨 기랴다임에서 엠 족속을 치고,

‘아스드롯 가르나임’은 ‘두 뿔의 아스드롯’이란 뜻입니다. 이 명칭은 이곳이 두 뿔 가진 가축들을 많이 소유한 곳이거나, 지형이 두 뿔을 닮았기 때문에, 혹은 아스다롯 여신을 섬기던 곳이기 때문이라고 추정합니다. 이 지명을 단순히 ‘가르나임’이라고도 합니다. 갈릴리 동쪽에 위치한 아스드롯 북방 4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으로 추정합니다. ‘르바 족속’은 거인족으로 이 족속 최후의 왕은 바산 왕 ‘옥’입니다(신 3:11). ‘함’은 암몬 족속의 성읍 ‘랍바’의 옛날 이름으로 추측합니다(신 3:11). 길르앗 야베스 북쪽 20km 지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수스 족속’ 후대에 암몬 족속에 의해 ‘삼숨밈’으로 불린 족속을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신 2:20). ‘사웨 기랴다임’은 후일 르우벤 지파의 성읍이 되었습니다. ‘엠 족속’은 두려운 족속이라는 뜻으로 초창기 모압 땅에 살던 거인족입니다(신 2:10).

 

6: 호리 족속을 그 산 세일에서 쳐서 광야 근방 엘바란까지 이르렀으며,

호리족속은 동굴에 거하는 무리, 혈거인이란 뜻으로 세일 산을 거점으로 하여 동굴에 거주하던 족속입니다(신 2:12). 이들은 후에 에돔 족속에 의해 전멸되었습니다. ‘그 산 세일’ ‘세일’이란 수풀이 울창한, 털이 많다는 뜻입니다. 이런 지명에 알맞게 이곳은 사해 남부, 아라바 평원 동부에 있는 고신 지대로서 울창한 숲과 많은 바위 및 동굴로 형성이 되어 있습니다. 이곳에 에돔 족속이 거주한 이후로 ‘세일’이라는 이름일 붙여지게 됩니다(36:30; 대하 25:11). ‘엘바란’은 아카바 만의 북쪽 연안으로 바란 광야의 동편에 위치합니다.

 

7: 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 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

남진을 계속하던 메소보다미아 4개국 연합군이 아라바 광야 쪽으로 향하지 않고 시내 반도쪽으로 방향을 선회했습니다. 시내 반도 북쪽과 가나안 남부 지역이 만나는 곳은 나중에 에서의 손자인 아말렉(36:12) 자손들의 주 활동 무대가 되었습니다. ‘엔미스밧’은 ‘심판의 우물’이라는 뜻으로 이 명칭은 물이 귀한 팔레스틴 영내에서 흔히 발생하는 일로서 한 우물을 두고 여러 부족이 분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데스’는 거룩하다는 뜻으로 출애굽 아시 바위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던 곳이자 하나님의 대언자 모세가 백성을 판결했던 장소(민 20:14)입니다. ‘하사손다말’(엔게디)은 종려나무의 전지라는 뜻으로 종려나무, 포도나무 등이 많은 곳입니다. 아모리 족속은 중근동 지방에 널리 분포되어 살던 함 계열의 족속입니다.

 

8,9: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접전하였으니, 곧 그 다섯 왕이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 네 왕과 교전하였더라.

메소보다미아의 연맹국들은 시리아, 팔레스틴 북부, 요단 동안, 사해 동안의 군사 도로를 따라 여러 가나안 족속들을 쳐부순 뒤 사해 연안 5개 동맹국들과 일전을 위해 싯딤 골짜기로 향했습니다. 사해 연안 동맹국들이 메소보다미아 연합군을 맞아 전장을 싯딤 골짜기로 정한 것은 이곳에 흔한 역청 구덩이를 저지선으로 활용하여 유리한 위치에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10: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군사가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역청 구덩이가 많은 장소를 전장으로 정한 사해 연안 5개 연합국들은 오히려 이 전쟁에서 큰 패배를 맛보고 말았습니다. 이는 그들의 전략에 허점이 있었다기보다는 탐심으로 인해 타락 일로를 걷던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입니다. 사악한 인간은 자신의 어떤 재능으로도 하나님의 심판의 칼날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11,12: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메소보다미아 동맹국들은 사해 연안의 가나안 족속들이 조공을 거절하자 전쟁을 일으켜 그에 상응하는 재물들을 약탈하여 갔습니다. 이는 인간사의 모든 전쟁이 탐욕에 기인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아브람과 작별 이후 롯은 소돔에서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으로 등장을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세상적 삶을 귀하게 여겨 하나님의 곁을 떠난 자가 받게 될 보응이 어떤 것인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13: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고하니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자더라.

포로가 되어 메소보다미아로 끌려가던 사람들 중 일부가 탈출을 하여 아브람에게 모든 사실을 알렸습니다. 여기에서 ‘히브리 사람’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을 합니다. 이 말은 셈 계열의 후손으로써 나중에는 선민 이스라엘의 통칭으로 사용이 됩니다(출 2:6).

 

14: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 십 팔 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길리고’ 이 말은 출생하다는 뜻으로 전쟁이나 매매로 얻은 종이 아닌 순수히 아브람이 소유한 종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주인에게 대한 결속력이 강했을 것입니다. ‘연습하다’는 말은 훈련하다, 교육을 받다는 뜻입니다. 이는 군사상의 훈련보다는 단지 유목민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된 가축보호나 집안 경계를 위한 파수꾼으로서의 훈련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런 미약한 수준의 훈련을 받은 식솔 318명만을 데리고 북쪽 연합군을 쫓아갔다는 것은 조카에 대한 애정과 함께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롯이 자신을 떠날 때에는 믿음으로 외로움을 달래고, 롯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며 그를 구하고자 하는 아브람은 믿음의 조상이기에 앞서 한 집안의 큰 어른이며 인격자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15,16: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왔더라.

소수의 군사로 대군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동시 다발적으로 야간 기습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 최상의 전략이라고 합니다. 이런 형태의 전략은 기드온의 300용사가 미디안 대군을 격파할 대에도 사용이 되었습니다(삿 7장).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군사의 수나 무기의 우수성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시느냐 아닌가가 더욱 중요합니다. 실로 하나님은 전쟁에 능한 신이시묘(시 24:8),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만군의 주이십니다(삼상 17:47). 호바는 다메섹 북쪽 24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으로 추정이 됩니다.

 

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출하는 것은 군사를 일으킨 목적이기도 합니다. 아브람은 롯은 물론 함께 글려간 다른 사람들도 구출해 주었습니다. 후에 아브람이 소돔이나 살렘 왕으로부터 크게 존귀함을 받은 것도 이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능한 한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것, 이것이 바로 선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해를 비추시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입니다.(마 5:45-48).

 

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전쟁 당시 소돔 왕은 ‘베라’였습니다. 전쟁 시에 죽었다면 그의 후계자일 것입니다. 살았다면 베라입니다. 그는 자기와 자기 부족의 안녕을 도모해 준 아브람에게 경의를 표하며, 아브람이 구출해 온 소돔 출신 포로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브람을 맞으러 나왔을 것입니다. 사웨 골짜기는 예루살렘에서 약 500m 정도 떨어진 기드론 시내 상류에 위치한 골짜기로 추정합니다. 이곳을 ‘왕곡’ 즉 왕의 골짜기로 부른 것은 소돔 왕이나 살렘 왕이 이곳에서 아브람의 개선을 맞이한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살렘(שׁלם)’은 평강이란 뜻인데(히 7:1) 예루살렘의 예살 지명(시 76:2)으로도 알려집니다. ‘의의 왕’(히 7:2)이란 뜻의 ‘멜기세덱’(מלכי־צדק)에 대해서는 ① 영적인 존재 ② 노아의 장자인 셈 등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문자 그대로 이방인이면서도 타락한 주변 문화를 극복하고 순전하고 신실한 믿음을 경주한 가나안의 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요세푸스, 칼빈).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멜기세덱이 전쟁으로 지친 아브람과 그 군사에게 가나안의 주산물인 떡과 포도즙을 가지고 나온 것은 군사들의 원기를 회복시키고, 침략자를 물리치고 평화를 가져다 준 자들에게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의 신분을 밝혀주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히 7:3)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해석을 한 것입니다. 이간 대제사장 아론의 반차를 초월한 자로서 영원한 대제사장 직무를 수행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해 주는 존재로 인정하고 있습니다(히 7:11-15).

 

19,20: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멜기세덱의 제사장적 임무로 아브람에게 축복을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가리켜 ‘천지의 주재’라고 하였습니다. 우주 만물을 조성하시고 지금도 여전히 소유하며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엘 엘룐:אל עליון) 이는 하나님의 완전함과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초월적 능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멜기세덱이 대적을 물리친 아브람을 향해 인간적 칭송을 늘어놓기 보다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권고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시며 지극히 높으신 분으로 고백할 줄 아는 신앙의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이는 율법에서 성문화되기 전에 이미 고대 근동 지방에서 신전 및 신정 봉사자들의 생계를 위해 바쳐졌던 보편화된 제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준 것은 그런 보편적인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거룩한 신성을 인정하며 행하신 멜기세덱의 축복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며, 그의 제사장 직분을 인정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십일조의 근본정신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데서 비롯되어야 하며 또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의 표시로부터 비롯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1-23: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오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소돔 왕은 정복자가 전리품을 취했던 고대의 관례에 따라 아브람이 얻은 전리품을 그의 소유로 인정을 하였습니다. 다만 자신의 백성들은 자신에게로 보내라고 요청을 하였습니다. 아브람은 히브리인들의 일반적 서약 방식으로 손을 들어서 맹세를 하면서(신 32:40; 계 10:5,6), 소돔에 속하였던 모든 물품들은 한 올의 실이나 신발 끈이라도 가지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소돔 왕이 자신의 배려로 아브람을 부자로 만들었다는 말을 듣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당시의 관례로는 전혀 거절할 필요가 없지만, 아브람으로서는 타락하고 부도덕한 이방인의 물품을 꺼려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24: 오직 소년들의 먹을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취할 것이니라.

아브람은 조카 롯의 구출 작전에 이웃 아무리 족속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분깃은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함께 동행한 이웃의 분깃은 보장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입장에서는 분깃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는 상대방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는 아브람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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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멜기세덱은 누구인가?

답변:
"의(義)의 왕"이라는 뜻을 가진 멜기세덱은 살렘(예루살렘)의 왕이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창 14:18-20, 시 110:4, 히 5:6-11, 6:20-7:28)이었습니다. 창세기에서 멜기세덱의 갑작스러운 출현과 퇴장은 다소 신비스럽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돌라오멜(Chedorlaomer) 및 그와 동맹한 세 왕을 패배시킨 후 처음으로 멜기세덱을 만났습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과 그의 지친 종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주며 우정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엘 엘룐(El Elyon,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였고 전쟁의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창 14:18-20).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그가 모은 모든 물건의 십분의 일을 바쳤습니다. 이 행동으로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을 자신보다 더 높은 영적인 지위에 있는 제사장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시편 110 편을 보면, 다윗이 쓴 메시야 시편(마 22:43)에서 멜기세덱이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제시됩니다. 이 주제는 히브리서에서 반복되는데 그곳을 보면 멜기세덱과 그리스도가 의와 평화의 왕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멜기세덱과 그의 유일한 제사장직을 모형으로 삼으면서 그리스도의 새 제사장직이 과거의 레위 반열 및 아론의 제사장직보다 더 우위에 있음을 보여줍니다(히 7:1-10).

어떤 사람들은 멜기세덱이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 혹은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의 현현이었다고 제안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전에 그러한 방문을 받았음을 고려하면 가능한 이론입니다. 창세기 17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주(엘 샤다이, El Shaddai)를 만나서 대화를 합니다.

히브리서 6장 20절은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셨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반차’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제사장 직을 맡는 제사장들의 계승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멜기세덱에서 그리스도까지의 긴 기간 동안에는 아무런 반차가 언급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반차’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에게만 영원히 주어진 반차입니다.

히브리서 7장 3절은 멜기세덱은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질문은 히브리서 저자가 이 말을 할 때 사실을 말한 것인가 아니면 비유적으로 말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 있는 묘사가 문자 그대로라면, 이 구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도 적용될 수 없습니다. 이 땅의 왕 중에 "영원히 제사장으로 남아 있는" 왕이 없으며 또한 "아버지나 어머니가 없는" 사람도 없습니다. 만일 창세기 14장이 그리스도의 현현을 묘사하는 것이라면 성자 하나님이 의의 왕(계 19:11, 16)과 평화의 왕(사 9:6)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딤전 2:5)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셨던 것입니다(창 14:17-19).

만일 멜기세덱의 묘사가 비유적인 것이라면 계보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 끊임없는 사역이라는 상세한 표현은 단지 아브라함을 만난 사람의 신비한 사역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이 경우 이와 관련한 창세기의 상세한 기록에 대한 침묵은 의도적이며 멜기세덱과 그리스도를 더 분명하게 연결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멜기세덱과 예수님은 같은 사람입니까? 같은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멜기세덱은 주님의 사역을 예표하는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지친 전투 끝에 주 예수님을 친히 만나 그분께 영광을 돌렸다고 보는 것도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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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 그는 누구이고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멜기세덱 (qdMelchisedec) 「의의 왕」

 

아브함 시대의 예루살렘 제사장(창 14:18시 110:4

 

"이 멜기세덱은 살렘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히 7:1)

<자료 1>

멜기세덱과 그의 행한 일에 대한 역사적 언급은 창세기 14:18-20에 나온다. 그런데 히브리서 7장에서는 대제사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면서 전장을 이 멜기세덱과 비교하고 있다. 여기서 멜기세덱은 왕으로 묘사한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의의 왕이요 살렘 왕이라 하였다. 다시 말해서 평화의 왕이란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는 부모가 없으며 족보도 없고 시작과 끝도 없어서 하나님의 아들과 같으며 영원한 제사장으로 있는다 하였다(7:2-3).

그러면 여기 멜기세덱은 역사적 인물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였나? 또 역사적 인물이 아니었다면 왜 여기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과 비교하고 있는가? 그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먼저 역사적 인물로서 멜기세덱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멜기세덱의 이야기는 중간 청동기 시대로서 B.C. 1500년 이전의 일이었다. 그 시대는 다양한 도시 국가들로 나라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돌라 오멜 왕과 그 동맹군이 소돔과 고모라 왕을 사로잡고 거기서 살았던 롯도 포로로 잡아갔다. 이 소식을 듣고 아브라함이 그의 집에서 훈련시킨 318명의 사병을 거느리고 가서 그 동맹군을 격파해 롯을 구하고 탈취 당했던 물건과 많은 노략물을 얻어 돌아온다(창 14:1-16). 그러나 거기서 중심 인물은 그돌라 오멜 왕에게서 회복을 바랐던 소돔 왕과 아브라함을 축복한 멜기세덱이다. 특별히 멜기세덱은 제사장 왕으로서 아브라함에게서 1/10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분명히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은 역사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어디의 누구였는가? 멜기세덱의 뜻은 나의 왕은 의롭다거나 정의롭다는 뜻으로 합법적인 왕으로 해석하는 학자가 있으나, 의의 왕이란 해석이 적합하다.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도 멜기세덱을 평화의 왕이요 의의 왕이라 불렀다. 이 의의 왕이란 말로서는 그가 누구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살렘이란 말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이 말은 완성하다, 다 지불하다는 뜻으로 보는 이가 있으나 평화란 뜻이 옳다. 그러므로 살렘 왕은 평화의 왕이란 말이다. 그런데 사해 사본이나 랍비들 그리고 조세프스는 시편 76:2을 따라 살렘을 시온과 동일시한다. 이렇게 볼 때 멜기세덱은 시온 즉 예루살렘의 왕이었을 것이다.

또 유세비우스(Eusebius)는 아브라함이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에게서 선물을 받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해석된 그리심 산의 성전으로 한 손님을 맞이했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살렘은 그리심 산과 동일시되며 이곳에서 멜기세덱이 제사장으로 다스리며 사역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해석은 창세기 14:18의 칠십인 역을 지지한다.1)

그런데 멜기세덱은 이 사건 후에 곧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에는 사독 계열 제사장이 생겼고 이들이 아론 제사장 계열과 합치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사독과 멜기세덱은 같은 어근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또 유대주의에서는 멜기세덱에 대해 하스모니아 왕조의 유대 제사장 왕들에서 어떤 증거를 찾을 수가 있다(B.C. 164ㅡ 63)고 생각하며 거기서부터 사두개 파가 나왔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들은 제사장이요 왕이었던 멜기세덱의 후예라고 생각한다. 그 밖에 다른 견해는 사해 사본에서 발견되는데 거기서 멜기세덱은 천사장 전사로 나타난다.2)

 

이렇게 볼 때 역사적으로 멜기세덱은 살렘 즉 예루살렘의 왕이요 제사장이었다. 그는 정종이 분리되기 이전의 신정 정치체제에서 역사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볼 때 그는 분명 선민 이스라엘이 아니라 가나안의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중에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물론 그의 사역자(제사장)까지 있게 하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제사장의 직분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의 역사성에 보다는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멜기세덱을 소개하고 있다. 그를 의의 왕이요 평화의 왕이며 출생과 부모와 족보가 없으신 분으로 소개함으로써 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기에 적합한 분임을 지적하였다. 모세와 천사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는 제사장으로서도 레위 계통의 아론보다 더 근원적이시며 뛰어나신 분이시다. 그는 적어도 아래 세 가지 사실에서 레위의 제사장직을 초월하신다.

 

1. 그는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았다. 더 넓힌다면 레위인에게서 받은 것이다.
2. 그는 그보다 열등한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
3. 그는 레위같이 죽을 인간과는 대조적으로 영원히 사신다.3)

이렇게 하므로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의롭게 다스리시며 평화를 구축하실 것으로 기대되었던 메시아이심을 드러내고 있다(사 9:5-6; 32:17; 렘 23:5-6; 33:15; 단 9:24; 슥 9:1-10; 말 4:22).4)


1. George W. Buchanan, To the Hebrews(New York: Doubleday, 1972). p.117
2. Peter H. Davids, More Hard Sayings for the New Testament, p.104
3. George W. Buchanan, Op,cit., p.122
4. Ibid.,
http://www.revdavidsuh.com/

 

<자료 2>

창세기 14:18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나타나 제사장의 직능으로 떡과 포도주를 상징적으로 써서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있다.

 

멜기세덱과 같이 제사장과 왕의 두 직능을 한 몸에 겸비한다는 것은 후대에 이르러 이스라엘의 이상적 왕자로 되고, 따라서 이상적 왕자는 '멜기세덱과 같은 자'라고 칭함을 받았다(시 110:4).

 

이것은 히브리서 5:6, 7에 있어서 그리스도에의 적용에 대성(大成)되고 있다.

그런데, 그 당시 엘람 왕˙고임 왕˙시날 왕˙엘라살 왕이 소돔과 고모라를 침공했을 때,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사로잡혀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이 정병 318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추격하여 다메섹 좌편 호바에서 롯과 부녀, 그리고 재물을 다 찾았다. 돌아올 때 소돔 왕이 나와 그를 영접하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상술한 바와 같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축복해 주자 아브라함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줌으로써 십일조의 창시자가 되었다.

 

멜기세덱에 대해 보는 관점이 많고 구구하지만, 히브리서 7:1- 17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그는 영원한 제사장(하나님의 아들)의 모형이다. 그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한다.

 

그의 제사장직은 조계(祖系)를 전연 가지지 않은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과 유사하다. 그는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모형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탄생 2,000년 전에 이미 멜기세덱이란 인물로 예표되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보다 높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축복했고, 아브라함은 그에게 십분의 일을 주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히브리서 7:4, 7, 특히 7절에 "폐일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리만큼 영전이 컸다. 즉, 그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그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했다(창 12:3). 그가 아브라함을 축복한 점이 아브라함보다 높은 증표다. 떡과 포도주는 영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의한 축복을 암시한다(마 26:26- 29).

 

그리고 '살렘'은 예루살렘일 것이다. 그 이유로써,

ⓧ 살렘은 이스라엘 사람의 가나안정복 전부터 예루살렘이란 이름으로 존재했으며, 왕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다.

ⓨ 시편 76:2에서 살렘은 예루살렘(평화의 성읍, 평화의 소유란 뜻)의 단축형으로써 쓰이고있다. ⓩ 만일 멜기세덱이 다윗처럼 같은 이 도성의 왕이라면 시편 110:4에서 다윗의 주가 멜기세덱과 대비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① 예루살렘은 아브라함이 호바와 다메섹에서 귀환하는 도상에 있었다는 것(창 14:15, 17, 18) 등의점을 들 수 있다.

<자료 3>

 

1. 창세기에 등장하는 멜기세댁

창14장에 보면 엘람 왕 그돌라 오멜이 자기를 섬기는 이웃 나라들이 자신을 배신한 일에 격분하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나라를 쳐 전쟁을 일으키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들이 싯딤 골짜기에서 싸울 때 소돔과 고모라 왕이 그에게 패하여 병사들은 역청 구덩이에 빠지고 왕들은 겨우 도망했습니다. 엘람 왕은 소돔과 고모라 성에 들어가 모든 재물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 때 그 성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가족들도 포로로 잡혀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같은 롯의 소식을 듣고 집에서 길러온 용사 318명을 거느리고 단숨에 쫓아가 엘람 왕을 기습했습니다. 이 기습전에서 대승한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포로로 잡혀간 자기 조카 롯과 모든 사람들과 재물도 빼앗아 올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 올 때 소돔 왕이 친히 아브라함을 영접하러 마중 나왔으며 살렘왕 멜기세댁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라함을 영접했던 것입니다. 이 때 멜기세댁이란 이름이 성경에 처음 등장하고 있으며 이 자리에서 멜기세댁은 아브라함에게 축복했습니다. 그의 축복은 '천지의 주재이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의 대적을 너의 손에 부치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할 지로다'고 했습니다.

 

2. 멜기세댁의 신분

멜기세댁의 신분을 보면 그는 살렘 왕이라고 했습니다. 살렘이란 말은 평강이란 뜻입니다. 이곳이 어디인지 알려진바 없지만 지금의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한 도시로 아마도 그 지경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당시 살렘이란 지역을 지배하는 왕의 신분으로 있었으며 아브라함에게도 알려지고 그도 아브라함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에 대하여 전혀 몰랐다면 신분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의 노략물의 십분의 일을 바칠 이유도 없었거니와 멜기세댁에게 축복 기도를 받지도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을 풀어보면 멜기란 말은 왕, 세댁이란 말은 의란 의미로 멜기세댁이란 의의 왕이란 뜻인 것입니다. 그의 신분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그를 살렘의 왕이라고 했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고 했습니다. 히7장을 보면 멜기세댁은 아브라함보다 높은 자로 나와 있는데 그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해 주었으며 아브라함으로부터 11조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멜기세댁은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을 설명하는데 반드시 성경에 등장해야 할 인물입니다. 만약 이 사람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은 그의 제사장직에 대한 성경적인 증명이 전혀 없기 때문에 우리의 제사장이시며 왕이신 그의 직분에 대해 증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백성들의 속죄 제물이 되셨다면 그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율법에 따르면 그 속죄 제물을 드려야 할 사람이 대제사장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대인들에게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제사장이란 반드시 레위 지파의 자손 중에서 나와야 하는데 유다 지파이신 예수님이 무슨 성경적 근거로 대제사장 직분을 하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이 왕이 되시는 일은 그가 유다 지파에 속하셨으며 다윗의 자손이기 때문에 인정을 받으실 수 있지만 그가 대제사장이 되실 수 없는 것은 그는 레위 지파에 속한 제사장의 자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성경에 멜기세댁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의 속죄제물과 제사장 직에 대하여 설명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왜 멜기세댁이 등장하여 예수님으로 하여금 레위가 아니라 멜기세댁의 서열을 따라 제사장이 될 사실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까? 멜기세댁은 레위 자파도 아니요 아론의 자손도 아닙니다. 아론이나 레위란 인물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댁을 만난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의 직분은 반드시 레위지파의 자손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멜기세댁이란 사람이 이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제사장은 동시에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멜기세댁은 살렘 왕이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댁의 반열을 따라 제사장이 된 예수님은 멜기세댁처럼 왕과 제사장이 동시에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왕의 직분과 제사장 직분의 법적 근거를 만들어 놓으시기 위해 율법적인 대제사장이 생기기 이전에 이미 창세기에 멜기세댁을 등장시키신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시요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신분은 멜기세댁과 같이 영원히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왕이시며 우리의 제사장이신 예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 그에게 간구하며 그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3. 멜기세댁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히브리서 7:1-10)


1) 멜기세댁이란 이름에 담겨진 메시야적인 의미
멜기세댁이란 이름에는 메시야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연관되는 것입니다. 멜기세댁이란 이름이 의의 왕인 것처럼 사32:1절에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의로 통치하는 왕'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보라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공평으로 정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언하고 있는 '장차 의로 통치할 왕'이란 그리스도가 장차 만 왕의 왕으로 온 세상을 통치하실 일에 대한 예언인 것입니다. 이 예언은 유대인이 소망하고 있는 메시야왕국(천년왕국)에서 이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댁이란 이름은 그 이름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직분에 대한 예언적인 뜻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의 직분은 살렘 왕이라고 했습니다. 살렘이란 평화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살렘 왕이란 평화의 왕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분입니다. 사53:5절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또 사9장에서 주님의 탄생에 대한 예언에서 '평강의 왕'이란 이름으로 나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누리게 하신 평화의 왕이시며 평강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또한 멜기세댁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 주님에 대하여 히7:26절에서 '하늘보다 높이 되신 우리의 대제사장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멜기세댁은 그의 이름이나 그의 직분 등 모든 일에 있어서 다 그리스도의 예표 인물로서 적중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묘하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멜기세댁은 그리스도의 높으심을 증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멜기세댁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높으신 분이신 가를 보여 주셨다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에 대하여 기대와 소망은 가졌지만 그 분의 위치가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모세정도의 인물로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 각하느냐 뉘 자손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시 한 가지 문제에 대한 질문을 계속하셨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기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하시니 그들은 유구무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삼으셨지만 아브라함보다 더 높은 멜기세댁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바로 이 멜기세댁의 서열을 따라 왕과 제사장이 되신 분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멜기세댁의 신분이 마치 수수께끼처럼 나오고 있습니다. 그의 신분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고 했습니다. 방불하다는 말은 똑같다는 뜻이 아니라 비슷하다는 뜻입니다.

 

그에게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멜기세댁이 아담의 자손이 아니란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치고 아담의 자손이 아닌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멜기세댁은 천사였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천사가 왕으로 사람을 다스리며 제자상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다는 일은 성경에서 상상도 하지 못할 일입니다. 이 말의 뜻은 멜기세댁의 인간적인 계보가 전혀 없다는 데서 한 말입니다.

 

멜기세댁이 그리스도의 예표적 인물로 등장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족보가 없어야 합니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적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존재가 성경에서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존재로 기록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멜기세댁을 성경에 등장시키실 때부터 그의 족보를 기록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마 1장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러나 이 족보는 예수님의 육신적인 혈통관계를 계보로 만든 것이지 그 분은 원래가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족보에 해당되실 분이 아니십니다. 멜기세댁은 육신적인 예수님의 예표가 아니라 그의 왕권과 제사장 직분에 대한 서열로 등장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인간적인 족보가 성경에서 삭제되었으며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님의 아들처럼 등장시킨 것입니다.

 

결론 : 멜기세댁의 제사장 직분은 성경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넘겨 드림으로,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예표 인물로서의 성경적인 사명을 이룬 것입니다. 우리는 이 멜기세댁에 대하여 깊은 지식을 가짐으로 우리 주님의 제사장 직분에 대하여 놀라운 지식을 갖게 되며 우리의 신앙이 장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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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

 

1 여호와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 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5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6 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

7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

 

시편 110:1~7

 

루터가 1538년에 “시편 110편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말씀이다. 여기에는 예수의 강림과 부활과 그의 왕국이 분명히 예언되었다”고 언명했듯이 이 시는 구세주에 관한 진리를 설명한 중요한 시편이다.

 

첫 절에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셨다”고 시인은 말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으로 기록한 것은 시편 중 이곳 한 군데 뿐이다. 이것은 작가인 다윗이 어떤 방법으로 계시를 받은 내용으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하나님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의 주는 물론 메시아로 강림하실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서열(법통)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 된다”(4절)는 것이 시편 기자의 메시아 예언이다.

 

 

멜기세덱이란 창세기 14:18~20에 나오는 신비의 인물이다.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었을 때 그를 찾아왔다. 그는 “살렘왕인 동시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고 간단히 소개되어있다. 그러나 이 한마디는 극히 중요하다. 왕과 제사장의 역할을 겸한 분을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왕은 통치자를 뜻하며 최고의 권위를 상징한다. 특히 멜기세덱은 살렘에서 온 왕이라고 소개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살렘은 물론 예루살렘의 옛 이름이지만 “평화”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이므로 살렘 왕을 문자대로 읽으면 “평화의 왕”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평화의 왕으로 보는 것은 이사야서의 메시아 예언이나 신약성경이 말하는 공통점이다.

 

 

 

멜기세덱에 대하여는 히브리서 7장에 해설이 되었다. “그 이름을 번역하면(즉 멜기세덱이란 뜻은) 정의의 왕”이라는 뜻이라고(2절) 말하였다. 메시아를 “의로운 자”로 예언한 곳은 여러 번 있었다(렘 23:5, 말 4:2).

 

즉 “살렘 왕 멜기세덱”을 문자대로 풀면 ‘평화의 임금’이며 ‘정의의 왕’이라고 읽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명칭과 일치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 곧 평화를 이룩하기 위하여 오실 것이며, 하나님의 의를 수립하는 자로 탄생하실 것을 이미 예수 탄생 3천 년 전에 멜기세덱의 출현을 통하여 예고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었던 것이다.

 

멜기세덱은 왕인 동시에 제사장이었다.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로 막힌 담을 속량하는 중간적인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히브리서는 그 전체를 통하여 예수의 제사장적 역할, 곧 죄를 속량하는 자로 해석하고 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멜기세덱을 히브리서는 이렇게 소개한다.

 

“그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 7:3).

 

히브리서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조자만이 할 수 있는 동정녀 잉태라는 비상한 방법으로 파견되었음을 지적하여, 신비의 인물 멜기세덱처럼 아비도 어미도 족보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시작한 날도 생명의 끝도 없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예수의 시발점은 베들레헴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이고 그의 부활은 생명의 끝이 없는 영원자로서 지금까지 제사장의 직분을 하고 있음을 말한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날 때 그의 손에는 떡과 포도주가 들려 있었다. 이 두 가지는 옛날 제사 때 사용한 음식이며, 예수는 이 두 가지를 자신의 피와 살을 상징하는 것으로 언명하고 성만찬 예식을 창설하셨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기를 축복하고 떡과 포도주로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주는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10분의 1을 바쳐 지금부터 5천 년 전에 십일조 헌금을 창시하였다.

 

창세기와 시편과 히브리서에 나타난 멜기세덱의 기사를 요약하면 이렇게 된다. “멜기세덱의 법통을 따라 오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평화(사랑)와 정의를 수립하실 분이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해결할 영원한 제사장이며 우주를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cafe.daum.net/ALIL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