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의를 얻은 사람만이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의를 얻지 못하고 불의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평강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내 하나님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사 57:21). 필리핀 교도소에 가보면 사람들이 무섭습니다. 다리부터 얼굴까지 문신이 다 그려져 있고 눈빛도 매섭습니다. 하지만 교도소 안에 있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얼굴부터 다릅니다. 똑같은 죄수지만 눈동자가 빛나고 얼굴이 밝습니다. 옷도 똑같은 죄수복인데 저희 의료선교팀이 만들어준 ‘Freedom in Jesus’라고 적힌 죄수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옷에 적혀진 글씨처럼 몸은 감옥에 있어도 영혼이 의를 얻었음으로 하나님과 평강을 누리기 때문에 얼굴이 달랐던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복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내 믿음을 보여드려야 된다.’ 그래서 아브람은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입니다. 아브람이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바친 이유는 자신의 마음이 먹고 마시는 떡과 포도주에 있지 않고 탈취한 전리품에도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자신이 받은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에게 십일조를 드립니까? 우리 마음이 물질에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받은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3절에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요 5:23).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41장에서 애굽에 7년 풍년이 온 후 7년 동안 기근이 왔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바로 왕에게 가서 곡물을 달라고 요청하니까 요셉이 곡물을 다 가지고 있으니 그에게로 가서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메튜 헨리(Matthew Henry)라는 유명한 주석가는 이 이야기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아름답게 보여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복의 원천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복이 우리에게로 내려오는 유일한 통로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른 통로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통로는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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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과 멜기세덱 창세기 14:1-24 손재호목사
14:1-12절에 보면 가나안에 전쟁이 발발하게 된 원인은 이랬습니다. 당시 가나안과 그 주변은 여러 족속들이 나라를 이루고 지배국가와 지배를 받는 국가의 관계 속에 있었습니다. 당시 가장 강력한 국가의 왕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아래쪽 페르시아 만을 끼고 있는 엘람 제국(지금의 페르시아 지역)의 왕 그돌라오멜이었습니다. 그돌라오멜이 얼마나 강했는지 주변 국가의 왕들뿐만이 아니라 이곳으로부터 장장 1500km나 되는 먼 거리에 떨어져 있던 사해주변의 나라들까지 그에게 조공을 바칠 정도였습니다. 소돔왕 베라와 고모라왕 비르사와 아드마왕 시납과 스보임왕 세메벨과 벨라라고도 하고 지금은 소알이라고도 부르는 나라의 왕 등 다섯 나라의 왕들은 12년 동안 그에게 조공을 바쳐왔습니다. 그러다가 그돌라오멜이 엘람왕이 된지 13년째 되던 해부터는 조공을 바치지 않기로 하고 이들 다섯 나라는 지금은 사해바다 라고도 부르는 싯딤 계곡에 모여 동맹을 맺고 연합군을 만들어 엘람왕 그돌라오멜과 그와 동맹한 나라들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싯딤 계곡에는 역청 구덩이(도로 도장, 방부제 또는 방수제로 쓰였음)가 많아서 전투에서 패하여 퇴각하는 군사들에게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습니다. 소돔왕과 고모라왕은 역청 구덩이에 빠져 곤경에 처하였습니다. 나머지 세 나라의 왕은 산악 쪽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이렇게 다섯 나라가 크게 패퇴하자 가나안 땅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마구 짓밟혔으며 백성들은 재물과 양식을 모조리 약탈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이 난리는 소돔에 살고 있던 아브람의 조카인 롯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도 재산을 다 약탈당하고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이 살렘왕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기도 하였습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람을 맞아 하나님을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을 지으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으로 복 주시는 분이심을 말하면서 아브람의 승리가 대적을 아브람의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도우신 결과에 따른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19-20절에 보면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제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고 했습니다.
멜기세덱은 이번 전쟁에서의 승리가 아브람의 힘과 실력과 지략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말미암아 승리하게 되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복을 주시도록 축복 기도합니다. 살렘왕 멜기세덱이 승전하고 돌아오는 아브람을 마중 나와 축복한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7:1-3절에 보면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한 살렘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멜기세덱을 살렘왕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평화의 왕이란 뜻으로 멜기세덱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위해 존재하는 왕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지리적으로 예루살렘과 연관이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이라는 단어 자체는 ‘의의 왕’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가 의의 왕이라는 점은 의로우신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 구절을 오해해서 멜기세덱을 잘 못 이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출생도 사망도 없다’는 말은 그의 출생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신분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런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과 같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멜기세덱에 대한 이러한 표현은 처음이요, 나중으로서 영생을 주시는 참 하나님이시며, 또한 참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모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자기에게 복을 빈 멜기세덱을 자신보다 높은 자로 인정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멜기세덱이 살렘왕으로서 또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아브람을 위하여 복을 빌면서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이로써 아브람이 이번 전쟁에서 주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승리하게 되었음을 인정하고 이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곧 아브람이 소돔왕의 호의를 거절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였습니다. 아브람은 소돔왕이 준 재물로 부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지 않기 위해 실 한 올, 신을 매는 끈 하나라도 가져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전쟁을 치루면서 하나님에 대한 아브람의 믿음이 많이 성장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24절에 보면 “오직 소년들의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취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다만 아브람은 자신과 함께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이 먹을 것은 가져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자신과 동맹을 맺고 같이 싸우러 간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몫은 가져가도록 하였습니다.
만약 아브람이 소돔왕에게서 진리품을 받았다면 아브람이 부자로 살아갈 때 소돔왕은 자신이 아브람에게 많은 재물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브람은 전쟁에서의 승리가 자신의 지혜와 힘에 의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잘 알기에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야 할 영광을 자신이 재물을 취함으로써 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전쟁에서 승리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선심을 쓰듯이 “물품은 네가 취하라”고 하는 소돔왕의 호의를 거절한 것입니다. 이로써 아브람은 그가 누릴 수 있는 부를 포기하였습니다. 그리고 멜기세덱을 통해서 드러나 알게 된 천지의 주재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만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존하는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아브람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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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제14장 강해 - 롯의 구출과 멜기세덱
가나안 북부 메소보다미아 지역의 4개국인 시날, 엘라살, 엘람, 고임과 가나안 남부 사해 지역의 5개 소국인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소알의 국가 간 연합 전쟁이 처음으로 성경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전쟁의 원인은 남부의 5개 사해 동맹국들이 12년 둥안 조공을 바치며 섬기던 엘람의 맹주 그돌라오멜을 반역했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은 남부 동맹국들의 패배로 끝났고, 소돔 근처에 있던 롯도 이때에 잡혀가고 말았습니다. 아브람은 롯을 구출하기 위해 가병 300명을 이끌고 북방 연합군들을 공격하고 승리하여 롯을 구출하였습니다. 아브람이 귀환할 때에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영접하였고, 아브람은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1: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 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시날은 바벨론 지역을 의미하고 왕 이름은 ‘아브라벨’입니다. 그 뜻은 ‘신들을 지키는 간수’, ‘강한 백성’ 등입니다. 그는 시날 땅 최초의 통치자인 니므롯의 후손입니다(10:10). ‘엘라살’으 유브라데 동편 남부 바벨론이 한 성읍인 ‘라르사’로 추측합니다. 라르사는 바벨론의 요충지입니다. ‘아리옥’은 존경한다는 뜻입니다. 바벨론 남부 지역의 넓은 영역을 통치했던 막강한 실력자로 보고 있습니다. ‘엘람’은 동으로 바사, 서로 티ㅡ리스, 남으로 페르시아 만, 북으로 앗수르에 둘러싸인 산간지역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매우 호전적이어서 항상 주변 국가들에게 위협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돌라오멜’은 ‘한 웅큼의 곡식알’이라는 뜻으로 이번 원정에 참가한 4개국 중 가장 탁월한 실력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임’은 ‘열방’이라는 뜻으로 동방의 유목민들이 세운 작은 부족 국가인 듯합니다. ‘디달’은 ‘두려워하다, 빛나다, 경외’의 뜻으로, 일개 유목민을 이끌던 우두머리로서 점차 주변의 약한 족속을 침탈하여 세력을 키워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2: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소돔은 ‘큰 불’이란 뜻입니다. 이 명칭은 역청 지대인 소돔이 훗날 유황불 심판으로 멸망당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베라’는 ‘선물, 은사’의 뜻입니다. 남부 지역의 연합군 지도자 격입니다. ‘고모라 왕 비르사’ ‘고모라’는 ‘갈라진 장소, 거주, 물이 많은’ 등의 뜻입니다. ‘비르사’는 강한, 악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약탈과 전쟁에 능했던 그의 일면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드마‘는 농사짓는 성읍이라는 뜻으로, 농업 위주의 정착 생활을 하던 지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시납‘은 ’아버지의 이’란 뜻입니다. ‘스보임’은 거친 들, 작은 영양이라는 뜻으로 비옥하지 못한 고산 지대의 성읍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메벨’은 이름이 높아진다는 뜻입니다. ‘벨라’는 삼키다는 뜻이며, ‘소알’은 작다는 뜻입니다.
‘싸우니라’ 이는 전쟁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전쟁 기사입니다. 이 이방인들의 전쟁에 대한 기사가 굳이 아브람과 롯의 작별 사건 뒤에 언급이 되는 이유는, 첫째 탐욕의 눈으로 소돔을 향해 간 롯이 이방인들 사이의 전쟁에 휘말려 큰 고초를 겪었듯이, 세상을 좇아가는 자의 앞길은 결코 평탄하지 못하다는 것이며, 둘째 줄곧 가나안을 방랑하던 아브람이 이 전쟁으로 인해 가나안에서 확고한 위치에 올라섬으로써 가나안을 아브람에 주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차근차근 그 언약을 성취해 나가시는가를 보여줍니다.
3: 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 염해에 모였더라. 싯딤 골짜기는 울창한 숲으로 된 골짜기, 소금 계곡, 아카시아의 골자기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해 남쪽에 위치한 역청이 많은 지역으로 추정이 됩니다. 모세가 창세기를 기술할 당시에 싯딤 골짜기는 이미 염해로 변했습니다.
4: 이들이 십 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 십 삼 년에 배반한지라. 그돌라오멜은 메소보다미아 동맹국의 지도자격에 해당하는 인물론 셈 계열에 속한 자로 추정합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 중에는 그돌라오멜을 위시한 북방 4개 동맹국의 사해 5개 연합국(함 계열의 가나안 후손)에 대한 침략을 가나안 후손에 대한 노아의 예언의 선취로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나안 5개국은 그돌라오멜이 통치한 지 제13년에 조공을 거부하고 반역을 했습니다. 그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12,13장에 나오는 아브람과 롯이 겪었던 기근과 관계가 있을 수 있다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계속되는 기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가중되는 조공 부담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모반을 꾀했을 것입니다.
5: 제 십 사 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동맹한 왕들이 나와서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 족속을, 사웨 기랴다임에서 엠 족속을 치고, ‘아스드롯 가르나임’은 ‘두 뿔의 아스드롯’이란 뜻입니다. 이 명칭은 이곳이 두 뿔 가진 가축들을 많이 소유한 곳이거나, 지형이 두 뿔을 닮았기 때문에, 혹은 아스다롯 여신을 섬기던 곳이기 때문이라고 추정합니다. 이 지명을 단순히 ‘가르나임’이라고도 합니다. 갈릴리 동쪽에 위치한 아스드롯 북방 4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으로 추정합니다. ‘르바 족속’은 거인족으로 이 족속 최후의 왕은 바산 왕 ‘옥’입니다(신 3:11). ‘함’은 암몬 족속의 성읍 ‘랍바’의 옛날 이름으로 추측합니다(신 3:11). 길르앗 야베스 북쪽 20km 지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수스 족속’ 후대에 암몬 족속에 의해 ‘삼숨밈’으로 불린 족속을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신 2:20). ‘사웨 기랴다임’은 후일 르우벤 지파의 성읍이 되었습니다. ‘엠 족속’은 두려운 족속이라는 뜻으로 초창기 모압 땅에 살던 거인족입니다(신 2:10).
6: 호리 족속을 그 산 세일에서 쳐서 광야 근방 엘바란까지 이르렀으며, 호리족속은 동굴에 거하는 무리, 혈거인이란 뜻으로 세일 산을 거점으로 하여 동굴에 거주하던 족속입니다(신 2:12). 이들은 후에 에돔 족속에 의해 전멸되었습니다. ‘그 산 세일’ ‘세일’이란 수풀이 울창한, 털이 많다는 뜻입니다. 이런 지명에 알맞게 이곳은 사해 남부, 아라바 평원 동부에 있는 고신 지대로서 울창한 숲과 많은 바위 및 동굴로 형성이 되어 있습니다. 이곳에 에돔 족속이 거주한 이후로 ‘세일’이라는 이름일 붙여지게 됩니다(36:30; 대하 25:11). ‘엘바란’은 아카바 만의 북쪽 연안으로 바란 광야의 동편에 위치합니다.
7: 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 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 남진을 계속하던 메소보다미아 4개국 연합군이 아라바 광야 쪽으로 향하지 않고 시내 반도쪽으로 방향을 선회했습니다. 시내 반도 북쪽과 가나안 남부 지역이 만나는 곳은 나중에 에서의 손자인 아말렉(36:12) 자손들의 주 활동 무대가 되었습니다. ‘엔미스밧’은 ‘심판의 우물’이라는 뜻으로 이 명칭은 물이 귀한 팔레스틴 영내에서 흔히 발생하는 일로서 한 우물을 두고 여러 부족이 분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데스’는 거룩하다는 뜻으로 출애굽 아시 바위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던 곳이자 하나님의 대언자 모세가 백성을 판결했던 장소(민 20:14)입니다. ‘하사손다말’(엔게디)은 종려나무의 전지라는 뜻으로 종려나무, 포도나무 등이 많은 곳입니다. 아모리 족속은 중근동 지방에 널리 분포되어 살던 함 계열의 족속입니다.
8,9: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접전하였으니, 곧 그 다섯 왕이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 네 왕과 교전하였더라. 메소보다미아의 연맹국들은 시리아, 팔레스틴 북부, 요단 동안, 사해 동안의 군사 도로를 따라 여러 가나안 족속들을 쳐부순 뒤 사해 연안 5개 동맹국들과 일전을 위해 싯딤 골짜기로 향했습니다. 사해 연안 동맹국들이 메소보다미아 연합군을 맞아 전장을 싯딤 골짜기로 정한 것은 이곳에 흔한 역청 구덩이를 저지선으로 활용하여 유리한 위치에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10: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군사가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역청 구덩이가 많은 장소를 전장으로 정한 사해 연안 5개 연합국들은 오히려 이 전쟁에서 큰 패배를 맛보고 말았습니다. 이는 그들의 전략에 허점이 있었다기보다는 탐심으로 인해 타락 일로를 걷던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입니다. 사악한 인간은 자신의 어떤 재능으로도 하나님의 심판의 칼날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11,12: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메소보다미아 동맹국들은 사해 연안의 가나안 족속들이 조공을 거절하자 전쟁을 일으켜 그에 상응하는 재물들을 약탈하여 갔습니다. 이는 인간사의 모든 전쟁이 탐욕에 기인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아브람과 작별 이후 롯은 소돔에서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으로 등장을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세상적 삶을 귀하게 여겨 하나님의 곁을 떠난 자가 받게 될 보응이 어떤 것인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13: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고하니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자더라. 포로가 되어 메소보다미아로 끌려가던 사람들 중 일부가 탈출을 하여 아브람에게 모든 사실을 알렸습니다. 여기에서 ‘히브리 사람’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을 합니다. 이 말은 셈 계열의 후손으로써 나중에는 선민 이스라엘의 통칭으로 사용이 됩니다(출 2:6).
14: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 십 팔 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길리고’ 이 말은 출생하다는 뜻으로 전쟁이나 매매로 얻은 종이 아닌 순수히 아브람이 소유한 종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주인에게 대한 결속력이 강했을 것입니다. ‘연습하다’는 말은 훈련하다, 교육을 받다는 뜻입니다. 이는 군사상의 훈련보다는 단지 유목민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된 가축보호나 집안 경계를 위한 파수꾼으로서의 훈련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런 미약한 수준의 훈련을 받은 식솔 318명만을 데리고 북쪽 연합군을 쫓아갔다는 것은 조카에 대한 애정과 함께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롯이 자신을 떠날 때에는 믿음으로 외로움을 달래고, 롯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며 그를 구하고자 하는 아브람은 믿음의 조상이기에 앞서 한 집안의 큰 어른이며 인격자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15,16: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왔더라. 소수의 군사로 대군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동시 다발적으로 야간 기습 공격을 감행하는 것이 최상의 전략이라고 합니다. 이런 형태의 전략은 기드온의 300용사가 미디안 대군을 격파할 대에도 사용이 되었습니다(삿 7장).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군사의 수나 무기의 우수성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시느냐 아닌가가 더욱 중요합니다. 실로 하나님은 전쟁에 능한 신이시묘(시 24:8),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만군의 주이십니다(삼상 17:47). 호바는 다메섹 북쪽 24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으로 추정이 됩니다.
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출하는 것은 군사를 일으킨 목적이기도 합니다. 아브람은 롯은 물론 함께 글려간 다른 사람들도 구출해 주었습니다. 후에 아브람이 소돔이나 살렘 왕으로부터 크게 존귀함을 받은 것도 이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능한 한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것, 이것이 바로 선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해를 비추시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입니다.(마 5:45-48).
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전쟁 당시 소돔 왕은 ‘베라’였습니다. 전쟁 시에 죽었다면 그의 후계자일 것입니다. 살았다면 베라입니다. 그는 자기와 자기 부족의 안녕을 도모해 준 아브람에게 경의를 표하며, 아브람이 구출해 온 소돔 출신 포로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브람을 맞으러 나왔을 것입니다. 사웨 골짜기는 예루살렘에서 약 500m 정도 떨어진 기드론 시내 상류에 위치한 골짜기로 추정합니다. 이곳을 ‘왕곡’ 즉 왕의 골짜기로 부른 것은 소돔 왕이나 살렘 왕이 이곳에서 아브람의 개선을 맞이한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살렘(שׁלם)’은 평강이란 뜻인데(히 7:1) 예루살렘의 예살 지명(시 76:2)으로도 알려집니다. ‘의의 왕’(히 7:2)이란 뜻의 ‘멜기세덱’(מלכי־צדק)에 대해서는 ① 영적인 존재 ② 노아의 장자인 셈 등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문자 그대로 이방인이면서도 타락한 주변 문화를 극복하고 순전하고 신실한 믿음을 경주한 가나안의 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요세푸스, 칼빈).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멜기세덱이 전쟁으로 지친 아브람과 그 군사에게 가나안의 주산물인 떡과 포도즙을 가지고 나온 것은 군사들의 원기를 회복시키고, 침략자를 물리치고 평화를 가져다 준 자들에게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의 신분을 밝혀주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히 7:3)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해석을 한 것입니다. 이간 대제사장 아론의 반차를 초월한 자로서 영원한 대제사장 직무를 수행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해 주는 존재로 인정하고 있습니다(히 7:11-15).
19,20: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멜기세덱의 제사장적 임무로 아브람에게 축복을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가리켜 ‘천지의 주재’라고 하였습니다. 우주 만물을 조성하시고 지금도 여전히 소유하며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엘 엘룐:אל עליון) 이는 하나님의 완전함과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초월적 능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멜기세덱이 대적을 물리친 아브람을 향해 인간적 칭송을 늘어놓기 보다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권고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천지의 주재시며 지극히 높으신 분으로 고백할 줄 아는 신앙의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이는 율법에서 성문화되기 전에 이미 고대 근동 지방에서 신전 및 신정 봉사자들의 생계를 위해 바쳐졌던 보편화된 제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준 것은 그런 보편적인 차원을 넘어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거룩한 신성을 인정하며 행하신 멜기세덱의 축복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며, 그의 제사장 직분을 인정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십일조의 근본정신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데서 비롯되어야 하며 또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의 표시로부터 비롯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1-23: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오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소돔 왕은 정복자가 전리품을 취했던 고대의 관례에 따라 아브람이 얻은 전리품을 그의 소유로 인정을 하였습니다. 다만 자신의 백성들은 자신에게로 보내라고 요청을 하였습니다. 아브람은 히브리인들의 일반적 서약 방식으로 손을 들어서 맹세를 하면서(신 32:40; 계 10:5,6), 소돔에 속하였던 모든 물품들은 한 올의 실이나 신발 끈이라도 가지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소돔 왕이 자신의 배려로 아브람을 부자로 만들었다는 말을 듣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당시의 관례로는 전혀 거절할 필요가 없지만, 아브람으로서는 타락하고 부도덕한 이방인의 물품을 꺼려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24: 오직 소년들의 먹을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깃을 취할 것이니라. 아브람은 조카 롯의 구출 작전에 이웃 아무리 족속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분깃은 단호하게 거절했지만 함께 동행한 이웃의 분깃은 보장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입장에서는 분깃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는 상대방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하는 아브람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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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멜기세덱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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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 그는 누구이고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멜기세덱 (qdMelchisedec) 「의의 왕」
아브함 시대의 예루살렘 제사장(창 14:18시 110:4
"이 멜기세덱은 살렘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히 7:1) 멜기세덱과 그의 행한 일에 대한 역사적 언급은 창세기 14:18-20에 나온다. 그런데 히브리서 7장에서는 대제사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면서 전장을 이 멜기세덱과 비교하고 있다. 여기서 멜기세덱은 왕으로 묘사한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의의 왕이요 살렘 왕이라 하였다. 다시 말해서 평화의 왕이란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는 부모가 없으며 족보도 없고 시작과 끝도 없어서 하나님의 아들과 같으며 영원한 제사장으로 있는다 하였다(7:2-3).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멜기세덱의 이야기는 중간 청동기 시대로서 B.C. 1500년 이전의 일이었다. 그 시대는 다양한 도시 국가들로 나라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돌라 오멜 왕과 그 동맹군이 소돔과 고모라 왕을 사로잡고 거기서 살았던 롯도 포로로 잡아갔다. 이 소식을 듣고 아브라함이 그의 집에서 훈련시킨 318명의 사병을 거느리고 가서 그 동맹군을 격파해 롯을 구하고 탈취 당했던 물건과 많은 노략물을 얻어 돌아온다(창 14:1-16). 그러나 거기서 중심 인물은 그돌라 오멜 왕에게서 회복을 바랐던 소돔 왕과 아브라함을 축복한 멜기세덱이다. 특별히 멜기세덱은 제사장 왕으로서 아브라함에게서 1/10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분명히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은 역사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도 멜기세덱을 평화의 왕이요 의의 왕이라 불렀다. 이 의의 왕이란 말로서는 그가 누구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살렘이란 말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이 말은 완성하다, 다 지불하다는 뜻으로 보는 이가 있으나 평화란 뜻이 옳다. 그러므로 살렘 왕은 평화의 왕이란 말이다. 그런데 사해 사본이나 랍비들 그리고 조세프스는 시편 76:2을 따라 살렘을 시온과 동일시한다. 이렇게 볼 때 멜기세덱은 시온 즉 예루살렘의 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에는 사독 계열 제사장이 생겼고 이들이 아론 제사장 계열과 합치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사독과 멜기세덱은 같은 어근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또 유대주의에서는 멜기세덱에 대해 하스모니아 왕조의 유대 제사장 왕들에서 어떤 증거를 찾을 수가 있다(B.C. 164ㅡ 63)고 생각하며 거기서부터 사두개 파가 나왔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들은 제사장이요 왕이었던 멜기세덱의 후예라고 생각한다. 그 밖에 다른 견해는 사해 사본에서 발견되는데 거기서 멜기세덱은 천사장 전사로 나타난다.2)
이렇게 볼 때 역사적으로 멜기세덱은 살렘 즉 예루살렘의 왕이요 제사장이었다. 그는 정종이 분리되기 이전의 신정 정치체제에서 역사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볼 때 그는 분명 선민 이스라엘이 아니라 가나안의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중에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물론 그의 사역자(제사장)까지 있게 하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제사장의 직분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1. 그는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았다. 더 넓힌다면 레위인에게서 받은 것이다. 이렇게 하므로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의롭게 다스리시며 평화를 구축하실 것으로 기대되었던 메시아이심을 드러내고 있다(사 9:5-6; 32:17; 렘 23:5-6; 33:15; 단 9:24; 슥 9:1-10; 말 4:22).4) 주
<자료 2> 창세기 14:18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나타나 제사장의 직능으로 떡과 포도주를 상징적으로 써서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있다.
멜기세덱과 같이 제사장과 왕의 두 직능을 한 몸에 겸비한다는 것은 후대에 이르러 이스라엘의 이상적 왕자로 되고, 따라서 이상적 왕자는 '멜기세덱과 같은 자'라고 칭함을 받았다(시 110:4).
이것은 히브리서 5:6, 7에 있어서 그리스도에의 적용에 대성(大成)되고 있다. 그런데, 그 당시 엘람 왕˙고임 왕˙시날 왕˙엘라살 왕이 소돔과 고모라를 침공했을 때,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사로잡혀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이 정병 318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추격하여 다메섹 좌편 호바에서 롯과 부녀, 그리고 재물을 다 찾았다. 돌아올 때 소돔 왕이 나와 그를 영접하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상술한 바와 같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축복해 주자 아브라함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줌으로써 십일조의 창시자가 되었다.
멜기세덱에 대해 보는 관점이 많고 구구하지만, 히브리서 7:1- 17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그는 영원한 제사장(하나님의 아들)의 모형이다. 그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한다.
그의 제사장직은 조계(祖系)를 전연 가지지 않은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과 유사하다. 그는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모형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탄생 2,000년 전에 이미 멜기세덱이란 인물로 예표되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보다 높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축복했고, 아브라함은 그에게 십분의 일을 주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히브리서 7:4, 7, 특히 7절에 "폐일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리만큼 영전이 컸다. 즉, 그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그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했다(창 12:3). 그가 아브라함을 축복한 점이 아브라함보다 높은 증표다. 떡과 포도주는 영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의한 축복을 암시한다(마 26:26- 29).
그리고 '살렘'은 예루살렘일 것이다. 그 이유로써, ⓧ 살렘은 이스라엘 사람의 가나안정복 전부터 예루살렘이란 이름으로 존재했으며, 왕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다. ⓨ 시편 76:2에서 살렘은 예루살렘(평화의 성읍, 평화의 소유란 뜻)의 단축형으로써 쓰이고있다. ⓩ 만일 멜기세덱이 다윗처럼 같은 이 도성의 왕이라면 시편 110:4에서 다윗의 주가 멜기세덱과 대비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① 예루살렘은 아브라함이 호바와 다메섹에서 귀환하는 도상에 있었다는 것(창 14:15, 17, 18) 등의점을 들 수 있다. <자료 3>
1. 창세기에 등장하는 멜기세댁 창14장에 보면 엘람 왕 그돌라 오멜이 자기를 섬기는 이웃 나라들이 자신을 배신한 일에 격분하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나라를 쳐 전쟁을 일으키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들이 싯딤 골짜기에서 싸울 때 소돔과 고모라 왕이 그에게 패하여 병사들은 역청 구덩이에 빠지고 왕들은 겨우 도망했습니다. 엘람 왕은 소돔과 고모라 성에 들어가 모든 재물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 때 그 성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가족들도 포로로 잡혀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같은 롯의 소식을 듣고 집에서 길러온 용사 318명을 거느리고 단숨에 쫓아가 엘람 왕을 기습했습니다. 이 기습전에서 대승한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포로로 잡혀간 자기 조카 롯과 모든 사람들과 재물도 빼앗아 올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 올 때 소돔 왕이 친히 아브라함을 영접하러 마중 나왔으며 살렘왕 멜기세댁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라함을 영접했던 것입니다. 이 때 멜기세댁이란 이름이 성경에 처음 등장하고 있으며 이 자리에서 멜기세댁은 아브라함에게 축복했습니다. 그의 축복은 '천지의 주재이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의 대적을 너의 손에 부치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할 지로다'고 했습니다.
2. 멜기세댁의 신분 멜기세댁의 신분을 보면 그는 살렘 왕이라고 했습니다. 살렘이란 말은 평강이란 뜻입니다. 이곳이 어디인지 알려진바 없지만 지금의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한 도시로 아마도 그 지경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당시 살렘이란 지역을 지배하는 왕의 신분으로 있었으며 아브라함에게도 알려지고 그도 아브라함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에 대하여 전혀 몰랐다면 신분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의 노략물의 십분의 일을 바칠 이유도 없었거니와 멜기세댁에게 축복 기도를 받지도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을 풀어보면 멜기란 말은 왕, 세댁이란 말은 의란 의미로 멜기세댁이란 의의 왕이란 뜻인 것입니다. 그의 신분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그를 살렘의 왕이라고 했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고 했습니다. 히7장을 보면 멜기세댁은 아브라함보다 높은 자로 나와 있는데 그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해 주었으며 아브라함으로부터 11조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멜기세댁은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을 설명하는데 반드시 성경에 등장해야 할 인물입니다. 만약 이 사람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은 그의 제사장직에 대한 성경적인 증명이 전혀 없기 때문에 우리의 제사장이시며 왕이신 그의 직분에 대해 증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백성들의 속죄 제물이 되셨다면 그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율법에 따르면 그 속죄 제물을 드려야 할 사람이 대제사장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대인들에게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제사장이란 반드시 레위 지파의 자손 중에서 나와야 하는데 유다 지파이신 예수님이 무슨 성경적 근거로 대제사장 직분을 하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이 왕이 되시는 일은 그가 유다 지파에 속하셨으며 다윗의 자손이기 때문에 인정을 받으실 수 있지만 그가 대제사장이 되실 수 없는 것은 그는 레위 지파에 속한 제사장의 자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성경에 멜기세댁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의 속죄제물과 제사장 직에 대하여 설명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왜 멜기세댁이 등장하여 예수님으로 하여금 레위가 아니라 멜기세댁의 서열을 따라 제사장이 될 사실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까? 멜기세댁은 레위 자파도 아니요 아론의 자손도 아닙니다. 아론이나 레위란 인물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댁을 만난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의 직분은 반드시 레위지파의 자손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멜기세댁이란 사람이 이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제사장은 동시에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멜기세댁은 살렘 왕이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댁의 반열을 따라 제사장이 된 예수님은 멜기세댁처럼 왕과 제사장이 동시에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왕의 직분과 제사장 직분의 법적 근거를 만들어 놓으시기 위해 율법적인 대제사장이 생기기 이전에 이미 창세기에 멜기세댁을 등장시키신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시요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신분은 멜기세댁과 같이 영원히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왕이시며 우리의 제사장이신 예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 그에게 간구하며 그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3. 멜기세댁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히브리서 7:1-10)
또한 그의 직분은 살렘 왕이라고 했습니다. 살렘이란 평화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살렘 왕이란 평화의 왕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분입니다. 사53:5절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또 사9장에서 주님의 탄생에 대한 예언에서 '평강의 왕'이란 이름으로 나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누리게 하신 평화의 왕이시며 평강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또한 멜기세댁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 주님에 대하여 히7:26절에서 '하늘보다 높이 되신 우리의 대제사장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멜기세댁은 그의 이름이나 그의 직분 등 모든 일에 있어서 다 그리스도의 예표 인물로서 적중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묘하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멜기세댁은 그리스도의 높으심을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은 어느 날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 각하느냐 뉘 자손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시 한 가지 문제에 대한 질문을 계속하셨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기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하시니 그들은 유구무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삼으셨지만 아브라함보다 더 높은 멜기세댁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바로 이 멜기세댁의 서열을 따라 왕과 제사장이 되신 분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멜기세댁의 신분이 마치 수수께끼처럼 나오고 있습니다. 그의 신분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고 했습니다. 방불하다는 말은 똑같다는 뜻이 아니라 비슷하다는 뜻입니다.
그에게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멜기세댁이 아담의 자손이 아니란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치고 아담의 자손이 아닌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멜기세댁은 천사였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천사가 왕으로 사람을 다스리며 제자상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다는 일은 성경에서 상상도 하지 못할 일입니다. 이 말의 뜻은 멜기세댁의 인간적인 계보가 전혀 없다는 데서 한 말입니다.
멜기세댁이 그리스도의 예표적 인물로 등장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족보가 없어야 합니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적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존재가 성경에서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존재로 기록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멜기세댁을 성경에 등장시키실 때부터 그의 족보를 기록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마 1장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러나 이 족보는 예수님의 육신적인 혈통관계를 계보로 만든 것이지 그 분은 원래가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족보에 해당되실 분이 아니십니다. 멜기세댁은 육신적인 예수님의 예표가 아니라 그의 왕권과 제사장 직분에 대한 서열로 등장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인간적인 족보가 성경에서 삭제되었으며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님의 아들처럼 등장시킨 것입니다.
결론 : 멜기세댁의 제사장 직분은 성경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넘겨 드림으로,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예표 인물로서의 성경적인 사명을 이룬 것입니다. 우리는 이 멜기세댁에 대하여 깊은 지식을 가짐으로 우리 주님의 제사장 직분에 대하여 놀라운 지식을 갖게 되며 우리의 신앙이 장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https://cafe.daum.net/MD2000 |
멜기세덱
1 여호와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 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5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6 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
7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
시편 110:1~7
루터가 1538년에 “시편 110편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말씀이다. 여기에는 예수의 강림과 부활과 그의 왕국이 분명히 예언되었다”고 언명했듯이 이 시는 구세주에 관한 진리를 설명한 중요한 시편이다.
첫 절에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셨다”고 시인은 말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으로 기록한 것은 시편 중 이곳 한 군데 뿐이다. 이것은 작가인 다윗이 어떤 방법으로 계시를 받은 내용으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하나님께서 “내 주”께 말씀하셨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의 주는 물론 메시아로 강림하실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서열(법통)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 된다”(4절)는 것이 시편 기자의 메시아 예언이다.
멜기세덱이란 창세기 14:18~20에 나오는 신비의 인물이다.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었을 때 그를 찾아왔다. 그는 “살렘왕인 동시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고 간단히 소개되어있다. 그러나 이 한마디는 극히 중요하다. 왕과 제사장의 역할을 겸한 분을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왕은 통치자를 뜻하며 최고의 권위를 상징한다. 특히 멜기세덱은 살렘에서 온 왕이라고 소개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살렘은 물론 예루살렘의 옛 이름이지만 “평화”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이므로 살렘 왕을 문자대로 읽으면 “평화의 왕”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평화의 왕으로 보는 것은 이사야서의 메시아 예언이나 신약성경이 말하는 공통점이다.
멜기세덱에 대하여는 히브리서 7장에 해설이 되었다. “그 이름을 번역하면(즉 멜기세덱이란 뜻은) 정의의 왕”이라는 뜻이라고(2절) 말하였다. 메시아를 “의로운 자”로 예언한 곳은 여러 번 있었다(렘 23:5, 말 4:2).
즉 “살렘 왕 멜기세덱”을 문자대로 풀면 ‘평화의 임금’이며 ‘정의의 왕’이라고 읽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명칭과 일치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 곧 평화를 이룩하기 위하여 오실 것이며, 하나님의 의를 수립하는 자로 탄생하실 것을 이미 예수 탄생 3천 년 전에 멜기세덱의 출현을 통하여 예고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었던 것이다.
멜기세덱은 왕인 동시에 제사장이었다.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로 막힌 담을 속량하는 중간적인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히브리서는 그 전체를 통하여 예수의 제사장적 역할, 곧 죄를 속량하는 자로 해석하고 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멜기세덱을 히브리서는 이렇게 소개한다.
“그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히 7:3).
히브리서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조자만이 할 수 있는 동정녀 잉태라는 비상한 방법으로 파견되었음을 지적하여, 신비의 인물 멜기세덱처럼 아비도 어미도 족보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시작한 날도 생명의 끝도 없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예수의 시발점은 베들레헴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이고 그의 부활은 생명의 끝이 없는 영원자로서 지금까지 제사장의 직분을 하고 있음을 말한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날 때 그의 손에는 떡과 포도주가 들려 있었다. 이 두 가지는 옛날 제사 때 사용한 음식이며, 예수는 이 두 가지를 자신의 피와 살을 상징하는 것으로 언명하고 성만찬 예식을 창설하셨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기를 축복하고 떡과 포도주로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주는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10분의 1을 바쳐 지금부터 5천 년 전에 십일조 헌금을 창시하였다.
창세기와 시편과 히브리서에 나타난 멜기세덱의 기사를 요약하면 이렇게 된다. “멜기세덱의 법통을 따라 오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평화(사랑)와 정의를 수립하실 분이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해결할 영원한 제사장이며 우주를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cafe.daum.net/ALIL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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