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제사와 그리스도의 제사(히 10:1-18)
10장 1절부터 18절까지는 히브리서 전체를 전·후반부로 나눌 때 전반부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와 달리 전반부와 중반부 후반부로 히브리서를 구분할 경우 본문은 4장 10절부터 계속 진술해온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 사역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중반부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때문에 본문은 앞에서 언급했던 진술들을 다시금 거론하며 반복해서 정리해주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요약된다.
1. 구약제사의 불완전성을 지적한 부분(1-4절)
이는 1절부터 4절까지 기술된 내용이다. 저자는 1절에서 구약의 제사로는 죄인들을 온전케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 이는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이며 참 형상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 내용은 8장 5절과 9장 8-10절 이미 언급되었든 교훈이다.
여기서 ‘장차 오는 좋은 일’은 9장 11절에서 보도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신 대속의 역사를 일컫는다. 즉 구약의 제사는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의 하나의 그림자일 뿐 참 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참 형상’이라고 할 때 ‘형상’으로 번역된 ‘에이콘’(εἰκών)은 ‘그림자’, 또는 ‘허상’과는 반대 되는 ‘실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부정 불변사’인 ‘우크’(οὐκ)와 함께 이것이 구약의 제사를 지칭한 표현이라고 할 때 구약의 제사는 실제 죄를 완전히 사하는 효능을 가진 제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단어는 다른 실체를 가리키는 하나의 표시등과 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모든 건물에는 화재나 재난 시에 출입구를 알려주는 유도등이 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빨리 도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율법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들의 죄를 대속해 주실 것이란 사실을 가르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 그것이 사람의 죄를 사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몽학선생’으로 비유하기도 하였다(갈 3:24, 25). 몽학선생은 주인의 아들이 장성한 사람이 될 때까지 보호해 주고 인도해주는 역할을 하는 노예를 가리킨 말이다. 율법은 그처럼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역할일 뿐이지 실제 그것을 통해서 죄를 사함 받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러기에 1절의 결론에서 저자는 구약의 제사로는 결코 제사를 드리는 자를 온전케 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2절부터 4절의 내용은 9장 1-22절까지 진술했던 내용을 요약 정리해준 것이다. 한 마디로 구약의 제사가 불완전하였기에 매년 번복하여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2절에서 만일 구약의 제사가 온전한 것이었다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깨달음’이란 표현은 완전한 죄사함이 이루어졌다면 자신의 중심에 다시금 죄의식을 갖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는 취지의 발언이다. 그리고 그리되었다면 다시 제사를 드릴 이유가 없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않았으리요”라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제사를 거듭하여 드린다고 하는 것은 죄사함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3절에서는 구약의 제사가 도리어 죄를 생각하게 하는 요소가 있다고 진술하였다. 이는 구약의 제사가 죄를 정결케 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에게 죄를 자각하게 하는 효능으로 나타났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4절에서 황소나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처음 구원을 위해 정해진 언약이 하나님과 사람의 언약이었다. 그러므로 짐승의 희생으로 사람이 지은 죗값을 대신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구약의 제사로는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2. 그리스도의 제사(5-10절)
구약의 제사에 대한 불완전성을 지적한 저자는 5절부터 10절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희생하여 드린 제사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다. 5절은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라는 말로 시작하였다. 여기서의 ‘그러므로’란 1절부터 4절에서 밝힌 바와 같이 ‘구약의 제사가 온전치 못함으로’란 뜻을 전제한 표현이다. 그리고 ‘세상에 임하실 때에’란 구약 제사가 가리킨 그 대속의 실체되신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가리킨다. 즉 그리스도의 대속에 대한 설명의 서론을 이렇게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간 진술은 구약성경의 인용과 그에 대한 해석이다.
5절에서는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라고 하였다. 이 부분은 시편 40편 6절의 인용구이다. 시편에서는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지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다윗이 쓴 시로서 전반부인 1-10절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찬양시다. 그리고 후반부인 11-17절은 다윗이 맞게 된 어떤 질곡의 현실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채워진 비탄시적 성향을 가진 시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시편에서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로 기록한 부분을 히브리서 저자는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란 말로 변형시켜 인용한 것이다. 이는 구약의 히브리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역이 그렇게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가 70인 역을 인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본래 히브리 원본인 맛소라 본문을 직역하면 ‘당신이 나를 위해 귀들을 열으셨나이다’라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70인 역은 어떻게 귀들을 열었다는 문장을 한 몸을 예비하였다는 의미로 번역을 하였는가? 이를 옥스퍼드원어성서대전에서는 이 시가 그 시대 종과 주인의 예를 비유한 시였다고 설명하였다. 즉 유대인들은 종을 부릴 때 6년 동안만 섬기게 하고 제 7년째에는 종에서 풀어 자유하도록 율법이 규정하고 있다(신 15:12). 그러나 종이 자발적으로 평생 주인을 섬기겠다는 의지를 밝히게 되면, 주인은 그 종의 귀를 뚫어 영영히 종이 되게 할 수 있었다(신15:16, 17). 즉 ‘귀를 열었다’는 것은 종이 주인을 평생 섬기겠다는 의지를 밝힘으로 귀를 뚫었다는 유대인의 관습적 표현이었다는 설명이다. 때문에 그랜드종합주석에서는 70인 역이 히브리 원본에서 귀를 가리킨 오젠(אזן)이란 단어를 ‘몸’을 가리키는 소마(σῶμα)로 의역한 것인 듯 하다고 설명하였다. 즉 귀를 뚫었다는 것이 종이 주인께 대한 헌신을 나타내는 것인데, 이를 그리스도께 적용시킨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께 순종한 것을 드러낸 표현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아무튼 히브리서 저자가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짐승의 희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 몸’이 있었는데 그분이 곧 그리스도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마치 종이 스스로 주인의 종으로 살겠다고 자원하여 귀를 뚫은 것처럼 스스로 기쁨으로 이 일을 감당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6절에서는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라고 진술을 이어갔다. 여기서 ‘전체로 번제함’의 원어는 ‘전부’를 뜻하는 ‘홀로스’(ὅλος)와 ‘불사름’을 뜻하는 ‘카우토스’(καυτός)가 합성된 단어이다. ‘모두 태워드리는 번제들’을 의미한다. 이 제사는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헌신을 상징하여 드리는 제사이다(출 29:38-42; 레 8:18). 그리고 속죄제는 범죄 한 사람이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이다. 이러한 제사를 율법의 규정에 두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킬 것을 명하신 것은 하나님이셨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말한 것이다. 때문에 여기서의 이 표현은 그 자체가 완전한 것이 아니란 측면의 언급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그런 것으로 우리들의 죄가 온전히 사해지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7절의 내용은 시편 40편 7절을 인용한 것으로 두 가지 의미를 나타낸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이미 구약성경에 예언하신 대로 이루어진 역사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두루마리 책에 나를 기록하였다고 한 말씀에 담긴 뜻이다. 여기서의 두루마리는 구약성경을 가리킨 것으로서 실제 구약성경은 창세기 때부터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예언해 주고 있다.
또 다른 한 가지 의미는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이다. 이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라고 진술하였다. 이는 시편 40편 8절을 인용한 것인데 거기서는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를 히브리서 저자는 주님께 적용시켜 주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얼마나 기뻐하셨는가를 밝혀주는 내용으로 해석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야만 하고, 그것도 십자가에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셔야만 하는 희생의 길임에도 불구하고 그 길이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이를 심히 큰 기쁨으로 행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님의 마음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 16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라고 표현하였듯이 우리 성도들 모두가 본받아야 할 마음임에 분명하다
8절에서부터 10절의 내용은 역시 앞에서 인용한 시편을 재분석하면서 그것이 나타내고자 하는 뜻을 결론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는 부분이다. 8절 서두에서 ‘위에 말씀하시기를’이라고 표현한 것은 5절부터 7절까지 인용된 시편 40편 6-8절까지를 지칭한 것이다. 즉 구약에서 번제와 속죄제를 드린 것은 완전한 속죄를 위해 드린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께서 하라 명하신 것이기에 드린 것이란 표현이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번제와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에 따라 드렸던 것일 뿐이라고 하였다.
9절의 앞부분은 시편 40편 8절을 인용한 것으로서 본장 7절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다’는 표현의 기사를 재 분석해준 내용이다. 그리고 후반절은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밝혀주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하나님의 뜻은 첫 것을 폐하고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첫 언약을 폐하시고 새 언약을 세우기 위함이었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즉 그리스도의 대속의 역사는 과거 율법으로 시행되었던 의식의 제도를 폐하시기 위함이었음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진술은 역시 그 시대 기독교와 유대교의 제사 제도에 대한 극명한 대립적 관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다시금 유대교로 돌아가기를 시도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었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안식일과 주일의 성수 문제도 그러했다. 그리고 제사장과 제사의 시행 문제 역시 매우 심각한 오해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주님께서 오셔서 대속의 역사를 완성하셨기에 더 이상 제상장직의 직무는 쓸모없게 된 것이며 아울러 제사를 시행하는 것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밝히고자 하였던 것이다. 때문에 이에 대한 결론으로 10절에서 저자는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라고 하였다.
‘이 뜻을 좇아’라고 한 말은 하나님의 뜻을 좇았음을 뜻한다. 처음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실패한 구원 언약을 대신 성취하고 아울러 그 실패의 죗값까지 대신 갚아주시기로 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법, 즉 구속의 법을 좇았다는 말이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단 번에 자신의 몸을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은 제사장의 직무나 제사가 필요 없게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저자가 그리스도의 희생에 ‘단 번’이란 표현을 쓴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드린 제사는 완전하며 영원하다는 것을 함축한다. 그렇지 않다면 구약의 제사처럼 또 다시 중복하여 드려져야 할 것이지만 여기서의 ‘단 번’이란 이제는 더 이상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음을 전제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고 표현하였음에서도 나타난다. 여기서 ‘거룩함’으로 번역된 ‘헤기아스메노이’(ἡγιασμένοι)는 ‘정결하게 하다’, ‘거룩하게 하다’란 뜻의 ‘하기아조’(ἁγιάζω)의 완료 수동태이다. 거룩하게 됨이 완료시제로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그의 택한 백성들은 이미 거룩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완료 되었다는 것은 역시 속죄를 위한 어떤 제사도 더 이상은 행할 이유가 없음을 전제한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이 수동태라는 것은 성도들이 거룩하게 됨이 성도들 자신의 행위에 의함이 아니라는 의미가 함유되어 있다. 곧 우리가 거룩하게 된 것은 주님의 대속의 결과로 얻게 된 은혜임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은 전적 그리스도의 대속의 결과인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가 행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어떤 대가를 요구하신 바 없다. 오직 주님의 공로, 오직 주님의 은혜로 이르게 된 결과인 것이다.
3. 그리스도의 희생의 완전함과 영원성(11-18절)
그리스도께서 드린 제사의 완전성을 진술해 가는 과정에서의 특징은 모두 셋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죄를 없이 하지 못하는 구약의 제사
11절에서 저자는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본절에서는 구약제사의 취약성의 특징으로 세 가지 단어가 집약되었다. 그것이 ‘매일’이라는 말과 ‘서서’라는 말, 그리고 ‘자주’라는 단어이다. 이는 구약의 제사의 불완전성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들이다. 매일 이나 자주란 단어는 완성되지 못한 제사를 뜻한다. 계속 제사가 진행된다는 이러한 표현은 아직 완성이 아니란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서서 제사를 드린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12절에서는 주님께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하였다. 이러한 주님의 제사와 비교적 측면에서 서 있다는 것은 아직 제사가 끝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그것은 11절의 결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죄를 없게 하지 못하는 제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구약의 제사도 제한된 범위에서의 부분적이며 일시적인 용서와 정결을 가져다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기에 9장 13절에서는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이라고 진술하였다. 그러면서도 히브리서 저자는 본절에서 그런 제사로는 죄를 없이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9장 13절과 10장 11절의 말씀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 9장에서의 의미는 육신에 관한 것으로서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정결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절의 의미는 단 번에 그리고 완전히, 그리고 영원토록 죄를 사하지 못한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서 속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즉 구약의 제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과정에서 죄를 억제하게 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부분적이고 일시적으로 피하게 하는 효력을 논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하여 그것이 근본적으로 죄와 죄책을 면케 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본문의 진술이다. 때문에 저자는 구약의 제사의 불완전성을 지적하기 위하여 ‘매일’, 그리고 ‘서서’, ‘자주’ 제사를 드려야 했던 것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드린 제사의 완전성
구약제사의 불완전성을 지적한 저자는 이어진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제사의 완전성을 서술해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드린 제사의 완전성에 대해서 본절에서는 두 가지 특징을 밝히고 있다. 하나는 ‘한 영원한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표현이다.
여기서 ‘한 영원한 제사’란 앞 절의 ‘매일’이나 ‘자주’와 대조되는 표현이다. ‘한’은 단 한번을 뜻하고, 영원한 제사란 말은 그 제사의 효력이 영원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은 역시 전 절에서 서 있다는 말과 대조되는 표현이다. 이는 완전한 죄사함이 이루어졌기에 더 이상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서서 있다는 것이 제사가 완전히 종결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면 앉아 있다는 것은 이제 그 직무가 끝났음을 함축한 발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3절에서는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신다고 하였다. 이는 시편 110편 1절을 인용한 내용이다. ‘발등상’은 왕이 의자에 앉을 때 발을 올려놓은 발판을 가리킨다. 따라서 원수들로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란 말은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권세를 완전히 파하시고 승리자로 재림하실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수사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재림하실 때까지 제사를 드릴 이유가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14절에서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기 때문이라고 답변하였다. 여기서 ‘거룩하게 된 자들’이라고 할 때 ‘거룩’이란 ‘성별’이나 ‘구별’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기 백성, 즉 택한 백성들을 가리킨 것으로 이해함이 합당하다. 주님의 희생제사는 택한 백성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음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3) 새 언약에 대한 온전한 성취
주님의 제사의 완전성에 대한 성격에 대해 진술한 저자는 그것이 바로 구약에서 예언한 새 언약의 성취란 사실을 보도해 주고 있다. 15절부터 17절까지는 예레미야 31장 33, 34절을 설명해주고 있는 내용이다. 예레미야서에 대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이라고 15절에서 언급하였다. 그리고 16절은 예레미야 31장 33절을 인용한 것으로 이 내용에 대해서는 8장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구약이 아닌 새 언약을 주실 것을 예레미야를 통해서 예언하였는데 이를 히브리서 기자는 8장에서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으로 해석을 하였다. 즉 주님께서 자기 몸으로 희생 제사를 드린 것은 자기 스스로 취하신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것이었음을 밝혔다. 그런데 그것을 여기서 다시금 결론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17절 역시 예레미야 31장 34절을 인용한 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희생은 자기 백성들의 죄와 불법을 다시 기억치 아니하실 새 언약을 성취한 것이므로 더 이상 동물을 잡아 드리는 제사는 드릴 필요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과 관련한 긴 진술의 결론으로 18절에서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진술을 통해서 그 시대 기독교가 세워지는 일이 얼마나 험난하고 어려운 일이었는가를 생각해 본다. 천 년을 넘게 행해온 교회의 관습을 뛰어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제사장의 직무가 없어지고 제사를 전혀 드리지 않는 기독교를 바라보는 유대인들의 시선이 고을이 만무하고 또 심히 도전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심각한 갈등의 역사 때문에 기록된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서 두 가지 구속사적 교훈을 깨닫게 된다. 하나는 기독교의 우월성에 대한 확신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말씀에 대한 깨달음은 오직 성령의 조명으로만이 이해와 해석이 가능한 영역이란 사실이다. 왜냐하면 본서의 기자기 인용한 시편이나 예레미야가 선언한 새 언약에 대한 내용들은 그야말로 특별한 성령의 조명이 아니고서는 이것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을 염두에 둔 기사라는 사실에 도저히 접근이 불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들어지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된 것인지에 대한 진리의 확신, 그리고 기독교가 과거 여호와 신앙을 계승한 참 된 교회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 아울러 진리에 대해 좀 더 눈을 뜰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히브리서를 통해서 얻게 되는 가장 큰 은혜란 생각이 들어진다.
특히 대속의 역사란 심히 큰 희생과 고난이 요구되는 길이었다. 그러나 마치 종이 주인의 종으로 평생을 살겠다하여 귀를 뚫은 것처럼 주님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기쁨으로 대속을 감당하신 길이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주님의 마음이라면 우리 역시 일생의 길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인생이어야 함을 생각해 본다.
즉 믿음의 길이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쫓고, 내가 가고 싶고, 내가 원하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되 그 행함이 나에게 손해가 되고, 그 길이 심히 큰 희생의 길이라 해도 기꺼이 순종하겠다는 자세로 임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길인 것이다.
구속받은 자의 특권과 의무(히 10:19-25)
지금까지 히브리서 기자는 도입부인 1장 1절부터 4장 13절까지 그리스도의 존재의 우월성을 논증하였다. 그리고 중반부에 해당하는 4장 14절부터 본장 18절까지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무의 우월성과 관련한 논증이었다. 이처럼 기독론에 대한 일련의 교리적 논증을 마감한 저자는 이제부터 13장 17절까지 앞에서 진술한 교리적인 논증을 토대로 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 삶을 교훈하는 내용으로 후미를 채워가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본 단락은 믿음을 전진을 위해 노력하라는 권면과 함께 배교를 경고하는 내용으로 전개되는 교훈이다. 성도들의 기본적인 자세와 실생활을 권면하고 있는 본문에서는 크게 둘로 그 교훈이 구분된다.
1. 성도의 특권
성도의 특권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1) 하늘 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됨
저자는 19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진술하였다. 이는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존전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 특별한 은혜를 강조한 표현이다. 여기서 언급된 ‘성소’란 9장 12절에서 밝힌 그리스도께서 들어가신 하늘 성소를 가리킨다. 물론 그렇다하여 천국에도 성전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구약의 성소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 곳이기에 이 역시 하나님이 계신 곳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담력을 얻었다는 말은 구약에서 일반 백성들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던 상태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 자체가 죽음으로 인식되어 그것은 심히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하여 성도들의 모든 죄가 사해진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그런 염려를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취지의 발언이다. 비슷한 의미에서 바울은 에베소서 3장 13절에서 이렇게 진술한 말씀이 있다.
(엡 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신약의 성도들은 현 세상에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만인 제사장 시대란 지고(至高)한 은혜아래 살고 있다. 아울러 하나님의 존전 앞에도 전혀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근거를 히브리서 기자는 19절에서 ‘예수의 피’를 힘입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 20절에서는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라고 하였다. 여기서의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을 가리킨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실 때 위에서 아래로 갈라진 사건을 가리킨다. 그러나 본질적인 의미는 누구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만인 제사장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를 ‘산 길’이라 표현한 것은 이것이 영생으로 나아가는 생명의 길이란 의미에서이다. 따라서 주님의 대속이후를 사는 신약의 성도들은 제사장을 통하지 않고도 직접 하나님과 교제 교통할 수 있는 은혜의 시대를 맞게 된 것이다. 아울러 하늘의 하나님 존전에도 당당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효력이 성도들에게 가져다준 일차적인 특권이면서도 가장 큰 은혜인 것이다.
2) 성도들에게는 영원토록 큰 제사장이 있다는 것
저자는 21절에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있다는 것을 두 번째 성도들의 특권으로 제시하였다. 여기서 ‘하나님의 집’이란 표현에 대해서 원어성서대전이나 그랜드종합주석에서는 ‘우주적인 교회’ 즉 지상의 모든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을 하였다. 일차적인 의미로서 일리가 있다. 주님을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라 하였으니 신약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란 사실에서 볼 때 연관성이 있다. 아울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진다는 측면에서도 주님께서 신약교회의 제사장 되신다는 것도 의미가 있는 진술이다.
즉 신약의 교회가 인간 제사장 제도가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과 교통 교제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구약의 교회제도와 비교해 볼 때 신약 교회의 제사장은 그리스도인 것이 맞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지상의 교회만이 아니라 천상에 있는 하나님의 집을 함축한 표현이다. 앞의 19절에서 ‘하늘 성소’를 말씀했고, 20절에서 ‘산 길’ 곧 생명의 길을 말씀한 것에서 보면 문맥의 흐름상 이 역시 천상, 곧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킨 표현으로 해석됨은 매우 타당하다. 즉 주님은 천상에서도 성도들의 제사장이 되신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표현 역시 천국에서도 제사장이 필요하다는 뜻의 진술은 아니다. 주님의 중보의 효력, 즉 죄사함의 효력이 영원하다는 사실을 강조한 상징적 표현이다. 그리고 성도들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입었다는 원리에서 보면 택한 백성들에게 큰 대제사장은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계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택한 백성들에게는 영생과 관련하여 완전한 보험에 들어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영생을 실패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하고 완벽한 보험이 성도들에게는 확보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큰 대제사장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세상이 두 쪽 나도 전혀 염려할 이유 없는, 경제가 아무리 어렵고, 세상사 돌아가는 것이 아무리 험악하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것에 염려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우리들에게는 위대한 대제사장인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이다.
3) 성도들에게 있게 된 변화
그것은 22절 상반절에서 밝혀주고 있는 부분이다. 저자는 성도들의 변화에 대해서 세 가지를 나열했다. 첫째, 마음의 뿌림을 받았다는 것, 둘째, 양심의 악을 깨달았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은 몸을 맑은 물로 씻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마음에 뿌림을 받았다는 것은 과거 구약시대 대제사장이 희생의 피를 우슬초에 묻혀 속죄소에 뿌린 것을 비유한 말이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어떻게 죄사함에 이르게 되었는가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구약시대는 속죄소에 피를 뿌림으로 임시적이나마 정결함을 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는 어떻게 성도들에게 뿌려졌는가는 당시로서는 의문을 가질 수 있는 문제였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피는 속죄소에 뿌려진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심령에 뿌려졌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나를 위한 역사였다고 믿는 믿음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 6:54)”라고 하신 것 역시 주님의 희생이 나를 위한 것임을 믿는 믿음을 가리킨 것과 의미를 같이한다.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의 피를 뿌렸다는 것이나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신다는 것은 같은 뜻의 표현인 것이다.
그리고 양심의 악을 깨달았다는 것은 거듭난 사람의 양심의 상태를 지적한 표현이다. 즉 자신에 대하여 죄인이란 사실과 그에 대한 최종 심판에 대하여 진심으로 자각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몸을 맑을 물로 씻었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대속이 성도들에게 미친 효력을 언급한 것으로서 완전한 죄사함에 대한 표현이다. 바로 이것이 성도들이 받은 특별한 은혜요 특권인 것이다.
특히 원어의 문법에서 보면 마음에 뿌림을 받았다는 것이나 물로 씻었다는 표현은 완료시제로 되어 있다. 그리고 양심의 악을 깨달았다는 것은 소유격으로 되어 있다. 이는 앞으로 이루어가야 할 문제가 아니라 이미 완료 된 것이며 소유한 은혜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즉 택한 백성들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변화가 이미 완료 완성되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2. 성도의 의무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큰 은혜를 입은 성도들에게 저자는 이제 그들이 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것이 22절 후반부부터 25절까지 보도된 내용이다. 여기서는 4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다.
1) 진실하고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함(22b)
22절에서 저자는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에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다면 이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권면하였다. 여기서 ‘참 마음’에서 ‘참’으로 번역된 ‘알레디네스’(ἀληθινῆς)는 가짜라든지 불완전한 것의 반대 개념을 가진 ‘알레데노스’(ἀληθινός)의 소유격 형용사다. 즉 ‘실제’나 ‘진짜’라는 뜻을 나타낸다. 한마디로 진실하고 충성된 마음을 가리킨다.
이를 좀 더 실감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와 반대되는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참이나 진실과 반대되는 것은 가식이나 외식이란 개념을 생각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나타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나, 또는 목적이 순수하지 못하고 자신을 위한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과정을 가리킨다. 바리새인들이 큰 거리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했던 것, 그리고 이마에나 옷 술에 크게 경문을 달고 다닌 것은 모두 참 마음이라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을 사람들에게 나타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행위를 금으로 비유하면 순금이 아니라 다른 철이 섞여 있어서 18k나 24k로 비유한다면 여기서 저자가 말한 ‘참 마음’은 100% 순금을 가리킨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도의 자세, 주님을 위해 행하는 모든 행위는 바로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절대 다른 조건을 붙여서는 안 된다. 결코 다른 목적을 가져서도 안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오직 하나님을 순종하고, 그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온전한 믿음’은 좀 더 성장된 믿음을 가리킨다. 여기서 ‘온전한’으로 번역된 ‘폴레로포리아’(πληροφορία)는 ‘그 양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비유하면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어서 새들이 깃들일 수 있을 만큼 성장한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러한 저자의 표현은 성도들은 날마다 성장해 가야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어제 보다는 오늘이, 작년 보다는 금년이 좀 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해가고, 충성이나 헌신의 양도 좀 더 깊고 넓고 높아져가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믿음이란 성장하지 않으면 반드시 퇴보하게 되어있다.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성장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죽기까지 멈추어선 안 되는 길이다.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도 계속해서 전진해야할 길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인 것이다.
2) 내세의 소망을 견고하게 붙들어야 함(23절)
참 마음과 진실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것을 권면한 저자는 23절에서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미쁘시니’로 번역된 헬라어는 ‘피스토스’(πιστός)로서, ‘신실한’, ‘신뢰할 만한’이란 뜻을 갖는다. 즉 하나님의 약속은 믿을 만 하다는 표현이다.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표현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민수기 23장 19절에서는 하나님은 식언치 않으신다고 말씀하셨다. 야고보서 1장 17절에서는 변함이 없으시다고 하였고, 마태복음 5장 18절에서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라고 말씀하기도 하셨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틀림없이 지켜질 약속이라는 뜻이다.
그러기에 성도는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야 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믿는 도리의 소망’이란 말씀이 약속한 내세에 관한 언급이다. 즉 부활과 영생, 특히 믿음의 수고와 헌신에 따라 더해 주시는 영광스런 기업과 관련된 약속을 가리킴이다.
때문에 다음 장인 11장에 가서는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견지하는 것이 결국 내세의 것들임을 매우 상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즉 성도는 내세의 소망을 든든히 붙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의 성공은 여기에서만 가능하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네 종류의 밭에서도 말씀한 바와 같이 세상 것을 염려하는 사람은 말씀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처음에는 어느정도 말씀이 그 속에서 자라는 것 같지만 세상사 문제로 어려움이 오면 결국 믿음은 무너지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세를 소망하며 그것을 견고히 붙잡은 성도는 어떤 가운데서도 믿음의 변질이 있을 수 없다. 세상의 포기도 거기서 가능하고, 극한 환란을 이기는 힘이나 끝까지 참고 견디어 내는 인내 역시 내세의 소망이 분명한 사람만이 해 낼 수 있는 믿음의 열매이다.
그리고 저자가 진술한 본문을 보면 두 가지 구원 원리에서 진술이 이어지고 있음이 발견된다. 먼저는 값없이 받은 은혜의 구원이다. 그것은 바로 전반 절에서 말한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에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음을 얻은 것이 그것이다. 이는 기본 구원에 해당하는 것으로써 택한 백성들 모두에게 거저 주어진 은혜이다. 그러기에 이것들의 단어가 모두 과거 완료시제요 소유격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은혜를 입은 자들이라면 이제 참 마음, 진실한 믿음, 그리고 믿음의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을 것을 권면하였다. 이는 이제 기본 은혜를 입은 자들이 힘써서 성취해 가야할 2단계 구원, 즉 성화구원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때문에 ‘굽게 잡아’로 번역된 원어는 현재 능동태 동사이다. 이는 성도들이 행위를 통해서 성취해가야 할 구원의 단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원을 얻는 것은 신앙생활의 절정이며 목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거저 받은 것으로서 신앙의 단계에서 보면 가장 기초적인 것이요 신앙생활의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 교회들은 온통 여기에만 힘을 쏟고 있다. 그것은 처음부터 신앙의 원리를 잘못 오해한 것이다. 마치 달음질 하는 선수가 향방 없이 달리는 것과 같고, 격투기 선수가 허공에다 주먹을 뻗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인 것이다(고전 9:26).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6장에서는 이런 것들은 초보적인 것으로 다시 터를 닦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던 것이다.
3) 성도들은 서로를 돌아보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함(24절)
끊임없는 신앙의 성장과 하나님 약속을 견고히 붙잡을 것을 권면한 저자는 24절에서 성도들 간의 피차에 서로 사랑의 관심을 갖고 믿음생활에 서로 도움이 되어야 함을 권고하였다. 24절에 나타난 의미는 두 가지다. 하나는 성도들 간에 서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과 선행에 대해 서로 격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돌아보라는 말은 관심을 가져야 함을 뜻한다. ‘격려’로 번역된 원어의 뜻은 ‘선동’, ‘자극’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용기를 갖고 더 잘하도록 힘을 북돋아 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거기에 사랑과 선행이란 서술(敍述)이 부기(附記)되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진실한 형제 사랑과 어려운 형제들을 돌아보고 도움을 주는 행위를 뜻한다.
어떻게 보면 믿음생활이란 혼자는 행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선행도 어려운 이웃이 있어야만 할 수 있고, 사랑 역시 상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까닭이다. 그러기에 교회란 혼자로서는 설수 없다. 때문에 주님은 교회 공동체의 외적 구성요소와 관련하여 두 세 사람이라고 말씀하였다(마 18:20).
특히 진리의 길은 좁고 협착한 길이라고 하였다. 그러기에 가는 사람이 적을 것이라고 말씀하였다. 때문에 이 길은 심히 외롭고 또 고독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거짓 것들로 인한 심각한 도전에 노출되어 있기도 하다. 말세를 사는 성도들일 수록 다수와 물량에 의한 상대적 빈곤감도 상당한 압박감으로 작용할 것이다. 때문에 진리를 좇는 진실한 성도들은 믿음의 형제들 간에 각별한 관심과 서로를 격려하여 힘을 북돋아 주는 역할들이 필요하다.
당시 외형적으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던 유대교에 비해 기독교는 그야말로 심히 보잘 것 없는 상태였다. 그로인하여 개종한 유대인들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일들이 여기저기서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는 물질적으로 당하는 어려움을 참아내지 못해서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한 때 열과 성의를 다하여 주님을 위해 산다고 하였지만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오히려 대적하는 자들의 조롱과 핍박만이 가중되기에 견뎌내지 못하고 돌아가는 성도들도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 같은 진리 안에서, 같은 길을 가는 기독교인들은 서로를 돌아보고 또 돕고 격려하는 일이 매우 요구되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우는 비단 그 시대만은 아니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로 진리를 좇는 길은 어렵고 힘든 길이다. 따라서 성도들 간에 서로를 돕고 또 격려하는 일들이 필요하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전도서 4장 12절에서는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삽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라고 말씀하였다. 혼자로는 감당할 수 없지만 서로를 돕고 격려하는 것은 어려움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동력이 되어 줄 수 있다는 말씀이다.
4) 모이기를 힘써야함(25절)
저자가 마지막으로 권면한 것은 성도들 간에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성도들은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며 말씀의 가르침을 받고 가르침을 받은대로 실천해야 할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열심을 내어 모이기를 힘쓰는 것은 성도의 기본적인 본분이고 의무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성도들 간에 모이는 것에 대하여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이에 대하여 그랜드종합주석에서는 세 가지의 형태를 소개하였다.
첫째, 유대계 신자들로서 교회 보다는 유대인들의 회당에 모이기를 보다 중히 여긴 자들과, 둘째는 영지주의를 신봉하는 자들로서 교회에서는 더 배울 것이 없다는 지적 교만에 빠져 교회의 모임에서 떨어져 나간 자들이다. 그리고 셋째는 이방 불신자들이나 유대교도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교회의 모임에 참여하기를 두려워한 자들이다.
이유가 무엇이었던 당시 교회들이 모이기를 힘쓰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교회 공동체의 결속력이 약화되고 이제 막 시작한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존립 자체마저도 와해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때문에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이라면 서로를 돌아보고 격려하며 모이기를 힘써야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벌겋게 달아오른 숯불이라 하더라도 한 개의 숯불로는 그렇게 큰 화력을 기대할 수도 없고 불길은 금방 꺼져버리고 말 것이다. 숯불이 여러 개가 함께 합쳐져 있을 때 화력은 배가의 효력으로 나타나고 불길 역시도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것처럼, 신앙생활은 성도들 간에 자주 모이고 그 모임 안에 함께 해야 만이 진정한 신앙의 열매를 기대할 수 있고 더 좋은 결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교회를 가까이 하지 않고서 신앙을 성공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역시 교회를 가까이 하면 할수록 믿음은 더욱더 견고해지고, 그 열매는 더욱더 많은 결실을 거두게 될 것이다. 고로 어느 시대를 사는 성도들이든 믿음의 성장과 승리를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모이기에 열정을 다해야만 한다. 모이지 않고서는 가르침을 받는 일도, 실천 실행하는 일도 행할 수 없는 까닭이다. 특히 믿음생활이란 삶의 일부분이 아니며, 삶의 목적이요 중심이기에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 중심적인 삶은 성도들에게 있어 그만큼 절대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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