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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연구

히브리서 13장 - 실천편

by 은총가득 2021. 9. 2.

 

 

 

하나님은 우리 편(히 13:1-6)

 

13장은 히브리서의 마지막 장이다. 그동안 그리스도와 기독교의 우월성에 대해 변증해 왔던 히브리서 기자는 본서 마지막장에 와서 다시 한 번 성도들의 올바른 신앙생활을 권면하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전체적인 내용은 3등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1-6절에서는 성도의 경건생활에 대하여 권면하고 있는 부분이다. 7절부터 17절까지는 성도의 견고한 신앙생활에 대해 보도한 내용이다. 마지막 후반부에 해당하는 18절부터 25절까지는 중보기도 요청과 송영, 그리고 문안 인사와 축도로써 본서 전체를 끝맺고 있다. 그중 여기서는 1-6절까지 보도한 내용에서 그 교훈적 의미를 생각해 본다. 본 단락에서는 성도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경건생활을 위해 실행해야 할 실천적 행위와 반대로 경건생활을 위해 필히 경계해야 하는 중요 요건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 내용은 네 가지로 구분된다.

 

 

 


1. 형제 사랑에 대한 권면(1-3절)

저자는 1절에서 아주 짤막하게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할 것을 권면하였다. 여기서 히브리서 저자가 지적한 ‘형제’란 혈연적 관계를 말함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교회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킨 표현이다. 당시 성도들에게 이러한 권면을 해야 했던 이유는 기독교가 유대교나 로마 정부로부터 매우 혹독한 박해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믿음 안에 있는 형제들끼리 서로를 돌아보고 도움을 주어야 하는 일들이 적극적으로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형제 사랑을 강조하면서 권면한 내용은 3가지로 요약된다.

1) 중단 없는 사랑

이는 사랑을 계속해야 한다고 한 말씀이 주는 의미이다. 여기서 ‘계속하고’로 번역된 ‘메네토’(μενέτω)는, ‘지속하다’, ‘계속되다’, ‘남아 있다’, 등의 뜻을 가진 ‘메노’(μένω)의 현재 능동태 동사이다. 따라서 이러한 저자의 표현으로 보아 기독교 공동체 안에 그동안 사랑의 교제들이 지속되어 왔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하기에 저자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중단 없는 사랑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의 ‘형제’란 표현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믿음의 형제들을 가리킨 것임을 부정하는 학자들은 없다. 그러나 대부분 주석가들은 유대교에 속한 유대인들까지 포함한 것이라는 견해들을 밝히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원수까지도 사랑할 것을 교훈하신 내용을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사복음서에 나타난 주님의 행적에서 보면 유대교를 주님께서 사랑하신 것은 아니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사단의 자식으로 정죄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임을 천명하기도 하셨다.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나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도 돌려 대라는 등의 교훈은 육신과 관련된 문제에 국한 된 것이지 진리를 대적하고 기독교를 배교하는 자들까지 사랑할 것을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주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하신 바도 있다. 또 교회의 말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7)는 말씀도 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마 10:14)”고 하신 말씀도 있다. 바울도 그런 말을 하였다.


(고후 6:14-16)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특히 본서 저자는 6장에서 유대교에 대하여 타락한 천사를 비유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셨음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주님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를 하고 있는 자들로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원리적으로 맞지가 않다. 따라서 여기서의 사랑의 대상자는 교회 공동체 안에 속한 자, 당시로서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교훈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오늘날 우리 시대에 적용을 시킨다면 기독교 공동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 적용시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오늘날 기독교 안에는 그 시대의 유대교보다도 더 잘못된 교회나 가르침들이 너무나도 횡횡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씀을 오늘에 적용시킨다면 참 된 진리 안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 간에는 어떤 경우라도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가 중단 없이 계속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 섬김과 봉사

두 번째 사랑의 관계는 심정적인 문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섬김과 봉사로 나타나야 함을 강조한다. 이를 위해 저자가 실례를 삼은 것이 아브라함이다. 즉 아브라함이 천사를 대접했던 창세기 18장의 사건을 예로 든 것이다. 당시 상황은 이러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이 장막 문에 앉아 있었고, 그때 사람 셋이 지나가는 것을 아브라함이 목격하였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지나가는 그 행인들을 불러 송아지를 잡아 접대한 것이었다. 이는 실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해 주기 위해 보내주신 천사였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은 그들을 단순이 지나가는 나그네로 알고 접대를 하였는데 천사를 대접한 것이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히브리서 기자가 사랑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아브라함의 사례를 언급한 이유는 사랑은 곧 섬김과 봉사를 통해서 완결되는 것임을 밝히려 함에 그 목적이 있다. 오늘날과 같이 숙박제도나 시설이 미비했던 고대시회에서는 나그네나 손님을 잘 대접하는 것이 큰 미풍양속이었다. 특히 하나님의 선민으로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손님 접대하기를 힘쓸 것을 명하는 율법규정이 주어지기도 하였다(신 10:18, 19). 따라서 이스라엘에서는 손님을 접대하는 것이 신자들 간에 중요한 의무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손님 접대는 무엇보다 무조건적인 희생이며 봉사라는 사실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 그러한 뜻에서 주님은 그런 말씀을 하신 바 있다.
(눅 14:12-14)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여기서의 교훈적 의미는 잔치를 배설할 때 실제로 형제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주고자 하신 교훈의 목적은 믿음생활에 어떤 대가를 바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자 함에 교훈의 목적이 있다. 본문의 교훈도 그러하다.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사람을 접대한 것은 어떤 대가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순수한 희생이며 헌신적인 봉사였다. 다시 말해 지나가는 행인을 소를 잡아 대접하라는 그런 뜻이 아니라 믿음의 원리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즉 사랑이란 바로 이처럼 대가를 바라지 않고 순수하게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어려운 형제들을 위해 희생하며 섬기는 행위임을 이야기하고자 함인 것이다.

 


3) 고통을 받는 성도들에 대한 각별한 관심

저자는 3절에서 “자기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고 하였다. 말씀에서 보면 그 시대 믿음 때문에 감옥에 투옥된 성도들이 다수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고 육체적으로 고통스런 여러 형태의 학대를 받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한 성도들에 대해 마치 자기가 그러한 학대를 받는 것과 같이 생각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고통 받은 믿음의 형제들을 깊이 헤아려 살펴야 한다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즉 믿음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성도들을 자기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만큼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도와주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져야할 사랑이라는 것이 히브리서 기자가 내리는 정의이며 결론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은 성도라면 누구나 실천해야할 기본적인 삶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사르밧 과부가 마지막 남은 한 움큼의 밀가루로 엘리야를 공궤했던 것은 가장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수넴의 한 귀부인이 엘리사를 공궤했던 것이나, 신약교회에서 사도 바나바가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성도들을 도운 것 역시 좋은 모델이다. 특히 믿음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성도라면 우리가 어떤 측면에서도 그 어려움을 분담하여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이 히브리서 기자가 밝히고 있는 사랑의 결론이다.

 

 

 

2. 육신적 결혼과 음행에 대한 교훈(4절)

저자는 4절에서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 하시리라”고 하였다. 이러한 권면에는 두 가지 의미에서 생각할 수 있다.

1) 정상적인 결혼 생활은 매우 귀한 일이라는 의미

이는 혼인을 귀히 여기라는 말씀에 담긴 뜻이다. 여기서 ‘귀히 여기고’로 번역된 ‘티미오스’(Tίμιος)는 ‘값나가는’, ‘가치 있는’, ‘고귀한’ 등의 뜻을 가진 단어다. 즉 남녀 간의 정상적인 결혼생활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매우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근본적인 이유를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분해해 보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구속사를 대표제로 제정하시기 위해 아담의 혈통을 통해 택하신 백성들을 보내시기로 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고 돕는 배필로 하와를 지어 주셔서 가정이란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를 구성케 하셨다. 그러므로 혼인은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기위한 필수적인 과정과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창조 때부터 잉태와 출산은 축복이요, 반대로 자식을 갖지 못하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로 인식되었다.
저자가 갑자기 여기서 이러한 결혼 제도에 대해 교훈을 하고 있는 것은 이에 대한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7장 3절에서는 멜기세덱에 대하여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다고 하였다. 이를 천주교가 잘못 오해하여 성직자들에게 결혼을 금하는 규정을 둔 문제에 대해 살핀바 있다. 또 시대마다 결혼 제도나 부부생활을 천시여기고 금욕생활을 강조한 잘못된 가르침들도 있었다. 특히 초대교회 당시에 금욕생활을 최상의 신앙으로 취급했던 잘못된 인식들도 있었다. 신약사에서 쿰란 공동체나 에세네파로 불렸던 분파들이 그러하였고, 이러한 사상들이 기독교 안에 스며들어올 여지는 충분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남녀의 혼인은 매우 고귀한 가치의 제도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 천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며, 아울러 결혼을 하지 않는 것 자체를 우월한 신앙으로 오해해서도 안 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 혼인 외의 무분별한 남녀의 관계는 정죄의 대상이라는 의미

이 문제는 인륜적인 문제에서도 용납이 안 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저자가 특별이 이 부분을 강조하는 것은 결국 이러한 일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결정적으로 큰 방해를 가져오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섬겨야 하는 성도의 입장에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됨을 성경은 강하게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성도가 이와 같은 육신적인 문제에 빠져 있다면 하나님을 따르고 순종하는데 치명적인 방해를 가져올 것은 불을 본 듯 뻔한 일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 상태에서는 더욱더 하나님을 사랑할 수도 없을 것이다. 마음이 온통 하나님 보다는 육신의 것에 매여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여성에 대한 인식은 성경의 교훈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고대 헬라 사회에서 남성은 그 신분과 존재에 있어서 원천적으로 여성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즉 여성들은 존재론적으로 남성들에 비해 불완전하고 하급 존재에 속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의 결과는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많은 여자들을 아내로 두고 살아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때문에 바울은 데모데전서 3장 12절에서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라며 교회의 직분을 가진 자는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만 함을 교훈한 바 있다. 그리고 이혼한 자매들에게는 재혼을 해도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으로 자신처럼 혼자 살 것을 권면하기도 하였다. 그 이유에 대하여 결혼을 하게 되면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마음이 나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답하였다. 본문의 히브리서 기자도 여기서 음행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그 자체도 죄이지만 그것은 성도가 정상적인 경건생활을 하는데 심각한 장해를 가져다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3. 돈에 대한 욕심의 경계(5절)

성도가 경건생활을 위해 필연적으로 경계해야 할 것은 음행과 아울러 돈에 대한 욕심임을 지적하였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5절에서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 하였다. 돈을 사랑치 말라는 것은 돈에 대한 과다한 욕심을 가져서는 안 됨을 지적한 표현이다. 어떻게 보면 성도들이 신앙에 실패하는 경우는 음행의 문제보다 더 많은 경우가 돈이란 덫에 걸려 넘어질 것이란 생각이 들어진다. 왜냐하면 음행이란 윤리 도덕적인 측면에서도 심히 부끄러운 행위임이 드러나지만 돈을 사랑하는 것은 정당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일반사이고, 오히려 교회들 조차 돈을 많이 벌어 부자 되는 것을 하나님의 큰 축복으로 여기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토록 교회들에서는 복을 달라고 부르짖어 기도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성경의 교훈에서 보면 실제 음행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돈이 성도들에게 주는 폐해이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돈을 사랑한다는 것을 여기서는 사모한다는 말로 달리 표현 하였는데 이는 ‘~을 잡으려 하다’, ‘애쓰다’란 뜻으로서 돈을 향한 애착과 그것을 얻고자 집중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좀 더 포괄적인 의미로서 바울은 로마서 8장 7, 8절에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라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역시 히브리서 기자도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섬기는 경건생활을 위해서는 돈을 사랑해선 안 된다고 경계하는 것은 이 문제가 그만큼 성도들의 신앙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 시킬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성도는 영생의 것을 위해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영생의 것에 간절한 꿈을 두고 살아야 하는데 돈을 사랑한다는 것 자체는 영생이 아니라 이생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믿음을 실패케 하는 만 가지 악이 바로 돈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던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절대 세상 것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 것은 추구의 대상이 아니라 포기의 대상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 것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과는 정 반대 방향을 향해 줄달음치는 것과 같은 행위이기 때문이다.

 

 

 

4. 확고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질 것에 대한 권면(6절)

경건한 생활을 위해 성도가 경계해야할 음행과 돈에 대한 욕심을 지적한 저자는 믿음에 대한 담대함을 권면하였다. 6절의 말씀은 시편 118편 6절을 인용한 것이다. 시편 118편은 유월절이나 감사절 등 종교적인 큰 절기나 또는 다른 공중 집회 때 사용키 위해 특별히 편집된 찬양 시 중 일부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가 인용한 6절은 시편을 노래한 기자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확신하며 감사 찬양하고 있는 부분이다. 거기 시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시 118:6)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여러 형태의 환난과 고난 속에 처해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한다는 확신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가 이를 여기서 인용하는 것은 당시 어려움을 당하는 성도들에게도 시편의 기자처럼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구원해 주심에 대한 확신을 갖고 그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것을 권고하며 격려하고자함에 그 목적이 있다.
이러한 고백은 다윗도 여러 차례 한 바 있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시편 27편 1절을 찾아볼 수 있다. 시편 27편은 다윗이 평생에 자신을 대적했던 무리들로 인한 위기들에서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지켜주심을 확신하며 노래한 찬양시이다. 거기 1절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시 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다윗이 당한 환란은 사울 왕이나 아들 압살롬의 반역에 의한 것이 가장 큰 어려움으로 평가 된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며 용기를 갖고 그 모든 어려움을 견뎌 냈던 것이다. 바울도 수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는 그런 고백을 한 바 있다.


(롬 8:35-3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씩이나 맞고, 태장에 세 번 맞고, 돌에 맞아 거의 죽게 되어 성 밖에 버려짐을 당했던 경우도 있었다. 그 외 여행 중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과 이방인의 위험, 시내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거짓 형제 중의 위험, 그리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다고 하였다(고후 11장). 그러나 그처럼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였지만 바울도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며 그 모든 것들을 기꺼이 감당해 냈던 것이다.


오늘 우리들도 그러해야 한다. 믿음으로 살다보면 여러 형태의 어려움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은 우리 편이며, 나를 도우시는 분이라는 확신이다. 비록 삶의 과정에서는 환난도 있고, 무릎꿇림을 당하는 굴욕도 있을 수 있다. 끼니가 어려워 허리띠를 동여매야 하는 경우도 있고, 사랑하는 자식에게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음에 한숨 쉬지 않을 수 없는 딱한 사정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결국은 진리가 이기며 성도가 승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역사는 이미 완료 완성 되었고, 하나님은 오직 진실한 성도들의 편이시기 때문이다.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신앙(히 13:7-17)

 

13장 1절부터 6절에서는 일반적인 신앙생활의 원칙을 권면하였다면 본 단락인 7절부터 17절까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좀 더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에 대해서 교훈해 주고 있는 부분이다. 교훈의 내용은 크게 4가지로 요약된다.

1. 앞선 지도자들의 믿음을 본받을 것을 권면(7-9절)

저자는 앞선 선진들의 믿음을 돌아보며 성숙한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함을 촉구하는 가운에 3가지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1) 믿음의 선진들의 삶과 그 결말을 돌아보고 그들을 본받으라는 것

7절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고 하였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이란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을 비롯한 선진들을 총괄한 표현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주님의 제자들이나 사도들, 또는 그 시대 기독교를 세우고 말씀과 교회를 위해 봉사했던 사람들을 가리킨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인도하던 자들’이라고 한 원어가 관사를 가진 현재 분사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론에서 히브리서의 기록 연대를 바울의 사후로 보고 대략 A.D. 60년대 후반으로 생각을 했었다. 이때는 네로황제의 박해로 인해 베드로나 바울을 비롯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의 이슬로 사라져갔던 시대이다. 즉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가 수신자들을 위해 본받을 것을 권면한 믿음의 선배들은 세상에서 화려하게 부와 권세를 누린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정 반대로 복음을 위해 수많은 고초를 당하고 희생당한 순교자들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의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라’고 한 것은 그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갖은 고초를 당하거나 순교를 당한 사실을 가리킨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특별히 저자가 이러한 권면을 하는 이유는 당시 기독교가 유대교나 로마의 박해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 시대 환란에 봉착해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선택한 선배들의 믿음을 본받을 것을 권면하고자 함인 것이다. 11장 36절 이하에서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참담한 죽음도 구차하게 피하려 하지 않았던 믿음의 선진들을 이야기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본받아야 할 믿음은 바로 이런 것이어야만 한다.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나와 함께 고난을 받자”(딤후 2:3)고 권면했던 바와 같이 복음을 위해서 목숨도 아끼지 않았던 선진들의 믿음을 돌아보고 우리 역시 복음을 위해 어디까지 나를 내어 놓고 희생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진정으로 본받아야 할 것은 요셉의 애굽 총리 자리나, 다윗이 올랐던 통일 이스라엘의 왕위가 아닌 것이다. 복음과 주님의 교회를 위해 자신을 번제와 같이 드린 바울과 같은 희생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진정한 신앙의 표본이며 모델인 것이다.

2) 그리스도는 영원토록 동일하다는 것

선배들의 믿음을 본받을 것을 권면한 저자는 8절에서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고 하였다. 여기서 저자가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강조한 것은 무엇보다 믿음의 소망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본받을 것을 언급한 것이 당시 믿음을 위해 희생한 선배들이었기 때문이다.
6절에서도 시편 118편 6절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실 것이며 믿음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원리를 이야기하였다. 그처럼 믿음의 원리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가 동일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란 진술이다.

3) 다른 교훈에 미혹되어선 안 된다는 것

그리스도의 영원성을 언급한 다음 9절 서두에서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고 권면하였다. 그 당시 교회 안에 매우 다양하고 잡다한 잘못된 가르침들이 성행하고 있었음이 직감되는 대목이다. 이보다 대략 25년이 지난 교회의 모습은 계시록 2장 3장에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거기 기록되어 있는 교회의 모습은 그야말로 심각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 안에 사단의 회가 자리를 잡고 있었고, 교회마다 문제가 없는 교회가 없었다. 그렇다고 볼 때 본서가 기록될 때 역시 그와 같은 현상이 우려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양태의 혼란이 진행되었을 것이란 추측을 해보게 된다. 그러니까 문제는 유대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 안에서도 일치된 진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당시 잘못된 가르침들의 대표적인 문제가 율법의 시행이나 행위 구원, 또는 진리의 세속적 변질이 그 중심이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왜냐하면 바로 이어진 9절에서 은혜를 굳게 함이 아름다운 것이고, 식물로써 행하는 자는 유익이 없다고 지적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은혜란 그리스도의 대속의 완전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을 굳게 하라고 하는 것은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원리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것을 촉구한 표현이다. 반대로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고 한 것은 율법의 음식물에 대한 규례를 가리킨 표현이다. 이 내용은 레위기 11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당시 율법이 이러한 규정을 둔 것은 하나님 백성들에게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교훈하기 위한 목적에서였지 그 자체가 심령을 새롭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효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때까지도 유대교에서는 이러한 음식에 대한 규례들을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즉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받는 것이란 기독교의 원리를 부정하고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주장하며 시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 자체가 구원과 관련하여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였다.


이 지식은 성도의 신앙생활에 절대적인 문제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아름답고’로 번역된 헬라어 ‘칼론’(καλὸν)은 ‘유익’이나 ‘좋은 것’ 등을 뜻하는 ‘칼로스’(καλὸς) 형용사로서 ‘유익을 얻지 못했다’는 말과 정 반대되는 뜻을 갖고 있다. 즉 구원은 은혜로 받는 것임을 깨닫고 믿을 때에만 그 결과에 이르는 유익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한 ‘다른 교훈’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1장 6절에서 지적한 ‘다른 복음’과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교회들은 이 부분에 대하여 문제가 그야말로 심각하다. 장로교회가 아닌 경우야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개혁해 낼 때 처음부터 원리가 맞지 않는 유사한 형태의 교회였지 실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세워진 개혁교회는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날은 장로교회 안에도 은혜의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확고한 믿음을 가진 경우가 드물다. 개혁주의 입장에서 주석을 쓰고 있는 학자들까지도 어떤 때는 은혜를, 또 어떤 때는 행위를 강조하는 경우들이 다반사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문의 히브리서 저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은혜를 굳게 하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는 본래 은혜의 원리에서 세워졌고, 이 은혜의 원리 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은혜의 원리에서 벗어난 것은 교회라 할 수 없으며 거기서는 히브리서 기자의 지적과도 같이 아무런 유익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성도가 구원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새삼 깨닫게 되는 대목이다.

 

 

 

2.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신앙을 권면(10-14절)

이는 10절부터 14절까지에 나타난 교훈이다. 여기서 저자가 언급한 내용들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설명하면서 그 고난에 함께 동참할 것을 권유하고 있는 부분이다. 먼저 10절 서두에서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라고 할 때 이 ‘제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킨 표현으로 대부분 학자들이 이해하고 있고, 그것은 문맥상 합당하다고 보여진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세워지게 된 기독교를 가리킨 표현이다. 그리고 거기에 구약시대 속죄일에 드려진 속죄제사와 관련하여 설명을 이어가고 있다. 10절 중반부에서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라고 한 것은 구약의 제사를 예를 들고 있는 것이다. 즉 구약시대 속죄일에 드려진 제물은 누구도 그 제물을 먹을 수 없었고 모두 다 진 밖에서 불태워야만 했다(레 4:12; 6:30). 저자는 바로 이를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11절에서는 제사장은 짐승의 피만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짐승의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살랐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영문’이란 야영지나 진지를 가리키는 말로서,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할 때 장막을 치고 있던 곳을 가리킨다. 그런데 영문 밖이라 하였으니 속죄 제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한 진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불살랐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어진 12절에서는 예수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형판결을 받은 것은 예루살렘성 안이었지만 십자가의 죽음은 성문 밖에 있는 골고다 언덕에서 죽으신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구약의 속죄제사 가운데 속죄를 위한 제물과 연관시키고 있는 것이다.


율법에서 속죄를 위한 제물을 영문 밖에서 불살랐던 것은 그 제물이 모든 백성들의 죄를 전가 받아 더러워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부정한 죄인들의 사형시킬 때는 영문 안이나 예루살렘 성안에서 집행하지 않았다. 그곳은 거룩한 곳으로 인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레위기 24장에 보면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한 여인을 진 밖에서 돌로 쳐 죽였음을 말씀하고 있고, 이러한 인식은 초대교회 당시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스데반 집사도 예루살렘 밖으로 끌려 나가 돌에 맞아 죽었고, 예수님도 성문 밖으로 끌려 나가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것이었다.


그러기에 영적으로 ‘영문 밖’이란 거룩한 것과 반대되는 부정하고 더러운 곳을 뜻한다. 즉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식에서 보면 더럽고 부정한 죄인이었고 그러기에 더러운 영문 밖으로 끌려 나가 죽임을 당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택한 백성들, 즉 더러운 우리들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거룩한 자기 자신을 더러운 곳에 내어 주셨음을 의미한다. 그에 대하여 저자는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3절에서는 저자가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우리 역시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고 외치고 있다. ‘그 능욕을 지고’란 말은 믿음을 위해 당하는 치욕이나 고난을 감당하자는 뜻이다. 그리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는 말 역시 자기 백성들의 거룩함을 위해 희생하신 주님처럼 복음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더럽고 추한 곳에 내어 놓자는 표현의 선언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희생,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고난의 걸음에 동참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하여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라고 하였다. 즉 이 세상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고, 성도들 역시 이러한 임시적인 세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도성을 원하는 까닭에 영문 밖으로 나아가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역시 앞에서 믿음의 선배들을 본받자고 한 의미와 같은 개념이다. 즉 복음의 길이란 세속종교들이 추구하는 세속적인 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이 스스로 택하신 그 영문 밖의 희생이 성도들이 가야 할 길일 뿐만이 아니라 이는 필히 동참해야 할 성도들의 삶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표현을 한 바 있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또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그렇게 고백한 말씀도 있다.
(골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라면 우리가 소원해야 하는 것은 예루살렘 성문 안이 아닌 것이다. 성문 밖 골고다 언덕이어야 한다는 것이 히브리서 기자의 선언이다. 부와 명예가 아닌 것이다. 복음을 위한 헌신과 희생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주님께서 우리의 거룩함을 위해 영문 밖으로 나아가셨다면, 우리는 주님을 위해 영문 밖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 역시 간절한 소망은 이 도성이 아니라 영구한 도성 하늘의 본향을 바라고 있는 까닭이다.

 

 

 

 


3. 진정한 예배의 정의와 선행에 대한 권면(15-16절)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을 권고한 저자는 15절과 16절에서 성도로서의 참된 예배와 선행에 대한 삶을 권유하고 있다. 15절에서는 ‘이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였다. 여기서의 ‘이러므로’란 주님께서 성도들의 거룩함을 위해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신 역사를 전제한 표현이다. 즉 그리스도의 그 은혜를 입었으니 이제 성도들은 항상 찬미의 제사와 함께 선행의 열매가 있어야 함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는 짐승을 잡아 드리는 희생제사는 드리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닌 것이다. 신약의 성도들은 그들 나름대로 드려야 할 제사가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을 찬미와 선행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의 ‘찬미’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찬양을 가리킨다.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삶을 가리킨다. 그러기에 15절 하반절에서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라고 설명해 주고 있다. 여기서의 ‘그 이름’이란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의 선하시고 의로우시며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은혜로우심을 함축한 표현이다. 그리고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란 이와 같으신 하나님에 대하여 항상 입술을 열어 시인하고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의 성도들이 드릴 진정한 제사요 예배임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실로 생각해 볼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가히 상상할 수 없는 너무너무 큰 은혜임이 분명하다. 생각하면 할수록 감격한 감사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술의 열매가 있어야만 하고, 입술의 열매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삶의 열매 역시 있어야 함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 이상 영광을 받으실 만큼 크고 위대하신 분이시고, 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가히 말로다 헤아릴 수 없는 그의 은혜를 받고 또 그의 은혜아래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가 감사의 찬미라면, 성도들 간의 수평적 관계는 선행과 나눔을 이야기 하였다. ‘선행’으로 번역된 ‘유포이이아스’(εὐποιΐας)는 오직 본문에서만 사용된 단어다. ‘좋다’는 뜻의 ‘유포이아’(εὐποιΐα)의 소유격 명사로써, 의와 비슷한 개념이 아닌 ‘좋은 일’을 뜻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와 비슷한 개념이 바로 이어진 나눔이다. ‘나눠 주기를’로 번역된 말은 ‘교제’나 ‘참여’, ‘교섭’ 등을 뜻하는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의 소유격 명사 ‘코이노니아스’(κοινωνίας)다. 헬라 세계에서 이 단어는 인간들 사이에 깨어지지 않는 교제를 나타내는 용어였고, 인간들 사이에 ‘밀접한 결합’과 ‘친밀한 결속’을 의미하는 단어였다고 한다. 즉 성도들 간에 진정한 사랑의 교제가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초대교회 때 보면 자신의 재산들을 정리하여 어려운 성도들을 도왔던 일들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것은 언제나 진리 안에서란 전제가 있다. 그저 물질을 나누는 나눔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는 진리 안에서의 삶이 있어야 하고, 그러한 성도들 간의 진정한 사랑과 교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한 제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성도들 간에 친밀한 교제와 나눔의 교통이 있을 때 그것이 바로 참 예배요, 진정으로 완성된 제사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4. 영적 지도자들에 대한 복종에 대한 권면(17절)

성숙한 신앙의 조건으로서 마지막 권면의 말은 영적 지도자들에 대하여 순종과 복종이다. 이에 대해서 17절 서두에서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하여는 “저희는 너희의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개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라고 하였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교회의 지도자들이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며 행사하는 수고를 지칭한 표현이다. 그러면서 교회의 지도자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성도들을 가르치고 지도할 수 있도록 하되 근심으로 하게하는 일이 되지 않도록 할 것을 권면하였다. 즉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성도들이 순종해야 하는 소극적인 목적은 그들이 이 일을 금심으로 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는 것이고, 적극적인 목적은 성도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일에 그들이 기쁨으로 감당케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권면은 당시 유대인 성도들 가운데 기독교를 떠나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일들로 인해 교회의 지도자들이 마음에 많은 근심과 가슴 쓰린 안타까움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냐는 추론이 가능하다. 교회의 지도자와 성도들이 하나가 되어 진리와 교회를 보전하고 전파해야하는 것은 어려운 현실과 상황일수록 더욱 요구되는 공동체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와 정 반대로 성도들의 결심이 약하여 믿음이 식어지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일들이 벌어질 때, 그야말로 당시 성도들을 인도하였던 지도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 심정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아픔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진다. 따라서 저자는 본서의 수신자들에게 교회 지도자들을 존중하고 순복할 것을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비슷한 개념에서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갈 6: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물론 이런 것은 구원에 절대적인 문제는 아니다. 그렇지만 성도가 성숙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필히 지켜져야 할 하나의 과정인 것만은 틀림없다. 가르치는 자와 등을 지고서는 결코 믿음의 성숙과 성장을 기대하기는 심히 어려운 열매일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위한 희생은 곧 성도들을 위한 헌신과 봉사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요한 사도는 그런 표현을 한 바 있다.


(요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기에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는 어떤 경우도 진리를 떠나서는 안 된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를 더한다면 진리 안에 함께하는 성도들 간에 서로 돕고 격려하며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친밀한 교제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제사요 예배임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은혜를 입은 우리라면 우리가 추구하고 원하는 것은 우리의 영광이어서는 안 된다. 주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더럽고 추한 짐을 짊어지는 영문 밖의 길이어야 하는 것이다.

 

 

 

히브리서의 결론(히 13:18-25)

 

히브리서의 마지막 장이면서도 마지막 장을 마감하는 본 단락은 히브리서 기자가 이 편지를 읽게 될 수신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며 문안 인사와 함께 축도로서 본서를 결론짓고 있는 부분이다.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구분하면 네 단락으로 구성 요약할 수 있다.

1. 수신자들에게 중보기도 요청(18, 19절)

저자는 18절 서두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부탁을 하였다. 18절과 19절에서 저자가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한 의미는 두 가지다.

1) 히브리서 기자의 선한 양심

먼저 기도를 부탁한 기자는 이어서 자기들이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선한 양심이 자기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피력하였다. 여기서 선하게 행하려 한다는 표현에서 ‘선’으로 번역된 ‘칼로스’(καλῶς)는 본래 ‘알맞다’, ‘어울리다’, ‘유용하다’, ‘건전하다’ 등을 뜻하는 단어다. 고대 헬라어 문헌에서는 이 단어가 적당한 은신처나 건강한 몸, 흠 없는 희생 등을 표현하는 단어로 쓰였다고 한다. 즉 ‘칼로스’는 외적 현상이든 내적현상이든 건전함이나 질서의 완전한 상태를 표현할 때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저자가 선하게 행하려 한다고 한 말이나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 확신한다는 표현 등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행한 모든 일들이 자신들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함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즉 전혀 양심에 거리낌이 없을 만큼 순수한 마음으로 행하였음을 변증하고자 함에 목적이 있다.


당시는 개종한 유대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한 불안함과 아울러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고자 했던 상황이었다. 그러기에 저자가 히브리서 전체를 통해 말하고자 하였던 핵심은 유대교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교회이고, 기독교가 진정한 교회란 사실을 밝히고자 함이었다. 따라서 저자가 유대교를 비판하며, 반대로 기독교를 옹호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본서의 저자들에게 본서를 통해서 그동안 다섯 차례(2:1-4; 3:7-4:13; 5:11-6:12; 10:26-31; 12:18-29)나 책망을 하였고, 그 가운데 5장 말미와 6장 서두에서는 수신자들을 향해 초보라는 단어를 써가며 심히 모욕적인 질타를 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반대편에서 히브리서 기자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들이 있었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었는지도 모른다.


더러는 히브리서 기자가 기독교에서 어떤 개인적인 유익을 받고 있기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의 눈길을 보낼 수도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다른 오해도 쌓여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오해란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저자는 너무나도 그리스도와 기독교편에 치우쳐 있다는 지적을 받을 만큼 그리스도와 기독교를 변호 변증하였다. 따라서 저자는 자기가 그동안 행한 일들이 결코 비난을 받을 일이 없었다는 사실과, 현재도 자신들의 양심에 전혀 거리낌이 없다는 사실을 변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선한 양심은 하나님을 믿고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갖추어야할 기본적인 요소이다. 사사롭게 자기의 유익을 도모하기위한 수단은 어떤 공적과 위대한 업적이라 하더라도 결국 하나님 앞에 옳다 인정함을 받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저자가 속히 히브리서 수신자들에게 돌아갈 수 있기를 위한 기도요청

9절에서 저자는 “내가 더 속히 너희에게 돌아가기를 위하여 너희 기도함을 더욱 원하노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도의 요청에서 보면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을 만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히브리서가 저자 미상이기에 이 편지를 쓴 발신 지역을 알 수 없었다. 또 편지를 받는 수신지 역시도 명확하게 밝힐 수 없었다. 그러나 본문의 이러한 발언에서 보면 저자와 수신자들은 과거 한 때는 같은 지역에서 신앙생활을 함께 했던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더 속히 돌아가기를 위하여’라고 할 때 ‘돌아가기를’로 번역된 원어의 의미가 ‘이전의 상태로 복구시키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서, 본래 있던 장소로 되돌아간다는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재는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저자와 수신자들이 거주했던 지역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저자의 편지 내용으로 보아 수신자들을 떠났던 이유는 복음 전파를 위한 목적 때문이었을 것이란 추론이 설득력이 있다. 그동안 본서에서 나타난 내용을 집약해 볼 때 본서의 저자는 그야말로 바울을 버금갈 만큼 성경지식이 매우 탁월한 인물이었다는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현재는 급히 돌아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빨리 돌아갈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돌아가기를 위하여’로 번역된 ‘아포카디스테미’(ἀποκαθίστημι)가 신약성경에 모두 8차례 사용되었는데, 그중 4차례가 병자의 병의 치료나 회복과 관련하여(마 12:13; 막 3:5; 8:25; 눅 6:10) 사용되었다. 때문에 옥스퍼드원어성서대전에서는 저자가 어떤 병에 걸려 있었기에 돌아가고 싶으나 속이 돌아갈 수 없어 이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만약 그랬다면 역시 저자가 어떤 병에 걸린 것은 복음을 전하다가 걸린 병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진다. 아울러 저자는 현재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복음 사역을 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그것은 기도를 요청하면서 ‘우리’라는 복수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저자의 이러한 기도 요청을 통해서 성도들이 서로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사사로움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그러나 믿음을 전제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기도는 성도들 간의 아름다운 사랑에 실천으로써 유용하고 필요한 교제인 것이다.

 

 


2. 하나님 뜻의 성취를 위한 기원과 송영(20, 21절)

저자는 본서를 마감하는 과정에서 이 편지의 수신자들을 위하여 기원을 하는 내용인데, 그 기원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1) 선한 일에 온전케 되기를 원하는 기원

이를 위해 저자는 먼저 20절 서두에서 주님에 대하여 ‘양의 큰 목자’란 표현을 썼다. 이는 이사야 63장 11절을 인용한 것으로 사료된다. 이사야서에서는 모세를 가리킨 표현으로 ‘양 무리의 목자’란 표현을 썼다. 그런데 본서의 저자는 이를 그리스도께 적용시키며 대신 ‘양의 큰 목자’라 표현한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모세에 비해 훨씬 우월함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여기서 저자가 실제로 밝히고자 하는 진술의 요지는 그리스도를 부활케 하신 하나님을 말하고자 함에 목적이 있다. 그러기에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진술을 이어가고 있다.


저자가 이처럼 하나님을 말하고자 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대속의 역사와 함께 그리스도의 신분을 밝히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성도들의 구원을 위해 분리해서 말할 수 없음을 입증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유대교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결정적인 문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유대교의 그릇된 가르침 때문이었다. 특히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으로 표현한 것은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통해 원수 되었던 자기백성들과 화해를 이루신 것을 의미한 것으로 예수님의 사역은 모두 하나님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본서의 수신자들이 역시 선한 일에 온전케 되기를 바란다는 간절한 바람을 보도하고 있다. 여기서 ‘선한 일’로 번역된 ‘아가도’(ἀγαθῷ)는 윤리적인 선행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각양 좋은 선물, 즉 은사를 가리킨 표현이다. 그리고 ‘온전케 하사’로 번역된 ‘카타르티사이’(καταρτίσαι)의 원형 ‘카타르티조’(καταρτίζω)는 ‘정돈하다’, ‘복구시키다’, ‘완전하게 하다’, ‘준비하다’ 등의 뜻을 가진다. 어떤 경우 이 단어를 탈골된 관절을 접골하여 원래 상태로 복구하는 것을 뜻하는 의학 용어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선한 일에 온전케 되기를 원한다고 하는 것은 수신자들이 본래 기독교로 개종할 때 가졌던 신앙으로의 회복을 바란다는 소망이 담겨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완전성을 믿는 믿음의 회복을 기대하는 저자의 의도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선한 일’이 곧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나 은혜를 가리킨 말인데,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대속에 의구심으로 인하여 유대교로 돌아가고자 하는 자들을 향해 주어지는 교훈이기 때문이다. 우리역시 일생을 신앙생활을 하노라면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은 아니다. 더러는 시험에 들기도 하고, 나태와 게으름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럴 때 우리 역시 신앙의 회복을 위한 각고한 노력이 필요하다. 믿음의 회복이란 결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기를 원하는 기원

수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에 대한 확신이 온전케 되기를 바란다고 진술한 저자는 그들의 신앙이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성실하게 행하는 데까지 이르기를 기원하고 있다.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란 표현이 이를 밝혀주고 있다.
당시 수신자들의 믿음은 로마의 핍박이나 유대교의 영향에 의해 심히 흔들리는 상태였다. 그로인하여 12장 5절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저자는 수신자들이 처음 기독교로 개종할 당시의 신앙 상태로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역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란 사실도 암시 되어 있다. 21절에서 ‘그 앞에 즐거운 것’이란 표현은 하나님께서 즐거워하신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사람으로의 변화와 성장을 바라는 기원

이는 21절 중반절에서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기를 원하노라”고 보도한 진술이 담고 있는 의미이다.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의 변화가 수신자들에게 있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히브리서 저자가 수신자들에게 바라는 가장 큰 목적이요 소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신앙을 회복하여 하나님이 즐거워하는 사람으로의 변화와 성장을 이루는 것은 모든 시대 모든 성들이 이르러야할 믿음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성도들의 소원 역시 이와 같아야 함을 깨닫게 된다. 성도는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자신에게 이루어지기를 소원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성도는 자기 좋아하는 것을 좇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즐거워하는 사람으로의 변화를 이루고자 함이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란 교훈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교회들은 하나님의 뜻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그러기에 교회가 추구하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것 역시 온통 자기 소원들뿐이고, 세상사 육신의 문제들뿐이다. 이러한 양태의 신앙생활은 진정한 신앙의 원리에서 크게 이탈된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성도가 이 세상에서 이루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으로의 영적 변화와 성장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도들에게 변화를 기원한 저자는 21절 끝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 것을 기원하였다. 이 부분 역시 성도들이 추구해야할 삶의 목표여야만 한다.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기를 바라는 자세가 바로 성도의 믿음의 절정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고백한 바 있다. 또 로마서 14장 8절에서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라고 고백하기도 하였다.


성도들 삶 역시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거룩함을 위하여 영문 밖으로 나아갔으니 우리 역시 하나님을 위한 길이라면 능욕의 길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감당해야만 한다. 그것이 그의 은혜를 입은 자의 지극히 마땅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3. 지금까지 진술한 교훈을 받아 지킬 것을 권면


저자는 22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권면의 말을 용납하라 내가 간단히 너희에게 썼느니라”라고 하였다. 이는 지금까지 기록한 저자의 진술에 대하여 이의 없이 받아들일 것을 권면한 내용이다. ‘용납하라’로 번역된 ‘아네케스데’(ἀνέχεσθε)는 ‘들어 올리다’, ‘영예롭게 하다’, ‘견디다’ 등의 뜻을 가진 ‘아네코’(ἀνέχω)의 동사 명령법 현재시제이다. 마태복음 17장 17절과 고린도후서 11장 1절에서는 ‘참기 힘든 자를 참아주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디모데후서 4장 3절에서는 ‘교훈을 받다’라는 뜻으로 번역되었다. 본문에서도 ‘견디다’ 또는 ‘참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본서에 기록된 교훈들에 대하여 인내심을 갖고 지켜낼 것을 마지막으로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가 자신이 지금까지 진술한 내용을 받아들일 것을 권면하면서 ‘견디고 참아낸다’는 뜻의 단어를 사용한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지금까지 기록된 말씀을 인내심을 갖고 읽고 받아들일 것을 권면하는 의미이다. 본서에서 지적된 내용을 통해서 당시의 유대인 성도들의 심정이나 분위기를 추론해 보면, 당시 개종한 유대인 성도들 가운데는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교회 형태에 대하여 매우 미심쩍은 분위기가 역력했다. 그런 그들이 그야말로 인내심을 갖지 않는다면 본서를 자세히 그리고 끝까지 살펴본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선입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인내심을 갖고 자신의 진술한 바를 살피며 받아들일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외부적인 환란에 대한 문제 때문이었다. 그 시대 유대교는 로마 정부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을 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신흥종교로 취급되어 매우 혹독한 핍박이 자행되고 있었다. 거기에다 유대교의 회유, 그리고 유대인들의 민족적 감정에 의한 따돌림도 심각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의 말대로 그 교훈을 받고 믿음을 지켜낸다고 하는 것은 인내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저자는 특별히 ‘견디고 참아 낸다’는 뜻을 가진 단어를 사용하며 자신의 교훈을 받아들일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시대나 믿음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견딤과 인내가 필요하다. 믿음의 길이란 만사형통의 길이 아니라 오히려 시험과 환란, 가기 힘든 고된 역경의 길이기 때문이다.


이어진 23절에서는 디모데가 놓였다는 것을 수신자들에게 알려주며, 디모데가 자기에게 오면 그와 함께 수신자들을 방문할 것을 밝히고 있는 내용이다. 본서의 이러한 기록대로라면 디모데가 한 때 감옥에 투옥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성경 다른 곳에서는 그 어디에도 디모데가 투옥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기에 칼빈은 이것이 디모데가 아니고 누가나 클레멘트(빌 4:3)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또 다른 학자들 가운데는 이것이 옥에 갇힌 것이 아니라 어떤 임무를 띠고 먼 곳에 갔다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가리킨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디모데가 옥에 갇힐만한 추정이 가능한 한 사건이 있다.


그것이 바울이 2차 로마 감옥에 갇혔을 때이다. 당시 바울은 디모데에게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과 가죽종이에 쓴 성경책을 가져올 것을 부탁하였다(딤후 4:13). 이 때 디모데는 틀림없이 바울의 편지를 받고 로마 감옥을 찾아갔을 것이다. 그 해 겨울에는 바울이 순교를 당한 시기였고, 로마 정부의 기독교에 대한 분위기는 매우 흉흉했다. 때문에 바울이 부탁한 성경과 옷을 갖고 찾아간 디모데도 바울과의 연분으로 인하여 잠시 감옥에 갇힐 위험은 충분히 의심해볼만한 사건이다. 연대적으로도 히브리서가 대략 64년 이후 그러나 70년 이전이었을 것으로 개론에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고 순교한 때는 대략 66년에서 67년경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디모데가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났다면 바로 로마 감옥이었을 것이고, 바로 이 때였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왜냐하면 본서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디모데가 풀려난 사실을 언급한 때와 시기적으로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성경, 즉 사도행전이나 바울의 서신에서 디모데의 투옥 사건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은 디모데의 투옥 사건은 바울이 순교시점과 일치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바울의 행적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로마 감옥에 1차 투옥되었던 사건을 끝으로 하고 있다. 때문에 바울이 1차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 어디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다시 재차 투옥이 되어 순교를 하였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진바 없다. 로마서에서 서바나 지역을 전도하고 싶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실현되었는지도 확인이 안 되고 있다. 때문에 디모데의 투옥사건 역시 바울 서신에서는 언급될 상황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다면 본서를 쓴 사람은 바울이 아닐 가능성이 더욱더 확실해 진다. 특히 23절에서 본서의 저자는 디모데를 가리켜 ‘우리 형제’란 표현을 썼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디모데 전서와 후서에서 공히 믿음의 아들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히브리서 기자는 바울이 아니라 디모데와 비슷한 연령대의 누군가가 아니냐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물론 나이와 상관없이 당시 동족이나 교회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에게 형제란 표현을 쓰는 것은 일반적인 사례였다. 때문에 꼭 그렇다고 하기는 어려운 문제일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가 디모데를 수신자들에게 밝히고 있는 것은 수신자들이 디모데와 매우 친밀한 관계의 사람들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때쯤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를 목회하고 있었기에 이 편지의 수신지가 에베소 교회가 아니었을까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아니었다면 디모데의 고향이었던 루스드라 지역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물론 이 부분도 디모데가 바울과 함께 여러 지역을 동행하며 전도여행을 하였고, 또 바울의 심부름으로 여러 곳을 방문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에베소나 루스드라만으로 한정지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모데의 투옥 사건을 가장 가슴에 안타까움으로 담고 있고, 그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을 사람들은 틀림없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고향 루스드라를 떠난 지는 꽤 세월이 지난 터였고, 다른 지역들도 디모데가 실제 목회를 한 곳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서의 저자도 수신자들과는 매우 친밀한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했기에 본서의 저자는 유대교로 되돌아가는 유대인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써서 그리스도와 기독교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최종적으로 자신의 권면에 대하여 인내심을 갖고 받아들여 지킬 것을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

 

 

 

 

4. 문안 인사와 축도

본서의 최종 대미는 문안 인사와 축도이다. 저자는 당시 수신자들을 가르치고 있는 지도자와 모든 성도들에게 문안을 청원하면서 로마에서 온 자들과 함께 히브리서 기자도 수신자들을 문안한다는 인사를 밝히고 있다. 이달리야에서 온 자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들에 의해 디모데가 투옥에서 풀려난 사건을 알았던 것으로 사료되고, 그들 역시 수신자들과는 안면이 있는 사람들로 추정이 된다. 따라서 디모데의 투옥이 로마 감옥이었을 것이란 추정이 좀 더 설득력을 더하고, 로마에서 온 사람들은 바울의 순교와 디모데의 투옥사건을 전달받고 로마를 방문한 성도들로 추정되기도 한다. 때문에 우리는 이 편지의 수신지가 에베소일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으로 본서의 강해를 끝맺게 된다.


저자는 최종적으로 25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수신자들 모두에게 있을 것을 기원하는 축도로서 본서를 마감하였다. 총 13장이란 비교적 긴 서신이면서도 본서는 구약성경을 인용한 매우 깊은 기독교 원리를 밝혀 주었다. 그리스도의 신분, 멜기세덱에 대한 반차, 새 언약에 의한 대속의 문제, 유대교의 문제, 기독교의 주일 성수문제나 제사제도에 대한 폐지 문제, 기독교 신앙의 가장 기본인 믿음에 대한 정의 등 매우 다각적인 측면에서 그리스도와 기독교의 우월성을 변증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진술을 통해서 진리를 아는 앎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또한 쟁점마다 조목조목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설명하는 저자의 변증을 통해서 성경은 오직 성경으로 답해야 한다는 원리도 깨닫게 된다. 아울러 깨달음이 삶으로 이어지고, 더불어 이 히브리서 강해가 전하는 자나 듣는 오늘 우리들 모두에게 지식을 더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한층 더 견고하게 하는 열매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글: chongshin.re.kr/zerobo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