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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서신 - 베드로전후서

야고보서 개관 및 행위와 은혜

by 은총가득 2021. 2. 7.

 

 

야고보서 개관< 권문상>

야고보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요 바울이 예수의 형제라고 말한 야고보에 의해 기록되었다. 야고보가 이 편지를 쓴 목적은 로마 제국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 신자들(디아스포라) 및 이방인 신자들 모두에게 여러 가지 박해와 시련을 참고 임박한 종말을 기다릴 것을 권면하고 반드시 행동이 뒤따르는 참 믿음의 사람이 될 것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야고보서의 주제

야고보서 전체의 주제는 ‘참 믿음의 실체’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분류한다면 참 믿음은

1) 여러 시험과 시련을 견디게 하고(1:2-18)

2) 교회에서의 공동체적 교제를 구현하며(1:19-4:17),

3) 헌신이 뒤따르고(아브라함과 라합의 행함, 2:23, 25).

4) 세속적 삶을 초월하여 종말론적 삶을 따르며 궁극적으로 여러 시험과 시련, 박해로부터 인내하는 삶을 살게 한다(5:1-20).

 

서신을 보낸 배경

야고보는 아마도 율법이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오해한 성도들을 의식하였던 것 같다. 이신칭의 교리가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도리를 지식의 차원에서만 받아들여서 교회 안에서 성도들 사이에 말이나 행동을 통해 상처를 받고 열등감 느끼게 하며, 소외 의식을 심화시키는 등 공동체의 붕괴를 일삼는 것을 문제시한 듯하다. 아마도 야고보는 성도들 사이에 험악한 적대 관계의 현장을 목도했는지도 모른다.

거친 말이 오가고 이간질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것을 듣고 보았을 것이다. 같은 장소에서 같이 거룩한 찬송을 하고 말씀을 듣는 자들이 예배를 마친 후 서로를 향해 저주의 말을 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거짓말과 비판의 말은 거친 독설이었을 것이고, 미움이 극에 달해 관용과 용서는 사치였을 것이다. 이런 교회에서 서로의 형편을 돌아보아 궁핍함을 채워주는 형제애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 교회에 모여 같이 신앙생활을 하고는 있지만, 참 믿음의 공동체적 교제는 아닌 것이다. 이러한 신앙인 공동체는 예수님이 가르쳐준 복음의 실체가 아니었다.

 

“---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억ㄹ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0-23).

예수님께서 천국에 가는 길, 혹은 ‘의’에 이르는 길은 ‘주여 주여’ 하면서 말로만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표시를 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요 ‘열매’를 드러내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되새겨 볼 때, 야고보는 열매 있는 참 믿음, 혹은 행함이 있는 참 믿음의 실체를 알려주어야 했던 것이다.

 

참 믿음의 실체- 이런 사람들의 참 믿음의 실체는

1) 어떤 시험과 시련을 만나도 잘 인내하는 ‘열매’를 맺는 모습이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1:3)라는 말씀이 이를 증거한다. 이런 참 믿음을 소유한 자는 자연스럽게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길 것이다(1:2). 아울러 참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끝까지 하나님을 믿으면서 자신이 겪는 어려움을 극복할 것이다(1:5-8). 또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며 때를 기다릴 것이다(1:9-11).

궁극적으로 끝까지 잘 참아서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참 믿음의 소유자는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세속적 시험을 겪지도 않게 될 것이다.

 

2) 또한 야고보가 가장 문제의식을 가지고 가르치고 있는 바와 같이(1:19-4:17) 참 믿음의 실체는 교회 안에서의 공동체적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모습이다. 참 믿음의 소유자는 우선 말을 조심해서 하는 자다. ‘혀를 재갈 물리라’(1:26)고 야고보가 말한 것을 보면 말로 인해 교회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1:19)고 하였다. 그리고 말로만 경건하다고 하는 자를 꾸짖기를 참으로 경건한 자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세속적 삶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자라고 선언한다.

 

참 믿음은 말만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선행이 뒤따르는 것이라는 말이다. 참 믿음을 소유한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라면, 교회 안에 가난한 자와 양식 없는 자에게 적당한 필요를 채워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 안에 참 공동체적 교제가 살아 있게 하는 것이다. 만일 말로만 믿는다고 한다면, 귀신도 믿고 떠는 ‘형식적’ 믿음에 불과한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한 입엣 찬송과 저주가 나오지 않는다(3:9). 마치 한 구멍의 샘에서 단 물과 쓴 물이 나올 수 없고, 무화과나무에서 감람 열매가 나올 수 없으며, 짠 물이 단 물을 낼 수 없는 것과 같다(3:1-12). 참 믿음의 소유자는 거짓말하지 않으며, 편견을 갖지 않고 성결하며 회평케 하고 관용을 베풀며 양순하고 긍휼의 사람으로서 선한 열매를 맺는 자고(3:17) 서로 비방하지 않는 자다(4:11).

 

3) 참 믿음은 말로만 떠드는 것이 아니라, ‘헌신’의 행동이다. 아브라함처럼 이삭을 희생시킬 수 있을 정도의 자기 헌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기생 라합처럼 목숨을 걸고 사자들을 접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헌신의 행동을 통해 비로소 아브라함도, 기생 라합도 의롭게 되는 것이다(2:21, 25).

참 믿음은 헌신의 행동을 통해 그 실체가 구현되는 것이다. 여기서 야고보는 결코 행위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21절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말한 후, 곧이어 22절에서 이 행함은 믿음의 온전한 형식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헌신의 행동은 참 믿음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런 의밍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 되는 것이고(2:20), 죽은 것이 되는 것이다(2:26).

 

신학적으로 말하면 성화가 뒤따르지 않는 칭의는 거짓이라는 말이다. 칭의와 성화가 구분되지만 결코 분리되지는 않는 것이다. 믿음과 행함이 구분되어야 하지만 결코 나누어 생각될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이 둘을 구분하지 않으면 행위 구원에 이를 수 있어서 이신칭의 교리 자체를 폐기하는 비성경적 논리를 만들게 된다. 반대로 만일 이 둘을 분리하면 말로만 믿음 앞세우는 자나, 율법폐기론자 혹은 윤리적 책임 의식을 사라지게 하는 자가 되어, 교회 안에서 반윤리적, 비양심적 행동을 하고서도 자신은 믿음이 있으므로 천국 간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야고보는 어느 정도까지 ‘행함’이 뒤따라야 한다고 하는가? 야고보는 이 주제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다만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3:2)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가 완전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성화의 삶을 사는 자는 믿음과 행함을 나누어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4) 끝으로 참 믿음의 실체는 재물에 욕심을 두지 않고 주의 임박한 강림을 믿으며 현재의 시련을 끝까지 잘 견디는 삶을 사는 모습이다. 야고보는 임박한 종말론을 제시하고 있다. 당장 내일이라도 곧 주님이 다시 오실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삶 자체를 포기하게 하는 시한부 종말론과 달리, 임박한 종말론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게 한다. 참 믿음을 소유한 자는 재물을 쌓아놓고 쓸 줄 모르는 자가 아니라 교회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곳에 사용하기를 즐겨하는 자다. 참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종업원 임금을 체불하거나 착복하는 악덕 기업주가 될 수 없다.

 

현대적 적용

 

야고보서에서 우리는 마치 한국교회의 시끄러운 현장이 그대로 투영도는 것을 발견한다. 한국 교회가 갖는 좋은 전통은 구원에 이르는 확고한 믿음을 잘 보존시켜온 것이다. 이신칭의 교리의 중요성은 신학적으로 무시될 수 없다. 하지만, 이신칭의 교리를 피상적으로만 이해한 것은 유감이다. 교회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된 것이 그 증거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야고보서를 가지고 설교를 하지 않았든지 아니면 아예 무시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란 말씀에 민감하지 못했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은 너무 사치일지도 모를 정도로 분쟁, 분열, 분란으로 교회 안에서조차 참 믿음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교회 안에 너무도 많은 ‘입’이 있는 것,, 그것도 거칠고 중상모략적이고 탐욕적인 ‘입’이 많이 있는 것을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특히 야고보가 부자를 향해 쓴소리한 것을 한국교회는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한다. 교회 안에 있는 돈 많은 사람이나 회사 경영자들은 가난한 성도들을 구제해야 하고 자기 회사의 노동자나 직원들에게 정당한 임금을 미루거나 거부하여서는 안 된다. 결론적으로 한국 교회는 공동체적 일체감을 회복해야 한다.

 

참 믿음을 가진 자는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한 가족처럼 포용하며 필요를 채워주어야 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여 더 이상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지 말아야 한다. 한국 교회 성도들은 그동안 참 믿음의 사람이었는지 반성하여야 하겠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인가? 확인하는 방법이 야고보서에 담겨 있다. 긍휼의 마음, 베푸는 실천, 관용의 자세, 화평을 좇는 행동 등이 나에게 있느냐 없느냐가 내가 참 믿음의 소유자인지 판가름할 것이다.

[권문상 교수]_묵상과 설교 중에서 


 

행위,은혜를 부르는 또 하나의 이름
권연경 교수(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1. 야고보서는 지혜문학에 속한다. 전도서나 잠언에서 보듯, 이 지혜는 추상적이고 이론의 지혜가 아니라 구체적 삶에서 필요한 생활의 지혜다. 야고보 서는 시종일관 우리 삶에 눈길을 둔다. 삶의 모양을 관칠하면서 거기서부터 신앙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사실 복음의 실천적 의미에 목말라하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너무도 반가워야할 종류의 글이 야고보서다.
하지만 야고보서는 별 인기가 없다. 엄연히 성경의 한 부분이지만, 그의 '홈피‘에는 방문자가 드물다. 이유는 간단하다. 삶에서 출발히여 신앙에 접근하는 방식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행위와 믿음을 나누고, 구원 문제를 삶/행위 아닌 교리로 해결하는 우리로서는 야고보서의 실천적 신앙론이 반갑지 않다. 반가운 친구보다는 부담스런 손님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는 시선을 피한다. 루터처럼 대놓고 폄하할 수는 없지만, 조용히 무시함으로써 사태를 무마하려는 것이다.


물론 야고보서를 아주 피할 수는 없다. 그래서 때때로 야고보서블 읽고 거기에 댓글을 단다. 그런데 그 댓글들이 더 답답하다. 야고보를 읽는 우리의 태도는 바울을 읽는 태도와는 너무 다르다. 믿음과 은혜를 강조하는 바울의 선포에는 뜨거운 갈채를 보내지만. 무늬뿐인 믿음의 허망함을 지적하는 야고보서 앞에서는 자기방어적 태도로 바뀐다. 루터처럼 '악플‘을 달지는 않 지만, 야고보를 있는 그대로 즐기려는 시도는 흔치 않다. 야고보는 분명 우리의 행실을 강조하는데, 우리는 끝내 “야고보서도 믿음 구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로 결론을 맺는다. 이런 결론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야보고서를 놓고서도 바울 변중올 시도하는 우리의 자세가 석연찮다는 것이다. 우리는 왜 행함이 최종적 판단의 기준이라는 야고보의 가르침에 흔쾌히 '아멘‘하지 못할까? (어쩌면 필자의 이런 표현을 놓고서도 교리적 틈을 찾으려고 눈에 불을 켜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갈라디아서나 로마서를 강해하면서. “하지만 우리를 의롭게 하는 믿음은 반드시 행위로 드러나야 합니다” 하면서 거품을 무는 설교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소위 *바울의 관점‘으로 야고보서를 재해석하려는 시도는 차고 넘치지만, 야고보의 관점에서 바울을 읽으려는 시도는 찾을 수 없다. 우리의 태도가 왜 이렇게 일방적일까?

II. 자기 기만의 함정
성경은 신자들의 착각. 곧 자기기만에 대해 자주 경고한다. 물론이 착각은 은혜가 있는 곳이면 어디나 존재한다. 아무 공로없이 이스라엘을 선택했던 하나님의 은혜는 쉽게 삶을 떠난 외적 종교성으로 타락했다. 삶의 순종은 없지만 화려한 종교는 있었고, 이스라엘은 그 외양에 (자발적으로) '속아‘ 자신들이 안전하다 착각하였다. 이사야 초두에서 보는 것처럼, 구약 선지자들의 외침은 줄곧 백성들의 이런 위선적 자기기만을 겨냥한다. 이스라엘은 ’값싼 은총‘에 의지했고. 선지자들은 그것이 그들을 구원할 수 없음을 폭로하였다.


새 언약의 등장이 구원역사의 본질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신약성경은 하나님나라의 임박함을 다급히 외치지만, 그렇다고 해서 '회장님의 방침‘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피상적으로 제기되는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이항대립은 첫 언약에 대한 오해인 만큼, 또한 새 언약에 대한 오해이기도 하다.


기독교의 첫 음성인 세례요한은 (어설픈) 행함을 포기하고 자기 뒤에 오실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촉구하지 않았다. 그는 아브라함의 후손, 곧 언약백성이라는 외적 정체성에 희망을 걸었던 당시 유대인들의 값싼 은총론을 공격하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 없이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마 3:7-12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1.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12.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눅 3:7-14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0.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12.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14.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오실 메시아에 대한 선포는 이런 요구에 기초 한 것이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다. 그는 바리새인들의 '행함‘을 비판하고, 자기에 대한 믿음을 요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칼날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외적 경건에 치중하면서 '율법의 더 소중한 가르침, 곧 정의와 자비로움과 신실함‘은 팽개친 위선적 공허함을 겨냥한다(마23:23). 야고보 식으로 말하면, 그들의 문제는 듣기만 하고 행하지는 않음으로써 자신을 속이는 어리석음이었다(약 1:2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말은 무엇이든지 행하고 그들의 행동은 본받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종교인들이었기 때문이다(마 23:3).
믿음과 은혜의 화신인 바울도 예외가 아니다. 칭의론을 개진하면서 바울이 공격한 유대인들은 율법준수에 열심인 율법주의자들이 아니라 외면적 정체성(할례, 율법 소유)을 자랑하면서도 그 삶은 이방인과 다를 바 없었던 부류의 사람들이었다(롬 2장). 갈라디아의 선동자들에 대한 그의 비판도“그들이 할례는 강요하면서 율법은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갈 6:12-13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이렇게 보면, 신약의 일관된 비판은 율법에 대한 열성이 아니라 그 반대. 곧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종교적 외양으로 모양만 내려한 위선에 대한 공격이었다. 종교적 껍데기를 비판하고 참된 알맹이를 약속하면서 등장한 것이 기독교 복음이었던 것이다.

Ill. 신자들의 자기 기만에 대한 바울의 경고
물론 이는 유대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더 큰 은혜를 누리는 우리들에게는 이런 자기기만의 위험이 월씬 더 크다. 그래서 신약은 거듭 성도들의 착각을 경고한다. 가령 이신칭의의 선언서에 해당하는 갈라디아서에 서 바울은 성도들을 향해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를 날린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무시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통치 하에서는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갈 6:7). 우리 인생의 농사에는 육체 농법과 성령 농법 2가지가 있다. 육체라는 밭에다 파종하면, 육체의 밭에서 썩어짐을 수확한다. (바울서신에는 지옥 개념이 없는데, 썩어짐이 그와 유사한 개념의 하나다). 반면에 성령에다 인생을 파종하면. 성령의 밭에서 영생을 수확한다

갈6,8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신앙의 모양만 잘 꾸민다면 육체 농법으로 살면서도 영생을 수확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강한 믿음이 아니라 대책 없는 자기기만이다. 바울은 그것을 경고한다. 그것은 육체대로 살면 죽을 것이고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라는 로마서의 말과 같다.

비교
롬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IV. 복음을 말하는 야고보서 방식
야고보서와 무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이유는. 삶을 제시하면서 믿음을 말하는 야보고의 관심사가 순수한 복음 그 자체라는 것을 되새기기 위해서였다. 오늘 우리에게도 구원을 삶의 문맥에서 분리하려는 유혹, 혹은 방식 우리 삶의 공허함을 화려한 외양으로 보상해보려는 충동은 신앙의 길을 방해하는 가장 집요한 장애물의 하나로 작용한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들에게 야고보서를 주셨다. 바울서신처럼 야고보서 또한 복음을 말하는 방식의 하나다. 우리는 쉽게 믿음이 순종으로 이어진다 말하지만. 이 흐름은 결코 자동적이지 않다. 사실 믿음이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많은 이들의 고민이 아닌가? 그럴 때 우리는 순종을 갈망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것이다. 하지만 때로 (혹은, 많은 경우) 우리는 위선적 종교성으로 순종없는 삶을 감추려 들기도 한다. 화려한 종교성 혹은 그럴듯한 믿음의 수사로 순종 없는 내 삶을 위장하는 것이다. 야고보서는 그런 우리들을 향해 복음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너의 삶을 거울로 삼아 너의 믿음을 비추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값없는 용서를 선포하셨다(눅 15장). 이는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소환하기 위한 하나님의 희생적 결단이었다. 그런데 이 은혜가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 상황이 생긴다. 1만 달란트의 용서가 1백 데나리온의 용서로 연결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오직 믿음’과 ‘오직 은혜‘를 말하려 한다 이럴 때 은총은 율법보다 더 무서운 칼날을 휘두른다. 예 수님은 "너희가 먼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해야 하나님이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라고 경고하며.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고 기도하라고 우리를 가르친다. 물론 복음이 율법으로 둔갑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는 이기적 자기만족을 하나님의 은혜로 치부하는 우리의 위선을 폭로하는 거룩한 지혜의 표현이다. 열매로 나무를 판단하고. 우리의 용서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읽어내겠다는 것은. 은혜로는 부족하니 율법을 의지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참 은혜를 선포하는 한 방식이었던 것이다. 바울의 표현으로 하자면. “의를 통하여 우리를 통치”하는 은혜 아래 살아가라는 초청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야고보는 정말 예수님의 동생이었다.


행위를 요구하는 야고보서가 복음으로 읽히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가 성경적 복음과는 다른 '내가 복음‘을 믿고 있다는 말과 같다. 철없는 아이는 복잡한 교통규칙을 짜증나는 율법이라 말하겠지만. 어른들은 자유로운 운행을 가능케 하는 지혜라 말할 것이다. 은혜의 다스림 안에 있으면 과거의 율법도 우리를 '자유케 하는 율법’으로 다가오지만(1:25). 죄의 다스림에 휘둘리는 사람에게는 복음조차도 갑갑한 요구사항으로만 들릴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야고보서가 해결되어야 할 신학적 문제인가. 아니면 우리가 잘못된 고집을 부리는 것인가?

V. 야고보서에서 배우는 하늘의 은혜
야고보는 지혜를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생활의 지혜, 우리의 행실로 드러나는 그런 지혜다(3:13). 우리는 이런 지혜를 실천해야 한다 (3:13-14). 하지만 이런 실천의 근원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그래서 이 지혜는 ‘위로부터 오는 지혜'다(1:5, 17; 3:15). 우리에게는 이 초월적 지혜, 곧 우리로 하여금 시험에서 인내하게 하고 우리를 생명의 면류관으로 이끌 어줄 하늘의 지혜가 필요하다(1:5). 여기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런 지혜로 우리 삶을 채워주실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말고 믿고 구해야 한다”


비교
1:6-8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롬 4:19-21그가 100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야고보서가 행위구원론이 아닌 이유가 여기 있다. 행위/지혜가 없어도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삶을 가능하게 하는 지혜가 하늘로부터 오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비교1:21“그러므로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모두 버리고. 온유한 마음으로 여러분 속에 심어주신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
2:14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심어주신 복음의 말씀은 구원의 능력을 함축한 말씀이다(롬 1:16 참고). 우리를 더러움에서 건지는 힘. 우리로 하여금 악을 버리게 하는 힘, 곧 시험에서 인내하며 참된 삶을 지켜가는 힘이다. 행위로 우리의 믿음을 중명하라는 야고보의 요구는 결국 (돈처럼)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 헛된 것들에 의지하거나(2:1-13: 4:13-17; 5:1-6). 육체의 욕심에 휘둘려 서로 시기하고 경쟁하거나(3:13-18: 4:1-12). 그러면서도 구원에 이를 것처럼 착각하지 말고(2:14-26). 오히려 우리를 구원하는 말씀의 능력을 굳게 믿고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늘의 지혜를 사모하라는 요구와 다르지 않다.


사실 우리가 하늘의 지혜를 필요로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아닌가? 내가 내 삶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내가 생명을 창조할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하늘의 은총. 곧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사모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야고보서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하늘올 사모하도록 만들지 않는가 <글 출처 : 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