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빗 왓슨, 제자도,
제1장 나는 제자입니다.
1. 제자는 어떤 형태로든 순교자로 부름받았습니다. 제자 개념은 예수님 당시에 널리 퍼져있었는데, 모세나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기독교적인 제자의 삶을 보여주었는데, 모세나 바리새인의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는 데만 그친 반면 그들은 스승에게 자신의 삶을 완전히 헌신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 평범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완전한 복종을 기대했으며, 그들이 치르게 될 고통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
2. 랍비들 세계에서는 제자가 스승을 선택해 학교에 입학했으나, 예수님은 주님이 택하여 제자로 세우십니다.(요15,16)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리스도의 주도권, 성령의 절대주권적 사역에 대한 제자들의 강한 인식이 예수님을 담대하게 증거하게 했으며, 고난을 인내하게 했으며,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엡4,1) 행하도록 인도했습니다. 주님이 택하여 세웠다는 인식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전적인 헌신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
3. 유래 랍비와 헬라의 철학자들은 제자들이 특정한 가르침이나 일정한 주장을 무조건 따르기를 기대했습니다. 석가도 석가 자신을 기리는 것보다 가르침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무조건 따라야 했고, 함께 있어야 했으며, 전심으로 그에게 헌신해야 했습니다. 제자도란 예수님 자체를 아는 것이며, 예수님을 사랑하고 믿으며, 헌신하는 것입니다.
순종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
4.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삶의 전적 헌신을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를 믿고 따르며, 그분의 뜻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인데, 순종이 없다면 진정한 믿음도, 제자도도 없습니다. 극단적 충성심으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목숨도 내놓는 극단적 테러리스트들이 그리스도인들보다 순종이라는 개념을 더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현대는 믿음으로 부름 받은 사람은 많으나 순종으로 부름받은 사람은 적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흔들리지 않는 순종과 충성으로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묶는 진정한 제자들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순종의 삶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만 악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매일’ 성령으로 연합되어 있는 형제들끼리 서로 권면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합니다.
섬김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
5.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으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낼 것을’ 명령받았습니다.(마10,8)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과 같은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제일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야망과 자기 연민의 감정이라는 두 가지 유혹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섬김의 예와 금세의 보상과 내세의 영생을 받으리라는 확신을 제자들에게 주심으로 유혹에 대처하도록 하십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받고 하나님 나라만을 위한 야망을 가질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종은 모든 자기 권리를 포기한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보상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의 필요 충족과 자신의 평화, 기쁨을 채우려는 것은 절반의 진실입니다. 우리 필요의 많은 부분이 예수님과 다른 사람을 섬길 때 충족됩니다. 줄 때에만 받을 수 있습니다.(눅6,38)
단순한 삶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
6. 랍비의 제자들은 토라 공부를 위해 물질적 이익을 포기했지만, 스승이 되면 보상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의 모든 안락과 물질적인 행복을 포기하셨으며 제자들에게도 겸손과 가난을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그러셨듯이 가장과 집, 직업과 재산을 포기했으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예수님만 신뢰하고 이방인들과 같이 걱정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공동체를 이루었으며, 이 공동체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은 물질로 공동체를 섬겼습니다. 이 단순한 삶에 이끌린 자들이 모든 재산을 함께 나누는 초대교회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고난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
7. 예수님이 자기를 따르라 부르셨을 때, 제자들은 십자가의 길도 기꺼이 따라야 했습니다.(빌1,29)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제자들이 체험해야 할 것들을 말씀하시면서 준비하도록 하셨지만(마16,21이하),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초대교회의 많은 제자들이 박해를 받았으며, 현재 세기에 순교자들이 이제까지의 숫자보다 더 많습니다. ‘이 시대는 적당하게 믿는 그리스도인이 살 수 없는 시대’입니다.(프란시스 쉐퍼) 제자들은 육체적 시험(마10,17:21이하)과 정신적 고통(딤후4,10-14)을 당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서로 상처를 입히고 실망을 주기도 하지만, 서로에게 죄를 범할 때 용서해야 합니다. 고난은 제자도와 떨어질 수 없으며, 깊은 영적 감수성을 가진 사람은 대부분 큰 고난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만 합니다. 박해 받지 않게 해 달라고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박대 당할 만큼 가치 있는 존재가 되도록 기도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박해를 통하여 우리에게 오기 때문입니다.”
은혜로 부르심을 받았다
8. 랍비들은 자격 있는 사람들, 즉 율법의 기준에 따라 의로운 사람들과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을 제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자격이나 제한이 없이 부르십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도 있었습니다. 열두 제자의 모임 성격에서 교회의 유형이 나타납니다.(고전1,26-29)
9. 순종으로 부름과 섬김으로 부름, 단순한 삶의 양식으로 부름, 고난으로 부름, 필요할 때에는 죽음으로 부름, 이러한 부름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부름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삶을 전적으로 바쳐야 하며, 이 땅 위에서 그의 몸의 지체로서 서로에게 삶을 바쳐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가입하는 단순한 클럽이 아니라 몸이며, 건물이며, 가족이며, 군대입니다.
데이빗 왓슨, 제자도, 2장 나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 하나님이 개인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십니다. 우리를 개인적으로 알고 계시며, 우리의 이름을 부르실 만큼 개인적인 사랑을 갖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의 개인을 인격적으로 사랑하십니다.
- 그러나 예수님이 개인을 혼자 존재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들의 새로운 공동체로 연합하게 하기 위해 부르십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서로 함께 살도록 하셨습니다. 매일 서로 교제하면서 이기심을 극복하고 서로 돕고 또 의지하는 방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재산도 모두 함께 나누었습니다. 왕이신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요일1,3)
공동체가 우선되어야 한다 - 예수님은 3년 동안 제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심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교회의 모델을 제공하셨습니다. 사랑하고, 필요를 채워주고, 가르치셨고, 언행심사를 고쳐 주셨으며, 신앙을 자극하셨고, 자기 이름으로 그들을 보내셨고, 용기를 주고, 인도하셨습니다. 그리스도 교회는 사도 자신들과 그들의 서로 나누는 삶이 기초가 됩니다.(엡2,20)
-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많은 진리를 가르치신 예수님은 무엇보다 자기(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하십니다.(요17,3)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을 함께 사는 공동체, 사랑하는 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사랑으로 연합된 제자들의 공동체’는 초대교회의 특징이 되었습니다.(행2,44;4,32:시133편)
- ‘하나님의 나라는 고침 받은 창조 세계’입니다.(한스 큉, 엡1,9-10)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갈 대행자입니다. 교회가 먼저 교회 안에서 치유하고 화해하는 사역을 잘 감당할 때,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대한 치유와 화해의 사역을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 나라는 ‘현재 이루어짐’(Now)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음’(Not Yet)이 항상 공존합니다. 교회가 오직 사랑으로 하나님 백성이 연합되고 사랑스러운 공동체를 이룬다면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실질적으로 치유’될 것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됩니다(엡3,10)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속하는 대행자로 교회를 선택했기 때문에 신약성경 기자들이 끈질기게 그리스도인들의 화해를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연합하라 - 대제사장인 예수님이 ‘사랑의 연합’을 기도하셨습니다.(요17장) 완전한 사랑의 공동체인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가는 교회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연합은 하나님의 삶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오늘날을 위한 ‘육신이 된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 공동체 위에 기초한 제자도가 효과적인 복음 전도를 위해 필수적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다른 은사를 가진 많은 교인들이 있으며, 성령의 여러 가지 다양한 은사들이 ‘각자의 뜻대로’ 계발될 수 있도록 허용될 때 교회는 자기 고유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고, 복음 전도 사명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 복음전도의 3P가 있는데, ‘현존(presence)의 복음 전도’와 ‘선포(proclamation)하는 복음 전도’, ‘설득(persuasion)하는 복음 전도’입니다. 여기에 스나이더(snyder)는 ‘전파(propagation)하는 복음 전도’를 추가합니다. 복음 전도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를 형성해야 창조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교제가 복음을 증명하는 곳에는, 신자들이 생기가 넘치며 비신자들은 그 비밀이 무엇인지 호기심이 생기며, 그것을 알고 싶어합니다.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대안을 생각하라 - 교회는 성경적 원리에 입각하여 헌신적으로 공동체의 삶의 형태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도덕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구조를 향하여 즉각적으로 도전을 할 수 있습니다. 제자도로 부름과 공동체로 부름, 선교로 부름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많은 교회가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우연한 만남이거나 고작해야 함께 일하는 관계에 불과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전제하십니다.
- 그리스도의 부름은 근본적으로 대안적인 사회로의 부름입니다.(막10,28-31 ‘핍박을 겸하여 받고’) 교회는 사랑의 방어 체제로 형성된 공동체로 구성되어야 하나,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는 취미와 성향이 어울리는 안란한 친목단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탐욕과 압제, 자기 중심으로 치닫는 현 세계에 도전하는 삶, 즉 ‘사랑의 방어 체제를 구축한 삶의 양식’(형제들과 자매들의 물건들을 무조건적으로 이용하며 제한 없이 서로 의지하며 신뢰)을 채택했을 때 다른 사람의 강하고 지독한 반발에 부딪히게 됩니다. 교제(koinonia)라는 단어가 돈과 재산을 서로 나누다는 문맥에서 자주 나타납니다.
- 교회는 ‘새상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교육 장소’이며 ‘앞으로 도래할 시대의 한 표시’입니다. 물질주의적이며 탐욕주의적인 압력을 행사하는 사회인데,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세우라 - 예수님이 제자들을 훈련시킨 방법은 공수특공 훈련과 같습니다. 3년도 채 되기 전에 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지성을 교훈했고, 의지를 변화시켰으며, 새로운 사회를 형성했고, 성령의 능력과 은사로 무장시켰습니다. 풍성한 삶을 제공하셨고, 빈마음을 사랑과 기쁨으로 채워 주셨지만, 고난의 시대가 곧 도래할 것을 경고하셨습니다.(요16,32이하;눅21,12;마24,10-12) 초대교회의 박해는 실로 처절하고 잔인했는데, 오지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들을 붙잡았기 때문에 박해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 오늘날에도 거의 동일합니다. 투옥과 고문, 매맞음, 죽임을 당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당합니다. 서구 기독교의 냉랭함과 무감각, 무사안일에 도전합니다. ‘평화로울 때 너희 자신을 강하게 하라’
- 1978년 니카라구아의 하나님의 도성의 지도자 카를로스 만티카가 말하길, 시련의 때가 올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고 완전하지는 않지만 첫 충격을 저지할 만한 힘이 있을 정도로 준비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대량학살하고, 고문, 테러의 심각한 시련을 줍니다. 1977년에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 깊게 헌신했떤 사람들은 고난의 한가운데서도 대부분 굳게 설 수 있었습니다.
- ①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준비 시간입니다. ② 시련의 때가 도래하면, 영적 전쟁의 강도는 다른 것보다 두 배나 강합니다. 그래서 다른 종류의 요새나 무기를 가져야 합니다. ③ 이 요새는 깊은 확신과 굳은 결심, 강한 관계 안에서 건축됩니다.
- 예수님은 필요할 때 우리가 서로 돕고,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고난이 오기 전에 공동체가 먼저 있어야 한다고 결정하셨습니다. 우리는 공동체의 중요성을 이해하며 우리 관계를 강화시킬 필요를 느낍니다. 우리와 맺은 하나닝믜 계약과 더불어 우리 형제들과 자매들과 맺은 계약은 고난의 때를 당했을 때 가장 좋은 보증입니다.
데이빗 왓슨, 제자도, 8장 나는 하나님의 영적 투사입니다.
1. 모든 그리스도인은 제자도가 투쟁임을 압니다. 사람은 왜 선한 일을 하고 싶으나 하지 못할까요? 하나님을 거역하여 반역함으로 죄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며(롬7,15), 하나님의 뜻을 좌절시키려는 사단과의 영적 전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마귀의 존재를 믿지 않으려 하는데, C.S 루이스는 마귀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과 마귀를 과도하며 비건전하게 관심 갖는 것을 경계합니다. 마귀는 이 두 가지 오류, 유물론자와 마술사를 환영합니다. 마귀의 존재를 부정하면 영적 전쟁에서 마귀의 전략을 모르기 때문에 눈가리개를 한 병사와 같습니다. 적을 보지 못하고, 적의 공격을 받고는 놀라 자기들끼리 총칼을 겨누고 싸우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 안의 증오와 오해, 적의가 생깁니다.
영적 전쟁에 대한 성경의 증거들
2. 성경에는 많은 곳에서 사단에 대한 언급합니다. 구약은 물론 예수님의 광야에서의 마귀 시험(마4,1),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구원 사역에서 언급된 사단과의 싸움.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는 베드로를 향하신 예수님의 책망(마16,23),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영적 전쟁,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빼앗는 ‘악한 자’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라는 예수님의 말씀,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라고 유대 지도자들을 책망하심(요8,44), 제자들이 악한 자에게 빠지지 않기를 기도하심(요17,15), 악한 영과 귀신 내쫓는 일이 포함된 치유사역 등이 그 예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사역에는 마귀의 능력과 인격성에 관해 말해줍니다.
3. 사도들도 영적 전쟁을 강조해서 가르쳤는데,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경고한 사도 바울(고후11,14), ‘궤계를 알지 못하는 사단에게 속지 않기 위해 용서하라’(고후2,11)는 사도 바울의 권면,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도록’ 그리스도인들과 바른 관계를 맺으라는 촉구, ‘마귀와 올무’(딤전3,7:딤후2,26), ‘귀신들의 가르침’(딤전4,1) 등이 있습니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엡6,11이하),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사자와 같이 삼키려는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 근신하고 깨어라’(벧전5,8) 등의 말씀들로 교훈했습니다.
영적 전쟁에 대한 역사적 증거
4. 기독교 지도자들도 영적 전쟁을 가르쳤는데, ‘영들의 분별을 위한 규칙들’이라는 장을 쓴 익나티우스 로욜라, 마귀의 공격 중 좌절과 실망 영역에 집중한 마틴 루터, 천성으로 가는 여행길에서 옆으로 기우는 여행자를 삼키지만 가운데 서서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을 건드릴 수 없다는 존 번연, 존 웨슬리나 조지 휘필든, 조나단 에드워드 등이 영적 전쟁을 진지하게 가르쳤습니다.
영을 분별하는 능력
5. ‘영들을 분별하는 능력’은 하나님이 주신 신령한 은사 중의 하나이며,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역의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단순히 육체적인 현상으로만 보지 않고 병 이면에 있는 원수를 직시했습니다. 베드로도 마법사 시몬의 가면을 벗겼으며, 바울은 점치는 영이 들린 소녀를 자유롭게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고 경고합니다.(요일4,1) 하나님의 순수한 일까지 매도해서는 안되지만, 이단과 사이비 종파를 분별해야 합니다. ‘세상 신’(고후4,4)이며 ‘온 천하는 꾀는 자’(계12,9)인 사단은 그리스도인들을 선경 진리를 왜곡하고 의미를 은혜해서 거부하도록 미혹합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인 사단은 악한 구조나 부당한 정치 제도 등을 동원해 약물 남용이나 오용, 섹스 산업,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물질주의, 폭력 등을 행함으로 그리스도의 통치를 반대합니다.(딤후3,1)
직접 공격
6. 악한 자에게 교활한 작전이 몇 가지 있는데, 첫째 직접 박해함으로 하나님의 활동을 파괴하려고 하며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고통을 주어 공격합니다.(벧전5,8이하:4,12이하) 로마 제국이 초대교회를 박해한 것을 시작으로 오늘날에는 공산주의 국가와 회교 국가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고문당하고 투옥당하고 있습니다. 20세기에 순교당한 그리스도인이 초대교회부터 19세기까지 순교 당한 수보다 훨씬 많습니다. 육체적 질병과 정신적 질병의 근본 원인을 분별하는 것은 무척 어렵지만, 그 배후에는 ‘우는 사자’의 행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찰스 스펄전은 루터를 인용하면서 ‘깊은 절망감’이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이라고 토로하며, 루터는 마귀와 말싸움하지 말고 혼자 있지 말고 다른 좋은 일을 하라며 절망감을 일으키는 사단의 공격을 이기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질병을 유발시키는 원인은 육체적 요인들(아픔, 피로, 영양 실조, 생리적 불균형, 미량 원소의 결핍)과 심리적 요인들(선천적인 성격), 타락한 심성, 마귀의 공격인데,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 연약한 곳을 찾아 사용합니다.
기소
7. 둘째, 사단은 ‘기소’라는 간접적인 방법을 사용합니다. ‘형제들을 참소(기소)하던 자’인데, 홍수 같은 거짓말로 교회를 압도하려 합니다.(계12,1-17)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사역이나 영적 갱신을 침묵하거나 엉뚱하게 풍자해서 왜곡합니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들이 서로 비난하며 모욕하는 일들이 일어나며, 마침내는 교회가 분열됩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불신을 심어 진리를 거부하게 합니다. 이런 일들은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에 불과하며 믿음의 방패로 이길 수 있습니다.(엡6,16)
도용
8. 사단은 그리스도인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일을 훼방합니다. 사단은 교회에서 존경받거나 영향력 있는 인물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편협하고 경직된 신앙으로 매도하게 만듭니다. 다른 형제를 혹평하거면서 몰아세우기도 합니다. 사단은 연약한 인간의 육체를 악용하며 순수한 사랑의 체험을 감정적 연루나 간음, 동성연애 행위로 전복시킵니다. 이런 현상들로 지도자들을 타락시킵니다. 사단은 우리의 연약함을 이용해서 평화를 가져오는 자(peace-maker)가 아니라 그저 누리기만 하도록 만듭니다. 갈등을 회피하려고만 들고 관계에서 생기는 긴장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자연히 성도 가운데 죄가 득세해도 침묵, 방치합니다.
위조
9. 사단은 각종 움직임을 허위로 조장해 하나님의 일을 혼란시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많은 사람들을 속이고 성령이 역사하는 순수한 운동까지도 불신하게 만듭니다. 더구나 교회의 영적 빈곤으로 인해 신비주의적 관행과 동양 종교의 신비주의가 더 넓게 퍼지고 있습니다. 사도들과 교부들은 영지주의 이단과 신비적 종교들이 미혹하는 영들의 활동으로 판단하고 ‘적그리스도의 영’과 ‘실족케 하는 영’이라 정의하며 철저히 경계했습니다.
유혹
10. ‘유혹자’인 사단은 하나님의 백성을 유혹함으로 파멸시키려 합니다. 사단의 유혹으로 제 정신을 잃고 자신의 일을 게을리하고, 남의 일을 시기하며, 스스로 교만에 빠지며, 제 몸에다 상처를 입힙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허약하게 만듭니다. 요즘은 유사 기독교적 생활 양식이 날로 강해지고 매력적인데, 세속적 물질주의와 사회적 지위 구분, 중간 계층의 윤리, 서구적인 풍요 등으로 유혹합니다. 신앙을 취미생활로 만들어버려 영적 지도자가 던지는 도전을 회피합니다.
11. 그리스도인은 온 세상이 악한 자의 세력 밑에 있는 세상의 가치에 순증하라고 부름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노아의 때를 탐욕과 간음, 도박, 살인과 같은 범죄행위를 언급하지 않으시고, 단지 일상적이며 단순한 일들인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와 같은 일들을 언급했습니다.(눅17,26) 하나님이 노아의 때를 심판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의 삶 중심에서 밀려나 언저리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 시민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로잡힘(귀신들림)
12. 여섯째, ‘살인자’와 ‘무저갱의 사자’(파괴자. 요8,44:계9,11)인 사단은 하나님의 창조물인 인간을 사로잡아 하나님의 일을 조롱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인격이 악한 영에 사로잡혀 파멸해 가는 현상은 경악스럽습니다.(눅4,33-36) 이런 일들은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신비주의적 관행을 좇다가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단은 인간의 제도에 개입해 개인을 굴욕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사회 및 정치적 제도에 개입해 가난한 자와 약한 자를 압제하며, 인간의 탐욕을 조장해 엄청난 부정 축재를 낳게 하고, 타락한 육욕을 사용해 모든 정열을 육적인 일에 몰두하게 만들며, 젊은 사람들을 섹스의 대상으로 전락시킵니다.
13. 초대교인들은 영적 전쟁에 익숙했으나 오늘날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 전쟁의 승리와 자유의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당신의 적을 알아라. 사단의 성격과 전략, 활동적이며 파괴적인 행위를 알아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라. 하나님은 능히 우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우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분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믿음 위에 우리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킬 것’을 요구했습니다.(유17-25)
셋째, 그리스도 안에서 강하라. 사람을 사단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은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에 관한 성경 구절이나 본문을 읽기만 해도 큰 힘을 얻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사단을 억제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연설하는 목회’와 무분별한 축사(귀신 쫓는 것) 행위를 절제해야 하는데, 더한 고통과 심각한 합병증을 유발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에 언급한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넷째, 성령으로 충만하라. 바울은 성령 충만할 것을 촉구했는데, 영적 전쟁에 효율적으로 임하기 위해 성령의 모든 은사로 무장할 필요가 있습니다.(엡5,1-18) 사람의 능력을 의지하면 그 연약함으로 넘어지거나 교만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 삶을 온전히 성령에 맡겨야 합니다.
다섯째,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섬기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권면한 후에 ‘세월을 아끼라’고 촉구합니다. ‘사단은 아직도 게으른 사람이 무엇인가 큰 재난을 일으키기를 기대하며’(아이작 와츠)의 게으름과 ‘서두르라…마귀가 있다’(칼 융)는 게으름과 서두름의 균형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영은 고요하고 평화로웠지만 몸은 바빴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일을 완전하게 성취했습니다.
여섯째, 잘못된 관계를 빨리 바로잡아라. 모든 교회는 죄인들의 사귐이기에 뜻하지 않게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고 우리도 상처 입습니다. 그래서 ‘일흔 번에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마귀로 틈을 주지 않기 위하여’ 해가 질 때까지 화해하라고 권면합니다.(엡4,26)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전4,9-12)
일곱째, 하나님의 전신갑줄르 입으라. 여덟째, 끊임없이 기도하라. 아홉째, 즐거운 소리를 사용하라.(수6,16-20:대하20장)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 어려움을 넘는 힘이 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더욱 견고케 할 것입니다.
달라스 윌라드, 잊혀진 제자도, 머리말
1. 1. 예수께서 세상과 우리 삶 속에 오셨으니 이제 상황이 정말로 달라질 것이라고 소망하지만, 기독교 신자들의 성품과 영향력에 대해, 기독교 기관들에 대해, 기독교 신앙과 현실 인식에 대해 실망하는 목소리가 아주 많습니다. 기독교와 거리를 두고 있는 사람들도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지만,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 자책성 실망을 합니다. 즉 예수 안에 표현된 생명에 대한 희망과 실제 일상 속에 행동과 내면 생활과 대인 관계 사이에 거대한 괴리(great Disparity)가 있습니다.
2. 2. 이 거대한 괴리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예수의 성품과 그분의 가르침과 사역에 내재적인 문제가 있나요, 기독교 기관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비본질적인 요소들이 들러붙어서인가요? 자동차에 물 탄 연료를 주입하면 주행에 문제가 생기듯이, 기독교라는 자동차의 주행에 문제가 생긴다면 우리 삶을 떠맡을 수 있을 만큼 우리가 거기에 자신을 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3. 3. 기독교라는 자동차가 전천후로 영광스럽게 달리는 모습을 보아 왔으며, 그렇게 달릴 수 있습니다. 숨겨진 분이 아니라 계시된 예수님일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이 찾아야 합니다. 찾으면 만나 주시는데, 이 만남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지속적으로 ‘자라 가는’ 예수 제자의 복된 실존입니다.
4. 4. 배우는 자이며 학생, 도제인 ‘제자’는 그 업에 종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절대로 제자가 되지 않고도 영원히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이 지상 명령의 중대한 누락과 괴리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를 없애고 양분만 주면 됩니다.
5. 5. 자동차에 사용설명서가 있듯이, 우리에게 제자가 되어 제자를 삼으라는 지상명령이 있습니다. 기독교 회심자나 특정한 ‘믿음과 실천’의 회심자, 죽음 이후 ‘천국에 가게’ 하는 것 또는 ‘커트라인에 들게’ 하는 것, 불의를 제하는 것, 성공적인 교회를 만들어 유지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이런 일들도 그분이 명하신 일을 할 때 이루어집니다. 그 일만 한다면 그 밖의 다른 일들을 하고 안 하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제자인 우리가 다른 사람을 제자가 되게 하면 초자연적인 삼위일체의 임재 아래 모아서, 전혀 새로운 종류의 사회 단체인 ‘교회’(ecclesia)를 형성합니다.
6. 6. 지상명령의 에스네이(esne)라는 헬라어를 ‘족속’으로 번역함으로 다른 나라에 가서 해야 할 일로 생각하고, ‘우리 부류의 사람’은 제자도로 인도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이 말을 ‘소수 민족’이나 그냥 ‘모든 부류의 사람’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우리는 다른 곳에 가서 이 사역을 하도록 노력을 동원하는 것만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있는 이 자리에서 지상명령을 이행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7. 7. 예수께서 떠나실 때 교회를 시작하라고 알고 있으나 이것보다 훨씬 큰 목표를 명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 나라의 ‘교두보’ 또는 작전 기지를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은 인류를 향한 목적이 이 땅에 다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부단히 계속되는 도덕적인 개혁으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사명은 생명에서 흘러나오는데, 영생이란 성령께서 거하시는 환경 속에서 하나님과 그 특별한 아들 예수와 함께 누리는 상호 작용의 관계입니다. 영생은 하나님 백성답게 걸어가는 것인데, 이것은 예수의 도제가 되어서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순종이 필요합니다.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이나 더 많은 돈, 더 많은 건물이나 프로그램, 더 많은 교육, 더 많은 위신보다 ‘예수의 제자들 삶 속에 실현하시는 차원의 삶’이 교회에 필요하고, 이것이 전부입니다.
8. 8.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인간 실존 모든 분야에서 하늘나라의 삶을 사는 법을 배움이 필요합니다. 교회를 깨치고 나와 그리스도의 교회(Church)가 되며, 인간적인 세력이나 ‘폭력’ 없이 선을 이룰 그리스도의 권능의 세력이 되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향해 교회들을 선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복잡하거나 모호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대로 하자! ‘이래저래 다 안 되거든 사용설명서를 따르라’달라스 윌라드, 잊혀진 제자도, 11 개인의 영혼 관리 _ 사역자들과 모든 사람을 위해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4,23
1. 1. 복음의 일꾼으로서 사역자는 “속사람”(고후4,16)이 끊임없이 새롭게 되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속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자원을 가져다 써야 끊임없이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영혼과 가장 큰 계명
2. 2. 인간의 숨은 면 또는 영적인 면을 말하는 “영혼”은 개인의 생각과 감정, 마음, 뜻, 의향, 선택과, 개인의 신체적인 삶과 사회적인 관계도 포함된 포괄적인 것입니다. 사역자의 자아가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일하느냐에 따라 사역자의 열매 맺는 삶이 결정됩니다. 나무를 잘 돌보면 열매는 저절로 맺히게 됩니다.(마7,17)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큰 계명(눅10,27)도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 보다는 무엇을 가꾸어 영혼을 관리해야 하는지의 내적인 차원을 말합니다. 하나님 차원의 사랑인 아가페에 흠뻑 젖은 인격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과 봉사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3. 3. 그러나 사역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할 때, 즉 사역자와 그의 가족들이 사람들에게 ‘잘해주려고’ 하다가 분노하고 절망합니다.
성품과 성령의 열매
4. 4. 사역자들의 ‘갑작스런’ 실패는 ‘마음에 숨은 사람’(벧전3,4)의 고질적인 결함들이 겉으로 표출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생과 사의 모든 조건을 감당하기에 충분한 자원이며(고전13장),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요4,14)입니다. “생수의 강”(요7,38)이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서 목마른 세상으로 흘러서 나갑니다. 사람들은 설교자의 말보다 설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를 기억합니다. 즉 우리 영혼의 질이 다른 사람에게 흔적을 남깁니다.
5. 5. 하나님은 우리 삶에 성령의 열매(갈5,22-23)가 많이 맺히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분의 능력을 받아서 우리 영혼을 적절히 관리하면 영적인 열매가 풍성히 맺히고 ‘육체의 일’의 비참한 목록(갈5,19-21)에서 건짐을 입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
6. 6. 영적 훈련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일은 항상 하나님을 우리 생각 앞에 두는 것입니다.(시16,8-9) 훈련 초기에는 잡념에 빠지는 습관 때문에 힘들 수 있지만, 이것은 중력과 같은 법칙이 아니라 습관이기 때문에 고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항상 앞에 두고자 계획적으로 자꾸 행동을 취하다 보면 은혜 충만한 새로운 습관이 옛 습관을 대체하게 됩니다.
7. 7.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 안에서 동행하는 “평소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는 신약성경의 복음서를 날마다 정성 들여 읽고 또 읽어서 그 장면들과 말들을 의도적으로 항상 우리 생각 앞에 두는 것입니다. 이 연습 과정의 시작 단계로 하루 동안 끊임없이 우리 생각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로 되돌리는 연습을 하기로 결단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좋은 문단들을 암송하면 예수께 집중하는데 더 탄력이 붙습니다. 이런 좋은 말씀들로 우리 생각이 가득 차고 언제고 묵상할 수 있게 되면, 우리 삶 전체가 경건의 시간이 됩니다.
8. 8. 묵상은 우리 삶의 필수적인 부분입니다.(수1,8:시1편)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입에 둘 수 있는 방법은 암송입니다. 말씀을 외우면 하루 중 우리에게 닥치는 일들이 우리를 깨우쳐 주시는 하나님 말씀의 임재 안으로 들어옵니다.(시36,9)
사랑과 예배
9. 9. 말씀에 우리 생각을 집중하면 하나님을 점점 더 사랑하게 되고, 예배의 삶 속으로 들어갑니다. 예배는 우리 전 존재를 하나님께로 회복시키는 일을 지속하고 완성케 합니다. 예배는 또 하나의 일이 아닙니다. 예배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선물인 ‘생수’의 한 단면이며, 하나님과 늘 동행하면 자연스럽게 사랑과 예배가 흐르게 됩니다.
충만한 기쁨
10. 10. 영혼 관리를 위해 자신의 감정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랑이 영적인 삶의 기초이며, 기쁨은 그리스도 생명의 핵심 요소입니다. 즉 기쁨은 감각이나 쾌감이 아니라 편만하고 지속적인 평안함입니다. 그리스도 안의 삶을 나타내는 “믿음, 소망, 사랑, 평안”은 몸과 사회적인 상황을 포함한 모든 개인 삶을 아우르는 상태이며, 감정이 함께 생깁니다. 이런 긍정적인 감정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사는 사람들의 특징이 됩니다.
고독과 침묵
11. 11. 영혼 관리를 위한 실천 가운데 대화와 소음을 떠나 혼자 있는 고독과 침묵이 있습니다. 고요한 사귐의 자리에서 나에게 영혼이 있고 양육해야 할 내적 존재가 있음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와 상호 작용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내면의 성소에서 다시금 체험하게 됩니다.
12. 12. 우리를 위한, 우리를 통해 하실 그분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공급은 충분합니다. 우리가 ‘일이 되게 할’ 필요가 없고, ‘결과’의 짐을 그만 짊어져도 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못하게 막는 가장 큰 위협은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우리 마음을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에 빼앗기는 것은 개인의 영혼 관리의 실패입니다. 그러나 고독과 침묵의 시간에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것을 연습하면 영혼 관리의 실패로부터 우리를 건져줄 것입니다.(시46,10-11)
시간은 나는 것이 아니라 내는 것이다
13. 13. 영혼 관리를 할 시간이 없다, 할 일이 너무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삶의 질을 높이려고 시간을 쓰는 것보다 더 유익한 시간은 없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할 일을 너무 많이 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스스로 그렇게 만들거나 남들에게 잠자코 끌려가는 것뿐입니다. 둘째, 사역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구사하는 것으로는 성품이 고쳐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지혜롭게 구하고 받을 수 있으나,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자라 가기를 구할 때에만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품 없이 능력만 있으면 현대판 삼손과 사울이 나옵니다.
충만한 삶의 계획
14. 14.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삶을 추구할 수 있는 검증된 방법으로 “영적 훈련”들이 있는데, 고독과 침묵 뿐만 아니라 금식, 검소한 삶, 봉사, 기쁨, (훈련으로서의) 기도, 일기 쓰기, 교제, 감시 관계, 복종, 고백, 기타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훈련은 공로를 얻는 수단이나 고생, 고행, 의가 아니라 단지 꼭 필요한 지혜입니다.
앤디 스탠리, 성품은 말보다 더 크게 말한다, 1장 티끌 모아 태산
1. 1. 1966년 웨일즈 남부의 탄광촌인 애버팬에 탄광 사고가 났습니다. 백 여 년 동안 탄 부스러기가 쌓여 만들어진 거대한 검은 산이 폭우로 무너져 내렸는데, 학교를 덮쳐 이백 여명의 아이들이 사망하였습니다. 고장의 명물과 유산이 하루 아침에 재앙의 원인이 되었는데, 그 하루는 이미 오래 전부터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애버팬은 어디에나 있다
2. 2. 결혼 생활의 파경이나 원치 않는 임신, 재정 위기, 직장 생활의 문제와 같은 개인적인 재난은 불시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만들어진 사건입니다. 그런데 왜 자기 스스로 놓은 덫을 알아보지 못할까요? 어떻게 했더라면 그 상황을 피할 수 있었을까요? 그 대답은 언제나 “성품”으로 결론지어집니다.
3. 3. 옳은 길을 벗어나 재앙을 쌓아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이의 성품 결함이 불러온 폭풍 때문에 고난을 겪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당한 대우와 억울한 고통을 당할 때 자신의 성품이 드러나는데, 분노와 절망하는 사람도 있으며, 경건한 시각과 태도를 지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말보다 행동과 태도, 삶이 그들 내면의 실상을 더 큰 소리로 말해줍니다.
당신의 참 모습
4. 4. 성품은 한 사람의 참모습입니다. 개인의 성취와 성공, 인간관계는 성품으로 결정됩니다. 재능과 교육, 배경, 인맥이 문을 열 수는 있지만, 그 문을 들어선 후 어떻게 될지는 성품으로 결정됩니다. 즉 외모와 재산으로 결혼할 수는 있지만, 행복한 결혼생활은 성품으로 결정됩니다. 건강한 몸으로 자녀를 낳을 수 있지만, 자녀와의 관계와 대화는 성품으로 결정됩니다.
5. 5. 나무는 날마다 성장하는데, 당장에 눈에 띠지 않습니다. 성품도 마찬가지로 정체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성장하거나 쇠퇴합니다. 겉사람이 서서히 변하는 것처럼, 속사람도 서서히 변화합니다.
6. 6. 오 년 후나 십 년 후 되고 싶은 모습에 오늘 가까워졌을 수도 있고 오히려 멀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소수의 사람만이 부정적 관성을 이기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장례식장에서 사람이 평가되는데, 당신의 유산을 결정하는 것은 성취나 재물이 아니라 성품입니다.
7. 7. 진정한 성품은 평생 자랍니다. 불리한 사건과 경험, 학대 때문에 불리한 출발을 할 수 있지만, 종착점은 내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내 속사람과 성품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성품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이는 과정에 깊이 개입하시기 때문에 성품의 성장은 단독비행이 아닙니다.
앤디 스탠리, 성품은 말보다 더 크게 말한다, 2장 성품이란 무엇인가?
1.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특정한 방식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신기한 생각이 있고, 그 생각을 절대 떨치지 못한다. C.S.루이스
1. 2. 40억 달러를 투자하고 육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십년 동안 노력하여 오백 킬로미터 상공에 고성능 망원경을 올려놓았습니다. 지름 3미터의 망원경 본렌즈인 오목렌즈는 육 년 동안 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 머리털 지름의 1/50만큼 렌즈의 초점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망원경은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성품에 초점을 맞춘다
2. 3. 현대는 좋은 성품에 대한 일치된 의견이 없습니다. 성질이나 기분, 배경, 경제적 지위, 종교적 소속에 따라 성품을 다르게 정의하는데, 이런 것은 움직이는 과녁과 같습니다. 분명한 정의가 없기 때문에 ‘나는 성품의 사람이며, 문제는 남에게 있다’고 착각합니다.
전체 진상
3. 4. 성경적인 성품의 근원은 인간 행동 유형이 아니라 우리 창조주의 본성에 있습니다. 좋은 성품이란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이며, 이런 성품을 이룰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성품을 힘쓸 마음이 없으면서 타인에게 그런 성품을 요구합니다.
정의를 찾아서
4. 5. 하나님의 주권(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입니다)과 소유권(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이라는 기본 교리에 근거하여 성품을 정의합니다.
5. 6. 성품이란 일신상의 어떤 대가가 따르더라도 하나님 기준의 옳은 길을 가려는 의지입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믿음과 어떤 대가가 따르더라도 옳은 길을 가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6. 7. 이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의 체포 명령에 존 울핑거 선교사는 도망가지 않고 체포되어 처형당했습니다. 일본군이 울핑거의 은신처를 물으면 추종자들이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은 용인될 수 없는 일입니다.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옳은 길을 가려는 의지를 지켰습니다.
어떤 대용품도 불허한다
7. 8. 성품의 분명한 정의가 없으면 대중 문화가 내놓은 껍데기 모조품이 자리를 채웁니다. 거짓말도 오래 들으면 사실로 믿어집니다. 성품을 바르게 정의하지 못하면 성품이 나타나는 현장에서 실패하게 됩니다.
8. 9. 배우자를 버리는 남편과 아내들, 권위에 반항하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 고용주를 속이는 직원들은 ‘가해자’에게는 엄격한 논리를 적용하나 자기 행동을 정당화시키켜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앤디 스탠리, 성품은 말보다 더 크게 말한다, 3장 당신의 성품은 보인다.
사람이 안에서부터 바뀌려면 자기 방어적 관계에서 깊은 사랑의 관계로 점차 옮겨가야 한다. _래리 크랩 박사
1. 1. 굳이 보지 않아도 당신의 성품은 보이는데, 특히 당신과 가까운 이들에겐 훤히 보입니다. 전혀 비밀이 아닙니다. 성품은 대인 관계에서 차지하는 독특하고도 불가피한 역할 때문에, 즉 관계의 윤활류이기 때문에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엔진의 시동을 걸라
2. 2. 일 초도 안 되는 동안 수백 가지 복잡한 작동이 정확히 이루어지는 물리학의 조용한 기적인 자동차 엔진도 오일이 없으면 단 몇 분만에 절단 나고 맙니다. 수십 억의 인간이 맞물려 있는 인간 관계의 집합체인 사회도 성품이 없으면 피차 절단 납니다. 오일이 없으면 차이점이라는 마찰 때문에 혹독한 대가를 불러와 서로 갈라서게 만듭니다. 죽고 못살던 남녀의 결혼생활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로 끝나는 이유도, 환상적인 호흡의 동업자가 갈라서는 이유도, 부모와 자녀, 이웃과 친구들과의 관계가 아무 것도 아닌 문제들 때문에 깨지는 이유도 성격이 다른 사람들을 맞물리게 하는 윤활유인 성품이 없기 때문입니다.
3. 3. 성품 결손이 있는 곳마다 관계에 대가를 치릅니다. 성품이 모자란 경영자에게는 사장을 존경하지 못하는 직원들이 생기게 되고, 재능과 카리스마는 있으나 성품이 없는 공동체 지도자에게는 공동체의 다툼이 생깁니다. 맞물리는 시간이 길수록, 관계가 가까울수록 마찰 가능성은 높아집니다.
4. 4. 가까워질수록 갈등이 불거질 기회가 많으나 거리를 두면 사태가 진정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갈등을 회피하는 것으로는 사회라는 엔진을 장기간 계속 돌릴 수 없습니다. 관계라는 정밀 기계의 핵심 역할에서 사람들을 빼면 엔진이 고장납니다. 즉 부부 갈등 때문에 배우자를 버리면 자식들이 고생합니다. 직원의 불만으로 인한 사표나 해고는 후속 조정과 생산성 하락으로 경제적 타격을 줍니다. ‘문제’ 인간들을 감옥에 넣으면 사회적 점은 점점 커집니다. 마찰을 피하는 것은 정밀 기계의 주요 부품을 빼내는 것과 같기 때문에 문제만 더 악화될 뿐입니다.
성품을 들여다보는 창
5. 5. 건강하고 오래된 관계는 온전한 성품이 존재한다는 증거입니다. 갈등 많고 단명한 관계는 성품 결손의 증거입니다. 성품 결손이 있을 때 제일 먼저 ‘관계’가 고통 받습니다. “당신은 성품의 남자입니까?” “아내의 얼굴을 보면 그가 어떤 남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아내에게 주었거나 주지 않은 것은 아내의 얼굴에 그대로 묻어납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기준을 받아들이면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초점을 두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타인지향적이며(롬8,32), 성품을 추구한다는 것은 주변 사람들을 진정 배려한다는 뜻입니다.
성품의 깊은 효과
6. 6. 성품을 갖춘 사람은 자기 영향권 내의 모든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에 도덕적 권위와 안정감, 호감, 친근감, 존경심을 줍니다. 타인은 매력을 풍기는 성품의 사람처럼 되고 싶어합니다. 반대로 성품의 부재도 연쇄 반응을 낳습니다. 자기 손해를 면하려 성품을 타협하는 사람은 존경과 신임을 잃게 됩니다. 관계가 꺼려지게 되고, 앞뒤 종잡을 수 없는 거짓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겨져 타인이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벽을 칩니다. 내가 언제 성품 결손자의 희생물이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7. 7. 나도 다른 사람들의 성품에 반응하지만, 동시에 그들도 우리의 성품에 반응합니다. 이런 두 힘이 만나 관계 역동의 천을 짜게 되는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거나 증오를 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품 기준을 따르면 관계의 보상을 받게 됩니다. 성품이 있는 곳에 상생이 있고, 성품이 없는 곳에 갈등이 있습니다.
네 가지 중요한 관계
8. 8. 성품의 효과를 보려면 네 가지 기본 관계를 생각해야 합니다.
9. 9. 하나님과의 관계 : 알면서도 성품을 타협하면 하나님의 기준과 내 실제 기준 사이의 불일치를 느끼게 됩니다. 이런 감정을 죄책감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거리감이 들면 피하게 되고, 더 멀리 달아나면 거리감이 커지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성품을 추구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동행이 위태로워집니다.
10. 10. 자신과의 관계 :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가 하나님과 타인을 어떻게 보느냐를 결정합니다. 성품의 부재와 타협은 하나님 기준이나 자기 기준에 맞지 않을 때 나타나는 죄책감을 느끼는데, 믿음을 저버린 무익한 존재가 된 기분입니다. 패배감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낮은 자존감을 갖게 됩니다. 내가 원수처럼 행세하고 있으니 자신을 더 수용할 수 없습니다. 자신에게 불만인 사람들은 늘 주변 사람들에게도 불만거리를 찾아냅니다. 즉 자기 성품에 불만이 많을 때 다른 사람들을 흠잡기에 가장 빠릅니다. 남편이나 아내, 자녀 등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주요 표적이 됩니다. 성품에 따라 행하면 하나님의 절대 기준을 존중했음을 알고 부끄럼이 없기 때문에 고생이 닥쳐와도 그 안에서 쉴 수 있습니다. 고생은 어리석은 선택에 대한 벌이 아니라 성품의 사람이 치러야 하는 값진 대가입니다. 죄책감과 패배감 대신 승리자와 정복자가 된 기분입니다.
11. 11.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 모든 대인 관계 갈등의 근원은 무산된 기대입니다. 타협이 지배 원리인 세상에 살면서도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경악합니다. 기대를 품고 살기 때문인데, 모든 기대의 밑바닥에는 자기중심적인 동기가 깔려 있습니다. 즉 무난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을 정도만 성품의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말 좋은 관계를 막는 최대의 장애물은 정당화된 자기중심성입니다.
12. 12. 성품이란 하나님의 옳고 그른 기준에 따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내 기대를 하나님께 맡긴다는 뜻입니다. 즉 참 성품이란 보답이 없더라도 이웃을 나처럼 사랑하는 것이며, 부장한 대우는 성품을 드러낼 기회입니다. 복수심에 정서적 에너지를 쏟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옳은 길을 갑니다. 대인 관계에서 성품의 보상을 누리게 됩니다.
13. 13. 공동체 관계 : 공동체의 성패는 그 단체의 집단적인 덕에 좌우되는데, 경건한 성품이 공동체 내에 지배적이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는 자치적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외부 세력이 통제하게 됩니다. 아이의 불순종은 부모의 개입과 통제를 부르고, 성인의 불법은 경찰력 동원을 부르며, 국가의 자치권 능력 상실은 혁명이나 구테타, 타국의 점령을 부릅니다. 그런데 공동체의 성공 열쇠는 개개 구성원들의 성품입니다.
14. 14. 공동체에서 갈등이 발생하는 것은 엔진 마찰과 같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성품의 결손이 문제입니다. 차이와 갈등을 성공적으로 풀어가려면 어떤 대가를 따르더라도 덕과 정직, 공정성과 같은 옳은 길을 가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성품을 중시해야 합니다.
15. 15. 인간의 자기 이해 능력은 자신의 사고 역량에 제한됩니다. 많은 일상의 문제들은 우리의 문제 해결 능력을 넘어섭니다. 좌절과 혼란, 철저한 탈진에 빠지게 되고, 내 방법과 내 힘으로 인생을 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교훈이 우리 생존에 꼭 필요합니다. 경건한 덕, 즉 성품이 있어야 갈등의 교묘한 침략을 역전시킬 수 있습니다. 관계란 잘 지내는 것인데, ‘바르게 살면 잘 지낼 수 있습니다.’ 앤디 스탠리, 성품은 말보다 더 크게 말한다, 4장 성품의 약속 book summary
우리 뒤에 무엇이 있고 앞에 무엇이 있느냐는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느냐에 비하면 작은 문제다 _ 랄르 왈도 에머슨
1. 1. 애팔레치아 구릉의 바위 끝에는 이백 년 된 상록수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오랜 세월의 강한 바람과 폭설, 자연환경 때문에 마치 죽은 것과 같이 매달려 있습니다. 겉만 보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보이지만, 해마다 짙푸른 침엽과 토실토실한 솔방울들이 주렁주렁 맺힙니다. 거센 풍파에도 나무는 조용히 표면 밑으로 내적 지원 장치를 구축했고, 도리어 거센 자연 환경은 나무를 더 강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인생도 거센 풍파를 만나면 부러지거나 더 강해지는데, 폭풍의 강도가 아니라 우리 성품의 깊이에 따라 결정됩니다. 경건한 성품은 우리 속사람을 지탱해주고 양분을 공급해주는 장치입니다. 성품이 있을 때 삶의 폭풍을 견딜 수 있으며, 형통할 수 있습니다. 성품의 내적 유익은 영적 친밀함과 정서적 활력입니다.(시15편)
영적 친밀함 :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2. 2. 하나님을 친밀히 아는 능력과 우리 각자의 의, 즉 성품 사이에는 상관 관계가 있습니다. 즉 성품을 추구하는 사람은 하늘 아버지와 특별한 관계를 누립니다. 시15편은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 친밀히 아는 사람들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하루 종일 기도하거나 묵상의 긴장 속에 사는 것을 떠올릴지도 모르나, 위기의 순간에 “주님, 왜입니까?”라고 묻는 것도 주님을 갈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신의 한 마디로 온 세상이 달라지는 순간이 있는데, 우리 안에 하나님과 친밀함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찾는 갈망은 답이 없는 난해한 의문에 부딪힐 때 가장 잘 표출됩니다. 가장 깊은 의문, 말 못할 의문의 답을 찾다가 하나님을 찾는 경우도 많습니다.
3. 3. 일반적으로 ‘주의 장막’이라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언덕이나 성막 안 언약궤, 세상과 동떨어진 교회당, 수도원을 생각합니다. 이런 곳에서 가까울수록 하나님과 가까운 것이고, 멀수록 하나님과도 먼 것입니다. 그러나 성품은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길을 닦습니다. 성품의 남녀 특성은 정직히 행하며, 옳은 길을 가며, 진실을 말하며, 험담하지 않으며, 사람을 부당하게 대하지 않으며, 옳은 사람들 편에 서며, 약속을 지키며, 가난한 사람에게 이자 없이 돈을 빌려 주며, 사람을 이용해 재정적 이득을 챙기지 않습니다. 건강한 관계에 필요한 세 요소인 존중과 신뢰, 의사소통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필요합니다.
엉뚱한 동기
4. 4. 엉뚱한 이유와 다른 꿍꿍이로 접근한 사람에게 어떤 기분이 들며 어떻게 반응하나요? 마음을 열고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조심하게 되고 행동과 동기를 의심하게 됩니다. 나와 하나님의 관계에서도 무언가를 얻는데 치중한다면 친밀한 관계를 누릴 생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내 목표를 이룰 수단으로만 보는 한 절대 친밀함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판기로 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내 의지와 나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품의 추구를 통해서만 친밀해 질 수 있습니다.
그분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
5. 예수님에게도 제자들 중 친밀한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마13장의 천국 비밀과 특별한 깨달음은 측근들만의 몫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사랑하시고 죽으셨지만, 제자들에게 좀더 깊은 차원에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3) 해변가에서 바람을 등질 때는 몰랐으나, 뒤로 돌았을 때 산들바람이 느껴집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의 가치관과 원리에 맞추면 하나님의 실체가 강하게 느껴집니다.
정서적 활력 : 푹풍 속에서 건지심
6.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시15,) 이런 유익은 당장 누리는 유익이 아닌 몇 주, 몇 달, 몇 년씩 성품에 투자하여 얻는 유익 중 하나입니다. 똑 같은 폭풍이 똑 같은 위력으로 두 나무를 덮치지만, 하나는 꺾이고 다른 하나는 그대로 서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품의 남녀를 폭풍을 면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폭풍 속에서 건지십니다.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면 그분이 돌보신다는 확신으로 살아갑니다.(벧전5,7참조) 하나님의 뜻 한가운데가 가장 안전합니다. 성품의 남녀는 삶의 풍파를 헤쳐나가는 것이 자기 책임이 아님을 압니다. 폭풍을 대비하는 최선의 방법은 하나님과 친밀함을 가꾸는 것입니다. 인생 최대의 비극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추구하지 않아 하나님을 놓치는 것입니다. 성품의 사람은 값을 지불하지만, 성품을 무시해서 치루는 값보다는 훨씬 가볍습니다. (값이 훨씬 더 무겁습니다.)
7.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길은 성품으로 닦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요동함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확신 가운데 사는 신뢰의 삶입니다.
앤디 스탠리, 성품은 말보다 더 크게 말한다, 5장 내면의 작업
속사람과 겉사람이 하나일지어다 _ 소크라테스
1. 1. 난기류 지대에서 보이지 않는 지면에 착륙하려는 비행기는 공항관제탑의 무선 신호에 따라야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습니다.
흐릿한 시야
2. 2. 하나님이 멀게 느껴지는 삶의 난기류에서도 덕의 신호를 따라야 합니다. 심령의 문제나 옳고 그름의 문제, 사랑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성령께서 깨우치시려고 끊임없이 신호를 보냅니다. 이때 ‘내 삶은 내 소관’이며, 때가 때이니만큼(폭풍의 때) 스스로 조절하려는 유혹이 듭니다. 그러나 난기류의 시기에 다른 무엇보다도 성품이 우리를 시험하고 형성하고 강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길잡이 신호에 주목해야 합니다.
3. 3. 질병이나 죽음, 이혼, 방탕한 자녀, 재정 파산 등의 어려움으로 엉뚱한 곳에서 하나님을 찾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내 기대를 얼마나 잘 채워주시는가’가 하나님의 임재와 관심의 평가기준이 됩니다. 바른 경로로 가고 있지만 어려움이 닥치면 기계가 고장난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런 경우 상황보다는 상황을 해석하는 방식이 더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하시려는 일을 더 잘 이해하고 깨달으려면 나의 내면에 하시려는 일에 충분히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각의 변화
4. 4. 우리는 대부분 상황을 통제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속사람에 집중하지 못하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놓쳐 버립니다. 비행기 창을 가리고 계기에 집중하도록 훈련 받는 비행기 조종사처럼 그리스도인들도 휘장으로 밖을 가리고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집중하는 법을 연습할 필요가 있습니다[1]. 상황이 아닌 그리스도의 성품에서 하나님을 찾으려고 집중해야 합니다.
5. 5. 속사람과 그리스도의 성품에 집중하지 않으면 내 삶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개입과 사랑을 상황의 기준으로 평가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내 삶에서 하나님의 행하심이 이해되지 않으면 삶을 종교적인 부분과 세속적인 부분으로 구분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이 없다고 여겨지는 일과 여가, 우정, 가정 등의 모든 활동은 세속적인 부분으로 취급하며, 이런 부분의 통제권을 자기가 고수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영역이 삶 전체이지만, 오직 세속적인 영역은 제외한 종교적인 의무에만 적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삶의 모든 면에 관심이 있으며,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게 하려 하십니다.
완전한 투자자 하나님
6. 6. 하나님은 우리를 장차 올 세상에 준비시키시기 때문에 우리 주변보다는 우리 내면에 초점을 맞추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없어질 운명의 육체나 세상에 투자하여 낭비하지 않으시고 영원히 남을 영혼과 심령, 속사람에 투자하시는 훌륭한 투자자이십니다.
7. 7. 그러나 사람은 시간과 에너지, 자원을 겉사람에 소비합니다. 그래서 건강과 부, 사회 생활과 관련된 것만 기도하고, 영원히 유익이 될 것들에 대해서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일이 꼬이거나 참을성을 잃으면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를 되뇌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으시고자 사용하시는 환경을 없애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완전한 거래자이신 하나님께 물어야 할 질문은 ‘왜 하나님이 무언가를 하시지 않습니까?’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이 무엇이며 나는 어떻게 거기에 합류할 수 있나?’입니다. 하나님의 주된 관심사인 우리의 성품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부지런히 일하시는 하나님
8. 8. 우리가 태어나던 날부터 하나님이 하시려고 계획하신 일이 빌립보서2장12-13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믿는 사람들 안에서 현재도 끊임없이 일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처음 묵상할 때 ‘진행되고 있는 일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9. 낙태 업종에 종사하던 헬렌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말씀의 고린도후서5장17절을 읽었습니다. 그녀는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자기의 겉모습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거울에 비친 모습은 그대로였습니다. 다음날 직장에 가서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깨달았는데, 시술소의 낙태 현장을 보면서 그 전에 보이지 않던 죽은 아기들이 보였습니다. 그 후 속사람의 변화 때문에 겉사람의 몇 가지 생활 방식도 변하게 되었습니다.
완전한 모본이신 그리스도
10. 10.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결과는 우리 삶이 얼마나 매끄럽게 풀리느냐, 얼마나 부유하거나 예뻐지느냐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재현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우리 안에 새로운 성품의 잠재력이 주어졌는데, 하나님은 이 잠재력이 뜨거워지도록 부채질을 하라.
데이비드 플랫, 팔로우 미, 03장 마음의 깊은 것까지 통째로 갈아엎으라
book summary
1. 1. 기독교는 세상의 다른 종교들과 확연히 다릅니다. 힌두교나 이슬람교, 불교, 시크교는 갠지스 강에서의 제사, 정해진 환경과 횟수, 절차에 따른 기도, 평안과 쉼을 얻기 위한 종교 의식 등을 행합니다.
기독교가 독보적인 이유
2. 2. 이 네 가지 종교에는 신을 경배하고 구언을 받기 위해 따라야 할 길을 제시하는 스승이 있습니다. 힌두교의 베다 전례를 남긴 옛 스승들과 이슬람의 코란을 남긴 마호메트, 불교의 팔정도와 사성제를 따르라고 한 부처, 시크교의 가르침을 남긴 열 명의 구루(스승)들이 있습니다.
3. 3. 그러나 예수님은 그저 “나를 따르라”고 하시며, 오신 목적이 제자들에게 특정한 교리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로 초대하려는 데 있음을 분명히 하십니다.(요14,6)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인격적인 관계의 요청을 규칙과 규범, 관습, 원칙 따위로 변질시킵니다.
행실이 좋으면 장땡?
4. 4. 예수님이 부르신 제자들은 유대교의 무수한 규칙들이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노력하고, 애쓰고, 정진할수록 더 나아질 것’이라는 종교들 사이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 와서 쉼을 얻으라’는 예수님의 요청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킵니다.
애처로운 신앙생활을 그만두라
5. 5. 예수님은 피상적인 신앙생활을 벗고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율법을 잘 지켜 존경 받는 랍비입니다. 마치 갖가지 명령을 좇아 살려는 현대 그리스도인과 같습니다. 믿어야 할 진리들과 실천해야 할 덕목들,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 점검해야 할 일들의 목록들은 피상적인 신앙의 열매들입니다.
새로운 마음을 주신다
6. 6.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고 하시며, 예수님은 자녀들의 죄를 씻어주시려 세상에 오셨다고 강조합니다.(겔36,25-28:렘31,33-34:사1,8:요일1,9:딛3,4-5)
허물이 ‘사라지는’ 기적
7. 7. 한 영국인이 거금을 들여 고장이 나지 않는다는 롤스로이스를 구입했는데 시골 길 한가운데서 차가 서 버립니다. 롤스로이스 회사에 전화했더니 정비공이 헬기를 타고 나타나 수리를 해 주었으며, 수리비도 받지 않습니다. 고장나지 않는다는 차가 고장 난 것에 분통을 터뜨리던 영국인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진통제에 만족할 것인가
8. 8.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인생의 가장 큰 필요를 채워 주시는데, 예수님을 통해 하늘 아버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고 주님과 화해할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질병 치료나 물질적인 번영으로 동일시하는 왜곡 현상이 크게 나타납니다. 육신의 질병과 물질적인 번영을 채우실 하나님이시지만, 예수님이 전한 복음은 더 크고 위대합니다.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저자의 장모님은 당뇨와 암, 그에 따른 합병증으로 고생을 하셨지만 용서의 예수님을 만나는 영적 체험으로 평안을 누렸으며, 마지막 숨을 거둘 때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용서는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며, 암 치료보다 죄를 씻는 것이 인간에게는 더 절실합니다.
마음이 통째로 바뀌는 기적
9. 9. 죄 씻음과 함께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겔36,26-27:갈2,20:롬8,10-11) 즉 옛 본성의 개선을 넘어 완전히 새로운 됨됨이, 곧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성품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 명령의 핵심입니다. 대학을 마친 후 직장이 없어서 수입이 없었으나 초등학교 교사인 아내와 결혼하니 그녀의 수입이 모두 내 것이 되었습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 앞에 나오면 그분께 속한 것들이 남김없이 따라오는 굉장한 일이 벌어집니다.
제자인가 팬인가
10. 10. ‘나를 따라오면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는데, ‘하게’가 아니라 ‘되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어부들은 자연스럽게 제자를 낳게 됩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지상명령을 주십니다.(마28,19-20) 마태복음 4장과 28장 사이에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제자 삼는 일꾼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죄 용서받은 데 이어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져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데서 한 걸음 나아가 그분의 제자를 삼는 일에 헌신적으로 뛰어들었으며, 제자 삼는 사역을 통해 끝없이 복제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 낚는 어부의 사명을 감당하는 제자 삼는 사역을 해야 합니다.
왜? 하고 싶어서
11. 11.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금기의 목록을 따르는 신앙과 피상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사랑과 전능하신 하나님, 죄 용서와 성령으로 신적인 변화를 이끄시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로의 신앙을 파악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부딪혀 마음과 생각, 의지와 관계가 변화된 이들은 그리스도의 뜻과 목적이 절대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또 다른 제자를 세우는 일에 발 벗고 나서게 마련입니다. 지금도 환란과 핍박의 환경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하고 싶어서” 제자 삼는 일에 헌신한다고 말합니다.
거듭났는가?
12. 12.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새로운 생각, 새로운 소망, 새로운 의지, 주위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새로운 방식, 새로운 목적 따위를 한데 아우르는 ‘새로운 마음’이란 열매를 맺습니다.
존 비비어, 은혜 Extraordinary: Life You’re Meant to Live, 08 은혜는 마음의 변화를 가져온다
당신은 더 이상 죄의 본성이 아닌 그분의 본성을 지녔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죄는 우리 삶에 대한 지배력을 잃었다!
1. 1. 은혜 안에 하나님의 놀라운 용서와 천국의 약속뿐 아니라 그분의 능력도 포함됩니다. 죄로 힘들며 적은 성령의 열매, 열등감과 초라한 자아상 때문에 힘들어했지만 하나님의 성품이 있음을 깨달았을 때 삶이 안정되면서 축복이 흘러 나갔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력도 커졌습니다.
2. 2. 처음 노트북 컴퓨터를 배울 때 컴퓨터 전문가는 원래 있던 프로그램을 알려줄 뿐이지만 저자는 그 전에는 있는 것조차 몰랐던 처음 사용합니다. 처음부터 있던 기능들인데 무지 때문에 가려져 있었습니다.(사5,13)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하면 더 심각한 결과를 맞이할 수 있는데(호4,6),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다 신앙의 파멸을 맞게 됩니다.
3. 3. 베뢰아 신자들은 “성품이 더 고결하여” 성경을 상고했습니다.(행17,11) 우리가 배우는 가르침이 성경과 일치하는지 공부해서 확인해야 합니다. ‘신자는 죄에 쩔쩔매는 죄인이다’, ‘그리스도인은 길을 잘못 들어도 결국 은혜로 제자리에 도달하는 존재이다’라고 가르치는데,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는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가 확실하면 꼭 붙잡고 그렇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죄의 지배는 끝났다
4. 4. 은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섬기되 받으실 만하고 기쁘시게 섬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값없는 선물입니다.(히12,28) 은혜는 우리를 들어 올려 비범한 삶으로 들어가게 해줍니다. 이 능력은 내적으로 그분을 닮도록 우리를 재창조하셨습니다.(롬8,29)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에 들어섰고, 예수님 자신의 본성을 지녔습니다. 우리에게 더 이상 죄가 자리할 곳이 없어서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험담, 중상, 거짓말, 간음, 혼외 성관계, 동성애, 포르노, 기타 모든 부정함, 미움, 원한 용서하지 않는 마음, 편견, 시기, 무절제한 분노, 격분, 욱하는 성질, 도둑질, 마약 복용, 알코올중독, 권위에 대한 불순종, 고집, 반항은 자리가 없다)
왜 아직도 힘들어 하는가?
5. 5. 그러나 아직 죄에 지배당하며 힘들어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로마서6장에서의 물세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예수님의 목숨을 버리시는 세례(푹 잠김)을 말씀하십니다.[1]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푹 잠겨 그분과 하나가 되었습니다.(요17,23의 연합, 포도나무와 가지의 연합) 우리 삶을 예수께 드리던 그때 영적으로 예수와 함께 장사되었고,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부활하신 예수님의 본성을 우리 안에 넣어 주셨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푹 잠겨 있으며, 더 이상 죄의 본성이 아닌 그리스도의 본성을 지녔습니다. 죄는 우리 삶을 지배하지 못합니다.(롬6,11-14)
선택은 여전히 우리 몫이다
6. 6. 이제는 죄를 이길 힘이 우리에게 있는데, 죄에 굴복을 선택할 수도 있으며 은혜 안에서 행함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모신 적이 없는 사람은 죄짓는 일이 정상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정상이 아닙니다. 참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죄를 짓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여전히 용서가 있습니다.(요일2,1) 이렇듯 은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비범한 삶을 살아갈 능력을 주지만, 계속 죄에게 굴복한다면 다시 노예가 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잠재력을 충분히 활용하지 않는 것)입니다.(고후6,1;롬6,16:8,12-13)
회개는 진리의 문제다
7. 7. 반복해서 죄를 지을 때는 죄를 자백하고(요일1,9) 회개해야 합니다.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 쓴 구약의 회개와는 달리 신약의 회개는 진리의 문제이며, 마음이나 생각의 온전한 변화를 가리킵니다. 회개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했음을 깊이 뉘우치며 이제 이 부분에서 그분의 뜻에 순종하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깊은 근심-진정한 회개- 때문에 삶이 바뀌지만 세상 근심-회개 없는 근심-은 사망을 이룹니다.(고후7,9-10) 그래서 신자가 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면 자백과 회개가 둘 다 필요합니다.
자비 vs 은혜
8. 8. 형통과 자유를 가져다 주는 것은 자복만이 아니라 자복하고 버리는(참으로 회개하는) 것입니다.(잠28,13)그러면 자비를 받는데, 은혜와 자비는 의미가 다릅니다. 은혜는 절대로 받지 못할 것을 받는 것이고, 자비는 마땅히 받을 것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자비는 죄를 짓고도 응분의 대가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주어지는 능력으로, 그 능력이 우리를 죄의 폭정에서 해방시킵니다. 간음한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요8장)을 정죄하지 않는 것은 자비이며,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것은 은혜(필요한 능력)가 담겨 있습니다.
9. 9. 신약 기자들의 서신에는 은혜와 자비를 구분하고 있습니다.(딤전1,2;딤후1,2;딛1,4;요이1,3) 은혜는 우리에게 살아갈 능력을 주고, 자비는 우리를 다시 죄의 손아귀 속으로 끌어들이려 하는 죄책과 정죄, 수치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줍니다. 즉 자비는 우리를 정죄에서 해방시켜 주고,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으로부터 우리 양심을 지켜 줍니다.(마12,7;롬8,1) 자비는 우리가 실패한 일, 회개한 죄에 대해 주어지고, 은혜는 우리를 돕고 능하게 하려고 주어집니다.(히4,16
[1] 세례란 “푹 잠그다, 담그다, 가라앉히다”라는 뜻이며, 대부분 물세례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뭔가 다른 것에 푹 잠긴다는 뜻으로 쓰인 적도 많습니다. 성령의 세례(눅3,16참조),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세례(고전12,13) 고난의 세례도 있습니다.
[|작성자 forwill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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