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센델, 『정의란 무엇인가』,
4장 대리인 고용하기 – 시장과 도덕
정의를 둘러싼 치열한 공방에는 ‘자유시장은 공정한가, 돈으로 살 수 없고 사서는 안 되는 재화가 있는가, 그것은 어떤 재화이며 왜 문제가 되는가’라는 시장의 역할이 자주 거론됩니다. 자유시장 옹호는 전형적으로 두 가지 주장에 근거합니다. 첫째는 자유에 관한 주장입니다. 시장을 옹호하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자발적 교환을 허용하는 것이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 주장은 시장을 옹호하는 공리주의자들이 말하는 행복에 관한 주장입니다. 자유시장이 전체의 행복을 증진시키며, 두 사람이 거래할 때 둘 다 이익을 얻으며, 전체 공리도 당연히 높아집니다. 시장회의론자들은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이 자유롭지 않으며, 특정 재화나 사회적 행위를 돈으로 사고 팔 경우 타락하거나 질이 떨어진다고 말합니다. 전쟁 수행과 대리 임신의 예를 들어 이 행위의 대가로 돈을 지불할 때의 도덕성 문제를 따져봅니다.
징집과 고용, 무엇이 옳은가?
남북전쟁 당시 북군과 남군 모두 ‘징병제’였으며, 다른 사람을 고용해 대신 복무할 수 있는 ‘대리복무제’도 할 수 있었습니다. 대리복무 제도는 ‘부자들의 전쟁, 가난한 자들의 싸움’이라는 비난 여론 때문에, 대리복무제를 그대로 두되 정부에 일정 금액(300달러)을 내면 병역을 면제해 주는 ‘병역면제비용제도’로 변했습니다. 이것은 일반노동자에게 병역 면제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었지만, 인간의 목숨에 값을 매기고 그 값을 지불하고 정부의 승인을 받는 듯한 모양새 때문에 사람들의 분노를 샀습니다. 결국 비교적 소수의 징집자만이 북군에 입대해 싸웠는데, 실제 징집 예정자 약 20만7000명 가운데 8만7000명이 면제 비용을 지불했고, 7만4000명이 대리인으로 채워졌으며, 4만6000명만이 복무했습니다.
돈 있는 사람이 대리인을 고용해 자기 대신 싸우게 하는 행위는 계급 차별로 여겨지기 때문에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자원병 제도를 더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개인이 대신 싸워줄 사람을 고용하는 대리복무제도와 국가가 대신 싸워줄 사람을 모집하는 자원병 제도가 도덕적으로 무엇이 다르다는 말입니까? 이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 먼저 군인을 모집하는 두 가지 경로인 징병과 시장을 생각해 봅니다.
징병제는 군 복무에 적합한 시민을 모두 불러들이거나, 제비뽑기로 사람을 뽑아 사병을 모으는 방법입니다. 1,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 전쟁에 징병제를 이용한 미국에서는 제도가 복잡했으며, 학생들과 특정 직업군에서 징병 유예를 신청해서 참전을 피해갔습니다. 마침내 미군이 베트남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하면서 징병을 모두 자원병으로 대체했습니다. 군 복무가 더 이상 의무가 아니기 때문에 군 인력을 모으기 위해 보수를 높이고 복리후생을 늘렸습니다. ‘자원군’은 일반 사업처럼 노동시장을 이용해 모병합니다. 누구도 강제로 징집되지 않고 자발적으로 참여했지만, 돈이나 복리후생 혜택을 받는 대가로 임무를 수행합니다.
미국인 대다수가 자원군을 좋아하며, 징병제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미군이 주도하면서 자원군과 징병제를 둘러싸고, 정치철학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인 개인의 자유와 시민의 의무에 관한 문제가 새롭게 떠올랐습니다. 징병제와 대리인을 고용하는 징병제, 시장체제(자원군) 중 어떤 방법이 가장 공정하겠습니까?
자원군 옹호
자유지상주의자들에게 징병제는 강제성을 띤 일종의 노예제이기 때문에 부당하다고 봅니다. 징병을 노예제와 똑같이 생각하지는 않더라도, 선택권을 제한하고 전체 행복을 감소시킨다는 이유로 징병을 반대하는 공리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공리주의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대리인 고용을 허용하는 제도와 비교해, 징병은 서로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거래를 금지하여 사람들의 행복을 감소시킵니다. 자발적 교환이 양 당사자에게 모두 이익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야 합니다. 따라서 자원군은 세 가지의 모병제도 중 최고의 선택입니다. 주어진 보상에 근거해 입대를 할지 말지 선택하게 한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공리를 극대화할 수 있을 때만 군 복무에 응합니다. 복무를 원치 않는 사람은 자신의 의지를 거슬러 입대를 강요받아 공리를 잃는 상황에 놓이지 않아도 됩니다.
자유지상주의 논리와 공리주의 논리에 따르면, 자원군이 최고의 선택이고, 그 다음이 남북전쟁 때의 혼합형 제도, 징병제가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선택이 됩니다. 그러나 이 순위 매기기에 두 가지 반박이 가능한데, 하나는 공정성과 자유에 관한 반박이고, 또 하나는 시민의 미덕과 공동선에 관한 반박입니다.
반박1: 공정성과 자유
공정성과 자유에 관한 반박은 제한적인 상황에서는 자유시장이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노숙자는 자유의사로 밖에서 자는 것일까요, 어쩔 수 없이 필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일까요? 시장 논리로 보자면, 자원군은 강제 징집을 피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하지만 강압적 요소가 끼여들 수 있습니다. 그가 자원군이라 할지라도 사회에서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없다면, 입대를 결정한 사람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징집되는 셈입니다. 징병제와는 강제의 형태가 다를 뿐입니다. 오늘날의 자원군 구성 계층을 보면, 저소득층에서 중간 소득층 지역 출신 젊은이의 비율이 현저히 높습니다. 25% 이상이 정규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일반인 46%가 대학 교육을 받는 사회에서 대학 문턱을 넘은 군인은 고작 6.5%입니다. 믹구 사회 특권층 젊은이들은 군 복무를 기피하고 있으며, 하위계층의 젊은이들이 군 복무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징병제 부활을 요구하기도 하며, 미국 사회에서 기회 불균등이 지속되는 한 시장을 이용해 군 복무를 할당하는 것은 대안 없는 사람들에게는 부당한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첫 번째 반박은 불공평과 강제와 관련이 있는데, 즉 계층간 차별이라는 불공평과 가난 때문에 대학 교육 등의 혜택을 받는 대가로 어쩔 수 없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젊은이들에게 부과되는 강제입니다.
반박2: 시민의 미덕과 공동선
이 반박에 따르면 군 복무는 단순히 여러 직업 중 하나가 아니라 시민의 의무입니다. 이것을 시장에 내놓고 거래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시민의 책임인 배심원 의무는 배심원으로 불려가는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전문 유급 배심원 제도’를 만들지 않습니다. 유급 배심원을 뽑으면 소외 계층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아져서 재판의 질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배심원을 고용하기 보다는 징발하는 이유는 법정에서 정의를 집행하는 행위를 모든 시민이 함께 나눠야 할 책임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여러 계층의 배심원들의 서로 다른 경험은 증거와 법을 심사숙고하는 과정에서 큰 도움이 되며, 시민 교육의 장이자 민주 시민의 표현 방식이기도 합니다. 즉 모든 시민이 배심원 제도를 이행해야 한다는 생각은 법정과 사람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군 복무를 시민의 책임이라고 본다면, 군 복무를 상품 취급해 사람을 사서 대신하게 하는 행위는 군 복무에 바탕이 되어야 하는 시민의 이상을 타락시킵니다. 군인 고용은 잘못인데, 가난한 사람에게 공평치 못한 처사라서가 아니라 시민의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미군은 용병의 색채가 짙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대신 싸워주는 사회와는 동떨어진 세계의 전문 유급군입니다. 같은 시민 가운데 소수를 고용해 대신 싸우게 하고는 발을 뺌으로 인해 다수의 시민과 그들 이름으로 싸우는 군인 사이의 연결 고리가 끊어집니다. 자원군은 거의 모든 미국인에게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책임을 면제해 주지만, 정치적 책임의식이 약회되는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시민의 의무를 팔릴 물건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는 자유의 가치를 옹호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깎아내린다고 주장합니다. 공공서비스를 사람이 아닌 돈으로 해결하려는 순간부터 국가의 몰락이 가까워지지만, 진정 자유로운 국가라면 시민은 모든 일을 자기 손으로 하려고 하지, 돈을 들여 하지 않습니다. 이런 루소의 호소는 미국 같은 시장 중심 사회에서도 여전히 반향을 일으킵니다. 미국에서는 모병을 시장에 떠 맡겨놓고도 군 복무를 애국심과 시민의 미덕이라는 낡은 개념과 분리하지 못합니다. 즉 자원군은 상당수가 보수와 복리후생 때문만이 아니라 애국심에서 복무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자원군과 용병의 진짜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자원군은 미국인이지만 용병은 외국인’이라는 국적의 차이나 ‘외국인은 미국인보다 충성도가 떨어진다’라는 충성도의 차이로 구별할 수는 없습니다. 징병제를 폐지한 지 두 세대 째가 되는 지금, 미국인은 시장 논리를 군 복무에 적용하기를 주저합니다. 하지만 미국은 외인부대를 창설하지는 않았지만, 그 방향으로 옮겨가는 중입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필요한 병력 모집이 어려워지자 임시 비자로 미국에 살고 있는 이주민을 상대로 군인을 모집하기 시작했으며, 상당한 보수와 시민권 조기 발급 등의 혜택이 주어집니다. 지원 자격은 영주권 소지자에서 일시 체류자, 외국인 학생, 망명자로 확대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미국은 군사 도급 업체에게 기지 건설, 차량 정비, 물자 보급, 식사 제공 같은 비전투 업무를 맡기고 있습니다. ‘패더럴 익스프레스가 우편 업무를 담당하듯이, 군사도급업체들이 국가 안보 기능을 담당하고자 노력합니다.’
과연 군 복무(국가에 봉사하는 일)는 모든 시민이 수행해야 하는 의무일까, 힘든 직업처럼 위험한 일의 하나이며 노동시장의 원리에 따라야 마땅할까? 이 질문에 답을 하려면 더 포괄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민주사회의 시민이라면 서로에게 어떤 의무를 지며, 그 의무는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정의에 관한 서로 다른 이론은 서로 다른 답을 내놓기 때문에 군인을 징집해야 할지, 고용해야 할지는 시민 의무의 기본과 범위를 살펴 본 뒤에 결정한다면 한결 쉬울 것입니다. 그전에 노동시장 활용과 관련된 논쟁을 하나 더 살펴 봅니다.
대가를 받는 임신
자녀가 없는 한 부부가 대리모 출산을 결정하고 나서는 몇 차례의 인공수정 끝에 임신을 했으며, 여자아이를 출산했습니다. 그러나 대리모는 아이를 넘겨받는 순간 받게 될 1만 달러와 의료비를 포기하고 아이를 주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이 ‘아기 M’ 사건으로 1심 법원은 애초의 합의에 손을 들어주며 계약의 신성함을 강조했습니다. 대리모는 불충분한 관련 정보와 돈이라는 보이지 않는 강제 때문에 계약했기 때문에 계약의 의미가 퇴색됐으며, 그러기에 자발적인 합의가 아니라는 반론에 대하여 판사는 양자의 합의할 때의 처지가 우월하거나 열등한 처지가 아니었으며 각자 수행할 서비스에 대한 대가를 정했고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합의에는 문제가 없다고 대응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상품으로 전락시키고 임신과 출산을 돈벌이로 만들어 여성을 착취했다는 반론에 대하여 판사는 1만 달러는 서비스(임신)에 지급한 것이지, 생산물(아이)에 지급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서비스 제공은 여성을 착취한다는 주장에 대해 돈을 받고 임신하는 행위를 돈을 받고 정자를 제공하는 행위와 비교했을 때 남자는 자신의 정자를 팔 수 있으므로 여자도 자신의 생산 능력을 팔 수 있어야 한다고 반박합니다.
대리모는 뉴저지 대법원에 상고했으며, 대리 출산 계약이 무효라고 판결합니다. 대법원은 아기M의 양육권을 대리모에게 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합니다. 대리 출산 계약에 반대한다며, 그 계약이 전적으로 자발적이지 않았으며, 거기에는 아기를 파는 행위가 포함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관련 정보가 충분히 제공되지 않아서 자발적인 계약이 아니었으며, 1만 달러는 대리모가 양육권을 넘기고 친권을 포기함과 동시에 지불되기 때문에 아기를 판매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대리 출산 계약과 정의
‘아기M’ 사건은 누가 옳았습니까? 계약을 인정한 1심 법원인가, 계약을 무효로 만든 상급 법원인가요? 이 문제의 답은 계약의 도덕적 효력과 대리 출산 계약에 대한 두 가지 반박을 따져보아야 합니다.
반박 1: 문제가 있는 합의
대리모의 동의가 전적으로 자발적이었는가에 관한 첫 번째 반박은 사람들이 선택을 할 때 놓이는 상황에 주목합니다. 부당한 압력을 받지 않는 상황에서의 선택이나 대안에 관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받을 때의 합의가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고 진정한 자발적 동의와 선택을 가르는 기준이라고 말합니다.
반박2: 비하와 고귀한 재화
‘아기나 여성의 출산 능력처럼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있는가’, ‘이것을 사고 파는 행위가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질문에 아기나 임신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행위는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비하하는 행위라는 답이 가장 설득력 있습니다. 공산품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는 방법은 그것을 사용하거나 팔아서 이익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단순히 사고파는 상품으로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인간은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이지, 사용하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리 출산 계약도 여성의 노동과 아이를 상품화함으로써 비하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합당한 가치보다 낮은 가치를 부여하여 취급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사랑하고 보살펴야 할 인간으로 소중히 여기기기보다 이익의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또한 상업적 대리 출산은 여성의 몸을 물건을 찍어내는 공장 취급하고, 여성에게 돈을 주어 임신한 아이와 관계를 끊도록 함으로써 여성을 비하합니다.
재화라고 다 같은 재화가 아니며, 모든 재화의 가치를 이익의 수단이나 물건의 효용만을 따져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즉 더 높은 기준으로 평가해야 할 사회적 행위와 재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높은 기준이란 무엇이며, 각 재화와 사회적 행위에 걸맞는 평가 방법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한 가지 답은 자유에 대한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인간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으니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 존중받아야 합니다. 임마누엘 칸트가 이 시각을 옹호합니다. 또 하나의 시각은 재화와 사회적 행위를 올바르게 평가하려면 그것이 추구하는 바를 따져봐야 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임신의 본래 목적이 어머니와 아이의 감정적 유대인데, 그것을 맺지 말라고 요구하는 계약은 임신의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굴욕적입니다. 행위의 주요 목적부터 파악해야 한다는 생각은 정의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의 핵심입니다.
외주 임신
‘아기 M’의 논쟁은 대리모가 난자와 자궁을 제공했기 때문에 태어나는 아기의 생물학적 어머니입니다. 그러나 체외 수정이 가능해지면서부터 난자는 특정 유전적 특성을 가진 사람에게서, 자궁은 특정한 성격을 가진 사람에게서, 더욱 차별화된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난자와 자궁, 어머니가 하나로 연결되는 기존 방식에서 탈피한 새로운 대리 출산으로, 기존의 법적·감정적 문제가 줄고 시장도 새롭게 활성화되었습니다.’ 이처럼 대리 출산 양상이 바뀌면서 비용 상승 때문에 값싼 대안이 나타났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인도는 상업적 대리 출산을 합법화하면서 싼 가격에 상업적 대리 출산을 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대리 출산은 대리모는 난자가 아닌 자궁과 임신이라는 노동만을 제공하기 때문에, 아이는 유전적으로 대리모의 자식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아이는 거래되지 않으며, 대리모가 아이의 소유권을 주장할 개연성도 적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역할을 둘이 아닌 셋으로(양부모, 난자 제공자, 자궁만 제공하는 대리모) 나눈다고 해서, 아이에 대한 소유권에서 누가 우위를 차지하는가의 문제는 풀리지 않습니다. 체외수정 외주 임신과 세계적인 외주 임신은 자유로운 선택인지, 여성의 몸을 비하한다는 도덕 문제를 더욱 부각시킵니다.
아이 출산 행위와 전쟁 수행 행위는 서로 이질적이지만, 인도의 대리 출산과 자신을 위해 대신 싸울 군인을 고용한 사례에는 뭔가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생각해 보면, 정의 개념을 서로 다르게 규정하는 두 가지 질문에 직면합니다. 자유시장에서 우리의 선택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세상에는 시장이 존중하지 않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미덕과 고귀한 재화가 과연 존재할까?
5장 중요한 것은 동기이다. / 이마누엘 칸트
보편적 인권을 믿는 사람은 인간을 집단적 행복의 도구로 취급하는 공리주의자는 아닙니다. 공리주의자들은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경우에만 “인권”을 옹호합니다. 반면 자유지상주의자들의 ‘개인은 타인의 행복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주장이 권리의 도덕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자기소유’라는 개념은 낙오자를 보호할 안전장치가 없는 자유시장, 불평등을 해소하고 공동선을 장려할 거의 모든 수단을 배제하는 최소국가, 합의를 완벽한 행위로 칭송하여 합의한 식인 행위나 노예 매매처럼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행위를 인정하기 때문에 완전한 ‘권리’의 도덕적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칸트의 권리 옹호
임마누엘 칸트는 의무와 권리의 근거를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자기소유’ 개념과 기독교의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개념에 근거하지 않고, ‘인간은 존중받아야 하는 존엄성을 지닌 이성적 존재’라는 생각에 기초합니다. 첫 번째 저서인 『순수이성비판』에서 경험론에 도전하며,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는 공리주의를 비판합니다.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는 ‘보편 인권’이라 부르는 개념에 막강한 토대를 제공합니다. 철학뿐만 아니라 도덕과 정치(공적 삶의 핵심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는 ‘도덕의 최고 원칙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면서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이 답은 도덕정치철학에 줄곧 나타났습니다.
이 책에서 정의란 사회 전체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이라는 공리주의와 규제 없는 시장에서 소득과 부의 공정한 분배라고 주장하는 자유지상주의, 재화를 분배해 미덕을 포상하고 장려하는 것이라는 미덕 장려의 세 가지 방식을 구별했습니다. 칸트는 행복 극대화의 첫 번째 시각과 미덕 장려의 세 번째 시각을 거부하고, 정의와 도덕을 자유와 연관시키는 자유지상주의의 시각을 열렬히 옹호합니다. 하지만 칸트가 말하는 자유는 물건을 사고 팔 때 행사하는 선택의 자유보다 훨씬 더 까다롭습니다. 시장의 자유나 소비자의 선택은 애초에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욕구를 충족하는 행위가 포함되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행복극대화의 문제점
칸트는 공리주의를 거부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쾌락을 준다는 이유만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으며, 가변적이고 우연적이기 때문에 보편적 원칙이 되기 어려운 흥미·바람·욕구·기호 같은 경험적 요소가 보편적 원칙이 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도덕을 사람들의 흥미와 기호를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도덕의 위엄이 땅에 떨어집니다. 그리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법을 가르치지 못하고, “계산에만 밝은 사람이 되게 할 뿐”입니다.
칸트에 의하면, 도덕의 기초로 사람의 바람과 욕구는 자격 미달이며, 신성한 권위에서 찾지도 않습니다. ‘순수 실천 이성’을 연습하여 도덕의 최고 원칙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성으로 어떻게 도덕법에 도달할 수 있는지 살펴보려면,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능력과 자유롭게 행동하는 능력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는지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사람의 능력은 이성적 능력뿐만 아니라 감각과 느낌에 반응하는 능력인 ‘지각력’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성이야말로 우리의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이때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욕망에 내몰리지 않습니다.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은 자유롭게 행동하는 능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이 두 가지 능력이 합쳐져 우리는 특별한 존재,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존재가 됩니다.
자유란 무엇인가?
칸트의 도덕철학을 이해하려면 그가 말하는 자유를 이해해야 합니다. 보통 자유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다른 동물처럼 쾌락이나 고통 회피를 추구하는 것이며, 진정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욕구는 우리 밖에 주어진 어떤 목적이며, 욕구를 위해 행동하는 것은 그것의 노예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허기를 달래려고 이 길을 가고, 갈증을 해소하려고 저 길로 갑니다. 바닐라보다 에스프레소와 과자가 들어간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는 욕구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갖고 있는 욕구일 뿐입니다. “당신의 갈증에 복종하라”는 스프라이트 광고 문구는 욕구를 따라 행동하는 것은 노예라는 칸트의 통찰력이 담겨 있습니다. 스프라이트 캔 하나를 집어들 때면, 자유가 아니라 복종을 실천하는 셈입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욕구에 반응하고, 내 갈증에 복종하는 행위입니다.
‘스프라이트를 먹고 싶다는 욕구는 유전자에 새겨진 욕구일까, 광고에 자극받은 욕구일까’라고 천성과 교육이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두고 논쟁을 벌일 수도 있습니다. 내 행동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것이든, 사회적으로 훈련된 것이든, 진정으로 자유로운 행동은 아닙니다. 칸트에 따르면,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것은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뜻이며,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천성이나 사회적 관습에 따라서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칸트는 ‘자율’의 반대 개념으로 ‘타율’을 대조하는데, 내가 ‘타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내 밖에 주어진 결정에 따라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당구공이 땅에 떨어질 때, 이것은 공의 자유로운 행위가 아니라 자연법칙인 중력의 법칙에 지배를 받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 머리 위에 떨어져 다른 사람이 죽었다면, 도덕적 책임이 없습니다. 당구공이 높은 곳에서 누군가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고 해서 당구공에게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두 경우 모두 자유롭게 행동한 것이 아니라 중력의 법칙에 지배를 받았습니다. 자율이 작용하지 않았기에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자율로서의 자유와 칸트가 말하는 도덕의 연관관계를 볼 수 있는데, 자유로운 행동은 주어진 목적에 걸맞는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만이 할 수 있고 당구공은(대부분의 동물은) 할 수 없는 선택입니다.
사람과 사물
칸트에 의하면, 이것을 위해, 저것을 위해, 여러 가지 것들을 위해 행동하기로 결정한다면 타율적 결정입니다. 타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우리 밖에 주어진 목적을 위해 행동한다는 것이며,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의 주체가 아니라 도구가 됩니다. 우리가 자율적으로, 즉 자신에게 부여한 법칙대로 행동할 때, 행동 그 자체가 목적이 됩니다.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능력 덕에 인간의 삶은 특별한 존엄성을 지니며,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인간을 목적으로 취급한다는 뜻입니다. 덩치 큰 사람을 밀어 떨어뜨려 철로를 막는 행위를 보고 공리주의자들도 안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장기적으로 공리가 줄어드는 부차적 효과를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칸트에 의하면, 이 행위는 사람을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지 목적 그 자체로 존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적절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특정 행동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을 하면 칸트의 까다로운 자유의 개념에서 역시 까다로운 도덕의 개념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도덕이란 무엇인가, 동기를 찾아라
칸트에 따르면, 어떤 행동의 도덕적 가치는 그 결과가 아니라 동기에 있습니다. 중요한 건 옳은 일을 하는 것이며, 그 이유는 옳기 때문이라야지, 이면에 숨은 동기 때문이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행동이 도덕적으로 선하려면, 도덕법 그 자체에 기여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행동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동기는 의무인데, 칸트가 말하는 의무 동기란 올바른 이유로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만약 의무가 아닌 다른 동기로, 즉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행동한다면, 도덕적 가치가 부족한 행동입니다. 내 이익뿐만 아니라 내 바람이나 욕구, 기호, 식욕을 채우려는 모든 시도를 '끌림 동기'라고 부르는데, 이 '끌림 동기'도 도덕적 가치가 부족한 행동입니다. 오직 의무 동기에서 나온 행동만이 도덕적 가치가 있습니다.
- 계산적인 가게 주인과 '바른 거래 사무국'
칸트는 의무와 끌림의 차이를 보여주는 몇 가지 예를 제시합니다. 한 신중한 빵집 가게 주인이 바가지를 써도 모를 정도의 어린 아이에게도 정상적인 값을 부릅니다. 그 이유는 가게의 평판 때문입니다. 이때 가게 주인은 옳은 일을 했지만, 자신의 평판 때문이라는 자신의 이익 만을 위해 정직하게 행동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가게 주인의 행동은 도덕적 가치가 부족합니다. 오늘날의 예를 든다면, '바른 거래 사무국'에서 '신뢰, 개방, 공정한 가치를 바탕으로 한 기업은 성공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직한 사원을 모집합니다. 하지만 칸트의 입장에서는 원칙을 고수하는 정직인 정직을 위한 정직과 이해 타산을 따지는 정직을 구분하고, 원칙을 고수하는 자세만이 행동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유일한 동기인 의무 동기에 포함된다고 주장합니다. 몇 년 전 메릴랜드 대학은 시험부정 행위와 전쟁을 벌이면서, 부정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서약한 학생들에게 동네 가게에서 사용할 수 있는 할인카드를 나눠주었습니다. 할인 혜택이 부정행위를 줄일 수는 있겠지만, 매수된 정직은 도덕적 가치가 부족한 것입니다. 이 예에서 오직 의무 동기만이 도덕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유용하다거나 편리해서가 아니라 옳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할 때만이 도덕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 목숨 보전하기
사람들은 살고 싶은 강한 욕구가 있기 때문에 목숨을 보전하려는 행동이 의무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도덕적 가치도 매길 수 없습니다. 안전띠를 매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점검하는 일은 타산적인 신중한 행동이지 도덕적 행동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 행동의 동기를 파악하기 어려운 때도 많습니다. 의무 동기와 끌림 동기가 동시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칸트에 따르면, 의무 동기만이 행동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삶이 좋아서 살지, 의무라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희망을 잃고 살고 싶은 욕구가 없는 사람이 의무감에 삶을 보존하려 한다면, 이것은 의무 동기이며 그의 행동에는 도덕적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올바른 이유로, 삶을 사랑하고 보존해야 하는 의무감으로 살아갈 때 삶을 보존하는 행위의 도덕적 가치가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 도덕적인 인간 혐오자
어떤 사람은 이타적이라서 타인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그들을 도우면서 쾌락을 느낍니다. 칸트에 의하면, 동정심에서 나온 선행은 "아무리 옳고, 아무리 다정해도" 도덕적 가치가 떨어집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의 통념과는 거리가 먼 생각이고, 쉽게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분명 이런 사람은 선한 사람이고, 칸트도 동정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에 선한 사람이라고 동의합니다. 그러나 타인을 도울 때, 쾌락을 느끼는 선행 동기와 의무 동기를 구별하고, 의무 동기만이 그 행동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한다고 주장합니다. 이타주의자들의 동정은 칭찬과 격려를 받을 자격이 있지만, 존중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선행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요? 이타주의자들은 어느날 인류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려, 연민과 동정이 메마른 인간 혐오자가 됩니다. 그러나 이 냉정한 영혼은 자신의 무관심을 떨쳐내고 다른 사람을 돕습니다. 내키지는 않지만 '순전히 의무감에서' 타인을 도울 때 도덕적 가치를 지닙니다. 물론 칸트가 인간 혐오자를 도덕적 본보기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선행의 동기가 그 행동이 옳기 때문이어야지, 쾌락을 주기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 철자 맞히기 대회 영웅
철자 맞히기 대회에서 열세 살의 남자 아이가 틀린 대답을 해지만 심사위원이 잘못 알아듣고 맞았다고 했습니다. 아이는 자신이 틀렸다고 솔직히 말해 탈락했지만 정직한 아이라고 칭송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 이유는 '더러운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아서' 였습니다. 칸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더러운 인간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끌림이며, 그렇게 때문에 아이 행동의 도덕적 가치는 떨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너무 가혹해 보입니다. 진실을 말한 유일한 이유가 죄의식을 피하기 위해서였거나 실수가 발각되었을 때 부정적 여론을 피하기 위함이었다면 , 그 행동은 도덕적 가치가 부족합니다. 하지만 이 경우 옳은 행동이기 때문에 진실을 말했다면, 아이의 행동은 그에 따르는 쾌락이나 만족과는 상관없이 도덕적으로 가치 있는 행동이 됩니다. 옳은 이유로 옳은 행동을 했다면, 그때 기분이 좋았다고 해서 도덕적 가치가 떨어지진 않습니다.
도덕의 최고 원칙은 무엇인가?
도덕이 의무감에서 행동하는 것이라면, 의무의 필수 조건은 무엇일까요?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도덕의 최고 원칙을 파악해야 하며, 칸트의 중요한 개념인 도덕과 자유, 이성을 어떻게 연관시키고 있는지 살펴보면 됩니다. 대조되는 용어들에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대조1 (도덕) : 의무 대 끌림 ○ 대조2 (자유) : 자율 대 타율
○ 대조3 (이성) : 정언명령 대 가언명령 ○ 대조 4 (관점) : 지적 영역 대 감각적 영역
의무와 끌림이라는 첫 번째 대조에서는 의무 동기만이 어떤 행동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합니다. 자율과 타율의 두 번째 대조에서는 내 의지가 자율적으로 결정될 때만이, 내 의지가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지배될 때만이 나는 자유롭습니다. 욕구에 따라 선택한 것은 내가 직접 선택하지 않은 것이며, 그래서 내 의지가 타율적으로 결정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의 모든 것은 자연스러운 필요법칙이나 물리법칙, 인과법칙에 따라 움직입니다. 우리 행동이 물리법칙에만 지배된다면 우리는 당구공과 같습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행동하는 능력이 있다면, 저절로 주어진 법칙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법칙이 어디서 나올까요? 칸트의 답은 이성입니다. 이성이 우리 의지를 결정한다면, 그 의지는 자연이나 끌림의 명령에 구애받지 않는 선택의 힘이 될 수 있습니다.(칸트는 늘 이성이 의지를 지배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면, 이성이 내 의지를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공리주의자들도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보았지만, 도구로서의 이성입니다. 즉 우연히 생긴 욕구를 충족하여 공리를 극대화할 방법을 찾는 것이며, "욕구를 찾는 정찰병"이나 "열정의 노예"입니다. 그러나 칸트에게 이성은 도덕과 관련된 실천 이성을 도구로 여기지 않고 "어떤 경험적 목적에도 상관없이 선험적으로 정해지는 순수 실천 이성"입니다.
정언명령 대 가언명령
칸트에게 이성은 의지에 명령하는 두 가지 방법인 언제나 조건이 따라 붙는 가언명령과 조건 없는 명령인 정언명령을 구별하고 대조합니다. 가언명령은 'X(사업가로 좋은 명성)를 원한다면 Y(고객에게 정직)를 하라'는 식으로 이성을 도구로 활용합니다. '정언'은 조건이 없다는 뜻이며, 정언 의무나 정언 권리는 특정한 상황에 구애받지 않는 의무와 권리를 뜻합니다. 정언 명령은 다른 어떤 목적에도 기대지 않고, 말 그대로 정언적으로 명령합니다. "그 명령은 행동이나 예상되는 결과와 무관하며, 명령의 형태, 명령이 도출된 원칙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행동에서 본질적으로 선한 부분은 그 결과와 관계없이 애초의 정신 자세에 달렸습니다." 오직 정언명령만이 도덕적인 명령이 될 수 있습니다. 자율이라는 의미의 자유를 추구하려면 가언명령이 아닌 정언명령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이때 한 가지 중대한 문제가 남는데, 무엇이 정언명령이고,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명령합니까? "그 자체로 절대적이며 다른 어떤 동기도 포함하지 않은 채 명령을 내리는 실천 법칙"을 이해해야 합니다. 칸트는 정언명령의 몇 가지 형태 또는 공식을 제시하는데, 이것들은 결국 한 가지라도 말합니다.
- 정언명령 1 : 당신의 행동준칙을 보편화하라 - "행동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이는 보편적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준칙이라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모순 없이 보편화할 수 있는 원칙에 따라서만 행동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지키지 못할 뻔한 약속을 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요? 돈이 급히 필요해 금방 갚겠다는 거짓 약속을 하고 돈을 빌립니다. 이 행동은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있을까요? 거짓 약속은 정언명령에 걸맞는 행동일까요? 모든 사람이 돈이 필요할 때마다 거짓 약속을 한다면, 어느 누구도 약속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거짓 약속을 보편화한다면 약속을 지킨다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해집니다. 그렇다면 약속을 하고 돈을 빌리는 행위는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비이성적이기까지 합니다. 결국 거짓 약속을 한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며, 정언명령과도 맞지 않습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모두들 거짓말을 한다면 사람들은 누구의 말도 믿지 않을 것이며, 다같이 불행해질 것이다'라는 논지는 결과론적인 입장이라고 칸트를 비판합니다. 이런 비판은 칸트의 요지를 오해한 것인데, '행동준칙을 보편화하라'는 말은 예상 결과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준칙이 정언명령에 맞는지 판단해본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거짓약속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사회의 신뢰를 무너뜨려서가 아니라, 거짓 약속으로 다른 사람의 필요와 욕구보다는 내 필요와 욕구를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 정언명령 2 :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 - 그 자체가 목적이면서 존재만으로도 절대적 가치를 지니는 것은 오직 '인간'뿐입니다. 사람은 이성적 존재이며, 상대적 가치를 지닐 수도 있지만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존엄성을 지닙니다. 그래서 인간과 모든 이성적 존재는 이런저런 의지에 따라 임의로 사용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으로 존재합니다.
정언명령의 두 번째 공식으로 거짓 약속이 왜 도덕적으로 잘못인가 살펴보면, 갚을 능력이 없음에도 거짓으로 약속하고 돈을 빌린다면 상대방을 이용한 꼴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해야할 목적으로 대하지 않고, 금전적 어려움을 해결할 수단으로 이용하는 셈입니다. 본인의 뜻을 거슬러 목숨을 빼앗는 행위인 타살과 스스로 선택한 자살이 인간을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정언명령에 똑같이 어긋납니다. 타살은 이익을 챙기려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것이기 때문에 희상자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취급한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나를 고통 완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존재하는 인간성을 처분할 권리는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내게도 없습니다. 사람을 물건 취급하면서 그 자체를 목적으로 존중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타살과 자살은 모두 옳지 않습니다.
칸트에게 있어서 인간을 존중해야 하는 의무는 이성을 지닌 존재, 인간성을 지닌 존재인 인간에 대한 의무입니다. 사랑이나 공감, 연대감, 동료 의식과 같은 특정한 타인에게 끌리는 도덕 감정 때문에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칸트식 존중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존중이며, 우리 모두에게 비차별적으로 존재하는 이성적 능력에 대한 존중입니다. 칸트의 존중 원칙은 보편 인권 원칙과도 통합니다.
도덕과 자유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도덕법을 생각해, 의무감에 따라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도덕법은 정언명령인 인간 자체를 목적으로 여겨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이루어집니다. 정언명령에 따른 행동만이 자유로운 행동입니다. 자율적으로 행동할 때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할 때만이 본성과 환경의 명령, 특정한 바람이나 욕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자유롭게 행동하기, 즉 자율적으로 행동하기란 도덕적으로 행동하기, 즉 정언명령에 따라 행동하기와 똑같은 하나의 개념입니다. 특정한 이익이나 욕구(행복이나 공리 등)를 도덕의 기초로 삼으려는 노력은 실패라며 공리주의를 비판합니다. 공리주의는 의무가 아니라 특정한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행동해야 하는 필요성을 발견한 것이며, 이익을 기초로 한 원칙은 언제나 조건적이기 때문에 도덕법이 될 수 없습니다.
칸트에 대한 의문
의문 1 : 칸트의 정언명령은 모든 사람을 목적으로서 존중하라고 합니다. 이는 성서에 나오는 '황금률'과 똑같지 않은가요?
답 : 그렇지 않습니다. 황금률은 '사람들이 어떻게 대우받고 싶어 하는가'라는 불확정적인 요소에 의존합니다. 정언명령은 불확정성에서 벗어나 특정 상황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든 그들을 이성적 존재로 존중하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요양원에 있는 나이 든 어머니에게 동생의 자동차 사고로 인한 사망 소식을 전해야 하는가? 정언명령 관점에서 보면, 어머니의 기분을 걱정해 거짓말을 한느 행위는 어머니를 이성적 존재로 존중하기보다 어머니의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행위입니다.
의문 2 : 칸트는 의무에 답하는 것과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똑같은 하나로 보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의무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은 법칙을 지킨다는 뜻입니다. 법칙에 복종하는 것이 어떻게 자유와 양립할 수 있습니까?
답 : 의무와 자율은 특별한 경우, 즉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칙을 나 스스로 정했을 때만 양립합니다.
의문 3 : 자율이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한다는 뜻이라면, 모든 사람이 똑같은 도덕법을 선택하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정언명령이 내 의지의 산물이라면, 사람마다 정언명령이 서로 다르지 않겠습니까? 칸트는 우리 모두 똑같은 도덕법에 찬성하리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마다 이성적 사고가 다르니, 서로 다른 도덕법을 주장하는 일이 생기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습니까?
답 : 도덕법을 정할 때, 어느 한 특정한 사람으로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존재, 칸트가 '순수 실천 이성'이라 부른 것에 참여하는 존재로서 선택합니다. 특정한 이익이나 욕구, 목적에 따라 판단해 생겨난 수만은 원칙은 도덕 원칙이 아니라 신중한 원칙일 뿐입니다. 순수 실천 이성을 발휘하면 누구나 똑같은 결론에, 즉 유일한 정언명령에 이르게 됩니다.
의문 4 : 칸트는 도덕이 신중한 계산 이상의 것이면 정언명령 형태를 띨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도덕과 이익의 손아귀에서 놀아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나요? 우리가 자유의지를 갖고 자율적으로 행동할 능력이 있따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나요? 과학자들이(뇌영상이나 인지신경과학으로) 우리에게 자유의지는 없다고 결론 내린다면? 그것이 칸트의 도덕철학을 뒤집을 수 있지 않나요?
답 : 의지의 자유는 과학이 옳다 그르다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연 영역에 살고, 모든 행동은 물리적, 생물학적 관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칸트는 두 가지 관점으로, 즉 물리와 생물이라는 경험 영역과 자유로운 인간의 행위라는 '지적' 영역에서 동시에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내 의지가 항상 어떤 이익이나 욕구에 얽매이는 경험적인 존재라면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오직 감각 세계에서 만들어낸 결과에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인 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나를 자유로운 인간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유롭다고 생각할 때, 자신을 지식 세계의 일부로 편입시키며, 의지의 자율을 그 결과인 도덕과 결부해 인식합니다. 정언명령이 가능한 이유는 "자유에 대한 생각이 나를 지적 세계의 일부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대상이 아닌 행위자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거짓말, 정치
- 자유로운 성관계에 반대하는 칸트의 견해
성도덕에 관해 칸트는 보수적인데, 부부 사이의 성관계를 제외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성적 행위에 반대합니다. 자유지상주의의 자기 소유 개념과는 정반대로, 우리는 자신을 소유할 수도, 마음대로 처분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하는 도덕적 의무가 있습니다. 서로 동의 하에 자유로운 성관계는 두 사람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둘을 대상화합니다. 성욕을 충족시킬 뿐 상대의 인간성을 존중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성적인 논쟁에서 자율권을 중시하는 사람은 몸을 자기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칸트는 자율적이란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 즉 정언명령에 지배된다는 것이며, 자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자신을 존중하고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우리 몸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습니다. 오직 부부끼리의 성관계만이 "인간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두 사람이 상대에게 자신의 전부를 주며 성적 능력을 이용하지 않을 땜나이 성관계가 대상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좋든 싫든, 모든 면에서" 서로가 상대의 "인간성과 육체와 영혼"을 공유할 때만이 이들의 성은 "인간의 결합"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칸트 시대의 치아 판매 행위나 오늘날의 콩팥 시장 형성, 매춘도 자신을 대상으로, 단순한 수단으로, 이익을 위한 도구로 여기는 행위이기 때문에 도덕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 살인자에게 거짓말을 하는 행위는 잘못인가?
칸트는 거짓말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살인자가 집 문 앞에서 내 집에 숨어 있는 친구를 찾습니다. 이 때 살인자에게 거짓말을 한다면 옳은 행위입니까? 프랑스 철학자 콩스탕은 진실을 알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만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살인자 같은 사람은 진실을 들을 자격이 없습니다. 하지만 칸트는 살인자에게 거짓말을 한느 행위가 잘못인 이유는 살인자에게 해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진실 원칙을 위반하기 때문입니다. 도덕은 원칙의 문제이며, 그 결과는 우연과 밀접히 관련됩니다. 그래서 칸트는 진실만을 말하라고 요구합니다. 거짓은 진실의 샘을 오염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살인자에게 친구의 소재를 말해야 하고, 안네 프랑크가 다락방에 숨어 있다고 말해야 하느냐'라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마이클 센델은 칸트의 입장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여기 없어요"라고 빤한 거짓말을 하거나, "한 시간 전에 저 아래 가게로 가는 걸 봤어요"라고 맞지만 오해할 만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뻔한 거짓말과 진실이지만 오해를 일으킬 말을 할 수 있는데,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진실이지만 오해를 일으킬 말은 정언 명령을 위협하지는 않으며, 도덕법을 존중하고 있습니다.
- 칸트라면 빌 클린턴을 변호했을까?
클린턴은 르윈스키와의 성 문제 이후 다음과 같이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 저는 르윈스키라는 여성과 성적인 관계를 맺은 적이 없습니다." "성적인 관계"를 부인하는 것이 거짓말인가를 놓고 공화당 의원과 클린턴의 변호사와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대통령의 변호인은 클린턴이 인턴과의 관계는 잘못되고 부적절하고 비난받아 마땅하며, 그와 관련된 대통령의 발언이 사람들을 '오도하고 기만했다'는 사실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성적인 행위를 했지 성관계를 맺지 않았기 때문에 "성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다"는 클린턴은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고 맞섭니다. 양 진영 모두 클린턴이 거짓말을 했는지, 단순히 국민을 오도하고 기만했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었습니다. 마이클 센델의 의견에는, 용의주도하게 회피하는 말은 법률가처럼 주의 깊게 듣고 분석해야 진실을 알 수 있지만, 뻔한 거짓말이 무시하는 진실을 말해야 하는 의무를 존중합니다. 오도하지만 진실인 발언은 노골적인 거짓말처럼 듣는 사람을 대놓고 속이거나 이용하지는 않습니다.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는다면 말의 진위를 판별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서 칸트에 의하면 뻔한 거짓말과 달리 오해를 일으키는 말은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있습니다.
칸트와 정의
칸트의 정치론은 공리주의를 거부하고 사회계약을 기초로 한 정의론을 지지합니다. 첫째, 칸트에 의하면, 공리주의는 개인 도덕성의 기초 뿐만 아니라 법의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 만일 공리주의에 의해 특정한 행복을 헌법의 기초로 삼는다면,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의 가치를 받아들여야 하고 자기만의 목적을 추구할 개인의 권리가 무시됩니다. 공정한 헌법이라면 개인의 자유는 물론이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조화를 이루도록 힘써야 합니다. 둘째, 칸트는 정의와 권리를 조금 특이한 사회계약에서 도출합니다. 로크와 같은 사회계약을 주장한 초기 사상가들은 합법 정부는 사회계약에서 탄생한다고 주장하며, 이 사회계약은 자신이 포함된 집단의 삶을 지배하는 원칙을 정한 사람들이 결정합니다. 그러나 칸트는 이 원초적 계약이 진짜가 아니라 상상의 계약이라고 주장합니다. 국가가 형성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사회계약이 있었다는 증거가 거의 없으며, 도덕원칙은 경험한 사실에서만 나올 수 없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즉 과거의 사람들이 동의했다고 공정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관념이지만 확실한 실제 현실성이 담겨 있는 "이성이라는 관념"이 입법자에게는 법의 틀을 짜도록 명령할 수 있으며, 시민에게는 '동의한 듯한' 의무감을 느끼게 합니다. 집단적 동의라는 상상의 행위가 "모든 공공법의 정당성을 판가름하는 잣대"라고 결론짓습니다.
7장 소수집단우대정책 논쟁
백인 여성인 홉우드는 텍사스 법학전문대학원에 지원하였으나 떨어졌는데, 그녀와 대학 성적과 입학시험 점수가 비슷한 흑인과 멕시코계 미국인이 모두 합격한 것입니다. 그들은 사회적 소수자에게 가산점을 주는 소수집단우대정책의 혜택으로 합격한 것입니다. 홉우드는 입학을 거절당한 것이 부당하며 차별에 희생되었다고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대학은 법률사무소 뿐만 아니라 입법부와 법정을 포함해 텍사스 법조계에 인종적, 민족적 다양성을 높이는 것이 텍사스 법학전문대학원의 사명 중 하나라고 답했습니다. 흑인과 멕시코계 미국인이 텍사스 인구의 40%에 이르지만, 법조계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훨씬 적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원은 소수집단우대정책을 실행하면서 입학생의 약 15%를 소수집단에서 뽑는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이들의 낮은 입학 기준에도 불구하고 모두 학업 수행 자질이 있으며, 거의 모두 무사히 졸업하며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부당한 대우를 받았으며 입학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홉우드를 설득하지는 못했습니다. 소수집단우대정책에 항의해 제기한 소송 때문에 법정은 도덕적, 법적 문제로 골치를 앓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소수집단우대정책이 평등권 보호를 보장하는 미국 헌법을 위반하는가'라는 법적 문제는 제쳐두고, '취업과 대학 입학에서 인종과 민족을 고려하는 행위가 정당한가'라는 도덕적인 문제를 다룰 것입니다. 이 정책의 지지자들이 내세우는 세 가지 기준인 표준화된 시험의 불균형 바로잡기와 과거의 잘못 보상하기, 다양성 증대를 살펴볼 것입니다.
시험 격차 바로잡기
표준화된 시험에서 나타날 수 있는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서 인종과 민족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학업적성시험(SAT)를 비롯한 여러 시험이 과연 학생의 학업 수행 능력을 제대로 예측할 수 있는가',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은 대학원 입학 자격시험 점수가 신통치 않았음에도 박사 과정에 합격했습니다. 구두 적성 시험에도 평균 이하의 점수를 받았지만 그는 뒷날 위대한 연설가가 되었습니다. 표준화된 시험에서 계층간 경제적 수준을 고려해도, 흑인과 히스패닉 학생이 백인 학생보다 더 낮은 점수를 받습니다. 그러나 학업 성취 가능성을 예측하려면 시험 점수를 해석할 때 학생의 가정이나 사회, 문화, 교육 배경을 고려해야 합니다. 시골에서의 700점이 대도시 중심에서의 700점보다 더 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학생의 인종, 민족, 경제 배경을 고려해 시험 점수를 평가하는 것이 오히려 학업 성취 가능성을 정확히 측정하려는 시도입니다.
과거의 잘못 보상하기
소수집단 학생들을 불리한 처지에 몰아넣은 역사적 차별을 보상하는 차원에서 우대해야 한다는 논리에 따라 입학 허가를 가장 먼저 주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지금 보상받는 사람들이 원래의 피해자가 아닐 수 있으며, 보상하는 사람에게도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을 책임이 없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합니다. 그래서 이 정책의 요지가 불리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돕는 것이라면, 인종이 아니라 계층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빈곤한 백인보다 풍요로운 흑인과 히스패닉이 더 큰 혜택을 누리는 것은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역사적 보상을 위해 부당 행위에 가담하지 않은 현재의 사람에게도 보상을 끌어내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느냐도 문제입니다. 과거 세대가 저지른 잘못을 보상할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하는가에 대해 '집단적 책임', 즉 개인의 의무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과거 역사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다양성 증대
소수집단우대정책을 지지하는 다양성 논리는 입학 허가를 수혜자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목적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봅니다. 다양성이란 공동선, 즉 학교의 공동선이자 사회의 공동선이란 명분을 내세웁니다. 여러 인종의 학생들이 섞여 있으면 출신 배경이 비슷한 학생들끼리 모여 있는 것보다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건이 불리한 소수집단 학생들을 교육해 핵심 공직이나 전문직에서 지도력을 발휘한다면, 대학은 지역 발전과 공동선에 더 크게 기여하는 것입니다. 서두의 텍사스법학전문대학원장도 홉우드의 반발에 대해 시민사회의 목적에 기여한다고 반박했습니다. 대학의 사명 중 하나는 텍사스 법조계에 다양성을 늘리고, 흑인과 히스태닉이 정부와 법조계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고, 이것이 성공을 거두었다고 밝혔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하버드대학도 학업 성적과 시험 점수가 입학 심사의 유일한 기준이 아니며, 출신 배경과 특기, 사회의 다양한 지도층이 될 수 있는 잠재 가능성과 함께 이제는 인종적, 민족적 다양성도 고려한다고 밝힙니다.
다양성 노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현실적 반박과 원칙적 반박으로 나뉩니다. 현실적 반박은 소수집단우대정책이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효과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다원화 사회를 활성화하거나 편견과 불평등을 줄이기보다는 소수집단 학생들의 자부심을 훼손하고, 모든 집단이 인종을 더욱 의식하게 만들며, 인종간의 긴장을 높이고, 백인들의 분노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종별 우대정책은 권리를 침해하는가?
원칙적 반박은 입학할 때 인종이나 민족을 따지는 것 자체가 부당하다고 주장합니다. 공리주의자들에게는 탈락자의 실망감의 무게보다 교육적, 사회적 이익의 무게가 더 크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 반박이 그다지 설득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소수집단우대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어떤 목적보다 개인의 권리가 우위에 있다고 여기는 칸트식 자유주의자이거나 롤스식 자유주의자들입니다. 이들 생각에는 입학 심사에 인종을 고려할 경우 홉우드의 권리가 침해될 때만이 부당한 정책입니다.
그렇다면 홉우드의 권리가 침해되었나 살펴보아야 합니다. 입학과 관련된 권리가 오직 학문적 기준으로 한정된 것이 아니라 학업 성적과 시험 점수, 기타 학업 성취 가능성과 함께 민족적, 지역적 다양성, 운동 능력, 과외하롸동, 지역 봉사활동 등도 포함이 됩니다. 즉 이런 기준으로 학생들을 선발하여 교육하는 것을 대학의 사명으로 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대학 입학은 학생의 능력이나 미덕을 포상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이 정한 사회적 목적에 부합할 때 허락되는 것입니다. 학교의 사명이 관련 능력을 정하지, 학생의 능력이 학교의 사명을 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소수집단우대정책에서 인종을 고려하는 것은 누구의 권리도 침해하지 않습니다.
인종분리정책과 반유대적 할당제
그렇다면 대학은 내키는 대로 사명을 정할 수 있으며, 그 사명에 걸맞는 입학 정책은 모두 공정합니까? 한때는 대학들이 흑인들을 받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웠으며, 1920~30년대에 일부 아이비리그 대학에서는 반유대적 할당제를 실행했습니다. 소수집단우대정책을 옹호하는 사람이 다양성 논리를 내세웠듯이, 대학이 스스로 정한 사명에 맞춰 입학 기준을 정하면서 특정 인종을 배제하거나 제한을 두는 식으로 인종차별 조치를 취할 경우 이를 비난할 수 있을까요? 이 두 제도 사이에 어떤 원칙적 차이가 있을까요? 분명한 답은 분리주의 시대에 특정 인종을 배제한 행위는 어떤 인종이 다른 인종에 비해 유전적으로 더 가치 있따는 경멸스러운 사고방식에 기초한 반면, 소수집단우대정책에는 그런 편견은 없습니다. 중요한 전문직에서 다양성 증대가 중요해지다 보니, 흑인이나 히스패닉이라는 사실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특성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백인 학생들에 비해 유대받을 도덕적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교육 현장에서 인종적, 민족적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이 학교의 교육 목적에 맞을 뿐입니다. 또한 목적 추구가 입학에서 제외된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실망한 지원자들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법적으로 항의할 수 없습니다.
백인 우대 정책?
때로는 백인을 우대하는 것도 정당화될 수 있을까요? 스타렛 시티는 2만 명이 입주한 뉴욕 브루클린의 아파트 단지로 인종 통합 공동체라는 기치를 내걸었습니다. 공동체의 민족적, 인종적 구성 비율을 조절하는 '입주자 조절 정책'을 실시하여 흑인과 히스패닉을 전체 입주자의 40%로 제한했습니다. 이 비율은 편견이나 경멸이 아니라, 백인 이탈 현상을 피하고 주민 통합이 깨지는 한계점을 피한 인종적 한계점입니다. 그러면서 인종적, 민족적 균형을 유지해 안정되고 인종적으로 다양한 공동체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 방법은 효과가 있어서 살기 좋은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백인보다 흑인에게 돌아가는 할당량이 적기 때문에 입주를 원하는 흑인 가족은 백인 가족보다 더 오래 기다려야 했습니다. 백인 가족은 서너 달을, 흑인 가족은 최장 2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 할당제는 인종적 편견이 아닌 공동체 통합이라는 목표에 근거한 할당제이지만, 일부 흑인 신청자들은 인종에 근거한 이 정책이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법원은 현재의 할당제를 유지하되 소수집단을 위한 주택 조성 계획을 더 추진하라고 판결했습니다.
스타렛 시티의 인종을 기반으로 실시한 아파트 할당제는 부당할까요? 소수집단우대정책을 지지하는 다양성 논리를 인정한다면, 부당하지 않습니다. 주택 정책이나 대학 입학의 경우 인종적, 민족적 다양성은 각각 다르게 적용되지만, 공정성이란 관점에서는 같은 기준이 적용됩니다. 다양성이 공동선에 봉사한다면, 누구도 증오나 경멸로 차별받지 않는다면, 인종별 우대는 어떤 사람이 권리도 침해하지 않습니다. 도덕적 자격이라는 롤스의 견해에 따르면, 어떤 능력이 인정받는가는 주택당국이나 대학 당국이 사명을 결정한 뒤에야 정해질 수 있습니다.
정의는 도덕적 자격에서 분리될 수 있는가?
도덕적 자격을 분배 정의의 기초로 삼지 않는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타당하고 한편으로는 불안합니다. 타당한 이유는, 성공은 미덕에 씌워주는 왕관이라거나 가난한 사람보다 부자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이 부자되는 거라는 능력 위주 사회의 사고방식을 허물기 때문입니다. 뛰어난 재능을 타고날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며, 처음부터 사회에서 유리한 출발선에 설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장점을 높게 쳐주는 사회에 살게 된 것도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그저 행운입니다. 그러나 정의를 도덕적 자격에서 분리할 때 불안감을 해소하기 어렵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규칙을 따르는 사람"은 앞서 갈 자격이 있다고 끊임없이 외치며,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사람들이 성공하게 된 것은 미덕도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확신에 집착하면 사회 결속에 걸림돌이 되지만, 성공을 우리 노력의 결과로 여길수록 뒤처진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은 줄어들게 됩니다. 그래서 성공을 미덕에 대한 포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이 끈질긴 믿음은 단순한 오해이며, 버려야 할 그릇된 통념입니다.
하지만 자격 논쟁에서 정의 논의를 완전히 분리하기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첫째, 정의는 흔히 영광과 관계됩니다. 분배 정의에 관한 논쟁은 누가 무엇을 갖는가의 문제만이 아니라, 영광과 포상을 얻는데 어떤 자질이 필요한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둘째, 사회조직이 자체적으로 사명을 결정하고 난 뒤에 무엇이 능력으로 인정받는지 정해진다면 각종 학교나 대학, 전문직, 공직 관련 조직은 사명을 자신들 마음대로 정할 수 없으며, 조직에 할당된 역할의 선을 무시하면 자칫 타락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대학이 경매로 입학생을 뽑아도 될까?
'기여입학생'(development admits)이란 지원자 가운데 졸업생의 자녀는 아니지만 학교에 상당한 기부금을 내놓을 정도로 재력이 풍부한 부모의 자녀를 말합니다. 이를 극단적인 상황으로 확대한다면, 대학이 입학 정원이 10%를 경매에 부쳐 높은 가격을 부른 입찰자에게 입학을 허가한다고 상상해 봅시다. 이 제도는 공정할까요? 대학은 대학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대학이 원하는 '능력'을 어떤 식으로든 대학의 사명에 기여하는 역량을 뜻한다면, 답은 '공정하다'가 될 것입니다. 기부금을 낸 지원자들은 대학이 정한 사명과 그에 따른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공정성은 확보됩니다. 기여입학생 때문에 입학에서 탈락한 학생들은 편견의 희생자가 아닙니다. 다만 기부금을 낼 능력이 안 되는 부모를 둔 불운한 학생일 뿐입니다. 돈 많은 부모가 자녀에게 아이비리그 입장권을 사줄 수 있다는 사실은 불공평해 보이지만, 가난이라는 자신의 통제력을 벗어난 문제로 불이익을 당한다는 사실이 부당할 수는 없습니다.
대학 입학을 '경매'하는 것이 거부감 드는 이유는 지원자의 기회보다 대학의 청렴성과 관련이 깊습니다. 더 높은 값을 부른 입찰자에게 자리를 파는 행위는 교육 기관보다는 록 콘서트나 스포츠 행사에 더 어울립니다. 대학은 학생들을 교육해 사회에 나가 훌륭히 일하게 만들지만, 대학 교육의 일차 목적이 상업적인 거래는 아닙니다. 대학의 목적은 수입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연구로 공동선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육을 단지 상품처럼 파는 행위는 일종의 타락이며, 대학 존재 이유인 학문 추구와 시민의 기대에서 멀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정의와 권리의 문제를 영광과 미덕의 문제에서 분리하기 힘든데, 대학이 수여하는 명예학위는 대학이 마땅히 추구하는 미덕을 보여준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어느 면에서는 대학이 수여하는 모든 학위가 명예로운 학위입니다. 이렇게 정의에 관한 논재을 영광, 미덕, 선의 의미에 관한 논의에 묶어두는 것은 대책 없는 의견 차이를 봉합하는 비결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스토리가 스펙을 이긴다
Part4 스토리의 뼈대를 이루는 8가지 핵심 역량
청자 중심의 의사소통을 연습하라
혼자 많이 알면 인정받던 시절에서 전문 지식에 설명 능력이 합쳐져야만 전문가로 인정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에는 의사소통능력(커뮤니케이션 능력)이 핵심 역량입니다. 커뮤니케이션에는 언어적 요소 뿐만 아니라 비언어적 요소도 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에게 강한 화자 중심의 커뮤니케이션 문화에서 글로벌 시대에 적합한 청자 중심의 커뮤니케이션 문화로 변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말을 못알아 들으면(한국말이든 외국말이든) 듣는 사람이 문제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생각을 바꿔서 말한 사람에게 문제가 있으며 '무슨 뜻인지 다시 말씀해주세요'라고 당당하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글과 말, 음악, 영상, 기술문서 등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는 무수히 많은데, 그 중에서 자신이 익숙한 커뮤니케이션 도구를 활용하면 효과적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습니다.
* 내생각) 화자 중심의 커뮤니케이션 문화 : 말을 많이 해야 내 의사가 전달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단 대화의 주도권을 잡았다면 일방적으로 쏩니다.
* 고집스럽고 어리석은 사람은 지배하고 복종시킴으로 관계를 맺으면서 영향력을 증대시키려고 합니다. 이러한 이의 공통점은 상대가 말할 틈을 주지 않으며 자기 자랑이나 어려움에 대하여 쉬지 않고 주지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관계를 지속시키지 못하고 단절시켜 버립니다.
그렇다면 일대일 관계를 잘 맺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커뮤니케이터이며 리더십 전문가인 존 맥스웰은 “상대방에 대해서 더 많이 말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적게 말하라.”
“도울 일이 없는지 묻고 끝까지 신경을 써라. 섬기는 자세로 임하는 것은 말보다 훨씬 오래가는 강력한 영향력을 갖는다.”고 주장합니다.
(인간관계 맺는 기술, 존 맥스웰 저, 성기영 역)
Part5 지금 당장 당신의 스토리를 시작하라
1단계 스토리의 시작, 근원적 체험
위대한 스토리는 미미하지만 가슴 깊이 남아 있는 근원적 체험부터 시작합니다. 2001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는 어린 시절 겪은 근원적 체험 때문에 '약자의 경제학'을 주창하게 되었습니다.
- 약자의 경제학을 주창한 스티글리츠 교수의 근원적 체험
그는 어린 시절 공업도시의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 경험과 배우지 못한 아프리카계 가정부와의 만났습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있는 완전한 시장은 실업과 빈곤이 없어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 손은 없으며 시장 주도적 경제에 정부의 통찰력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근원적인 체험이 그를 경제학의 길로 안내하고 새로운 통찰로 이끌었습니다.
저자도 한국전쟁의 고아와 과부의 아픔과 슬픔을 '자신의 슬픔과 아픔'이 되게 해 달라는 월드비전의 창립자 밥 피어슨 목사를 본받고자 하는 바람을 갖게 된 근원적 체험이 있습니다.
- 탐험가의 눈빛으로 나를 탐색하라
일단 알게 되면 이전과 똑같이 살기 어려운 근원적 체험은 조용히 자신의 과거와 관심 분야를 호기심으로 살피는 탐색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근원적 체험은 누구나 자신의 일상 속에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온전히 자신에 몰두하는 고독에의 용기는 성취로 바뀝니다.
2단계 뽀빠이 모멘트를 체험하라
뽀빠이 스토리는 '근원적 체험'의 전형적인 형태를 취하는데, 어떤 문제와 마주쳤을 때 사람에게는 본능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열망과 창의력이 솟아남을 보여줍니다. <내생각) 이런 근원적인 체험으로 생겨난 열망을 꺽어버리는 부모의 핀잔>
- 평범한 학생들의 특별한 순간
지구본에서 한국을 찾지 못하는 외국인들을 보고 한국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국제법 분야를 파고 들겠다는 학생, "살인의 추억"이라는 영화를 보며 체계화된 수사기술과 전문기식의 중요성을 깨닫고 프로파일러가 되고자 한 학생, 신경숙의 "외딴방"이라는 베스트셀러를 읽고 내가 외면한 사회를 변화시켜야겠다(인권 관련 분야의 일)고 결심한 학생들이 있습니다.
(Q. 수많은 사람들이 일상을 경험하는데, 누구는 근원적 체험을 합니다. 왜, 어떻게?)
- 헨리 조지의 클라이맥스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14살에까지밖에 공식교육을 받지 못했던 헨리 조지는 뉴욕의 사치와 빈곤의 공존에 충격을 받고 집필하기 시작한 "진보와 빈곤"이라는 논픽션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 가슴 떨리는, 나를 감동시키는 일을 하라!
3단계 거룩한 불만족을 찾으라
근원적인 체험을 통해 뽀빠이 모멘트를 경험한 사람들은 유독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이슈를 해결하고자 하는 '거룩한 불만족'을 갖고 행동하게 됩니다. '거룩한 불만족'을 갖은 사람은 분노와 열정을 쓸모 있는 일로 바꾸는 방법을 찾습니다.
- 분노와 열정을 쓸모 있는 일로 바꾸는 방법
퍼시스의 손동창 회장은 중학교 시절 보게 된 '심플하면서도 세련된 북유럽의 의자'를 보고 거룩한 불만족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무기기의 직선을 곡선으로 바꾸고 철제를 나무로 바꾼 퍼시스 제품을 보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창의적인 사람은 흔한 공무원 책상을 보면서 '왜 책상이 이렇게 단순하고 불편해야 하지?'라는 질문을 갖게 되고, 불편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봅니다.
- 불만합창단의 희망 이야기
"불만합창단"은 불만에서 긍정의 에너지를 만들어 낸 좋은 예입니다. 개인적인 차원의 불만을 찾아내면 거룩한 희망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4단계 에피소드를 수집하라
구체적인 재료를 가진 우리 각자의 스토리는 어떻게 준비할 수 있을까?
- 에피소드에서 시작해보자
자신의 자서전을 '나의 진리실험 이야기'라고 말한 간디는 자기 인생의 주제를 '진리 실험'이라 정했고, 스스로를 경건한 실험의 대상으로 삼아 스토리를 써내려갔습니다. 인생을 관통하는 하나의 스토리는 '거룩한 불만족'이 무엇인지 드러나야 합니다. 하지만 '거룩한 불만족'을 느끼기 전의 스토리도 그 자체로 소중합니다. 스타워즈나 배트맨의 시리즈는 영화가 완결된 후 '스토리 이전의 스토리'인 '에피소드'를 파헤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거대한 스토리가 시작되기 전 '에피스도'란 스토리가 있는데, 나만의 에피소드를 준비해 봅시다. 먼저 과거를 돌아보면서 내가 지나왔던 점들을 이어보면 불투명한 미래를 알게 됩니다.
- 솔직하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내게 편안하고 납득되는 스토리를 이야기해 보고 느껴보십시오. 자신에게 반복적으로 이야기한 진짜 스토리는 우선순위와 가치가 증대되어 자신의 머리 속에 깊이 뿌리는 내리게 됩니다.
- 아는 것이 아니라 느낀 것, 체험한 것, 경험한 것이 중요하다
'내가 아는 것'을 쓰는 것은 논문입니다. 경험이 스토리의 재료입니다. 자신이 업으로 삼고자 하는 영역의 핵심 역량을 파악해, 그 역량에 관한 자신만을 확보해가야 합니다. 특별한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서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에서 스토리의 재료들과 만나게 됩니다.
5단계 비상한 머리보다는 더러운 손
관련된 모임이나 소규모 프로젝트의 실행, 관련 연구자료 분석을 통해 나의 진짜 스토리인지 확인해 봅니다. 뽀빠이 모멘트와 거룩한 불만족의 과정 후 어떤 분야에 뛰어들었는데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라 열정이 나오지 않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 경우는 진정한 '거룩한 불만족'이 아니든지, 시간이 더 무르익어야 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부딪히고 몸으로 생각하는 '자기 관심 노출'을 해야 합니다. 관심 분야의 사람들과 정보를 교류하게 되고, 서로의 성취를 돕는 기회가 찾아옵니다.
- 9월에 태어난 사람들 프로젝트
뉴욕의 이벤트 기획자인 해리슨은 케냐의 큰 병원의 수도에서도 흙탕물이 나와 환자들의 병세가 악화되는 뽀빠이 모멘트를 경험하였습니다. 2006년 그는 31번째 생일에 친구들에게 선물 대신 20달러를 현금으로 기부해 달라고 부탁했으며, 2007년 32번째 생일에는 1년을 1달러로 계산해서 32달러를 기부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9월에 태어난 사람들' 프로젝트는 7주 동안 1억8천만원을 모금하여 케냐 병원 세 곳과 학교 한 곳에 우물을 파고 수도관을 연결해 주었습니다. 2008년 33번째 생일에는 계속 자기 노출을 하여 300개 마을에 우물을 파기로 계획했는데, 16개국 80여만 명이 혜택을 볼 수 있는 1500개소 이상의 우물과 수도관이 설치되었습니다.
'누구나 물만큼은 깨끗한 것을 마셔야 하지 않을까요? 제 생일을 축하해 주세요. 선물이 아니라 제 나이만큼 1년에 1달러로 기부해 주세요' 그는 스토리를 만들어 자기 노출을 했습니다. 마침내 아프리카의 물 문제를 해결하는데 재능을 쓰는 것이 자신의 '업'임을 깨달았습니다.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의 존 마에다 총장은 늘 손을 더럽게 해 다양한 경험을 할 때 창의성이나 어떤 결과들이 나온다는 '더러운 손(dirty hands)' 이론을 주장합니다. 스토리는 고상한 머리보다는 '더러운 손'이 필요합니다.
6단계 가장 작은 곳에 포커스를 맞춰라
강원도 감자밭은 싸리나무나 잡목으로 무성한 버려진 땅 밑에서 감자가 자라고 있습니다.
- 모두가 이야기 덩어리다
온갖 어려움을 이긴 도로시의 마지막 주문은 "집이 최고다"입니다. 스토리가 태어난 곳은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입니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신경숙 씨는 제주도의 생활과 같은 단순한 패턴과의 만남에서 스토리를 포착합니다. "일상이 단순해지면 오히려 몯느 순간들이 이야기가 된다. 누구나의 일상은 이야기를 가득 품고 있다. 모두가 이야기 덩어리다"라고 그녀는 말합니다.
- 일상 속의 위대함
스티븐 코비는 특별한 스토리가 발견되는 평밤한 일상을 "일상 속의 위대함(Everyday Greatness)"라고 말합니다. 일상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위대함을 일탈을 통해 경험할 수 없습니다. 스토리는 일상에서 시작됩니다. 학과 수업이나 독서, 토론, TV, 신문 등과 같은 일상 속의 스토리 조각들이 모여 퍼즐이 완성됩니다. '세렘디피티'란 '기대치 않았던 무언기의 소중한 가치' 또는 'A를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B가 더 소중하고 중요한 상황'을 뜻합니다. 일상은 세렌디피티의 천국입니다.
7단계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개인적으로 행동하라
이애경, 기다리다 죽겠어요, 8장 적극적으로 침노하는 여성들
구하고 찾았다면 두드려라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눅11,9) 내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이 진리의 말씀은 기도가 이뤄지는 순서를 보여줍니다. 구하기 시작해서 직접 내 손에 넣기까지 다섯 단계가 있습니다.
첫번째 단계는 부족하고 필요하다고 느끼며 특정한 기도의 시작을 알리는 단계입니다. 필요를 알기 전에는 구할 이유가 없습니다. 직장에서 해고 위기나 이직, 전직의 상황, 재정의 부족, 결혼의 필요성이라는 부족은 기도 응답의 첫 단계입니다.
구하면 원하는 것을 주신다 단 내 시야 밖에 있을 수도 있다
첫 번 째 단계는 구하는 단계, 부족함을 알게 된 후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며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알고 계시기 때문에 미사여구는 필요치 않고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됩니다. 죄가 있는 경우는 하나님이 기도를 듣지 않기 때문에 일정한 시간이 소요됩니다. 기도의 응답이 이뤄지지 않으면 죄와 허물이 있나 돌아보아야 합니다. 성령님이 밝혀주시는 것을 통해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 몸과 생각으로 지은 죄들을 깨닫게 되고 회개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세 번째 단계는 인간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는 기도의 응답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이미 응답을 주신 단계입니다. 비록 상황은 변한 것이 없지만, 하나님이 응답하셨다는 생각이 들고 마음이 평안합니다. 기도의 그릇이 다 채워졌다는 확신이 들고 하나님이 응답하셨다는 확신이 드는 때입니다.
찾았다면, 두드려라. 문이 부서질 정도로
네 번째 단계는 하나님이 주셨지만 아직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응답을 찾아 나서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즉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의 지시대로 가고 멈추면 됩니다. 나의 의지가 반영되어서는 안 됩니다. 미로를 빠져나오는 게임에서 누군가 위에서 지시할 때 빨리 탈출하고 승리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찾았다면 문을 두드리는 다섯번째 단계로 접어듭니다. 내 눈 앞에 보인다면 그것을 취해서 내 손에 넣어야 할 단계입니다. 문 앞에 가만히 있으면 문이 저절로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두드려야 합니다. 갈급할수록 소리치고 강하게 두드립니다. 언제까지? 문이 열릴 때까지.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경우는 하나님이 주시려던 것이 아니거나 하나님의 지시대로 가지 않아 잘못 찾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시간과 열정을 낭비했다고 느껴질지도 모르나 과정에서 건질 수 있는 아름다운 수확물이 있습니다. 바로 말씀을 더 잘 들을 수 있는 훈련과 하나님께 순종했다는 기쁨을 얻습니다. 전구를 발명한 에디슨에게 이천 번의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이천 번의 과정을 거친 것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남편감을 만나라
기도 응답의 다섯 단계를 결혼에 대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배우자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특히 하나님이 택하신 좋은 배우자의 필요성을 알게 된 후 결혼에 관한 기도를 합니다. 내 삶에 회개나 치유해야 할 문제를 해결한 경우 결혼 기도를 들으시고 배우자를 내 삶에 데려다 놓으십니다. 하지만 아직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나와 배우자를 열결해 줄 사람을 내 삶에 보내시거나, 사내 커플이면 한 직장에, 교회 커플이면 한 교회에 부르시는 일을 하십니다. 내 삶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기도응답과는 멀어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두 사람을 만나게 하는 작업을 시작하셨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던 배우자가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길을 가는 동안 내 앞에 나타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계속 걸어갈 때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워지는 때 결혼도 가까워진다
하나님과 친밀감과 하나님을 우선 순위로 놓는 삶을 살다 보면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이때 옆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배우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 시점에서 하나님께 확답을 얻는 후에 문을 두드립니다. 남자든 여자든 먼저 문을 발견한 사람이 문을 두드립니다.
안쪽으로든 바깥쪽으로든 문은 열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이 만드신 결혼과 관련된 문은 복도에서 방으로 나 있는 문이 아니라 방과 방 사이에 있는 문입니다. 결혼은 각각 연결된 두 개의 방으로 인도된 두 남녀가 상대방을 향해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문을 먼저 발견했다면 애써 감추지 말고 적극적으로 두드려라. 남자들은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먼저 손을 내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택함 받은 당일, 바로 고향을 떠난 행동주의자 리브가
부흥강사와 함께 온 스태프 한 명이 물을 요청했을 때 그와 스태프를 위해 얼음 물을 주는 자매를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섬김의 자리에서 기적을 기다려 온 자매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둘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합니다. 리브가와 같은 기적이 일어납니다. 리브가는 택함받은 당일 바로 친정을 떠나 시댁으로 가는 당차고 빠른 행동력을 지닌 인물입니다. 하나님이 해 주시는 일이 있고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햇빛과 비를 주셔서 곡식이 잘 자라고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땅에 종자를 심고 밭을 갈고 잡초를 고르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씨를 뿌려야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 믿고 있다는 당신은 대체 뭘 하고 있는가
하나님께 기도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동성끼리만 어울려 다니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상식선에서 일하십니다. 제발 눈을 뜨고 기도하고, 좋은 형제를 만날 기회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리브가는 결혼을 위해 기도하며 준비하고 기다려온 여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물가의 사건을 우연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이 계획하셨음을, 하나님이 이루신 일이라는 것을 정확히 깨달았습니다. 지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Yes and Amen"으로 화답한 리브가는 믿음을 실행해 옮기는 당찬 행동주의자입니다.
장점을 최대한 가리고 있어도 내 짝은 그 진가를 알아본다
사람은 어디를 가도 티가 납니다. 부자는 아무리 허름한 옷을 입어도 귀티가 흐르고, 지혜로운 사람은 한 마리만 해도 지혜가 쏟아져 나옵니다. 내가 준비된 보석이라면 장점을 가리고 있어도, 내 짝은 반드시 나를 알아볼 수 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날 때, 아버지께 돌아온 이삭은 묵상을 합니다. '묵상하다'(히브리어로 shua)는 '기도하다, 생각하다, 애곡하다'는 뜻입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그 빈자리를 채워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모리아 산에서 '여호와 이레'를 체험한 이삭은 결혼의 문제에서도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처음으로 리브가를 본 이삭은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인도하심을 듣고 성실하고 내면이 아름다운 리브가에게 사랑을 느끼며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내면과 외모 모두 아름다운 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리브가 또한 이삭의 남다른 행동으로 보고 확신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내면의 아름다움과 정체성의 확신, 행동력
성실함이 몸에 배인 리브가 - 리브가를 통해 우리는 외면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을 먼저 가꿔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부유한 집에서 자랐지만, 종이 하는 물 길는 일을 직접하는 겸손함과 성실함을 갖추었습니다. 힘들여 길은 물을 엘리에셀에게 내어부며 다시 우물에서 물을 긷는 수고를 합니다. 낙타가 마시는 물의 양이 어마어마한데, 낙타가 다 마실 때까지 기다린 리브가는 상당한 인내심을 소유한 여성입니다. 상대방의 필요를 돌볼 줄 아는 사람, 적당한 친절이 아닌 성의를 다해 상대의 필요를 넘치게 베푸는 사람입니다.
정체성이 분명히 확립된 여인 - 리브가는 자신을 소개할 때, '밀가가 나홀에게서 낳은 아들 브두엘의 딸'이라고 소개할만큼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조상에 대한 자부심과 영적,, 물질적 유산을 받은 자녀임을 분명히 압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유산을 물려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인식하고 충만히 채우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베푸는 여유가 생깁니다.
행동력과 분별력을 갖춘 지혜로운 여인 - 묵을 곳을 찾는 엘리에셀을 만났을 때 자신의 집에 거할 곳이 있다고 알립니다. 그후 어머니께 벌어진 일을 알려 줄 정도로 행동력과 분별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일도 하나님의 손길을 직감하고 행동하고 분별합니다.
행동하는 믿음을 지닌 기생 라합, 하나님을 알게 되다
술을 파는 유흥업 종사자 라합은 자신의 직업적 특성을 십분 발휘한 정보력과 용기, 대담함으로 자신과 가족을 죽음에서 살려 낸 여인입니다. 술 시중을 들던 고객들을 통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들었습니다. '감이 좋다', '촉이 좋다'는 최고의 정보를 수집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환경이 있어서 상황을 판단할 때 우월한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목숨을 건, 일생일대의 기회가 결혼으로 연결되다
정탐꾼을 만난 라합은 여리고성이 함락될 때 그녀와 그녀의 가족을 살려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따르기로 결정한 라합은 살려 달라고 애걸하지 않았으며, 남자 상대의 술집 운영으로 다져진 강단으로 정면 승부합니다. 라합은 평생 기생, 술집 여자라고 천대받았을지 모르지만 그의 가족을 구원하는 놀라운 기적의 주체가 됩니다. 그녀의 정보력과 판단, 결단력, 행동에 이르는 네 박자를 민첩하게 실행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숨겨진 보배 중의 보배, 기생 라합
정탐꾼 중 한 명이었던 살몬은 라합과 결혼합니다. 살몬의 눈에는 기생 라합이 아닌, 지혜롭고 강단 있고 용기 있는 여인, 하나님을 경외햇으며 하나님께 선택받은 이방 여인 라합이 보였습니다. 살몬과 결혼한 라합은 보아스를 낳아 다윗과 메시아의 족보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방인이었던 라합을 둔 보아스는 이방 여인 룻을 아내로 맞아들일 때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 이방인 어머니를 두었기 때문에 큰 용기와 실천력을 지닌 룻에게 큰 호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유전자를 타고 났을 것입니다.
나는 기다려야 하는가 침노해야 하는가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은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적극적인 노력이 과하여 도를 넘으며 '때'를 무시한 침노라면 말라고 싶습니다. 외롭다거나 나이가 찼다거나 주변의 성화에 못 이겨 내 때가 아닐 때 무조검 침노를 단행한다면 많은 문제와 상처를 안고 돌아설 가능성이 100%입니다.
운명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꿈꾼다거나, 환상적인 신혼 생활, 오직 사랑만으로 결혼할 수 있다는 로맨티스트, 기도 리스트를 100% 충족시키는 원하는 남편감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 완벽하게 준비된 자가 결혼하다는 생각, 남편과 교회 사역을 다 같이 할 수 있다는 생각, 모든 사랑을 남편에게 쏟아부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있다면 아직 결혼할 시즌이 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더 가까워져야 합니다.
최고의 사랑은 남편이 아니라 하나님,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결혼이 아니라는 생각, 하나님이 최고의 신랑을 준비하셨을 것이라는 믿음, 결혼을 위한 구체적인 기도, 결혼은 생활이며 남편의 경제력도 중요하다는 인식, 본인의 경제적 자립, 가정과 나의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신뢰를 어느 정도 표현한다면 적극적으로 침노할 때입니다.
결혼을 기다리는 수많은 싱글 마르다들
대한민국에는 너무나 많은 마르다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 노력은 언젠가는 이 땅에서도, 천국에서도 보상받습니다. 하지만 그 보상이 원하는 결혼으로 돌아오지는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수많은 자매들의 신앙상담 전화로 턱까지 내려온 다크서클, 회사까지 찾아가는 일대일 방문, 교회 지체들의 간식비로 저당잡힌 월급 통장, 때마다 돌아오는 나에게 맡겨지는 교회 사역들, '아, 이러다 과로사할지도 몰라!' 그들을 위해 긁어 댄 카드 내역서, 회생 불가능해 보이는 다크서클, 매일 같이 달고 사는 감기, 외로움에 뼈가 사무치는 기나긴 밤, 동생들로부터 받는 화사한 청접장, 혼자서도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강철 심장의 아줌마 근성만 다시 돌아올 뿐입니다.
마르다 놀이는 그만, 이제 마리아가 되자
일주일 내내 교회 사역을 하다보니 '대체 이러다 남자는 언제 만나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애도 좀 시키시지 왜 자꾸 일만 시키시는 거예요?", 불평이 머리 끝까지 차올랐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정신없게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지 말고 가만히 내 무릎에 앉을래? 나는 너와 놀고 싶단다.", "내가 너에게 일을 하라고 한 적이 없다. 그저 너와 시간을 보내며 함께 놀고 싶었던 것이란다." 마리아처럼 많은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보낸 뒤, 그 안에서 나오는 기쁨의 샘물로 일을 해야 하는 것이지, 그 준비가 되기 전에 일을 하는 것은 이렇게 힘들게 만듭니다.
동시에 눈을 뜨게 하시고 사랑에 빠지게 되다
하나님이 만드시는 연애 스토리는 각자의 개성과 장점이 다른 것처럼 내용도 제각각입니다. 친한 교회 누나가 여자로 보이기 시작해서 고백을 합니다. 그때 그 자매도 형제에게 '나도 너에게 관심이 생기기 시작 했어'라고 고백합니다. 거의 동시에 이성적 호감을 갖게 된 것입니다. 장점과 단점을 너무 잘 아는 그들은 변하지 않는 부분을 무리하게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다루시는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기도하던 리스트와 전혀 반대의 남자와 결혼하다
배우자 기도를 열 살부터 해 오던 자매가 하나님이 주신 사람이라는 형제와 만나 가까워졌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남자가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형제였지만, 일 년 후 어느 날 형제가 자매에게 이별을 선언합니다. 오 년 동안 이 자매는 형제가 자기 짝임을 깨닫게 해 달라고 계속 기도했지만 형제의 마음을 열리지 않습니다. 그를 좋아할 때보다도 자매는 더 힘든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항상 고민을 들어주고 친구처럼 지내던 형제가 고백을 하는데, 자매가 기도해온 조건과 전혀 맞지 않는 그런 형제입니다. 하지만 자매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결혼에 이릅니다. "살면 살수록 남편이 내가 좋아하는 모습을 많이 갖고 있는 것에 깜짝깜짝 놀란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자신의 조건 리스트가 너무 쓸데 없거나 자신도 잘 모르고 써 놓았던 조건들이었다고, 자기를 잘 아시는 하나님이 자신도 모르는 취향마저도 다 맞춰 주신 것 같다고 고백하며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꿈으로, 환경으로 말씀하신 하나님께 순종하다
한 교회에서 얼굴만 알던 형제와 자매가 있었는데, 찬양사역을 하던 이 형제에게 결혼을 위해 기도를 시작한 후 열심히 찬양하는 한 자매의 아름다운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수많은 기도 끝에 하나님이 주신 배필이라는 확신이 들어 자매에게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자매의 대답은 'No'입니다. 시큰둥한 반응에 '자매에게 꿈으로 말씀해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자매의 꿈에 그 형제가 등장하자 하나님의 뜻을 묻게 되었고, 주위의 목사님과 리더들을 통해 확신을 얻게 되어 사귀고 결혼에 이릅니다.
하나님은 SNS와 채팅도 사용하신다
자매는 한국에, 형제는 미국에 있었기에 페이스북과 메일로 서로를 알아갔습니다. 형제가 선교를 위해 잠깐 한국에 머물 수 있는 시간에 처음 만납니다. 많은 이메일과 채팅 때문에 편안함을 느꼈고, 하나님이 인도하신 만남임을 확신하고 결혼합니다. 많이 기도해 복 받고 그 형제가 맞다고 생각되면 적극적으로 시도해 보라. 여전히 고백할까, 말까를 재고 있다면 당신은 형제에 대한 확신이 전혀 없거나 아직도 결혼이 급하지 않은 것입니다.
로버트 멍어, 『거지인가 왕자인가?』, IVP book summary
마크 트웨인의 소설, 『왕자와 거지』는 왕과 거지로 살던 꼭 닮은 두 소년이 서로 자리를 바꾸어 살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자리에 오셨으며, 우리는 그분의 자리를 얻게 된다는 사실의 표지판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영광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영적으로 황폐하며 율법을 범한 죄인이며 하나님의 통치에 반항하는 반역자인 거지보다 못한 존재인 우리와 자리를 바꾸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자리를 취하시고,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담당하시며, 우리의 변덕스런 삶의 결과들을 맡아 주시고,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자리를 대신 취하시면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자리를 내어주시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항하여 싸웠던 사도 바울은 자기를 용서하시고 아들의 자리에 세워주셨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2,20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갈2,20은 현재 시제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필요한 것들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과거의 죄뿐만 아니라 현재의 죄에서도 구원해 주시며, 미래의 상황뿐만 아니라 당면한 문제에서도 구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최종 목적을 이루기까지 멈추지 않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삶을 살도록 도우시는데, 이를 이루기 위해 ‘자리를 바꾸지 않겠냐’고 제안하십니다. 우리 상한 마음속으로 들어와서 나를 통해 그리스도의 삶을 살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요15,5) 자리를 바꿔야 합니다.
자리바꿈은 두 방향으로 일어납니다. 첫 번째 단계는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내어드림과 양도, 헌신이며, 두 번째 단계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들여 내 안에 살아 계시도록 하는 신뢰와 하나님에 대한 의존입니다.
첫 번째 단계는 조금도 남김없이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천 년을 누워있어도 쓸모없는 진흙덩어리도 토기장이의 손에 들어가면 쓸모 있고 아름다운 그릇이 됩니다. 토기장이의 능한 손가락에 자신을 맡기면 토기장이의 의도대로 그릇이 빚어집니다.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빚어져 쓰임받기를 원한다면 전 존재를 하나님께 드리고 그분이 원하는 대로 맡겨드리면 됩니다.
자동차의 운전사는 한 사람이면 충분하며, 한 사람이 운전해야 안전합니다. 두 사람이 실랑이를 하거나 뒷자석에서 간섭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운전대로 주님이 맡으시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내 손을 운전대에서 놓고 편안히 쉬면서 그분을 신뢰하고 지시하시는 대로 따르면 됩니다.
중병에 걸린 한 젊은이가 의사에게 병의 증상을 말하지 않고 의사의 충고를 따르지 않는다면 치료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의사는 자기 문제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처방을 따르는 사람만 치료할 수 있습니다. 삶을 그리스도의 손에 맡기고 가장 위대한 의사이신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이 지시에 따라야 합니다.
‘여러 번 제 삶을 맡아 달라고 기도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삶을 맡길 때에는 그분이 우리를 받아들이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집이나 토지를 선물로 줄 때는 그 물건을 포장해서 줄 수는 없습니다. 대신 권리 증서를 양도합니다. 다음 날 찾아가서 선물을 받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으니 권리 증서를 다시 써달라고 한다면,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된다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우리 삼을 예수님께 맡기고는 정말 그분의 소유인지 확신이 없어 몇 번이고 다시 맡기곤 합니다. 삶을 그리스도께 드린 후에는 나의 삶이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 모든 것이 다 그분의 소유입니다.
이것이 청지기적 삶의 기초입니다. 청지기는 하나님의 것을 충성스럽게 관리할 뿐입니다. 우리의 소유와 결정, 대인 관계, 만남 등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렇듯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일이 변호된 삶의 첫 단계입니다.
변화된 삶의 두 번째 단계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실 수 있음을 믿는 수용의 단계입니다. 갈2,20 말씀을 “나는 하나님 아들의 신실하심에 의지해서 삽니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분량보다 믿음이 대상이 중요하며, 우리 믿음의 강도보다 변치 않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 있으며,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면서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도록 주님이 도우시도록 나 자신을 내어 드려야 합니다.
축구경기장에서 입장권을 공짜로 준다면 주고자한 순수한 의도를 가진 그 사람을 믿었기에 그것을 받습니다. 사랑한다는 남자의 구혼에 “진짜로 날 사랑해요?”라고 계속 물어본다면 남자는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위해 친히 자기 자신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세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믿고 받아들이고 반응할 때에만 이 사랑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 후에야 변화된 삶이 시작됩니다. blog.naver.com/forw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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