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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및 신앙 서적

하나님 한 분만을 위한 예배/ 복음만 자랑하라

by 은총가득 2021. 1. 18.

 

하나님 한 분만을 위한 예배

 

2장 예배는 거룩한 산 제사와 자기를 부인하는 순종으로 빚어진다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을 부르실 때, 그것은 와서 죽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 디트리히 본회퍼

 

예배의 중심인 희생

'희생'(sacrifice)이란 단어는 '구제비를 내거나', '버스를 탈 때 연로하신 분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 정도를 뜻하는 것으로 전락해 버렸으며, 우리의 관심 밖의 말이 되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희생을 원하시는데 우리는 희생을 싫어합니다. 예배의 중심에는 희생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또 희생은 '순종'이라는 단어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여러 모습의 희생 제사를 설명하고 있는데, 주요 절기에는 수양, 어린 양, 염소, 비둘기, 곡식, 포도주 등으로 희생 제사를 드립니다. 이런 모든 절기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개념이 '희생'과 '순종'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

역대하 7장에는 그 동안 옮겨다니던 제단을 한 곳에 모시기 위해 성전을 건축합니다. 성전의 모든 설계는 바로 하나님이 주관하셨고, 성전에서 드려지는 예배 또한 아무 때나 우리 마음대로가 아닌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대로 드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개인적인 선택사항이라고 믿지만, 우리에게는 예배를 드리는 방식에 대한 최종 결정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예배를 좋아하시기 때문에 바르게 예배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 즉 우리의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를 위해 치르는 대가

역대하 7장은 솔로몬이 봉헌기도를 드린 직후 상황부터 시작됩니다. 엄청난 규모의 성전 건축이 끝났습니다. 15만3천6백 명의 노동 인력이 동원됐으며, 타이타닉 호를 바다에 가라앉힐 만한 무게의 금이 성전 내부 장식에 사용되었습니다. 봉헌식에는 엄청난 수의 소와 양을 희생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 희생 제물은 건축에 참여한 사람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한 바베큐용으로 잡은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불에 타서 없어졌으니 모두 허비된 것입니다. 솔로몬이 드린 제사는 예배가 모든 것을 드릴 만한 가치 있는 것임을 잘 보여줍니다.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삼하24,24) 예배는 무엇인가 대가를 치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이 치른 대가는 상당한 재정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희생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에는 희생 제사보다 더 중요한 어떤 것을 드려야 하는데, 우리의 삶을 희생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희생의 자리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

솔로몬이 드린 예배로 돌아가 보면, 성전 안은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에 백성들은 경배하며, 제사장들은 제사의 직무조차 제대로 거행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희생의 자리에 나타났습니다. 언약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3개월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는 오벧에돔과 그의 집을 축복하셨습니다.(삼하6,12-15) 오벧에돔의 집에서 예루살렘으로 언약궤를 옮길 때,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처음에는 여섯 걸음마다 희생 제사를 드리는 광경이 펼쳐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 느낀 장엄함과 신기함은 점점 사라졌을 것입니다. 오래 걸리는 시간 때문에 지겨워졌을 것이며, 제물의 비용 문제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다우시은 이 행차가 끝나는 순간까지 마지막으로 엄청난 희생 제사를 드리며, 여호와 앞에서 그의 세마포 옷이 흘러내릴 정도로 춤을 추었습니다. 이 법궤 행차는 이토록 엄청난 희생이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거룩한 산 제사

예수님께서 죄에 대해 '단번에'(once for all) 죽으셨기 때문에 더 이상 희생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구약의 짐승을 드리는 제사가 상징하던 궁극적인 희생 제사이며, 그 어느 것도 예수님의 희생 제사보다 더 나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희생 제사가 거기서 끝난 것은 아닙니다. 신약성경에는 찬미의 희생 제사를 드리라고 말하며, 로마서12장1절에는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허락하신 구원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의 사랑과 경배를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아무 것도 남김없이 하나님께 전부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급진적인 순종

상황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주님을 전심으로 섬겨야 합니다. 한때 '급진적'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급진적인 생활 방식, 급진적인 기독교, 급진적인 예배 등)했는데, 예수님을 더 잘 따르려는 진지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예배가 삶의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종의 마음으로 순종하기

핀란드 집회에서 깃발을 흔들며 캠프장 주위를 도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를 멸시햇으나,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 부흥회를 중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헌신된 기도의 용사였으며, 종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을 만난 후 저자는 집회 기간 중에 강대상에 올라와 기도 요청한 몇몇 사람에게만 기도해 주었으나, 저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이나 기도를 요청하는 모든 사람과 만나 기도해 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섬기는 종의 마음으로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의 의무나 피요, 책임까지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내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었을 때, 하나님은 나 자신을 잊을 만큼 급진적으로 그분께 순종하고 헌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예수님은 산상 설교를 통해 누가 빰을 때리거든 다른 빰도 돌려대며,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동행해 주며,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라고 하십니다.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살라', 급진적이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라고 교훈하셨습니다. 이런 삶이 바로 예배입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고 말씀하셨습니다. '순종'을 말하면 폭군 같은 선생님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순종은 배워서 익숙해져야 할 주제이며, 성경이 말하는 원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될 때 진정한 자유를 찾게 되고, 진정한 정체성을 발견하게 되며,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는 순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바로 순종이다."(찰스 스윈돌)

 

사랑이 흘러넘쳐야 순종할 수 있다

저자가 취하는 작은 순종의 방법이 있는데, 누구와 대화하고 누구와 기도할지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잠시 종이 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랫동안 누려보지 못한 자유와 기쁨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축복은 섬김을 통해서만 오는 축복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으로서 하는 우리의 행동에 '희생'이라는 딱지를 붙이려고 하는데, 순종은 "그리스도인의 희생이란 주님을 향한 사랑이 흘러넘쳐서 나오는 것으로, 우리의 전 생애 동안 흘러나와야 할 당연한 행위"(오스왈드 챔버스)입니다.

 

급진적인 삶의 변화

급진적인 순종의 삶은 자신의 관심사를 제쳐놓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미루고서라도 먼저 다른 사람들을 섬기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며, 그렇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야구에서 1루에도 진출하지 못해 쩔쩔매는 사람처럼 출발도 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순종하면 캄캄한 미래만 남은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9,24) 목숨을 구원하리라는 말씀은 찬란한 영광 안에 살아가는 인생이 되리라는 의미입니다.

 

기쁨의 희생을 드린 삭개오

기쁨으로 드리는 희생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삭개오의 이야기

 

급진적인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

삭개오의 구원은 재산의 많은 부분을 나누겠다고 선언했을 때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무에서 내려와 저녁식사를 준비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미 임했습니다. 얼마나 큰 용서를 받았는지 알고 나면 희생은 기쁜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드리는 순종의 제산느 의무감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크게 넘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순종의 삶이 곧 예배이다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을 부르실 때, 그것은 와서 죽으라고 하시는 것이다"(디트리히 본회퍼) "세상아, 나의 마음을 나누지 마라.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기를 원한다"(찰스 웨슬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런 자리(희생의 자리)로 부르신 것은 무언가를 더 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무엇 하나라도 더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순종하는 것이 예수님의 양식이며, 예수님께 생명을 공급해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명령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순종이란 이처럼 간단합니다.

 

3장 예배는 우리의 마음과 입술과 온몸과 삶에서 나온다

참된 예배란, 인격적으로 그리고 어찌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과 깊은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 A.W. 토저

 

다채로운 표현의 예배 언어

예배는 마치 연애를 하는 것과 같은데, 사랑받고 있음을 사랑의 말과 선물, 희생적인 행동 등으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랑받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표현할 수는 없지만 감정적으로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여러 유형이 있는 것처럼 예배에도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입술에서 나오는 예배, 삶에서 나오는 예배, 마음에서 나오는 예배가 있습니다. 각 영역에는 저마다 드리는 예배의 코드와 형식, 허용 범위가 있는데, 이것들이 예배의 언어가 됩니다.

 

사랑의 대상이 바뀌는 역사

"참된 예배란 인격적으로, 어쩔 수 없을 만큼 하나님과 깊은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 그 사랑을 다른 대상에게 옮긴다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A.W.토저는 말합니다. 주님을 만나면 갑자기 변화되는데, 통렬한 회개와 친밀한 예배를 통해 열렬하게 그 감정들을 표현합니다. 수련회의 마지막 예배 시간에 억지로 참석한 불량한 청소년들이 '사랑의 감정을 다른 대상에게 옮기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사기와 약물, 칼, 환각제 등을 설교자에게 내놓으며 이런 것들을 버리기로 결심합니다. '영원'을 체험하자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을 사소한 일에 낭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같이 예배란 귀에 들리거나 해석할 수 없지만 직접적이고 간절한 마음의 언어입니다.

사랑의 대상이 주님께로 바뀌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회개', 즉 '되돌아오다', '생각과 행동을 바꾼다'입니다. "우리는 예배하는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하든지 다른 신들을 예배하게 됩니다"(A.W.토저) 그리고 "우상숭배란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은 생각을 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은 생각을 품는 것, 그 자체가 우상 숭배입니다.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는 생각은 그분의 가치를 낮추는 것이며, 진정한 하나님이 아닌 어떤 것을 하나님 자리에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우상에게 돌이키고,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개념들을 추방하는 것입니다.

 

몸의 언어로 표현하라

히브리어에서 예배를 묘사하는 단어들은 거의 모두 어떤 신체적인 자세를 표현합니다. '송축하다'는 "그 앞에서 무릎을 꿇다"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문들아 머리를 들라", "내 손을 들리이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무릎을 꿇자"라는 사랑과 찬양, 감사의 마음을 신체적인 행위로 표현합니다. 예배를 표현하면서 몸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웃고 춤추고 노래하라

구약시대에는 춤이 중요한 예배 행위였지만, 지금 나는 춤을 잘 못추고 멋지지도 않기 때문에 아예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갈등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의도로 쇼를 연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렇다고 예배 시간 내내 무표정하거나 침울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불같은 열정에 사로잡혀 있는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말보다 우리의 행동이 훨씬 더 많은 것을 표현해 줍니다.(표정으로 전달과 말로 전달하는 비율) 히브리 문화에서는 영혼과 육체가 서로의모습을 비추는 거울이기에 예배의 체스처는 우리 마음의 모습을 비추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가운데 있다면 몸으로도 표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는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웃고 춤추고 노래 부릅니다.

 

마음과 입술과 온몸으로!

예배의 언어는 예배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단어뿐 아니라 우리의 온 몸을 다 상요합니다. 성경에는 손과 마음이 동시에 언급되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예배를 드릴 때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만져주시면, 우리는 몸을 통해 예배와 순종의 행동으로 표현하게 됩니다. 미갈은 하나님 앞에서 옷이 거의 다 흘러내릴 정도로 자유럽게 춤을 추었던 다윗의 행동을 불쾌히 여겼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께 헌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각오가 서 있었습니다. 우리의 감정을 하나님 앞에 표현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하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교인들에게 잔소리하지 않으면서 교인들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격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의 예배 언어

성경에서 말하는 예배를 연구한다면, 스포츠 경기 중계를 시청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놀라운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용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굽혀 절한다'는 '샤카(Shacah)'. '찬양하다', '자랑하다', '축하하다'라는 '할렐(Hallel)' - '주를 찬양하라'는 뜻의 '할렐루야(Hallelujah)'의 어근입니다. '감사하다', '손을 상요하라', '경배하다', '고백하다'라는 의미의 '야다(Yadah)'. '주님께 노래한다'는 '테힐라(Tehillah)'와 '악기 반주에 맞춰 노래하다'는 '자마르(Zamar)'. '기뻐하다', '즐거워하다'라는 뜻의 '싸마흐(Samach)'.

신약성서에서 나오는 단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입 맞추기 위해 나아오다'라는 '프로스쿠네오(Proskuneo)'. '고맙습니다'라는 뜻의 '유카리스토(Eucharisto)'와 '유카리스티아(Eucharist)', 성만찬 예배를 가리키는 '유카리스트(Eucharist)'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고 날 위해 돌아가셨다면 내가 그분을 위해 치르는 어떤 희생도 결코 크다고 할 수 없습니다."(C.T.Studd)

 

친밀한 예배를 위한 사랑과 헌신

예배의 중심은 친밀함입니다. 요한복음 12장에는 죄인의 삶을 살아온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주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인은 아주 비싼 향유 한 병(1년 연봉에 해당하는 가치)을 예수님께 부어드립니다. 그 헌금을 사용할 만한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마리아에게는 그 어떤 가치보다도 예수님이 더 소중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돈과 재능, 시간, 에너지 등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예수님께 부어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9장 예배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위한 것이다

우리의 예배는 우리가 예배 드릴 오직 한 분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 그래함 켄드릭

 

현실을 직시하라

교회는 지금 쇠퇴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역들도 교회를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아두지 못합니다. 급진적인 기독교 신앙을 가르친 중심지의 설교도 회중친화적으로 변해가고 있으나, 출석 교인은 점점 줄어듭니다. 복음주의적 교회나 은사주의 교회, 세상 지향적인 교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젊은이들이 줄어 드는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여호수아 시대와 비슷하다고 해서 여호수아 세대라고도 하고, 두려움에서 위대한 용사로 일어난 기드온과 젊은이들을 비교하며 기드온 세대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출산하지 못하는 교회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수치심을 안고 성전으로 가서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쏟아냈습니다. 교회는 한나처럼 '자녀를 출산하지 못하는' 교회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교회가 재정이 건실했기 때문에 쇠퇴 현상을 돈으로 해결하고 무마해 왔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진정한 성공은 그 교회가 출생시켜서 양육하는 영적 자녀들의 숫자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나처럼 부끄러운 모습을 직시하고,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한나는 아들을 주시면아이를 자신이 소유하거나 통제하거나, 자기 곁에 두지 않겠다고 서원할 만큼 필사적으로 간구했습니다. 그와 같이 이 세대를 우리의 소유가 아닌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올바른 교회 교육

한나는 서원했던 것과 같이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렸으며, 사무엘은 성전에서 자랐습니다. 사무엘은 한나의 헌신과 희생으로 특별하고 유능한 인물로 자랐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자녀들은 교회에서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의 감독 아래 하나님을 섬겼는데, 비록 어리석은 엘리의 지도였지만 엘리에게 순종하며 존경하는 법을 배우면서 자랐습니다. 오늘날 개인 중심의 포스트모던 시대에 '순종'과 '존경'이라는 두 속성을 우리 젊은이들에게도 가르쳐야 합니다.

 

희생 제사의 원리

사무엘이 성전 안에서 사는 것은 순탄한 일이 아닙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죄를 범했는데, 소녀들과 동침한 죄도 정말 나쁜 일이지만 제물로 사용할 고기를 도둑질하는 큰 죄를 범했습니다. 제물을 제단에 올려 태우기 전에 고기를 물에 삶아 모든 피와 기름기를 확실히 제거했습니다. 이때 제사장들이나 그들의 종들은 세 갈래가 달린 쇠스랑을 끓는 물 속에 한 번 넣어 걸려 나오는 것을 제사장의 것으로 취했습니다. 제사장들은 따로 봉급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생활을 위한 제도적 장치입니다. 그런데 엘리의 아들들은 제물로 드릴 고기가 아직 날 것일 때 그들이 원하는 부위를 마음대로 가져다가 그들의 입맛에 맞게 구워 먹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로 드리는 희생 제사의 제물을 그들 마음대로 다루며 자기들에게 좋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섬기고,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신 분께 우리의 전부를 돌려드리는 일입니다. 예배의 핵심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교회를 옮길 때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어리석은 엘리 제사장 밑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했으며, 혐오스러울 만큼 부패하고 썩은 제도권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때 사무엘은 여전히 그곳에 머물렀으며, 충성스럽고 거룩하게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사무엘상 3장에서,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교회에서 성장했지만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음성 듣는 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며, 자신의 양은 자신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시는데도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사무엘은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3,10)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엘리의 아들들이 죽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회사의 상관에게 찾아가 그의 아들들이 곧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상황과 같이 곤란한 상황이지만, 사무엘은 충성을 다합니다.

 

이 세대를 위한 말씀

젊은이들이 교회 안에 뿌리를 내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히 들어야 합니다. 그 메시지가 듣기 거북한 말일 수 있으며, 급진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할 수도 있지만, 새로운 사무엘 세대가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철폐해야 할 목록'을 만들었는데, 하나님은 그것에 관심이 없으시고 나의 개인적인 잘못에 거 많은 관심을 가지시는 것 같았습니다.

 

사무엘 세대에게 주는 말

사무엘이 위대한 인물로 높임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무엘이 평생 했떤 일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는 일입니다. 아마 베들레헴의 어린 목동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일은 사무엘에게 가장 큰 시험일 수도 있었습니다. 어리고 천한 목동인 다윗보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한 자신을 왕으로 세우려는 야망이 있었다면 불행한 일들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겸손했습니다. 저자의 기도 제목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아닌 일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주제 넘게 나서는 죄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사무엘의 미덕은 겸손함이다

단지 섬기기 위해 교회에 나오신 은퇴 목사님과 같이 자신의 영광보다는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하는 겸손한 사무엘이 되고 싶습니다.

 


김상현, 복음만 자랑하라,

 

chapter06 한국 교회여, 전도자의 야성을 회복하라

 

나는 전장에 선 사령관처럼 복음 전도 현장에 서서 성도들을 지휘하는 복음 전도의 야전 사령관이 되고 싶다. 진시황처럼 성을 쌓고 무덤을 만드는 인생이 아니라 칭기스칸처럼 죽는 날까지 달려가는 인생이 되고 싶다. 단지 내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보며 살고 싶다. "주님, 이 땅에 속히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임하게 하소서."

 

한국 교회여, 군대 교회로 거듭나라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입니다. 이왕이면 좋은 목회자가 되고 좋은 교회를 세워 가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목회자로 좋은 교회를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공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 한국 교회의 현실

큰 도시의 교회를 탐방하며 그 교회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현재의 모습 등 자료를 수집한 곳이 800여 곳이나 되었습니다. 800여 교회를 탐방하고 자료를 정리한 다음에 '교인들을 이렇게 훈련하면 되겠군', '이런 교회를 되지 말아야겠어'라는 나름의 결론은 내렸습니다. 그 내용은 '신생아실'과 같은 교회나 '유치원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는 '군대 교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신생아실' 교회는 10년이 지나 자라야 하는 교회와 성도들이지만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옹알이 수준의 신생아들 뿐입니다. 10년이 지나도록 젖병을 물려 주고 기저귀를 갈아 주어야 하는데, 이런 자녀를 둔 부모는 가슴이 무너질 것입니다. 두 번째는 '유치원 교회'입니다. 밥도 제 손으로 먹고, 똥 오줌을 가립니다. 그런데 아이들이라 그런지 삐치는 일이 많고 별 거 아닌 일로 싸웁니다. 신생아실 교회나 유치원 교회보다 조금 나은 교회가 '초등학교 교회'인데, 반장과 부반장을 세우고 몇 가지 일을 스스로 합니다. ',고등학교 교회''대학생 교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교회로는 성이 차지 않았습니다.

 

- 하나님이 기뻐하는 '군대 교회'

계속 성장하며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교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들의 공통점은 '군대 교회'입니다. 모든 병사들이 일사분란하게 한 목적을 가지고 사역을 감당합니다. 오직 승리를 통해 나라를 지키고 땅을 화장시키는 꿈을 꿉니다. 모든 군인들은 전투가 벌어지면 전투의 현장에서 승리를 위해 생명을 바칩니다. 즉 한 사람 한 사람이 전투에 나가 싸울 수 있는 군인 정신을 가진 교회가 바로 군대교회입니다.

그렇다면 군대 교회가 되기 위해 교인들이 감당할 일은 무엇입니까? '군인'이 되는 것입니다. 전방에서 근무하는 군인도 있지만, 공병, 취사병, 군견병 등 역할이 다릅니다. 총을 들고 싸우지는 않지만 자기 자리에서 충분히 역할을 감당할 때 군대가 제대로 돌아갑니다.

 

- 환자들이 많은 한국 교회

군 생활 내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병사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한 사람을 위해 뒤치다꺼리를 해야 합니다. 인력과 재정 낭비는 둘째치고라도 군대라는 큰 조직의 사기에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악영향을 줍니다.(환자에 대한 이해를 이렇게 하고 있네요. 후진국 수준의 이해입니다) 한국 교회는 이런 성도가 많은데, 어떤 성도는 '상처 받았어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신앙생활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평생 상처만 받다가 가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전장에 나가 힘써 싸워도 모자란 판에 허구한 날 야전병원에 누워 시간만 허비하고 있는 환자교회와 같습니다. 병원에 입원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빨리 치료 받고 회복해서 전투 현장에 나가면 됩니다. 교회의 사역 중 성도들의 정신 건강과 영적 건강을 살피고 치유하는 치유 사역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1년 내내 상담과 치유 사역자에게만 붙어 있는 교인들이 많아 문제입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강한 군대 같은 교회를 목회 초기부터 꿈꿨습니다. 총알이 날아와 내 몸 어딘가에 박혀도 고지를 사수하기 위해 끝까지 싸운느 용감한 군인처럼 한국 교회 성도들도 영적으로 무장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전쟁에 나선 군인은 두려움이 없다

 

영적 전쟁에서 '깨어 근신할' 때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원하십니다.

 

- 군인은 무조건 승리해야 한다

전쟁의 기본 원리, 즉 목표는 '승리'입니다. 올림픽은 참여하는데 의미가 있지만, 전쟁은 참여가 아닌 승리가 목표입니다. 무조건 이겨야 합니다. 올림픽은 4년 후를 기약하고 다시 도전할 수 있지만, 전쟁은 한 번 지면 끝입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며, 전쟁에 패하면 나와 가족, 대대손손 노예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노예로 사는 것은 정말 치욕스런 일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이 아니라 가문 전체를 부르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을 부르시고 요셉에서 완성하셨습니다. 이새와 다윗, 솔로몬, 르호보암을 통해 왕의 가정을 만드셨습니다. 이와 같이 나의 승리를 통해 다음 세대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복을 영원히 받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복음 전파를 통해 그들의 가문이 살아나게 됩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는 순간, ', 이제 저 집안이 살았구나', 감사합니다. 성도가 상처 받았다고 하면, 시험 들었다고 하면 한걸음에 달려갑니다. 가문이 무너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교회로 옮기는 건 용납해도 믿지 않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 한 사람 안 믿는 게 문제가 아니라 온 집안이 영적 노예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전쟁은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복음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실을 맺을 때까지 반드시 해야 합니다.

 

- 가장 좋은 승리의 비책은 '공격'

승리의 가장 좋은 비책은 '공격'입니다. 교회는 요새가 아니라 최전방 공격기지가 되어야 합니다. 언제나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역사에서 세계의 지도를 바꾼 이들은 모두 야전 사령관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이나 징기즈칸, 알렉산더 등 세계사를 움직인 사람들은 모두 말안장에 앉아 전쟁을 지휘했습니다. 말 타고 나가서 공격하는 사람만이 세계를 정복합니다. 교회를 지키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루살렘과 유대, 사마리아, 땅 끝까지 나가서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찾아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야 합니다.(28,19) 자진해서도 교회에 오지만, 자진해서 올 정도라면 먼저 찾아가 권했다면 더 일찍 와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 것입니다.

 

-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공격하기 위해서는 '집중'해야 합니다. 큰 나무를 쓰러뜨리는 방법은 열 번 찍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구난방으로 열 번 찍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열 번 찍어야 나무가 쓰러집니다. 전도하면서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보다 한 명씩 한 명씩 사랑과 관심을 주어야 합니다. 전도자가 한 사람에게만 관심과 사랑을 주는 것이 에너지를 집중하기 더 쉽습니다. 나무가 넘어질 때까지 도끼질을 하듯 예수 믿을 때까지 전도합니다. 안 믿는 남편이 잇다면 "주일예배 다녀와서 집사님이 은혜 받은 설교 내용을 꼭 남편에게 이야기해 주세요"라고 말합니다. 남편에게 전하기 위해서라도 아내는 설교를 열심히 듣게 되고, 은혜를 전하니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몇 달만 하면 남편은 답답해서라도 교회에 한 번은 오게 됩니다. 포크레인만 둑을 허무는 것이 아니라 개미도 둑을 허물 수 있습니다. 계곡물을 받아 채우는 물탱크의 입구가 매우 작아서, '이래서야 저 큰 물탱크를 언제 다 채울 수 있을까' 걱정했습니다. 내 생각에는 100년이 지나도 차지 않을 것 같던 물탱크가 불과 며칠 만에 가득 찼습니다. 아무리 적은 물이라도 꾸준히 들어가면 물탱크를 채웁니다. 아무리 돌같이 굳센 심령일지라도 하고 또 하면 언젠가는 결실을 맺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승리를 위해 기동성 있게 사명을 감당하라

 

지금 한국 교회는 고인 물처럼 정체되어 있습니다. 나쁜 상품, 짝퉁 상품을 팔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팔도 각지를 돌아다니는데도 우리는 진짜 상품, 그것도 명품을 창고에 쌓아 놓고만 있습니다. 피카소의 명작이 창고에 파묻혀 있는 동안 모조품이 유명 전시장에 버젓이 걸려 잇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진품인 줄 알고 감탄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진품이 별로 없는 가짜 건강식품을 먹습니다.

 

- '기동성' 있게 복음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하라

타지키스탄에 단기선교를 갔는데, 한나절 동안 물을 마시지 못하자 진흙탕 물을 스스럼 없이 마셨습니다. 비싼 생수만 마시던 사람들도 하루 동안 물을 마시지 못하자 흙탕물을 들이킵니다. 사람들이 이단에 가는 이유는 커다란 물탱크를 가진 우리가 생수를 공급하지 못했기 때문에 흙탕물이라도 마시러 가는 것입니다. 나쁜 것을 먼저 받아들이기 전에 우리가 좋은 것을 먼저 전해 주어야 합니다. 전쟁에서 고지를 점령할 때 빨리 가야 차지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잠에 빠져 있는 한국 교회가 이제는 깨어나 기동성을 발휘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복음 전하기 좋은 시대가 없습니다. 복음 전한다고 누가 감옥에 가두길 하는가, 복음을 전한다고 매를 맞는가, 복음 전한다고 해서 사자 굴에 넣기를 하는가, 복음 전하기 가장 좋은 시대가 바로 지금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는 더 부지런해야 합니다. 새벽에 나가서 전도할 영혼을 기다리고, 저녁까지 나가서 전도할 영혼을 데려와야 합니다. 먼저 갈급한 심령에게 예수의 생명수를 부어 주어야 합니다.

 

- 알아야 이긴다, 정보를 수집하라

전쟁에서는 적을 공격하기 전에 미리 알아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정보전을 펼쳐 정보를 수집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를 살펴보고 우리 지역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술집과 유흥가, 점집이 널려 있는데, 세심하게 조사해서 영적 지도를 그려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부광교회 옆에도 무당집이 10개 가까이 있었는데, 교인들과 합심하여 기도했더니 지금은 몇 개가 없어졌습니다. 어릴 적 광산촌인 고향에는 술집이 200여 개나 되었습. "이 술집들이 없어지고 선교센터가 되게 해주십시오." 지금은 광산업이 사양 산업이어서 술집은 물론 동네가 폐허가 되었지만, 곧 선교센터가 들어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언제나 복음 전도의 야전 사령관이고 싶다

 

우리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게 전도해야 합니다. '기습 전도'를 해야 합니다. 맑은 날 뿐만 아니라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뙤약볕에도 전도를 나갑니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도 전도를 해?" 하면서 문을 열어 주기도 하고, 뙤약볕에서 전도지를 나눠주는 것이 안쓰러워 전도지를 받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전혀 생각지 않던 때, 예상치 못하던 곳에서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저절로 나타납니다. 느긋하게 앉아서 오기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찾아 나서야 합니다. 모든 직분자들이 전도해야 하고, 목사도 전도법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전도해야 합니다. 전장에서 선 야전사령관처럼 복음 전도 현장에 서서 성도들을 지휘하는 복음 전도의 야전 사령관이 되고 싶습니다.

작성자 forwill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