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버리고 길을 묻다
By 맥스 루케이도
제1장. 삶의 짐, 그 무겁고 부담스러운
짐 없이 가볍게 여행 다니는 방법을 나는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는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죄로 만든 여행 가방. 불만 보따리, 한 쪽 어깨엔 권태의 더플백을 메고 다른 쪽엔 슬픔가방을 걸쳤습니다. 등에도 의심의 배낭과 외로움의 침낭, 두려움의 트렁크 따위를 둘러맸습니다. 순식간에 공항에서 화물을 운반하는 인부보다 더 많은 짐을 짊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하루를 마감할 무렵이면 파김치 신세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마 11:28)
제2장. 삶의 중심잡기
사람들은 하나님의 모습을 요술 램프 속의 요정이나 인자한 할아버지, 바쁜 아버지 따위로 바꿔놓기 일쑵니다.
- 요술 램프 속의 요정
편리하고 가려운 데를 척척 긁어주는 신입니다. 차를 몰고 나가면 주차할 공간을 찾아주고, 데이트를 주선해줍니다. 축구 경기를 하면 슛이 들어가게 해줄 수도 있고 노골이 되게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램프를 문질러서 요정을 불러내기만 하면 만사 형통입니다. 할 일을 다 마친 뒤에는 다시 램프 속으로 들어가버리니 얼마나 편리가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 인자한 할아버지
한없이 인자하고, 비할 데 없이 지혜롭고, 말할 수 없이 친절합니다. 하지만 너무, 너무, 너무 늙어버린 신입니다. 깨어 있기만 하면 정말 대단한 능력을 발휘할 테지만, 정작 필요할 때면 십중팔구 낮잠에 빠져 있습니다.
- 바쁜 아버지
월요일 아침에 출근해서 토요일 저녁에나 돌아오는 신입니다. 언제나 장거리 여행과 사업 관련 모임에 묻혀 삽니다. 하지만 주일이 돌아오면 말쑥하게 차려 입고 신령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물론 월요일에는 우리를 버려두고 다시 떠나겠죠. 우리가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 하나님이 분주한 아버지 같은 신이라면 우리의 문제를 들어줄 시간이 없을 게 분명합니다.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존재라면 너무 허약해서 우리 짐을 대신 들어줄 수 없습니다. 요술 램프 속의 요정이라면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위대한 존재가 되는 셈입니다. 우리가 시키는 대로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꼴이니 말입니다. ★
요술 램프 속의 요정이든, 인자한 할아버지든, 분주한 아버지든 모두들 겉으로는 그럴 듯해 보이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거의 없는 신입니다.
다윗은 ‘야훼’란 이름을 내어놓습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유대인이 아닌 우리들의 귀에는 다소 생경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야훼’란 다윗에겐 더할 나위 없이 선명하게 다가오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당시 하나님을 통칭하던 엘 샤다이(EL Shaddai: 전능하신 하나님)라든가, 엘 엘리온(El Elyon,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엘 올람(El Olam, 영원하신 하나님) 따위의 호칭을 다 제쳐두고 야훼란 이름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어떤 이름으로 표현할지는 완전히 다윗의 재량에 속하는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모든 호칭을 면밀하게 검토한 뒤에 ‘야훼’를 쓰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야훼입니까? 야훼는 하나님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부를 때 아무개 아빠, 아무개 엄마, 의사 선생, 학생 따위로 부를 수 있습니다. 모두가 상대를 묘사하는 용어들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게 상대의 이름은 아닙니다. 내 이름을 부르고 싶다면, ‘맥스(Max)'라고 해야 합니다.
상대의 이름을 부를 작정이라면, 가능한 한 정확한 성명을 찾아 호칭하는 게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이름으로 호칭하고 싶으면 ‘야훼’라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만큼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갖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처음으로 배워 알았던 이는 모세였습니다. 가시덤불에서 환한 빛이 나오는 장면을 목격하고 삶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던 당시, 모세는 여든 살의 늙은 목자로서 양떼를 돌보던 처지였습니다. 다윗이 태어나기 약 700년 전 일입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훗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셨습니다.
★“나는 야훼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El Shaddai)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야훼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출 6:2~3).★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너무 거룩해서 차마 인간의 입에 올릴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야훼’라는 이름을 부를 일이 있을 때마다 주님을 뜻하는 ‘아도나이(Adonai)'라는 말로 대신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해야 할 일이 생기면 먼저 목욕을 했으며, 글을 쓴 뒤에는 펜을 분질러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훼’가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모세 역시 한 번도 그 뜻을 묻지 않았습니다. 아마 학자들 가운데는 ‘모세가 야훼가 무슨 뜻인지 물어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생각하는 이가 많을지도 모릅니다.
야훼라는 이름은 ‘나는 존재한다’와 ‘존재하게 하다’라는 의미를 갖는 호칭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존재하는 분이며 동시에 존재하게 하는 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호하게 “나는 ~ 이다”라고만 말씀하고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묻고 싶어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 대답은 이것입니다. “나는 ~ 이다.”
하나님께서는 설명하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일 뿐입니다.
하나님 야훼는 변함없는 분이며, 자존하는 분이며, 제한받지 않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육체가 아니므로 육체에 제한받으실 일이 없습니다. 캄보디아에 계시면서 동시에 미국에서 활동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라고 자문하고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139:7-8)라고 자답합니다.
우리에겐 야훼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그런 하나님을 품고 있노라고. 그분이 우리의 목자시라고.
제3장. 내 식대로 해보렵니다.
인간은 누구나 무엇이든 자기 뜻대로 하고 싶어합니다. “쉬운 길이 있다고요? 보편 다탕한 길이 있다고요? 가장 좋은 길이 있다고요? 하나님의 길을 알려 주겠다고요? 놔두십시오. 내 길은 내가 알아서 갑니다. ”
성경은 인간에게 이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6)
양이 고집 센 동물이라고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짐승들 가운데 스스로 살아갈 능력이 가장 모자라는 녀석이 바로 양입니다.
양은 머리가 나쁩니다. 양 조련사를 만나보신 적이 있습니까? 양을 데리고 마술을 부리는 걸 보신 적이 있나요? 양에게 구르는 재주를 가르친 이가 있다는 얘길 들어보셨습니까? 그러기에는 녀석들의 머리가 너무 아둔하기 때문입니다.
양에겐 방어능력이 터무니없이 모자랍니다. 송곳니도 없고 날카로운 발톱도 없습니다. 물어뜯을 줄도 모르고 빨리 달리는 재주도 없습니다. 마스코드로 양을 내세우는 팀을 하나도 볼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라이온스(lions)니 불스(bulls)니 타이거즈(tigers)니 하는 얘기는 들었어도 램즈(lambs)라는 건 들어본 적이 없죠? 앞으로도 치어 리더들이 이런 구호를 외치는 걸 들어보기는 좀처럼 어려울 겁니다.
“야, 야, 야! 우리는 양!
누구든지 덤벼라, 우리는 양!
무적의 양! 승리의 양!“
게다가 양은 지저분합니다. 고양이는 자기 몸을 정성스럽게 닦습니다. 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들이 물통에 들어가서 퍼덕거리며 몸을 씻는 장면이라든가 곰이 강물에 몸을 닦는 모습을 본적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양은 어떻습니까? 몸이 더러워져도 그냥 그대로 뒹굽니다.
다윗은 양보다 더 훌륭한 비유를 생각해낼 능력이 없었던 것일까요? 분명 그렇지는 않았을 겁니다.
시편 23편을 이렇게 시작했더라면 어땠을까요?
“여호와는 나의 사령관이요, 나는 그의 용사라.”써놓고 보니 훨씬 좋아보이는군요. 용사라면 제복에 무장을 갖추었을 테고, 어쩌면 훈장까지 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이것도 괜찮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영감이요, 나는 그의 가수라.”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성가대원입니다. 정말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이런 것도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왕이요, 나는 그의 대사라.”하나님을 대변하는 것과 견줄만한 일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대사가 입을 열면 모두들 하던 일을 멈춥니다. 하나님의 가수가 노래를 하면 모두 귀를 기울입니다. 용사가 지나가면 다들 갈채를 보냅니다.
★ 하지만, 하나님의 양이 나타난다 한들 누가 신경을 쓰겠습니까? 하나님의 양이 노래하고, 말하고, 움직이는 데 주의를 기울이는 이가 있을까요? 있다면 딱 한명뿐일 겁니다. 바로 목자입니다. 다윗은 바로 그 점에 주목했습니다. ★
하나님은 용사요, 가수요, 대사였던 다윗은 주님을 단번에 잘 드러낼 수 있는 실례가 없을까 찾다가 자신이 목자로 일하던 시절 생각이 났습니다. 밤낮으로 얼마나 깊은 관심을 쏟아가며 양들을 보살폈었는지 떠올랐습니다. 양 무리 틈에서 잠을 자면서까지 그들을 지켰던 기억이 생생했습니다.
자기가 양들을 어떻게 돌봤는지를 더듬어보던 다윗은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살피는 방식임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는 기쁨에 넘쳐 소리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이 말을 한꺼풀 벗겨보면 다윗의 자랑스러운 고백이 숨어 있습니다. “나는 그의 양이라.”
제 4장. 욕구의 감옥
모두 무언가를 원하고 있습니다. 더 큰 것, 더 아름다운 것, 더 빠른 것, 더 날씬한 것을 원합니다. 한결같이 무언가를 원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많은 걸 바라는게 아닙니다. 원하는 것이라곤 그저 새로운 직장뿐입니다. 새 차 하나뿐입니다. 새 집 하나뿐입니다. 새로운 배우자를 만나는 것, 그것 하나뿐입니다. 수십 가지를 기대하는게 아닙니다. 단 하나뿐입니다. 원하는 그 ‘하나’를 갖게 되면 행복해질 것입니다. 분명 행복해지겠죠. 그리고 그 ‘하나’를 손에 넣은 순간 감옥을 나갈 겁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될까요? 새로 산 자동차에서 나던 새 차 냄새는 곧 사라져 버립니다. 새로 얻은 직장도 곧 일상적인 일터가 됩니다. 이웃집에서는 더 큰 텔레비전을 사들입니다. 새로 맞은 배우자는 나쁜 습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이 새버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죄수는 가석방 기회를 차버리고 감옥으로 돌아갑니다.
지금 감옥 안에 있는 건 아닙니까? 뭘 좀 가지고 있다 싶으면 기분이 좋고, 부족하다 싶으면 기분이 나빠지십니까? 그렇다면 감옥에 갇힌 겁니다. 배달시킬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넘길 수도 있고, 상으로 줄 수도 있고, 형태를 마음대로 바꿔버릴 수도 있는 그런 대상에게서 기쁨을 찾는다면 감옥에 갇혀 있는 겁니다. 얼마나 많은 돈을 저금해두었느냐, 무엇을 마시느냐, 무슨 차를 타느냐, 어떤 음식을 먹느냐 따위에서 행복을 찾는다면 지금 감옥, 욕구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겁니다.
어떤 분이 면회를 오셨다는 소식입니다. 가석방 기회가 생겼다는 메시지를 가지고 온 분입니다. 바로 시편 기자 다윗입니다. 다윗이 귓가에 입을 대고 속삭이듯 말합니다. “말해줄 비밀이 있어요. 만족에 이르는 비결에 관한 얘기에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이 뜻은 ‘세상에서 갖지 못한 것보다 하나님 안에서 가진 것이 훨씬 더 크다.“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전5:15)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눅 12:15)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생각하실 때 옷 잘 입는 남자, 큰집에 사는 여자, 새 자전거를 가진 꼬마 따위로 사람을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은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나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헤아리시려 한다면 우리 마음이 얼마나 따듯한지, 얼마나 헌신하고 있는지, 얼마나 온유한지, 주님을 향해 얼마나 민감한 마음을 가졌는지 등을 살펴보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지를 기준으로 우리를 평가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똑같은 고백을 할 수 있을 때 만족은 찾아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바울은 말합니다.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6)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쉬잇!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으세요? 아무래도 무슨 소린가가 들리는 것 같군요. 확실치는 않지만… 감옥 문이 열리는 소리가 아닐까요?
제 5장.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이것’은 무얼 말하고 있는지 맞춰보시겠습니까?
- 미국에서만 해도 이것 때문에 7천만 명 정도가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매년 3만 8천 명 정도가 목숨을 잃는다.
- 이것 때문에 매년 93조 원 정도의 생산성 비용이 낭비된다.
- 십대들도 이것 때문에 고통 받는다. 연구에 따르면 미국의 십대들 가운데 64%가 이것을 학업부진의 요인으로 꼽는다고 한다.
- 중년에 들어서면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전문가들은 30-40대에서 최악의 증상이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 노인들 역시 이것에 시달리고 있다. 65세 이상 노인 가운데 50% 정도는 이것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 이것을 치료하기 위해 치아교정에서부터 허브 차, 명상에 이르기까지 온갖 방법이 동원되고 있다.
⇒ ★ 정답은 불면증입니다. 세상은 잠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
미국인 7천만 명이 숙면을 취하지 못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미국인의 3분의 1이 직장에서 꾸벅꾸벅 졸거나, 수업시간에 선잠을 자거나, 운전을 하면서 깜빡깜빡 정신을 잃는다는 뜻입니다.(졸음을 이기지 못한 트럭 운전 기사들 때문에 매년 1,500건의 사망 교통 사고가 발생합니다.)
하루에 팔려나가는 아스피린, 수면제, 신경안정제 따위가 무려 30톤이나 됩니다.
★ 인간들은 정말 고되게 일합니다. 벌어야 할 돈이 있고, 따야할 학위가 있고, 올라가야 할 사다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하루에 15분만 눈을 붙이면 생활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장담했던 에디슨을 영웅 취급합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하룻밤에 11시간씩 잠을 잤던 아인슈타인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1910년경에 살았던 미국인들은 하루에 9시간씩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하루에 7시간을 잘 수 있으면 자랑거리가 됩니다. 그러니 지치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몸도 마음도 모두 피곤해집니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영혼마저도 지쳐버리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 인간 외에도 걱정이 너무 많아서 좀처럼 쉬지 못하는 피조물이 하나 더 있습니다. ★
개는 아닙니다. 녀석들은 툭하면 시글시글 잠에 빠집니다. 곰도 아닙니다. 겨울잠을 자기 때문이죠. 고양이는 특유의 ‘고양이 잠’을 개발했습니다. 이 게으른 친구는 하루에 20시간 정도 선잠을 잡니다. 동물들은 십중팔구 쉬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예외는 하나뿐입니다 곱슬곱슬한 털이 온몸을 덮고 있으며 생각하느 게 아주 단순한 짐승입니다. 움직임이 느려터진 녀석이기도 합니다. 정답은 양입니다. 양은 좀처럼 잠들지 못합니다. 양의 수면량은 턱없이 모자랍니다.
양이 잠들기 위해서는 모든 상황이 딱 맞아떨어져야 합니다. 맹수가 없어야 하고, 양들 사이에 긴장이 없어야 하고, 공중에 벌레가 덤비지 않아야 하고, 배가 고프지 않아야 합니다. 어느 것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조건이 다 갖춰져야 합니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양들에게는 제힘으로 안전한 초장을 찾아낼 재간이 없습니다. 벌레 잡는 약을 뿌릴 줄도 모릅니다. 갈등을 해결하는 법도 모르고 먹을 것도 구할 수도 없습니다. 양들에게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바른 길로 이끌어주고 푸른 초장에 눕게 해줄 목자가 필요합니다. 바른 길로 이끌어주고 푸른 초장에 눕게 해줄 목자가 필요합니다. 목자가 없으면 전혀 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목자가 없으면 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시편 23편 2절에서 다윗은 시인에서 화가로 변신합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2)
★ 누가 양들을 누이고 인도하십니까? 다시 말해서 양들을 누이고 인도하는 일은 누구의 몫입니까? 그건 목자의 일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어디로 몰아갈지 선택하고 푸른 풀밭을 마련해줍니다. 양들이 할 일은,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할 일은 목자를 바라보는 일 하나뿐입니다. 시선이 목자를 놓치지 않을 때 비로소 양은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26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 이걸 한번 보시겠습니까? 여기 백지 한 장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빈 종이입니다. 잘 들여다보십시오. 무엇이 보입니까? 그저 종이 한 장이 보일겁니다. 이제 한복판에 점을 하나 찍으십시오. 그리고 다시 종이를 보십시오. 이번엔 무엇이 보입니까? 점이 보이죠. 그렇죠?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점 하나가 흰 종이 전체를 가려버린 것입니다. ★
★ 우리는 물위를 걸어오신 주님을 보기보다 일렁이는 물결을 먼저 봅니다. 배고픈 사람 오 천 명을 먹이신 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는 살통에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캄캄한 금요일에 신경을 쓰나라 주님이 부활하신 영광의 주일을 놓치고 맙니다. ★
올바른 대상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편안히 쉬십시오.
기왕 쉴 거면 분주한 일정을 바꾸고 넉넉히 쉬십시오.
★ 돌 판에 새겨진 열 개의 계명 가운데 무엇과 관련된 조항이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까요? 살인? 간음? 도둑질?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습니다. 물론 살인이나 간음, 도둑질도 넓은 지면을 할애할 가치가 있는 계명들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계명들은 아주 짧은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간음과 도둑질, 살인을 정죄하는 데 고작 두 단어가 필요하셨을 뿐입니다.
하지만 안식 문제에 이르면 한 문장으로 모자랍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 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도 속으로는 ‘그래도 누군가는 안식일에도 일을 해야하지 않을까요? 내가 안 된다면 아들 녀석이라도 일을 해야죠’라고 생각하는 가게 주인의 마음도 다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네 아들도 일해선 안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안 된다. 일주일에 하루는 일하지 말고 나를 경배하거라. 속력을 늦추고 자리에 앉거라. 누워서 편히 쉬거라.”
여전히 우리는 망설입니다.
“일주일에 하루를 쉬면 성적을 올릴 수가 없어요.”
“제가 팔아야 할 할당량이 있는데, 그건 어떻게 하죠?”
하나님의 메시지는 단순합니다.“나 여호와가 일주일에 하루를 쉬었는데도 창조 질서는 무너지지 않았다. 하물며 네가 일주일에 하루를 쉰다해서 세상이 어찌 되기야 하겠느냐?
찰스 스펄전은 무려 100여 년 전에 설교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똑같은 충고를 했습니다.
★“짐을 끌고 다니는 가축이라 해도 때때로 풀밭에 풀어주어 쉬게해야 합니다. 바다 역시 밀물 때 한 번, 썰물 때 다시 한 번 쉽니다. 차가운 겨울 동안 땅도 몇 달에 걸쳐 안식을 취합니다. 하나님의 대사로 파견된 인간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안식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탈진하고 맙니다. 타버린 심지는 잘라 내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밝기가 약해집니다. 쉬면서 원기를 회복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채 피어보기도 전에 시들고 말 것입니다. ”
활을 힘껏 잡아당기면 잡아당길수록 부러질 가능성은 점점 높아집니다. 밭에서 좋은 소출을 얻으려면 가끔가다 한번씩 씨를 뿌리지 말고 땅을 놀려야 합니다. 사람은 적절히 쉬어야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속도를 늦추십시오. 하나님께서 고쳐주실 것입니다. 몸과 마음에, 무엇보다도 영혼에 안식을 주십니다. 푸른 초장으로 인도해주십니다.
★‘푸른 초장’은 이스라엘 어디쯤 존재하는 자연적인 지형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다윗이 양을 치던 베들레헴 인근은 풀도 많지 않고 푸르지도 않습니다. 지금까지도 그곳은 헐벗고 삭막한 풍경 그대롭니다. 유대 땅에 푸른 초장이 있다면, 그건 어느 목자가 땀흘려 조성해놓은 곳입니다. 목자는 험한 땅을 편편하게 고르고 돌부리를 뽑아내버립니다. 그루터기를 잘라버리고 덤불을 불태웁니다. 물길을 내고 목초를 기릅니다. 이게 목자의 일입니다. ★
그러므로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라는 다윗의 말은 “목자가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끝낸 풀밭에 나를 눕게 하시며”라는 뜻입니다. ★목자 되신 예수님께서 못 자국이 선명한 두 손으로 우리 영혼을 위해 푸른 초장을 준비해두셨습니다. 저주의 가시덤불을 잘라내고 죄의 바윗돌을 굴려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은혜의 싸를 뿌리고 사랑의 샘을 파셨습니다. ★
이제 주님은 우리더러 거기 와서 쉬라고 부르십니다. 온갖 고생을 해가며 마련해놓은 부드러운 풀밭에서 자기 양떼들이 누워 쉬는 모습을 바라볼 때, 목자가 얼마나 가슴 뿌듯해하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까?
제 6장. ‘큰일인데’와 ‘어떻게 잘’
걱정은 마음이 나눠지게 만듭니다. 성경에서 걱정이란 뜻으로 쓰인 헬라어 ‘merimnao'는 ’me-rizo(나눠지다)‘와 ’mous(마음)를 합쳐 만든 합성어입니다. 걱정은 오늘 해야 할 일과 내일의 문제 사이에서 에너지를 분산시킵니다. 마음 한쪽은 현재에 머물러 있지만 나머지 한쪽은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미래의 문제에 가 있게 만듭니다. 결국 절반의 마음만을 가지고 오늘을 사는 꼴입니다.
걱정은 소모적인 습관입니다. 물론 걱정하는 일이 반드시 현실로 연결되다면, 그만한 값어치가 있겠죠. 하지만 그런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6:27)고 물으십니다.
★ 걱정 근심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그런 얘기를 들어보셨습니까? 고민할 게 너무나 많았던 어떤 친구가 자기 대신 걱정해줄 사람을 고용하기로 작정했답니다. 마치 그러마 하고 나서는 사람이 있어서 연봉 2억 5천만원을 주기로 하고 데려왔습니다. 취업이 확정되자마자 직원이 고용주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일년에 2억 5천만 원이나 되는 큰돈을 어디서 구하실 계획이죠?”고용주는 짧게 대답했습니다. “우선 그 걱정거리부터 처리해주게!” 슬프게도 걱정이란 남에게 넘겨줄 수 있는 게 아니고 극복해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라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때에’도움을 주십니다.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비행기 표를 나눠주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할 때마다 나는 비행기 표를 모두 거둬서 작은 여행 가방에 보관합니다. ★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이 되면 승무원과 우리 아이들 사이에 섭니다. 그리고 딸아이들이 게이트를 통과할 때마다 한 장씩 비행기 표를 쥐어줍니다. 아이들은 입장에서는 꼭 필요한 시점에 표를 받게 되는 셈입니다.
내가 딸아이들에게 표를 나눠주는 방식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주님은 우리와 필요 사이에 자리를 잡고 서십니다. 그리고 가장 알맞은 때가 이르면 우리 손에 표를 쥐어주십니다. 제자들에게 주셨던 약속만 해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치 말고 무엇이든지 그 시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가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막13:11)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메시지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만나를 내려주겠다고 약속하시면서, 다만 한 번에 하루 먹을 양만큼만 거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이틀 치를 거둬들인 이들오 있었지만, 그들이 챙겨두었던 만나는 모두 썩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규칙에 예외가 있다면 안식일 전날뿐이었습니다. 금요일에 한하여 평소의 곱절씩 거둬들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적절한 때를 택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필요를 채우셨던 것입니다.
★“교회를 이끌고 나갈 능력이 없습니다. 모르는게 너무 많거든요.”
정말 능력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혹시 너무 성급하게 모든 걸 다 알고 싶어하는 건 어떨까요?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정답을 보여주실 겁니다.
“오늘 주신 힘으로 오늘의 문제를 풀어가라. 내일 벌어질 문제는 내일 벌어질 문제는 내일 씨름하라. 내일 쓸 힘을 오늘 갖출 수는 없다. 오늘은 오늘 쓸 힘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것이 오늘 이야기의 요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 6:34)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처음부터 끝까지 선면하게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혹시 그런 기대를 품고 있다면 포기하는게 나을 겁니다. 주님이 약속하신 것은 ‘내 발에 등’이었지 ‘미래를 넘겨다 볼 수 있는 망원경’이 아니었습니다.
내일 벌어질 일에 신경쓰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앞서서 인도하시며,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히4:16)입게 될 것만 알면 아무 걱정할 게 없습니다.
제 7장. 정글 탈출, 낙오에서 구조까지
목자는 우리가 이곳 정글에 대해 깜깜하다는 사실을 이미 잘알고 있습니다. 정글을 헤쳐나갈 도구가 전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자는 스스로 앞장서서 길을 열어나갈 작정을 하고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는 것. 그것이 목자가 찾아온 목적입니다. 그분이라면 넉넉히 우리 영혼을 되살려내실 것입니다. 목자는 정확한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자는 우리가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 같은’존재임을 상기시킵니다. (벧전 2:9). 그리고 사방을 둘러싼 아름드리 고목을 보지 말고 고개를 들어 저 높은 곳에 펼쳐진 하늘을 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십시오.”(골3:2)
다윗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지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시 121:1~7)
주님은 ‘내가 곧 길’(요 14:6)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상 이렇게 과감한 선언은 없었습니다.
정글을 만든 이보다 정글을 더 잘 아는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프리카 밀림 깊숙이 사파리 여행을 해본 친구가 들려준 이야깁니다. 앞장 선 안내인은 정글용 칼로 웃자란 잡초나 무성한 가시덤불을 잘라내며 한없이 걸어갔습니다. 얼마나 갔을까, 피곤하고 더위에 지친 친구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여기가 도대체 어딥니까? 우릴 어디로 데려가는 거죠?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노련한 안내인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보며 대답했습니다. “제가 곧 길입니다.”
우리도 똑같은 질문을 하곤 합니다. 하나님께 “우리를 어디로 몰고가시는 겁니까? 길은 어디에 있죠?”라고 묻습니다. 안내인처럼 주님 역시 곧이곧대로 대답을 해주지 않으십니다. 고작해야 한두 가지 힌트를 주시고는 그만입니다.
그러기에는 사파리 여행에 따라갔던 친구처럼 우리도 정글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일이 답을 주시는 대신 훨씬 더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바로 하나님 자신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글을 깨끗이 밀어버리셨나요? 아닙니다. 수풀은 변함없이 무성합니다.
맹수들을 남김 없이 없애버리셨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위험은 여전히 도사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망을 주기 위해 정글을 바꾸는 방식을 태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직접 우리 곁에 오심으로써 소망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누군가 이 사실을 시시때때로 상기시켜줄 필요가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존재가 있어야 합니다. 소망이 필요치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제 8장. 하늘나라의 물물 교환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제 9장. 자아의 벽을 넘어 낮고 낮은 자리로
칭찬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초등학교 1학교 시절 내가 의자 차지하기 놀이에서 상으로 받은 케이크에 대해 가졌던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승 상품은 부드럽고 촉촉한 코코넛 케이크였습니다. 그날 밤, 나는 앉은자리에서 케이크를 몽땅 먹어버리고 싶었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내가 애써서 받아온 상품이 아닙니까?
하지만 아빠 엄마가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케이크를 적절히 잘라주시고는 그만이었습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나눠주신 것입니다. 부모님은 내가 케이크를 한번에 양껏 먹으면 당장 배탈이 날 것을 아시고, 성공이 병을 불러오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십니다. 주님은 케이크를 가져가십니다. 사람들의 칭찬도 거둬가십니다. 그게 필요해서 가져사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칭찬을 제대로 요리해낼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주위의 알랑거림을 한 입 베어무는 것으로는 만족할 줄 모릅니다. 통째로 집어삼켜야 속시원합니다.
몇 마디 칭찬은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질서를 죄다 흐트러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칭찬 한 방으로 고개가 뻣뻣해지고 뇌의 기능이 뚝 떨어진 인간은 즉시 세상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사는 것은 스스로 잘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눅 18:14)
세례 요한은 예수님과 피를 나눈 친척이었고 역사상 최초의 복음 전도자였지만,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3:30)고 스스로 고백한 인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겸손에 대한 하나님 말씀을 겸손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1) 자신을 정직하게 평가하라
겸손하다는 말은 자존감이 낮다는 말과 같은 뜻이 아닙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게 아닙니다. ★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으며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12:3)
2) 성공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라
성경은 경고합니다.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신 8;13-14). 인생의 짦음과 재물의 덧없음으로 기억하여 교만을 물리치십시오,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전5:15)
3) 소중한 동료들에게 갈채를 보내라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3)
사실 인생을 살면서 올린 득점은 모두 팀의 노력으로 올린 점수입니다. 같은 팀 동료에게 박수를 쳐주십시오.
4) 전용 주차 공간을 요구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눅 14:10)
자기를 대우해다랄고 요구하는 것은 나비를 쫓아다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나비든 명예든 따라다니면 다닐수록 더욱 멀리 달아나기 마련입니다. 가만히 기다려보십시오. 저절로 어깨 위에 내려앉을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블레이즈 파스칼(Blaise Pascal)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칭찬해주길 바라는가? 그렇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스스로 자신을 칭찬하지 말라.”
잠언 기자 역시 “타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말며 외인으로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말지니라.”(잠27:2)
5) 100% 확실해지기 전에는 성공했다고 떠벌이지 말라
6) 겸손하게 말하라.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삼상 2:3). 잘난 체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여러분의 의견에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웬만해서는 ‘틀림없다’라든가 ‘의심의 여지가 없다’등 논쟁의 소지가 있는 표현이나 차마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을 수 없게 만드는 말을 쓰지 않았다. 대신 ‘제 생각에는’이라든가 ‘제가 이해한 바로는’이렇다 저렇다 식으로 이야기했다. 내게는 이 습관이 큰 유익이 됐다고 생각한다.
7) 십자가 그늘 아래서 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
제 10장. 내가 너를 집으로 인도하리라.
히브리서 기자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전 7:2)
모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주님의 약속에 주목하십시오. “내가 다시 와서…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그분은 우리를 본향으로 데려가겠다고 확실하게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출 33:14)
야곱에게 하셨던 똑같은 말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어디로 가는지 너를 지키며”(창 28:15)
여호수아에게 하셨던 말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게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수1:5)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셨던 바로 그 말씀 “내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수1:5)
다윗과 같은 똑같은 고백“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제 11장. 마침내 애곡하는 날이 오면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다.”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 도로 죄인을 교훈하시리로다.”(시 25:7~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 34:8)
하나님은 선한 일만 하십니다. 어떻게 죽음이 선한 일이 될 수 있는지 묻고 계십니까? 단순히 문상을 온 사람들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시간의 양이 시간의 질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죽음이 선한 일이 될 수 있는지 묻지 않을 것입니다.
해답의 실마리는 이사야서 57장 1-2절에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지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
죽음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이 화(禍)를 입지 않도록 보호하시는 방법입니다. 도대체 어떤 화를 말하는지 궁금하십니까?
그건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아무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에서 하루도 가감할 수 없다는 사실뿐입니다.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 139:16)
흔히 먼저 간 이의 생이 너무 짧았다고들 얘기하지만, 영원이라는 시간에 비한다면 누구의 삶이랏 감히 길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다들 살 만큼 살고, 죽을 때가 되면 세상을 떠나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좀 더 오래 살기를 소망한다 하더라도 주님은 언제 생을 마감하는 게 가장 좋을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혹시 이렇게 묻고 싶은 이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좋아 예수님을 믿고 죽은 사람은 그렇다고 쳐. 그럼 믿음 없이 죽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지?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죽은 사람은 어떻게 하지?
하지만,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습니까?
도대체 누가 한 인간이 마지막으로 품은 생각을 알 수 있습니까? 생의 마지막 순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죽음에 임박한 이가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무릎은 얼마든지 꺾일 수 있습니다.
갈보리 산에서 주님은 그런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의 고백은 난생 처음 해보는 고백인 동시에 평생 마지막으로 드리는 고백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그 고백을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받아주셨습니다.
솔로몬은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전 3:1, 4)
제 12장. 숨막히는 공포에서 평안으로
(눅22:39-44)주님이 느끼셨던 공포감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두려우셨던지 피를 흘리셨습니다. 의사들은 이런 증세를 ‘혈한증(hematidrosis)'이라고 부릅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근심이 깊으면 몸에서 화학 물질이 분비되어 땀샘과 연결된 모세 혈관이 파열됩니다. 그렇게 되면 땀에 핏물이 섞여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 주님이 그런 두려움을 느끼셨다니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친절하게도 그 얘기를 다 들려주셨습니다. 우리는 정반대로 행동합니다. 두렵지 않은 척, 그럴 듯한 말로 얼버무립니다. 윤색하고 포장합니다. 꾹 질러 넣은 손이 주머니 속에서 진땀에 젖고, 속이 메스꺼워 토할 것 같고, 입 안이 바짝바짝 타들어가지만 절대 비밀에 부칩니다.
주님은 달랐습니다. 힘센 척, 가면을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길 힘을 주시길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두렵다고 고백하는 주님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분은 아버지 하나님이었습니다. 물론 어머니한테 먼저 달려갈 수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에게 털어놓을 수도 있었습니다. 기도회를 소집할 수도 있었습니다. 모두 타당한 일이긴 하지만, 어느 것도 주님의 우선 순위에 들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아버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
★ 우리는 거꾸로 여기저기 헤매다니기에 바쁩니다. 술집으로 달려가거나 카운슬러부터 찾아가 봅니다. 자신감을 키워주는 책을 읽거나 이웃에 사는 친구를 만납니다. 주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두려움을 고백하는 그분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던 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였습니다. ★
다윗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이라고 고백할 만큼 평정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제대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야. 질리는 느낌이 들면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열려 있는 공간에 초점을 맞춰봐.”
두려움에 눈길을 주는 대신 해결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예수님께서도, 다윗도, 히브리 기자도,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1-2)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산이 얼마나 크고 높은지 재지 말고, 산을 옮길 능력을 가진 분에게 말씀드리십시오. 세상을 어깨에 짊어지고 가려고 끙끙거리는 대신, 우주를 지배하시는 분과 상의하십시오. 소망이란 먼 곳을 보는 행위입니다.
지금 어디를 보고 있습니까? ★
제 13장. 고요한 밤, 외로운 낮
다윗은 무려 10년 동안이나 도피 생활을 했습니다.
외로음을 일으키는 요인은 친밀감의 결핍입니다. 혼자 있다고 해서 외로움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외로움은 혼자 있다고 느끼는데서 생기는 감정입니다. 혼자서 죽음을 맞는 것 같은 느낌, 혼자서 질병과 싸우고 있는 것 같은 느낌, 혼자서 미래와 마주 선 것 같은 느낌이 외로움입니다.
나는 외로움이 우리를 주님께 주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친구한테 자동차를 빌린다고 생각해봅시다. 나중에보니 라디오는 고장이 났고 CD플레이어만 작동이 됩니다. 당연히 친구가 모아둔 CD를 하나하나 뒤적거리면서 들을 만한 노래(그냥 트로트라고 해둡시다)가 있는지 찾아볼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친구는 자기 취향(클래식 음악이라고 해두죠)의 CD만 잔뜩 꽂아놓았습니다. 결국 견디다 못해 CD에 손을 댑니다. 좋아하기로 치자면 스틸 기타 쪽이지만 높이 뽑아올리는 테너 목소리가 들려 옵니다. 우선은 그저 들어줄 만한 수준입니다. 적더도 쥐 죽은 듯 조용한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것도 한참 듣노라니 점점 괜찮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한 가지 묻겠습니다. 클래식 음악도 듣기 좋다는 사실을 스스로 발견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그걸 알게 됐습니까? 전에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음악에 귀를 기울이게 된 까닭은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달리 들을 음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침묵이 견디기 힘들 만큼 무거워진 순간, 평생 들어본 일이 없었던 노래를 틀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분의 음악을 들려주고 싶어하시는지 아십니까?
주님은 우리가 여태까지 사 모아둔 CD를 한 장 한 장 던져버리십니다. 친구가 등을 돌립니다. 직장의 형편이 나빠집니다. 배우자가 이해를 못합니다. 교회에서도 해결받지 못합니다. 가진 것이라곤 하나님 한 분만 남을 때까지 하나씩 모든 여지를 무너뜨립니다.
정말 그러실까요? 두말하면 잔소립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히12:6) 주위의 잡다한 소리들을 모두 끊을 필요가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의 음악을 들려주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다윗이 찾았던 것을 우리도 찾아내며, 다윗이 했던 말을 우리도 할 수 있게 되기를 고대하십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모세는 “주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우리 가까이에 계시는 분이시다. 이와 같은 하나님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어디에 또 있겠느냐?(신 4:7)
바울은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7)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리라”(왕상 6:13)
“여호와께서는 그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시94:14)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신 31:6)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발견하는 순간 모든 게 달라집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요일 4:18)
고독한 시간이 하나님께 그분의 노래를 가르치는 방법이라면 외로움이야말로 정말 소중한 선물이 아닐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 14장. 수탉의 울음소리, 그리고 나
사실 그에게는 갈릴리로 돌아갈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진작부터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을 만나러 갈릴리로 가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약속한 장소는 바다가 아니라 산이었습니다.(마28:16)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말하자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화답합니다(요21:3)
무엇 때문에 지금 고기를 낚으려는 걸까요? 새삼스럽게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셨고, 베드로도 빈 무덤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이런 때에 고기를 잡으로 나가다니, 그게 말이 됩니까?
상한 마음을 견디다 못해서 그랬을 겁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부인했다는 사실을 덮어둘 수가 없었습니다. 텅 빈 무덤으로도 그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수탉 울음소리까지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다시 돌아오셨지만, 베드로는 괴로워하고 또 회의했습니다.“주님은 내가 한 짓을 다 아실 텐데, 설마 나 같은 놈을 다시 찾아오시겠어?”
우리도 베드로와 똑같은 괴로움과 회의를 품습니다. 절대로 어기지 않겠다는 맹세를 저버린 사람이 어디 베드로뿐이겠습니까?
“다시는 성적인 순결함을 잃지 않겠습니다”
“지금부터는 정말 혀에 재갈을 물려놓겠습니다”
“이번 일로 진짜 많이 배웠습니다. 이제 더 이상 떳떳치 못한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호언 장담하는 목소리가 우렁차면 우렁찰수록 부끄러움도 커집니다.
유혹이 닥쳐오면 힘 한 번 못 써보고 무너집니다. 이러니 저러니 뒤에서 누군가를 헐뜯는 자리를 무시하고 지나지키는커녕 얼른 한몫 거듭니다.
진실을 굳게 지키기보다는 애매 모호하게 흐려버립니다.
그러나 닭이 울고 죄의식이 양심을 찌르는 순간 베드로와 더불어 어두컴컴한 구석에 나란히 허게 됩니다. 베드로가 흘렸던 것과 똑같은 눈물을 쏟은 뒤에, 베드로와 똑같은 행동을 합니다. 고기를 잡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옛 생활로 돌아가버립니다. 회의에 가득차서 묻습니다. “주님이 나같은 인간도 받아주실까?”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그 질문에 답하고 있습니다. 해답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주신 선물 속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물을 가르셨던가요? 배를 금 덩어리로 만드시고, 그물을 은으로 바꾸셨나요? 아닙니다. 주님은 훨씬 의미 심장한 일을 하셨습니다. 음식을 다 차려놓고 베드로를 아침상에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마귀와 사탄이 지켜보는 가운데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셨습니다.
다윗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시23:5)라고 말합니다. 시편 23편의 목자가 양을 대하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대하시는 모습과 너무도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 똑같은 일을 해주셨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시기 바로 전 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상을 차리셨습니다.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 제자들이~내 제자들과 함께 먹을 나의 객실이 어디 있느뇨 하시더라 하라’(막14:12~15)
본문에서 누가 객실을 준비하는지 잘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널찍한 방을 예약하고 제자들을 안내해줄 안내인까지 섭외해주셨습니다. 가구가 잘 갖춰진 공간을 확보하고 음식을 차려놓으셨습니다. 그럼 제자들은 무슨 일을 했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충실하게 따르고 음식을 열심히 먹었을 뿐입니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이 손수 상을 베푸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독사를 내쫓아내셨습니다. 그날 밤, 제자들 가운데 하나가 식사를 다 마치지 못하고 나갔던 걸 기억하십니까? 성경은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요13:2)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식사를 다 마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유다는 방을 나갑니다.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유다가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요13:27,30)
예수님께서 유다를 내보내는 장면에는 놀라운 복선이 깔려 있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유다는 만찬을 지켜보는 것까지는 허락받았지만, 식사에 참여할 수는 없었습니다.
“너는 여기 앉을 자격이 없어. 내 자녀들을 위한 자리거든. 내 아이들을 미혹해서 함정에 빠트릴 수는 있을지 몰라도, 절대로 자녀들과 나란히 앉을 수는 없어.”그만큼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술은 한 방울도 입데 대지 않는다’에서 ‘일주일에 한두 병만 마신다’로 발전했습니다. 남들에게는 전혀 문제될 게 없는 일인지 몰라도, 내게는 정말 큰 문제였습니다.
매년 열리는 남성 사역자들을 위한 수양회에서 강의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오직 그 생각에만 매달리다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최선은 부끄러운 짓을 감쪽같이 해내는 게 아니라 아예 손도 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막무가내로 음모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큰길에서 떨어진 한적한 편의점 앞에다 차를 대고 손님들이 다 돌아가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가게에 들어가서 맥주를 산 다음 옆구리에 감추고 허겁지겁 자동차로 돌아왔습니다.
순간, 수탉이 울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주일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교인들 앞에 앉아서 설교할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갈등은 계속됐습니다. ‘하나님께서 나같은 인간이 설교하는 걸 원하실까?’
해결의 실마리는 ‘최후의 만찬’에 있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나누셨던 만찬 말씀입니다. 베드로를 위해 식사를 준비하신 바로 그 예수님께서 내게도 똑같은 자리를 마련해놓으셨습니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나는 그 잔을 마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이 베푸신 상으로 돌아가 앉자마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제 15장. 머리를 매끄럽게, 상처를 부드럽게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읒니’(시23:5)
양 키우는 법을 조금 공부해보면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목자들은 해충을 쫓아내고, 싸움을 막고, 상처를 치료하는 3가지 용도로 기름을 사용했습니다.
사람에게는 곤충들이 귀찮은 존재일 뿐이지만, 양들에게는 생명을 위협할 만큼 치명적입니다. 파리, 모기, 각다귀 따위가 들끊는 여름은 가축들에겐 곧 고문의 세월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코파리를 생각해봅시다. 코파리가 양의 콧속에 있는 부드러운 점막에 알을 낞는 데 성공하고 그 알이 구더기 비슷한 유충으로 자라면 양은 미쳐 날뛰게 됩니다. 어느 목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간질간질 괴롭고 성가신 느낌을 떨쳐내려고 양들은 머리로 나무든, 바위든, 기둥이든, 덤불이든 가리지 않고 격렬하게 들이받습니다. 감염이 심한 경우, 양이 잠시나마 간지러움을 피해보려고 애쓰다가 광포해져서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사례도 있습니다.
유충이 부화하면 양은 공황 상태에 빠집니다. 달리기도 하고 숨기도 합니다. 몇 시간식 머리를 치켜들었다 내리기를 반복합니다. 먹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암컷은 젖을 내지 않고 따라서 새끼양도 성장을 멈춥니다.
이런 까닭에 목자들은 양에게 기름을 발라줍니다. 머리에도 기름 비슷한 방충제를 골고루 칠합니다. 방충제 향기 때문에 곤충들이 얼씬거리지 못하게 되고 덕분에 양떼는 평온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평온함은 짝짓기 철이 이르기 전까지 뿐입니다. 양들은 일 년 내내 조용하고 온순한 동물이지만, 짝짓기 철이 되면 만사가 달라집니다. 숫양들은 뿔을 난폭하게 휘둘러댑니다. 목자가 다치지 않도록 미끄러운 기름을 바르고 윤활제를 발라주면 머리끼리 정통으로 부딪치지 않고 미끄러져 빗너가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상처가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그런 상처 때문에 목자는 양들에게 기름을 발라줍니다.
주님은 스스로 “나는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저 간구할뿐, 요구할 수 없습니다. 넘치는 소망과 가난한 심령으로 그분 앞에 서는 것입니다.
양은 어째서 기름이 파리를 쫓자내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기름이 상처를 치료하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사실 양이 아는 것이라곤 목자가 늘 함께하며 돌봐준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것만 알고 있으면 그만입니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시25:1-2)
제 16장. 복숭아 조림을 담그는 계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
시기심을 진정시켜 줄 억제제가 필요하십니까? 질투를 가시게 할 해독제를 구하십니까? 지금 공부하고 있는 시편 23편은 바로 그 억제제, 또는 해독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크고자 하면 내려가야 합니다
By 빌 하이벨스
1. 크게 되는 길
하향성의 위력을 믿는 첫째이자 분명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모번이다. 빌립보서 2장 5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하나님과 동등되신‘분이었다. 이런 하향성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고 모든 이룸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 그것이 반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려가셔서 하나님의 위대함이 되셨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이 명예와 영광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차마 두고 보지 못하셔서가 아니다. 사실 그분은 우리를 높여 주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그분이 우려하시는 것은 세상이 정의하는 상향성이다. 자기 탐닉이란 본질상 언제나 자멸로 치달음을 그분은 아신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상에 올라가서 깊은 자아 성취감을 얻을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제 무덤을 파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전에서 ‘위’라는 말은 언제나 내리닫는 길이다.
거꾸로, ‘아래’는 올라가는 길이다. 야고보서 4:10에 보면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나와 있다.
2. 두 왕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2:6)
마태복음 2장의 두 왕인 헤롯과 예수님은 권력의 관리에 관한 한 헤롯과 예수님의 공통점은 딱 하나였다. 피 흘림으로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헤롯은 권력과 자원고ㅘ 군대를 갖춘 무시무시한 자였고, 예수님은 어머니 품에서 젖을 먹는 아기였다.
헤롯의 입에서 나온 살해 명령은 뒤따라 휘둘러진 검들만큼이나 싸늘하고 살벌했다. 마태복음 2장의 대학살을 읽을 때에 우리는 그 공포의 참상을 나와는 별개의 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말 잔등에 올라서 베들레헴 각 가정의 문을 쳐부수고는 부모가 빤히 보는 가운데 사내 아기들의 몸을 창으로 내리찍는 군사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라. 그 땅을 휩쓴 공포와 격노와 무력감이 상상이 되는가?
상황만 된다면, 우리 중에 헤롯의 마술을 조금이라도 부릴 우려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자신의 재능과 자원과 재능과 매력을 사용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고 할 때가 비일비재하다. 교묘히 또는 무지한 척 속내를 숨긴 채 말이다. 우리는 그것을 직장에서의 정치적 전략, 영역 다툼, 부부 간의 권리, 부모의 특권 등 다른 이름들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의 귀착점은 언제나 똑같이 권력남용이다.
‘아래’라는 말은 아직도 수시로 두려움과 심지어 분노를 유발하지 않는가? 우리는 다 헤롯의 얼굴을 할 때가 있다. 그럴싸한 화장으로 잘 가렸을지 모르지만 똑같이 살벌한 곁눈질을 한다.
헤롯은 비록 미치광이였지만 적어도 실제적이었다. 예수님은 실용주의 성향이 적어보인다. 우리는 33살의 나이에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의 발자취를 정말로 따라야 하는 것일까?
성경에 보면 지혜는 그 결과로 정당성을 얻는다고 했다. 헤롯과 예수님의 정반대되는 길을 충분히 이해하려면 끝을 살펴보아야 한다. 헤롯은 부와 높은 지위오ㅘ 재물을 다 갖추고도 끝은 파멸이었다. 생애 마지막 해에 그는 몸에 병이 들었다. 종종 한밤중에 그의 비명소리가 궁전 안에 들릴 정도로 고통이 심했다. 그러나 몸의 고통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죽어도 슬퍼할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그는 자기가 죽는 순간에 눈물이 있기를, 그것도 많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필사적인 방책을 짜냈다. 그는 그 땅의 최고 지도자들을 여리고의 회합에 소집하고는 일단 그들이 당도하면 문을 잠가 버릴 참이었다. 그러고는 자기가 죽기 직전에 그들을 전부 학살하도록 명을 내릴 참이었다. 그러면 어쨌든 헤롯의 죽음에 때맞추어 백성이 눈물을 흘릴 것 아닌가.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로 그의 방책은 역풍을 맞았고 지도자들은 풀려났다. 헤롯은 혼자 죽어싿. 그리고 역사에서 멸시당하고 있다.
헤롯은 그 모든 권력으로도 자신을 죽음이나 외로움에서 구할 수 없었다. 예수님은 자신을 구하실 수 있었으나 일부로 그러지 않으셨다.
두 왕의 메시지는 정반대였다. 헤롯은 네 욕망을 따르고, 십자가를 피하고, 얻으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날마다 네 십자가를 지고, 베풀라고 하셨다. 결국 기쁨에 이르는 길을 아는 왕은 둘 중 하나뿐으로 밝혀졌다.
4. 안전 지대를 벗어난 삶
요한복음 20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 주셨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명하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이 두 문장이 나란히 나오는 것이 이상해 보이지 않는가? “나는 너희를 상처와 죽음의 삶으로 보내노라. 그러나 염려하지 말라. 평강이 너희를 따라갈것이다.”
요지는 이것이다. 풍성한 삶은 고통을 피한다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용감히 고통 속을 통과할 때에 찾아온다.
우리가 도모하는 편한 삶(문제에 정면 승부하면 갈등이 불거질 수도 있으므로 사람들은 그보다는 문제를 피하거나 스포츠, 술, 섹스, 먹기 등 다른 데로 에너지를 돌리기 일쑤이며 그리하여 평화롭고 안락한 인상을 꽤 그럴듯하게 지어낸다. 그러나 그 평화는 거짓이고 그 안락은 값비싼 대가를 치른 것이다. 현실과 개인의 성장을 희생하여 산 것이다)은 무미 건조하기 짝이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신나는 모험에 비하면 그것은 그야말로 밋밋한 땅이다.
5. 짐 저지 박사: 아프리카 오지로
케냐의 의료 실태는, 생후 1년 이내의 사망률은 넷 중 하나 꼴이다. 영아 사망의 가장 큰 요인은 폐렴과 탈수증이다. 많은 질병이 나쁜 식수와 열악한 식생활의 결과이며, 자원과 교육만 제대로 갖춰지면 예방이 가능하다. 그러나 정말로 나쁜 소식은 그게 아니다. 에이즈다. 이 병원에서 검사를 받은 환자들 중에서 HIV(인체 면역결핍 바이러스)양성인 사람이 4중에 1명 즉, 25%가 넘었다. 병원에 헌혈을 하겠다는 ‘건강한’사람들 중에도 열에 하나는 양성반응을 보였다. 현실적으로 추산하여 케냐인 8명당 1명은 HIV 보균자인 것으로 짐은 보고 있다. 향후 5년 동안 아프리카 동부와 중부에서 7천만명 이상이 에이즈 합병증으로 사망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것은 집단 학살 다음이다.”
6. 끝없이 놀라운 사랑
오늘날의 세계는 타락의 표출인 이러한 이기심을 예찬한다. 인간을 부풀리는 관점이 이처럼 널리 받아들여진 적은 일찍이 근대사에 없었다. ‘나 세대’(Me Generation)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어디까지나 지금의 우리 세대다. 탐욕이 급기야 주목할 만한 우상으로 승격된 것은 1980년대였다. 가치, 도덕, 정의감에 기초하여 내려지는 결정은 갈수록 적어졌다. 대신, 대답은 욕구에 싸여 있다. 이것이 나의 필요를 채워 줄 것인가? 나의 성욕을 만족시켜 줄 것인가? 더 많은 것을 바라는 나의 갈증을 씻어 줄 것인가? 나의 권력욕을 채워 줄 것인가? 핵심 단어는 ‘나’였다. 우리의 역할모델은 테레사 수녀에서 마돈나로 바뀌었다. 메시지는 분명해졌다. 마음껏 쾌락을 탐하고 물리도록 채우고 좇으라라는 것이었다.
- 하나님의 논리
‘내 것’은 ‘네 것’이 되었고, ‘얻음’은 ‘베풂’이 되었고, ‘군림하는 자’는 ‘종’이 되었다.
7. 앤지 가버: 80세에 나바호 보호 구역에서
그녀는 삶의 초점을 소유물에 둔 적이 없다. 그녀는 말한다. “나는 소유물만 갖는 것은 원치 않아요. 소유물을 사랑하면 사람들을 이요하게 되죠. 나는 집에 살림살이를 들여놓는 데 관심이 없어요. 이미 충분하죠. 아니, 충분함 이상입니다. 성경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고 했지요.”거기에 곁들여서 자신의 작은 트럭에 기름만 조금 넣을 수 있으면 된다고 웃으며 덧붙인다.
사랑도 한계가 있다. 섬겨도 보장이 없다고 앤지는 말한다. 보호 구역에서 수십 년을 보내면서 앤지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자라가며 삶이 변화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시선을 주님께 두어야 합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면 안 됩니다. 자신의 기쁨이 주님에게서 와야 하지요. 관건은 이것입니다. 내 마음이 주님을 원하고 있는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여기서 일하거나 섬길 수 없겠지요.”
무조건적이지 못한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님을 앤지는 배웠다. 사랑은 감사에서 흘러나와야지 개인의 필요에서 비롯되어서는 안된다. 사랑은 많은 것을, 정확히 말하면 모든 것을 요구한다.
8. 서열
아무 닭이나 10마리를 가져다가 닭장 안에 함께 두고 모이를 조금 뿌려 주라. 닭들은 본능적으로 일련의 싸움을 통해서 1위부터 시작해서 2위, 3위, 저 아래 불운한 10위까지 서열을 정한다.
서열 1위 닭은 2위 닭을 쪼아 겁을 주어도 2위 닭한테서 아무런 보복도 당하지 않느다. 서열 2위와 3위 닭, 3위와 4위 닭도 마찬가지다.
최근에 나는 어느 은행장을 위한 감사 오찬에 초대받았다.
나는 아홉 명의 다른 남자들과 한 식탁에 앉았는데, 다들 그 은행의 고객이었고 나로서는 초면이었다. 금세 대화가 시작되었다. 토론의 초점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이슈들이었다. 나는 어디서 일하는가? 우리 회사는 돈을 얼마나 벌고 있나? 내 밑에서 일하는 사람은 몇이나 되나.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깃털을 과시하면서 바닥을 파헤치고 있었다. 바닥이 흙이 아니라 호화로운 카펫이었고 깃텃 대신 멋진 정장 행렬과 반짝이는 캐럿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다를 것은 없었다.
최근의 목사들을 위한 어느 집회에서 점심을 먹는데, 대부분의 대화가 다음 3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우리 교회의 교인 수가 몇이나 되나? 예산 규모가 얼마나 되나? 교역자 수가 얼마나 되나? 목사들도 서열을 정하려고 한다.
해로운 것이 없어 보일 수 있다. “순진한 작은 게임이다. 뭐가 대수인가?”라고 말할 수도 있다.
VIP나 소유주나 슈퍼스타가 곁에 오면 우리는 반사적으로 그들에게 특혜를 베푼다. 눈 깜짝할 사이에 행동에 돌입한다.
하지만 우리 회사의 경비원이 5분만 시간을 내달라고 하면 어떤가? 옆집의 혼자 된 엄마가 소소한 일을 부탁해 오면? 어쩌면 우리의 기분에 따라 또는 전에 부탁받은 적이 몇 번인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서열 덕에 그런 융통성이 생기는 것이다.
서열은 편견이 없는 척하지 않는다. 굳이 옳고 그름을 묻지도 않는다. 서열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권력자처럼 서열도 다른 대안들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다. 이 세상에 살려면 세상의 규칙대로 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자격을 갖춘 서열 후보자는 역사를 통틀어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서열을 미워하셨다. 사실 그분은 사역 전체를 들여서 서열의 기초를 허무셨다. 그분은 기회만 있으면 서열을 위아래로, 안팎으로 뒤집으셨다. 정상에 올라 있는 사람들(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을 종종 말로 질타하셨다. 그분을 그들을 위선자, 회칠한 무덤, 뱀이라고 부르셨다.
예수님의 시각을 형성한 것은 깊은 겸손이었다. 전혀 겸손이 필요 없으신 분의 겸손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과 ‘보통 사람들’사이의 분리를 즐겼으나 예수님은 벽을 허물려고 애쓰셨다.
정말 충격적인 일은 예수님이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그분처럼 반문화적이고 대항적인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그들이 너희가 나를 따르는 자들임을 알 것이다”라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책임을 서열상 우리보다 높은 자들에게로 국한하는, 각주나 빠져나갈 틈새를 허용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다. 그뿐이다. 아무런 한정어도도 붙어 있지 않다. 그것은 작은 명령이 아니었다.★
빌립보서 2:3에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했다.
★ 겸손이 중요한 절대적인 이유가 또 있다. 서열을 해부해 보면 그 기초는 오만과 편견이다. ★
우리 중에 일부가 다른 일부보다 낫다는 신념이다. 겸손이란 우리 각자가 하나님 보시기에 동등함을, 즉 철저히 흠이 있으면서도 여전히 소중한 존재임을 아는 지혜다.
우리의 결혼 생활을 생각해 보라. 남편이 자신을 ‘서열 2위 닭’인 아내를 쫄 권리가 있는 ‘서열 1위 닭’으로 보기를 그만두고, 아내도 복수로 자녀들이나 개나 방문 외판원을 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남편마다 말하기를 “내 아내는 대단히 중요한 사람(VIP)이며 나는 아내를 높이고 존중하고 격려할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리고 아내도 남편에 대하여 똑같이 말한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나보다 불운하고 특혜받지 못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일부러 보인다면 그분이 얼마나 기뻐하실지 상상해보라.
10. 죽을 각오가 된 삶만이 진짜 삶이다.
야곱은 나쁜 일을 묵과한다. 모세는 자신이 못났다고 느낀다. 베드로는 대책 없는 바보처럼 행동한다. 다윗의 손에는 피가 묻어 있다. 그러나 인간의 연약함과 죄라는 바로 그 정황 속에서 성경은 믿음 - 심령과 역사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 종류의 믿음 - 이 가능하다는 과격한 주장을 감히 내놓는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 16:21-22)
12. 보상인가 선물인가
아메리칸 드림은 아직도 매력을 잃지 않고 있다. 이미지에 치중하는 텔레비전은 우리의 거의 무의식적인 두뇌 속에 메시지를 새겨 놓았다. 소유물이 만족을 주며 소유물이 많을수록 만족도 더 커진다고 텔레비전은 우리에게 말했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들거든 광고속의 미소 짓는 사람들만 보면 된다. 그들은 약간 뻐기는 듯 자기만족에 젖은 모습으로 금방이라도 기쁨이 터질 것만 같다. 모두가 물건을 소유한 결과다.
아메리칸 드림을 사려면 돈이 필요했고 그 돈을 벌려면 거의 가미카제처럼 헌신해야 했다. 다른 모든 헌신 - 하나님, 가정, 여가 등을 위한 - 은 소유물이라는 우상에 희생되어야 했다.
아메리칸 드림을 좇는 사람들은 악착같이 안위와 쾌락과 권력과 안전을 추구한다. 그러나 결국 그는 영적으로 소외되었고, 관계적으로 고립되었고, 정서적으로 고갈되었고, 신체적으로 망가졌다. 남은 것이라고는 그를 조롱하는 물건 더미뿐이었다.
‘성공한’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렇게 끝난다. 그렇다면 그만큼의 ‘운’조차 없던 사람들, 능력이나 기질이나 경제적 계층이나 차별 때문에 아메리칸 드림을 추구할 기회조차 막혔던 사람들은 어떨까?
증상은 무기력에서 분노, 체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얻을 수 없는 것에 집착하여 자신들을 볶아야 하는 설명할 수 없는 욕구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는 왜 이 일을 계속하고 있을까? 성경은 우리가 죄인이라서 그렇다고 딱 잘라 답한다.
작성자<싸이티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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