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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및 신앙 서적

고통의 문제 By C. S 루이스

by 은총가득 2021. 1. 9.

고통의 문제

By C. S 루이스

1장. 서론

모든 고등종교에는

3가지 성분 내지 요소가 있는데, 기독교에는 그 외에 한 가지 요소가 더 있습니다.

종교의 첫째 요소는 오토 교수가 명명한 바 ‘누미노제’의 경험입니다. 경외감을 불러 일으키는 대상을 ‘누미노제’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종교의 두 번째 요소는 단순히 도덕법만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도덕법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도덕적 경험과 누미노제 경험은 워낙 동떨어진 것들이기 때문에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아무 접촉 없이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 외의 종교에는 신들에 대한 숭배와 철학자들의 윤리적 논의 사이에 거의 아무런 관련도 보이지 않는 형태가 많이 등장합니다. 인간이 이 2가지를 동일시 할 때, 즉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신령한 힘(Numinous Power)과 의무감을 불러일으키는 도덕의 수호자를 동일시할 때, 종교는 세 번째 발달 단계로 접어듭니다.

종교의 네 번째 성분 내지 요소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한 유대인이 태어나 자신이 바로 자연에 출현했던 그 두려운 존재이자 도덕법을 부여한 존재의 아들이라고, 또는 그 존재와 ‘하나’라고 주장했습니다.

 

제2장. 하나님의 전능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지 말이 안 되는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피조물의 자유란 선택의 자유인데, 선택할 수 있으려면 선택의 대상들이 존재해야 합니다. 피조물에 환경이 없다면 선택의 여지 또한 없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자유도 자의식처럼 자신의 자아 외에 다른 자아의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불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면 몸을 편안하게 해 주지만, 가까이 가면 몸을 해칩니다. 따라서 설령 완벽한 세상에서 산다 해도, 고통을 감지하는 신경섬유들이 전달하게 되어 있는 위험 신호는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어떤 세상에서도 악의 요소(고통이라는 형태를 가진)를 피할 수 없다는 뜻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죄는 아무리 가벼운 것이라도 측량할 수 없는 악인 것이 분명한 반면, 고통이라는 악은 정도에 따라 좌우되는 것으로서 일정 수준을 넘지 않을 때에는 두려움이나 분노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을 쬘 때 얼마나 거리를 두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과정, 즉 ‘따뜻하다 - 기분 좋을 만큼 뜨겁다. - 너무 뜨겁다 - 화끈화끈하다’로 이어지는 과정에 불만을 느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제 감각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화창한 날 산책하고 나서 잠자리에 들 때 다리에 느껴지는 가벼운 통증은 사실 유쾌하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물질의 성질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 어떤 상태에서든 한 영혼에게 한결같은 만족을 주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어느 때건 우주의 물질이 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한결같이 편리하고 만족스럽게 분배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이쪽 사람에게 내리막길은 저쪽 사람에게는 오르막길입니다.

우리는 나무의 항구적인 성질을 사용해서 대들보를 만들 수 있지만, 이웃의 머리를 내리칠 무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피조물들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할 때마다 매번 하나님이 개입해서 바로잡아 주는 세상을 그려 볼 수 있겠지요.

일상적인 세상, 따라서 안정적인 세상에서는 이런 예외적인 일이 극히 드물게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체스게임을 할 때 자기 재량으로 상대방에게 양보해 줄 때가 있는데, 그것은 마치 기적이 자연법칙에 대립되는 것처럼 평상시 게임 규칙에 대립되는 행동입니다. 여러분은 성장(城將) 하나를 때어 주거나, 상대방이 잘못 둔 수를 물러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번번이 상대방의 형편에 맞추어 준다면 - 언제든지 수를 물릴 수 있게 해주고, 상대방에게 불리할 때마다 자기 말을 치워 준다면 - 게임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세상에 살고 있는 영혼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불변하는 법칙과 인과적 필연성에 따른 결과 및 전체 자연질서는 일상의 삶을 제한하는 한계인 동시에 그러한 삶을 가능케 해 주는 유일한 조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자연질서 및 자유의지와 맞물려 있는 고통을 배제한다는 것은 삶 그 자체를 배제하는 것과 같습니다.

 

제 3장. 하나님의 선함

하나님이 우리보다 지혜로운 분이라면 많은 문제에서 우리와 다른 판단을 내리실 것이며 선악의 문제에서는 더더욱 다른 판단을 내리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선하게 보이는 일이 그의 눈에는 선하지 않게 보일 수도 있고, 우리에게 악하게 보이는 일이 그의 눈에는 악하지 않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선함은 거의 예외 없이 사랑이 많다는 뜻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대부분이 이 문맥의 사랑을 친절(kindness)-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 어떤 식으로든 행복하기만을 바라는 마음-로 이해한다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마음에 드는 하나님이란 우리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너만 만족을 느낀다면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고 말해주는 하나님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그 하늘에 계신 아버지(Father in Heaven)가 아니라 그냥 하늘에 계신 할아버지(Grandfather in Heaven) - 흔히 말하듯이 “젊은이들이 즐기는 모습이 보기 좋아하는”할아버지, 세상에 대한 계획이라고 해 봤자 하루가 끝날 때마다 “오늘도 모두 즐겁게 보냈지”라고 말할 수 있게는 만드는 것이 전부인 연로하고 인자한 할아버지-를 원합니다. ★

물론 사랑 안에 친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친절이 동일선상에 있는 것은 아니며, 사랑의 다른 요소들과 분리된 친절은 그 대상에서 근복적인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그 대상을 경멸하는 사태까지 초래할 수 있습니다. 친절은 그 대상을 제거하는 일에도 서슴없이 동의합니다. 우리는 동물에게 친절한 마음을 가지 고 있기 때문에 고통을 면하게 해 주려는 목적으로 동물을 죽이는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단순한 친절은 고통을 면하게 해 줄 수만 있다면 그 대상이 선해지든 악해지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지적하듯이, 응석만 부리면서 자라는 자식은 서자입니다. 가문의 전통을 이어갈 적자는 징계를 받습니다. 우리는 별 관심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무조건 행복하기만을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의 친구와 연인과 자녀들에 대해서는 엄격한 태도를 보이며, 그들이 다른 사람과 불화를 일으키는 비열한 방식으로 행복해지느니 차라리 고통받는 편을 바랍니다.

이러한 사랑의 정의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단순한 친절을 넘어서는 분임이 분명합니다.

창조와 피조물의 관계는 어떤 피조물 간의 관계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유일무이한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 우리에게 먼 존재인 동시에 그 누구보다 우리와 가까운 존재입니다. 이런 유일무이한 관계를 이해하려면 유비(analogy)를 동원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피조물들이 알고 있는 다양한 사랑의 형태를 살펴봄으로써,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적절치는 앉지만 유용한 개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넒은 의미에서만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가장 저급한 형태의 사랑은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보면서 느끼는 사랑입니다. 토기장이와 진흙을 목격한 예레미야의 경험(예레미야 18장)이나 전체 교회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건물이요 각각의 성도는 그 건물을 구성하는 돌이라고 말한 성 베드로의 말(베드로전서 2장5절)에 묘사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바로 이러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화가는 아이를 재미있게 해 주려고 한가히 끼적거리는 그림에 그다지 큰 수고를 들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설령 자기 의도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해도 그냥 내버려 두겠지요, 그러나 일생을 바쳐 위대한 작품을 그릴때 - 성격은 다르지만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거나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처럼 강렬하게 사랑하는 작품을 그릴 때 - 에는 끝없는 수고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 결과, 만약 그 그림이 감각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 그림에도 끝없는 수고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감각능력을 지닌 어떤 그림이 열 번씩이나 문질러지고 긁히고 다시 그려지는 동안 ‘차라리 내가 1분이면 완성될 엄지손가락 스케치였다면’하고 바라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덜 영광스럽고 덜 힘겨운 것이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더 사랑하지 말고 덜 사랑해 주시기를 바라는 태도입니다.

또 다른 사랑의 형태는 인간이 동물에게 느끼는 사랑으로서,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상징하는 데 이 유비를 지속적으로 사용했습니다.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편 100편 3절)이 유비에는 동물이 감각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인간보다 열등한 존재라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점에서는 앞의 유비보다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동물을 만들지 않았으며 동물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앞의 유비보다 못합니다.

우리는 그 주인이 모든 노력을 들이고 개에게도 그러한 노력을 요구하는 것은 오직 개가 고등동물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집게벌레에게 대소변 훈련을 시키거나 지네를 목욕시키지는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하찮게 여겨서 자연스러운 충동에 따라 살게 내버려 두시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우리르 더 사랑하지 말고 덜 사랑해 달라고 요구하는 태도입니다.

이보다 더 뛰어난 유비는 인간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에 빗대는 것으로서, 이 유비가 우리 주님의 가르침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만 보아도 그 가치를 쉽게 인정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당연히 아들을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아들보다 뛰어난 지혜로 판단하건대 좋다고 여겨지는 모습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권위를 사용합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여성을 향한 남성의 사랑에 빗대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무 거리낌없이 이 유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내로서 부정을 저질렀지만, 하늘에 계신 남편은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살았던 시절을 잊지 못하십니다. 예레미야 2장 2절, 에스겔 16장 6-15절, 야고보서 4장 4-5절, 에베소서 5장 27절.

이 유비가 강조하는 진리는 사랑은 본질상 그 연인을 완벽한 존재로 만들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상대방이 고통을 당하지만 않는다면 무엇이든지 허용하려 드는 단순한 ‘친절’은 사랑과 상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사랑은 그 연인이 아름다움을 잃어도 사랑할 수 있지만, 아름다움을 잃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은 미움보다 예민하게 연인의 모든 흠을 감지합니다.

 

꾸벅꾸벅 졸면서 여러분이 그 나름대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연로한 할아버지의 인자함이나 양심적인 치안판사의 냉담한 박애주의, 손님 대접에 책임감을 느끼는 집주인의 배려로서가 아니라, 소멸하는 불로서, 세상을 창조해 낸 사랑으로서, 작품을 향한 화가의 사랑처럼 집요하고 개를 향한 인간의 사랑처럼 전제적이며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처럼 신중하고 숭고하며 남녀의 사랑처럼 질투할 뿐 아니라 꺾일 줄 모르는 철두철미한 사랑으로서 여기 계십니다. ★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요한계시록4장11절)”우리를 만드신 주된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물론 이 목적도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우리를 그의 사랑이 ‘아주 기쁘게’머물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드시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향해 현재의 모습에 만족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 하나님이시기를 그만 두시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사랑은 본성상 지금 우리의 인격에 있는 흠들을 저지하고 거부할 수밖에 없으며, 그는 우리의 인격에 있는 흠들을 저지하고 거부할 수 밖에 없으며, 그는 이미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실 수 없습니다. 전보다 좀 나아졌다 해도 여전히 불순한 현재의 우리 모습에 만족해 주시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주된 목적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무 거리낌 없이 사랑하실 수 있는 존재가 될 때 비로소 진정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부족한 것 하나 없는 그분이 우리를 필요로 하기로 선택하신 것은, 그의 필요가 되는 것이 곧 우리의 필요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들로서, 우리의 역할은 언제나 주체에 반응하는 객체, 남성에 반응하는 여성, 빛에 반응하는 거울, 소리에 반응하는 메아리의 역할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활동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반응하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착각 속의 모습이 아니라 진정한 모습으로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그의 요구에 복종하며 그의 바람에 따르게 됩니다. 반대로 그가 우리의 요구에 복종하시며 우리의 바람에 따르신다는 것은 말하자면 존재의 문법을 위반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우리가 사랑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고, 인간에게는 오직 좀 더 나은 반응을 할 것인가 못한 반응을 할 것인가를 선택할 자유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정신병자가 병실 벽에 ‘어둠’이라고 갈겨쓴다고 해서 태양이 꺼지지 않는 것처럼, 인간이 예배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감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선을 바라시는데, 우리의 선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롬13:14) 즉 하나님처럼 되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스스로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자 하십니다.

 

제 4장. 인간의 악함

현대는 그 환상이 너무 강력해진 시대이기 때문에, 실재를 좀더 믿을 만하게 만들어 줄 몇 가지 고찰을 해보자.

1) 우리는 사물의 겉모습에 속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남들과 대충 비교해 볼 때, 모든 이에게 존경할 만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Y보다 크게 못할 것이 없으며 혐오감을 주는 X보다 확실히 나은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추한 사실을 고백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고백하는 말투에 거짓을 섞어 넣습니다. 고백하는 행위 그 자체, 아주 약간의 위선적인 눈짓, 몇 마디 우스갯소리 같은 것들을 통해 자기가 고백하고 있는 내용과 자기 자신 사이에 어느 정도 거리를 만드는 것이지요.

2) 자신의 죄책을 덮기 위해 공동의 죄책이라는 개념을 이용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공동의 죄책은 아무래도 개인의 죄책과 같은 강도로 느껴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며, 실제로도 같은 강도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3)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 죄가 말소된다는 이상한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것으로든 죄지은 사실을 말소시키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간이 영원히 현재입니다.

4) 우리는 ‘수가 많으면 안전하다’는 느낌을 경계해야 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듯이 정말 모든 사람이 악하다면 얼마든지 변명의 여지가 있지 않은가’라고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8)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 하지 말지니’(야고보서 1:13)간접적으로 창조자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키도록 부추기는 사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 5장. 인간의 타락

 

★ 어린 아들이 제 주머니에 넣어 두고 그 한도 안에서 예산을 세울 수 있는 용돈을 아버지에게 규칙적으로 받고 싶어하듯이, 그들도 독립적인 존재가 되어 자기 미래를 책임지며 쾌락과 안전을 얻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내 것(Meum)을 갖게 되기를 열망했고, 시간과 관심과 사랑이라는 측면에서 하나님께 적당한 세금을 바치기는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것이 아닌 자기 것을 갖게 되기를 열망했습니다. 우리 식대로 말하자면 “제 영혼을 제 것으로 삼기”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된 삶을 살고 싶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실제로 우리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여기는 당신 소관이 아니라 제 소관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을 우주 안에 한 구석이라도 얻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런 구석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

 

이처럼 피조물이 자기 고집대로 하려 든 것은 피조물의 참 신분을 아주 벗어나는 행위로서, ‘타락’이라 할 수 있는 유일한 죄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스스로 우상이 되어 버림으로써,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통스러운 노력을 기울여야만 그렇게 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성향도 자기 중심적인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자만심과 야망, 자기 눈에 보암직한 사람이 되고자 애쓰는 동시에 경쟁자를 깔아뭉개려는 욕망, 시기, 더 확실한 안전을 얻기 위한 쉼 없는 추구야말로 인간의 영혼이 가장 쉽게 취할 수 있는 태도가 되었습니다.

영혼은 본성을 다스릴 힘이 없는 무력한 왕일 뿐 아니라 악한 왕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태는 유전에 의해 이후의 모든 세대에 전달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결코 만드신 바 없는 새로운 종()이 죄를 통해 스스로 생겨난 것입니다.

 

대단히 나쁜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점잖은 집안에 처음 가게 될 상황에서 그 집안 사람들은 이 아이가 싸움 잘 하고 비겁한데다가 고자질쟁이에 거짓말쟁이인 것이 ‘이 아이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당연히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정이 그렇다 해도 이 아이의 현재 성품은 혐오스러운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그 성품을 싫어하며, 사실 그런 성품은 싫어해야 마땅합니다. 그들은 이 아이의 현재 모습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오직 이 아이를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한편으로 아이가 그런 환경에서 자란 것은 정말이지 불행이라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아이와 아이의 성품이 별개의 것인 양 그 성품에 대해서도 ‘불행’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싸움잘하고 고자질 잘하며 그런 짓을 즐기는 주체는 바로 그 아이 - 그아이 자신 -입니다. 만약 그 아이가 마음을 고쳐먹는다면 자기가 이제 막 그만 둔 행동들에 대해 수치심과 죄책감을 느낄 것이 틀림없습니다. ★

 

우리에게 선이란 본질적으로 우리를 치료하며 바로잡아 주는 선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처럼 우리를 치료하고 바로잡는 부분에서 고통이 실제로 어떤 역할을 감당하는지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제 6장. 인간의 고통I

왜 우리의 치료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느냐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우리가 너무나 오랫동안 자기 것으로 주장해 온 의지를 되돌려 드리는 일은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든 간에 본질적으로 가혹한 고통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한 상태에서 한껏 부풀고 커져 버린 아집을 양도한다는 것은 죽기만큼 힘든 일입니다.

우리는 이런 아집이 어린 시절에 어떤 식으로 나타났던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뜻대로 안될 때마다 분을 삭이지 목하기도 했고, 격렬한 울음보를 터뜨리기도 했으며, 굴복하느니 차라리 상대방을 죽이거나 내가 죽고 싶다는 흉악하고 악마적인 소망을 품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쾌락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 악하면서도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무언가 ‘들어맞지’않는다는 사실, 자신이 우주의 법칙에 따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합니다.

“우리는 비행기 조종사가 낙하산을 대하듯 하나님을 대합니다. 위기 상황에 대비해 마련해 두긴 하지만, 그것을 사용해야 할 기회는 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명백한 자족의 위험은, 우리 주님이 무능하고 방탕한 자들의 악을 세속적인 성공에 이르는 악보다 훨씬 더 너그럽게 대하셨던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창녀들은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할 정도로 현재의 삶에 만족할 위험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만하고 탐욕스러우며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럴 위험이 큽니다.

자살이 스토아 정신의 전형적인 표현이고 전투가 전사(戰士) 정신의 전형적인 표현이듯이, 순교는 변함없는 기독교 정신 최고의 실현이자 완덕()입니다.

죽음의 교리는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땅에 묻힌 씨가 싹으로 다시 솟아나는 드라마의 반복을 통해, 자연 자체가 온 세상 곳곳에 이 교리를 크게 적어 놓았습니다. 자연으로부터 그 교리를 배웠을 아주 옛적의 농업 공동체들은 수세기에 걸쳐 동물 제사나 인신 제사를 드림으로써 “피흘림이 없은 즉 사함이 없느니라”는 진리를 나타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처음에는 그런 개념들이 부족의 농작물이나 자손들하고만 관련이 있었겠지만, 후대에는 신비적 제의들을 통해 개인의 영적인 죽음 및 부활과도 관련을 맺게 되었을 것입니다. 대못이 박힌 침대 위에 누워 자기 몸을 괴롭히는 인디언 고행자들도 이와 똑같은 교훈을 가르치며, 그리스 철학자들도 지혜의 삶이란 곧 “죽음을 연습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순교자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유지하면서 끝까지 믿음을 지킨 이들도 구원받습니다. 은혜를 입은 것이 분명한데도 칠십 평생을 의외로 평탄하게 살아온 듯 보이는 노인들도 가끔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얼핏 보기에 절제와 ‘유쾌한 분별력’이 빚어내는 평범한 결과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자기 복종에서부터 잔인하기 짝이 없는 순교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수준에서 그를 따르는 자들 가운데 반복되거나 메아리칩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분명한 것은, ‘왜 겸손하고 경건한 신앙인들이 고난을 겪느냐’가 아니라 ‘왜 어떤 이들은 고난을 겪지 않느냐’하는 데 진정한 문제가 있다는 점입니다.

 

제 7 장. 인간의 고통 II

인간의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완결짓는 데 필요한 6가지 명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1. 기독교에는 시련에 관한 역설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심판’(예를 들어 사회 정의)과 기부금을 통해 가능한 한 모든 곳에서 가난을 청산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 하셨듯이 핍박을 면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이 정말 좋은 것이라면 피하기보다는 추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에 대해 고난 그 자체는 좋은 것이 아니라고 대답하겠습니다. 고통스러운 경험의 유익은, 고난받는 당사자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게 되며 그의 고난을 목격한 사람들은 동정심을 품고 자비로운 행동을 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죄를 짖지 않을 수는 없지만,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화가 임합니다. 죄는 확실히 은혜를 더하게 하지만, 그것을 빌미로 계속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의 죽음 자체는 역사적 사건 중 최악의 사건인 동시에 최선의 사건이지만, 유다의 역할은 여전히 악한 것입니다.

4. 우리는 모두 확고한 행복과 언전을 갈망하지만, 하나님은 세상의 본성상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기쁨과 쾌락과 즐거움은 널리 퍼뜨려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결코 안전하지 않지만, 풍성한 재미와 얼마간의 황홀감을 누립니다.

우리가 갈구하는 안전은 우리 마음을 세상에 안주시킴으로써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깐 동안의 행복한 사랑, 아름다운 경치, 교향악, 친구들과의 즐거운 만남, 목욕, 축구경기에는 그런 성향이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여행길에 기분 좋은 여관에 들러 원기를 회복하게 해 주시지만, 그 여관들을 우리 집으로 착각하에 만드시지는 않습니다.★

 

6. 모든 악 중에 오직 고통만이 살균 소독된 악입니다. 지적인 악 또는 잘못은 첫 번째 잘못을 저지르게 만든 원인(피곤이나 악필 같은)이 계속 작용함으로써 재발될 수 있습니다. 잘못은 그 본성상 또 다른 잘못을 낳게 되어 있습니다. 논증의 첫 단계가 틀리면, 다음 단계들도 전부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죄 또한 그 본성상 죄짓는 습관을 강화시키고 양심을 약화시킴으로써 또 다른 죄를 낳게 되어 있습니다. 고통도 다른 악들처럼 첫 번째 고통을 일으킨 원인(병이나 원수)이 여전히 작용함으로써 재발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에는 그 본성상 증식하는 성향이 없습니다. 고통이 끝났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끝난 것으로서, 그 후에는 자연스럽게 기쁨이 뒤따라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차이를 달리 표현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원인(피곤이나 악필)을 제거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잘못 자체도 바로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또 죄를 지었다면 가능한 한 그 죄를 짓게 만든 유혹을 제거해야 할 뿐 아니라 돌이켜 그 죄 자체를 회개해야 합니다. 즉 두 경우 모두 ‘복구’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에는 그러한 복구가 요구되지 않습니다. 고통을 일으켰던 병을 치료할 필요는 있지만, 일단 종료된 고통은 더 이상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합니다. 반면에 바로잡지 않은 잘못과 새로운 죄를 끊임없이 흘려 내보내는 원천이 됩니다.

또 내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잘못을 나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내가 공적으로 죄를 지을 때, 목격자들은 그것을 묵과함으로써 공범이 되거나, 정죄함으로써 사랑과 겸손을 잃을 위기에 처합니다. 그러나 고난은 본질적으로 목격자들에게(그들이 특별히 타락한 자들만 아니라면) 나쁜 효과가 아니라 좋은 효과, 즉 연민을 불러일으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복합적인 선’을 만드는 데 주로 사용하시는 그 악을 가장 확실하게 소독되어 있는 악, 또는 악에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최악의 특징인 증식의 성향이 없는 악입니다.

제 8장. 지옥

구원받지 못한 영혼의 특징은 “자기 자신 외의 것은 무엇이든지 거부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지옥에 대해 말씀하실 때 3가지 상징을 사용하셨습니다. 첫째는 형벌의 상징(“영벌”, 마태복음 25장 46절)이고, 둘째는 파멸의 상징(“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10장 28절)이며, 셋째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남자에 대한 비유나 슬기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에 대한 비유에 나타나는 바, “바깥 어두움”으로 쫓겨나는 추방이나 박탈, 배제의 상징입니다.

 

제 9장. 동물의 고통

하나님은 우리 저신의 고통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만한 데이터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짐승에 대해서는 그런 데이터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짐승에 대해서는 그런 데이터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짐승들이 창조된 목적이나 본질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며, 오직 추측에 근거하여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제 10장. 천국

오늘날 우리는 천국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 창피하게 생각합니다. ‘하늘에 있는 파이’에 침을 흘린다는 놀림을 받지는 않을까, 지금 이곳에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야 할 의무를 등진 채 행복한 별세계의 꿈 속으로 ‘도피하려’한다는 말을 듣게 되지는 않을까 두려운 것이지요. 그러나 하늘에 정말 파이가 있든지 없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파이가 없다면 기독교는 전부 거짓입니다.

또한 우리는 천국이 미끼는 아닐까, 천국 자체를 목적으로 삼을때 사심 없는 사람이 못 되는 것은 아닐까 염려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은 대가만 바라는 사람이 갈망하는 것들을 하나도 제공해 주지 않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모든 상급이 동기를 훼손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그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한다고 해서 대가만 바란다고 할 수 없고,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 시를 읽고 싶어한다고 해서 대가만 바란다고 할 수 없으며, 운동을 사랑하는 사람이 달리고 뛰고 걷고 싶어한다고 해서 사심이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한다면 그 대상을 즐기고 싶어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부 록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는 고통은 좀더 눈에 뜨이는 효과를 나타냅니다. 사람들은 거의, 또는 전혀 불평 없이 고통을 받아들이며 점점 더 강한 정신력과 체념의 태도를 보여 줍니다. 자만심이 수그러들기도 하고, 때로 고통을 감추려는 결심을 하는 환자들도 있습니다. 만성적인 고통을 겪는 사람들 중에는 상태가 점점 악화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점점 더 불평을 많이 하고, 환자라는 특권적 지위를 이용하여 가정에서 독재자 노릇을 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점은, 이렇게 실패하는 사람들의 수는 아주 적은 반면 영웅들의 수는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고통의 원인을 받아들이고 직시할 때, 갈등을 통해 성품이 강해지고 정화될 뿐 아니라 고통도 때가 되면 대개는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고통이 지속되어 파괴적인 효과를 내는 경우도 가끔 있습니다. 고통의 원인을 직시하거나 알아보지 못할 때 고통은 만성적 신경증이라는 음울한 상태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만성적인 정신적 고통도 영웅처럼 극복해 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종종 놀라운 일을 해내며, 자기 성품을 단련된 강철처럼 강하고 굳세고 예리하게 단련시킵니다.

대부분의 정신병 환저들은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지 않거나, 실제로 자기가 어떤 상태인지 의식하지 못합니다. 두 경우 모두 설사 회복된다 해도 놀라울 만큼 아무 변화 없이 병들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들은 자기 병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고통은 영웅의 자질을 드러낼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놀라울 만큼 많은 이들이 그 기회를 잡고 있습니다. ★

[작성자 싸이티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