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앙 및 신앙 서적

아더핑크/ 마음을 지킨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말씀의 유익

by 은총가득 2020. 12. 21.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더 핑크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잠 4:23)

많은 사람들이 종교 가운데서 애쓰는 수고는 헛된 노력에 불과하다. 옛날 바리새인들을 보라. 저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도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무시하였다. 종교적인 열심을 가진 자가 많았지만 지식을 따라 행한 것이 아니었다. 매우 열심히 행동하였지만 그 정력이 잘못 사용되었다. 많은 놀라운 일들을 행하였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물리침을 당하였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명하신 큰 일은 제쳐둔 채 그들이 하는 일은 자기가 택한 일이며 사람이 명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바르지 못하면 외적인 모든 행위는 다 무가치한 것이다. 우리가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 (시 66:18). 그런고로 이처럼 지극히 중한 권면의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 보도록 하자.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모든 것에 대하여 양심이 적용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성경을 찾아 보면 마음과 양심이 하나의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많이 있다(삼상 24:5; 삼하 24:10; 요일 3:21 등). 바울은 선언하고 있다.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행 24:16) 이 말씀에서 바울은 우리가 추구하여야 할 본보기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모든 의무를 수행할 때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할 때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깊은 사려와 열심으로 양심을 지켜야 한다. 이러한 일이 살아 있는 동안에 완전하게 이루어 질 수는 없지만 모든 거듭난 영혼들은 양심의 흠없는 상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함으로 선한 양심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히 13:18) 선한 양심은 홍옥보다도 훨씬 귀한 것이다.

모든 일에 대한 선한 의지는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도 가져주지 못하는 헛된 또한 소원과 비교할 수 없는 그 이상의 어떤 것이다. 바울은 “그러므로 나는 스스로를 괴롭게 하노라”고 말하고 있다. 자기의 마음을 지키는 문제는 그에게 있어서 깊은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자기 자신을 속이거나 잘못 인도하여 스스로 교만하여지는 일이 없는가 하는 것을 열심히 주의하여 살핀 것이다.

 

바울은 자기의 외면적 그리고 내면적 생활 양면에 대하여 양심적이었으며 자기의 양심이 자기를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그는 자기의 가장 아끼는 벗을 노하게 하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의 양심을 자극하지 않도록 하는 일에 더 주의하였다. 그는 이 원칙에 의하여 살아가면서 매일 자기의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자기의 타고난 기질에 끌려가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조심하였고 게으른 육체가 회피하려고 하는 일들을 수행하였다.

그는 하나님이나 사람에 대하여 사랑의 법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주의를 경주하였다. 그리고 실패하였다고 느낄 때는 양심에 죄책감을 쌓아두는 대신 회개와 믿음으로 (고백함으로) 새롭게 행동함으로써 양심이 가진 죄의 부담을 제거하였다.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딤전 1:5) 여기서 말하는 “경계”(commandment)는 베드로후서 2:21의 “거룩한 명령”(holy commandment)과 같은 것으로서 즉 복음을 말하며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완전한 사랑을 명령하는 도덕적 율법이 포함되어 있다.

그 목적 혹은 의도 - 율법이 명하고 촉구하는 바 - 는 사랑이다. 그러나 영적인 사랑은 단지 청결한 마음에서만 나올 수 있으며 이 마음은 은혜로 새로워진 마음이며, 하나님에게 대하여 원수되었던 상태에서 건짐받은 마음이며(롬 8:7), 사람을 미워하던 상태에서도 건짐받은 마음이며(딛 3:3), 죄를 사랑함과 죄로 인한 부패에서 정결케 된 마음이다.

영적인 사랑은 다만 선한 양심에서만 일어날 수 있으며 이 양심은 은혜로 말미암아 소생하여 활동하는 양심이며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케 되는 양심이며 양심을 더럽히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려는 모든 것을 힘써 피하는 양심이다. 따라서 이러한 양심을 소유한 사람은 자기의 모든 행동에 있어서 양심적으로 행동하도록 하는 영향력을 받는다. 선한 양심을 버린자들은 곧 “믿음에 관하여 파선한”(딤전 1:19) 자가 되고야 만다는 준엄한 사실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마음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여호와를 항상 앞에 모시는”(시 16:8)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여호와가 아니라 예언적으로 주 예수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반대하기도 한다. 그 말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도록 우리에게 본을 남겨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면 “주를 항상 앞에 모신다”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 의미는 우리가 그의 청지기 직분을 맡은 자로서 일한 것을 전부 그에게 고하여야 한다는 것과 이 사실이 끊임없이 우리의 좌우명이 된다고 하는 의미이다. 이 의미는 우리가 항상 그의 이름과 영광을 목표로 하여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살지 않고 나타난 그의 뜻을 따라 행한다는 것이다. 그 의미는 우리가 어떤 신앙적인 일을 할 때든지 언제나 하나님을 우리 앞에 모시기를 힘쓴다고 하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외면적인 행위나 헛된 말에 넘어가실 분이 아니시다. 그를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여야 한다.”(요 4:24)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고 하신 말씀에 다윗은 이렇게 응답하였다.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시 27:8)

 

“물이 가득차 있어서 처음 펌프질을 할 때부터 물이 쏟아져 나오는 우물은 아주 드물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적인 말을 할 때에 최선의 주의를 기울인 뒤라고 하더라도 마음을 고양시키고 끌어올릴 수 있는 무엇이 없이는 자기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유롭게 쏟아부을 수 있는 영적인 마음의 상태는 그리 흔하지 않다. 그렇다. 은혜의 샘물이 때때로 고갈되어 펌프질을 하는 것만으로는 기도하고자 하는 상태로 마음을 끌어올릴 수 없어서 마음에서 사모함이 솟아나기 전 영혼을 설복하는 무엇이 영혼 안으로 부어져야 하는 때가 있는 것이다.” (W. Gurnall, 1660)

이 말은 시편 기자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고 찬양한 후에 다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03:1-2)고 되풀이하여 말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사랑하는 독자여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말씀을 주목하되 입술로만 하지 않기 바란다. 다윗은 겉으로는 깨어 있다고 하면서 속 사람은 잠자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한 것이다. 당신도 그와 같은지? 다윗은 마음의 둔함이나 졸음으로 자기의 영적 기능이 방해받지 않도록 힘쓴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여 찬양하였다.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자”자기 속에 있는 것들은 지각과 양심과 성향과 의지 모든 것들이다.

그리스도께서 꾸짖으신 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하신 그 두려운 죄를 범하지 말하야 할 것이다. 다시 한번 우리는 2절의 반복에 주목하게 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이 말씀은 우리가 높으신 보좌로 나아갈 때에 전력을 다하여 영적인 나태와 형식성과 위선을 던져 버리기를 힘쓰며 우리 자신을 반복적으로 분발시켜야 할 필요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전 하나님의 종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탄식하였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매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사64:7)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우리가 이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진정 우리가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가? 그렇게 하기 전까지는 야곱과 같은 하나님과의 성공적인 씨름군이 될래야 될 수 없을 것이다.

은혜의 보좌를 향하여 드리는 청원에 응답이 그토록 적은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역사하는 힘이 많은 의인의 뜨거운 기도”(약 5:16)이어야 한다. 높으신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기 전에 우리의 마음을 먼저 바로 하여야 할 필요가 있으며(욥 11:13),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하여 주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함으로써 마음을 다하여 그를 신뢰하며(잠 3:6), 마음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며(마 22:37), 마음을 다하여 그를 찬양하여야 한다(시9:1).

오늘날 거의 모든 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놀라운 불경건을 보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 안으로 무분별하게 뛰어들어가기도 하고 (때로는 일부러 그렇게 가장하기도 하는) 마음에 먼저 떠오르는 생각대로 지껄이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휠씬 더 악한 영의 영향을 받고 있다. “악한 교제는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고전 15:33)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분명히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을 그토록 심히 욕되게 하는 것들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나아가야 할 대상이 누군가를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완전에 우리의 마음을 고정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드리고 있는 반쪽 마음과 잘못된 인식과 무분별과 무관심의 예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힘쓸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깊이 생각하며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그의 약속을 굳게 잡음으로 우리의 전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저 은혜로운 성품 안으로 우리의 성향이 불타올라 우리의 마음이 인도받아 들어가도록 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나 예배 중에서 나아가려고 할 때 뿐만 아니라 그의 거룩하신 말씀으로 눈을 돌릴 때에도 우리의 마음을 조심하여 살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들과 도움과 은혜의 수단들은 우리가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다만 공허한 껍데기일 뿐이며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만나리라.”(렘 9:13)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할 때 인간의 책을 읽는 것과 같은 영을 가지고 읽는다면 인간의 글을 정독할 때 얻을 수 있는 이상의 것을 우리의 영혼이 유익으로 얻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양심에 주신 말씀이며 그 말씀으로부터 오는 도움을 정당하게 기대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읽는 말씀의 내용에 전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맡기려고 애써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권면하신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잠 6:20-21) 또 말씀하신다. “내 명령을 지켜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 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잠 7:2-3) 잠시동안 성경을 읽고나서 한 시간 후에는 읽은 것을 모두 잊어버리고서는 말씀대로 행할 수 없을 것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토록 가벼이 여기는 사실을 크게 부끄러워 하여야 할 것이다. 아니다. 우리는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며 “내가 주의 율례를 끝까지 길이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시 119:112)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마음을 지킨다고 하는 의미는 거룩함 가운데서 마음이 진보하는 것과 타락하는 것을 부지런히 살펴 유의한다고 하는 것이다. 신체와 건강 사이의 관계는 영혼과 성결 사이의 관계와 같다. “마음에 묵상하며 심령이 궁구하기를.”(시77:6) 건강한 영적 삶이 유지되기 위하여서는 이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매일 매일 한 시간을 따로 내어 마음으로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묵상이라고 하는 방법을 통하여 마음의 기능을 함양하여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어려움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영혼의 상태가 어떤지 거의 묻는 일이 없이 몸만 생각하고 돌보는데 열심이었던 우리들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히스기야의 예를 생각하여 보자. 그는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스스로 겸비”하였던(대하 32:26) 사람이었다. 베드로의 마음은 자신으로 가득차 있었으나 그의 실패는 “교만한 영”이 먼저 그에게서 존재한 까닭이었다.

다시 범죄하고 타락하는 모든 일은 마음 속에서 시작한다. 자신의 성향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하나님 아니면 세상 둘 중 어느 것으로 향하고 있는지 보도록 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유익이 늘고 기쁨을 점점 맛보게 되는 것을 경험하고 있는지 아니면 의무적으로 마지못해 하고 있는지 살펴보라.

 

기도에 대해서는 어떤가 살펴 보라. 당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붓는 일에 있어서 점점 더 자유한가, 아니면 점점 더 속박되고 있는가? 기도하는 일에 점점 더 자유함을 얻는가, 아니면 성가신 의무가 되는가? 하나님의 훈계와 약속을 섭취함으로써 당신이 받은 영적 은혜들을 잘 점검하여 보고 믿음이 생동력 있게 역할을 다 하는가 확인하라. 당신의 소망은 살아 있어서 영광스러운 미래를 바라보는가? 당신의 사랑은 더운가 차가운가? 인내와 겸손과 절제가 더 나아졌는가 아니면 더 못하여 졌는가?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순전하고 거룩한 것들을 마음에 잘 공급한다는 의미이다. 어린아이가 더러운 물건을 손에서 버리도록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오렌지나 사과를 제공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단의 유혹에서 영혼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영혼으로 하여금 더 사랑스럽고 만족을 주는 대상에 쏠리게 하는 것이다. 선한 것으로 충만하여 그 일에만 전념하는 마음은 악에서 가장 잘 보호되고 있는 마음이다.

 

빌립보서 4:6-8의 순서를 잘 주목하기 바란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던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영혼은 하나님의 평강으로 가장 좋은 보호를 받는다. 그러나 정결한 공기가 영혼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호흡에 필요하며 건전하고 사랑할 만하고 찬양을 불러일으키는 일들만 생각할 때 이 호흡은 잘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와 자주 교제하라. 그의 사랑스러우심 위에 거하며 그가 임재하시는 밝은 태양빛 안에 머물며 주께서 주시기로 늘 예비하신 은사와 은혜로 당신의 영혼을 새롭게 하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당신 안에 있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의 마음이 이같은 것들(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그리스도의 영광)로 충만하여 있으며 사로잡혀 있으며 소유되어 있다고 하면, 또한 이런 일들이 마땅히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며 그렇게 될 때 우리의 행복이 있다고 하면 도색된 쾌락과 사탕발린 독과 독묻은 미끼를 가진 죄가 어떻게 우리 영혼에 접근할 수 있겠는가? 그 때에 우리는 죄가 가져다 주는 것을 모두 미워하며 ‘더러운 것들아 물러가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John Owen)

 

이 세상 사람들이 가난한 자가 산업이 없이 부자되기를 기대하며 허약한 자가 음식과 운동이 없이 건강하기를 기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도 진지한 열심과 근면한 노력이 없이 믿음에 부요하여지고 하나님께 담대하려고 한다. 우리가 주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요 15:5)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여 주시지 않고는 우리의 모든 수고가 헛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게으른 자에게 아무런 상을 베풀지 아니하시며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잠 13:4)고 약속하시었다.

 

한 농부가 자기 밭에서 소출을 내려고하다가 아무런 도움이 자기에게 주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밭의 비옥도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달려 있다고 깨달으며 기도의 효력을 굳게 믿는다고 할지라도 자기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그의 곡간은 텅텅 비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영적인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게으름뱅이가 되도록 부르시지는 않았으며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부르신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일하고 애쓰고 수고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슬픈 것은 그중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일에 관계하고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필수적이고 근본적인 일은 무시하고 지엽적인 일에 보다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잠 4:23) 이 말씀은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부여하신 큰 임무이다. 그러나 지키라고 하신 마음을 우리가 얼마나 소홀히 하고 있는지 모른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관심사 중에서 마음을 지키는 일은 거의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관심거리들, 즉 자신에 대한 평판이나 자신들의 몸이나 세상에서의 자기 위치등에 대한 관심에만 빠져 있는 한, 마음은 자기 멋대로 내버려지고 있는 것이다.

심장(heart)이 우리 신체 중에서 피를 각 부분에 순환시켜 건강과 질병을 전하여 주므로 신체 한 가운데 있어서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처럼 영적으로도 그러하다. 우리의 마음이 불경건과 교만과 완악과 악의와 더러운 정욕에 그 자리를 내어주게 되면 우리 생명의 모든 순환이 악한 것들로 더럽혀질 것이다. 이 악한 요소들이 들어와 마음을 일시라도 다스리게 되면 우리의 성품과 행동은 비례적으로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 서 있는 자리가 다른 모든 것보다 더욱 잘 보호될 필요가 있으며 항상 마음을 공격하는, 조심하여야 할 수많은 공격자들에게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이 영혼의 샘을 잘 보호하여 거기서 흘러나오는 물에 독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인간의 됨됨이는 그 마음의 상태에 달려 있다. 마음이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 있다고 한다면 그 인간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셈이다. 만약 마음이 하나님에 대해 올바른 상태에 있다면 모든 것이 올바르게 되는 것이다. 시계의 중심부에 있는 가장 중요한 스프링 때문에 모든 톱니바퀴와 부속품들이 잘 움직일 수 있듯이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어떠한”(잠 23:7) 것이다. 마음이 바르면 행동도 바를 것이다. 마음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그 인간의 현재와 미래 상태도 결정된다.

 

인간의 마음이 거듭나고 성화하면 이 세상에서는 믿음과 성결의 생활을 할 것이요, 다가올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따라서 “당신의 우물을 청소하기보다는 마음을 청결케 하며, 당신의 양떼를 먹이기 보다는 마음을 먹이며 집을 지키기 보다는 마음을 지키며 당신의 돈을 지키기 보다는 당신의 마음을 지키라.”(Petter Moffat, 1570)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잠 4:23) 여기서 마음은 우리의 내적 존재, 즉 “마음에 숨은 사람”(벧전 3:4)을 가리키는 말이다. 마음은 우리의 하는 모든 일을 통제하고 그 일에 성격을 부여한다. 마음, 즉 영혼을 지키는 일-수비대나 파수대로서 - 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임무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지만 이를 행하여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헛된 것에서부터 생각을, 오류에서 이해력을, 완악함 에서부터 의지를, 죄책에서 양심을, 무절제와 악한 일에서부터 우리의 성향을, 악한 것이나 무익한 것에서부터 마음을 지켜야만 한다. 우리 존재 전체를 사단에게 사로잡히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부여하신 임무이다.

 

청교도였던 죤 페이블(John Favel)의 말은 지극히 정당하다. “모든 상황에 있어서 마음을 지키고 바르게 유지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크고 중요한 일이다.” 여기서 마음을 바르게 지킨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바르게 놓여져 있다고 하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마음이 바르게 놓여지는 것은 중생시에 일어나는 사건이며 새로운 영적 성향이 주어졌을 때이다. 참된 회심은 마음이 사단의 다스림에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죄로부터 거룩함으로 돌아가며 세상에서부터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마음을 바르게 지킨다는 것은 거듭나 인간이 은혜로 말미암아 들어가게 된 성결의 상태에서 자신의 영혼을 보존하고자 끊임없이 돌아보고 애쓰는 것이며 그 상태를 유지하고자 매일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일들이 여기에 달려 있다. 지켜진 마음과 이 땅에서 우리의 인생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될 것이며 인생의 목적이 앞으로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을 무시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이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순종에 미치지 못하여 잃어버린 인생이 될 것이며 미래에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할 잃어버린 인생이 될 것이다”(John Owen, Cause of Apostasy에서)

 

 

1. 마음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대적되는 모든 것에서 마음을 가리워 지키려고 애쓰는 것을 말한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요일 5:21)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며 어떤 경쟁자도 용납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 보좌에 않기를 요구하시며 당신만을 최고로 사랑할 것을 요구하신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적인 어떤 것을 향해 무절제하게 끌리고 있음을 인식하였을 때 우리는 이에 대항하여 싸워야 하며 마귀와 싸워야 한다. “모든 것에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고전 6:12)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것은 그가 마음을 부지런히 지켰으며 오직 하나님께로만 돌려야 할 경외의 자리가 자기 영혼 속에 잘못 들어와 있게 되지 않을까 염려하였다는 뜻이다. 아주 작은 물체라도 우리 눈앞에 가까이 있기만 하면 태양 빛을 가리게 되듯이 아주 사소한 세상의 일이라도 우리의 마음이 그리로 좇아가게 되면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교제는 곧 단절되어 버린다.

 

중생이 있기 이전에 우리의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었다(렘 17:9). 이는 악의 원리, 즉 육체가 마음을 전적으로 다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체가 회심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어서 끊임없이 영을 다스리려고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자기 마음을 쉬지 말고 세심히 살펴야 할 것이며 마음이 속기 잘하는 성질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며 마음이 유혹에 타협하기 쉬운 사실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마음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 중에 해로운 것이 아무것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주의 깊게 방비하여야 할 것이며 특별히 헛된 생각과 상상을 경계하되 어떤 이익을 얻게 될 때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이다. 만일 해로운 사상들이 생각 안으로 들어올 길을 얻게 된다면,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그 사상들을 즐기게 된다면 “영적인 생각을”(롬 8:6) 하는 상태를 원하는 우리의 소망은 헛되게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전혀 힘써서 자기 마음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그의 마음의 성향이 움직이고 있는 방향이 어디인가를 주목하는 것을 말하며, 세상의 일들이 그의 마음을 점점 더 확고하고 완전하게 사로잡고 있는지 아니면 점점 매력을 잃고 있는지를 발견해 내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훈계하신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 3:2) 이 훈계의 말씀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늘 시험하며 속이는 멸망할 세상에는 점점 더 죽은 마음이 되어 가는지, 하늘의 것들에서는 귀하고 가장 큰 기쁨을 찾아내고 있는지를 살피라고 하는 것이다.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두렵건대 네가 그 목도한 일을 잊어버릴까 하노라 두렵건대 네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날까 하노라.”(신 4:9)

 

2. 마음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마음을 일치시키는 것을 말한다. 말씀의 순전하고도 거룩한 교훈이 구체적인 형상으로 마음에 새겨지기 전까지 우리는 만족하여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슬프게도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준엄한 말씀의 교훈을 희롱하고 있으며 자기 환상 속에서 이를 멋대로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한번도 이 교훈들을 붙들어 자기의 것으로 만들지 않고 있다.

사랑하는 독자여, 당신이 날카로운 설교의 말씀을 듣거나 신앙적인 글들일 읽었을 때 받은 엄숙한 인상들이 어떻게 그다지도 사라져 버리는가? 당신 안에서 일어났던 그같은 거룩한 감정이나 열망들이 왜 지속되지 않는가? 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가? 그것은 당신의 마음이 그 인상이나 감정이나 열망들로 온전히 감동되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당신은 “받고 들은것”(계 3:3)을 “굳게 잡지” 못하였으며 그 결과로 당신의 마음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다시 빠져 들어가 말씀이 질식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종으로부터 강력한 메시지를 듣거나 읽고 마음이 깊이 움직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당신의 편에서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너희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구나”(호 6:4) 하시는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적절한 장소에 못을 박으시듯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영혼 속에서 살아 움직이게 하심으로 마귀가 그것을 빼앗지 못하도록 열심과 끈기로 기도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에게 무엇이 요구되는가?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눅 2:19)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지 않는 일은 쉬 잊어버린다. 말씀을 읽을 때 묵상하는 것은 음식을 먹을 때 잘 씹는 것과 같다. 무엇이 요구되는가? 바로 이것이다. 배운 바를 즉시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빛을 따라 행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 배운 바를 즉시 빼앗길 것이다.(눅 8:18).

 

외면적인 행동이 말씀에 의해 조절되어야 할 뿐 아니라 마음도 역시 말씀과 일치하여야 한다. 살인의 행위를 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까닭 없는 분노도 버려야 한다. 간음의 행위를 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내적인 정욕도 또한 억제해야 한다(마 5:28). 하나님은 외면적인 행위를 모두 주목하고 알고 계실 뿐 아니라 “심령을 감찰”(잠 16:2)하신다. 그뿐만 아니라 행동의 배경을 면밀히 살필 것과 그 동기를 시험할 것과 어떠한 영으로 행동하고 있는 가를 생각하라고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중심의 진실함”(시 51:6) 을 요구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하신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

 

3. 마음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죄에 취약한 마음을 지킨다고 하는 의미이다.

거듭나지 못한 인간은 종교적인 죄(sin)와 윤리적인 죄(crime)를 거의 구분하지 못한다. 자기가 사는 사회의 법 안에서 행동하고 동료 인간들에게서 존경의 평판을 받고 있는 한 보통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만족하게 여긴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전혀 이와 다르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서 있으며 자기 인생의 모든 회계 보고를 제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많은 일들을 가지고 신경을 쓴다. 처음 성령이 그에게 죄를 깨닫도록 하셨을 때 자기의 전 인생이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것이었으며 자기만을 기쁘게 하며 살아온 인생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깨달음이 그의 마음을 관통하여 깨어나게 하였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고뇌는 신체의 어떤 부분을 잃은 것보다 더욱 큰 고통이 된다. 그는 자신이 영적인 문둥이임을 깨닫고 그 때문에 자기를 미워하게 되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슬피 애통하는 것이다. 그는 부르짖는다.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9-10)

이 같은 죄에 대한 죄의식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임무이며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사명의 한 부분이다. 가증한 자기 고집과 자기 사랑 때문에 주어지는 고통에 마음이 둔감하지 않도록 신자는 매일 노력하여야 한다. 신자가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게 하며 악행을 가벼이 여기게 하며 변명하게끔 하도록 애쓰는 사단의 모든 노력에 대해 끊임없이 대항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눈이 자기 위에 머물러 있음을 항상 인식하여 시험받을 때마다 요셉이 한 말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 39:9) 이 말을 자신에게 하면서 살아야 한다.

 

신자는 영광의 주께서 자기를 위해 저주를 받으신 것은 자기의 범죄 때문인 것을 날마다 상기하며 십자가의 관점에서 자기 죄를 보아야 한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므로써 구세주가 구속하신 모든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성결과 순종에 배치되는 것은 어떤 것이든 용납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독자여, “더욱 마음을 부지런히 지키는 것”은 아이들의 놀이가 아니다. 오늘날 안일한 신앙을 가르치는 종교들은 그 추종자들을(차라리 희생자들인) 결코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할 것이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이 질문에 대하여 하나님 자신이 대답 하신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시 24: 3-4)

신약성경의 가르침도 이와 다를 바 없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마 5:8) 청결한 마음은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요, 죄에 대항해 싸우는 마음이다. 청결한 마음은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요, 그리스도께서 거주하시는 곳을(엡 3:17) 더럽히지 않으려고 애쓰는 마음이다.

 

4. 마음을 지키는 것은 마음이 정결하게 되도록 부지런히 살피는 마음이다.

독자 중에는 자주 “오, 내 마음이 이다지 사악한가”고 부르짖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게하여 주셨을 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 바란다. 진정 당신의 마음이 그러하고 또 실제로 그것을 느낀다면 하나님께서 수많은 눈멀고 무관심하고 입으로만 신자임을 고백하는 당신 주변의 사람들에게서 당신을 구분하여 내셨다고 하는 분명한 증거인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친구여, 당신의 마음이 계속하여 사악하여야 할 이유는 없다.

당신의 정원에 잡초와 쓰레기로 가득 찬 것을 보고 비통해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상태로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야 되겠는가? 우리는 현재 당신 안에 여전히 거하는 죄로 물든 본성인 치료와 변화가 불가능한 육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지키라” 명하신 당신의 마음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마음에서 헛된 상상을 깨끗이 치울 책임은 당신에게 있으며 불법으로 향하는 생각을 당신의 영혼에서 제거하고 양심에서 죄책을 제거할 책임도 당신에게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당신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것들을 어떻게 다스릴 수 없다. 그것들은 청하지 않았는데도 나타나며 그것들을 막을 힘이 내게는 없다.” 당신을 그렇게 믿게 한 것은 마귀이다. 당신의 정원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잡초는 원래 청하지 않아도 솟아나는 것이 아닌가? 마당벌레나 해충들은 식물을 해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무력한 것을 슬퍼만하고 있을 것인가? 아니다. 대항해 싸워야 한다. 제거할 수단들을 취하여야 한다.

도적은 청함을 받고 집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문과 창문을 단속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사단의 유혹하는 자장가에 마음을 두지 말라.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 4:8) 두 마음, 한 마음은 하나님께로 또 한 마음은 자기에게로 향한 것을 말한다. 한 마음은 거룩함으로 또 한 마음은 죄의 낙으로 향한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나의 마음을 “정결케”할 것인가? 속에 들어간 더러운 것들을 다 토해 내어야 한다. 부끄러운 낯으로 하나님 앞에서 그것들을 고백하여야 한다. 그것들을 단호히 버려야 한다. 그것들을 증오하면서 돌이켜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서만 정결케 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매일 새롭게 하는 회개를 함으로써 “정결케”할 수 있다.

 

고린도후서 7:11은 그러한 회개에 관하여 말한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날마다 믿음을 나타내어 그리스도의 정결케 하는 보혈로 깨끗이 씻으며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슥 13:1)에 밤마나 목욕함으로써 정결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의 길을 따라 감으로써 정결케 된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벧전 1:22)

이제 우리는 모두가 그리스도인인 독자들에게 명백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마치려고 한다. 그리스도인이 행하여야 하는 모든 의무에는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열심히 그리고 분명하게 은혜와 도움을 성령께 구하여야 한다.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이고 마음의 순전함으로 말하여야 한다.

 

“주여 당신은 부지런히 제 마음을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온전히 그 명령을 이룰 수 없음을 느낍니다. 제 연약하고 초라한 능력으로는 그런 일을 전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겸손히 구합니다. 주께서 제게 명하신 대로 행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저에게 은혜로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주여 당신의 선

하심을 따라 의지를 가지고 행동할 수 있도록 내 속에 역사하여 주옵소서.”

 


 

세 종류의 그리스도인/ 아더 핑크

일반적으로 말해 소위 “그리스도”이라고 불리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설교자에 의한 그리스도인, 자아에 의한 그리스도인, 하나님에 의한 그리스도인이다.

‘설교자에 의한 그리스도인’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유아세례를 받고 교회의 정회원이 되었을 뿐 아니라(특수한 직임은 맡지 않았을지라도), 책임 연령에 이르면 전도자에게 ‘고백할 것’을 강요받는다. 이러한 강요받는 형태와 정도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에서 대중최면에 이르기까지 여러 방법을 통하여 ‘앞으로 나오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이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하나님 앞에서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도 없이 ‘당당한 일을 하도록’,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모이도록‘, ’하나님의 백성들과 연합하여 악에 대항하여 싸우는 십자가의 군병이 되도록‘ 권유받는다. 이러한 신자들은 버섯과 같아서 밤사이에 돋아 올라 잠시 동안 지탱하나 뿌리가 없어 견디지 못한다.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소위 ’인격적인 사역‘이란 미명하에 많은 사람들이 강요받는다. 이는 마치 떠돌이 외판원들이 세일하는 방식으로 실적을 올리려는 수작과 유사하다.

‘자아에 의한 그리스도인’은 어떤 자들인가?
그들은 방금 앞서 말했던 사실들로 경고 받은 자들이며, 종교적인 협잡꾼들에게 농락당할까봐 두려워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협잡꾼들이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과 영교함으로 ‘만사형통’하다고 농간부리는 데 속지 않으려고 주의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만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과 그리스도께서 전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복음을 믿는 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필요치 않다는 사실을 받아 들인다.
그들은 요한복음 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과 로마서 10:16(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라는 말씀을 단지 지적으로 승인하거나 받아들인다. 요한복은 2:23-24의 말씀은 별로 중시하지 않는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많은 사람이 그를 믿었으나 저희가 바리새인을 인하여 회당에서 쫓겨날까봐 그를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께 칭찬 듣는 것보다 사람에게 칭찬듣기를 더 좋아함이라”. 여기에서 그들의 믿음이 문제가 된다. 자연인도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들은 나름대로 만사형통하게 나아갈 수가 있으며, 기뻐할 수가 있다.


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흔들 수 없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놀라운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대부분의 기독교 신자들이 지적으로 승인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러한 자들은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전적으로 자기 의지에 의해 좌우된다고 생각하는 자들과 다를 바 없다.
타락한 인생의 운명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처분에 달려 있다는 사상은 이러한 교만한 자들에게는 정말로 관심이 없다.
그리스도께 나아온다는 자체가 영적인 활동이지 자연적인 활동은 아니다.
중생하지 못한자는 죄와 허물 가운데 완전히 죽어 있기 때문에 어떤 영적 인 활동도 불가능하다.
그리스도께 나아온다는 것은 주님을 절감하는 영혼의 사역이며, 잃어 버린 바 된 죄인을 영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게 된 결과이며, 그를 간절히 사모하는 애정의 발로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과 원수’된 자연인이 성자 하나님을 사모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에 의한 그리스도인’은 은혜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지으심으로 말미암는다(엡 2:10).
그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거듭남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통하게 되고 새로운 지각과 활동을 하게 된다.
옛 성품으로써 신령한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없는 무언가 새로운 것으로써 교통하는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것’은 ‘영으로 난 자는 영이니’(요 3:6)라고 말한 분과 동일한 성품에 참예한다. 그의 거룩한 성품에 참예한다.
그것은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며,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에 전가시킨 은혜의 원리이며, 그를 기쁘시도록 열매 맺게 하는 성향이다.
중생은 어떤 지루한 과정이 아니라 즉각적이다.
거기에는 다른 아무것도 추가 될 수 없고 제해버릴 수도 없다(전 3:14). 그것은 하나님의 법정적인 소산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매 그대로 되었다.
그것은 즉각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중생은 성직자의 마술적인 사역의 결과이거나 개인적인 체험의 결과가 아니다.
중생받는 자는 순전히 피동적이며 무의식중에 그것을 받는다.
성육신 하신 진리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3).
혈통에 대해서 - 유전은 이 일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교도들의 조상들이 수세기 동안 우상을 숭배하였지만 그 후손들을 중생시켰기 때문이다.
육정에 대해서 - 하나님의 살리시는 역사 이전에 인간의 자의지는 철저히 하나님과 ㅂ나대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뜻에 대해서 - 설교자는 자신을 중생시키지 못할뿐더러 남도 중생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생의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전권적인 역사로써만 가능하다.

또 다시 그리스도께서는 선포하신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그 결과는 명백함)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이것의 원인과 작용은 인간으로서는 깨달을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신비한 역사임)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 3:8).

이러한 하나님의 선포는 마치 빛이 어둠과 구별되듯이 모든 종교적인 가르침과는 완전히 판이하다.

 



거듭남의 증거들 - 아더 핑크

거듭난사람들에게서 어떤 열매들을 찾아볼 수 있는가? 거듭났다는 증거는 무엇인가? 어떻게 내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가? 이것들은 아주 중요한 질문이며, 이에 대한 명백한 해답을 구하는 모든 진지한 질문자들은 중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거듭남의증거들은 무엇인가? 보다 더 상세한 대답을 드리고자 한다.

1.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개인적 인 믿음이 있다.

▶ 무엇인 거듭남의 증거인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요 3:36)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헬라어에서 이 동사는 과거완료형으로 되어 있다.)"(요 5:24)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헬라어에서 이 동사는 과거 완료형으로 되어 있다.) 자니" (요일 5:1)

이 말씀들에서는 우리는 주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미 영생을 소유하였고, 다른 말로 하면 거듭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참으로 의지하는 믿음이 있는 곳에는 거듭남의 분명한 증거가 있다.

만일 당신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고자 하는 바램을 버렸다면, 그리스도의 용서에 의지하여 더러운 걸레 같은 당신 자신의 의를 내버렸다면, 방황하고 의지할 것 없는 죄인의 모습으로 그리스도께 나와 그의 긍휼을 구했다면, 능히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그분께 의지했다면, 이것이 바로 당신이 이미 거듭났다는 증거가 된다. 마치 아기가 본능적으로 엄마에게 매달리듯이, 갓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도 무력한 채로구세주이신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어 있다.

2. 죄에 대한 참된 회개가 있다.

▶ 죄인의 회개와 신자의 회개와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신학적인 개념에서 회개는 보통 믿음 이전에 일어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보통 복음서에서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막 1:15)는 순서로 되어있다. 그래서 흔히 "회개하고 회심하라. 그리하면 당신의 죄가 사함을 받을 것이다."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살리기 위해 그 순서를 바꿔 보자. 사실 죄인의 회개와 그리스도인의 회개는 차이점이 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회개란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이며, 내 자신의 타락한 상태에 대한 깨달음과 인정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잃어버린바 된 죄인의 자리에 서는 것이다.

하지만 신자에게 있어서 회개란 죄로 인해 넘어질 때마다 죄에 대한 혐오와 마음의 근심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게 신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통해서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하게 된다.

▶ 회개가 무엇인가?

하지만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 (godly sorrow; 경건한 슬픔)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성품이 이미 내 안에 있음을 의미하는데, 죄인은 그 안에 이것이 없다. 회개란 죄에 대해서 슬퍼하고 근심하는 것 그 이상이다. 회개란 바로 "하나님 뜻대로하는 근심" 이다.

교도소 안의 많은 죄인들은 죄에 대해 슬퍼하고 또 근심하기도 하지만, 오직 하나님의 자녀만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회개를 경험한다. 나는 내 죄과에 대한 형벌이 두렵고 끔찍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고 하나님의 눈에 죄가 끔찍이도 극악한 것임을 알기에 회개한다. 회개는 하나의 행위 그 이상의 것이다. 이것은 마음의 태도 문제이다. 회개는 죄에 맞서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셔서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내가 만일 그의 자녀라면 내 안에 그의 거룩한 성품이 존재하므로 결과적으로 죄를 범한 일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 죄를 한탄하며 또한 죄에서 떠나는 것이다.

3. 하나님을 향한 참된 사랑이 있다.

▶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께 사랑이 있는가?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또 우리 속에 하나님의 성품을 심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미워한다.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소극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또 우리를 낳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사랑한다. 여기에 거듭남에 대한 적극적인 원리가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일 4:16)

이것은 그 부모를 사랑하는 자녀의 정상적인 상태이다. 반복하지만, 거듭난 사람은 자신을 거듭나게 해주신 분을 사랑할 것이다.

▶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확실히 이 질문은 불필요하다. 우리는 우리 존재 사실에 대한 자각 없이는 누구를 진실히 사랑할 수 없다. 즉 우리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각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감정은 하나님을 향해 끌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탁월하심이 우리의 마음을 감화 감동시킨다. 이제 우리도 시편 기자와 함께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시 73:25)라고 고백하게 된다. 더욱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주된 갈망은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다.

▶ 인간이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도 사랑할 수 있는가?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7,8)

이 말씀은 앞 절의 생각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순서를 잘 관찰하여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앞서 있다. 인간적인 영역에서는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전에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야하지만, 하나님을 알기 전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 14:1)

그렇다면 나는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그의 모든 아름다움을 보고 그를 사모하는가?
그를 묵상함이 꿀보다 더 단가?
내가 엎드려 경배할 단 한 분이신가?
그렇다면 이것은 당신이 거듭났다는 증거가 된다.

4. 형제사랑이 있다.

▶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외에 누구를 어떻게 사랑하게 되는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요일 4:7)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이 내 안에 거하면, 그의 자녀들도 사랑하게 된다. 그들의 사회적 지위나 지적 수준 또는 교파에 관계하지 않고, 그들이 흑인이든 백인이든, 가난하거나 부자이든, 교양이 있든 무교육자이든 하나님의 자녀 모두를 사랑하게 된다. 인간의 삶에서도 같은 가족구성원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혈연관계가 서로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준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가족들 간에도 어떠한 한계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들 또한 혈연으로 -모든 신자가 공통으로 소유한 그리스도의 피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시대에 이교도들이 성도들을 가리켜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 있었다.

"저들이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라?“

당신에겐 이 형제 사랑이 얼마나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가?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7,18)

만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를 사랑한다면, 그들의 인격을 옹호하고, 그들의 이익을 도모해주며, 그들의 필요를 돌보며, 또한 그들의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5. 실제적인 의로운 삶이 있다.

▶ 거듭난 사람의 삶은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가?

나무는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 믿음은 그 행위로써 입증된다. 경건한 성품은 자연스럽게 경건한 삶으로 드러난다.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요일 2:29)

우리가 거듭났다고 하는 또 하나의 증거는 선(의로운 행위)을 행하는 것이다. 거듭나지 못한 자들은 "불순종의 아들들"이라고 불린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존중하는 마음도 없고, 하나님의 권위에 순복하기를 거절하며, 하나님의 영광 보다 그들 자신의 관심사에 마음을 쏟는다. 하지만 성령으로 난 사람들은 자신의 "지체를 의의 병기(도구)로“ 드리며, 하나님 말씀의 계명에 조화를 이루면서 자신들의 삶을 빛어간다.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이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며, 값으로 산 바 되었음을 깨닫는다. 그들은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 (엡 2:10)가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의 열매가 그들 삶 가운데 아름답게 맺히기를 기도한다.

또한 요한일서 5장 4절에는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자의 삶은 시대의 풍조나 체계, 처세법 그리고 세상을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 아닌, 우리가 주로 고백하는 분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우리의 본보기로 남겨 놓으신 그분, 바로 그리스도로 인해 사는 것이다.

6. 은혜 안에서의 성장이 있다.

▶ 은혜 받은 사람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침체와 부진은 질병과 죽음을 야기한다. 손발을 전혀 사용하지 않으면 결국 마비되고 만다. 생명은 성장을 통해 입증된다. 그 사실로 인해 우리는 베드로전서 2장 2절의 말씀으로 교훈을 받고 있다.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영혼을 생명의 양식으로 먹이게 될 때, 우리 영성은 발달하게 되고 우리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게 된다. 날마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때, 주님의 능력과 주님의 강력한 권세로 우리는 강해지게 된다. 그럴 때 우리 거듭난 자의 삶은 능력에서 능력으로, 영광에서 영광으로 나아가는 삶이 된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잠 4:18)

자, 여기에 영적 성장을 측정하는 기준이 있다.

- 당신은 그리스도를 더욱 닳아가고 있는가?
- 당신은 과연 주님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이 사실은 당신이 분명 하나님의 자녀로 계수되고 있다는 증거 이다.

7. 끝날까지 흔들리지 않는 인내하는 믿음이 있다.

▶ 거듭난 자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인가?

입으로만 신앙 고백하는 자와 참으로 거듭난 신자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곧 기쁨으로 받아드리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 속에는 아직 뿌리가 없어 잠시 동안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게 된다(마13:20,21).

이런 사람들은 결코 거듭난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신의 성품이 그들 속에 한 번도 주어진 일이 없기에, 결론적으로 그들 안에는 "뿌리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겉만 씻긴 암퇘지 같아서 곧 자신들이 뒹굴던 흙탕물로 돌아가게 된다.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다. 그들은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한다(시 37:24). 그들은 베드로처럼 침륜에 빠질 수도 있지만, 베드로처럼 슬피 통곡하고는 다시 회복된다. 거듭난 사람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이며(벧후 1:4), 하나님께서 영원불변하시기에 그들 또한 결코 멸망치 않는다. 이 땅 가운데서의 순례가 끝날 무렵, 모든 거듭난 영혼들이 다소간 차이는 있을지라도, 적어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4:6-8)

하나님의 은혜가 그 자녀된 신분에 합당히 살아가는 저자와 독자 모두에게 있기를 바란다

 

출처: 개혁주의 마을 글쓴이: grace

* 말씀이 가져다 주는 영적 유익

 

- 아더 핑크 -

 

 

지난 여러 해 동안 성경을 읽고 공부했지만 사람들이 영적인 유익을 별로 얻지 못했다는 데에는 어떤 중대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참으로 우리는 이보다 더한 경우를 볼 수도 있다. 즉 성경 공부가 축복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저주가 되었다는 예를 종종 접하게 될 때 우리는 크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 같은 말이 심한 경우를 보여주는 말임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 같은 사례의 심각성 그 자체보다 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사는 남용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 또한 오용될 수 있는데 이런 사실이 말씀 공부에서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은 그 열매를 통해 명백히 드러나는 사실이다.

 

본성에 속한 사람도 과학을 연구하듯이 큰 열정과 기쁨을 갖고 성경 연구에 착수할 수 있는데, 이 경우에는 지식의 양이 늘어나는 만큼 그의 자만심도 커지게 마련이다. 흥미 있는 실험에 열중하는 화학자처럼 성경을 지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은 그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참으로 자만하게 된다. 그렇지만 후자의 기쁨이란 전자의 기쁨만큼이나 영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화학자가 성공하면 자만심이 커져서 자기보다 무지한 사람들을 멸시하기 쉽듯이, 성경 속의 숫자나 예표나 예언이나 그 밖의 다른 주제들을 연구한 사람들도 이 같은 경우에 속할 때가 많다.

 

성경을 대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동기가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문학적 자부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성경을 모르면 교육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단순히 성경의 일반적 내용을 습득한다는 것이 존경할 만한 일이며 인기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다른 유명한 글을 읽어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듯이 그런 목적으로 성경을 읽는다.

 

또 다른 이들은 자기들만의 특정한 자만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성경을 읽으며, 또 자기 교단의 특성을 보여주는 구절들을 외우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하며 "자기네 교리"를 뒷받침하는 구절들만을 열심히 찾는 사람들도 있다. 또 다른 이들은 자기들과 달리 생각하는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공박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기도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일에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나 영적으로 세움을 받으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 혼이 아무런 유익도 얻지 못한다. 그렇다면 성경 말씀에서 얻을 수 있는 참된 유익이란 무엇인가?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에 명확한 해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게 하려 함이라"

 

이 내용 중에서 혹시라도 빠진 것이 있는지 살펴보라! 성경은 우리의 지적 만족이나 세속적 사색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다. 성경을 주신 목적은 가르치고 책망하고 바로 잡음으로 우리로 하여금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게 하려 함이다. 이제 이 말씀의 의미를 더 명확히 찾아보기 위해 다른 구절들도 인용하도록 하겠다.

 

 

1. 말씀이 우리를 죄 있는 자라고 가르칠 때에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바로 이것이 말씀의 첫 번째 기능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우리의 타락함을 드러내며 우리의 더러움을 밝히 드러내며 우리의 사악함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의 도덕 생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수도 있으며 인간관계가 나무랄 데 없이 좋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사람의 마음과 양심 속에 말씀을 적용하사 죄로 가려진 눈을 뜨게 하시고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 및 태도를 바라보게 하실 때에 비로소 그 사람은 대언자 이사야 같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하고 울부짖게 된다. 참으로 구원받은 영혼은 이런 식으로 예수님의 도우심과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되, 온전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필요하나니"(눅 5:31). 참으로 성령님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말씀을 적용하실 때에야 비로소 모든 사람은 자신이 병들었으며, 병들어 죽게 되었음을 느끼게 된다. 인간의 본질 속에 죄가 이루어 놓은 황폐한 자취들이 있다는 것을 마음속에서 확신하는 일은 회심한 이후에 즉시 일어나는 초기 경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으로 내 마음속에 축복을 내리실 때마다 나는 그분께서 내 앞에 세우신 기준 즉 "오직 너희를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 같이 너희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할지니"(벧전 1:15) 라는 기준에서 내 자신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으며 또 내가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이제 다음과 같이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성경 속에서 여러 사람들이 비참하게 실패한 것을 읽을 때에 그 사실이 나로 하여금 나도 저들처럼 비참한 상태에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가? 또 그리스도의 복되고 완전한 삶에 대해 읽을 때에 그 사실이 나로 하여금 나는 그분에 비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해주는가?

 

 

2.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해 슬퍼하게 가르칠 때에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돌밭과 같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자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나니."(마 13:20,21) 한편 오순절 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의 가책을 느낀 자들에 대해 성경은 "그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았다"(행 2:37)고 기록한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모습이 그대로 존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설교자의 수사학적 능력이나 지적 기교를 보여주는 화려한 설교나 '세대주의적 진리' 등을 담은 말씀을 듣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대개 이런 것들은 양심을 꿰뚫는 침투력이 없다. 사람들은 이 같은 설교에 수긍은 하지만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든지 혹은 가깝게 접근하려 들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자신의 "지적 탁월함"에 대한 명성을 얻으려고 힘쓰지 않는 신실한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훌륭했던 하나님의 사람들조차도 비참하게 실패했었음을 보여주며 신자들의 성격과 행동의 지침을 삼게 해야 한다.

 

비록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설교자를 멸시할지 모르지만 참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자신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고 슬피 울며 부르짖게 해주는 그 말씀에 고마움을 표할 것이다. 성경을 홀로 읽을 때도 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 성령님께서 이와 같은 방법으로 말씀을 적용시켜 주실 때에 우리는 자신의 부패함을 바라보며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예레미야 31장19절에는 "내가 교훈을 받은 뒤에 내 볼기를 쳤나이다. 내가 부끄럽고 참으로 당황하기까지 하였나이다." 라는 말씀이 있다. 독자 여러분은 이 같은 체험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가? 성경 공부를 통해 상한 마음을 갖게 되고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겸손하게 낮추어 본 적이 있는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스스로의 죄를 깨달아 매일 같이 하나님 앞에 회개해 본 적이 있는가? 유월절 어린양은"쓴 나물"(출 12:8)과 함께 먹어야만 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에도 성령님께서는 그것이 우리 입에 달게 되기 전에 쓰게 만드신다. 계시록 10장 9절의 "내가 그 천사에게 나아가 말하되, 그 작은 책을 내게 주소서, 한즉, 그가 내게 말하되, 이것을 가져다가 먹으라. 이것이 네 배를 쓰게 할 것이나 네 입에서는 꿀같이 달 것이라, 하거늘" 말씀에서 순서를 자세히 살펴보라. 이것이 바로 영원토록 적용되는 실증적 순서이다. 위로 받기 전에 먼저 애통함이 있어야 하며(마 5:4) 높임을 받기 전에 먼저 겸손함이 있어야 한다(벧전 5:5).

 

 

3. 하나님 말씀의 인도하심으로 죄를 고백할 때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성경은 "책망"(딤후 3:16)하기에 유익하므로 정직한 사람은 말씀을 통해 자기의 허물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세상에 대하여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고 또 빛으로 나아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자기 행위를 책망 받을까 함이요"(요 3:20) 라고 말하고 있다. 거듭난 마음의 소유자는 "하나님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부르짖게 된다. 말씀으로(시편 119편) 새롭게 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범죄한 사실을 깨닫게 되고 우리의 죄를 자백하게 된다.

 

"자기의 죄들을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들을 시인하고 버리는 자는 다 긍휼히 여김을 얻으리라"(잠 28:13). 우리가 마음 한가운데에 죄를 숨기고 있으면 결코 어떤 영적 성장이나 열매(시 1:3)를 기대할 수 없으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숨김없이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맛볼 수가 있다. 우리의 양심이 고백하지 않은 죄로 눌려 있으면 평안이 있을 수 없으며 우리 마음 한가운데 진정한 휴식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 온전히 모든 죄를 털어놓을 때에 비로소 안식이 찾아온다.

 

다윗이 체험한 고백을 들어보자. "내가 잠잠할 때에 하루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들이 쇠하였나이다. 밤낮으로 주의 손이 나를 무겁게 누르오니, 내 진액이 여름 가뭄에 마른 것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시 32:3,4). 당신은 상징적이면서도 강한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가? 혹은 당신 자신의 신앙의 역사를 통해 이 말씀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개인의 체험 없이는 도저히 만족스런 해석을 할 수 없는 성경구절들이 많이 있다.

 

다음 구절에 나오는 말씀은 참으로 매우 복된 말씀이다. "내가 말하기를, 나의 범법한 것들을 주께 고백하리이다, 하고 주께 내 죄를 시인하고 내 불법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주께서 내 죄의 불법을 용서하셨나이다. 셀라"(시 32:5).

 

 

4. 성경 말씀이 읽는 이로 하여금 죄를 심히 미워하게 만들 때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주를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악을 미워하라."(시 97:10)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우리는 악을 피하고 그 속에 계속 머물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악을 대항하고 마음속으로 그것에 분개해야 한다."(C. H. 스펄젼)

 

회심했다고 고백한 후에 이를 확인해 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시험은 죄에 대한 마음의 태도이다.

 

거룩한 생활의 원칙이 마음에 세워지면 거룩하지 못한 모든 것을 미워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죄를 미워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죄악을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감사하게 된다.

 

다윗의 경험을 보라. "주의 교훈들을 통해 내가 깨달음을 얻으므로 모든 거짓된 길을 미워하나이다."(시 119:104). 이 말씀을 잘 살펴보면 거짓된 길을 "단지 삼가는" 정도가 아니라 "미워하며", "일부 혹은 몇 가지"가 아니라 "모든 거짓된 길"이며 단순히 "모든 악"이 아니라 "모든 거짓된 길"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모든 것에 관한 주의 교훈들을 바르게 여기며 모든 거짓된 길을 미워하나이다"(시 119:128). 그러나 사악한 자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반대의 말씀을 하신다.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시 50:17). 잠언 8장 13절을 보면 "주를 두려워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 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신명기 17장 18-19절을 보라. "그가 자신의 왕국의 왕좌에 앉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있는 것에서 이 율법을 책으로 한 권 필사하여, 평생토록 자기 곁에 두고 읽어서 주 자기의 하나님 두려워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법규를 지켜 행할 것이니라."

 

다음의 말은 이에 대해 아주 바르게 설명해 주고 있다. "죄를 미워하기 전까지는 결코 죄를 죽일 수 없다. 마치 유다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고함을 지르며 그분을 증오했던 것처럼 참으로 그렇게 죄를 미워하지 않고는 결코 울부짖으며 죄를 대적할 수 없을 것이다."(E. 레이너 1635).

 

 

5. 하나님 말씀으로 인해 죄를 버리게 될 때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다 불법에서 떠날지어다"(딤후2:19).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이며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더욱 더 잘 알 수 있다. 더욱이 우리의 마음이 주님과 함께 바른 관계에 있다면 우리의 생활 방식도 그 말씀에 더욱 부합될 것이다. 이를테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요삼 4절)이 있게 된다. 고린도후서 6장 끝 부분을 보면 자신들을 불신자들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사람들에게 주신 귀한 약속 몇 가지가 있다. 성령님께서 이것들을 어떻게 적용하시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라. 그분께서는 "이 약속을 가진 자들이여, 그러므로 위로를 받고 안심하라" 고 하시지 않고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이 하자"(고후 7:1) 고 말씀하신다.

 

"이제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깨끗하게 되었으니"(요 15:3). 이 말씀에는 우리가 늘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아야만 하는 중요한 규칙이 들어 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여 우리의 행위를 깨끗하게 하고 있는가? 구약의 시편 기자는 이런 질문을 하였다. "청년이 무엇으로 자기의 길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하나님은 이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신다.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라". 옳은 말씀이다. 말씀을 단순히 읽고 믿고 기억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우리의 "행실"에 적용시킴으로 깨끗함을 받을 수 있다.

 

"음행을 피하라"(고전 6:18),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전 10:14), "이것들을 피하라-즉 돈을 사랑하지 말라“(딤전 6:11),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딤후 2:22).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버리고 떠나기 위해서는 위의 사항들을 삶에 적용시켜야 한다. 죄는 단지 고백하는 차원을 넘어서 "버려야"(잠 28:13)하는 것이다.

 

 

6. 하나님 말씀을 통해 죄에 대해 강력히 저항하게 될 때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성경은 우리의 본성에 따른 죄를 나타내주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롬 3:23) 여러 가지 면들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죄로부터 구원받고 하나님을 노엽게 만드는 길에서 떠나는 방법들을 제시해주고 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숨겼나이다"(시119:11).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는 실천 사항이다. "청하건대 너는 그분의 입에서 법을 받고 그분의 말씀들을 네 마음에 쌓아 두라"(욥 22:2). 이 말씀은 우리가 특별히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귀중히 여길 필요가 있는 명령이며 권고며 훈계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하며 묵상하는 가운데 기도로 실천에 옮겨야 하는 것이다. 땅에서 잡초가 자라는 것을 막으려면 좋은 씨를 뿌려야 한다. "악에게 지지 말고 도리어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더욱 "풍성히"(골 3:16) 거하면 거할수록 죄가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서 활동할 자리는 더욱 좁아질 것이다.

 

성경이 진리임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다고 볼 수 없다. 우리는 성경을 사랑을 가지고 애착심을 가지고 받아야 한다. 성령님께서는 사람들이 배교하는 이유가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기"(살후 2:10)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입술이나 마음속에만 두고 이야기 거리나 사색 거리로 삼는다면 곧 그 말씀이 사라지고 만다. 땅 표면에 놓인 씨앗은 공중의 새들이 물어가고 만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땅속 깊이 묻어야 한다. 말씀을 귀로 듣고 생각 속으로 넣고 그 뒤 마음속에 깊숙이 새기고 다시 새겨 마음 깊숙이 잠기게 해야 한다. 말씀을 사랑으로 받는다는 것은 말씀이 마음속에서 우선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말씀을 우리의 정욕보다 더 소중히 여길 때 말씀이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T. 맨튼)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결코 미끄러지지 아니하리로다"(시 37:31).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세상의 나쁜 영향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사탄의 유혹에서 건져 주며 죄에 대한 효과적인 예방법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진리가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양심을 움직이며 우리가 진정으로 진리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결코 실족하지 않을 것이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들 때에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하리이까?"(창 39:9) 라고 말하였다. 말씀이 그의 마음속에 있어 그의 정욕보다 더 큰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말로 다할 수 없이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구원하실 수도 있고 멸망시키실 수도 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이 일에 귀를 기울이겠느냐? 누가 다가오는 때를 위하여 귀를 기울이고 듣겠느냐?"(사 42:23).

그렇다. 앞으로 다가올 비상 사태에 대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저장해 둠으로써 미래를 예견하고 방어해야 하는 것이다.

 

 

7. 말씀이 그것을 읽는 이로 하여금 죄와 반대되는 것을 행하게 만들 때 우리는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는다.

 

"누구든지 죄를 범하면 율법도 범하는 것이니 죄는 곧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요일 3:4). 하나님께서는 "너는.....을 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죄는 "나는......을 하지 않겠다" 말하며, 하나님께서 "너는.....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 죄는 "나는 .....을 하겠다"고 대답한다. 이와 같이 죄는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이며 자기 갈 길로 가고자 하는 결심하는 것이다(사 53:6).

 

또한 죄는 영적 세계에 존재하는 일종의 무정부 상태이며 하나님 앞에서 붉은 기를 드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불법을 행하지 않으려면 법에 굴복해야 하듯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않으려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이처럼 죄와 반대되는 길로 걷기 위해서는 순종의 길로 걸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성경을 주신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을 깨닫게 된다. 또한 성경은 책망과 바르게 함을 위해 유익할 뿐만 아니라 의로 교육하기에도 유익한 것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아야 하는 중요한 사항이 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사고를 형성하고 있으며 내 마음을 지배하며 내 길과 행실을 통제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요구를 하신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의 표현 방법을 보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명령들을 지키라"(요 14:15).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나로 하여금 주의 명령들의 길로 들어가 걷게 하소서. 내가 그것을 기뻐함이니이다"(시 119:35). 이것이 바로 다윗의 기도였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가는 길을 보여 줄 빛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행하고자 하는 마음도 필요하다. 우리의 마음은 어두운 고로 지침이 필요하고 우리의 마음은 연약한 고로 은혜의 역사가 필요하다. 만일 우리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따르지 않는다면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다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맨튼).

 

진리를 받아들여 죄와 반대되는 것을 행하는 것이 "주의 명령의 길"임을 유의하라. 이 길은 자신이 선택하는 길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명백히 제시된 길이며, 누구나 다 아는 "큰 길"이 아니라 개인만이 아는 "좁은 길"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 같이 위에서 열거한 7 가지 사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그리고 열심을 내어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우리의 성경 공부가 우리 자신을 더욱 겸손하게 만들었는가? 혹시라도 지식을 얻었다는 자부심을 갖게 하지는 않았는가? 성경공부가 우리 자신을 친구보다 더 높은 존재로 만들어 사람의 존경을 받게 만들었는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좀더 겸손하게 만들었는가? 성경 공부가 자신의 죄성에 대한 혐오감과 증오심을 유발시켰는가? 아니면 자신에 대한 깊은 만족감을 주었는가?

 

우리가 교제하거나 가르치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나도 저 정도의 성경 지식을 가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탄식하게 만들었는가? 아니면 그들로 하여금 ‘나의 선생님이나 친구에게 주셨던 믿음과 은혜와 거룩함을 주소서!’ 하고 주님께 기도하도록 만들었는가? "이것들을 묵상하고 네 자신을 이것들에 온전히 드려 너의 진보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 4:15).

 

- 아더 핑크, "성경은 언제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가 - Profiting from the Word" 중에서

 <출처: 자료바구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