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의인들을 다루는 방법 / 아더 핑크
1.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자들에게 살리는 영향이나 힘을 발휘하심
본래 저희는 영적으로 허물과 죄로 죽었다. 그러므로 저희는 영적으로 살아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생할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시고(요 5:24) 우리로 그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시며(벧후 1:4) 우리를 어두움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다(골 1:13). 이제는 분명히 우리가 연약하므로 자력으로 이것을 할 수 없다(롬 5:6).
그런고로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생할 때에 우리로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하게 하셨다. 성품은 원리 ―씨― 생명이 우리에게 교통한다. 그것은 “성령으로 난 것이다”. 그런고로 “영이다” 성령으로 났기 때문에 그것은 거룩하다. 이 하나님이 거룩한 성품을 떠나서는 아무라도 전적으로 신령한 충동을 되살릴 수 없고 신령한 개념을 구성할 수 없고 신령한 생각을 할 수 없고 신령한 것을 이해할 수 없고 더욱이 신령한 일을 할 수 없다. “성결됨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중생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성결해 지려는 생각조차 없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제도를 원치 않는다. 그렇다면 그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위해 기도하며, 찾으며, 또 노력 하겠는가? 정녕 그렇지 않을 것이다.
만일 사람이 본성에서 그가 마음에서 싫어하는 것을 좇으며 그가 한때에 미워하던 이를 지금에는 사랑한다면 그것은 그의 속에서 이적적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요 자기의 외부에서 온 세력이 그에게 역사했기 때문이다. 그의 옛 성품과는 전연 같지 않은 성품이 그에게 내주하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성경에 이르기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라고 하였다. 바로 전에 말한 것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어두움에서 빛으로, 또 사단의 힘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이다(행 26:18). 그렇게 위대한 변화가 다른 방법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신생은 일시적으로 죄를 통회하여 단순히 눈물이나 몇 방울 흘리는 것 보다 훨씬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생활 과정을 변케 하여 나쁜 버릇에서 좋은 버릇으로 고치는 것 보다 훨씬 고상한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고상한 이상을 품고 실천하는 것과 다른 것이다. 그것은 인기 있는 전도자 앞에 나와서 손을 들고 믿기로 결정한다는 카드에 서명하거나 또는 교회에 가입하는 것 보다 한정 없이 깊은 것이다.중생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의 시작이요 새 생명을 영접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개혁함이 아니라 온전히 변화함이다.
요약한다면 신생은 이적 즉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의 결실이다. 중생은 급변적이요, 혁명적이요 또 영구적인 것이다.때가 되매 먼저 하나님이 당신의 택자들에게 하시는 것이 있다. 그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붙잡고 그들을 되살려 새 생명을 주신다. 그는 죄인으로 잉태되어 죄인으로 난자를 취하셔서 당신의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신다. 그가 사단의 포로가 된 자를 빼내셔서 믿음의 식구가 되게 하신다. 그는 거지를 골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가 되게 하신다.
그는 당신과 정 반대되는 원수에게 이르셔서 그에게 새 마음을 주셔서 당신을 온전히 사랑하게 하신다. 그는 본래 반역자인 사람에게 굴욕을 참고 그에게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할 마음을 주사 그렇게 하게 하신다. 그는 불가항력적 세력으로 죄인이 성자로, 원수가 친구로, 사단의 종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다. 그런고로 우리는 확실히 감동되어 이렇게 말한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다 갚겠네 특별한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2. 하나님께서 택자들에게 활력을 발휘하심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들이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다른 것들 가운데서 그들이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2:18)고 하였고 또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소서”(3:16)라고 기도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의 선한 싸움과 저희를 대항하여 계속하여 싸우는 대적하는 세력과 싸울 수 있다. 저희는 다만 ‘양’과 같아서 자신들에게는 힘이 없다. 양은 동물 가운데 가장 미약한 것이나 언약은 확실하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사 40:29).
하나님께서 이 활력을 의인에게 내적으로 발휘하시므로 합당하게 당신을 봉사할 수 있게 하신다. 옛 선지자가 말하기를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의 ……채움을 얻고”(미 3:8)라고 하였다. 또 우리 주님은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을”것이라(행 1:8)고 하셨는데 다음 말씀으로 그것이 증명되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 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행 4:33)라고 한 말씀이다. 바울도 역시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면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이 능력의 역사하는 범위는 제한되어 있지 않음은 벧후 1:3에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신자의 성격에 속하는 여러 가지 아름다움은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와 절제”인데 이것들은 직접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성령의 열매”라고 가리킨다.. (갈 5:22, 고전 8:16)
3. 하나님께서 택자들에게 직접 영향이나 권능을 발휘하신다.
옛날 그가 당신의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하실 때에 저희를 낮에는 구름 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다. 오늘날 그가 당신의 성도들을 그렇게 인도하시는데 외적으로 보다 내적으로 하신다. “이 하나님은 영영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 하시리로다”(시 48:14)라고 하였으나 그가 우리를 인도 하실 때에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할 마음을 주시고 또 그렇게 행하게 하신다.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이 엡 2:10에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한 바울의 말씀에 분명하게 알려진다. 그래서 자랑할 만한 근거는 다 없어지고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지자가 말한 대로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평강을 베푸시오리니 주께서 우리 모든 일을 우리를 위하여 이루심이니이다”(사 26:12)라고 해야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고 하신 말씀이 얼마나 참된지 모른다(시 65:4, 겔 36:27).
4. 하나님께서 택자들에게 보전하는 영향이나 권능을 발휘하신다.
이 복된 진리를 말한 성구가 많다.
“저가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시 97:10).
“여호와께서 공의를 사랑하시고 그 성도를 버리지 아니 하심이로다 저희는 영영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시 37:28).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다 보호하시고 악인은 다 멸하시리로다”(시 145:20).
신자들의 책임과 충성에 관해서 성구를 더 열거하거나 변론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숨을 멈출 때에 호흡할 수 없는 것과 같이 그가 우리를 보호하시지 않으면 우리가 스스로 보전할 수 없다. 또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얻나니”(벧전 1:5, 대상 18:6).
하나님께서 비 택자들을 주관하심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네 가지 감화력 혹은 권능을 저희에게 발휘하심을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라이스(Rice)박사가 명백하게 분류한 것을 인용한다.
1. 하나님께서 때로는 악인들에게 구속하는 힘을 발휘하셔서 그것으로 저희가 곧 단행하려는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막으신다.
이에 대한 분명한 예는 그랄의 왕 아비멜렉에게서 보여준다. 아브라함이 그랄지방에 내려갔을 때 그의 아내 때문에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서 자기 아내더러 누이라 하라고 지시했다. 사라가 미혼 여자인줄 알고 아비멜렉이 사자를 보내서 그녀를 자기에게 데려오게 했었다. 이때에 하나님이 당신의 능력으로 그녀의 명예를 어떻게 보호하신 것을 다음 말씀에서 알 수 있다.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 하지 않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못하게 함이 이 까닭이니라”(창 20:6)라고 한 말씀이다.만일 그가 간섭하시지 않았더라면 아비멜렉이 사라에게 범죄 했을 것이나 주님이 그를 제재하셔서 그 마음속에 품은 악한 생각을 구체화시키기를 허락하시지 않았다.
비슷한 경우가 요셉과 그 형제들이 그를 취급함에서도 들어난다. 야곱이 요셉을 더 사랑하는 것을 알고 요셉의 형제들이 그를 미워서 저희 맘대로 할 수 있는 줄 알고 “저희가 그를 죽이기로 꾀했다”(창 37:18).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한 계획을 성취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먼저 하나님께서 르우벤을 감동시켜서 그를 저희의 손에서 구원하셨고 다음에는 유다로 하여금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서 저희가 그를 애굽으로 데리고 가게 하자고 하게 하셨다. 몇 해 후에 요셉이 자기 형들에게 알게 한 대로 하나님께서 저희들로 그렇게 제재하신 것이 분명히 들어난다. 요셉이 말하기를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8)고 했다.하나님께서 제재하는 힘을 악한 자에게 발휘하신 예가 발락이 선지자 발람을 시켜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한 경우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하나님이 방임해 두었을 때에 발람이 발락의 청원을 쉽게 수락한 것이 확실하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의 마음에 있는 생각을 제재하신지를 그 자신의 말로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민 23:8,20). 하나님이 제재하시는 힘을 악인 개인에게 뿐 아니라 한 민족 전체에게도 발휘하신다. 여기에 대한 놀라운 실례는 출 34:24의 말씀 즉 “내가 열방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너의 하나님께 보이러 올 때에 아무 사람도 네 땅을 탐내어 엿보지 못하리라”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해마다 세 번씩 여호와의 명령대로 자기들의 집과 소유를 다 그대로 버려두고 절기를 지키려 예루살렘에 올라와 있는 동안 하나님의 약속대로 저희의 이방인 이웃들의 탐심에서 나오는 계획과 소원을 제재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짐을 보호하실 것이란 말씀이다.
2. 하나님께서 때로는 당신의 주장이 성취되게 하기 위해서 악한 자들에게 저희의 육에 속한 태도의 반대로 그것을 무효케 하는 유순한 세력을 발휘하신다.
위에서 요셉의 역사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악한 자에게 제재하는 능력을 역사하셨다고 하였으나 이제는 그가 애굽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역시 불의한 자들에게 유순하게 하는 능력을 나타내셨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가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다”고 말한다.
그의 상전이 주님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알고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의 총무를 삼았다”(창 39:3,4).
후에 요셉이 억울하게 옥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같이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 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창 39:21) 전옥이 요셉에게 많은 친절을 베풀고 그를 존경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옥에서 석방된 후에 행 7:10에 보면 “주께서 그 모든 환란에서 건져 내사 애굽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세웠느니라”고 한 것을 알게 된다.
바로의 딸이 어린 모세를 돌본데 에서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모세의 원수들로 실패케 하신 놀라운 증거를 보여 준다. 바로가 명령을 내려 이스라엘 사람들의 장자 아기들은 다 학살하라고 했다. 어떤 레위인이 아기를 낳았는데 석 달 동안 그 어머니가 집에 감추어 두었다. 그 이상 더 숨겨 둘 수 없어서 아기를 바구니에 담아서 강가에 있는 갈밭에 숨겨 두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애굽 공주가 강에 목욕하러 갔다가 아기를 발견하고 히브리인의 남자 아이가 나면 강에 던져 죽이라고 한 아버지의 악한 법령대로 하지 않고 “그녀가 그 아이를 불쌍히 여겼다”(출 2:6). 그래서 이 어린 생명이 구출되어 후에 이 공주의 양자가 되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접근하셔서 당신의 주권적 목적에 따라서 그 마음들을 부드럽게 하신다. 불경건한 에서가 자기 아버지를 속인 동생에게 복수하려고 맹세했으나 다음에 야곱을 만났을 때에 그를 죽이지 않고 “그의 몸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 맞췄다”(창 33:4).
이세벨의 나약하고 악한 남편 아합은 선지자 엘리사의 기도로 삼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을 때에 심히 노해 그를 원수로 여겨 사방으로 그를 잡으려고 찾았으나 그를 찾지 못한 때에 그가 맹세하였다(왕상 18:10). 오히려 저희가 피차 만났을 때에 선지자를 죽이는 대신 아합이 그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로 보내어 선지자들을 갈멜산으로 모으니라”(20절).
유대인 여자 에스더는 위엄 있는 메대 파사의 왕궁에 들어가는 것이 “규례를 어기는 것”(에 4:16)이라고 말했다. 그때에 그는 죽을 것을 각오했으나 “그가 심히 사랑스러움으로 왕이 손에 잡았던 금홀을 그에게 내어 미니”(에 5:2)라고 했다.
또 청년 다니엘은 외국에 포로가 되었다. 그때에 왕이 그와 그의 동무들에게 매일 먹을 음식을 정해 주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마음에 결심하고 그 지정한 음식을 먹어서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로 하고 자기의 뜻을 환관장인 그의 상전에게 말했다. 어떻게 되었는가? 그의 상전은 이방인이요 또 왕을 두려워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다니엘을 향하여 노하여 그의 명령대로 실시하라고 하였는가.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님이 다니엘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단 1:9).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 21:1).
이것에 대한 놀라운 예가 이방 왕 파사의 고레스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백
은 포로가 되었으나 그 포로에 대한 예언된 목적에 거의 도달했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은 폐허가 되어 있고 유대인들은 먼 나라에 있었다. 그런 형편 아래서 주의 집을 재건하는 것에 아무 소망이 없었다. 그러나 다음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신 것을 알 수 있다.
“파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파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스 1:1-2).
기억해야 할 것은 고레스는 이방인이요 역사가 증거 하는 대로 그는 매우 악한 왕이었다. 그러나 주님이 그를 감동하셔서 당신의 말씀이 예레미야를 통하여 70년이 차기 전에 성취되도록 이 조서를 내리게 하셨다.
스 7:27의 기사에서 같은 예시가 발견되니 이에 의하면 에스라는 하나님이 아닥사스다 왕으로 하여금 고레스가 재건하가고 명령한 그 집의 준공과 미화시키게 하신 일에 대하여 감사함을 돌린 것이 나타난다.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그가 왕의 마음에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셨다”(스 7:27).
3. 하나님이 때로는 악인들에게 지도하시는 권능을 발휘해서 전화위복이 되게 하심.
적절한 경우로 요셉의 역사에 다시 한 번 돌아가서 살펴보자. 그 형들이 잔인하고 무심한 동기로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았다. 저희는 그를 치워버리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장사꾼에게 파는 것이 제일 쉬운 방법이었다. 그들에게는 이 고귀한 소년을 노예로 사는 것은 이익을 보려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희의 악한 행동 이면에서 비밀히 역사하셔서 그들을 주장하신 것을 볼 수 있다.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로 마침 이스마엘 사람들이 그때에 지나가므로 요셉을 죽이려든 일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더욱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요셉을 보내시려고 하던 애굽으로 여행하는 도중에 있었다. 또 하나님은 저희가 요셉을 살 것을 미리 정해두셨다. 이 사건에 하나님의 손이 역사하셨고 이것이 다행스러운 우연적 기회 이상의 것이었음은 후에 요셉이 자기 형들에게 한 말씀에서 분명히 들어난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창 45:7)라고 하였다.하나님께서 지도하시는 능력이 악인에게 나타나심에 대한 또 하나의 뚜렷한 예가 사 10:5-7 말씀에 나타나 있다. 그 말씀은 다음과 같다. “화 있을진저 앗수르 사람이여 그는 나의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나의 분한이라 내가 그를 보내어 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하여 나의 노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가로상의 진흙 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늘 그의 뜻은 이 같지 아니하며 그 마음의 생각도 이 같지 아니하고 오직 그 마음에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여”라고 한 말씀이다.
앗수르 왕은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기 위하여 세계적 정복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군략적 야욕과 야망을 지휘하시며 주장하셔서 그로 하여금 당시 적은 이스라엘 나라를 정복하는데 그의 마음을 집중하게 하셨다. 그러한 일이 교만한 왕의 마음에 없었으나 (그는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하나님이 그로 어떻게 하셨으므로 그대로 하는 것 외에 별 수가 없었다(삿 7:22).
악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능력을 발휘하신 최고의 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거기 관련된 모든 형편들이다. 일찍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으로 경영하는 섭리로 증거 된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사건이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모든 사건들 가운데 그 사건의 세밀한 부분까지 예정하셨다. 우연이 또는 사람의 임의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서 또 어떻게 당신의 아들이 죽을 것을 작정해 두셨다. 그가 십자가의 죽음에 대하여 목적하신 것의 대부분은 구약 예언을 통하여 알려졌고 이 예언들의 정확하고 말씀하신 대로 성취에 있어서 하나님이 악인들 위에 발휘하신 주관적 능력에 대하여 분명히 증명되고 충분히 지시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시지 않은 것이 없고 그가 다 작정하신다. 그가 목적하신 대로 되었고 또 그렇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그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배반을 당할 것이 작정되었다면(시 41:9 참고 마 26:50 비교)그를 판 자는 예수의 제자 유다이다. 그 배반자가 그 무서운 반역적 행위의 삯으로 은 삼십냥을 받을 것으로 작정되었고 대제사장들이 그에게 이 돈을 주었다. 이 반역에서 얻은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살려고 했으나 하나님의 손이 유다를 인도하여 그 돈을 대제사장에게로 돌려주었고 또 저희의 뜻을 돌이키게(마 27:7)하셨다. 우리 주님에 대하여 거짓 증거할 사람들을 작정하셨다면(시 35:11) 그대로 그런 일이 발생했을 것이다.
주님의 영광은 “때리고 욕하는 것”(사 50:6)이 될 것이라고 작정해 놓으셨다면 그렇게 할 자들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구주께서 “죄인으로 간주”될 것으로 작정되었다면 자기도 모르게 빌라도가 다른 두 강도와 함께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 달려 있는 동안 초와 우슬초를 주어서 마시게 하기로 작정되었다면 하나님의 이 작정이 바로 문자 그대로 실시되었다. 무심한 군인들이 그의 옷을 제비 뽑을 것으로 작정되었다면 확실히 저희가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의 뼈가 하나도 상하지 않을 것으로 작정되었다면(출 12:46, 민 9:12) 하나님의 주관하시는 힘으로 로마 군인들로 두 강도의 다리는 꺾게 하되 우리 주님에게는 그렇게 하시지 못하게 하셨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뼈 하나를 군인이나 사귀들이 꺾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이 이상 더 말할 필요가 있는가? 십자가의 죽으심과 관련하여 성경에 예언된 것 전부가 정확히 또 글자대로 성취된 것은 전능한 힘이 그 날에 된 것은 다 지도하시고 주관하신 것을 변론할 여지가 없음을 나타낸다.
4.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시고 또 저희의 눈을 어둡게 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강퍅케 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신다.” 이것은 성경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을 전개할 때에 이제 우리는 그 가장 장엄한 장면에 도달하였고 특별히 성경 말씀에 접근해야 한다.
우리가 성경 말씀 보다 한 치라도 더 나아감을 하나님이 금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가는 은혜를 주시기 바란다. 신비로운 것은 하나님께 속함이 사실이나 성경에 계시된 것들은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속해 있음도 역시 사실이다.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그 종들에게 교활히 행하게 하셨도다”(시 105:25). 이 말씀은 야곱의 자손들이 애굽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을 때를 언급한다. 이 늙은 족장과 그 가족을 영접한 바로가 죽은 후에 요셉을 모르는 새 왕이 즉위할 때였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 자손이 크게 번성하여 애굽 사람들보다 많아졌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저희의 마음을 변케 하여 당신의 백성을 미워하게 하셨다.
애굽인들이 미워한 결과 저희가 하나님의 백성을 잔인하게 구속하고 무자비한 감독아래 두기를 그 백성이 감당할 수 없을 때까지 했다. 이에 응답해서 그가 모세를 저희의 지도자로 주어서 구원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친히 당신의 택하신 종에게 나타나셔서 애굽 궁중에 가서 많은 이적을 행할 힘을 주시고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가서 사흘 동안 영호와를 경배하게 해줄 것을 요청하게 하셨다.
그러나 모세가 떠나가기 전에 바로에 대하여 모세에게 경고하시기를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출 4:21)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는가라고 질문한다면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기 위함이라”(롬 9:17)고 성경이 대답한다.
다르게 말한다면 그것은 주님이 교만하고 권세 있는 왕을 정복시키므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이런 방법을 택하셨을까 그것은 하나님은 임의로 행하시니 당신이 원하시는대로 행하실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여서 이스라엘로 나가지 못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그 땅에 심한 재앙을 내려서 그가 마지못해 제한적 허락을 하게 했고 애굽 사람들의 처음 난 것들을 죽였고 이스라엘이 실제로 해방된 후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애급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시더니”(출 14:17-18)라고 하셨다.
이런 사건이 헤스본 왕 시혼에게 생겼으니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 그의 땅을 통과해야만 했다. 저희의 역사를 회고할 때에 모세가 그 백성에게 말하기를 “헤스본 왕 시혼이 우리의 통과하기를 허락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붙이시려고 그 성품을 완강케 하셨고 그 마음을 강퍅케 하셨음이라”(신 2:30)고 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들어간 다음에 그렇게 된 것이 다음 말씀에서 증명된다. “기브온 거민 히위 사람 외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화친한 성읍이 하나도 없고 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쳐서 취한바 되었으니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 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로 모세에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수 11:19-20)(가나안 족속이 죄가 많아 부패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진멸하려 하였다).
이 장엄한 진리의 계시가 구약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요 12:37-40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니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에 매우 주의해야 할 점이 있으니 하나님에게 눈이 멀게 함과 마음을 강퍅케 하심을 당한 자들은 짐짓 빛을 조롱하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증거를 거역한 사람들이었다.
살후 2:11-12의 말씀을 생각해 보자.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성구는 앞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유대인들에게 하신 것을 오히려 기독교인들에게도 하시려고 한다. 그리스도의 당시에 유대인들이 그의 증거를 멸시한 나머지 그들의 눈이 어두웠던 것과 꼭 같이 진리를 배격하는 과오를 범한 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이 유혹을 당하게 하셔서 저희가 거짓을 믿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세상을 주관하시고 계시는가?
그가 인류를 다스리는 역사를 하시는 방법이 무엇인가?
그가 인간을 어떤 범위와 방편으로 통치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마음으로 당신과 원수가 된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가 어떤 방법으로 그들을 감화시키시는가?
이런 문제들을 성경에 비추어서 대답하려고 시도한 것들 가운데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자들에게 살리는, 지휘 하는, 또 보전하시는 능력들을 발휘하신다. 그러나 악인들에게는 그가 구속한 유순한, 지도하시는, 강퍅하게 하는 또 눈이 멀게 하는 능력을 발휘하시되 당신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무한한 지혜와 공의의 지시에 의하여 발휘하신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은 다 그대로 실시된다.
그가 작정하신 것은 다 성취된다.
사람의 악행에는 제한이 있다.
악행과 악인들에 대한 제한은 하나님께서 정했으니 그 한계는 넘어갈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모를지라도 선인과 악인이 다 같이 최고 주권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계 19:6)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그 행사에 속해 있고 또 그가 모든 것을 다 다스리신다.
당신은 정말 하나님을 아는가?” /아더핑크
당신은 정말 하나님을 아는가?
그분이 어떤 분이시건, 그저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는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더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해, 더 건강해지고 젊어지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오늘은 또 얼마나 부단히 노력했는가?
당신은 스스로 자랑으로 여기는 것을 위해 당신의 시간과 정성과 체력을 아낌없이 쏟아 붓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는가?
정말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그분을 신뢰하며 사랑하며 경외하며 경배하고 있는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은 제대로 믿을 수도, 섬길 수도 없다. 당신은 스스로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겠지만, 어떻게 자녀가 자기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모를 수 있겠는가?
설령 안다고 해도, 당신이 믿고 싶은 하나님의 한가지 성품만을 붙잡고 왜곡된 신의 형상을 하나님으로 그리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 자녀는 하나님 말씀과 교제와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바르게 알려는 노력을 한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당신이 이 세상에서 얻어야 할 모든 지식의 근본이다. 오직 자기 하나님을 아는 백성만이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자기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욥 22:21)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렘 9:23,24) .
구원에 이르는 영적 지식,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지식이다.
하나님에 관한 참 지식은 성경에 계시된 그분의 완전한 속성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알지 못하는 하나님은 믿을 수도, 섬길 수도, 경배할 수도 없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이론으로 아는 것 이상의 지식이 필요하다.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분의 권위에 순종하며, 범사에 그분의 거룩한 규례와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영혼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 수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즉, 복종을 통해) 여호와를 알자” (호 6:3) .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 알리라” (요 7:17) .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단 11:32) .
말씀에서 영적 유익을 얻기 위해 주목할 부분(성경과 죄) |
당신은 정말 하나님을 아는가?” /아더핑크
당신은 정말 하나님을 아는가?
그분이 어떤 분이시건, 그저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는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더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해, 더 건강해지고 젊어지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오늘은 또 얼마나 부단히 노력했는가?
당신은 스스로 자랑으로 여기는 것을 위해 당신의 시간과 정성과 체력을 아낌없이 쏟아 붓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는가?
정말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그분을 신뢰하며 사랑하며 경외하며 경배하고 있는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은 제대로 믿을 수도, 섬길 수도 없다. 당신은 스스로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겠지만, 어떻게 자녀가 자기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모를 수 있겠는가?
설령 안다고 해도, 당신이 믿고 싶은 하나님의 한가지 성품만을 붙잡고 왜곡된 신의 형상을 하나님으로 그리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 자녀는 하나님 말씀과 교제와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바르게 알려는 노력을 한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당신이 이 세상에서 얻어야 할 모든 지식의 근본이다. 오직 자기 하나님을 아는 백성만이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자기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욥 22:21)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렘 9:23,24) .
구원에 이르는 영적 지식,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지식이다.
하나님에 관한 참 지식은 성경에 계시된 그분의 완전한 속성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알지 못하는 하나님은 믿을 수도, 섬길 수도, 경배할 수도 없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이론으로 아는 것 이상의 지식이 필요하다.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분의 권위에 순종하며, 범사에 그분의 거룩한 규례와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영혼만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 수 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즉, 복종을 통해) 여호와를 알자” (호 6:3) .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 알리라” (요 7:17) .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단 11:32) .
출처: 개혁주의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grace
현대 복음주의의 치명적 결함(아더 핑크)
요즈음 보편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사실은 기독교계 안에 영성이 쇠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가 급격하게 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주님의 백성들은 복음이 여전히 널리 전해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위안을 갖습니다.
슬프게도 이들의 낙관적인 추측은 근거가 약하며 모래에 기초를 둔 것입니다.
만약 지금 선교 홀에서 전해지고 있는 메시지를 조사해 보거나, 일반대중 가운데 뿌려진 소책자를 면밀히 검토해 보거나, 옥외에서 전해지는 말씀을 주의해서 들어 보거나, 구령 캠페인에서 전해지는 설교나 강연을 분석해 보거나, 현대의 복음주의를 성경의 저울에 무게를 달아보면, 요컨대, 참된 회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없으며, 죄인이 구원자(救主:Saviour)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본질적인 것이 없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변화된 삶의 열매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흠을 잡으려고 이 글을 쓰거나 남의 감정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함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며, 완전함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평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다른 이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비평하는 것도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훨씬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시대의 "복음주의"는 철저하게 표면적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복음주의는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나오도록 호소하는 기초가 전혀 없습니다.
오늘날 복음주의 안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하나님의 거룩보다 훨씬 더 크며,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진노보다 훨씬 더 크다는 균형을 잃은 슬픈 양상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를 알게 하기 위하여 주신 것들이 치명적으로 빠져 있습니다. 비난받아 마땅할 멋진 찬양, 유모 있는 익살, 재미있는 일화 등은 도입되었지만, 오직 복음만이 효과적으로 비출 수 있는 어두운 배경은 의도적으로 삭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심각한 것은 이러한 것이 부정적인 면의 한쪽에 불과하다는 점입니다.
더욱 심한 것은 복음이 현대의 싸구려 복음전도자들에 의해 값싸게 팔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내용은 단지 죄인의 눈에 먼지를 날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의 혼은 전혀 의심받지 않고 사용되는 마귀의 마취제로 잠에 빠져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정통" 설교에서 전해지는 "메시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들은 치명적으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길이 사람에게는 옳은 길로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주권적인 은혜의 기적으로 간섭하지 않을 경우, 그 길을 따르는 자는 결국 그 끝이 사망의 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늘(천국)을 향해 가는 중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후에 지옥에서 깨어날 때 참혹한 환멸을 갖게 될 것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반역자를 사악함 가운데서 편하게 만드는 하늘로부터 전해진 좋은 소식인가요?
미친 듯이 쾌락을 추구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믿기만" 하면 장차 두려워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확신을 주고자 주어진 것인가요?
혹자는 대부분의 "복음전도자들"이 복음을 제시하는 방식에 - 오히려 왜곡시킨 방식에 -
비추어 그렇게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회심한 자들"의 삶을 바라 볼 때,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 영적 분별이 있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들을 위해 죽으셨으며, 단지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죄(과거, 현재, 미래)를 완전히 용서받았다고 확신하는 것은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는 것에불과하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 앞서 계시된 하나님의 율법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공의를 완화시켰다거나 그분의 거룩의 표준을 낮추셨다고 공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복음을 성경적으로 설명할 때 복음은 하나님의 공의와 단호함과 그분께서 죄를 절대적으로 혐오하신다는 것에 관한 가장 확실한 실증과 가장 명확한 증거를 보여줍니다.
슬프게도 육체의 자랑은 수많은 자격 없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보다 훨씬 지혜로운 자들이 지나가기를 두려워하는 곳을 뛰어들도록 방임합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비참한 상황을 초래한 원인은 이러한 자격 없는 자들이 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들과 모임들이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이유는 이러한 "회심자"들로 가득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독자들이여, 복음은 결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결코 죄들을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자기 백성들의 범법으로 인한 구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치신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공의의 검을 보여줍니다.
복음은 율법을 무효로 하기는커녕 오히려 율법의 저주를 견디어내시는 구원자(구주)를 보여줍니다.
갈보리는 엄숙하고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를 시간 안에서와 영원 안에서 계속 줄 것입니다.
당신은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이 우상에 집착하고 그 마음이 여전히 죄를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리스도를 단지 개인적인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함으로 복음이 존귀하게 되거나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생각합니까?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며, 복음을 왜곡시키고,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음란한 것으로 변개시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몇몇 독자들은 앞에 기술된 우리의 "거칠고" "비평적인" 말에 반대하며
다음과 같이 물을 것입니다. "영감을 받은 사도가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분명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그렇다면 오늘날 동일하게 죄인들에게 말하는 것이 틀렸단 말인가요?
우리가 그렇게 하는 데에는 신성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요?"
그러한 말씀이 성경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한 말씀이 성경에 있기 때문에 훈련받지 않은 많은 표면적인 사람들이 모두 그 말씀을 그대로 말하는 것을 옳다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행전 16:31이 결코 어중이떠중이 군중들에게 전해진 것이 아니라 특정 개인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그 말씀은 아무에게나 전해진 메시지가 아니라 복음이 최초 전해졌던 자들과 같은 성품을 가진 자에게 전해진 특별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구절들은 절대로 왜곡되어서 안 되며, 본문에 따라 고찰하고, 해석하고, 적용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듯이 숙고하고, 주의 깊게 명상하며, 시간을 드려서 연구해야 합니다.
오늘날과 같은 급변하는 시대가 만든 이러한 겉만 번지르르한 가치 없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잘못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6:31을 보십시오.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사도와 그의 동료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라고 말한 때가 언제이며 누구에게 말했는가요?
복음의 말씀이 진실로 전해진 자들의 특성을 뚜렷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묘사하는 일곱 가지 대답이 있습니다. 이들 일곱 가지 항목들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독자들은 이 항목들을 주의 깊게 숙고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그 말씀을 들은 사람은 바로 전에 기적을 일으킨 하나님의 권능을 목격했습니다.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감옥의 기초가 흔들리고 즉시 모든 문이 열리며 각 사람의 결박이 풀린지라"(행16:26).
둘째, 그 결과로 그 사람은 매우 동요되어 스스로 자기 생명을 포기하려 했습니다.
"간수가 잠에서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친 줄 생각하고, 검을 뽑아 자결하려 하거늘..."(27절).
셋째, 그는 경위를 알고 싶었습니다.
"간수가 등불을 달라 한 후..."(29절).
넷째, 자기 만족을 누리며 살던 그의 삶이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뛰어 들어가 떨면서..."(29절).
다섯째,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바울과 실라 앞에 와 엎드리고..."(29절).
여섯째, 그는 하나님의 종에게 존경과 경의를 보였습니다.
"그들을 데리고 나와..."(30절).
일곱째, 자신의 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물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우리가 기꺼이 배우고자 한다면 우리를 가르치는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그 간수는 "단순히" 믿기만 하라는 권면을 받은 경솔하고 부주의하고 무사태평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신 역사가 자기 안에 이미 역사했다는 명백한 증거를 보여주는 자입니다.
그의 혼은 깨어 있었습니다(27절). 그 간수의 경우, 그의 잃어버린 상태를 깊이 느끼도록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잃어버린 상태를 분명하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사도들이 반드시 회개하도록 설득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의 완전한 태도는 그가 진정으로 회개한 자임을 보여줍니다. 자신들의 타락한 상태에 완전히 눈이 멀어 있고 하나님께 대하여 완전히 죽어있는 자에게 간수에게 전해진 말씀을 적용하는 것은 방금 물에서 나와 후각이 없는 자의 코에 후자극제(嗅刺戟劑 : 냄새로서 각성, 자극시키는 약)를 갖다대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입니다.
독자들은 이 글의 비평을 읽고 사도행전을 주의 깊게 통독하며, 과연 사도가 어중이떠중이 청중이나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에게 연설을 할 때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라고 말한 경우가 단 한 번이라도 있는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구약 성경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신약 성경에 대하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고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에 앞서서 회개로 부르기 전에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처럼,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마음에 율법이 적용되기 전까지는 복음을 받아들이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롬 3:20). 미리 경작하지 않았거나 일구지 않은 땅에 씨를 뿌리는 것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온통 죄를 짓는 일에 몰두하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대속을 소개하는 것은 개에게 거룩한 것을 주는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자는 반드시 그가 인격적인 관계를 가져야 할 분의 성품과 자신에 대한 그분의 권리와 의로운 요구와, 그가 극악무도하게 그분을 무시하고 자기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슬프게도 그리스도의 구원의 본질이 오늘날의 "복음전도자"들에 의해 잘못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구원자 대신에 지옥에서 구원해 주시는 구원자를 전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치명적으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육욕과 세속적인 마음으로부터 구원받고자 하는 갈망이 조금도 없이 불호수만 피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맨 처음 언급하는 곳은 "그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다가오는 진노로부터가 아니라) 그 죄들에서 구원할 것임이라"입니다(마 1:21).
죄의 엄청난 가증함에 관하여 깨닫는 자, 양심에 죄의 무거운 짐을 느끼는 자, 그리하여 죄를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는 자, 죄의 무서운 지배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자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구원자가 되시지만, 다른 이에게는 구원자가 되시지 않습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죄를 사랑하는 자들을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신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사악함을 묵과하며, 하나님을 대적하여 그들을 편드는 죄의 사역자가 될 것입니다.
이 거룩한 분을 그같이 고소하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신성모독인가요?
만약 독자가 "그리스도께서 나를 구원하실 때,나는 죄의 가증함을 알지 못했고, 죄의식으로 복종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즉시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은 결코 구원받은 적이 없거나, 당신이 이전에 구원받았다고 생각했을 때 실제로는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인이 은혜 안에서 자라감에 따라 죄가 무엇인지를 - 하나님께 대한 반역 - 더욱 분명하게 깨닫고, 더욱 더 죄를 미워하고 죄에 대하여 슬퍼하게 됩니다. 그러나 양심이 결코 성령에 의해 찔린바 된 적이 없는 자와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적이 없는 자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떠한 사실의 영역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것과 같습니다.
"온전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하니라"(마 9:12).
진정으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위대한 의사에게서 치료받기를 구하는 자만이 죄로 병든 자입니다. 그러한 자만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죄의 행위와 혼을 더럽히는 죄의 오염으로부터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죄로부터의 구원이요, 죄를 사랑하는 것으로부터의 구원이요, 죄의 지배로부터의 구원이요, 죄의 교활함과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에, 복음전도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와 주된 사역은 죄에 관하여 선포하고, 죄의 열매가 아닌 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정의하고, 죄 안에 있는 무한한 극악성을 보여주며, 마음속에서 죄의 다양한 역사를 찾아내고, 영원한 형벌이 바로 죄의 공로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아, 복음전도자가 죄에 관하여 선포하는 것 - 단지 죄에 관하여 상투적으로 몇 가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죄가 무엇인가를 선포하는 것 - 은 그를 유명하게 만들지 않고 청중들의 관심을 끌지도 않을 것입니다. 분명 그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칭찬을 얻는 것보다 사람의 칭찬을 사랑하는 자와, 구령(救靈)보다 자기 봉급에 더 가치를 두는 자는 그에 알맞은 임기웅변의 조치를 취하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씀의 선포는 사람들을 쫓아내는 것이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신실한 말씀을 선포함으로 사람들을 쫓아내는 것이 부정하게 육체와 영합하여 성령을 쫓아내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전도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이란 용어를 잘못 전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복음전도자들이 전하는 내용은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며 값없이 선물로 받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셨기 때문에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고, 단지 그리스도의 피의 무한한 공로를 믿고 신뢰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이 지금 "정통" 기독교계에 널리 유행하고 있고, 그들의 귀가 멍하도록 자주 듣고 있으며, 그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이제 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하고,
그것이 부적절하고 한쪽으로 치우쳐서 사람을 미혹하며 잘못된 것 이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면, 그는 즉시 이단이라는 낙인을 찍히고 행위 구원을 가르침으로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손상시킨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타락한 피조물이 하나님께 공로를 인정받거나 은혜를 얻을 만한 일을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거룩을 희생하면서 까지 역사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은 결코 죄와 타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원은 값없는 선물로서, 오직 빈손으로 받아야 하며, 여전히 세상을 굳게 쥔 손으로는 결코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셨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배를 채우지 못하는 돼지 먹이인 곡식 껍질로 죄인의 배를 채우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먼 나라에서 돌아서게 하셔서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자기 죄들을 인정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죄인 스스로가 반드시 해야 할 행동입니다. 참으로 이러한 것들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탕자가 계속해서 아버지에게서 떨어져 죄악 가운데 있는 동안은 아버지의 입맞춤과 반지를 받을 수 없는 것 같이, 탕자가 이러한 것들을 행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믿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단단해진 마음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먼저 반드시 그 마음이 부서져야 합니다. 성경은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그와 같이 멸망하리라"고 말합니다(눅 13:3).
회개도 믿음과 똑같이 구원에 필수적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 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그 후에 회개하지도, 믿으려 하지도 아니하였음이니라."(마 21:32).
모든 순서는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정하셨습니다.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회개는 죄를 슬퍼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마음으로 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죄를 버리고자 마음으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자유로이 역사합니다. 왜냐하면 거룩의 요구는 죄를 버릴 때 만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전도자는 반드시 다음과 같이 외쳐야 합니다.
"사악한 자는 자기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아담 안에서 떠났던)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시리라"(사 55:7).
복음전도자의 책무는 그의 청중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병기를 버리도록 요구하여, 그리스도를 통하여 긍휼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구원의 길에 대한 정의가 잘못 내려져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현대의 "복음전도자"들은 죄인이 지옥을 면하며 확실히 하늘(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단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회중을 안심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르침은 죄인을 완전히 잘못 인도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배척하면서 동시에 구주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복음 선포자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자는 또한 주님으로서 그분께 완전히 복종해야 한다'고 부언하기는 하지만, 회심자가 그와 같이 하지 않더라도 하늘이 확실하게 보장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즉시 그러한 말을 쓸모 없게 만듭니다. 그와 같은 주장은 마귀의 거짓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적으로 눈먼 자들만이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권위를 무시하거나 그분의 멍에를 거절하는 자도 구원하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독자들이여,
그것이 은혜가 아니라 수치인 이유는 그리스도를 불법을 장려하시는 분으로 뒤집어씌우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주님(Lord)의 직분으로 하나님의 영예를 유지하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도우시며, 하나님의 법을 집행하고 계십니다.
만약 독자들이 두 개의 호칭이 등장하는 누가복음 1:46,47, 사도행전 5:31, 베드로후서 1:11, 2:20, 3:2, 3:18을 본다면, 항상 "구주와 주님"이 아니라 "주님과 구주"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왕권에 복종한 적이 없고, 그분을 자신의 마음과 삶 가운데서 왕위에 앉힌 적이 없으면서도 여전히 그분을 자신의 구주로 믿는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속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을 환상에서 깨어나게 해 주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오른 손에 거짓을 쥐고 영존하는 타오르는 불 속으로 떨어질 것입니다(사 44:20).
그리스도는 "자신을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창시자"가 되십니다(히 5: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주님 되심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그분께 대해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라는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눅 19:14).
독자들이여,
잠깐 멈추고 정직하게 다음의 질문을 직시하기 바랍니다.
"당신은 그분의 뜻에 복종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진정으로 그분의 명령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슬프게도 오늘날 하나님의 "구원의 길"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본질은 거의 보편적으로 오해되고 있으며, ‘하나님의 구원’이란 용어는 모든 방면에서 잘못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선포되고 있는 "복음"은 십중팔구 진리를 벗어났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하늘(천국)을 향하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사실은 가능한 빨리 지옥으로 서둘러 가고 있습니다.
기독교계 안에 이러한 사태는 심지어 "비관론자"와 "기우가 심한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나쁩니다.
우리는 대언자가 아니며, 결코 대언서의 예언을 고찰하는데 깊이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필자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들이 자주 그렇게 행함으로 스스로 어리석은 자가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하건대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영국에서조차 종교적인 상황은 150년 전보다 훨씬 더 나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심히 두려워합니다. 하나님께서 진정한 부흥을 주시지 않는다면, 머지 않아 곧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짙은 어둠이 백성들을 덮을 것입니다"(사 60:2). 왜냐하면 참된 복음의 빛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판단컨대 현대의 "복음주의"는 모든 "시대의 표적들" 가운데서 가장 심각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작금(昨今)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에베소서 5:11이 하나님의 답을 주고 있습니다.
"열매없는 어두움의 일들에 참여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들을 책망하라".
말씀의 빛을 대적하는 것은 모두 "어두움"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가져야 할 의무는 오늘날의 "복음주의" 괴물과 아무 관계도 갖지 않으며, 이들에 대한 모든 도덕적 재정적 지원을 보류하고, 그들의 모임에 참석하지 않으며, 그들의 소책자를 배포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인들에게 우상을 버리지 않고도, 회개하지 않고도,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에 복종하지 않고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선포하는 자들은, 구원은 행위로 말미암으며 하늘(천국)은
반드시 자기 공로에 의해서만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만큼이나 진리에서 벗어났으며 위험한 자들입니다.
믿음의 눈 (The Eye of Faith) 아더 핑크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이 구절에서 욥은 무엇을 나타내고자 했을까요? 분명한 사실은 욥의 말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비유를 적용하면, 이제 자기의(自己義)로 말미암은 불신앙의 안개가 걷혔으며, 믿음이 하나님의 존재를 살아있는 영광스러운 실체로 이해하였습니다. "내 눈이 항상 주를 향함은"(시편 25:15).
욥의 믿음은 계속해서 실행 가운데 있었습니다. 성경은 모세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가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을 보는 것 같이 하여 견디어 냈으며"라고 합니다(히 11:27).
곧, 모세의 마음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점유된 믿음을 통하여 격려를 받았습니다.
성경은 자주 믿음을 육체적 시각으로 비유해서 표현합니다.
우리 주님은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대하여 "너희 아버지 아브라함은 나의 날 보기를 기뻐하다가, 보고 반가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56).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시고 높아지신 날을 즐거이 기다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로 가서 "그들의 눈을 열어 주어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하라는 사역을 위임받았습니다(행 26:18).
달리 말하면,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말씀을 선포함으로 그들을 회심하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을 벗어난 몇몇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바울은 "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인들아, 누가 너희를 미혹하여 진리에 순종치 못하게 하더냐? 너희 가운데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 눈 앞에 명백히 제시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썼습니다(갈 3:1).
이제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성경기록이 믿음을 육체적 시각의 개념으로 말할 때 그 성경기록의 저자는 적절하고 적합한 비유를 이용한 것 이상의 무엇인가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성경기록의 저자는 처음에 놀라운 시각 기관인 눈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분께서는 그리스도인이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루는데 있어서 매우 주요한 역할을 하는 보이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눈을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사실을 분별하는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물질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영적 세계 안에 있는 어떤 위대한 실제를 희미하게 보여줍니다.
이러한 점에서 얼마든지 주시하고 묵상할 수는 있지만, 우리는 몸의 눈이 마음의 믿음을 상징하는 한 가지 예표로 제한해야 합니다.
1. 눈은 수동적인 기관입니다.
눈은 스스로 빛을 비추거나, 바라보는 대상에게 아무 것도 주지 못합니다. 눈이 해, 달, 별을 바라보며 무엇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나눌 수 없습니다. 눈은 아무 것도 더하지 못하며, 단지 마음 안에(망막에, 그러면 뇌에 전달됩니다.) 상(像)을 남기거나 비출 뿐입니다.
믿음도 그와 같습니다.믿음은 아무 것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 안에서 붙들고 있는 것에 아무 것도 주지 못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의 빛이 혼의 시각에 비쳐지는 대로 단순히 받거나 또는 마음 안에 취합니다.
과연 불 뱀에 물린 이스라엘 사람들이 놋 뱀을 바라보고 치유되었을 때, 놋 뱀과 무엇을 나누었을까요? 우리는 아무 것도 그리스도에게 더하지 못하며, 다만 그분을 바라보며 구원을 받습니다(이사야 45:22).
2. 눈은 인도하는 기관입니다.
낮에 빛이 있을 때 눈을 뜬 사람은 자기 길을 볼 수 있으며, 눈 먼 사람이나 밤길을 걷는 사람처럼 도랑에 빠지거나 벼랑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도 그와 같습니다.
"사악한 자들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들은 심지어 어디에 걸려 넘어지는지도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의인들의 행로는 빛나는 광채 같아서 점점 더 빛나 완전한 낮에 이르느니라"(잠언 4:19,18).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 관하여 "우리가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함이라"라고 말합니다(고후 5:7).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믿음이 우리의 본(本)이신 분을 봄으로), 우리 앞에 놓인 경주로를 달릴 수 있습니다.
3. 눈은 매우 빨리 기능을 하는 기관으로서, 아주 멀리 있는 것들도 봅니다.
우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땅위에 있는 것들에서 시선을 돌려 멀리 있는 산을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땅의 것들과 가장 높이 떠 있는 별을 동시에 볼 수 있으며, 넓디넓은 온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시력은 얼마나 놀라운지요! 동일하게 믿음의 권능도 놀라운 것입니다.
실로 믿음이란 시각이 예민한 은혜로서, 조상들의 믿음이 행했듯이, 아주 멀리 있는 것도 봅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약속된 것들을 보았습니다(히 11:13).
그와 같이, 믿음은 순간적으로 영원 과거를 뒤돌아보며 땅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영존하는 근원과 그 역사를 볼 수 있으며, 동시에 장차 올 영원을 향해 돌아서서 휘장 안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감춰진 영광들을 봅니다.
4. 눈은 비록 작지만 성능이 매우 뛰어난 기관입니다.
낮에 빛이 있을 때 눈을 뜬 사람은 자기 시야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뒤에 있는 것을 돌아보거나 앞에 있는 것들을 볼 수 있으며, 샘물을 들여다보거나 깊은 골짜기 아래의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으며, 멀리 하늘의 천체(天體)를 바라 볼 수 있습니다.
믿음도 그와 같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광대한 범위 안에 있는 모든 것에까지 미칩니다.
믿음은 먼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알게 하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깨닫게 합니다. 믿음은 지옥을 들여다보며, 하늘들을 관통해 봅니다. 믿음은 주변 세상의 온갖 허탄한 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순수한 믿음이 처음에는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조금 밖에 취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점에서도 땅에 속한 예시가 영적인 진리를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곧, 유아(乳兒)의 눈은 빛을 보고 외부의 물체를 지각하지만, 계속해서 시각이 자랄 동안에는 많은 연약함과 혼란을 겪게 됩니다.
믿음도 그와 같습니다.
처음에 영적 지식의 빛은 매우 희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기는 멀리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비들 안으로 더 깊게 자라게 되며, 마침내 열려진 비전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5. 눈은 매우 확신을 주는 기능입니다.
눈은 다섯 가지 육체적 감각(五感) 중에서 가장 설득력이 있습니다. 눈으로 보면 얼마나 확실한지요!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은 사물을 단지 정신적인 착각이라고 확신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바른 마음을 가진 자들은 누구도 그들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늘에서 해가 빛나는 것을 보면 낮이라는 것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바로
그 본질에서 수많은 확신을 가져오는 은혜입니다.
"믿음은 소망하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서(證書)니"(히 11:1).
회의론자들은 성경에 관한 하나님의 영감을 부인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그 진리의 초자연적인 아름다움들을 바라볼 때 그 문제는 영단 번에 해결됩니다.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꾸며낸 한 경건한 사람으로 간주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도가 일단 진정으로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보면, "내가 알기에 내 구속자께서 살아계시니"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6. 눈은 자취를 남기는 기관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 마음에 자취를 남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종종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며"라고 기도드릴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이유이며(시편 119:37),
대언자가 왜 "내 눈이 내 마음을 상하게 하였도다"라고 선언하였는지에 대한 이유입니다(애가 3:51).
계속해서 몇 분 동안 해를 바라보면, 해로부터 눈을 돌리거나 눈을 감을지라도, 해의 자취는 눈에 남습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믿음은 마음에 의(義)의 태양이신 분의 자취를 남깁니다.
"그들이 그분을 바라보고 빛을 받게 되었으며 그들의 얼굴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였도다."(시편 34:5).
고린도후서 3:18은 이에 대해 더욱 분명하게 증거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듯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나니, 곧 주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권능이 자기 백성들의 몸을 죽을 것에서 생명으로, 천한 것에서 영광스러운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처럼, 지금 성령님께서는 도덕적으로 변화시키는 권능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성품에 역사하고 계시며, 믿음을 실행으로 옮기심으로 자녀들이 점점 더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7. 눈은 놀라운 기관입니다.
자기 의견을 표현하는데 유능한 사람들은 이 특별한 지체가 인간의 몸 중에서 가장 기묘하고 진기한 부분이라고 주장합니다. 창조자의 지혜와 권능의 많은 부분이 보는 기능을 형성하는 가운데 발견됩니다. 그와 같이 믿음은 영혼 안에 기묘하고 놀랍게 역사하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자의 지혜와 권능의 많은 부분이 새로운 피조물의 그 어느 부분보다도 믿음의은혜가 형성되는 가운데 발견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믿음의 행위를 권능으로 성취하사"라고 말합니다(살후 1:11).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을 때 임했던 위대하고 전능하신 그 뛰어난 권능이 동일하게 그 사실을 믿는 사람들 위에와 안에 역사하고 있습니다(엡 1:19).
8. 몸의 눈은 매우 예민한 기관입니다.
눈은 빨리 다치고 쉽게 해를 입습니다. 아주 작은 재 하나가 고통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눈을 회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눈물을 흘림으로 눈 안에 들어온 먼지나 티끌을 제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이 믿음은 가장 섬세한 은혜로서, 깨끗한 양심 안에서 가장 잘 자랍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순수한 양심에 믿음의 신비를 간직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딤전 3:9).
생기 넘치는 믿음의 역사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는 마음 안에 들어온 죄의 먼지나 세상의 허탄한 것에 의해 쉽게 손상됩니다. 참된 믿음이 있는 곳에서는, 죄로 인해 상처를 입었을 경우, 스스로 경건한 슬픔의 길로 그 죄를 배출합니다.
출처: 개혁주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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