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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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 서론적 고찰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필수불가결한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하나는 의무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지식에 부응하는 양심적인 행위이다. 우리가 순종하지 않는다면 영원한 구원에 대한 빛나는 소망은 가질 수 없다.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없다면 순종에 대한 확실한 방법도 모를 것이다. 행함이 없는 지식은 있을 수는 있어도 지식이 없는 행함이란 있을 수가 없다.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안다는 것은 우리에게 행동규범으로서 율법을 주시고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심판하시는 분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원래 우리 마음속에 기록된 본성의 율법을 우리가 더럽힘으로써 그 계명들을 더 이상 읽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율법을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과 십계명에 기록하도록 하신 것이다.
우리는 먼저 십계명의 공포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십계명이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전달되었던 모습은 엄숙했고 우리에게 훌륭한 가르침으로 가득 찼다.먼저 백성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존전에 서기 전에 외부적인 더러움을 깨끗이 하는 의식을 갖기 위해 이틀 동안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출 19:10,11).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 앞에서 기다리게 되거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받기 전에 몸과 마음의 신중한 준비가 있어야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하나님 존전에 서기 위하여 자신들을 성결하게 했다면, 하물며 우리는 더욱 하늘에 계신 하나님 존전에 서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성결하게 해야만 되지 않겠는가? 또한 하나님이 강림하셨던 산은 지경이 정해져 있어 어느 누구도 그 거룩한 산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금령이 있었다. (출 19:12,13)이것은, 하나님은 무한히 높으시고 최상의 존숭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는 것을 가르치며, 또한 그의 율법의 엄격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번에는 우리가 여호와께서 그의 율법을 전수하시기 위하여 강림하셨던 두려운 현현에 대한 묘사를 살펴보자(출 19:18,19). 여호와의 현현의 그의 권위에 대한 존중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두렵게 하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며, 하나님께서 율법의 전수에서도 그렇게 무서운데 율법을 어김으로 우리에게 심판하러 오신다면 그 무서움이 얼마나 심하겠는가를 의미하기 위하여 의도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전달하셨을 때 백성들은 너무나 두려워서 모세에게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중재자와 통역자로 일해 달라고 간청했다. (출 20:18,19) 이는 율법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직접 전달된다면 그것은 정죄와 죽음의 역할을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이 중재자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달되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보게 되고 지키게 된 것이다. (고전 3:19, 갈 9:21, 갈 6:2)따라서 모세는 산으로 올라가서 두 돌판 위에 하나님께서 손수 쓰신 율법을 받았다.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원래가 악하여 하나님의 손가락 외에는 누구도 그의 율법의 흔적을 남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저 돌판들은 모세의 거룩한 분노로 말미암아 깨뜨려져서(출 32:19) 하나님이 다시 기록하신 것이다.(출 34:1)
이것은 자연의 율법 창조시 우리 마음에 기록 되었으나 우리가 아담 안에서 타락했을 때 깨뜨려졌고
중생 시 우리 마음에 다시 기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히 10:16). 그러나 혹자는,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으로 완전히 폐지되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아무도 질 수 없는 무거운 속박의 멍에로 우리를 데려가고자 하십니까? 신약에서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분명히 선포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에서 자기 백성들을 자유케 하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주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주셨던 그리스도인의 자유와는 전혀 모순되는 것으로 십계명의 권위를 인간의 양심에 부과하려는 시도가 아닙니까?” 라고 질문할지도 모른다.
그런 질문에 우리는 흔히 이렇게 답한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율법이 폐지되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고 계신다(마 5:17,18).
진실로 그리스도인은 행위언약이나 정죄하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생활의 법도와 거룩케 하는 율법 아래 있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십계명의 독특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먼저는 이 독특성이 그의 거룩하심에 대해 두렵고도 웅장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시내산 하나님의 계시는 오는 모든 시대에 섬겨야 할 인간 의무를 집대성하였던 것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십계명에 특별하신 중요성을 부과하셨는데 그 공포 모습이 이를 분명히 보여주었다.십계명은 구름과 어두움, 천둥과 번개와 나팔소리의 무시무시한 부대현상과 함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분명한 목소리로 들려 왔으며 그렇게 들려진 신적 계시는 유일무이한 부분들이었다. 어떠한 의식법이나 시민법도 이렇게 독특할 수 없었다.그 열 가지 말씀들, 그것만이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돌판 위에 쓰여 졌으며 그것만이 보호되기 위해 언약궤에 넣어졌다. 이와 같이 십계명에 부여된 유일한 영광과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우리는 극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셋째, 십계명의 원천인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우리는 십계명의 서두에 아주 보잘것없는 관심을 가져 왔었다.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아무리 웅장한 권위가 율법의 공포 때에 수반되었다 해도 율법의 원천은 사랑에 있었던 것이다.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율법은 주님이 자기 백성에게 은혜로운 구속자이시며 의로우시다는 것(즉, 그의 성품)을 분명히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것을 분명히 이해함으로 얻어지는 결론이자, 원리는 다음과 같다. 즉 구속받은 사람들에게서는 하나님의 성품과 명령에 일치하는 생활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심은 사랑의 행위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을 기초로 자기 백성에게서 사랑받으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 때에만 구속하시는 하나님과 구속함을 받는 백성들 사이에 일치와 동일함이 있게 된다.제 2 계명 후반부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수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순종이란 오직 사랑하는 데서만 나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주님께서는 율법의 모든 필요조건이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데 요약되어 있다고 선포하셨다.
넷째, 우리는 십계명의 영속성에 대해 생각해 보자. 십계명이 모든 세대를 거쳐 각 사람들을 얽매고 있다는 점은 여러 면에서 생각해 볼 때 밝혀진다.첫째로 하나님의 진실하심에 대해 확고부동한 표현이 있지만 모든 도덕적 행위(moral agent)위에 십계명의 권위는 필연적으로 적용되어진다는 것이다. 즉 율법(다스리시는 법도)이 폐지되기 전에 하나님 자신의 특성도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 때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율법을 말하며 그로부터 인간은 계속적으로 율법에서 떠남으로 구원받을 수 없었다. 이성과 의지가 부여된 피조물이 사는 곳은 어디든지 도덕적 율법이 그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도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심으로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셨다. 그래서 우리도 그의 발자취를 따라야 할 것이다.셋째로 이방인들에게 바울 사도가 특별히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라는 의문을 제기하고서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우리는 율법을 세우느니라.”라고 자문자답했다(롬 3:31).마지막으로 율법의 영속성은 그의 백성들이 새로이 태어날 때마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친히 기록하심으로 유지된다. (렘 31:33, 겔 36:26,27)
다섯째, 도덕률이 십계명의 숫자에 있어서 열 가지가 완전할 수가 있겠는가에 대해 몇 가지 생각해 보자. 이것은 성경상에서 “십계(十戒)”(출 34:28)라고 언급되었는데 열이란 숫자는 전체가 필요한 것들로서 완전하게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애굽에 내린 재앙들이 그렇게도 여러 번 계속되었다는 점은(10번 재앙이 내림) 하나님 심판의 완전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숫자의 상징적인 중요성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광야에서 히브리인들의 범죄가 열 번에 이르도록 허용되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들은 열 번이나 죄를 범했기 때문에(민 14:21) 죄악의 모든 분량을 채웠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십일조, 혹은 십분의 일을 성별하여 하나님께 드림이 되며 모든 소산은 십이라는 숫자로 표현되고, 이들 중 하나는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고 주를 위하여 있다는 표시로 주께 바쳐진다.
여섯째, 십계명의 구분에 대해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납득할 만한 충분한 이유 없이 행동하시지 않기 때문에 십계명을 두 돌판 위에 기록하신 것에는 특별한 뜻이 계셨다. 이러한 의도는 표면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들 계명의 내용은 하나님의 공의를 한 데 묶어서 보여주고 있다.그들은 두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지는데 전자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의무를, 후자는 인간을 향한 인간의 의무를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전자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관계에 대해, 후자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하늘의 주관자에게 속하는 영광을 취한다면 우리 이웃에게 아무리 예의바르다 해도 그러한 의는 철저히 무가치하다. 마찬가지로 이웃에게 사랑의 의무는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처럼 된다 해도 이는 역시 헛된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면서 내가 음행하지 않았다. 도적질하지 않았다. 거짓말하지 않았다고 위안 받으면서 예배드리는 것도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거부된다.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의 의무가 첫 돌판에 기록된 것은 칼빈이 일컫는 바와 같이 그 계명들이 ‘종교의 제목’이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과 활기’를 이루는, 즉 ‘종교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경배함이 없이는 인간들 사이의 어떠한 평등도, 사랑도 무익한 것이다. 경건치 않은 인간들이 제 아무리 자기들끼리 실시하는 정의가, 자비가, 인내가 있다 해도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는 쓸데없는 것들이다.
그와는 반대로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활에 올바른 위치를 차지하고 계시며 우리가 옳고 그름의 주관자로 그를 공경한다면 우리는 이웃들에게도 공평하게 대할 수가 있을 것이다. 5계명이 첫 돌판에서 끝났는지 둘째 돌판에서 시작되었는지 하는 십계명 구분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전자의 견해를 지지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릴 대는 부모가 하나님의 위치에 서게 되고 성경상에서도 부모를 이웃과 동등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유로는 첫 돌판의 다섯 계명이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포함하고 있으나 나머지 계명들에게서는 그 어디에도 그 용어가 없기 때문이다.
일곱째, 우리는 십계명의 영적인 면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율법이 신령하다”(롬 7:14)는 것은 율법이 신령한 입법자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서 단순히 외부적인 복종보다 더한 것 즉, 인간 마음의 순종을 가장 철저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십계명이 우리 마음의 생각과 소원에까지 적용된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만 우리가 십계명을 얼마나 지키지 않는가를 알게 된다.
하나님은 “중심에서”(시 51:6) 진실을 요구하신다. 심지어 우리의 생각에서조차도 하나님의 거룩함에서 벗어나는 조그만 탈선해위도 금하시는 것이다. 율법은 우리가 가장 은밀한 성향과 의도를 감찰하고 있으며, 우리의 지성과 사랑과 의지를 거룩한 뜻에 따르기를 요구하고 있으며,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사랑에서 우러나와야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상의 모든 사실들을 볼 때 율법의 기원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직까지 인간의 영을 주장한다고 장담한 법은 없었으나 여호와의 율법은 인간의 깊은 마음속을 감찰한다. 이러한 율법의 영적인 면은 예수께서 음욕을 품는 것이 곧 간음이라고, 분노가 살인이라고 말씀하셨던 관계로 명백해졌다.
“여덟째, 우리는 십계명의 임무에 대해 생각해 보자. 첫째로, 도덕적 율법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오직 의(義)이지만 우리에게는 불의(不義)밖에 없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죄는 우리의 판단을 어둡게 하고, 이기적인 사랑에 빠지게 하고, 잘못된 자신감을 갖도록 작용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율법의 높고 거룩한 요구에 비교해 본다면, 우리는 더러움과 허물과 오만함을 깨닫게 될 것이며 우리에게 요구되는 의무를 수행하는 데에 능력의 부족을 의식하게 된다.
칼빈은「기독교 강요」에서(2권, 7장 7절) “이와 같이 율법은 일종의 거울이다. 거울 속에서 우리는 얼굴에 묻어 있는 오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율법 속에서 우리는 첫째 우리의 무능을, 둘째 우리의 허물을, 셋째 이상 두 결과로 인하여 저주를 알게 된다.”라고 잘 표현했다.
율법의 두 번째 임무는 악인들을 경고한다. 악인들이 비록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에는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를 기쁘시게 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을지라도 형벌의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악한 행동을 삼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악인들이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살고 있는 공동사회에 유익이 된다. 세 번째, 율법은 성도들의 생활규범이 되는 것으로 그들을 지도하고 하나님의 은총 속에 지켜주는 것이다.
아홉째, 우리는 십계명의 상벌에 대해 생각하자. 여호와는 우리를 죄의 예속상태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많은 의무를 감당케 하셨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엄숙한 광경을 보여줌으로 그들 마음속에 공경심을 불러일으키게 하셨다.
그 다음에 그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는 약속과 경고의 말씀을 후반부에 추가시키셨다. 이는 우리가 그의 권위에 순종하고 그의 명령을 기쁘게 순복하며 그가 금하신 것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그의 명령을 수행하는 자들이 헛되이 일하는 것이 아니며 반역자가 형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열 번째, 마지막으로 우리는 십계명의 해석에 대해 생각해 보자. 시편 기자는 “주의 계명은 심히 넓으니이다.” (시 119:96)라고 했다. 도덕적 율법은 대단히 넓어서 그 권위가 우리 생활의 모든 도덕적 행위에까지 미친다. 성경의 다른 부분들은 십계명에 관한 주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성경은 논리적으로 우리를 경고함으로 자극하고, 약속함으로 우리를 달래며, 경고함으로 죄를 짓지 못하게 하며, 그렇지 않으면 역사적으로 기록된 실례들을 취하여 전자는 고무시키고 후자는 금지시킨다.
신약의 명령들은 단지 십계명에 대한 설명, 확충 그리고 적용이라는 사실을 올바로 이해하자. 특별히 명령되거나 혹은 금지되는 부분들이 있다면 이는 형식적으로 말하는 바 그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함축되었음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그러나 좀 더 특별한 의미를 생각해 보자. 첫째, 각각의 계명들에 있어서 주요한 의무나 죄악은 그보다 사소한 것들의 전형으로 나와 있다. 그리고 나타난 행위에는 그 행위를 일으키게 하는 모든 관련된 원인까지도 포함된다. 어떤 죄가 거론된다 해도 그러한 죄의 원인과 결과와 동일한 종류의 모든 죄는 금지된다. 그리스도께서도 실제로 사람을 죽인 것뿐만 아니라 마음의 분노도 육 계명에 저촉된다고 설명하셨다.
둘째 어떠한 악이 금지되면 그 반대로 선이 요청되며, 어떠한 선이 명령되면 악은 정죄 받는다. 이를테면 제 3계명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기 이름이 망녕되이 일컫게 되는 것을 금하셨으며 그 결과로 자기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구하시는 것이다. 제 8계명에서 도둑질하는 것을 금했던 것은 그 반대의 의무, 즉 우리가 일하여 마땅히 받아야 할 것에는 대가를 주신다는 것이다(엡 4:28
제 1 계 명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 20:1-2)
이 율법의 서문은 십계명 전체에 동일한 관계를 가지며 (첫 계명만 아니라), 그것은 우리가 십계명에 순종해야 된다는 것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것은 마치 왕이나 통치자가 칙령을 반포하기 전에 그들의 이름과 제목을 서두에 붙여 그들이 공포하는 것에 더 많은 주의와 경의를 얻게 하는 관계와 같다.
만왕의 왕이시오, 하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도 자기 백성에게 율법을 선포하셨는데 이는 그의 권위에 깊은 존숭을 표하는 백성들을 사랑하신다는 의도이며, 반대로 권세 많은 주권자시오, 영화로운 주님에 의해 선포된 그 율법을 어기는 사람들에게는 보다 두렵게 하신다는 뜻이다.
방금 위에서 지적되었던 것은 모세의 이스라엘에게 한 엄숙한 말 “너는 너의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해야 하느니라.”(신 28:58)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나는 주 너의 하나님이다.” ‘주’라는 말은 지존자시오, 영원하시고 자존하시는 즉 ‘여호와’라는 뜻이며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이시다(계 4:8).‘하나님’이라는 말은 그분이 본체에서는 하나이시나 위(位)에 있어서는 셋이 되는 엘로아의 복수형 “엘로힘”이다.
예배의 지존자이신 여호와는 과거에는 창조자였고, 현재에는 통치자이며, 미래에는 심판주가 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되신다. 덧붙여 말하면 그는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이시며 구속주로 말미암아 택하심 받은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다.이렇게 하여 우리는 율법을 순종하여야 한다.우리 안에 두려움을 일으키는 그의 절대적인 권위는 “여호와 너의 하나님” 이란 구절에서 나타나며 사랑으로 역사하시는 그의 은혜와 자비는 “종 되었던 집(비유)에서 너를 인도하여 낸 여호와로라”라는 구절에서 나타난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 20:3)는 첫 계명이다.그것의 의미를 간단히 살펴보겠다. 우리는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말하는 ‘너희가’가 아닌 ‘너’라는 단수에 주목해야겠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는 것은 당신이 다른 신을 소유하지도, 섬기지도 말라는 것을 강조한다.‘다른 신들’이란 있을 수 없다.
그들이 그렇게 불리운 것은 본질이나 직무가 그렇기 때문이 아니고(시 82:6) 다만 인간들의 마음의 부패가 “그들의 신은 배요” (빌 3:19)라는 구절에서와 같이 그렇게 만들었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내 앞에” 혹은 “내 얼굴 앞에”라는 말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내 앞에 행하여 완전하라” 혹은 “의로와라” (창 17:1)는 말씀과 동의어이다.
이는 네가 언제나 내 앞에 있고 나의 눈이 언제나 너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 행동하라는 뜻이다.
이것은 아주 철저한 보습이다. 무리는 사람 앞에서 인정받고 또 거룩한 모습을 외부로 전시함으로 너무나 쉽사리 안주해 버리기 쉽다.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감찰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은밀한 정욕이나 숨겨진 우상을 여호와 앞에서 감출 수가 없다.
다음에 우리는 첫째 계명에 부과된 적극적인 의무를 생각해 보자.간단히 말해서, 너의 하나님 여호와 오직 그만 선택하고 예배하고 섬기라는 것이다.하나님은 조성자시요, 통치자시며, 권위자시요, 예배의 지존자이시기 때문에 그는 어떠한 경쟁자도 인정치 않으시고 그와는 어느 누구도 싸울 수가 없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요구는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그것을 범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제 1계명은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일치되는 가운데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고 영혼을 만족케 하실 수 있는 유일 지존자이시다.그것은 우리가 지상의 모든 사랑보다도 더욱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됨을 요구하며 그를 가장 높은 위치에 모셔서 섬기고 복종해야 됨을 요구한다.그것은 우리가 참되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봉사함에 있어서 모든 태만과 위선을 좌우로 물리치고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헌신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제 1계명이 요구하는 의무들을 표현할 때는 웨스트민스터의 신앙고백서를 인용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그 고백서는?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며(대상 28:9, 신 26:17등등), 생각함으로 (말 3:16), 묵상함으로(시 63:6), 기억함으로 (전 12:1), 높게 받들므로(시 71:19), 경외함으로(말 1:6), 숭배함으로 (사 45:23), 선택함으로 (수 24:15), 사랑함으로 (신 6:5), 사모해야 (시 73:25) 한다.
또한 그를 두려워함으로 (사 8:13), 그를 믿음으로 (출 14:31), 신뢰함으로 (사 26:4), 소망함으로 (시 103:7), 그를 기쁘시게 함으로 (시 37:4), 그를 즐겁게 함으로 (시 32:11), 그를 위해 열심을 품음으로 (롬 12:11), 그를 찾음으로, 모든 찬양과 감사를 드림으로 (빌 4:6), 그리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그에게 모든 순종과 복종을 드림으로 (렘 7:23), 모든 물질에 주의하여 그를 기쁘시게 함으로 (요일 3:22), 그를 슬프게 하지 않음으로 (렘 31:18, 시 119:136) 그리고 하나님과 겸손히 행함으로 (미 6:8) 그에게 영광 돌려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무들은 다음의 주요한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우리가 모르는 하나님께 예배할 수 없기 때문에 말씀과 사역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충만한 지식을 따라 끊임없이 일생 동안 추구하는 것이다.
둘째, 성실하게 그를 찾아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리고, 나아가서 열과 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셋째, 그의 위대하심에 대한 경의와 그의 권위에 대한 지고의 존숭과 그의 영광에 대한 갈망을 표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순종의 원동력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불순종을 못하게 하는 것이 된다.
넷째,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말씀과 기도에 따라 연구와 묵상을 계속 하고, 배운 것들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너는 내 앞에 다른 신들 두지 말지니라.”하는 것은 마땅히 하나님께만 있어야 하는 신앙심과 찬양과 신뢰함을 하늘이나 땅의 아무에게나 어떤 것에도 두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속하는 것을 다른 어떤 물질이나 피조물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하나님과 다른 피조물 사이에 그러한 것들을 나누려고 해서도 안 된다.왜냐하면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에 나와 있는 것들은 제 1계명에서 금지하고 있는 큼직한 죄목들이다.
첫째,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을 알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을 멸시함으로써 하나님과 그의 뜻을 고의적으로 알지 않는 것이다.
둘째, 무신론이나 하나님을 부정하는 행위이다.
셋째, 우상숭배나 다른 신을 만들어 섬기는 일이다.
넷째, 불순종과 자기 옹고집 혹은 공공연히 하나님께 반항하는 행위이다.
다섯째, 우리의 가슴과 마음을 다른 대상에게 두거나 과도하고 무절제하게 사랑하는 행위 등이다.
어떤 자가 마음에 생각함으로 신을 만들어낸다면 그는 우상숭배자이며 제 1계명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 자들은 신성 안에 삼위가 있음을 부정하는 유니테리안들이며,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하고 교황이 죄사할 권세가 있다고 믿는 카톨릭 교도들이며, 신성이 무너지고 파괴되었다고 믿는 대부분의 알미니안주의자들이며, 관능적인 쾌락주의자인 에피큐리안들이다. (빌 3:19)
왜냐하면 그러한 자들은 외부적인 우상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겔 14:3)라는 구절이 이것을 보여준다. 사도 바울이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골 3:5)라고 말한 것을 보아도 모든 무절제한 욕망은 우상이다.우리가 드려야 할 소원과 예배의 대상은 홀로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시다.그것이 자신이든지, 금과 명예와 기쁨이든지, 혹은 친구이든지, 모두가 하나님께 속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만다.당신의 하나님은 무엇인가? 무엇에다 당신의 삶을 바치고 있는가?
제 2 계 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3,4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4-6)
제 2계명은 제 1계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그들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여러 가지 모양으로 표현된다. 첫째 계명은 참되신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선택하는 것과 관계되지만 둘째 계명은 예배하는 우리의 실제적인 고백에 관계된다.전자는 예배의 대상에 고정시키지만 후자는 종교적인 예배의 모양에 초점을 맞춘다. 첫째 계명에서는 여호와가 자신을 참되신 하나님으로 선포하시지만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본성과 어떻게 자신이 경배 받아야 하는가를 계시하셨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이 계명은 인간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욕망이라든지 혹은 병적인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그러한 것들을 쳐부수어 버린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예배의 보조수단으로 도움받기 위해 감각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물질을 사용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찾는 데는 어렵지 않다. 하나님은 형체가 아니며, 볼 수도 없고 다만 신령한 원리에 의해서만 깨달아 질 수 있다. 이 원리가 타락한 인간에게는 죽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히 육체와 연관되는 것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큰 차이가 있게 된다. 하나님을 살아 계신 본체로 참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헌신하는 수단으로써 어떤 형상이든지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와 매일 교제를 나누는 사람이라면 아무도 기도하고 찬양하는 데에 그의 형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는 환상으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그를 깨달아 알고 섬기기 때문이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제 2계명은 모든 우상이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강조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저주가 뒤따른다. 문제는 형상을 만들어 내는 재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보여주신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라”(출 25:18)고 하셨고, 후에는 놋뱀을 만들라고 명령하셨던 것과 같이, 저주받은 물질이나 형상에 절하는 미련함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볼 수 없고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물질이나 한정된 형태로 나타낸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그의 권위에 대한 신성모독이다. 이와 같이 극도로 저주받은 성상숭배 즉 아주 잘못된 하나님 숭배는 합당한 하나님 숭배가 어떤 미신적인 의식으로 말미암아 모독되어서는 안 된다.
이 둘째 계명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에게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라고 말하는 소극적인 면뿐이다. 그러나 여기에 요구되는 의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이러하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 가운데 제정하신 모든 예배와 법도를 순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준수하고 지키는 것(신 32:46,47, 마 28:20, 행 2:42, 딤전 6:13,14), 특별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와 감사를 드리는 것(빌 4:6, 엡 5:20), 말씀을 읽고 전파하고 듣는 것(신 17:18,19, 행 15:21, 딤후 4:2등등)이다.
또한 성령의 시행과 수납(마 28:19, 고전 11:21-30), 교회의 치리와 권징(마 18:15,17, 16:19, 고전 5장), 직무와 사역(엡 4:11,12등등) 거룩한 금식(고전 8:5), 하나님의 이름으로 수고하는 것(신 6:13), 서원하는 것(사 19:21, 시 76:11), 모든 거짓 숭배를 인정치 않고 혐오하고 반대하는 것(행 16:16,17등등), 각자의 주어진 위치와 사명을 따라 모든 우상을 제거하는 것(신 7:5, 사 30:22) 등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 우리가 간단히 덧붙여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성실한 준비를 갖추는 것이며 올바른 마음자세를 가다듬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땐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이다.
인간 이성의 판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든다거나 그러한 수단들은 모두가 정죄 받는다. 모든 예배의 형태 심지어는 참되신 하나님에게 드리는 경배일지라도 그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과는 모순되거나 반대되고, 사도 바울이 표현했던 “자의적 숭배”(골 2:23)와 같은 것이라면 제 2계명은 호되게 책망한다.
그것은 참되신 하나님께 예배를 타락시킨 형태이며 미신으로 나아가는 인간 마음의 성향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능과 재주로 어떤 형상이든지 만들려고 할 때 이 점에 있어서 허용 받지 못하며 그리스도께서는 당시의 종교의식적인 손 씻는 결례를 정죄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법에다 인간의 유전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제 2계명은 현대인의 의식주의(예배에 단일복장을 입는 것)를 비난한다. 또한 성만찬에 참예함으로 주술적인 효능이나 특별한 힘이 덧붙여진다고 하는 것이나 십자가를 사용함으로 그렇게 된다는 것들을 비난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정하시고 경배 받으시는 예배마저도 경시하거나 취소하는 자들을 정죄한다.
성경이 우리에게 예배의 범위를 설정했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덧붙여서도 안 되고 거기에서 축소해도 안 된다. 이 원리를 적용함에 있어서는 예배의 본질과 부수적인 것들을 엄밀히 구분해야 한다.
사람들이 경배의 요소라고 우리에게 강요하려 할 때 그것이 만약 성경 상에서 명백히 요구되지 않는 이를테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릎을 꿇는 것이라든지 십자가를 그리는 것 따위는 증오할만한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예배의 분위기나 변화가 예배 중에 요구된다면, 그들에 대한 성경적인 표현이 없을지라도 그들이 신령한 예배의 규모와 질서에서 떠나지 않고 온당하고 질서 있게 나아가는 것들이라면 우리가 받아들여도 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암부로스가 터득해서 가르쳐 준 좋은 실례가 나와 있다. “그대가 죄를 짓지 않거나 죄를 짓게 하지 않으려거든 그대가 처한 교회의 합당한 관례를 따를지니라.” 우리가 만약 하나님께서 세우신 예배의 법도를 무시한다면 이 계명을 위반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냉랭한 사랑, 어수선한 마음 거룩한 열심의 부족, 불신앙, 마음은 그에게 떠나 있으면서도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는 것들도 역시 이 계명을 위반하는 것이다.
제 2계명은 세 가지 이유에 의해 시행되어진다. 첫째 이유는 계명을 어기는 자에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그가 우리와의 관계를 “너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하셨다. 여기 ‘하나님’이란 히브리어 개념은 권위를 입증할 수 있고 불명예를 받을 땐 능히 보복할 수 있는 ‘상한 자’라는 뜻이다.결혼생활에서 상대방이 계약관계를 어겼을 때 취해지는 비유적 용어인 ‘질투하시는 하나님’ 이시기 때문에 어떤 불륜에 대해선 형벌이 가해진다. 인간의 방식을 따라 말씀하시는 주님은 그를 비웃거나 업신여기는 자를 용서치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들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중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켰도다.”(신 32:16-21 참고).
둘째, 엄격한 심판으로 위협한다.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3,4대까지 이르게 한다.” 여기서 ‘갚는다.’라는 말은 비유적인 표현으로 하나님께서는 마치 시간이 경과하기까지 모르거나 잊어버렸던 것처럼 하셨다가 그의 경륜과 섭리에 따라 인간의 악한 행사와 길을 예의 주시하시고 드러내신다는 뜻이다.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어찌 이 일들을 인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 (렘 5:9, 참고 렘 32:18, 마 23:34-36) 이것은 사람들의 본래적인 애정에 호소함으로써 우상숭배에서 돌이키게 하기위한 것이다. “주님의 공의로우신 저주는 악한자의 머리 위에만 임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전 가족에게까지 미친다.”(칼빈)
훈도나 모본을 잘못 보임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개념을 자녀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형벌은 지은 죄과에 따라 가해진다. 하나님은 부모가 지은 죄를 자식에게도 벌할 뿐만 아니라 범죄의 당사자 부모들에게 벌하신다. 왜냐하면 부모가 죄짓고 벌 받는 것 만으로서는 자식이 죄를 짓지 않는다는 보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계명에 순종하면 다음의 약속 속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지고의 축복을 받게 된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수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라는 말씀에서이다.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잠 20:7)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킴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카톨릭 교도들은 그들 앞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어 놓고 성상숭배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촉진시키는 수단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미워하기 때문에 우상을 사용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자들의 자손들 수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는 이 약속은 보편적인 원리를 포함한 것이 아니다.
이삭의 경우 경건치 못한 에서가 있었고, 다윗의 경우 압살롬이 있었다는 점에서 보여 지기 때문이다. “입법자께서는 그러한 사건에서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을 포기하면서까지 불변한 법칙을 마련할 뜻이 전혀 없었다. …다만 주께서는 부모 때문에 자녀에게 그의 긍휼과 자비를 베푸신다는 한 예만을 들어 보이심으로 그를 경배하는 자들에게 불변한 은혜에 증거를 제공하시는 것이다.”(칼빈)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수천의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된다. 사람들이 흔히 수백만이라고 말하나 (유 14) 여기서는 수천의 무리이다. 주님의 양떼는 오히려 적은 무리다 (눅 12:32). 자녀를 위하여 하나님을 진노를 쌓지 아니하고 기도로 쌓아 올린 경건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들이 있다면 이는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해야 될 일인가?
제 3 계 명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아니하리라”(출 2:7).
제 2계명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방법에 대해 언급하나 제 3계명은 합당한 영적인 태도로 하나님께 경배드릴 것을 요구한다. 곧 우리는 최상의 성실, 겸손 그리고 경배를 드림으로 엄위하신 하나님의 권위에 만족할만한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 여호와 너의 하나님을 경외하라”(신 28:58). 우리가 지존자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야말로 그 얼마나 거룩한 심성으로서 엄위하신 하나님의 존전에 설 수 있단 말인가!
“이 명령의 끝 부분은 주께서 자기 이름의 위엄을 신성불가침하게 하시고자 하는 데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에 대해서 무엇을 생각하든지 무엇을 말하든지 그의 이름의 장엄함에 따라 그의 뛰어나심을 나타내어야 하며 그의 위엄을 높여야 된다.” (칼빈) 하나님에게 속하는 그 어떤 것도 가장 진지하게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먼저 우리는 이 계명의 범위와 인식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대로 여호와란 이름은 그로 말미암아 그의 말씀, 칭호, 속성, 법도, 사역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다. 하나님이란 이름은 그의 본성과 존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시편 20편 1절, 135편 3절, 요한복음 1장 12절 등에서 잘 타나나 있다.
때로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한 진리를 모두 포함한 집대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가 주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 하리이다.”(미 4:5) 이때는 그 이름의 뜻이 하나님께서 정하여주신 진리와 경배의 방식을 의미한다. “내가 당신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요 17:6) 즉,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교훈을 가르치셨다는 뜻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혹은 특수하게 우리가 부르고 알게 된 이름이 사용되어진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다”라는 것은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대상으로 혹은 그에 관해 말하는 주제로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최상의 경외심을 가지고 생각과 말과 행실에 있어서 거룩하게 사용해야 함을 말하는 부정적인 측면이다.
제 3계명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이와 같은 태도로 일컫기를 요구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 가운데 많은 것들을 주셨는데 우리가 함부로 상용하거나 아무렇게나 나타낸다면 가장 위대한 특권을 가진 우리가 가장 사악한 경멸을 받아도 마땅할 것이다.
신앙적인 고백을 하지 않는 사람이나 거룩한 지존자의 것들을 배우려 하지 않는 인간들은 그를 무시하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공중예배 에서나 개인 기도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또한 종교적인 선서를 할 때나 엄격한 약속을 할 때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우리가 기도드림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 아브라함(창 18:27), 야곱(창 32:10), 모세(출 15:11), 솔로몬(왕상 8:33), 히스기야(왕하 19:15), 다니엘(9:4) 그리고 천군 천사가 (계 4:10,11)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는 겸손하게 낮아져서 거룩한 신성을 찬양해야 된다.
부정적인 측면에서 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모든 불명예스러운 생각, 불필요한 짓, 건방진 행동, 불경스러운 언행, 신성모독적인 언사, 그의 말씀에 대한 무분별한 사용, 그의 섭리에 대한 불평,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게 하시는데 쓰시는 것의 남용, 이 모두를 금지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하여 망령되이 일컬어지는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몇 가지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는 합당한 목적을 생각지 않고 사용될 때이다. 우리가 그의 이름, 칭호, 속성들을 사용하는 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하나는 그의 영광을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교화를 위해서이다. 이 밖에 모든 것은 시시하고 사악한 것들이라서 영광과 존귀가 충만하시며 위대하시고 거룩하신 이름을 들어 사용할 수 없다.
우리가 언어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말하는 상대방의 유익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의 형용하기 어려운 이름을 부르는 데 합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우리가 그의 이름을 쓸데없는 목적에 따라 함부로 말할 때 대단한 치욕거리가 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가 그것을 합당한 생각이나 경외심이 없이 사용하면 우리로 말미암아 망령되이 일컬어진다. 스랍 천사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바 그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때 언제든지 우리는 그의 무한하신 존귀와 영광을 신중하게 엄숙하게 생각해야 하며 그 이름 앞에서 우리의 마음에 가장 깊이 엎드린 경배가 있어야만 할 것이다.
엄위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는 자들과 모든 대화 가운데 빈 말이나 허탄한 말만 하는 자들이 어떻게 그의 이름을 존숭함으로 높여 부를 수 있겠는가? 그 이름으로는 장난쳐도 안 되고 가벼운 혓바닥으로 이리저리 갖고 놀아도 안 되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을 부름은 그 이름을 엄숙하게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습성으로 임해야 한다. 왜냐하면 언제나 그분은 살아 계셔서 발설하는 모든 것들 듣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고백하든지 않든지 그것이 위선적으로 사용되어질 때에 망령되이 일컬어진다.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유다의 근원에서 나왔으며 거룩한 백성이라 칭하며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성실치 아니하고 의로움이 없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는 너희는 이를 들을지어다.”(사 48:1)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으나 거기에 포함된 계시에는 순종치 않았고 결국은 제 3계명을 범하게 된 것이다.(마 7:22,23 비교).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할 때는 그 의미와 함축된 뜻에 맞는 방법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라고 말씀하셨다.(눅 6:46).
마찬가지로 우리가 거룩한 의무에 애정은 두지 않고 가볍게 기계적으로 처리하면 이것도 무서운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행함이 없는 기도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마음은 그에게서 떠나 있으면서도 입술로만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그를 만홀히 여기는 결과이며 정죄를 가중시키는 행위이다.
우리가 사람의 이름을 대하듯이 대수롭지 않게 하나님의 이름을 대하여 부르고 가볍게 맹세할 때에 그리고 이웃에 대해 거짓증거 할 때에 하나님의 이름은 망령되이 일컬어진다. 우리가 진실을 알지 못하고 또한 거짓말로 꾸며서 맹세하거나 증거 할 때 우리는 사람들이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본인은 원치 않았는데 거짓의 아비가 거짓을 말하게 했다고 하나님을 증인으로 요청했기 때문이다. “땅으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함이니라.”(사 65:16)라는 구절에서 진리의 하나님은 사람들 사이에 증거 되는 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구별해야 한다고 하셨다. 서약이 우리 중에서 정치적 목적과 뒤엉켜 얼마나 남발되었고 무시되어 왔는가, 그 죄가의 엄청남을 그대는 생각할 수 있는가!
“심중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나의 미워하는 것임이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슥 8:17) 평소의 일상 대화중에서 온갖 저주와 모독하는 언사로서 우리의 언어를 오염시키고, 우리의 귀를 다치게 하는 바 이 무수한 거짓맹세 자들의 무리에게 우리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들의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들의 입에는 저주와 고통이 가득하였다”(롬 3:13,14). 이웃을 해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보잘 것 없는 변명도 하나님께는 망령된 것이고, 그들의 모든 동료가 그렇게 하니까 따라서 했다는 구실도 망령되고, 단지 사람들의 감정을 누그러지게 하는 의도뿐이었다는 탄원도 망령된 것이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모욕을 줄 수 있는 최대한도로 하나님께 대항하고 모욕함으로 당신의 마음을 분노하게 했다면 그 얼마나 미칠 노릇인가! 비록 이웃이 비난하지 않고 경찰이 체포하지 않고 검사가 벌주지 않아도 “주님께서는 자기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않을 것이다.” “저가 저주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이 하더니 저주가 그 내장에 들어가며 기름같이 그 뼈에 들어갔나이다.”(시 109:17,18) 하나님은 우리의 사회가 범하는 신성모독 죄로 대단히 두렵게 격분하신다.
오늘날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언사를 듣지 않고서는 거리에 나가거나 모인 무리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일간 신문의 소설, 무대, 심지어 라디오까지도 (그리고 최근에는 텔레비전, 영화, 인쇄물) 무서운 범법자들이며, 의심할 여지없이 이것들은 무서운 죄악이며 이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심판을 쏟아 붓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말하기를 “저주로 인하여(맹세) 땅이 슬퍼하며 광야의 초장들이 마르나니 그들의 행위가 악하고 힘쓰는 것이 정직하지 못함이로다.”(렘 23:10)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날도 동일하게 말씀하신다. “주님은 자기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아니하리라.” 쓰라린 형벌이 현재의 생활에 주어지지 않는다면 장차 오는 그 때에 가장 확실히 그리고도 영원히 그의 몫으로 주어질 것이다.
제 4 계 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8-10)
제 4계명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시간을 주관하시는 주인이라는 것과 그가 이 계명에서 밝히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시간을 선용하며 개선해야 할 것을 보여준다. 이 계명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이들은 상호간에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하라”(행하여도 좋다는 것이 아님)는 부분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히 지켜라”는 부분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거룩한 의무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우리에게 맡기신 직업과 생활에 부지런히 참예하여 주의 깊게 양심적으로 일을 하라고 하는 것이다. 이 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일을 해야 된다는 것이며 그것도 일주일에 5일간 일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한때 노동조합이 이 문제로 선동했음) 육일간이다.
일을 하지 않는 자는 예배에 합당치 못하다. 일은 예배드리러 가는 길을 닦는 것이며 예배는 우리로 일을 더욱 충실히 하게 하는데 합당케 한다. 누군가가 본 계명의 상반부에 순종하지 않아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사회제도에서 빚어지는 어두운 면이며 이는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서 얼마나 빗나갔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6일 동안 부지런하고 충실하게 일을 한다면 제 7일째의 안식일은 더욱 가치 있을 것이다. 안식일의 제정은 인간 자유를 독단적으로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섭리이다.
그것은 슬픔의 날이 아니라 기쁨의 날로 제정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일주일 중 하루를 현세의 수고스런 생활에서 면제시켜 주는 창조주의 자비이며 우리가 물질적인 날에서 영적인 날로 완전히 돌아오는 날들을 위해 새로이 성결해지고 새롭게 된 힘을 공급받아 가짐으로 고난과 시련뿐인 현재의 생활을 더 좋게 하고 미구에 올 미래를 예상케 한다.
인간의 시간을 규정하는 이 계명은 특수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계획되어진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향하여 영속적이고 영구적인 것이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막 2:27) 제정되었지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위에서 지적된 이 계명의 이중성은 다음에 이어지는 부분에서 그 이유가 분명하고 명확하게 밝혀진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7일에 쉬었음이라”(출 20:11).
이 계명의 이중성을 유의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엄위하신 창조주께서도 6일 동안 일을 하시고 제 7일에 쉬셨음으로 그의 피조물 앞에서 지켜야 할 모본(계명의 이중성)을 세워 놓으셨다. 또한 남자에게 노동을 맡기신 것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은 그를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던 것이다(창 2:15).
이 이중성을 내포한 계명의 영속성 혹은 영원성은 위에서 보여 진 설명에서 특수하게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분명하게 선포되어진 것이라는 데서 명백해진다. 더구나 이 계명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성취하셨을 때 폐지된 이스라엘의 의식적 율법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손가락으로 돌판에 쓰심으로 율법의 영원성을 의미하는 도덕적 율법에 주어진 것이다.
결국은 이 계명에서 쓰여 진 바로 그 용어가 유대인만을 위해 쓰여 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히 밝혀 준다. 왜냐하면 유대인 중에 거주하는 이방인에게도 이 계명은 관계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의식적 율법 하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는 없었을지라도 그들도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을 요구받고 있었던 것이다. “너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일하지 말라”(출 20:10).
“제 7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제 7일’이란 말이 한 주일의 제 7일 (여기에서나 성경 다른 어디에서도) 이 아니고 그냥 “제 7일” 즉 6일간 일한 그 다음날이라는 것이다. 유대인에게 제 7일은 한 주간의 일곱째 날인 토요일이었으나 우리에게 이 날은 히브리서 4장 8절에 명백히 보여준 대로 ‘다른 날’, 다시 말해 한 주간의 첫째 날이었다.
왜냐하면 이 안식일이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기념할 뿐만 아니라 보다 더욱 큰 사역인 구속을 기념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 동시에 부합하도록 제 4계명을 주셨으며 그로 말미암아 이 계명의 영속성이 알려진다.
기독교인의 안식일은 토요일 자정에 시작하여 일요일 자정에 끝난다. 그것은 요한복음 20장 1절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해뜨기 전에 시작된 것이 분명함으로 우리는 안식일이 토요일 한 밤중에 시작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요한복음 20장 19절에 보면 (그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것이 “둘째 날 저녁”이라 불리지 않았다.) 우리가 안식일이 저녁 내내 계속되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우리의 예배도 저녁 동안까지 계속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인의 안식일은 토요일 자정에 시작되지만 그것에 대한 준비는 좀 더 일찍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가 어찌 “너는 아무 일도 하지 말지니라.”라는 계명의 요구조건에 만족될 수가 있겠는가? 안식일에는 우리 자신의 즐거움을 위하여 오락은 물론 모든 세상적인 번거로운 일에서도 벗어나 종일토록 온전한 안식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다. (사 58:13) 아내도 그녀의 남편과 온전한 하루의 안식이 필요하다. 그녀는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포리지(음식의 이름)나 수프와 같은 것들은 토요일에 미리 준비되어 안식일에는 간단히 데워 먹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자신을 주 안에서 기쁘게 할 수 있고 예배와 봉사에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토요일 밤에 일을 하거나 앉아 있어서 주의 날에 침대에 오래도록 누워 있거나 거룩한 의무를 하는 데 조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계명은 하나님이 가정에서 경배 받으신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것은 물론 가정예배를 시행해야 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아홉 계명의 어떤 것보다도 특별히 가정의 가장이나 고용주에게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의 책임 하에 모두가 안식일을 지킬 수 있도록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더욱 더 직접적으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신다. 그것은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엄격히 선별해 놓은 것이며, 우리는 묵상과 명상과 찬양을 드리는 데에 안식일을 보내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제정하셨기 때문이며 (시 118:24), 우리는 그것을 폐지할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이 계명은 마땅히 해야 할 의무들을 생각해 버리거나 부주의하게 행하거나 싫증나게 하는 것을 금한다. 우리가 이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면 나머지 아홉 가지 계명도 잘 지키게 될 것이다.
우리가 “거룩한 안식일”날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세 종류이다.
첫째는 필요에 의한 일이다. 이를테면 전날 할 수 없고 다음 날까지 미룰 수 없는 일 - 가축을 치는 일이다.
둘째, 자비에 관한 일이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하는 동정과 사랑의 일 - 병자를 돌보는 일이다.
셋째, 경건에 관한 일이다. 이를테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를 감사하고 기뻐함으로 드리는 공중예배와 가정예배이다.
우리는 이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받아 누리기 위하여 성실히 기도를 드려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날 우리의 마음을 부패시키고 우리의 머리를 혼탁하게 하며 거룩한 의무에서 돌아서게 하는 사단의 역사에 주의를 기울여 싸워야만 할 것이다.
주님은 그의 날을 성도로 복 주어 지키게 하신다. 한편 우리의 범죄한 땅이 쓰디 쓴 대가를 증거 하는 날에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모독한 죄 값으로 특별한 저주를 내리신다. (느 13:17-18 참조)
“안식일을 잘 지킨 자여, 그대에게 만족한 일주일이 있을지어다. 힘에 힘이 진하도록 수고하리로다. 그러나 안식일을 모독한 자, 그대를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아직도 슬픔의 사자가 보이지 않는가!”
제 5 계 명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계명은 첫눈에 얼핏 보이는 것보다 그 의미의 범위에 있어서 훨씬 광범위하다. 그것은 문자적인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윗사람에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 계명을 주신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보존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그에 의해서 제정된 우열의 순위가 신성하게 보존되도록 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의 요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감독하기 위하여 높이신 자들을 우러러보고, 그들을 존경하고 순종하고 감사의 뜻을 표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 계명(복종해야 한다는)은 인간 본성의 타락으로 볼 때 극히 모순된 것이니 이는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에 부풀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종속적인 지위에 있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나면서부터 가장 사랑할만하며 가장 공평한 즉 윗사람과 같은 것을 실례로 들어서 인간들의 마음을 보다 쉽사리 달래고 복종하는 습성을 키워주도록 해주신 것이다.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우리시대의 악한 영이 되어 불순종과 불법을 조장하지만, 우리는 이 계명의 광의의 해석에 대하여 의의를 제기하지 않도록 다음의 몇 가지를 고찰하여 생각하겠다.
첫째, “공평”이라는 것은 원칙적으로 하나님께 속한다.
둘째, 파생된 의미로 그것은 하나님께서 권위를 부여하시고 존귀하게 한 사람들에게 속한다. 그는 그러한 자들을 다른 사람들 위에 높여서 칭호를 부여하시고 사람들을 지배하게 하신다. 우리는 이들을 우리의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하는 것과 똑같이 존경해야 한다. 성경상에서 “공경”이란 말은 디모데전서 5장 17절, 베드로전서 2장 17절 등등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광범위하게 적용된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해서 주님께서 보편적인 규범을 제정한 사실에 대하여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야 하겠다. 즉 주님께서 우리 위에 감독자로 세운 사람에 대하여 존경과 순종과 감사를 돌리고 그에 대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봉사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 윗사람들이 그러한 존경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냐 없느냐는 별개 문제이니 나는 그들이 어떠한 인물이든 간에 그들의 지위가 하나님의 섭리를 통하여 얻은 것이요, 입법자 자신이 그들을 존경하도록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우리 양친을 존경하라고 분명히 명한 것이다. 여기에 강조된 의무는 손아래 사람과 손윗사람에게 서로 부합하는 의무를 의미하는 상호관계성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다만 제한된 지면으로 여기에서 고찰하고자 하는 것은 지배자에 대한 피지배자의 의무만을 말하고자 한다.
첫째, 부모에 대한 자녀의 의무를 살펴보자. 자녀들은 그들을 낳은 부모라는 점에 있어서 노여워하는 것을 두려워함으로 마땅히 부모들을 사랑하고 존경해야 한다. 참다운 효성은 자녀들을 교육시켜 부모를 슬프게 하거나 노엽게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자녀들은 부모들에게 순종해야 한다.그리스도께서 남겨놓으신 복된 모본을 살펴보자(눅 2:51).“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들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 3:20) 다윗은 왕위로 기름 받은 후에도 자기 아버지가 맡긴 양치는 일을 했다. (삼상 16:19)자녀들은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아비의 거룩한 행실을 본받아 행해야 된다.(잠 6:20) 부모의 언행은 언제나 존경받아야 하고 부모의 몸가짐은 언제나 자녀로 순종케 해야 한다.요셉은 애굽에서 그렇게 높은 자리에 올랐지만 그의 아버지 앞에서는 그의 얼굴을 땅에 대고 절을 했다.(창 48:12) 솔로몬 왕이 그의 어머니를 얼마나 공경했는지를 보아라. (왕상 2:19) 자녀들은 될 수 있는 한 부모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보살펴야 한다. (딤전 5:16)
둘째, 하나님이 우리 위에 세우신 통치자나 다스리는 자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살펴보자.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하나님의 대행자요, 대권 자들이다.“나(여호와)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 …”(잠 8:15).하나님은 인간들이 서로 간에 물고 뜯는 야수 같은 짐승들이 되지 않도록 인류의 보편적인 선을 위하여 국가라고 하는 권위를 제정하셨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들이 치안관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이 일시적인 형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우리는 사자나 호랑이 같은 사람들 중에서도 안전하게 되는 것이다.
다스리는 자들은 땅 위에서 하나님의 공식적인 대행자로 간주되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 속에서 마땅히 존경받아야 된다. (전 10:20, 롬 31:1 이하, 행 23:5) 우리가 말을 할 때에도 그들의 직무와 권위를 높여 줌으로 존경해야 하는데 이는 성경이 약한 자들에 대해서 “그들은 권위자들에 대해 악한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벧후 2:20) 라고 밝혀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인간들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들을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칭찬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벧후 2:13,14) 우리는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를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해야”된다. (롬 13:7)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것이다. (딤전 2:1,2)
셋째, 우리는 주인에 대한 종의 직무를 살펴보자.그들은 주인에게 복종해야 한다.“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골 3:22).그것은 “모든 선한 충성을 보여서”(딛 2:10) 주인의 이익을 얻게 해주기 위해 의무를 부지런히 감당해야 한다.
그들은 주안에서 “거스려 말하지 않음으로”(딛 2:9) 책망과 바르게 함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종들로 그들의 주인들에게 묵묵히 순종하라고 엄히 명령하셨기 때문에 종들이 하등 책망 받을 이유가 없더라도 주인의 근거 없는 노여움을 인정해야 한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애매히 고난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니라.”(벧전 1:18-19)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하신 거룩한 표준에서 얼마나 멀리 떠나가 버렸는가!
마지막으로 우리는 목자와 양떼 즉 사역자와 그의 교인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왜냐하면 그들 사이에도 5계명이 보여주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개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7)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권능으로 옷 입혔기 때문에 “너희에게 듣는 자는 나에게도 듣는 자요, 너희를 멸시하는 자는 나를 멸시하는 자다.”(눅 10:16) 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또 다시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딤전 5:17) 여기 “배나 존경”이라는 말은 존경을 하되 계속하라는 뜻이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 그리고 고전 9:11은 참고)
다음 경고는 얼마나 엄숙한 것인가. 그 백성이 하나님의 사자를 비웃고 말씀을 멸시하며 그 선지자를 능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로 그 백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둘째, 윗사람에게 순종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신약에서도 이 약속이 강조된다. (엡 6:2,3; 벧전 3:10)
셋째, 지상의 축복에 관한 모든 약속들은 반드시 다음의 조건들을 만족시켜야 한다. 즉 약속들은 아무리 영원한 축복이 있다 해도 현 세상에서 문자적으로 성취되어야만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약속이 아니라 위협이기 때문이다.하나님께서는 가끔 그의 자비하신 은총 속에서 이 약속을 단축시켜서 그의 사랑하는 자들을 천국으로 데려 가신다.
제 6 계 명
“살인하지 말지니라.” (출 20:13)
첫 다섯 계명들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지키시는가를 보았다.
둘째 다섯 계명들에서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안녕과 복지를 제공하시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1) 인간 인격의 보호 (“살인하지 말지니라.”)
(2) 가정의 신성함과 행복 (“간음하지 말지니라.”)
(3) 재산과 물질의 보호 (“도둑질하지 말지니라.”)
(4) 명예와 평판의 보호 (“너는 너의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지니라.”)
(5)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십계명 전체에 튼튼한 담을 두름으로서 외부적인 죄를 금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감정 속에 있는 내부적인 악의 움직임까지도 금하신다. (“너는 탐내지 말지니라.”)
이제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첫 번째 내용은 “살인하지 말지니라.”라는 것으로서 이웃과 관련시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제 6계명은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살인죄를 금지한다.왜냐하면 이 살인은 “처음부터 살인하는 자”
(요 8:44)였던 마귀의 장자이기 때문이다.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첫 번째 범죄가 바로 그것이다.그들의
후손에게 전가된 부패성은 가인으로 말미암아 처참하게 저질러진다. 가인의 증오와 원한은 그로 하여금 동생 아벨을 죽이게 충동했는데 이는 “동생의 행위가 의로웠고 그의 행위는 악했기” 때문이었다. (요일 3:12)
그러나 이 계명은 실제적인 살인행위만을 금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급한 분노, 증오, 비방, 원한과 같은 모든 살인의 원인을 금하며 그밖에 우리 이웃의 안전을 해치는 무엇이든지, 이웃을 구해서 살릴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있는데도 죽어가게 버려두는 무엇이든지 금지한다.
사람을 죽인다는 모든 행위가 살인이 아니라는 것을 제시하고자 한다. 재판관이 살인자에게 사형선고를 할 때 합당한 권위로서 사형이 집행되기 때문에 살인이 아니다. 만약 재판관이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그를 죄로 벌하실 것이다.“사람의 피를 흘린 자마다 사람에 의해서 그의 피도 흘려야 하리니”(창 9:6).이러한 말들은 보편적이고 불변적인 원리들이다.“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라 생명은 생명으로니라.”(신 19:21)
이것은 재판장에게 하신 하나님의 명령이다. 성전에서 피를 흘리는 것은 살인자로 지탄받지 않는다.
침략자에게는 무기를 들고 부당하게 빼앗긴 것을 찾는다면 이것은 합당하다.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자기 부인을 포로로 잡아 도망가는 아말렉을 추격했다.또한 어떠한 큰 악행이나 불법에 대해 벌주는 것도 합당하다.다윗은 자기 신복들이 모욕을 당했기 때문에 암몬 자손들과 전쟁을 했다. (삼하 10장)기독교의 제도에서 모든 전쟁을 불법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자 한다.
즉 군인들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눅 3:14)라고 그리스도 앞에 와서 물을 때 그는 더 이상 싸우지 말고 너의 직업을 포기해 버리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 하는 가르침을 주셨다.
백부장이 주님께 와서 그의 군무에 관한 논증을 할 때 주님은 그의 고백을 정죄하지 않으셨고 그러한 직업 가진 것에도 견책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는 그의 믿음을 극찬하셨다. (눅 7:8,9) 그리스도께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실 때 “나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라고 선포하셨다.“내 나라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나의 종들이 싸워서 내가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이 말씀들은 육체적인 방법들이 그리스도의 신령한 왕국으로 나아가는데 부적합하지만, 만약에 그의 비하상태가 왕홀을 취하는 데 방해 받는다면 그의 추종자들이 정당하게 싸워서 그의 칭호를 지켰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한 가지 또 다른 예외가 있다.즉 그렇게 할 의도가 전혀 없었는데 생명이 취해지는 우발적인 살해가 있는데 그것은 살인자로 고소 받지 않는다.그러한 경우는 우리가 성경상에서도 볼 수 있다.
곧 나무를 찍는 도끼가 부지불식간에 미끄러져 이웃을 죽이는 경우이다. (신 19:5) 그러한 죄 없는 살해자에 대해서 주께서는 도피성을 지정하여 피의 보수자로부터 안전한 처소를 발견할 수 있게 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는 합당한 사실들에 대해서만 효력이 있다.그렇지 않고 부당하게 다른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면 이는 살인죄에서 헤어날 수 없다. (출 21:22-24 참조)
다음은 살인의 실례들을 생각해보자.자살은 자기 살인이며 범행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범죄이다.
이 죄를 범한 자는 다시 회개할 수 없고 따라서 용서받지 못한다.그러한 인간들은 영원한 구원에 참예하지 못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에 의해서 버림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피 묻은 손을 가지고 심판주 앞에 나가야 한다. 그들은 자신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파괴하는 자이기에 자아 살인자들이다.
타인을 살인한 것도 가장 가증스러운 죄이다. 그자에게는 무서운 공포심이 양심을 괴롭혀서 견딜 수 없게 한다.공범자들도 살인죄에 해당된다. 즉 그것이 그렇게 되도록 맡기는 사람들 (삼하 11:15, 12:9) 혹은 그렇게 되도록 승낙하는 사람들(빌라도와 같이) 혹은 그것을 은폐하는 자들(신 21:6,7)이다.이 계명은 살인 범죄를 금지할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유도하는 모든 원인과 이유를 금한다.이들의 주범은 시기와 질투이다.
시기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자신의 슬픔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요 영혼을 썩히는 녹으로 잘 묘사되었다.
가인은 먼저 자기 동생의 제물의 결과에 시기하여 불평하였고 이것은 재빨리 그를 살인하게 충동질했다.
너무나 악하고 절제 못하는 분노가 사람의 마음에 들끓고 있다면 그것은 마침내 앙심품은 증오의 독기로 변하는 것이다.
그러한 분노는 마태복음 5장 21-2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밝히 가르치셨듯이 살인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살인의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분노는 시기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그 자체만은 나쁜 것이 아니다. (죄와는 상관없이 고상하고 흠모할 만한) 즉 의분이 있다 (막 3:5을 보라).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지고 그 이름에 욕이 돌아가고 그의 성전이 더럽힘을 당하고 그의 백성이 중상을 받을 때 하나님을 인하여 분노를 내는 것은 거룩한 분노이다.
우리가 부당하게 화를 당할 때 인정할만한 분을 낼 수 있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죄를 짓지 않도록”(엡 4:26)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리를 어둡게 하고 흥분상태로 사람을 몰고 가는 악하고 죄 많은 분노는 이유도 없고 한계도 없다. 요나서 4장 1절은 이유 없는 분노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분노는 그것이 격렬하거나 과도할 때 혹은 그것이 계속적으로 끓어오를 때 절제하기 어렵다.“해가 지도록 너의 분을 품지 말라” (엡 4:26).분노를 품고 있으면 앙심의 찌꺼기가 마음속에서 다음 날 아침까지 있게 될 것이다!
본 장을 끝맺으면서 분노를 자제하기 위한 몇 가지 규칙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일하고 기도하라. 너 자신을 낮추어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너를 얕볼 때에도 화를 내지 말라. 모든 다툼은 자만에서 나오느니라. (잠 13:10) 네가 자신을 낮추면 그럴수록 더 쉽사리 동료의 경멸을 참을 수 있을 것이다.
(2) 하나님의 무한하신 인내와 참으심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라. 그분은 우리로부터 얼마나 모욕을 참으시는가. 우리가 얼마나 많이 그에게 노하게 하는 이유를 일으키는가. 그러나 “그는 우리의 죄를 따라 갚으시지 않으신다.” 이 위대한 모본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라.
(3) 어떤 사람에 대하여 편견을 갖지 않도록 하라. 왜냐하면 그들이 오해하여 행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시기나 분노가 일어날 때는 아예 초기에 조심하라.
(4) 분노한 사람을 피하라 (잠 22:24,25). 분은 급속히 퍼져 나가느니라.
제 7 계 명
“간음하지 말지니라.” (출 20:14)
정결의 덕목은 가정 관계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며 나아가서 가정은 사회관계에 있어서 기본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에 요구되는 정결의 의무는 인간의 생사문제에 버금가는 문제이다.
이 계명은 인간생활이 성결해야 할 것을 선포하고 가정을 보호하기 위해 울타리를 둘러서 거룩한 인간 생식기능을 유지케 한다.
사회질서를 살펴보면 모든 사람들이 소속되는 가정관계보다도 필수적인 것이 없기 때문에 가정은 모든 공격의 형태로부터 질투함으로 보호받아야 한다. 그 계명은 간단하고, 무조건적이며 변경할 수 없는 부정적인 “하지 말라”이다. 아무 것도 더 이상 요구되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논증도 필요 없고 어떠한 이유도 주어질 수 없다. 이 죄는 너무나 파괴적이고 저주스럽기 때문에 간단하게 그 이름만 불러도 그 자체에서 벌써 이 엄격한 금령에 대하여 충분히 문제를 일으킨다.
이 계명은 하나님께서 그의 직무를 위해 영혼만큼이나 육체를 주장하시고 계심을 명백히 암시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라…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롬 6:12; 8:13).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 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3,15,20).
어떠한 기독교인에게 이 불결한 죄는 불경스러운 것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6:19)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집이 도둑소굴로 된 것을 보시고 분개하셨는데 하물며 거룩한 성령의 전을 더러운 돼지우리로 전락시킨 행악함을 보았다면 그의 보시기에 얼마나 가증스럽겠는가!
“간음하지 말지니라.” 이 금령은 가정의 신성함을 지키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 엄격히 말해서 “간음”이란 결혼한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죄이고 “사통”이란 미혼자들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을 가리킴이다.
우리가 지켜야만 되는 것은 형용하기 어렵도록 순수하고 거룩하기 때문에 그는 우리에게 모든 불결에서 떠나라고 하신다. 이 계명은 사랑과 애정의 공동체 즉 가정을 어떠한 불순함도 부정함도 더럽히지 못하도록 보호하며 이 계명을 지키는 자들을 특별히 좋아한다.
하나님께서 인종의 번식을 위해 심어놓으신 사람들의 본능적 성향에 대해 적절히 훈련해야 할 것을 이 계명은 요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기에서 나오는 모든 유혹을 이기기 위해 모든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이 죄의 원인이 되는 모든 것들을 피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더러움의 죄에 대하여 그의 말씀 속에 있는 여러 구절들에서 밝혀주셨다. 이 죄는 심지어 결혼하지 않은 사람의 편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큰 악”이라 불리었다. (창 39:9) 그러니 결혼한 사람의 편에서는 그것이 얼마나 변명할 여지가 없고 참을 수 없는 것이겠는가! 이스라엘 민법에 이 죄에 부과된 그 당시 형벌은 살인한 자에게 부과된 것과 똑같은 죽음, 그것이었다.
욥은 그것을 “중죄,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라 하였다(욥 31:11,12). 대부분 이러한 행악은 은밀하게 행해진다. 그 행악자들이 사람의 심판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 13:4)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에 하늘의 심판은 그들이 모면할 수 없을 것이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숭배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질하는 자나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간음죄는 살인죄보다 더 나을 것이 없으며, 엄청나다. 후자는 인간의 일시적인 존재를 파괴시키지만, 전자는 은혜로 존재케 한 모든 것을 파괴시킨다. “인간 모두가 간음의 방종에 놀아난다면 인간들은 가까운 장래에 야수로 퇴화될 것이다.”(R.L Dabney)이 죄를 막기 위하여 하나님은 결혼의 법을 제정하셨다.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전 7:2). 간음죄는 결혼계약과 선서의 위반이며 그래서 부정하다는 증서를 첨부한다. 음행은 몸에게 하는 죄이다(고전 6:18). 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해 하심은 인간 생활의 모든 부분에 심한 형벌로 갚으신다는 사실을 보아서 알 수 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결혼은 인간으로 하여금 방종하여 짐승과 같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성적 불결함의 죄에 대한 구제책으로 신적으로 제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한 사람들은 모든 것이 그들에게 허용되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도리어 각자 자기 아내를 신중하게 접하고 또 각 아내는 그 남편에 대해서도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결혼의 품위와 절도에 적합지 않은 것이 일체 개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주님 안에서 계약된 부부 관계는 그러한 절제와 정숙에 의해서 규제되어 극도로 음란에 빠져들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암부로스는 이러한 방자한 음욕을 엄하게 그러나 부당하지 않은 말로 지적하였는데 즉 “부부 생활을 지켜 나가는데 있어서 신중함과 예의바르게 행하지 않는 자는 자기 부인에 대해서 간음을 행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어떤 사람도 자기는 부정함으로 비난받을 수 없다고 자만하지 말라. 이는 그의 실제 행위에서 절제했을지 모르나 그의 마음은 음탕한 상상과 욕망의 더러운 생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신령한 것이기 때문에(롬 7:14) 그것은 바깥의 큼직한 더러움의 죄를 금할 뿐 아니라 모든 합당치 못한 상상과 생각 즉 마음의 부정함을 금하고 정죄한다. 마음에 살인과 같은 것이 있듯이 마음에 간음이 있고 사색적인 더러움을 품는 자와 그의 생각과 상상을 정욕의 불순한 접촉으로 매음하는 자는 이 계명을 범하는 죄를 짓는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그의 마음속에 이미 그녀와 간음하였느니라.” (마 5:28)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 사도가 남자마다 창기와 함께 자기를 더럽히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낫다고 한 말로 만족하지 않았고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고전 7:9)고 했던 것을 알게 된다. “간음” 죄만이 이 계명에 특별히 언급되었지만 이들 계명들이 해석되는 규칙들은 우리로 다른 모든 종류의 부정이 이 큼직한 죄의 종류 하에서 금지됨을 이해하게 한다. 몸을 더럽히는 모든 것은 여기서 금지된다. 모든 다른 도덕적 부패가 거기로 향하기 때문에 간음은 특별히 여기에서 언급된다. 모든 인간이 간음을 나쁜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부당한 정욕을 자제하도록 훈련받아야 한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에 의해 지도받을 때 흠 없는 정숙함과 정결함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결혼관계를 제외한 모든 다른 성적관계는 하나님의 눈에서 저주받아 마땅하다. 이 계명은 음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불을 붙일 때와 간음으로 나아가는 모든 종류의 접근태도나 단계들을 단호히 금지한다. 본 계명이 요구하는 바는 당신이 언제든지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당신 이웃의 정결을 해하지 말아야 하며 부정함으로 시험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계명은 또한 우리가 정숙치 못한 옷, 상스러운 언어,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음식이나 음료 그 외에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정욕을 유발시키는 모든 경향들에 대하여 조심할 것을 요구한다. 특별히 젊은 사람들로 남자나 여자 어느 편에서든지 결혼 전 부정한 행동은 마땅히 행복해야 할 결혼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명심하게 해야 한다. 이 계명은 부정적인 측면에서 하지 말라는 형태로 표현되었지만 보다 적극적인 의무가 있다.
즉 그것은 우리 몸의 정결, 마음의 성결, 하나님에 대한 애정의 표현 그리고 주어진 시간에 유익한 일을 하는 것 등을 명령하는 것이다. 불결한 죄를 피하게 하는 규칙과 조언
(1)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잠 15:3)는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 존전에 있다는 의식을 언제나 가지라.
(2) 감각들을 엄격히 통제하라. 왜냐하면 이들은 우리의 마음을 깨끗케 하는 맑은 물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염된 수렁과 진흙탕을 떠내려 보낸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의 눈과 약속을 하라 (욥 31:1). 모든 음담설화에서 귀를 돌리라. 마음과 육체를 더럽히는 책들은 아무것도 읽지 말라. 당신의 생각도 악한 것이 틈타지 못하게 주의하라.
(3) 절제와 근엄함에 이르도록 하라 (고전 9:27). 탐식하는 자들과 술 취하는 자들은 정욕으로 솟아남을 느낄 것이다.
(4) 정직하고 합당한 일에 종사하도록 하라. 게으름이 많은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악한 무리의 회중을 피하라.
(5) 당신의 마음을 깨끗케 하려면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라. (시 119:37)
“간음하는 남녀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약 4:4)
이것은 영적인 간음죄를 언급하는 것이다. 영적인 간음이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세상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며, 영(육체의 정욕에 미혹 당하게 하여) 하나님에게 분리하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 속에 만족을 누릴만한 행복을 찾기를 소원하는 신자들이 아직도 많다. 자연계에 수많은 등급이 있듯이 이러한 간음죄에도 수많은 등급이 많이 있다. 공공연한 표면화되지 아니한 생각과 욕망 속에서의 간음이 있을 수 있듯이 기독교인들이 완전히 세상 따라 살지는 않을지라도 은밀히 세상을 그리워하고 동경하는 자들이 있는 우리의 마음이 물질적인 만족이나 위안에 지나치게 집착되어 있을 때는 이러한 성향들을 세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비천한 물질을 더 좋아한다든지 하나님께만 속하는 사랑과 경배를 다른 대상에 표할 때 보다 그를 더 진노하게 하는 것은 없다.
“처음 사랑을 버리지 말라”(계 2:4)
“우리의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저버리지 말라” (고후 11:2)
제 8 계 명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출 20:15)
도적질이 생기는 원인은 하나님께서 나눠주신 분량에 불만을 가진 데서 나오는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금지하셨으나 다른 사람에게 주신 재물을 탐하게 되는 것이다. 칼빈의 정확성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여기에서도 안타를 쳤다
“이 계명은 우리의 손발에 대하여 제정되었던 만큼 우리의 마음에 대하여도 제정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의 재산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익을 증진시키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칼빈)
앞서 나온 제 7계명과 같이 이 계명도 세상적인 물질에 대한 욕망을 적당히 제어함으로 우리의 집착을 다스릴 수 있게 한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우리에게 베푸신 분량에 과도하게 넘어서서 남의 것을 탐내지 않는다.
이래서 우리에게는 아래와 같은 기도가 적합하다. “허탄한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고 나로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함이니이다.” (9잠 30:8,9)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여기에 부여된 적극적인 의무는 다음과 같다. 즉 당신은 당신의 재산을 보호하고 또한 당신의 이웃의 재산도 함께 보호해야 한다.이 계명은 우리자신과 가족을 궁핍에 떨어뜨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부지런함과 근면함을 요구한다. 나태함과 게으름의 결과인 곤경에 처하지 않도록 합당하게 재산 모을 것을 이 계명은 요구하고 있다.우리는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해야” 한다. (롬 12:17) 나아가서 이 계명은 우리 이웃의 재산에 대해서 탐내지 않는 사랑의 율법이다.
그것은 대인관계에 제일 중요한 실천적 원리가 되는 정직과 신의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마 7:12).이 계명은 소유주의 허락 없이는 어느 누구도 감히 침범할 수 없도록 재산 주위에 합법적으로 신성불가침한 울타리를 치는 것이다.
놀랍고도 엄연한 사실은 인간이 범했던 최초의 죄가 도적질이었다는 것이다. 하와는 금단의 열매를 취했다.(훔쳤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 간 후 기록된 최초의 죄도 도적질이었다. 인간은 약탈품 중에서 얼마를 훔쳤다. (수 7:21)마찬가지로 초창기 그리스도 교회를 더럽혔던 최초의 죄도 도적질이었다.
아나니아와 삽리라는 돈의 얼마를 감추었다. (행 5:2)이것은 어린이가 얼마나 짓기 쉬운 최초의 죄인가! 그러므로 이 계명은 가장 어린 유년기부터 그들을 가르쳐야 한다.
몇 년 전 우리는 한 가정을 방문했는데, 그 집 안주인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그날 그녀는 자기 딸이 (약 네 살가량 된) 큰 포도송이 한 다발이 있었던 방으로 몰래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이 어린 꼬마가 그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더니 테이블 위로 올라가서는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도적질하지 말지어다.’”라고 말한 후 방에서 달려 나왔다는 것이다.
“도적질하지 말지어다.” 이 죄의 가장 높은 형태는 하나님께 대해 지어지는 바 신성모독죄 이다.
예날 그는 이 죄를 지은 이스라엘을 책망하셨다.“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도고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말 3:8,9)그러나 이 땅위에서 물질적으로 하나님의 명분을 하나님께 돌리기를 거부함으로 범하는 죄 말고도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것에 도적질하는 실례들이 있다.이를테면 우리가 하나님에게 속하는 영광을 취하고 있을 때는 하나님에게 도적질 한 것이 된다.또한 하나님께 속하는 존귀와 찬양을 우리 자신에게 돌릴 때도 영적인 도둑이 되는 것이다.알미니안 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온 것을 인간 자유의지에 돌림으로서 가장 큰 잘못을 범한다.
그리스도께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이니라.” (요 15:16)라고 말씀하셨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도적질하는 또 하나의 것은 청지기 직무를 불성실하게 이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위탁하신 것을 우리가 잘못 다룸으로 마치 우리가 다른 사람의 신용을 해쳤거나 이웃의 재산을 약탈했을 때처럼 모욕이 될 수 있다.
이 계명은 우리가 현세적인 재산을 그것이 크든 작든 간에 우리자신과 우리의 부양가족에게 공급하기 위하여 근면하게 관리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게으른 자는 일종의 도둑이다.그 자는 수벌의 역할을 하는 자며 다른 벌떼가 먹여 주기를 바라는 자다.탕자도 일종의 도둑인데 이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나눠 주신 물질을 “허랑방탕한 생활”가운데서 사치와 안일함으로 허비했기 때문이다.
주일 날 세상일을 하려는 자도 도둑인데 이는 마땅히 예배에 바쳐야 하는 시간을 하나님으로부터 훔쳤기 때문이다.하나님으로부터 소명감도 없이 다만 편안하고 유여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야 주제넘게 복음사역에 참견하는 자는 “절도요 강도”라고 이 단락이 끝나기 전에 지적하고 넘어 가야겠다.하나님은 우리가 이마에 땀이 흘려야만 빵을 얻을 수 있도록 하셨으며 우리는 정직하게 얻은 분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러나 혹자는 게을러서 일하기를 싫어하며 어떤 작자는 탐욕이 있어 더 많은 분깃을 얻으려한다. 이점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는 하등 권리가 없는 재산을 얻으려고 힘의 행사나 사기를 하곤 한다.
일반적으로 도둑은 타인이 합법적으로 취득한 재산을 부당하게 취득하는 것을 말한다.
이웃의 재산을 취하는 자와 마찬가지로 이웃의 소유로 되어 있는 것을 돌려주지 않는 자도 도둑이다. 이 계명은 경영자나 노동자로 말미암아 심하게 깨뜨려진다. 과거에는 가난한 자가 불충분한 노임으로 학대를 받았으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져서 고용된 자들이 고용주에게 지불할 수 없는 노임을 종종 요구한다.
한편 온전한 하루의 노동이 온전한 하루의 삯을 받는 것이 옳다면 온전한 하루의 노동에도 가치가 있어야 됨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그러나 게으름뱅이는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다.
“도둑질하지 말지니라.”거짓 광고는 이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상인이 그들의 상품에 대해 불순물을 섞거나 과대선전을 하거나 저울질을 속이는 짓을 하면 이도 역시 죄짓는 것이다.폭리를 취하는 것도 또 다른 도둑의 형태이다.사도 바울은 “이 모든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고 권고했다(살전 4:6).
사치와 허영을 위하여 빚을 내는 것은 도둑이며 필수품을 얻는데 진 빚을 갚지 않는 것도 도둑이다.
파산하기 전에 재산을 아내에게 양도한자는 하나님 보시기에 도둑이며 또한 파산자가 후에 재정적으로 번창했는데도 그의 채권자에게 충분히 갚지 않으면 이 자도 도둑이다.빌리고도 갚지 않는 자도 그 자가 남자든, 여자든 모두 도둑이다.
전세 든 사람이 주인의 재산이나 가구를 부주의하게 깨뜨리는 것도 이 계명을 어기는 행위이다. 세금지불을 회피하는 것도 또 다른 형태의 도둑질이다.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좋은 전례를 남기셨다 (마 17:24).노름은 사람들이 정직하게 일하지 않고 돈을 따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도 역시 도둑이다.
옛 격언에 나온 말씀이 꼭 맞다. “마귀가 번 것은 무엇이든지 마귀의 배속으로 내려간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폭력이나 사기로 획득한 물건에 저주하신다. 그것은 부대에 구멍을 내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 아래 곧 소비되어 버린다.하나님은 의로우신 심판을 행사하실 때 가끔 한 가지 죄를 또 다른 죄에 벌주는 자로 사용하시며 도둑질로 얻어진 것은 무절제함이나 짧아진 수명으로 재빨리 소비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기록되었으되 “악인의 강포는 자기를 소멸하나니 이는 공의 행하기를 싫어함이니라.” (잠 21:7)
“그러므로 이제 너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시민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버리며 계책을 베풀어 너희를 치려하노니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 길과 행위를 선하게 하라 하셨다 하라” (렘 18:11).“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11).
하나님은 여러 번에 걸쳐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입혔던 대로 갚아주는 자들을 높이신다. 현대 사회에 이 범죄의 무서운 증가는 일일이 벌을 주지 못하게 한다.만약 이 글을 읽는 독자가 과거에 다른 사람에게 잘못 저지른 것을 알게 된다면 하나님께 그 죄를 고백한 것으로 충분치 못하다.적어도 두 배는 배상해 주어야 한다. (눅 19:8; 삼하 12:6) 만약 소유주가 죽었다면 그의 후손에게 갚고, 그 후손도 없다면 공공 자선사업에 내놓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8계명이 금지한 죄를 피하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그것이 지시하는 의무수행을 위해 몇 가지 조언들을 제안하고자 한다.
(1) 정직하게 노동에 종사하라. 만약 고귀한 신분을 가진 부자가 있다면 공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하라. 비행에 가장 잘 유혹받는 사람은 바로 게으른 인간이다.
(2) 다른 사람의 복지를 위해 노력함으로 이기심을 버리도록 하라.
(3) 가난한 사람에게 도와주고 탐욕을 버리라.
(4) 당신의 구세주가 당신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시기 위해 두 도둑들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어찌하여 당신은 부정직한 행동으로 그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가 있겠는가.
(5) 자족하는 습성을 키우라. 이를 위해 만물이 한낱 일시적이고 헛된 것임을 생각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복종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묵상하고 (히 13:5,6), 모든 것에 절제하고, 위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며 그리스도께서 이 땅위에서 하신 일들을 매일 상기하라.
제 9 계 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증거하지 말지니라.” (출20:16)
이 말들을 문자 그대로 지켜라. 심지어 법정에서도 위증이나 거짓 증거를 해서 죄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전에 나왔던 계명들과 같이 여기에서도 구체적으로 지적되었던 것 이상으로 함축되고 의미되고 가르치는 바가 많다.우리가 이제까지 많이 지적해 온 바대로, 십계명 모두가 보편적인 원리를 선포했으며 나아가서 한 가지 대표적인 죄와 관련된 모든 죄들을 금지하고 있는가 하면 모든 죄의 원인이나 그러한 경향들을 금하고 있다.뿐만 아니라 상반되는 덕목이 적극적으로 요구되며 그것을 유념하고 고양시키는 그 밖에 행위도 요구된다.
이와 같이 열 계명이 모두 확대 적용되었던 연고로 제 9계명도 광의의 의미에서 이웃의 평판을 해치거나 공, 사설에서 험담하는 우리의 모든 말을 문책한다. 이러한 확대 적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도 논란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이것을 문자적인 의미에만 제한한다면 법정에 증언하기 위해 호출 받은 소수만을 제외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계명을 가장 넓게 적용함에 있어서 이 계명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가장 우수하고 고귀한 기능중의 하나인 우리의 언어에 관한 규정을 말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끝에 달렸나니” (잠 18:21), “온유한 혀는 생명의 나무니라.” (잠 15:4), 그리고 고삐 풀린 혀는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다” (약 3:8)고 하였다.
우리가 가볍게 혹은 무심코 말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 주님의 무한히 엄숙한 말씀 속에서 분명해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 13:36,37)
우리는 다음과 같이 기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시 141:3)우리의 혀에 대한 의무들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즉 우리의 혀는 항상 진실해야 하고 사랑 안에서 말해야 한다. (엡 4:15) 팔 계명이 이웃의 재산을 탐내지 말라고 하였듯이 이 계명은 이웃에 대하여 사랑 안에서 진실을 말함으로 이웃의 명예를 존중하도록 가르친다.
부정적으로 9계명은 이웃에 대한 모든 거짓말과 해하는 말들을 금한다. 적극적으로 이것은 진실한 말만 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이 계명을 주신 목적은 진리 자체이요, 거짓을 저주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조금도 위선 없는 진실을 보존하기 위함이다.” (칼빈)진실이란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에서 진정한 마음으로 엄격히 준수하는 것을 이름이다. 진실의 중요성과 필요성은 인간이 아는 거의 모든 것이 대화 가운데서 기인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아들이는 말의 가치는 전적으로 말의 진실성과 신빙성에 달려 있다. 만약 그 말들이 거짓이라면, 그들은 무가치하고 악한 것이며 미혹케 하는 것이다. 진실성은 한 종류의 덕목일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덕목의 뿌리가 되며 모든 올바른 성품에 근본이 된다. 성경에는 “진리”가 가끔 “의”와 동의어로 사용된다.
의로운 사람은 “그의 마음속에서 참된 것을 말하느니라.” (시 15:2) “진리를 좇는 자들은” (요 3:21) 자신의 의무를 이미 이행하는 자들이다. 진리로 거룩케 한다. (요 17:17) 9계명의 적극적인 형태는 다음 말들에서 발견된다.너희는 이웃에 대해 진실을 말하라(슥 8:16).성경 구절이 금지하는 최초의 죄는 거짓말하는 죄이다.
적당히 말해서 거짓말은 세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다. 즉 참되지 않은 말을 하는 것, 또 유유히 그렇게 행하는 것, 마지막은 타인을 속일 의도로 그렇게 행하는 것 등이다. 모든 거짓말이 다 거짓일 수 없다. 우리는 잘못 전해 듣거나 속일 수도 있고 우리가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진지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타인을 미혹하거나 속일 의도를 전혀 가지지 않는다.
한편 다음의 실례들을 보면 우리는 사실을 그대로 말함으로 거짓말을 할 때가 있다. 즉 사실을 보고하나 그것을 틀린 것으로 믿게 하며 속일 의도로 말하는 것이다. 혹은 그리스도에 대해 거짓 증거를 한 사람의 경우와 같이(마 26:60) 비유적인 표현인 데도 문자적으로 믿게 하는 것이다.가장 나쁜 거짓말의 형태는 이웃의 평판을 해칠 목적으로 악의를 품고 거짓말을 꾸며대는 것이며 그러한 것은 9계명에 비추어 더욱더 나쁜 것이다.
이러한 죄가 얼마나 비열하고 증오할 만한 것인가는 다음 고찰들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사람을 마귀와 같이 되게 하는 것이다.마귀는 영물이기에 사소한 육체적인 죄는 마귀의 본성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즉 마귀가 좋아하는 것은 교만, 악의, 거짓, 사기와 같은 것이다.“그는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니라”(요 8:44).악의가 일단 어떤 거짓의 형태에 들어오면 그만큼 사람은 마귀를 닮게 된다. 그러므로 거짓말은 하나님의 성품과 특성에 가장 반대가 되는 죄이다. 왜냐하면 그는 “진리의 주 하나님” 이시기 때문이다(시 31:5).
우리는 “거짓의 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는다.” 라는 말씀을 경청해야 한다. (잠 12:22) 마귀가 거짓말쟁이이고 거짓의 아비인 것같이 하나님은 진리의 주 하나님이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들도 “그들은 나의 백성이라 거짓말을 하지 않는 자녀들이라”(사 63:8)는 말씀을 명심하여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거짓말하는 자들에게 가장 무서운 벌을 내리신다고 경고하셨다.“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계 21:8).
이러한 죄가 얼마나 높은 위험 수위까지 올랐는가. 거짓말하는 죄는 너무 흔해서 참으로 적은 소수만이 그 죄에 가책을 느끼고 있다. 이때 우리는 “진리가 거리에 떨어졌도다.”라고 통곡해야 할 것이다(사 59:14). 첫째 진리가 강단에서 떨어졌다. 진화론의 거짓말쟁이가 과학계를 사로잡고 또 거듭나지 못한 수천 명의 설교자들을 휘어잡은 지 1세기가 지났다.
진화론은 인간의 타락을 반박하고 구속과 중생에 대한 인간의 동시적인 필요성을 제체두기 때문에 그것은 진리의 근본을 말살시키려는 거짓말쟁이다. 같은 기간 동안 소위 독을 신신학자들이 주장한 “고등비평”이란 것도 인간이 지적으로 우수하다고 여김 받기를 원하는 수천 명의 불경건한 목사들에게 영어를 사용하는 세계에서 만연되었다.
일단 진리가 강단에서 사라지자 얼마 안 되어 그것은 국회나 시장에서 사라졌고 현금에 이르러 우리 인간은 국가 간에 신의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살게 되고 우리 동료 간에 대화에도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세계에서 살게 되었다.
진리에 대한 거룩한 열정이 젊은 사람들에게 확고부동하게 뿌리박히며, 또한 그들이 거짓말은 모든 악과 부패에 이르는 통로가 된다고 교육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마찬가지로 어린이를 보호하는 자들 특별히 부모들은 어린이 앞에서 자신의 모범에 따라 가르쳐야 한다. 그들은 어린이들이 성취하지 못할 것을 약속하게 하거나 그들이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에 위협을 가함으로 그와 같은 것들을 무위로 돌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 각자가 약속을 할 때는 아주 천천히 신중하게 해야 한다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그러나 일단 약속이 맺어지면 하나님께 죄짓는 것이 아닌 한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그것은 지켜져야 한다. 나의 이웃에 대해 거짓증거를 금하는 것은 내 자신에게도 거짓증거를 금한다. 내 자신은 실재의 나보다도 더 거룩한 채하며, 또한 실재의 경우에서 보다 더 더욱 겸손한 채하는 태도를 지니기가 쉽다.
우리가 진실을 말하는 때에도 불필요하게 말하거나 불순한 동기에서 말하면 9계명을 깨뜨리는 것이다.
“우리가 이웃의 잘못을 특정한 필요 없이 사람들에게 열거하여 폭로시키면 이웃의 인격을 해치는 것이 된다. 우리는 이웃의 허물을 알 권리가 없는 사람에게 말하거나, 어떤 선한 목적 없이 사회적으로 이웃의 평판을 떨어뜨릴 목적으로 말해서도 안 된다 … 우리가 묵시적으로 같이 하는 사람에게 어떤 피해가 가해질 때에 잠잠하거나, 반대로 우리가 아는 것을 숨김으로서 도무지 말을 하지 않을 때도 9계명을 범하는 것이다.”(존 딬)
사람에게 아부하는 것도 또 다른 형태로 이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단순히 그의 비위를 맞추고 그의 허영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인사하는 것은 당신의 영혼을 속이는 것이며 그의 안전을 위험하게 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추천서에 합당치 않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특성에 대해 거짓증명을 나열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는 것도 “거짓증거”를 하는 것이다.
다음의 지침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사람이 일상적인 죄들을 짓지 않도록 하는데 유익될 것이다.
(1) 당신이 타인을 중상모략하지 않으려면 당파심에 좌우되지 말라. 종파심은 편견을 낳게 하고 편견은 우리와 함께 행하지 않는 사람들의 장점을 인정하지도 인정받지도 않게 하고, 그들을 가장 나쁜 사람들이라고 믿게 하기 때문이다.이 점에 있어서 책을 쓴다는 사람들이 흔히 죄를 많이 짓는다. 교파심이 강한 골동분자는 많은 사람들로 그와 달리하는 자에게 오해를 일으키게 하고 그가 주장하지도 않은 오류들을 그에게 전가시킨다.
(2)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 당신 자신 일에나 열중하고 다른 사람의 일은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도록 내버려두라.
(3) 당신 자신의 허물과 약점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세요. 당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려고 하기 보다는 오히려 당신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대들보를 찾아보라.
(4) 말 만들어 내는 자들이나 잡담하는 자들의 무리를 피하라. 무익한 소문은 영혼을 해치기 때문이니까.
(5) 타인이 당신을 비방한다면 당신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양심에 거리낌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난 후에는 타인이 당신에게 대하여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말하든지 상관하지 말라.
제 10 계 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출 20:17)
여기에서 금지하고 있는 것은 현세이니 이를테면 타인의 소유에 대한 부당한 탐욕이다. 앞서나온 여러 계명들을 해설할 때에 계명들의 실제적인 용도는 외부적으로 들어난 죄 된 행위를 금지하는 데만 국한되었지만, 그러나 각 계명이 미치는 범위는 외부적으로 드러난 죄에 이르게 하는 경향이나 원인을 망라한 모든 것들을 정죄한다고 하였다. 십계명의 마지막인 이 부분에서도 동일한 사례를 분명히 찾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정신 위에 계명을 뚜렷이 부여하시고, 그가 금하시는 모든 것에 대한 욕망을 금지하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죄를 범하지 않는 최상의 방법은 마음속에서 죄에 대한 소원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이전에 나온 아홉 계명들의 권위가 사람의 마음과 영혼의 가장 은밀한 의도에까지 미치지만, 하나님께서는 십계명 속에서 이것을 문자적으로 분명하게 기록하셔서 그가 금지하시는바 물질로 향하는 우리의 최초 마음의 움직임까지도 구체적으로 열거하여 책망하신다. 그렇게 함으로서 이 십계명 전체를 강화시키는 고리가 되는 것이다. 악한 세상적인 욕망은 인간의리가 하락하기 전에 나타나는 것으로서 은밀하고 내적인 죄이며 모든 악의 씨앗들이다. 욕망이나 정욕은 타락한 인간 마음에서 나오는 첫 열매 즉 우리 인간성의 부패에서 나오는 첫 소산 혹은 첫 번째 표출되는 것이다.
그것은 악한 것으로 향하는 격렬한 성향 혹은 의향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명령에 반대하여 나타나는 성향이다. 인간은 활동적이고 정렬적인 피조물이어서 언제나 그의 악한 본성에 어울리는 활동만을 계속한다.타락 전에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께로서 나왔으나 인간이 하나님께 배반하고 그에게서 떠나자 인간의 영혼은 피조물에 유혹을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이 타락한 인간은 신령한 생명과 은혜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무시하는 성향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물질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그 물질에 대한 과도한 욕망을 가지고 죄 된 길로 사용하게 되었다. 타락한 인간이 물질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으려고 하지도 않을뿐더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지도 않기 때문에 결국은 악하게 되었다.
현세욕은 이 계명에서 “탐욕”이라고 표현되었는데 이는 영혼의 불규칙적인 성향이라는 뜻이다.
청교도 에스겔 홉킨스는 (그는 앞서 나온 계명들에서도 많은 도움을 준 것처럼 여기서도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준다.) 세상욕심과 탐욕에는 네 단계가 있음을 지적했다.
죄가 우리 안에 형태를 갖추기 전 악한 생각의 영상 내지는 죄의 불완전한 싹이 생기려는 단계다. 이것은 성경이 “마음의 모든 생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러한 모든 생각들을 “악”이라고 명백히 선포하였다. (창 6:5) 그러한 것은 인간의 관능적인 욕망을 만족시키려는 것이며 인간의 부패한 본성의 시발점이 된다. 이들을 과감히 직시해서 거부하고 증오해야 한다. 그들은 위험한 불꽃과 같음으로 우리의 뇌리에 명백하게 새겨져야 한다. 이는 그들이 우리 안에 와서 휘젓기 시작하자마자 우리의 영혼을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거울위에서 숨을 몰아 내쉬면 거울을 흐리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내부에 있는 악한 소원과 생각을 처음부터 내쉬기만 해도 우리의 영혼은 오염된다.
이 욕망의 다음 단계는 인간 부패성의 악한 움직임이 마음속에서 어느 정도 자기도취에 겨워 환대받을 때 그것이 도달된다. 죄 있는 대상이 정욕적인 마음 앞에서 자신을 내어 보일 때 기쁨으로 함께 하려는 내부적인 반응이 일어나며 그 마음과 대상 사이에는 이미 공명이 일어난다. 자연스러운 공명심이 일어나는 즉시 그 인간은 왜 그런지 이유도 알지 못하고 그 대상을 좋아한다. 또한 죄악 된 공명과 반응이 일어나는 때에 그 마음은 그것ㅇ데게 죄를 짓게 하고 영향을 미치는 대상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생각할 시간도 갖기 전에 그 대상에 사로잡힌다. 한 사람에 대하여 한번 안면이 있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는 똑같이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다른 모든 군중들보다도 그 사람에게 더 끌리는 것을 우리는 여러 번 의식한다. 우리 마음속에 죄의 소욕이 얼핏 일어난다는 사실은, 우리가 죄가 왜 그런지 이유를 조사할 여유를 갖기 전에 죄에 끌리는 힘이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욕망의 둘째 형태나 단계는 첫째 것보다도 몰아내기가 더욱 힘들다. 만약 그러한 죄의 움직임이 우리로 말미암아 환대를 받는다면 죄에 대한 동의와 승낙이 그 사람의 실제적인 판단 속에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부패하고 육욕적인 세력으로 말미암아 눈이 멀게 되고 수행되어지는 그 사람의 판단은 실천적인 기능을 죄에 완전히 맡겨버린다.
식별이란 모든 행위를 신중하게 결정하는 법정과 같다. 그리하여 거기 법정을 먼저 통과하지 않으면 어떠한 행위로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 저러한 행동이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 법정에서 논란되는 중요한 문제다. 그래서 정신적인 모든 기능들이 여기에서 명확한 판결이 나기를 기다리고 그 이후에야 시행한다. 보통 두 증인이 출두하여 죄에 대한 식별과 판결을 내리도록 증언한다. 하나님의 율법과 대리자는 양심이다. 율법은 정죄하며 양심은 죄를 서술한다.
인정심문단계가 있자 좋게 해 준다는 약속으로 재판관에게 뇌물을 준다. 그렇게 함으로 죄에 투표를 하여 죄를 승인하는 재판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따먹기 전에 그녀와 뱀 사이의 대화 가운데 있는 실례에서 얻었다는 것을 주목하라.
어떤 죄 된 움직임이 판단으로부터 허용을 얻게 되면 판결 규정에 의해 의지적으로 실행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오성이 죄 된 행위를 허용했기 때문에 인간의지는 그것을 수행할 것을 결정해야만 한다.
그때 죄는 마음속에서 충분히 형성되어 밖으로 나와 행사할 기회만 엿보게 된다.“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이와 같이 우리는 욕망과 탐욕이 무엇인가를 보이도록 힘써왔다. 그리고 그것의 여러 가지 단계들도 보아왔다; 먼저 우리 마음속에 죄악 된 생각이 일어나는 단계; 그것을 환대하는 단계(그것은 우리 정신 속에 일어난 죄악 된 첫 열매를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부패한 본성에 만족을 줄 수 없다) ; 판단의 동의와 허용; 우리의지의 결단, 이들은 특히 십계명이 금지한다. 죄가 더 이상 나아가면 그것은 이 계명의 한도를 넘어서게 되고, 특별히 외부적인 죄의 행위를 금하는 이런 몇몇 계명들의 금지 상태에 떨어진다.
이 마지막 계명은 내부적인 삶에 있어서 죄에 대한 엄정한 항거를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무한 광대한 영역과 주권을 보게 되고 찬양하게 된다. 그는 욕망의 감추어진 영역위에도 그의 권리를 선포하신다. 그의 권위는 영혼과 양심에 미치고 어떤 인간의 율법도 행사할 수 없는 사람의 생각과 마음에 놓여 있는 의무에도 주장한다.
재판권에 해당될 수 없는 것에다 법령을 부여한다는 것은 사람에게 헛된 일이며 그러므로 욕망이나 정욕은 그들이 들어난 행위로 발견되지 않는 한 탄핵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그들이 사람의 계명과 눈치에서는 벗어날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보는 것과 같이 보지 않으시고 사람이 판단하는 것과 같이 판단치 않으시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문책과 선고는 피할 수 없다.
모든 마음의 비밀은 그의 보시는 눈앞에서 밝히 드러나고 벌거벗은 것이 된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의 전지하심 같이 욕망의 가장 보잘것없는 미풍도 하나님 앞에서는 정오의 햇빛 속에서 보다 더욱 뚜렷이 우리의 영혼을 휘저을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 영혼의 가장 은밀한 처소에까지 이르시며 당신 마음의 모든 구석구석을 감찰하시며 아무 인간의 눈도 탐지할 수 없는 사람들의 정욕을 심판하신다. 그들이 숨겨져서 인정을 받을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당신의 외부적인 움직임을 좋게 한다 해도 범법자로 영원한 죽음에 합당한 자로 당신을 정죄한다.
바깥으로 들어난 하나님 율법에 일치한다고 우리가 스스로 만족해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헛된 일인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성실함과 정결함으로 우리의 마음을 인정받도록 힘써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대접의 안쪽이 더러운 정욕으로 가득 차 있는데도 바깥쪽만 씻는 한낱 바리새인의 의식(외선)에 지나지 못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에게 외부적으로만 미친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은 그들 마음속에 악한 욕망과 악한 의도를 환대하고 열망해도 된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외부적인 범죄만 터뜨리지 않으면 된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심판 날은 그것이 정반대 방향에 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얼마나 적은 소수의 사람만이 마음의 죄를 생각하고 있는가! 적은 소수만이 “나의 은밀한 죄에서 나를 씻기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는가! 속지 마시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 그는 외부적인 화려한 쇼에 속을 리가 없다.
십계명의 마지막 부분에 이 계명을 두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보아라. 왜냐하면 그것이 다른 모든 계명의 울타리요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말과 행실의 죄는 영혼의 더러움에서 일어난다. 안식일을 범하게 되는 것은 불행한 욕망에서 나오는바 안식이 뭔지 모르기 때문이다. “마음에서 악한 생각, 살인, 간음”등이 나온다(마 15:19). 그리스도께서 이, 악한 무리의 선두주자로서 첫 번째에 “악한 생각”을 위치시키신 것을 보아라.
“탐내지 말지니라.”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을 조금이라도 바라지도 말고 거기에 마음도 두지 말라는 것이다. 혹 반대자는 “우리가 열망하는 소원을 제어하기는 불가능합니다.”라고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 점이 바로 타락한 인간 상태와 인간 마음의 절망적인 악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죄 많고 저주받을 욕망은 이 계명의 조명 속에서만 발견된다. 십계명의 이 마지막 명령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자는 죄에 유죄판결을 받은 모습과 무력함을 깨달아야 하며 이것이 계명의 궁극적인 의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거룩한 율법을 주어 우리도 우리자신이 그냥 버림을 받는다면 철저히 소망 없음을 깨닫게 하셨다. 이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그의 무한광대하신 은혜로 돌리시기 위하여 그가 친히 주신 것이다.
그때 참회하는 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을 신뢰할 것인데 이는 그 아들이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셨고 성부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글쓴이: grace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유기(遺棄)와 하나님의 주권(主權)(1) / 아더 핑크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롬 11:22)
4장에서 성부 하나님의 주권과 구원을 논하면서, 성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택하시고 이들이 자기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예정하셨음을 보여주는 성경 구절 일곱개를 살펴보았다. 지적인 독자라면 당연히 이렇게 물을 것이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렇게 대답한다. 하나님께서는 불택자(不擇者)들을 지나치시고 이들이 자기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시며, 마지막에 이들을 불못에 던지시는데, 이들이 하나님의 길을 거부했고 그분이 보내신 구주를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의 절반일 뿐이다. 육신의 생각에 아주 거슬리는 나머지 절반은 무시하거나 거부한다.
하나님의 주권에서 이 부분은 엄청나게 중요하므로, 대충 훑고 넘어갈 부분이 아니다. 이 부분을 자세히 논의할 필요를 느낀다. 우리가 알듯이, 우리 시대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이 칼빈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마저도- 유기(예정된 영벌) 교리를 무시하고 거부하기 때문이며, 유기 교리야말로 가장 격한 논쟁을 불러 일으킬만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꺼리낌 없이 인정하듯이, 하나님의 주권 교리에서 유기 교리는 매우 불가사이한 부분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것 때문에 유기 교리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성경이 하나님이 취하신 행동의 모든 이유와 근거를 만족스럽게 설명 할 수 있는 데까지만 성경을 믿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들이 자신의 제한된 지적 능력이라는 작은 저울로 측정 가능한 것만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기장 강하게 표현하면, 이제 살펴보려는 핵심은 이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이 영벌에 이르도록 미리 작정 하셨겠는가? 두 가지는 확실하다. 1. 많은 사람이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성경이 분명하게 말한다.
2. 각 삶은 자기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고 뿌린 대로 거두며, 결과적으로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한다"(롬 8:3 KJV 영벌은 공의롭다).
하나님께서는 불택자들이 자기 갈 길을 선택하도록 작정하셨다. 이제 이것을 증명해 보겠다. 앞장에서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살펴 보았다. 그런데 선택된 사람들이 있다면, 성경이 이것을 말하지는 않지만, 선택되지 못한 사람들도 틀림없이 있다. 필연적 추론이다. 선택한다는 말은 선택되는 대상이 있는가 하면 선택되지 못하는 대상도 있다는 뜻이다. 사실 모든 선택은 거부를 전제한다. 제외하기(내버려두기)가 없으면 진정한 선택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에 이르도록 택하신 사람들이 있다(살후 2:13 참조) 그러므로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되지 못한 사람들도 틀림없이 있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지 않으신 자들도 틀림없이 있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도 틀림없이 있다. 이것은 필연적인 추론이기 때문에, 이제 이것을 자세히 증명해 보겠다.
우리가 알듯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자들과 그러지 않을 자들을 이미 창세 전에 확실하게 아셨다. 하나님께서는 누가 그리스도를 거부할지 아시면서도 이들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필연적으로 영벌에 이르도록 이들을 창조하신 것이 아닌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가 그리스도를 거부할지 미리 아셨으나 이들이 형벌에 이르도록 작정하시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이것은 쟁점이 되는 진짜 문제를 피해 간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분명하신 이유가 있으시고, 개개인들 창조하신 구체적인 목적이 있으시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의 영원하신 운명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이 영원을 천국에서 보내거나 불못에서 보내도록 목적하셨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가 구주를 멸시하고 거부할 것을 미리 아시면서도 그를 창조하셨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영원히 잃어버린 자가 되도록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하나님께서 이 선물을 일부에게만 주시기로 목적하셨다면, 이것은 이 선물을 나머지 사람들에게 주시지 않기로 목적하셨다는 뜻이기도 하다. 믿음이 없으면 구원도 없다.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지 않기로 하신 자들이 있다면, 이들이 영벌에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작정하셨기 때문인 것이 틀림없다.
이러한 결론을 피할 길이 없다. 그뿐 아니라 역사도 이러한 결론을 확증해 준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절대다수 인간에게는 은혜의 외적 방편조차 없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고, 하나님의 뜻이 담긴 기록된 계시도 없었다. 수 천 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자신을 특별히 계시하셨다.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묵인하셨으나"(행 14:16) -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이스라엘]만을 알았나니"(암 3:2),- 결과적으로 다른 모든 민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고, 따라서 믿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그분을 기쁘게 하는 방법도, 그분이 자신들을 받아들이게 하는 방법도 알지 못했다 유기(遺棄)와 하나님의 주권(主權)(2) / 아더 핑크
만약 하나님께서 이들의 구원을 원하셨다면, 구원의 방편을 이들에게 주시지 않으셨겠는가? 이 목적을 이루는데 필요한 전부를 이들에게 주시지 않으셨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 하시지 않으셨다. 이것은 부정하지 못할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공의(公義) 및 자비와 모순되지 않게 하시면서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은혜의 방편을 허락지 않으시고 그들을 큰 어둠과 불신앙에 가둬두실 수 있으시다.(선조들의 죄, 그 이전 세대들의 죄때문에) 그렇다면 일부나 다수를 은혜 자체로부터, 은혜와 연관된 영생으로부터 차단하는 것이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양립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어쨌든, 그분께서 주님이시며, 수단이 지향하는 목적과 목적을 지향하는 수단을 주권적으로 공급하시는 분이시다.
시대에, 이 나라에도 -복음화 되지 않은 수많은 이교도를 제외하더라도- 사방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들이 즐비한 데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거룩하심을 모른 채 죽은 영혼이 많은 게 분명하지 않은가? 사실 구원의 메시지가 가까이 있는데도, 그것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많다. 많은 아이들이 그리스도인은 위선자며 목사들은 속 좁고 편협하다고 가르치는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다. 또 어떤 아이들은 복음주의 기독교를 치명적인 이단으로 여기고 성경을 매우 위험한 책으로 여기는 교파에서 자라고, 어떤 아이들은 현대의 기독교 이단에서 자라나 복음화 되지 않은 이교도와 다를 바 없이 그리스도의 진정한 복음을 알지 못한다.
이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고 결론 내리는게 옳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로 뜻하셨다면, 베푸시지 않으셨겠는가? 시간 속에서 이들에게 은혜를 베푸시지 않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이것은 틀림없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뜻이셨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그러하시듯이, 하나님의 뜻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기 때문이다. 잊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결정하신 일만 시간 속에서 하신다. 또는 고전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섭리는 그분의 작정의 현현일 뿐이시다. 하나님의 뜻이 그분의 모든 행위와 일의 유일한 원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은 상태로 내버려 두시는 것이 하나님의 결정이라면, 그렇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결정이셨으며,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창세 전에 버리셨다고 결론 내려도 안전하다.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일어날 모든 일을 영원 전에, 자신의 뜻에서 나온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을 통해, 불변하게 작정해 놓으셨다." 매우 주의 깊고 신중한 학자요 저술가였던 F. W. 그란트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장차 일어날 모든 일을 자신의 영광을 위해 작정해 놓으셨다는 것은 완전히, 신적으로 참되다." 이러한 진술들이 참이라면, 영벌(永罰) 교리도 참이지 않는가? 인간의 삶에 매일 일어나는 한 가지가 무엇인가? 매일 사람이 죽어 이 세상을 떠나는 소망 없는 영원으로, 고통과 재앙의 영원으로 옮겨간다.
우리가 말했듯이, 하나님께서 장차 일어날 모든 일을 미리 작정해 놓으셨다면, 수많은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 채 이생을 떠나 불못에서 영원히 고통당하는 것은 그분의 계획 일부가 틀림없다. 이것을 일반적 원리로 인정한다면, 구체적 적용은 필연적이지 않겠는가? 이러한 사고 논리에 답해, 독자는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이것은 모두 단순화시킨 추론일 뿐이다. 분명히 논리적으로나 추론으로 얻은 결론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이 중대한 주제에 관해 아주 분명하고 확실히 가르치는 성경 구절을 살펴보겠다. 이 구절들은 오해하기에는 너무 명백하고 회피하기에는 너무 강하다. 놀라운 사실은 지금까지 많은 선한 사람이 부정할 수 없는 결론들을 부정했다는 것이다. 유기(遺棄)와 하나님의 주권(主權)(3) / 아더 핑크
"여호수아가 그 모든 왕들과 싸운 지가 오랫동안이라 기브온 주민 히위 족속 외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화친한 성읍이 하나도 없고 이스라엘 자손이 싸워서 다 점령하였으니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을 진멸하여 바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을 멸하려 하심이었더라"(수 11:18-20)
무엇이 이보다 분명하겠는가? 하나님께서 허다한 가나안 족속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고, 이들을 완전히 멸하고 이들로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셨다. 이들은 악하고 부도덕하며 우상을 숭배했다. 그렇더라도 이들이 다른 많은 족속보다, 존 패턴(1824-1907, 뉴헤브리디스 제도의 선교사)의 선교를 통해 구원받은 식인종들보다 나빴는가? 확신컨대, 아니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에게 명하시어 가나안 족속들에게 자신의 율법과 참 하나님께 대한 제사를 가르치게 하시지 않으셨는가? 이유는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멸망에 이르도록 영원 전에 계획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주께서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하여 지으셨으니, 정녕, 악한 날을 위하여 지으신 악인까지라"(잠 16:4, 한글킹제임스)
본서의 모든 독자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셨음을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만물을 지으셨다고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더라도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우리의 행복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지으셨다고 거듭 확인해 준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4:11)
그러나 잠언 16장 4절은 여기서 훨씬 더 나아간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악한 날을 위해 악인을 지으셨으며,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들을 지으신 목적이시라고 분명히 선언하신다. 그렇다면, 왜 그런가? 로마서 9장 17절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날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악인을 지으신 목적이 있으시다. 가장 거친 배반자와 가장 강한 원수를 정복하는 일이 자신에게는 얼마나 쉬운 일인지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시기 위힘이시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두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3)
앞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성경에서 '알다'와 '미리 아심'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께 적용되면, 단지 그분의 예지가 아니라 그분의 은혜(恩惠)와 인정(認定)을 가리킨다. 하나님게서는 이스라엘에게 "내가 땅의 모든 민족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암 3:2)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내가 오직 너희에게만 은혜를 베풀었다"는 뜻이다. 로마서 11장 2절은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사랑의 대상으로 선택하신 백성(이스라엘)을 마지막까지 버리지 않으셨다."는 뜻이다.(신 7:8 참조)
우리는 마태복음 7장 23절을 같은 방법으로 이해한다.(가능한 방법은 이것뿐이다) 심판 날에, 주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했노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주목하라. 단순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했노라"가 아니다. 주님의 준엄한 선언은 이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인정하지 않노라." 이 말씀을 "나는 내 양을 알고[사랑하고]양도 나를 안다[사랑한다]"(요 10:14)는 말씀과 대조해 보라. '양', 자신이 택한 자들 '소수'는 그분이 '아신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악한 자들, 자신이 택하지 않은 자들 '다수'는 그분께서 알지 못하신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도 그분께서는 이들을 알지 못하셨다. 그분께서는 '도무지'(NEVER) 이들을 알지 못하셨다! 글쓴이: 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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