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생활을 막는 장애들 / 리차드 백스터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당신이 꼭 피해야 할 장애물들을 고려해 보자.
1) 알고 있는 죄 가운데 살아가는 것
알고 있는 죄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천상의 삶을 영위하는데 가장 큰 장애이다.
죄가 얼마나 당신의 영혼을 황폐하게 만드는가!
죄가 당신의 기쁨을 얼마나 파괴하는가! 사람들의 아름다움을 얼마나 파괴하는가!
영혼의 건강을 얼마나 방해하는가!
그리스도인 독자들이여, 당신은 자신의 양심에 폭력을 행사하며 잘 아는 죄를 저지르고 있는가?
공적이든, 사적이든 또는 은밀하든, 당신은 마땅히 제거해야 할 어떤 죄를 의도적으로 등한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은 탐욕에 빠져있거나 또는 감각의 노예가 되어 있는가?
당신은 자신의 명예를 추구하는 교만한 자인가?
당신은 매사에 시비를 거는 까다로운 사람인가?
누가 조금이라도 당신을 우습게 알면 조금도 참지 못하고 당장 분노를 터뜨리는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간교한가?
옳고 그른 것에 상관없이 부유해지려고 노력하는가?
만일 당신이 이러한 경우에 해당하면 나는 감히 말하길 당신의 영혼은 천상의 생활을 누릴 수 없다. 자기 눈 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천국을 볼 수 있는 시력을 잃는다. 당신이 알고 있는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것은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구름을 끼게 하는 것이다.
당신이 영원을 연구하고 내세로부터 오는 힘을 얻으려고 하면 당신이 지은 죄는 당장 당신을 바라보며 “이러한 일들은 당신에게 해당하지 않아. 어떻게 육체의 정욕 가운데 그렇게 많은 쾌락을 취하는 당신이 하늘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겠어”라고 핀잔하며 말한다.
당신의 죄가 당신의 기쁨을 얼마나 쉽게 꺾어 버리는지, 그 날과 상태를 생각할 때마다 당신의 삶은 당장 즐거움이 아니라 괴로움이 된다!
모든 의도적인 죄는 불을 꺼뜨리는 물처럼 당신의 기쁨에 찬 물을 끼얹는다.
당신이 기쁨을 생각하려고 하면, 그 죄는 당장 그 기쁨을 제거할 것이다.
날개 잘린 새가 하늘을 날 수 없는 것처럼 죄에 의해 철저하게 무기력하게 되고 무능하게 된 영혼은 신성한 묵상 가운데 날아오를 수 없다.
죄는 천상의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모든 근육을 잘라낸다.
오, 이 사람아!
당신이 알고 짓는 죄 때문에 당신이 어떤 삶을 잃고 있는지 아는가!
당신의 그 더러운 죄 때문에 날마다 어떤 즐거움을 잃고 있는지 아는가?
만일 천국과 지옥이 닿을 수 있고 하나님이 죄를 사랑하시게 된다면 당신은 죄 가운데 살아도 될지 모르겠다!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당신의 부패를 소중히 여기면서 하늘의 영광을 미리 맛보며 하늘의 대화를 나눌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지 않은가!
그 죄 때문에 당신의 마음이 천국을 누리지 못하는 것처럼 혹시 그 죄 때문에 실제로 당신이 천국에서 추방될지 모른다.
지금은 비록 당신이 알기에 당신은 어떤 분명한 죄를 짓지 않았으며 또한 어떤 죄가 당신을 다스리지 않는다고 해도 언젠가 당신이 이러한 경우에 해당하게 된다면 얼마나 슬프겠는가! 그러므로 죄를 지을 기회 및 유혹에서 벗어나기를 특별히 결심하라.
매일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마 6:13)라고 기도하라.
2) 세상적인 마음
세상적인 마음은 우리가 조심스럽게 피해야 할 장애물이다.
하나님과 맘몬, 그리고 세상과 천국이 동시에 당신의 마음의 즐거움이 될 수는 없다.
하늘의 마음을 가진 신자는 하나님 안에서 복을 누리며 다가올 영광의 소망 가운데 기뻐한다. 하지만 세속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세상의 번영에서 복을 누리며 이 세상에서 형통할 소망 가운데 즐거워한다.
하늘의 마음을 가진 신자는 그리스도 및 그가 영원히 함께 하게 될 천사들과 성도들을 바라보며 그 영혼에 위로를 얻지만, 세상적인 마음을 가진 당신은 당신의 부귀로 위로를 받고 당신의 재산과 물건과 소 떼와 건물을 바라보며 흐뭇해한다.
당신은 또한 위대한 사람들의 호의를 생각하며 좋아하고, 넓은 부동산과 자녀들에게 물려줄 큰 재산과 당신의 가문의 발전이나 식솔들이 많아질 것을 생각하며 기뻐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 12:19)라고 말한 어떤 부자를 어리석은 자로 선포하셨다면, 그 부자와 똑같은 말을 하는 당신은 얼마나 더 어리석은 자이겠는가!
이 어리석은 부자의 표현과 세상을 좋아하는 당신의 마음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말해 보라. 당신은 마음을 살피는 주의 음성을 기억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당신이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안주하려는 만큼 하나님을 즐거워함이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세상적인 마음을 갖고도 겉으로는 신앙을 고백하고 평범한 의무를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늘을 즐거워하며 묵상하는 이 의무를 병행할 수는 없다.
당신이 이 세상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세상과 거래를 한 이후로 당신에게는 하늘의 즐거움을 생각할 여력이 없다.
당신이 세상에 마음을 준 이후로 당신이 위의 즐거움을 찾은 때가 얼마나 드물고 냉랭했던가!
오, 종교적으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의 저주스러운 광기여!
그들은 너무 많은 일에 자신을 던지더니 결국 일에 치이고 염려로 가득 찬다.
따라서 그들의 영혼은 등에 산을 얹고 걷는 사람처럼 너무나 지쳐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눌 여유가 없으며, 몸이 태양을 뛰어넘듯 묵상 가운데 높은 곳에 오를 힘이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천국을 놓친 후에는 그 상태가 합법적임을 입증하기 위해 몇 가지 썩어빠진 논리들을 편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입증하지 못한다.
하늘의 즐거움을 맛본 그리스도인들이여, 내가 당신에게 충고하는 것은 만일 당신이 천국의 즐거움을 더 맛보길 원한다면 만족을 모르는 세상적인 마음을 피하라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일단 ‘부유하려고 하면’ 많은 유혹과 덫에 빠질 것이며 여러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빠질 것이다.
세상의 것들을 붙들지 말고 세상의 것을 언제든지 벗어던질 수 있는 외투처럼 여기라.
그러면 필요할 때만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하늘 영광은 당신의 마음 곁에 항상 있게 하라.
언제나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것은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약 4:4)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다”(요일 2:15)는 진리다. 이는 자명한 진리이니 신실하게 이 진리를 받는 자는 복될 것이다.
3) 불경건한 동료들
불경건한 자와 어울리지 않도록 주의하라.
물론 필요한 대화를 하지 말라거나 사랑으로 그들에게 대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특히 그들에게 소망이 있고 기회가 있다면, 그들의 영혼의 유익을 위해 노력하지 말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또한 그들을 책망해야 하는 의무를 피하기 위해 그들을 개와 돼지로 판단하라는 것도 아니다. 특히 앞으로 나아질 수 있는 소망이 있는 한, 절대로 그러한 판단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 신실하게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책망해 보지도 않고, 또한 그들을 만나 알아보거나 대화를 나누어 보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을 개나 돼지로 판단하는 것은 전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만류하는 것은 전혀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과 친밀하게 어울리는 것이며 또한 불경건한 자들과 함께 불필요한 단체 활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즉, 신성모독을 하는 사람들, 욕을 하며 저주하는 사람들, 술주정뱅이들, 경건의 원수들과 어울리는 것은 당신에게 해가 되기에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도덕적이며 교양은 있지만 당신의 생각을 천국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허망하고 무익한 대화를 하는 사람들과의 잦은 만남도 피해야 한다.
우리가 영적으로 뒤로 처지는 것을 막으려면 가장 꾸준하고 강력한 도움이 필요하다.
돌이나 흙덩어리가 저절로 일어나 하늘을 나는 것이 아니듯이 우리의 마음이 저절로 하늘을 향하지는 않는다.
당신은 바위가 하늘로 날지 못하도록 막을 필요가 없다. 그냥 가만히 두면 된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영혼도 큰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아무런 장애가 없어도 위로 솟아오르지 못한다.
오, 당신이 어울릴 사람을 택하는데 있어서 이 점을 고려했으면!
만일 당신의 영이 불꽃처럼 하늘만을 바라는 성향이 있어서 하늘로 향하는 것을 도울 필요가 없을 정도가 되어 늘 위로 오르며, 또한 당신의 그 길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함께 하늘로 데려갈 수 있다면 참으로 당신은 누구와 어울릴 것인지를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수준이 될 때까지는 당신은 천상의 삶의 즐거움을 사랑하는 만큼 이곳에서 누구와 어울릴지를 주의해야 한다.
당신이 신령한 삶을 사는데 있어서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고 날씨가 어떠하며 세상 소식들이 어떠한지를 세세하게 나누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이러한 대화들은 세상적인 사람들의 대화다.
그 목사는 훌륭한 목사이며 저 사람은 뛰어난 그리스도인이고 이 설교가 좋고 저 책이 훌륭하다는 것을 듣는 것이 당신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매우 복잡하고 지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전혀 중요하지 않은 논쟁들을 듣는 것이 당신의 신령한 삶에 무슨 유익이 되는가?
아마 이러한 대화들이 당신의 일상의 대화일지도 모른다.
또한 형식적이고 사색적인 죽은 신앙의 사람들로부터 들을 수 있는 최선의 대화일 것이다.
당신이 하늘의 복된 기쁨을 묵상하여 당신의 마음이 새롭게 뜨거워져 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대화는 당신의 감정을 마비시키고 당신의 마음을 신속하게 얼게 할 것이다.
나는 이런 일을 시도해 보고 자신의 마음 상태를 관찰해 본 모든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사람은 어떤 대화를 나눌 때 그의 마음이 그 대화와 전혀 다른 것에 갈 수 없다.
특히 세상과 천상의 것들처럼 그 속성이 전혀 반대일 때는 더욱 그렇다.
세상적인 대화에 빠지기에 가장 쉬운 젊은이들이여!
내가 말하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라. 당신은 빠나 술집을 다니는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면서 당신의 마음이 천상을 생각할 수 있는가?
당신은 더러운 저주와 욕설과 어리석은 말과 희롱의 말을 하는 자들과 어울리면서 하늘에 마음을 둘 수 있는가?
아니, 당신이 그러한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고 계속 그들과 함께 한다면 당신은 하늘의 대화를 전혀 나누지 못할뿐더러 그 상태로는 절대로 당신 자신도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되지 않는다.
만일 당신의 보화가 그러한 세속적인 친구들과 함께 하는데 있다면, 당신의 마음은 저 멀리 하늘 위에 있는 것에 있을 수 없다.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의 사귐은 천국에서 누릴 행복의 한 부분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땅에서의 사귐은 그 행복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되든지 아니면 방해가 된다.
4) 개념뿐인 종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진리들에 대해 다투려는 잦은 논쟁을 피하라.
이러한 논쟁은 개념뿐인 종교에 치우친 자들이 자신들의 의견을 주장하느라 생기는 것이다. 그들은 신앙의 부수적인 것들을 붙들고 거칠게 논쟁을 하지만 천상의 삶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그의 종교는 단지 의견이며 따라서 자신의 의견을 쉬지 않고 말하며 그 의견을 주장하는데 모든 열심을 다한다.
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인들은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그 행복한 시간을 말하는 것을 가장 즐거워한다.
이러한 신자는 드물고 귀한 그리스도인이며 분명한 복음의 진리들을 증진시키는데 능숙하다. 그러므로 나는 천상의 삶을 갈망하는 당신에게 권하기를 당신의 영혼에 별 도움을 주지 않는 종교적인 논쟁에 휘말리지 말라는 것이다.
당신의 생각, 당신의 시간, 당신이 열정, 당신의 말을 그러한 논쟁을 위해 사용하지 말라.
위선자들이 껍질과 모양을 먹고 살 때 당신은 하늘의 즐거움을 먹도록 하라.
나는 당신이 하나님의 모든 진리를 변론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를 위해 읽고 연구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와중에 절대로 영원에 대한 생각을 놓치지 않기를 바라며 주된 복음의 진리를 더욱 연구하기를 바란다.
우리의 영혼에 가장 많이 필요하며 가장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한 진리들에 대해서는 별로 논쟁할 거리가 없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성경의 교훈을 마음 속에 두라.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말라.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롬 14:1; 딤후 2:23-24; 딛 3:9; 딤전 6:3-5; 딤후 3:5).
5) 교만한 마음
교만하고 거만한 마음을 갖지 않도록 주의하라.
이 죄는 하나님과 대단히 원수 되기 때문에 이 죄가 당신에게 있는 한, 하나님은 당신과 함께 할 수 없으며 당신도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게 된다.
만일 이 죄가 천사들을 하늘로부터 내어 쫓은 이유라면 당신이 이 죄를 품고 있는 한 당신의 마음은 천국과 거리가 멀다.
만일 이 죄 때문에 우리의 최초의 조상이 파라다이스에서 쫓겨났고 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간격이 만들어지고 모든 피조물에게 저주가 임하였다면, 지금 이 죄는 우리의 마음을 파라다이스로부터 멀게 할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저주의 상태를 더욱 크게 할 것이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은 겸손하여지며 그 겸손은 또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욱 증진시킨다.
사람이 하나님과 늘 함께 하며 주의 영광스러운 속성들을 연구하는데 사로잡히면 그는 먼지와 재 가운데 있는 자신을 혐오하게 된다.
이러한 자아 혐오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있어서 최선의 준비 과정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지나거나 마음이 겸손하여지는 사건들을 지난 후에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아가 천상의 삶을 가장 많이 맛보곤 한다.
하나님은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주의 말을 듣고 떠는 자”(사 66:2)를 즐거워하시며, 그러한 영혼들의 즐거움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게 된다.
서로 즐거워하는 대상과는 자유로운 왕래가 가능하고 언제든지 서로 따스하게 환영하며 자주 대화를 나누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에게서 멀리 계시며 그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금하신다.
하나님은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시며” (시 138:6),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약 4:6).
교만한 자들은 자만심이 깊고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하며 육체의 소욕을 갈망한다.
그러나 겸손한 마음은 하나님을 드러내기를 기뻐하고 거룩을 갈망한다.
겸손한 마음과 교만한 마음은 서로 가장 반대되며, 왕과 농부가 아니라, 왕과 왕이 전쟁을 치르듯이 이 둘은 항상 인간의 마음속에서 전쟁을 치른다.
자, 당신은 자신을 대단한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여기는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칭찬하고 높일 때는 우쭐해지지만 그들이 당신을 얕보는 말을 할 때는 매우 낙심하는가?
당신은 당신을 알아주는 사람들은 사랑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이 아무리 경건하고 정직해도 형편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자기 기분에 따라 행동하고 자기 판단만이 옳은 규칙이며 자신의 말은 다들 따라야 하는 법이라고 여기는가?
당신의 말이나 뜻이 좌절되면 분노를 터뜨리는가?
당신은 하나님께 죄를 범한 때도, 그리고 형제들에게 가해를 했어도 겸허한 자세를 취하는 것은 추하고 천박한 자세라고 생각하고 절대로 잘못했다는 겸손한 고백을 할 줄 모르는가?
당신은 가난한 신자를 보면 이상하게 여기면서 그들과 어울리기를 가장 부끄러워하는가?
당신은 사회적으로 잘 될 때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섬길 수 없는가?
당신은 참된 겸손 때문이 아니라 겸손해 보이고자 하는 잔꾀와 모양새로 자랑을 삼가는가? 당신은 모든 사람의 관심이 당신에게만 있기를 원하며 그들이 “이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기를 갈망하는가?
당신은 자신의 마음의 간교함과 악함을 잘 모르는가?
당신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자신을 탓하기보다 끝까지 핑계하며 자신은 순전하다고 변론하는가?
당신은 가까운 자들의 꾸지람을 견디지 못해 하며 당신에 대한 그들의 솔직한 평가를 듣기 싫어하는가?
만일 이러한 증상들이 당신의 마음에 있다면 당신은 교만한 사람이다.
당신의 마음은 천상을 대하기에는 너무 지옥 같은 교만으로 가득차 있으며, 하나님과 친밀하기에는 당신의 마음은 마귀와 같다.
교만한 자들은 자신을 자기 신으로 삼으며 자신을 자기 우상으로 세운다.
이러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좋아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가 그의 마음을 천국에 둘 수 있겠는가?
자신을 속이고 꾀를 써서 입술로는 겸손하게 말하고 하늘의 표현들을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의 마음속에는 겸손도 없고 천국도 없다.
나는 교만한 마음에 대해 더 말을 하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 죄는 가장 일반적이고 위험한 죄이며, 불신의 큰 죄를 가장 많이 조장하는 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여!
만일 당신이 먼지 가운데 겸손하게 꿇어 앉아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면 주께서는 당신을 높이 들어 올리시고 “그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그에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 11:29)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당신의 영혼은 “평온함을 얻지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을 것” (사 57:20)이다.
당신의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 안에서 감미로운 즐거움을 누리는 대신에 끊임없는 불안 가운데 있게 될 것이다.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는 훗날에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클 것이며, 마찬가지로 현재 이 땅에서도 가장 많이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맛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시고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신다”(사 57:15).
그러므로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당신을 높이실 것이다” (약 4:10). 또한 “사람들이 당신을 낮추거든 당신은 교만했노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리라” (욥 22:29).
6) 게으른 마음
천상의 삶을 영위하는데 또 다른 장애는 게으른 마음이다.
진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천상의 삶을 누리는데 있어서 가장 방해 되는 것은 아마 게으름일 것이다.
천상의 삶을 누리는 것이 그저 입술이나 움직이고 무릎을 펴는 정도라면 다들 친구를 만나듯이 천상을 향한 계단을 밟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천상의 삶을 누리려면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세상에서 떼어내고 우리의 모든 덕목들을 끄집어내어 각 덕목에 해당하는 목표를 향해 자라나도록 힘쓰며 그 일이 형통할 때까지 인내하며 붙들어야 한다면, 이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독자들이여!
천국은 당신 위에 있으니 그 가파른 등정을 수고와 결심 없이 여행할 수 있다고 생각마라.
가만히 드러누워 빈둥거리면서 당신의 땅에 속한 마음을 하늘에 닿게 하고 뒤로 후퇴하는 마음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산기슭에 누워서 꼭대기를 바라보며 그곳에 있기를 원하기만 하면 꼭대기에 당장 닿는다면 우리는 매일 천국을 향해 다녀왔을 것이다.
그러나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는다” (마 11:12).
약속의 땅의 첫 열매를 얻기 위해서도 침노를 해야 하며 약속의 땅을 완전히 소유하기 위해서도 침노해야 한다.
내가 당신에게 말하지 않더라도 당신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가?
당신이 뜻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마음이 위로 향하겠는가?
당신은 천국이 당신의 모든 소망이며 이 땅의 그 무엇도 당신에게 그러한 안식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천국을 거의 생각하지 않는 마음은 천국으로부터 아무런 위로를 가져올 수 없다.
당신은 하늘을 걸으며 하나님과 동행해야 할 이때에 게으르게 누워 천국을 누릴 기회를 놓치려는가?
당신은 천상의 삶을 영위하는 것은 감미롭다고 칭찬하며 그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최고의 그리스도인으로 평가하면서도 왜 막상 당신 자신은 그 삶을 누리려 하지 않는가?
게으름뱅이가 침대에 누워있으면서 “오 이렇게 해서 될 수 있다면!”이라고 외치듯이 당신은 잡담을 하며 빈둥거리며 안일하게 지내면서 “오 내 마음이 천국에 닿을 수 있으면!”이라고 말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 안에서 부지런히 위로를 발견하려고 애쓰기보다 책이나 설교를 통해 쉬운 방법 또는 간단한 방법을 찾으려고 하는가!
만일 그들이 천국의 삶을 발견할 수 있는 지침을 구하다가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하면 그 지침을 따르며 천상의 그리스도인들이 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들에게 그들이 해야 할 일을 보여주며 그들이 쉬운 방법으로 천상의 즐거움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면 그들은 젊은 관원이 슬픈 기색을 하고 그리스도를 떠났던 것처럼 우리를 떠난다.
독자들이여!
이제 이 일이 당신의 위로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임을 알게 되었다면 그 일을 하기로 다짐하라.
만일 당신의 마음이 뒤로 물러서면 이성적으로 따져서라도 강요하도록 하라.
만일 당신의 이성이 흔들리면 이 일은 하나님의 명령임을 선포하고 또한 앞 과에서 제시한 고려 사항들을 살피며 당신 자신이 필히 해야 할 일인 것을 주장하라.
상상도 못할 그런 귀한 보화가 당신이 가질 수 있도록 당신 앞에 놓여 있는데 당신은 팔짱을 끼고 가만히 앉아 있겠는가?
당신이 움직이기만 하면 계속되는 당신의 지겨운 삶이 계속되는 잔치의 삶이 될 수 있는데 당신은 꼼짝 않고 있겠는가?
꽃으로 가득한 화원에서 일어나기만 하면 꽃을 딸 수도 있고 꽃향기를 맡을 수도 있는데 잠에 들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당신은 당신 눈앞에 하늘의 위로가 놓여 있어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불평만 하고 있다.
내가 아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샘이시지만 그 우물은 깊기 때문에 당신이 그 물로 목을 축이고 힘을 회복하려면 물을 길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아는 것은 당신이 영적인 한, 이 모든 침노하려는 수고는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당신에게 육적인 부분이 있는 한, 수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파르티아 사람들의 관습 중에는 자녀들의 이마에 수고의 땀이 보이지 않으면 아침을 주지 않는 것이 있다.
이러한 관습은 하나님께서 주의 자녀들을 대하시는 일반 섭리 속에서도 발견된다.
즉, 자녀들이 하늘의 즐거움을 구하기 위해 땀을 흘리기 전에는 그 즐거움을 주시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하늘의 삶과 육체적인 안일한 삶 가운데 어떤 것이 좋은지 판단하고, 지혜로운 자처럼 바른 결정을 내리라.
하지만 나는 당신을 격려하기 위해 몇 가지를 더하겠다.
당신은 지금보다 더 이상의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당신이 할 일은 당신의 생각을 더 낫고 좋은 즐거움의 대상에 고정시키는 것이다.
당신이 지금까지 매일 세상의 일들과 헛된 것들과 부적절한 것들을 생각해 왔던 것처럼 이제는 다가올 삶의 뛰어난 영광을 매일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당신의 마음은 어느새 천국에 있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게으른 자의 밭은 가시덤불이 그 전부에 퍼졌으며 그 지면이 거친 풀로 덮였고 돌담이 무너져 있다. 게으른 자의 욕망이 이는 자기의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한다.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말한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돈다.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한다” (잠 24:30-31; 잠 21:25; 잠 26:13-15).
이러한 게으름이야 말로 우리의 위로를 내다 버리는 것이며 결국 우리를 사신 보혈을 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즉, “자기의 일을 게을리하는 자는 패가하는 자의 형제다” (잠 18:9).
이 진리를 당신의 영적인 일에 적용하고 그 의미를 잘 연구해 보도록 하라.
7) 천상의 삶은 누리지 않고 단지 준비하는 일에 안주하는 것
천상의 삶을 한 번도 누리지 못하면서 단지 천상의 삶을 준비하는 일에 만족하는 것 또한 은밀하고 위험스런 장애다.
천상의 것들에 대해 연구하는 일에만 사로 잡혀 있고 개념적으로만 천국을 아는 상태에서 그것이 천상에 대해 충분한 것으로 천국을 말할 때 얼마나 큰 위험이며 장애인지 모른다.
특히 복음을 전하는 목사들처럼 다른 사람들의 헌신을 이끄는 일에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이러할 경우, 그 함정의 위험은 더욱 심각하여진다.
오, 이러한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속는지!
그들은 천국에 대해 읽고 연구할 뿐 더 이상이 없다.
설교하고 기도하고 천국에 대해 말해도 그것이 천상의 삶을 영위하는 것과는 다르다.
아아, 이 모든 것은 단지 준비일 뿐이다.
정보 자료를 모으는 것이지만 건물 자체를 세우는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만나를 모으지만 정작 자신은 하늘의 만나를 먹어본 일이 없다.
어떤 사람이 집에 앉아 각 나라들의 정확한 지도를 펼쳐 놓고 있지만 한 번도 그 나라들을 여행하거나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당신도 하늘의 즐거움을 남들에게 묘사하지만 정작 당신 마음속에는 그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다.
장님이 교육을 받아 빛과 색깔을 따지는 것처럼 당신도 단 한 번의 하늘의 빛을 본적이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 빛을 설명한다. 당신 자신은 한 번도 하늘의 열기로 따스한 적이 없는데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그 열기를 만들어 보겠다며 애를 쓴다. 발람 선지자가 그의 예언을 통해 천국의 길을 말하였지만, 그의 영은 천국과 얼마나 멀었던가!
천상의 삶을 누리는데 있어서 그 삶을 누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이 은밀한 유혹은 다른 세상 사람들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많다. 천상의 삶에 대해 연구하고 전파하는 것은 세상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천상의 삶을 닮아있다. 그런데 이러한 유사함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속기 쉬운 것이다.
이렇게 속아서 죽게 된다면 가장 비참한 죽음이 되는 것인데 그 이유는 식탁에 빵이 있는데 스스로 굶어 죽는 것이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물을 길어주다가 자신은 목이 말라 죽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영혼은 천국의 생수를 한 번도 마신 적이 없으면서 단지 매일 천국을 다룬다는 이유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바로 이와 같은 꼴이 된다.
설교자는 자기의 전인격을 드리는 경건의 수업이 있어야 한다(리처드 백스터)
1.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당신을 비켜가지 않도록 당신 자신을 주의깊이 살피십시오. 또 당신이 설교하는 복음의 효과적인 역사에 당신 자신이 이방인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요 --- 수많은 설교자들이, 지옥에서 벗어나도록 극도의 주의를 기울이며 신실하게 살피라고 수백 번씩 그의 청중들에게 설교했으면서도 자신들은 정작 지옥에 가 있습니다. 형제들이여, 설교자였다고 해서 또 아주 능력있는 설교자였다고 해서 그를 하나님이 구원하신다고 결코 생각하지 마십시요. 오히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인침을 받은 자, 성화된 자,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 주인의 구속사역 안에 들어있는 신실한 사람을 구원하심을 믿으십시요. 그러므로 당신 자신을 주의하십시요. 먼저 당신이 청중들에게 선포한 바로 그 사람이 되십시오.
2. 당신은 다른 이들에게 짓지 말라고 설교한 그러한 실제적인 죄들 속에 살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요. 당신이 날마다 정죄하는 죄책감을 가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 만일 죄가 악한 것이라면 어째서 당신은 그 죄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까? 만일 죄가 악한 것이라면 어째서 당신은 그 죄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까? 만일 죄가 악한 것이 아니라면, 왜 당신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피하도록 합니까?
3. 당신이 수행하고 있는 그 엄청난 직무에 걸맞지 않은 사람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요. 설교자는 구원받기 위하여 알아야 할 모든 비밀스러운 것들을 가르쳐 줄 지식에 있어서 어린 아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설교사역의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필요한 자격들입니까! 신학에 있어서 얼마나 많은 난제들이 해결되어야 하는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근본적인 것들은 선포해야 하지 않습니까? 설명해야 할 애매모호한 성경귀절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 그것은 게으른 연구를 한다거나 연구의 맛을 가끔 맛보았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태만함은 겸비한 연구를 가장하며, 성령만이 우리로 하여금 온전하게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심을 압니다 --- 그런 사람들은 죄스럽게도 그들의 태만함으로 성령을 소멸하면서도 성령께서 그 일을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게으르지 말고 성령 안에서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4. 여러분의 모범이 교리에 상반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요. 파멸을 초래하게 될지도 모를 장애물들을 장님 앞에 내려놓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여러분의 혀로 말한 것을 여러분의 생활로서 망쳐버리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요. 그렇게 함으로서 여러분 불경건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과 말씀선포 사역에 가장 치명적인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요· 단 한번의 교만한 말, 퉁명스러운 말, 짐이 되게 하는 말, 불필요한 관심, 한번의 탐욕스러운 행동 등은 많은 설교의 영광을 잘라 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제까지 공들여 이룩한 모든 열매들을 날려 버리는 것입니다. ---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기 위해서 열심히 성경말씀을 연구하듯이 생활 속에서도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를 원하고 기도하며 자기의 전인격을 드리는 경건의 수업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과 시간 (조나단 에드워드)
그리스도인과 시간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뒤돌아보면 헛되이 사용한 시간들이 많음을 본다. 그래서 우리에게 그것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글이 때때로 필요하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시간의 귀중성과 그것을 아끼는 것의 중요성”이란 요약설교가 바로 그것이라 생각한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에베소서 5장 6절 "시간을 아끼라(redeeming the time)"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유익함과 다른 사람들을 악에서 구출하기 위하여 그들의 기회들을 사용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시간은 대단한 가치를 가지며, 지혜로서 활용되어야만 한다.
1. 왜 시간이 귀중한가?
1) 왜냐하면 우리의 영원한 복락이 그것의 올바른 사용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시간의 귀중성은 그것의 중요성에 의존한다. 시간이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으로서 우리가 영원한 불행을 피할 수 있거나, 영원한 행복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2) 왜냐하면 시간은 짧기 때문이다
일용품은 부족할때에 가치가 올라간다. 시간은 적고, 짧다.
3) 왜냐하면 시간이 계속 주어질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 모른다.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날일 수도 있다. 만약 어떤 여행자의 식량이 부족하다면 그는 그것들을 가치있게 여길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간이 곧 끝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안다면 그것을 소중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생각하지 않기에 그것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4) 왜냐하면 시간은 지나가면 다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건은 잃은 후에도 다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은 한번 가면 다시 찾을 수 없다. 회개해도 그것을 다시 얻을 수 없다. 사용되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 뒤로 지나가 버린다. 죽음이 오면 시간은 끝난다. 그러므로 영원한 복락을 위하여 그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우리는 파산선고를 받을 것이다.
2. 지나간 시간 사용에 대한 회상
당신은 많은 것을 잃어왔다. 아마도 당신의 모레시계 속에는 몇 개의 모레 알갱이만 남아 있을수도 있다. 당신의 태양이 저물어 가고 있다. 어떻게 당신은 시간을 활용해 왔는가? 당신은 순간들, 날들을 해들을 헛되이 보내왔는가? 당신 인생의 날들을 판단해 보라. 매 순간이 귀중하다. 그러한 날들이 헛된가? 하나님이 당신에게 시간을 주셨다. 만약 그가 그것에 대하여 물어본다면 무엇이라 답할 것인가? 당신의 젊음, 여가, 주일날들에 무엇을 해 왔는가? 당신의 양심이 답하게 하라.
3. 시간 남용자를 향한 질책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시간은 솔로몬의 은과 같이 가치가 없다. 돈을 하찮은 것이라 하여 던져 버리는 사람은 미친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럼에도 돈보다 더 귀중한 시간은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낭비된다. 당신이 가진 것을 낭비하면 줄 것을 아무 것도 가질수 없을 것이다.
1) 게으른 자들
나태한 자들은 몸이나 영혼, 가족들, 이웃들, 나라를 위하여 어떠한 선도 행치 않는다. 그들에게 시간은 술과 사회생활, 무익한 잡담을 위하여 허비하는 장애물이다.
2) 악인들
그들은 악한 목적, 즉 그들 자신들과 다른 사람을 헐뜯으면서 시간을 소비한다. 그들은 마시고 흥청거리며, 잡담하고 깨끗지 못한 일을 행하며, 나쁜 동무를 사귀고, 다른 사람들을 고통으로 이끌며, 영혼들에 상처를 주고, 다툼을 일으킨다. 그들이 회개한다면 그들은 허비한 시간들을 후회할 것이고, 행하였던 나쁜 일들을 되돌리기 위하여 크게 힘써야만 할 것이다. 시간을 잘못 사용하여 후회하면서 사는 것보다 어떠한 시간도 가지지 않는 것이 더 낫다.
3) 세상적인 사람들
그들은 부지런히 일하여 이윤을 얻는 것들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영혼을 잃으면, 시간도 잃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간은 이기적인 사용을 위하여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더 이상 없다면 당신이 얻은 어떠한 것도 당신에게 유익되지 못할 것이다.
4. 어떻게 시간을 활용하는가.
1) 시간에 대하여 하나님께 해명해야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라
시간은 달란트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이다. 끝날에 그는 우리를 불러서 회계하라고 할 것이며, 어떻게 우리가 시간을 사용했는지를 물을 것이다. 매일 아침과 저녁에 당신이 어떻게 그것을 사용해 왔는지를 생각하라.
2) 당신이 이미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잃어버렸는지 생각하라
남아 있는 시간들을 올바로 사용하라. 잃어버린 시간들을 구속하라(redeem). 허비한 시간에 비추어보아, 그것의 사용에 더욱 근면하라. 왜냐하면,
첫째 당신의 기회는 더욱 더 짧기 때문이다. 인생은 짧다. 당신이 잃어버린 해들을 생각할 때에, 인생은 더욱 짧다. 그리고 기회들 은 더욱 없다.
둘째 당신의 일은 더욱 더 크다. 당신은 더 적은 시간을 가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회개의 그 일은 동일하다. 시간을 허 비함으로 당신은 당신 자신의 일을 도모해 왔다. 모든 힘을 다하여 이제 회개하라.
셋째 당신은 당신의 시간 중에서 최상의 시간을 잃어버렸다. 지나간 어린 시절들이 가장 최상의 것들이다. 젊음을 죄악가운데 살아온 것은 일생의 가장 최상의 부분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낙심하지 말라. 사단은 젊음 속에 있는 사람들을 어리석게 만들어, 그들에게 여전히 시간이 있음을 말하고, 말년에는 너무 늦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심지어 늦은 시간에도 하나님은 회개하도록 부르시며, 만약에 당신이 진지하다면 회개하게 하실 것이다.
3) 몇 몇 사람들은 죽을 때에 시간을 귀중하게 생각할 것이다.
죽음의 침상에 있는 죄인들은 시간의 귀중성을 보며, 일초의 시간을 위하여 부르짖는다. 당신이 눈이 멀었고, 속고 있기에 그들이 죽음의 때에 깨닫게 되는 시간의 가치를 모르는 것이다.
4) 이미 죽음의 강을 건넌 사람들의 시간에 두는 가치를 생각해 보라
저주받은 자들은 영생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다시 가지는 시간을 갈망한다. 당신은 동일한 갈망을 가지는가?
[적용]
1. 지체없이 귀중한 시간을 활용하라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당신에게 시간이 어떠한 가치도 없음을 증명한다.
2. 가장 귀중한 시간의 부분들을 활용하라
일반적인 시간이 있는 반면에 거룩한 시간도 있다. 당신의 주일을 활용하라. 특별히 공예배를 활용하라. 거룩한 의식아래서 부주의 하지 말라. 당신의 젊음을 올바로 사용하라. 당신과 함께 애쓰시는 성령의 시간을 가치 있게 하라. 왜냐하면 그때 하나님이 가까우시며, 그 시간이 귀하기 때문이다.
3. 당신의 여가시간을 활용하라
모든 사람은 얼마간의 여가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당신의 영혼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라. 여가는 세속적이거나 영적인 것에 종속된다. 시간이 더 이상 없을 그 날을 생각하며, 당신의 모든 달란트와 장점 그리고 기회들을 최대로 사용하라.
영적 바이러스의 6가지 진단 / 김홍만교수
영적 바이러스로 인한 그 질병들의 증세는 대략 6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로- 인간 중심적인 믿음의 해석으로 자기가 그 중심이 되는 알미니안 적인 태도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잘사는 것을 원하실 것이다. 따라서 내가 주일을 어기고 사업을 하건 혹은 경건치 못한 사업을 하건 관계 없이 내가 잘 살면 하나님께서 좋아 하실 것이고 하나님 앞에 더욱 많이 헌금하면 된다" 라고 말하는 교회 직분자들을 볼 수 있다. 이들은 항상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자신의 능력과 인간의 방법 및 수단을 더욱 의지한다. 이러한 증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그 영적 바이러스가 가장 근본적인 칭의 교리를 변형 시켰기 때문이다.
둘째로- 은혜 ...아래에서 방종의 삶을 사는 증상을 볼 수 있다. 이들의 특징은 도덕법을 그리스도인의 행위의 원리와 성화의 원리로 채택하는 것을 거부하고, 하늘로부터 직접 계시를 주장하기도 하면서 무질서의 삶을 산다. 그 입술에서는 은혜를 부르짖으면서도 성화의 삶이 전혀 없는 경우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죄를 미워하고 죄와 싸우는 모습을 기대 할수 없다. 왜냐하면 도덕법을 버렸음으로 죄를 측량하는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증상은 도덕률페기론(Antinominanism)의 영적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나타나는 증상이다.
셋째로 - 구원에 은혜에 대한 사람의 책임을 완전히 무시하고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실 것이라고 하면서 쉽게 죄에 빠지고 심각한 죄에 빠져있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죄에 빠져 있어도 결국에 하나님께서 회개 하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이들은 내가 기도를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다 아시기 때문에 괜찮다라고 쉽게 말한다. 또한 전도나 선교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구원 하실 백성을 다 아시므로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다 라고 하면서 복음증거의 의무를 무시한다. 이러한 증상은 하이퍼 칼빈 주의(Hyper-Calvinism)란 영적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다.
넷째로 - 은사 주의자들 가운데서 쉽게 볼 수 있는 증상이 있다. 그들의 증상을 보면 은사를 받은 자로서, 같은 성령으로 부터의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증상이다. 그들은 성령의 은사를 구원의 은혜로 착각하여서 은사 그 자체로 자신의 믿음이 있는 것으로 오해한다. 따라서, 경건의 덕목을 이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증상은 특히 알미니안 신학에 배경을 둔 오순절 운동 주의 교회에서 더욱 쉽게 볼 수 있다.
다섯째로 - 자유주의 신학의 영적 바이러스에 감염된 자들이다. 이들은 교회에 출석하고 외적인 신앙 생활을 다 지키지만 외식적이며, 명목적인 신자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교회 생활을 하면서도 영적으로 거듭남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외적인 종교적 행위에 자신의 믿음의 근거를 둔다. 그래서 그들은 도덕주의자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에게 경건의 모습이 있을 지라도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경건을 도덕으로 대체하였고, 거듭남 없는 삶의 개혁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들은 예수의 신성을 무시하기 때문에 인본적이요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 예로 그들이 사회 개혁을 부르짖기도 하지만 그 수단이 영적인 것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정치적이다.
마지막 여섯째로 - 오늘날 유행 중심의 복음주의 교회에서 발견 되는 현상으로 성경의 중요한 교리들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가사와 육적 멜로디인 발라드 풍이나 심지어 가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멜로디로 노래를 과도하게 부르며, 때로는 온갖 현대 장비를 동원해서 감정에 치우친 예배를 통해 은혜 받았다고 생각하는 증상의 병이다. 이들에게 있어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그리고 때로는 오락적 성향이 농후하여 축제라는 미명 아래 육신적으로 즐기려는 경향까지 나타난다. 이러한 것에 더하여 교회는 사람들의 편리를 제공하기 위해 주일 예배 대신 토요 예배를 드리게 하며 쉽게 믿는 풍조를 양산하고 복음을 싸구려로 전략 시킨다. 이러한 교회 속에서 교인들의 모습은 굳건하지 못하고 쉽게 흔들리며 때로 스스로를 은혜가 많은 자로 착각하여 교만하기 이를 데 없다. 그리고 마치 마약 중독자와 같이 감정적 예배를 반복하고 딱딱한 말씀을 듣기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은 교회 전체가 병든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들은 촬스 피니(Charles Finney) 이후의 부흥주의 (Revivalism)와 감정주의(Emotionalism)의 영적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나타나는 증상이다.
이렇게 교회가 경건의 능력을 잃어가고 명목적 신자가 늘어가며 위선자가 더욱 활기를 띄는 것은 교회에 침투한 영적 바이러스로 인한 것이다. 따라서, 존 낙스, 존 칼빈,과 영국과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이 하였던 것과 같이 또 18세기의 조나단 에드워즈가 하였던 것과 같이 영적 바이러스와 싸워야 하며 교회가 그 영적 무지와 오류에서 벗을 수 있도록 도와 줌으로 영적 바이러스로 감염된 것으로부터 회복시켜야 한다.
영적 바이러스를 치신앙적 모임의 필요성과 유익(휫필드)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 4:9-12)
1.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는 말은 진리
지혜자가 주장하고 있는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는 말이 진리임을 입증하고자 합니다. 일반적인 사회 단체에서도 그러하고, 특별한 모임에서도 그러합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인간의 육체와 영혼의 복지를 위해서 종교적 모임이야말로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보여드림으로써 지혜자의 주장이 참인지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다고 봅니다.
창조자가 아담을 행복자로 만드는데 부족한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돕는 배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아담은 창조주께서 그를 하나님의 낙원에 두셨기 때문에 그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타락이후로 인간은 그의 지식이 어두워지고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멀리 떠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시각을 받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발견하는 하나님의 계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의무에 있어서,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본질상 알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주님의 계시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모세에게 나타내실 때는 땅이 진동하였고 심히 두려워하였는데, 우리에게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신다면 우리는 더한 두려움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졌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지도에 따라 돕는 배필을 사용해야 합니다. 지식에 있어서 서로 가르쳐 주며 우리의 영원한 평강에 속한 것들을 실천해 가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 이후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모임의 목적임에 틀림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왜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더 나은지를 설명하는 강력한 근거입니다. 또 왜 우리가 함께 모이기를 폐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근거입니다.
더 나아가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어느 정도는 자연스러운 베일을 가지고 있는 자이기에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수건을 벗겨 내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영원을 향하여 여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곳까지 우리의 길을 가도록 돕고 격려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종교적 모임으로 함께 모이는 일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2. 종교적 모임의 측면에서 본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은 이유
종교적 모임에 있어서 왜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은지 그 이유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 인간은 홀로일 수 없는 존재입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은 가장 큰 이유, 혹은 종교적 모임의 가장 큰 유익은 “저희가 넘어질 때 한 사람이 그 동무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이유야말로 정말로 탁월한 설명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우리가 넘어졌을 때 사실을 말해 주며 다시는 넘어지지 않도록 경고해 주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성도들이 가지는 큰 특권입니다.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2) 서로 온기를 제공하기에 두 사람이 더 낫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은 이유는 서로에게 따뜻한 열기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불길로 함께 타오르면, 서로를 깨워 주고 활기가 넘치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서로 분리되고 따로 떨어져 있으면 금방 냉랭해지고 시들해져 버립니다.
두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열기가 있게 됩니다. 그러나 혼자서는 어떻게 뜨거워질 수 있겠습니까? 신앙적인 모임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또 다른 유익을 보십시오. 그것은 우리를 경건한 삶에 있어서 정열적인 사람이 되게 하고 강건한 자가 되게 합니다.
이제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견해와 다른 각도에서, 영원한 세상을 향하여 긴 여행을 하는 사람들로서 우리 자신들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비록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지날지라도 우리의 영적 대장이신 구세주, 여호수아의 지도하에 우리를 영적인 하늘나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자로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모든 난관들을 만날 때마다 얼마나 쉽게 놀라 자빠지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롯의 아내처럼 영적인 소돔성을 뒤돌아보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복인지를 보십시오. 그것은 우리의 소심한 계획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항상 상기시켜 줄 것입니다.
3)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능히 적을 이깁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내 아들아, 네가 여호와를 섬기고자 할 때 시험에 들지 않도록 네 영혼을 준비하거라.” 그 시험은 내적인 것뿐만 아니라 외부로부터 오는 원수들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함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선이 하늘에서 옮겨지는 순간 곧바로 세상은 우리의 눈을 현혹시켜 혼자서 잘 믿는 체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넓은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도 얼마든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미혹합니다. 사단도 마찬가지로 그의 악의적인 목적을 달성하고자 불경건한 생각들을 우리들 마음속에 주입합니다.
여기서 신앙적인 동지들이 있는 유익한 면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불길한 유혹들을 극복할 수 없을 만큼 심한 유혹을 받게 된다고 합시다. 그럴 때 신속하게 믿음의 동료들에게 달려가야 합니다. 그들이 여러분에게 참되고 바른 가르침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정말로 신앙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면 단순해져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 적당히 살기를 원한다면 다른 사람들처럼 여러분도 똑같이 게으름과 무관심한 삶을 살면 됩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살고자 하면 더 깊은 자리에 나아가야 한다고 믿음의 형제들은 말해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고통 중에 부르짖을 뿐 아니라 협착한 문으로 들어가려고 힘써 수고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친구들이 이러한 권면을 하는 이유는 스스로 너무나 많은 고통을 자초하지 않도록 하기위해서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의 경우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아픔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적인 모임에서 우리가 얻는 또 다른 놀라운 유익이 있습니다. 즉 친구들은 그들을 대적하는 것들로부터 서로를 잘 지켜 주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향하여 선한 뜻을 가지고 계시지만 사단은 우리가 함께 모이지 못하도록 서로에게 적대감을 심어 줍니다. 서로의 도움이 결핍되게 함으로써 사단은 우리를 자신의 목적에 사로잡히는 포로가 되게 합니다. 사단은 먼저 성도들로 하여금 교통에 대하여 무지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나서 죄인의 길에 서라고 명합니다. 냉랭할 때 나를 따듯하게 해 줄 친구가 없다거나 공격을 받을 때 그의 원수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돕는 친구가 없는 것은 불행입니다. 아니, 화입니다.
3. 신앙적 모임의 구성원들의 의무
모든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의무들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것은 세 가지인데, 첫째는 서로 바르게 하고, 둘째는 서로 권면하며, 셋째는 서로 보좌하며 방어하는 것입니다.
1) 서로 바르게 해야 합니다
바르게 한다는 말은 좀 더 폭넓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형제가 죄와 허물 가운데 빠졌을 때 아주 부드러운 방법으로 그를 바로잡아 줄 수 있음을 포함하는 말씀입니다. 또는 좀 더 제한적인 측면에서 말한다면 잘못을 저지른 친구를 더 이상 그 죄악에 빠지지 않고 보다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 감을 의미합니다. 지혜자는 본문에서 우리가 그 두 가지 경우 모두에 해당되어야 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가 넘어지면 다른 동료가 넘어진 친구를 일으켜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연약하고 불안정한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된’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값없이 베푸신 은혜와 그의 섭리하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범죄한 형제들은 우리에게서 비난보다는 동정을 바라고 있습니다.
성도 각 사람은 죄에 빠진 형제를 원상태로 회복시키기 위하여 가장 온유하고 가장 단호하게 일으켜 세우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의도적으로 악한 일에 빠진 경우는 죄를 범했지만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와 함께 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실수를 행한 자들, 혹은 실질적으로 죄를 범한 것은 아니지만 죄가 될 수 있는 일을 하는 자들을 온유함으로 바로잡는 일입니다.
2) 서로가 격려해야 합니다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를 따듯하게 할 수 있습니까?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자기의 심장에 열정적인 사도의 권면을 깊이 새기시기 바랍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우리는 잠자는 영혼들을 일깨우기 위하여 격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세상과 정욕과 악마의 유혹을 대적하는 파수꾼을 세우는 일을 위하여 서로 격려함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적인 모임을 가질 때 이 중요한 일을 실천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가 동원되지 않으면, 그리고 서로 격려함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불꽃이 타오르지 않으면 우리의 경건한 성경 읽기나 말씀 듣기가 큰 효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진리의 빛을 받거나 발하는 일에 서로 격려하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방법입니다. 따라서 이런 따뜻함과 열기를 보존하고 더욱 증가시키는 유일한 길은 바로 서로를 격려하는 것입니다.
3) 함께 힘을 합쳐 대적자를 방어해야 합니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전혀 공격을 받지 않은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또 반대로 연합과사랑을 나타내지 않은 기독교도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경험적으로 증명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는 이 세상 끝날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단지 우리 주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성도들은 대적하는 자와 맞서기 위해서라도 서로 하나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4.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는 말의 함축된 의미, 그리고 권면
1) 약한 세력이 뭉치기에 성도들은 결집해야 합니다.
다같이 마음을 모아 수고하는 것은 마땅한데, 한 가지만 더 지적한다면 하늘나라에서 우리가 가지는 행복의 한 단면이 성도들의 교통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달리 살아온 경건한 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과 교제하는 즐거움이 분명 주어질 것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우리의 믿음이 더욱 강화되고 힘을 얻게 됩니다. 천국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성도들과 교통하며 그들이 선행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 참된 신앙에 반하는 헛된 모임을 구분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그 말씀은 아주 위험한 상태에 빠져 있는 자를 경고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참으로 적대적인 일들을 조성하는 자들, 은밀하게 저지르는 방종함 및 이교도들이 얼굴 붉히는 일들을 저지르는 행위들, 악의가 없는 놀이나 모임 등 세상이 예의를 갖추고 친교하는 모임에서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 등도 경고의 대상입니다.
여러분이 시작한 이 길을 계속해서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의 사랑하는 교회 공동체 모임에 지속적으로 히을 다하여 참여하십시오. 악을 버리고 덕을 세우는 데 힘을 쓰십시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를 경외하는 가운데서 자신을 세워 가시기 바랍니다.
밖에 있는 자들과 동행하는 것을 신중하게 생각하고, 자신을 무지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대화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것으로 열려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매일매일의 삶에 있어서 계속해서 말과 행실에 본이 되시고, 특히 교회 공동체의 사람들과 교제하되 동일한 영과 기질을 소유하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과의 교제가 풍성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무한히 흘러 나오는 자비하심과 성부와 성령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찬송과, 권능과, 위엄과, 높임과 다스림이 지금부터 영원까지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료하라 에서 - 김홍만 목사
참된 믿음이 바라보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 / 존 오웬
첫째, 믿음은 복음 안에 제시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하나님과 그분의 모든 신적 탁월함이 창안하고 지정하며 제공하기에 합당한 것임을 뚜렷하게 깨닫고 정확하게 알아냅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본질과 생명입니다. 바로 이것을 통해서 믿음은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실제로 돌려 드립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구원 방식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합당하게 인식하고 이 방식의 흠없고 완전한 체계를 합당하게 인식하며 행하는 한 이 기초 위에서 믿음은 안전합니다.
참된 믿음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은혜와 사랑과 자비의 영광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얼마나 탁월한지를 영혼에게 은혜롭게 확신시켜 줍니다. 그 결과 영혼은 하나님의 구원방식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 최고의 방법으로 알게 되고 그 구원 방식만으로 흡족하게 됩니다. 이 정도로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얼마나 탁월한지를 영혼에게 은혜롭게 확신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언제 어느 때나 자신의 본성과 진실함을 항상 입증하기 마련입니다.
둘째, 구원얻는 믿음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각성한 영혼의 전체적인 목적과 모든 소망에 적합한 것으로 인정합니다. 진리를 아는 지식으로 각성되고 죄에 대한 신령한 자각으로 자기 자신의 영적 상태를 감지하게 된 영혼은 두가지 지배적인 소망과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소망과 목적은 그 영혼을 전적으로 통제합니다. 그중에 하나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이 영원히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빛과 은혜가 사람에게 맨 처음 비취이며 그 빛과 은혜를 소유하게 된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끊임없는 갈망이 시작되게 되어 있습니다. 신령한 빛과 은혜를 소유하게 된 영혼은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갈망 없이 자기 자신의 구원만을 소원하는 법이 없습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지속적으로 인정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구원이 일치한다는 것을 영혼 안에 굳게 붙들고 있는 한 이것은 그 어떤 환난과 곤경에서도 영혼을 견고하게 붙들어 주는 닻이 됩니다. 또한 그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께 대한 선한 마음으로 언제나 충만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인해서 그 사람의 마음에는 사랑과 은혜로운 소망이 샘물처럼 솟아나게 됩니다.
결론 - 믿음이 믿음으로 성립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세가지 요소
1.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과 은혜와 자비에 관한 복음의 계시와 선포에 대한 신령한 지식과 발견 - 계시된 진리에 대한 단순한 동의가 아닌 내용 자체에 대한 영적인 분별과 지각과 이해가 필요하며 사도 바울은 이것을 "예수 그리스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고후4:6)이라고 부릅니다.
2. 하나님의 구원 방식 안에 있는 모든 것이 특별히 자기 자신의 칭의와 구원에 적합하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능력이 그 모든 것 안에서 자신의 칭의와 구원이라는 목적을 효력있게 성취하도록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깨닫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복음을 통해 제시된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믿는 사람 각각을 구원하기에 적합하고 적당하며 유력하다는 사실에 대한 만족스러운 확신입니다.
* 이렇게 되기 위한 다섯 가지 조건
(1) 인간 본성의 죄, 그 죄로 인해 하나님을 배교한 인간의 현재상태,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인간의 현재상태, 그로 인해 발생한 온갖 비참한 결과들을 실제적으로 그리고 충분하게 각성한 사람.
(2) 죄의 본성과 허물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엄위하심 그리고 율법의 형벌과 저주를 충분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
(3) 자신이 범한 수많은 죄들의 심각성과 범한 횟수, 그 죄들을 범한 모든 상황과 관련하여 자신의 자범죄를 온전히 각성하고 자신의 죄가 날로 악화된다는 사실을 온전히 각성한 사람.
(4) 죄로 기우는 지속적인 경향이 자신 안에 역사하고 있음을 아는 사람이요, 그런 경향으로 인해 계속해서 증가하는 은밀한 죄와 발견되지 않은 죄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
(5)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심각하게 숙고하는 사람.
3. 믿음의 마지막 행위는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제외한 다른 모든 구원 방식과 구원 방편들을 거부하고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영원한 복락을 위하여 오직 하나님의 구원 방식만 인정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신뢰의 이 같은 행위에 있어서 믿음의 적합하고 직접적인 대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인격과 그 중보와 그 의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원 방식의 생명과 중심이 되시기 때문에 믿음의 적합하고 직접적인 대상이십니다.
세째, 믿음은 하나님의 이같은 구원 방식을 인정하되 율법의 제정과 상벌 제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표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현저하게 부각시키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인정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제정하실 때 목적으로 삼으셨던 하나님의 모든 영광이 하나도 실추되거나 감소되는 일 없이 하나님의 구원 방식 안에서 영원히 확보되고 완전하게 보존되는 방법을 보고 깨달음으로써 율법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진실하심과 거룩하심을 이유로 내세우며 하나님의 영광과 죄인의 구원이 조화되고 일치되는 것을 반대하는 모든 반론뿐만 아니라 율법이 제기하는 모든 도전과 참소까지도 능히 물리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하나님께 탄원하는 자신의 모든 변론 안에 율법을 가장 크게 만족시켜 주는 것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구원을 통하여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보편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바로 이것이 신자가 자신의 구원을 기뻐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영적 분별력
빌립보서 4:8“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참된 성도는 무엇에든지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받을 만하며 칭찬 받을 말한 것들을 분별할 수 있다.
참된 거룩은 덕과 기림이 될 만한 행위들을 분별하여 그렇게 행하는 것을 즐거워한다. 분별의 은사는 성령이 주시는 은사 중에 하나이다 (고전 12:10). 참된 분별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에 대해 혼동하지 않는다. 성령이 주시는 분별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한다.
성령이 허락하시는 분별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영화롭게 하며 비복음적인 요소들을 걸러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들은 성도들에게 마땅할 수 없다. 이에 바울은 성령의 분별을 통해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정결한 것 등을 구별하여 내어 행하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성령의 분별로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은 영적 오류를 단번에 인식한다.
그 이유는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주님의 양”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이끌어 낯선 음성을 따라가지 않도록 보호하신다. 영적 분별은 하나님의 영광과 매우 긴밀하며 하나님의 영광에 대단히 예민하다.
영적 분별력을 지닌 성도는 빛 가운데 행하며 빛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자들이다. 주를 향한 참된 순종과 영적 분별력은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잊지 않도록 하라.
-오스왈드 챔버스
현실을 직시하라 /로이드존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예레미야 17:9-10,14 )
기독교가 하는 일, 복음 설교의 목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여러분이 처해 있는 곤경들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단번에 영원히 제거해 버리자는 것이요, 여러분이 그것들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매주 여기서 찬송하고 설교를 듣는 동안만 여러분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잊어버린다면, 여러분은 진정한 기독교를 아직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기독교의 기능은 여러분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지금까지 매주 여기 와서 이제부터는 좀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해 왔다면, 그런데도 여전히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고 있다면, 제가 말씀드리거니와 여러분은 아직 복음의 능력을 맛보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결심을 하게 만들 뿐 아니라 또 실제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복음의 목적이요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기독교의 진짜 비극이 뭔지 아십니까? 그것은 많은 대중들이 기독교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에 의해 변화되지 않고 오히려 자기에게 편리하도록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양심을 일깨우는 대신 양심을 무마시키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무가치함과 죄악성과 영원한 형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보다 오히려 자기 만족감과 영원한 안도감에 빠지게 합니다.
주정주의(emotionalism)는 정말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음주의의 가장 미묘한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종교의 남용, 이 순전한 복음의 왜곡이 기독교에 대한 통속적 비난에 많은 보탬을 주고 있습니다. 즉 기독교는 그것이 현실을 회피하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생을 돕는다느니, 우리가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화 자찬이나 망상에 근거한 만족감에 지나지 않는다느니 하는 식의 통속적 비난에 많은 보탬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편견과 선입견 없이 성경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기독교 자체에 대한 그 비난이 얼마나 거짓된 비난인지 금방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저를 종종 놀라게 하는 것은 사람이 어떻게 몸서리를 치지 않고, 기절초풍을 하지 않은 채 성경을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을 완전하신 모습 그대로 보여 주는 한편, 인간의 악하고 추한 모습 역시 있는 그대로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성경에 대해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주장이 뭔지 아십니까? 그것은 아마 성경이 인생을 직면할 뿐 아니라, 인생을 있는 모습 그대로 아니 최악의 모습까지도 기꺼이 폭로하고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결국 인간 본성의 죄악성, 비열함, 위선, 어리석음, 광기, 절망에 관해,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읽고 기분이 좋아질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성경 속에서 인간 본성에 관한 모든 죄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각 부분 부분을 보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이 그 조신함과 자제력을 다 팽개쳐 버린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것은 인생의 모습을 충분하고 완벽하게 그려 주고 있습니다― 단순히 영웅들의 미덕을 기록하고 그들의 공로를 찬양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들의 결점과 악덕에 대해서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화려한 옥좌에 으스대며 앉아 있는 왕과 왕자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곧이어 바로 그 사람이 죄와 범죄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성경은 인간 본성이 갖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과 영광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안고 있는 창피함과 무서운 잠재력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만일 전자를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선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우리도 어쩔수 없이 후자의 운명에 빠지게 될거라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런 마약도 있습니까?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 자신에 대해 적나라하게 말해 주는 진리를 들으며, 우리의 실수와 결점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 자신의 본성을 보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불가피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는 그 무서운 지옥의 심연도 이따금씩 공포에 떨며 힐끗힐끗 들여다보게 됩니다. 세상에 이렇게 괴상 망측한 로맨스 소설도 있습니까? 현존하는 문학 작품 중 이렇게 무시무시한 문학 작품도 있습니까? 여러분이 세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하고 지저분하게 현실적인 책을 제게 보여 주십시오. 그것이 아무리 끔찍하다 해도 성경에 나온 그 많은 이야기 중 하나와 똑같거나 아니면 그만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항상 기억해야 할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인생을 있는 그대로 보며 있는 그대로 직면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그래서 이야기할 때나 책을 집필할 때 인생에 대해 최악의 것을 말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죽음을 인생의 종말로 간주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큰 위로가 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비극은 죽음과 함께 끝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경은 죽음과 함께 비극이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현대인들은 말합니다. “인생은 늘 비극과 실망과 악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갖자 인생으로부터 최선을 만들어 내자. 왜냐하면 우리는 곧 죽어서 이 불행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인생은 무섭다. 그러나 진짜 비극은 사망이 그 끝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영원한 운명으로 옮겨 가는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있다.”
이 세상에 인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을 그대로 말해 주는 문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성경책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장 악한 것을 말해 준 다음 가장 좋은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설교가 하는 일은 죄를 감추는 게 아니라 죄를 폭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모든 괜찮다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아무것도 염려할 필요없다고 말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실 그대로 우리 모두 잘못 되었다는 것, 하나님이 우리의 심판주라는 것, 그리고 우리가 이런 것들에 의해 깜짝 놀라고 오싹해지며 근심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아무 소망이 없다고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기독교가 주는 메시지입니다. 제가 오늘 설교 본문으로 택한 바로 이 구절 속에서도 볼 수 있는 메시지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모두 이 자리를 뜨기 전에 이 메시지를 볼 수 있게 되기를 간구하는 바입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인생을 분해하고 분석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 일도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인생을 폭로하고, 그 무서운 심연을 계시해 주며, 그 궁극적인 구성 요소들을 분석하고자 그대로 조각조각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새로운 통합, 새로운 시작, 새로운 탄생,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생명이라는 영광스러운 가능성들을 보여 줍니다. 그 통합의 필요성은 이 구절들 속에서도 아주 분명하게 밝혀지고 있습니다.
선과 악은 세상 마지막 때까지 교회 안에 공존한다/존 라일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 뿌리고 갔더니"(마 13:25)
유형교회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다. 마치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뿌려져 있는 넓은 들판과 같다. 신자와 불신자, 거듭난 자와 아직 변화받지 못한 사람, 그리고 천국의 자녀들과 악의 자녀들이 모두 회중 가운데 섞여 있다.
순수한 복음의 선포로도 이 상황은 막을 수 없다. 모든 세대에 걸쳐 교회들은 이 상태를 변함 없이 유지해 왔다. 초대교회 교부들과 마찬가지로 종교개혁자들도 교회 안에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있는 것을 경험했다. 현재의 사역자들도 겪고 있는 상황이다. 이 세상의 어떤 교회나 종교적인 모임도 '알곡'으로만 이루어지 단체를 만들 수는 없다. 우리의 영적 대적인 마귀가늘 '가라지'를 뿌리고 다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엄격하고 철저히 훈련시키더라도 이 상황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성공회나 장로교, 감리교, 그 밖의 독립교회 안에서도 우리는 똑 같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교회를 깨끗하게한다 할지라도 완벽하게 순수한 알곡들의 공동체를 만들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러한 노력과 방법들이 교회에 해를 끼칠 수 있다. 완벽을 추구하는 가룟 유다와 같은 자를 만들어 낼 수도 있고 많은 신자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가라지를 뽑으려다 알곡의 뿌리가 뽑힐 위험도 있다. 이러한 열정은 말씀은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경우 해를 불러 올 수 있다.
심겨진 알곡에 관심을 갖지 않은 사람의 마음에는 자연히 가라지가 자라게 되고 그리스도에게서도 점차 멀어지게 되어 있다
진리의 중요성( 존 맥아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2)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진리를 알아야 하고 진리를 사랑해야 합니다. 진리를 사랑하고 따르기를 거부하여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불신으로 “멸망하는 자들”의 특징입니다(살후2:20). 구원받는 믿음은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니까요. 그러므로 이 마음이야말로 진짜 신자의 특징이지요. 예수님은 그들이 진리를 알았으므로 진리가 그들을 자유롭게 했다고 말씀하십니다(요 8:32).
진리를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할 교회에서조차 진리가 조롱과 공격을 받는 시대에 솔로몬이 전하는 지혜는 더욱 빛을 발합니다. "진리를 사되 팔지 말며“(잠 23:23). 진리보다 중요하고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어야 합니다(딤전 3:15).
자기가 무엇을 믿는지 모르는 것은 불신과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하신 진리를 인정하지도, 지키지도 않은 것은 매우 고집스럽고 해로운 불신입니다. 모호함을 응원하고, 불확실성을 지지하고, 고의로 진리를 흐리게 하는 짓은 불신을 키우는 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항상, 쉬지 말고 감사해야 합니다 (로이드존스)
도대체 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항상 감사하지 않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멸망할 이 세상에서 우리를 불러내셨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셨으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이처럼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 맺어진 관계는 영원하고도 확실하며, 항상 존재하며 항상 사실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우리는 매일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지 않는 것일까요?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다면, 그 원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들을 우리가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말할 뿐,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를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저는 우리의 이런 행동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로 인하여 날마다 감격하고 놀라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형편없는 그리스도인이다. 또 만일 우리가 저 영원하고도 영광스러운 기업을 그리스도와 함께 물려받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날마다 감격하지 않는다면, 만일 이것 때문에 우리가 뼛속 깊이 감격하지 않는다면, 분명 우리는 뭔가 잘못된 것이다”.
사실 우리는 온갖 것들 때문에 하루에도 수없이 흥분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작은 일에 성공해도 기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좋은 일들 때문에, 또는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나 좋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기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연스런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여,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봅시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천국의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흥분과 전율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감사와 찬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도 바울의 말은 참으로 옳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항상, 항상, 쉬지 말고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가 끊어지는 순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깨닫기 위해 열심을 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을 슬프시게 하는 모든 것을 피해야 합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깨닫고 묵상할 것이며, 다음과 같이 노래할 것입니다.
‘내 영혼아 찬양하라. 주님 앞에 엎드려 구속하신 넓은 은혜 높이 찬양하여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영원하신 하나님!’
로이드존스
성경에서 말하는 삶의 지침 40가지 /성은교회
1. 하나님께 드릴 마음을 세상에 나누어 주지 마십시오 (요일 2:15).
2. 당신이 죽을 때 세상과 그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해 갖게 될 생각을 지금부터 항상 견지하십시오 (마 16:26).
3. 자기 자신에 대해 무심하지 말고, 자주 심중에 말하십시오 (시 4:4).
4. 일찍부터 하나님을 섬기고, 당신의 젊은 날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전 12:1).
5. 하나님을 회피하는 자들을 피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친구들을 가까이 하십시오 (시 119:63).
6. 시간의 가치를 잘 알아 소중히 여기고, 한 시도 게으름으로 허비하지 마십시오 (엡 5:16).
7. 날마다 영원을 생각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십시오 (마 25:46).
8. 당신 삶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평생 잊지 마십시오 (빌 2:12).
9. 합리적인 영혼의 생각을 따라 살되, 몸이 합리적인 영혼의 생각에 굴복하게 하십시오 (고전 9:27).
10. 죄에 대한 회개와 경건한 슬픔을 견지하는 가운데 살고, 또 그렇게 죽기를 연구하십시오 (마 5:4).
11. 거룩해지기를 힘쓰고 의로운 삶을 위해 노력하되, 그것이 우리에게 전가된 의를 대신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롬 10:3).
12. 모든 경우에 그리스도를 당신의 보증으로 삼되, 곤고할 때마다 그 분께로 달려가 피하십시오 (시 119:122).
13.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를 기대하는 만큼,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위해 애쓰십시오 (고후 5:15).
14. 그 대가가 아무리 크다 해도 그리스도께 꼭 붙어서 거룩한 길을 떠나지 마십시오 (행 11:23; 딤후 3:12).
15. 사람들의 인정보다도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십시오 (고후 10:18).
16.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위한 보증되시는 그리스도를 감사함으로 깊이, 그리고 자주 묵상하십시오 (요일 3:1, 16)
17.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 분에 대해 말하기를 기뻐하되, 특별히 우리를 위한 그분의 죽음과 고난에 대해서 그리하십시오 (눅 9:31).
18. 당신이 그리스도와 친근히 하는 것을 못마땅히 여겨 제기되는 반대들은 당신 영혼을 파괴하기 위한 원수의 제안으로 여기십시오 (마 16:23; 애 3:25).
19.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높이게 하는 위대한 복음의 교훈들을 부지런히 연구하십시오 (마 16:24; 고전 1:31).
20.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과 싸움을 위해 필요한 모든 능력을 그리스도로부터 얻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대한 모든 의무를 힘써 행하십시오 (사 45:24; 골 3:17).
21.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서 항상 주님을 당신 앞에 모시고 그리하십시오(시16:8; 25:25).
22.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 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십시오 (고전 10:31).
23. 가능하면 많은 시간을 내어 은밀히 기도하며 하나님과 대화하십시오 (살전 5:17).
24. 은밀히 행하는 신앙의 의무뿐 아니라, 가정에서 해야 할 신앙의 의무를 소흘히 하지 마십시오 (수 24:15; 삼하 6:20).
25. 하루하루를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고 하나님과 함께 마무리하십시오 (시 4:8; 시 5:3).
26. 한 날에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 지 아무도 모르기에, 매일 그 날이 당신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가십시오 (잠 27:1).
27. 순례자처럼 이 세상을 지나가되, 어느 때라도 짐을 꾸려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항상 세상을 느슨하게 쥐고 살아가십시오 (벧전 1:17; 고전 7:29-31).
28. 세례와 성찬 때 드린 맹약을 항상 생생히 기억하고 그에 걸맞게 살아가십시오 (시 56:12-13).
29. 하나님을 섬기고 그 분의 영광을 높이는 데 쓰도록 주신 은사들을 증진하십시오 (눅 19:13).
30. 모든 신자들은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자비에 감사하십시오 (시 116:8, 12).
31.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당신을 구별하셨기 때문에 당신도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십시오 (마 5:47).
32. 외적인 신앙고백이나 경건의 모양에 만족하지 말고, 사람들 사이에 이름이 나는 것으로 자긍하지 마십시오 (딛 1:16).
33. 당신 입술의 말을 항상 주의하십시오 (시 141:3).
34. 모든 상황에서 기쁨을 잃지 말고 자족하십시오 (빌 4:11).
35. 십계명의 첫 번째 돌 판과 두 번째 돌 판을 분리하지 말고 항상 이 둘을 함께 생각하고 지키십시오 (마 22:37).
36. 하나님과 그 분의 길을 떠나 뒤로 물러나고 배교할까 항상 경계하십시오 (히 10:38-39).
37. 모든 죄를 깨어 경계하되, 특별히 당신이 애착을 갖거나 쉽게 무너지는 죄에 대하여 더욱 그리하십시오(시 18:23; 히 12:1).
38. 이 땅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하게 하고 그 나라를 확장케 하는 일에 힘써 관심을 가지십시오 (마 6:10; 시 72:19).
39. 삶이 주는 그 어떤 것에도 위로를 느낄 수 없는 중병과 죽음의 침상에서 위로 받을 수 있도록 부지런히 준비하십시오 (딤전 6:19).
40. 주님과 함께 할 영원한 성찬을 고대하고 바라십시오 (빌 1:23; 계 19:9).
< 출처: 개혁주의 마을>
'신앙 및 신앙 서적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베드로 전서 QT (0) | 2021.01.03 |
---|---|
거룩한 전쟁- 존 번연 (0) | 2020.12.23 |
아더핑크/십계명/ 유기와 하나님의 주권 (0) | 2020.12.21 |
아더핑크/ 마음을 지킨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말씀의 유익 (0) | 2020.12.21 |
하나님께서 의인들을 다루는 방법 / 아더 핑크 (0) | 2020.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