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마음과 손을 들자(애 3:49,41)
(애 3:40)“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41)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예레미야 애가는 남 유다 만족이 하나님께 불순종과 불신앙에 대한 진노와 심판을 받아 바벨론에 멸망을 당하고,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전도 파괴되어 성전의 모든 성물까지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백성은 포로로 잡혀 가기도 하고, 죽임을 당하고 일부는 애굽으로 도망을 쳤다가 칼과 기근과 질병으로 모두 죽어갔습니다. B.C 586년 세 번째 바벨론의 침공으로 완전히 멸망하는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던 선지자 예레미야가 눈물을 흘리며 노래한 것이 예레미야 애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멸망해가는 남 유다의 모습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망하기를 마음으로 빌었던 자들입니다.
(애 2:15)“무릇 지나가는 자는 다 너를 향하여 박장하며 처녀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소하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천하의 희락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16)너의 모든 원수는 너를 향하여 입을 벌리며 비소하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저를 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하도다”
이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언제나 방해한 무리들로 시편 83편에 나오는 에돔, 이스마엘, 모압, 하갈, 그발, 암몬, 아말렉, 블레셋, 두로, 앗수르, 그리고 롯의 자손들입니다.이렇게 박수치며 예루살렘의 멸망을 입을 벌려 비웃고 웃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지나가는 자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임한 근심 같은 근심이 너희는 관계가 없는지? 살펴보라고 한 것입니다. 예레미야에게 임한 근심과 고통과 눈물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진노이며 이로 인해 괴로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레미야 선지자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지은 죄로 인한 것은 아닙니다. 이 죄는 온 이스라엘의 죄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룩한 민족입니다. 그들이 거룩한 삶을 살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별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거룩하게 하려고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그들을 건져 거룩한 율법을 주시고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시고 그들에서 그곳에서 영원토록 축복을 누리고 살도록 하셨는데, 하나님께 배난하여 율법을 버리고 불순종함으로 인해 당한 징계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범죄할 때마다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어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하셨지만 이들을 무시하고 더욱 패역하여 멸망을 피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당한 수모와 치욕이 얼마나 비참했는가? 예레미야 애가를 통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애가 1장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슬픔을 노래한 것입니다.
(애 1:1)“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고 본래는 열방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공 드리는 자가 되었도다”
2장은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께서 내리신 진노입니다.
(애 2:2)“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를 삼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음이여 노하사 처녀 유다의 견고한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고 나라와 방백으로 욕되게 하셨도다(3)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원수 앞에서 오른손을 거두시고 맹렬한 불이 사방으로 사름 같이 야곱을 사르셨도다(4)원수 같이 활을 당기고 대적처럼 오른손을 들고 서서 눈에 아름다운 모든 자를 살륙하셨음이여 처녀 시온의 장막에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5)주께서 원수 같이 되어 이스라엘을 삼키셨음이여 모든 궁을 삼키셨고 견고한 성들을 훼파하사 처녀 유다에 근심과 애통을 더하셨도다(6)성막을 동산의 초막 같이 헐어 버리시며 공회 처소를 훼파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 가운데서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시며 진노하사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도다(7)여호와께서 또 자기 제단을 버리시며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 궁장을 원수의 손에 붙이셨으매 저희가 여호와의 전에서 훤화하기를 절기날과 같이 하였도다(8)여호와께서 처녀 시온의 성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줄을 띠고 훼파함에서 손을 거두지 아니하사 성과 곽으로 통곡하게 하셨으매 저희가 함께 쇠하였도다(9)성문이 땅에 묻히며 빗장이 꺾여 훼파되고 왕과 방백들이 율법 없는 열방 가운데 있으며 그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예루살렘 성안에 남아 있는 자들이 먹을 것이 있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급기야 자기 자식을 잡아먹어야 하는 가장 비참한 지경에 처한 것입니다.
(애 4:7)“전에는 존귀한 자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보다 붉어 그 윤택함이 마광한 청옥 같더니(8)이제는 그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 가죽이 뼈에 붙어 막대기 같이 말랐으니 거리에서 알 사람이 없도다(9)칼에 죽은 자가 주려 죽은 자보다 나음은 토지 소산이 끊어지므로 이들이 찔림 같이 점점 쇠약하여 감이로다(10)처녀 내 백성의 멸망할 때에 자비한 부녀가 손으로 자기 자녀를 삶아 식물을 삼았도다”
자비한 부녀라는 것은 인정이 많고 동정심이 많은 여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자비한 여자가 자기 자식을 자기 손으로 잡아 삶아서 먹을 양식으로 삼았다고 증거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서 애통의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속에는 이러한 일이 세 번 있었습니다.
(왕하 6:24)“이 후에 아람 왕 벤하닷이 그 온 군대를 모아 올라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니(25)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합분태 사분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26)이스라엘 왕이 성 위로 통과할 때에 한 여인이 외쳐 가로되 나의 주 왕이여 도우소서(27) 왕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타작마당으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포도주 틀로 말미암아 하겠느냐(28)또 가로되 무슨 일이냐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날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29)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이르되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저가 그 아들을 숨겼나이다”
B.C 845년 남 유다 멸망 259년 전에 북 이스라엘은 주변 나라 아람의 공격을 받아 수도 사마리아가 포위되어 완전히 둘러 쌓였습니다. 그러다보니 곡물 값이 엄청나게 치솟아 올라 돈이 있어도 사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물가 시세는 나귀 머리 하나에 은 80세겔인데 이 값은 노동자의 1년치 월급이라고 합니다. 합분태는 여물지 않은 콩-영양가 없고 값어치 없는 곡물인데 합분태 1/4갑은 달걀6개 분량인데 값은 은5 세겔인데 약 20일치 월급인 셈입니다. 그래도 이것도 구할 수 없는 사람의 양식은 자식을 잡아서 삶아 먹어야 한 것입니다. 이런 비참한 일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내리신 저주의 징계입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주님께서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눅 19:41)“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42)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43)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대로 오셨으나 영접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일을 행한 유다 민족의 죄가 하나님께서 진노를 내리심으로 유다민족이 멸당 당하고 전세계에 흩어진 사건이 인데 A.D. 70년에 로마에 의해 멸망당할 때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라는 인물은 유대인으로 제사장이며, 학자이며, 역사가로 훗날 로마 군인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시키는 전쟁에 참가하여 그 실상을 <유대 전쟁사>라는 책으로 기록한 인물입니다.
“그 당시 먹을 것이 없어서 가죽 띠까지 잘라 입으로 씹어 먹었고, 마른 건초를 먹었다고 합니다. 벳세다에 살던 마리아라는 여인은 명문 집안의 부유한 여인인데 예루살렘으로 피신을 했다가 먹을 것이 없자 자기 품에서 젖을 빨고 있는 자기 아들을 죽여 절반은 구워먹고 절반을 감추어 나중에 먹으려고 했는데 강도들이 음식냄새를 맡고 집안으로 들이닥쳐 음식을 내 놓지 않으면 당장 죽이겠다고 하자 감춘 자식의 고기를 내어 놓았다고 합니다. 강도들은 이 광경을 보고 너무 큰 충격을 받고 소름이 끼쳤는데, 그 여인이 하는 말이 “이것은 바로 내 아들이오, 내가 직접 요리한 음식인데 한번 먹어 보시오. 나는 이미 식사를 끝냈는데 그대들은 여자보다 감정이 풍부하며 어머니보다 사랑이 많은 척하지는 않을테니 어서 먹으시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이 되고 내가 한 짓이 마음에 걸리거든 나머지 반을 내게 남겨놓고 가시오”
라고 말했답니다. 강도들은 그만 떠나가고 그 소문이 삽시간에 온 예루살렘에 퍼져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는데, 로마군은 이 소식을 듣고는 어미가 자식의 인육을 먹는 이러한 민족은 세상천지 어디에도 없는데 이런 유대인은 멸망 받아 마땅하다 하면서 마지막 공격을 감당하여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백성의 이러한 끔찍하고 비참한 일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 가운데 있는 축복과 저주에 관한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신 28:53)“네가 대적에게 에워싸이고 맹렬히 쳐서 곤란케 함을 당하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자녀 곧 네 몸의 소생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54)너희 중에 유순하고 연약한 남자라도 그 형제와 그 품의 아내와 그 남은 자녀를 질시하여 (55)자기의 먹는 그 자녀의 고기를 그 중 누구에게든지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 대적이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맹렬히 너를 쳐서 곤란케 하므로 아무것도 그에게 남음이 없는 연고일 것이며(56)또 너희 중에 유순하고 연약한 부녀 곧 유순하고 연약하여 그 발바닥으로 땅을 밟아 보지도 아니하던 자라도 그 품의 남편과 그 자녀를 질시하여(57)그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와 자기의 낳은 어린 자식을 가만히 먹으리니 이는 네 대적이 네 생명을 에워싸고 맹렬히 쳐서 곤란케 하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함이리라”
유순하고 연약한 남자, 유순하고 연약한 부녀-발바닥으로 땅을 밟아 보지 아니한 여자-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아주 귀하게 자란 금지옥엽 같은 여자라도-자기 자식을 잡아먹을 것에 대한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예레미야 애가에 기록된대로 남 유다의 멸망 때에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훗날 주후 70년에 다시 예루살렘에서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살았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징계가 이렇듯이 무섭게 내려졌던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이스라엘은 순종함으로 축복을 누린 민족이 아니라 불순종으로 저주와 징계를 받은 민족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경계와 교훈이 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러한 일을 보면서 비웃거나 조롱하는 것은 더욱 큰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러한 근심이 너희에게는 없는가?” 살펴보라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말은 어느 시대 누구에게든지 자신을 살피는 경계가 되는 귀한 교훈입니다.
그리고 오늘 제목의 말씀과 같이 아주 조금 남아 있는 유대인들에게 죄로 인한 고난 징계에 대하여 진실한 회개를 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애 3:38)“화, 복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입으로 나오지 아니하느냐(39)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40)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41)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이 말씀은 모든 인간은 죄 가운데 출생하여 저주받은 땅에서 고난을 당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살아야함에도 자기 마음과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재앙이 일어나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일어나는 각종 재해들은 하나님께서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을 마지막으로 멸하시려고 주시는 경고의 나팔, 경고의 음성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마지막 자비하심입니다.
자비하심에 회개하지 아니하고 자긍하고 교만하여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말씀을 무시한다면 멸망을 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고난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가운데 있는 일입니다. 이 세상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회개는 죄로 인한 징계에 대하여 행위를 조사하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마음과 손을 들어야 합니다. 마음과 손은 우리의 전인격을 말합니다. 거짓된 회개는 손만 드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마음을 하나님께 토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라고 한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 나라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지난주 묵상한 예레미야 끝 부분인 46-53장에는 열방들의 심판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애굽, 다메섹, 가나안 족속, 게달과 하솔, 모압, 암몬, 엘람, 에돔 그리고 바벨론까지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준엄하신 공의의 심판이 있습니다. 온천지에 충만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악을 아시고 드러내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돌아보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마음과 손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들도 자신을 돌아보도록 성경을 기록하여 경계와 교훈을 받아 합당하게 살아가도록 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사건 특히 성경을 통하여 증거된 이스라엘의 역사와 그 역사 속에 살아갔던 인물과 사건 모든 것은 바로 우리에게 거울과 교훈으로 기록하신 것입니다.
(고전 10:1)“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2)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3)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4)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5)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6)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7)저희 중에 어떤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8)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9)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10)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11)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12)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교회 속에서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도 우리는 자신을 먼저 헤아리고 살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초상집에 가는 자가 잔치 집에 가는 자보다 지혜 있다고 한 것은 이러한 연유에서입니다. 초상집에서 죽은 사람을 생각하며 그의 죽음 같이 나도 어느 날 죽음이 찾아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죽음 후에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죄인으로 서게 될 것인지? 아니면 의인으로 서게 될 것인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이 나타나도록 힘쓰는 삶이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초상집에 가서도 생각하는 것이 사람은 죽음으로 끝이 나고 죽음으로 모든 것이 소멸되는 것처럼 여기며 살아있는 동안 멋지고 즐겁게 살자! 라고 하는 미련이 벗어지지 않는 삶을 택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나타난 남 유다 민족의 비참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죄로 인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고난이 없습니까? 욥기에서는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태어났다”고 증거한 것처럼 고난은 우리 삶에 있어서 연속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욥 5:7)“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불티는 나무가 다 탈 때까지 계속 일어납니다. 솔로몬이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진다”(잠 26:20)고 한 것처럼 인생은 육체가 다하여 죽음을 맞을 때까지 고난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은 본래 인생에게 없던 것이었습니다. 고난이 시작된 것은 우리 인류의 첫 조상 아담이 하나님께 대적하고 반역하고 범죄함으로 시작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은 후에 하나님께서 인생들이 살아가는 땅을 저주하여 가시와 엉겅퀴가 나게 하신 것입니다. 인생에게서 가시와 엉겅퀴가 바로 고난과 고통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음을 맛보아야하는 징계를 주신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할 때 이 세상에서의 평안함도 주셨지만 불순종하고 죄를 범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더욱 큰 고난으로 기근과 질병과 자연재해와 전쟁과 그리고 나라를 잃고 먹을 것이 없어 자식까지 양식으로 삼아야 하는 가장 비참한 고통과 고난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떠한 고난이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각기 환경과 여건이 다른 가운데 고난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누구 때문에! 아니면 환경 때문에! 라고 탓하면서 변명과 핑계를 말하지만 실상은 우리의 연약함과 실수와 죄로 인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죄로 인한 징계가 그 가운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재 나에게는 모든 것이 잘 되어지니까 편안하고 안전하다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에게는 어떠한 고난과 재난이 닥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모든 일은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하며 하나님 말씀을 따라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이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나에게는 그러한 고난과 관계된 것이 없는가? 자신을 헤아리고 살펴야 하나님 앞에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고난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증거하였습니다.
(애 3:15)“나를 쓴 것으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셨으며(16)조약돌로 내 이를 꺾으시고 재로 나를 덮으셨도다(17)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잊어 버렸음이여(18)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19)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20)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21)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22)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23)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24)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25)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26)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27)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28)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29)입을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30)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31)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32)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33)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고난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었음을 알았기 때문에 오히려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잠시 동안의 고난에 대하여 잠잠히 인내하며 겸손해 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으며, 베드로와 야고보 사도는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연단하여 정금보다 더욱 귀한 자로 주 앞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으로 나타나게 하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를 얻게 된다고 증거 했습니다.
징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참 아들을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도록 하신 은혜입니다. 징계를 받는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닮아가는데 있어서 연단을 받아야하는 것들이 매우 많습니다.
(히 12:11)“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우리의 심령, 기도, 온유, 인내, 믿음, 소망, 사랑, 거룩 이라는 열매는 자발적으로 맺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통한 연단의 의의 평강한 열매입니다.
징계를 통하여 죄를 죽이고 경건의 능력이 더욱 크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은 하나님을 더욱 의뢰하게 하는 성도들에게 큰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시 119:67)“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71)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에 대하여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본문의 주제처럼 남의 고난에 대하여 비웃거나 조롱하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특히 성도들 간의 연약함과 실수와 죄가 드러났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갈 6:1)“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그런데 본성적으로 우리는 비난하고 조롱하고 멸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자랑하고 으시대던 사람들이 잘못되면 본성적으로 “잘난 체 하더니 꼴 좋다. 고소하다.” 하면서 비웃으며 마음으로 기뻐하던 습성이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본성적으로 다른 성도들의 연약함과 실수를 그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럴때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마음에 되새겨야 합니다.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먼저 우리 자신을 살피고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마음과 손을 들며 애통하고 회개하며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2절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그렇지 않고 스스로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 후에 영광을 주시려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받으신 고난은 아무도 영원히 받을수 없는 고난이십니다.
그것은 죄없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속하시기 위한 고난이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스스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친히 십자가에서 몸으로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니신 성품을 덧입고 닮아 그의 앞에 거룩하여 점과 흠이 없이 서도록 견고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앞에 서는 날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존귀와 영광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신뢰하도록 시련과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정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는 법칙 아래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에 충만하여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누구도 숨길수 없고 속일 수 없습니다. 스스로도 속을수 있기 때문에 성경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따라 우리가 하는 일이 “나를 기쁘게 하는 육체를 따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성령을 따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가?” 분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남 유다의 멸망은 뿌린 씨앗을 거두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행위를 조사하고 하나님께 마음과 손을 들어야 합니다.
죄는 자백하여 그리스도의 피와 말씀으로 씻어 정결케 되어야 하나님과 교제하고 동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간구하며 의탁하고 신뢰하여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믿음으로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성 경: [애3:1] |
예루살렘 거민을 낮추심(예레미야 애가 4장)
1-12절, 거름더미를 안았음
[1-2절]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정금이 변하였으며 성소의 돌이 각 거리 머리에 쏟아졌는고. 시온의 아들들이 보배로와 정금에 비할러니 어찌 그리 토기장이의 만든 질항아리같이 여김이 되었는고.
금이 빛을 잃고 정금이 변했다는 말은 예루살렘 성의 낮아진 형편을 묘사한다. 전에는 정금과 같았으나 지금은 빛을 잃은 정금이 되었다. 마치 정금이 빛을 잃고 정금 아닌 물질로 변질된 것처럼, 예루살렘 성은 비천한 상태에 떨어졌다. 성소의 돌들은 길거리에 쏟아지고 버려졌다. 전에 정금같이 보배로웠던 시온의 아들들은 이제는 토기장이가 만든 질그릇같이 별 가치 없는 존재로 여김을 받았다.
[3-5절] 들개는 오히려 젖을 내어 새끼를 먹이나 처녀 내 백성은 잔인하여 광야의 타조 같도다.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음이여, 어린 아이가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도다. 진수를 먹던 자가 거리에 외로움이여, 전에는 붉은 옷을 입고 길리운 자가 이제는 거름더미를 안았도다.
‘들개들’(탄닌)은 여우와 이리 중간쯤 되는 짐승인 ‘재칼들’을 가리킨다고 한다(BDB, NASB). 사나운 짐승인 재칼들도 자기 새끼에게는 젖을 먹이지만, 유다 백성은 짐승보다 더 잔인하여 광야의 타조같이 자기 자식을 돌보지 않는다. 젖 먹는 아기는 젖을 먹지 못해 목이 말라 혀가 입천장에 붙고 어린아이들은 먹을 빵을 구하나 떼어 줄 자가 없었다. 맛있는 음식만 골라 먹던 아이들은 이제 거리에서 처량하였고, 붉은 옷을 입고 길리우던 자들은 이제 천한 자같이 거름더미를 안았다. ‘거름더미를 안았다’는 말은 그들의 비천해짐을 잘 보인다.
[6절] 전에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경각간에 무너지더니 이제 처녀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중하도다.
예루살렘 성의 멸망은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었다. 그들의 죄는 옛날의 소돔 성의 죄악보다 더 무거웠다. 옛날에 소돔 성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않고 순식간에 멸망했듯이, 예루살렘 성과 유다 나라는 하나님의 징벌로 처참하게 멸망하였다. 예루살렘의 처참한 멸망의 원인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니고, 바로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다.
[7-8절] 전에는 존귀한 자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보다 붉어 그 윤택함이 마광한 청옥 같더니 이제는 그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 가죽이 뼈에 붙어 막대기같이 말랐으니 거리에서 알 사람이 없도다.
‘존귀한 자’라는 말(네지레하)은 ‘그들의 성별된 자들’이라는 뜻인데(BDB, NASB) 그것은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들을 가리키든지(KJV) 그들의 방백들을 가리킬 것이다(NIV). ‘산호’(NASB)라는 말은 ‘홍옥’(KJV, NIV)이라고도 번역된다. 유다 나라의 성별된 자들 혹은 방백들은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우유보다 희며 홍옥보다 붉고 윤택함이 광나는 청옥 같았으나, 이제는 얼굴이 숯보다 더 검게 되었고 거리에서 알아볼 자가 없으며(원문 순서) 그 가죽이 뼈에 붙었고 몸이 막대기같이 말랐다.
[9-10절] 칼에 죽은 자가 주려 죽은 자보다 나음은 토지 소산이 끊어지므로 이들이 찔림같이 점점 쇠약하여 감이로다. 처녀 내 백성의 멸망할 때에 자비한 부녀[여인들이]가 손으로 자기 자녀를[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식물을 삼았도다.
굶어 죽어가는 자들의 모습이 처참하기 때문에, 선지자는 차라리 칼에 죽은 자들이 굶어 죽은 자보다 낫다고 말한다. 예루살렘 멸망의 가장 처참한 모습은 그 거민들이 너무 굶주려 평소에 인자하던 여인들이 손으로 자기 자녀들을 삶아 먹은 일이었다. 그것은 이미 2:20에서도 말한 사실이었다: “여호와여, 감찰하소서. 뉘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손에 받든 아이를 먹으오며.” 원문은 한 명이 아니고 여러 명이 그러하였음을 암시하기를, ‘여인들’이 ‘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었다고 증거한다.
이것은 이미 모세의 율법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그 명령을 행치 않고 그것을 멸시하고 싫어하고 그 언약을 배반할 때 내려질 것이라고 경고된 바이다. 레위기 26:29, “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신명기 28:53, “네가 대적에게 에워싸이고 맹렬히 쳐서 곤란케 함을 당하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자녀 곧 네 몸의 소생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
[11-12절] 여호와께서 분을 발하시며 맹렬한 노를 쏟으심이여, 시온에 불을 피우사 그 지대를 사르셨도다. 대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갈 줄은 세상 열왕과 천하 모든 백성이 믿지 못하였었도다.
예루살렘 성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분을 발하시며 맹렬한 노를 쏟으신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시온에 불을 피우셨고 그 기초를 삼키셨다(원문의 뜻). 원수들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그 성을 비참하게 멸망시키리라고는 세상의 열왕들과 백성들은 믿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상상하거나 예상하지 못한 일이 현실에서 일어났다. 하나님께서는 일반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으시고 예언된 징벌을 그들에게 내리셨다. 예루살렘 성은 처참하게, 비극적이게 멸망하였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죄를 멀리해야 한다. 죄가 모든 불행의 원인이며 죄를 회개하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이 모든 행복의 시작이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사 48:22). 사람이 죄성 있는 육신을 가지고 살고 있는 세상에서 죄를 완전히 짓지 않는 것은 불가능할지라도, 구원받은 성도는 죄를 멀리하고 죄 짓지 않기 위해 힘써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반드시 벌하신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우리에게 거울이 된다.
셋째로, 우리는 범죄했을 때 즉시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결코 뒤로 미룰 일이 아니다. 우리는 깨달은 죄를 즉시 회개하기를 힘써야 한다.
13-22절, 지도자들의 죄 때문에
[13절] 그 선지자들의 죄와 제사장들의 죄악을 인함이니 저희가 성읍 중에서 의인의 피를 흘렸도다.
유다 나라의 멸망은 백성의 죄악 때문일 뿐 아니라, 또한 지도자들의 죄악 때문이었다. 실상, 지도자들의 죄악이 더 중요하다. 한 사회는 그 지도자가 어떤 자인가에 따라 그 평안의 여부에 차이가 난다. 유다 지도자들인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성읍 중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리는 가증한 죄를 범했다. 의와 진리를 선포하고 공의를 시행해야 할 자들이 의인들의 피를 흘리고 악인들의 악을 용납한 것이다.
[14-15절] 저희가 거리에서 소경같이 방황함이여, 그 옷이 피에 더러웠으므로 사람이 만질 수 없도다. 사람이 저희에게 외쳐 이르기를 부정하다, 가라, 가라, 가라, 만지지 말라 하였음이여, 저희가 도망하여 방황할 때에 이방인이 이르기를 저희가 다시는 여기 거하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저희’는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들은 소경같이 방황했다. 실상 그들은 영적 소경이었다. 그들의 옷은 피에 더러워져서 사람이 만질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나병 환자에게 ‘부정하다’고 외치며 진 밖으로 나가 살게 했듯이(레 13:45-46), 그들은 다 부정한 자같이 되었다. 이제 그들은 이방에 포로로 잡혀갈 것이며 이 땅에 다시 거하지 못할 것이다.
[16절] 여호와께서 노하여 흩으시고 다시 권고치 아니하시리니 저희가 제사장들을 높이지 아니하였으며 장로들을 대접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여호와께서 노하여’라는 원어(프네 여호와)는 ‘여호와의 얼굴’이라는 뜻이다. 여호와의 얼굴 곧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흩으시고 다시 돌아보지 않으실 것이다. ‘권고하다’는 원어(힙비트)는 ‘쳐다보다, 존중하다’는 뜻이다. 전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 나라들과 달리 사랑하셨고 주목하며 귀히 여기셨으나(신 11:12),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는 지금 진노의 얼굴을 그들에게 향하셨다. 본절 후반부의 ‘저희’는 유다의 원수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은 유다의 존귀한 지도자들, 제사장들과 장로들을 높이거나 대접하지 않을 것이다. 바르게 행하며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지도자들은 존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지만, 악을 행하며 백성으로 화를 당케 하는 자들은 모욕을 당할 것이다.
[17-20절]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치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 저희가 우리 자취를 엿보니 우리가 거리에 행할 수 없음이여, 우리의 끝이 가깝고 우리의 날이 다하였고 우리의 마지막이 이르렀도다. 우리를 쫓는 자가 공중의 독수리보다 빠름이여, 산꼭대기에서도 쫓고 광야에도 매복하였도다.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가 저희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저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저의 그늘 아래서 열국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유다 백성들은 그들을 구원치 못할 나라 곧 애굽을 바라보고 헛된 도움을 기대했다. 그러나 유다가 바벨론의 침략을 받았을 때, 애굽은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고 그들의 멸망을 막아주지 못했다. 그들의 외교적 노력과 군사대국과의 동맹이 무용지물이었다.
원수들은 유다 백성을 가까이서 엿보았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에서 예루살렘 거민들을 관측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의 멸망 곧 유다의 멸망이 가까웠고 그 마지막 날이 이르렀다. 그들을 쫓는 바벨론 군대는 공중의 독수리보다 빨라서 유다 백성은 산꼭대기로도 광야로도 도망칠 수 없고 멸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20절의 ‘우리의 콧김’은 ‘우리의 코의 호흡’이라는 말로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자 곧 왕을 가리켰다고 본다. 유다 멸망 때의 왕은 시드기야이었다. 유다 백성은 그 왕이 그들을 잘 다스려 열국 가운데서 평안하게 살 줄로 생각했으나, 그는 원수들의 함정에 빠졌고 사로잡혔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모든 헛된 소망과 기대, 헛된 의지물을 다 파하셨다. 애굽 나라도 그들의 왕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아닌 모든 인간적 소망과 의지물은 다 헛되었다.
[21-22절] 우스 땅에 거하는 처녀 에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려무나. [그러나](NASB) 잔이 네게도 이를지니 네가 취하여 벌거벗으리라. 처녀 시온아, 네 죄악의 형벌이 다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않게 하시리로다. [그러나](NASB) 처녀 에돔아, 주께서 네 죄악을 벌하시며 네 허물을 드러내시리로다.
에돔은 우스 땅에 거하는 자들이라고 표현된다. 이 ‘우스’는 욥의 고향인 우스(욥 1:1)와 같은 지역일 것이다. 에돔 사람들은 멸망하는 유다를 보면서 기뻐하고 있었다. 예레미야는 이제 에돔에 대해 비꼬며 “에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려무나”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상 그는 에돔이 슬퍼해야 할 소식을 전하고 있다. 에돔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에돔 사람들의 죄악을 벌하시며 그들의 허물을 드러내실 것이다. 그러나 반면 그는 유다 백성에게는 그들의 죄의 형벌이 끝나고 다시는 포로로 잡혀가는 일이 없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유다와 예루살렘 성의 멸망이라는 고통스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소망과 위로의 말씀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세계 열국을 공의로 섭리하신다. 그는 자기 백성 유다라도 범죄할 때 혹독하게 징벌하셨다. 유다의 멸망을 비웃고 기뻐하던 에돔은 장차 하나님의 공의의 징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인 유다는 때가 되면 회복될 것이다. 이와 같이, 세계 역사는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로 진행되고 성취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세계 역사의 진행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섭리자 하나님만 바라보자. 온 세상은 하나님의 섭리의 손 안에 있다. 세계사는 하나님의 손 안에서 진행된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암울하게 보이는 일들까지도 섭리하셔서 그의 뜻을 이루신다. 개인의 일도, 교회의 일도, 국가의 일도, 세계의 일도 다 그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세상의 창조자요 섭리자이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삼위일체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고 섬겨야 한다.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가장 귀하고 중요한 일이다.
둘째로, 우리는 헛된 소망을 버리자. 하나님 없이 가진 혹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가진 모든 인간적 소망은 헛되다. 불경건은 가장 근본적 죄악이다. 개인뿐 아니라, 국가의 소망도 하나님께 있다. 국가의 안전은 정치 외교나 경제나 군사력에 있지 않다. 각종 미사일이나 이지스함이나 F-35 전투기 같은 최첨단 무기들을 많이 소유하는 것이나 한미동맹을 견고히 하는 것이 나라의 평안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는 모든 소망과 의지물은 실상 다 헛되다.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하고 우상숭배적이고 부도덕한 나라를 지키지 않으신다. 현세의 평안과 형통, 미래의 영생과 천국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다. 시편 39:7,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셋째로, 우리는 오직 경건하게 살고 의와 선을 행하자.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공의로 섭리하신다.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 자는 누구든지 다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경건하게 살고 의와 선을 행하는 자는 평안과 형통을 누릴 것이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3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365세를 향수하였다(창 5:22). 창세기 6:9,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하나님 앞에 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경건이다. 또 참된 믿음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함으로 의롭고 선한 행실로 증거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고 오직 신구약성경에 증거된 그의 모든 명령과 교훈을 힘써 지키고 행해야 한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http://www.oldfaith.net/01exposit/01ot/1-25애가.htm#4장
예레미야애가 4장
Ⅰ. 죄과의 열매 4:1-12
본장은 예루살렘의 비참한 변화에 대한 비탄으로 시작된다. 예전에는 정금과 같던 그 성읍이 영광을 잃어 쓸모없게 되어 버렸다.
(1) 예루살렘의 영광이요 보호물이었던 성전은 황폐케 되었다. 어떤 이들은 1절에 나오는 금을 '성전의 금,' 곧 성전에 입혀졌던 정금으로 이해한다(왕상 6:22). 성전이 불에 탔을 때 그 금은 훼손되었다. '성소의 돌'은 불로 인해 내려 앉아 '각 거리 머리'에 쏟아졌다. 그 돌들은 도처의 폐허 속에 뒤섞여 버렸다.
(2) 어떤 특별한 의미에서 '시온의 아들들'이라고 볼 수 있었던 방백들과 제사장들은 능욕을 당하였다(2절). 이스라엘은 금, 은과 같은 보배로라기보다는 그 사람들로 인해 더욱 부유하였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질항아리처럼 깨져 버린 것이다. 그들은 가난해지고 포로로 잡혀갔으며 비천한 자들로 멸시받게 되었다.
(3) 어린 아이들은 떡과 물이 없어 굶어 죽게 되었다(3,4절).
(4) 상류층의 사람들은 궁핍에 빠지게 되었다(5절). 그들은 좋은 가문 태생으로 교양있게 자란 자들이었으나 전쟁으로 인해 모두 헐벗게 되어 거리에 버림받았으며 누울 잠자리조차없어졌다. 때때로 '궁핍한 자가 거름 무더기에서 일어나는'(시 113:7) 경우가 있으나 여기서는 부유하던 자가 '거름더미'를 안게 되었던 것이다.
(5) 위엄으로, 혹은 고결함으로 존귀하였던 사람들은 그 공동의 재난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었다(7,8절). '존귀한 자'들에게 변화가 왔다. 이 존귀한 자들(Nazarites)은 절제있는 식사로 인해서, 특히 그들의 얼굴을 모세의 얼굴처럼 빛나게 했던 하나님께 대한 헌신 가운데서 누리는 즐거움으로 인해서,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었다.' 그들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음으로 해서 건강이 넘치는 안색과 기운찬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이사야 52:14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말한 것처럼) '그들의 얼굴은 상하였다.' 그 얼굴이 숯보다 검고(8절). 그들은, 한편으로는 굶주림으로 한편으로는 슬픔과 혼란으로 비참하게 보였다. 거리에서 알 사람이 없도다. 그들을 존경하던 자들이 이제는 그들을 무시하였다.
(6) 예루살렘은 오랫 동안 질질 끌며 멸망해 갔다. 이는 다른 어떤 심판보다도 기근이 그 성읍을 멸망케 하는 주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그 스스로가 멸망해 가는 것을 느끼도록 조금씩 멸망해 갔다. 예루살렘의 죄악은 소돔의 죄악보다도 중하였으므로 그 죄악에 따른 형벌 또한 소돔보다 중한 것이 당연하였다. 소돔은 예루살렘이 받았던 은총을 전혀 받은 적이 없었다. 자비한 부녀가 손으로 자기 자녀를 삶아 식물을 삼았도다(10절). 그들의 상황은 자녀들을 먹이고 그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 방법이 없을 정도로 비참하였다(4절). 그러나 더욱 비참한 것은 그들이 자녀들을 음식으로 삶아 먹고자 하는 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완전한 멸망이었으며(11절), 깜짝 놀랄 만한 멸망었다(12절). 이 사건은 세상 열왕에게, 그리고 예루살렘을 알고 있던 '천하 모든 백성'에게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위대한 왕의 성'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성을 보호하시기 때문에 어떠한 대적이 공략하더라도 무위로 끝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Ⅱ. 환난의 원인 4:13-20
(1)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렇게 파멸시킨 원인이 된 죄악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정당하게 해주었다(13,14절). 그 선지자들의 죄와 제사장들의 죄악을 인함이니. 그들에게 특별히 책임지워진 죄목은 핍박이었다. 거짓 선지자들과 부패한 제사장들은 '성읍 중에서 의인의 피를 흘리는' 일에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자녀들의 무죄한 피를 흘려 몰록에게 제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 가운데 거하는 의인들의 피를 흘려 진리와 참된 종교에 대한 적개심이라는 더욱 잔인한 우상에게 제사하였던 것이다. 핍박하는 것만큼 선지자와 제사장들을 혐오스럽게 만드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2)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을 증명하기 위해 이웃들이 증언한다. 죄에 빠져 살면서도 깨끗한 척하는 그들을 그 이웃들이 비난하였다. 사람이 저희에게 외쳐 이르기를 부정하다 가라...하였음이여(15절). 이웃들은 모두 그들에게 무안을 주며 소리질렀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좋은 땅에 살면서도 그토록 자신을 진노케 하는 백성들을 참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예견하였다. 그 땅은 예전에 그들의 선조에게 했던 것처럼 그들을 토해내려고 하였다. 저희가 도망하여 방황할 때에 이방인이 이르기를 저희가 다시는 여기 거하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이웃 나라들은 이제 '여호와께서 노하여 그들을 흩어시리라'고 말하였다. 그 이웃들은 그들이 추방당하는 것을 보고는, "하나님께서 다시 권념치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어찌 스스로 도울 수 있으리요?" 라고 말하였다. 사실 이것은 이웃들이 오해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상의 모든 사실로도 그들을 버리시지 않는다.
(3) 그들은 고난 속에서 절망한다. "우리가 볼 때, 우리의 처지는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도다." 우리의 마지막이 이르렀도다(18절). "우리 교회와 나라의 마지막이 다가왔도다." 그들이 피한 피난처는 그들에게 실망을 안겨다 주었다. 그들은 이곳과 또 다른 강력한 동맹국에게 도움을 바랐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꿈에도 도와 줄 생각을 하지 않는 자들에게 희망을 걸었던 것이다(17절). 우리가...우리를 구원치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 그 나라는 그들의 기대를 좌절시켰다. 그리하여 핍박자들이 그들을 정복하였다(18절). 저희가 우리 자취를 엿보니 우리가 거리에 행할 수 없음이여. 갈대아인들은 그 성을 포위하고서 거리에 나 다니는 사람들을 쏘아 맞힐 수 있도록 성벽보다 더 높은 포대를 세웠다. 갈대아인들은 그들을 화살로 이리 저리 추적하였다. 우리를 쫓는 자가 공중의 독수리보다 빠름이여(19절).
Ⅲ. 교만한 에돔에 내릴 형벌 4:21-22
다윗이 지은 여러 애가에는 공통적으로 어떤 위로의 말이 포함되어 있다. 이 위로의 말은 사망으로부터의 생명과 같고 어둠 속에서 빛나는 빛과 같은 것이다. 본문이 바로 그런 것이다. 이 애가에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용기를 북돋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예언되었다.
(1) 시온이 당하고 있는 환난이 다할 것이다(22절). 하나님의 백성들이 당하는 환난은, 그것의 임무를 완수한 후에는 더 이상 계속되지 않을 것이다.
(2) 에돔이 누리고 있는 승리 또한 다할 것이다. 이것은 반어적으로 말해졌다(21절). 처녀 에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려무나. "지금은 예루살렘이 다 마셔야 할 차례가 된 이 떨리는 잔이 네게도 이를지라." 에돔 족속의 멸망은 이 예레미야 선지자에 의해 예언되었다(렘49:7이하). "네게 이르게 될 잔이 너를 취하게 하리라. 네가 취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비틀거리고 넘어지며 마치 노아가 취했을 때처럼 벌거벗고 망신을 당하리라."
황량해진 예루살렘 (예레미야 애가 4:1-12)
이 장에서의 애가는 하나님의 심판이 예루살렘에 행하여짐으로 인한 심한 슬픔과 슬픈 변화에 대한 애가로 시작한다. 이전에는 "금과 같고 정금과 같았던" 그렇게 부하고 화려하던 성읍, 완전한 아름다움과 온 땅의 기쁨이었던 그 성읍이 흐려지고, 변화되고, 광택을 잃고, 가치를 잃어버리고 지금은 옛 성읍이 아니다. 이제는 부스러기가 되었다. 아! 얼마나 큰 변화가 여기에 있는가!
Ⅰ. 성전이 황폐하여졌다.
성전은 예루살렘의 영광이요, 보호자이었다. 그것이 적의 손 안에 버려졌다. 어떤 이들는 1절에서 말하고 있는 이 금은 "성전의 금이고" 정금은 금으로 입혀진 것으로(왕상 6:22)이해한다.
성전이 불탔을 때 금은 마치 가치가 거의 없는 것처럼 연기에 그을리고 더럽혀졌다. 그것은 쓰레기 속에 버려졌다.
그것은 "변하였다." 그것은 일반적인 용도로 바뀌어지고, 그것으로는 아무 것도 만들지 않았다. 기묘하게 새겨진 성소의 돌들은 갈대아 사람들이 그것을 부숴버릴 때 내던져지고, 또는 불의 세력으로 내려지고 쏟아져 나와 "모든 길거리에 버려졌다." 그것들은 구별됨 없이 다른 것들과 같이 파괴되었다. 성소의 하나님이 죄로 말미암아 철수하시도록 자극을 받으셨을 때 성소의 돌들이 이렇게 모욕을 당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Ⅱ. 특별히 시온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왕들과 제사장들이 유린당하고 학대를 받았다. 그 하나님의 집과 다윗의 집은 둘 다 시온에 있었다. 이 두 집의 자손들은 존귀한 자들로 여겨졌다. 그들은 제사직과 왕직의 두 계약의 특전을 받은 상속자들이었다. 그들은 "정금에 비교되어졌다." 이스라엘은 금과 은의 창고가 있어서 보다도 그들이 있어서 더 부요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질항아리같이 여김이 되었다." 그들은 질그릇같이 깨어지고, 그 안에 기쁜 것이 없는 그릇과 같이 내던져졌다. 그들은 가난하게 되고 포로로 잡혀가, 거기서 천하고 비열하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짓밟고 모독하였다. 하나님의 백성들 위에 놓여진 모욕은 우리들에게 애가의 사건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유의하자.
Ⅲ. 어린아이들은 떡(빵)과 물이 없어서 굶주렸다(3,4절). 자식을 기르는 어머니들은 그들이 먹을 식물과 그 품에 있는 자식들에게 먹일 우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식물을 충당하는 데 있어 진실로 동정심이 많기도 했지만 그래도 실에 있어서는 알을 땅에 버려두는 광야에 있는 타조와 같이 잔인한 것처럼 보인다(욥 39:14, 15). 자식들에게 먹일 식물이 없어서 그들은 할 수 없이 자식들을 방지하게 되고, 그들을 잊어버릴 수 있는 짓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어린 것들에게 아무 것도 먹일 것이 없을 때 그 자식들을 생각하는 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들은 물개나 들개나 고래보다도 더 나쁘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젖을 꺼내어 그 새끼들에게 빨게 하였으나, 내 백성의 딸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어린 것들은 어른들처럼 자리를 이동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젖먹이 아이가 목이 말라서 혀가 입 천정에 달라붙는 것을 보는 것은" 더욱 고통스러운 일이다. 목을 축일 한 방울의 물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 자식들이 그들의 부모에게 빵을 달라는 말만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부모가 그들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었고 어느 친구도 그들에게 먹을 것을 줄 수가 없었다. 이 경우에 우리의 마음은 슬퍼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즐길 많은 것들과,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위하여 가진 풍부한 식물과 우리가 소유한 집들로 인하여 감사해야 할 것이다.
Ⅳ. 좋은 계층에 있는 사람들도 극단적인 궁핍에 빠졌다. 그들은 좋은 가문에서 출생했고, 호화롭게 자랐고, 음식과 의복에 있어 가장 좋은 것에 익숙하였다. 그들은 진수를 먹고, 진기하고 좋은 모든 것을 가졌다.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만 잘 먹는 반면에 그들은 그것을 잘 먹는 것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매일 호화롭게 열락" 하였다. 그들은 다만 붉은 빛을 추구하여 갔을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붉은 빛 속에서 길리워지고, 결코 천하거나 일반적인 것과는 친숙하지 않았다. 그들은 붉은 빛 위에서 양육받았다(그 [말이 뜻하듯이). 그들의 말의 깔개와 그들이 걷는 양탄자가 붉은 빛이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하여 이 모든 것이 벗겨지고 길 거리의 외로운 자가 되었다. 그들의 머리를 들이밀 집을 가지지 못하고 누울 침대도 없으며, 그들을 감쌀 옷도 없고, 따뜻하게 할 불도 없다. 그들은 "거름더미를 안고" 약간의 휴식을 얻기 위하여 그 위에 누우므로 즐거웠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먹을 것을 찾아서 거름더미를 뒤졌을 것이다. 집 나간 탕자가 배가 고파서 찌꺼기로 배를 채웠듯이...... . 가장 화려하고 부요하게 사는 사람들은 그들이 곧바로 죽음 앞에까지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에 주의하자. 때로 "가난한 자가 진토에서 일으켜지는 것같이" (시 113:7) 또한 부자가 쓰레기더미로 떨어지는 실례도 있는 것이다.
유족한 자들이 양식을 위해서 품을 팔고(삼상 2:5)...... . 그러므로 부요한 사람들의 지혜는 너무 호화롭게 지내지 아니하는 데 있다. 곤경이 올 때 그들은 갑절로 곤경을 겪을 것이기 때문이다(신 28:26).
Ⅴ. 위엄에 뛰어난 사람들, 아니 아마도 뛰어나게 고결한 사람들도 일반적인 재앙을 다 른 사람들과 다같이 겪는다(7,8절). 그 존귀한 자들의 몸이 심히 변화되었다. 어떤 사람 들은 존귀한 사람들을 다만 젊은 신사인 명예로운 사람이라고 이해한다. 그들은 매우 깨끗하고, 산뜻하고, 옷을 단정히 입고, 몸을 씻고, 향료를 발랐다. 그러나 나는 그 존귀한 자들이란 바로 나실인의 서약을 하여 "주께 그 몸을 구별하여 드린 사람들" 중의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민 6:2). 가장 타락한 시기에 그들 중에 있는 이러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아모스 2장 11절에서부터 나타난다. "내가 너희 청년들 나실인을 일으켰나니," 이 나실인은 비록 그들의 머리는 자르게 되어 있지 않았다 할지라도 식사를 삼가서 하고 자주 몸을 씻으며 특히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고 하나님과 더불어 대화를 가지는 즐거움으로 인하여 모세와 같이 그들의 얼굴이 빛났으므로 그들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우유보다 희였던 것이다. 포도주와 독주는 마시지 아니하였지만, 다니엘과 그 친구들이 채식과 물만 먹은 것같이, 매일 포도주로 열락하는 사람들보다도 더 건강한 안색과 밝은 표정을 가졌다. 그것은 모든 선한 사람들이 그들에게 대단한 존경과 숭앙을 가지게 하였던 것일 수도 있다. 아마도 눈으로 보기에는 그들이 모양을 내거나, 미모를 가지지 않았을지라도 주를 향하여 자신을 구별한 것은 마치 그들이 "산호보다 붉고 마광한 청옥과 같이 가치가 있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얼굴이 상하였고(그리스도에게 대하여 말하여지듯이, 사 52:14) 숯보다 검은 것이다. 그들은 한편 굶주리고, 또 한편 슬픔과 당혹으로 인하여 비참하게 보였다. 그들은 거리에서 알 사람이 없어지게 되었다. 그들을 존경하던 사람들은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아니하고 그들을 친하게 알던 사람들도 이제 거의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모습은 오랜 포위로 말미암아 그렇게 비참하게 변하였다. 그 가죽이 뼈에 달라 붙고, 그의 살이 여위고 소모되었다. "그 가죽이 마르고, 막대같이 되었고" 나무 조각같이 마르고 딱딱하여졌다.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린 사람들이 아직 있다 할지라도 황폐한 심판이 확대될 일반적 재앙 속에 다른 사람들까지도 포함된다는 것이 대단히 슬퍼할 일이라는 것을 주의하자.
Ⅵ. 예루살렘은 서서히 함락되고, 오래 끌면서 죽었다. 기근은 어떤 다른 심판에서 보다도 더욱 그의 파멸을 가중시켰다. 이런 이유로 예루살렘의 파멸은 "소돔의 파멸보다 더 하였다." 소돔은 순식간에 엎드러졌다. 불의 소나기와 유황이 소돔을 급히 처치하였다. 지도자가 인도하는 것이 그에게는 없었다. 소돔은 예루살렘과 같이 오랜 포위를 당하는 일도 없었다. 그는 집을 때리는 주의 손으로 즉각 멸망하고 심판을 행하기에 오랫동안 걸리는 약한 존재인 사람에게 망하지 아니하였다(사 8:21). 예루살렘은 고통과 비참한 속에서 여러 달 동안을 지속하였다. 그리고 조금씩 그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느끼면서 죽어갔다. 예루살렘의 죄악이 소돔의 죄보다 더 하나님을 노하게 하였을 때 그 형벌이 그와 같았다고 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소돔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그 예언자 같은 예루살렘이 가진 은총을 갖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심판은 소돔의 심판보다 더 무자비하였을 것이다. 극심한 기근은(마 11:23, 24) 여기서 두 가지 소름끼치는 실례를 보여 준다.
1. 9절의 원인이 된 지루한 죽음. 많은 사람들이 굶주려 죽어갔다. 개인집의 창고가 비어 버리고, 공공의 창고가 거의 바닥이 났기 때문에 그들은 구제를 받을 수 없었다. 그들은 "토지 소산이 끊어짐으로 칼에 찔리웠다." 굶주려 죽어가는 이들은 마치 그들이 칼에 찔리고 꿰뚫어지는 것같이 죽은 것은 확실하였다. 다만 그들의 경우는 더 비참한 것뿐이다. 칼날에 죽은 자는 "그들이 음부로 내려가는 순간에" 그들의 고통으로부터 곧 해방된다(욥 21:13). 그들은 죽음이 그들 앞에 오는 것을 보는 공포를 갖지 아니하며, 타격이 주어졌을 때는 그것을 거의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날카로운 투쟁이다. 그리고 그 일은 끝난다. 만일 우리에게 또 다른 세상이 준비된다면 우리는 그리로 가는 이 짧은 과정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빠르면 빠를수록 더욱 좋다. 그러나 기근으로 죽는 사람들은 쇠약해져 가고 굶주림은 그들의 정신을 초조하게 하고 괴로움으로 그들을 채운다. 그들은 연대적으로 죽었다(시 73:4).
2. 10절에 있는 야만적인 살인자들. "자비한 부녀가 손으로" 먼저 살인을 하고 그 후에 자기 자식들을 삶았다. 이것은 앞에서 애도되었다(2:20). 사람이 자식을 삶아 먹을 만큼 그렇게 악하게 되어지는 것과, 그러한 것에 유혹될 만큼 극단적 상황이 된다는 것은 크게 애도되어질 일이다. 그러나 오랜 포위로 말미암은 이 무서운 결과는 일반적으로 경고되어졌던 것이다(레 26:29; 신 28:53). 특히 예루살렘이 갈대아의 포로가 되는데 대해서(렘 19:9; 겔 5:10) 그들이 그 자녀들에게 먹일 것을 갖지 못하였다는 것과 그들을 위하여 식물을 만들 수 없었다는 것은 충분히 슬픈 일이지만, 그들 마음속에 그 자녀들이 먹을 것으로 보이고, 그들을 식물로 삼았다는 것은 더욱 나쁜 일이다. 나는 그것이 궁핍의 힘이 그 같은 사건을 만들어 내는 것인지, 또는 죄악의 힘이 그 같은 사건을 만들어 내는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방의 우상 숭배자들이 "자신들을 더러움에 내어 버려둔 것같이" (롬 1:26) 이 유대인 우상 숭배자들과 특히 그 여자들, "하늘의 여신에게 과자를 만들어 드리고" 그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을 가르치던 유대 여자들은 "본성적인 사랑을 벗어버리고" 그 자녀들에게 그같이 행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그 자신들의 "본성을 부끄러운 데에 내버려 두었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에게 향한 수치스러운 일로 인하여 그들 위에 공의로운 심판이 내리는 것이다.
Ⅶ. 예루살렘은 철저히 그리고 놀라웁게 함락되었다.
1. 예루살렘의 파멸은 완전한 파멸이었다(11절). "주께서 분을 발하시며." 그는 철저하게 그의 일을 하셨다. 그가 예루살렘에 대하여 노하여서 목적한 모든 일을 실행하셨다. 그는 심판의 한 부분도 남겨두지 않으셨다. 그는 진노로 가득한 병을 밑바닥에다가 병의 찌꺼기까지 쏟아 부으셨다. 그는 "시온에" 불을 "붙여서" 집들을 사르고, 땅으로 평평히 만들어 버릴 뿐 아니라, 마치 그 위에는 더 이상 집을 짓지 아니하게 되는 것처럼 다른 화재가 불태우는 것 이상으로 "지대를" 살라 버렸다.
2. 그것은 놀라운 파멸이었다(12절). 그것은 세상의 왕들에게 놀라운 일이었다. 그 왕들은 예루살렘을 알고 있거나 또는 알고 싶어하는 이웃 나라의 왕들이었다. 아니 예루살렘은 알고 있거나 듣고 있었던, 또는 예루살렘에 대하여 읽고 있었던 세상에 사는 천하 모든 백성들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들의 적과 "원수들이 예루살렘" 에 사는 것은 "천하 모든 백성들" 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성문으로 들어갈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1) 그들은 예루살렘의 성벽과 성채뿐만 아니라 그 국민의 많은 인구와 힘에 의해서 강하게 요새화되어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견고한 시온성은 난공불락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 그들은 예루살렘을 온 땅의 주가 그 거민들을 독특한 방법으로 소유하고 있는 "크신 왕의 성읍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룩한 성읍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떠한 적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도 그 공격을 헛되게 할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성읍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3) 그들은 예루살렘에 가한 많은 공격이 좌절된 것을 알고 있었다. 산헤립의 실패도 그 증거다. 그러므로 그들은 갈대아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들었을 때 놀랐던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직접적인 섭리에 의해서 된 것이라고 추리하였던 것이다. 적이 예루살렘의 문을 깨뜨리고 들어간 것은 하나님의 위탁에 의한 것이었다.
예루살렘의 파괴 (예레미야 애가 4:13-20)
우리는 여기서 아래 내용을 가진다.
Ⅰ. 하나님이 그들 위에 이 파멸을 가져오게 하고, 그럼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정당화하게 한 그들이 책임진 죄(13,14절). 그것은 "예언자들의 죄와 제사장들의 죄" 때문이다. 백성들도 죄가 없지 않다. 아니다. 그들은 "그것을 좋게 여겼다" (렘 5:31). 그들이 행한 것같이 예언자와 제사장들이 행한 것을 그들이 즐거워한 것이다. 그러나, 그 잘못은 예언자와 제사장들에게 있는 것이다. 그들은 백성들을 더 잘 가르쳤어야만 했고, 꾸짖고 훈계하여야만 했고, 그리고 결국에 올 것을 그들에게 말했어야 했던 것이다. 그들에게 경고하지 않았던 이 파수꾼들의 손에서부터 그들의 피가 요구되어질 것이다. 백성들은 제사장과 예언자들에 비하여 파멸하도록 더 죄에 원숙하지 않았고 더 빨리 그 분량을 채우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책임지워진 특별한 죄는 거짓 예언자와 부패한 제사장들이 그들의 힘을 연결하고 그 가운데(유다) 있는 의인들의 피를 흘리는 것에 합심한 것이다. 그들은 몰록에게 희생을 드리기 위하여 죄 없는 아이들의 피를 흘릴 뿐만 아니라 진리와 참된 종교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는 더 잔인한 우상에게 희생을 드리기 위하여 그들 중에 있는 의로운 사람의 피를 흘렸다. 이것은 여호와가 용서하지 않는 죄이다(왕하 24:4). 그리고, 그것은 최후의 파멸을 예루살렘에 가지고 온 죄이다(약 5:6). "너희가 의로운 자를 저주하고 죽였도다." 마치 그리스도 시대에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대하여 백성들을 격앙시키던 사람들이었던 것같이 제사장과 예언자들은 박해의 주모자이었다. 그들은 다른 방법으로 찬송하기를 주장하였다. 이들은 "거리에서 소경과 같이 방황하는 사람들이다" (14절). 정의의 좁은 길에서 빗나간 그들은 선한 모든 것에 대해서는 소경이고 음행하는 데에는 빨리 보여지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부패한 재판장들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알지 못하고 "그들이 아는 것을 행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행하고 있다" (시 82:5). 그리스도는 부패한 교사들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요" (마 15:14), 그들은 "성도의 순결한 피로써 그 자신들을 더럽혔으므로 사람들은 그들의 옷을 만질수 없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서 싫어하도록 스스로를 만들었기 때문에, 선한 사람들이 죽은 시체를 만지기 싫어하듯 또는 부드러운 사람이 돌아보지 아니하는 죽은자의 피묻은 옷을 만지기를 싫어하는 것같이 그들에게 접촉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예언자와 제사장들이 미움을 받게 만드는 것은 박해하는 영혼들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다.
Ⅱ. 그들의 이웃의 증언은 그들의 죄를 입증하기 위하여, 또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행하심이 정당함을 보이기 위하는 두 가지에 있어서 증거를 제시한다. 죄에 있어서 대단히 뻔뻔스럽게 된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이 자기들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하여 주의하지 않는 것을 자랑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언자를 통하여 유대인들은 사람들이 그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과, 이웃이 그들에 대하여 말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을 가르쳤다(15,16절). 그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사람들이 그들에 대하여 외쳐 이르는 것은 무엇인가? 특히 이방인 중에서 부패한 제사장과 예언자들에 대하여 부르짖는 것은 무엇인가?
1. 그들은 실직적인 불의한 방식 속에 살면서 순결을 가장하는 것을 책망하였다. 그들은(이웃) 그들에게 외치기를 "가라, 부정하다." 그들은 그렇게 엄밀하기 때문에 이방인을 접촉하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떨어져라.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하니라" 했다. 그리스도를 송사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더럽혀지지 아니하도록 재판정에 들어가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너는 하나님이 너를 그들의 손에 넘겨 주실 때 이방인이 너를 접촉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느냐? 네가 도망하여 방황할 때도 너는 그들에게 따로 서 있고, 너를 만지지 말라고 명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깨끗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헛된 일이다." 이 뱀들은 매혹되지 아니할 것이고, 황홀하여지지도 않을 것이다. 아니다. 그들은 "제사장들의 인격을 존중하지도 아니할 것이고," "장로들을 좋아하지도 아니할 것이다."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도 그들에게는 비열한 사람일 것이다.
2. 그들(이웃)은 제사장과 예언자들의 죄를 꾸짖는다. 그리고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향한 것과 진노로 인한 무서운 결과에 대하여 말한다. 그들은(이웃) 그들에게(거짓 예언자, 제사장) 부르짖기를 "가라 부정하다고 한다." 모두 거짓 제사장과 예언자들의 수치를 부르짖고, 하나님을 화나시게 하는 백성이 그 좋은 땅에서 계속 거주하는 것을 하나님은 본래 견디지 못하게 되실 것을 쉽게 예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저들의 "법령과 재판은 의로왔다" 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저들이 "지혜와 지식있는 백성이기를 기대하였다" (신 4:6). 그러나 그들이 저들의 전혀 다른 면을 보았을 때 "가라, 가라고 했다." 그들은 곧 그 땅이 저들의 조상에게 하였던 것같이 저들을 토해낼 운명을 보았다. 그들이 "도망하고 방황하는" 야곱의 흩으심을 보았을 때 저들에게 그것을 말하였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을 나누고" 모든 나라에 "흩으셨다" 했다. 그들이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나 예레미야나 기타 다른 이들과 같은 그들 가운데 있는 경건한 "제사장들을 높이지 아니하였고, 장로들도 대접"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리어 저들이 자기들의 타락한 행실을 저지하기 위하여 돌아 다녔을 때 저들의 그 권위를 멸시하였다. 바로 이방인은 이것이 그들을 파멸시킬 것을 보았던 것이다.
3. 그들(이방인)은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파괴함에 있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은 저들이 자기들의 땅에서 추방됨을 보았을 때 "저희가 다시 거기 거하지 못하리라고 했다." 그들은 마지막 작별을 고하였으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다시 그들을 권고치 아니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 자신이 회복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그들은 오해된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저들이 자기 하나님을 격노케 한 때문에 그들은 아주 버림을 당한 것 외 다른 어떤 것도 기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할 만큼 그들은 대단히 깊이 관찰하였다.
Ⅲ. 그들 자신이 재앙 아래 있도록 된 자포자기. 그들이 이방인 중에서 그들에 관하여 말할 것을 들었으니, 이제는 그들 자신이 자기들에 대하여 하는 말을 들어 보라(17절). "우리가 어떤 의미로는 도움이 없을 것들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끝이 가깝고(18절), 교회와 국가들의 끝, 우리는 이 둘의 파멸의 바로 끝에 있다. 아니 우리의 끝은 왔다. 우리는 철저하게 파멸된다. 운명적인 최후의 시기가 우리의 모든 위로를 난처하게 한다. 우리의 번영의 날은 가득히 채워졌다. 그들은 도가 차고 완성되어졌다." 이렇게 그들의 공포는 주께서 다시 저들을 권고치 아니하시리라는 적들의 희망과 일치된다. 왜냐하면,
1. 낙담한 자들에게로 달아난 피난. 그들은 이 나라 저 나라 강한 동맹국들에게 도움을 구하였다. 그러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헛된 것이 입증되었다. 그들이 기다렸던 원군은 들어오지 않았으며, 적어도 그들이 기대하였던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그들의 눈은 결코 오지 아니하는 자들을 바라봄으로 쇠약하였다. (17절) "그들은 바라보고 바라보았다." 그들은 큰 열심과 인내를 가지고 그들을 돕기로 약속한 나라를 간절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실패하고 그들의 기대는 꺾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이들을 "구원치 못한 나라" 였다. 그들은 갈대아군과 싸우기에는 너무나 약하였으므로 물러가고 말았다. 피조물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시 60:11). 그러나 우리는 눈이 상하기까지 우리의 마음이 상하기까지 그것을 바라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드디어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고 만다.
2. 그들은 박해자들에게로 도망갔고 결국엔 그들에게 붙잡혔다(18절). "그들이 우리의 자취를 엿보니 우리가 거리에 행할 수 없도다." 갈대아군이 그 성읍을 포위하였을 때 그들은 성을 도망할 수 없을 만큼 성벽이 높았기 때문에 거리에 다니는 사람에게 포를 쏘았다. 또한 그들은 화살로 이 곳 저곳에서 이스라엘을 추적하였다. 성이 함락되고 모든 사람이 도망갈 때 그들의 박해자들은 하늘의 독수리가 먹이를 보고 날 때보다도 더 빨랐다(19절). 도망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산 꼭대기에서도 쫓았다. 완전히 피했다고 생각될 때 그들은 퇴각을 차단하고 붙들기 위하여 광야에 매복한 자들에게 붙잡혔다. 왕 자신도 위급할 때에 도피할 수 있는 모든 편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도망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보복이 백성과 함께 그를 추적하기 때문이다(20절). 그리고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가 저희 함정에 빠졌다." 어떤 이들은 이 사람은 전쟁에서 애굽왕에게 죽은 요시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다윗집의 마지막 왕이요, 갈대아 군에게 추적을 당하다가 여리고 평야에서 포로가 된 시드기야로 생각된다(렘 39:5). 그는 주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통치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임명하신 그 족속의 후계자이었다. 유대 백성은 그를 대단히 신뢰하였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저의 그늘 아래서 열국 중에 살던 자로다 하던 자이다." 여고냐가 포로된 이후의 남은 자들은 시드기야가 정부의 보호 밑에서 다시 뿌리박고, 열매를 맺으리라고 약속을 하였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자기들이 그와 같이 쇠약해졌기 때문에 이방인을 통치할 생각은 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들 중에서 살기 위하여 모욕을 당하지 아니하고 이방인들로 말미암아 갈기갈기 찢어지지는 않기 위하여 계락을 쓸 수가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모든 작은 희망을 붙잡으려는 관심뿐 아니라 그 희망이 그들을 회복시킬 것이라고 생각하는 관심들이 없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예루살렘은 사회 불안에 기생하는 소비병으로 죽어갔다. 그가 금방에라도 멸망할 것 같은때까지도 희망적인 징조의 모습을 만들고 그 위에 그가 회복될 것이라는 희망을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왔는가? "하루 밤에 시들어버린" 요나의 박넝쿨과 같이 되어져 버렸다.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가 함정에 빠졌다." 마치 그가 전리품으로 먹혀지는 짐승일 뿐이었던 것같이 되었다.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존재이므로 범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던 자를 그들은 그렇게 하찮게 여겼다. 우리가 어느 피조물을 우리의 콧김으로 하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 약속을 하였을 때 그 호흡을 정지시키고, 그것에게 기대하였을 때 우리에게서의 생명을 빼앗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었다는 것을 주의하자.
시온의 위로 (예레미야 애가 4:21,22)
다윗의 애가 시(詩)는 일반적으로 어떤 위로의 말들로 결론을 맺는다. 그것은 죽엄에서 생명, 어둠에서 빛이 비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장에서의 애가도 그렇다. 하나님의 백성은 지금 큰 재난속에 있다. 그들의 모든 양상이 슬프고, 그들의 전망이 모두 지독히 무섭다. 그들의 악한 이웃인 에돔족은 그들에게 대하여 모욕을 가하고, 그들의 파괴자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노하게 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그들의 형제 야곱에 대하여 그들의 난폭함이 그러하였을 때 것같이(욥 1:10) 예루살렘에 대한 그들의 심술이 이러하였다. 그들은 "훼파하라, 훼파하라(시 137:7)고 외쳤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용기를 붇돋우기 위한 예언이 여기에 있다.
Ⅰ. 시온의 형벌의 끝이 올 것이다(22절). 오! 시온의 딸아, "네 죄악의 형벌이 다 하였다." 받아야 할 형벌의 채워짐을 말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벌을 파괴하기 위하여 설계하시고 결심하신 것이 채워진 것을 말함이다. 하나님의 정의를 영화롭게 하고 그들의 죄를 제거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죄악이 사함을 입었느니라(사 40:2). "그는 너를 포로로 더 오래 두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도 읽혀질 수도 있다. 그는 더 이상 너를 포로가 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너의 포로를 돌이킬 것이며, 너를 영광스럽게 해방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형벌을 그들에 보내어진 목적의 일을 다 성취할 때까지만 계속되는 것임을 주의하자.
Ⅱ. 에돔의 승리에 종말이 올 것이다. 그것을 반어적으로(비꼬아서) 말하고 있다(21절). "처녀 에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려므나." "고통 속에 있는 시온에 대하여 모욕을 계속하라. 너의 죄악의 분량을 채우기까지 그렇게 하라. 네 이웃의 공통된 운명으로부터 네가 지금 머무르게 되어 있는 것을 기뻐하라." 이것은 솔로몬이 방종한 쾌락을 즐기는 청년에 대한 책망과 같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와 계산하러 오실 때에 할 수 있으면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멀지 않아 너와 계산하실 것이다. 이제 예루살렘이 깊이 마시고 있는 떨리는 잔이 네게로 돌아갈 것이다. 그것은 금주하겠다는 맹세가 너의 몫이 될 때까지 돌고 돌 것이다. 이것은 비참한 가운데 있는 어떠한 사람에 대해서도 경멸하지 말아야 할 좋은 이유이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도 몸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들의 경우가 언제 곧 우리의 것이 될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재난 가운데 있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자들은 그런 재난들의 도구가 된 자들과 더불어 재난의 후원자들로서 그리고 교사자들로서 파멸될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에돔의 파멸은 이 예언자가 예언하였다(렘 1:7). 하나님의 백성은 그런 전망을 가지고, 현재의 무례하고 오만한 저들에 대하여 자신들을 고무하여야 할 것이다.
1. 그것은 치욕적인 파멸인 것이다. 네가 마실 "잔이 네게 이를지니 네가 취하리라." 아주 얼이 빠지면 어찌할 바를 몰라서 너의 모든 계획이 흔들리고 너의 모든 기업이 넘어지고, 그 다음에는 노아가 취하였을 때 같이 "네가 벌거벗으리라." 그리고 모욕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비웃는 자들은 반드시 그들 자신이 그것을 당하게 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언젠가는 비웃음을 받게 될 것이다.
2. 그것은 정의로운 파멸일 것이다. 하나님은 너의 죄악을 방문하며, 너의 죄를 찾으실 것이다. 그는 그 죄들을 벌하실 것이다. 거기에서 그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죄들을 발견하실 것이며 들어나게 하실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 대하여 이와 같이 행하시는데 대한 정당한 이유를 가지시게 되는 것이다. 죄에 대한 형벌이 정확하게 그 목적에 부응할 것이므로, 그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리라. 때때로 하나님은 죄악을 그렇게 심판하시기 때문에 달리는 자도 그 형벌 속에서 죄상을 발견할 것이다. 조만간 죄는 징벌되고, 발견된다. 어둠 속에 숨긴 모든 일이 드러나는 것이다. cafe.daum.net/correcttheology
할렐루야!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Dear friends, do not believe every spirit, but test the spirits to see whether they are from God, because many false prophets have gone out into the world. This is how you can recognize the Spirit of God: Every spirit that acknowledges that Jesus Christ has come in the flesh is from God, but every spirit that does not acknowledge Jesus is not from God. This is the spirit of the antichrist, which you have heard is coming and even now is already in the world. _ 요한일서 1 John 4:1-3
† 예레미야애가 4장
[SYNOPSIS]
영광스러웠던 지난날과 치욕스런 현실을 날카롭게 대조시키고 있다. 존귀하던 그들의 신분이 기근과 재앙으로 인하여 이제는 굶주림과 천대를 받는 비참한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언제나 헛된 구원에만 집착해 있는 유다 백성들은 포위된 상황에서도 애굽 인들만 바라보았으며, 세상 왕의 그늘을 신뢰하였다. 그들은 구원이 오로지 하나님께로만 말미암는다는 진리를 최후 순간까지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CONTENTS]
성전과 그 장식품들은 완전 초토화(焦土化)되었으니 이는 유다에게 임한 현재의 환난이 범죄에 따른 하나님의 주권적 심판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멸망 후의 예루살렘의 참혹하기만 한 광경에 예레미야는 가슴을 에는 듯한 비통함에 젖는다.
“1~2.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는고? 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 어찌 그리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고?”
“3~5.”
- 저 광야의 들개조차도 제 새끼에게는 젖을 물려 빨리건만, 처녀 내 백성은 아주 몰인정하여 사막의 타조처럼 제 새끼를 조금도 돌보지 않는구나. 보라, 젖먹이들이 목이 말라 혀가 그 입천장에 착 달라붙고, 아이들이 배가 고파 먹을 것을 구걸하여도 누구 하나 거들떠보는 이가 없구나. 한때는 진수성찬을 즐기던 자들이 이제는 길거리에 내버려져 외롭게 죽어가고, 한때는 자주색 고운 옷(붉은 옷)을 입고 곱게 자라던 자들이 이제는 쓰레기더미 속에서 나뒹굴고 있구나.
자신이 낳은 알을 잊어버리고 팽개쳐 두는 새 ‘타조’는 자식에게 무정한 부모를 상징하는데, 부모들이 그 자녀를 내팽개치고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포위된 예루살렘 성의 기근(饑饉)이 극심했다는 것이며, ‘붉은 옷’은 왕이나 귀족들이 입던 고급 옷을 뜻하는 것으로(삿 8:26; 에 8:15), 최고위층의 지도자들까지도 예루살렘 백성들이 당하는 재앙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6. 전에,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아니하였는데도 순식간에 무너지더니, 이제는 딸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무겁도다.”
유다의 죄와 심판이 소돔의 그것보다 더 크고 심각하다는 점을 주지시키고 있는데, 소돔은 음란과 더러움으로 인해 멸망당한 존재의 대명사와도 같은 도시이다(창 19:1~28; 유 1:7).
“7~10.”
- 전에는 이 예루살렘 귀족들의 살결이 눈보다 더 깨끗하였고, 우유보다도 더 희었다. 그들의 혈색은 산호보다 더 붉었고, 그들의 외모는 반짝반짝 광을 낸 사파이어 같았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얼굴은 숯덩이보다 더 시꺼멓게 변했고, 그들의 살갗은 뼈에 바짝 달라붙어 마른 막대기같이 되어 버렸으니, 길거리에서 그들을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칼에 맞아 당장에 죽는 것이 굶주려 천천히 죽는 것보다 더 나으니, 이 땅의 소산물이 모두 끊어졌으므로 서서히 배곯아 죽는 것이 훨씬 더 비참하기 때문이다. 이 도성의 굶주림이 얼마나 처참한지! 처녀 내 백성이 멸망할 때에 심지어 자애로운 어머니들조차 먹을 것이 없어 자기 손으로 자기 자녀를 삶아 음식물로 삼았도다.
극한 기아(飢餓) 상태에 빠져 온갖 괴로움을 당하며 서서히 죽어가는 광경과 심지어 자기 자녀를 삶아 먹는 광적이 모습이 갑작스레 멸망한 소돔이 차라리 유다의 형편보다는 나음을 극명(克明)하게 언급하고 있다.
심판의 그날에, 여호와께서는 크게 화를 내시어 맹렬한 진노의 불길을 쏟아 부어 시온에 그 불길을 사정없이 쏟아 부으시니, 그 불길이 시온의 기초까지 다 태워 버린다.
“12~16.”
- 내 백성의 대적들과 원수들이 예루살렘 성문 안으로 버젓이 들어갈 수 있을 줄이야, 그 누군들 알았으랴! 세상의 뭇 왕들이, 온 세상의 모든 백성들이 어찌 그 사실을 믿을 수 있었으랴! 결국 그런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은, 이 백성의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이 주를 거슬러 죄를 지었기 때문이니, 곧 그들이 이 도성 안에서 의로운 자들의 피를 흘리게 하였도다.
그들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을 보라! 이 백성의 인도자가 된 그들이 눈 먼 사람처럼 길거리를 이리저리 헤매고 다님에도 그들의 옷은 의인의 억울한 피로 온통 더럽혀졌으므로, 사람이 그들의 옷을 만질 수 없도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크게 외치기를 “부정한 자들이여, 저리 가라! 얼른 저리 비켜라! 나를 만지지 말라!” 하였도다. 그러므로 그들이 먼 땅으로 도망쳐서 뭇 민족들 가운데 이리저리 떠돌며 방황할 때, 이방인들조차 그들에게 말하기를 “떠나가라, 너희가 다시는 이곳에서 살 수 없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크게 진노하시어 그들을 뭇 민족들 가운데 흩어버리시고 다시는 그들을 돌아보지 않으시니, 세상 도처의 이방인들이 제사장들을 멸시하여 그들을 대우하지도 않고, 장로들을 업신여겨 그들을 대접하지도 아니 하였음이로다.
재앙의 원인이 나타나 있다. 여기서는 특별히,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의 죄악을 지적하고 있다. 선지자들의 죄란 다가오는 하나님의 진노를 거짓 평안으로 바꾸어 전파한 것이고, 제사장들의 죄란 권력과 야합하여 무고한 자들의 피를 흘린 것이다. 그래서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이방인들에게 조롱을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때늦은 후회 속에 유다를 도와줄 능력이 없는 애굽과 동맹을 맺고 원조를 요청한 사실에 절치부심(切齒腐心)한다.
“17~19.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의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 그들이 우리의 걸음을 엿보니 우리가 거리마다 다 다닐 수 없음이여, 우리의 끝이 가깝고 우리의 날들이 다하였으며 우리의 종말이 이르렀도다. 우리를 뒤쫓는 자들이 하늘의 독수리들보다 빠름이여, 산 꼭대기까지도 뒤쫓으며 광야에서도 우리를 잡으려고 매복하였도다.”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에 침입하여 유다 백성을 감시, 속박(束縛)함으로 인해 백성들이 거리에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된 상황을 언급하고 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광야나 산골짜기로 도주해 보았자 곧 추적당하고 만다는 진퇴양난의 절박한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20.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가 그들의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그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의 그늘 아래에서 이방인들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우리의 콧김’ 이라 함은 호흡, 생명이라는 뜻의 유다 왕을 지칭함인데, 이는 그들이 유다 백성들에게 생명과 같이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말해 준다. 즉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의 왕권을 충실히 대리할 때에 실로 생명과 같이 중요한 존재가 될 수 있었지만, 대다수의 열왕들은 그러지 못하였다.
유다의 멸망을 조롱하던 에돔의 멸망을 선포함으로써 유다 백성을 위로하며, 지금껏 절망적인 현실에 절규하던 선지자의 목소리는 극적으로 희망의 목소리로 바뀐다. 공허한 희망은 사라졌지만 엄연한 현실에 입각하여 새롭게 제시되는 참된 소망과 비전이 제시된다.
“21~22. 우스 땅에 사는 딸 에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라. 잔이 네게도 이를지니 네가 취하여 벌거벗으리라. 딸 시온아! 네 죄악의 형벌이 다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아니하게 하시리로다. 딸 에돔아! 주께서 네 죄악을 벌하시며 네 허물을 드러내시리로다.” Amen! .https://sysun21c.blog.me/22040272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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