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예언과 백성의 기도(애4,5장)
1. 존귀하던 시온이 비참하게 됨(애4장)
1) 잘못된 예언과 제사
2)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백성의 결과
2. 유다의 범죄와 회개(애5:1-7)
1) 죄악을 고백하고 회개함
2) 민족의 죄악을 담당하는 자
3. 바벨론의 통치로 인한 고난(애5:8-22)
1) 선지자의 자세와 간구
2) 고난 중에 간구함
1.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의 죄악목록
1) 제사장들의 죄목록
2) 선지자들의 죄목록
2. 기업
3.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
1) 약속의 구체적인 의미
2) 회복에 담긴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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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예언과 백성의 기도(애4,5장)
본문에서는 예루살렘 성의 비참한 모습을 말하면서 거짓 선지자와 제사장의 죄로 인하여 유다가 망하게 된 것을 피력하고 있다. 또한 유다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앗수르와 애굽을 의지하여 살고자 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마지막으로 유다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이켜서 하나님께서 다시 새롭게 하실 것을 간구함으로 예레미야애가의 끝을 맺고 있다.
1. 존귀하던 시온이 비참하게 됨(애4장)
선지자 예레미야는 과거에는 유다 민족을 정금에 비했었는데, 지금은 토기장이의 질항아리에 비유했다. 그 의미는 무엇인가? 또한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의 죄로 인하여 유다 민족이 망했다고 피력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유다 민족이 헛되어 도움을 바랐다고 했는데, 무엇을 바랐는가?
1) 잘못된 예언과 제사
다윗 왕과 솔로몬 왕 시대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영화를 기억하면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 민족을 정금에 비교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와 잘못된 제사를 행하고 거짓 선지자와 다른 나라들을 의지함으로써 크게 범죄하게 되자 그 결과로 바벨론에 의하여 폐허가 되어 비천하게 여김을 받는 유다 민족을 질항아리에 비교하였다. 또한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묵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짓을 선포하였고, 제사장은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제사드리지 아니하고, 진짜 선지자들의 말씀을 듣지 않고 도리어 이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죄악을 범하였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와 제사장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유다민족을 벌하셨다. 또한 유다 민족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앗수르와 애굽을 의지함으로 헛되이 도움을 바랐다.
2)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백성의 결과
통일 왕국 시대와 하나님을 의지한 유다 열왕의 시대에는 하나님의 긍휼로 인하여 정금에 비교하리 만큼 큰 영화와 권세를 누렷다. 반면 이방 민족과 우상을 의지할 때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해서 패망하는 결과를 낳았다.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나아가는 자에게 하나님은 큰 긍휼과 사랑으로 그 사람을 높이신다. 그리고 교만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술수를 쓰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올무에 자신이 빠지게 된다. 따라서 믿는 자들은 모든 일에 하나님이 앞서 행하시게 하는 것이 지혜이다.
2. 유다의 범죄와 회개(애5:1-7)
선지자 예레미야는 당시의 예루살렘의 정황을 보면서 하나님에게 우리의 수욕을 감찰해 달라고 했는데, 그 수욕은 어떤 것인가? 또한 예레미야가 유다를 대신하여 회개한 세 가지 사항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예레미야는 유다의 죄악을 어떻게 담당했는가?
1) 죄악을 고백하고 회개함
바벨론에게 점령당한 유다의 정황은 ① 기업이 바벨론에게 돌아갔다. ② 집들을 빼앗겼다.③ 아비가 없는 외로운 자식이 되었다. ④ 어미들은 과부가 되었다. ⑤ 은을 주어야만 물을 먹을 수 있었다. ⑥ 값을 주고 산에 있는 나무를 가져와야 했다. ⑦ 원수가 일을 하지 못하게 목을 죄었다. ⑧ 곤비하여서 쉴 수도 없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가 이렇게 된 것이 죄악으로 인함을 알고 세 가지의 회개 기도를 드렸다. 첫째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것을 회개하였고, 둘째는 애굽과 앗수르와 동맹한 것을 회개하였으며, 셋째는 애굽과 앗수르가 도와주고 먹을 것을 주리라고 여겼던 것을 회개하였다. 이처럼 선지자 예레미야는 민족의 죄악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회개함으로 그 죄악을 담당하였다.
2) 민족의 죄악을 담당하는 자
선지자 예레미야는 민족의 죄악을 낱낱이 회개함으로써 그 민족의 죄악을 담당하였다. 그는 하나님이 그 백성을 치셨으나 싸매실 것을 기대하여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다. 우리도 향락, 범죄 우상으로 가득 찬 이 세대의 민족들을 위해 간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3. 바벨론의 통치로 인한 고난(애5:8-22)
선지자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통치로 인하여 유다가 당하는 극한 어려움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어떤 것을 기록하였는가? 그리고 이 고난 속에서 선지자 예레미야의 상태는 어떠했는가? 마지막으로 선지자는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했는가?
1) 선지자의 자세와 간구
바벨론의 통치를 받게 된 유다는 ① 종들을 세워 유다를 관할하게 하였고, ② 광야에는 도적과 악도가 성행하여 죽기를 각오하고 먹을 것을 구해야 했으며, ③ 굶주림이 극심했고, ④ 부녀들과 처녀들은 욕보임을 당했으며, ⑤ 장로들이 존경을 받지 못하고, ⑥ 젊은 사람들은 끌려가 강제노동을 당했으며, ⑦ 아이들은 섶을 해오다가 힘이 없어 엎어지고, ⑧ 노인은 마음 놓고 성문에 앉지 못하며, ⑨ 유다 민족이 몰락하여 면류관이 땅에 떨어졌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태에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을 의지하여 유다 백성을 돌이키시기를 간구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 뜻을 돌이키셨고, 유다 백성은 바벨론으로 끌려간지 7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2) 고난 중에 간구함
하나님은 징계를 즐거워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서 음행하는 자에게는 징계를 주심으로 다시 돌아오게 만드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채찍이 있을 때는 더욱 하나님께 달려나가는 것이 지혜이다. 자신에게 달려오는 자식을 더 때리는 부모가 없듯이 하나님은 자신에게 달려오는 자식을 품에 안아 주신다. 그리고 고난을 이미 받았으면 겸손하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세를 지녀야 할 것이다.
유다 민족은 거짓 선지자들의 잘못된 예언과 제사장들의 잘못된 예배 그리고 애굽과 앗수르를 의지함으로 하나님께 크게 범죄하였다. 그 결과로 하나님은 바벨론을 들어 유다 민족을 징벌하셨다. 하나님은 징벌 중에도 끊임없이 유다로 하여금 회개하여 하나님만을 섬기고 공의를 행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패역한 유다는 끝까지 하나님의 요청을 거부함으로 열방에 흩어지게 되었다. 흩어진 유다는 다시금 하나님께 돌아왔고, 하나님은 이들을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하사 성전을 재검케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저버리는 범죄를 저지르지 말아야 할 것이며, 또한 범죄하였을 때 빨리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징계받을 때는 겸손하게 낮아져서 묵묵히 참아 기다리는 것이 지혜이다.
1.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의 죄악목록
1) 제사장들의 죄목록
제사장의 타락은 솔로몬 이후에 왕국이 분열되면서 우상 숭배가 만연되어 감에 따라 두드러지게 일어났다. 제사장이나 선지자는 민족의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의 타락은 하나님의 심판의 주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들이 타락한 모습을 보면,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언약 법전의 의무를 충실하게 실행하지 못했음을 인지할 수 있다(민18:1-32). 그들이 지도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저지른 죄악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자기의 권력을 의지하고 백성을 다스렸다.
②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을 백성들에게 가르치지 아니했다(호4:6).
③ 하나님을 버리고 음란을 조장했다(호4:10).
④ 부도덕하고 타락한 예배 행위를 서슴없이 일삼았다(호4:11-14; 말1:6-14).
⑤ 삯을 받고서 백성들을 가르쳤다(미3:11).
⑥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버리고 백성들이 죄를 더 짓기를 바랐다(호4:6,8)
2) 선지자들의 죄목록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한 두드러진 죄악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백성들에게 평안만을 예언하였다(렘23:17).
② 거짓을 믿게 하였다(렘28:25).
③ 백성들에게 거짓으로 예언하였다(렘5:31;렘14:4;렘23:2,25;렘27:10,15).
④ 백성들에게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예언하였다(렘14:1).
⑤ 허탄한 묵시를 보았다(겔13:6).
⑥ 백성들에게 거짓된 점괘를 말하였다. 선지자들의 이와 같은 죄는 하나님의 심판의 근본 원인이 되었다(애4:13). 그래서 하나님은 열방의 도구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정화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2. 기업
기업의 기본적인 의미는 제비뽑기에서의 제비로, '몫, 상속'을 의미한다. 신약에서도 이 단어의 첫 번째 의미는 제비이지만 이 단어의 중요한 의미는 할당된 몫이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129회 정도 나오고, 족장들에게 주어진 가나안 땅을 소유하리라는 약속과 함께 그 의미를 굳혔다. 이 약속은 모세오경 부터 시작하여 예언서들에 이르기까지 소개되어 있다. 따라서 기업은 할당과 그것에 근거한 소유를 가리키며, 기본적인 개념은 땅을 소유한다는 점이다(마2:4;렘7:17).
구약법에서 땅은 가족에게 속한 것이지 개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었다. 장남이 유산의 반을 물려받았고, 그외 다른 아들들이 나머지 반을 소유하였다. 구약에서 땅에 대한 약속 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되었다(신32:8,9). 반면 레위인의 기업은 하나님 자신이시다. 신약에서 이 개념은 모든 것이 참된 상속인인 예수께로 좁혀진다(막12:7; 히7:12).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양자가 됨으로 하나님의 기업을 물려받으며(롬8:17), 그 기업은 하나님 나라(마25:34), 땅(마5:5), 구원(히1:14), 영원한 생명(고전15:15)이다. 히1:2은 만물의 상속자로 성자가 지목되어 있다. 이 비유에서 상속은 실제적인 소유를 가리키지 아니한다. 부활하신 주님만이 그것을 소유하신다(마28:18). 이 약속은 예수님이 오실 때에야 완전하게 성취될 것이다. 이 기업은 하늘에 간직되어 있다(벧전1:4).
그러므로 우리가 그 기업을 소유할 때까지 성령께서 그 기업에 대한 보증이 되신다(엡1:14). 이와 같이 기업에 대한 신학적 의미는 구약에서의 기본적인 개념과 구별되어 있지 아니하고 숨겨져 있다. 영적 개념이 확연하게 드러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3.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
1) 약속의 구체적인 의미
예레미야의 예언 활동 중에서 가장 소망을 주었던 약속은 이스라엘의 절망적인 상태에서 다시 회복시켜 주겠다는 약속이다(렘29:10-14).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약속은 예레미야 30.33장까지 연속적으로 나타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의 핵심은 구체적으로 회복이다.
2) 회복에 담긴 내용
① 포로귀환(렘29:10): 태평과 안락을 줌(렘3:9,10).
② 파괴된 성읍과 궁궐이 재건됨(렘30:18).
③ 새로운 통치자를 보내리라(렘30:21).
④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함(렘31:7-9).
⑤ 새 언약 체결(렘31:31-34; 렘32:38-41).
⑥ 다윗의 왕권 회복 약속(렘33:14-16): 의로운 가지의 탄생.
⑦ 제사장직 회복(렘33:17,18): 메시야를 통한 회복
이와 같은 회복의 내용들은 하나님의 변치 않는 굳은 의지의 표명이며(렘30:3,4), 그 내용은 미래에 있을 영적인 축복이기도 하다. < 갓피플(GODpeople) 지식자료실 성경총론 > 자료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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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애가 5장 주석
성 경: [애5:1]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본장도 히브리어 알파벱의 수효인 스물 두 개의 절로 구성되어 있으나, 알파벱 순서대로 배열되는 답관체의 형식을 띠지는 않는다. 현재 처한 비참한 상황을 토로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호소하면서 그 감정의 북받침이 극에 달한 나머지 시의 정형(定型)을 제대로 지킬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Clarke). '기억하시고'(*, 제코르)라는 말은 단순한 회고의 차원을 넘어 구체적인 결과를 낳는 행동을 취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따라서 이는 여호와의 적극적 개입을 촉구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겠다(Ellison).
성 경: [애5:2]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ꃨ 우리 기업이 외인에게 - '기업'으로 번역된 '나할라'(*)는 '점유', '세습 재산'(patrimony, NEB). '유산'(inheritance, KJV, NIV, RSV)등의 뜻을 지니며, 여기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 할당받은 가나안 땅을 가리킨다. 이 땅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약속의 땅으로 주어져서 여호수아 시대에 비로소 정복되었다(창 12:1; 13:14-17; 수21:43-45).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범죄함으로써 이 축복의 땅을 상실하였던 것이다.
성 경: [애5:3]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ꃨ 아비 없는 외로운 자식...과부 - 성경에서 고아와 과부는 의지할 길 없는 사회적 약자로서 특별한 보살핌의 대상으로 자주 언급된다(출 22:22; 신 24:17; 26:12; 잠 23:10; 사 1:17; 약1:27). 본절은 기근과 살상으로 인해 유다 내에 실제로 고아와 과부가 급증한 사실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유다의 버림받은 상황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을 갈망하는 호소이기도 하다.
성 경: [애5:4]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물'과 '섶'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메메누'(*)와 '에체누'(*)에는 모두 강조의 의미를 나타내는 대명사 접미어 '누'(*)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를 정확하게 옮기면, '우리의 물'과 '우리의 섶'이 된다(Calvin). 아마도 본절은 바벨론의 강점(强占)하에서 유다에 남은 백성들은 심지어 천연 식수마저 대가를 지불하고 사용해야 할 정도로 과중한 세금에 시달렸음을 뜻할 것이다(Clarke). 왕하 24:14; 25:12; 렘 39:10등에 의하면, 예루살렘 함락이후 유다에 남은 자들은 빈천한 자들이 주종을 이루었는데, 그들은 유다 땅을 기껏 경작해 보았자 바벨론 제국에서 상납해야 하는 식민지 백성의 설움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성 경: [애5:5]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ꃨ 우리를 쫓는 자는 우리 목을 눌렀사오니(*, 알 차와레누 니르다페누) - 문자적으로는 '우리는 우리의 목을 추적당했다'이다. 혹자는 전치사 '알'(*)을 '멍에'를 뜻하는 '올'(*)로 읽기도 한다(Henderson Lowth). 그러나 굳이 맛소라 사본(M.T)을 변형시키지 않아도 동일한 의미로 이해 가능하다. 유다 백성은 마치 멍에 메기를 거부하는 완고한 짐승처럼 하나님께 대해 목을 곧게 할 결과(출 32:9), 이방인에 의해 멍에로 메어진 꼴이 되고만 것이다. 한편, 본절은 항복한 대적의 목에다 발을 얹었던 승리자의 모습과 관련하여 해석되기도 한다(수 10:24; 사51:23 참조. Harrison).
성 경: [애5:6]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앗수르 사람'에 관한 언급을 고려하여 본절을 7절과 더불어 '열조의 죄악'으로 해석하려는 견해도 제시된다(Ellison). 이러한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은 호 5:13;7:11;12:1등의 성구를 그 전거(典據)의 하나로 삼는다. 그러나 문맥상 본절은 예루살렘 함락 이후 생존을 위한 자구책을 구하느라고 우왕 좌왕하는 유다 백성에 대한 묘사로 이해되는 것이 자연스럽다(Clarke, Harrison). 앗수르는 바벨론에 의해 패망했지만, 바벨론의 지배 속에서도 비교적 자유롭고 풍요한 삶을 이어갔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유화정책은 페르시아 통치 시대 때 더욱 돋보였다(스 6:22 참조).
ꃨ 악수하고(*, 나타누 야드) - 문자적으로는 '우리가 손을 주었다'는 뜻이다. 이는 단순한 우정의 의미에서 주고 받는 악수보다는 주종(主從)관계를 밝히는 어떤 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암시한다(Hillers).
성 경: [애5:7]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ꃨ 우리는 그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 이는 열조의 범죄로 말미암아 유다의 국운(國運)이 점점 위태해져 갔고 그들의 악영향을 답습한 후손들의 범죄로 인해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 가득 차게 되었음을 의미한다(Clarke). 궁극적으로 죄에 대한 심판은 각 개인의 행위에 따라 주어진다는 사실은 겔 18:1 이하에서 강변되고 있다.
성 경: [애5:8]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ꃨ 종들이 우리를 관할함이여 - '종들'이란 바벨론의 하급 관리들을 가리킨다. 유다는 자국의 왕을 모시지 못하고 대신 이들의 압제와 간섭에 시달려야 했으며, 아무리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탄원할 법정마저 없었다(Ellison).
성 경: [애5:9]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ꃨ 광야에는 칼이 있으므로 - '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레브'(*)는 '가뭄'이라는 뜻도 지닌다. 대부분의 영역본들과 한글 개역성경, 탈굼역(Ta rg um) 그리고 블레이니(Blayney). 핸더슨(Henderson)같은 주경 학자들은 '칼'로 번역하여, 광야 지대로부터 습격해 들어와 약탈을 일삼았던 도적들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광야'(*, 미드바르)란 주로 사막을 뜻하며 다음 절에서도 기근에 관한 언급이 나오는 것으로 볼 때, 본절은 '사막에는 기근이 있으므로'라고 번역되어도 무방하겠다(Calvin).
성 경: [애5:10]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극심한 영양 실조 현상으로 인해 가죽만 남은 피부가 거무틱틱하게 수척해진 모습을, 검댕과 열기에 의해 계속 찌그러들고 검게 변한 가마솥에다 비유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표현은 4:8; 욥 30:30에도 나온다.
성 경: [애5:11]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바벨론 군사들에 의해 유다의 여자들이 무자비하게 겁탈당한 치욕적인 사실이 언급된다. 이는 모세와(신 28:30, 32) 예레미야(렘 6:12)등에 의해서도 예언된 바로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영적 순결성을 거부했던 백성들에게 임한 심판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특히 시온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곳으로 자주 언급되는 바(시 78:68; 사 8:18) 본절의 비극상과 수치스러움을 더욱 부각시키는 말이다. '욕보였나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나'(*)는 '낮추다', '강탈하다'는 뜻이며 여기서는 강제로 겁탈한 것을 나타낸다.
성 경: [애5:12]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ꃨ 방백들의 손이 매어 달리며 - 본 구절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이다. (1)갈대아인들에 의해 자행되었던 극형의 하나로서, 손을 갈고리에 묶어 탈진하여 죽을 때까지 벽에 달아 놓은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Clarke). (2)방백들로부터 숨겨놓은 재물을 찾아낼 목적으로 가했던 고문의 일종으로 보는 견해. (3)죽은 이의 시신을 수치스럽게 만들기 위해 내어 걸었던 것을 가리킨다는 견해(Ellison). (4)방백들 스스로 자학하거나 자살을 기도한 것에 대한 묘사라고 보는 해석(Calvin). 이중 어느 것이 정확히 옳은지를 선택적으로 지지하기란 힘들다. 다만 다소 완곡한 투로 언급되는 본절 하반절과 연관성을 고려할 때, 어떤 목적에서 가해졌던 고문에 관한 언급이 아닌가 생각한다.
성 경: [애5:13]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ꃨ 소년들이 맷돌을 지오며 - '소년'으로 번역된 '바후르'(*)는 '선택된 자' 혹은 '젊은이'를 뜻한다. 군사로 뽑힐 정도의 건장한 젊은이들이 주로 여자(노예)들의 일로 여겨졌던 맷돌질이나 하게 된다는 뜻이다(Clarke, Ellison). 한편, 벌게이트역(Vulgate)은 본 구절을 '젊은이들이 성적(性的)으로 문란해졌다'라고 옮기는데, 이는 '맷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혼'(*)을 '가루를 빻다'는 뜻과 함께 '첩이 된다'는 뜻의 속어로도 쓰이는 '타한'(*)으로 읽은 데서 연유한 번역이다. 그러나 본절 하반절과의 평행을 고려하건대 그것은 무리한 해석이라 하겠다(Hillers).
성 경: [애5:14, 15]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하나님이 정해주신 법도에 따라 살아가는 모든 시민 질서가 파괴되었으며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끊겨버린 서글픈 현실을 토로하는 내용이다.
ꃨ 노인은 다시 성문에 앉지 못하며 - 장로들이나 재판관들이 재판을 주재하던 성문도 이제 폐허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백성들은 공의로운 율법에 따른 재판도 받지 못하고 바벨론에서 파견된 관리들에 의해 제멋대로 결정되는 판단에 아무 말없이 굴복해야 했다.
성 경: [애5:16]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면류관'(*, 아타라)은 왕관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축제나 결혼식과 같은 즐거운 잔치석상에서도 썼으며 영광과 영예를 상징하기도 했다(욥 19:9; 사 28:1, 3, Calvin, Hillers). 따라서 면류관이 떨어졌다는 말은 대단히 폭넓은 의미를 시사한다. 첫째로, 이는 유다가 민족적 특권과 위엄을 상실하고 노예국으로 전락했다는 의미이다(Harrison). 둘째로는, 모든 기쁨의 축제가 유다 땅에서 사라졌다는 의미이다(Clarke). 셋째로는, 신정(神政) 왕국 제도나 제사장 제도와 같은 유다 민족 고유의 위대한 유산이 멸절되었다는 의미이다(Calvin).
ꃨ 우리의 범죄함을 인함이니이다 - 지금까지 당면한 재난에 대해 절규한 것이 단순히 불평 불만을 토로하기 위함이 아니라 민족의 죄악을 통렬하게 고백하는데에 주요 목적을 두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결론적인 내용이다. 이러한 죄의 고백과 회개가 있을 때, 비로소 구원의 호소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확신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성 경: [애5:17, 18]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포로의 참상에 대한 비탄]
당면한 모든 재난이 범죄로 말미암았음을 고백한 후, 선지자는 그 범죄의 결말을 '이러므로'(*, 알 제)라고 다시금 진술한다. 특히 여기서는 수많은 재난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비극이 지적되고 있는데, 그것은 곧 시온의 황폐함이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임재 장소로서 거룩히 구별되어졌던 시온이 들짐승의 거주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언약 백성에게 있어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었다(Calvin). 여우(*, 슈알)는 팔레스틴지역에 흔한 짐승이며(삿 15:4), 야생 짐승이 거주하는 것을 황폐함의 이미지로 사용하는 예는 히브리인들에게 익숙했다(Clarke).
성 경: [애5:19]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회복을 비는 마지막 간구]
ꃨ 여호와여...세세에 미치나이다 - 저자는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불변하심에 근거하여 미래의 구원을 호소하며 밝은 소망을 피력하고 있다. 암울한 현실을 볼 때는 절망의 탄식밖에 나오지 않지만 세상 만물과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새 힘을 얻고 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一向)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성 경: [애5:20]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회복을 비는 마지막 간구]
'잊으시오며'(*, 티쉬카헤누)와 '버리시나이까'(*, 타아즈베누)의 두 동사는 모두 미완료형으로서, 하나님께 잊혀지거나 버림받았다고는 결코 믿을 수 없었던 저자의 신앙의 일면을 보여준다.
성 경: [애5:21]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회복을 비는 마지막 간구]
본절은 하나님이 아직도 언약 백성을 위한 주권적인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고 하는 확신속에서 하나님과의 화해와 민족의 회복을 바라는 저자의 열망을 표현한다(Harrison). 특히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이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회개도 가능하다는 놀라운 자각을 보여준다(렘 31:18, 33, 34; 겔 36:26, 27). 어떤 점에서 이는 신약의 중생(regeneration) 교회의 일면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Ellison).
성 경: [애5:22]
주제1: [예레미야의 마지막 기도]
주제2: [회복을 비는 마지막 간구]
히브리어 원문상 본절을 시작하는 말인 '키 임'(*)에 대한 해석은 갖가지이다.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영역 성경들에서 잘 드러나는데, KJV는 이를 역접 접속사(dut)로 옮겼고 NIV는 양보의 접속사(unless)로 해석했다. 그런가 하면 RSV는 이를 명령문 다음의 or로 보고 본절을 의문문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쨌든 본절이 유다의 비참한 현재 상황을 묘사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부정적이고 불행한 상황에 대한 묘사로 끝맺는 예는 사 66:24; 말 4:6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한편, 본절이 부정적인 내용으로 끝맺음하고 있기 때문에, 공적인 낭독시에는 22절을 읽은 다음 21절을 읽는 것이 관례였다 한다(Harrison).
이스라엘의 회복을 간구함(예레미야 애가 5장)
[1-5절] 여호와여, 우리의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의 수욕을 감찰하옵소서. 우리 기업이 외인에게, 우리 집들도 외인에게 돌아갔나이다. 우리는 아비 없는 외로운 자식이오며 우리 어미는 과부 같으니 우리가 은을 주고 물을 마시며 값을 주고 섶을 얻으오며 우리를 쫓는 자는 우리 목을 눌렀사오니 우리가 곤비하여 쉴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는 유다 나라와 예루살렘 성의 멸망으로 인해 당한 비극적 상황을 하나님께서 돌아보시기를 구한다. 그 모든 불행에 대해 그에게 탄원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그들에게 남은 소망이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들의 땅과 집들은 다 외인들에게로 돌아갔다. 각 가정은 자녀들과 여자들을 보호하고 책임져줄 자들이 없었다. 그들은 아버지 없는 고아들이며 그들의 어머니는 과부 같았다. 그들은 물을 마시기 위해 돈을 주어야 하였고 땔감을 얻기 위해 값을 주어야 했다. 기본적 식생활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들을 쫓는 자들은 그들의 목을 눌렀고 그들은 피곤하며 휴식을 취할 수 없었다.
[6절] 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양식을 얻어 배불리고자 하였나이다.
‘악수한다’는 원어는 ‘손을 준다’는 말로 상대에게 충성을 맹세하거나 복종하겠다는 뜻이라고 보인다. 역대상 29:24, “모든 방백과 용사와 다윗 왕의 여러 아들이 솔로몬 왕에게 복종하니[손을 주니].” 에스라 10:19, “저희가 다 손을 잡아 맹세하여[손을 주며] 그 아내를 보내기로 하고.” 유다 사람들은 배불리 양식을 얻기 위해 애굽 사람들과 앗수르 사람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복종하였다.
[7-8절] 우리 열조는 범죄하고 없어졌고 우리는 그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종들이 우리를 관할함이여, 그 손에서 건져낼 자가 없나이다.
예레미야는 그들이 선조들의 죄악을 담당하였다고 말한다. 선조들이 범죄했고 지금 다 죽고 없어졌고 그 자녀들은 그 선조들의 죗값을 받고 있다. 사람이 지은 죄의 값은 자신이나 자녀들이 반드시 받아야 한다. 바벨론 나라의 종들은 유다 백성을 다스렸다. 유다 백성은 온갖 학대를 당했으나, 그들의 손에서 건져내어줄 자가 아무도 없었다.
[9-11절] 광야에는 칼이 있으므로 죽기를 무릅써야 양식을 얻사오니 주림의 열기로 인하여 우리의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으니이다[탔나이다]. 대적이 시온에서 부녀들을, 유다 각 성에서 처녀들을 욕보였나이다.
광야에는 바벨론 군인들의 칼이 있기 때문에 양식을 얻기 위하여 광야로 나가는 것은 죽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러 날 먹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피부는 아궁이처럼 탔다. ‘검다’는 원어(카마르)는 ‘달아오르다’는 뜻이다(BDB, NASB, NIV). 또 대적자들은 시온에서 부녀자들을, 유다 각 성에서 처녀들을 학대하고 욕보였다. 전쟁의 결과는 비참했다. 거기에는 사람의 기본적 도덕성도, 양심도, 인정도 없었다.
[12-14절] 방백들의 손이 매어달리며 장로들의 얼굴이 존경을 받지 못하나이다. 소년들이 맷돌을 지오며[돌리오며] 아이들이 섶을 지다가 엎드러지오며 노인은 다시 성문에 앉지 못하며 소년은 다시 노래하지 못하나이다.
방백들은 손이 매어달리기까지 했고 장로들의 얼굴은 존경을 받지 못했다. 이전에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던 자들이 이제는 모욕과 부끄러움을 당했다. 이전에 그렇게 힘든 일을 해본 적이 없는 어린 소년들이 무거운 맷돌을 돌렸고 어린아이들은 땔감을 지다가 힘들어 엎드러졌다. 노인들은 이전처럼 성문에 앉아 담소하거나 성안의 재판사건을 처리하는 일을 하지 못했고 소년들은 이전처럼 즐거운 노래를 부르지 못하였다.
[15-18절] 우리 마음에 희락이 그쳤고 우리의 무도(舞蹈)[춤]가 변하여 애통이 되었사오며 우리 머리에서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함을 인함이니이다. 이러므로 우리 마음이 피곤하고 이러므로 우리 눈이 어두우며 시온산이 황무하여 여우가 거기서 노나이다.
그들의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이 그쳤고 춤이 애통으로 변하였다. 그들의 머리에서 아름다운 면류관이 땅에 떨어졌다. 이스라엘에게서 영광이 떠났다. 예레미야는 이 모든 비극적 현실이 자신들의 죄 때문에 왔다고 말한다. 불행은 죄 때문에 온다. 그것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나 마찬가지이다. 죄의 결과로, 그들의 마음은 피곤하였고 그들의 눈은 어두웠으며 시온산은 황무해져서 사람들이 거하는 대신에 여우들이 뛰노는 곳으로 변하였다.
[19-20절]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세세에 미치나이다.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예레미야는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앙망하며 그의 영원하심과 그의 영원한 통치자 되심(NASB, NIV)을 고백한다. 시편 9:7,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영원히 잊으시고 버리실 것인지 질문한다. 사람들은 현재의 비극적 징벌과 재앙으로 낙심하지만, 선지자는 하나님의 섭리가 그때에도 진행되고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고 있다.
[21-22절]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특심하시니이다[만일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지 않으셨고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특심하지 않으시다면](NASB, NIV).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라는 기도는 사람이 전적으로 부패하고 무능력해져 있음과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본서의 핵심적 진리를 증거한다. 예레미야는 사람의 전적 부패성과 무능력을 증거했었다.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예레미야 13: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사람의 전적 부패성과 무능력, 구원의 전적 은혜성은 신약시대에 사도 바울을 통하여 밝히 증거되었다. 로마서 8:7-8,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로마서 9:18,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또 구원은 사람의 본래의 영광스런 상태로의 회복이다. 성경은 그것을 예언한다. 그것은 사도행전 3:21에 기록된 ‘만유를 회복하실 때’이며 요한계시록 21:1에 예언된 ‘새 하늘과 새 땅’이며 21:5에 언급된 대로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세상의 큰 변화이다.
본장의 교훈은 분명하다.
첫째로, 죗값은 크고 무섭다(7, 16절). 하나님께서는 심판자이시다. 그는 죄에 대해 고생과 파멸, 몸의 죽음과 영원한 지옥으로 벌하신다(계 21:8).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죄의 대가를 치루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둘째로, 그러므로 우리는 범죄치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며, 구원받은 자는 다시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한다. 죄가 없는 인격과 세상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이며 섭리의 목표이다. 구원은 죄사함이며 신앙생활의 일차적 목표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의지하자. 21절,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빌립보서 3:8,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의만 의지하고 감사하며 찬송하자.
1) 원문에는 ‘주께서’라는 말(아도나이)이 4번 나오고(1, 2, 5, 7절), ‘여호와께서’라는 말)이 2번 나온다(6, 8절). 2) ‘원수’ 혹은 ‘대적’이라는 말이 예레미야 애가에 24번이나 나온다.
예레미야애가 5장
[자료 1]
Ⅰ. 회개의 기도 5:1-16
비탄에 잠긴 하나님의 백성들은 은혜의 보좌에 자신들의 슬픔을 터뜨린다. "지난 일을 기억하시고 오늘날 당하는 일을 감찰하옵소서. 모든 백성이 당한 바 환난을 작게 여기지 마시고 간과해 버리지 마옵소서"(느 9:32). 그들의 모든 호소는 '수욕'이라는 한 마디 말로 집약되고 있다. 우리의 수욕을 감찰하옵소서. 그들이 당한 것을 수욕이라고 볼 때, 그것은 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인정하셨던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손상시킨 것이었다.
(1) 그들은 죄에 대한 수욕을 받아들였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그들의 어린 시절, 곧 그 민족 형성 초기에 조상들이 지은 죄에 대한 수욕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그들 선조들의 죄에 대한 참회였으며 그들 자신이 집착해 왔던 조에 대한 참회였다. 그러한 그들의 죄 때문에 이제 고통받는 것은 마땅하였던 것이다.
(2) 그들은 자기들을 부끄럽게 만든 몇몇 세목들을 들어 그들이 당하고 있는 수욕을 설명한다.
1)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그 좋은 땅을 강탈당하였다(2절). "그 땅이 외인들에게 돌아갔나이다. 그들이 우리가 지어 놓은 집에 거하오니 이것이 우리의 수욕이 되나이다."
2) 그들의 형편과 나라는 과부와 고아같이 되었다(3절). 우리는 아비 없는 외로운 자식이오며. "우리는 의지할 데가 없나이다. 나라의 아버지인 우리 왕은 베임을 당했나이다. 아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신 것같이 보이나이다. 우리 어머니, 우리 성읍은 이제 과부가 되어 학대와 모욕을 받으니 이것이 우리의 수욕이니이다."
3) 그들은 생활 필수품을 구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예전에는 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으나 이제는 은을 주고 물을 마시게 되었나이다. 전에는 땔감을 가져다 썼으나 이제는 값을 주고 섶을 얻되 한 다발을 얻기 위해 비싼 값을 치루게 되었나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양식을 무슨 수로 구하겠는가? 그들 중 몇은 그것을 얻을려고 자기들의 자유를 팔았다(6절). 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양식을 얻어 배불리고자 하였나이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거래였나이다. 우리가 죽기를 무릅써야 양식을 얻사옵나이다." 그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성을 몰래 빠져 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칼에 베어 죽임당할 위험에 빠져 버렸다. 광야에는 칼이 있으므로(9절).
4) 그들은 종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들이 받은 어떤 수욕만큼이나 큰 수욕이었다(5절). 우리를 쫓는 자는 우리 목을 눌렀사오니. 그 멍에의 고통은 극심하였다. 바벨론으로 끌려간 비참한 포로들은 '곤비하여 쉴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밤의 안식도 안식일의 휴식도 없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하나님과 그의 종들과 선지자들의 부드럽고도 자비로운 통치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제 대적들과 종들에게 준엄한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하였다.
5) 잔치를 벌이곤 했던 자들은 이제 주리게 되었다(10절). "심한 주림, 글자 그대로 주림의 열기로 인하여 우리의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고 말라 붙어 타버렸나이다."
6)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능욕과 굴욕을 당하였다. "여인들이 심지어 거룩한 시온에서조차 능욕을 당하였나이다"(11절).
7) 그들의 모든 즐거움이 다하였다(14절). 마음 내키는 대로 웃고 했던 '소년들은 노래하지 못하게' 되었다. 온 백성들이 그렇게 되었다. 우리 마음에 희락이 그쳤고 우리의 무도가 변하여 애통이 되었사오며(15절). 이 구절은 그들의 절기에 누리던 기쁨과, 그들이 행하던 아름답고 경건한 '무도'에(삿 21:21) 적용시킬 수 있다.
8) 그들의 모든 영광이 다하였다. 공의로운 정치가 그들의 영광이었으나 이제는 사라져 버렸다(14절). 왕의 위엄이 그들의 영광이었으나 그것 역시 사라져 버렸다. 우리 머리에서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왕 자신이 굴욕당했을 뿐 아니라 면류관도 떨어져 버렸다. 즉 그에게는 아무 후계자도 없었던 것이다. 세상의 면류관은 쇠하여 사라질 물건이다. 그러나 은혜롭게도, '시들지 아니하며' 결코 쇠하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이 있으며, '진동치 못할 나라가' 있는 것이다.
Ⅱ. 여호와의 영원한 주권 5:17-22
(1)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이 받은 재난보다도 성전이 파괴된 사실에 더 깊은 염려를 표명하고 있다(17,18절).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악으로 시온산을 더럽혔으므로 하나님께서 그곳을 황무하게 하신 것은 당연하나이다. 여우들이 거기서 숲속에서처럼 언제나 자유롭게 노나이다."
(2)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다는 신조로 스스로 위로한다(19절).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무엇이 세상을 뒤흔들지라도 그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을 어지럽게 하지는 못한다. 세상에 어떠한 변혁이 있을지라도 영원한 분이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한결같으시며, 지혜롭고 거룩하며 공의롭고 선하며 무한히 영원토록 계시는 분이시다.
(3) 그들은 자기들이 현재 당하고 있는 하늘의 노여움에 관해서 하나님께 겸손히 간구한다(20절).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가 당신 마음 속에서 사라졌나이까? 당신은 한결같으신 분이니이다. 그러니 당신의 성소의 보좌가 훼파된다 해도 당신은 우리에게 이전과 같은 분이 되시지 않겠나이까?" 우리는 하나님과 쟁변할 수 없지만 그에게 호소할 수는 있는 것이다(렘 12:1).
(4) 그들은 은총과 자비를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여호와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지는 마시고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사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소서"(21절). 이 말로 끝을 맺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의 랍비들은 22절에 나타나는 슬픈 말로 이 책을 끝맺고 싶지 않으므로 이 기도를 반복하여 그것으로 본장을 읽고 쓸 때 맨 마지막 말이 되게 하였다. 이것은 시편 80:3,7,19의 반복되는 기도와 일맥 상통한다.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소서.' "진실한 회개의 개심으로써 우리를 우상에게서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 가겠사오니. 만일 하나님께서 자비로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신다면, 은총으로 우리의 날도 새롭게 하실 것이다.
[자료 2]
●여호와여 기억하소서 (예레미야 애가 5:1-16)
어느 "누구가 괴로움을 받고 있는가? 그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라."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그의 하소연을 쏟아 놓게 하라. 그리하여 그의 고민이 하나님 앞에 알려지게 하라. 하나님의 백성이 여기에서 그같이 하고 있다. 슬픔이 압도하기 때문에 은혜로운 보좌의 발판에 그들의 슬픔을 터뜨린다. 그리고는 평안하여진다. 그들은 악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악을 느꼈기 때문에 한탄하는 것이다. "우리가 당한 일을 기억하소서(1절). 과거에 우리를 위협하던 것, 그리고 오래도록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 이제는 우리 앞에 당하였습니다."
" 우리는 그 아래서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습니다. 과거를 기억하시고, 현재를 감찰하소서. 우리가 당한 환난을 적게 여기지 마시고, 주목할 가치가 적은 것으로 여기지 마소서" (느 9:32). 사실은 우리의 고난 중에서도 그것이 충분한 것이 될 수 있는 큰 위로는 하나님이 보시고 권고하시고, 우리가 당한 모든 것을 기억해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 가운데서 우리의 문제들을 하나님의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권고하심에 맡길 필요가 있다.
그들의 모든 불평 속에 있는 한 말은 수욕(치욕)이라는 말이다. "우리의 수욕을 감찰하소서." 그들이 당한 환난은 그들의 지난날의 위엄과 부요에 비교하면 그들이 다른 백성들에게 끼쳤던 것보다도 더 큰 수욕이었다. 특별히 하나님과의 관계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의지를 생각하면, 그리고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던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대단히 수긍이 가는 불평이다. 왜냐하면 이 수욕은 그의 백성을 위하여 그 수욕을 사용하셨던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당신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Ⅰ. 그들은 그들이 범한 죄의 치욕을 인정한다. 그들의 어렸을 때의 치욕, 즉 민족 초기의 치욕(이것은 에브라임이 자신을 한탄한 말이다. 렘 31:19), 이것이 그들의 불평의 한가운데 들어온다(7절). "우리의 열조는 범죄하고 없어졌고" 그들은 죽어 없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이것은 말씀과 같이 역정내는 불평도 아니고 하나님께 대한 불의한 비난도 아니었다(렘 31:29; 겔 18:2). "아비가 신 포도를 먹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 그러므로 주의 길은 같지 아니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죄에 대한 참회하는 고백이다. 그들의 조상 또한 죄 중에서 멸망하였고, 그 때문에 지금 바로 그들은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린 심판이 너무나 컷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 자신의 죄와 함께 그들 조상들의 죄를 현재의 그들 속에서 본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조상들은 이 세상에서 두드러진 벌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들 조상들에게는 죄를 묵인하시고(그는 조상들의 죄를 자손들에게 짊어지우셨다), 그 죄를 자손들에게 추적하여 자손들에게는 가혹함으로 정의를 채우셨다(마 23:35, 36). 여기에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한다.
1. 하나님의 정의에 그들 자신들을 복종시킨다. "주여! 당신은 우리에게 내리신 모든 것에서 의로우십시다. 우리는 행악하는 자의 종자요, 진노의 자식이며, 저주받은 자의 후예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가 많으며 그것을 좋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벌로써 되돌아보신 죄를 우리는 회개로써 돌이켜 보아야 하고, 우리를 바로 잡기 위하여 하나님 정의롭게 행하시는 모든 일들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에 주의하자.
2.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하여 말한다. "주여! 우리의 열조들이 죄를 범하였고, 우리는 그들의 죄로 인하여 마땅히 매를 맞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없어졌습니다. 그들은장차 올 재난을 받지 않은 채 옮겨갔고, 우리가 당하는 이 재난을 보지도 아니했고, 몫을 나누어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짊어졌습니다. 이제 여기에서 하나님은 의로우시지만 우리의 경우는 불쌍하고, 동정을 받아야 한다고 고백되어져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참회하고 우리 조상의 죄 때문에 고통받는 중에서도 인내한다면 우리를 벌하시는 그분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곧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을 기대할 수도 있다는 것에 주의하자.
Ⅱ. 그들은 그들의 진술에 있어서 당하는 고난에 대한 비난을 몇몇 특별한 구절들에서 그들의 불경건에 돌리는 경향이 있다.
1.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좋은 땅을 빼앗겼고, 적들이 그것을 소유하였다. 그 가나안은 그들의 유업이었다. 그것은 약속으로 받은 그들의 땅이었다. 하나님은 그들과 그들의 자손에게 그 땅을 주셨다. 그들은 그의 면류관으로부터 승인을 받아서 그것을 소유하였다(시 136:21, 22).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외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것을 소유할 권리가 없는 그들이, 이스라엘에게는 외인이요, 약속의 계약과는 상관이 없는 그들이 그 땅을 소유하였습니다. 그들이 우리가 지은 집에 거주하니, 이것이 우리의 치욕입니다." 하늘의 가나안은 빼앗길 수 없는 유산인 것이야말로 모든 영적 이스라엘의 행복이다. 그것은 결코 이방인에게로 돌아가지 아니할 것이다.
2. 그들의 나라와 민족은 과부와 고아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3절). "우리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도움이 없는)우리에게는 보호자가 없고, 돌봄이 없습니다. 나라의 아버지인 왕은 베임을 당하였습니다. 아니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저버리고 내어버린 것처럼만 보입니다. 이스라엘에 자식을 많이 낳는 어머니 같은 성읍인 우리 어미는 지금 과부와 같으니 남편이 죽은 아내들과 같습니다. 위로도 없고 허물과 상처는 드러나니 이것이 우리의 수욕입니다. 체제를 갖추었던 우리가 이제는 모욕을 가지고 쳐다봅니다."
3. 그들은 그들 자신과 가족들의 필수품을 위하여 힘들게 일하였다. 전에는 그들은 모든 것에 있어 풍부하였었다. 물은 자유롭게, 쉽게 얻을 수가 있었으나, 그러나 이제는(4절) "우리가 은을 주고" 물을 마시니 물은 모든 사람에게 거저라는 말은(water is free to all) 더 이상 진실이 아니었다. 그들의 압박자들이 그렇게 많이 물을 퍼썼으므로 그들은 돈이나 노동으로 사지 않고는 맑은 물을 한 모금도 얻을 수가 없었다. 이전에는 쉽게 연료를 구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값을 주고 섶을 얻으오며" 비싼 값을 지불하고 섶을 얻는다. 이제 그들은 그들이 하늘 여왕을 위하여 과자를 구울 때 쓸 땔나무를 얻으려고 그들의 자식들을 부린 죄 때문에 벌을 받는다(렘 7:18). 그들은 압박자들에게 완전히 박탈당하였고, 고대의 관례에 따라 불과 물을 사용하는 것 둘 다 금지되었다. Interdico tivi aqua et igni-즉 나는 너희가 물과 불을 사용하는 것을 금한다. 그러나 빵을 위하여 그들은 무엇을 해야하는가? 진실로 그것은 다른 어느 것만큼이나 얻기가 힘든 것이었다.
(1)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빵을 얻기 위하여 자유를 팔았다(6절). "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그들을 섬김으로 우리가 양식을 얻어 배 불리려고 그들과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거래를 하였다. 우리는 가엾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는 가장 힘든 때에 가장 천한 노동에 복종하는 것이 즐거웠다. 우리 자신과 가족들이 살아가기 위한 필수품을 얻으려고 기근 때에 애굽인들이 바로에게 하였듯이 우리를 그들에게 전적으로 봉사하는 종으로 넘겨주었다." 이웃에 있는 나라들은 밀을 얻기 위하여 유다와 무역을 하였었다(겔 27:17). 유다는 수확이 많은 땅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땅은 거민들을 삼켜 버렸고, 그들은 애굽인과 앗수르인에게 아부하기를 즐겨하였다.
(2) 그들 중의 다른 사람들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하여 그들의 생명을 무릅쓰고 모험을 하였다(9절). "우리가 죽기를 무릅써야 양식을 얻사오니" 포위로 인하여 고립되고 모든 양식이 떨어졌을 때 그들은 양식을 얻기 위하여 포위군들의 손에 붙잡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성 밖으로 나가서 돌격하거나 도둑질을 하였다. 포위군들은 성 주위의 평원 모든 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생명을 무릅쓰지 아니하고 우리 얼굴에 땀을 거의 흘리지 아니하며 쉽게 빵을 얻어 부요를 즐기는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자. 우리는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즐거움이 있고 필요한 것들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광야의 칼에 대한 어떤 공포도 없이 땅의 즐거움을 누리는 쾌락이 있는 것이다.
4. 자유로운 백성이었던 이들이 노예 신분이 되었다. 그들 자신의 주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주변의 모든 것들의 주인이었다. 자유로운 백성이 노예 상태가 된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당한 어떤 수욕보다 적지 아니한 것이었다. "우리를 쫓는 자" 의 괴롭고 무자비한 멍에가 "우리의 목을 눌렀사오니" (예레미야가 말한 쇠 멍에가 그들에게 놓여졌을 것이다. 렘 28:14), 우리는 부리는 자의 명령에 따라 전적으로 주인을 섬기는 멍에 멘 짐승과 같이 부려졌다. 그들의 종살이를 더 괴롭게 하는 일이 있다.
(1) 그들의 노동은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의 그것과 같이 끊임이 없었다. 매일같이 임무가 부과되고, 또 지나쳤다. "우리가 수고하나 쉼이 없나이다." 떠나지도 못하고 쉴 틈도 없다. 멍에 멘 소는 밤에 멍에를 벗고 쉰다. 그같이 그들은 특별히 제정된 법에 의해서 안식일에는 쉬었다. 그러나 살기 위하여 일을 해야하는 바벨론에 있는 가난한 포로들은 밤도 안식일도 없이 노동하고 쉬지 못했다. 그들은 계속적인 노동으로 인하여 아주 피곤해져 버렸다.
(2) 그들의 주인들은 견딜 만한 자들이 아니었다(8절). "종들이 우리를 관할함이여." 종들이 다스릴 때보다도 더 약 오르는 것은 없다(잠 30:22). 이스라엘을 명령하는 갈대아의 높은 사람들 뿐 아니라 가장 천한 그들의 종들까지도 즐기며 그들을 학대하였고, 또 모욕하였다. 그들은 저들의 고갯짓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가나안의 저주는 이제 유다의 운명이 되었다. "종의 종들이 된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통치를 받지 아니하고 그의 종인 예언자들로 말미암아 통치를 받았다. 그의 다스리심은 온화하고 은혜로왔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그들의 적과 종들에게 혹독하게 다스림을 받고 있는 것이다.
(3) 그들의 비통함이 개선될 가망이 없다. "그 손에서 건져낼 자가 없나이다. 포로에서 구출해 줄 이가 없을 뿐 아니라 우리를 학대하고 짓밟는 종들의 오만을 저지하고 없애 줄 사람이 없나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주인들이 그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종들의 행위는 그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묵인하고, 도리어 고무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이들은 점잖은 징계로는 고정될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일축되고 그들은 종들로 되어버렸다. 여기서 그들은 기도하여야 할 것이었다. "여호와여 우리의 수욕을 감찰하소서."
5. 과거에는 축연을 베풀고 있던 때 지금은 굶주리고 있다(10절). "우리의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으니이다." 무서운 기근의 폭풍 때문에 마르고 또한 탔다. 기근이 백성들에게 점차로 왔지만 그것은 격심하게 왔고, 그 앞에서 모든 것은 압도당하였다. 거기에는 저항이 있을 수 없었다. 이것은 또한 그들의 치욕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포로 중에 이방인 중에서 받은 기근의 치욕을 본다(겔 36:30).
6.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그들의 인격과 품격이 가장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학대를 받고 수욕을 당하였다.
(1) 거룩한 산 시온에서 부녀들을 욕보였나이다(11절). 이 같은 지독한 악을 범한 슬픈 탄원이 있는 것이다.
(2) 위대한 사람들은 죽음에 놓여질 뿐 아니라 수치스러운 죽음에 처하여졌다. "방백이 매여 달리며," 마치 그들이 종인 것처럼 갈대아인의 손을 매어 달렸다. 그들은 거만하게 그들의 손으로 이 야만적인 집행을 실행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칼에 죽임을 당한 후에 방백들의 몸이 사울의 아들들의 몸과 같이 매어달린 것은 수치스런 죽음이었고,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민족의 죄악을 속죄하는 보상의 죽음이었다고 생각한다.
(3) 장관들과 권위있는 이들이 존경을 받지 못하였다.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나이 많은 "장로들의 얼굴이 존경을 받지 못하나이다." 이것은 갈대아인의 또 다른 날을 특별히 기억나게 한다(사 47:6). "늙은 이에게 네 멍에를 심히 무겁게 메우며."
(4) 노인의 근엄함도 고려되지 않음같이 소년의 연약함도 고려되지 않았다. 그들은 소년들에게 "맷돌을 갈게" 하였다. 아니 아마도 연자 맷돌이나 또 다른 것들을 움직였다. 그들은 마치 짐승과 같이 짐을 졌다. 그래서 그들이 소년일 때에 그들의 등이 상하여서 그 생활의 휴식이 그들을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어린 자식들에게 짐을 지웠기 때문에 그들은 "섶을 지다가 엎드러졌다." 이 잔인한 감독들은 그렇게 비인간적이었다.
7. 그들의 즐거움에 끝이 오고 그들의 기쁨이 전혀 멸절되었다(14절). 유쾌하여지고 싶던 "소년들이" 그들의 "음악을 그치고" 버드나무에 거문고를 걸었다. 실로 음악을 그침은 늙은 사람에게는 잘 어울리게 된다. "모든 음악하는 딸들이 쇠퇴" 되는 때는 정중한 경멸로서 그것을 내려놓을 때이다. 그들의 소년들이 음악을 그치게 되는 때는 그 백성에게 큰 재앙인 것을 뜻한다. 그것은 백성의 몸이 겪는 재난과 함께 마음의 재난인 것이다. "그들의 마음에 희락이 그쳤고" 그들의 적들이 홍수와 같이 그들에게 들어온 이후로 기쁨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깊은 슬픔이 전달되어 한 사람의 슬픔의 파도는 또 다른 사람의 목에까지 흘러 들어갔다. 그러므로 그들은 슬픔에 아주 압도되어 버렸다. 이전에 기쁨으로 뜁뛰던 대신에 "우리의 무도가 변하여 애통이 되었사오며" 우리는 슬픔 속에 가라앉는다. 이것은 특별히 엄숙한 축제의 기쁨과 거기서 사용된 조심스럽고도 신성한 춤에 관련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삿 22:21). 이것이 슬픔으로 변하였다. 축제일에는 이전에 즐거웠던 일들이 기억되어서 슬픔이 더욱 가중되었다.
8. 그들의 모든 영광이 끝났다.
(1) 정의의 공적 집행은 그들의 영광이었다. "노인은 다시 성문에 앉지 못하오며" (14절). 강같이 흐르던 정의의 흐름이 지금은 그쳤다. 그렇게도 엄숙하던 법정이 지금은 조용해졌다. 재판관들이 살육되고 또는 포로로 잡혀갔기 때문이다.
(2) 왕의 위엄은 그들의 영광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사라졌다. "우리의 머리에서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왕이 굴욕에 떨어졌을 뿐 아니라, 왕관도 떨어졌다. 그에게는 후계자가 없다. 왕의 표상 [왕관, 홀, 보주(寶珠)등]은 모두 잃어버렸다. 땅의 면류관은 시들고 떨어지는 것이란 것에 유의하자. 그러나 하나님은 복되시니 거기는 시들지 않고 떨어지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이 있고, "옮겨지지 아니하는 하늘 나라가 있다." 먼저의 모든 불평 외에 이 불평에 있어서만 그들은 죄를 참회하는 고백을 한다. "오호라! 우리 범죄함을 인함이니다. 아! 우리의 경우는 매우 통탄스럽습니다. 그것은 모두 우리들 자신 때문입니다. 우리는 파멸하고 일을 악화시키고 우리 손으로 망하였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이니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모든 우리의 비애는 우리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 때문인 것에 주의하자. 만일 우리의 머리에서 면류관이 떨어졌으면, 만일 우리의 탁월함을 잃고 천하게 되어졌으면,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우리의 면류관이 더럽혀지고 우리의 존귀가 땅에 떨어진 것이니 우리 탓이다.
●불변하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애가 5:17-22)
여기에서 이것을 살피자.
Ⅰ.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재난의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 보다도 성전의 파괴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표현한다. 하나님의 집에 대한 관심은 그들 자신에 대한 관심보다도 더 그들의 마음 깊이에 있다(17,18절). "이러므로 우리 마음이 피곤하고," 그 무거운 짐 밑에 눌립니다. "이러므로 우리 눈이 어두우며" 우리의 시력이 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흔히 정신 착란, 또는 졸도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시온산이 황무한 때문입니다. 그 거룩한 산 위에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다른 황폐한 것을 인하여는 우리 마음이 슬프고 우리 눈이 눈물을 흘리나 이것을 위하여는 우리 마음이 피곤하고, 우리의 눈이 어두울 정도입니다." 종교를 파멸시키겠다고 협박하니까 종교에 대한 관심이 약해지는 것만큼 상한 백성의 마음을 무겁게 근심시키는 것은 없다는 것에 주의하자.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어떤 일시적인 괴로움보다 그것이 더 우리를 괴롭힌다고 하면, 그리고 우리가 만일 그것을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의 위로인 것이다. 백성들이 시온산을 더럽혔으므로 여우가 숲 속에서 자유롭게 놀던 것처럼, 그 위에서 놀 정도로 시온산을 황무케 하신 것은 의로우신 것이다. "시온산이 시랑의 밥이 된 것은" (시 63:10) 실로 슬픈 일이다. 그러나 이는 무엇보다도 죄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시 13:4).
Ⅱ. 그들은 하나님과 그 통치의 영원성에 대한 교리로서 스스로를 위로한다(19절).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이것은 그들이 "곤고한 자의 기도라" 고 제목을 붙인 편지에서 배운 것이다(시 102:12). 피조물로부터의 모든 위로가 우리에게서 떠나가고 우리의 마음이 낙심하였을 때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 자신을 고무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영원성에 대하여. "당신은 영원히 계시오며" 세상을 뒤흔드는 것은 세상을 만드신 이를 교란시키지 못한다. 땅 위에는 변혁이 있으나 영원한 마음은 변함이 없다. 하나님은 아직까지도 동일하시며, 지혜와 거룩하심과 의로우시고 선하심이 영원하시다. 그에게는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
2. 결코 실패하지 않는 그 통치의 영원성에 대하여. "주의 보좌는 세세에 미치나이다." 영광의 보좌, 은혜의 보좌, 그리고 통치하는 보좌는 모두 변하지 않고 옮겨지지 않는다. 이것은 "면류관이 우리 머리에서 떨어질 때도,"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사실이다. 우리의 보호자이었던 방백들의 보좌는 흙으로 떨어지고 그 속에 묻혔지만 하나님의 보좌는 아직까지 계속된다. 그는 아직까지 세상을 통치하시며 선한 교회를 위하여 세상을 통치하신다. 오! 시온이여, 주께 다스리시니 그 다스림이 영원하시도다.
Ⅲ. 지금 처하여 있는 비천한 상황에 대하여 하나님께 겸손히 간언을 드린다. 지금 그들이 하늘의 찌푸림 아래 있는 것이다(20절). "마치 우리가 마음에서부터 완전히 버림을 받은 것처럼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마치 우리가 당신의 나타나시는 증거를 완전히 빼앗긴 것처럼 우리를 이같이 오래 저버리시나이까? 마치 당신이 우리를 철저하게 버리시기나 한 것처럼 어찌하여 우리의 구원을 늦추십니까? 비록 당신의 성소의 보좌는 부서졌다 해도 당신은 동일하시며 하늘의 보좌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그들은 그들이 가졌던 하나님의 사랑과 나타나심의 가치를 표현한다. 지금은 그 증거와 위로를 빼앗긴 것이 사랑과 현현의 가치는 장구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마지막 구절을 이 같은 간언으로 읽어도 좋다. 난외주에는 그같이 기록하였다.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나이까? 우리를 향하여 웃으심과 자비스럽게 기억하심 뿐만 아니라 우리를 향하여 얼굴을 찡그리심과 당신이 하시는 표징까지도 우리에게 가까이 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면전에서 우리를 버리시고 우리가 당신에게 가까이 가는 것까지도 버리셨나이까? 당신은 우리에게 영구히 진노하시나이까? 당신의 선하심과 미쁨으로 화해시키는 것은 어찌 되오며 견고한 계약은 어찌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다시 읽는다. "당신이 우리를 버리셨나이다. 당신의 가지신 두려움의 근거를 우리에게 주셨나이다. 주여!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는 이 시험 중에 있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을 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와 더불어 변론을 할 수는 있으며, 또한 그가 우리를 버리셨다고 우리가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지마는 우리는 그의 판단에 대하여 겸손히 그에게 변론할 수 있다는 것에 유의하자(예언자 예레미야와 같이; 렘 12:1). 특별히 그의 성소의 장구한 황폐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다.
Ⅳ. 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자비와 은혜를 열심히 기도하였다. "여호와여! 영원히 우리를 버리지 마시고,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소서(21절)." 이 말들은 마지막에 놓여지지 않았지만 그러나 랍비들은 저 우울한 말들로(22절) 끝맺을 책들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기도를 되풀이한다. 즉, 해는 구름 아래로 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 말씀들을 쓰는데와 읽는데 있어서 마지막을 삼았다. 그들이 여기에서 기도하는 것은
2. 자비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를 당신에게로 돌이키소서. 옛날과 같이 우리의 날들을 새롭게 하소서. 우리의 선조들이 오래 전에 누리고 장구히 계속되었던 것과 같은 행복과 상태가 되게 하소서. 우리를 처음과 같이 본래와 같이 되게 하소서" (사 1:26). 만일 하나님이 그의 은혜로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시면 그는 그의 은혜로 우리의 날들을 새롭게 하실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독수리와 같이" 우리의 "청춘을 새롭게" 하실 것에(시 103:5) 주의하자. 회개하고 그들이 먼저 할 일을 하면 기쁘게 되고 위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는 영원부터 있었다(시 25:6). 그러므로, 그들이 희구하면 당시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전부 잊으신 것같이 보인다 할지라도 영원부터 있는 자비는 영원까지 있을 것이다. 아멘.
여호와여 기억하소서 (예레미야 애가 5:1-16)
어느 "누구가 괴로움을 받고 있는가? 그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라."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그의 하소연을 쏟아 놓게 하라. 그리하여 그의 고민이 하나님 앞에 알려지게 하라. 하나님의 백성이 여기에서 그같이 하고 있다. 슬픔이 압도하기 때문에 은혜로운 보좌의 발판에 그들의 슬픔을 터뜨린다. 그리고는 평안하여진다. 그들은 악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악을 느꼈기 때문에 한탄하는 것이다. "우리가 당한 일을 기억하소서(1절). 과거에 우리를 위협하던 것, 그리고 오래도록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 이제는 우리 앞에 당하였습니다."
" 우리는 그 아래서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습니다. 과거를 기억하시고, 현재를 감찰하소서. 우리가 당한 환난을 적게 여기지 마시고, 주목할 가치가 적은 것으로 여기지 마소서" (느 9:32). 사실은 우리의 고난 중에서도 그것이 충분한 것이 될 수 있는 큰 위로는 하나님이 보시고 권고하시고, 우리가 당한 모든 것을 기억해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 가운데서 우리의 문제들을 하나님의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권고하심에 맡길 필요가 있다.
그들의 모든 불평 속에 있는 한 말은 수욕(치욕)이라는 말이다. "우리의 수욕을 감찰하소서." 그들이 당한 환난은 그들의 지난날의 위엄과 부요에 비교하면 그들이 다른 백성들에게 끼쳤던 것보다도 더 큰 수욕이었다. 특별히 하나님과의 관계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의지를 생각하면, 그리고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던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대단히 수긍이 가는 불평이다. 왜냐하면 이 수욕은 그의 백성을 위하여 그 수욕을 사용하셨던 하나님의 이름과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당신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Ⅰ. 그들은 그들이 범한 죄의 치욕을 인정한다. 그들의 어렸을 때의 치욕, 즉 민족 초기의 치욕(이것은 에브라임이 자신을 한탄한 말이다. 렘 31:19), 이것이 그들의 불평의 한가운데 들어온다(7절). "우리의 열조는 범죄하고 없어졌고" 그들은 죽어 없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 이것은 말씀과 같이 역정내는 불평도 아니고 하나님께 대한 불의한 비난도 아니었다(렘 31:29; 겔 18:2). "아비가 신 포도를 먹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 그러므로 주의 길은 같지 아니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죄에 대한 참회하는 고백이다. 그들의 조상 또한 죄 중에서 멸망하였고, 그 때문에 지금 바로 그들은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린 심판이 너무나 컷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 자신의 죄와 함께 그들 조상들의 죄를 현재의 그들 속에서 본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조상들은 이 세상에서 두드러진 벌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그들 조상들에게는 죄를 묵인하시고(그는 조상들의 죄를 자손들에게 짊어지우셨다), 그 죄를 자손들에게 추적하여 자손들에게는 가혹함으로 정의를 채우셨다(마 23:35, 36). 여기에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한다.
1. 하나님의 정의에 그들 자신들을 복종시킨다. "주여! 당신은 우리에게 내리신 모든 것에서 의로우십시다. 우리는 행악하는 자의 종자요, 진노의 자식이며, 저주받은 자의 후예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가 많으며 그것을 좋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벌로써 되돌아보신 죄를 우리는 회개로써 돌이켜 보아야 하고, 우리를 바로 잡기 위하여 하나님 정의롭게 행하시는 모든 일들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에 주의하자.
2.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하여 말한다. "주여! 우리의 열조들이 죄를 범하였고, 우리는 그들의 죄로 인하여 마땅히 매를 맞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없어졌습니다. 그들은장차 올 재난을 받지 않은 채 옮겨갔고, 우리가 당하는 이 재난을 보지도 아니했고, 몫을 나누어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죄악을 짊어졌습니다. 이제 여기에서 하나님은 의로우시지만 우리의 경우는 불쌍하고, 동정을 받아야 한다고 고백되어져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참회하고 우리 조상의 죄 때문에 고통받는 중에서도 인내한다면 우리를 벌하시는 그분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곧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을 기대할 수도 있다는 것에 주의하자.
Ⅱ. 그들은 그들의 진술에 있어서 당하는 고난에 대한 비난을 몇몇 특별한 구절들에서 그들의 불경건에 돌리는 경향이 있다.
1.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좋은 땅을 빼앗겼고, 적들이 그것을 소유하였다. 그 가나안은 그들의 유업이었다. 그것은 약속으로 받은 그들의 땅이었다. 하나님은 그들과 그들의 자손에게 그 땅을 주셨다. 그들은 그의 면류관으로부터 승인을 받아서 그것을 소유하였다(시 136:21, 22).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외인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것을 소유할 권리가 없는 그들이, 이스라엘에게는 외인이요, 약속의 계약과는 상관이 없는 그들이 그 땅을 소유하였습니다. 그들이 우리가 지은 집에 거주하니, 이것이 우리의 치욕입니다." 하늘의 가나안은 빼앗길 수 없는 유산인 것이야말로 모든 영적 이스라엘의 행복이다. 그것은 결코 이방인에게로 돌아가지 아니할 것이다.
2. 그들의 나라와 민족은 과부와 고아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3절). "우리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도움이 없는)우리에게는 보호자가 없고, 돌봄이 없습니다. 나라의 아버지인 왕은 베임을 당하였습니다. 아니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저버리고 내어버린 것처럼만 보입니다. 이스라엘에 자식을 많이 낳는 어머니 같은 성읍인 우리 어미는 지금 과부와 같으니 남편이 죽은 아내들과 같습니다. 위로도 없고 허물과 상처는 드러나니 이것이 우리의 수욕입니다. 체제를 갖추었던 우리가 이제는 모욕을 가지고 쳐다봅니다."
3. 그들은 그들 자신과 가족들의 필수품을 위하여 힘들게 일하였다. 전에는 그들은 모든 것에 있어 풍부하였었다. 물은 자유롭게, 쉽게 얻을 수가 있었으나, 그러나 이제는(4절) "우리가 은을 주고" 물을 마시니 물은 모든 사람에게 거저라는 말은(water is free to all) 더 이상 진실이 아니었다. 그들의 압박자들이 그렇게 많이 물을 퍼썼으므로 그들은 돈이나 노동으로 사지 않고는 맑은 물을 한 모금도 얻을 수가 없었다. 이전에는 쉽게 연료를 구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값을 주고 섶을 얻으오며" 비싼 값을 지불하고 섶을 얻는다. 이제 그들은 그들이 하늘 여왕을 위하여 과자를 구울 때 쓸 땔나무를 얻으려고 그들의 자식들을 부린 죄 때문에 벌을 받는다(렘 7:18). 그들은 압박자들에게 완전히 박탈당하였고, 고대의 관례에 따라 불과 물을 사용하는 것 둘 다 금지되었다. Interdico tivi aqua et igni-즉 나는 너희가 물과 불을 사용하는 것을 금한다. 그러나 빵을 위하여 그들은 무엇을 해야하는가? 진실로 그것은 다른 어느 것만큼이나 얻기가 힘든 것이었다.
(1)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빵을 얻기 위하여 자유를 팔았다(6절). "우리가 애굽 사람과 앗수르 사람과 악수하고 그들을 섬김으로 우리가 양식을 얻어 배 불리려고 그들과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거래를 하였다. 우리는 가엾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는 가장 힘든 때에 가장 천한 노동에 복종하는 것이 즐거웠다. 우리 자신과 가족들이 살아가기 위한 필수품을 얻으려고 기근 때에 애굽인들이 바로에게 하였듯이 우리를 그들에게 전적으로 봉사하는 종으로 넘겨주었다." 이웃에 있는 나라들은 밀을 얻기 위하여 유다와 무역을 하였었다(겔 27:17). 유다는 수확이 많은 땅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땅은 거민들을 삼켜 버렸고, 그들은 애굽인과 앗수르인에게 아부하기를 즐겨하였다.
(2) 그들 중의 다른 사람들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하여 그들의 생명을 무릅쓰고 모험을 하였다(9절). "우리가 죽기를 무릅써야 양식을 얻사오니" 포위로 인하여 고립되고 모든 양식이 떨어졌을 때 그들은 양식을 얻기 위하여 포위군들의 손에 붙잡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성 밖으로 나가서 돌격하거나 도둑질을 하였다. 포위군들은 성 주위의 평원 모든 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생명을 무릅쓰지 아니하고 우리 얼굴에 땀을 거의 흘리지 아니하며 쉽게 빵을 얻어 부요를 즐기는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자. 우리는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즐거움이 있고 필요한 것들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광야의 칼에 대한 어떤 공포도 없이 땅의 즐거움을 누리는 쾌락이 있는 것이다.
4. 자유로운 백성이었던 이들이 노예 신분이 되었다. 그들 자신의 주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주변의 모든 것들의 주인이었다. 자유로운 백성이 노예 상태가 된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당한 어떤 수욕보다 적지 아니한 것이었다. "우리를 쫓는 자" 의 괴롭고 무자비한 멍에가 "우리의 목을 눌렀사오니" (예레미야가 말한 쇠 멍에가 그들에게 놓여졌을 것이다. 렘 28:14), 우리는 부리는 자의 명령에 따라 전적으로 주인을 섬기는 멍에 멘 짐승과 같이 부려졌다. 그들의 종살이를 더 괴롭게 하는 일이 있다.
(1) 그들의 노동은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의 그것과 같이 끊임이 없었다. 매일같이 임무가 부과되고, 또 지나쳤다. "우리가 수고하나 쉼이 없나이다." 떠나지도 못하고 쉴 틈도 없다. 멍에 멘 소는 밤에 멍에를 벗고 쉰다. 그같이 그들은 특별히 제정된 법에 의해서 안식일에는 쉬었다. 그러나 살기 위하여 일을 해야하는 바벨론에 있는 가난한 포로들은 밤도 안식일도 없이 노동하고 쉬지 못했다. 그들은 계속적인 노동으로 인하여 아주 피곤해져 버렸다.
(2) 그들의 주인들은 견딜 만한 자들이 아니었다(8절). "종들이 우리를 관할함이여." 종들이 다스릴 때보다도 더 약 오르는 것은 없다(잠 30:22). 이스라엘을 명령하는 갈대아의 높은 사람들 뿐 아니라 가장 천한 그들의 종들까지도 즐기며 그들을 학대하였고, 또 모욕하였다. 그들은 저들의 고갯짓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가나안의 저주는 이제 유다의 운명이 되었다. "종의 종들이 된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통치를 받지 아니하고 그의 종인 예언자들로 말미암아 통치를 받았다. 그의 다스리심은 온화하고 은혜로왔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그들의 적과 종들에게 혹독하게 다스림을 받고 있는 것이다.
(3) 그들의 비통함이 개선될 가망이 없다. "그 손에서 건져낼 자가 없나이다. 포로에서 구출해 줄 이가 없을 뿐 아니라 우리를 학대하고 짓밟는 종들의 오만을 저지하고 없애 줄 사람이 없나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주인들이 그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종들의 행위는 그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묵인하고, 도리어 고무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이들은 점잖은 징계로는 고정될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일축되고 그들은 종들로 되어버렸다. 여기서 그들은 기도하여야 할 것이었다. "여호와여 우리의 수욕을 감찰하소서."
5. 과거에는 축연을 베풀고 있던 때 지금은 굶주리고 있다(10절). "우리의 피부가 아궁이처럼 검으니이다." 무서운 기근의 폭풍 때문에 마르고 또한 탔다. 기근이 백성들에게 점차로 왔지만 그것은 격심하게 왔고, 그 앞에서 모든 것은 압도당하였다. 거기에는 저항이 있을 수 없었다. 이것은 또한 그들의 치욕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포로 중에 이방인 중에서 받은 기근의 치욕을 본다(겔 36:30).
6.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그들의 인격과 품격이 가장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학대를 받고 수욕을 당하였다.
(1) 거룩한 산 시온에서 부녀들을 욕보였나이다(11절). 이 같은 지독한 악을 범한 슬픈 탄원이 있는 것이다.
(2) 위대한 사람들은 죽음에 놓여질 뿐 아니라 수치스러운 죽음에 처하여졌다. "방백이 매여 달리며," 마치 그들이 종인 것처럼 갈대아인의 손을 매어 달렸다. 그들은 거만하게 그들의 손으로 이 야만적인 집행을 실행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칼에 죽임을 당한 후에 방백들의 몸이 사울의 아들들의 몸과 같이 매어달린 것은 수치스런 죽음이었고, 그리고 실제로 그것은 민족의 죄악을 속죄하는 보상의 죽음이었다고 생각한다.
(3) 장관들과 권위있는 이들이 존경을 받지 못하였다.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나이 많은 "장로들의 얼굴이 존경을 받지 못하나이다." 이것은 갈대아인의 또 다른 날을 특별히 기억나게 한다(사 47:6). "늙은 이에게 네 멍에를 심히 무겁게 메우며."
(4) 노인의 근엄함도 고려되지 않음같이 소년의 연약함도 고려되지 않았다. 그들은 소년들에게 "맷돌을 갈게" 하였다. 아니 아마도 연자 맷돌이나 또 다른 것들을 움직였다. 그들은 마치 짐승과 같이 짐을 졌다. 그래서 그들이 소년일 때에 그들의 등이 상하여서 그 생활의 휴식이 그들을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어린 자식들에게 짐을 지웠기 때문에 그들은 "섶을 지다가 엎드러졌다." 이 잔인한 감독들은 그렇게 비인간적이었다.
7. 그들의 즐거움에 끝이 오고 그들의 기쁨이 전혀 멸절되었다(14절). 유쾌하여지고 싶던 "소년들이" 그들의 "음악을 그치고" 버드나무에 거문고를 걸었다. 실로 음악을 그침은 늙은 사람에게는 잘 어울리게 된다. "모든 음악하는 딸들이 쇠퇴" 되는 때는 정중한 경멸로서 그것을 내려놓을 때이다. 그들의 소년들이 음악을 그치게 되는 때는 그 백성에게 큰 재앙인 것을 뜻한다. 그것은 백성의 몸이 겪는 재난과 함께 마음의 재난인 것이다. "그들의 마음에 희락이 그쳤고" 그들의 적들이 홍수와 같이 그들에게 들어온 이후로 기쁨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깊은 슬픔이 전달되어 한 사람의 슬픔의 파도는 또 다른 사람의 목에까지 흘러 들어갔다. 그러므로 그들은 슬픔에 아주 압도되어 버렸다. 이전에 기쁨으로 뜁뛰던 대신에 "우리의 무도가 변하여 애통이 되었사오며" 우리는 슬픔 속에 가라앉는다. 이것은 특별히 엄숙한 축제의 기쁨과 거기서 사용된 조심스럽고도 신성한 춤에 관련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삿 22:21). 이것이 슬픔으로 변하였다. 축제일에는 이전에 즐거웠던 일들이 기억되어서 슬픔이 더욱 가중되었다.
8. 그들의 모든 영광이 끝났다.
(1) 정의의 공적 집행은 그들의 영광이었다. "노인은 다시 성문에 앉지 못하오며" (14절). 강같이 흐르던 정의의 흐름이 지금은 그쳤다. 그렇게도 엄숙하던 법정이 지금은 조용해졌다. 재판관들이 살육되고 또는 포로로 잡혀갔기 때문이다.
(2) 왕의 위엄은 그들의 영광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사라졌다. "우리의 머리에서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왕이 굴욕에 떨어졌을 뿐 아니라, 왕관도 떨어졌다. 그에게는 후계자가 없다. 왕의 표상 [왕관, 홀, 보주(寶珠)등]은 모두 잃어버렸다. 땅의 면류관은 시들고 떨어지는 것이란 것에 유의하자. 그러나 하나님은 복되시니 거기는 시들지 않고 떨어지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이 있고, "옮겨지지 아니하는 하늘 나라가 있다." 먼저의 모든 불평 외에 이 불평에 있어서만 그들은 죄를 참회하는 고백을 한다. "오호라! 우리 범죄함을 인함이니다. 아! 우리의 경우는 매우 통탄스럽습니다. 그것은 모두 우리들 자신 때문입니다. 우리는 파멸하고 일을 악화시키고 우리 손으로 망하였습니다. 우리의 죄 때문이니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모든 우리의 비애는 우리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 때문인 것에 주의하자. 만일 우리의 머리에서 면류관이 떨어졌으면, 만일 우리의 탁월함을 잃고 천하게 되어졌으면,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우리의 면류관이 더럽혀지고 우리의 존귀가 땅에 떨어진 것이니 우리 탓이다.
불변하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애가 5:17-22)
여기에서 이것을 살피자.
Ⅰ.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재난의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 보다도 성전의 파괴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표현한다. 하나님의 집에 대한 관심은 그들 자신에 대한 관심보다도 더 그들의 마음 깊이에 있다(17,18절). "이러므로 우리 마음이 피곤하고," 그 무거운 짐 밑에 눌립니다. "이러므로 우리 눈이 어두우며" 우리의 시력이 다 하였습니다. 이것은 흔히 정신 착란, 또는 졸도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시온산이 황무한 때문입니다. 그 거룩한 산 위에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다른 황폐한 것을 인하여는 우리 마음이 슬프고 우리 눈이 눈물을 흘리나 이것을 위하여는 우리 마음이 피곤하고, 우리의 눈이 어두울 정도입니다." 종교를 파멸시키겠다고 협박하니까 종교에 대한 관심이 약해지는 것만큼 상한 백성의 마음을 무겁게 근심시키는 것은 없다는 것에 주의하자.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한 어떤 일시적인 괴로움보다 그것이 더 우리를 괴롭힌다고 하면, 그리고 우리가 만일 그것을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의 위로인 것이다.
백성들이 시온산을 더럽혔으므로 여우가 숲 속에서 자유롭게 놀던 것처럼, 그 위에서 놀 정도로 시온산을 황무케 하신 것은 의로우신 것이다. "시온산이 시랑의 밥이 된 것은" (시 63:10) 실로 슬픈 일이다. 그러나 이는 무엇보다도 죄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시 13:4).
Ⅱ. 그들은 하나님과 그 통치의 영원성에 대한 교리로서 스스로를 위로한다(19절).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이것은 그들이 "곤고한 자의 기도라" 고 제목을 붙인 편지에서 배운 것이다(시 102:12). 피조물로부터의 모든 위로가 우리에게서 떠나가고 우리의 마음이 낙심하였을 때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 자신을 고무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영원성에 대하여. "당신은 영원히 계시오며" 세상을 뒤흔드는 것은 세상을 만드신 이를 교란시키지 못한다. 땅 위에는 변혁이 있으나 영원한 마음은 변함이 없다. 하나님은 아직까지도 동일하시며, 지혜와 거룩하심과 의로우시고 선하심이 영원하시다. 그에게는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
2. 결코 실패하지 않는 그 통치의 영원성에 대하여. "주의 보좌는 세세에 미치나이다." 영광의 보좌, 은혜의 보좌, 그리고 통치하는 보좌는 모두 변하지 않고 옮겨지지 않는다. 이것은 "면류관이 우리 머리에서 떨어질 때도,"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사실이다. 우리의 보호자이었던 방백들의 보좌는 흙으로 떨어지고 그 속에 묻혔지만 하나님의 보좌는 아직까지 계속된다. 그는 아직까지 세상을 통치하시며 선한 교회를 위하여 세상을 통치하신다. 오! 시온이여, 주께 다스리시니 그 다스림이 영원하시도다.
Ⅲ. 지금 처하여 있는 비천한 상황에 대하여 하나님께 겸손히 간언을 드린다. 지금 그들이 하늘의 찌푸림 아래 있는 것이다(20절). "마치 우리가 마음에서부터 완전히 버림을 받은 것처럼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마치 우리가 당신의 나타나시는 증거를 완전히 빼앗긴 것처럼 우리를 이같이 오래 저버리시나이까? 마치 당신이 우리를 철저하게 버리시기나 한 것처럼 어찌하여 우리의 구원을 늦추십니까? 비록 당신의 성소의 보좌는 부서졌다 해도 당신은 동일하시며 하늘의 보좌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그들은 그들이 가졌던 하나님의 사랑과 나타나심의 가치를 표현한다. 지금은 그 증거와 위로를 빼앗긴 것이 사랑과 현현의 가치는 장구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마지막 구절을 이 같은 간언으로 읽어도 좋다. 난외주에는 그같이 기록하였다.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나이까? 우리를 향하여 웃으심과 자비스럽게 기억하심 뿐만 아니라 우리를 향하여 얼굴을 찡그리심과 당신이 하시는 표징까지도 우리에게 가까이 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면전에서 우리를 버리시고 우리가 당신에게 가까이 가는 것까지도 버리셨나이까? 당신은 우리에게 영구히 진노하시나이까? 당신의 선하심과 미쁨으로 화해시키는 것은 어찌 되오며 견고한 계약은 어찌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다시 읽는다. "당신이 우리를 버리셨나이다. 당신의 가지신 두려움의 근거를 우리에게 주셨나이다. 주여!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는 이 시험 중에 있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을 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와 더불어 변론을 할 수는 있으며, 또한 그가 우리를 버리셨다고 우리가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지마는 우리는 그의 판단에 대하여 겸손히 그에게 변론할 수 있다는 것에 유의하자(예언자 예레미야와 같이; 렘 12:1). 특별히 그의 성소의 장구한 황폐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이다.
Ⅳ. 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자비와 은혜를 열심히 기도하였다. "여호와여! 영원히 우리를 버리지 마시고,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소서(21절)." 이 말들은 마지막에 놓여지지 않았지만 그러나 랍비들은 저 우울한 말들로(22절) 끝맺을 책들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이 기도를 되풀이한다. 즉, 해는 구름 아래로 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 말씀들을 쓰는데와 읽는데 있어서 마지막을 삼았다. 그들이 여기에서 기도하는 것은
1. 그들이 자비하심을 받기에 적합하도록 준비하고, 하나님의 은총이 그들에게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리소서."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저버리고 잊어버리신 것을 불평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는 당신이 우리에게 돌이키소서가 아니고, 우리를 당신에게 돌이키소서이다. 이것은 멀리 떨어진 이유가 그들 자신에게 있는 것을 승인하는 뜻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결코 누구든지 하나님을 떠나기 전에는 먼저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시며 또한 그들이 하나님을 멀리하지 아니하는 한 그들을 멀리하지 아니하신다. 이것은 반복되는 기도와 일치한다(시 80:3, 7, 19).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추사" 성실한 회개와 개심으로 우리를 우상 숭배에게서부터 당신에게로 "돌이키소서. 그러면 우리가 돌아가겠나이다." 이것은 그들 자신이 하나님께로 돌아 가기에는 약하고 무능하다는 것을 더욱 암시한다. 우리의 본성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려는 경향은 있으나, 그의 은혜가 우리의 의지와 행동 양면에 작용하기 전에는 그에게로 돌아가려는 성향이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진실로 고백할 수 있는 은혜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를 돌이키소서.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돌이킬 수 없고 다만 끝없이 방황할 뿐입니다. 우리를 돌이키소서. 그러면 우리가 돌아가겠나이다" 라고 진실로 고백할 수 있는 은혜는 그렇게도 능력있고 효력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진해서 돌아가려는 날은 능력 있는 전능한, 권능의 날이기 때문이다(시 110:3).
2. 자비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를 당신에게로 돌이키소서. 옛날과 같이 우리의 날들을 새롭게 하소서. 우리의 선조들이 오래 전에 누리고 장구히 계속되었던 것과 같은 행복과 상태가 되게 하소서. 우리를 처음과 같이 본래와 같이 되게 하소서" (사 1:26). 만일 하나님이 그의 은혜로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시면 그는 그의 은혜로 우리의 날들을 새롭게 하실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독수리와 같이" 우리의 "청춘을 새롭게" 하실 것에(시 103:5) 주의하자. 회개하고 그들이 먼저 할 일을 하면 기쁘게 되고 위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는 영원부터 있었다(시 25:6). 그러므로, 그들이 희구하면 당시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전부 잊으신 것같이 보인다 할지라도 영원부터 있는 자비는 영원까지 있을 것이다. 아멘. <cafe.daum.net/correcttheology>
할렐루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Whatever you do, work at it with all your heart, as working for the Lord, not for men, since you know that you will receive an inheritance from the Lord as a reward. It is the Lord Christ you are serving.
_ 골로새서 Colossians 3:23-24
† 예레미야애가 5장
[SYNOPSIS]
본장도 히브리어 알파벳의 수효인 스물 두 개의 절로 구성되어 있으나, 알파벳 순서대로 배열되는 답관체의 형식을 띠지는 않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현재 처한 비참한 상황을 토로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호소하면서 그 감정의 북받침이 극에 달한 나머지 시의 정형(定型)을 제대로 지킬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비탄에 잠긴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의 죄악을 통회 자복하면서 하나님 앞에 눈물을 쏟아 놓는다. 그 역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보고 가슴아파했으며, 선민 유다가 당하는 수욕을 보고 몸부림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새로운 진리를 터득하게 된 것이다. 곧 시온 산에 있는 성전은 파괴되었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하다는 진리, 또한 통치자들의 궁전은 파괴되었지만 ‘주의 보좌’는 영원하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도 파괴시킬 수없는 하나님의 왕권에 대한 깨달음이 그를 비탄 속에서 건져주었던 것이다.
[CONTENTS]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이 당하는 고난을 하나님께 탄원하면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또한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대적들에게 당하는 참상을 낱낱이 그리면서 하나님께 유다를 다시 회복시켜 달라고 간구한다.
“1~2. 여호와여,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보옵소서. 우리의 기업이 외인들에게, 우리의 집들도 이방인들에게 돌아갔나이다.”
‘기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소유로 약속하신 가나안(=팔레스타인=이스라엘)땅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땅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약속의 땅으로 주어져서 여호수아 시대에 비로소 정복되었다(창 12:1; 13:14~17; 수 21:43~45).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범죄함으로써 이 축복의 땅을 상실하였던 것이다.
“3~10.”
- 우리는 아버지 없는 외로운 고아가 되었고, 우리 어머니들은 전부 과부 신세가 되고 말았으니, 이제 우리는 우리의 물을 마시는 데도 돈을 주어야 하고, 우리의 땔감을 얻는 데도 값을 치러야 하며, 우리를 뒤쫓는 원수들이 우리 뒤에서 바짝 추격하고 있으므로, 우리가 몹시 지쳤지만 잠시도 쉴 틈이 없나이다.
우리가 먹을 양식을 구해 우리의 배를 불리려고 애굽 사람들과도 손을 잡았고, 앗수르 사람들과도 손을 잡았나이다. 우리의 조상들이 죄를 지었지만, 이제 그들은 다 가고 없어졌고, 지금 우리가 남아서 조상들의 죄악을 짊어지고 있나이다. 비천한 종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지만, 그들의 손에서 우리를 구해낼 자가 아무도 없나이다.
도성에서는 더 이상 양식이 없으므로 먹을거리를 구하려고 광야로 나가지만, 그곳에는 칼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는 우리의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너무도 굶주린 나머지, 굶주림의 열기로 우리 살갗이 아궁이처럼 검게 타버렸나이다.
예레미야는 함락된 유다의 참상을 또다시 언급하면서, 유다 백성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11~16. 대적들이 시온에서 부녀들을, 유다 각 성읍에서 처녀들을 욕보였나이다. (대적에게 사로잡힌)지도자들은 그들의 손에 매달리고(처형당하고), 장로들의 얼굴도 존경을 받지 못하나이다. 청년들이 (힘겹게)맷돌을 지며(돌리며), 아이들이 나무를 지다가 엎드러지오며, 노인들은 다시 성문에 앉지 못하며, 청년들은 다시 노래하지 못하나이다.
우리의 마음에는 기쁨이 그쳤고, 우리의 춤은 변하여 슬픔이 되었사오며, 우리의 머리에서는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 때문이니이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법도에 따라 살아가는 모든 시민 질서가 파괴되었으며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끊겨버린 서글픈 현실을 토로하고 있다. 장로들이나 재판관들이 재판을 주재하던 성문도 이제 폐허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백성들은 공의로운 율법에 따른 재판도 받지 못하고 바벨론에서 파견된 관리들에 의해 제멋대로 결정되는 판단에 아무 말 없이 굴복(屈服)해야만 했던 것이다. 한편, 지금까지 당면한 재난에 대해 절규한 것이 단순히 불평불만을 토로하기 위함이 아니라 민족의 죄악을 통렬하게 고백하는데에 주요 목적을 두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죄의 고백과 회개가 있을 때, 비로소 구원의 호소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확신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17~18. 이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피곤하고, 이러므로 우리 눈들이 어두우며, 시온 산이 황폐하여 여우가 그 안에서 노나이다.”
당면한 모든 재난이 범죄로 말미암았음을 고백한 후,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범죄의 결말을 ‘이러므로’라고 다시금 진술한다. 특히 여기서는 수많은 재난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비극이 지적되고 있는데, 그것은 곧 시온의 황폐함이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임재 장소로서 거룩히 구별되어졌던 시온이 들짐승의거주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언약 백성에게 있어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질 않은가.
예레미야는 신실한 자들에게 극심한 재난 속에서도 하나님 앙망하기를 그치지 말라고 격려한다. 하나님은 자신과 맺은 언약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시며, 무한하신 사랑을 끝까지 베푸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진다면 새로운 날이 반드시 회복될 것이다.
“19.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불변하심에 근거하여 미래의 구원을 호소하며 밝은 소망을 피력(披瀝)하고 있다. 암울(暗鬱)한 현실을 볼 때는 절망의 탄식밖에 나오지 않지만 세상 만물과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언약에 신실(信實)하신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새 힘을 얻고자하고 있다.
예레미야는 언약(言約)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옛 영광을 회상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벨론으로부터 구속(救贖)하시기를 마지막으로 탄원(歎願)함을 끝으로... 끝났다.
“20~22.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참으로 크시니이다(정녕 주께서는 우리를 아주 저버리신 것입니까? 정녕 주께서는 우리에게 베푸신 그 크신 진노를 영영 풀지 않으시렵니까? 그렇지 않으시다면, 우리를 속히 회복시켜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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