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의 약속(애3장)
1. 선지자의 애통(애3:1-18)
1) 민족의 아픔이 선지자의 아픔
2) 하나님의 사람의 애통
2. 고난 중에 소망을 가지고 간구함(애3:19-54)
1) 겸손하게 하나님께 간구함
2) 기다리는 자에게 응답하심
3. 하나님께의 간구(애3:55-66)
1) 원수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간구
2) 하나님은 백성들의 신원에 응답하심
1. 신명기 법전에 나타난 우상숭배와 거짓선지자에 대한 입장
1) 우상 숭배(신13:6-18; 신12:29-32)
2) 거짓 선지자(신13:1-5; 신18:9-22)
2. 멍에와 상급
1) 멍에
2) 상급
3. 바사 왕 다리오(Dar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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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의 약속(애3장)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의 고초를 피력하면서 하나님께 주의 자비와 긍휼에 따라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시금 불쌍하게 여겨달라고 간구한다. 이러한 예레미야의 호소는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하나님은 유다와 예루살렘 멸망 후에 곧바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셨다. 그 약속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면서 영원한 나라의 회복에까지 연결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경륜과 그 사랑에 의지하며 겸손하게 낮아져야 할 것이다.
1. 선지자의 애통(애3:1-18)
선지자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인하여 고난당한 자는 내로다"(애3:1)라고 말했다. 여기서 '노하신 매'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왜 '고난당한 자'가 선지자 예레미야 자신이라고 했는가? 또한 선지자 예레미야의 고난당하는 진상은 무엇인가?
1) 민족의 아픔이 선지자의 아픔
하나님의 노하셨다는 것은 유다와 예루살렘이 우상 숭배와 거짓 예언과 죄악이 관영하므로 바벨론이란 채찍을 들어 징계하신 것을 말한다. 바벨론의 침략은 주전 605년에 1차 침략이 있었고, 2차 침략은 주전 597년에 있었으며, 3차 침략은 주전 586년에 있었다.
이러한 침략으로 예루살렘은 황폐하게 되었고, 많은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으며, 선지자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시위대 장관인 느부사라단에 의하여 라마에서 풀려나서 자유의 몸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왔다.
2) 하나님의 사람의 애통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고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을 보며 애통해 하는 아픔을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마음이 불붙는 듯하여 죽은 영혼들에게 그 사랑을 전파한다.
또한 하나님을 거역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사람과 민족을 보면서 안타까이 여기고, 그 민족과 개인의 죄를 위하여 중보 기도를 담당하는 자이다. 우리는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복음에 빚진 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2. 고난 중에 소망을 가지고 간구함(애3:19-54)
선지자 예레미야는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3:25,26)라고 했는데, 잠잠히 기다리라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다고 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한 입에 티끌을 대라고 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1) 겸손하게 하나님께 간구함
하나님은 기다리고 잠잠히 참는 자에게 선을 베푸신다. 따라서 고난과 환난 중에도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면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때를 맞을 수 있다. 그리고 젊었을 때 멍에를 메면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할 수 있고, 하늘의 상급 또한 크다. 하나님의 일에 숙달되어서 더욱 성숙하고 능숙하게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입에 티끌을 대라는 말은 자신을 지극히 낮추라는 말로서 겸손하게 낮아지며 수욕을 달게 받으면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태도를 의미한다.
2) 기다리는 자에게 응답하심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비참한 모습을 보며 한없는 탄식을 하면서도, 다시금 겸손하게 기도하며 참고 기다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회복해 주실 것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멍에를 계속하여 짊어지고 나아갈 것을 종용하였다.
하나님의 멍에는 인간의 힘으로 지기에는 버겁고 힘들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멍에를 친히 지시기에 우리는 순종한으로 따라갈 따름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큰 성과를 이루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따라서 우리는 겸손히 낮아져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것이 중요하다.
3. 하나님께의 간구(애3:55-66)
선지자 예레미야는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니다"(애3:55)라고 했는데, 그 의미는 무엇인가? 또한 예레미야는 "저희가 내게 보고하며 나를 모해함을 주께서 다 감찰하셨나이다"(애3:60)라고 했는데, 무엇을 보수하고 모해하였는가? 그리고 저의 손으로 행한 대로 응보해 주시기를 구했는데, 이는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1) 원수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간구
선지자 예레미야는 실제적으로 깊은 구덩이에 빠뜨림을 받아 극한 고난을 받은 적이 있다(렘38:6). 그렇지만 여기서의 깊은 구덩이는 바벨론에 의한 큰 수욕과 고난을 의미한다. 따라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큰 수욕과 고난 중에 하나님께 간절한 간구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벨론 군이 예레미야에게 행한 모든 일을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신다고 예레미야는 피력하였다. 또한 '저의 손으로 행한 일에 대한 보응'은 바벨론이 메대 바사에게 끝내는 멸망당할 것을 예언한 것이다. 이 간구는 주전 539년에 바사의 다리오에 의하여 성취되었다.
2) 하나님은 백성들의 신원에 응답하심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신원을 간과하시지 않는다. 특히 큰 수욕과 고난 중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에 속히 응답하신다.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를 주권적으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자신의 주권을 행하심에 있어 하나님의사람들의 간구를 신원하여 행하신다. 따라서 민족을 위한 믿는 자들의 간구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이다.
믿는 자의 기도를 기쁨으로 신원하시는 하나님께 우리는 밤낮으로 부르짖어, 민족과 세계에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속히 이루어지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민족이 바벨론에 의하여 큰 수난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애통하며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다. 또한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자신의 간구를 이미 능히 알고 계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에 대하여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소망은 역사적으로 일점 일획의 변함없이 성취되었다. 따라서 우리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 열심히 간구하여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의 간구에 친히 천군천사를 동원하시어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실 것이다.
1. 신명기 법전에 나타난 우상숭배와 거짓선지자에 대한 입장
1) 우상 숭배(신13:6-18; 신12:29-32)
① 우상 숭배의 미혹에 대한 하나님 백성의 태도는 발자취를 따르지 말며, 연구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매우 가증히 여기시는 일들을 이방 민족이나 우상 숭배자들이 행하여 왔기 때문이다.
② 유혹의 대상이 가까운 친구, 친척 그리고 가족의 일원일 경우, 백성들의 태도는, a. 좇지 말라, b. 말을 듣지 말라, c. 긍휼히 보지 말라, d. 덮어 숨기지 말라, e. 용서 없이 돌로 쳐서 죽이라 등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배반하려는 행위이기 때문이며, 다시는 악을 행하지 못하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③ 유혹의 대상이 성읍을 대상으로 한 불량자, 혹은 사악한 자녀들일 경우, 백성들의 태도는, a. 사실 여부를 자세히 조사하여 알아보라, b. 사실화가 되면 성읍 거민을 칼로 죽이라, c. 그 성읍과 거하는 모든 것, 생축을 칼로 죽이라, d. 전리품을 불살라 하나님께 바치라, e. 없앨 물건에 절대 손대지 말아라, f. 영원한 폐허로 남겨 두고 다시는 성읍을 건축하지 말아라(신13:12-18)
④ 우상 숭배 사실 여부를 소문으로 들었을 경우 백성들의 태도는, a. 소문이 사실인지의 여부를 잘 조사해 보아라. b. 만약 소문이 사실이라면 우상 숭배자를 성문에 끌어내어 돌로쳐서 죽이라, c. 죽일 때의 조건은 두세 사람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 한 사람의 증언은 불가하다, d. 증인이 먼저 돌로 치라(신17:2-7) 등이다.
2) 거짓 선지자(신13:1-5; 신18:9-22)
① 제거의 대상: 복술자, 신접자, 박수, 초혼자, 무당, 요술하는 자, 요술객과 무당, 길흉을 말하는자, 인신 제사를 드리는 자, 거짓 예언자, 꿈으로 점치는 자 등이 있다.
② 백성들의 태도: a. 하나님만을 따르라, b. 그분만을 섬기라, c. 그분만을 경외하라, d. 그분의 명령을 지켜라, e. 그분의 말씀을 청종하라. f. 그분에게 충성하라, g. 그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지 말고 용납하지도 말라, h. 죽이라 등이다.
③ 제거하는 이유: a. 하나님께서 용납하지 아니한다, b. 하나님을 배반하게 하는 것이다, c. 하나님의 생명의 길에서 떠나게 하기 때문이다.
2. 멍에와 상급
1) 멍에
zogo"(조고스; 멍에)는 수레를 끄는 짐승들을 연결시키기 위해 목에 걸쳐 놓은 것을 말한다. 대하10:4에서 이 단어는 폭정을 나타내고, 사14:29;사19:10;사47:6, 단8:25에서는 외국의 지배를 의미하고 있다. 구원은 멍에를 벗기는 것으로 모사되고(사9:4) 있으며, 하나님께서 멍에를 깨뜨리시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기도 하다(레26:13). 죄인들은 하나님의 멍에 베기를 원치 않지만(렘2:20), 궁극적으로 열방들은 그 멍에를 즐거이 멜 것이다(습3:9). 멍에의 상징적인 의미는 굴복(렘27:8), 무거운 고역(왕상12:4-14), 압박(신28:48), 죄의 짐(애1:14; 갈5:1) 등을 뜻한다.
2) 상급
헬라어 신약성경에는 상급 개념을 가진 용어가 다양하게 나온다. 그중에 '상'이라는 말로 번역된 가장 중요한 단어로 misqov"(미스도스)와 그 파생어를 들 수 있다. 미스도스는 헬라 및 로마 세계에서는 일의 대가, 급료 혹은 제사장의 사례금 그리고 신의 보응을 뜻하였다. 칠십인역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의미들이 등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축복의 표시로서 의인들에게 이 세상에서 보상을 주신다(창15:1; 사40:10). 신약에서 이 낱말은 희생을 치루면서까지 일을 잘 해낸 것에 대해 부여하는 명예(눅6:23)뿐 아니라, 고용되어 맡은 일을 행한 것에 대해 지불하는 삯의 개념(마20:8)도 내포하고 있다. 성경은 다른 많은 상급들을 묘사하고 있고, 또 종종 그 상을 받을 수 있는 특정한 삶의 방식을 계시하기도 한다.
3. 바사 왕 다리오(Darius)
성경에는 다리오 왕이 3명 나타난다. 첫째는 메대 사람 다리오로서, 62세에 벨사살 왕을 죽이고 바벨론의 왕이 된다(단5:30,31). 다니엘서 외에는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으며, 당대의 비문들은 나보니두스(벨사살)와 고레스 사이에 다른 바벨론 왕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다. 둘째는 캄비세스 왕의 뒤를 이어 바사와 바벨론의 왕이 된 다리오 1세로서 B.C.521-486년까지 다스렸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도록 도와주었고(스4:5; 학1:1), 또한 고레스 왕의 칙경을 확인시켜 주었다(스6:1-14). 셋째는 다리오 2세로서 B.C.423-408년까지 바사와 바벨론을 다스렸으며, 느12:22에는 바사 왕 다리오라고 불렀다.< 갓피플(GODpeople) 지식자료실 성경총론 > 자료 옮김.
예레미야애가 3장
Ⅰ. 여호와의 진노와 그 결과에 대한 슬픔 3:1-20
이 장의 표제로 시편 102편의 표제인 '곤고한 자가 마음이 상하게 그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하는 기도'가 더 적절할지도 모른다. 선지자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한탄한다.
(1) 하나님이 진노하셨다는 점을 한탄하였다. 바로 이것이 이 쓰디쓴 고통의 원인이다(1절).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인하여 고난당한 자는 내로다. 그는 이것을 아주 민감하게 느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그의 백성들에게 진노하신다. 그러나 이것은 잘라 내버리려는 칼이 아니고 고쳐 주시려는 매이다. '여호와의 노하신 매'는 그들에게, 현재의 슬프지만 결국은 유익한 것이 된다. 이 매로 인하여 우리는 고난당할 것을 예기해야 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 고난 이상의 것을 볼 수 있다면 결코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진노는 당연한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선지자 자신이 흑암 중에 행하게 된 것을 한탄하였다. 흑암은 고난과 혼란을 의미한다. 이것이 한탄하는 이유이다(2절). 나를 이끌어 흑암에 행하고 광명에 행치 않게 하셨으며. "그가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의 사슬로 나를 묶으사 내가 두려워하는 흑암으로 이끄시고 바라는 광명으로는 행하지 못하게 하시는도다." 나를 흑암에 거하게 하시기를 죽은 지 오랜 자같게 하셨도다(6절). "무덤같이 어두운 곳에 완전히 잊혀져 버린 사람처럼 만드셨도다."
(3) 하나님이 그에 대하여 적으로 나타나신 점에 대해 한탄하였다. 손을 돌이켜 자주 자주 나를 치시도다(3절). "그는 내가 깨달을 때까지 '종일토록 나를 치셨도다.' 나는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시73:14). 하나님께서 손을 돌이켜 치실 때 우리는 그의 마음이 우리에게서 돌이키시지는 않았는지 생각하게 되는 시험에 빠진다. 저는 재게 대하여 엎드리어 기다리는 곰과...은밀한 곳의 사자같으사(10절). "곰과 사자같이 심판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니 어느 길로 가더라도 내가 안전하지 못하도다." 활을 당기고 나로 과녁을 삼으심이여 전동의 살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12,13절). "그로 인하여 나는 마음에 상처를 입었도다."
(4) 유다의 상태는 나이 많아 노쇠한 사람으로 비유된다(4절).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피부는 늙어서 시들어졌고 내 뼈는 꺾어졌나이다." 나를 쓴 것으로 배불리시고(15절). 쓴 것이란 지금 받는 고통의 쓰라림을 의미한다. "그는 내 음식 속에 '조약돌'을 섞어 놓으셔서 '내 이를 꺾어' 놓으셨도다(16절). 또한 그는 애통하는 사람이 하는 것처럼 재로 나를 덮으셨도다." 혹자는 '재로 나를 먹이셨도다'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5) 선지자는 도망할 길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15절). 나를 에우셨으며. 포위된 성을 향하여 요새나 포대를 쌓듯이 그를 에우셨다. 열려진 한 길마저도 완전히 메워졌다. 하나님은 담즙과 쑥으로 사방에서 그를 둘러 싸셨다. 그는 초조하고 애가 타서 도망할 길을 찾아 보았으나 찾지 못하고 지치기만 하였다(7절). 나를 둘러 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그는 극악한 범죄자처럼 이중으로 차꼬에 묶였으니 '그의 사슬이 무겁게' 되었다. 하나님은 또한 '다듬은 돌을 쌓아 그의 길을 막으셨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는 석벽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첩경을 굽게'하셨다. 그가 여기 저기 다녀보았으나 여전히 제자리였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그의 길로 치우시게' 만드시고 그의 목표를 꺾으셨다. 또한 '그 몸을 찢으시며 그로 적막하게' 하셨다. 그의 영혼의 위안거리를 모두 박탈하신 것이다.
(6) 하나님이 그의 기도에 귀를 막으셨다(8절). "하나님께서 들으시도록 내가 간절히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셨도다." 때때로 하나님은 심지어 '주의 백성의 기도'에도 노하시는 것처럼 보인다(시 80:4). 기도가 응답되는 위로를 얻지 못하는 경우는 실로 통탄할 일이다.
(7) 이웃이 그의 고통을 조롱거리로 삼는다(14절).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가 되었도다. 모든 사악한 자들이 조롱했다. 그들은 공적인 심판과 특히 선지자 예레미야의 슬픔을 웃음거리로 삼았다.
(8) 그는 구원받기를 포기하려 한다. "하나님은 내게서 평강을 빼앗아 가실 뿐만 아니라 '내 심령으로 평강을 멀리 떠나게' 하시도다(17절). 그리하여 나는 '복을 잊어 버렸도다.' 복을 받아본지 오래되어 이제는 생각조차 나지 않도다. 이제 슬픔과 노예 생활에 익숙하여져 기쁨과 자유가 무엇인지 잊어 버렸도다."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18절). "나는 더 이상 하나님을 내 지주로 의지할 수가 없도다. 나의 하나님은 무정하기조차 하도다."
(9) 고통을 생각할 때마다 슬픔이 되살아나고 과거에 대한 회상은 과거의 번성했던 것 만큼이나 쓸쓸하다(19,20절). 나의 고통과 죄악, 즉 나의 고통과 그 고통이 있게 한 죄악이 '고초와 재난' 중에 있는 '쑥과 담즙'이다. 고난의 잔을 쓴 잔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죄인 것이다.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은 포위당했을 때의 고통스럽던 기억을 계속 간직하고는 시온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시 137:1,5).
Ⅱ.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이로 3:21-36
여기에서 구름은 흩어지고 하늘이 개이기 시작한다. 즉 본문에는 분위기가 바뀌어 시온에서 애통하던 자들이 조금씩 즐거움을 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소망에 대한 마음은 여전히 찢긴 채로 있다. 선지자는 여기서 완전히 찢어진 마음을 치유하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회상'한다. 그것은 소망의 근거를 제시해 주는 것이다(21절). 중심에 회상한즉. 어떤 역본에는 '내 마음을 돌이켜본즉'으로 되어 있다. 때때로 우리 마음 속에 지니고 있던 것들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 마음에 돌려 주실 때까지 잊혀진 상태로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마음을 돌이켜본즉 소망이 있나이다. 그것이 저희가 자꾸 절망으로 빠져드는 것으로부터 지켜 주나이다."
(1) 현재의 상황은 좋지 않지만 더 이상 나빠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이다. 우리는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나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진멸되지' 않는다(22절).
1) 그들은 끊이지 않는 자비를 깨달았다.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불타는 떨기나무 같아서 진멸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에게 '핍박을 받아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린 바 되지' 않는다. 따라서 비록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는 않으며'(고후 4:9) 진멸되지 않고, 은과 같이 용광로에서 제련을 받을지언정 찌꺼기 같이 버려지지는 않는다.
2) 그들은 이 끊이지 않는 자비의 근원을 깨달았다. 여호와의 자비와...무궁하시므로. 하나님은 다하지 않는 자비의 샘이요 자비의 아버지이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로 인하여 재앙을 받는다면 벌써 오래 전에 진멸되었을 것이나 다행히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심판을 받는 것이다.
(2) 그들은 비록 깊은 고통 중에 처해 있지만 아직도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그 언약의 신실성을 체험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시지 않는다고 여러 번 불평했었다(참조. 애 2:17,21). 그러나 이제 스스로를 바로잡고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1) 여호와의...긍휼이 무궁하시므로. 하나님의 긍휼은 진실로 무궁하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자신의 긍휼하심을 닫아 버리신 것같이 보일지라도 실상은 그렇지 아니하다. 그의 자비는 강물 같아서 결코 마르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 넘친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23절). 우리는 매일 아침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새롭게 경험한다. '아침마다 자기의 공의를 드러내시며'(습 3:5). 우리의 위안거리가 끊어진다 해도 하나님의 긍휼은 끊이지 않는다.
2)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비록 예루살렘은 파괴되었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영원하다.
(3) 하나님께서는 현재나 앞으로도 그의 백성들에게 풍족한 행복을 채워 주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24절).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이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1) "내가 이 세상에서 갖고 있는 모든 것과 자유, 생활, 심지어 생명 그 자체를 잃는다 해도 하나님께 대한 나의 관심은 잃지 않으리라."
2) "내가 하나님께 대한 관심을 잃지 않는 동안에는 그것으로 족하도다. 나의 고난을 상쇄시키고 나의 잃어 버린 모든 것을 채워 주기에 충분한 것을 나는 소유하고 있도다."
3) "이것이 내가 의지하는 바라."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나를 도와 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하나님께 나를 맡기리라."
(4)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은 그를 믿는 것이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25절).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기다리며,' 기도로 '구하여야' 한다. 우리가 그를 구하는 것이 기다리는 자세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이것은 우리의 의무인 동시에 말할 수 없는 위로와 만족이 될 것이다). 그 구원이 올 것을 바라고 오기를 기다림에 있어서 우리는 고요하고 잠잠한 가운데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하지 말고 그 처분을 묵묵히 따라야 한다. '아버지여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5) 고통은 사실상 우리에게 이로운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견디기만 한다면 우리에게 유익이 될 것이다. 구원을 기다리는 것도 우리에게 좋은 일이지만 그 사이에 고통을 받는 것도 우리에게 좋은 일이다(27절).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많은 젊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갔다. 선지자는 이 포로 생활의 멍에가 그들에게 유익이 될 것이며 또한 이렇게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쓰다 보면 이것이 결국 그들에게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의 멍에는 고통의 멍에를 의미하는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젊었을 때에 이 멍에를 지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멍에는, 그것을 지지 않는다면, 길들여지지 아니한 황소와도 같이 교만하고 방종해지기 쉬운 자들을 겸손하게 만들어 준다. 그러면 젊었을 때 지게 되면 유익이 되는 그 멍에는 언제 매게 되는가?
1) 그때는 우리가 고통 중에 잠잠히 있을 때이다.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그렇게 앉는 이유는 하나님과 대화하고 우리 영혼과 교제를 나누며 모든 불만스럽고 의심스러운 생각을 억제하기 위해서이다.
2) 그때는 우리가 고통 중에 겸손히 참고 있을 때이다. '입을 티끌에 대는' 사람은 그 멍에로 인해 유익을 얻는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다는 표시로 손을 입에 댈 뿐만 아니라, '죄를 기억하고 슬퍼한다는 표시로 그 입을 티끌에 댄다'는 것이다. 죄로 인해 진실로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비록 입을 티끌에 댔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선한 소망을 품고 기뻐할 것이다.
3) 그때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에 대하여 온유해지고 그들을 용서해 주려는 마음을 지니게 될 때이다(30절). 우리 주 예수께서 이 일에 모범을 보이셨다. 곧 그는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신' 것이다(사 50:6). 남들의 비난과 멸시를 참을 수 있으며, 욕을 욕으로 고통을 고통으로 갚지 않는 사람들은, 그 멍에를 매는 것이 유익하며 자기에게 영적인 성장을 가져온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6)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사 그 백성들에게 고난을 주신 때를 따라서 적절한 위로를 주실 것이다(31,32절). 우리는 다음 사실로 인해 고난을 견디어낼 수 있다.
1) 우리가 버림을 때에라도 아주 끊이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인함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바로잡은 것이지, 의절할 것은 아니다.
2) 우리가 한동안 아주 끊어진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진짜 끊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함이다.
3) 우리가 어떤 슬픔에 빠져 있더라도 하나님의 손이 그 안에 계심을 인함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슬픔이 잠깐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벧전 1:6).
4)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슬퍼하도록 만드신 사람들에게도 긍휼과 위로를 많이 주심을 인함이다. 그는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해주실 것이다(호 6:1).
5)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와 다시 교제를 나누시는 것이 우리의 자랑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이라는 사실을 인함이다.
(7) 하나님이 우리를 슬프게 하신 것은 거룩하고 지혜로운 뜻을 위함이다. 그는 우리에게 재앙을 내리시기를 기뻐하지 않으신다(33절). 하나님은 고의적으로, 즉 '본심에서' 그리 하시는 것이 아니다.
1) 그는 우리가 그렇게 만들지 않으면 결코 고통을 내리시지 않는다. 만일 주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면 그것은 그에게 선한 것이기 때문이며, 만일 우리에게 쓰라림을 주신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것을 받을 만하고 또 필요하다고 여기시기 때문이다.
2) 그는 죄인의 죽음이나 성도들의 불안함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마지 못해서 하는 것이다. 그는 피조물 중 어떤 것이라도 고난을 당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는 그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시고 자신이 고통스러워하시고, 그들의 고통으로 인하여 영혼이 슬퍼하신다.
3)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실 때조차 그는 자비를 지니고 계시다. 그가 '인생으로 근심하게 하는 것이 본심이 아니라면' 하물며 그의 자녀들에게는 어떠하시겠는가? 그들은 하나님이 얼굴을 찌푸리시고 그 손에 매가 들려 있는 것을 볼 때에도, 믿음으로써 그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차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8)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바로 세우실 때에, 사람들을 그 손이나 또는 그 손의 도구로 사용하시지만 그들이 저지르는 불의함과 잘못을 기뻐하지 않으신다(34-36절). 하나님의 백성은 두 가지 방법으로 원수들에게 고통을 받는데, 이중 어느 하나도 하나님께서는 허락지 않으신 것이다. 따라서 선지자는 여기서 우리에게 이 사실을 확신시켜 준다.
1) 사람들이 무력으로 짓밟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셨다. '세상에 모든 갇힌 자를 발로 밟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갇힌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도 허락지 않으신다. 이미 쓰러진 사람을 짓밟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2) 만일 사람들이 정의를 가장하여 피해를 준다면, 즉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여' 자신의 권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게 하고 '사람의 송사를 억울케 하여' 잘못된 판결과 거짓 재판을 한다면, 하나님이 그 사실을 지켜 보고 계심을 명심해야 한다. 이 모든 일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얼굴 앞에서' 행해지는 것이다(35절).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인정하지 않으신다. 이 말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정의를 굽게 하거나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께 정면으로 대적하는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조만간 그와 같이 행한 사람들을 엄하기 질책하실 것이다.
Ⅲ.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해야 하는 의무 3:37-41
(1)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우리에게 내려진 고통에 대하여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된다(39절). 살아 있는 사람은...어찌 원망하랴. 하나님의 주권과 우주적인 섭리로부터 선지자는 이런 결론을 이끌어냈다. 어찌 원망하랴. 포로로 고통받고 있는 자들은 고통받는 중에도 하나님의 뜻을 순종해야 한다.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고통을 받는데' 어찌 원망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는 다같은 죄인이다. 그리고 우리 죄로 인하여 당연히 받아야 할 고통에 대하여 불평하고 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우리의 불의함으로 인해 받아야 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평하지 말자. 불평하는 대신에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해 주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써 우리도 그의 거룩하신 뜻에 순종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2)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죄를 일깨워 주고 하나님께 돌아와 편히 쉬도록 만들려는 것이다(40절).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조사해야 한다. 우리의 '행위를 조사'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조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막연한 소망으로가 아니라 단계적으로, 어떤 특정한 한 단계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방식으로, 즉 바라는 목표와 생활 철학, 그리고 인생의 방향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조사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통 중에 빠졌을 때가 바로 '자기의 소위를' 살펴볼 때이다(학 1:5). 그럼으로써 앞날을 위해, 잘못된 것은 회개하고 그치는 것이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는 길이다. 모든 사람들이 고통을 받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따져서 그들을 비난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오로지 우리의 행위를 조사해야만 한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가 전에는 그와 함께 있었으나 그를 버린 후에는 전과 같이 잘된 적이 없지 않느냐. 그러므로 이제 그에게로 다시 돌아가자." 기도할 때에는 마음도 같이 해야 한다. 흡사 우리의 말에 영혼을 쏟아 붓기라도 할 것처럼 '마음과 손을 아울러 들어야' 하다. 기도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하듯이 '영혼이 하나님을 우러러 보는' 것이다(시 25:1). 하늘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영히 거하기를 원하는 영혼은 자주 기도함으로써 그쪽에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길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Ⅳ. 다시 한번 고통을 호소함 3:42-54
선지자는, 살아 있는 사람은 원망해서는 안된다고 말하였으나 이제 구름이 다시 몰려 왔다.
(1) 그들은 자기들에게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는 점을 고백한다(42절). 우리의 범죄함과 패역함을. 죄를 '범죄함과 패역함'으로 부르는 것은 잘못 부르는 것이 아니다.
(2) 그들은 현재 당하는 고통에 대하여 불평한다. 하나님께 대한 비난이 아주 없을 수는 없다.
1) 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표시에 대해 불평한다. 주께서 사하지 아니하시고(42절).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43절). 그들은 하나님과 자기들 사이에 벽이 있다고 불평한다. 진노로 스스로 가리우시고. "매장되어 완전히 덮여지고 잊혀진 사람처럼 가리우셨나이다." 또한 그들의 기도가 상달되지 못한다고 불평한다(44절). 주께서 구름으로 스스로 가리우사 기도로 상달치 못하게 하시고. "그 구름은 너무 두꺼워 우리 기도는 그 안에서 잊혀졌나이다."
2) 그들은 이웃들의 비난에 대하여 불평한다(45절). 우리를...진개와 폐물을 삼으셨으므로. 만일 그들이 스스로를 천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원수들도 그들을 그렇게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3) 그들은 원수들이 그들에게 행한 파괴에 대하여 불평한다(47절). 나의 성읍의 모든 여자를 인하여(51절). 처녀 내 백성의 파멸을 인하여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48절). 원수들은 그들이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 쫓아왔다(53절). 저희가 내 생명을 끊으려고 나를 구덩이에 넣고. 그들은 구덩이 혹은 무덤에 던져진 자처럼 되었고 돌로 무덤 문을 막았던 관습대로 '그 위에 돌이 던져졌다.' 원수들은 유다를, 죽어 매장한 것처럼 여겼다. 그들의 멸망은 물에 빠져 죽는 사람으로 비유되기도 했다(54절).
4) 그들은 슬픔과 두려움이 너무 과하다고 불평한다(48,49절). 이것은 51절에 또다시 강조된다. 내 눈이 내 심령을 상하게 하는도다. "성읍과 나라가 황폐하게 된 것을 보면 볼수록 슬픔이 더하여지는구나."
5) 이런 슬픔 불평들 속에 한 가지 위로가 될 만한 말이 나온다(50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시기를 기다리는도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 눈물을 그치지 말아야 한다. 상황이 아무리 나빠도 하늘로부터 자비롭게 살피시는 눈길 하나로 모든 것이 바로 될 것이다. 그들은 눈물을 그치지 않은 채로 계속 기다렸다. 여호와께서 살펴보시기 전에는 그들 눈에 눈물을 닦아 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Ⅴ. 하나님을 소망함으로 얻는 위로 3:55-66
선지자 예레미야는 믿음과 두려움과 소망 사이에서 갈등하였다. 그러나 믿음이 최종적으로 승리하였다. 세 가지 면에서, 선지자와 그의 친구들은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1)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구름이 너무 두꺼워 기도가 상달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었다(44절). 그들은 '깊은 구덩이'에 던져져 죽은 자들 사이에 홀로 살아 있는 사람처럼 '주의 이름을 불렀다'(55절).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귀를 가리우지 마옵소서(56절). 그가 자기 기도를 '탄식'이라고 부른 것을 주목하라. 우리는 기도 중에 하나님께 탄식하고 그와 함께 호흡한다. 기도는 거듭난 사람의 호흡이다. 탄원함으로 자비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찬양함으로 내뱉는다. 이것은 영적 생활의 증거이면서 또한 그것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2) 하나님께서 그들의 두려움을 가라앉혀 주셨다(57절).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우리는 믿음의 눈을 통하여, 우리가 순종의 길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께서도 자비의 길로 우리에게 나아오심을 볼 수 있다.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3) 하나님께서 이미 그들을 위하여 나타나셨다(58절).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을 펴셨고 내 생명을 속하셨나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공의와 전지하심에 호소함으로써 스스로 위안을 얻는다. 여호와여 나의 억울을 감찰하셨사오니(59절). "내가 잘못한 것이 전혀 없으나 큰 고통을 받고 있나이다." 저희가...나를 모해함을 주께서 다 감찰하셨나이다(60절). "그들은 마치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노리개로 삼았듯이, 나의 불행을 조롱거리로 삼았나이다. 그들이 내게 행한 것같이 자신들도 받게 하소서. 그들이 우리를 대적하여 손을 폄같이 주의 손을 그들에게 펴소서."
예레미야의 고난 (예레미야 애가 3:1-20) 시편 103편의 표제는 본장의 앞에 매우 적당하게 덧붙여질 수 있다. "곤고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하는 기도" 왜냐하면, 여기에서 쏟아지고 있는 불평은 매우 감동적이고 유창하기 때문이다. 그것에 관하여 상세하게 관찰하여 보자. 그 예언자는 다음과 같이 불평한다. 1. 하나님은 진노하신다. 이것은 공통의 원인이 되고 그 고통을 맛보게 한다(1절). "내로다." 유달리 고통을 당한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의 매로 인하여 고통을 민감하게 느끼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때때로 그의 백성들에게 진노하시는데, 그것은 잘라내는 칼로서가 아니라, 바로 잡기 위한 채찍으로서 불평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주의하자. 그것은 그들에게 현재는 슬픈 것일지라도 그 목적에 있어서 유익한 시련으로서 "진노의 매" 인 것이다. 이 매로 인하여 우리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을 예기해야 한다. 우리가 이 채찍으로 인하여 보통 고난보다 더한 고난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불평하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진노가 정당하고 고난은 온순하며 자비를 동반하는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2. 그는 당황하고 있고, 캄캄한 어둠 속에 처해 있다. 어둠은 괴로워하게 하고 당혹하게 한다. 위로와 방향 지시를 갈망하게 한다. 이 불평하는 자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2절). 하나님은 그의 섭리로 말미암아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건들의 연속으로 말미암아 "나를 이끌어 흑암에 행하고, 광명에 행치 않게 하셨으며," 내가 두려워하는 어둠에 행하게 하고, 내가 바라는 "광명에 행치" 않게 하셨다. 그리고(6절) "나를 흑암에 거하게 하시니, 흑암은 죽은 지 오랜 자의" 무덤과 같다. 그 곳은 아무도 그가 누구였는지, 무엇을 하였는지 알지 못하고 아주 망각된 곳이다.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 속한 이스라엘은 빛의 자녀라 할지라도 때때로 흑암에 행한다는 것이다. 3. 하나님은 그에게 대하여 적으로서, 공공연한 적으로서 나타난다. 하나님은 그의 편에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깨달을 수 있을 때까지 "자주 자주 나를 치신다" (3절). "종일토록 손을 돌이켜 자주 자주 나를 치시도다. 나는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 (시 73:14). 하나님의 손이 돌이켜 우리를 계속하여 치실 때에 우리는 그의 마음도 또한 우리를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시험에 빠진다. 어느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호 5:14) "내가......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다" 고 하셨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말을 진실되게 하신다. "저는 내게 대하여 엎드려 기다리는 곰과 같으시며, 그의 심판으로 나를 놀라게 하며 은밀한 곳의 사자와 같으시다. 그러므로 내가 간 길이 어느 길이라 할지라도 나는 생명의 위험을 느꼈고, 나의 안전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적들을 향하여 쏘는가? 그러나 그는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을 쏘도록 정하여져 있는 활을 당겨서 이스라엘의 아들을 향하게 한다(12절). "나로 과녁을 삼으심이여." 나를 겨냥하고 나를 맞추려고 한다. "전통의 살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 그 살은 치명상을 즉 내적인 상처를 준다(13절). 하나님은 그의 전통에 많은 화살을 갖고 계시며, 그 살은 빠르게 날아서 깊이 박힌다는 것을 주의하자. 4. 예루살렘은 몸, 마음 둘 다 심하게 고통받는 사람과 같다. 이 유대인의 상태는 지금 나이 많아 쪼그러든 사람과 적합하게 비교된다. 거기에는 약이 없다(4절).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살과 가죽은 쇠약하고 마른다. 나는 곧 무덤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나의 뼈를 꺾으셨고, 그러므로 나는 나를 구원할 수가 없다(15절). 나를 쓴 것으로 배불리시니, 이 재앙의 맛은 쓴 것이다." 하나님은 영혼에 접근할 수 있고, 쓰게 하실 수 있으므로 그 영혼의 모든 즐거움을 쓰게 하시는 것이다. 위(胃)가 불결할 때는 그 안에 있는 먹은 모든 것이 불결한 것과 같다. "쑥으로 취케 하셨으며," 나의 고통의 맛으로 나를 취하게 하셨으므로 나는 말하고 행동할 줄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이 나의 빵에 "조약돌" 을 섞으셔서 그로 인하여 "내 이가 꺾어진다" (16절). 그러므로 내가 먹는 것이 즐겁지 않고 살로 가지도 않는다. "재로 나를 덮으셨도다." 이것은 슬퍼하는 자들이 행동하는 것과 같다(어떤 것은 다음과 같이 읽혀진다). "하나님은 재로 나를 양육하셨다. 나는 재를 양식같이 먹으며" (시 102:9). 5. 예루살렘은 도망가거나, 구원받을 길을 분간할 수가 없다(5절). "나를 에우셨으며, 요새와 포열(砲列)이 포위된 성읍을 향하여 세워졌다. 열려진 한 길마저도 완전히 봉하여졌다. 담즙과 수고로 모든 면에서 나를 에우셨다. 나는 초조하고 안달이 나고, 피곤하여 도망할 길을 찾으려 하나 아무것도 발견할 수가 없다" (7절). 나를 둘러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포위되어졌을 때,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었다" 고 말하여졌다(눅 19:43). "나는 사슬에 매여졌다. 이름난 범죄자는 이중 족쇄(足鎖)로 채우고 또한 쇠를 짊어지우듯이 여호와는 나의 사슬을 무겁게 하셨으며, 또한(9절) 다듬은 돌을 쌓아 내 길을 막으셨다. 내 길을 가시로(호 2:6) 두를 뿐만 아니라, 관통할 수 없는 돌벽으로 길을 끊었으므로 나의 길이 굽게 하셨다. 나는 앞 뒤와 왼쪽, 오른쪽으로 나아갈려고 노력해보나 여전히 되돌아 오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가로 질러서 굽은 길로 행하게 하신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고, 그들의 설계를 가로 지르고, 그들의 수단을 깨뜨리고서 고난의 굽고 좁은 길로 걷게 하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11절) "나의 길로 치우치게 하시며" 그는 나의 모든 협의를 분쇄하시고, 나의 계획들을 깨뜨려 버리셨다. 그러므로 나는 파멸이 강요되어졌다. "내 몸을 찢으시며" 그는 찢고 그리고 탈취하여 가셨다(호 5:14). 그리고 "나로 적막하게 하셨다." 모든 사회로부터 나를 탈취하고 내 영혼에서 위로를 빼앗으셨다. 6.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물리치신다(8절). "내가 진지하게 하나님으로 하여금 들으시게 하려고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나의 기도를 물리치시고,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귀는 그의 백성의 기도에 열려지고, 자비의 문이 그것을 노크하는 사람들에게 열려지는 것이 예사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들이 다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 에게까지도 닫혀졌다. 이렇게 하나님은 때때로 "그의 백성의 기도" 에게까지도 노하시는 것처럼 보인다(시 80:4). 그리고 그들의 상황이 응답하시는 유익뿐만 아니라 수리하시는 위로까지도 거절되었을 때는 참으로 통탄할 만하다. 7. 그의 이웃들은 그의 환난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14절).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그들 중에 있는 모든 악한 자들에게 줄 공적인 심판과, 특히 예언자 예레미야의 슬픔을 가지고 그들 자신과 서로 서로를 즐겁게 한 악한 자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다." 나는 그들의 노래요, 그들이 연주하는 악기요, 그들의 침뱉는 통(욥 17:6)이요, 그들의 노리개이다. 마치, 로마는 불에 타고 있는데 네로는 거문고를 타는 것과 같다. 8. 그는 구원이나 구출에 대하여 절망하게 되어 있다. "주께서 나에게 평화를 빼앗으실 뿐 아니라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멀리 떠나게 하신다" (17절). 그러므로 평강은 나의 힘이 닿는 곳에 있지 아니할 뿐 아니라 보이지도 아니한다. "내가 복을 잊어버렸음이여." 내가 복을 가졌던 때가 오래되고, 또 그것을 회복할 가망이 없으므로 나는 그 생각을 잊어버렸다. 나는 슬픔과 노예 상태에 익숙해 졌으므로 나는 기쁨과 자유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나는 사라져 버리고 결정나 버린 모든 것을 단념해 버리기까지 하였다. "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나의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18절). 나는 하나님에게 내 자신을 더 이상 머무르게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심을 발견할 수 없고, 또한 나의 환난이 끝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나의 이익을 위하여 나타나심을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내 상처는 고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며 하나님은 냉혹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의심없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의 의지가 연약한 것이다(시 77:10).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원한 힘" 이시고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 그 백성의 힘이시기 때문이다. 9. 슬픔이 고난의 기억으로 인하여 되살아나고 그 영향은 그가 번영하였던 것만큼이나 침울한 것이다(19,20절). "그는 불평을 잊기" 위하여 욥과 같이 애를 썼는가?(욥 9:27) 아! 그것은 소용없게 되어 있었다. "그는 고초와 재난, 쑥과 담즙," 모든 것을 기억한다. 그는 이렇게 그의 고난을 강조하여 말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고난에 대하여 그렇게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가 그의 고난을 회상할 때 그것은 무겁게 놓여 있었다. 재난은 그 자체가 고통이었었다. "나의 고통과 나의 범죄" 이것을 어떤 사람들은 나의 환난과 그 환난을 내게로 가지고 온 나의 죄라고 해석한다. 이것은 "고초와 재난" 속에 있는 "쑥과 담즙" 이었다. "고초의 잔으로 하여금 쓴 잔이 되게 한 것은 죄이다."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포위로 인한 모든 재난을 간직하고, 그들의 눈 앞에 아직도 불타는 예루살렘과 파멸이 어른거리어서 "시온을 기억하고 울었다." 아니 그들은 결코 "예루살렘을 잊을 수가 없었다" (시 137:1, 5).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니, 고난에 대한 감정으로 눌릴 뿐만 아니라 죄 때문에 쓰라려서 낙심이 된다. 우리의 고통과 재난에 대한 모든 기억 위에 있는 죄는 우리로 하여금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고, 우리의 수치스러운 참회를 새롭게 하게 한다. 이렇게 우리는 과거를 바로 잡고, 미래를 예방하는 것으로 인하여 유익을 얻을 수 있다. |
이스라엘에게 주는 위로의 말 (예레미야 애가 3:21-36)
여기에서 구름은 흩어지고, 하늘은 개이기 시작한다. 앞 부분에서 불평은 대단히 침울하였으나 여기서는 기분이 변화되고 시온을 슬퍼하는 자들은 약간의 기쁨을 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희망에 있어서는 마음이 약해진다. 철저한 낙심으로부터 마음을 구출하기 위하여 여기에 회상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소망에 대한 근거를 주는 것으로(21절) 앞에 오는 것에 대하여 언급되고 지나간 것에 언급하고 있지 않다. 난외주에는 "심정에 회상한다" 고 되어 있다. 우리의 심정에 가진 것, 우리의 심정에 놓여 있는 것은 때때로 하나님이 그의 은혜로 그것을 사용할 기회가 준비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심정에 그것을 떠오르게 하기까지 아주 잃어버리고, 잊어버려지는 것 같다.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으며 완전한 절망으로부터 구원된다." 다음에 그가 상기하는 것들을 보자.
Ⅰ. 그들이 당한 일들은 나쁜 것이지만 더욱 나쁘게 되지 아니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라고 그들은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나" 우리가 "멸절되지 아니한 것은 여호와의 자비이다" (22절). 우리가 재난 중에 있을 때 우리는 믿음과 소망을 고무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때리심과 동시에 또한 자비를 베푸시는 것을 관찰하여야 할 것이다. 당한 일들은 나쁘지만 그것은 사실은 더욱 나쁘게 되었어야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더욱 좋아질 수 있는 희망이 있다. 여기에서 보여지는 것은
1. 자비의 시내가 고백되었다. "우리가 멸절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할 것은 하나님의 교회는 모세의 가시덤불이 타고 있으나 "멸절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과거에 만난 곤경이나 현재 만날 수 있는 곤경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이 세상에서 시간의 종말까지 있을 것이다. 사람에게 "핍박" 을 받아도 하나님에게서 "버려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은과 같이 용광로 속에서 단련을 받으나 찌꺼기와 같이 "멸절되지 않는다."
2. 이 시내는 근원에까지 추적되었다. 그것은 "여호와의 자비들이다." 여기에 여러 가지와 풍성함을 의미하는 복수로서 자비들이 있다. 하나님은 다할 줄 모르는 무진장의 "자비의 샘" 이요, "자비들의 아버지" 이다. 우리는 모두 멸절되지 아니한 것은 하나님의 알뜰한 자비에 빚지고 있다는 것을 주의하자. 우리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멸절되었다. 그리고
Ⅱ. 그들은 그들의 깊은 고통 가운데서도 아직도 온유한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약 속의 진실하심을 경험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다고 몇 번이나 불평을 말한다(2:17, 21). 그러나 여기에서 그들은 그들 자신을 바로 잡고 다음 같이 고백한다.
1. 하나님의 긍휼은 다 없어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의 온유하신 자비를 닫아버리신 것처럼 보이는 진노 중에서까지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다하지 않는다. 이 자비의 강은 넘쳐서 끊임없이 흐르고 결코 마르지 않는다. 아니 그것은 "아침마다 새롭다." 매일 아침 우리들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새로운 실례들을 경험한다. 그는 "아침마다 긍휼을 가지고 우리를 방문하신다" (욥 7:18). "아침마다 자기의 공의를 드러 내시며" (습 3:5), 우리의 위로가 끊어질 때에도 하나님의 긍휼은 끊이지 않는다.
2.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위대하다. 계약이 깨어진 것처럼 보인다 해도 아직도 계약의 충만한 힘은 계속 된다고 그들은 고백한다. 또한 예루살렘은 비록 파괴되어졌다 할지라도 "여호와의 성실" 하심은 "영원하시다." 우리가 아무리 힘든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불평하는 생각을 품어서는 아니되고 그래도 그는 동정적이고 성실하시다고 고백할 준비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에 주의하자.
Ⅲ.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충분한 행복이시며 또한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택하였고 다음과 같이 그에게 의존하였다. 즉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것은
1. "내가 세상에서 가진 모든 것, 자유나 생활이나 거의 생명 그 자체를 잃어버릴 때에도 나는 하나님께 대한 나의 관심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는 것이다. 땅 위에 있는 기업은 멸절할 것이지만 하나님은 영원한 기업이시다.
2.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한 나는 그것으로 족하다. 나는 내 모든 고통과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채워서 균형을 잡기에 충분한 것을 소유한다." 우리의 기업으로부터 무엇을 빼앗긴다 할지라도 안심이다.
3. 이것이 내가 의지하는 것이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나를 지탱시키는 모든 것들과 고무시켜 주는 것들이 내게서 없어질 때에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 영혼의 기업이 되게 하고, 우리의 기업으로서 그분을 이용하고 우리의 슬픔 중에서 그분으로부터 위로를 얻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에 주의하자.
Ⅳ. 하나님과 관계하는 이들은 그를 신뢰하는 것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왜냐하면
1. 그는 그를 신뢰하는 자에게 선하시기 때문이다(25절). 그는 모든 이에게 선하시다. "그의 온유한 자비는 그의 지으신 모든 것 위에 넘친다." 모든 그의 피조물은 그의 선하심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는 독특한 방식 속에 계신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도다." 재난이 길고 구원이 늦어질 때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을 기다리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롭게 돌아오시기를 기다려야 할 것에 유의하자. 우리가 믿음으로 그를 기다리는 동안 기도로서, 그를 찾아야 한다. 우리의 "영혼" 은 그가 발견되기까지 그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구함은 우리의 기다림이 계속되도록 도울 것이다. 이렇게 기다리고,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로우실 것이다. 그는 그의 놀라운 인애(仁愛)를 그들에게 보이실 것이다.
2. 그렇게 하는 자들은 그것이(참고 기다림) 그들에게 좋다고 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26절).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좋다" (그것은 우리의 의무요, 또한 말할 수 없는 위로와 만족이 될 것이다). 바라는 길에 놓여 있는 곤란이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장차올 것을 바라는 것은 좋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불평없이 우리 자신을 불안하게 하지도 아니하고 하나님의 처분을 묵묵히 따르면서 고요히, 그리고 말없이 기다리는 동안, 오래 지체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오기까지 기다리는 것은 좋다. "아버지여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만일 우리가 이 기도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이 결국에는 잘 성취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Ⅴ. 고통은 진실로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옳게 견디기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유익을 끼칠 것이다. 구원을 바라고 기다리는 것만이 좋은 것이 아니라, 잠시 동안 고통 아래 있는 것도 유익한 것이다(27절).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많은 청년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그는 그 청년들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포로의 멍에를 짊어지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그들에게 말한다. 만일 그들이 그들의 상황에 자신들을 적응시키기만 하면 그리고 무거운 멍에가 그들 위에 놓여진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수고한다면 멍에를 메는 것이 그들에게 좋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명령의 멍에는 멜만 하다. 청년들이 젊었을 때 그 멍에를 메는 것이 좋다. 아무리 일찍 종교적이 된다 하더라도
너무 이를 수는 없다. 만일 우리가 젊었을 때에 멍에 아래에 종사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의무로 하여금 하나님께 열납되게 하는 일이고 우리 자신에게는 더 쉬운 일이 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멍에는 고통을 의미하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은 젊을 때에 이것을 짊어지는 것이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청년들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고, 진지하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멍에에 길들이지 아니한 황소와 같이" 거만하고 방종한 동안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떠나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참으로 젊을 때에 그것을 짊어지는 것이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어느 때 그 멍에를 짊어질 것인가? 예레미아 선지는 다음 구절에서 대답한다.
1. 우리가 고통 아래서 진지하고 조용할 때 우리가 "혼자 앉아서 잠잠하게 있을 때" 우리에 관한 하나님의 섭리의 처분에 불평하면서 또한 우리의 재앙을 불러오도록 자극하면서 불평하는 친구들 속으로 이리 저리 달리지 말자. 자기의 내면에로 돌아가서 혼자 앉아서 역경의 날을 생각하자. 그러면 극심한 시련 속에서도 평화로웠던 아론과 같이 우리의 입을 손으로 막고 불만스러운 모든 의심되는 생각들에 대하여 침묵하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우리 마음속에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고의적으로 멍에를 떨어내 버리지 말고, 하나님이 그것을 놓으실 때 참음으로 복종하면서 그것을 짊어진 사람들과 같이 멍에 아래서 조용하게 있어야 한다.
젊었을 때에 고통 중에서 자신들을 적응시키려는 사람들은 그들의 목을 멍에에 맞추고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하나님의 목적에 응답하고자 연구해야 한다. 그때 그들은 멍에를 메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들에게는 의의 평화로운 열매를 맺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우리가 우리의 고통 아래서 겸손하고 인내할 때 고통 중에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표로서 "입에 그의 손을 놓을 뿐만" 아니라, 슬픔의 표로서 입을 티끌에 대는 사람, 죄을 기억함으로 부끄러워하고 자기를 혐오하는 사람, 완전히 자신을 삭제하고 개심한 자, 그리고 시편 72장 9절에서처럼 먼지를 핥기까지 패망한 자가 되어 끌려온 자는 멍에를 멤으로써 유익을 얻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희망에 대한 기대 속에서 대단히 겸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에 우리 자신은 철저하게 무가치한 것을 고백하면서 "혹시" 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죄로 인하여 진실로 겸손하여진 사람들은 그들이 입을 티끌에 대기는 하지만 어쨌든 은혜를 통하여 좋은 희망을 얻어서 즐겁게 될 것이다.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행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입을 먼지에 댈 때 그들의 마음이 먼지에 가라앉지 않게 하는 어떤 용기를 얻는다면 그것을 자유로운 은혜의 탓으로 돌려야만 한다는 것에 유의하자.
3. 우리의 고통을 가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고 따뜻하며 용서하는 영혼이 될 때(30절) "그를 때리는 자에게 뺨을 대는 자," 되돌려 때림으로 갚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뺨을 돌려 대는" (마 5:39) 사람은 멍에로 말미암아 선한 것을 얻는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이러한 실례를 우리들에게 남겨 주셨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사 50:6) 경멸과 꾸지람을 견딜 수 있는 그 사람, 욕을 욕으로 갚지 아니하고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갚지 아니하는 그 사람, 그가 "수욕으로 배 불려질 때" 그것을 그 자신에게만 있게 하면서, 그것을 그에게 채운 사람들에게 되돌려 갚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쏟아내는 그 사람(시 123:4 의 2와 같이 그의 영혼은 교만한 자의 멸시로 넘치게 채워져 있었다)은 멍에를 견디는 것이 선하고 좋다고 하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멍에를 메는 것은 그에게 영적인 이익을 되돌려 줄 것이다. 결국 "시련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부끄럽지 아니하는 소망을 이루는 것이다."
Ⅵ.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괴롭힌 때를 따라서 시기에 적합한 위로를 가지고 그의 백성들에게 은혜롭게 돌아가실 것이다(31,32절). 그러므로 고난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심을 믿기 때문에 그같이 회개하고 인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복음적인 회개와 기독교적인 인내 둘 다에 크게 자극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가지고 견딜 수가 있다.
1. 우리가 버려질 때에도 우리는 아주 인연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바로 잡는 것이 아들과 의절하는 것은 아니다.
2. 분별있는 위로가 끊겨지고 요구되는 구원이 주어지는 한동안 우리는 아주 버림을 당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로 버려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영원토록 버리지 않을 것" 이기 때문이다. 우리와의 논쟁은 영구하지 않을 것이다.
3. 우리가 슬퍼하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길은 그 안에 있는 것이다. 슬픔을 초래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것은 지혜롭고, 은혜롭게 명령된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그것은 잠간이다. 그것이 필요할 때 우리는 슬픔 속에 있는 것이다(벧전 1:6). 하나님은 슬픔을 주셨을지라도 세상은 우리를 구원하고 도울 것이라는 생각을 멀리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다. 슬픔을 주신 바로 그분이 은총을 갖고 오실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파멸한다. una eademque marus vulnus opemque tulit-즉 상처를 내신 그 같은 분이 그것을 치료하셨다. 그가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다(호 6:1).
4. 하나님께서 우리와 은혜롭게 관계하시기 위하여 돌아오시는 것은 우리의 공포를 따라서가 아니고 그의 자비를 따라서 오시는 것이다.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우리는 그만큼 무가치하기 때문에 풍부한 하나님의 자비밖에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로부터 기대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슬픔을 자아내게 하시는 것은 결코 이런 기대에 대한 실망이 될 수는 없다.
Ⅶ. 하나님이 우리를 슬프게 하신 것은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하신 것이고, 그는 우리 재난을 기뻐하시는 것은 아니다(33절). 그는 진실로 "인생으로 하여금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신다." 그들의 모든 근심과 고통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원해서가 아니고, 본심으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이 뜻하는 것은,
1. 그는 우리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시도록 자극할 때에만 우리에게 고통을 주신다. 그는 은총을 내리시는 것같이 그의 불쾌하심을 분배하시지는 않으신다. exmero molu-즉 다만 그의 선하신 즐거움으로부터 만일 그가 우리에게 호의를 보이신다면 그것은 그것이 그에게 좋게 보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그가 우리에게 괴로운 일들을 나타내신다면 그것은 그 일들을 받기에 합당하고 또한 필요하기 때문이다.
2. 그는 괴로움을 주시기를 즐기지 않으신다. 그는 죄인의 죽음이나 성도의 환난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마지못하여서 벌을 주신다. 그는 형벌하기 위하여서 그의 자리로부터 나오신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자비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피조물들의 고통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의 백성을 존중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고통을 받을 때 그가 고통을 당하시고, 이스라엘이 고난을 당할 때 그의 영이 슬퍼하실 만큼 고난을 기뻐하는 것에서부터는 거리가 멀다.
3. 그는 그의 백성을 괴롭게 하시는 때라도 그의 백성에 대한 호의를 여전히 가지고 계시다. 만일 그가 "인생들이 근심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실" 진대 더구나 그의 백성의 고난은 원치 않으신다. 그러하니 하나님은 그들에게 선하시다(시 73:1).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얼굴에서 분노와 그 손에 채찍을 보는 때에라도 그의 마음속에 사랑이 있는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본다.
Ⅷ. 그는 그의 백성을 바로 잡기 위하여 그의 손으로 사용하시지마는 또는 사람을 그의 손에 들려진 기구로 사용하시기는 하지마는 그래도 그는 그들의 행함에 있어 그의 백성들에게 행하는 악과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34-36절). 행악자나 행악자들을 옳게 여기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게 하라.
환난당하는 자의 의무 (예레미야 애가 3:37-41)
앞 절에서 우리는 괴롭힘을 받는 자들에게 베풀어진 위로를 살펴보았었다. 그리고 위로의 단맛을 맛보았다. 여기에서는 괴로움을 받는 상태에서 우리가 위로를 기다리면서 행할 규정된 의무가 있다.
Ⅰ. 우리는 어느 때에라도 개인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우리에게 닥친 모든 재앙 중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고 깨달아야 한다(37,38절). 여기에는 우리가 고난 중에서 우리의 영혼을 조용하게 하고 거룩하도록 도울 위대한 진리가 놓여져 있다.
1. 사람의 행동은 무엇이나 그것들을 다스리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만일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하랴?" (어떤 일을 설계하고 성취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논을 따르지 아니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또한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면 어떤 권력이나 성공도 가질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은 그의 길을 궁리한다." 그는 계획하고 하려고 한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는 그렇게 할 것이라고 한다(약 4:13). 그러나 그가 계획한 것과는 다르게 "여호와께서 그의 걸음을 지도하신다." 그리고 그가 계획하고, 기대했던 것은 먼저 하나님의 손길과 그의 의도가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지 못하면 성취되지 않는다(시 16:9; 렘 10:23). 갈대아인은 말하기를 그들이 예루살렘을 파괴하리라 하였고, 그것은 이루어졌다. 이는 그들이 그것을 말한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것을 명하셨고, 그들에게 그것을 하도록 위임하셨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사람은 다만 위대하신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기계일 뿐이고, 이 낮은 세계의 정부에서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일하며 하나님 없이는 그들의 어떤 계획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유의하자.
2. 사람의 기업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명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즉 높으신 자의 입으로부터 화와 복이 나오지 아니하느냐? 그렇다. 확실히 화와 복은 하나님께로서 나온다. 원문에 있어서는 더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즉 이 화와이 복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정하시고 명하신 것이 아닌가? 그렇다. 확실히 그러하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화해를 이루기 위하여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 보편적인 진리를 특별히 적용하여야 한다. "내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욥은 그 같이 주장하였다. 우리가 건강한가? 또는 병들었는가? 부요한가? 가난한가? 우리의 설계는 성공하고 있는가? 방해당하고 있는가?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다. "모든 사람의 판단은 그로부터 나온다. 주께서 주시고? 또한 거두신다." 그는 태초에 그가 하신 것처럼 빛도 짖고, 어둠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생각의 산물이라는 것에 주의하자. 되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지시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손으로 하신 일은 그 입의 말씀과 일치한다. "그가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그렇게 쉽게 효과적으로 그의 모든 목적은 이루어진다.
Ⅱ. 우리는 어느 때에라도 우리 위에 놓여진 고통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불화하여서는 안 된다(39절). "살아 있는 사람이 어찌 원망하랴?" 여기서 예언자는 그가 앞 장에서 불평한 것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서 그는 하나님이 몰인정하고, 엄격하신 분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말한다. "나는 노하여지기를 잘하는가? 왜 나는 이렇게 안달이 나는가?" 급하게 하나님께 대하여 투덜대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꾸짖지 않으면 안 된다.
앞에 나온 구절에서 그가 주장한 하나님의 통치와 우주적인 섭리라는 교리로부터 그는 이 결론을 이끌어낸다. "살아 있는 사람이 어찌하여 원망하랴?"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에 대항하여 우리는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시 39:9). 그들의 고난을 비난하는 그들은 그것을 그들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을 질책한다. 포로에서 고난당하는 이들은 그들의 모든 고난에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의할 것은 우리의 불평(호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대항하여 불평을 내놓아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여기에서 강조된 이유는 매우 분명하게 알 수 있다.
1. 우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 자신을 사람으로 나타내 보자. 사람이 원망할까? 사람! 우리는 사람이다. 사람은 이성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사람은 위를 보고 앞을 보아야 한다. 이 두 방법은 우리의 불평을 잠잠하게 하기에 충분한 생각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우리는 사람이다. 그들을 손상시키는 모든 것들 때문에 울부짖는 아이가 아니다. 우리는 사람이고, 신이 아니다. 종속하는 자요, 주(主)가 아니다. 우리는 자신이 주인이 아니요, 자신을 만든 이가 아니다. 우리는 유한하다. 우리는 순종하고 복종하여야 한다. 우리는 사람이고 천사가 아니다. 그러므로 천사와 같이 고난으로부터 자유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슬픔이 없는 세상의 거민이 아니고, 슬픔 이외에 아무 것도 없는 이 세상의 거민이다. 우리는 사람이고, 마귀가 아니다. 우리는 마귀와 같이 비참하고, 도움이 없고, 소망이 없는 상태에 있지 아니하고, 그들이 갖지 아니한 우리 자신을 위로할 무엇을 가지고 있다.
2.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날마다 죽기는 하지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통하여 아직도 우리는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이 원망하리요?" 아니다. 인간은 삶의 어떤 재앙이나 무거운 짐으로 인한 불평보다도 삶을 인하여 감사할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목숨은 연약하고 몰수된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자, 살아 있는 자, 그들은 찬양" 하고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사 38:19). 생명이 있는 한 거기에는 희망이 있다. 일들이 잘못 되었다고 해서 원망하는 대신 우리는 그것들이 더 좋아질 것이라고 하는 희망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고무할 것이다.
3. 우리는 죄 있는 사람이다. 우리가 원망하는 것은 바로 우리 죄의 형벌이다. 아니 그것은 우리의 불의가 받아야 할 것 보다는 훨씬 적다. 우리는 우리의 고난에 대하여 원망할 이유를 거의 가지지 못한다. 하나님은 약하고 비이성적인 사람의 폭력을 사용하여 그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시지마는 그의 압박받는 백성이 대대로 생각했던 것처럼 폭력을 장려하시지는 않는다(합 1:13).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나이까?"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적들에게 두 가지 방법으로 상처받고 압박받는다. 그리고 예언자는 그 둘 중 어느 하나도 하나님은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증한다.
(1) 만일 사람이 군사력으로 그들을 해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찬성하지 않으신다. 그는 "세상에 모든 갇힌 자를 발로 밟지 않으시며" 갇힌 자의 부르짖음에 주목하시고, 또한 사람이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을 승인하지 아니하신다. 아니 그는 그것을 불쾌하게 여기신다. 눌린 자들을 짓밟는 것이나, 사로잡히고 곤경에 빠진 자들을 짓누루는 것은 야만스런 것이다.
(2) 만일 사람이 법이라는 미명을 붙여서 그들을 상해한다면, 법의 집행이라는 것으로 가장하고서 만일 그들이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여" 무엇이 그의 정의인지 알 수 없게 한다면 또는 정의에 이를 수 없다면 그들을 구제할 길이 없다. 만일 그들이 "사람의 송사를 억울케 하면," 그리고 잘못된 결정을 하고, 거짓 판단을 하면 그들로 하여금 다음 사실을 알게 하라. 그 하나는 하나님이 그들을 보신다는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자의 얼굴 앞에서" (35절) 그것은 하나님의 통찰 안에 있고, 그의 눈 아래 있으며 하나님 을 대단히 불쾌하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사실이 그러한 것을 알 수밖에 없으며, 그러므로 그들이 그것을(잘못된 재판) 행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인 것이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자이시다." 그들은 가장 높은자보다도 더 높으신 이가 감찰하신다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그들이 지배하는 자들에 대한 자기들의 권위를 남용함으로써 자기들을 다스리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권위를 경멸한다(전 5:8). 그 둘째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행하는 것을 승인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는 표현된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암시한다. 재판을 굽게 하고 송사를 억울케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중대한 모독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바로 잡기 위하여 그들을 사용하신다 할지라도 그는 곧바로이든지 나중에 이같이 행한 자들에게 엄격히 계산하실 것이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는 이들이 잘 되는 것을 한동안 허락하고, 그리고 이들을 통하여 그의 목적을 수행하신다 할지라도 그는 이들의 악행을 승인하지 않으신 다는 것에 유의하자. 그러므로 의인은 주로부터 연단을 받기는 하지만, 세상과 함께 저주를 받지는 아니할 것이다.
Ⅲ. 우리는 우리에게 괴로움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도하심에 응답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이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고, 또한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려는 것이다. 고통이 우리 위에 놓여지는 것은 두 가지 뜻이 있다.
1. 우리 자신에 대한 심각한 성찰과 우리 과거의 삶에 대한 반성.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찾고, 시험해 본다==search and try)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 자신을 도피시키고, 숨겨서 변장하고 있는 범죄자를 찾아내고, 그 다음에 죄를 범했는지 아닌지를 시험해 본다. 양심으로 하여금 찾고, 시험하는 두 가지 일을 하게 하라. 그리고 양심으로 하여금 신실하게 다루고, 부지런히 찾아보게 하고 공평한 심판을 하도록 위임하라. 우리의 행위를 시험해 보자. 그것들로써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행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감사할 수가 있다. 우리 자신의 사악이 우리를 징계한다(잠 19:3).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다투어야 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옳으시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의 통치자이다. 그는 불복종을 응징하여 그의 통치하시는 명예를 지속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고난을 받는가?" 그러할진대 원망하지 말자. 우리가 하여야 할 다른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불평하는 대신에 회개하여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화해되어진다는 증거로서 우리는 그의 거룩하신 뜻에 우리 자신을 조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죄로 인하여 벌을 받는가?" 그러므로 복종하는 것이 지혜요, 채찍에 입맞추는 것이 지혜다. 만일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께 반대하여 걸음을 걷는다면 그는 우리를 일곱 번도 더 벌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판단하실 때, 그가 이기실 것" 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그에게 우리 자신을 조화시키면 우리는 우리의 희미한 소원으로서가 아니고, 우리의 걸음걸이로 말미암아 한 특별한 걸음에 의해서가 아니고, 우리들의 방식들, 우리가 목적하는 것들, 우리가 나아가는 법칙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의 성질들을 판단하는 목적을 겨냥하고 찬성할 수 있으며, 그 목적들 또는 그 규칙들을 향한 우리의 삶의 기질들을 찬성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상태를 판단해야 한다. 우리의 상태를, 우리가 고통 중에 있을 때 우리의 행위를 생각하는 것은 시기에 적합한 일이다(학 1:5). 신통치 않은 것은 회개하고, 미래를 위하여 고치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여 우리는 고난의 목적에 응답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공적인 재앙의 시대에 우리의 할 일은 우리 자신의 행위를 찾고, 시험하는 일임에 반하여 다른 사람의 행위에 대하여 헐뜯고, 그들을 비난하기가 쉽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할 일이 얼마든지 있다. 우리 각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무엇을 하였는가? 나는 공적인 화염에 무엇을 기여하였는가?" 그러면 우리 각자는 하나를 고칠 수 있고, 그 후에는 모두가 고쳐질 수 있는 것이다.
2. 하나님께 대한 성실한 회개.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를 싫어하신 하나님께로 그리고 우리가 떠나가버렸던 그 분에게로, 우리를 소유한 분이요, 통치하시는 분인 하나님께로 회개와 개혁으로 말미암아 돌아가자. 우리는 그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를 저버린 이후 그는 결코 우리와 함께 잘 있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에게로 돌아가자." 이것은 앞의 부분을 수반하며 그의 결과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악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하여 "우리의 행위를 조사"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다윗이 취한 방법이었다(시 119:59).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 주의 증거로 내 발을 돌이켰사오며."
Ⅳ.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헌신의 정염(情炎)으로 우리의 지극한 사랑과 봉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41절). 우리가 괴로움 중에 있을 때
1. 우리는 우리 위에 무한히 높으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쳐다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논의의 여지없이 우리 위에 주권을 가지신다. "하늘이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더불어는 다투게 되어 있지 않고, 복종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2. 우리는 그로부터 자비를 받을 것을 기대하고, 믿으면서 그에게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에게 "우리의 손을 들자" 속에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기도할 때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몸짓, 때로는 이것 대신으로 시 141:2 을 사용하기도 한다.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같이 되게 하소서."). 그것은 그의 자비를 구하는 것과 그 자비를 받을 우리의 준비를 의미하는 것이다.
3. 우리의 마음은 우리의 기도와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말로서 우리의 정신을 쏟아내어야 할 때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들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그 속에서 그리고 다른 예배에서 보시는 것은 마음이다. 마음없이 드리는 희생이 무슨 유익이 있는가? 만일 내부적인 느낌이 외부적 표현에 다소라도 일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만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고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같이 하나님께 향하여 영혼을 드는 것이다(시 25:1). 그리고 하늘에서 영원히 하나님께 함께 있기를 원하는 영혼을 자극하는 헌신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리로 가는 길을 배우고, 그 길에서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호소함 (예레미야 애가 3:42-54)
불평없는 우리 자신을 꾸짖는 것보다도 불평으로 인하여 우리 자신을 꾸짖는 것이 더욱 쉽다. 예언자는 마치 그가 2장의 앞 부분에서 그의 불평(원망)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 언급한 것처럼 살아 있는 사람은 원망을 해서는 안 된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비온 뒤에 구름이 다시 돌아오고, 상처에는 다시 피가 흐른다. 큰 고통이 고난받는 영혼에게 중용을 이루기 위하여 취하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
Ⅰ. 그들은 그들의 괴로움 중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고백한다(42절). "우리가 범죄하고 패역" 하였나이다. 우리가 고난에 처할 때는 우리가 죄를 범한 때문에 우리 위에 무거운 짐을 올려 놓으신 하나님을 정당하다고 시인하는 적합하다. 죄는 범죄를 부르고 범죄는 패역을 부르니 너는 그것을 잘못 부르지 말라.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행위를 찾고, 시험해 본 결과이다. 그들이 그들의 행위를 조사하면 할수록 그들이 더욱 그러한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Ⅱ. 그들은 그들이 눌리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불평한다. 그것에는 하나님께 대한 비난이 없지 아니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모방하여서는 안 되고, 날카로운 판단 아래서 항상 그분을 높게 친절하게 생각하고 말하여야 한다.
1. 그들은 하나님의 불쾌해 하심과 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불쾌하심의 표정에 대하여 불평한다. 그들은 회개하였다(42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사하지 아니하셨다." 그들은 죄 용서에 대한 보증과 위로를 갖지 못하였다. 죄로 인하여 그들에게 임한 심판은 옮겨지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이 잘못이었다. 이 잘못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혼이 버림을 당하고 불안해 있을 때 범하는 일반적인 잘못이다. 그들의 경우는 참으로 가련하였다. 그러나 "당신은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43절)" 하고 그들은 불평하는 것이다. 그들의 적들은 그들을 학대하고 살육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나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다만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기구일 따름이었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를 보호하고 구원해 주시기를 기대하였지만 당신은 우리를 군축하시고 살육하셨나이다." 그들은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는 간막이 벽이 있다고 불평한다. 그리고 그것은
(1) 그들에게 내려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운다. 그들에게 내려오는 하나님의 은혜의 광선은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이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진노로 스스로 가리우시고, 그래서 우리의 영광은 숨어 버리고 없어졌나이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노하시고,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이전에 생각되어졌던 것같이 빛나는 백성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또는 "당신은 우리를 매장된 사람이 덮여지고 잊어 버려지는 것처럼 가리우셨나이다."
(2) 그것은 그들의 기도가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을 가리운다(44절). "주께서 구름으로 스스로 가리우니" 그것은 하나님이 성전을 점유하셨던 그 빛난 구름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배자들을 그에게로 가깝게 이끌게 하였던 구름이었다. 이 구름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강제로 멀리 서게 하였던 시내산에 내린 구름과 같은 것이다. "이 구름은 대단히 두껍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그 속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기도는 상달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들어주시는 분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주의할 것은 시련이 길어지면 기도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때때로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계시는가 안계시는가 하고 의심하도록 시험이 들어온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은 계시고, 기도를 들으신다고 믿었던 것이다.
2. 그들은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이웃의 모욕과 꾸지람과 치욕에 대하여 불평한다(45절). "당신은 우리를 2층에서 쓰레기 더미에 내 던져진 진개와 폐물처럼 만드셨나이다." 사도 바울은 사도들의 고난에 대하여 설명하는 중에 이것을 언급한다(고전 4:13).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우리는 열방 가운데서 모든 사람에게 폐물 또는 찌꺼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 중 가장 천한 자로서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맛 잃은 소금과 같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우리의 적들이 우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46절) 우리를 삼키기 위하여, 우리를 비난하기 위하여, 또는 그들은 우리의 희락이라고 비소하여 말하기 위하여 우는 사자와 같이 입을 크게 벌렸습니다." 이 불평들은 우리가 앞에서 해설한 것이다(2:15, 16). 저급하고, 심술궂은 사람들이 존귀한 사람들이 깊은 비탄에 빠졌을 때 계속 헐뜯고 지껄여대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라는 것에 유의하자. 그러나 그들은 죄로 인하여 이것을 자초하였다. 만일 그들이 그들 자신을 수치스럽게 만들지 아니했다면 그들의 적들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도 그들을 버려 사람들이 그들을 버림받은" 은(銀)이라고 불렀다.
3. 그들은 그들의 적들이 행한 비통스러운 파괴에 대하여 불평한다(47절). "두려움과 함정이 우리에게 임하였도다. 적들은 공포로 우리를 두렵게 할 뿐 아니라, 술책으로 우리를 이기고, 우리에게 대하여 복병을 놓아서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리고는 잔해와 멸망만이 있을 뿐이요, 나의 성읍의 모든 여자들(51절) 곧 내 백성의 딸의 파멸만 있을 따름이었도다" (48절). 그들의 얼마는 덫에 걸린 새처럼 적들의 먹이가 되어 추적을 받았다. 사람들이 "쫓았다" (52절). 숲에서 숲으로 쫓겨 기진맥진하여진 "새와 같이" 사울이 다윗을 "새와 같이" 사냥하듯이 "나의 대적이 된 자가 나를 심히 쫓도다." 이렇게 그들의 박해자들의 증오는 쉼이 없고, 또한 아무 이유도 없이 그렇게 하였다. 그들은 아무런 자극을 받지 아니하고도 "무고히" 그들을 박해하였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할지라도 그들은 의롭지 아니하였다. 다윗은 때때로 "무고히 그를 미워하는 자" 들로 인하여 불평한다. 또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적들도 이러하다(요 15:25). 그들의 적들은 그들이 완전히 멸망하기까지 그들을 추적하였다(53절). "그들이 내 생명을 끊으려고 나를 구덩이에 넣고," 그들은 밀폐되고 어두운 감옥에 그들의 포로를 감금하였다. 그곳은 말하자면 그들이 산 자의 땅에서부터 베어짐을 당한 곳이요, 또는 나라와 왕국이 침몰되고, 그들의 생명과 존재가 사라진 곳이요, 말하자면 저들이 그들을 "구덩이" 와 무덤에 "던지고", "그 위에 돌을 던진 곳이라." 이와 같이 그들은 "무덤 문에 돌을 굴려" 막곤 했던 것이다.
그들은 유대민족을 죽여 매장되어 부활의 가능성이 없는 것의 상징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에스겔은 "죽고 마른 뼈들이 가득한 골짜기" 의 환상 가운데서 그것을 보았다. 그들의 파멸은 죽은 자의 매장에 비교될 뿐 아니라, 산 사람이 물 속에 침몰된 것에 비교되었다. 그는 물 속에서 산 사람이 되기를 바랄 수는 없는 것이다(54절). 고난의 "물이 내 머리에 넘치나이다." 대홍수가 그들을 완전히 이기고 압도하였다. 갈대아 군들이 "물의 쏟아짐" 같이 일시에 그들을 습격하고, 그 물은 그들의 "머리 위에" 넘칠 만큼 대단히 높이 솟아 올랐다. 그들은 걸어서 건널 수 없다. 헤엄칠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피할 수 없이 침몰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고난은 때로 그들이 믿음을 위한 발판을 발견할 수도 없고, 어떤 위로를 받을 만한 기대를 가지고 물 위에 그들의 머리를 내어밀 수도 없을 정도로 그들을 압도한다는 것이다.
4. 그러므로 그들은 과도한 그들의 슬픔과 공포에 대하여 불평한다.
(1) 고난받은 교회는 눈물 속에 빠지고 예언자는 그 교회 때문에 운다(48,49절).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그들은 그렇게 많이 울었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그들의 울음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들의 정신적 고통은 완화됨이 없었다. 극단적인 심신의 불안은 계속되고, 좀 더 나은 날이 없었다. 고통은 더 추가 되었으니(51절) 곧 "내 눈이 내 심령을 상하게 하는도다. 내 눈이 보는 것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는도다. 내가 성읍과 마을의 잔해를 보면 볼수록 나는 더욱 슬퍼지는도다. 내가 어느 방면을 본다 할지라도, 나의 성읍의 모든 여자를 인하여, 어미 성읍인 예루살렘에 비하면 딸들과 같았던 근처의 모든 성읍을 보는 것까지도 내 슬픔을 새롭게 할 뿐이로다."
오! 우는, "내 눈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도다." 슬픔을 토해내는 것이 평안케 해 주는 대신에 오히려 슬픔을 증가시키고, 더욱 격앙시킨다. "오, 내 눈이 내 영혼을 녹이도다." 내 영혼이 울며 세월을 보낸다. "내 눈이 슬픔으로 인하여 쇠약하여질 뿐 아니라 내 영혼과 내 생명이 슬픔으로 쇠잔하여진다" (시 31:9, 10). 크고 오랜 슬픔은 그 영혼(정신)을 지쳐 버리게 하여 많은 노인 뿐 아니라 많은 청년들까지도 무덤으로 내려가게 한다. 예언자는 "나는 나의 성읍이 모든 땅들보다도 더욱 운다(난외주에는 그렇게 표현하였다)고 했다." 그는 다정다감한 여성들보다도 더 슬퍼하였던 것이다.
(2) 교회는 슬픔뿐만 아니라 보다 더 지독한 공포에 압도된다. 그리고 모든 것은 멸절된 것으로 포기한다(53절). "내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제는 멸절되었다 하도다. 나는 파멸되었고, 복구할 희망이 보이지 않으며 나는 죽은 자와 같다." 일반적으로 버림받은 사람들은 그들이 아주 멸절된 것으로 스스로 생각하게 되는 시험에 빠진다는 것에 주의하자(시 31:22; 요 2:4).
5. 이 슬픈 불평의 호소 속에 여기 하나의 위로의 말이 있다. 이 말로 말미암아 그들의 경우는 그들이 불평했던 것처럼 모든 것이 그렇게 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나타난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시기까지 이렇게 계속 울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을 암시한다.
(1) 고통 가운데 있는 그들을 주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모든 불평을 시정하는데 효과적일 것이라고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만일 우리의 고통에 무관심하던 것처럼 지금은 구름으로 자기를 가리우신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신다면 모든 것은 잘될 것이다. 만일 그가 우리를 살피시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시 80:19; 단 9:17). 이 경우와 같이 나쁜 사태도 하늘로부터 은혜로운 살피심이 있으면 모든 것이 바로될 것이다.
(2) 그들은 적어도 하나님이 그들을 은혜롭게 살피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대하였었다. 아니 그들은 그것을 그의 뜻이 승인하신 것으로 여기었다. "그가 다투시기는 하지만, 비록 우리가 그의 다투심을 받을 만하기는 하지만 영원히 다투지는 아니하실 것이다."
(3) 그들이 울기를 계속하고, 기다리기를 계속하는 동안 그들은 하나님 이외의 어떤 다른 손으로부터 경감되거나 구원받기를 기대하지도 아니하였고 또 그렇게 하지도 아니하였다. 은혜의 회복 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그들을 위로할 수 없을 것이고 그가 살피시기까지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줄 자가 없을 것이다. 지금 시내같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들의 눈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기까지 그들의 주 하나님을 기다릴 것이다(시 132:2).
하나님의 자비를 발견함 (예레미야 애가 3:55-66)
우리는 이 전장을 통하여 예언자의 가슴속에서 감정과 믿음, 또 공포와 희망 사이의 투쟁을 관찰할 수 있다. 그는 불평을 하고 그리고 그 자신을 위로한다. 시편 42편과 같이 자신을 위로하고 그리고 다시 불평을 한다. 그러나 거기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믿음은 최후의 말을 얻고 정복자로 실현된다. 이 구절에서 그는 어떤 위로를 가지고 결론을 맺는다. 여기에는 그가 자신을 위로하는 두 가지가 있다.
Ⅰ. 그는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한다. 이것은 공적인 고난에 대하여 그 자신을 고무한 예언자의 개인적인 경험에 돌릴 수도 있다. 특별한 성도를 적당한 시기에 구원하신 그는 일반적으로 교회를 구원하심에 실패하지 않으실 것이다. 또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헛되지 아니하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유대인 중에 있는 남은 선한 백성일 수도 있다. 예언자와 그의 경건한 친구들은 세 가지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선하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1.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다. 진노의 구름으로 인하여 그들의 기도가 상달할 수 없는 것 같았음을 두려
워하게 되어 있었지만(44절) 그들은 다른 방법으로 두 번째의 생각으로서 적어도 더 깊은 시련으로써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는 것을 발견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었다. "너희는 나를 헛되이 찾지 말라." 그들이 깊은 구덩이에 있을 때 마치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산 자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55절). 그들의 울음이 기도를 방해하지 않았다. 우리가 깊은 구덩이에 버려졌다 할지라도 우리는 거기서부터 지극히 높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게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다는 것을 유의하라. 고래 배속에서의 요나와 같이 "내가 깊은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시 130:1). 하나님은 깊은 함정에서 드리는 그들의 기도를 들으실 수 있었다. 그렇다. 사실 그러했다. "당신이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어떤 사람들은 다음 말을 깊은 감사함에 대한 고백으로 번역한다. "당신은 나의 호흡에" 나의 부르짖음에 "당신의 귀를 숨기지 아니하시고." 원본에는 그런 해석의 의미도 포함할 것이다.
우리는 거기 더하여 그것을 탄원으로서 읽는다. "당신의 귀를 숨기지 마옵소서." 깊은 구덩이에서라 할지라도 우리가 그에게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우리의 소리를 들으심은 그가 어떠한 때라도 그의 귀를 감추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하는 희망을 우리에게 고무하는 것이다. 그가 호흡을 어떻게 기도라고 부르는가를 관찰하자.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께 향하여 호흡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를 쫓아서 기도한다. 기도는 탄원으로 자비한 공기를 빨아들이고, 찬양으로 그것을 되돌려 보내는 중생한 사람의 호흡이다. 그것은 영적 생활의 증거요 지속이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나의 숨을 헐떡거림으로 읽는다. "내가 숨을 거둘 것 같을 때, 그리고 나는 나의 마지막을 호흡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당신은 내 고통을 지각하셨습니다."
2. 하나님은 그들의 공포를 평안하게 하셨다(57절).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당신은 당신의 나타내심으로 나를 은혜롭게 안심시키고, 내 가까이 당신을 보게 하셨으나 나는 당신을 나로부터 멀리 계신 것으로 생각하였었나이다." 우리가 순종의 길로 하나님께 가까이할 때 그가 자비의 길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는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볼 수 있을 것에 유의하자.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이것은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하나님의 예언자의 예언이다(사 41:10, 13, 14). 이것은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들을 예방하는 선지자의 예견의 언어이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을 조용하게 하고 그들을 순하게 하는 선지자의 언어이다. 그의 예언은(언어), 재난 중에 있으면서도 그래도 아직 하나님의 백성인 그 영혼들에게 대하여 선지자의 영의 증언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3. 그는 이미 그들에게 대하여 호소하기 시작하였다(58절).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을 펴셨고" (이것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내 생명을 속하셨나이다. 내 생명을 취하여간 이들의 손에서부터 내 생명을 구원하셨나이다. 금방이라도 삼켜질 것 같은 때에 내 생명을 그들의 전략물로 주는 대신에 나에게 주셨나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에게 대하여 그는 그들을 위하여 아직도 더 호소할 것이라고 고무하는 것이다. "당신이 죽음에서부터 내 영혼을 구원하셨나이다. 그러므로 나의 발을 타락에서부터 건지실 것입니다. 당신이 내 생명의 원통을 펴셨습니다. 그러므로 내 다른 원통한 것들도 펴실 것입니다."
Ⅱ. 그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하여(그 심판을) 그리고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하여 호소함으로써 그 자신을 위로한다.
1. 그는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에 대하여 호소한다. 그의 적들은 사악하며 악독한가?(59절) "여호와여, 나의 억울을 감찰하셨사오니, 나는 전혀 잘못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많은 고난을 당하였음을 아시나이다." 모든 것을 아시는 그는 다음의 것들을 아셨다.
(1) 그들이 그에 대하여 가진 악의, "당신은 모든 그들의 복수를 보셨나이다. 그들이 마치 내가 그들에게 행한 어떤 큰 상해를 인하여 보복이나 하는 것처럼 나에게 해악을 행하기를 원하고 있음을 아시나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것들을 유의하자.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대하여 마음속에 가진 모든 복수할 생각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의 포악과 조심하는 일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보복하려는 생각을 허락해서는 안 되며 그것이 머무르게 해서도 안 된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들이 이유없이 그들의 마음속에 우리에게 복수하려는 모든 생각을 가진 것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그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맡겨야 한다.
(2) 그들이 그에 대하여 해악을 행하려고 하는 음모와 궤계. "저희가 내게 보수하며 나를 모해함은 주께서 다 감찰하셨나이다(60절). 또 다시 저희가 나를 훼파하며 모해하는 것을 들으셨나이다(61절).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궁리하고 모해하는 것 이 두 가지가 다 말로나 행위로나 보이든지 안보이든지 간에 그것은 당신에게 알려져 있나이다. 아니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 할지라도 그들이 나에게 대하여 종일 모해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파악되어지고 감찰되어지도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드러나고 벗겨진다. 교회의 적들이 가장 깊이 감춘 비밀한 계약이라도 교회의 하나님에게 완전하게 알려지고 그에게는 그들이 아무 것도 감출 수 없다는 것을 유의하자.
(3) 그들이 그에게 한 모욕과 비방. 그들이 그에게 대하여 업신여겨 말한 모든 것과 그들이 비난하여 말한 모든 것을 하나님은 아신다. "그들이 훼파하는 것을 들으셨나이다(61절). 그들이 나의 인격에 대하여 나쁘게 말한 모든 말들과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로 나를 공격하는데 사용한 모든 것들과 그들이 나를 가증하고 하찮게 만드는데 사용한 모든 방법들과 일어나 나를 치는 자의 입술(62절)을 하나님은 아신다. 그들이 나에 대하여 말하는 어느 때이든지 그들이 사용한 오만한 말들, 즉 그들이 앉고 일어설 때에, 그들이 밤에 누울 때와 아침에 일어날 때, 그들이 식사외 모임의 자리에 앉을 때와 일어날 때, 아직도 나는 그들의 노래이다. 그들은 불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조롱거리로 만든 것같이 나의 불행을 가지고 그들 자신과 서로 서로를 위한 즐거움을 삼았다." 예루살렘은 그들이 그 위에서 노는 평판(平板)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예루살렘의 멸망" 이라고 이름 붙인 어떤 음악이나 연극, 어떤 가극이나 막간의 희극을 연출했었을 것이다. 그것은 본래 비극이지만 거룩한 성읍이 불운하기를 원하는 그들에게는 대단히 환영받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에 대하여 그리고 그 백성들에 대하여 말한 모든 잔인한 말들을 계산하기 위하여 어느 날 죄인들을 부르실 것을 유의하자.
2. 그는 이 사실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호소한다. "여호와여 나의 억울함을 감찰하셨사오니, 그것을 입증할 어떤 증거도 필요 없습니다. 또한 그 입증을 실행할 어떤 고발자도 필요 없습니다. 당신께서 그 진상을 보셨고, 지금 나는 그것을 당신에게 맡겼사오니, 나를 위하여 신원하옵소서. 그들을 처리하옵소서."
(1) 그들이 받아야 할 만한 대로(64절) "저의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하사 그들이 우리에게 행한 대로 그들에게 행하십시오. 그들의 손으로 우리에게 행한 것같이 당신의 손으로 그들에게 행하십시오. 그들이 우리를 많이 애타게 하였습니다. 이제 주께서 그 마음을 강퍅하게 하소서(65절). 그 마음을 당혹케 하소서(어떤 이들은 이와 같이 번역한다). 그들로 하여금 모든 면에서 협박하는 해악으로 둘러싸이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들이 나갈 길을 볼 수 없게 하십시오. 그들의 마음을 낙담케 하소서(다른 이들은 이것을 이와 같이 번역한다). 그들이 절망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들 자신이 없어지도록 단념하게 하소서." 하나님은 분명하게 생각하는 그들의 두뇌를 혼란시킬 수가 있고, 굳세게 생각하는 그들의 마음을 낙심케 하실 수가 있다.
(2) "그들로 하여금 위협을 따라 취급되게 하십시오. 저주를 더하시며, 그것은 당신의 저주가 그들 위에 오게 하십시오. 당신 백성의 적들에 향하여 당신의 말로 발설한 모든 해악을 그들 위에 오게 하십시오(65절). 그들이 우리를 저주하였습니다. 그들이 저주하기를 좋아하는 것만큼 그것이 그들에게 임하게 하십시오. 당신의 저주는 진실로 그들을 불행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들의 저주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저주는 의롭고, 열매를 이룰 것입니다. 당신이 저주한 사람들은 실제로 저주를 받습니다. 당신의 저주가 실현되게 하십시오(66절). 그들이 분노로 우리를 군축하고, 파괴한 것같이 진노로 그들을 군축하고 멸하소서. 여호와의 천하에서 멸하소서. 그들로 하여금 빛의 유익이 없게 하시고, 하늘의 은혜가 없게 하십시오. 하늘에 앉아서 그들을 웃으시는(시 2:4) 전능하신 분에게 파멸을 당하였다고, 그리고 하늘이 통치한다고 모든 사람이 말할 수 있는 방법으로 멸하십시오." 우상에 대해서 말하여 진 것은(단 4:26) 여기서는 그 예배자들에게 대하여 말하여진다(예배자들은 또한 우상에게 되어진 것과 같이 될 것이다). 그들은 이 하늘 아래서 망할 것이다(렘 10:11).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늘 행복으로부터 제외될 뿐 아니라 이 보이는 하늘 위로를 받지 못할 것이다. 이 보이는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어늘" (시 115:6) 그를 거역하는 사람들은 보호를 받을 가치가 없다.
하나님께로부터 화와 복이 오는가?(애 3:38-39)
"화, 복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입으로 나오지 아니하느냐 살아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애 3:38-39)
위의 구절은 성경의 다른 여러 구절들과 일치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긍휼하시므로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다(참고, 시 94:9; 약 5:11; 요일 4:10). 그러나 이와 반대로 성경은 하나님을 진노하시며 원수를 갚으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는 구절도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붙이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고 진멸하고 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다(신 7:16; 참고, 삼상 6:19; 15:2-3; 렘 13:14; 히 12:29).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화와 재난 그리고 악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은 적어도 악의 저자이시거나 악의 후원자가 아니신가?
37절에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능히 말하며 이루게 하랴고 반문한다. 또 시 33:9에서도 저가 말씀하시 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 하였다.
따라서 선악을 막라한 모든 일이 반드시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그처럼 하나님은 주권적이시다. 따라서 화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게 사실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추구했던 제 2세기 이단의 한 파였던 노스틱(Gnostic)의 말시온(Marcion)은 하나님은 무감동(impassible)한 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하나님과 조화시킬 수 없는 데미어지(demirage)(조물주)라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말시온의 하나님은 공격을 하시거나 결코 성내지 않으시며 온전히 무감동하고 모든 감정에서 자유한 분이시다. 결국 노스틱파는 하나님은 죄나 불의에 대해서 전혀 노하시는 분이 아니신가하는 의문을 제기해 놓았다.
교부 중의 락탠티우스(Lactantius)는 제3세기 후반에 하나님과 노에 대한 고전적인 논문을 썼다. 그 제목은 하나님의 노(De Ira Dei)였다. 락탠티우스에게는 감정이나 열정들은 만일 그것들이 통제되었다면 본래의 악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감정이나 격정이 악의가 있는 어떤 사람이나 그것을 싫어하지 않는 자 혹은 그것으로 인해서 노하게 되는 자에게는 악이었다. 선을 사랑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으로 정의되었다. 반대로 악을 미워하지 않는 것은 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것이 왜 우리가 하나님의 노는 결코 격정적이거나 비이성적이거나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증언하는지의 이유이다. 하나님께 노는 결코 다스리는 힘이나 격정이 아니다. 하나님의 노는 단지 그의 의지의 도구일 뿐이다. 그러나 그가 그의 노를 처벌이나 교훈을 위해 쓰시더라도 그는 우리에게 결코 그의 사랑을 제외하지 않으신다(시 77:9)(1).
이제 위 본문의 문제를 풀어보자. 위 본문은 유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는 일로 부당하다는 불평에 대한 해답이다. 하나님은 그의 불변하시는 본질에 따라서 일관된 행동을 하신다(말 3:6; 약 1:17). 여기서는 다만 그 대상이 다른 것뿐이다. 하나님은 악한 자에게 그의 노를 시행하시는데 이것은 그의 공의가 요구하기 때문이며 그가 의인에게 선을 베푸시는 것은 그의 사랑이 그를 강제하기 때문이다(2).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다. 어떤 일도 하나님이 모르시거나 허락하심이 없이는 발생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세상에 존재하는 선과 악을 모두 허용하신다. 자유로운 행위자로서 인간은 그 결과가 형벌이요 고통인 악을 선택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충분한 경고를 하신다(출 34:6-7; 암 3:7; 욘 4:2; 벧후 3:9). 따라서 그의 오래 참으심에도 끝이 있을 것은 당연하다(암 4:12). 그러므로 아무도 형벌의 고통이 범죄한 죄로 인해서 할당된 것일 때 불평할 수가 없다(시 38:3; 51:3-4; 롬 6:23)(3).
사람은 그가 범죄했을 때 그의 고난을 인해서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차라리 그의 고통의 원인이 된 그의 죄를 인해서 슬퍼해야 하고 통곡해야 한다(4).
비록 우리가 범죄하여 심판의 고통을 받게 될지라도 불평 대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그 고통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롬 8:28).
선지자의 고통과 소망(예레미야 애가 3장)
1-33절, 진노 중에도 소망이 있음
[1-3절] 여호와의 노하신 매로 인하여 고난 당한 자는 내로다. [그는] 나를 이끌어 흑암에 행하고 광명에 행치 않게 하셨으며 종일토록 손을 돌이켜 자주 자주 나를 치시도다.
유다 백성의 고통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진노의 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흑암 중에 행하도록 이끄셨다. 광명은 기쁨과 행복을 가리키고, 흑암은 슬픔과 불행을 가리킨다. 그들이 현재 처한 상황은 흑암이다. 슬픔과 고통, 불행과 죽음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징계의 손을 유다 백성을 향해 펴시고 종일토록 거듭 징벌하셨다.
[4-6절]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를 꺾으셨고[부수셨고] 담즙[고통]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 나로 흑암에 거하게 하시기를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셨고 그들의 뼈를 부수셨다. 유다 백성은 그 전쟁 중에 먹지도 못하고 마음을 쓰고 매 맞고 넘어짐으로 온 몸이 상하고 찢기고 뼈가 부서지고 상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고통과 수고로 그들을 둘러싸셨고 그들로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고통과 불행에 가득히 에워싸이게 하셨다.
[7-9절] 나를 둘러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나의 사슬을 무겁게 하셨으며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다듬은 돌을 쌓아 내 길을 막으사 내 첩경을 굽게 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둘러싸서 그들로 나가지 못하게 하셨고 그들의 사슬을 무겁게 하셨다. 유다 백성은 바벨론 군인들의 감시 아래 감금되어 자유가 없었고 도피할 곳도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도움을 구하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셨고 그 기도를 물리치셨다. 그는 그들이 그 국가적 재난에 대처하기 위해 의논하고 세운 계획들을 막으셨고 그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하셨다.
[10-13절] 저는 내게 대하여 엎드리어 기다리는 곰과 은밀한 곳의 사자 같으사 나의 길로 치우치게 하시며 내 몸을 찢으시며 나로 적막하게 하셨도다. 활을 당기고 나로 과녁을 삼으심이여, 전동(箭筩)[화살통]의 살로 내 허리(킬레요사이)[나의 콩팥]를 맞추셨도다.
하나님께서는 엎드려 기다리는 곰과 은밀한 곳의 사자같이 그들을 위협하여 곁길로 가게 하셨고 그들의 몸을 찢으셨고 그들로 적막하게, 쓸쓸하고 비참하게 만드셨다. 또 그는 숙련된 궁수처럼 활을 당기고 과녁을 맞추듯이 그들의 내장을 맞추셨다.
[14절]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랫거리가 되었도다.
유다 백성은 바벨론 나라의 침공을 받아 멸망을 당하면서도 회개하지 않았고 오히려 선지자 예레미야를 조롱하고 멸시하였다.
[15-18절] 나를 쓴 것으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셨으며 조약돌로 내 이를 꺾으시고 재로 나를 덮으셨도다. 주께서 내 심령으로 평강을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잊어버렸음이여,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유다 백성은 고통으로 배불렀고 그들의 이는 꺾였고 그들의 몸은 재로 더러워졌다. 평안과 형통의 복은, 잊혀진 옛 이야기가 되었다. 그들은 힘과 소망을 잃었고 낙심과 절망만 있었다.
[19-23절] 내 고초와 재난(마루)[안정 없음](BDB, NASB, NIV)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유다 백성은 하나님의 징벌로 큰 고난을 당하고 정처 없이 방황하고 있다. 그것은 쑥과 담즙같이 그들의 심령에 쓴 고통이며 또 이런 고통 중에 그들은 낙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낙망할 만한 큰 고난 중에도 소망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긍휼에 근거한 소망이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중요한 진리이다. 죄로 인해 회복 불가능하게 된 죄인들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근거한다. 또 이 소망은 그의 크신 성실하심에 근거한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긍휼에 근거하고 그의 성실하심으로 이루어진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도 날마다, 아침마다 새롭다.
[24-26절]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예레미야는 남은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경건한 고백이다. 땅의 것을 재산과 기업으로 삼는 자는 땅이 불탈 때 그의 소망이 땅과 함께 사라질 것이지만, 하나님을 재산과 기업과 복으로 삼는 자는 그 소망과 영광이 영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참 소망이 되신다. 그는 우리의 기쁨과 힘과 위로가 되신다. 또 그는 그를 기다리며 구하는 자에게 선을 베푸신다.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고 의지하며 소망하는 자에게 선과 복을 베푸신다. 시편 62: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27-30절]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입을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유다 백성은 지금 하나님의 징벌로 큰 고난 가운데 있다. 그러나 젊었을 때 멍에를 메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단련을 받아서 거룩하고 온전한 인격이 되어 인생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지금 당하는 고난의 멍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메우신 것이니 잠잠히 또 입을 티끌에 대듯이 겸손히 하나님 앞에 굴복하며 고난을 당하는 것이 좋다.
[31-33절]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고난 받는 유다 백성이 소망 중에 인내하며 대처할 수 있는 이유는, 주께서 그들을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그들을 근심케 하셨지만 그의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주께서는 즐거운 마음으로 인생을 고생케 하시거나 근심케 하신 것이 아니다. 그는 택자들을 향해 크신 자비와 긍휼을 가지고 계신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죄를 멀리하자. 죄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오고 또 고난과 불행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죄 짓지 않는 것은 최상의 길이다. 의로운 삶은 충만한 평안을 가져오며(사 48:18) 몸의 건강까지도 보장된다(잠 3:7-8).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본심을 깨닫자. 이스라엘 백성은 죄 때문에 큰 징벌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본심은 그들에게 고난을 주는 것이 아니다. 33절,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하나님께서는 선하시며 모든 좋은 것을 주신다. 평안과 행복은 본래 사람을 위해 예비된 바이다. 죄로 인해 모든 것이 파괴되고 상실되었으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 죄와 멸망에서 구원을 받았다(롬 3:23-24).
셋째로, 우리는 고난 중에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야 한다. 21-22절,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6절,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을 달게 받으며 잠잠히 긍휼의 하나님만 바라고 죽는 날까지 의와 선을 힘써 행해야 한다. 그것이 성도의 본분이며 승리의 길이다.
34-66절,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함
[34-36절] 세상에 모든 갇힌 자를 발로 밟는 것과 지극히 높으신 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사람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것은 다 주의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
하나님께서는 갇힌 자를 학대함과 불의한 재판을 미워하신다.
[37-39절]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하랴. 화, 복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입으로 나오지 아니하느냐?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유다 백성에게 임한 재앙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주’ 즉 주권자이시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그의 주권적 작정과 섭리의 일들이다. 사람의 복과 재앙이 다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입으로부터 나온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다.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 이는 고난 중에 하나님께 원망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공의의 통치자시며 사람은 자기의 심은 대로 거두기 때문이다.
[40-41절]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사람은 자신의 행위를 살피고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또 유다 백성들은 마음과 손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어야 한다. 마음과 손을 든다는 말은 진지하고 간절한 기도를 말한다.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은 하나님께 진지하고 간절한 기도를 올릴 것이다. 유다 나라의 소망은 오직 참된 회개와 간절한 기도에 있다.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고서는 그 나라는 다시 세워지지 못할 것이다.
[42-43절] 우리의 범죄함과 패역함을 주께서 사하지 아니하시고 진노로 스스로 가리우시고 우리를 군축(窘逐)하시며 살륙하사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
유다 나라의 멸망의 원인은 그들의 범죄함과 패역함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범죄함과 패역함을 용서치 않으셨고 진노하여 그들을 내쫓으셨고 죽이셨고 긍휼을 베풀지 않으셨다. 죄가 죽음과 모든 불행의 원인이다. 죄가 예루살렘의 멸망의 원인이었다.
[44-47절] 주께서 구름으로 스스로 가리우사 기도로 상달치 못하게 하시고 우리를 열방 가운데서 진개(塵芥)(세키)[쓰레기, 찌꺼기](BDB)와 폐물을 삼으셨으므로 우리의 모든 대적이 우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렸나이다. 두려움과 함정과 잔해와 멸망이 우리에게 임하였도다.
하나님께서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우심으로 그들의 기도는 그 앞에 상달치 못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날에 그를 찾지 않다가 징벌과 환난의 날에 그를 찾았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듣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열방 중에 쓰레기와 같이 여기셨다. 대적들은 그들을 조롱하고 멸시하였고 두려움과 멸망이 그들에게 임했다.
[48-51절] 처녀 내 백성의 파멸을 인하여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내 눈의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시기를 기다리는도다. 나의 성읍의 모든 여자를 인하여 내 눈이 내 심령을 상하게 하는도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멸망의 참혹한 재앙 앞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흘렀고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그는 하늘에 계신 주권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을 살피시고 돌아보시기를 기다렸다.
[52-54절] 무고히 나의 대적이 된 자가 나를 새와 같이 심히 쫓도다. 저희가 내 생명을 끊으려고 나를 구덩이에 넣고 그 위에 돌을 던짐이여, 물이 내 머리에 넘치니 내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제는 멸절되었다 하도다.
예레미야는 백성을 대신해서 말하는 것 같다. 유다 백성은 바벨론 군인들에게 잘못한 것이 없으나 그들은 까닭 없이 독수리가 먹이를 쫓듯이 심히 쫓았다. 유다 백성은 고난의 깊은 구덩이에 던지웠고 물이 머리에 넘친 것과 같았다. 그들은 죽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55-56절]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우지 마옵소서.
절망적 상황에서 주권자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성도만의 특권이다. 또 그것은 모든 어려운 문제의 해결책이기도 하다. 유다 백성은 과거에 하나님의 응답을 여러 번 체험했다. 그런 체험에 근거하여 그는 현재의 고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한다.
[57-59절]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하셨나이다.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을 펴셨고[송사들을 변호하셨고] 내 생명을 속하셨나이다. 여호와여, 나의 억울을 감찰하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신원(伸寃)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도 응답의 첫 단계는 마음의 평안이다. 구체적인 응답은 그 다음에 온다. 예레미야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억울함을 갚아주셨고 현재의 억울한 형편도 감찰하심을 확신한다. 과거의 체험은 현재의 지침이 된다. 과거에 공의로 섭리하신 하나님께서는 현재도 모든 일을 공의로 보응하실 것이 분명하다.
[60-63절] 저희가 내게 보수(報讐)하며 나를 모해(마카솨바)[해치려 계획]함을 주께서 다 감찰하셨나이다. 여호와여, 저희가 나를 훼파[훼방](국한문 개역성경)하며 나를 모해[해치려 계획]하는 것 곧 일어나 나를 치는 자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과 종일 모해[해치려 계획]하는 것을 들으셨나이다. 저희가 앉든지 서든지 나를 노래하는 것을 주여, 보옵소서.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모든 말과 행위를 다 감찰하시고 들으시며 공의로 보응하신다. 그는 악한 바벨론 사람들이 유다 백성을 향해 원수를 갚고 해치려는 악한 계획들을 한 것을 다 감찰하셨고 그들이 유다를 비방하는 악한 말들을 다 들으셨고 다 보셨다.
[64-66절] 여호와여, 주께서 저의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하사 그 마음을 강퍅하게 하시고 저주를 더하시며 진노로 저희를 군축(窘逐)하사 여호와의 천하에서 멸하시리이다.
원문은 네 개의 명령형 동사(미완료시제 단축형)로 되어 있으며 그것들은 다 기도의 내용들이다.
첫째는, ‘보응하소서’라는 말이다. “저의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하소서.” 하나님께서는 행한 대로 갚으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전 12:14; 시 1:6; 롬 2:6-8; 계 20:12).
둘째는, ‘주소서’라는 말이다. “그 마음을 강퍅하게 하시고 저주를 더하소서.” 직역하면, “그들에게 마음의 강퍅함을, 그들에게 저주를 주소서.” 완고함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심판이며 징벌이다. 강퍅함과 완고함을 가진 자는 결코 회개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이다.
셋째는, ‘쫓아내소서’라는 말이다. “저희를 진노로 쫓아내소서.”
넷째는, ‘멸하소서’라는 말이다. “저희를 여호와의 천하에서 멸하소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은 악인들의 영원한 징벌과 멸망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인정하자. 37-38절,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하랴. 화, 복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입으로 나오지 아니하느냐?”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의 징벌이었다.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을 아는 것이 참 경건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40-41절,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유다의 멸망은 그들의 범죄함과 패역함 때문에 온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진리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불경건과 부도덕의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자. 55절,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59절, “여호와여, 나의 억울을 감찰하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신원하옵소서.” 성도는 고난 중에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시편 46:1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고 말했다. cafe.daum.net/correcttheology
할렐루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And the prayer offered in faith will make the sick person well; the Lord will raise him up. If he has sinned, he will be forgiven. Therefore confess your sins to each other and pray for each other so that you may be healed. The prayer of a righteous man is powerful and effective. _ 야고보서 James 5:15-16
† 예레미야애가 3장
[SYNOPSIS]
본장의 시는 각 행의 머리글을 모으면 히브리어 알파벳순이 되며 삼중시의 형태를 띠면서 진행되는 대단히 정교한 애가이다. 여러 면에서 이 시는 애가의 기본적인 주제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시편 22편과 이사야 53장에서 볼 수 있는 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한 묘사와도 유사성을 보여준다.
[CONTENTS]
1~18절의 ‘나’는 예레미야이다. 그렇지만 예레미야의 고통은 개인적인 고통을 넘어서 백성 전체의 고통을 의미하고 있다. 이 단락에는 고통의 실상이 나타나 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겪었던 고통과 백성들이 겪었던 고통이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인정하고 있다.
“1~3. 여호와의 분노의 매로 말미암아 고난당한 자는 나로다. 나를 이끌어 어둠 안에서 걸어가게 하시고, 빛 안에서 걸어가지 못하게 하셨으며, 종일토록 손을 들어 자주자주 나를 치시는도다.”
- 아, 나는 주의 진노의 매를 심하게 맞고서, 이렇듯 고통당하고 있다. 주께서는 나를 끌어다가 어둠 가운데로 몰아넣으셨고, 빛 가운데로 걷게 하지 않으셨으며, 손을 높이 들고서 온종일 쉼 없이 나를 계속 내리치셨도다.
“4~9.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들을 꺾으셨고, 고통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 나를 어둠 속에 살게 하시기를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 나를 둘러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사슬을 무겁게 하셨으며,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다듬은 돌을 쌓아 내 길들을 막으사 내 길들을 굽게 하셨도다.”
- 그리하여 나의 살과 피부를 쇠약하게 만드셨고, 마침내 내 뼈까지 모두 부러뜨리셨고, 주께서 이렇듯 쓰디쓴 고통의 담즙을 내게 먹이시고, 내 사방으로 시련의 담을 높이 쌓아 나를 단단히 가두셨으므로, 죽어서 무덤에 묻힌 지 오래된 사람처럼, 내가 깊은 흑암 가운데 머무르고 있도다. 주께서는 또 내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나를 빙 둘러 포위하고, 무거운 쇠사슬로 나를 꽁꽁 동여매셨으며, 내가 도움을 부르짖고 살려 달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내 기도를 들은 체도 하지 않으시며, 내가 나가려는 지름길에 다듬은 큰 돌로 높은 담을 쌓아 가로막으시고, 나의 앞길을 굽게 만드시어 먼 길로 빙 돌아가게 하셨도다.
“10~14. 그는 내게 대하여 엎드려 기다리는 곰과 은밀한 곳에 있는 사자 같으사, 나의 길들로 치우치게 하시며 내 몸을 찢으시며 나를 적막하게 하셨도다. 활을 당겨 나를 화살의 과녁으로 삼으심이여, 화살통의 화살들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회복할 수없는 치명상).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랫거리가 되었도다.”
- 정녕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엎드려 먹이를 노리는 성난 곰과 같고, 은밀한 곳에 몰래 숨어서 사냥감을 기다리는 굶주린 사자와 같으시니, 나로 내 길을 잘못 들게 하시어, 마침내 나를 덮쳐 내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리신 뒤 그대로 내팽개쳐 두셨도다. 주께서는 활시위를 힘껏 당기시어, 나를 화살의 과녁으로 삼으심이여, 화살통의 화살을 뽑아 들고 나를 향해 화살을 강하게 날려 내 심장을 꿰뚫으셨도다. 그리하여 나는 모든 백성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고, 그들은 하루 종일 나를 조롱거리 삼아 노래를 부르는 도다.
“15~18. 나를 쓴 것들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셨으며, 조약돌로 내 이들을 꺾으시고 재로 나를 덮으셨도다. 주께서 내 심령이 평강(조화를 이룬 완전함 즉, 영·혼·육이 온전하게 누리는 평화)에서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내어버렸음이여,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 주께서 나를 쓸개즙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쓰디쓴 쑥으로 질리도록 배불리 먹게 하셨으며, 자갈로 내 이를 부러뜨리시고, 재로 내 온몸을 뒤집어 씌우셨도다. 주께서 내 심령으로부터 평강을 빼앗아 아주 멀리 던져버리시니, 그 후로 나는 복이 도대체 무엇인지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말하기를 ‘아, 내 모든 힘은 쇠약해졌고, 주를 향한 내 소망의 줄도 마침내 끊어져버리고 말았다!’ 하였도다.
“19~24.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언제나 변함없음을 의미).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인간적으로는 아무런 희망도 기대할 수 없는 극심한 절망 속에서도 예레미야는 놀라운 소망을 발견한다. 그가 주위의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그 환경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의 마음속에는 위로와 소망이 샘솟았다. 그는 유다의 고통이 긍휼하신 하나님께서 내리신 사랑의 채찍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25~33.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하나님의 징계를 당할 때 원망하지 않고 묵묵히 감당하라는 뜻).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고통과 시련)를 메는 것이 좋으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완전히 낮아진 상태로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복종하는 것).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 진실로 그렇다. 누구든지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나 주님을 찾는 사람에게 주님은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므로 사람은 주님의 구원을 기대하고 그 구원의 손길을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좋다. 또 사람은 젊은 시절에 고난의 멍에를 짊어지는 것이 좋으니, 그것은 주께서 그 멍에를 얹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어진 멍에를 그저 홀로 묵묵히 짊어져야 한다. 입이 땅의 흙먼지에 닳을 정도로 그렇게 바짝 꿇어 엎드려, 주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복하라. 그러면 혹 절망 가운데서 소망이 생겨날지도 모른다.
또 자신을 때리려는 사람에게 뺨을 대주고, 자신을 향해 욕을 하거든 기꺼이 들을지어다. 그러면 주께서 우리의 그런 모습을 보시고, 우리를 영영 버리시지 않으실 것이며, 주께서 우리를 그토록 슬프게 하실지라도, 그분은 마침내 우리에게 자비를 보여주시리니, 그분의 풍성한 자비하심에 따라 정녕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실 것임이라, 그것은 사람을 고생시키고 사람에게 괴로움을 안겨주는 것이 주님의 본래 마음이 아니시기 때문이도다.
하나님의 긍휼과 성실을 알게 된 신실한 자들에게 당면한 고난을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긍휼하신 하나님은 결코 의미 없는 고난을 주시지 않는다. 따라서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실, 고난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긍휼의 한 방편이 되는 것이다.
“34~39. 세상에 있는 모든 갇힌 자들을 발로 밟는 것과, 지존자의 얼굴 앞에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하는 것과, 사람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는 것은 다 주께서 기쁘게 보시는 것이 아니로다.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할 수 있으랴!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들 때문에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인간의 모든 화와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다. 인간이 저지르는 불의한 만행도 하나님의 허용하심이 없이는 일어날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목적하신 바에 따라 화와 복을 병행하여 베푸신다.
남은 자의 고난이 각자의 죄에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죄를 먼저 회개할 것을 지적한다.
“40~41.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 우리의 모든 행위를 스스로 살펴보고, 이제 주께로 돌아가자.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고, 우리의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자.
하나님께서 내리신 징벌로 인하여 파멸 상태에 이른 유다 백성들을 보고, 예레미야는 죄를 고백하라고 권면한다. 죄로 인하여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과 단절되었으며, 포로가 되는 비운을 감당해야 했다.
“42~54. 우리의 범죄함과 우리의 반역함을 주께서 사하지 아니하시고, 진노로 자신을 가리시고 우리를 추격하시며 죽이시고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 주께서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사, 기도가 상달되지 못하게 하시고, 우리를 뭇 나라 가운데에서 쓰레기와 폐물로 삼으셨으므로 우리의 모든 원수들이 우리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크게 벌렸나이다. 두려움과 함정과 파멸과 멸망이 우리에게 임하였도다.
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 나의 성읍의 모든 여자들을 내 눈으로 보니 내 심령이 상하는 도다. 나의 원수들이 이유 없이 나를 새처럼 사냥하는 도다. 그들이 내 생명을 끊으려고 나를 구덩이에 넣고 그 위에 돌을 던짐이여, 물이 내 머리 위로 넘치니 내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제는 멸절되었다!’ 하도다.”
- 주여! 우리가 주를 거슬러 죄를 짓고 주님을 배반하였으므로, 주께서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주께서는 크게 진노하셨고, 우리를 뒤쫓아 오셔서 우리를 살육하시되, 아무런 인정도 베풀지 아니하시고 사정없이 죽이셨습니다. 그때에 주께서는 빽빽한 구름으로 스스로를 칭칭 두르셔서, 우리의 모든 기도가 주님께 도달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주께서는 온 세상 만민 가운데서 우리를 쓰레기와 찌꺼기로 만드셨으므로, 우리의 모든 원수들을 우리를 집어삼키려고 우리를 향해 한껏 입을 벌렸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는 오직 공포와 함정과 파괴와 파멸만이 물밀듯 밀려올 뿐입니다.
아, 슬프다! 처녀 내 백성이 망하였으므로, 내 두 눈에서는 눈물이 시내처럼 줄줄 흘러내리는구나. 내 눈에서 눈물이 잠시도 그치지 아니하고 하염없이 쏟아지는구나. 이제 이 몸이 바라고 기다리는 것은, 주께서 하늘에서 우리를 살펴보시고 돌아보시는 것뿐이로다. 내 성읍, 곧 이 도성 예루살렘의 여인들이 겪은 일을 내 두 눈으로 보니, 내 영혼이 심히 고통스럽고 내 가슴이 찢어지는구나.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여 내 대적이 된 자들이 새를 사냥하듯 나를 열심히 뒤쫓고 있구나. 저들은 내 생명을 아예 끊어놓으려고 나를 산채로 구덩이 속에 쳐 넣은 뒤, 그 위를 커다란 돌로 덮어버리는구나. 그런 지경에서 물이 차올라 내 머리 위로 넘쳤으므로, 그때에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아, 나는 이제 꼼짝없이 죽었구나!’ 하였도다.
구덩이에 갇힌 예레미야의 간구이다. 그는 개인인 고통뿐만 아니라 민족적인 고통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는 지금 민족의 중보자로서 민족이 당하는 고난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대적들이 유다에게 저질렀던 만행을 하나님께 상기시키면서 그들을 징벌해 줄 것을 간구한다.
“55~66.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지 마옵소서.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함을 풀어 주셨고 내 생명을 속량하셨나이다. 여호와여! 나의 억울함을 보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원통함을 풀어주옵소서. 그들이 내게 보복하며 나를 모해함을 주께서 다 보셨나이다.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비방하며 나를 모해하는 모든 것, 곧 일어나 나를 치는 자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들과 종일 나를 모해하는 것들을 들으셨나이다. 그들이 앉으나 서나 나를 조롱하여 노래하는 것을 주목하여 보옵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손이 행한 대로 그들에게 보응하사, 그들에게 거만한 마음을 주시고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소서. 주께서 진노로 그들을 뒤쫓으사, 여호와의 하늘 아래에서 멸하소서.” Amen! sysun21c.blog.me/22040172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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