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훼파된 성의 상태(애2:1-10)
선지자 예레미야는 "처녀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고...진노하신 날에 그 발등상을 기억지 아니하셨도다"(애2:1)라고 기록하였는데, 그 의미는 무엇인가? 또한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시고 원수 앞에서 오른손을 거두셨다고 하신 뜻은 무엇인가? 그리고 예루살렘 처녀들은 머리를 땅에 숙였다고 했는데,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1)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의 손길이 떠난
처녀 시온은 유다와 예루살렘을, 구름은 하나님이 주신 재앙을 각각 상징한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이 재앙을 유다와 예루살렘에 가득 차게 하신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발등상은 하나님의 성전을, 뿔은 권세를 상징하고, 오른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말한다. 이는 하나님이 유다의 왕과 관리들은 버리시고 도움의 손길을 주시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또한 예루살렘 처녀는 유다 백성을 말하는데, 유다 백성이 유다와 예루살렘 멸망을 보면서 머리를 숙이고 부끄러운 태도를 취하는 것을 뜻한다.
2) 민족적 죄악으로 인한 재앙
하나님은 자신의 임재의 상징인 성전도 죄악이 만연할 때에는 버리신다. 하나님의 버림은 영원한 버림이 아니요, 택한 자들을 다시 부르기 위한 일시적인 버림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루살렘 멸망과 함께 회복에 대하여 예레미야를 통하여 선포하게 하셨다. 우리가 범죄할지라도 영원히 버리시지 않으시고 다만 징계만 하실 뿐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에게는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3. 예루살렘 멸망으로 인한 비참상(애2:11-22)
선지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황폐된 모습을 보면서 "내 눈이 눈물에 상하여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애2:11)라고 하였다. 이처럼 예레미야는 유다의 멸망에 대하여 애달파하였다. 그러면 이 패망의 원인 중에 하나로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다"(애2:14)는 의미는 무엇인가? 또한 하나님은 옛날에 명하신 말씀대로 다 이루셨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패역한 이스라엘에 대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1) 하나님의 뜻을 분별치 못함
유다는 거싲 선지자의 잘못된 묵시 때문에 망했다.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나님은 계속해서 유다의 회개와 바벨론에게 항복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이 나와서 평안할 것이고 안전할 것이라고 거짓 예언하는 바람에 유다 왕과 백성이 미혹되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상 숭배와 거짓 예언과 죄악이 가득한 유다를 모세오경에 약속한 대로 징벌하셨다. 그 결과로 여인들은 기근으로 자신의 자식을 먹었고, 제사장과 선지자들은 주의 성소에서 살육당하였으며, 노인과 아이들은 돌볼 사람이 없어서 길바닥에서 기진하였고, 처녀와 소년들은 전쟁터에서 바벨론의 칼에 죽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포로가 되어 이방 땅으로 끌려갔다.
2) 거짓 영을 잘 분별해야 함
세상에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전하는 참된 목자가 있는 반면, 거짓 영의 사주를 받아 잘못된 사술을 전하는 거짓 목자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거짓 영, 거짓 목자는 오늘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에 비춰 분별하는 성도들은 언제나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다.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이 융성할 때에는 친구와 같이 아첨하지만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을 보면 오히려 비웃고 조소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그 백성의 징계를 보면서 눈물로 탄식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한다. 성도들은 예레미야처럼 징계받을 때 눈물로 회개하는 동시에 회복의 은혜에 대한 믿음을 지녀야 할 것이다.
1. 하나님께 합당했던 유다 왕들(하나님을 의지한 왕들)
통일 왕국 이스라엘이 B. C. 931년에 유다와 이스라엘로 분열된 후에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당하기까지(B. C. 586년) 약 345년 동안 왕국이 존속되어 왔다. 유다의 19왕 중에 8명이 하나님의 눈에 선한 왕이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유다의 8왕이 모두 똑같이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왕들이 모세의 율법에 따라 행동하려 하였고, 그 노력을 어느 정도 수행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8명의 왕은 다음과 같다.
① 아사(B. C. 911-870, 왕상15:9-24; 대하14-16장)
② 여호사밧(B. C. 873-848, 왕상22:41-50; 대하17-20장)
③ 요아스(B. C. 835-796, 왕상 12장; 대하23:16-24:37)
④ 히스기야(B. C. 728-686, 왕하 18-20장; 대하 29-32장)
⑤ 요시야(B. C. 640-609, 왕하22:1-23:30; 대하 34,35장)
⑥ 아마샤(B. C. 800-783, 왕하14:3)
⑦ 웃시야(B. C. 783-742, 왕하15:34)
⑧ 요담(B. C. 742-735, 왕하15:34)
2. 시온(Zion)
시온은 예루살렘의 남동쪽에 있는 다윗 성을 가리킨다. 다윗은 여부스 족속의 요새를 빼앗아 후에 다윗 성으로 삼는다. 구약에서 '시온'이란 단어는 154회 나오며, 이와 병행되는 용어로는 다윗 성, 예루살렘, 살렘,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 성소 그리고 이스라엘 등이 있다. 시온은 예언서와 시편 그리고 예레미야애가에 자주 나온다. 이 단어는 마지막 때의 구원의 도시라는 의미로 가장 많이 사용된다. 또한 왕의 거처, 수도 그리고 제사 중심지를 나타내기 위해서도 사용되었지만, 죄와 심판의 도시라는 의미로는 아주 드물게 나온다. 이사야의 후반부에서는 공동체의 상징으로 나오며, 시편에서는 하나님의 도시, 공동체 그리고 성전의 의미로 나온다. 뿐만 아니라 시온은 하나님의 거할 처소요(사8:18), 영원한 치리 장소이며(마4:7), 구원얻을 자의 피난처요(욜2:32), 신약 복음의 출처가 된다. 그러므로 시온은 예루살렘 도성을 가리킬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적 왕국(시125:1)이라 할 수 있다.
3. 선지자의 묵시
1) 계시방법
선지자는 계시의 수신자이다. 그 계시는 미래를 특징 지어준다. 그래서 선지자는 객관적 계시의 수신자이며, 선지자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신적 계시의 산물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이 선지자의 마음속에 들려지거나 인상 지워지게 함으로써 육체적인 청각 기관을 사용하지 않고도 알 수 있도록 하셨다. 또 어떤 메시지들은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심으셨을 수도있다(사22:4).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했고, 또 예언과 메시지가 이루어짐으로써 하나님의 승인을 받았다.
선지자들의 계시 수납 방법은 ① '말씀'과 '들음'을 통해서(사8:1; 사18:4), ② '보여 주심'과 '봄' 또는 '환상'을 통해서(렘1:11,12; 겔 1-3장), ③ 선지자의 몸의 '들어올림'을 통해서(고후12:1-4) 받는 경우가 있었다.
2) 계시내용
계시의 수납자인 선지자가 계시하는 내용은 4가지가 있다.
첫째,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은 유일신론을 원칙으로 한다.
둘째,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존재하는 독특한 유대 관계를 계시한다.
셋째, 하나님과의 언약적 유대 관계의 결렬, 즉 이스라엘의 죄악들을 지적하며 계시한다.
넷째,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은 선지자들의 종말론적 관점에서 계시한다.
4. 하나님의 진노
예레미야애가를 통해 하나님이 유다 백성에게 나타내신 진노의 극한점은 당신을 위해 세운 성막과 제단과 성소를 헐어 내시겠다는 표현에서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성별되게 여기시던 제단, 성전, 언약궤, 절기 등은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사용하셨던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이스라엘의 패역하고 악한 죄악으로 인해 과감하게 버리시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엄청난 진노는 참고 기다렸지만 돌아오기는커녕 더 악해지고 죄를 범함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심판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들이 죄악된 모습으로 드리는 형식적인 예배는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행위이므로 우리의 진정과 신령으로 드려지는 예배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 형식적이며 이례적인 모습으로 성전과 제담을 가까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뜨거운 열정과 헌신의 마음으로 진노하심을 피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예레미야 애가 2장)
1-10절,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
[1절]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처녀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고.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것(티프에렛)[아름다움, 영광]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진노하신 날에 그 발등상을 기억지 아니하셨도다.
유다의 멸망은 주 하나님께서1) 하신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복도 주시지만 재앙도 내리신다. 재앙은 사람의 죄에 대한 그의 징벌이다.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불같이 진노하심으로 왔다. 1절, “진노하사 . . . 진노하신 날에.” 2절, “노하사.” 3절, “맹렬한 진노로.” 4절, “노를 불처럼.” 예레미야 애가서 전체에 ‘진노’라는 말이 열 네 번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죄에 대해 불같이 진노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구름으로 예루살렘을 덮으셨다. 마치 폭우가 쏟아지기 전에 검은 구름이 하늘을 캄캄하게 만들며 두려움을 주듯이,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구름으로 예루살렘을 덮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것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다.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를 섬기며 그의 계명을 지키는 동안에는 기쁨과 평안과 사랑이 넘쳤고 질서가 있었고 물질적 유여함이 있었고 또 군사적으로도 강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셔서 이스라엘의 영광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 진노하신 날에 그의 발등상을 기억지 아니하셨다. 그의 발등상은 그의 임재(臨在)가 있는 성전을 가리킨 것 같다. 시편 132:7은 “우리가 그의 성막에 들어가서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하리로다”고 말한다. 유다와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날, 예루살렘 성전은 더 이상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2-3절] 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를 삼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음이여, 노하사 처녀 유다의 견고한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고 나라와 방백으로 욕되게 하셨도다. 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원수 앞에서 [그의] 오른손을 거두시고 맹렬한 불이 사방으로 사름같이 야곱을 사르셨도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집을 부수시고 긍휼히 여기지 않으셨다. 그는 유다의 견고한 성들을 허시고 땅에 엎으셨고 나라와 방백들을 욕되게 하셨다. 그는 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셨다. 뿔은 힘과 영광을 상징한다. 그는 원수 앞에서 그의 오른손 곧 힘있는 손을 거두셨다. 그는 이스라엘을 돕지 않으셨다. 그는 맹렬한 불이 사방을 사름같이 야곱을 사르셨다. 그는 유다의 모든 귀하고 영광스러운 것들을 천하고 무가치하게 만드셨다.
[4절] 원수같이 활을 당기고 대적처럼 오른손을 들고 서서 눈에 아름다운 모든 자를 살륙하셨음이여, 처녀 시온의 장막에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에게 원수2)같이 행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 불리었고(사 41: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겠다”라고 말씀하셨었다(사 49:25). 그러나 그는 지금 그 자손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수같이 행하시는 것이다. 그는 원수같이 활을 당기시고 오른손을 들고 서셔서 눈에 아름다운 모든 자들을 살육하셨다. 본문은 바벨론 군대의 살육을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로 행해진다. 그러므로 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하는 길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오직 온 백성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의와 선을 행하는 데 있다.
[5-6절] 주께서 원수같이 되어 이스라엘을 삼키셨음이여, 모든 궁을 삼키셨고 견고한 성들을 훼파하사 처녀 유다에 근심과 애통을 더하셨도다. 성막을 동산의 초막같이 헐어 버리시며 공회 처소를 훼파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 가운데서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시며 진노하사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도다.
주께서는 원수같이 이스라엘 백성을 멸망시키셨다. 그는 모든 궁과 견고한 성들을 파괴하셨고 유다 백성에게 슬픔과 애통을 더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성막을 동산의 초막같이 헐어버리시며 유다 백성이 시간을 정하여 모이는 집회 장소를 다 부수셨다. 시온에서 절기와 안식일은 잊혀졌고 왕과 제사장들은 멸시를 당하였다.
[7-8절] 여호와께서 또 자기 제단을 버리시며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 궁장(宮墻)[궁궐벽]을 원수의 손에 붙이셨으매 저희가 여호와의 전에서 훤화하기를 절기날과 같이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처녀 시온의 성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줄을 띠고 훼파함에서 손을 거두지 아니하사 성과 곽으로 통곡하게 하셨으매 저희가 함께 쇠하였도다.
주께서는 자기의 소유인 성전의 제단과 성소를 미워하셨고 궁궐벽을 원수의 손에 붙이셨다. 원수들은 절기같이 하나님의 전에서 시끄럽게 떠들었다. 주께서는 예루살렘 성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손을 펴서 그 성을 부수셨다. 성벽은 다 허물어졌고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통곡하며 다 쇠약해졌다. 열왕기하 25:8-10,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19년 5월 7일에 바벨론 왕의 신하 시위대 장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5월 10일에](렘 52:12) 여호와의 전과 왕궁을 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시위대 장관을 좇는 갈대아 온 군대가 예루살렘 사면 성벽을 헐었으며.”
[9-10절] 성문이 땅에 묻히며 빗장이 꺾여 훼파되고 왕과 방백들이 율법 없는 열방 가운데 있으며[열방 가운데 있으며 법이 없으며](KJV, NASB, NIV) 그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 처녀 시온의 장로들이 땅에 앉아 잠잠하고 티끌을 머리에 무릅쓰고 굵은 베를 허리에 둘렀음이여, 예루살렘 처녀들은 머리를 땅에 숙였도다.
성문이 땅에 묻히고 문빗장이 꺾여 파괴되고 왕과 방백은 이방인들 가운데 포로로 끌려가고 법이 없는 무법천지가 되었다. 예레미야 52:11,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다가 그 죽는 날까지 옥에 두었더라.” 선지자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못하였다. 장로들은 할 말을 잃고 땅에 잠잠히 앉았고 티끌을 머리에 무릅썼고 굵은 베를 허리에 둘렀다.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성에게는 더 이상 품위도, 권위도, 영광도 없었다. 평소에 명랑하던 처녀들도 슬픔과 고통 중에 머리를 땅에 숙였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자.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크게 진노하심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고 삼키셨고 엎으셨고 뿔을 자르셨고 불로 사르셨고 살육하셨고 진노를 쏟으셨고 훼파하셨다. 또 그는 왕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처녀들과 유다 나라의 아름다운 모든 자들을 다 벌하셨다. 또 그는 모든 거처와 견고한 성들과 모든 궁과 성전과 제단과 집회 장소와 사면 성벽을 다 부수시고 허무셨고 불태우셨으며, 또 절기와 안식일을 폐하셨다. 하나님의 진노는 참으로 두려운 것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참 지혜와 지식의 시작이다(잠 1:7).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되지 말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원수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범죄함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사람은 범죄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곧 멸망이요 불행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죄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그의 교훈을 순종함으로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믿음과 의로 살면 하나님과 친구가 되고 큰 평안을 누릴 것이다.
11-22절, 하나님께서 내리신 형벌
[11절]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처녀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혼미[기진]함이로다.
예루살렘이 멸망했을 때 어린 자녀들과 젖먹는 아이들이 길거리에서 기진함을 보고 선지자는 창자가 끓는 눈물을 흘렸다.
[12-13절] 저희가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혼미하여 그 어미의 품에서 혼이 떠날 때에 어미에게 이르기를 곡식과 포도주가 어디 있느뇨 하도다. 처녀 예루살렘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증거하며 무엇으로 네게 비유할꼬? 처녀 시온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꼬? 너의 파괴됨이 바다같이 크니 누가 너를 고칠소냐?
어린아이들은 엄마 품에서 빵과 포도 쥬스를 달라고 말했다. 그 성의 멸망은 너무 거대하여서 위로할 말이 없었고 고칠 길이 없었다.
[14절]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드러내어서 네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저희가 거짓 경고와 미혹케 할 것만 보았도다.
그 성의 멸망의 한 원인은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들이었다. 그들은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고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거짓된 위로와 소망을 전했다. 그들은 부드러운 말만 했고 유다 백성의 죄를 책망하거나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유다 백성은 자기들의 죄를 깨닫지 못했고 죄로부터 떠나지 않다가 마침내 멸망하여 포로로 잡혀갔다.
[15-16절] 무릇 지나가는 자는 다 너를 향하여 박장(拍掌)하며 처녀 예루살렘을 향하여 비소하고[비웃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온전한 영광이라, 천하의 희락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하며 너의 모든 원수는 너를 향하여 입을 벌리며 비소하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저를 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하도다.
지나가는 자들과 모든 원수들은 유대인들을 비웃고 조롱하였다.
[17절]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옛날에 명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음이여,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훼파하사 원수로 너를 인하여 즐거워하게 하며 너의 대적의 뿔로 높이 들리게 하셨도다.
이런 참혹한 예루살렘 멸망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미 작정하신 일을 행하신 것이며 옛날에 명하신 말씀을 이루신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파괴한 것이 아니었고, 천지의 대주재자 하나님께서 유다를 긍휼히 여기지 않으시고 그 성을 파괴하고 원수들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이었다.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을 행하신 것이었다.
[18-19절] 저희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처녀 시온의 성곽아, 너는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로 쉬게 하지 말지어다.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 각 길머리에서 주려 혼미한 네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고 밤낮 눈물을 강처럼 흘리며 외치라고 말한다. 그는 그들이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고 마음을 하나님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하며 각 길머리에서 굶주려서 기진한 어린 자녀들의 생명을 인해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들라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회개와 간구의 기도를 올리라는 뜻이다.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 항복하는 심정으로, 절대 순종을 각오하는 심정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뜻한다. 예루살렘 성의 멸망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임을 안다면, 그들은 이제 하나님께 회개하며 간구하는 것밖에 남은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20-21절] 여호와여, 감찰하소서. 뉘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손에 받든(티푸킴)[‘안고 어르는’(dandling) (BDB), ‘건강하게 기른’(KB, NASB)] 아이를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살륙을 당하오리이까? 노유(老幼)[노인들과 청년들]는 다 길바닥에 엎드러졌사오며 내 처녀들과 소년들이 칼에 죽었나이다. 주께서 진노하신 날에 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살륙하셨나이다.
가장 참담하고 비극적인 일은 여인들이 자기 손으로 안고 길렀던 아이들을 먹은 것이었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도 성소에서 살육을 당했고 노인들과 청년들도 죽임을 당해 길바닥에 엎드러졌으며 처녀들과 소년들도 칼에 죽었다. 주의 진노의 날에 주께서는 유다 백성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셨고 다 죽이셨다.
[22절] 주께서 내 두려운 일을 사방에서 부르시기를 절기에 무리를 부름같이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었나이다. 내 손에 받들어 기르는 자를 내 원수가 다 멸하였나이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날에 피하거나 남은 자들이 없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죄의 값은 멸망이다. 온전한 아름다움, 천하의 희락이라고 불리던 예루살렘 성은 완전히 멸망했다. 어린아이들은 굶주려 기진하여 죽어갔고, 오랫동안 먹지 못했던 부모들은 심지어 자기 자녀들을 잡아먹기까지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신 날에 그들을 죽이셨다. 그의 진노를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었다. 원수들은 어린것들도 다 죽였다. 죄를 짓는 자들은 결국 다 망한다.
둘째로, 우리는 거짓된 설교를 분별해야 한다. 선지자들은 거짓말을 했고 거짓된 평안과 헛된 소망만 전했다. 그들은 백성의 죄를 드러내거나 책망하지 않았다. 선지자들의 거짓된 설교들은 백성들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였다. 죄를 책망하고 의의 길을 지시하는 바른 설교는 참으로 중요하다. 죄인들에게 평안만을 전하는 것은 속이는 설교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아야 한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옛부터 정하신 일을 이루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행하시는 주권자이시다. 복도 화도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그는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거기에 건강과 일용할 양식, 평안과 행복과 영생이 있다.
예레미야애가 2장
Ⅰ. 하나님의 진노하심 2:1-9
본문에는 하나님의 교회의 상태, 야곱과 이스라엘의 상태, 그리고 시온과 예루살렘의 상태에 대하여 매우 비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본문의 가장 중요한 점은 나마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놓여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들의 슬픔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진노하셨다는 점이다. 즉 그가 '진노하사' 그들을 치신 것이다.
(1)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기뻐하사 자신을 친구처럼 나타내셨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교회에 대해 진노하사 자신을 원수로 나타내신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기한가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손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 사랑으로 징치하시는 것은 쉽게 견딜 수 있으나 사랑으로 책망하시는 것은 깊은 상처를 남긴다. 맹렬한 불이...야곱을 사르셨도다(3절). 하나님이 진노하사 이일을 행하셨다. 그러나 이 불을 붙은 것은 그들의 죄이다. 하나님은 인자한 아버지 같아서 자녀들이 화나게 하지만 않는다면 결코 스스로 노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이제 하나님은 그들의 원수가 되셨다. 아니면 적어도 '원수 같이' 되셨다(5절). 그는 '원수 같이 활을 당기셨다.' 또한 그는 '대적처럼 오른손을 들고 서시사' 그들을 향하여 칼을 뽑아 겨누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그 백성들의 원수는 아니시다. 심지어 진노하실 때에라도 하나님은 노하심으로 그들을 바로잡으신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원수같이 되신다. 그 때에는 그들에 대한 모든 섭리가 외견상으로는 그들을 파멸로 이끄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게도 우리의 화평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를 화평케 하시는 분으로서 이 불화를 제거하셨다.
(2) 이전에 하나님의 교회는 매우 빛났고 열방중에 뛰어났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어두운 구름으로 가리우사 그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하셨다. 처녀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고(1절). 이 구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인도하셨던 구름도 아니요, 성전을 덮어서 영광을 나타내셨던 구름도 아닌, 짙고 어두운 구름을 의미한다. 혹은 홍해에서 애굽인들 쪽으로 향했던, 구름이 이제 그들을 향해 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오른손을 거두시사' 닥쳐오는 재앙을 그들이 피하지 못하게 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의 오른손을 거두셨는데, 길고 여로보암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의 손을 마르게 하셨는데 그 손으로 대적들과 맞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3) 이전에 예루살렘과 유다의 성읍들은 견고하고 요새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여호와께서는 진노하사 그것들을 '삼키셨다.' 그것들은 철저히 파괴되어 흡사 삼키운 것처럼 되었다. 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를 삼키시고(5절). 그것들은 당당하고 견고하며 부요하고 잘 보호되고 있는 성읍들이었으나 삼키워진 바 되었다. 그는 거처만 파괴하신 것이 아니고 요새까지도 모두 파괴하셨다. 처녀 유다에 근심과 애통을 다하셨도다. 의지할 것들이 모두 떠나가는 것을 보고, 그들의 근심과 애통은 더욱 더하여졌다. 이 점은 7-9절에 다시 한 번 강조된다. 여호와께서...궁장을 원수의 손에 붙이셨으매. 하나님께서 스스로 불의 담이되사 막아 주지 않으신다면 아무리 왕궁의 벽이라 해도 소용이 없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황폐하게 하시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날이 오면 그는 '줄을 띠어'(측량줄을 의미한다).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신다. 그 줄까지만 파괴되고 더 이상은 안되도록 하시는 것이다.
(4) 이전에 그들의 국가는 매우 융성하여 그 근처의 힘의 균형은 그들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이 반대로 되었다. 나라와 방백으로 욕되게 하셨도다(2절). 그들이 먼저 우상 숭배로 스스로를 욕되게 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더러운 자로 취급하셨다. 왕과 방백들은, 이전에는 그 신분이 훌륭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 신분을 범하기 힘든 것으로 간주되었으나 이제는 그들이 사람들로부터 멸시받게 되었다. 이것은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기' 때문이다(6절). 여호와께서 '왕과 방백들을 열방 가운데'있게 하사 그들의 머리에서 면류관을 벗기셨다. 그들은 이전의 명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죄인들과 같이 가장 비천하게 취급당하였다. 죄로 인하여 스스로의 품위를 떨어뜨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심판으로 그들을 낮추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5) 이전에 그들은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켜 행하고 하나님께서도 그들 중에 임재의 표시를 남겨 놓으셨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을 진정으로 아름답게 해주었던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것'이 사라졌다. 언약궤는 그룹들 사이, 속죄소 아래에 있는 하나님의 '발등상'이었다. 이것은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가장 거룩한 징표였다(대상 28:2;시 99:5;132:7). 그곳은 쉐키나가 안식하는 곳이었으나 하나님은 '그 발등상을 기억지' 아니하셨다. 언약궤는 갈대아인의 수중에 떨어지는 수난을 당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물들이, 그가 떠나가시면 무슨 거치를 지니고 있겠는가? 하나님과 그의 왕국은 발등상이 없어도 존립할 수 있다. 거룩한 직분에 봉사하던 자들은 '처녀 시온의 장막'을 기뻐하였었다(4절). 그들은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었었다'(참조. 애 4:7).
그러나 이제 그들은 살육되었고 '그들의 피는 희생 제물에' 섞이었다. 성전은 하나님의 성막이었다(이는 성막에서 예배할 당시 그것을 하나님의 전이라 부른 것과 같은 논리이다, 시 27: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헐어 버리셨다'(6절). 그는 성막의 말뚝을 뽑고 지탱하는 줄을 끊으셨다.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성막이 아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막을 모독할 때 그들에게서 성막을 빼앗으심은 당연한 결과이다.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7절). 성소는 죄로 물들어 있었다. 죄는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미워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전에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시 132:14)고 까지 하셨던 자기 성소마저도 미워하시는 것이다. 공회 처소를 훼파하셨도다(6절). 혹자는 이 말이 성전뿐만 아니라 공회당과 선지 학교까지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것들은 원수들이 불살랐었다(시 74:8). 절기와 안식일은 주의깊게 기억되어 왔었다. 그러나 이제 여호와께서는 '시온 가운데서 절기나 안식일을 잊어 버리게' 하셨다. 이제 시온은 파괴되어 안식일과 다른 날의 구별이 없어졌다. 매일 매일이 슬픔의 나날이었으며 모든 절기는 잊혀졌다. 제물을 거룩히 구별하던 제단도 버려졌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들의 제사를 받지도 아니하시고, 그 제사로 인해 영광을 받지도 아니하실 것이기 때문이다(7절). 제단은 여호와의 상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을 것이며 그들을 먹이시지도 않고 그들과 같이 먹지도 아니하실 것이다. 그들은 선지자와 율법사들을 가지는 축복을 받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 사이에는 율법이 없어졌다(9절). 백성들은 더 이상 그것을 읽지 않았고 서기관들도 그것을 가르치지 않게 되었다. 율법이 기록되어 있던 돌판은 언약궤와 함께 사라졌다. 그들을 율법책을 박탈당했다.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핍박하였고 여호와께로 오는 묵시를 경멸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더 이상 선지자와 묵시를 받지 못하게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다.
Ⅱ. 시온의 슬픔 2:10-22
본서가 애가로 불리워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이것은 에스겔의 두루마리에 기록되어 있던 것같은 완전한 슬픔의 표현이다(겔2:10).
(1) 그들의 슬퍼하는 모습이 여기에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아주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1) 항상 당당한 제복을 입고 다니던 재판관들과 행정관들이 그 옷을 벗고 애통하는 자의 옷을 입었다. 장로들은 이제 더 이상 다윗의 집의 보좌인 재판석에 앉이 않고 땅에 앉았다. 그들은 슬픔에 잠겨 할 말을 잃고 '잠잠히' 앉아 있었다. 티끌을 머리에 무릅쓰고 굵은 베를 허리에 둘렀음이여.
2) 예루살렘 처녀들은 머리를 땅에 숙였도다. 항상 쾌활하던 그들은 이제 슬픔이 무엇인지를 알게된다.
3) 선지자 자신이 애통하는 자의 한 본보기가 된다(11절). 눈이 눈물에 상하며. 그는 더 이상 울 수 없을 때까지,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예레미야 자신은 이웃들에 비하여 한결 나은 상태이며 오히려 전에 그 백성에게 당하던 때보다 훨씬 편한 상태였다. 백성들의 멸망이 자신의 구원이 되겠지만 그는 공공의 유익에 신경을 쏟아 개인적인 유익은 묻어 버렸다. 그는 흡사 자신이 이 재앙의 가장 큰 피해자라도 된 듯이 '백성이 패망한' 것을 애통해 하였다.
(2) 저희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18절). 혹자는 이것을 쓰라린 고통의 외침이라고도 하나, 그들 대부분은 고통 중에서 진실한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이다. 선지자 예레미야도 그들에게 계속해서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처녀 시온의 성곽아. "성벽 위에 서 있는 파숫군(사 62:6) 이 원수들이 포위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거나 성벽의 무너짐(성이 함락된 후 약 한 달 뒤에 무너졌다) 때문에 처녀 시온으로 하여금 애곡하게 하라." 오랜 후에 느헤미야도 같은 이유로 애통하게 된다(느 1:3,4).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끊임없이, 쉬임없이 애통하게 하라."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로 쉬게 하지 말지어다. 이 재앙은 계속될 것이며 따라서 슬픔의 원인도 자주 생길 것이다. 즉 새로이 슬퍼할 만한 일들이 밤낮으로 생길 것이다. 그들은 점차 무감각해질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교만하고 강퍅한 마음이 완전히 낮아지고 온유해지기 위해서는 그들의 영혼에 고통을 더 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3) 슬픔의 원인에 대하여 설명한다.
1) 많은 사람들이 기근으로 죽었다. 하나님은 얼마전에 심한 한발로 식량 부족을 일으켜 그들을 바로 잡으셨었다(렘 14:1). 그리고 이제 그들은 엄중하게 포위하시사 기근을 극한 상태까지 몰아 넣으셨다. 따라서 어린 자녀들이 어미의 품에서 굶어 죽어갔다(11절). 이것은 19절에 다시 반복된다. 각 길머리에서 주려 혼미한 네 어린 자녀. 자기 어미의 손에 죽어서 먹히운 어린 아이들도 있었다(20절). 이와 비슷한 사건이 사마리아가 포위당했던 때에도 있었다(왕하 6:29).
2) 많은 사람들이 칼에 살육당하였다. 칼은, 갈대아인들같이 잔인한 원수들 손에 있을 때에는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된다. 그들은 연령을 가리지 않고 아이나 노인이나 모두 죽였다. 그 칼날을 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똑같이 '칼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남녀를 가리지 않고 죽였다. 내 처녀들과 소년들이 칼에 죽었나이다(21절). 이것은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다. 다음에 나오는 말은 매우 가혹하다. 주께서...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 이유는 그의 영혼이 이스라엘의 고통으로 인하여 슬퍼하시기 때문이다.
3)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았다(14절). 예레미야는 오래 전에 이 사실을 알고 애통해 하였으며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렘14:13).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그는 이 말을 애가에도 삽입하였다. 그들의 묵시는 모두 그들 자신의 공상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꾸며낸 그 묵시가 가짜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백성들이 그들을 세웠고, 그들이 말해야 할 바까지 알려 줌으로써 그들을 자기들의 마음에 합당한 선지자로 만들었다. 선지자는 사람들에게 잘못을 말해 주고 그들의 죄를 보여 주어 회개하게 함으로써 멸망에 이르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러나 이 선지자들은 만일 그렇게 하면 백성들의 사랑과 그들의 지원을 잃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백성들의 '죄악을 드러내지 아니하였다.' 만일 백성들의 죄악을 없앨 수 있었다면 그들이 포로로 잡혀가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4) 이웃이 그들을 조롱했다(15절). 무릇 지나가는 자는 다 너를 향하여 박장하며.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이 고작 이것이냐?(시 50:2) 어찌하여 이제는 온전히 추하게 되었느냐? 아름다움은 모두 어디로 갔느냐?"
5) 원수들이 그들을 정복하였다(16절). 예루살렘에 대하여 좋지 않게 생각하던 이들은 이제 그들의 '입을 벌렸다.' 아니 '입을 넓혔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들은 경멸하고 모욕하는 듯이 '비소하고 이를 갈았다.' 우리가 저를 삼켰도다. "이것은 우리가 행한 일이고 우리가 얻은것이라. 이제 저들은 모두 우리의 소유물이라."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아! 이것을 얼마나 가지기를 원하였던가."
6) 이 모든 일로 보아 하나님은 그들에게 돌이키신 것처럼 보이셨다(17절).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적대하여 정하신 일들은 실상 그들을 위한 것이다. 이 사실은 결과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율법을 범하면 어떠한 심판이 내려질 것인지 말씀해 주셨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그 율법을 범하였기 때문에 이미 선포하신 것을 집행하셨을 뿐이다. 이는 레위기 26:16이하와 신명기 28:15에 의한 것이다.
(4) 그들은 이 슬픔을 치료하기 위한 위안을 구했는데, 그 위안이 여기에서 처방되어진다. 그들은 위안을 구하였다(13절). 선지자는 이런 경우에 그들에게 말할, 적절하고도 수긍될 만한 어휘를 고르려고 애쓴다. 처녀 시온이여 내가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꼬. 친구를 위로할 때 우리는 그가 당한 경우가 그에게만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얘기함으로써 위로하려고 애쓴다. 그런 경우보다 훨씬 심한 고통을 받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경우에는 그런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내가 무엇으로 비교하여 너를 위로해 주랴.' "어느 성, 어느 나라가 너와 비교할 만한 고통을 받고 있겠느냐. 아! 그런 곳과 그런 슬픔은 아무데도 없도다. 왜냐하면 너만큼 존귀함을 입었던 곳이 없기 때문이라." 우리는 친구들에게 그 상황은 그리 절망적이 아니고 쉽게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경우는 인간적인 견지에서 전혀 희망이 없다. 그 이유는 '파괴됨이 바다같이 크기' 때문이다. 바다가 육지를 파괴하는 경우, 육지는 원상태로 되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파괴된다. "네가 상처를 입었으니 누가 너를 고칠소냐." 인간의 어떤 지혜나 능력으로도 그와 같이 부서지고 흩어진 상태를 고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통상적인 강장제를 투여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여기에 처방된 치료 방법은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이끌어 내어 회개하는 기도로써 하나님께 그 상황을 완전히 맡기는 것이다(19절). 그 기도는 즉시 시작해야 하며 또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한다. "혼란과 절망에서 일어나 '밤 초경에 부르짖도록' 하여라. 남들이 잘 때에 너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그 자비하심을 끈질기게 구하라. 밤의 4경중 초경에,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쏟듯 하여라.' 마음을 열어놓고 자유롭고 완전하며 성실하고 진지하게 기도함으로 네 처지를 하나님께 모두 펼쳐 놓아라. 하나님을 바라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손을 들어 그를 향하고 '네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라. '이 불쌍한 양 무리가 무엇을 했겠나이까'라고 말하라"(20절). 여호와여 감찰하소서 뉘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그들은 당신의 백성이며 당신의 친구 아브라함과 당신이 택하신 야곱의 자손이 아니니이까? 여호와여 저희의 상황을 살피시사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시온의 참극의 원인 (예레미야 애가 2:1-9)
여기에서 그 야곱과 이스라엘의 하나님되시고 시온과 예루살렘의 하나님이 되시는 하나님의 교회의 상태를 매우 슬프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들에 있어 강조점은 그들이 신음하는 재앙은 모두 하나님의 손에 놓여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진노로 나타나셔서 그런 일들을 그렇게 하셨으므로 그 슬픔은 그렇게 커다란 것이 못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채찍질하고 진노와 격렬한 노하심으로 그들을 징벌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원수가 되어 그들과 싸우신다. 이것이 고통과 재난 중에 더욱 이들을 괴롭히는 쑥과 담즙인 것이다.
Ⅰ. 하나님의 기쁨이 자신의 교회에 있었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스라엘에게 친구로 나타나셨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불쾌해 하신다. 화를 내시고 적으로 나타나시고 행동하신다. 이점이 여기에서 자주 반복되어 말해지고 그들이 슬프게 애곡하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진노 가운데서 행하시니 이 때문에 우리의 오늘은 정말 침울한 날이 된다. 즉 "진노하신 날" (1절)이고 "노하신 날" (2절)이며 "맹렬한 진노 가운데 끊으시고 던지시며" (3절) "진노로 분개하신 날이다" (6절).
하나님의 사랑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진노보다 더 두려운 것이 없으며, 사랑의 교정은 쉽게 견딜 수 있지만 사랑의 책망은 깊은 상처를 준다. "맹렬한 불이 사름같이 야곱을 사르신 것은 하나님의 진노이다" (3절). 그 불은 소멸시키는 불이며, 모든 명예들과 위안들을 통째로 삼키는, "사면을 사르는" 불이다. 이것은 소돔과 고모라에 내린 불과 유황과 같이 "불처럼 쏟으시는 노이다" (4절). 그러나 이 불을 일으킨 것은 그들의 죄이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자애스런 아버지이시다.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을 조롱하고 노하게 하지만 않는다면 결코 우리에게 노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은 결코 노하게 하는 원인 이상으로 노하시지 않는다. 그들과 맺은 하나님의 계약은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목소리를 잘 청종하면" (출 23:22) 그리고 그들의 하나님에게 가까이 하는 한 하나님은 "그들의 원수에게 원수가 되신다" 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수가 되셨다. 또는 최소한 "원수와 같이" 되셨다(57절). 그는 "원수같이 활을 당기셨다" (4절). 하나님은 그들에게 대하여 "대적처럼 모든 손을 들고" 칼을 뽑았다. 하나님은 정말로 그 백성의 원수가 아니시다. 그들에게 노하시는 때에도 원수로서 노하시는 게 아니라 노하심으로 그들을 바로 잡으시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사랑하는 친구나 친한 사람들에게 심하게 화를 낼 수 있다. 그러나 원수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대한 모든 그의 섭리가 표면상으로는 그들을 파멸시키려는 것인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행하는 모든 것이 그들을 적대하고 전혀 아무 것도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일 때 이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원수와 같이 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축복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요, 화평케 하시는 이시다. 그리스도는 이 불화를 제거하셨다.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우리의 원수와 화합한다. 이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다투는 것은 헛된 일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유익한 평화의 조건을 제공하시기 때문이다.
Ⅱ. 과거에 하나님의 교회는 나라들 중에 빛나고 뛰어나고 유력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여호와께서 처녀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다." 캄캄한 구름,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대단히 두려운 것이었다. 그것으로 인하여 교회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없다. 두꺼운 구름, 검은 구름,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침식하고 하나님의 존엄을 숨긴다. 이 구름은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한 것과 같은 구름이 아니고 또는 성전을 둘러싸서 그의 영광으로 성전을 충만하게 하였던 그 구름이 아니다. 아니 홍해에서 애굽인을 가로 막았던 구름과 같이 지금 이 구름의 측면은 그들을 향하여 가로막고 있다.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것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이여" 그들의 방백들과 그들의 성전예배와 그들의 아름다움과 그들의 이웃에게 호의와 존경을 받게 한 모든 것들 그리고 그들에게 상냥하게 보답하던 모든 것들, 그것들은 그들을 "하늘에까지 올리었으나" 지금은 시들어버리고 없어졌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구름으로 그것을 덮으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3절). 그의 모든 아름다운 것과 장엄한 것(시 132:7), 모든 그의 부요와 충만한 것, 그리고 그의 권력과 권위들을 자르셨다. 그들은 거만하게 그들의 뿔을 하나님께 향하여 쳐들었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하나님은 그들의 "뿔을 자르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적들에게 저항하고 대적하기에 무능하게 하셨다. "오른손을 거두셨으므로" 그들은 그들이 전에 하였던 것같이 공격을 할 수가 없고 또한 공격을 방어할 수도 없었다. 하나님이 그 오른손을 거두실 때 그리고 여로보암에게 하사한 것같이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마르게 하실 때 그들의 오른손이 그 적들에 대하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용기있다고 평판높던 한 백성이 그들의 땅에 설 수도 없고 그들의 위치를 지킬수도 없을 때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것은 이렇게 던져진 것이 되었다."
Ⅲ. 과거에 예루살렘과 유다의 성읍들은 강했고 잘 요새화되었었다. 그러나 주민들에게 신뢰를 받았고 난공불락으로서 적들이 감히 가까이 하지 못했다. 지금은 여호와께서 진노하셔서 그들을 "삼키셨다." 그것들은 아주 없어져 버렸다. 요새와 방벽들은 점령당했고 침략자들은 저항도 받지 않았다. 그들의 힘이요, 아름다움이었던 위엄있는 구조물들이 함락되었고 황폐하게 되었다.
1. 여호와께서 "노하셔서 야곱의 모든 거처를 삼키셨다" (2절). 성읍들과 촌락의 집들은 불탔고 또는 다른 방법으로 파괴되었다. 전체가 파괴되었으므로 그것들은 삼키워진 것처럼 보였고 남은 것이라곤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삼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다." 어떤 사람은 그토록 훌륭히 건축되고 장식된 호화로운 집은 집이 없어 방황하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사용했어야 했으므로 완전히 파괴해 버려선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늘 베푸셨던 동정심을 이젠 그만인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은 먹이를 삼키는 사자와 같이 이스라엘을 "삼키셨다" (5절).
2. 하나님은 보통의 거처들뿐 아니라 궁전들까지도 "삼키셨다." 그 "모든 궁들은' 그들의 왕자들과 존귀한 자들의 거처였다. 이것들은 가장 장엄했고 튼튼했으며 또 부요했고, 잘 감시되었지만 역시 삼키워졌다. 하나님의 심판의 명령이 떨어졌을 때 궁전이나 시골집이나 차별이 없이 삼켜 버린다. 만일 궁전들이 이스라엘의 궁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죄로 인하여 더러워진다면 저주가 그들을 방문하도록 기다리게 하라. 그 저주는 "나무와 돌을 아울러 사를 것이다" (슥 5:4).
3. 하나님은 그들의 저주하는 곳뿐만 아니라 그들의 요새와 성곽을 성체와 방어진지까지도 파괴하셨다. 하나님은 "진노로" 이것들을 땅에 엎으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방해하며 또한 심판의 진행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다. 그들로 하여금 가을 나뭇잎처럼 떨어지게 하고 그들을 바닥부터 무너뜨려서 땅에 닿게 하라(2절). 다시(5절에서) 하나님은 그의 "견고한 성을 파괴하셨다." 그러니 무슨 힘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대항할 수 있었겠는가? 이렇게 하나님은 "처녀 유다의 근심과 애통을 더하셨다." 그들에게서부터 그들의 의존하는 모든 것들이 떠나가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은 두려워 간담이 서늘하도록 놀라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7-9절에서 다시 주장된다. 그들의 "궁들을 삼키기" 위하여 궁장(宮墻)을 "원수의 손에 붙이셨다." 궁장은 그들을 안전케 하는 것이었다. 궁장(궁벽)이 부서졌을 때 궁전들이 곧 허물어졌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둘러싼 부담이 되시지 않는 한 궁벽이 그들을 보호할 수가 없다. 하나님은 "노하심으로" 이를 행하셨다. 그것을 계획적으로 행하셨다. 그것은 목적의 결과로 되어졌으며 현명하고 꾸준한 섭리에 의해서 행해졌다. "여호와께서 처녀 시온의 성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이것을 실행하시기 위한 목적으로 갈대아군을 불러들이셨다.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무엇을 황량하게 하시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의도를 따르는 것임에 주의하라. 하나님은 우리를 치시는 일까지도 우리를 위하여 작정하신 일로서 실행하신다. 그러나 그것이 행하여질 때 하나님은 그것을 정확하게 행하기 위하여 "측량줄을 띄신다." 여기까지만 파괴가 행하여질 것이다. 더 이상은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표시되어진 곳까지만 "잘라내어질" 것이다. 또는 수평을 이루게 하는 줄인 "혼란의" 줄을 의미한다(사 34:1).
하나님은 그의 일을 계속하실 것이고 적과 같이 그의 백성들에 대하여 내뻗는 모든 손을 "훼파함에서 거두지 아니하신다" (4절). 목적이 세워졌으면 실행이 계속되어질 것이다. 그의 손은 끝까지 그의 의도를 성취하실 것이고 거두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 백성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던 그 "성과 곽(廓)으로 애통하게 하셨으며 저희와 함께 쇠하게 하셨다." 그 곽과 성 또는 성곽은 함께 그들 위에 무너지고 그들의 함락에 대하여 서로 조위(弔慰)하는 일만 남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문은 순식간에 없어졌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 문의 무게로 인하여 땅속으로 꺼져버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문빗장이 꺾여 훼파되었다." 이 예루살렘 성문의 빗장은 이전에는 "견고하였었다" (시 147:13). 그러나 문과 빗장은 하나님이 그의 보호를 거두시면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Ⅳ. 과거에 그들의 통치는 번영하였고 방백들은 장관이었으며 그들의 왕국은 이웃 나라 사이에서 위대하였었다. 힘의 균형이 그들편에 기울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주 다르다. 하나님은 "나라와 방벽으로 욕되게 하셨다" (2절). 그들은 먼저 우상 숭배로써 그들 자신을 더럽혔고 그 후에 하나님은 그들을 더러운 것으로 취급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그들에게 가장 적당한 장소인 거름더미에 던지셨다. 하나님은 신성한 것(우리는 그것을 장엄한 것이라고 하였다)으로 보여졌던 그때의 영광을 버리셔서 짓밟히고 모욕을 받게 하셨다. 항상 덕망이 있고 신성한 것으로 여겨지던 왕과 제사장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경멸을 받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사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다" (6절).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셨다. 하나님은 그들이 왕직과 제사직의 계약을 더 이상 전수받을 가치가 없으므로 그들을 모두 몰수하셨으며 그들을 버려두셨다.
그러므로 시드기야 왕은 모욕을 당하였고 대제사장 스라야는 범죄인으로서 죽음을 당하였다. 왕관이 그들의 머리에서 떨어졌다. "왕과 방백들이 이방인 가운데 있으며" 그들 중에 있는 죄인들로서 그들에게 모욕을 받았고(9절), 보통 사람들과 같이 취급받았을 뿐아니라 그들의 품격은 거들떠보지 않았고 가장 천한 자로서 취급을 받았다. 주의할 것은 죄로 인하여 그들 자신을 욕되게 한 사람들을 심판하시며 모욕하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Ⅴ. 과거에는 하나님의 법령이 힘있게 그리고 순결하게 그들 중에서 집행되어졌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현존하신다는 표들을 가졌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표들을 빼앗겼고 실로 그들의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던 이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이 없어졌다.
1. 법궤는 그룹(cherubim) 사이, 자비의 보좌 아래 있는 하나님의 발등상이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현현의 가장 신성한 상징이었다. 그것은 그의 발등상이라고 불리워졌다(대상 28:2; 시 99:5; 132:7). 거기에 세키나(shechinah)가 있어서 이스라엘을 지켜보며 때때로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구하여 주었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그의 발등상을 기억하지 아니하신다." 법궤 자체도 갈대아인의 손에 떨어짐으로서 수난을 받았는데 이는 마땅히 그렇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노하신 신께서 그것을 던져버리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더 이상 그의 발등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전에 법궤가 버려졌던 것처럼 지구가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시 66:1). 하나님의 현존이 떠나갔는데 그 현존의 표가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더욱이 하나님께서 그의 법궤를 포로로 내어 주신 것이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시 78:61).
하나님과 그의 나라는 발등상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
이 거룩한 것들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처녀 시온의 장막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것들은 "눈보다 깨끗하고 우유보다 희었었다" (4:7). 모든 선한 백성들의 눈에는 하나님의 장막에서 섬기는 것보다도 더한 즐거움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이들은 죽임을 당하였고 그들의 피는 "희생 제물에 섞여졌다." 이렇게 제사장들은 왕과 마찬가지로 모욕을 받았다. 주의할 것은 시온의 장막을 보는 게 즐거웠던 사람들이 살륙을 당했을 때 하나님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그것을 행하셨다. "여호와께서 불을 붙여서 타는 것이기" 때문에 나답과 아비후의 경우와 같이(레 10:6) 이스라엘의 모든 집이 애곡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3. 성전은 하나님의 장막이었었다(장막은 그것이 있을 동안에는 성전이라 불려졌던 것과 같이, 시 27:4).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헐어버리셨다(6절). 말뚝을 뿌리째 뽑아 버리시고 그 줄을 끊어버리셨다. 그것은 더 이상 장막이 아니니 하물며 하나님의 장막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마치 동산지기가 그의 오두막집이나 원두막을 허물어 버리듯이 그것을 허물어 버리셨다. 하나님은 그것을 쉽고도 빠르게 헐어버리셨고 마치 그것이 다만 "포도원의" 망대나 참외밭의 상직막인 것처럼 아무 후회나 주저없이 허셨다(사 1:8; 욥 27:18).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모독할 때에 그들로부터 성전을 취하여 가심은 그에게 타당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셨다" (암 5:21).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로부터 떠나가시도록 하나님을 자극하였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들의 거룩한 장소를 파괴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배가 혐오스런 것이 되어버렸는데 그들의 예배 장소는 무슨 쓸 데가 있는가? "여호와께서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 (7절) 성소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유일한 것인 죄로 더럽혀졌다. 그리고 그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셨고 "나의 영원히 쉴 곳" 이라고 부르셨던(시 132:14) 성소까지도 미워하신다. 하나님은 "실로" 에 대하여 이같이 행하셨었다. 전에는 "절기의 날" 에 성전의 노래와 음악으로 떠들썩하였던 "여호와의 집에서" 지금은 원수들이 주연을 베풀고 모독하는 소리로 떠들썩하게 되었다(시 74:4).
어떤 이들은 그 "공회처소" (6절)는 성전뿐만 아니라 적들이 불태워 버린 회당과 선지 학교도 가리킨다고 이해한다(시 74:8).
4. 절기와 안식일은 주의 깊에 기억되어졌고 백성은 끊임없이 그것들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었다. 그러나 이제는 "여호와께서" 먼 시골에서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시온에 사는 자들까지도 "그것들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왜냐하면 기억할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고 그들이 바라보곤 하던 장소들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시온은 멸망해 버렸기 때문에 안식일과 다른 날들의 구별은 무너져 버렸다. 매일매일이 애곡의 날이었으므로 "모든 절기가 빼어버려졌다." 그들에게서 안식일과 절기가 지닌 유익과 위로를 빼앗은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들은 절기와 안식일을 충분하게 존중하지도 아니하였고 성실하게 준수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이 날들을 모독하였다. 그것은 유대인이 자주 범한 죄 중의 하나이다. 인자의 날을 보고도 그 날을 가볍게 여기는 자는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눅 17:22).
5. 예물을 바치던 제단은 이제 내어버려졌다. 하나님은 그들의 예물을 더 이상 받지도 아니하시고 그들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지도 아니하시기 때문이다(7절). 제단은 "여호와의 우상이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이상 그들 중에 집을 가지지 아니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지도 아니하시고 그들과 더불어 즐기지도 아니하신다.
6. 그들은 예언자들과 율법 교사들을 축복으로 받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율법이 없다(9절). 율법은 백성들에게서 읽혀지지 않고 서기관들은 더 이상 율법을 해설하지 않는다. 십계명은 법궤와 함께 없어졌다. 율법책은 그들로부터 취하여지고 백성들은 율법책을 소유하지 못하게 금지되었다. 율법을 가지고서도 더 좋은 진보를 하지 못한 그들이 성서를 가지면 또 무엇을 할 것인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한다. 하나님은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대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이것은 사울의 슬픈 경우이었다(삼상 28:15). 그들은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핍박하고 주께로부터 오는 환상을 멸시하였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이 더 이상 예언자와 환상을 갖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로 하여금 자기 마음의 생각을 묵시라고 속이고 아첨했던 예언자에게로 가게 하라.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을 위로해 주고 또 언제까지 재앙이 계속될지를 그들에게 말해 줄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학대한 자들에게는 예언자들을 잃어버리는 게 마땅하다.
복합적인 슬픔 (예레미야 애가 2:10-22)
이것이 애가라고 불려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들은 매우 애상적인 것들이다. 완전한 비탄의 표현과 화에 대한 애곡 그외의 다른 것은 없다. 마치 에스겔의 두루마리의 내용과 같다(겔 2:10)
Ⅰ. 앞에서와 꼭 같은 애가들이 여기에서 나타나는 데 이것들은 생생하게 그려진다.
1. 관복을 입고 나타나곤 하던 법관들과 장관들이 그 관복을 버리거나 혹은 그 옷들을 벗어버리고 슬픔의 옷을 입는다(10절). 장로들은 더 이상 "다윗의 집의 보좌" 인 재판하는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그들을 편안하게 하는 방석 없이 "땅에 앉는다." 또는 큰 슬픔의 표시로서 욥의 친구들처럼 "땅에 앉는다" (욥 2:13).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의 의견을 제시하기 위하여 성문에서 입을 열지 않고 슬픔에 압도되어 "잠잠하며" 말할 바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깊은 슬픔을 가진 자가 하는 것처럼 "티끌을 머리에 무릅쓰고 굵은 베를 허리에 둘렀다." 그들은 그들의 힘과 건강을 잃었으니 이것이 이토록 그들을 슬프게 하였다.
ploratur lachrymis amissa pecunia veris-즉 잃어버린 번영으로 인하여 우리가 흘린 눈물은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다.
2. 그렇게도 화려하게 옷을 입고 "늘인 목으로" 걷곤하던(사 3:16) 처녀들은 이제 비천하게 되었다. "예루살렘 처녀들은 머리를 땅에 숙였다." 슬픔에 대해서 도도하며 항상 즐겁기만 하던 처녀들이 슬픔을 알게 되었다.
3. 예언자 자신이 슬퍼하는 자들의 표본이시다(11절). "내 눈이 눈물에 상하여" 더 울 수 없을 때까지 울었다. 거의 그의 눈이 쇠하기까지, 거의 눈이 멀게 되기까지 울었다. 슬픔의 내적 느낌은 슬픔의 외부적 표현보다 오히려 강하다. 그가 이 재난들이 오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의 창자가 끓었다(렘 4:19, 20).
어떤 사람은 이 예언자는 지금 이 화들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테지만 이 예언자도 조금도 다를 바 없이 그의 "간이 땅에 쏟아질" 정도로 견딜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완전한 파멸을 느꼈다. 그의 모든 창자가 녹고 용해되었다(시 22:14). 예레미야 자신은 그의 이웃들보다도 좋은 대우를 받았고 전에 그가 자기의 동포에게서 받았던 것보다도 좋은 대우를 받았다. 아니 그들의 파멸은 그의 구원이었고 그들의 포로됨은 그 자신이 커지는 것이었다. 그들을 죄수로 만든 것이 그를 유익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사적인 관심은 대중을 위한 관심 속에 삼켜진다. 그리고 이 공통적인 재난 속에서 그 자신이 가장 고난을 받는 자인 것처럼 "그의 백성의 패망" 을 몹시 슬퍼한다. 비록 우리 자신들은 훌륭히 빠져나올 수 있더라도 바로 우리들이 나라와 그 백성들 위에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애곡해야 함을 주의하자.
Ⅱ. 여기에서 애가를 부르고 있다. "저희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18절) 어떤 사람들은 그것은 진실한 회개가 아니고 통렬한 불평의 외침이라고 염려한다. 그들의 마음은 담을 수 있는 한도까지 슬픔으로 가득 채워져서 슬픈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를 발한다. 그 부르짖음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한다. 우리들은 그들 중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재난 중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얻기 위하여 성실하게 부르짖었다고 너그럽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예언자는 가서 계속 그렇게 하라고 명령한다. "처녀 시온의 성곽아! 성곽 위에 서 있는 너, 성벽 위에 서 있는 파수꾼인 너마저(사 62:6) 네가 적들이 성벽 주위에 야영하는 것과 그들이 성벽으로 접근하는 것을 볼 때에 또는 성벽 때문에(그것은 애가의 주제이다). 성벽의 무너짐 때문에(그것은 그 성읍이 취하여진 후 약 한 달이 되기 전까지는 무너지지 않았다) 이 커다란 재난 때문에 처녀 시온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애곡하게 하라." 이것은 느헤미야가 훨씬 이후에 애곡한 것이었다(느 1:3, 4). "밤낮으로 눈물을 강처럼 흘릴지어다. 중단하지 않고 울며 스스로 쉬지 말고 네 눈동자도 쉬게 하지 말지어다." 이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1. 재앙은 계속될 것이다. 또한 슬픔의 원인은 자주 되살아날 것이다. 그리고 그들 자신을 슬프게 하기 위한 새로운 일들이 밤낮으로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2. 그들은 하나님의 손 아래에서 점차로 무감각해지고 둔해지는 것이 어느 정도 적절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교만과 굳는 마음이 충분히 겸손하고 부드럽게 되기까지 그들의 영혼을 아직도 더 괴롭게 하는 것이 요청될 것이다.
Ⅲ. 슬픔의 원인들이 여기에서 주어진다. 애곡해야 할 재난들은 대단히 독특하게 그리고 동정적으로 서술된다.
1. 대다수의 백성들이 매우 심한 심판인 기근으로 멸망한다. 그리고 그 심판 아래 떨어지는 사람들의 경우는 가련하다. 하나님은 얼마 전에 가뭄과 식량 부족을 통하여 그들을 바로 잡으셨었다(렘 14:1).
그러나 이런 정도의 낮은 심판으로는 그들을 회개로 이끌지 못했다. 그러므로 지금은 하나님께서 포위의 긴장으로서 그들을 이 극한 상황으로 몰아 넣으신다. 그것은
(1) 그 자녀들이 그 어머니의 품 속에서 굶주려 죽었다. "자녀와 젖먹는 아이들은" 순수하고 아무런 힘이 없는 상태이므로 "상한 자처럼" (12절) "길거리에서 혼미할 때" (11절) 가장 먼저 구원받을 권리가 있다. 그들을 위하여 주어질 식물이 없기 때문에 굶주려 죽는 이들도 칼에 찔려 죽는 이들과 같이 틀림없이 죽었다. 많은 아이들이 먹을 곡식과 그들을 소생시킬 포도주를 구하여 그들의 가난한 어머니에게 울부짖으며 누워 있다. 그들은 포도주로 양육을 받아 왔기 때문에 이제 그것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으므로 결국엔 "그들의 혼이 그 어미의 품 속으로 쏟아진다."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숨을 쉬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언급되어진다(19절). "각 길머리에서" 굶주려 "쇠약하여진다." 그러나 이것이 최악의 경우는 아니다.
(2) 자기 어미의 손으로 죽임 당하고 먹혀지는 어린아이들이 있는 것이다(20절).
식량이 부족함으로 그 부녀들은 그들이 죽게 되었을 때 그 자신들의 "몸의 열매" 즉 "손으로 받든" 그들의 자녀들까지도 먹었다(시 28:53). 이와 같은 것이 사마리아가 포위되었을 때에도 행하여졌었다(왕하 6:29). 이러한 극한 상황, 아니 이러한 야만은 기근으로 인하여 초래되었다. 우리는 풍부함으로 우리 자신을 위하여서 뿐 아니라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도 필요한 식물을 갖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자.
2. 많은 사람들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삼켜버리는 칼날로 인하여 죽었다. 특히 칼이 갈대아인과 같은 잔인한 적들의 손에 돌려졌을 때 그들은 칼에 죽었다.
(1) 그들은 사람을 가리지 아니하고 죽였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구별이 되어졌던 사람들 또한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자들은 보호를 받을 것이라고 하였지마는 그들까지도 차별없이 죽음을 당하였다. 그들은 홉니와 비느하스같이 그들의 처소도 아니고 전쟁 마당에서도 아닌, 그들이 피난할 수 있으리라 희망하였던 그들의 직무 장소인 성소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2) 그들은 연령을 가리지 아니하고 죽였다. 어리거나 노쇠한 사람이라고 해서 칼의 취함으로부터 면제되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다 똑같이 칼로 "멸하였다." "아직 무기를 들 수 없는 어린 사람과 일을 하지 못하는 노인들도 매장할 어떤 친절한 손길을 만날때까지 길바닥에 엎드려졌고 죽음을 당했다."
(3) 그들은 성(性)을 구별하지 않고 죽였다. "내 처녀들과 소년들이 칼에 죽었나이다." 우리가 읽은 가장 야만적인 군인들의 행위에서도 처녀들은 전리품으로 남아 있었다(민 31:18; 삿 5:30). 그러나 여기서는 처녀들도 소년들과 같이 칼에 죽음을 당하였다.
(4) 이것은 여호와의 행하심이었다. 그는 이렇게 차별없이 칼이 멸망시키도록 묵인하셨다. "주께서 진노하신 날에 살육하셨나이다." 왜냐하면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죽이시기도 하고 살리시기도 하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의 것들은 대단히 가혹하다. 주께서는 "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나이다." 그의 영혼은 "이스라엘의 재난으로 인하여 슬퍼한다." 이같이 잔인하게 행한 원수들은 하나님께서 소집하시고 소환하셨다(22절). "주께서 두려운 일을 사방에서 부르시기를 절기에 무리를 부름같이 하셨나이다. 내게 이같이 두려운 자들은 갈대인들이다." 지금 원수들은 전에 절기날에 그러하였던 것처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붐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수에 아주 압도되었고 아무도 도망하거나 살아 남는 사람이 없었다. 예루살렘은 완전한 도살장이 되었다. 어머니들은 오랫동안 그들이 그렇게 돌보고 고통을 같이 했으며 그렇게 자상하게 해 주었던 아이들이 이렇게 비인간적으로 갑자기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서 가슴이 찢어졌다. "내 손에 받들어 기르던 자를 내 원수가 다 멸하였나이다." 마치 그들은 살인자들을 위하여 출생된 것 같고 도살자들을 위한 양과 같았다(호 9:13). 그들 모두의 어머니였던 시온은 그들이 그의 뜰에서 양육을 받고 성서의 교훈을 받았던 이들이 이렇게 먹혀짐을 보고서 애곡하였다.
3.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을 속였다(14절). 이것은 예레미야가 오래 전에 슬퍼하고 큰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여 보았던 것이다(렘 14:13). "아! 여호와여 그들이 말하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여기에서 그는 그의 애가 중에 이것을 삽입한다.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그들은 백성을 위하여 또한 백성에 대하여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발견한 것처럼 가장하고 어마어마한 환상을 본 것처럼 가장하여 그것을 그의 말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헛되고 어리석은 것이다. 그들의 환상은 모두 다 그들 자신의 공상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어떤 환상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다만 그들의 미친 두뇌의 소산이거나 열이 오른 상상의 산물이다. 그것은 그들이 게으르고 주제넘은 자신의 행동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아니 그것은 그들이 가장했던 환상이 위조품이고 가짜였다는 것을 그들 자신이 알았을 것임이 거의 틀림없다. 그리고 그들이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에게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하여 백성들을 고의적으로 속여서 다만 빛깔로만 사용하였다는 것을 그들 자신이 알았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예언자가 아니고 백성들의 예언자였다. 하나님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심정을 따르는 목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들을 예언자로 세우고 이 거짓 예언자들이 해야 할 말을 말해 주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백성들의 마음을 따르는 예언자들이다.
(1) 예언자들은 백성들에게 그들이 회개하게 하고 그들의 파멸을 예방하기 위하여 그들의 허물을 말해야 하며 그들의 죄를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 예언자들은 그런 말은 사랑과 헌물을 잃게 할 것임을 알았고 그들은 그들 자신들을 동시에 책망함이 없이 청중들을 질책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백성들의 죄악을 드러내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스스로가 죄악을 보지 아니하였다. 만일 보았다고 하면 그들은 그 안의 악과 그 위험을 조금 밖에 보지 못했고 그러므로 그들이 그것을 말하는 것이 그들의 불의를 제거함으로서 포로에게 돌이키는 수단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백성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다.
(2) 예언자들은 그들 위에 오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을 백성들에게 경고하였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 경고만 보았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에게 온 것으로 가장한 말씀이 거짓임을 알았다. 그리고 거짓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안전으로 그들을 만족시킴으로서 순수하게 행동하였으면 예방할 수 있었던 추방을 초래하였다.
4. 그들의 이웃들은 그들을 비웃었다(15절). "지나가는 자는 다 너를 향하여 박장했다." 예루살렘은 이웃 나라들 사이에 위대한 모습을 이루었고 위대한 이름을 얻었으며, 위대한 세력을 가졌었다. 그는 주변에 있는 모든 나라에 공포와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 성읍이 이렇게 쇠약해져서 성이 함락될 때 그들은 모두 기뻐 날뛰었다. 인간들은 이 같은 경우에 이러한 경향이 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이전에 뽐내던 것으로부터 떨어진 것을 보고 기뻐하면서 "비소하고 그들의 머리를 흔들었다. 사람들이 온전한 아름다움이라고 부르던 성이 이 성이냐?(그들이 말하기를)(시 50:2) 그러던 것이 지금은 얼마나 온전히 흉한 모습이냐? 지금은 그 모든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느냐? 천하의 희락이라 일컫던 성이 이 성이냐?" (시 48:2)
다른 어떤 곳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선물을 받아 즐거워하던 성이 이 성이냐? 그리고 이 성이 온 땅의 기쁨이냐? 모든 그 기쁨과 영광이 지금은 어디 있느냐? 이와 같이 사람들의 다른 재난들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고통받는 자들에게 더 많은 고통을 추가한 것은 커다란 죄이다.
5. 그들의 원수들은 의기양양하였다(16절). 예루살렘에 대하여 불행을 원했지만 겉으로는 평화를 기원했던 이들이 이제는 전에 감추었던 그들의 악의와 앙심을 드러낸다. 이제 그들은 "그들의 입을 벌리며" 아니 그들의 입을 넓히며 조소하고 분개하며 "비소하며 이를 간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정복한 승리를 기뻐한다. 그리고 그들이 예루살렘의 주인이 됨으로 많은 전리품을 얻었으므로 즐거워한다. "우리가 저를 삼켰도다. 그것은 우리가 행한 것이요, 우리가 얻은 것이다. 그것은 모두 우리의 것이다. 예루살렘은 더 이상 전과 같이 재판자가 되거나 두려움이 되지 아니할 것이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아 우리는 그렇게도 그것을 갖기를 원하였었다."
교회의 적들이 파괴하기 위하여 충격을 가하고 따라서 이 파멸을 기뻐 날뛰기가 쉽다는 것을 주의하라.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왜냐하면 "음부의 문이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6. 이 모든 것에 있어서 그들의 하나님은 그들에 대항하여 나타나셨다(17절).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의 파괴자들은 "위로부터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았으면 예루살렘을 파괴할 힘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칼일 뿐이다. "내버리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이 논쟁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에게 향하시는 하나님의 연민의 통상적인 예를 가질 수 없었다. "원수도 너를 인하여 즐거워하게 하며" (욥 30:1) "너의 대적의 뿔을 높이 들리게 하셨도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힘을 주시고 자랑거리를 주셨다. 하나님이 그들의 원수가 되는 이것은 실로 가장 괴로운 고난이다. 그러나 그 아래서 인내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가장 강한 논쟁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에 복종해야 하도록 되어 있다. 왜냐하면
(1)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의 실행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셨다." 그것은 신중하고 심사숙고하여 결정된 것이고 경솔하거나 성급한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가 너희에게 재앙을 계획했도다" (렘 18:11).
우리는 그 의사에 정확하게 응답할 수 있도록 계획된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 대하여 고안하신 것은 그들을 위하여 설계하신 것이다. 결국은 그러한 것임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2) 그것은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이다. 그것은 성서의 성취이다. 하나님은 그가 옛날에 말씀하신 것을 이제 실행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의 율법을 그들에게 주실 때에 그들이 그 율법을 범할 때에 그들에게 과하여지는 심판이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확실히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선언한 율법을 어기는 죄를 범하였다(레 26:16). 그의 교회에 관한 하나님의 모든 섭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성취하신다는 사실에 유의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손의 심판과 그 입의 말씀의 심판시에는 정확한 일치가 있으며 이 둘을 비교해 보면 이 둘은 서로 설명하고 예중하기 때문이다.
Ⅳ. 이 애가들의 치료를 위한 위로가 여기에서 나타나며 처방되어진다.
1. 이 위로들은 찾아지고 요청되어진다(13절). 이 예언자는 이 경우에 그에게 말할 적당하고 타당할 말을 발견해 내려고 애쓴다. "처녀 시온이여 무엇으로 네게 비교하여 너를 위로할꼬? 우리는 슬퍼하는 재앙을 만난 사람들을 위로하기를 힘써야 한다는 사실에 유의하자. 우리의 열심이 그들을 최악의 상태로 만들었을 때 우리의 지혜는 그들을 바로 잡고 최상의 상태로 만들도록 노력하여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의 고난받는 친구들에 대한 우리의 동정이 그들의 위로가 되도록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고난의 상황 중의 위로에 대한 두 개의 가장 일반적인 총론을 여기에서 시도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파악되지 아니할 것이기 때문에 시도되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말로서 우리의 친구들을 위로하려고 노력한다.
(1)그들의 경우는 유일한 것도 아니고 전례가 없지도 않다. 그들보다 더 고통이 컸던 사람들과 더 무거웠던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고. 그러나 예루살렘의 경우는 이런 논쟁을 허락하지 않는다. "무엇으로 내가 너처럼 되며, 무엇으로 너와 동등하게 되어 너를 위로할 수 있으리요?" 어떤 도시와 나라의 슬픔이 너의 것과 동등할 수 있습니까? 어떤 증거를 내가 말하여 너의 이 비참한 상태를 말해 줄 실례를 증명할 수 있겠는가? 아! 아무 것도 없도다. 너의 슬픔 같은 슬픔이 없으니 이는 그 영광이 너와 같은 자가 없기 때문이다.
(2) 우리는 그들의 경우는 절망적은 아니라고 말한다. 쉽게 치료받을 수 있다고. 그러나 여기에 인간의 가망성이라곤 용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너의 불화는 바다와 같이 크며," 가끔 바다와 육지는 불화한 것 같아서 복구될 수가 없고 점점 더 넓어만진다.
네가 상처를 입었으니 "누가 너를 치료하리요?" 인간의 지혜도 능력도 이렇게 산산이 부서진 상태의 황량함을 복구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통상적 강장제들을 투약하는 것은 쓸 데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2. 처방된 치료법은 그들 자신이 그들이 하나님께서 범한 죄를 회개하는 기도로서 하나님께 말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도는 즉시해야 하며 끈질기게 해야 한다(19절). "너는 땅으로부터, 너의 절망으로부터 일어나 밤중에 부르짖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잠들어 있을 때 기도자는 깨어 있어서 무릎을 꿇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하나님께 성가시게 졸라대야 한다. 밤의 사경 중에 "초경에 일어나" (네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어 있게 하라." 시 119:148) "네 마음을 여호와 앞에" 물처럼 쏟아 놓으며 자유롭게 그리고 완전하게 기도하라. 네 마음을 열고 너의 경우를 하나님께 펼쳐 놓으며 성실하고 진실되게 기도하라.
거룩한 바램과 기대로 "손을 주를 향하여 들고 네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라." 이 불쌍한 어린 양들은 그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삼하 24:17) 너는 이 말을 하라(20절). "여호와여 감찰하소서. 눠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누구에게 이렇게 대우한 적이 있는지요? 그들은 당신의 백성이 아니며 당신의 친구 아브라함과 당신이 선택하신 야곱의 자손이 아닙니까? 주여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주의할 것은 기도는 모든 아픔을 극심한 아픔까지도 고통을 가라 앉히는 약이 되며 모든 질병을 가장 비참한 질병까지도 치료하는 약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기도할 때 우리가 할 일은 명령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지혜와 뜻에 승복하는 일이다. 우리의 처지를 하나님께 말씀드리고는 하나님께 그것을 맡겨야 한다. "주여 보시고, 살피소서. 그리고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예레미야 애가 2장 주석
성 경: [애2:1]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하나님의 심판]
ꃨ 처녀 시온을 구름으로 덮으셨는고 - 하나님의 진노는 마치 천둥치는 구름처럼 유다 왕국을 덮고 있으며 무서운 권세로서 그 진노를 폭발 시키실 것이다. 이와 유사한 표현한 이사야서와 예레미야서에도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사 1:7; 렘 4:31; 6:2, 23 등 ). 이 민족은 그들이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특권을 나타내는 증표로만 생각했었으나, 도덕적, 영적 영역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는 한, 그런 특권적 위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 민족의 찬란하던 수도는 땅바닥에 떨어졌으며, 신성 불가침으로 여겨졌던 성소, 곧 발등상도 정복자들에게 짓밟혔다. 성소가 이처럼 파괴되었다고 하는 것은 선택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케 한다(Harrison).
성 경: [애2:2]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하나님의 심판]
전유다가 황폐해졌다. 70인역은 '나라' 대신에 '왕'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왕과 그 대신들도 그들의 영광스럽던 신분을 다 상실했다. 욕되게 하셨도다 - 의 히브리어 '할랄'(*)은 '상처를 입히다', '살해하다', '모독하다', '더럽히다'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성 경: [애2:3]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하나님의 심판]
ꃨ 이스라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여 - '뿔'에 해당하는 '케렌'(*)이란 말은 구약에서 권세와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흔히 사용된다(신 33:17; 삼상 2:1, 10; 암 6:13; 미 4:13). 본절은 거대하고 튼튼한 성과 요새들이라도 하나님의 분노가 집어 삼킬 때는 막을 수 없음을 나타낸다.
성 경: [애2:4]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하나님의 심판]
시인은 여기서 신인 동형론법적인 표현을 사용하여서 하나님을 자기 백성에 대한 강력한 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백성들은 오랫동안 죄와 우상 숭배에 젖어서 하나님께 대항하여 왔었다. 그러므로 과거에는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행사되었던 하나님의 권세가 이제 이들을 파멸시키는 목적으로 등장한다. 본절에는 불타오르는 장막이 예화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서 우리는 좋은 것이면 무엇이나 약탈해 가는 약탈자의 모습을 상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제 이들에게는 그나마 약탈해 갈 만한 좋은 것도 없다. 또한 '불'의 이미지(image)가 사용되었는데, 그리스도께서도 역시 이를 심판에 대
한 상징으로 사용하셨다(마 13:42; 18:8; 25:41 등).
성 경: [애2:5]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하나님의 심판]
'근심과 애통'은 히브리어 '타아니야'(*)와 '아니야'(*)를 번역한 말이다. 이 두 단어는 동의어로 두운법을 이루고 있으며 통렬하고 날카로운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개역 성경에서는 그런 뉘앙스가 잘 살아나지 않는다.
성 경: [애2:6]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하나님의 심판]
'성막'으로 번역된 '소크'(*)는 원래 '오두막', '천막'이란 뜻이며, '공회 처소'(*, 모에드)는 원래 '성회'(聖會), '집회 장소'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이 둘 다 하나님의 성전을 지칭하는 듯하다. 또한 '초막같이'의 히브리어 '카간'(*)은 문자적으로 '정원같이'로서 원문상의 정확한 의미가 잘 파악되지 않는다. 70인역( LXX)은 '덩굴(포도나무)같이'라고 읽고 있다. 또한 성전과 함께 '왕과 제사장'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왕정 정치의 일면을 보여준다. 즉 왕은 물론 제사장 직무에서 배제되어 있었긴 하난, 그는 이를 보호, 감독하는 위치에 있었던 듯하다(Ellison).
성 경: [애2:7]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하나님의 심판]
여기서는 예루살렘이 약탈당하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수세기 동안 이 민족의 자존심이었던 찬란한 솔로몬 성전도 이 파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궁장(*, 호모트 아르메노테하). 곧 왕궁 벽돌은 성전 복합 건물의 일부였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제단, 성소와 함께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성전은 몇개의 부속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7년에 걸쳐 건축되었고 왕궁을 세우는 데 다시 13년이 걸렸었다. 한편 '훤화'(*, 콜)는 적들이 승리를 기뻐하며 내지르는 함성을 말하는 것으로서, 히브리 경배자들의 축제 함성이 아니었다(Harrison).
성 경: [애2:8]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하나님의 심판]
여기서는 건축자가 어떤 건물을 파괴시키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시행하는 것을 예로 들어서 여호와의 주권적 의지에 따라 시온이 황폐화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이곳의 '곽' 곧 성벽이란 말은 일부로서 전체를 가리키는 환유법적 표현으로서, 예루살렘 성벽 전체를 가리키고 있다. 하나님의 파괴 작업은 너무나 정확하고 섬세하여서 성전 돌 하나가 다른 돌 위에 놓이지 않을 정도였다. 기독교 초기에 예루살렘은 다시 이런 운명을 당하게 된다(마 24:2; 막 13:2; 눅 19:44; 21:6, Harrison).
성 경: [애2:9]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하나님의 심판]
7절에서는 성전 파괴에 대한 애도의 노래가 울려 퍼졌으나, 8절과 본절에는 다시 예루살렘 성의 파괴와 왕이 포로로 잡혀가는 사건을 애도하고 있다. ꃨ 율법 없는 열방 가운데 있으며 - '율법 없는'(*, 엔 토라)이란 말에 대해 혹자는 판이나 돌에 새겨 성전에 비치된 율법이 갈대아인에 의해 파괴되어 없어져버린 사실을 가리킨다고 본다(Gataker). 그러나 한글 개역 성경처럼 이를 '열방'을 수식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낫겠다. 이스라엘은 제의적, 도덕적, 시민법적 차원의 율법을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특권을 누렸으나 이를 거역하고 파기함으로써, 이제 이방 땅에 추방당하여 율법 없는 이들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다(Calvin).
성 경: [애2:10]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하나님의 심판]
ꃨ 장로들이 땅에 앉아 잠잠하고 - '장로들'은 가문의 머리되는 사람들을 뜻한다. 그리고 민 11:25에는 모세를 도와서 백성들의 재판을 주관하기 위해서 장로 70인이 임명되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출 24:1 참조). 그리고 가나안 정착 시대 이후에는 각 고을에 장로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지역적 문제를 관장하였다(신 19:12; 21:2; 삿 8:14 참조). '이스라엘의 장로들'로 알려진 이 국가적 위치의 집단은 포로기를 전후해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제 이 땅이 황폐해졌기 때문에 장로들은 더 이상 시민의 업무에 관여할 것이 없었다. '티끌을 머리에 무릅쓰고'란 말은 슬픔과 애도의 독특한 표현이었다(욥 2:12; 겔 27:30). '굵은 베' 옷은 초상집에서 입던 것으로서, 고인을 애도한다는 의미를 가졌다(창 27:34; 삼하 3:31). 이것은 주로 염소 털로 만들어졌으며 검은 색깔이었다.
성 경: [애2:11]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심판으로 인한 탄식]
ꃨ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 졌으니 - '창자'와 '간'이란 말은 예리하고도 견딜 수 없는 감정적 혼란이나 슬픔을 상징한다. 간은 정신적 요소를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으가, 또한 깊은 정서적 반응과 결부된 곳으로 여겨졌다. 몇몇 영역 성경들은 이를 심장으로 번역하기도 하는데(heart, NIV, RSV), 이와 동일한 뜻을 지닌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Harrison).
성 경: [애2:12]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심판으로 인한 탄식]
ꃨ 저희가 성읍 길거리에서 상한 자처럼... - 예루살렘 포위 공격 동안 어린 아이들이 당한 그 처절한 운명이 언급되면서 슬픔이 더욱 고조되고 있다. 이 주제는 19-21절과 4:4, 10 에서 다시 나타난다. 이곳에 보여지는 생생한 장면은 그것을 묘사한 자가 목격자임을 분명하게 나타내 준다. 이 아이들은 어미 품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양식을 호소하고 있다. '곡식과 포도주'란 것은 문자 그대로의 뜻을 나타내기 보다는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식량에 대한 일반적 표현이다. 한편, 이런 장면들은 민족이 회복될 때의 약속의 상황, 곧 예루살렘 거리에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어 노는 행복한 때와 뚜렷이 대조를 이룬다(슥 8:5).
성 경: [애2:13]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심판으로 인한 탄식]
시인은 그들의 고난이 너무나 커서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굳이 비교한다면 바다의 크기에나 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바다는 그 크기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 도시의 황폐가 마치 태초의 혼돈의 바다를 연상시킴도 아울러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Ellison).
성 경: [애2:14]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심판으로 인한 탄식]
본절에서 시인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거짓 선지자들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였음을 밝히며(렘 23:18-22; 겔 13:10-16), 또한 이 거짓 선지자들을 환영하고 좇은 백성들의 영적 우매도 신랄하게 지적한다. 거짓 선지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위대하고도 찬란함에 정신이 팔려 있었고 또 신성 불가침이라는 대의 명분에만 집착하고 있어서 그들이 해야 할 의무는 실행치 않고 기득권 유지와 세속적 인기에만 연연하고 있었다. 한편 '어리석은'이라 번역된 '타펠'(*)은 음식에 적용될 때에는 '평범한', '맛없는'이란 뜻이지만 '우둔한', '거짓된'의 의미도 내포한다(Calvin).
성 경: [애2:15]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심판으로 인한 탄식]
ꃨ 지나가는 자는 다 너를 향하여 박장하며 - 유다 대적들이 오랫동안 염원하던 그것이 마침내 이루어짐으로 매우 기뻐하는 광경이다. 한편, 고대에 각 도시들은 그 자체의 신들을 섬겼는데 그 신들이 비록 서로 경쟁적 위치에 있기는 하였으나 재난을 당할 때는 공개적으로 비웃거나 하는 것을 자제하고 상호 묵과해 주는 것이 일반적 관습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예루살렘 멸망을 두고 대적들이 기뻐 뛰며 조롱과 혐오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Ellison).
성 경: [애2:16]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심판으로 인한 탄식]
ꃨ 우리가 저를 삼켰도다 - 이스라엘은 여호와가 유일한 하나님이시고 또 이스라엘이 그의 백성이며 예루살렘이 그 수도임을 주장하면서 긍지를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자부심에 대해 주변 국가들은 시기하고 있었던 바, 그 도시가 파괴되자 마치 자신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것처럼 기뻐하였다.
성 경: [애2:17]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심판으로 인한 탄식]
ꃨ 원수로 너를 인하여 즐거워하게 하며 - 여기서 시인은 유다를 대적자들의 비소거리로 전락하게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지적한다. 포로기 이전 대다수 유다인들은 하나님의 성품에는 변함이 없으심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이 그 성전을 버린다는 예레미야의 신탁을 노골적으로 배척하였다. 그러나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이 선언하셨던 내용은 오경에 잘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그 뜻에 불순종하는 것에 대한 처벌이었다(레 26:1-45; 신 28:15-68).
성 경: [애2:18]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심판으로 인한 탄식]
ꃨ 저희 마음이 주를 향하여 부르짖기를 - 본절에서부터는 주제의 흐름이 급격히 바뀌고 있다. 이러한 급작스러운 변화는 이 책 다른 곳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시인은 황량한 이 도시를 향해서 하나님께 탄원할 것을 촉구한다. '처녀 시온의 성곽아'라는 말은 그곳 인구 전체를 집합적으로 가리키는 표현이다. 맛소라 본문(M.T.)은 '주'란 말과 '성곽'이란 말을 나란히 병기함으로써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대상이었던 사실을 암시하는 듯하다.
성 경: [애2:19]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심판으로 인한 탄식]
ꃨ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지어다 - '경'(*, 아쉐무로트)이란 밤을 12 등분하는 시간 단위였다. 이곳의 '밤 초경'이란 말은 아마도 밤 동안에 어떤 간격을 두고 계속 애곡하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생존자들의 잠을 깨워 이전의 죄악으로 인해 처절한 심판을 받았다는 슬픈 사실을 상기 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라는 특이한 표현은 열정적이고도 진지한 기도를 나타낸다(Harrison).
성 경: [애2:20]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심판으로 인한 탄식]
ꃨ 여인들이...아이를 먹으오며 - 부모들이 굶주림에 견디다 못해 죽은 자기 자녀들을 먹는 끔찍한 장면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광경은 예루살렘이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허물어져 간 그 당시의 비극적인 상황(렘 3:23-26)을 극명하게 반영시키고 있다. 아마 시인의 뇌리에는 그때의 그 사건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한편, '손에 받든'에 해당하는 '티푸힘'(*)을 70인역(LXX)은 '젖을 빨던'이라 의역하였고, 탈굼역(Targum)은 '비단옷을 입은'이라고 옮겼다. 그러나 개역 성경처럼 '손에 받든'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원문적이라 하겠다(Blayney, Calvin).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집과 관련된 최고의 영적 전통의 근간이 되었던 무리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이 범죄하였던 그 무대 위에서 종말을 맞게 되었다. 그 어떤 제사 의식이 종교 행사라 하더라도 그것이 신적 권위를 가질 때에야만 효력이 있었고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하나님은 외적인 제사보다는 영적으로 윤리적으로 정결한 상태에서 마음으로 예배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강조해 오셨던 것은 제사 절차라는 기계적이고 의식적인 것 자체보다는 순수한 동기에서 비롯된 영적인 예배를 추구하는 일이었다(삼상 15:22; 시 51:17).
성 경: [애2:21]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긍휼에의 호소]
ꃨ 내 처녀들과 소년들이 칼에 죽었나이다 - 젊은 남녀들이 살육당한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세대란 점에서 대단히 심각한 문제였다. 시온은 이제 바람의 씨를 뿌리면 결국 태풍을 거두게 된다는 쓰라린 교훈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고난은 변함없으시고 또 일관된 신적 심판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 경: [애2:22]
주제1: [하나님의 영광을 상실한 슬픔]
주제2: [긍휼에의 호소]
'절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모에드'(*, 1:15)는 '정해진 시기', '모임' , '지정된 장소'란 의미를 가지는데, 주로 정해진 장소에 사람들이 모여서 종교적 절기나 축제를 지키는 것을 가리켜 쓰인다. 사 33:20에는 시온이 '우리의 절기 지키는 시온성'으로 묘사되었고 시 74:4에서는 이 말이 성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적용되었다.
할렐루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Be careful, or your hearts will be weighed down with dissipation, drunkenness and the anxieties of life, and that day will close on you unexpectedly like a trap. For it will come upon all those who live on the face of the whole earth. Be always on the watch, and pray that you may be able to escape all that is about to happen, and that you may be able to stand before the Son of Man. _ 누가복음 Luke 21:34-36
† 예레미야애가 2장
[SYNOPSIS]
주전 587년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함락은 유다 백성들에게 치명적인 믿음의 위기를 안겨 주었다. 성전은 이전에 선민 유다가 하나님과 만나서 제사를 드리던 곳이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헐어 버리셨다. 절기와 안식일 역시 이전에는 누구나 성실하게 기억하던 날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시온 가운데서 절기나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이제 성전이 파괴되어 안식일과 다른 날의 구별이 없어졌다. 또한 이전에는 하나님의 계시와 율법이 선민 유다 안에 있었으나, 이제 그들 사이에는 율법이 없어졌다. 백성들은 더 이상 율법을 읽지 않게 되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러한 것들을 매우 그리워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유다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경건한 자들 또한 예루살렘의 함락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낸 사건임을 인식하게 된다. 곧 그들은 유다의 죄가 이러한 재앙을 받을만하다고 인정하였던 것이다.
[CONTENTS]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진노로 파괴되는 모습이 묘사된다.
“1. 슬프다! 주께서 어찌 그리 진노하사, 딸 시온을 (분노의 먹)구름으로 덮으셨는가! 이스라엘의 아름다움(영광)을 하늘에서 땅에 던지셨음 이여, 그의 진노의 날에 그의 발판(예루살렘 성전)을 기억하지 아니하셨도다.”
하나님의 진노는 마치 천둥치는 구름처럼 유다 왕국을 덮고 있으며 무서운 권세로서 그 진노를 폭발 시키실 것이다. 이 민족은 그들이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특권을 나타내는 증표로만 생각했었으나, 도덕적, 영적 영역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는 한, 그런 특권적 위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 민족의 찬란하던 수도는 땅바닥에 떨어졌으며, 신성불가침으로 여겨졌던 성소, 곧 발등상도 정복자들에게 짓밟혔다. 성소가 이처럼 파괴되었다고 하는 것은 선택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케 한다.
“2~10. 주께서 야곱의 모든 거처들을 삼키시고,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음이여! 노하사, 딸 유다의 견고한 성채들을 허물어 땅에 엎으시고, 나라와 그 지도자들을 욕되게 하셨도다. 맹렬한 진노로 이스라엘의 모든 뿔을 자르셨음(이스라엘의 모든 힘과 영광이 사라짐)이여! 원수 앞에서 그의 오른손을 뒤로 거두어들이시고 맹렬한 불이 사방으로 불사름 같이 야곱을 불사르셨도다.
원수 같이 그의 활을 당기고, 대적처럼 그의 오른손을 들고 서서 눈에 드는 아름다운 모든 사람을 죽이셨음이여! 딸 시온의 장막에 그의 노를 불처럼 쏟으셨도다. 주께서 원수 같이 되어, 이스라엘을 삼키셨음이여! 그 모든 궁궐들을 삼키셨고 견고한 성들을 무너뜨리사, 딸 유다에 근심과 애통을 더하셨도다.
주께서 그의 초막을 동산처럼 헐어 버리시며, 그의 절기를 폐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절기와 안식일을 잊어버리게 하시며, 그가 진노하사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도다. 여호와께서 또 자기 제단을 버리시며 자기 성소를 미워하시며 궁전의 성벽들을 원수의 손에 넘기셨으매, 그들이 여호와의 전에서 떠들기를(기뻐하며 환호성을 지르기를) 절기의 날과 같이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딸 시온의 성벽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줄을 띠고(예루살렘의 멸망이 확정되었음을 상징) 무너뜨리는 일에서 손을 거두지 아니하사, 성벽과 성곽으로 통곡하게 하셨으매(예루살렘 성곽이 완전히 무너짐) 그들이 함께 쇠하였도다. 성문이 땅에 묻히며 빗장이 부서져 파괴되고, 왕과 지도자들이 율법 없는 이방인들 가운데에 있으며, 그 성의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교통이 완전히 단절됨). 딸 시온의 장로들이 땅에 앉아 잠잠하고, 티끌을 머리에 덮어쓰고 굵은 베를 허리에 둘렀음이여(큰 슬픔과 애통을 나타내는 행위)! 예루살렘 처녀들은 머리를 땅에 숙였도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원수가 되어 직접 성벽과 성전을 부수었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자신의 성소를 파괴하시고, 자기와 영원히 언약을 맺은 자기 백성들을 살육하셨던 까닭은 죄악으로 무디어진 자기 백성들이 재앙을 통해서 회개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11~19.”
- 아, 딸 내 백성이 망하였구나! 어린 자녀들과 젖먹이들까지도 기진하여 길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으니, 내 눈에서는 눈물이 그치지 않고 하염없이 줄줄 흐르는 도다. 내 창자가 끓어오르고, 내 간이 땅바닥에 쏟아지는구나. 아무것도 먹지 못한 어린 자녀들이 부상당한 자들처럼 기진한 채로 성읍 길바닥 여기저기에 힘없이 쓰러져 헐떡이고 있구나. 어린것들이 제 엄마 품속에서 허기진 채 죽어가면서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말하기를 “제발 먹을 것 좀 주세요. 밥과 물은 어디 있나요?” 하는구나.
처녀 예루살렘아, 내가 무엇을 더 말하랴? 너를 무엇에 비교할 수 있으랴? 딸 시온아, 내가 너를 무엇에 비교하며, 무슨 말로 너를 위로할 수 있으랴? 진실로 네 상처는 바다같이 깊고 크니, 누군들 너를 고칠 수 있겠느냐? 네 예언자들은 네게 대해 거짓말만 하였다. 그들은 헛되고 어리석은 환상만 보았으므로, 네게 대해 아무 쓸모없는 말만 지껄였을 뿐, 네 죄악을 올바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기에 오늘날 네가 재앙의 덫을 피하지 못하고 대적에게 사로잡혀 포로가 된 것이다. 참으로 그들은 네게 거짓된 경고와 미혹하는 말만 일삼았도다.
보라, 이 도성을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손뼉 치며 비웃는다. 처녀 예루살렘의 망한 꼴을 보고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어 대며 조롱하기를 “이 도성이 그토록 아름다웠다는 그 도성이냐? 정말로 이 도성이 ‘온 세상의 기쁨’이라 일컬어지던 그 영광의 도성이더냐?” 하는구나. 오 멸망한 예루살렘아, 여호와께서는 네게 대해 이미 작정하신 뜻대로 다 행하셨고, 오래전에 네게 경고하신 대로 다 이루셨다. 그렇다. 심판의 날에 여호와께서는 너를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사정없이 다 허무시고 부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네 원수들로 하여금 너를 보고 기뻐하게 하셨고, 네 대적들로 하여금 네 앞에서 그들의 뿔을 높이 들게 하셨도다.
그러므로 그때에 예루살렘 백성들이 주를 향해 부르짖기를 “딸 시온의 성벽이여, 너는 울어라! 밤낮으로 울고 또 울어, 네 눈물로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 쉬지 말고 계속 울어, 네 눈으로 잠시도 쉬게 하지 말라. 초저녁부터 일어나 밤새도록 울며 부르짖어라. 네 고통스런 심정을 주 앞에 강물처럼 쏟아놓아라. 예루살렘 성읍의 모든 거리 어귀마다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네 어린 자녀들을 생각하며, 그 어린것들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주를 향해 네 두 손을 높이 들고 부르짖어라.” 하였도다.
주전 589~587년의 예루살렘 포위 기간에 있었던 성 안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이와 같은 참상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거짓 선지자의 유혹이었다. 이 같은 예루살렘의 참상을 목도한 이방 원수들은 의기양양하여 유다를 조롱하였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재앙 속에서 유다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위로를 구하는 일밖에 없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가 굶주림에 견디다 못해 죽은 자기 자녀들을 먹고, 여호와의 집과 관련된 최고의 영적 전통의 근간(根幹)이 되었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주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며, 또한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젊은 남녀들이 살육(殺戮)을 당하게 되니, 시온은 이제 바람의 씨를 뿌리면 결국 태풍을 거두게 된다는 쓰라린 교훈을 배우게 되었다.
“20~22.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누구에게 이같이 행하셨는지요? 여인들이 어찌 자기 열매 곧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먹으오며,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어찌 주의 성소에서 죽임을 당하오리이까? 늙은이와 젊은이가 다 길바닥에 엎드러졌사오며, 내 처녀들과 내 청년들이 칼에 쓰러졌나이다. 주께서 주의 진노의 날에 죽이시되,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고 도륙하셨나이다.
주께서 내 두려운 일들을 사방에서 부르시기를, 절기 때 무리를 부름 같이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는 날에는 피하거나 남은 자가 없나이다. 내가 낳아 기르는 아이들을 내 원수가 다 멸하였나이다.” sysun21c.blog.me/220400639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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