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구약의 산책

예레미야 애가(Lamentation) 서론 및 1장

by 은총가득 2020. 12. 15.

예레미야 애가 서론


1. 명칭

옛날 히브리 사람들은 자기가 저술한 책에 제목을 붙이는 일이 없었다.
후일에 다른 사람들이 그 내용을 보고 합당한 제목을 붙였다.

 

본서의 히브리어 제목은 본서의 첫 글자인 (에카)어찌하여이다.
그런데 70인역의 번 역 자들이 본서의 내용을 따라 (예레미야의 눈물) 이라고 이름을 붙였고, 라틴역에 서는 (눈물)이라고 제목을 붙이고 (예언자 예레미야의 애가)라는 주석을 붙였다.
영어 성경이나 한글 성경은 이 라틴어 성경을 따른 것이다.

 

그림설명 / 쿰란 제4동굴에서 발견된 애가의 단편(4Q Lam) 사해두루마리의 일부. BC 1세기.


2. 주제표

초점

백성의 상태

하나님의 심판

선지자의 약속

시인의 예언

백성의 기도

본문

애 1

애 2

애 3

애 4

애 5

주제

절망

소망

결단

3. 내용과 주요사상

한글 성경에는 본서가 에레미야서 다음에 있는데 이것은 70인역 역자들이 바꾸어 놓 은 순서를 따른 것이지 히브리어 원전의 순서는 아니다. 애가는 히브리인들의 국치일인 압(Ab)월 9일 즉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파괴당한 날 에 낭독한 두루마리이다. 본서의 내용이 바로 예루살렘의 파괴와 그 후의 참상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본서의 구조적 특징은 제 1장부터 4장까지 각 장이 히브리 글자 가나다순으로 각 절 의 첫 글자가 되게 지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을 아크로스틱(Acrostic)시형이라고 한다. 그래서 각장의 절수가 히브리어의 가나다 글자 수인 22절로 되어있다.

 

애가 3장은 글자 하나로 세 절씩 만들었기 때문에 66절이 되어있다. 제5장은 가나다순으로 짓지 않았지만 절수는 22절이다.  본서는 주전 586년에 멸망한 유다와 예루살렘의 참상을 슬퍼하는 시이다. 선민 이스라엘 민족의 국가가 한 때는 모든나라의 수도 중에서 으뜸가던 예루살렘의 현재의 비 참이 무슨까닭인가? 그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죄를지은 결과라는것을 솔직하 게 고백한다. 동시에 저자는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애절하게 하나님께 구원하여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다.


4. 내용 분해(대분류)

1. 화려하고 거룩한 예루살렘의 비참을 슬퍼함 애1:1-22 2.   이 비참의 원인  애2:1-22   3.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나 그의 자비를 의지함 애3:1-66 4. 예언자와 제사장들의 죄와 그 결과 애 4:1-22 5. 하나님의 은혜와 나라의 회복을 기도함 애5:1-22


5. 내용 분해(소분류)

○애1:1 첫째 애가, 예루살렘의 폐허 애1:1 예루살렘 성의 비참함 애1:10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애곡 애1:20 원수들에 대한 저주 ○애2:1 둘째 애가, 예루살렘의 함락 애2:1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예루살렘 애2:11 유다 백성의 슬픔과 수치 애2:20 하나님께 대한 간구 ○애3:1 셋째 애가, 선지자의 고통과 기도 애3:1 유다 백성이 환난 애3:19 소망을 갖는 예레미야 애3:40 회개를 촉구하는 예레미야 애3:56 구원을 간구하는 예레미야 ○애4:1 넷째 애가, 멸망한 예루살렘 백성들 애4:1 예루살렘의 참상 애4:11 선지자와 제사장들의 죄악 애4:17 폐허 속에서의 소망 ○애5:1 백성들을 위한 기도 애5:1 유다 백성의 참상 애5:19 백성들의 귀환을 위한 기도

명칭
 
애가(哀歌)란 말은 헬라 어의 '큰 소리로 높여 운다'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따라서 책의 내용을 이 명칭 한 마디로 집약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히브리 성경의 제목은 '어찌하여'라는 탄식과 비통의 감정을 의미하는 단어인 '에카' (ekah)이다. 우리가 '예레미야애가'라는 명칭을 쓰는 것도 칠십인역과 벌게이ㅌ 역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본서는 히브리 어 성경에서는 룻기, 아가서, 전도서, 에스더서와 함께 한 두루마리 안에 기록되어 있다.
 
저자 및 기록연대
 
전통적으로 본서의 저자는 예레미야라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데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성경 안에서 예레미야가 저자라는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대하 35:25 이하에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요시야 왕의 죽음에 비탄하여 애가(哀歌)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그가 애가를 자주 지었다는 근거가 된다. 그리고 본서의 내용을 살펴볼 때 이 저자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반드시 목격했던 인물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파멸에 관한 묘사가 너무나 생생하게 저자의 경험담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1:13-15; 2:6, 9; 4:1-12). 이는 예레미야의 경험과 일치한다(비교. 렘 39, 52장). 뿐만 아니라 예레미야가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기록들이 있다(3:52-54). 곧 구덩이에 던져진 일들은 예레미야의 자전적 기술임을 증명해 준다(렘 37:15; 38:6). 그리고 무엇보다도 애가서와 예레미야서 사이의 문체의 통일성은 저자가 한 시람임을 말해주며, 이는 곧 애가서의 저자도 예레미야임을 입증한다.

(2) 전통이 본서의 저자가 예레미야임을 증명한다.
본 애가서의 저작 연대는 대체로 B.C. 587-586년 사이로 본다. 이렇게 보는 이유는 예레미야가 그다랴 총독을 암살한 무리들에게 끌려가 애굽으로 가기 직전에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본서에서 예레미야가 애굽의 사정을 언급한 곳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설이 더 유력하다.
 
구조및 사상
 

■ 구조
본 애가서는 각 장이 22절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에 대한 예외가 있다면 66절로 기록된 3장인데, 살펴보면 이 3장 또한 '22절 구조'라 볼 수 있다(22×3). 이러한 형식은 히브리 알파벳 순서에 따라 각 절을 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히브리 알파벳은 22자임).

■ 사상
예루살렘이 폐허화되고 언약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 버린 B.C. 587년의 참극은, 소위 언약 백성에게 많은 의아심을 품게 했다. 어떻게 계약의 하나님이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의 파괴를 묵인하셨는가? 이와같은 질문에 대한 시인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고난은 하나님께서 그의 목적을 달성하시기 위하여 인간에게 내리시는 한 방편이다(3:37).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 목적을 이루시도록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최선의 길(3:25-27)일 뿐이다. 시인은 이를 생각하며 절망중에 감사했다(3:23). 하지만 그는 그날을 기다리며 간구한다.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5:21).

 
내용분해
 
1. 예루살렘의 황폐(1:1-22)
2. 주의 진노의 날의 참상(2;1-22)
3. 파괴된 시온의 환난(3:1-66)
4. 고난당하는 시온의 백성(4:1-22)
5. 회개하는 시온의 간구(5:1-22)
 
서론 일람
 
1. 기록자 : 아마도 예레미야가 기록했을 것이다.
2. 기록연대 : B.C. 586-585년 사이.
3. 기록장소 : 예루살렘 혹은 이집트
4. 기록대상 : 무너져 내린 예루살렘 거민들
5. 핵심어 및 내용 : 예레미야의 핵심어는 "분노"와 "비탄"이다. 하나님의 분노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은 멸망되었고 그분의 의로우심과 공의는 드러났다. 이제 예레미야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한때 영광스럽고 위대한 성이었던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우는 것뿐이다.

 

예레미야애가 1장

 

Ⅰ. 예루살렘의 슬픔 1:1-11

(1) 예루살렘이 당한 참극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1) 그들의 사회적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① 본래는 거민이 많던 성읍이 적막해졌다(1절). 이 성읍은 그 백성으로 가득차 있었고 또 다른 나라 백성들도 자주 찾아와 그들과 더불어 유익한 교역을 많이 가졌었다. 그러나 이제 그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가고 홀로 '적막히 앉아' 있게 되었다. '지혜가 소리쳐 부르던' 성의 주요한 거리는 이제 더 이상 그렇지 못했다. 이제는 과부같고. 신랑되는 왕은 이제 가 버렸다. 그 성의 하나님은 얼굴을 돌이키셨다. 이제 그 성은 아이들을 잃어버린 과부처럼 고독과 슬픔 가운데 버려졌다.

 

② 주권을 가지고 있던 성읍이 이제는 속국이 되어 버렸다.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여서 어떤 나라에게는 큰 사랑을 받았고 어떤 나라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어떤 나라들은 선물을 보내왔고 어떤 나라들은 조공을 바쳤었다. 그 성은 실로 '열방 중에 공주'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우방들을 다 잃고 '적막히 앉았을' 뿐만 아니라 자유도 잃고 '조공드리는 자'가 되어 버렸다. 그 성은 처음에는 애굽에, 그리고 이제는 바벨론에 조공을 드리게 되었다. 죄를 짓는 백성은 적막하게 될 뿐만 아니라 노예가 되어 버린다.

 

③ 즐거움에 가득차 있던 성읍이 이제는 슬픔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예루살렘은 기쁨의 성읍으로서 모든 지파들은 여호와 앞에서 기쁨을 누리기위해 그곳으로 갔었다. 그 성은 온 세상의 기쁨이었으나 이제는 침묵과 고독 속에 '밤새도록 애곡하고' 있는 것이다. 남들이 쉬고 있는 한밤중에도 그 성은 당하고 있는 고난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성의 '머리는 물이 되고 눈은 눈물 근원'이 되어 낮이나 밤이나 눈물만 흘리고 있다(렘9:1).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④ 열방 중에서 구별되었던 그 백성들이 이제 '열방에 거하게' 되었다. 그들은 특별히 선택된 백성들이었으나 이제는 뒤섞이고 말았다(3절). 유다는...사로잡혀 갔도다. 그들은 약속되었던 땅으로부터 적국, 즉 하나님과 그 언약과는 거리가 먼 이방인들 중으로 옮겨져 '평강을 얻지' 못하게 된 것이다.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5절). "다음 세대의 시가 될 자녀들이 끌려감으로 그 땅은 상속자가 없어 황폐하게 남아 있도다." 자기들의 땅에서 동족들과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이, 강제로 이국으로 끌려가는 사람들의 불행을 생각해 본다면 현재 받고 있는 은혜에 더욱 감사해야 할 것이다.

 

⑤ 항상 남을 정복하기만 하던 백성들이 이제는 정복당했다. 그 모든 핍박하는 자가 저를 쫓아 협착한 곳에 치쳤도다(3절). 그 백성들은 어쩔 수 없이 '대적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빠져 나갈 길이 아무데도 없었기 때문이다(7절). 어느 곳에서나 그들의 '대적이 머리가 되고 원수가 형통하게' 되었다(5절).

⑥ 하나님께서 존귀케 하시사 거룩한 백성이 되고 이웃 나라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던 백성들이 이제는 멸시를 받게 되었다(8절). 전에 높이던 모든 자가...업신여김이여. 이제 그들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업신 여김을 당하게 된 것이다. 여호와여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하오니(9절). 죄는 사람에게 치욕을 안겨 준다.

 

⑦ 풍요로운 땅에 거하던 백성들이 이제 양식이 없어서 죽게 되었다(11절). '그 모든 백성이' 낙담과 절망의 '탄식'을 한다. 이제 그 땅에는 '식물이 진하게' 되었다(렘 52:6). 따라서 포로생활 중에 그들은 음식물을 얻기 위하여 많은 수고를 해야 했다(참조. 애 5:6). 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소성시키려고 보물로 식물들을 바꾸었더니(11절). 어떤 역본에는 '생명을 다시 얻기 위하여'라고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이제 그들은 거의 쓰러질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2) 그들의 종교적인 상태는 다음과 같았다.

① 종교적인 절기는 더 이상 준수되지 않았다(4절). 시온의 도로가 처량함이여. 그 길은 잡초로 뒤덮혔다. 엄숙한 절기들이 무시되고 모독당했다(사 1:11,12). 그러므로 그들에게 종말이 닥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온의 도로가 처량함' 같이 '모든 성문도 황적'하여졌다. 그 문은 제사를 드리러온 신실한 자들이 서로 만나곤 했던 곳이다.

 

②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그들은 성전이 황폐하게 된 것을 탄식하였다. 찬양이 탄식으로 바뀐 것이다. 시온이 한창 번성할 때에는 '소고치는 동녀 중에 가객과 악사'가 있었으나(시 68:25) 이제 모든 것이 사라졌다. 처녀들이 근심하며...곤고를 받았도다. 즉 시온의 모든 거민이 다 이전의 장엄한 집회를 회상하며 슬픔에 잠겨 있다. 그들에게는 '이 치욕이 무거운 짐이 되었다'(습 3:18).

 

③ 그들이 경건하게 제사드리던 장소가 모독당했다(10절). 저희가 성소에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 그 성소는 이스라엘 사람들 중 아무리 경건하고 헌신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제사장 이외에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방인들은 예배하기 위함이 아니라 약탈하기 위하여 함부로 떼지어 들어간 것이다.

 

④ 성전을 아름답게 장식하거나 혹은 예배에 사용되던 값비싼 물건들이 이제 대적들의 노략물이 되었다(10절). 대적이 손을 펴서 보물을 빼앗았나이다. 이 보물들이 무엇인지는 이사야 64:11에서 찾아볼 수 있다. 거기서 이사야는 정선이 불에 타는 것을 탄식하면서 '즐거워하던 곳이 황무하여 진다'고 덧붙이고 있다. 그 보물들은 다른 어떤 것보다 기쁨을 주던 것으로, 법궤와 제단, 기타 하나님의 현현하심을 기념하는 물건들이었다. 그 물건들은 이제 깨어지거나 옮겨졌다. 즉 '처녀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간' 것이다(6절). 처녀 시온의 아름다움은 거룩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므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처녀 시온의 아름다움도 없어진 것이다.

 

⑤ 거룩한 날이 조롱을 받았다(7절). 대적은 보고 그 황적함을 비웃도다. 대적들은 이 백성이 7일 중의 하루를 안식으로 삼은 것을 비웃었다. 당시 이방 시인 쥬베날은 유다인들이 시간의 7분의 1을 손해보는 것에 대해 이렇게 비웃었다. "그들은 안식일을 돈을 주고 사야 할지니 이는 7일 중 하루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안식일이 만일 마땅히 지켜진다면 일주일 중 다른 어떤 날보다도 훨씬 유익한 날로 바뀔 것이다. 유다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안식일을 지켰다고 말하자 대적들은 이렇게 물었다. "너희가 하나님의 율례를 지켜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 그가 너희를 이 고통 속에 버려두지 않았느냐?"

 

⑥ 지금 당하고 있는 상황은 이전에 누리던 것과 정반대였다(7절). 예루살렘이 환난과 군박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생각함이여. 즉 어둡고 음침한 날에 옛날의 영화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자비하심을 보이지 않으심으로써 그것의 가치를 알게 해주신다.

 

(2) 이 모든 재앙의 원인은 예루살렘의 죄에 있었다. 여호와께서 곤고케 하셨음이라(5절). 여호와께서는 '저의 죄가 많으므로' 공의로운 심판을 내리신 것이다. 그들의 고통이 심한가? 그들의 죄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참조. 렘 30:14). 그들은 매우 사악하였다(8절).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하므로. 그들은 고의로, 즉 계획적으로 범죄하였다. 이전에 하나님께 신앙을 고백하고 그로 인하 특권을 누리던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하므로' 그들은 '놀랍게 낮아졌다'(9절). 이전에 악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압박받게 되었다(3절). 유다는 환난과 많은 수고로 인하여 사로잡혀 갔도다. 그들 중의 부유한 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였고 특히 갈대아 역본에 따르면 히브리 노예들을 핍박하였다. 이것이 이 재난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렘34:11). 모든 자가 그 적신을 보고 업신여김이여...저의 더러움이 그 치마에 있으나. 예루살렘은 그 거민들의 죄의 구렁텅이에서 뒹굴게 하였다.

 

(3) 예루살렘의 친구들은 모두 그릇되고 동정심조차 없었다. 친구도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도다(2절). 저의 목백은 꼴을 찾지 못한 사슴이 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림같도다(6절). 첫 번 경고가 울리자마자 그들은 도망을 쳤다. 그러나 그들은 흡사 꼴을 먹지 못하여 전혀 힘이 없는 사슴같았다. 이웃들은 전혀 이웃답지 못했다. 돕는 자가 없고...위로할 자가 없도다(7,9절). 아무도 동정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주지 않았던 것이다.

(4) 비로소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찾는다. 그들은 오로지 하나님의 동정어린 긍휼하심만 바라고 있다.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9절). 여호와여 나를 권고하옵소서(11절). 우리가 짐에서 벗어나 편안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선 그 짐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가 선히 여기시는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도록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다.

 

Ⅱ. 환난 중에 하나님을 찾음 1:12-22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교회가 슬픔을 당하는 중에도 그 재앙 가운데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인식한다. 그 손은 공의의 손이다.

(1) 고통을 당하고 있는 교회는 자신의 고통을 과장하여 말한다. 그녀는 모든 구경꾼들에게 호소한다. 내게 임한 근심 같은 근심이 있는가 볼지어다(12절). 예루살렘은 실제로 이와 같이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고통에 빠질 떼 흡사 자기만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행동하기 쉽다. 만일 그 고통을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같이 섞어서 균등하게 나누어 가진다면 아마 이렇게 외칠지도 모른다. "오 주여 원래의 내 고통을 돌려 주시옵소서."

 

(2) 예루살렘은 고통을 주는 도구들 너머로 그 고통을 만드신 분을 본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12절). "여호와께서 진노의 날에 내게 대하여 노를 발하사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구나." 교회는 지금 열에 들떠 있는 사람처럼 되었다.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13절). 또한 그물에 엉키어 있는 것같다. 그 그물은 빠져 나오려고 애를 쓸수록 점점 더 엉켜 들어가는 그물이다. 그녀는 적막한 광야에 있는 자처럼 되었다.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 종일토록 고적하여 곤비케 하셨도다. "나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으며 의지할 것이 없나이다." 그녀는 멍에를 멘 자처럼 되었다. 그 멍에는 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고통의 멍에였다. 내 죄악의 멍에를 그 손으로 묶고 얽어(14절).

 

그리스도의 계명의 멍에는 쉬운 멍에이다(마 11:30). 그러나 우리가 범죄함으로 묶인 멍에는 무겁고 힘들다. 양심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심판하여 우리를 묶는다. 그때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손이 우리에게 멍에를 씌우사 묶는 것이다. 그리고 그 멍에를 풀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자비의 손 밖에 없다. 하나님은 '모든 용사를 없는 것같이 여기시는' 분이시다(15절). 그 성은 또한 술틀에 밟힌 자처럼 되었다. 하나님이 '처녀 유다를 술틀에 밟으셨다.' 그녀는 원수들의 손에 붙여진 바 되었다. 여호와께서 그녀를 '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붙이셨다'(14절). 여러 번 야곱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서 여기서는 야곱을 침공할 것을 명하신 것이다. 이는 야곱이 그의 계명을 불순종하였기 때문이다.

 

(3) 예루살렘은 자신의 고통을 바라보고만 있는 자들에게 동정을 베풀어 달라고 정당하게 요구한다(12절). 무릇 지나가는 자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너희들이 그토록 무관심하게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너희 이웃의 집이 불타고 있는데 너희에게는 아무 관계가 없단 말인가?"

 

(4) 예루살렘은 자신의 슬픔을 정당화한다(16절).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같이 흐름이여. "내가 '밤새도록' 울어도 아무도 보지 못하는구나."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17절). 이것은 무엇인가를 소망하는 자세가 아니고 오히려 절망의 표시이다. 예루살렘의 하나님은 그에게서 떠나가셨다. 구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위로자이신 하나님이 멀리 계실 때 성도들의 영혼이 쇠약해지는 것은 전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예루살렘의 거민들은 옮겨졌으므로 전혀 예루살렘을 도울 수 없데 되었다. 자신을 돌볼 수도 없는 그들이 어찌 예루살렘을 돌볼 수 있겠는가? 그 성의 기쁨과 희망이었던 '처녀와 소년들이 사로잡혀' 갔다(18절). 친구들 역시 그 성을 실망시켰다.

 

어떤 이들은 도울 뜻이 없었고 어떤 이들은 도울 능력이 없었다. 그녀, 곧 그 성은 도움을 바라며 '두 손을 폈으나 위로할 자가 없었다'(17절). 그녀는 우상들을 사랑했고 애굽과 앗수르를 믿었으나 그들은 그녀를 김나하였다.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선두에 나서서 사람들을 지도했어야 했으나, 굶주림으로 '기절하였거나'(19절) 또는 '소성시킬 식물을' 찾아 구걸에 나섰다. 밖으로는 칼의 살육이 있고(20절). 원수들은 가로막는 것들을 모두 죽였다. 집에는 사망 같은 것이 있나이다.

 

원수들로 온통 에워싸여져 있음으로 양식 조달이 끊어져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 적들은 매우 잔인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에 원한을 몹시 품고 있던 에돔과 암몬 족속으로 당장이라도 달려들 차비가 되어 있었다. 나의 모든 원수가 나의 재앙을 들었으나 주께서 이렇게 행하심을 기뻐하나이다(21절). 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이스라엘과의 사이가 멀어지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5)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정당하다고 인정한다. 즉 자기의 죄가 이러한 재앙을 받을만하다고 인정하였다. 그토록 무겁고 단단하게 매어져 있는 멍에는 바로 자신의 '죄악의 멍에'였다(14절). 이는 곧 자신의 채찍으로 자기 자신을 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자신의 불의함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로움을 인정한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18절). 또 한번 반복하여 고백한다. 나의 패역이 심히 큼이니이다(20절). 죄에 대하여는 아무리 나쁘게 말하여도 충분치 못하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우리의 죄에 대하여 가장 나쁘게 말하여야 하고 심지어 '패역' 곧 가장 큰 패역이라고까지 말해야 한다. 죄에 대해 슬퍼하는 것은 슬픔 중에 가장 큰 슬픔이어야 하며 그것은 영혼을 움직여야 한다.

 

(6) 예루살렘은 현재 당하고 있는 상황에 대하여 하나님께 자비와 공의, 이 두 가지 측면으로 호소한다. 여호와여 돌아 보옵소서 내가 환난 중에서 마음이 괴롭고. 그녀는 원수들이 그녀에게 행한 해악에 대하여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한다(21,22절). 주께서 반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시리니. "하나님의 뜻으로 결정되사 예언에 기록되어 있는 그날을 이르게 하시어 내 원수들을 나와 같이 만드시고 지금 내 손에 있는 진노의 잔이 그들의 손으로 옮겨가게 하시옵소서." 이것은 "정해진 날이 이르게 하소서"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리고 곧이어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저희 모든 악을 주 앞에 나타내시고. "나의 모든 죄악을 인하여 내게 행하신 것같이 저들의 죄를 인하여 저희에게도 행하시는 날이 빨리 오게 하소서." 이 기도는 대적들과 연합하려는 모든 생각에 대하여 저항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여야 한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과 자신의 교회에 대적하는 무리들에게 반드시 이루시리라고 말씀하신 것들을 이루시라고 기도할 수는 있다.

 

예루살렘의 참극 (예레미야 애가 1:1-11)


여기에 있는 애가는 너무나 애절하기 때문에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기질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 구절들을 읽어내려 가면서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Ⅰ. 예루살렘의 재난이 너무나 무겁고 많은 경우에 있어서 너무 심한 괴롭힘을 당한다고 불평을 한다. 이 재난들을 살펴보자.

1. 그들의 시민으로서의 지위에 관하여.

(1) 본래는 거민이 많던 성읍이 적막해졌다(1절). 이것은 놀라움으로 말해진다. -이 일이 올 수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했으랴! 또는 질문하는 방식으로 말한다. -무엇이 이 재난을 여기에 가져왔는가? 또는 탄식으로- "슬프다! 슬프다!(마치 계시록 18:10, 16, 19 처럼)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그녀는 그녀 자신의 백성으로 가득 차서 그녀를 채웠고 그녀에게 자주 찾아오는 다른 나라 사람들로 만원을 이루었으며 그들과 더불어 유익한 무역과 즐거운 교제를 나누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녀의 백성은 포로로 끌려갔고 이방인들은 그녀의 비위를 맞추지 아니해 그녀는 "적막히 앉아있다. 지혜가 소리쳐 부르던 광장" 이었던(잠 1:20, 21) 성의 주요한 곳들에는 지금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그들이 쓸쓸한 채로 버려진 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기에서 지혜의 외침을 청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을 주의해 보자.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증가했던 그들의 수를 금방 줄일 수 있으시다. "처녀 이스라엘이 어찌 그리 과부처럼 되었는고!" 그녀의 남편이었고 남편이었어야 했던 왕은 끊어지고 가버렸다. 그녀의 하나님은 그녀를 떠나갔으면 그녀에게 이혼 증서를 주었다. 그녀는 자녀들을 빼앗기고 과부와 같이 고독하고 슬픔에 차 있다. 어떤 가정이나 예루살렘 외의 어떤 나라나 아니 바벨론이라 할지라도 안심하거나 내가 "여왕처럼 앉으며 과부로 지내는 것을 결코 보지 않으리라" 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라(사 47:8; 계시록 18:7).

(2) 주권을 가지고 있던 성읍이 지금은 종속되어 있다. 그녀는 "열국 중에 큰 자" 였으며 어떤 나라들에게는 매우 사랑받는 존재였고 다른 어떤 나라들에게는 매우 두려운 존재였다. 이러한 나라들로부터 주목을 받았고 그들은 모두 복종했었다. 어떤 나라들은 선물을 보내왔고 다른 어떤 나라들은 조공을 바쳤다. 그래서 그녀는 실로 "열국 중에 공주" 였고 모든 곡식단들은 그녀의 단에 절하였다. 심지어 열국의 왕자들도 그녀의 호의를 간청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상들은 뒤엎어졌고 그녀는 그녀의 친구들을 잃어버리고 적막히 "앉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녀 자신의 자유마저 잃고 공물(貢物)처럼 앉아 있다. 그녀는 먼저는 애굽에게 다음에는 바벨론에게 공물을 바쳤다. 죄는 한 백성을 적막하게 만들 뿐 아니라 노예로 만든다는 것에 주의하자.

(3) 즐거움으로 충만하던 성읍은 침울함으로 변하고 모든 서술이 비통으로 가득차 있다. 예루살렘은 기쁨의 성읍이었었고 그 지파들은 주 앞에서 기뻐하기 위하여 올라갔었으나 이제는 시들어 버렸다. 그녀는 모든 땅의 기쁨이었으나 이제는 심하게 울고 있으며 그녀의 웃음은 애곡으로 변했고 그녀의 엄숙한 축제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진정 슬퍼하는 자가 몰래 남이 듣지 않게 혼자 울듯이 밤중에 운다. 다른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는 "밤중에" 그녀의 생각은 그녀의 아픔에 최고로 집중되고 그때 슬픔은 폭군을 연출한다. 그녀를 위해 울던 예언자의 머리를 그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으나 이제는 그 예언자의 머리가 그녀 자신의 머리가 되어 -" 물처럼" 그리고 눈은 눈물의 근원이 되어 "낮과 밤에" 운다(렘 9:1). 그녀의 눈물은 하염없이 뺨위를 흐른다. 눈물처럼 빨리 마르는 것이 없는 데도 새로이 북받쳐오는 슬픔들이 새눈물을 자아내므로 그녀의 뺨은 눈물이 떠날 날이 없다. "학대받는 자가 흘리는 눈물" 보다 더 널리 알려지는 것이 없고 학대받는 자와 함께 비 그친 뒤의 구름은 개인다(전 4:1)는 교훈에 주의하자.

(4) 열방 가운데서 구별되었던 자들이 지금은 "열방에 거하게" 되었고 독특한 백성이 이제는 혼합된 백성이 되었다(3절). 유다는 그녀의 땅으로부터 원수들의 땅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고 거기서 하나님과 계약을 알지 못하는 자들 가운데서 불안과 불만을 느끼며 안정을 얻을 수 없는 자들과 함께 살며, 승승장구하는 제국의 폭군의 뜻에 따라 이곳에서 저곳으로 계속 쫓겨다니는 삶을 그들 가운데서 영구히 체류하며 살아야 할 것만 같다. 그리고 다시(5절에서는) 그녀의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 잡혔도다" 하고 탄식한다. 다음 세대를 이어갈 씨앗이 되어야 했던 그 자녀들이 끌려갔고 그래서 그 땅은 황폐해졌으며 또한 그 땅을 이어받을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땅은 계속 황폐한 채로 버려질 것이다. 자신들의 동족들 가운데서, 자신들의 땅에서 자유롭게 사는 자들은 타국으로 끌려가야만 하는 사람들의 비참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그들이 누리고 있는 행운에 대해 더욱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5) 전쟁에서 정복하던 자가 이제는 패하였고 정복당하였다. "그 모든 핍박하는 자가 저를 쫓아 협착한 곳에 미쳤도다" (3절). 그들은 그녀로부터 가능한 모든 재산들을 빼앗았으므로 그녀의 백성은 도망할 길이 없이 불가피하게 "대적의 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7절). 그들은 사방으로 둘러싸였고 그들이 어디로 도망치려고 해도 그들은 낭패만을 당할 뿐이었다.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으나 유린당하고 정복당할 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느 곳에서나 "저의 대적이 머리가 되고 저의 원수가 형통하게 되었다" (5절). 그들은 그들의 칼을 어디로 돌리든 더 좋은 것을 얻게 되었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초래한 협착한 곳은 죄로 인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가장 큰 대적과 원수인 죄로 하여금 우리를 지배하게 하고 우리의 머리가 되도록 허락한다면 분명코 다른 우리의 원수들이 우리를 지배하려고 애태워 괴로워할 것이다.

(6) 구별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예를 내려 주심. 위험을 갖추었고 모든 이웃들이 경의를 표하던 백성이었던 자들이 이제는 멸시를 받고 있다(8절). "전에 높이던 자가 업신여김이여" -전에 동맹을 간청해 오던 나라가 이제는 그럴 만한 가치가 없어졌다. 그녀가 화려하고 번성할 때에는 그녀를 애무하던 자들이 이제 그녀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 그 "적신(赤身)을 보고 업신여긴다." 그녀의 원수들의 득세함을 보고 열방들은 그녀의 연약함을 지각(知覺)하고 그들이 생각해 오던 강한 나라가 아님을 알며 그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큼을 보고 그들은 이제 밝혀지고 또 어느 곳에서나 이야기되어지는 그녀의 사악함을 깨닫는다. 이제 그들이 얼마나 죄로 인하여 타락하였는가 드러난다. 그들에 대하여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한다" (9절). 원수들은 그들을 짓밟고 모욕하니 원수들의 눈에는 그들이 미천하게 되었으며 비록 전에는 열방의 머리였으나 이제는 열방의 꼬리가 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죄는 어떤 백성에게도 치욕을 가져온다는 사실에 주의하자.

(7) 비옥한 땅에 살던 자들이 멸망하게 되었고, 그들 중에 많은 자들이 먹지 못하여 죽었다(11절).

" 모든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낙담과 절망의 "한숨을 쉬었으며" 기절하게 되었고 그들의 영혼은 죽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한숨을 쉬었다. 왜냐하면 먹을 것을 찾으나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침내 "그 땅에 거하는 백성들에게 식물이 떨어지는" 극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렘 7:6). 그리고 노예인 그들은 음식을 얻기 위하여 많은 수고를 해야 했다.

그들은 많은 즐거운 것들, 보석과 그림들, 그리고 옷장들과 장롱들과 같은 모든 가구들을 소유했었다. 또 그들은 그것들을 바라보며 즐거워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들과 그들의 가족들의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이것들을 팔았으며 그것들을 팔아 "목숨을 구하기 위해 먹을 음식을 사야 했다." 그들에게는 다른 어떤 강장제보다도 음식을 필요로 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주고 생명을 사며 생명을 지탱해 주는 음식을 샀다. 즐거운 것들에 싸여 있는 자로 그것들을 자랑하지도 못하게 하고 그것들을 좋아하지도 못하게 하라. 필수적인 것들을 기꺼이 팔아야 할 때가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기 위해 충분한 양식을 가진 자들로 하여금 그것으로 만족하게 하자. 비록 그들이 즐거운 것들을 가지지 않았더라도 그 양식 때문에 감사하게 하라.

2. 우리는 여기에서 비참한 그들의 교회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의 성스러운 관심의 파멸은 그들에게 있어서 다른 어떤 세속적 관심보다 더 통탄할 노릇이었다.

그들의 종교적 축제들은 더 이상 거행되지 않았고 더 이상 반복되지 않았다(4절). "시온의 길은 슬피운다." 그들은 침울하게 보였고 시들은 풀이나 잡초처럼 보였다. 성전에 이르는 대로를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가는 것을 보는 것은 즐거운 기분전환이 되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곳에 오랫동안 서 있을 수 있고 그렇게 해도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아무도 거룩한 절기에 오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거룩한 도시가 파괴됨으로 그들에게는 완전한 종말이 왔다(사 33:20). 거룩한 절기는 무시되었고 모독되었다(사 1:11, 12). 그러므로 마땅히 그들에게는 끝이 온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시온의 길이 애곡하게 되었을 때 모든 시온의 아들들은 그 길과 함께 애곡할 뿐이었다.

선량한 사람에게 있어서 종교적 모임이 깨어지고 흩어지는 것을 보는 것은 그리고 기쁘게 모임에 참여하고 싶으나 금지당한 자들을 보는 것은 비통한 일이다. 그리고 시온의 길들이 애곡하듯이 신실한 예배자들이 만나는 곳이었던 "시온의 문도 황폐하였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만나는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었다. 주께서 모든 야곱의 거민들보다도 시온의 문들을 더 사랑하셨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문들을 잊으셨고 그 문들로부터 떠나가시도록 자극받으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포기하셨을 때 성전이 황폐했던 것처럼 그 문들이 그렇게 된 것은 마땅한 일이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지리라" (마 24:38).

(2) 그들의 예배를 맡은 사람들은 전혀 그들이 원하는 예배를 집행할 수 없었고 완전히 좌절해 있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은" 성전의 황폐함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그들의 노래들은 탄식으로 변했다. 그들은 아무런 할 일이 없으므로 탄식하고 그러므로 가졌어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은 백성들처럼(11절) 먹을 것이 없어서 탄식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계였던 여호와의 제물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제사장들과 여호와의 대리자들은 탄식할 때이다. 노래와 춤으로 즐거이 그들이 거룩한 절기에 나아가던 "이스라엘의 처녀들" 역시 "무겁게 고통을 당한다." 시온이 번영할 때에 그들의 예배에 대한 연주를 했었으나(시 68:25, "그들 중 소고치는 동녀가 있었다") 이제는 그 파멸을 연주한다. "이스라엘의 처녀들은 고통을 당하므로 슬픔 가운데 빠져 있다." 즉 시온의 모든 거민들이 다 슬픔 가운데 있다. 그들의 특징은 거룩한 모임 때문에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 치욕이 무거운 짐이 되었다" (습 3:18).

(3) 그들의 종교적인 장소는 모독되었다(10절). "이방인이 성소에 들어가며" 성전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이 곳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고 이스라엘 사람도 제사장들 외에는 그들이 아무리 경건하고 헌신적이더라도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방인은 예배를 위해서라도 가까이 오면 죽으리라." 그런데 지금 이방인이 예배를 드리려는 게 아니라 노략질하기 위하여 난폭하게 몰려 들어온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은 회중에 들어가는 것조차도 해서는 안 되며" 유다 백성과 혼합되어서도 안 된다고 명령하셨었다(신 23:3). 그러나 이제 그들은 통제를 받지 않고 거룩한 곳에 들어간다. 주의할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참다운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을 모독하고 거룩한 것들을 경멸하는 것을 보는 것보다도 더 슬프고 비탄스러운 것은 없다는 것이다.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시 74:3, 4)라고 그릇 호소한다.

(4) 그들의 거룩한 그릇들과 모든 훌륭한 것들은 성전을 장식하고 아름답게 하여서 예배에 사용되어 졌었던 것이었으나 이제는 적들에게 전리품이 되었다(10절). "대적이 손을 펴서 보물을 빼앗았나이다" (보물들이 무엇인가는 시 64:11 에서 배울 수 있다). 거기에서 성전이 불타는 것에 대한 불평에 추가해서 "우리의 즐거워하던 곳이 황무하였나이다" 고 한다. 그것들은 법궤와 제단과 하나님이 그들에게 현현하시는 모든 다른 표징들이다. 이것들은 다른 어느 것들보다 더 그들이 즐거워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것들은 깨어지고 멀리 옮겨졌다. 이렇게 처녀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갔다" (6절). 거룩한 아름다움은 시온의 딸의 아름다움이었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집인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그 아름다움은 사라졌다. 아름다움의 막대기를 잘랐으니 이는 계약의 서약과 그 인(印)을 취하려 함이다(슥 11:10).

(5) 그들의 거룩한 날들이 희롱을 받았다(7절). "대적들은 그를 보고 그의 안식일을 조롱하였다." 그들은 7일 중의 한 날을 세속적인 일을 쉬고 구별하는 것 때문에 조롱을 받았다. 그 당시 이방인 시인인 쥬베얼은 시간의 7분의 1일을 잃어버린다고 하여 유대인을 조소하였다. Cui septima quaeque fuit lux Iguava et vitae Partem non attigitullam-즉 그들은 그들의 안식일을 지킴으로 손해를 본다. 왜냐하면 7일 중 한 날은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반면에 안식일은 마땅히 그러할 것으로서 거룩하게 지켜진다면 주간의 다른 모든 날보다도 더 좋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하나님께 복종하고 그의 명예를 위하여 안식일을 지켰다고 고백하였다.

 

반면에 대적들은 그들에게 묻기를 "너희는 그것을 지킴으로 무엇을 얻었는가? 너희의 하나님의 율령을 지킴으로써 무슨 이익을 얻었는가? 그는 지금 너희를 고난 가운데 버리지 않았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명령이 특히 안식일이 조롱받는 것을 듣는 것은 대단히 큰 고통이라는 것에 주의하자. 시온은 그날들을 "그의 안식일" 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하나의 제도인 것이지만 또한 이스라엘의 특전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시온의 아들들은 안식일에 대한 경멸을 곧 그들 자신에게 가해진 경멸로 생각하는 것이요, 따라서 그들의 심중에 놓여진 경멸로 취하는 것이다.

(6) 이 모든 불평들이 더 심하게 한 것은 현재의 그의 상태가 과거의 그의 상태에 비하여 정반대가 된 때문이다(7절). 환난과 궁핍을 당하는 날에, 모든 것이 어둡고 희미할 때 예루살렘은 "옛날의 모든 즐거운 일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그가 과거에 그 일들로 기쁨이 가득하였던 그것들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를 더 잘 이해한다. 하나님은 때때로 자비의 결핍을 통하여 자비의 가치를 알게 하신다. 최고의 번영으로부터 역경에 떨어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곤란은 극심하게 된다.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의 의식에서 추방되었을 때 다윗의 가슴을 에이던 슬픔이었다.

그는 "무리들과 함께 하나님의 집으로 갔을 때를 기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 42:4).

Ⅱ. 여기에서 예루살렘의 죄는 이 모든 재앙을 초래하고 도발하는 원인으로서 불평되어진다. 사람은 누구나 쓰여지는 기구이나니 고난을 만들어내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저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곤고케 하셨음이라" (5절).

예루살렘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은 올바른 심판으로서 그것을 행하신 것이다.

1. 그의 죄는 셀 수 없이 많다. 그의 고난이 많은가? 그의 죄는 더욱 많다. 그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괴롭게 하셨다" (렘 30:14). 한 백성의 죄가 증가될 때는 "그는 까닭없이 내 상처를 많게 하신다" (욥 9:17)고 욥이 그의 경우에 말한 것과 같이 말할 수는 없다.

2. 그 성질로 말하면 극히 악질적이다(8절).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하므로 하는 말대로 그들은 모든 것 중에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가중스러운 범죄인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였다.

그러한 고백을 하게 하고 그러한 특권을 누리는 예루살렘의 죄는 가장 통탄스러운 죄이다.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8절) "놀랍게 낮아졌다." 통탄할 죄는 놀라운 파멸을 초래하는 것을 기억하라. 불의를 행하는 자들에게는 이상한 벌이 따른다(욥 31:3). 그 죄들은 명백히 벌을 받을 죄이다.

(1) 그들은 심하게 압박받아 왔고, 그러므로 그들은 압박받는 자들이었다(3절). 유다는 환난과 수고로 인하여 사로잡혀 갔도다. 왜냐하면 그들 가운데 있는 부자들이 가난한 자를 괴롭히고 그들로 하여금 혹독하게 종노릇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갈대아 사람이 말하듯인 그들은 그들에게 맡겨진(렘 34:10) 히브리인들을 압박하였기 때문이다.

압박은 그들이 부르짖는 죄 중의 하나였는데(렘 6:7, 7) 지금은 그 죄가 큰 소리로 부르짖고 있다.

(2) 그들은 스스로가 자신을 천하게 만들었으므로 당연히 천대를 받는다. "불경한 자같이 되어 전에 높이던 모든 자가 그 적신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예루살렘이 그 거민을 죄의 구렁창에서 딩군 것이 그 옷에 묻어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더럽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우리의 영광을 더럽힐 수 없다.

(3) 그들은 매우 안전하였었다. 그러므로 이 파멸은 그들에게 당연히 놀라운 것이었다(9절). 결국을 생각지 아니함이여. 이스라엘은 그의 이후의 끝이 즉 그가 행한 그러한 악한 행위의 종말이 이러한 것이리라고 생각하도록 경고를 받았었으나 그것을 듣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놀랍게 낮아졌다. 그가 두려워 아니하던 것을 두려워하게 되는 놀라운 방법으로 "놀랍게 낮아졌다." 고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리실 것이다.

Ⅲ. 여기서 예루살렘의 친구들은 거짓되고 나약하고 대단히 불친절한 자로서 불평되어진다. "친구도 다 배반하여" 그러므로 "그들은 원수가 되었다." 그 배신자들은 그의 파괴자들 만큼이나 그를 괴롭게 하였다. 우리 아래서 부러진 갈대지팡이는 "우리를 친 갈대지팡이" 만큼이나 많은 해악을 우리에게 행하였다(겔 29:6, 7). 그를 보호했어야 할 방백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적들에게 대항할 충분한 용기가 없었다. 그들은 "사슴과 같이" 우선 놀라서 도망하기에만 바빴고 싸우려 하지 않았다. 아니 그들은 꼴을 찾지 못하여 굶주린 "사슴과 같아서 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림 같았다." 싸울 힘이 없이 곧 달려 내려가 먹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의 이웃들은 이웃답지가 않았다. 왜냐하면,

1. 그를 돕는 자가 없었다(7절). 그들은 도울 수도 없었고 돕기를 원치도 않았다.

2. 더욱이 그를 위로하는 자도 동정하는 자도 없었고 그의 슬픔을 경감시켜 줄 어떤 말을 해 주지도 않았다(7,9절). 욥의 친구들의 경우에서처럼 예루살렘의 슬픔이 너무 컸기 때문에 위로는 소용없는 것이었다. 이 경우에 그들은 위로자가 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였다.

Ⅳ. 예루살렘의 하나님은 여기에서 모든 일에 관하여 관심을 갖도록 호소하신다. 그리고 모든 것은 그의 자비로우심을 말하고 있다(9절).

"여호와여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 이것을 인정하소서(11절). 그리고 보시옵소서. 여호와여 권고하옵소서." 이것에 대하여 명령을 내려 우리가 우리의 짐에서 벗어나 편하게 하는 유일한 길은 그 짐을 먼저 하나님께 맡기고 그가 우리를 위하여 선하게 여기시는 대로 하시도록 맡겨두는 것이다.
환난 속에서 보는 하나님 (예레미야 애가 1:12-22)

여기에 있는 불평은 본질상 앞부분에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구절들에 있어서 예언하고 슬퍼하는 교회의 이름으로 이 재앙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와 그 섭리의 의로우심을 특별히 인식한다.

Ⅰ. 여기에서 비탄 중에 있는 교회는 그의 고통을 증대시킨다. 그러나, 그의 고통은 그 원인 보다 더 큰 것은 아니다. 그의 신음은 그가 저지른 죄악보다 더욱 심하지 않다. 그는 모든 구경군들에게 호소한다. "내게 임한 근심 같은 근심이 있는가 볼지어다" (12절). 아마도 이것은 진실로 예루살렘의 슬픔을 말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 이것을 너무도 약삭빠르게 우리 자신에게 적응시키고, 또 고난의 원인에 합당한 이상으로 고통을 과장하여 말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확실히 우리의 근심과 같은 근심이 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과 같은 종류의 고통에 던져져서 우리가 동등하게 그 고통을 분배받고 몫을 같이 나누지만 우리의 짐을 심각히 느끼고 있으며 우리 자신이 그 고통을 마땅한 것으로 감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소리쳐 부르짖게 되는 것이다.

Ⅱ. 예루살렘은 여기에서 사용되는 도구 너머에 있는 고난의 저작자를 본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지시되어지고 결정되어지고 처분되어진 것으로 고백한다. "여호와께서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그는 나에게 진노하셨기 때문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다. 그의 진노의 크기는 나의 재난의 크기에 의해서 측정될 수 있다. 이것은 그의 진노의 날에 되어진 것이다" (12절).

고통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온 것을 우리가 알 때에는 그것은 단지 슬픈 일만은 아니다. 교회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행한다.

1. 교회는 불 속에 있는 것과 같다. 이 불은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다.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즉 초자연적인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내가 냉과리같이 탔나이다" (시 120:3). 아픔을 당하고 쇠약해지고 말라버렸다.

2. 교회는(예루살렘) 그물 속에 있는 것과 같다. 그가 빠져나오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그 속에 휘말려 들어간다. 이 그물은 하나님이 쳐놓은 것이다.

" 하나님이 내 발 앞에 그물을 베풀지 아니" 하셨다면 적들의 전략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3. 교회는 광야에 처한 것과 같다. 그는 길을 잃고 방황하며 고독하고 지쳐버렸다. "나로 물러가게 하였음이여." 그러므로 나는 나아갈 수가 없고, "그가 나를 고적하게 하셨으므로" 나는 의지할 것이 전혀 없으며 "다만 종일토록 곤비하도다."

4. 교회는 멍에를 메고 있는 것과 같다. 일하기 위한 멍에가 아니고 목과 뒷꿈치를 함께 얽은 고행의 멍에이다(14절). "내 죄악의 멍에를 그 손으로 묶고 얽었도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범죄한 것 외에는 어떤 것에도 휘말려들지 않는다는 것을 관찰하자.

" 악인은 그 죄의 줄에 메이나니" (잠 5:22) 그리스도가 명하신 멍에는 "쉬운 명에" 이다(마 11:30). 그러나 우리가 범죄한 멍에는 무거운 멍에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를 공격하실 때 이 멍에를 묶으시고 우리의 죄가 받을 만한 내적 외적 고통 가운데로 우리를 몰아넣으신다.

양심이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행함으로써 우리를 묶는다. 그의 공의의 "손으로 멍에를 묶고" 나를 둘러싼다. 그러면 그의 용서하시는 자비의 손 이외에 아무 것도 그것을 풀 수가 없다.

5. 교회는 진흙 속에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분은 "모든 용사를 발아래 짓밟으시고" 일어설 수 없게 하시고 차례차례 심판으로 그들을 뒤집어 엎으셨다. 그리고 그들의 거만한 정복자들에게 짓밟히도록 그들을 버려두셨다(15절).

아니 교회는 포도즙틀에 밟히는 것과 같다. 짓밟힐 뿐 아니라 여러 조각으로 찢어지고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통 안에 있는 포도와 같이 눌려서 몽개지고 피가 포도주 같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처녀 유다를" 짓밟으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6. 예루살렘은 적들의 손 안에 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 그를 넘겨 준 것은 여호와이시다(14절). "내 힘을 피곤케 하였음이여."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당할 수 없도다." 아니 그들에게 대항하여 일어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다. 그래서 그들의 손에 나를 넘겨주시고 아니 나를 대항하여 "성회를 모으시고 내 소년들은 부수셨다." 그리고 이러한 성회가 반항한다는 생각은 실제로 쓸데없는 생각이다(17절). 다시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면에 있는 자들을 명하여 야곱의 대적이 되게 하셨다." 여러 번 야곱을 위하여 구원을 명하신 그가 지금은 야곱에 대하여 침략할 것을 명하신다. 이는 야곱이 그의 율법의 계명을 불순종하였기 때문이다.

Ⅲ. 예루살렘은 자연히 그의 비참을 구경하고 있는 자들에 대하여 긍휼과 동정을 베풀 것을 요구한다(12절).

" 지나가는 자여 무릇 너희에게는 관여가 없는가?" 너희는 무심히 나를 바라볼 수 있는가? 너희 심장은 얼마나 철석과 같으며 너희 눈은 얼마나 대리석과 같기에 너희는 내게 대하여 동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도, 동정적으로 바라볼 수도, 동정적인 눈물을 흘릴수도 없단 말인가? 너희 또한 물을 가지고 있지 아니한가? 너희 이웃집이 불타고 있는데 너희에게는 무관한 일인가?

그들은 시온의 슬픔과 파괴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요셉의 고통으로 인하여 슬퍼하지" 않는다. 얼마나 가련하게 그가 동정을 애걸하고 있는가?(18절)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근심을 볼지어다." 나의 하소연을 들어라. 그리고 내가 근심하는 이유를 보라. 이것은 욥의 요구와 같다(욥 19:21).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우리의 친구들이 우리를 동정하여 우리와 함께 눈물을 흘려주면 우리의 근심은 가벼워진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비록 그들 가운데 있지마는 우리가 경멸받지 않는다는 긍지가 되기 때문이다. 고통 중의 경멸은 일반적으로 다른 어느 것만큼이나 두려운 것이다.

Ⅳ. 예루살렘은 이 재난으로 인한 그의 슬픔이 극한적이기는 하지만 그 자신의 슬픔을 정당화한다(16절).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내가 밤새도록 애곡하니(2절) 아무도 보지 아니한 때 내 눈에 물같이 흐름이여."

이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눈물의 골짜기라는 것을 주의하라. 시온의 아들들은 때때로 시온의 애곡자가 된다. 요구하는 심정이라기보다도 절망의 표시로 시온은 두 손을 폈고(17절) 모든 희망이 사라진 행복의 표시로 그의 손을 내어 뻗었다. 그는 이 격렬한 슬픔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살펴보자.

1. 그의 하나님은 그에게서부터 떠나가셨다. 금 우상들만을 가지고 있었던 미가는 그것들을 도둑맞았을 때 울부짖었다. "내가 더 이상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당신이 나에게 말한 것은 무엇입니까? 웬일이십니까?" 여기에서 교회는 지나치게 슬퍼한다. 그는 말하기를 "나로 인하여 내 영을 소생시킬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라" 라고 한다. 하나님은 위로자이시다. 그는 과거에 위로하곤 했었다. 다만 그분만이 효과적인 위로를 베푸실 수 있다. 그의 말씀이 그들에게 위로를 말하였다. 우리에게 위로의 말을 하시는 이는 그의 성령이다. 그의 말씀은 영혼을 소생시킬 수 있고 영혼이 사라졌을 때 그것을 되돌릴 수가 있다. 우리 자신은 그것을 다시 살릴 수 없다. 그러나 이제 그는 불쾌하심으로 떠나셨다. 그는 "멀리 떠나셨음이로다. 멀리 떠나 있는" 나를 보라. 그들을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자인 하나님이 멀리 떠나 있을 때 성도들의 영혼이 쇠약하여 가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라는 것을 주의하라.

2. 그의 자녀들은 그에게서부터 옮겨져 갔으며 그를 도울 능력이 없다. "라헬이 자식들을 위하여 우는 것같이 그는 자식들이 없으므로 울고 위로받기를 거절한다. 원수들이 이기며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너의 양육한 모든 아들들 중에 그 손으로 너를 이끌 자가 없도다" (사 51:18). 그들은 그들 자신도 구할 수 없는데 하물며 어찌 그 어미를 구할 수 있으랴? 그의 기쁨이요, 희망이었던 처녀들과 청년들이 "다 사로잡혀 갔다" (18절). 갈대아인은 청년 남녀들은 여성이거나 꽃피는 나이거나 간에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였다고 말하고 있다(대하 36:17).

3. 그의 친구들은 그를 실망시켰다. 어떤 친구들은 그를 구원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또 어떤 친구들은 그를 구원할 수가 없었다. 그는 구원을 구걸하여 "두 손을 폈으나 위로할 자가 없었다." 위로를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의 "사랑하는 자를 불렀으나" 그들은 그를 속였다(19절). 그들은 욥기 6장 15절에 있는 목마른 여행자에게 마른 시내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유의할 것은 우리가 피조물들에게 마음을 두고 기대를 건다고 하는 것은 흔히 속거나 실망한다는 것이다. 그의 사랑하는 자들은 그의 우상들이었다. 애굽과 앗수르는 그가 신뢰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속였다.

그가 번영할 때에 그에게 충성하던 그들은 그에게서 물러났고 역경 중에 있는 그를 멀리하였다. 하나님을 그의 친구로 삼고 그의 사랑 속에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를 친구삼는 자들을 속이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4. 그를 인도하도록 되어 있었던 사람들은 그를 위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매사의 선두에 나서야 했던 "제사장들과 장로들" 은 굶주려 죽었다(19절).

그들은 "식물을 구하다가 기절" 하거나 또는 곧 죽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살기 위해서 빵을 구하러 갔었다. 그 땅에 기근이 극심하여 지혜로운 자도 식물이 없고 제사장들과 장로들도 굶주려 죽었다.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들의 위로자들이어야 했지만 그들 자신이 위로를 받지 못하는 데 어떻게 그들이 남을 위로할 수 있는가?

"저희가 나의 탄식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나를 돕기 위하여 그들을 소환하여야만하는 탄식이었다. 그러나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었다. 나의 사랑하는 자와 당신이 나에게서 멀리 있게 하였나이다."

5. 그의 적들은 그에 대하여 너무나 잔인했고 그를 모욕하였다. "원수들이 이기며(16절) 칼의 살육이 있고 집에는 모든 양식이 떨어졌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죽음 같은 것" 이 있었으며 그것은 기근이었다. 그것은 페스트(흑사병)와 같이 나쁜 것이었다. 아니 더 나쁘다-밖으로는 칼에, 방안에서는 놀람에(신 32:25) 재난의 도구로 사용된 적들로서 주위에 서 있던 자들, 즉 에돔과 암몬은 대단히 야만적이었고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악한 생각을 품었다. "그들이 나의 재앙을 들었으니 주께서 이렇게 행하심을 기뻐하나이다" (21절).

그들은 재앙 그 자체를 기뻐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것을 행하심을 기뻐한다. 하나님과 그의 이스라엘이 불화한 것을 보는 것이 그들에게는 즐거웠다. 그들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대단히 냉냉하게 행동하였다. "예루살렘은 그들 중에 있는 불결한 여자와 같도다." 그러므로 그들은 접촉하기를 싫어하고 꺼려하였다(17절).

이 모든 설명에 있어서 그의 현재의 상태로 인하여 그의 탄식이 많은 것과 더욱이 장차 있을 것 같은 일들로 인하여 그의 "마음이 곤비한" 것은(22절) 이상할 것도 없고 비난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Ⅴ. 예루살렘은 그가 당한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은 정당하다고 한다. 그의 죄는 이 격심한 시련을 받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도 무겁게 놓여 있는, 그리고 그렇게도 단단하게 묶여 있는 멍에는 "그의 죄악의 멍에이다" (14절). 우리가 묶여 있는 족쇄(足鎖)는 우리 자신이 만든 것이고 우리가 맞은 채찍은 우리 자신들의 몫이다. 교회가 하나님은 가혹하다고 생각하고 말했었다면 교회도 여호와는 의로우시다는(18절) 사실을 깨닫고 자신을 뉘우쳐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같이 취급하심으로써 악을 행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행하심 속에 어떤 불의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사람은 아무리 불의하여도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는 것과 하나님은 그 행하심이 그 율법에 반대가 된다 할지라도 의로우심이 드러나리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 고통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그 행하심이 "의로우시다" 는 것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고백하지 아니한다면 우리는 하나님도 우리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게 된다.

예루살렘은 그 자신의 불의를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정당하심을 고백한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 (18절). 그리고 다시(20절) "나의 패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고 한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충분히 나쁘게 말할 수가 없다.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하여 더 나쁘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고, 우리는 그것을 "패역이라고, 심히 큰 패역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안 된다. 진심으로 참회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죄는 커다란 패역이다. 예루살렘이 눌려 있는 고통보다도 더 무겁게 그 위에 놓여 있는 것은 이 심히 큰 죄악이다. "마음이 괴롭고" 패역은 괴로운 바다와 같이 내 안에서 역사한다. "내 마음이 번뇌하오니," 내 마음이 안식이 없고 요동하니 이는 "나의 패역이 심히 크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슬픔은 커다란 슬픔이어야 하고, 영혼으로부터 슬퍼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는 것을 유의하자.

Ⅵ. 예루살렘은 현재의 그가 당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 양면에 대하여 호소한다.

1. 예루살렘은 그가 하나님의 동정 대상이 되게 한 그의 슬픔에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도록 호소한다(20절).

"여호와여 돌아보옵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나이다. 나의 상황을 인지하소서. 그리고 당신이 원하시면 나의 구원을 명하소서." 우리의 영혼을 짓누르는 환난이 하나님의 눈 앞에 전개된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위로의 사실이 된다.

2. 예루살렘은 그의 적들이 그에게 행한 상해에 대해서 하나님의 정의에 호소한다(21,22절). "주께서 반포하신 날을 따르게 하시리니, 저희가 나와 같이 되겠나이다." 하나님의 뜻에서 확정되고 예언으로 발표된 그날에는 지금 나를 핍박하는 적들이 "나와 같이 될 것이다."

그날에는 지금 나의 손에 놓여 있는 진노의 잔이 그들의 손에 놓여질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기도로 해석될 수 있다. "작정된 그날이 오게 하소서." "저희 모든 악을 주 앞에 나타내시고 그 악행이 기억되게 하시고 헤아려지게 하소서. 그들이 내게 행한 모든 악행을 그들에게 복수하소서(시 109:14, 15). 나의 모든 죄악으로 인하여 내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의 범죄로 인하여 그들에게 행하실 때가 빠르게 하소서." 이 기도는 그들의 원수들이 가진 모든 생각들에 대한 항거가 되고 그들의 파멸에 대한 예언자이기도 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서명하는 것이 된다.

주의할 것은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될 수 있고 일치되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을 요구하게 되어 있고 다른 날을 요구하게 되어있지 않다.

비록 우리가 자비롭게 원수를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회개하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원수와 교회의 성취들에 대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성취되기를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다.

 

예루살렘의 황폐함을 슬퍼함(예레미야 애가 1장)

1-6절, 슬프다, 이 성이여

[1절] 슬프다, 이 성이여, 본래는 거민이 많더니[어찌하여 백성이 가득하던 성이]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히 앉았는고.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고 본래는 열방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공 드리는 자[종]가 되었도다.

바벨론 군대의 침입과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어떤 이들은 사방으로 도망쳤으며 또 많은 이들은 포로로 잡혀갔기 때문에 이제 예루살렘 성은 거민 수가 매우 줄어 적막한 곳이 되었다. 그 성은 이제 남편과 사별한 과부같이 쓸쓸하며 낙이 없게 되었다. 이전에는 열국들 중에 크고 지방들 중에 공주같이 존귀하던 성, 경건한 성도들이 가장 사랑하고 즐거워했던 그 성이 이제는 종처럼 바벨론의 지배를 받고 그 거민들이 학대를 당하고 있다.

[2절] 밤새도록(발라옐라)[밤에](KJV, NASB, NIV)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도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도다.

선지자 자신을 포함하여 그 성의 남은 거민들은 밤에 애곡하였다. 그들이 밤에 애곡한 것은 낮에는 노역으로 수고로운 시간을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좀 쉬고 웃고 해야 할 밤에 쉬지 못하고 웃지 못하고 애곡하였다는 뜻일 것이다. 예루살렘 성을 사랑하던 모든 자들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고 모든 친구도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다. 전에 이스라엘과 유다가 강한 때에는 조공을 바치고 친근히 하고 동맹관계를 맺었던 이웃 나라들이 많았으나 예루살렘이 멸망할 당시에는 그들이 다 등을 돌렸다. 이웃 나라들과의 동맹관계은 허무하였다.

[3절] 유다는 환난과 많은 수고로 인하여 사로잡혀 갔도다. 저가 열방에 거하여 평강을 얻지 못함이여, 그 모든 핍박하는 자가 저를 쫓아 협착한 곳에 미쳤도다.

유다 백성들은 환난과 많은 수고를 당하는 중에(NASB) 바벨론의 포로로 사로잡혀갔다. 포로로 간 그들은 이방 나라들에 거하여 충분한 잠과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많은 압박을 받았다.

[4절] 시온의 도로가 처량함(아벨롯)[애곡함](BDB, KJV, NASB, NIV)이여, 절기에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이 황적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저도 곤고를 받았도다.

예루살렘의 도로들은 기쁜 절기에 나아가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애곡하는 것 같았다. 모든 성문들은 황폐하고 적적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고 그 성 자체가 곤고한 상태에 있었다.

[5-6절] 저의 대적이 머리가 되고 저의 원수가 형통함은 저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곤고케 하셨음이라.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 처녀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저의 목백은 꼴을 찾지 못한 사슴이 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림 같도다.

유다 백성의 대적들은 그들의 머리가 되고 그의 원수들은 형통했다. 왜 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성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인가? 그것은 그들의 죄가 많아 하나님께서 그들을 곤고케 하셨기 때문이다. 신명기 28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면 열국 가운데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하셨고(13절), 반대로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으면 그들 중에 우거하는 이방인들이 머리가 되고 그들은 꼬리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43-44절). 예루살렘 성의 멸망은 하나님의 경고대로 된 것이다.

사람이 다 죄인이지만 죄가 작을 경우 하나님께서 그렇게 무섭게 징계하지는 않으시는 것 같으나, 사람이 계속하여 많은 죄를 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무섭게 징벌하신다. 그들은 곤고함을 당하였고 그들의 어린 자녀들은 사로잡혔고 시온의 모든 영광은 떠나갔다. 그들의 방백들은 꼴을 찾지 못해 힘없이 달리는 사슴과 같았다. 노아의 시대에도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온 땅이 하나님 앞에서 패괴하고 강포가 땅에 가득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온 땅과 거기 거하는 생물들을 멸하셨었다(창 6:5, 11, 13). 그러므로 우리는 죄가 많다고 깨달을 때뿐 아니라, 조금 있을 때부터 회개해야 한다. 죄가 계속 누적되면, 또 그 죄를 회개치 않고 끝까지 고집하면, 사람은 마침내 하나님께 큰 벌을 받고 결국 망하게 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이 세상의 부귀와 영광과 권세를 크게 여기거나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예루살렘 성은 크고 공주같이 존귀하던 성이었고 경건한 성도들이 가장 사랑하고 즐거워했던 성이었지만, 그 거민들이 범죄할 때 그 성은 그 영광을 상실하고 멸망하고 황폐케 되었다. 세상의 부귀와 영광이 다 그렇다. 그것은 일시적이며 사람들이 계속 악을 짓고 고집하면 어느 날 다 없어지고 말 것이다. 전도서의 교훈대로, 땅의 모든 것은 참으로 헛되다. 또 이사야의 말씀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사 40:6).

 

둘째로, 우리는 사람을 너무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했을 때 유다의 이웃들과 동맹국들은 그들을 위하지 않았다. 친구는 언제나 배신하고 떠나갈 수 있고 동맹국도 언제나 배신할 수 있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원수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은 우리의 참된 위로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친절히 대하고 선을 베풀어야 하지만, 사람을 너무 신뢰하지는 말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고 의지하고 그의 명령만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람의 본분이며 평안의 길이다. 전도서 12:13,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이사야 48:18,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7-11절, 그 결말을 생각지 않음

[7절] 예루살렘이 환난과 군박(窘迫)(메루드)[정처 없음]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생각함이여, 백성이 대적의 손에 빠지나 돕는 자가 없고 대적은 보고 그 황적(荒寂)함(미슈밧)[멸망](BDB)을 비웃도다.

예루살렘 거민들은 환난을 당하고 정처 없이 행하고 있다. 사람들은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생각한다. 옛날에는 성안에 평안과 즐거움이 있었다. 또 먹을것도 넉넉하였고 가족과 이웃 간의 사랑의 교제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에게 환난과 정처 없음뿐이다.

 

또 백성은 대적의 손에 빠졌다. 본서에는 ‘대적’(차르, 9번)이나 ‘원수’(오옙, 15번)라는 말이 24번이나 나온다. 백성이 대적의 손에 빠진다는 말은 대적이 지배하고 학대한다는 말이다. 또 이런 상황에서도, 예루살렘을 돕는 자가 없었다. 예루살렘은 자신을 지킬 힘이 없었고 그가 믿었던 애굽의 도움도 얻지 못했다. 물론 하나님의 도우심도 얻지 못하였다. 그것은 가장 불행한 일이었다. 대적들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비웃었다. 예루살렘은 참으로 불쌍한 처지가 되었다.

 

[8절]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하므로 불결한 자같이 되니 전에 높이던 모든 자가 그 적신(赤身)[벌거벗음]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저가 탄식하며 물러가도다.

예루살렘의 문제는 그 거민들이 크게 범죄한 데 있었다. 작은 죄는 하나님께 쉽게 용서받기도 할 것이지만, 사람이 큰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그를 멸망시키실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지만, 큰 죄를 짓고도 끝까지 회개치 않는 자를 반드시 벌하신다.

 

예루살렘의 죄는 또한 ‘불결함’이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거민들이 우상을 섬기고 부도덕하게 행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보기에 좋지 못하고 더럽고 추한 모습이다. 이런 불결함 때문에 그들은 멸망을 당한 것이고 육신적으로도 낮아지고 상하고 찢기고 더러워진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은 다 부서져 공개되었고 왕후와 공주들과 궁녀들은 짓밟힘을 당했다. 이전에 예루살렘을 높이며 그에게 조공도 바치러 왔던 이웃 나라들이 이제는 예루살렘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 업신여긴다. 예루살렘 거민들 자신도 탄식하며 물러갔다.

 

[9절] 저의 더러움이 그 치마에 있으나 결국을 생각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게 낮아져도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여,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하오니[원수가 거대해졌사오니]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

‘저의 더러움이 그 치마에 있다’는 말은 영적 음란의 죄를 묘사한 것 같다. 예루살렘은 우상숭배의 죄를 범했으나 그 결말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미래를 대비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 성은 놀랍게 낮아졌다. 그 부요하고 영화롭고 평화로웠던 성은 이런 수치와 궁핍을 당하고 있어도 그를 위로할 자가 아무도 없었다.

원수들은 거대한 세력이 되었고 예루살렘은 미약해졌다. 이런 때,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호소한다. 죄로 인하여 징벌을 받는 성도에게도 한가닥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돌아보시면 그는 어떤 곤란 중에서도 구원을 얻을 것이다.

 

[10절] 대적이 손을 펴서 보물을 빼앗았나이다. 주께서 이미 이방인을 금하여 주의 공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사오나 저희가 성소에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

성전은 이스라엘에게 가장 귀한 곳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거룩한 성소로 이스라엘과 이방을 구별하셨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성소를 짓밟고 그곳에 들어갔고 성도들은 이제 그것을 보고 탄식한다.

 

[11절] 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소성시키려고 보물로 식물들을 바꾸었더니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 나는 비천하오니(졸렐라)[무가치하오니](BDB) 여호와여, 나를 권고하옵소서.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에게는 먹을것이 심각하게 부족하였다. 그들은 보물로 식물들을 바꾸어 먹었고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고 있다.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형편을 대신해 “나는 무가치하오니”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선지자는 다시 하나님께 호소한다. “여호와여, 나를 권고하옵소서.” 멸망당하는 이스라엘의 남은 소망은 오직 하나님의 돌아보심뿐이다. 하나님의 긍휼 외에 다른 소망은 없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존귀하던 예루살렘 성은 멸망하여 황폐케 되고 비천하게 되었다. 예루살렘 거민은 옛날의 즐거움을 기억할 뿐 지금은 고통과 슬픔뿐이다. 그들은 자유가 없고 돕는 자도 없고 원수의 비웃음을 받으며 벌거벗겨지고 탄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낮아졌고 위로하는 자도 없었다. 원수는 커졌고 성전은 짓밟혔으며 그들은 먹을것이 심각히 부족하였고 심히 비천하고 무가치한 자가 되었다.

 

둘째로, 예루살렘의 멸망의 원인은 그들의 큰 죄와 불결 때문이었다(8-9절). 그들의 죄는 우상숭배와 부도덕이었고, 그것은 자신들을 더럽게 하였다. 그들은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삶으로써 미래를 대비했어야 했다. 우리는 모든 죄를 버리고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

 

셋째로, 그들에게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에 호소하며 모든 죄를 버리고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다. 11절, “여호와여, 나를 권고하옵소서.” 죄인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에 있다. 또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하는 자마다 이제는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만 살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평안을 누릴 것이다. 이사야 48:18,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또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를 체험할 것이다. 이사야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 . .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 또 의식주의 공급함도 받을 것이다.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12-17절, 주께서 징벌하심

[12절] 무릇 지나가는 자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내게 임한 근심 같은 근심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유다 땅을 지나는 자들은 유다 백성의 근심과 고통에 대해 무관심한 것 같았다. 그들은 유다 백성의 고통을 동정하지 않았다. 사람이 평안할 때 환난 당하는 가난한 이웃에게 무관심한 것도 잘못이다(겔 16:49). 환난 받는 이웃을 동정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지만 진노하시는 날이 있다. 그는 진노하신 날에 유다 백성을 괴롭게 하셨다. 역사상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종종 있었고 마지막으로 온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실 날이 올 것이다(롬 2:5). 하나님께서는 평안도 주시지만 환난도 주신다(사 45:7).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와 악인에 대한 징벌을 믿는다.

 

[13절] [그가] 위에서부터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그가] 내 발 앞에 그물을 베푸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 [그가 나를] 종일토록 고적(孤寂)하여 곤비케 하셨도다.

“위에서부터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셨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의 뼈들에 불같은 고통을 보내셔서 견딜 수 없게 하셨다는 뜻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의 발 앞에 그물을 베푸셔서 그로 물러가게 하셨고 종일토록 쓸쓸하여 곤비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행하신다. 사람의 누리는 복도, 당하는 화도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에게 불같은 화를 내리셨다.

 

[14절] 내 죄악의 멍에를 그 손으로 묶고 얽어 내 목에 올리사 내 힘을 피곤케 하셨음이여, 내가 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주께서 나를 붙이셨도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죄악들과 그 결과를 손으로 묶고 얽어 그의 목에 올리셨고 그의 힘을 피곤케 하셨다. 또 주께서는 그가 당할 수 없는 자의 손에 그를 붙이셨다. ‘주께서’라는 원어(아도나이)는 ‘주권자’를 가리키는 말이며, 15절에도 두 번 더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만일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면 그들 다섯 명이 원수 백 명을 쫓고 그들 백 명이 원수 만 명을 쫓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으나, 반면에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순종치 않으면 원수에게 지고 세계 만국으로 흩어질 것이라고 경고하셨다(레 26:7-8, 17). 유다의 패배는 이 율법의 경고대로 된 것이다.

 

[15절] 주께서 내 지경 안 모든 용사를 없는 것같이 여기시고 성회를 모아 내 소년들을 부수심이여, [주께서] 처녀 유다를 술틀에 밟으셨도다.

‘없는 것같이 여기셨다’는 원어(실라)는 ‘경멸하셨다’(BDB), ‘거절하셨다’(KB, NASB, NIV)는 뜻이다. 주께서는 유다 지경 안의 모든 군사들을 경멸하시며 거절하셨고 대회를 열어 그 청년들을 죽게 하셨다. 그는 처녀 유다를 술틀에 밟아 굴욕과 멸망을 당하게 하셨다.

 

[16절]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같이 흐름이여, 나를 위로하여 내 영을 소성시킬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이는 내 영혼을 소생시킬 위로자가 나를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징벌과 예루살렘의 참혹한 멸망의 현실 앞에서 울었다. 원문에는 ‘내 눈에’라는 말(에니 에니)이 두 번 나온다(KJV). 선지자의 눈에서는 비오듯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위로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멀리 떠나셨고 돕지 않으셨다. 원수들은 유다 백성을 이겼고 유다 자손들은 쓸쓸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멀리 떠나신 것은 그들이 범죄했기 때문이다. 이사야 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라.” 에스겔 8:6, “그들이 여기서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

 

[17절]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야곱의 사면에 있는 자를 명하여 야곱의 대적이 되게 하셨으니 예루살렘은 저희 가운데 불결한 자 같도다.

두 손을 펴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시온을 위로할 자가 없었다. 하나님께서도 그를 위로하지 않으시고 사람들 중에도 위로자가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사면에 있는 자들을 그들의 대적이 되게 하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예루살렘 성은 그들 가운데 불결한 자같이 되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자.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며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크고 작은 모든 일, 좋고 나쁜 모든 일을 다 섭리하신다. 사무엘상 2:6-7,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우리는 범사에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를 의지하자.

 

둘째로, 우리는 죄를 멀리하자. 예루살렘의 멸망의 이유는 그들의 죄 때문이었다. 죄의 결과는 큰 불행과 고통이었다. 예루살렘 성은 근심과 고통 가운데 떨어졌고 황폐하고 쓸쓸하며 곤비해졌다. 그들의 군대는 경멸과 죽임을 당했고 유다 백성은 짓밟혔다. 죄는 모든 좋은 것들을 빼앗고 가로막고 모든 재앙을 가져온다. 죄는 불행과 사망의 원인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조심해야 할 일은 오직 죄 짓지 않는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일한 위로자이시다. 예루살렘 성의 멸망의 때에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었다. 그들은 이웃의 동맹국들에게서도 위로를 얻지 못했다. 그것은 실상 그들이 참된 위로자이신 하나님과 대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참된 위로자이시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사는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가장 큰 복이며 큰 위로와 힘이며 승리의 길이다.

 

18-22절, 나의 거역과 패역 때문에

[18절] 여호와는[여호와 그는] 의로우시도다. [이는]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였도다[거역하였음이로다].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듣고 내 근심을 볼지어다. 나의 처녀와 소년들이 사로잡혀 갔도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다. 의롭다는 말은 ‘기준에 맞다’는 뜻이다. 그 기준은 하나님 자신, 즉 하나님의 속성, 그의 뜻, 그의 계명과 율법이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을 의롭다고 말하는 까닭은 유다의 멸망이 그의 공의로운 처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였음이로다”라고 말한다. 그가 무슨 큰 죄를 지었다는 뜻이 아니다. 비록 그 자신도 부족한 자이지만, 그는 지금 유다 민족을 대표해 유다의 죄악됨을 하나님 앞에 아뢰는 것이다. 유다의 멸망은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까닭에 왔다.

 

예레미야는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 말을 들으라”고 말한다. 그는 유다 백성들에게 지금이라도 이 재앙이 하나님의 공의의 처분이요 우리의 죄 때문에 온 것을 알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그는 그들이 그의 근심을 보라고 말한다. 또 그는 예루살렘의 소년 소녀들을 “나의 처녀와 소년들”이라고 부르며 그들이 사로잡혀갔다고 말한다. 그들은 2세들이요 다음 시대를 책임질 자들이며 미래의 소망이다. 그러나 그들이 사로잡혀갔고 노예가 되었고 사람의 기본적 권리를 다 빼앗긴 자가 되었다. 이제 유다 나라의 소망은 없어졌고 미래는 사라졌다.

 

[19절]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불렀으나 저희가 나를 속였으며 나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소성시킬 식물을 구하다가 성중에서 기절하였도다.

‘내 사랑하는 자들’은 유다의 이웃 나라들, 어려울 때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던 동맹국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인데, 그들은 전에는 유다와 친근한 교류가 있었지만, 유다가 어려울 때 관심과 동정을 가지지 않았고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유다를 속였고 동맹으로서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또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음식을 구하다가 성중에서 기절하고 죽어 갔다. 기본적인 것들, 즉 사람들의 생명을 유지할 음식들이 없었다.

 

[20절] 여호와여, 돌아보옵소서. [이는] 내가 환난 중에서 마음이 괴롭고 마음이 번뇌하오니[번뇌함이니이다.] [이는] 나의 패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으로는 칼의 살륙이 있고 집에는 사망 같은 것이 있나이다.

예레미야의 마음은 괴롭고 번뇌하였다. 평안이 없었다. 행복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호소하며 기도한다. 그는 하나님을 찾고 그의 이름을 부른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아는 자이며 하나님을 믿는 자이다. 하나님을 알고 믿고 의지하는 자마다 이 세상 사는 동안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낙심치 않고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다.

또 예레미야는 유다의 번뇌와 고통, 즉 그 재앙의 원인이 무엇인지 말한다. 그것은 그의 패역이 심히 컸기 때문이었다. 유다 백성은 죄 때문에, 큰 죄 때문에 심한 고통과 불행 가운데 떨어졌다. 길거리에는 칼의 살육이 있었고 집 안에는 사망 같은 것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질병과 부상으로 인해 죽어가고 있었다.

 

[21절] 저희가 나의 탄식을 들었으나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고 나의 모든 원수가 나의 재앙을 들었으나 주께서 이렇게 행하심을 기뻐하나이다. [그러나] 주께서 반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시리니 저희가 나와 같이 되겠나이다.

유다의 모든 원수들은 유다 백성의 탄식을 들었지만 유다를 위로하지 않았다. 고난 당하는 자에게 위로의 말이 큰 힘이 되지만, 유다 백성은 그런 위로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원수들은 유다의 재앙을 들었으나 주께서 그렇게 행하심을 기뻐했다. 그들은 무정한 자들이었고 자기 자신의 부족과 악함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자들이었다.

유다의 멸망은 주님 곧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었다. 이미 12절, 17절은 여호와께서 진노하셔서 그 사면에 있는 자들을 대적이 되게 하셨음을 말했고, 14절, 15절은 주(아도나이, 3번)께서 유다를 원수의 손에 붙이셨고 그 용사들을 죽게 하셨다고 말하였다.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바대로 된 일이었다. 그는 그가 선언하신 그 날을 오게 하셨다. 심판과 멸망의 그 날은 기어코 오고야 말았다. 그러나 유다의 원수들도 멸망할 것이다.

 

[22절] 저희 모든 악을 주 앞에 나타내시고 나의 모든 죄악을 인하여 내게 행하신 것같이 저희에게 행하옵소서. [이는] 나의 탄식이 많고 나의 마음이 곤비하니이다[곤비함이니이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멸망이 그들의 모든 죄악 때문임을 다시 고백한다. 유다의 멸망은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했기 때문에(18절), 그들의 패역이 심히 컸기 때문에(20절), 또 그들의 모든 죄악 때문에(22절) 온 것이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원수 나라들도 유다처럼 그들의 죄 때문에 멸망을 당하게 하시기를 하나님께 탄원한다. 그들의 죄란 우상숭배, 부도덕함, 포학함, 무정함 등이다. 특히 이방인들이 유다 백성에게 행한 강포와 악행, 유다 백성이 그들에게 당한 억울한 학대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죄는 고통과 근심, 번뇌와 곤비함, 굶주림과 포로로 잡혀감, 살육과 사망의 원인, 즉 멸망의 원인이다. 반면에, 의는 생명과 평안과 기쁨의 원인이다(사 48:18). 우리는 모든 죄를 버리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사람이나 세상의 것을 의지하지 말자. 유다는 동맹국들이 있었으나 전쟁 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속임을 당했다. 자녀들은 포로로 잡혀갔고 음식은 고갈되었다. 사람을 의지하는 자는 절망할 때가 올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나 세상을 의지하지 말자.

 

셋째로, 우리는 징벌 중에서라도 회개해야 한다. 유다 백성은 재앙을 당하면서도 회개하지 않았다. 선지자만 그들을 대표해 회개의 기도를 올렸을 뿐이다. 우리는 징벌 중에서라도 회개해야 산다.

 

 

성 경: [애1:1]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황폐된 예루살렘]
이 책의 주제는 유다 왕국과 그 수도 예루살렘의 재앙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인데, 본장 전반부, 곧 1-11절까지에 잘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파멸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간략하게 언급된다. '슬프다' 라고 번역된 감탄사 '에카'(*)는 비극적 상황을 묘사할 때 흔히 등장한다(사 1:21 참조).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은 평상시에는 민족 종교의 구심점이었으며 상업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었다. 그러나 이제는 참혹하게 황폐화되어 버린 폐허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파멸의 비극적인 상황을 더욱 고조시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남편과 자식을 잃은 과부가 옛날의 영광을 회상함과 동시에 현재의 한탄스러운 상황을 돌아보면서 애도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과부 예화는 인간의 깊은 외로움과 절망을 묘사할 때 종종 사용되었다. 한때 예루살렘은 에돔이나 모압 등과 같은 주변 나라의 지배자였으나, 이제는 포로가 되었고 버림받았다.

성 경: [애1:2]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황폐된 예루살렘]
ꃨ 밤새도록 애곡하니...친구도 다 배반하여 - 잠자는 것도 잊어버린 채 밤새껏 통곡하는 저자의 모습은 극에 달한 슬픔의 상태를 잘 보여준다. 한편 본절에서는 유다가 '사랑하던 자' 혹은 '친국'로 부터 배신당한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다. 당시 유다가 의지하던 대표적인 맹방은 애굽이었는데, 성경 기록상에는 애굽이 유다에 대해 배신하였다고 하는 특별한 언급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B.C. 588년 바벨론이 유다를 침공했을 때, 애굽은 비록 패주하긴 했으나 유다를 돕기 위해 원군을 파견하기도 하였다(렘 37:5). 그렇다면 본절 내용은 맹방의 특별한 배신 행위보다는 의존하던 대상으로부터 실질상으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사실을 강조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겔 23장; 호 8:9, 10). 유다는 외세에 의존하기보다는 하나님께 의존하여 그들의 안전을 유지하여야 했었다. 그러나 그들이 선택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주변 나라들이었다(왕상 15:16-20). 유다는 이러한 친구들이 꺽어진 갈대라는 사실을 패망 후에야 비로소 배웠을 것이다(겔 29:6, 7).

성 경: [애1:3]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황폐된 예루살렘]
ꃨ 유다는...사로잡혀 갔도다 - 여기서 시인은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에게로 눈을 돌린다. 영역 성경 KJV 는 이를 '유다가 환난으로 인해서 포로잡혀 갔도다'(Judah is gone into captivity because of affliction)라고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마치 그들이 자발적으로 사로잡혀 갔다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렘 40:11; 42:4-10; 44:1 참조). 그러나 '사로잡혀 갔도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갈레타'(*)는 삼하 15:19과 겔 12:3에서도 쓰이고 있는데, 이는 전혀 자발적인 포로를 의미하지 않는다. 시인은 언약 백성이 이방 땅에 끌려가 온갖 수모를 당하는 현실을 애통해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유다 백성이
세 차례에 걸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실에 대해서는 왕하 24:1-5; 25:8-12; 대하 36:6, 10, 20을 참조하라. 협착한 곳에 미쳤도다 - '협착한 곳'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차르'(*)는 흔히 어떤 사람이 곤경에 처하게 된 고통스러운 상황을 암시하는 상징적 의미로 많이 사용되었다. RSV 영역 성경은 본문을 '그녀의 고통 중에'(in the midst of her distr ess)라고 번역하였고, NEB 영역 성경은 '그녀의 고통스러운 협곡에서'(in her sore st raits)라고 번역하였다.

성 경: [애1:4]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황폐된 예루살렘]
ꃨ 절기에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예전에는 성전에 올라가 제사 절기르 마지키려고 하는 순례자들로 북적대었으나 이제는 황량하고 인적이 끊겼다. 렘 41:5 에 의하면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도 드물게나마 순례 행렬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바, 본문이 기록될 당시에는
그것조차 끊어졌던 것 같다(Ellison).

성 경: [애1:5]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황폐된 예루살렘]
ꃨ 저의 원수가 형통함은...곤고케 하셨음이라 -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내용은 이미 언약에 규정되어 있던 것이다(신 28:44 참조).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고난이 '저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내리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솔직한 고백이었다. 여기서 '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페솨'(*)는 원래 '위반', 혹은 '반역'을 뜻하는 말이다. 문맥을 살펴보면 이런 의미가 보다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포로로 잡혀가는 것 역시 언약 파기에 따른 처벌로서 이미 예언되었던 것 중에 하나였다(신 28:36, 63-68 참조).

성 경: [애1:6]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황폐된 예루살렘]
'목백'에 해당하는 '사르'(*)는 영역 성경에서 주로 '군주'(princes)로 번역되었는데, 예루살렘에서 도망쳤다가 붙잡혀 온 시드기야와 그의 신하들을 가리키는 듯하다(왕하 25:4; 렘 39:4 이하 참조). 그리고 목초지를 찾지 못하는 '사슴'예화는 시 23편에 묘사되고 있는 상황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거기서는 여호와께서 백성들의 목자가 되사 그들을 쉴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신다는 내용이 언급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양떼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신 선한 목자로 묘사된 바 있다(요 10 :11 이하). 시인은 여기서 과거의 상태와 현재의 비참한 지경을 대조시킴으로써 포로로 잡혀 가는 비애와 슬픔을 의도적으로 고조시키고 있다(Harrison).

성 경: [애1:7]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황폐된 예루살렘]
예루살렘이 정복자의 먹이가 되어 아무런 도움도 없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은 과거의 영광에 비추어 볼 때 너무 비참하였다. 아마 이 시는 이 성이 함락된 이후 오래지 않은 그 어느 시기에 구성되었던 것 같다. 설상 가상으로 그 대적들을 이들을 조롱하고 비웃는다. 성경에서 대부분 비웃음은 조롱이나 비난과 연결되어 쓰였다. 한편, '군박'의 히브리어 '마루드'(*)는 그 어원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약간 다르게 번역될 수 있다. 즉 '루드'(*, 이주하다)에서 유래되었다면 '추방'을 그리고 '마라드'(*, 반항하다)에서 유래되었다면 '핍박'을 각각 가리킨다.

성 경: [애1:8]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황폐된 예루살렘]
ꃨ 크게 범죄하므로 불결한 자같이 되니 - 이곳에서 5절에서 언급되었던 예루살렘의 범죄에 대한 주제가 보다 더 상세하게 지적된다. 그리고 이 주제는 본서의 주요 신학적 문제들 중에 하나가 된다. 시인은 여기서도 더렵혀졌다는 이유로 버림받은 여인을 예화로 사용하여서 설명하고 있다.

성 경: [애1:9]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황폐된 예루살렘]
ꃨ 여호와여...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 - 선지자는 여호와께 호소하며 환난을 감찰해 줄 것을 간구하는데, 이 간구는 스스로 큰 체하는 적들의 무례에 근거해 있다. 아마 유다 백성은 그들의 운명을 다시 역전시켜 달라고 간청할 수도 없었고 간청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것을 목격하고서도 그 근본적 원인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죄악에 깊이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상반절). 따라서 적들의 오만 불손한 승리의 자부심을 징벌할 것을 요구하며, 백성들의 고난을 제거해줄 것을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이러한 장면이 종종 등장하고 있는데 그 두드러진 예로서 앗수르가 그들의 교만으로 인해서 징계를 받을 것이라는 사 10;12의 내용을 들 수 있다. 한편 '스스로 큰 체하오니'란 말을 영역 성경 NIV, RSV 등은 '적이 승리했사오니'(the enemy has triumphed)라고 번역하였는데, 문자적으로 틀린 번역은 아니나 오해의 소지가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적들의 승리로 인한 보응이 아니라, 승리 후에 보여준 오만 불손한 교만으로 인해서 처벌해 달라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성 경: [애1:10]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황폐된 예루살렘]
ꃨ 손을 펴서 보물을 빼앗았나이다 - '보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하마데하'(*)는 여기서 복수형으로 쓰이고 있는데, 이는 드문 용례이다. 문자적인 의미는 '그녀의 가치 있는 것들'로서, B.C. 586년 바벨론인들의 공격으로 성전에 있는 값비싼 장식품들이 모조리 강탈당하여 바벨론으로 옮겨진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렘 52:17-23). 이스라엘 자손들조차도 제사장 신분이 아닌 이상 성소에 입실하는 것에 금지된 상황인데, 이교도들이 그 거룩한 성전을 마구 짓밟았다는 것 자체가 최악의 상황이었음을 말해준다. 이스라엘 회중에 들 수조차 없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밟았던 것이다.

성 경: [애1:11]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황폐된 예루살렘]
ꃨ 보물로 식물들로 바꾸었더니 - 여기서 '보물'은 양식을 사기 위해 내주었던 예루살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보물을 말한다. 아마 이것은 B.C. 586년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직전의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해서는 아무리 값비싼 보물이라해도 양식과 바꾸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성 경: [애1:12]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예루살렘의 비극에 대한 탄식]
ꃨ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 본 구절은 여러 가지로 번역된다. (1) 한글 개역 성경이나 KJV, NIV, RSV 등의 영역 성경들처럼 의문문으로 옮기는 견해, (2) '나는 너희에게 아무런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 혹은 '나의 슬픔이 너희에게는 아무렇지도 않다'등과 같이 평서문으로 번역하는 견해. (3) '너희에게 슬픔이 임하지 않게 하라'와 같이 명령문으로 옮기는 견해 등이 있다.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견해들 중에서 첫 번째의 견해, 즉 의문문으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우리는 의문형을 가리키는 '헤'(*)가 생략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Calvin).

성 경: [애1:13]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예루살렘의 비극에 대한 탄식]
ꃨ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 본 구절은 '그가 불을 내려보내시고 그것으로 내 뼈를 관통하게 하셨나이다'라고도 읽을 수 있다. 시인은 '그물'과 '곤비', '불'이란 개념을 사용하여서, 예루살렘을 뒤흔들었던 그 공포와 혼란상을 회화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불은 예루살렘 성 깊숙이 번져들어갔으며, 또한 그물이 쳐쳐 있어서 아무도 거기서 달아나지 못하게 되었었다. 한편, '이기게 하시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다'(*)는 '짓밟다', '정복하다'는 뜻으로 바벨론 군대의 침탈을 암시하는 듯하다.

성 경: [애1:14]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예루살렘의 비극에 대한 탄식]
ꃨ 내 죄악의 멍에를 그 손으로 묶고 - 맛소라 사본은 해석하기 어렵다. '묶고'로 번역된 '니쉬카드'(*)란 말이 구약 성경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쓰였으며, 그 의미 또한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70인역(LXX)과 수 많은 사본들은 자음들을 변형시켜서 '솨카드'(*)란 동사로 읽고 있다. 이것은 '주의하다', '지키다'란 뜻인데, 이를 받아들여 본절 상반절을 다시 번역하면, '내 죄악이 주시되어 왔었다'(Watch has been kept over my transgressions)이다. 이 번역은 '멍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올 '(*)마저 '...위에'라는 뜻의 전치사 '알'(*)로 읽어야 한다는 점에서 다소 무리한 해석이다. 그런가 하면, 이 말은 '무겁다'란 뜻을 가진 어근 '카쉐'(*)에서 파생된 말로 읽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내 범죄의 멍에가 무겁다'로 번역될 수 있다. 아무튼 이 구절의 취지는 예루살렘의 죄악이 복합적이므로 마치 동물 목에 걸린 무거운 멍에처럼 그들을 짓누른다는 의미이다(Harrison).

성 경: [애1:15]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예루살렘의 비극에 대한 탄식]
'성회'(*, 모에드)는 일반적으로 즐겁고 재미있는 모임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적군이 여호와의 호출을 받아 유다 용사들을 쳐부수는 축하 행사를 위해 모인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술틀'은 예루살렘의 저항이 분쇄되고 그 방어자들의 피가 마치 술틀에서 포도즙이 으깨져 나오는 것과 같다는 회화적 표현 수법이다.

성 경: [애1:16]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예루살렘의 비극에 대한 탄식]
ꃨ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흐름이여 - 본절에는 예루살렘 함락에 따른 쓰라린 심정이 표현되고 있는데, 이들 침략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라는 사실이 그 고통을 더욱 쓰라리게 한 것이다. 원문에는 '내 눈에'(*, 에니)란 말이 반복되고 있으나 현대의 대부분의 영역 성경들은 초기의 역본들을 따라 이것을 생략하고 있다(Ellison)

성 경: [애1:17]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예루살렘의 비극에 대한 탄식]
ꃨ 시온이 두 손을 폈으나 - 본절은 시인이 파괴된 이 도시 대신에 애도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두 손을 펴는 것'은 슬픔과 탄원의 몸짓을 나타낸다.

성 경: [애1:18]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예루살렘의 비극에 대한 탄식]
ꃨ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거역하였도다 - 여기서는 예루살렘을 이런 참혹한 심판으로 몰아 넣었던 죄악에 대한 한탄의 노래가 나타난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하나님의 뜻에 반역한다거나 또는 그 공의로우신 처사에 반발하는 듯한 내용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여기서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으로서 나타나고 있는데, 오랜 반역을 꾀하던 이들 하나님의 백성은 마침내 처벌당했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가나안 종교의 퇴폐적인 제사 의식에 빠져들음으로써, 이미 오염되어 있었으며 그 결과 심판에 대한 예언이 마침내 성취되었던 것이다(Harrison).

성 경: [애1:19]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예루살렘의 비극에 대한 탄식]
'사랑하는 자' 란 동맹국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바벨론 군대가 이땅을 파괴시키고 있었을 때 유다를 도우러 오지 못했다. 특히 기대를 걸고 있었던 애굽도 갈대아군들과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기 위해 몸을 도사리고 있었다.
ꃨ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 거짓 선지자들의 그럴 듯한 거짓말에 현혹되어 예레미야의 경고를 무시했던 바로 그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포위 공격에서 간신히 살아남긴 하였으나 결국 양식을 찾지 못해서 죽어갔다.

성 경: [애1:20]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예루살렘의 비극에 대한 탄식]
예루살렘의 유일한 희망은 여호와께서 그 대적들을 심판해 주시는것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죄악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다다라 있었다. 한편, 예레미야는 7 0년이 지난 다음에야 예루살렘이 회복될 것이고 그 반면에 갈대아인들은 망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예언했었다(25:12-14). 그러나 예루살렘 함락은 이 예언을 믿는 경건한 자들에게까지도 엄청난 충격이 될 정도로 처절했음이 분명하다.
ꃨ 마음이 괴롭고 - 이의 히브리어 '메아 하마르'(*)는 문자적으로 '창자가 뒤틀린다'는 뜻으로서 극도로 괴로운 심경을 나타낸다.

성 경: [애1:21]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예루살렘의 비극에 대한 탄식]
여기서는 전날 선택된 백성을 위해 대적을 무찔러 주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자기 백성에게 진노하셨다는 사실이 언급되면서, 대적들이 이 사실을 알고는 대단히 즐거워한다는 내용이 언급된다. 본절 끝부분의 반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시리니 (*, 헤베타욤 카라타)라는 표현은 난해한 구문이다. 어떤 학자는 '반포하신 날'을 유다의 재앙의 날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이해하기도 하나, 거만한 이스라엘 대적들이 처벌을 받아 낮아지는 때를 가리킨다고 봄이 타당하다. RSV 영역 성경은 페쉬타(Peshitta)역을 따라 이를 명령형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NIV 영역본은 미래의 소망을 나타내는 희구적 가정법(optative suvjunctive)으로 이해하고서 이를 '그 날이 이르도록 하시기를'(May you brin g the day)이라 번역하였다. 그런가 하면 KJV, ASV 는 이를 예언적 완료형으로 이해하고 있다. 저자는 대적들의 악한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처벌받게 되기를 기도한다. 이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악이 처벌되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공의의 실현이 바로 심판이었다는 내용은 뒤에 이어지는 몇 장의 주제로 등장한다. 본절은 이런 의미에서 본서의 기본적인 신학 사상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죄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이 민족이 바라보고 기대를 걸 수 있는 미래에 대한 희망의 근거이기도 한 것이다(Harrison).

성 경: [애1:22]
주제1: [유다의 슬픔]
주제2: [예루살렘의 비극에 대한 탄식]
본절은 본장의 결론에 해당되는데, 하나님의 공변된 보응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즉 온 세계의 심판주 되신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처벌하였던 것과 같이 악하고 죄많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그와 같은 심판을 내려달라는 것이다. 이런 탄원은 전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에 의거한 것으로서, 사도바울이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는 주의 약속을 상기 시킨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된다(롬 12:19).
<cafe.daum.net/correcttheology>


할렐루야!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뭇 백성을 징벌하시는 이, 곧 지식으로 사람을 교훈하시는 이가 징벌하지 아니하시랴?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느니라.

Does he who implanted the ear not hear? Does he who formed the eye not see? Does he who disciplines nations not punish? Does he who teaches man lack knowledge? The LORD knows the thoughts of man; he knows that they are futile. _ 시편 Psalms 94:9-11

 

예레미야애가 1장

 

[SYNOPSIS]

본서의 주제는 유다 왕국과 그 수도 예루살렘의 재앙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고, 이어서 파멸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언급한다. 예루살렘 함락은 유다 백성들의 신앙을 동요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절망의 늪에 빠뜨렸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는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위해 선택하신 거룩한 성전이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변화에도 예루살렘만은 요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성의 함락이 그들의 눈앞에 현실로 나타났던 것이다. 성이 함락되자 우방 국가들도 외면해 버리고, 예배가 중지되었으며, 온 성 거민이 곤욕과 수치로 뒤덮이게 되었다. 이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함락 원인이 죄악 때문임을 고백하고, 이 핍박으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호소한다.

 

 

[CONTENTS]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은 평상시에는 민족 종교의 구심점이었으며 상업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었다. 그러나 이제는 참혹하게 황폐화되어 버린 폐허로 묘사되고 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파멸의 비극적인 상황을 더욱 고조시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남편과 자식을 잃은 과부가 옛날의 영광을 회상함과 동시에 현재의 한탄스러운 상황을 돌아보면서 애도하고 있는 것으로 표현한다.

1.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2.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

사랑하던 자’와 ‘친구’는 유다의 동맹국인 애굽, 에돔, 모압, 암몬, 두로와 시돈 등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들은 유다가 멸망에 처했을 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였고, 에돔은 오히려 바벨론을 도와 유다를 공격했다(옵 1:10~14).

 

3~10. 유다는 환난과 많은 고난 가운데에 (포로로) 사로잡혀 갔도다. 그가 열국 가운데에 (흩어져) 거주하면서 (편히) 쉴 곳을 얻지 못함이여, 그를 핍박하는 모든 자들이 궁지에서 그를 뒤따라 잡았도다(거칠게 몰아붙이는구나). 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함이여! 절기를 지키려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들이 적막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시온도 곤고를 받았도다. 그의 대적들이 머리가 되고 그의 원수들이 형통함은, 그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음이라,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 딸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그의 지도자들은 꼴을 찾지 못한 사슴들처럼, 뒤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아났도다. 예루살렘이 환난과 유리하는 고통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기억하였음이여! 그의 백성이 대적의 손에 넘어졌으나 그를 돕는 자가 없었고, 대적들은 그의 멸망을 비웃는도다.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 조소거리가 되었으니, 전에 그에게 영광을 돌리던 모든 사람이 그의 벗었음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그는 탄식하며 물러가는 도다. 그의 더러운 것이 그의 옷깃에 묻어 있으나 그의 나중을 생각하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도록 낮아져도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여,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하오니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 대적이 손을 펴서 그의 모든 보물들을 빼앗았나이다. 주께서 이미 이방인들을 막아 주의 성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명령하신 그 성소에, 그들이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조차도 제사장 신분이 아닌 이상 성소에 입실하는 것이 금지된 상황인데, 이교도들이 그 거룩한 성전을 마구 짓밟았다는 것 자체가 최악의 상황이었음을 말해준다. 이스라엘 회중에 들 수조차 없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밟았던 것이다.

 

 

 

11. 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이으려고 보물로 먹을 것들을 바꾸었더니,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

예루살렘이 멸망되기 전, 예루살렘 성의 포위기간이 1년 6개월 동안이나 장기화(長期化)되어서 양식을 구할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갖고 있던 모든 보물을 팔아 식량과 맞바꾸는 상황이 도래(到來)한 것이다.

 

12~19.

- 지나가는 나그네들아, 이 일이 당신들과는 참으로 아무 상관이 없는가? 내게로 와서, 나를 한번 살펴보라, 내가 겪고 있는 이런 고통 같은 끔찍한 고통을 온 세상 어디에서 본 적이 있는가? 여호와의 맹렬한 진노의 날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 같은 끔찍한 고통을 쏟아 부었도다. 저 높은 곳에서 내게 불을 던지시어 내 뼛속까지 파고들게 하셨고, 내 발 앞에 그물을 쳐놓으시어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셨도다. 그러므로 내가 폐인처럼 황폐해져서, 심히 지치고 피곤하여 온종일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였도다. 내 죄들을 손수 묶고 엮어서 멍에로 만든 후에, 그것을 내 목에 얹어 놓으셨다. 아, 그 멍에가 어찌나 무거운지 내가 힘이 달려 도무지 멜 수 없었다. 또 여호와께서는 내가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강한 원수들의 손에 나를 넘겨 버리셨도다.

주께서는 내 가운데 있는 내 모든 용사들을 하나도 없는 것같이 여기시고, 큰 군대를 모아 내 젊은 용사들을 여지없이 쳐부수셨다. 처녀 유다를 포도주 틀 안에 넣고 마구 짓밟으셨도다. 이 일로 내가 슬피 우니, 내 두 눈에서 눈물이 물처럼 줄줄 흘러내리는구나. 그럴지라도 나를 위로해 줄 이가 아무도 없고, 내 영혼을 회복시켜줄 이도 멀리 떠나가고 말았구나. 이런 지경에 원수들이 나를 쳐 이기니, 내 자녀들마저 가련하고 처량하게 되었도다.

시온이 도움을 바라고 두 손을 힘껏 펼쳐보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아무도 위로해 주지 않는구나. 도리어 여호와께서 시온의 사방에 있는 대적들을 일으켜 야곱을 치게 하시니, 그들이 예루살렘을 더러운 오물 다루듯 하는구나. 참으로 여호와는 의롭도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온전히 내가 주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 모든 백성들아, 내가 겪고 있는 이 고통을 보라. 내 처녀들과 청년들이 모두 사로잡혀 포로로 끌려가고 말았도다. 환난의 날에, 내가 평소 의지하던 내 사랑하는 동맹국들에게 간곡히 도움을 호소했건만, 그들 모두가 나를 속이고 내게서 등을 돌렸다. 그래서 내 제사장들과 내 장로들이 목숨을 부지하려 먹을거리를 찾아 성 안 곳곳을 두루 헤매다가 모두가 기진하여 죽고 말았도다.

예루살렘과 유다 거민이 당하고 있는 슬픔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슬픔임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슬픔을 통하여 인내와 온유의 미덕을 배우게 된다. 또한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정당한 것이며, 예루살렘에 대해 그토록 심하게 징벌하신 것도 공정한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예레미야의 기도이다. 또한 그는 유다의 신실한 자들을 향해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권고한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의 손에 징벌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인정해야 하며, 그 다음에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하여 도움을 간구해야 한다. 기도의 내용은 재앙을 보고 기뻐하는 이방 나라들을 징벌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방 나라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은 경건한 자들에게 위로가 되며, 또한 경건한 자들을 구원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건한 자들이 스스로 겸손해지지 않고 원수에 대해 저주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20~22.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내가 환난을 당하여 나의 애를 다 태우고 나의 마음이 상하오니, (그것은) 나의 반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에서는 칼이 내 아들을 빼앗아 가고, 집 안에서는 죽음 같은 것이 있나이다. 그들이 내가 탄식하는 것을 들었으나,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으며, 나의 모든 원수들은 내가 재난 당하는 것을 듣고 주께서 이렇게 행하신 것을 기뻐하나이다. 그러나 주께서 그 선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셔서, 그들이 (지금의) 나와 같이 되게(고통 받게) 하소서. (그날에)그들의 모든 악을 주 앞에 가지고 오게(밝히 드러나게) 하시고, 나의 모든 죄악들로 말미암아 내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아, 주여!)나의 탄식이 많고, 나의 마음이 병들었나이다.   sysun21c.blog.me/220404331225


예레미야애가 개관

 

1. 저자

2. 시대적 배경

3. 전체 내용 요약

4. 구속사적 의미

5. 내용 분해

 

. 예루살렘 성의 멸망과 애통(1)

1. 예루살렘의 비참한 상태(1:1-11)

2. 예레미야의 탄식(1:12-22)

 

. 예루살렘 성의 모습과 멸망 원인(2)

1. 비참한 성의 모습(2:1-10)

2. 성의 멸망 원인(2:11-22)

 

. 예레미야의 간구와 회개 촉구(3)

1. 선지자의 탄식(3:1-18)

2. 회개의 촉구(3:19-54)

3. 선지자의 간구(3:55-66)

 

.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 죄악(4)

1. 시온의 비참(4:1-12)

2. 시온의 죄(4:13-20)

3. 에돔의 심판(4:21-22)

 

. 하나님께의 회개와 간구(5)

 

1. 저작권에 대한 비평

2. 애가의 주제와 목적 그리고 가치

1) 주제

2) 목적

3) 가치

 

3. 예레미야서와 예레미야애가

 

애가 (哀歌, lament)

 

애가로 번역된 히브리어 키나의 원뜻은 ‘(악기를) 치다(때리다)’, ‘(슬픈) 노래를 부르다로서

슬퍼하는(애통하는) 노래’, ‘애도의 노래’, ‘애곡’(哀哭)을 의미한다. 이는 고난과 애통함 중에

부르는 슬픈 노래로서, 국가적 위기 상황에 직면하여 탄식하며 거국적으로 회개할 때나

장례식에서 고인(故人)의 덕을 생각하며 또 상주를 위로할 목적으로 부르는 짧은 형식의 노래를

말한다(삼하 3:33-34; 대하 35:25; 9:20; 19:1-9; 28:12).

이외에도 예언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애가도 있는데, 바벨론에 대한 이사야의 애가(14:1-32),

예루살렘을 향한 예레미야의 애가(7:28-34), 두로에 대한 에스겔의 애가(27:2-36),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애가(19:41-44) , 바벨론에 대한 사도 요한의 애가(18:1-24)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애가[哀歌, lament] (라이프성경사전, 2006. 8. 15., 생명의말씀사)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19:41-44)

 

--------------------------------------------------------------------------------------------------------------------

 

No.133 3 강 예레미야애가 개관

 

1. 저자

 

본 서 자체에는 저자가 누구인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히브리 성경에서는 본 서를 구약성경에서 룻기와 전도서 사이에 있는 케투빔(Ketubim,성문서거룩한 글들’,‘기록된 글들’)이라 불리는 성문서 사이에 수록하였다. 이러한 편집은 저자에 대한 판단 기준을 제시하지 않고, 시편과 잠언 시가서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저자기 예레미야라는 것을 제시한 것은 칠십인역 번역자에 의하여 생겨난 것이다. 칠십인역 번역자는 현존하는 히브리 사본에 나타나지 않는 말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로잡혀 가소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 대하여 애도하며 말하기를" 이라는 부분을 첨가하고 있다. 또한 요세푸스와 탈무드의 기자 역시 이 사실을 지지하고 있다. 그리고 오리겐을 미롯한 교부들과 칼빈 역시 본 서의 저자가 예레미야임을 인정했다.

 

* 유대의 경전은 율법서(토라)와 예언서(선지서/네비임,느비임)와 성문서(케투빔)

구분해 불린다. 성문서(聖文書,Hagiographa)거룩한 글들’,‘기록한 글들

시편, 잠언, 욥기와 같은 시와 지혜, 아가, 룻기, 애가, 전도서 등이다.

 

본 서와 예레미야서의 유사성을 살펴보면 저자에 대한 관점이 더욱 명백해질 수 있다. 내용상으로는 예루살렘이 멸망을 기술한 점에서 동알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또한 문체상으로 '내 눈에 눈물이 물같이 흐름'(9:18; 13:17; 14:17; 1:16; 2:11,18; 3:48,49)'선지자와 제사장의 죄악(23:11; 2:14; 4:13)'처녀 내 백성의 파멸'(8:11,21; 2:11; 3:48; 4:10) 등의 표현이 유사한 표현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주제상으로도 하나님이 백성이 징계 당함에 대한 비통과 눈물 속에서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도 동일하다. 이러한 사실을 비추어 볼 때 본 서의 저자는 예레미야라는 사실이 더욱 명백해진다.

 

2. 시대적 배경

 

예레미야애가의 배경은 주전587-586년에 유대와 예루살렘에 임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을 18개월 동안 포위하여 점령한 사실이다. 포위로 인하여 예루살렘은 기근과 질병으로 가득 찼고, 점령으로 인하여 성은 완전히 파괴되고 불에 타버렸다.

 

남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한 이래 유다는 예루살렘 성을 하나님이 안전하게 지켜 주실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다가 하나님을 버리고 패역한 결과로 하나님이 바벨론을 들어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완전히 파괴해 보리자 유다 민족들은 자신들의 눈을 믿을 수 없었고, 따라서 이들의 비애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예루살렘의 훼파를 전후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약속하신다. 그리고 바벨론의 포로지에서도 이런 약속을 선지자 에스겔과 다니엘을 통하여 주셨다. 이러한 약속은 바벨론의 멸망과 함께 메대 바사의 고레스 왕의 포고령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또한 완전한 회복은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날 메시야를 통하여 영원한 왕국을 이루실 것을 약속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 약속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히 성취되었으나 유다 민족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유다 민족이 이 애가를 상당히 애독한 사실은 역사적으로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이 애가가 유대의 중요한 연중 행사 중 다섯 두루마리 책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브월 9일에 애가는 성전의 파괴를 기념하기 위하여 금식하면서 읽혀졌다. 또한 로마 교회는 성주간의 마지막 3일 동안 애가서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3. 전체 내용 요약

 

애가는 다섯 편의 시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들의 첫 4편은 히브리어 알파벳 순으로 구성된 이크로스틱 시(각 행의 첫 자음을 모으면 알파벳 순서로 끝까지 이루는 시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시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동질성 상실에 대한 큰 슬픔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읽혀지길 바라는 의도에서 저작되었다. 시대적으로는 예루살렘 성의 파괴,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야의 유배,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감 등의 극심한 고통 속에서 쓰여졌다.

 

1장은 예루살렘 성의 파괴로 인한 성의 비참함이 묘삳되면서 예레미야의 탄식과 애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2장의 초반절 역시 예루살렘이 비참한 모습을 기술하였고, 후반절에는 예루살렘 성의 멸망 원인인 거짓 선지자의 잘못된 예언을 기술하면서 선지자의 탄식이 기록되어 있다. 3장에는 저자의 애통이 계속되면서 백성들을 향하여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유다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신실하심을 좇아 긍휼을 구하고 있다. 4장은 다시금 예루살렘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탄식과 선지자와 제사장들의 죄악을 기술하고 있고, 마지막으로 위로와 하나님께 대한 소망이 나타난다. 5장에서는 유다 백성의 처지를 하나님께 신원하고,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을 간구함으로 끝마치고 있다.

 

4. 구속사적 의미

 

본 서는 예루살렘의 파괴로 인한 선지자 예레미야의 애통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애동의 5편의 시를 쓴 것으로만 요약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긍휼을 구하고 있다. 또한 백성에게는 진정으로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종용하고 있다. 그래서 본 서는 하나님의 공의와 회개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기록하고 있다.

 

본 서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며 인류의 죄악을 사하시는 은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회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5. 내용 분해

 

. 예루살렘 성의 멸망과 애통(1)

1. 예루살렘의 비참한 상태(1:1-11)

2. 예레미야의 탄식(1:12-22)

 

. 예루살렘 성의 모습과 멸망 원인(2)

1. 비참한 성의 모습(2:1-10)

2. 성의 멸망 원인(2:11-22)

 

. 예레미야의 간구와 회개 촉구(3)

1. 선지자의 탄식(3:1-18)

2. 회개의 촉구(3:19-54)

3. 선지자의 간구(3:55-66)

 

.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 죄악(4)

1. 시온의 비참(4:1-12)

2. 시온의 죄(4:13-20)

3. 에돔의 심판(4:21-22)

 

. 하나님께의 회개와 간구(5)

 

1. 저작권에 대한 비평

 

예레미야대가의 저자가 예레미야라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인정되어 왔다. 그러나 신학계에 비평학이 들어오면서부터는 저작권에 대한 비평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현대의 비평가들은 내증에 근거하여 부수주의의 역사적 전통을 부인한다. 첫째는 예레미야의 두 예언이 문체가 너무나 다르고, 두서너 가지의 역사적인 암시들을 볼 때에 이것이 예레미야 시대보다 훨씬 후대의 상황과 사건을 언급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반면에 B. C. 586년의 예루살렘 멸망외에 다른 어떤 후대의 사건이 이와 같은 비극적인 애가를 짓도록 영향을 줄 수 있었는지 의문시 된다. 만약에 예레미야가 저자가 아니라고 하면 그것을 쓴 사람이 누구이든 간에 예레미야와 동시대의 인물이어야 하며, 갈대아 정복자들에 의해서 시온이 겪은 그 처참한 비극을 목격한 자라야 한다. 또한 애가서와 예레미야서 사이에 문체와 어투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유사점들이 많이 있음을 볼 수 있다(8:21; 9:18; 1:15,16; 2:11). 그러므로 두 저자 사이에 판정이 다르다는 것에 근거한 논리는 건전한 성경 해석에 따르는 것이 아님을 볼 수 있다. 둘째는 예레미야는 바벨론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도구로서 사용하고 있음을 믿었는데, 3:59-66은 갈대아인이 하나님의 복수의 몽둥이를 실컷 맞아야 한 합당한 원수로 묘사하고 있기에 충돌이 있다. 그러나 이 두 관점이 서로 충돌된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이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확실히 바라보면서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악한 동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복하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사야 10장에도 이와 유사한 앗수르에 대한 태도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관점이 다르다는 점에 근거하여 저자가 다르다는 주장이 좋은 기초 위에 서 있지 않음을 결론지을 수 있다.

 

2. 애가의 주제와 목적 그리고 가치

 

1) 주제

애가의 대주제는 죄악 많은 유다에 임한 재앙과 거룩한 도시와 주님의 성전에 임한 처참한 멸망을 애도하는 것이다. 애곡의 대상은 비참한 상황에 놓인 백성들만이 아니고 그런 참극을 야기시킨 죄를 행한 것이기도 하다. 이것을 통하여 선지자는 매맞은 유다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의로운 손길을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의 은혜를 간구해야 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2) 목적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멸망 그 자체에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변치 않는 언약의 하나님의 회복하심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도 결코 유다를 버리지는 아니할 것이다. 따라서 애가서의 목적은 하나님의 심판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보여서 미래의 교훈으로 삼게 하기 위함이며, 또한 궁극적인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여 실의에 빠진 백성들에게 새 소망을 주기 위함에 있다.

 

3) 가치

애가서의 현대적인 가치는 시간과 역사의 제약을 받지 않는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그것을 생활에 광범위하게 적용할 수 있음에서 찾을 수 있다. 즉 교회의 영적 영광과 그 영광이 상실되었을 때의 비극, 죄의 극악성, 하나님의 공의와 신실, 언약의 본질과 언약 백성의 의무 그리고 우리들의 명예에 의존하는 어리석음 등이다. 그러므로 애가서는 우리로 하여금 오늘날의 혼탁한 교회 현실을 신중히 검토하고 자비와 긍휼이 무한하신 하나님께 돌이키도록 사랑의 채찍을 가할 것이다.

 

3. 예레미야서와 예레미야애가

 

예레미야서와 예레미야애가는 서로 상이한 점이 많이 발견됨에도 불구하고 삶의 정황에 있어서 동일한 선상에 놓여 있다. B.C. 586년 예루살렘 성의 함락 사건을 정점으로 전자는 예루살렘 함락을 경고하고, 후자는 재앙의 비참함과 절망적인 애도를 보여 주고 있다.

 

삼판이 내리기 전 예레미야는 예언을 통해서 멸망과 징표를 보여 주었는데(13:1-11), 이 예언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썩은 띠나 깨어진 오지그릇과 같이 극심하여 처참하게 파괴될 운명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땅에서 유랑하는 자가 될 것이며, 저주받은 골짜기가 매장지가 될 것이라고 했다(19).

 

반면에 예레미야애가는 예루살렘 함락을 보고 체험한 한 시인이 그 비참한 현실 앞에서 절망하고 애통해 하며,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간절히 바라는 심정으로 노래하였다. 그리고 고난과 수난을 당하는 자가 절망하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여호와를 신뢰하면 민족이 다시 번영 할 수 있다고 희망을 제시한다.

< 갓피플(GODpeople) 지식자료실 성경총론 > 자료 옮김.

---------------------------------------------------------------------------------------------------------------------------------

No.134 연구 1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심판(1,2)

 

1. 예레미야의 애곡(1:1-22)

1) 열방들의 배신

2) 하나님을 버린 결과

 

2. 훼파된 성의 상태(2:1-10)

1)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의 손길이 떠난

2) 민족적 죄악으로 인한 재앙

 

3. 예루살렘 멸망으로 인한 비참상(2:11-22)

1) 하나님의 뜻을 분별치 못함

2) 거짓 영을 잘 분별해야 함

 

1. 하나님께 합당했던 유다 왕들(하나님을 의지한 왕들)

 

아사(B. C. 911-870, 왕상15:9-24; 대하14-16)

여호사밧(B. C. 873-848, 왕상22:41-50; 대하17-20)

요아스(B. C. 835-796, 왕상 12; 대하23:16-24:37)

히스기야(B. C. 728-686, 왕하 18-20; 대하 29-32)

요시야(B. C. 640-609, 왕하22:1-23:30; 대하 34,35)

아마샤(B. C. 800-783, 왕하14:3)

웃시야(B. C. 783-742, 왕하15:34)

요담(B. C. 742-735, 왕하15:34)

 

2. 시온(Zion)

 

3. 선지자의 묵시

1) 계시방법

2) 계시내용

 

4. 하나님의 진노

 

------------------------------------------------------------------------

 

No.134 연구 1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심판(1,2)

 

본문에서는 예루살렘 성의 멸망으로 인한 선지자 예레미야의 애곡과 훼파된 성의 모습 그리고 멸망 원인이 나온다. 유다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그 친구들, 즉 애굽과 동맹한 나라들을 믿었으며, 또한 극한 우상 숭배를 인하여 하나님의 분노를 격동시켰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그 친구들, 즉 애굽과 동맹한 나르들을 믿었으며, 또한 극한 우상 숭배를 인하여 하나님의 분노를 격동시켰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벨론이라는 채찍을 들어 유다를 크게 징벌하셨으며,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징벌받은 예루살렘 성을 보면서 밤새 애곡하였다.

 

1. 예레미야의 애곡(1:1-22)

 

선지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본래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고 본래는 열방 중에 공주 되었던 자가 이제는 조공드리는 자가 되었도다"(1:1)라고 하였는데, 그 의미는 무엇인가? 또한 사랑하던 자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다고 하였는데,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예루살렘은 저희 가운데 불결한 자 같도다"(1:17)라고 한 뜻은 무엇인가?

 

1) 열방들의 배신

이스라엘은 다윗 왕과 솔로몬 왕 시기에 열방 중에 가장 융성한 나라였다. 그리고 남북이 분열된 후에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한 왕들의 시대에는 그 융성함이 지속되었다. 그 때에는 많은 나라들이 가까이에서 친구가 되었고, 유다는 공주와 같이 존귀한 자였다. 그러나 멸망 후에는 열방 중에 그 누구도 위로해 주지 않고 등을 돌렸으며, 오히려 바벨론에게 조공을 드리는 자가 되었다. '불결한 자'는 율법에 그 누구도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는 '정결법'이 패망한 이스라엘에 적용되었던 것이다.

 

2) 하나님을 버린 결과

선지자 예레미야는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열방의 힘을 의지한 유다와 예루살렘의 결과를 보면서 한없는 탄식과 눈물로 애가를 지었다. 이것은 현대의 우리들에게 큰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다. 모든 도움과 힘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따르는 자에게 하나님도 구체적인 도우심을 베푸신다. 인본주의와 환경에 따라 사는 신자들은 결국 실망케 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다른 곳을 의지하고 떠나면 채찍을 들어서라도 다시금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신다. 우리는 이러한 징계를 받기 전에 늘 자신의 신앙적 현주소를 확인해야 할 것이다.

<갓피플(GODpeople) 지식자료실 성경총론 > 자료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