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의 새 언약은 무엇인가?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렘31:31)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장래에 이루실 구원의 큰 역사에 대한 예언을 하면서 새 언약을 처음으로 소개하고 있다. 물론 예레미야의 새 언약 예언은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승리와 완성을 소개하는 다른 예언적 본문들과 아주 강하게 연관되어 있다(참고, 렘 32:3-6-41; 33:14-26; 사 11:6-9; 54:11-15; 59:20-21; 겔 16:59-63). 그리고 그 용어는 신약에서 6번 나오고 있으며(고전 11:25; 고후 3:6; 히 8:8; 9:15; 12:24) 새 언약에 대한 사상도 나온다(참고, 롬 1:27; 갈 4:21-31).
그러면 새 언약이란 무엇인가?
언약 혹은 계약이란 말은 원래는 둘이나 그 이상의 당사자 사이에 하나의 협정으로 그 안에 의무가 한 당사자나 양 당사자 모두에게 지워지는 것이다. 그 전형적인 형태로는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의무를 지우는 동등하지 않은 세력 사이에 계약(treaty)이 있고(삼상 11:1-2; 출 19:24), 동등한 거래 당사자간에 계약으로 서로 동등하게 의무를 지는 것이 있다(창 29:15-18)(1).
그런데 새 언약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우선 이 구절에 요점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1) 새 언약은 모세의 언약을 대치하였다. 모세나 율법의 언약은 역사의 종말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실 때까지 지내온 세대들에 대해 어떻게 신자들이 하나님과 관계하는지를 규정한다.
(2) 새 언약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집과 맺은 것이다.
(3) 새 언약은 죄에 대한 완전한 용서를 예비하였다.
(4) 새 언약은 하나님의 율법이 마음속에 기록된 바 인격의 내적 변화를 예비한다는 것이다(2).
여기서 예레미야는 새 언약이 장래에 있을 일로 말씀한다. 다시 말해서 신약과 연관이 있는 것이요 종말과 연관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약속의 성취는 장래 역사의 종말에 가서 온전히 이루게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브라이트(Bright)도 이스라엘 집을 위한 새 언약은 기독교의 복음과 연관이 있다고 하였다. 내가 새 언약을 세운다는 약속은 역시 복음의 말씀에도 나온다. 이 잔은 내 피의 새 언약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취되었다(3).
예레미야와 신약에서 언급된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구속에 대한 신적 적용의 동의어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이루어진 은혜 언약과 동일한 것이다(F. Furretin)(4). 그러나 건전한 이해는 새 언약은 그 내용에 있어서 옛 언약과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개인적이요 내적이며 보편적인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용서받고 구원받은 신자와 하나님과의 언약이다. 그러나 새 언약은 옛 언약에 대한 이스라엘의 실패로 인해 주어진 것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다루시는 방편으로서는 서로 깊은 연관이 있다.
새 언약의 기초는 모든 죄에 대한 절대적이고 완전한 용서이다. 새 언약은 율법이나 성전이나 제물이나 법궤나 인간 제사장, 그리고 나라와 민족에 의존하지 않는다.
옛 언약에서는 결코 누구를 구원할 수도 구원을 계획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두 언약의 목적은 같은 것이다.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참고, 33절; 출 29:45; 레 26:12)(5).
이제 새 언약이 이스라엘과 교회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알아보자.
교회는 옛 언약이 아니라 새 언약에 속해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옛 언약에서 실패했지만 장래에는 새 언약에 속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바울이 말씀한대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이 새 언약의 축복에 들어온 후 저들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음으로 새 언약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롬 11:25-27).
이렇게 볼 때 새 언약은 이스라엘과 교회 다시 말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라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죄사함 받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누릴 축복의 언약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결론할 수 있다.
새 언약은 그리스도가 세우신 것으로 현재와 장래를 다 포함한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현재 새 언약의 유익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를 위해 확보하신 모든 축복을 개종한 이스라엘과 우리에게 쏟아 부어 주실 역사의 종말에 한 정점을 기대한다(6). 그러므로 새 언약의 궁극적인 성취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된다.
주
1. F. B. Huey, Jr, Jeremiah, Lamentations(Nashville: Brodman, 1993), p.282
2. Larry Richards, Bible Difficulties Solved(Fleming H. Revell, 1993), p.178
3. Robert P. Carrall, Jeremiah(Philadelphia: Westminster, 1986), p.613
4. Walter A. Elwell, Edit.,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Grand Rapids: Baker, 1984), p.278
5. Charles L. Feinberg, Jeremiah, E. B. C. Vol.6( Grand Rapids: Zondervan, 1986), p.577
6. Larry Richards, Op.cit., p.179
새 언약과 율법
(렘31: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3)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주신 새 언약은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이다.
이 본문은 이유를 설명하는 접속사 ‘키’로 시작되고 있다. 이는 앞 절에서 강조된 이스라엘의 실패가 반복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곧 이스라엘은 더 이상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 방법은 하나님께서 언약의 법을 돌판이 아닌 마음에 기록하여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마음에 기록하여 주시겠다는 새 언약의 강조가 이전에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옛 언약 역시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는 것은, 신명기와 시편에 자주 언급되는 내용이기도 하였다(신 6:6; 10:12; 11:18; 30:6, 14; 시 37:31; 40:8; 119:34). 그러나 그것은 율법 준수의 책무를 갖고 있는 이스라엘이 바른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는 강조일 뿐이다. 새 언약의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직접 율법을 마음에 기록하여 주시겠다고 약속에 있다.
율법의 준수는 언약 체결의 전제조건이 아니다. 율법은 언약의 수혜자인 이스라엘이 언약의 시혜자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바르게 살아가는 길이요, 그 구체적인 방법이다. 율법은 법적인 제재나 의무사항과 같이 이스라엘을 얽매이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로의 억압과 구속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이 해방의 감격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기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마음에 새기는 내면화는 언약관계 유지의 우선순위가 아닐 수 없다.
‘마음에 새기다’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전치사 ‘알’은 ‘위에’(on)를 뜻하는데, 이는 마음이 은유가 아니라 문자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준다. 마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전치사 ‘베’(in)가 사용된다. 마음이 문자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마음이 곧 율법을 기록하는 거룩한 장소라는 뜻이다.
구약에서 ‘마음’은 정서적 장소가 아니라 도덕적 의지가 자리하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율법을 기록하여 주신다는 약속은, 곧 하나님의 율법이 인간의 도덕적 삶과 행동을 지배하게 하시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그것은 율법을 돌판에 새긴 옛 언약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율법을 돌판에 새겼다는 것은, 곧 인간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옛 언약의 돌판과 새 언약의 마음을 서로 대비시킨 것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즉 옛 언약의 율법은 모세와 같은 중재자가 필요했지만, 새 언약에는 더 이상 그런 중재자가 필요치 않다.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율법을 새겨 주시기 때문이다.
또한 옛 언약에서는 율법을 새길 돌을 하나님께서 직접 준비하셨지만, 새 언약에서는 그런 돌 대신 인간의 마음을 새롭게 창조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마음에 새겨 주심으로, 율법을 지킬 능력과 의욕을 마음에 불어 넣어 주신다.
새 언약은 율법을 지키려는 의지적 노력에 앞서 마음에 율법을 새겨줌으로, 그 자체가 삶의 한 구성요소이면서 인격의 한 부분이 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새 언약은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일치되는 것을 지향하며, 그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온전한 순종을 의미한다.
새 언약이 강조하는 율법의 그런 내면화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편만함과 그들의 죄가 사하여져 다시는 그 죄가 기억되지 않는 죄 용서의 영구성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새로운 시대의 원동력인 셈이다.
다윗의 의로운 가지(예레미야 33장)
1-11절, 황폐한 성을 치료하실 것
[1-3절]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다시 임하니라. 가라사대 일을 행하는(오사흐)[그것을 행하시는, 땅을 만드신](NASB, NIV)]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베추로스)[접근할 수 없는, 놀라운, 기이한](BDB) 일을 네게 보이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을 가능하게 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을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 고국으로 돌아와 나라를 회복케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그 일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4-5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라. 무리가 이 성읍의 가옥과 유다 왕궁을 헐어서 갈대아인의 흉벽과 칼을 막아 싸우려 하였으나 내가 나의 노와 분함으로 그들을 죽이고 그 시체로 이 성에 채우게 하였나니 이는 그들의 모든 악을 인하여 나의 얼굴을 가리워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스라엘 나라와 유다 나라의 멸망은 그들의 모든 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었다. 그들을 죽이신 자는 하나님이셨다.
[6-9절]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진리]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내게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나의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나의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강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리라.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을 치료하시며 고쳐 낫게 하실 것이다. 죄로 인해 멸망한 성, 중병이 걸려 다시 회복하기 어려워 보이는 그 성이지만, 하나님께서 치료하시면 회복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성을 회복시키시고 온전케 하실 수 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 성에 평안과 진리의 풍부함을 주실 것이다. 전에 그 성은 하나님의 진리도 평안도 없었다. 불의와 거짓이 가득하고 슬픔과 고통이 충만하였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실 때는 그 성에 진리의 말씀이 풍부하고 평안이 충만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들을 돌아오게 하실 것이며 그 땅을 예전과 같이,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일차적으로 그들의 포로 귀환으로 시작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악들을 사하시며 정결케 하실 것이다. 회복과 구원은 죄사함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죄가 멸망의 원인이었기 때문에 죄사함은 회복의 원인이 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이 세계 열방 앞에서 하나님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열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신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그가 이 성읍에 베푸신 모든 복과 모든 평안을 인하여 두려워하며 떨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회복은 기쁨과 평안을 줄 것이다.
[10-11절]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가리켜 말하기를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다 하던 여기 곧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던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와 여호와의 집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리리니 이는 내가 이 땅의 포로로 돌아와서 처음과 같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회복된 예루살렘 성은 사람들의 즐거워하는 소리와 기뻐하는 소리가 다시 들릴 것이며,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가 다시 들릴 것이며, 또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소리도 들릴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3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기이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 귀환에 대한 일을 가리켰다. 오늘 우리도 어떤 어려운 문제가 있든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을 두려워하고 범죄치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면 죄인들의 죄에 대해 엄히 징벌하실 것이다. 아름다운 예루살렘 성이라도 바벨론 군대에게 처참하게 짓밟혔고 황폐케 되었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 죄의 값은 사망과 불행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을 두려워하며 범죄치 말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믿자. 하나님께서는 멸망한 예루살렘 성을 치료하시며 낫게 하실 것이며 유다와 이스라엘의 포로들을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이런 일은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능치 못함이 없으시다. 그는 구주이시다.
넷째로, 우리는 우리의 죄를 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감사하자. 8절,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긍휼로 우리의 죄를 사해주셨다. 죄사함이 없었다면, 아무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을 것이나 죄사함 때문에 죄인들이 감히 하나님을 우러러 본다.
다섯째로, 우리는 평안과 기쁨의 복을 누리자. 하나님께서는 회복케 하실 땅과 성에 풍성한 평안과 큰 기쁨을 주실 것이다. 오늘 신약 성도들에게도 풍성한 평안과 큰 기쁨의 복을 주셨다. 주께서는 이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참 평안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요 14:27).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했다(살전 5:16-18).
12-26절, 다윗의 의로운 가지
[12-13절]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던 이곳과 그 모든 성읍에 다시 목자(로임)[목자들]의 거할 곳이 있으리니 그 양무리를 눕게 할 것이라. 산지 성읍들과 평지 성읍들과 남방의 성읍들과 베냐민 땅과 예루살렘 사면과 유다 성읍들에서 양무리가 다시 계수하는 자의 손 아래로 지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의 징벌로 황폐케 된 유다 땅이 사람 사는 땅으로 회복될 것이다. 사람들은 다시 목자들이 양을 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14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이른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선한 말’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과 포로들의 귀환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다. 본장 6-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진리]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었다. 그는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수 21:45).
[15-16절] 그 날 그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법과 의]를 실행할 것이라. 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얻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거할 것이며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義)라 일컬음을 입으리라.
‘그 날 그때’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를 보내주시는 때를 가리켰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서 한 의로운 가지를 나게 하실 것이다. 이것은 예레미야 23:5에서 이미 예언된 바이다: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다른 선지자들도 비슷한 예언을 했었다. 이사야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에스겔 34: 23-24,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호세아 3:5,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스가랴 3:8,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다윗의 한 의로운 가지는 곧 메시아를 가리킨다. 구약성경은 메시아의 강림을 예언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 1:1의 증거대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다. 그는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나셨다(마 2장; 눅 2장). 사람들은 그를 다윗의 자손으로 불렀다. 그는 이 땅에 법과 의를 행하실 것이다. 그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고 예루살렘은 안전히 거할 것이다. 또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義)라 일컬음을 입을 것이다. 이것은 신약교회에 주신 구원을 가리킨다. 신약교회는 주께서 주신 의(義)와 평안을 누린다.
고린도전서 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救贖)함이 되셨으니.” 로마서 3:21-2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義)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義)니 차별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17-18절]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스라엘 집 위에 앉을 사람이 다윗에게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내 앞에서 번제를 드리며 소제를 사르며 다른 제를 항상 드릴 레위 사람 제사장들도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다윗 자손 왕들과 레위 사람 제사장들을 끊임없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다윗에게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位)가 영원히 견고하리라”고 약속하셨었다(삼하 7:16; 시 89:3-4). 메시아 예언은 이 약속에 근거한다. 이사야도 말하기를,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 . .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位)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라고 하였다(사 9:6-7).
다윗 자손 왕들과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신약 성도들을 가리켰다고 본다. 요한계시록 5:10은,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왕들](전통본문)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고 말하고, 요한계시록 22:5는,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고 말한다. 또 베드로전서 2:9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라고 말했다.
[19-22절]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약정과 밤에 대한 나의 약정을 파하여 주야로 그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 내 종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도 파하여 그로 그 위에 앉아 다스릴 아들이 없게 할 수 있겠으며 내가 나를 섬기는 레위인 제사장에게 세운 언약도 파할 수 있으리라. 하늘의 만상은 셀 수 없으며 바다의 모래는 측량할 수 없나니 내가 그와 같이 내 종 다윗의 자손과 나를 섬기는 레위인을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신 다윗의 자손과 레위인 제사장들에 대한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며 그들이 번성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오늘날 신약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23-24절]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 택하신 두 족속을 버리셨다 한 것을 네가 생각지 아니하느냐? 그들이 내 백성을 멸시하여 자기들 앞에서 나라로 인정치 아니하도다.
24절의 ‘이 백성’은 유다의 원수들인 이방인들보다 이스라엘 백성 중 악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하나님의 택하신 두 족속은 이스라엘 나라와 유다 나라를 가리키는 것 같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 두 족속을 버리셨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나라로 인정치 않았다.
[25-26절]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주야(晝夜)의 약정이 서지 아니할 수 있다든지 천지의 규례가 정한 대로 되지 아니할 수 있다 할진대 내가 야곱과 내 종 다윗의 자손을 버려서 다시는 다윗의 자손 중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다스릴 자를 택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 포로된 자로 돌아오게 하고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밤낮의 약정이나 천지의 규례가 폐하여지지 않듯이,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들이 폐해지지 않을 것이며 그의 긍휼 중에 약속대로 포로들이 돌아올 것이다. 바벨론에 잡혀 간 포로들이 돌아오리라는 예언은 본서에서 이미 여러 차례 나왔다(29:10; 30:3; 32:44; 33:7, 11).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신실하신 자이시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범죄에 대해 엄하게 벌하시지만, 또한 약속대로 구원을 베푸신다. 낮과 밤에 대한 그의 약속이 변함 없이 지켜지듯이,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과 포로 귀환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 그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에게서 난 한 의로운 가지이시며 모든 믿는 자를 위해 의를 이루셨고(롬 10:4) 우리의 의가 되신다(고전 1:30).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3:22).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신약 성도들을 왕들과 제사장들로 삼으셨다. 요한계시록 5:10,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왕들]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중보 사역으로 말미암아 왕들과 거룩한 제사장들이 된 것을 깨닫고 감사함과 담대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이 세상 사는 동안 의와 선을 행하며 세상에 빛이 되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예레미야 33:1-9
현대 여성들이 보기에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남성들이 있다고 합니다. 여자들이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남자, 과연 어떤 남자이겠습니까? 눈이 단추 구멍 만큼 작아서 쌍꺼풀 수술한 남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 예쁘고 날씬한 여자를 볼 때 마다 눈이 당구공만 해지는 남자는 용서할 수 없다고 합니다. 과거가 있는 남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 미래가 없는 남자는 절대 용서가 안 된다고 합니다. 귀 뚫은 남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 귀가 막힌 남자는 용서가 안 된다고 합니다. 머리카락이 없는 남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 머리가 빈 남자는 용서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죄 많은 사람은 용서할 수 있어도 용서를 구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실패한 사람은 축복할 수 있지만, 기도하지 않은 사람을 하나님은 축복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시고 “크고 은밀한 계획”을 보여주십니다. 오늘 예배의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들도 이 시간,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크고 은밀한 계획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들을 보여주시며, 유다 백성들에게 그 계획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본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거리를 열심히 뛰어 다니며, 타락한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만 하면 살 수 있다고 눈물로 하나님의 계획을 선포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면 유대 나라가 바벨론에게 패망하여 바벨론의 식민지가 될 것이라고 울면서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레미야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유다의 왕 시드기야는 민심을 어지럽히는 유언비어를 유포한다하여 예레미야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가 감옥에 갇혔을 때 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33:1입니다.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
예레미야는 선지자였지만 감옥에 갇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낙심하고 있었던 예레미야에게 본문 2절은 “크고 은밀한 일”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33:2입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일을 계획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일을 행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예레미야의 인생에 개입하셔서 그의 인생에 드라마 작가로 등장하십니다.
모든 영화나 드라마에는 대본이 있습니다. 대본 속에는 작가의 아이디어, 사상, 놀라운 계획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아무리 연출가가 뛰어난 기획을 하고, 아무리 연기자들이 연기를 잘 해도 대본이 좋지 않으면 결코 좋은 작품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기획하시는 극작가이십니다. 그분은 내 인생의 연출가이십니다. 그런데 이 땅에 수많은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극본과 시나리오를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연기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를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기 멋대로 살아 보려고 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도 뻔합니다. 무엇인가 하려고 발버둥 쳐봐도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는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내 인생을 계획하신 하나님, 내 인생의 극본과 시나리오를 만드신 그 분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연출가이신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승리하는 사람인 줄 믿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지구라는 무대 위에서 하나님이 제시하신 대본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 가는 연기자와 같습니다. 여기에 엑스트라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귀한 배역도 있고, 좀 덜 귀한 배역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우리 모두가 내 인생의 주인공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내 인생 드라마의 주연 배우입니다.
예레미야는 지금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시나리오를 보여주셨습니다. 예레미야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일을 계획하시는 분, 그리고 계획하신 일을 반드시 행하시고 성취하는 여호와였습니다. 인간들이 계획을 세우고, 뜻을 세워도 그것을 이루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시나리오를 빨리 파악하는 것, 나를 향한 계획과 목적과 의도를 파악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시나리오를 무시하고 살다가 바벨론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도시 마다 시체로 가득 차고, 유다 임금은 두 눈이 뽑혀 죽었고, 수많은 젊은이들과 여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원치 않는 순간에 바벨론 포로와 같은 비참한 역경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고난의 순간마다 내가 하나님의 시나리오와 연출에 따라 살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고통을 당하느냐 아니냐의 문제 보다 어떻게 고난에 직면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똑같은 바람이 불어오지만 오물은 더러운 냄새를 풍기고, 꽃은 아름다운 향기를 날립니다. 고통은 똑같이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시나리오를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결코 그 고통이 삶의 마이너스로 끝나지 않습니다. 내 인생의 플러스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일, 은밀한 일”을 알 수 있습니까? 예레미야 33:3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예레미야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때가 가장 큰일을 할 때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한 번이라도 큰일을 감당하기를 원한다면 기도해야 됩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 나라를 살리는 가장 중대한 일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그 위기를 벗어나 승리하는 지름길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기도하는 일보다 더 크고 우선된 일은 없습니다.
이것이 예레미야가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예레미야는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조국을 위해 구국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어려운 난국을 풀기 위해서 자신이 앞장서야 하는데, 옥에 갇힌 신세가 되었으니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보여 주신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은밀한 일은 방황하는 민족과 아픈 유다 왕국의 사연을 가슴에 끌어안고 부르짖으며 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합 왕과 이세벨의 박해를 받았던 엘리야 선지자도 한때 착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상황을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나 혼자 뛰다가 이제는 지칠 때로 지쳤습니다. 나 혼자만 남았습니다. 차라리 내 목숨을 거두어 가 주십시오.” 그때 하나님은 열왕기상 19:18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네가 그 일을 하는 게 아니야. 그 일을 이루는 것은 나다. 너 혼자 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지금도 엎드려 기도하는 칠천의 용사를 네 곁에 남겨 두었다.’
여러분 지쳐있으십니까? 누군가 여러분을 위하여 지금 이 시간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 시간에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꿈의 사람 요셉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보니 자신의 꿈이 산산조각 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자신의 인생은 완전히 무너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감옥은 요셉의 인생을 무너뜨리는 곳이 아니라 요셉의 인생을 멋지게 세워주는 곳이었습니다. 감옥은 요셉의 꿈이 무너지는 곳이 아니라, 꿈을 이루는 구체적인 장소가 되었습니다. 남들이 가기 싫어하는 그 감옥이 요셉에게는 오히려 가장 안전한 기도의 골방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깨닫습니다.
‘나는 이 곳에서 망하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이곳에서 당신의 꿈을 이루고 계셨구나.’ 훗날 이 놀라운 계획을 발견한 요셉은 형님들을 만났을 때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창세기 45:8입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이 말은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내 인생의 크고 작은 모든 일,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이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바닷가에서 인명구조대원으로 일하는 사람에게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철썩거리는 파도소리,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 웃음소리, 고함소리가 어우러져 시끄러운데 물에 빠져 살려달라는 사람의 절규와 비명소리를 어떻게 들을 수 있습니까? 저렇게 파도를 타며 즐기는 수많은 손길들이 있는데 살려달라는 애원하는 손길을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 기뻐서 재잘대는 소리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비명소리는 분명히 다릅니다. 수영하는 아름다운 손들과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허우적대는 손길은 분명히 다릅니다. 나는 분명히 들을 수 있고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짖는 우리의 기도를 똑똑히 들으십니다.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우리의 손짓을 분명 보십니다.
여러분,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살려 달라고 애원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내 민족을 살려주시옵소서. 한국교회를 버리지 마시옵소서. 성령을 거두지 마시옵소서. 잠자는 내 민족을 깨워주시옵소서. 잠든 심령들을 깨워주시옵소서. 우리 교회를 살려주시옵소서. 내 자식을 살려주시옵소서. 하나님 나를 살려 주시옵소서. 하나님 외롭습니다. 도울 사람 없어 외로웠습니다. 지쳤습니다. 세상에 도움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어느 누구 하나 내 손을 잡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를 살려주십시오.”
우리가 부르짖고 허우적거릴 때에 하나님은 내 손을 똑똑히 보시고 내 기도를 똑똑히 들으십니다.
이렇게 부르짖어 기도하고 하나님의 크고 은밀한 일들을 얻는 기도전략을 예레미야 33장 3절에 근거하여 333전법이라 합니다. 이 333전법이 여러분의 인생의 전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아무도 희망을 선포해 주지 않을 때, 돌파구와 비상구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세상 모든 사람이 죽게 생겼다고 말할 때, 그래도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붙들고, 희망을 붙들고, 아직도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고 선포하는 사람, 그가 바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는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란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을 때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하나님과 한 팀이 되어서 내 인생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 가는 것이다.”
맞습니다. 하나님 앞에 두 손 뻗었을 때, 하나님이 내 손을 붙들어 주시고, 하나님과 한 팀이 되어서 아무리 크고 어려운 문제도 아무리 얽힌 문제도, 쉽게 해결하는 능력, 그것이 기도입니다.
지금 자녀문제로, 가정문제로, 직장문제로, 사업의 문제로 아파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서서 쩔쩔매시는 분이 계십니까? 지금이야말로 부르짖어 기도해야 될 때입니다. 문제는 내 앞에 있는 풍랑이 아니라,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직도 여러분의 경험을 의지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지식을 의지하시겠습니까?
썩은 새끼줄 같은 세상 줄을 붙들고 살아가시겠습니까? 그것들을 놓을 때에 우리는 생명 줄을 붙들 수 있습니다. 기도의 줄을 붙들 수 있습니다. 전능한 하나님의 손을 붙들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크고 은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꿈도 꾸지 못했던,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놀라운 계획, 크고 은밀한 일들을 여러분 앞에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를 축복합니다.
예레미야 33:6입니다.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6절은 “그러나” 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4~5절은 하나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났을 때, 그들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마음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6절부터는 새로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러나”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제 치료가 선포됩니다. 용서가 선포됩니다. 회복과 영광이 선포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심판과 멸망이 부르짖는 기도를 통하여 위대한 반전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파괴되고 멸망을 당했지만 하나님은 이 성을 회복하고 다시 찾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용서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배신하고 떠났다가 병들어 돌아온다 할지라도 나는 너희를 건강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나를 버리고 도망갔다 실패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할지라도 나는 너를 성공으로 도와줄 것이다. 나의 풍요로운 세계를 떠나서 거지로 돌아온다 할지라도 나는 너를 내 아들로 인정하여 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6절의 하나님은 고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이어지는 예레미야 33:7입니다.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이 포로가 되어 붙잡혀 갔다 할지라도, 다 잃어버리고 빼앗겼다 할지라도 그들을 다시 세우고 축복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7절의 하나님은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크고 은밀한 계획입니다.
오늘 실패와 절망의 걸음으로 주님 앞에 나오신 분 계십니까? 사업이 어려우십니까? 자녀들의 방황 때문에 고민이 되십니까? 인간관계가 깨어지셨습니까? 사랑에 실패한 분이 계십니까? 가정에 어려움 때문에 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지울 수 없는 마음의 고통 때문에 오신 분이 계십니까? 영적으로 유약한 자신의 모습을 보며 가슴 치며 나오셨습니까? 하나님은 당신 앞에 나오면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7절의 하나님은 회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레미야 33:8입니다.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8절의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큰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세상 그 누구도 용서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 시간 돌아오기만 하면 내가 너희를 용서하리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회복의 클라이막스는 9절입니다. 예레미야 33:9입니다.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며 찬송과 영광이 될 것이요 그들은 내가 이 백성에게 베푼 모든 복을 들을 것이요 내가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모든 평안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며 떨리라.”
하나님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났던 백성들이 다시 돌아오면 “너희들이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칭송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조롱했던 이방 백성들이 이제 너희를 바라보며 두려워 떨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야베스의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역대상 4:10입니다.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야베스는 그의 어머니가 아주 고통스러운 가운데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야베스는 어쩔 수 없이 고생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고, 무거운 고통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적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야베스는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었습니다. “하나님 나는 운명의 노예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 영향력 있는 인물로 살아가겠습니다. 내 지경을 넓혀 주시옵소서. 환난과 근심의 멍에를 지고 살아가는 백성으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영광의 선물이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야베스의 기도를 응답하셨습니다. 기도는 운명을 바꿉니다. 팔자를 바꾼단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시나리오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여러분 한분 한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내 인생의 분명한 목적이 내게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만 하면 그 목적을 이루도록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십니다.
18세기, 영국이 산업혁명으로 물질적인 풍요를 누릴 때, 영국은 윤리적으로 영적으로 타락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이 때, 시골에서 런던으로 올라온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가게에 취직을 해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침마다 골목을 청소하기 위해 가게 문을 열 때마다 지난밤의 광란이 지나간 거리를 바라보면서 마음 아파했습니다. 어린 소년은 하나님을 향하여 울며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살아 계십니까? 런던 거리에 희망이 있습니까?”
그는 시편 5:3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아침마다 빗자루를 들고 거리를 쓸기 전에 하나님 앞에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빗자루로 쓰는 것은 런던 거리지만, 이 민족의 영적인 쓰레기를 치우는 내가 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이 도시를 깨끗하게 하는 청소부가 아니라, 이 백성의 영혼을 청소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내가 복을 받아서 내가 받은 복으로 이 도시를 살리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 나를 영향력 있는 인물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내가 변화되어져서 이 영향력으로 이 시대를 살리는 인물이 되고 싶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그의 영향력이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은 당대의 영적인 거성, 산업혁명시대 영국을 살려냈던 인물, 구세군의 창설자 윌리엄 부스 였습니다.
예레미야 31 -33장 메튜헨리 주석
예레미야 31장
Ⅰ. 평화와 기쁨에 대한 약속 31:1-9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보증하신다.
(1) 하나님께서 그들과 다시 계약 관계에 있으실 것을 보증하신다. 그는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는 자녀들로 인정하실 것이다. 내가 이스라엘 모든 가족의 하나님이 되고(1절). 즉, 내가 그들에게 하나님됨을 스스로 나타내리라는 의미이다. 단지 두 지파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모든 지파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말씀이다. 또한 전체로서의 국가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집안의 가족 하나 하나의 하나님이 되시며 그들의 산업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 아래서 은혜를 입을 것이다. 만일 우리와 우리의 집안이 여호와를 섬기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받게 된다(잠 3:33).
(2)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벨론에서 인도해 내실 것을 보증하신다. 그는 옛적에 저희 열조들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셨을 때와 같이 역사하실 것이다.
1) 하나님께서는 저희 열조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을 때 무슨 일을 하셨는지 저희에게 상기시켜 주신다(2절). 그들은 그때에, 지금 이들과 마찬가지로, 애굽의 칼날 아래 목숨이 맡겨져 있었다. 즉, 태어나자마자 사내아이들을 멸절시켜 버리는 바로의 칼날 아래에 있었다. 그들은 그때에 '광야에' 있었으며 잃어버려지고 잊혀진 듯이 보여졌었다. 곧 지금 이들이 낯선 이방 땅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의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입어, 그에게 속한 바 되고 크게 영예롭게 되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가나안에서 '안식을 얻게 하려'하셨었다. 그리고 그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신 분이시다.
2) 그들은 하나님께서 저의 열조들에게 하신 일을 하나님께 상기시키신다. 이는 자기들이 그러한 표적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들은 기드온이 일찍이 하였던 그 물음을 묻고자 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들려 준 모든 표적이 지금 어디 있나이까?" 옛 시절들은 영화로운 시대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께서 현재 우리에게 모습을 감추고 계시는데, 옛적에 우리에게 나타나셨던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사 45:15).
3)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이 변함없음을 확증해 주신다.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옛적의 사랑으로서 사랑할 뿐만 아니라 '무궁한 사람으로' 사랑하신다. 잠시 그 위로를 보류할 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시들어질 수는 없는 사랑이다. 아무것도, 그들을 그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러한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그들을 이끌어 자신과 계약 관계에 있게 하시고 교제하게 하실 것이되 그의 성령으로 그들의 영혼을 감화시키심으로써 그렇게 하실 것이다.
(3) 하나님께서 그들을 한 민족으로 이루시고 조국 땅에서 기쁘게 정가하게 하실 것임을 보증하신다(4,5절). 그들은 이제 버드나무에 걸어두었던 수금을 다시 연주하게 되며 그것을 켜기 위하여 조율을 할 것이다. 성읍의 즐거움은 농촌의 산물의 풍성함에 달려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이 약속되고 있다(5절).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원을 심되. 사마리아는 유다 왕국의 수도와 대립되는,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그들은 연합하게 될 터이었다(겔 37:22). 그리고 그곳에는 사람들이 땅을 경작하는 일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을 정도로 평화와 안전이 보장될 것이다. 심는 자가 심고 그 과실을 먹으리라. 그들은 자기들이 심은 것의 산물을 취하러 군대가 올까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유로이 마음껏 '그 과실을 먹을' 것이다.
(4)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에 따라 예배하는 자유와 기회를 갖게 되리라고 보증하신다(6절). 날이 이를 것이라. 그 날은 영화로운 날이 될 것이다. 적군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하여 파수보도록 세워진 '에브라임 산 위의 파숫군'이 주위가 고요하며 어떠한 위험의 기식도 없으므로 교대할 시간만 기다리게 될 것이다. 그래야만 자기들이 '시온에 올라가서' 공중의 안녕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이것이니, 곧 '에브라임 산 위의 파숫군'들이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재촉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와는 반대로 예전에 그들은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었었다'(호 9:8). 그리고 시온에 올라가자고 사람들을 청하기는커녕 예루살렘을 앙모하는 자들을 비웃었었다(호 5:1).
(5) 하나님께서 찬양을 받으시며, 그 복된 변화의 영예와 위로인 교회가 서게 될 것이라고 보증하신다(7절). 야곱을 위하여 기뻐 노래하며. "이스라엘의 모든 친구들과 우방들로 하여금 이스라엘과 함께 즐거워하게 하라"(신 32:43).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롬 15:10). 전파하며 찬양하며. "이 소식을 전함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찬양하라. 또한 그 둘 모두를 영화롭게 하라."
(6)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고국 땅에서 복된 정착을 하기 위하여 포로된 땅에서부터 기쁘게 귀향하리라고 보증하신다(8,9절).
1) 비록 그들이 아무리 먼 원방으로 흩어져 있다고 해도, 그들은 '북편 땅에서, 곧 땅 끝에서부터'함께 모이게 될 것이다.
2) 비록 그들 가운데 많은 무리가 여정길에 오르기에 어려우이 많을지라도, 그 장애 요소들이 그들을 가로막지는 못할 것이다. '소경과 절뚝발이'가 올 것이다. 그들 모두는 그러한 선한 의지와 선한 마음으로 여행길에 오르게 될 것이다. 그들의 눈먼 것이나 다리저는 것이 그곳에 남아있을 이유가 되지 못할 것이다. 동무들이 그들을 도와 소경에게서는 눈이 되며 절뚝발이에게는 다리가 되어 줄 것이다. 이와 같이 선한 그리스도인들도 하늘로 가는 여정길에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욥 29:15).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실 터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자들은 자신이 소경이라고 탄원하지 아니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힘이 되어주시는 자들은 자신의 절름거림을 하소연하지 않을 것이다. '잉태한 여인'은 몸이 무거워 그와 같은 여행길을 떠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해산하는 여인" 역시 그에 못지않게 부적합하다. 그렇지만 시온으로 향하는 귀향길에 오를 때, 어떠한 장애 요소도 어려움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우리는 가지 못한다는 어떠한 하소연거리도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를 부르시는 바로 그분이 우리를 도우시며 힘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들은 포로 생활로 신음하고 있을 때보다도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는 때에, 죄로 인한 더 큰 쓰라림과 온유함으로 울게 될 것이다. 기도는 항상 눈물을 닦아주는 힘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은혜로 그들을 인도해 내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통과해야 할 땅이 마르고 건조한 땅인가? 내가 그들로...하숫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이것은 여름철에는 메마르곤 하는, 그러한 물가가 아니다. 그들이 지나가야 할 곳이 길도 없는 광야인가? 내가 그들로...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그리하여 그들은 길을 잃지 않게 될 것이다. 그곳은 거칠고 바위 투성이인 땅이던가? 하나님은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않게'하리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분명한 부르심으로 부르신 곳이며 어디로 부르셨든지 그는 그들을 위하여 길을 찾으시거나 혹은 예비하여 만들어 주신다. 하나님께서 왜 그의 백성을 이 모든 배려로 돌보시는지 그 이유가 주어지고 있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그러므로 저를 돌보실 것이다(시 103:13).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아이라고 불리울 자격도 없는 에브라임이 특별한 총애를 받을 뿐 아니라 야곱의 축복을 유업으로 얻을 '장자'로 인정되어질 것이다.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실 때에 주어졌던 같은 이유가 바벨론에서의 그들의 해방에 대해서도 역시 주어지고 있다. 그들은 자유자로 태어났으며 그러므로 노예가 되어서는 아니되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로 태어났으므로 사람들의 종이 되어서는 아니되었다(출 4:22,23).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 아들을 내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Ⅱ. 슬픔의 종식에 대한 약속 31:10-17
자기 백성에 관한 하나님의 사랑의 취지가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열방이 들어야만 하는 '여호와의 말'이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역사하심에 대한 예언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 세계에 퍼지게 될 소식 중의 한 부분일 것이었다. 예언되고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흩어져 있는 자들이 그 흩어진 곳에서 모두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10절). 그리고 그가 그들을 무리로 모으실 때, 다시는 흩어지지 않도록 '목자가 그 양무리에게 행함같이 그를 지키실' 것이다.
(2) 팔려가 따로 떨어져 있는 자들이 구속되어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다(11절). 비록 대적이 저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보다 강한'여호와께서, 즉 만유 중에 가장 강하신 그가 저를 '속량하시고 구속하실'것이다. 이는 값을 치르고 사는 것이 아니라 권능으로 하시는 것이다.
(3) 그들은 자유로이 풍요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영화롭게 되실 것이다(12,13절). 그들은 고국 땅으로 돌아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할' 것이다. 그 거룩한 산의 꼭대기에서 하나님께 찬미와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노래할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 성전의 토대가 닦여졌을 때 그들이 그렇게 했음을 읽게 된다(스 3:2). 여호와의 은사...에 모일 것이라. 즉, 여호와의 선하심, 다시 말하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선을 베푸시는 성전에 큰 무리를 이루어 양떼같이, 그리고 물줄기가 흐르는 듯한 큰 기쁨으로 모일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선하심을 인하여 찬양하고, 그 선하심을 지속시켜 주실 것을 기도하기 위하여 경건한 회중과 함께 모일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를 주시는 여호와의 선하심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기 위하여 올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제단 위에 드리기 위하여 제물로 가져오는 첫 열매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성령과 은혜라는 이슬로 흠뻑 젖은 동산과도 같다. '그들이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씀은 참으로 귀중한 약속이다. 이는 오로지 '모든 눈물이 그 눈에서 씻겨지는' 새 예루살렘에서의 일이다(계 21:4). 하지만 귀향한 포로들은 그들이 예전에 가졌던 그러한 슬픔의 요인들을 더 이상 갖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때문에 '청년과 노인이 함께 즐거워할' 것이다.
(4) 사역자들과 그 사역의 대상자들 모두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것에 풍성한 만족을 얻게 될 것이다(14절).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심령에 흡족케 하며. 즉 제단으로 생계를 의지하는 자신의 들이 안락하게 살 수 있을 정도로 제단에 바쳐지는 희생 제물이 풍성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제사장들과 그 가족들은 '기름으로 흡족케' 될 것이다. 내 은혜로 내 백성에게 만족케 하리라.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즐기는 영적인 축복들에도 적용된다. 그것이야말로 곡식이나 포도주나 기름보다도 궁극적으로 더 귀중한 것이다.
(5) 특별히 자녀들이 포로로 잡혀감으로써 그들을 잃은 슬픔에 잠겨있는 자들은 그 자녀들이 돌아옴으로 말미암아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리라고 예고된다(15-17절). 라마에서...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두루 포로로 잡혀갔던 그때에는 '슬퍼하며 통곡하는 수리'만이 가득하였었다. 라마의 통곡 소리가 다른 곳보다 더 심했던 것은 그곳이 느부사라단이 포로들을 집결시킨 집결지였던 까닭이다. 이것은 40:1에 나타난 대로인데, 거기에서 예레미야는 석방되었었다. 본문에는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 지파 가운데 하나인 베냐민과 열 지파의 우두머리되는 에브라임은 둘 다 라헬의 후손이었다. 그녀는 단지 이들 둘을 두었을 뿐이며 그 둘가운데 맏아들은 그 부친이 슬퍼하여 '위로를 받기'를 거절한 한들이었다(창 37:35). 다른 아들도 어머니가 '베노니'라고 이름 지었었는데, 이는 나의 슬픔에 아들이라는 뜻이었다. 이제 라마에 거사는 자들은 같은 방식으로, 포로로 잡혀간 '각기의 자녀를 위하여 슬퍼하고'있었다(삼상 30:6). 마음이 모질지 못한 부모들은 위로받기조차 거절하고 있었다. 이는 자식들이 대적들의 수중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 자식들을 다시는 볼 수가 없을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것을 복음서 기자들은 베들레헴에서 헤롯이 어린아기들을 학살함으로 일어난 큰 애곡에 적용한다(마 2:17,18). 그리고 그 말씀은 그때 성취되었다고 말해진다. 비록 우리가 슬프다 하더라도, 속으로 속삭이듯 하지는 말아야 한다. 큰 슬픔을 누르려면, 종국에는 소망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즉 고난이 끝까지 계속되지 않으리라는 소망, 복된 결말로 끝나리라는 소망, 다시 말하여 종말은 평안이라는 생각을 품어야 한다. 설혹 한 세대가 광야에서 죽는다고 해도 다음 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이다.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역경을 주신 날수만큼 기쁨을 허락하신다. 그리하여 기쁨과 슬픔 사이에는, 수고와 보상의 관계처럼, 균형이 있다(8;18). 죽음으로 인하여 떠나간 자녀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경내로 돌아오리라'는 소망이 있으니, 이는 부활로 주어지는 복된 몫이다. 곧 하나님의 성소라를 경내, 하늘의 가나안 땅으로의 귀향이다.
Ⅲ. 회개와 용서에 대한 약속 31:18-26
(1) 에브라임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다.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에브라임 곧 그의 백성은 회개함에 있어서 한 사람인 양 일심으로 단합할 것이다. 에브라임은 여기에서 죄로 인하여 울고 있다. 아마도 그들이 에브라임이라는 명칭을 따온 조상 에브라임은 다정한 마음의 소유자였던 듯하다. 그는 그의 자녀를 위하여 '여러 날 슬퍼하였었다'(대상 7:21,22). 그리고 죄로 인한 슬픔은 독자를 잃은 슬픔에 비유되고 있다. 그는 징계 받는 고통 가운데서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다.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내가 멍에 아래 있사오며, 그 벌을 받아 마땅하나이다. 내게는 그것이 필요하나이다. 나는 공의로이 징계받았으며 송아지같이 징벌을 받았나이다. 송아지가 멍에를 매지 않으려고 처음에 반항하지 않았다면 매를 맞지 않았으리이다." 이것이 지금 그가 깨닫고 있는 자신의 죄이다(19절).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젊은 날에 지었던 되까지 기억한다. 곧 '어렸을 때의 치욕'이다. 그는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에 대해 스스로 분개하여 화내고 있다. 그는 세리가 가슴을 쳤듯이 자신의 '볼기를 쳤다.' 그는 자신의 우매함과 완고함에 놀라기까지 하고 있다. 또한 그는 자신이 '부끄럽고 욕되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도 없음을 안다. 그는 하나님께 반역하였었으나 이제는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며, 그리하여 이렇게 기도한다.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렘 17:14). 그는 이제 하나님의 은혜의 복된 결과를 체험하게 되었음을 기뻐하고 있다.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 우리 심중에 있는 하나님께 향하는 모든 경건한 역사들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신 결과이다. 죄인들은 올바른 지식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된다. 에브라임은 징계를 받았었으나 바람직한 결과가 나오지 아니하였었다. 그것으로 끝났을 뿐이었다.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신의 교훈이 섭리하사 징벌로 바로잡는 일을 수행하셨을 때 회개의 역사는 이루어졌다.
(2)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을 긍휼히 여기시며 에브라임은 하나님께서 자비로이 용납하심을 깨듣는다(20절). 비록 에브라임이 의무를 수행하지 않은 불충한 자녀요 탕자에 불과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자녀로 인정하신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이제 에브라임은 회개하고 돌이켰다. 내가...그를 깊이 생각하노라. "저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평강의 생각이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역경 가운데 놓으실 때, 그는 그들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 그가 그들을 고국 땅에서 내쫓을 때, 그는 그들을 보지 않으신 바도 아니요, 잊어버리신 바도 아니었다. 에브라임의 징벌을 완화시킨 것은 하나님의 연민이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선다'(호 11:8,9). 그리고 이제 같은 연민으로 그는 에브라임의 회개를 받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에게 선을 베푸시리라고 결심하신다.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3) 바벨론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고국 땅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라는 은혜로우신 격려가 주어진다. 그들은 두려워 떨며 정신잃은 사람처럼 행동해서는 아니되었으며 사소한 말다툼으로 시간을 허비해서도 아니되었다. 오로지 굳게 결심하고 전념하여 귀향길에 오를 준비를 하느라 권면의 말씀이 줘지고 있다(21,22절). 처내 이스라엘아...돌아오라. "너희 하나님과 다시 정혼하게 된 처녀 이스라엘아."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비록 그 성읍들이 황폐해지고 부서져 폐허같이 되었다고 하나, 그것은 '네 성읍들'이라.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성읍들이라. 그러므로 다시 그곳으로 돌아오라." 그들은 사로잡혀 왔던 그 길로 다시 돌아 가야 한다. 그리하여 예전의 슬픔을 기억하게 될 것이며 그들의 부친이 무슨 말을 해주었었는지를 회상하게 될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저희의 구속에 대하여 더욱더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죄의 멍에를 메고 떠나갔던 자들은 저희가 소홀히 간과하였던 임무로 돌아와야 한다. 곧 '대로에 착념해야'한다. 바벨론에서 시온으로 가는 길, 죄의 구속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스러운 자유를 얻는 길이 곧 대로이다. 그렇지만 그 '길에 착념하지' 않고는 누구도 그 길을 걸을 수 없을 것이다.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고. "길을 잃을 위험이 있는 곳마다 그러한 것을 세워 두도록 하라. 그 길을 가장 잘 아는 자들을 먼저 앞서 보내고, 뒤따라 올 자들을 위하여 그같은 표지판을 세우게 하라."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그들의 마음이 변덕스럽거나 불확실해서는 아니된다. 근심과 두려움으로 곁길로 나아가서는 아니되며 자신들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그리고 저희의 마음을 하나님께 흔들림없이 붙들어 매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주신 보증을 통하여 이 일을 행하도록 격려받고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는 것이다. 여자처럼 약하고 힘이 없어 군사로 부르심 받기에 부적합한(사 54:6) 하나님의 교회가 강한 남자를 포위하여 승리하게 되리라는 말씀이다. 교회는 여자에 비유되고 있다(계 12:1). 그리고 '성도들의 진을 두르는'(계 20:9) 군대들에 대해 보게 되거니와, 이제 성도들의 진이 그 군대를 두르게 될 것이다. 많은 유명한 성경 해석자들은 이 '새 일'을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해석한다. 이에 대한 징조가 때때로 그들에게 주어지곤 했었다(사 7:14;9:6). 한 여자, 곧 동정녀 마리아는 자신의 태로 '전능자'를 둘러 쌌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사용된 단어 게베르(Geber)는 전능자를 뜻하며, 하나님은 기보르(Gibbor), 곧 '능하신 하나님'(렘 32:18)으로 불리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서 9:6에서 그리스도 또한, 그렇게 불리우고 있다. 그는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4) 그들이 고국 땅에서 다시 복되게 정착하리라는 약속이 주어진다. 모든 이웃들이 그들에게 좋은 권면을 줄 것이며 그들을 위하여 축복 기도를 해줄 것이다(23절). 비록 유다와 예루살렘이 오랫 동안 조롱거리가 되어 왔지만 '그들은 유다 땅과 그 성읍들에게 다시 이 말을 쓰리니 곧 의로운 처소여, 거룩한 산이여, 여호와께서 네게 복주시기를 원하노라'라는 말이다. 이것은 그들이 많이 개선되어서 돌아오게 되리라는 것, 그리고 이 개선된 변화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주목할 만큼 그렇게 현저하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약탈자의 소굴이었던 그 성읍들은 '의로운 처소'이자, 이스라엘의 산이 될 것이며, 특히 시온산은 '거룩한 산'이 될 것이다. 그들 가운데 넘치는 풍요함이 있으리라는 약속이 주어지고 있다(24,25절). 유다가 지금은 오랫 동안 황폐해져 있지만, 옛적에 가인과 아벨의 명예로운 직책이었던 '농부와 양떼를 인도하는 자'가 유다에 함께 거하게 될 것이다(참조. 창 4:2). 이는 내가 그 피곤한 심령을 만족케 하며 무릇 슬픈 심령을 상쾌케 하였음이니라. 포로 생활 가운데 오랫 동안 슬픔으로 지내왔던 자들이 이제는 넘치는 풍요를 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진정한 회개자들을 위하여 예비해 두신 영적인 축복에도 적용되어진다.
(5) 선지자가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기쁨을 우리에게 전해준다(26절). 내가 깨어보니. 즉 "기쁨에 넘쳐서 저절로 깨어나게 되었노라. 또 내 꿈을 곰곰 생각해 보니 그러한 꿈으로 말미암아 '내 잠이' 달았노라." 그리고 깊은 수면을 취한 자들과 같이 상쾌하게 되었다.
Ⅳ. 후손의 번성과 새 언약에 대한 약속 31:27-34
또 다른 약속들이 여기에서 주어지고 있다.
(1) 하나님의 백성은 수가 번성할 뿐만 아니라 번영을 누리게 된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인구와 가축 모두가 풍성하게 될 것이다(27절). 이것은 복음 교회가 놀랍게 증진할 것에 대한 예표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시고 심으실 것이다(28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선을 베푸시기 위하여 '경성하실' 것이다. 오랫 동안 만사가 그들에게 불리하게 전행되었었고, 그것은 마치 여호와께서 '경성하여 그들을 뽑으며 훼파하는'듯하였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은 그들의 이익을 복되게 강화시켜 주고 증진시켜 줄 것이다.
(2) 그들은 저희 조상들의 죄로 인하여 더 이상 헤아림 받지 않게 될 것이다(29,30절). 우리 주님께서는 주님의 때에 살던 당시의 악한 유대인들이 그들의 조상의 죄로 인하여 징벌받으리라고 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그 죄를 고집하였기 때문이다(마 23:35,36). 그러나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들의 조상의 죄로 인한 벌을 내리지 않으시며 저희 조상과 맺었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언약대로 선을 베푸시리라는 약속이 여기에 주어진다. 이제까지 불평해 왔던 대로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하지 아니 하리라.'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 그는 자신을 진노케 하는 사람들 개개인에게만 벌을 내리실 것이다.
(3)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계약을 다시 맺으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섭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약속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축복들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계약은 장차 올 훗날, 즉 복음 시대를 가리킨다. 사도는 이를 복음의 은총으로 이해했었다(히 8:8,9등). 히브리서에서는 이 전체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들과 맺어질 은혜의 계약의 요점으로 인용되고 있다. 이 계약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 곧 복음 교회요, 평강이 있을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과 더불어 맺어질 것인데,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함은 곧 믿음의 아브라함과 기도의 야곱을 잇는 영적인 자손들을 말한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분리된 두 왕국을 이루고 있었으나 돌아온 후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시는 은혜로운 결합으로 하나가될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도 복음의 교회와 언약 안에서 하나가 된다. 이것은 '새' 언약'이며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한' 것이다. 규례와 약속은 더욱 영적이고 신성해지며, 나타나는 일들은 더욱더 분명해진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그들이 소경이요 절름발이요 연약한 자이기나 하듯이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때에 한 언약을 세우셨으나, 그들은 그 '언약을 파하였다.' 그 언약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요, 그것을 파기한 것은 백성들이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나며 우리의 죄와 멸망할 것은 우리 자신들에게서 나기 때문이다. 그의 언약의 구체적인 항목 하나하나는 모두 영적인 축복들을 담고 있다. "내가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고 갖가지 축복들을 허락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에게 용서와 평안과 은혜와 선한 생각과 선한 마음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는 그들이 저희 의무를 기꺼이 수행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그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과 관계를 맺게 하겠다고 하신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에게 온전히 충족하신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은 그에게 충성하며 순종하는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올바르게 아는 자는 그를 찾고, 섬기며, 그를 의뢰할 것이다(34절). 그들이 '다 나를 앎이니라.' 모든 자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초대를 받고 그를 아는 방법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오랫동안 하나님이 유대에만 알려졌었지만 이제 하나님을 아는 길이 온 땅에 알려질 것이다. 제사장들은 이따금, 성전에서 비교적 적은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쳤었다. 그러나 이제 모든 사람들이 빈번히 모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집회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거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여러 기관 내지 부분들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들이 가르쳐질 것이다. 간략히 말하여 하나님께 속한 것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하여 이전보다 더욱 밝히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딤후 1:10).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러한 것들을 이전보다 더욱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엡 1:17,18). 죄는 용서받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다른 축복들의 이유가 된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즉 "용서하고 잊어버리라."
Ⅴ. 예루살렘의 재건에 대한 약속 31:35-40
여기에서 우리에게 보증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항은 세상이 존속되는 동안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교회를 유지하시리라는 것이다. 설혹 때때로 교회가 아주 열세에 처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다시 일어날 것이며 교회의 권익이 새롭게 확립될 것이다. 교회는 반석 위에 세워진 연고로 음부의 권세가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 세상을 지으신 것과 그 세상의 확고함은 자기 교회를 설립하신 하나님의 권능과 신실함에 대한 증거가 된다.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히 3:4). 자연계라는 왕국의 지속성은 은혜의 왕국의 영광의 지속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도록 우리를 격려해 준다.
1) 자연의 왕국의 영광 : 여호와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었고(35절). 그는 처음에 그렇게 되도록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되게 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태양의 빛과 열, 그 모든 영향력을 계속적으로 그것을 만드신 위대한 창조주를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규정하였고. 그들의 움직임이 '규정'되었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는 그것이 규칙적이며 법칙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이다(참조. 욥 38:31-33). 바다의 움직임을 주목하고 그 드센 파도를 저지시키는 힘을 기억하자. 여호와께서 '바다를 격동시켜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며' 그 파도가 요동할 때에 잠잠하게 하신다(혹자는 이렇게 이해하기도 한다). 하늘의 광대함과 그 궁창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광범위함을 주목하자. '위로 하늘을 측량할 수 있는'자가 없다(37절). 그 무한한 궁창을 하나님께서만 충만하게 채우신다. 우리의 운명이 속한 이 창조의 세계의 신비를 주목하자. 이 모든 것들이 불변하는 확고함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주목하자(36절).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을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이다'(시 119:90,91). 하늘에는 종종 구름이 끼며 해와 달은 자주 구름에 가리우기도 한다. 땅은 흔들리기도 하고 바다는 요동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제 자리를 고수하면서 움직이며, 그 경로를 벗어나지 않는다.
2) 은혜의 왕국의 확고 부동성 : "이스라엘의 자손이 폐하지 않고 영영히 나라를 이루리라"(참조. 벧전 2:9). 육에 속한 이스라엘이 더 이상 나라가 되지 못하면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롬 9:8). 그리고 설혹 그들이 매우 악하게 행하였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다(37절). 교회를 보전하시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우리의 도움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의 이름에 있으며, 그는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돌보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자신이 영광받으시도록 계획하셨다. 그가 영광을 받으시는 길은, 이 세상 가운데 교회를 두시고 그의 이름을 찬양할 백성을 확보하시는 것 외에 달리 없다. 만일 창조의 질서가 태초에 확고하게 세워졌기 때문에 지금도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면, 그리고 변경될 어떤 필요성도 없기 때문에 변경되지 않고 있다면, 같은 이유로 은혜의 방법도 처음에 정해진 대로 변치않고 지속될 것이다. 자신을 위하여 교회를 보존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확고함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스스로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시다.
(2) 지금 황폐한 예루살렘의 중건은, 하나님께서 복음 교회, 곧 하늘의 예루살렘을 위하여 행하실 위대한 역사에 대한 확실한 전조 혹은 보증이 된다(38-40). 비록 오래 걸릴지는 몰라도, '날이 이를 것이다.' 그것은 예루살렘이 예전과 같은 크기로 완전하게 다시 세워지는 때이다. 과연 느헤미야가 세운 성벽은 이 에언을 정확하게 성취하여, 여기에서 언급된 대로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느 3:1). 그리고 비록 본문에서 '모퉁이 문과 가렙산'이라고 일컬어진 곳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라고 결론내릴 수는 없지만 여기에서 언급된 만큼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성전이 하나님께 봉헌되고 예배드릴 수 있도록 완성되었을 때(38절). 그 주위와 인접한 들까지도 '여호와의 성지'가 될 것이다. 이전과 같이 온 성읍이 곧 성전이 되며 거룩한 곳이 된다. 새 예루살렘은 이같이 성 자체가 곧 성전이므로 별도로 성전이 필요없게 된다. 이 성읍은 오래 지속될 것이다. 옛 성읍이 다윗왕 때로부터 포로되기까지 오랫 동안 유지되었듯이 새 성읍도 그들의 귀향때로부터 이대로 마지막 멸망 때까지 오랫 동안 유지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약속은 복음의 교회에서 온전히 성취되어졌다. 그 교회는 영적인 이스라엘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멸하지 않으신다. 또한 교회는 거룩한 성이므로 인간의 모든 힘에 의해서도 '다시는 뽑히거나 전복되지 아니할' 것이다
예레미야 32장
Ⅰ. 예레미야의 투옥과 밭의 매매 32:1-15
갈대아 군대에 의한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이 점차로 임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려고 나아오실 때에 회개로 그를 맞으려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황폐하게 되기까지 심판을 진행하셨는데 그 멸망은 시드기야 11년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여기에 기록된 사건은 제 10년에 이루어진 일이다. 바벨론 군대의 왕이 예루살렘을 이미 침략하였고 강력한 기세로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1) 예레미야는 도성과 궁성 모두가 바벨론 왕의 수중에 떨어지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는 이 성의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이 성을 그들에게 내어주시며 아무런 보호도 하지 않으시리라고 그들에게 말한다(3절). 그리고 설혹 시드기야가 도피하려고 하여도 그는 사로잡힐 것이며 느부갓네살의 손에 죄수로 넘겨지리라고 말한다.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이 자기에게 운명의 심판을 내리는 소리를 들을 것이며 크게 분노하며 자기를 내려다 보는 것을 보게 될 터이었다. 눈이 서로 볼 것이며(3-5절). 시드기야는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며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권고할 때까지 비참한 포로 생활을 계속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자연적인 죽음을 통하여 거두어 가시기까지 계속 그곳에서 살게 될 것이다. 이는 느부갓네살이 그보다 앞서 그의 눈을 뽑아 빛을 뺏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2) 이 예언으로 인하여 예레미야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곳은 일반적인 감옥이 아니라 '유다 왕의 궁중에 있는' 감옥이다. 그곳에서 그는 좁은 공간에는 갇히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그곳에서 그는 군중들의 공격으로부터 차단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감옥이었으며 시드기야는 그가 한 예언으로 인하여 그를 그곳에 가둔 것이었다(2,3절). 그는 예레미야 '앞에서 겸비치 아니하였으며'(대하 36:12) 마음을 강퍅케 하였다. 비록 그가 예전에는 '자기들을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해' 주기를 바라면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인정하였을지라도(렘 21:2), 이제는 예언으로 인하여 그를 징책하고 있다(3절). 그는 예레미야를 감옥에 가두었으며 아마도 더 이상 예언하지 못하도록 제한을 가하였을 것이다.
(3) 감옥에 있으면서 예레미야는 가까운 친척으로부터 아나돗에 있는 토지를 구입한다(6,7절 이하). 전 국토가 이제 황폐해지며 갈대아인들의 수중에 들어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예레미야가 토지를 구입한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리고 비록 돈을 내버리는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그는 그 뜻에 순종하였다. 그의 친족이 그에게 와서 그 땅을 사도록 제안하였다. 그것은 예레미야 자신의 사욕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기업을 무를 권리'가 그에게 있었다(8절). 그리고 만일 예레미야가 거절한다면 그것은 친족의 임무를 행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 땅은 제사장들의 성읍 교외에 있었다. 그런데 만일 그가 사기를 거절한다면 그 같은 혼란의 틈바구니 속에서 다른 지파에게 매매될 위험도 있었다. 그것은 율법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그가 그 땅을 사는 것은 그의 친척에게도 자비로운 행동이 될 것이었다. 아마도 그 친척은 그 때에 대단한 돈이 필요했던 듯하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미리 말해 주심으로써 하나멜이 자기에게 오리라는 것을 알았을 때,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것을 구매하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그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함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고 그 밭을 샀다. 그는 돈을 지불함에 있어서 매우 정직했으며 정확하였다. 그는 '은을 저울에 달아 주었다.' 그것은 '은 칠십 세겔'이었다. 만일 우리가 그 당시에 돈이 대단히 귀중하였고 토지는 매우 헐값이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이 액수가 적은 것에 그리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그 증서를 보전하는 일에 대단히 신중을 기하였다. 그들은 '증인의 앞'에서 기록하였으며 매매 증서 한 부는 '인봉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부는 '인봉치 아니하였다.' 매매 행위는 증인들 앞에서 바룩의 손에 맡겨졌으며, 바룩은 '많은 날 동안 보존할' 수 있도록 '토기에 담아' 두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예레미야의 후손을 위한 것이었다. 이 거래의 의도는, 비록 지금은 예루살렘이 포위당해 있고, 전 국토가 황폐하게 될 것이었으나 기한이 되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함이었다(15절).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로 하여금 결혼하지 않고 살게 함으로써 예루살렘의 멸망이 임박하였다는 자기의 예언이 틀림없음을 깨닫게 하셨고, 이제는 그로 하여금 토지를 사게 함으로써 예루살렘의 장래의 회복에 대한 그의 예언의 확실성을 깨닫게 하셨다. 루키우스 플로루스(Lucius Florus)는 제 2차 포에니 전쟁 때의 로마 시민들의 용감성에 대한 훌륭한 예증으로서 그것을 연관짓고 있다. 즉, 한니발이 로마를 포위하여 곧 로마의 주인이되리라고 생각되는 바로 그 때에 그의 군대가 점령하고 있던 토지의 일부를 주인이 팔려고 내어놓자 한 시민이 즉시 그것을 샀다는 것이다. 그것은 로마 군대가 포위를 뚫고 일어서리라는 확신에서였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전부를 내걸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지 아니한다.
Ⅱ. 예레미야의 간구 32:16-25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무너뜨시리시며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일으켜 세우시기로 계획하셨음을 알게 되었을 때 선지자는 다소 곤혹을 느끼며 하나님께 기도한다. 비록 그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하긴 했어도 그 내용을 곰곰히 생각해 보고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크게 난처해 했다. 그는 이 난감함 가운데 처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로 자신의 영혼을 쏟아 놓는다. 예레미야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는 고통 중에 있었으며 하나님의 섭리의 뜻에 대하여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1)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찬미하고 창조주로서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린다(17-19절).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의 특별한 뜻에 대하여 문제를 느낄 때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선하심에 대한 일반적인 가르침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 좋다. 예레미야가 여기에서 하고 있는 대로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자.
1) 하나님은 모든 존재와 능력과 생명과 동력과 온전함의 근원이시다. 그는 '큰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다.'
2) 그에게 불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주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시니이다.
3) 그는 무한한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주께서는 자비로우실 뿐만 아니라 은혜를 베푸시나이다. 몇몇 사람들에게, 이곳 저곳의 한 두사람에게가 아니라 천만인에게 베푸시는 분이니이다."
4) 그는 공평 무사하시며 불변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5) 그는 우주를 지배하시며 명령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크신' 하나님이시오, '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만군의 여호와'시니 그것이 그의 이름이다.
6) 그는 만사를 최선의 상태로 이루신다. 그는 '모략에 크시며 행사에 능하시며,' 그의 지혜의 계획은 참으로 깊고 광대하시다.
(2)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모든 행위들을 돌보신다는 보편적인 진리를 인정한다(19절). 주는...인류의 모든 길에 주목하시며. 즉, 그들이 어느 곳에 있든지 악한 자와 선한 자를 주목하시며, 그들의 '모든 길'에 대하여 무관심한 방관자가 아니라 관찰하시는 심판자로서 주목하신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발견하셨듯이 그들도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3)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예전에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크신 일들을 열거한다.
1) 하나님께서는 억압당하던 애굽에서 '징조와 기사로' 그들을 인도해 내셨다.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지킴으로써 매년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모든 주변 국가들이 그것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높인 기사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이 오늘과 같이 된 것이라고 말한다.
2)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그는 그것을 '그들에게 주시기로 그 열조에게 맹세하셨었다.' 그리고 맹세하신 대로 그것을 그 자녀들에게 주셨으므로(22절) '그들이 들어가서 차지하였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전에 자기 교회를 위하여 행하신 위대한 이들을 자주 상기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특히 그 교회를 처음에 어떻게 세우셨는지, 그 경이로운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4) 예레미야는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범죄하여 반역하였음을 슬퍼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 반역에 대해 내리신 심판을 애통해 한다. 그는 여기에서 백성들이 하나님께 행한 배은 망덕한 행위를 슬픈 어조로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하시기로 약속하신 모든 일을 행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무릇 주께서 행하라 명하신 일을 행치 아니하였다'(23절).
1) 예레미야는 현재 예루살렘이 당하고 있는 상태를 하나님의 경고와 비교해 본다. 그리고 '주의 말씀대로 되었음'을 깨닫는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에 대하여 전에 경고하신 바가 있으시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그 경고에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멸망은 방지되었을 터이었다.
2)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현재 당하고 있는 상태를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의뢰한다(24절). 대적들이 이 성을 치기 위하여 토산 흙은 흉벽을 쌓고 기관을 설치한 것을 보시라고 의뢰한다. 보옵소서...주께서 보시나이다. "이것이 주께서 주의 이름을 두시기 위해 택하신 그 성이니이까? 그것이 이와 같이 버려진바 되어야 하겠나이까?"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에 대하여 결코 불평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행해 주셔야 할지 명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저희의 처지를 바라보시기를 바랄 따름이다. 우리가 어떠한 역경에 처해 있든지 우리는 이로 인하여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으니, 곧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며 그 치료법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5)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친척의 밭을 사도록 명하신 뜻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하는 듯이 보여진다(25절). "비록 이 성이 갈대아인의 손에 붙인 바 되었음에도, 그리하여 어떠한 사람도 자신의 소유를 즐길 수 없을 듯이 여겨짐에도 주께서는 내게 밭을 사라 하셨나이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자 곧장 그대로 행했었다. 그러나 그 일을 행한 그는 왜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렇게 하도록 명하셨는지 좀 더 알 수 있기를 갈망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께 절대적인 복종으로 따르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만 그 복종이 보다 더 헤아려 깨닫는 복종이 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규례와 심판에 대해 논박할 수 없다. 그러나 물어볼 수는 있으며 또 물어보아야만 한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뇨'(신 6:20).
Ⅲ. 멸망과 구원의 메시지 32:26-44
예레미야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그의 마음을 평정시키기 위하여 주어진다. 여기에는 현 세대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목적과 장차 올 세대에 대한 그의 자비의 목적이 완전히 밝혀지고 있다. 예레미야는 자비와 심판이 어떻게 병행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이 두 가지의 병행에 대하여 가르쳐 주신다. 예레미야는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도록 명령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갈대아인들로 포위를 풀게 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졌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니라고 대답하신다. "언도된 판결은 집행되리라. 예루살렘은 황폐해지리라."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가 이 밭을 사라는 명을 받은 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모든 자비를 보류해 두셨으며, 그들은 귀향 후에야 다시 저희의 땅을 소유하게 되리라는 의미임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이 매매는 그 때에 그들에게 풍성하게 베풀어진 영적인 축복들의 상징에 불과함을 알려주신다. 그 영적인 축복들의 상징에 불과함을 알려주신다. 그 영적인 축복들은 밭이나 포도원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귀중한 것이었다. 예레미야에게 임하신 이 '여호와의 말씀'에서 우리는 얼핏 위협적인 경고를 보게되나, 다시 보면 그것은 구약성경 다른 어느 곳에서 보여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귀중한 약속인 것이다.
(1)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이 여기에서 선포되고 있다.
1)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주권과 권능을 확증하신다(27절). 나는 여호와요. "나는 자존하며 스스로 충만한 자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온 인류의 하나님이라."
2)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왕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지키신다. 내가 이 성을...바벨론 왕...의 손에 붙일 것인즉 그가 취할 것이라(28절). 갈대아인이 와서 이 성읍에 불을 놓아(29절). 그 성읍은 불에 탈 것이며 거기에 있는 집들도 모두 불에 탈 것이다. 하나님의 집도, 왕의 집도 예외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3) 이 성에 대하여 이처럼 혹독한 심판이 집행되는 이유가 설명된다. 이 성을 멸하게 만든 것은 죄이다. 그들은 철면피하게 되를 범하고 죄에 애착을 가졌다. 그들은 '바알에게 분향하였다.' 사람들이 불까봐 부끄러이 여기며 귀퉁이에서 분향한 것이 아니라 '집 곧 그 지붕에서' 그리하였다(29절). 그들은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일을 행하였다(29절). 이스라엘 자손은 그 손으로 만든 것을 가지고 나를 격노케 한 것 뿐이니라(30절). 그리고 다시 한번 말씀하신다. 그들이 '모든 악을 행하여 내 노를 격동하였음이니라'(32절). 그들은 그의 질투를 유발하고 감히 그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예루살렘 '성이 오늘까지 나의 노와 분을 격발하였다'(31절). 그들은 계속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였다. "그들은 처음에 한 백성을 이룬 이래로 예로부터 내 목전에 악만 행하였느니라(30절). 그들이 광야에서 행했던 불평과 반역이 이를 증거하느니라. 그리고 예루살렘 성은, '거룩한 성' 임에도 불구하고 '건설된 날부터 오늘까지 나의 노와 분을 격발하였느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 공적인 범죄에 가담하였으므로 공적이 멸망에 포함되는 것이 마땅하였다. 성전으로부터 반역한 '이스라엘 자손' 뿐만 아니라 성전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유다 자손'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번 되풀이하여 그들을 회개하도록 부르셨으나 그들은 안하 무인격으로 그에게 등을 돌렸다. "내가 그들을 부지런히 가르쳤도다. 일찍이 일어나 가르쳤으며 저희의 능력에 알맞게 가르치고자 고심하였으나 모든 것이 허사였도다." 그들의 우상 숭배는 하나님께 대한 불경한 모독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 자기들의 가증한 물건들을 세워서 그 집을 더럽게 하였기' 때문이다(34절). 그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극도로 비정상적인 잔인한 죄를 지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자녀를 몰렉의 불에 지나가데 하였다'(35절). 그들은 '유다로 범죄케 하였다'(35절). 온 나라가 가증한 우상 숭배와 예루살렘의 죄악으로 오염되었다.
(2) 유다와 예루살렘의 회복이 여기에서 약속되고 있다(36절 이하). 하나님께서는 심판 중에도 자비를 기억하시기 때문에 시온에게 은총을 베푸시기로 정한 때가 올 것이다. 이 백성은 오랫 동안 절망에 빠져 있었다. 심판이 앞서 경고되었을 때 그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심판이 그들을 덮친 지금,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이 성에 관하여 말하기를(36절).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인하여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인 바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 나라에 대하여 애를 태우며 이와 같이 말하였다. 황폐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없으며. 어떠한 위안도 없고 치료책도 없다. 이 땅이 '갈대아인의 손에 붙인 바 되었다'(43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로운 희망을 주신다. 비록 그들은 포로 생활 가운데 죽을 것이지만 그들의 자손들은 이 복된 땅을 보게 되며 그 땅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포로 생활로부터 돌아와 이 땅에 와서 다시 정착하게 될 것이다(37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뿔뿔이 흩으셨으며 '모든 지방'으로 쫓아 보내셨었다. 도망한 자들은 스스로 뿔뿔이 흩어졌으며 적군의 수중으로 떨어진 자들은 그 적군에 의하여 분산되었다. 그들이 결속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에 의해서였다. 하나님의 손은 그 두 경우 모두에서 역사하셨었다. 그러나 율법에 약속했던 대로(신 30:3,4)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쫓아 보내었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 낼' 것이다. 개심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때문에, 안으로 저희자신의 양심이나 밖으로 대적들이 그들에게 결코 두려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는 '내가 정녕히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고 약속하신다(41절). 그들은 그곳에서 거룩한 안전과 휴식을 누릴 터이었다. 그들은 그곳에 뿌리 박고 확고하게 심기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새로이 계약을 맺으실 것이며, 그것은 은혜의 계약, 곧 영적인 축복의 언약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영영한 언약'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40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언약에 대하여 영원히 신실하실 것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언약의 효과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 약속은 육적인 이스라엘에 속하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곧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보증된 것이다.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그 약속을 자기 자신들에게 적용할 수 있으며 그 언약으로 하나님께 간청할 수 있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하나님께서는 그들 안에서 역사하심으로써 자기 백성으로서의 특성과 기질을 부여하시고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다. "그들을 참되고 완전하게 만들기 위하여, 영원히 복되게 하기 위하여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마음을 그들에게 허락하신다(39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언약을 맺으신 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들이 자기의 위엄을 경외하며 진노를 두려워하고 자기의 권위 앞에 떨리는 마음으로 서서 경의를 표하고 자기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반복되고 있다(40절).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다시 말해서 은혜로운 원리와 특성으로 그들 가운데 역사하여 그것으로 그들의 모든 생활에 감화를 주고 다스리게 하리라는 말씀이다. 교사는 우리의 머리에 좋은 지식을 넣어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 선한 것을 넣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시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뜻을 품게 하시고 행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효과적으로 그들을 은혜 가운데 보전하시며 자기와 그들 사이에 맺어진 언약을 지속시키신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세상의 치리자들은 변덕스럽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는 영원히 불변하시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에게서 돌아서신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사 54: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때에라도 그들에게 선을 행하시고 계획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확고 불변하심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믿지 못할 것은 단지 우리 자신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실 것이다(잠 23:17). 그는 그들의 자손에게 은혜를 허락하실 것이다. 이는 그들과 그들 '후손의 복을 위함'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하여 저희 후손에게 손해가 끼쳐졌던 것과 같이 이제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 있으므로 그 후손들에게 유익이 미칠 것이다. 우리 가정에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예배를 확실히 자리잡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재산을 우리는 생각할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신 것은 어쩔 수 없이 하신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포기하겠느냐"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는 기꺼이 그들을 회복시키신다. 그는 즐거이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즐거이 순종하는 종을 사랑하신다.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인데 그 때에 그가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하신 수고도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세상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를 보살피시기 위하여 온갖 배려를 하셨다고 일컬어질 것이다. 앞서 위협된 경고가 성취되었듯이 이 약속들도 확실히 이루어질 것이다. 거룩한 공의를 따라서 '내가 이 백성에게 이 큰 재앙을 내린 것같이 허락한 모든 복을 그들에게 내리리라.' 이는 약속을 따른 것이며 하나님의 자비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한 확실한 전조로서 유다와 예루살렘이 있는 집과 토지들이 제 값에 다시 매매될 것이다(43,44절). '이 땅에서 사람들이 밭을 사되' 다른 곳에 있는 땅보다도 이 땅을 더 사고자 할 것이다. '예루살렘 사방과 유다 성읍들과' 이스라엘 성읍들, 나라의 모든 곳에서 '밭을 은으로 사고 증서를 기록할' 것이다. 매매가 다시 이루어지고 농경이 다시 일으켜질 것이다. 법도 이제 제 역할을 하게된다. 왜냐하면 '증서를 기록하여 인봉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가 새로 땅을 산 행위를 감수하도록 하기 위하여 언급될 것이다. 비록 그가 토지의 한 구획을 샀을 뿐이고 그것을 보러 갈 수도 없었지만 이것은 수많은 매매에 대한 보증이었다. 그리고 하늘의 가나안에서의 소유와 어렴풋한 유사점에 대한 보증이 된다. 하늘의 가나안은 마음 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예비되어 있는 것이다.
예레미야 33장
Ⅰ. 성의 재건과 죄의 용서 33:1-9
1. 이 예언의 시기(1)
이 위로의 예언이 주어진 시기는 전 장의 사건의 연속으로 사태가 더욱 악화되어 가고 있을 때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두 번째 말씀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다시 임하니라. 이 말씀은 두 번째 임한 것이다. 이는 그의 백성을 격려해 주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의무를 행하기 위하여 경계에 경계를 필요로 할 만큼 그렇게 불복종하는 자들을 뿐만 아니라 위안을 받기 위하여 약속에 약속을 필요로 할만큼 그렇게 불신으로 가득찬 자들이다. 이 말씀은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예레미야가 아직 갇혔을 때에' 그에게 임하였다.
2. 예언의 내용(2-9)
(1) 이 위로를 그들에게 확증해 주시는 분이 누구인가(2절)? 그분은 여호와,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이시다. 그는 천지를 만드시고 지으신 분이다. 그는 예루살렘, 곧 시온을 지으시고 형성하신 분이시다. 그가 처음 그 성을 세우셨다. 그러므로 그가 다시 성을 재건하실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찬양을 받기 위하여 그 성을 지으셨으며, 그러므로 이제 다시 지으실 것이다. 그는 이 약속을 만드시고 세우신 분이다. 그는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하여 계획을 세우셨고, 약속을 하신 그가 수행하실 것이었다. 왜냐하면 여호와가 그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가 약속을 이루실 때 그는 그 이름으로 알려지신다(출 6:3). 그는 곧 온전하신 하나님이시다. 천지가 만들어졌을 때, 창조주는 여호와로 불리워지고 있다(창 2:4).
(2) 이 위로는 오로지 기도에 의해서 얻어진다(3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그리스도께서도 구하여야 했으며 그가 그렇게 함으로써 그에게 주어졌다(시 2:8). (부분적으로는 이미 나타났을지라도)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이제 약속들이 기도를 대신해서가 아니라 기도를 일깨우고 격려하기 위해서 주어졌다(겔 36:37).
(3) 예루살렘의 상황은 이러한 위로를 받기를 필요로 한다(4,5절). '유다 왕궁'을 포함하여 '이 성읍의 가옥'들이 흉벽과 칼, 혹은 기관과 도끼 혹은 망치에 의하여 부숴진다. 가장 강한 요새일지라도 부서져 평평한 땅과 같이 된다. '갈대아인을 막아 싸우려'한 자들은 유익보다 해를 더욱 초래하였다. 대적들로 하여금 더욱 흉맹하고 포악하게 공격하게끔 유발시켰으므로 예루살렘에 있는 가옥들은 '그 시체로 채워졌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노와 분함으로 그들을 죽였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대적들의 칼은 곧 그의 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죽임당한 사람들은 더욱 두드러지게 행악하였던 자들이었던 것 같다. 바로 그 사람들의 '모든 악을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얼굴을 가리워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셨다.'
(4) 하나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위하여 예비해 두신 축복들이 그들의 모든 슬픔을 치료해 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그 병이 치명적이고 치유될 수 없는 듯이 여겨질지라도 치료하여 주실 것이다(렘 8:22).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다'(사 1:5). 그러나 '내가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할' 것이다(6절). 내가 죽음을 저지하고 병을 물리치며 모든 것을 정상으로 회복시킬 것이라고 하신다(렘 30:17). 예루살렘의 죄가 그 병의 원인이었다(사 1:6). 그러므로 개혁하는 것만이 회복할수 있는 길이었다. 내가...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평강은 성실한 신앙, 평강과 하나님께 대한 진실된 예배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이는 그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있게 하였던 수많은 거짓과 미혹과 반대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보다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평강과 진리는 하나님의 계시의 위대한 본질이다. 여기에 있는 이 약속들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강과 진리를 나타내셨다. 진리로 우리를 지시하시며 평강으로 우리를 안식하게 하신다. 은혜와 진리의 풍성함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다. 평강과 진리는 영혼의 생명이며 우리로 그 생명을 얻게 하되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고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진리의 능력으로 다스리시며(요 18:37), 그것으로 '평강의 풍성함'을 주신다(시 72:7;85:10). 평강과 진리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는 믿음으로 그것을 받는 자들 모두에게 치유와 건강을 준다. 그들이 뿔뿔이 흩어졌으며 종이 되었었는가? 그들의 나라가 황폐하게 되었었는가? 내가...포로를 돌아오게 하며(7절). 그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포로 모두를 돌아오게 하실 거시다. 그들의 모든 역경을 야기시킨 원인이 죄인가? 그 죄는 용서받게 될 것이며 정복될 것이다(8절). 의식법상 깨끗하지 못한 자들은 성막에서 내쫓김 당했었다. 그리고 그들이 정하게 하는 물로 뿌림을 받으면 다시 성소에 들어가도록 허용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시면' 그들은 고국 땅에 들어가는 특권을 가지게 된다. 그들의 죄와 고난이 하나님을 명예롭지 못하게 하였던가? 그들의 개혁과 회복이 그를 찬양하게 될 것이다(9절). 인근 나라들이 유대 나라가 날로 커지는 것을 진정 두려워함으로 주목할 것이며 그들을 적으로 삼는 것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교회가 달처럼 아름답고 해처럼 맑을 때, 기치를 든 군대처럼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Ⅱ. 풍요와 메시야에 대한 약속 33:10-16
유다와 예루살렘이 포로 생활로부터 영광스럽게 귀향한 후에 누리게 될 그 복된 상태에 대한 예언이 계속하여 주어진다. 이 예언은 마침내는 메시야의 왕국에서 영광스럽게 실현될 것이다.
(1) 오랫 동안 슬픔에 잠겨있던 백성들이 다시 기쁨이 넘치게 되리라고 약속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이제 나라가 영원히 멸망하였으며 유다 땅에서는 짐승도 찾아볼 수 없고 '예루살렘 거리에서'는 거민을 볼 수 없으리라고 결론지었었다(10절). 그러나 비록 울음이 한동안 계속될지라도 기쁨이 되돌아올 것이다. 그리하여 그곳에는 평상시와 같은 기쁨이 있게될 것이다.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 예전과 같이 다시 혼인식이 축가를 부르며 거행될 것이다. 또한 종교적인 의식의 기쁨도 누리게 될 것이다. 성전의 노래, 이방 땅에서는 부를 수 없었던 여호와의 노래가 다시 불리워질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로 찬미할 뿐 아니라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찬양하게 될 것이다. 비록 옛 노래일지라도 이 새로운 사건을 계기로 새롭게 불리워지므로, 새 노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바벨론에서 귀환할 때 문자 그대로 이 일이 성취됨을 본다(스 3:11). 모든 희생 제물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 이 말씀은 겸손한 찬미와 기쁨의 감사로 드리는 영적인 제사를 의미하는 듯하다. 이것이 호세아서에서는 수송아지보다 여호와를 더 기쁘시게 하는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린다'고 표현되어 있다(호 14:2).
(2) 오랫 동안 황폐해 있던 나라가 다시 번성하게 되리라는 약속이 주어지고 있다. 베냐민 땅과...유다 성읍들에서 양무리가 다시 계수하는 자의 손아래로 지나리라(12,13절). 그 나라는 저들이 귀향한 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방랑인들의 거처가 되지 않을 것이며 목자들과 농부들의 거처가 될 것이다. 야곱의 후손들은 본래의 생업이 목자였다(창 47:3). 그리고 이제 그들은 다시 그 생업을 얻을 것이다. 그 양 무리를 눕게 하면서 맡은 직무에 온전히 전념할 것이다(12절). 그리고 또한 양 무리로 하여금 자기 아래로 지나가게 할 것이다(13절). 혹 잃어버린 것이 없는지 그 수를 계수할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은 수가 감소된 백성이 이 양무리와 같은 번성함과 평강함으로 영영히 회복되리라는 약속이 믿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이 약속에 대한 일반적인 인준이 첨가되고 있다. 내가...이른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14절).
(3)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축복 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것이 여기에 있는 메시야에 대한 약속이며, 그가 실현하실 영원한 의이다(15,16절).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선한 말', 즉 가장 큰 선한 말이다. 하나님께서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셨으므로 그는 이 약속대로 이루실 것이다. 이 약속 가운데 그들의 포로 생활로부터의 귀향과 고국 땅에서의 정착이 예고되었다.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주목되는 시대 중의 하나이다(마 1:17). 메시야에 대한 이 약속은 앞에서도 주어진 바 있다(렘 23:5,6). 거기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 위에 세우실 목자들에 대한 약속을 확증하는 것으로 나타났었다. 여기에서는 목자들과 양 무리들까지 포함하는 약속으로 여겨지며 비유적인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예고되고 있다.
1) 의로운 왕이다. 그는 찬탈자가 아니라 '의로운 가지'이다. 이는 그가 다윗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2) 의의 왕이다. 법을 정하시고 전쟁을 행하시며 심판을 하심에 있어 그는 의로우시다. 억울함을 당하는 자들을 변호하시며 잘못을 행하는 자들을 징벌하심에 있어 그는 의로우시다.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3) 온갖 위해를 당하는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시는 왕이다. 그로 말미암아 진노와 저주로부터 '유다가 구원을 얻겠고' 그렇게 구원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이 안전히 거할 것이다.' 이 평강의 왕을 의지함으로, 악에 대한 모든 두려움을 떠나 평화롭게 마음의 평정을 즐기게 된다.
4) 자기 백성들에 의하여 찬양을 받으실 왕이다. 16절 하반절을 "이것이 그들이 그를 부를 이름이다"라고도 읽는다(갈대아 역본, 아랍어 역본, 라틴어 역본). "그의 이 이름을 그들이 찬양할 것이며 이 이름으로 그들이 기도할 것이라."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 이는 그들이 저희의 의로써 여호와를 찬양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해진 것이 여기에서는 메시야의 성읍, 곧 그리스도의 교회인 예루살렘의 이름이 되었다. 이 성에 의를 전하신 이가 바로 그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지님으로써 예루살렘 성은 온전한 의를 가지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것은 스스로 난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온 의이다.
Ⅲ. 하나님의 언약과 확실성 33:17-26
하나님의 언약 세 가지, 곧 다윗과 그의 후손과 맺은 왕권에 대한 언약, 아론과 그의 후손과 맺은 제사장과의 언약, 그리고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과 맺은 언약들이 포로 생활 동안에 완전히 깨어지고 잊혀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 언약들의 참되 취지와 의도가 신약 시대의 축복들에서 풍성하게 응답될 것이 약속되고 있다. 이것은 포로 생활에서 귀향한 후 유대인들에게 베풀어진 것들에 의해 예표되었다.
(1) 왕권에 대한 언약은 다윗의 아들,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온전히 이루어진다(17절). 이스라엘의 왕위는 포로됨으로 말미암아 끊겨졌었다. '이스라엘 집 위에 앉을 사람이' 없었다. 그들이 돌아온 후, 다윗의 위는 다시 대를 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집 위에 앉을 사람이 다윗에게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라는 약속이 성취된 것은 메시야에게서였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만물을 다스리시는 영화로운 머리이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 한, 또한 그가 거룩한 산 시온에서 통치하시는 왕인 한, 다윗의 후계자는 끊어지지 아니하며 그와 맺은 언약은 파기되지 않는다.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서 왕 노릇하실 것이요'(눅 1:32,33). 다윗과 맺은 언약은 천체의 운행만큼이나 확고 부동한 것이다. 본문에서 '낮에 대한 약정과 밤에 대한 약정'이라고 일컬어지는, 자연에 대한 언약이 나오고 있다(20,25절). 이것은 자연에 대한 언약의 한 항목이다. '주야로 그 때에'있게 하리라는 약정이다. 하나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나누셨으며 각각에게 통치권을 세워 주셨다. 태양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셨고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셨다(창 1:4,5,16). 아침과 저녁으로 정한 때에 교차되게 하셨다(시 65:8). 태양으로 하여금 그 떠오를 장소와 시간을 알게 하셨고, 땅 그림자가 지는 시각도 이같이 운행되게 하셨다. 그리고 세계가 지속되는 한 이 경로는 변경되지 않을 것이며 이 언약은 파기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구세주, 곧 하나님의 종인 동시에 왕이었던 다윗과 맺은 구속의 언약도 확고 부동할 것이다(21절). 그리스도는 세상 끝날때까지 지상에 교회를 유지시키신다. 곧 시간과 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교회를 소유하신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다. 세상은 끝날이 이르겠지만 그 나라는 끝나지 아니하며 아버지되신 하나님께로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교회의 상태는 낮과 밤이 서로 교차되듯이 번영과 고난이 항상 교차될 것이다. 오늘 태양이 지지만, 내일 아침 다시 떠오를 것이 확실하듯이, 우리가 살아서 그것을 볼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나 이 세상에 있는 구속자의 나라가 잠시 부패와 박해로 인하여 구름에 가리듯 흐려질지라도 정한 때가 되면 다시 빛을 발하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윗의 자손은 '하늘의 만상'처럼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즉 메시야의 복음과 또 그 안에 함께 역사하는 그의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에게서 출생하는 메시야의 영적인 자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씨들은 다윗의 씨와는 달리 그의 후계자들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백성들이며 때가 이르면 그와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다(22절).
(2) 제사장직에 대한 언약은 확실히 보증될 것이며 그에 대한 약속 역시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제사장들이 섬길 제단도, 성전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세워질 것이다. 예루살렘에 돌아온 즉시로 '번제를 드리려'하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조석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다'(스 3:2,3). 똑같은 내용이 본문에서도 약속되고 있다(18절). 그러나 그 제사장직은 이네 부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레위의 언약이 패하여졌다(참조. 말 2:8). 그리고 로마인들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그 제사장직은 종말을 맞게 되었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 아론의 직을 대체하고 있다. 아론의 직이 그림자에 불과한 반면 그리스도의 직은 사실상 그 본질이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 고백의 대상이신 위대한 대제사장이 항상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계신 한, 레위인 제사장은 끊어지지 아니하였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히 7:3,7). 그는 영원하신 제사장이다. 충실한 사역자들이 신앙적인 모임을 계속 주관하며 기도와 찬양이라는 한 영적인 제사들을 드리고 있는 제사장들, 레위인들은 후계자가 끊어지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가장 훌륭한 후계자를 얻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하는 자들을 제단을 모시는 이들에 비교하고 있다(고전 9:13,14). 참된 성도들은 모두 '거룩한 제사장'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다(벧전 2:5,9).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왕과 제사장들로 삼아진' 자들이다(계 1:6). 그들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영적인 제사를 드리며, 무엇보다도 그들 자신이 '산 제사'이다. 레위인들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지리라고 한 본문의 약속은 바로 이들 제사장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22절).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이요, 영적 제사장들이기 때문이다(계 5:9;7:9,15).
(3) 선택의 언약도 마찬가지로 보증되며 그 언약에 대한 약속들도 복음의 이스라엘에게서 완전히 성취되게 된다. 이 언약은 포로 기간동안 파기된 것으로 간주되었었다(24절). 이스라엘의 원수들, 혹은 믿지 않는 이스라엘인들 스스로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였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신실하게 대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그리하였다. 그들이 내 백성을 멸시하여. "마치 그것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특권이라는 듯이 내 백성이 되는 특권을 멸시하는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은 낮과 밤의 약정만큼이나 확실하게 선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자손을 버리시느니' 차라리 주야의 약정이 깨어지게 하실 것이다. 이것은 육적인 야곱의 자손을 가리키는 말일 수 없다. 그들은 버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 모든 약속이 거기에서 실현되고 있다. 이는 사도 바울의 설교에서 그대로 드러났다(롬 11:1이하).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지배하에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복속은 낮과 밤이 계속되는 한 계속될 것이다. '내가 그 포로된 자로 돌아오게 하고.' 그를 이끌어 낸 다음에는 '긍휼히 여기리라.' 이 약속이 누구에게 주어진 것인가는 갈라디아서6:16에 나타나 있다. 곧 복음의 규례를 행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것으로서 그들에게는 '평강과 긍휼이 있을 것'이다.
새 언약(예레미야 31장)
1-14절, 내가 모으리라
[1-3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때에 내가 이스라엘 모든 가족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칼에서 벗어난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얻었나니 곧 내가 이스라엘로 안식을 얻게 하러 갈 때에라.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
멸망한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될 때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모든 가족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2절은 “이스라엘이 안식을 얻으러 갈 때 칼에서 벗어난 그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얻었도다”라는 뜻 같다(NASB).6)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군대의 칼을 모면한 남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주셨고 안식을 주실 것이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그 백성의 많은 죄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과 인자하심 때문에 이루어질 것이다.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사랑과 자비 때문에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는다.
[4-7절]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小鼓)로 너를 장식하고 즐거운 무리처럼 춤추며 나올 것이며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원을 심되 심는 자가 심고 그 과실을 먹으리라. 에브라임 산 위에서 파숫군이 외치는 날이 이를 것이라.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나라.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가자 하리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야곱을 위하여 기뻐 노래하며 만국의 머리된 자를 위하여(베로쉬 학고임)[만국의 머리된 자 가운데서](MT, KJV) 외쳐 전파하며 찬양하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하나님께서는 멸망한 이스라엘 나라를 다시 건립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나라는 이전처럼 아름답게 단장될 것이며 즐거움이 있어 노래하며 춤출 것이고 먹을것도 풍성할 것이다. 그 땅에는 경건도 회복될 것이다. 파수꾼들, 곧 주의 종들은 사람들에게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을 섬기자고 권면할 것이다. ‘만국의 머리된 자’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그 남은 자들을 다 구원하실 것이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며 찬양할 것이다.
[8-9절] 보라, 내가 그들을 북편 땅에서 인도하며 땅끝에서부터 모으리니 그들 중에는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하여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되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간구함으로 내가 그들을 인도할 것이며]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수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북편 땅으로부터 인도하시며 땅끝에서부터 모으실 것이다. 그들은 앗수르와 바벨론에 끌려가 온 땅에 흩어졌었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소경과 절뚝발이같이 몸이 불편한 자들도 귀환 행렬에 있을 것이며 임신하여 몸이 무거운 여인들이나 해산하여 몸이 불편한 자들도 함께할 것이다. 그들은 다 구원의 행렬에 참여할 것이다.
그들은 큰 무리를 이루어 울면서 돌아올 것이다. 그 울음은 회개와 감사 감격의 눈물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이다. 또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입고 하나님께 구원과 회복을 간구할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작정된 일을 이루는 과정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좋은 것을 작정해두셨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며 또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을 구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들로 넘어지지 않고 하수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인도하실 것이다. 하수가의 바른 길은 목마를 염려가 없고 쉴 만한 그늘이 있는 ‘바른 길’ 곧 정로(正路, 데렉 야솨르)이다. 인생의 정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바른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그들은 이제 성경의 교훈대로 경건하고 의롭게 살아야 한다.
[10-14절] 열방이여, 너희는 나 여호와의 말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무리에게 행함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속량(贖良)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속(救贖)하셨으니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은사(투브)[좋은 것들]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양의 떼와 소의 떼에 모일 것[떼로 흐를 것]이라. 그 심령은 물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 그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이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이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근심한 후에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니라. 내가 기름으로[기름진 것으로] 제사장들의 심령에 흡족케 하며 내 은혜로[좋은 것들로] 내 백성에게 만족케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흩으신 자가 그들을 모으실 것이다. 그는 그들을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건지실 것이다. 구원과 회복은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벌하여 흩으셨으나 이제 다시 모으시며 구원하시며 인도하시며 안식을 주시며 세우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좋은 것들을 주실 것이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양의 떼와 소떼로 흐른다는 표현은 그들이 먹을것을 풍성하게 얻을 것을 말한다. 그들의 심령은 물댄 동산같이 평안하며 기쁨과 즐거움을 얻게 하시고 만족함을 누리게 하실 것이며 근심과 걱정이나 슬픔이 없게 하실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키실 것이다. 4절,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8절, “내가 그들을 북편 땅에서 인도하며 땅끝에서 모으리라.” 10절,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13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이켜 즐겁게 하며.” 14절, “내가 기름진 것으로 제사장들의 심령에 흡족케 하며.”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신약교회 안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이루시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주이시다. 신약 교인들은 이미 그 은혜를 누리고 있고 장차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영광의 천국에서 충만히 누릴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이며 우리는 그 일에 쓰이는 도구들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바른 길로 회복시키실 것이다. 9절, “[그들이] 울며 올 것이며 간구함으로 내가 그들을 인도할 것이며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수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하수가의 바른 길은 목마를 염려가 없고 쉴 만한 그늘이 있는 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회개하며 간구하며 바른 길로 행하게 하실 것이다. 구원은 정로(正路)의 회복이다. 그 길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모든 계명을 행하는 것이다.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계명대로 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바른 길을 걸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의 교훈, 곧 하나님의 계명대로 의와 선을 행하는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실 것이다. 12-14절 “그 심령은 물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그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이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이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근심한 후에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니라. 내가 기름진 것으로 제사장들의 심령에 흡족케 하며 내 은혜로 내 백성에게 만족케 하리라.” 신약 성도들은 세상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평안을 누린다. 물론 우리는 영광의 천국에서는 기쁨과 평안을 더욱 풍성히 누릴 것이다.
15-22절, 네가 돌아오리라
[15절]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는도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통곡을 베냐민 자손의 눈물이라는 말로 표현하셨다. 라마는 베냐민 지파에 속한 마을이었다(수 18:25). 라헬은 요셉과 베냐민의 어머니이었다. 요셉에게서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나왔다. 라헬은 이스라엘 백성의 여인들을 대표할 만하며, 에브라임과 므낫세와 베냐민은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할 만하다. 이스라엘 나라는 이미 멸망했고 유다 나라는 멸망해가고 있었다. 많은 자녀들이 죽었고 포로로 잡혀갔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슬퍼하며 통곡하고 있는 것이다.
[16절]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 소리를 금하여 울지 말며 네 눈을 금하여 눈물을 흘리지 말라. [이는](원문)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돌아올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의 최후에[장래에](NASB)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경내로 돌아오리라.
하나님께서는 슬퍼하는 그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에게 소망의 말씀을 주신다. 그의 위로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그 대적의 땅, 즉 앗수르와 바벨론 땅에서 돌아오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지금 이방 나라에서 고생을 하고 있지만, 장래에 소망이 있다. 그들은 장차 그 포로된 땅으로부터 고국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것이 과연 일어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그렇다고 말씀하신다.
[18-19절]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정녕히 들었노니 이르기를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진 고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하나님께서는 또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부족과 무능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의 회개시키시며 구원하시는 손길을 간구할 것이라고 예언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징벌하셨음을 깨닫고 탄식할 것이다. 이스라엘 나라의 멸망과 이방 나라에서의 포로생활은 하나님의 징벌이었다. 또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의 역사가 실패의 역사임을 깨닫고 있다.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었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쳤지만, 그들은 그들의 전한 말을 거절하였고 결국 멸망의 길로 갔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나이다”라고 고백할 것이다.
[20절]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백이 옳은 고백이라고 인정하신다. 그는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을 그가 친히 시작하시고 주도하실 것을 선언하신다. 하나님께 회복과 구원의 능력이 있다.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면 이스라엘 백성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하나님의 긍휼에 근거할 것이다. 오늘 우리의 구원도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근거한다.
이와 같이, 본문은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인다.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되고 무능력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스스로 회개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1:18에 보면,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이방인 고넬료와 그 가족들과 친지들을 구원하신 일을 들은 다른 사도들과 형제들은 잠잠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말하였다. 회개와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고(요 6:37)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말씀하셨다(요 6:44).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엡 2:8).
[21-22절] 처녀 이스라엘아,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고 대로(大路)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에 착념하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이는]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안을 것임이니라].
‘길표’와 ‘표목’은 고국으로 돌아가는 표지판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패역한 딸,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변절하였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지금 참된 경건도 평안도 없이 방황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전에 가던 길 곧 하나님께서 명하신 정로(正路)에 착념해야 한다. 그것은 성경의 교훈, 곧 의롭고 선한 옛길을 가리킨다.
22절 하반의 “이는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을 것임이니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이 구절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는 연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강한 바벨론 나라를 이긴다는 뜻이라고 본다. 둘째는 처녀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출산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바벨론으로부터의 포로귀환에 관계되기도 하지만 메시아의 시대에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처녀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출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이다. 성육신(成肉身)은 하나님의 능력의 일이다. ‘남자’라는 원어(게베르)는 ‘아이’에게도 사용된 적이 있다(욥 3:3).
본문의 진리는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본심은 이스라엘을 벌하시는 것이 아니고 구원하시는 것이다. 20절,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이스라엘의 회복은 하나님의 긍휼에 근거한다.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의 긍휼에 근거한다. 예레미야 애가 3:32-33,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둘째로, 구원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이루시는 일이다. 18-19절,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나이다.” 구원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곧 그가 시작하시고 이루시는 일이다.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만 의지하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 중심의 삶, 천국 소망의 삶에 전념해야 한다. 21절, “처녀 이스라엘아,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고 대로(大路)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에 착념하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 귀환은 단지 유대 땅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돌아오고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길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또다시 죄악된 역사와 징벌과 멸망의 역사를 반복할 것이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신약 성도들은 이제 하나님 중심의 삶, 즉 경건과 의와 선의 삶을 살고 천국과 영생만 소망하며 살아야 한다.
23-30절, 내가 경성하여 세우리라
[23절] 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그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때에 그들이 유다 땅과 그 성읍들에서 다시 이 말을 쓰리니 곧 의로운 처소여, 거룩한 산이여,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 것이며.
유다 땅과 그 성읍들은 심히 죄악되었다. 이사야는 1:21은,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었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었도다”라고 말하였다. 예레미야 5:1, 30-31도,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城)을 사하리라,”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고 말하였다.
이렇게 죄악된 땅과 성읍들이, 하나님께서 그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실 때 회복될 것이다. 그때 그곳은 다시 의로운 처소와 거룩한 산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것은 종교적, 도덕적 갱신이 일어날 것을 보인 말씀이다. 그곳은 다시 하나님께 복 받은 땅과 성이 될 것이다. 이방 세계와 같이 변질되었던 구약교회, 아니 이방 세계보다 더 타락했던 구약교회가 다시 회복되며 거룩한 교회가 될 것이다.
그것은 신약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장차 천국에서 완성될 것이다. 신약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영광스런 교회로 작정되었다. 에베소서 5:26-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신약교회는 이제 죄와 불경건을 다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며 성경말씀대로 순종하는 거룩하고 의로운 교회가 되어야 한다.
[24-26절] 유다와 그 모든 성읍의 농부와 양떼를 인도하는 자가 거기 함께 거하리니 이는 내가 그 피곤한 심령을 만족케 하며 무릇 슬픈 심령을 상쾌케 하였음이니라 하시기로 내가 깨어보니 내 잠이 달았더라.
예레미야는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를 잠자는 중에, 아마 꿈속에서 받았다. 옛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사람이 잠자는 중에, 꿈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셨다(민 12:6). 오늘날에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으시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회복될 유다 땅과 성읍들에 피곤한 심령을 만족케 하시며 슬픈 심령을 상쾌케 하시는 심령의 회복을 주실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심령에 평안과 기쁨이 있는 날을 주실 것이다. 죄와 징벌로 인해 슬프고 피곤해진 심령이 평안과 기쁨을 얻게 될 것이다. 또 그 땅에는 농부들과 양떼를 인도하는 자들이 함께 거할 것이다. 그 땅에는 농사짓고 목축하는 평화로운 일상생활이 있을 것이다. 그 땅에는 물질적 유여함이 있고 전쟁의 불안이 없을 것이다.
주 예수께서는 참 평안과 기쁨을 신약 성도들에게 은혜로 주셨다.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갈라디아서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선함]과 충성과.” 빌립보서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27-28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내가 경성하여 그들을 뽑으며 훼파하며 전복하며 멸하며 곤란케 하던 것같이 경성하여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의 회복은 하나님께서 씨를 뿌리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뿌린다는 말씀은 사람과 짐승의 수적 번식과 번창을 가리킨다. 예수께서도 영혼 구원을 위한 전도를 씨 뿌리는 일로 비유하셨다(마 13장). 하나님께서 회복하시는 새 세계에는 구원받는 영혼들의 수가 심히 많을 것이다. 이것은 신약교회의 수적 번창을 가리킬 것이다. 요한계시록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요약하면 두 가지이다. 하나는 뽑고 파괴하시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심고 건설하시는 일이다. 이 두 가지의 일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명하신 일이기도 하였다. 예레미야 1:10,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죄와 악은 부서져야 한다. 악을 포용하거나 그것을 두둔하거나 모방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다. 악은 징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인들과 선인들을 심으시고 세우실 것이다. 그것이 그의 회복 운동, 구원 운동이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 포로 생활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다. 그는 참 교회를 세우실 것이다.
마태복음 16:18,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그것이 신약교회이다. 또 이 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될 것이다. 세계복음화는 하나님의 뜻이다(계 7:9; 11:15). 마침내 영광스런 천국이 올 것이다. 이 모든 일은 다 주권적 섭리자, 구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다.
[29-30절] 그때에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 이가 심 같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
이전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부모들 때문에, 조상들 때문에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해야 하였다. 그들은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포로생활로부터 건져주셨고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며 그들에게 자유를 주시고 의와 평안도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는 말을 더 이상 할 것이 없을 것이다. 각 사람은 자신의 죄악으로만 죽을 것이다. 각 사람은 오직 자신의 도덕적 책임을 가질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그 사로잡혔던 자들을 돌아오게 하실 것이며 경성하여 그들을 세우시고 심으실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 나라를 다시 세우실 것이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신약 성도들은 죄와 마귀의 권세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자들이 되었다. 우리는 다시 사람들에게 종이 되지 않을 것이다. 신약교회는 영원히 폐해지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며 그 나라의 왕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경은 모든 백성이 지킬 법이 될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으로부터 고국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교적, 도덕적 갱신을 누리게 하실 것이다. 예루살렘 성은 다시 의로운 성읍, 거룩한 산이라고 불릴 것이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약 성도들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거룩으로 옷 입고 이제는 즐거이 하나님만 섬기며 그의 계명만 순종하며 의와 거룩의 길을 걷고 선한 일을 위해 열심을 내는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적으로 많아지게 하시며 그들로 심령의 평안과 기쁨을 얻게 하시며 또 농사와 목축 같은 평화로운 생활을 하게 하실 것이다. 신약교회도 수적으로 많아져서 온 세계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리가 되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심령의 큰 평안과 기쁨을 주셨고 또 물질적 필요도 때때로 공급해주신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영육의 복된 삶을 누린다.
31-40절, 내가 새 언약을 세우리라
[31-32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날이 이르면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다. 옛 언약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이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책에 썼고 제물의 피를 취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뿌리며 이것이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해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라고 말했다(출 24:7-8). 광야 생활 40년을 지난 후 모세는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그 언약을 갱신했었다(신 29:10-13).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반복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어겼고 그 언약을 파하였다.
새 언약의 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마지막 유월절 저녁식사를 하실 때 포도즙을 나누시면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눅 22:20). 신약교회의 성찬식은 새 언약의 표이었다. 새 언약은 옛 언약의 갱신이었으나 이방인들이 편입되는 언약이었다. 이방인 신자들은 하나님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엡 3:6).
[33-34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새 언약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째로, 새 언약 아래서는 하나님의 법이 사람들의 마음에 기록될 것이다. 옛 언약에서는 하나님의 법이 돌판에 기록되었으나, 새 언약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법을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실 것이다. 이것은 신약 성도들이 누리는 중생(重生)과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을 가리켰다.
둘째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특별한 관계가 형성될 것이다. 전에는 그들의 범죄함으로 이 관계가 깨어졌었으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셋째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지식이 충만할 것이다. 신약시대에는 우리의 어린 자녀들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믿고 그를 찬양하며 경배하며 섬긴다.
넷째로, 죄인들에게 영원한 죄사함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도 않으실 것이다. 이것은 에스겔과 다니엘도 예언한 바이었다(겔 36:25; 단 9:24). 이것은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누리는 사죄(赦罪)와 칭의(稱義)의 은혜이다.
[35-37절] 나 여호와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었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규정하였고 바다를 격동시켜 그 파도로 소리치게 하나니 내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니라. 내가 말하노라. 이 규정이 내 앞에서 폐할진대 이스라엘 자손도 내 앞에서 폐함을 입어 영영히 나라가 되지 못하리라.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위로 하늘을 측량할 수 있으며 아래로 땅의 기초를 탐지할 수 있다면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행한 모든 일을 인하여 그들을 다 버리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해와 달과 별들의 법칙이 폐하여지지 않듯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영영히 버리지 않으실 것이며 이스라엘 나라는 하나님 앞에서 폐하여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늘을 측량할 수 없고 땅의 기초를 탐지할 수 없듯이, 은혜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악행들 때문에 그들을 버리지는 않으실 것이다.
신약성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하실 것을 증거한다. 로마서 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로마서 11:11-12,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로마서 11:15,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로마서 11: 25-27,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38-40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이 성을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모퉁이 문까지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할 것이라. 측량줄이 곧게 가렙산에 이르고 고아 방면으로 돌아 시체와 재의 골짜기와 기드론 시내에 이르는 데까지와 동편 말문 모퉁이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밭에 이르리니 다 여호와의 성지가 되고 영영히 다시는 뽑히거나 전복되지 아니하리라.
하나넬 망대나 모퉁이 문은 예루살렘 성의 북쪽에 있다. 시체와 재의 골짜기는 예루살렘 성의 서남쪽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를 가리킨다. 예루살렘은 과거에 죄인들이 가득한 성이었지만, 앞으로는 거룩한 곳이 될 것이다. 예루살렘 모든 지경이 여호와의 성지(聖地)가 될 것이다. 그 성은 다시는 뽑혀 버린 바 되지 않을 것이다.
이 예언은 부분적으로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후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일에서 성취되었지만 아직 불완전하였다.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되기 시작하였고 장차 그의 재림으로 완전하게 성취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21:12, 24, 26은 거룩한 새 예루살렘 성에 대해 말한다: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새 예루살렘 성은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성이며, 영원히 뽑히거나 버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본문은 새 언약의 네 가지 특징을 교훈한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법을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실 것이다. 이것은 신약 성도들이 받은 중생(重生)의 은혜와 성령의 내주(內住)하심이다.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그의 백성이 될 것이다. 이것은 신약 성도가 얻은 특권이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로마서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셋째로, 신약교회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하나님을 알 것이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충만할 것이다(사 11:9). 어른들뿐 아니라, 어린아이들도 하나님을 알 것이다.
넷째로, 신약 성도들에게는 영원한 사죄(私罪)가 있을 것이다. 다니엘 9:24, “죄악이 영속(永贖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히브리서 10:10, 14,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cafe.daum.net/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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