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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1

벧전 5장

by 은총가득 2020. 12. 12.

5장: 장로들에게 주는 교훈

1-4절, 장로들에 대한 권면

[1절]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본절에서 '너희'와 '장로들'은 구별된다. '너희'는 일반 성도들을 가리키고, '장로들'은 그들 가운데서 감독자로 세움받은 자들을 가리킨다. 베드로는 자신을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라고 증거한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었다(요 21:15, 16, 17). 또 사도들은 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들이었다. 또 그들은 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기도 하였고(행 1:21, 22; 2:32; 3:15; 5:30-32 등) 또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영광의 부활에 참여할 자들이었다. 진실한 모든 성도들이 다 그 영광에 참여할 자들이다.

[2절]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장로의 본분은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는 일이다. 그 양 무리는 하나님의 양 무리이다. 그러므로 장로들은 두렵고 떨림으로 성실하게 그 직무를 다해야 한다. 양 무리를 치는 목양(牧羊)의 일은 교회의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돌아보는 일이다. 목양 혹은 목회는 담임목사에게만 맡겨진 일이 아니고 장로들에게도 맡겨진 일이다. 그것이 장로의 직분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감독 혹은 장로라고 부르는 직분에는 교회 헌법이 표현한 대로 두 반이 있다. 하나는 설교와 치리의 일을 겸하여 가진 목사요 다른 하나는 치리의 일만을 행하는 장로이다. 디모데전서 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본절의 교훈은 목사와 장로 모두에게 주신 교훈이다.

본절은 장로들이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칠 때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세 가지로 교훈하였다. 첫째는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라고 하였다. '부득이함으로'라는 원어(아낭카스토스)는 '억지로, 의무감 때문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선한 일이라도 억지로, 마지못해서, 의무감 때문에 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한 일들 중에 가장 귀한 일인 이 목양의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장로들은 이 직무를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수행해야 한다.

둘째는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 말고 즐거운 뜻으로 하라고 하였다. 목사나 장로들은 교회의 일을 함에 있어서 사사로운 이익을 구해서는 안된다. 봉사는 항상 순수하고 깨끗해야 한다. 그러므로 목사와 장로들은 가능하면 교회 재정에 직접 관계하지 말고 또 만일 재정에 관계할 때는 돈 계산에 있어서 정확하고 깨끗해야 한다. '즐거운 뜻으로'라는 원어(프로뒤모스)는 '준비된 마음으로'라는 뜻이다. 장로의 직분을 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동기와 준비된 마음이 필요하다.

[3절]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셋째는 맡겨진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교훈하였다. 사람이 교인들의 대표자가 되고 인도하는 직분을 가질 때 다른 이들에 대해 높은 마음을 가지고 권위 의식을 가지고 대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악덕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점에 대해 벌써 교훈하여두셨다. 마태복음 20:25-27,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大人)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장로들은 일반 교인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가지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한다.

[4절]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목자장은 예수님이시다. 그가 다시 오실 것이다. 그의 재림의 날에 그는 충성된 종들에게 영광의 상급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상 주시는 분이시다(히 11:6). 주께서 마지막 날 복음의 일꾼들, 교회의 장로들에게 주실 영광은 시들지 않는 영광이다. 그러므로 현재 목사와 장로들은 주께서 주신 직분을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 힘들고 어려운 점들이 많을지라도 낙심치 말고 하나님만 바라며 또 우리는 부족 투성이이지만 감히 그의 상 주심을 기대하며 충성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충성해야 할 것이다.

 

5-6절, 젊은이들에 대한 권면

[5절]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베드로는 장로들에 대한 권면과 더불어 젊은이들에 대한 권면을 하였다. 젊은이들에 대한 권면은 일반 교인들에게도 적절한 교훈이다. 베드로는 젊은이들에게 세 가지의 권면을 하였다. 첫째는 장로들에게 순복하라고 하였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이 받아야 할 교훈이다. 히브리서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특히 젊은이들은 대체로 아직 인생의 고난들을 많이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교만하기 쉬운 때에 있다. 고난의 환경은 대체로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양약(良藥)이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은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둘째는 서로에게 순복하라고 하였다. 전통사본에는 '다 서로에게 순복하라'고 되어 있다. 바울 사도도 에베소서 5:21에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교훈하였다. 또 빌립보서 2:3에서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교훈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교회의 구성원이 된 우리 모두는 서로를 존중하면서 서로에게 복종하는 마음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며 그러할 때 교회는 하나님의 의도하신 대로 일치단합된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셋째는 겸손으로 옷을 입으라고 하였다. '허리를 동이라'는 원어(엥콤보오마이)는 '(허리를 동이는) 옷을 입는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잠언의 말씀대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이다. 겸손한 자는 자신이 부족한 사람인 것을 알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을 깨닫는 자이다. 이렇게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 장로들에게 순복할 수 있고 또 서로에게 순복할 수 있을 것이다.

[6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나님은 전능하신 주권자이시다. 그가 세우면 세워질 것이고 그가 파하면 파해질 것이다. 그가 높이면 높아질 것이고 그가 낮추면 낮아질 수밖에 없다. 시편 75:6, 7, "대저 높이는 일이 동에서나 서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때에 그의 능력의 손으로 우리를 높이 들어 쓰실 것이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높아지려는 자들을 결코 쓰지 않으실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6절까지의 교훈은 분명하다. 첫째로,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고, 더러운 이익을 위해 하지 말고 즐거운 마음과 준비된 마음으로 하고, 맡겨진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교훈하였다. 목사들과 장로들은 이 교훈을 명심하고 실행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젊은이들에게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서로에게 순복하고 겸손으로 옷을 입으라고 교훈하였다. 이것은 젊은이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 모든 교인들에게 필요하다. 겸손한 순종의 마음가짐은 우리 모두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교회 전체를 위해 필요하고 유익한 마음가짐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사랑 가운데서 일치단합된 모습을 가지기를 원하신다.  

7-14절,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라

[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사람이 세상을 사는데 염려거리가 아주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성도들도 예외는 아니다. 인생에게는 심리적,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염려거리가 항상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주님이 되시며 친히 우리를 돌보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시다. 그는 자기 백성을 결코 버려두지 않으시며 날마다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모든 염려를 다 그에게 맡겨버려야 한다.

[8-9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본절은 마귀 혹은 사탄의 존재를 증거한다. 마귀는 실제로 존재하는 영이다. 마귀의 성격은 대적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교회를 대적하고 성도들을 대적한다. 그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대적한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불신앙에 떨어지고 낙심하고 좌절하며 서로 미워하게 만들기를 원한다.

마귀는 악하다. 그는 우는 사자같이 성도들을 삼키고 죽이며 멸망시키려고 한다. 그는 성도들에게 고난을 줌으로써 그들을 넘어뜨리려고 한다. 어떤 때는 질병으로, 또 어떤 때는 가난으로, 또 다른 때는 가정적, 사회적 환난으로 성도들을 시험한다. 마귀는 매우 활동적이다. 그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공격할 대상을 찾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마귀에게 틈을 주는 것은 예를 들면 우리가 게으르거나 욕심을 품거나 세상이나 돈을 사랑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고 근신하고 깨어서 믿음을 굳게 하고 도리어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야고보서 4:7, 8,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우리가 믿음을 굳게 하여 마귀를 대적하려면, 성경 읽기와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한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은 마귀를 물리치는 검이다. 예수께서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기록된 성경 말씀을 인용하심으로써 물리치셨다(마 4:4, 7, 10).

[10-11절]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성도들은 세상에서 마귀의 시험과 고난을 당하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은혜가 풍성하시고 충만하신 하나님이시다. 그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부르셨고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이다. 그것이 바로 영광스런 천국이며 거기에서의 영생 복락이다.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영원한 천국에 비교해 볼 때, 성도들이 현실에서 당하는 고난은 '잠간 고난'에 불과하다. 그것은 아무리 길어도 100년을 넘지 못한다. 그러나 천국과 영생은 영원하고 영광스럽다. 그래서 바울도 고린도후서 4장에서 증거하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6-18).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계획하시고 뜻하신 바를 남김 없이, 실패함 없이 다 이루신다. 하나님의 계획의 중심에는 우리의 구원이 있다. 그는 이 일을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를 대속하게 하셨다. 그는 이 일을 위해 성령을 보내셔서 활동하게 하셨다. 이렇게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친히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굳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터를 견고케 하실 것이 분명하다. 과연 그러하다.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고 든든한 보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치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그 부르심 앞에서 성실하자.

[12절]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실루아노는 또한 바울의 협력전도자이었던 실라를 가리키는 것 같다(행 15:22; 고후 1:19; 살전 1:1; 살후 1:1). 원문에는 '너희에게'라는 말이 '신실한'에 걸려 있다. 실루아노는 베드로전서가 보내졌던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 등의 성도들에게(벧전 1:1) 신실한 형제로 인정받고 있었고 베드로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또 그는 지금 베드로를 위해 이 서신을 대필(代筆)하고 있다. 그렇다면, 실루아노는 바울의 협력자이었던 동시에 또한 베드로의 협력자가 되었다. 그는 바울이 전한 복음과 베드로가 전한 복음이 동일한 복음이라는 것을 잘 증거하는 인물이 된 셈이다.

베드로는 또한 자신이 증거하고 권면한 내용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였다. 또 전통사본에는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는 구절이 '너희에 그 안에 굳게 선'이라는 말로서 하나님의 참된 은혜를 수식하고 있다. 즉 베드로는 자신이 편지를 보내고 있는 성도들이 이미 하나님의 은혜 안에 굳게 서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확신 가운데서도 그는 또 그 은혜의 말씀으로 그들을 권면하고 격려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아는 하나님의 말씀들도 또 듣고 또 음미하고 기억할 필요가 있다.

[13-14절]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바벨론에 있는 교회'는 문자 그대로 바벨론에 있는 교회를 가리킬 것이다. 복음이 널리 퍼져 바벨론에까지 교회가 세워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또한 마가에 대한 언급도 앞절에서 실로아노에 대한 언급과 같이 초대교회의 동일한 신앙과 사랑의 교제를 나타내는 것 같다. 마가는 바울에게도 협력자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베드로에게도 그러하였고 본절에서 '나의 아들'이라고 불리웠다. 진정한 기독교는 일치된 진리와 신앙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진리와 이 신앙을 확인하고 확신하고 이 진리와 신앙 안에서 일치된 기독교를 확증하고 혹은 회복시키고 그것을 널리 전파하고 후대에 전수시키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7절부터 14절까지에서 우리는 세 가지의 교훈과 진리를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고 모든 염려를 그에게 맡겨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주인이시다.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이는 그 분이시고 우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짐을 그에게, 오직 그에게만 맡겨야 한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오직 염려 대신 감사의 기도를 그에게 올려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근신하고 깨어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마귀는 우리의 대적자이며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 우리는 믿음을 굳게 하여 그를 대적해야 한다. 오직 말씀과 기도로 마귀를 대적하자.

셋째로, 우리는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확신하자.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실 것을 작정하셨다. 그 일은 실패하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는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굳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터를 견고케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오직 그 앞에서 성실하게 살아가자.

 


 

교인들에게 주는 교훈 (베드로 전서 5:5-7)

 

사도 베드로는 교회의 목사 또는 영적 지도자들의 임무를 설정하고 설명한 다음 무리들을 교훈하는데

 

이르고 있다.

Ⅰ. 그들의 목사와 또한 교인들이 피차간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할까? 사도 베드로는 무리들이

일반적으로 그들의 연장자인 목사들보다 젊기 때문에 그들을 젊은이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낮음을 기억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 주님께서 낮은 자를 의미하기 위해

사용하신 젊은이라는 말을(눅 22:26) 사용하였다. 그는 젊은이와 낮은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어른들에게 합당한 존경과 경의를 나타내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바라고 있는 것과 같이(히

13:17) 어른들의 훈계와 책망과 권위와 요청과 명령에 순종하라고 권한다. 서로가 책망을 받고

또한 피차간 격려를 받는 한, 또한 "서로간의 짐을 나누어지도록" 준비하며 피차간 우애와 사랑의

모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피차간에 복종하라"는 규율을 주고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사회의 모든 지시에 순종해야만 한다(엡 5:21; 약 5:16). 연령으로나 직분상으로 위에 있는

자들에게 순복해야 할 의무, 그리고 서로가 복종해야 할 의무는 인간들의 교만한 본성과 이기적

관심에 배치되는 것이므로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충고하고 있다.

여러분의 마음, 태도, 의상, 그리고 전체의 몸가짐을 여러분이 지닐 수 있는 최상의 아름다운

습관인 겸손으로 단장하라. 이렇게 함이 복종과 의무를 용이하게 그리고 즐겁게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들이 불순종하며 교만하게 된다면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반대하며 통솔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이는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되 교만한 자는 대적하시기 때문이다."

1. 겸손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교회와 사회 안에서 평화와 질서의 위대한 보지자가 된다.

결과적으로 교만은 이 모든 것을 흩어 버리는 자가 되며, 교회 안에서 가장 큰 불화와 분열의

원인이 된다.

2. 말씀이 의미하는 대로 하나님과 교만한 자 사이에는 상호간에 반대되는 점이 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은 그들을 비웃으신다. 그들은 마귀와 같고 하나님과 사람들 중에 있는

그의 왕국에 대해 원수가 되므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잠 3:34).

3. 하나님이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실 경우 그는 더 많은 은혜, 더 많은 지혜, 믿음, 거룩함

그리고 겸손을 주실 것이다. 여기에서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말을 첨가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6절).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서로만이

아니라 그의 심판을 세상에 내리시며 또한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하실 크신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겸손하여야 한다(4:7). 곧 그의 손은 능하시며 만일 여러분이 교만하면 여러분을 쉽게

끌어내리실 수 있으며, 여러분이 만일 겸손하다면 그의 손이 여러분을 높이실 것이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위한 최선의 것으로 아시게 되면 이 생에서나 그렇지 않으면 심판의

날에 그의 손이 이를 분명히 행하시게 될 것이다." 아래의 두 가지 점을 기억하자.

(1)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을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시는 모든 일을 인하여 우리를

겸손하게 하며 그에게 순복하도록 한다.

(2) 하나님의 손 아래서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겸손하게 하는 것은 구원과 높임을 받게 되는 지름길이

된다.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 인내하며, 그의 뜻에 순복하며 회개와 기도 그리고 그의 긍휼을

소망하는 일은 적당한 때에 이르러 그의 도우심과 구원을 이루게 하여 준다(약 4:7, 10).

Ⅱ. 이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대단히 어려운 환경에 있음을 안 사도 베드로는 그가 앞서 말한 크나큰

시련이 이르고 있다는 것과 따라서 그들 안에 이 어려움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이 고조되고 있다는

것을 예상하고 있다. 이러한 어려움의 문제는 그들 자신에 관한 것이 아니면 그들의 가정,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것이다. 이런 조심스러운 염려가 무거운 짐, 그리고 혹심한 시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예견한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최선의 뒷받침하고 있다. 그의 권고는 "너희의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라"는 것이다. "여러분들의 심령을 꿰뚫고 여러분의 영혼을 상하게 할 만큼 매우

통렬하며 정신을 혼미케 하는 여러분의 염려를 하나님의 지혜롭고 은혜로우신 섭리에 맡겨 버리라.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돌봐주신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염려에서

해방시키기를 원하시며, 여러분의 염려를 모두 맡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두려움을

막아 주시며 두려움 가운데 있는 여러분들을 도와주신다. 하나님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여러분을

향한 그의 부성애와 친절을 신뢰할 수 있을 만큼 모든 일들을 명하여 주신다. 따라서 일들이

상함이 없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는 일들만이 여러분에게 임할 것이다"(마 6:25; 시 84:11; 롬

8:28). 아래와 같은 사실을 알아두자.

1.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이라 할지라도 지나친 근심과 염려의 짐으로 괴로워하기 쉽다.

그리스도인들의 염려가 다양하며, 하나 이상의 것, 다시 말해서 개인적인 염려, 미래에 대한 염

, 자신에 대한 염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염려, 그리고 교회에 대한 염려들이 라는 것을

암시하면서 사도 베드로는 그것을 "너희 모든 염려"라고 부르고 있다.

2. 선한 사람들의 염려일지라도 대단히 무거운 짐이 되며 때로는 큰 죄가 될 수도 있다. 그들의

염려가 불신앙과 무기력한 것으로부터 야기될 경우, 그들의 염려가 마음을 괴롭히며, 혼미케 하며,

우리들의 직분 이행에 부적합하며,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는 일에 방해하게 것이 될 때 그

염려는 모두 죄악된 것이다.

3. 극단적인 무관심에 대한 가장 좋은 양약은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관심을 맡겨버리는 것"이며

매사에 있어서 모든 결정권을 그의 지혜와 그의 은혜로우신 결정에 맡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하심과 그의 인도하심을 확실히 믿는 신앙은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적으로 안전하게 한다.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행 21:14).


 근신하라 깨어라(베드로전서 5:8,9)

 

 

여기서 베드로는 세 가지 사실을 보여 준다.

Ⅰ. 지금까지 그가 묘사한 어떤 악한 사람보다도 더 잔인한 적으로부터 그들이 당하고 있는 위험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 원수들에 대해 베드로는 이렇게 말해 준다.

1. 위험을 주는 존재의 이름과 성품을 보여 준다.

(1) 이를테면 "너희를 궁지로 몰아 넣는 대적 즉 너희 영혼을 과녁으로 삼고 법정으로 끌어내어

고소하려는 큰 원수다."

(2) 너희 모든 형제를 기소하는 "사탄"이다. 그 이름은 "꿰뚫는다(strike through)." 또는

찌르다(stab)"라는 뜻에서 비롯된 말이다. 사탄은 우리의 선천적인 악성을 찌르고 우리의

영혼에 독을 넣으려고 한다. 만일 열정적인 사람이라도 사탄의 공격을 당한다면 아마도

배교하거나 파멸로 이끌려 갈지도 모른다.

(3) 사탄은 사람의 영혼을 넘어뜨리려고 맹렬히 부르짖는 굶주린 우는 사자와 같다. 그는 강하고

잔인하며 탐욕적이고도 사나운 존재다.

2. 사탄의 하는 일은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는 것"이다. 그의 계획은 영혼을 파멸시키며 삼키는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지치는 일도 없고 휴식도 취하지 않는다.

 

그들은 영혼 파멸을 위하여 올가미를 씌울 자를 찾아내려고 밤이나 낮이나 두루 다닌다.

Ⅱ. 여기서 베드로는 성도의 의무를 아래와 같이 몇 가지로 기술하고 있다.

1. "근신하라." 그리고 금욕과 겸손과 절제로써 안과 밖을 다스려야 한다.

2. "깨어라." 게으르거나 나태하지 말고 이 영혼의 강적으로부터 오는 미심쩍은 위험을 미리

인식하고 사탄의 사전 계획을 좌절시키고 우리의 영혼을 구원해야 한다.

3. "믿음으로 굳게 서서" 이를 대적하라. 사탄의 과녁은 우리의 믿음이다. 만일 그가 우리의 믿음을

탈취한다면 우리는 배교자가 되고 말 것이다. 사탄은 우리의 영혼을 파멸시키면 그의 목표가

달성되는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을 파괴하려고 핍박하며 세상의 주권자로

군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굳게 서서 이런 시험과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Ⅲ. 그들의 근심거리는 단순하지 않았다. 세상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싸움에 가담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몇 가지 사실을 알아보자.

1. 세상 각처에서 언제나 일어났던 대 환난들은 모두 사탄에 의하여 발생된 영적 싸움이었다. 사탄은

고소자이며 속이는 자일 뿐만 아니라 대박해자다. 그는 사람을 악의 도구로 사용하며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을 대적하는 전쟁에서 가장 큰 원수가 된다. "내가 너를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앎으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계 12:12)

2. 핍박 중에서의 사탄의 계획은 하나님의 신실한 종을 대적하여 그들의 영혼이 파괴되어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배신하게 하려는 것이다.

3. 깨어 조심하는 것은 언제나 필요한 법칙이지만 특별히 환난과 핍박 중에서는 더욱 중대한 일이다.

"세상적인 것을 사랑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사탄에게 정복당하기 쉽다."

4. "너희의 고소자요 유혹자이며 박해자인 사탄을 너희가 정복하려면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저를

대적해야 한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라"(엡 6:16).

5.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을 생각하면 아무리 어려운 고난도 견딜 수 있는 용기를 얻을 수 있

."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고 있느니라."

 

사도 베드로의 기도와 축복(베드로전서 5:10-14)

 

 

본서의 결론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

Ⅰ. 베드로는 가장 신중한 기도로 본서의 결론 부분을 시작하고 있는데, 그 기도에서 베드로는 하늘의

선물을 내려 주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우리를 부르시고 영원한 영광을 나누어주시는 분이시라고

하고 있다. 그 영광은 원래 하나님의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중보에 의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누어주시기로 약속한 것이다.

1. 그의 기도는 아래와 같다. 그것은 그들이 고난을 피하게 해줍시사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이 닥친다해도 그것은 잠간이며 견딜만한 것이다. "잠간 고난을 당한 후에" 하나님이 그들을

 

회복시킬 것이 되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믿음이 있는가 흔들어 보는 것이며, 약한

자를 강하게 하고 반석되시는 그리스도 위에 서서 영원히 견고하게 하실 것이라고 바라고

기도했다.

(1) 모든 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끄시고 개종시키고 위안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신다.

(2) 은혜의 나라로 부름 받은 모든 사람은 영원한 영광과 행복을 얻을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생을 상속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반드시 고난을 받아야 하지만 그

기간은 잠간 동안이다.

(4) 은혜 가운데서 선한 백성을 강하게 하시고 인내하게 하시고 안전하게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성취하기 어려운 일이며, 쉬지 않고 그의 약속을 의존하고

기도함으로써만이 가능하다.

2. 그의 송영.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11절)라는 말은 은혜의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자들이 영광을 그에게 돌리고 영원히 능력을 얻고 다스림을 받을 것이라는 송영이다.

Ⅱ. "이 은혜에 굳게 서라"(12절)고 베드로는 여기서 요점을 재확인한다.

1. 이것은 구원에 대한 교리를 확증시키고 강조하기 위하여 여기에 기록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야기는 선지자들에 의하여 예언된 것이지만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2. 유혹자들의 계략이나 원수들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받은 사람들로서는 믿음에 굳게 서야 할

것이라고 정중하게 권면한다.

(1) 지도자들이 고통 가운데서도 목표로 삼아야 할 중점은 백성들로 하여금 기독교 사상에 대한

확신과 탁월성을 고백하게 하는 것이다. 본서는 그의 능력을 총동원하여 이 일을 위하여

권유하고 입증한다.

(2) 우리가 지금 천국으로 가는 참된 길에 있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는 것은 우리를 신앙에 굳게

서게 하고 그곳을 추구하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Ⅲ. 베드로는 이 간단한 서신을 전할 사람으로 실루아노를 추천한다. 그는 무할례자들의 목회자이긴

하지만 믿음으로 존경받는 형제요 모든 형제에게 친밀감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기대가 되는

사람이다.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존경심은 그들의 노력을 통한 성공의 열매로써 영향을 받는다.

그들이 성실하다고 인정될 때 우리는 지도자로서의 그의 직분이 얼마나 훌륭한가를 인식하게 된다.

유대인들 가운데도 어떤 이들은 이방인 목회자인 실루아노를 대적하려는 편견이 있었으나 한번

믿음으로 충실한 형제임을 알게 되었을 때 즉시 그러한 편견은 벗겨졌다.

Ⅳ. 베드로는 인사와 엄숙한 축도로써 본서의 결론을 내린다.

1. 이 편지를 기록할 때 베드로는 할례받은 자들의 사도로서 흩어져 있는 교회들을 방문하려고

여행하던 중 시리아의 바벨론에 있었다. 거기서 베드로는 "함께 선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의 문안 편지를 받을 교회에게 보낸다. 바벨론의 그리스도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참예할 자로서 그들과 및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세상으로부터 선택을 받았

(1:2). 이 인사에서 베드로는 그가 믿음으로 낳은 그의 신앙의 아들이요 전도 여행에 함께 동행한

 

전도자 마가를 소개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는 정열적으로 서로 사랑해야 하며

위해서 기도하고 가능한 한 서로 도와야 한다.

2. 베드로는 성도 상호간의 뜨거운 사랑과 구제를 권면한다. 이것을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14절)는 말로 당시 그 나라의 평범한 풍속을 들어 표현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한 몸이요 신령한 지체의 복된 공동체라는 축도로 끝을 맺는다.

그가 비는 축도의 주제는 "평안"이다. 그것은 모든 선의 근본이요 모든 번영의 수단이다. 평강의

축복은 모든 믿는자가 받을 가장 큰 축복이다. 그는 이러한 축복을 비는 간절한 마음의 표시로써

"아멘"을 첨부한다.

 

 

베드로전서 강해/김효성

 

머리말

주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성경 원본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은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것이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19세기 말 웨스트코트와 호트에 제시된 불확실한 가설에 의하여 많은 교회들이 신약성경의 전통적 다수 본문을 버리고 불완전하고 오류투성이의 사본들(א와 B)을 중시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은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해석하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중세 시대 말, 종교개혁 직전과 같이, 오늘날 벌써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강해는 성경 본문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들은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하며, 주석과 강해서는 오직 작은 참고서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서론

드로전서의 저자는 사도 베드로이다(1:1). 그는 본 서신의 내용을 실루아노에게 불러주어 대서(代書)(아마, 번역)케 하였다(5:12). 베드로후서 3:1은 베드로전서를 가장 먼저 인용한 구절이다. 폴리갑, 터툴리안,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등은 본 서신을 인용하였고, 이레니우스는 본 서신을 인용하면서 베드로전서라고 언급하였다.

본 서신의 수신자는 ‘흩어진 나그네’라고 표현되는데, 그들은 주로 소아시아 지방에 살았던 이방인 신자들이었다. 베드로전서 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4:3, “[너희가]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본서의 저작 연대는 사도 바울의 옥중 서신들보다 후이며 사도 베드로의 순교 전인 대략 주후 65년 내지 66년일 것이다.

베드로전서의 특징적 주제는 그리스도인의 고난이다. 본서는 고난받는 성도들에게 소망과 위로를 주는 서신이다(1:6-7; 2:18-21; 3:14, 16-1; 4:12-19; 5:8-10)..

베드로전서의 각 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장, 믿음의 시련

2장, 성도의 특권과 의무

3장, 아내들과 남편들에 대한 교훈, 선행에 힘쓸 것

4장, 그리스도인다운 생활, 불시험을 이기라

5장, 장로들과 청년들에게 주는 교훈

  

 

1장: 믿음의 시련

1-7절, 산 소망과 믿음의 시련

[1-2절]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 . . .

베드로는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함과 그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서 그가 항상 데리고 다니시던 세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막 5:37; 9:2; 14:33).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소개한다. 사도는 주께서 친히 불러 세우신 자들로 열두 제자들과 바울을 가리킨다(눅 6:13; 롬 1:1).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나가서 전도하며 권능을 받아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쳤던 자들이었다(마 10:1; 막 3:14-15).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살고 있었던 성도들에게 편지하였다. 위의 땅들은 오늘날 터어키 지역에 해당한다. 성도들을 ‘나그네’라고 부른 것은 우리의 본향이 천국이기 때문이다. 역대상 29:15에 보면, 다윗은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베드로는 성도들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로 말하였다. 첫째, 성도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다. ‘미리 아심’이라는 말은 어떤 이들이 잘못 생각하듯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것을 미리 아셨다는 뜻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셨다. 그러나 이 말은 단지 그런 지식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의 선택을 나타내는 말이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으로 된 것임을 분명히 증거한다(엡 1:4-5, 11).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다.

둘째,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그의 피뿌림을 얻은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며 그를 따랐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을 미워하며 자신의 모든 소유를 버린 자들이다(눅 9:23; 14:26, 33). 그들은 오직 주님만 따르며 그의 말씀만 따르는 자들이다. 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뿌림을 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이다.

셋째, 성도들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고린도전서 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께서 이 세상에 오신 주된 목적과 사역은, 일차적으로 교회 창설 시기에 있었던 방언과 예언과 병고침 등의 초자연적 은사들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택하신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에 있었다. 죄인들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구원을 얻는다. 성령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밝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다. 이로써 성도는 죄악된 세상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다.

[3-4절]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 . . .

베드로는 말한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말은 삼위일체 하나님, 특히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의 관계를 나타낸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구별되시지만, 신적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시다. 이것이 성경이 밝히 계시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께서는 그 많으신 긍휼대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 우리들의 거듭남(중생, 重生)은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과 은혜로 된 것이다. 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중생의 근거이다. 죄의 형벌은 죽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즉 대리적 형벌의 속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씻음을 받았고 그것에 근거하여 영원한 새 생명이 우리 속에 심어진 것이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모든 사실을 확증하고 보증하였다. 하나님의 선택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도, 성령의 중생케 하심도 다 하나님의 크신 긍휼의 결과이었다.

성도는 거듭난즉 산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죄의 결과는 죽음과 멸망이었고 거기에는 두려움과 절망만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죄씻음과 영원한 생명을 얻은 성도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고 그 소망은 결코 헛되지 않은 산 소망인 것이다. 세상의 것들은 다 썩고 더러워지고 낡아진다. 그래서 시편 102편에는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라고 말했다(시 102:26). 또 이사야 40장에는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고 말했다(사 40:6-7). 그러나 성도들을 위해 하늘에 간직된 기업 즉 천국은 썩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는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것이다. 성도들은 그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하나님의 상속자들인 것이다(롬 8:17).

[5-7절]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이란앞절에 말한 천국을 가리킨다. ‘말세에 나타낸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시에 나타내신다는 뜻이다. 성도들이 부활하여 영생을 누릴 천국은 주 예수님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나타날 것이다. 또 성도들은 이 놀라운 구원 곧 천국을 얻기 위해 지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고 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다(요 10:27-28). 사도 바울도 말하기를, “이를[이 복음을]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고 했다(딤후 1:12).

하나님의 구원과 그 능력의 보호하심이 이와 같이 확실하기 때문에, 성도들은 세상에서 여러 가지 환난과 시험을 당하며 잠깐 근심하게도 되지만 도리어 크게 기뻐할 수 있다. 없어질 순금도 용광로 속에서 제련함으로써 나온다. 우리의 믿음의 시련은 금의 제련보다 더 귀하다. 성도들은 환난과 시험을 통해 인격의 단련을 받아 거룩하고 겸손하고 믿음 있는 자가 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선행들을 많이 함으로 장차 예수님의 재림시에 ‘잘했다’는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말하였다(롬 5:3-4).

1절부터 7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로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과 성령의 거룩케 하심을 입은 자들인가? 우리는 모든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는가? 우리는 속죄신앙을 가졌는가? 그렇다면, 이제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신구약 성경말씀에만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지금 하늘에 간직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인 천국의 산 소망을 든든히 붙잡자. 이 세상은 썩어지고 더러워지고 쇠해지는 허무한 세상이며 인생은 나그넷길이다. 그러나 천국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광스런 세계이다. 모든 성도들의 소망은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영원한 저 천국에 있다.

셋째로, 우리는 믿음으로 승리하자. 믿는 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는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환난과 시험거리들이 많지만, 우리는 그 속에서 믿음의 단련을 받는다. 우리의 믿음은 금과 같이 깨끗케 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굳건한 믿음으로 승리하자.

8-12절,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

[8-9절]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베드로가 편지하고 있는 소아시아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던 성도들은 참으로 귀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였으나 그를 사랑하였으며, 지금도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있지만 그를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이것은 성령의 증거와 사도들의 증거로 가능하였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5:26-27).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였다. 우리는 상대방의 가치를 알 때 그를 사랑하게 된다. 사람들은 돈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돈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들이 돈의 헛됨을 안다면 돈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사람의 영혼의 가치를 알 때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치를 알 때 그를 사랑할 수 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음을 알 때, 그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교제와 대화로 표현된다. 사람은 누구를 사랑할 때 그와 교제하고 대화하기를 좋아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성경을 읽고 기도하기를 좋아할 것이다. 또 사랑은 봉사와 수고로 표현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봉사하고 수고하고 돈을 쓰는 것은 아깝지 않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과 그의 일을 위해 봉사하고 수고하고 물질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특히 기쁨으로 표현된다. 사랑하면 기쁨이 생긴다. 그래서 사랑하면 얼굴이 예뻐진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기쁨이 생겨서 그런 것이다. 기쁨이 있는 얼굴은 예뻐 보이지만, 근심과 슬픔이 가득하면 미워 보이기 마련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주를 기뻐하였다. 찬송가 85장의 찬송 작가는 다음과 같은 가사를 썼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만민의 구주 예수여, 귀하신 이름은 천지에 온갖 이름 중 비할 데 없도다. 참 회개하는 자에게 소망이 되시고 구하고 찾는 자에게 기쁨이 되신다. 사랑의 구주 예수여, 내 기쁨 되시고 이제와 또한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

믿음의 목표는 영혼의 구원이다. 우리의 영혼은 죄로 인하여 죽었었고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주셨고 그의 대속 사역으로 인해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의 구원을 얻게 되었다. 우리가 선한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길을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해야 하며 그래야 구원을 얻고 영원한 영광의 천국에 확실히 들어갈 것이다.

[10-11절]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우리가 받은 구원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은혜요 그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연구하였던 바이었다. 또 그들 속에 역사하셨던 그리스도의 영께서 그가 장차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였으므로 선지자들은 그것이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는지 연구하였다. 베드로가 구약 선지자들 속에 역사한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표현한 것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증거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신성(神性)을 가지신 분이시므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시기 전, 즉 구약시대에도 선지자들 속에 역사하실 수 있었고 또 역사하셨다.

구약시대의 선지자들 속에 계셨던 그리스도의 영이 그가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셨다는 것은 구약성경 이사야 53:5-6과 시편 16:10을 예로 들 수 있다. 이사야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시편 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또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때와 시기를 연구했다는 것은 다니엘 9:24-26을 예로 들 수 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7x70)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永贖)되며 영원한 의(義)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令)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7x7)와 육십이 이레(62x7)가 지날 것이요 그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성밖에 둘러판 못]가 이룰 것이며 육십 이 이레(62x7)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70이레의 기한에 관해,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7x7)와 육십이 이레(62x7)가 지날 것이요”라는 말씀은 음력으로 69이레 즉 483년을 양력으로 환산하여(470년), 예루살렘 성의 중건을 허락받았던(느 2:5-6) 느헤미야의 때 즉 바사 왕 아닥사스다 20년(느 1:1)인 주전 445년으로부터 계산하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무렵이 된다고 본다.

[12절]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한 내용이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요 신약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드러났다. 예수께서는 구약 예언의 성취자로서 나타나셨다. 또 이 사실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 전도자들이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전파한 바이었다. 또 하늘의 천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보기를 원한 바이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는 자들이므로 하나님의 뜻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보기를 원했던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믿고 사랑하며 기뻐했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이미 예언되셨던 분이시다. 예언된 가 오셨다. 그는 예언된 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 삼일만에 부활하셨다.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했던 구원사역이 다 이루어졌다. 많은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했으나 믿고 사랑하며 그를 기뻐하였다. 우리도 그들 중에 속한다.

13-25절, 거룩과 사랑을 권면함

[13절]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영광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오직 믿음으로 받았으므로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야 한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라’는 말은 나태하고 해이하거나 정신 없이 살지 말고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는 태도를 가지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 곧 하늘에 간직된 기업이며(4절)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가리킨다(5절).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임할 천국과 우리의 몸의 부활과 영생이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과 이 영광스런 구원을 온전히 바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소망을 거기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만을 바라는 자들이다. 히브리서 6:11-12,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14-16절]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우리는 이전에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알지 못했던 때 좇던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욕망을 본 삼지 말고 우리를 구원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처럼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에서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 구원받기 전에는 우리가 불순종적이고 불결한 삶을 살았었으나, 이제는 순종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친히 말씀하셨다(레 11:45). 거룩은 이 세상의 더러운 죄악들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려진 상태를 말한다.

[17절]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 . . .

베드로는 말한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우리는 사람들을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자들이 되었으므로 나그네와 같은 세상 생활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이 아니다. 우리의 본향은 천국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이 산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불순종과 불결의 죄악들만 지어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의와 거룩과 선과 진실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18-19절]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救贖)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너희가 알거니와’라는 말은 복음 지식이 모든 성도에게 공통적이고 기본적임을 가리킨다. 속죄 신앙 없으면 구원받는 참 신앙이 없는 것이다. 복음의 기본적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배로운 피를 흘려 우리를 구속(救贖)하셨다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은과 금으로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가치 있다. 그것은 100억원이나 1조원으로도 살 수 없는 구원이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예수, 즉 참된 신성(神性)을 가지신 그 분의 보배로운 핏값으로만 가능하였다. 이렇게 귀한 은혜를 입은 우리이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배은망덕한 자가 되지 말고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20-21절]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예정된]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예수께서는 창세 전부터 예정된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말세에 우리를 위해 나타내신 바 되셨다. ‘이 말세’는 신약시대를 가리킨다. 구약 4천년의 역사가 지나고 이제 마지막 시대가 온 것이다. 이 마지막 시대는 예정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참 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속 사역을 이루신 시대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중에서 살리셔서 부활의 영광을 주셨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하나님께 우리의 소망을 두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두어야만 한다.

[22절]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 . . .

베드로는 말한다. “너희가 [성령으로](전통사본)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깨끗한]1)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진리를 순종한다는 것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거듭나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게 되었고, 우리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깨끗하게 되었고 그 깨끗해진 마음으로 거짓이 없이 형제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성도는 깨끗한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다운 삶이다. 예수께서도 ‘서로 사랑하라’는 한마디로 요약된 새 계명을 주셨다. 성도는 이미 실천하고 있겠지만 깨끗한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해야 한다.

[23-25절]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 . . .

베드로는 말한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우리가 얻은 거듭남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으로 되었다. 그 구원의 생명은 실제로 거룩한 순종과 뜨거운 사랑으로 계속 나타난다. 모든 육체는 풀같이 쇠하고 그 모든 영광은 꽃같이 다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말씀은 쇠하거나 없어지지 않고 영원하다. 이와 같이, 우리의 구원의 새 생명도 쇠하거나 없어지지 않고 영원하다. 따라서 여기에 근거한 성도들의 거룩하고 사랑하는 삶은 결코 쇠하거나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주 예수님의 재림 때에 받을 은혜 곧 영광스런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확실하게, 충만하게 소망하자. 또한 우리는 순종하는 자들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을 본받아 모든 행실 즉 생각과 말과 행위에 있어서 거룩한 자가 되자. 우리는 조상 때로부터 물려받은 망령된 행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깨끗이 씻음을 받았다.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순종함으로 우리의 영혼이 깨끗하게 되었으므로 깨끗한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해야 한다.

 

2장: 성도의 특권과 의무

1-3절,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

[1-3절]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 . . .

베드로는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2)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모든 . . . 모든 . . . 모든 . . .’이라는 표현은 ‘온갖 종류의’라는 뜻이다. ‘악독’은 악한 생각과 뜻을 가리킨다. ‘궤휼’은 거짓과 속임을 가리킨다. ‘외식’은 겉으로 선하게 보이나 마음 속에는 악독한 것이요, ‘시기’는 다른 사람의 잘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를 괜히 깎아내리고 미워하는 것이다. ‘비방’은 다른 사람에 대해 정당하지 않고 악하게 비난하는 것을 가리킨다. 본문은 성도들이 이런 것들을 다 버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옛사람의 성질들이며 마귀적 성질들이다. 구원받은 성도들도 이러한 죄성들을 가지고 있고 이런 악들에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런 악들을 다 버려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는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한다. 갓난아이들은 엄마의 젖을 사모한다. 아기들은 엄마의 젖맛을 알기 때문에 배가 고플 때 그 젖을 못 빨면 마구 울어댄다. 아기들은 아프거나 몸이 안 좋으면 젖을 잘 안 먹으려 하겠지만 그렇지 않고 정상적이면 엄마의 젖을 사모할 것이다. 갓난아이들이 엄마의 젖을 사모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아기들은 이렇게 엄마의 젖을 잘 먹을 때 건강하게 잘 자라게 된다. 이와 같이,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라는 원어(토 로기콘 아돌론 갈라)는 ‘거짓 없는, 순수한 말씀의 젖’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젖에 비유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한 말씀’이라고 말한 것은 이단사설들, 인본주의적 생각들이나 말들,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고 흥미만을 위주한 예화나 이야기들 등과 구별시킨 말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성경의 바른 교훈을 늘 읽고 듣고 배우고 연구하고 묵상해야 한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할 이유는 자라기 위해서이다.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자라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야 한다고 말했다(엡 4:13-16). 히브리서는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장성한 자를 구별하였다(히 5:13-14). 우리는 주 안에서 순수한 성경말씀을 섭취함으로 자라야 한다.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말했다(딤후 3:16-17).

‘구원에 이르도록’이라는 말이 고대 사본들과 역본들에는 있으나 전통사본들에는 없다. ‘구원에 이르도록’이라는 말이 혹시 원문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이 구절의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구원에는 세 단계가 있다.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는 과거적 단계이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났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베드로전서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이미 구원을 얻었다(엡 2:8-9).

영화(榮化)는 미래적 단계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이루어질 일이다(벧전 1:5).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얻은 자들이다(롬 8:24). 예수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다 장차 영화롭게 될 것이다.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성화(聖化)는 현재적 단계이다. 이것은 법적으로 이미 얻은 의(義)를 실제로 우리의 인격과 삶에서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빌립보서 2:12에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이미 받은 구원, 장차 영화롭게 완성될 구원을 현실 가운데서 드러내라는 것이다. 즉 온전한 경건 생활과 도덕 생활을 하라, 의와 선과 진실을 다 행하라는 뜻인 것이다. 이것이 성화(聖化)이다. 이것은 우리가 순수한 성경 말씀을 주야로 묵상함으로써 거룩한 인격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베드로는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말한다. ‘주의 인자하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가리킨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긍휼과 은혜와 인자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인자하심을 통해 의롭다 하심을 받았을진대 우리는 실제적으로도 의로운 자, 죄 없는 자, 도덕적으로 온전한 자가 되기를 힘써야 마땅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옛사람에 속한 모든 악독과 모든 거짓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같이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해야 한다.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고 연구하는 것은 가장 귀한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거룩한 신앙 인격으로 자라가야 하는 것이다.

4-10절,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

[4-5절]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지 못하고 버렸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신 예수님은 하나님께 택하심을 입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사랑하시고 택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보배로운 산 돌이시다. ‘산 돌’이란 그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시고 그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심을 뜻한다. 우리는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와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진다. ‘신령한 집’이라는 단수명사(오이코스 프뉴마티코스 )는 성도들이 모여 한 교회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교회는 돌들로 지은 건물에 비유된다. ‘신령한’ 집이라는 말은 교회가 단순히 물질적 건물이나 육체적 집합체가 아니고 성령께서 거하시는 집, 곧 성령의 전인 것을 나타낸다. 고린도전서 3:16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말했다.

신약교회는 성도들의 연합 속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다. 에베소서 2:21-22,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신약교회는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고 있다. 이것은 온 세계의 모든 성도를 포함하는 거대한 교회이다. 지금도 이 교회의 건축 소리가 온 세계 곳곳에서 요란하게 들려지고 있다. 한 명의 영혼 구원을 통해 벽돌 한 장이 쌓여 가는 이 건축은 예배당 건축보다 수천 배 더 큰 의미와 중요성이 있는 건축이다. 우리 모두는 비록 물질적으로는 유여하지 못해도, 이 영적 건축, 곧 전도와 성화의 일을 크게 여기고 힘써야 한다.

또 우리는 이 영적인 집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영적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제사장’이라는 원어(히에라튜마)는 ‘제사장들의 집단’을 가리킨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다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들로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영적 제사들을 드려야 한다. 그 영적인 제사란 우리의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삶과 헌신과 봉사의 삶을 가리킨다. 우리는 모든 악독과 속임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을 버리고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생활을 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6-8절]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 . . .

베드로는 말한다.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는 보배이시다. 주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버린 돌, 부딪히는 돌, 거치는 반석’이 되셨다. 많은 이들이 그 돌에 부딪혀 넘어졌다. 이와 같이 우리는 열심히 전하고 가르치고 권면할지라도, 예수님을 믿는 자가 있고 믿지 않는 자가 있다. 하나님의 예정은 이중적이다. 그가 창세 전에 어떤 이들은 영생으로 선택하셨으나, 다른 이들은 그들의 죄 가운데 버려두셔서 영원한 형벌에 이르게 정하셨다. 죄 가운데서 멸망받을 자들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신 것이다.

[9-10절]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우리에게는 왠 은혜요 왠 사랑인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은 인생에게 가장 큰 복이다. 본문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특권들을 몇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 되었다. 선택받은 증거는 우리의 진실한 믿음과 회개와 순종이다. 둘째로, 성도들은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왕 같은’이라는 원어(바실레이오스)는 ‘높은 특권을 가진’이라는 뜻이다. 성도에게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그를 섬기는 특권이 있다(히 10:19). 셋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이다. 세상 나라들은 부정과 불법으로 가득하며 음란하고 부도덕한 나라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진리와 사랑과 평강의 나라이다. 성도들이 그 나라이다. 넷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우리는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 우리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핏값으로 사신 바 된 귀한 보배들이다. 또 하나님의 것은 아무도 그 손에서 빼앗을 수 없이 안전한 보호를 받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귀한 특권을 동반한 구원을 주신 목적은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다. ‘기이한 빛’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식과 의와 행복을 가리킨다. 심히 무지하고 불경건했던 우리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죄악들 가운데 살았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공로로 값없이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허무와 불행과 영원한 죽음 아래 살았던 우리가 기쁨과 평안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이 지식과 의와 행복은 참으로 놀랍고 기이한 빛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기이한 은혜와 사랑, 이 지식과 의와 행복을 마땅히 찬송하며 증거하고 전파해야 한다.

베드로는 또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고 말한다.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긍휼도 얻지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입은 자가 되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백성답게 거룩하고 의롭게 살면서 하나님을 증거하고 찬송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4절부터 10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산 돌들로서 영적인 집으로 건립되어야 한다. 교회는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이다. 우리는 영적 성전 건축 곧 전도와 우리 자신의 성화를 힘쓰자.

둘째로,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영적 제사들을 드릴 거룩한 제사장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한 삶과 하나님을 위한 헌신과 봉사의 삶을 가리킨다.

셋째로, 우리는 성도의 특권을 깨닫고 보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요 그의 특별한 소유이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은혜와 특권인지! 우리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은혜와 특권, 곧 지식과 의와 영생과 행복을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순종하고 그 은혜를 다른 이들에게 증거하자.

11-12절, 육신적 욕망을 제어하라

[11-12절]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 . . .

베드로는 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인생은 ‘나그네와 행인’ 같은 존재이다. 죽을 때 하나님 앞에서 선악간에 판단을 받아 천국 혹은 지옥에 들어갈 것이다. 인생은 나그넷길이며 죽은 후에 돌아갈 영원한 처소가 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내세를 준비한다. 내세의 준비는 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죄 가운데 정신 없이 살지 않고 죄를 회개하고 인간답게 사는 것이다. 중생한 영혼의 새 성향을 거스르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며 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음란과 방탕 등 육신의 욕망들을 제어하고 죄짓지 말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

성도들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선하게 삶으로써 그들에게 바른 깨달음을 줄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을 그릇되이 비방하는 일이 많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바사 왕 아닥사스다를 모반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 한다는 비난을 받았었다(느 6:6). 바울은 교인들을 교묘하게 궤계로 자기 사람을 삼는다는 비난을 받았었다(고후 12:16). 그러나 느헤미야와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종들이었다. 성도들이 악한 세상에서 선을 행하면 그것이 세상에 빛이 되어 하나님의 긍휼의 날에 사람들이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자들이 될 수 있다. 주께서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16).

13-17절, 인간의 제도에 순복하라

[13-15절]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 . . .

베드로는 말한다.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디아 톤 퀴리온)[주님 때문에]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곧[이는 너희가]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것이 하나님의 뜻임이니라].”

이 세상에서 성도들의 선한 삶은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순종하는 데서, 예를 들어, 왕과 그의 보낸 관리들에게 순종하는 데서 나타난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주의 이름이 있기 때문에 또 세속 사회의 질서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로마서 13:1-2, 4, 6,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거스름]이니 거스리는[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잘못된 말들로 성도들을 비난하기를 좋아하지만, 성도가 범사에 선하게 처신하므로 세상 사람들이 성도에게 아무런 비난할 말이 없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성도는 오직 선해야 한다.

[16-17절]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뭇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죄와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 그러나 우리는 그 귀한 자유를 악을 변명하고 정당화시키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5:13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했다.

성도들의 선한 삶은 인간 관계에서 나타난다. ‘뭇사람을 공경하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존중하라’는 뜻이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을 존중해야 할 이유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이기 때문이며, 또 주께서 피흘려 사신 자들이 누구인지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눈에 보잘것없어 보이는 자라 할지라도, 만일 주께서 그를 위해 피흘려 돌아가셨다면, 우리는 그를 존중해야 한다. 또 베드로는 형제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왕을 공경하라고 말한다. 왕을 공경하는 것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이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에는 이웃의 노인들, 교회 장로들, 학교 선생들, 직장 상사들, 나라의 대통령이나 관리들에 대한 존경 등을 포함한다. 이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다.

18-25절, 종들은 주인에게 순복하라

[18-20절]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 . . .

베드로는 말한다. “사환들아, 범사에[온전히]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하나님을 향한 양심 때문에](원문, KJV, NASB)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사환들’이라는 원어(오이케타이)는 ‘집안의 종들’을 가리킨다. 베드로는 구원받은 종들에게도 선한 삶을 교훈한다. 그것은 주인들에게 순복하라는 것이다. 종들은 주인들을 온전히 두려워함으로 순종해야 한다. 또 종들은 선하고 관용하는 주인에게만 순종할 것이 아니고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순종해야 한다.

종이 어떤 잘못이 있어서 주인에게 매를 맞으면 칭찬받을 것이 없지만, 그가 선하게 행하는데도 애매히 고난을 받고 그 고난과 슬픔을 잘 참으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일이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하나님을 향한 양심 때문에]라는 말은 ‘주인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선한 생각 때문에’라는 뜻이라고 본다. 종이 애매히 당하는 고난을 잘 참는 것은 미덕(美德)이다.

[21-25절]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우리를]3)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길 잃은 양들과 같았으나](전통사본)4)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성도들은 이런 고난을 당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런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본이 되셨고 우리로 하여금 그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다. 선을 행하면서 고난을 당하는 삶--그것이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가야 할 길이다.

구주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고 그 입에 거짓이 없으셨으나 고난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는 욕을 받으시되 욕하지 않으셨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않으셨고 오직 공의의 심판자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하셨다. 그는 마침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대속(代贖)의 제물이 되신 것이다. 이로써 우리가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게 하셨다. 그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영원히 고칠 수 없는 죄의 병에서 나음을 입었다. 예수님은 선을 행하면서 고난을 당하는 삶의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우리는 과거에 길 잃은 양들과 같았었다. 우리는 목자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멀리 떠나 방황했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인생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찾아 방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와 감독이 되셨다. 우리는 그의 인도, 그의 간섭, 그의 보호, 그의 돌보심을 받게 되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 중심의 삶이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다.

11절부터 25절까지의 내용은 어떤 교훈들을 주는가? 첫째로, 우리는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한다. 우리의 선한 행실은 세상 사람들에게 빛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님 때문에 순복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통치자들과 관리들을 존중해야 한다. 그들은 세상의 질서와 안정을 위해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이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의와 선을 행하게 하기 위한 자유이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의와 선을 행하자.

넷째로, 아랫사람은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윗사람에게 순복해야 한다. 선하고 관용하는 자에게 뿐 아니라, 까다로운 자에게도 그러해야 한다. 예수님은 선을 행하다가 고난받는 자들의 본이 되셨다.

 

3장: 선행에 힘쓰라

1-7절, 아내들과 남편들에 대한 교훈

[1-2절]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 . .

베드로는 말한다.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道)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순복하라’는 원어(휘포탓소)는 ‘순종하라, 복종하라’는 뜻이다.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순종하며 복종해야 한다. 사도 바울도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고 말했고(엡 5:22-23), 또 “아내들아, 남편[들]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고 말했다(골 3:18). 아내들이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명령이며 아내들의 의무이다. 거기에는 이의(異意)가 있을 수 없다.

아내들이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할 중요한 한 목적은 복음을 순종치 않는 자, 즉 믿지 않는 남편이라도 아내의 말로가 아니고 그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말로 구원하기 힘든 남편들이 그의 행위로 감동을 받아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오게 된다는 뜻이다. 말로 안 되면 행위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원리로, 우리는 이웃 사람들을 말로 구원하기 어려울 때 우리의 선한 행위로 그들을 구원할 수 있게 힘써야 할 것이다.

남편을 구원시킬 아내의 행위는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말한다. ‘두려워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함과 남편을 두려워함을 다 포함하는 것 같다.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을 자기 주인과 같이 생각하여 두려워함으로 순종해야 할 것이다. ‘정결한’이라는 원어(하그노스)는 ‘순결한, 거룩한’이라는 뜻이다. 아내들은 특히 음란한 세상 속에서 단정하고 순결하며 거룩해야 한다.

[3-6절]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여성도들은 머리를 꾸미고 금은 보석의 목걸이, 귀걸이, 반지 등의 장신구를 차고 값비싼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 같은 외적인 단장에 치중하지 말아야 한다. ‘머리를 꾸민다’는 원어(엠플로케스 트리콘)는 ‘땋은 머리’라는 뜻이다. 이 말씀은, 머리 단장이 죄악되므로 성도들이 머리 단장을 도무지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머리털은 헝클어져 있는 것보다 자주 씻고 깨끗하고 단정한 것이 필요할 것이다. 또 금은 보석과 아름다운 옷도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누릴 수 있는 정당한 것들일 것이다. 단지, 성도들은 외적인 단장을 크게 여기거나 거기에 너무 마음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이런 것들의 가치가 극히 작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여성도들의 단장은 내면적이어야 한다. ‘마음의 숨은 사람’은 사람의 내면적 인격성을 가리킨다. 여성도의 내면적 인격은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으로 단장되어야 한다. ‘안정한’이라는 원어(헤쉬키오스)는 ‘조용한’이라는 뜻이다. 여성도들은 특히 온유하고 조용한 심령으로 자신을 단장해야 한다. 몸은 세월이 갈수록 쇠해지지만, 이러한 고상한 인격성은 그 성질상 썩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다. 이런 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외적인 단장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고, 내면적 단장, 곧 고상한 인격성이 가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 때 우리가 받을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인 것이다.

베드로의 교훈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여성도의 이러한 덕은 예전부터 경건한 여성도들이 가졌던 덕이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유행하는 인간 풍습에 따라 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여인들은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였고 이런 덕으로 자신들을 단장하였던 것이다. 그 대표적 예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이었다. 그는 자기 남편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불렀다. 창세기 18:12에 보면, 그는 속으로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의 남편에 대한 그의 복종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오늘날도 여성도들은 사라처럼 선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7절]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남편들은 지식을 따라 아내들과 동거해야 한다. 여기서 말한 지식은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관한 지식을 가리킬 것이다. 결혼은 남녀가 결합하여 한 몸과 한 인격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밀접한 관계이다. 결혼의 목적은 첫째, 남자가 외롭지 않도록 돕는 아내가 함께 살게 하기 위함이며(창 2:18), 둘째, 자녀 출산을 위함이며(창 1:27-28), 셋째, 음행 방지를 위함이다(고전 7:2).

결혼에 있어서 남편의 의무는 사랑이다. 바울은 남편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주심같이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교훈하였다(엡 5:25). 그것은 무조건적, 희생적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아내들은 남편들의 따뜻한 한 마디의 말과 얼굴 표정과 행위에 집안 일의 수고를 잊고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낀다.

성(性)에 대한 바른 지식도 필요하다. 인간의 성은 더럽거나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아름다운 것이다(창 2:25). 그것은 사랑의 도구이다. 그러나 성은 단지 부부 관계에서만 사용되어야 하며, 그렇지 못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이유가 된다. 음행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남편들은 아내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아내는 남편의 갈빗대이며, 남편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 사도 베드로는 남편들이 아내들을 귀히 여겨야 할 이유로 첫째, 아내들이 더 연약한 그릇이며, 둘째, 그들이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라는 것을 들었다.

여성은 대체로 남성보다 몸이 연약하고 마음도 약하고 예민하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에 남자들만 아니고 여자들도 참여할 것이다. 이런 연약한 아내들이 남편들과 자녀들을 위해 노동과 같이 힘든 집안 일을 하며 늙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그들을 외롭게 하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슬프게 하지 말고, 귀히 여기고 보호하고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 아내들은 생명의 은혜, 즉 영생과 천국을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들이다. 아내들은 이 세상에서만 아는 관계가 아니고 천국에까지 같이 갈 반려자들인 것이다. 물론 천국에서는 부부로서의 짝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내들은 천국에서도 함께 기쁨과 영광을 누릴 영원한 동료들이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아내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남편들은 지식을 따라 아내들과 동거하고 그들을 귀히 여길 때 그들의 기도가 막히지 않을 것이다. 부부의 사이가 좋아야 기도도 잘 되지, 부부가 서로 다투고 나면 기도의 문이 막힌다. 왜냐하면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은 것도 죄가 되기 때문이다. 죄는 우리의 기도의 문을 가로막는다. 요한일서 3:21-22,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우리의 선한 생활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성도들은 가정에서부터, 결혼한 이들은 부부 사이에서부터 성경의 교훈대로 바르고 선하게 행해야 한다.

1절부터 7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순복해야 하며, 심지어 믿음 없고 까다로운 남편에게도 선한 행실로 감동을 주어야 한다. 자기 남편이 좋은 사람이든지 그렇지 못한 자이든지 간에 그렇게 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명령이며, 아내로서의 마땅한 의무이다. 그럴 때 믿지 않는 남편도 구원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성도들은 머리를 꾸미거나 장신구를 걸치거나 아름다운 옷을 입는 등의 외적인 단장을 힘쓰지 말고, 온유하고 조용한 순종의 내면적 덕으로 단장하기를 힘써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마땅하고 또 가치 있는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들이므로 이 세상적 가치관을 버리고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야 한다. 셋째로, 남편들은 지식을 따라 아내들과 동거하며 아내들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남편들은 결혼의 의미와 목적과 의무를 잘 이해하며 아내들이 남편들의 갈빗대이며 더 연약한 그릇이며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럴 때 남편들은 기도가 막히지 않을 것이다. 좋은 부부 관계는 신앙 생활에 유익하지만, 서로 자주 다투면 신앙 생활에도 해가 된다.

8-12절, 선한 마음을 가지라

[8-9절]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 . . .

베드로는 말한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친절하며](전통사본)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몇 마디 더 권면하고 그치려 했던 것 같으나 성령께서 계속 좀더 교훈하도록 감동하셨던 것 같다.

첫째로, 그는 우리가 다 마음을 같이하라고 말한다. ‘마음을 같이하여’라는 원어(호모프론)는 ‘생각을 같이하여’라는 뜻이다. 교회의 단합은 생각의 일치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로마서 12:16, “서로 마음[생각]을 같이하며.” 고린도전서 1:10, “같은 마음[생각]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빌립보서 2:2, “마음[생각]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생각]을 품어.” 생각이 같아야 말과 행동도 같아질 수 있다. 분열은 생각의 다름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이 하나 되도록 힘써야 한다.

둘째로, 그는 우리가 서로 체휼하라고 말한다. ‘체휼하다’는 원어(쉼파테스)는 ‘같은 감정을 가지다, 동정심(同情心)을 가지다’라는 뜻이다. 사람은 생각이 첫째로 중요하지만, 또한 감정도 중요하다. 감정이 같은 것이 좋다. 어떤 이는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이는 그것을 싫어하면 교회의 일치와 단합을 이루기 어려울 것이다. 성도들이 어떤 일에 대해 좋아하는 감정이나 싫어하는 감정이 같은 것이 교회의 일치와 단합을 위해 바람직하다.

셋째로, 그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그것은 성도의 기본적인 덕이다. 예수께서는 친히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쉽게]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는다”고 말했다(고전 13:4-7).

넷째로, 그는 우리가 남을 불쌍히 여기라고 말한다. ‘불쌍히 여기다’는 원어(유스플랑크노스)는 ‘인정을 가지다, 불쌍히 여기다’는 뜻이다. 우리는 상대방의 부족과 연약을 볼 때 멸시하거나 배척하지 말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바울도 이런 마음을 가질 것을 교훈했다. 에베소서 4:32, “[너희는]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다섯째로, 그는 우리가 친절하라고 말한다. ‘겸손하며’라는 본문(타페이노프론)5)은 전통사본(Byz)에는 ‘친절하며’(필로프론)라고 되어 있다. 겸손함과 친절함은 거리가 멀지 않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겸손하며 친절해야 한다.

여섯째로, 그는 우리가 남에게 보복하지 말라고 말한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주 예수께서는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고 말씀하셨고(마 5:39) 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라”고 하셨다(마 5:44 전통사본). 바울도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고 교훈하였다(롬 12:17).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위해 부르심을 입었다. 그 복이란 죄사함과 구원의 복, 평안의 복, 또 영광스런 천국과 영생의 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이 구원의 복을 깨닫고 귀히 여기고 감사하며 또 서로에게 이 복을 빌어야 할 것이다. 이 복을 잃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부족한 형제라 하더라도 이 복에서 제외되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않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진심으로 상대방을 위해 이 복을 빌어야 할 것이다.

[10-12절]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성도는 영원한 생명을 사랑하고 천국의 좋은 날들 보기를 원한다. 죽음은 죄 때문에 왔고 그것은 슬프고 고통스럽고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생을 주셨고 천국의 복된 날들을 약속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모든 일을 확증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 구원의 은혜를 받고 이런 놀라운 약속의 세계를 바랄진대, 거기에 합당한 자들답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

우선, 우리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고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악한 말’은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남의 명예에 손상을 주는 말을 가리킨다. 물론 불결하고 더럽고 음란한 말도 악한 말에 포함된다. 성도는 그런 악한 말을 그쳐야 마땅하다.

또 우리는 입술로 궤휼 즉 속임과 거짓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요한계시록 21:8에는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말했고, 또 요한계시록 22:15에는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고 말씀했다.

성도는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해야 한다. 선은 남에게 마음에 평안과 기쁨과 위로를 주는 것이다. 또 성도는 서로 간의 화평을 구해야 한다. 성도는 악과 거짓을 버리고 선과 화평을 구해야 한다. 이것은 말에 있어서 뿐 아니라 행실에 있어서도 그러해야 한다.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선함)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관심과 돌보심을 나타낸다. 그것은 그가 연약할 때 격려하시고, 낙심할 때 위로하시고, 위험할 때 지키시고 도우시며, 범죄할 때 근심하시고 책망하시는 그의 관심과 돌보심이다. 또 주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신다. 의인이 감사할 때나 회개할 때나 무엇을 간구할 때 하나님은 그의 기도와 간구를 잘 들어주신다. 그러나 주의 낯은 악을 행하는 자들을 향하신다. 그것은 그가 그들의 악한 행위를 보시고 판단하시고 기억하시고 진노하시고 심판하시고 징벌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긍휼이 풍성하시지만, 악한 자들에 대해서는 엄위하시고 두려우시다.

8절부터 12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감정을 같이하도록 힘써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참된 일치의 모습이 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되, 불쌍히 여김과 친절함을 가지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참된 사랑이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보복하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야 하겠다. 이것이 본문이 주는 교훈들이며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이다. 우리는 모든 악을 버리고 사랑과 화평을 구해야 한다.

13-17절, 선을 행하며 고난을 받으라

[13-14절]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 . . .

베드로는 말한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너희가 선을 본받는 자라면]6)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의 때문에]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예수 믿는 자들은 선을 본받는 자들이다. 우리가 선하게 살면, 양심이 있는 자들은 그런 우리를 잘 해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의 때문에 고난을 받을 때가 있다. 의 때문에 고난을 받는 자는 복 있는 자이다. 주 예수께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셨다(마 5:10). 그때 우리는 그들의 위협으로 인해 두려워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현세와 내세의 확실한 약속과 보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의 위협을 두려워할 것도 없으며 근심하고 염려할 것도 없다.

[15절]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하나님을]7)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우리는 마음에 하나님을 주님으로 거룩하게 모셔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절대주권자로 삼으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권적 섭리자이시기 때문에, 악한 자들의 위협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공의로 통치하시고 보응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모든 자에게 대답할 바를 온유와 두려움으로 항상 예비해야 한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님의 재림과 천국과 영생이다. 우리는 왜 이런 것들을 소망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통해 기적들과 성령의 은사들로 밝히 증거해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성령께서는 우리의 심령을 밝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다. 천국 소망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당연한 결과이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 간증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답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서  연약성과 죄성을 가진 죄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시라도 교만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다. 우리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16-17절]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 . . .

베드로는 말한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이 너희가 악을 행한다고 비난하는 일 때문에](전통본문)8)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우리는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과 행동으로 나타낸다(마 12:35). 우리가 악한 것과 거짓과 음란한 일을 많이 생각하면 우리의 말과 행위는 악하고 거짓되고 음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거룩하고 선한 일을 많이 생각하면 우리는 거룩하고 선한 말과 행위를 가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선한 삶을 살 수 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을 행함에도 불구하고 그릇된 비난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성도가 선한 양심을 가지고 끝까지 선하게 말하고 선하게 행동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악을 행한다고 비난했던 그들의 악한 비난이 거짓임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낫다.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은 당연히 받을 고난이지만,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고난을 당하셨다. 바울과 그 외의 사도들도 그러하였다. 우리도 이런 고난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13절부터 17절까지는 성도가 선과 의를 행하다가 고난과 핍박을 당하면 복 있는 자이며 그렇게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런 고난을 당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는가?

첫째로, 우리는 의와 선을 행하다가 핍박과 고난을 당할 때 핍박자들을 두려워하거나 근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주님으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역사와 우리 개개인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주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지키실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소망의 이유에 대한 대답을 항상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예비해야 한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장차 천국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릴 것이라는 소망은 성경에 증거된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과 믿음과 소망의 근거이다.

셋째로, 우리는 항상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항상 끝까지 선한 양심을 품고 선한 말과 선한 행동을 해야 한다. 그것이 성도다운 행동이요 또 결국 선으로 악을 이기는 길이다.

18-22절,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

[18절]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고난을 받으사]9)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성령]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한 번 죄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 ‘한 번’이라는 원어(하팍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번에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고 다시 반복될 필요가 없음을 나타낸다(히 7:27; 9:12, 26, 28; 10:10, 12, 14). 그의 고난과 죽음은 우리로 하나님과의 연합과 화목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 즉 그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심이었다.

죽임을 당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살리심을 받으셨다. 그는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 본절과 다음절(19절)은 성경에서 난해구절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육체와 영을 인간 예수님의 육체와 영으로 보는 것(RSV, NASB)은 정당하지 않은 것 같다. 영이 살리심을 받으려면 영도 죽임을 당하셨어야 할 것이지만, 본문은 단순히 육체와 영을 대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육체는 예수님의 인성, 즉 인간으로서의 영육을 가리키고, 영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KJV, NIV). 즉 예수께서 인간으로는 죽으셨으나 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 삼일만에 부활하셨다는 뜻이라고 본다.

[19절] 저가 또한 영으로[성령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저가 또한 영으로[성령으로](KJV, NIV)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영들에게 가셔서 전파하셨었느니라](원문).” ‘옥에 있는 영들’은 다음절에 말씀한 대로 노아 시대에 홍수로 멸망당한 자들의 영들이다. 본절은 성경에서 난해구절들 중 하나이다. 예수께서는 언제, 어디에서, 그리고 왜 저 영들에게 가셨고 또 무엇을 전파하셨는가?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다. 천주교회는 예수께서 죽으신 후 구약 성도들이 거하고 있던 ‘림보’(‘지옥의 변두리’라는 뜻)에 내려가셔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그들을 이끌어 천국에 들여보내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본문은 죽은 악인들의 구원의 가능성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것은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 나타난 교훈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에서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의 입을 통해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고정된 큰 간격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눅 16:26). 루터교회는 본절을 예수께서 (부활 직전 혹은 직후에) 지옥의 영들에게 가 승리의 영광을 선포하셨음을 뜻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 전에 지옥에서 승리적 행진을 하신다는 것은 적당한 생각이 아닐 것이고, 부활 후에 가셨다면 영으로 가셨다는 것이 적당하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본절을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것이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하나의 승리의 선포 사건이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바빙크, 크레다너스). 그러나 어거스틴을 비롯하여 기타 많은 정통적 성경학자들은 본절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지옥에 있는 저 영들에게 옛날 노아 시대에 성령으로 노아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아마 이 마지막 해석이 가장 적절한 해석일 것이다.

[20절]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음란하고 강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을 오래 참으셨고 심판을 120년간 유보하셨었다. 그 동안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다. 그러나 노아의 8식구들 외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구원받는 자들의 수는 심히 적었다. 오늘날도 그러하다. 예수께서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로 가다가 마침내 멸망할 자들은 수가 많으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가다가 영생에 이를 자들은 수가 적다고 말씀하셨다(마 7:13-14). 구원받는 자들의 수는 비교적 적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로 그 적은 수에 들기를 원하며 감히 그 수에 든 것을 감사한다.

[21절]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의 물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는 표가 되는 세례에 비교할 수 있다. 세례는 죄씻음을 통해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사는 것을 상징하고 확증한다. 물론, 물로 받는 세례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은 후에도 부족하고 연약할 때가 없지 않다. 그러므로 본문에는 세례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 찾아가는 것’이라고 표현되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받은 자들은 선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영접하고 의지하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인 것이다.

[22절]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본문은 예수님의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계심을 증거한다. 고난의 주께서는 부활하셔서 영광의 천국에 올리우셨고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영광을 누리고 계신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은 성경 여러 곳에서 증거하는 바이다. 마가복음 16: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사도행전 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로마서 8:34,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또한 모든 선한 천사들은 그에게 순복하고 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왕권, 영계와 물질계에 행사하시는 왕권을 가지고 계심을 나타낸다.

18절부터 22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셨고 삼일만에 다시 사셔서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셔서 우주적 왕권을 행사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자. 둘째로, 우리는 옛날 노아 시대나 소돔 고모라 시대보다 더 악하고 음란한 오늘날 세상과 세상의 풍조를 멀리하며 배격하고 노아와 그의 여덟 식구들같이 오직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영접하며 순종하며 살아가자. 셋째로, 우리는 죄가 없으셨으나 우리의 죄를 위해 대속의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도 선을 행하면서 고난받는 자들이 되자. 우리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고난받는 자들이 되자. 

 

4장: 그리스도인다운 생활

1-6절,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

[1-2절]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10)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무장하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성도를 가리켰다고 본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의 죄 때문에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기 때문에(3:18) 우리도 같은 마음과 생각으로 무장해야 한다. 즉 우리도 죄에 대해 죽은 자로 여겨야 한다. 로마서 6:6-7,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속의 고난을 받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하심이었다. 사람의 욕심은 죄를 만드는 원인자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는 사람의 욕심을 따라 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룩하고 선한 생활을 해야 한다. 에베소서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갈라디아서 5:16-17,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절]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할 이유는 이방인의 뜻을 좇아 죄악된 생활을 한 것이 지나간 때로 족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의 삶에 이끌리고 거기에 빠져 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는 지난날의 죄악된 삶으로 족하다. 그 죄악된 삶도 부끄러운 것뿐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말고 죄의 낙을 누리며 살지 말아야 한다. 더 이상 죄악된 일에 기웃거리지도 말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경고하기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고 하였다(롬 8:13). 성도에게도 죄의 충동은 있으나 성도는 더 이상 죄에 빠져서는 안 된다. 지나간 때가 족하다!

[4-5절]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성도가 세상 친구들과 같이 극한 방탕의 생활을 하지 않으면 그들은 그를 이상히 여기며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세상 친구들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심판주이시다. 디모데후서 4:1-2,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의인들과 악인들은 마지막 날에 다 부활하여(요 5:29; 행 24:15)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자기들의 죄들을 다 직접 고백하게 될 것이다.

[6절]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사람들을 따라, 사람들이 받는 것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하나님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사람은 육신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장차 죽은 자들이 다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 현재 죽은 자들에게도 그들이 살아 있었을 때 복음이 전파되었다. 비록 그들이 죽었지만 그들 중 어떤 이들은 그 영이 영생의 생명이므로 살아 있다. 육체로는 사람들이 받는 것처럼 심판을 받아 죽었지만, 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죄에 대해 죽은 줄 알고 죄를 멀리해야 하며 더 이상 범죄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죄악된 삶이 지나간 때로 족한 줄 알고 우리의 남은 날들을 사람의 정욕을 따라 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 또 우리는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며 두려워해야 한다.

7-11절, 근신, 사랑, 대접, 봉사

[7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 . . .

베드로는 말한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이 세상의 만물은 시작과 끝이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때가 시작이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때가 끝이다. 성경의 문자적 연대 계산에 의하면, 신약시대는 하나님께서 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지 4천년이 지난 때에 시작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세상의 종말에 대해 말하였다. 고린도전서 10: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요한일서 2: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신약시대는 종말의식을 가지고 살 시대이다.

이 세상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기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합한 생활을 힘써야 한다. 본문은 그런 삶을 서너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것은 세상의 일과 쾌락에 빠져 있거나 술취하고 방탕하지 말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깨어 기도하기를 힘쓰는 것을 말한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은혜의 일들에 대해 그에게 감사하며 우리의 부족과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더욱 이해하고 그 뜻을 행할 힘을 간구하여 얻는다.

[8절]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둘째로, 우리는 열심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베드로전서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이것은 예수께서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순종하는 일이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다(롬 13:10). 또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잠 10:12). 주께서도 새 계명을 주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심으로 서로 용서하는 본을 친히 보여주셨다. 사도 바울도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견딘다고 말했다(고전 13:7).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오래 참고 용서하며 사는 것이다.

[9-10절]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셋째로, 우리는 서로 원망 없이 대접해야 한다. 대접하는 것은 서로를 마음으로나 말로 너그럽게 대하며 상대방이 아프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방문하고 물질로 돕는 것이다. 성도가 서로 대접하는 것은 받을 것을 예상하고 베푸는 것이 아니고 그냥 베푸는 것이다. 계산적이지 않게 대접하는 자는 상대방이 자신을 위하지 않을 때라도 속상해 하지 않고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받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재능과 건강과 재물을 주셨다. 우리가 처한 가정 환경이나 사회 환경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다. 이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우리의 것인 양 우리 마음대로 쓰지 말고, 하나님의 것들을 맡은 선한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서로의 유익과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필요하다면, 우리는 기꺼이 드리는 심정으로 서로 봉사해야 할 것이다.

[11절]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말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주신 말씀으로 말하는 것처럼 하고 봉사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주신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범사에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영광과 권능은 우리에게 있지 않고 오직 영원히 하나님께만 있다.

7절부터 11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베드로는 성도들이 세상의 종말이 가까움을 느끼면서 힘써야 할 일에 대해 몇 가지로 교훈했다.

첫째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의 일들과 육신의 쾌락에 너무 빠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세월을 아껴야 한다. 우리는 기도하는 경건한 생활을 힘쓰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더욱 깨닫고 그 뜻을 힘써 행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열심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주의 사랑을 본받아 거룩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열심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우리는 사랑함으로써 상대의 부족과 연약을 용서해야 하고, 우리의 사랑이 식어지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원망 없이 서로 대접해야 한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무엇을 받을 것을 생각하지 말고 그냥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마음으로, 말로, 시간으로, 물질로 서로를 향해 너그럽게 대하기를 힘써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받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가진 재능과 지식, 건강과 시간, 물질을 가지고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섬겨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

12-19절, 성도의 고난

[12-13절]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 . . .

베드로는 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성도들에게는 시련하는 고난들이 있다. 그것들은 마치 금광석을 제련하는 용광로의 불과 같은 고통스런 시련들이다. 용광로에 넣어진 금광석에서 불순물들이 제거되고 마침내 순금이 나오듯이, 성도들이 당하는 불시험들은 성도들의 죄악성과 죄악된 습관과 불성실하고 게으른 연약성을 제거하고 더욱 경건하고 거룩하며 충성되고 의롭고 선하고 온유 겸손하고 진실한 인격이 되게 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불시험을 당할 때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성도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다. 시편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요한복음 1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사도행전 14:22,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성도에게 닥친 고난이 자신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든지, 아니면 순수한 시련의 고난이든지 간에, 성도가 당하는 고난은 이상한 일이 아니고 정상적인 일이다.

성도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고난은 2천년 전 십자가 위에서 이미 완성되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고난들은 성도에게 남아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죄가 없으셨고 의로우셨으나 우리의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셨다. 이와 같이 성도도 의롭고 선하게 살지라도 이것과 비슷한 고난을 당한다. 마태복음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골로새서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물론, 고난은 우리의 죄성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의의 고난을 당할 때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며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인 줄 알고 즐거워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재림하실 때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지나가고 있다. 기쁨도 슬픔도 지나간다. 그러나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는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슬픔이 나뉘게 될 것이다. 그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자들이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소유한 자들이다. 성도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현실의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14절]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그는 그들에게 비난을 받으셨으나 너희에게는 영광을 받으셨느니라.]11)”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들이다. 베드로는 그 이유로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께서 그들 위에 계심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임이 확인된 자들이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를 핍박하고 욕할 때 그들 위에 계신 성령도 비난하고 욕한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과 성령님을 믿고 의지하고 섬기며 그에게 영광돌렸다. 성도는 확실히 하나님의 사랑받는 백성이 되었다.

[15-16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이 일로](전통사본)12)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성도는 자기 잘못 때문에 고난을 당해서는 안 되며 살인하거나 도적질하거나 악을 행하거나 남의 일의 참견하다가 고난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성도가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당할 때는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17-18절]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하나님의 집 곧 교회 안에서 심판이 시작된다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교회 안에 섞여 있는 가라지와 염소 같은 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일 것이다. 성도에게는 단지 하나님의 징계나 단련이 있을 뿐이다(히 12:8). 그러나 현재 성도들에게 엄한 징계나 단련이 있다면,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마지막 날에 내려질 심판은 얼마나 더 엄중하겠는가? 성도들은 현재 하나님의 징계의 고난을 체험함으로 오히려 장차 하나님의 진노와 정죄로부터 자유를 얻지만, 악인들은 현재 평안할지라도 장차 영원한 형벌의 멸망을 얻을 것이니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모른다! 또한 의인들이 고난 중에 겨우 구원을 얻는다면, 경건치 않은 죄인들은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 앞에 어떻게 설 수 있겠는가?

[19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 하나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이란 앞에서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12절),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13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는 것’(14절),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는 것’(16절) 등으로 표현되었다. 성도의 고난은 아무리 불같은 시험일지라도 성도를 단련시키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이다. 3:17,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고난 중에서 성도가 취해야 할 또 하나의 태도는, 끝까지 선을 행하는 자로서 처신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신실하신 조물주께 부탁하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약속에 신실하시고 전능하신 주권자이시므로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예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 큰 소리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다(누가복음 23:46).

성도들에게는 고난이 있다. 그것은 원광을 용광로에서 제련하듯이 그들을 시련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는다. 그러나 선을 행하면서 고난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그런 유의 고난을 당할 때 이상히 여기지 말자.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은 남아 있는 죄악된 성질과 습관과 연약성을 제거하여 좋은 인격을 만드는 단련의 과정이다. 또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의미가 있다. 특히, 성도들이 믿음 때문에 당하거나 의롭고 선하게 살면서 당하는 고난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다.

성도들은 고난을 당할 때 우선 그 고난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고난을 통해 순금과 같이 신앙 인격의 단련을 받기 때문이다. 또 성도들은 그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또 그들은 고난 중에도 끝까지 선하게 살면서 자기 영혼을 신실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의탁해야 한다.

 

5장: 장로들에게 주는 교훈

1-6절, 장로들과 젊은이들에 대한 권면

[1절]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 . . .

베드로는 말한다.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로라.” ‘장로들’은 일반 성도들 가운데서 감독자로 선택되어 세움받은 자들을 가리킨다. 사도 베드로는 자신을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라고 증거한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었다(요 21:15, 16, 17). 또 사도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들이었고, 다 그의 부활의 증인이기도 하였고(행 1:21, 22; 2:32; 3:15; 5:30-32 등), 또 그의 재림 때에 영광의 부활에 참여할 자들이었다. 진실한 모든 성도들은 다 주의 재림 때에 그 영광에 참여할 자들이다.

[2-3절]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의무감 때문에, 억지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13)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준비된 마음으로, 열심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본문의 장로는 목사와 장로를 다 포함한다. 신약성경에서 장로는, 장로교 헌법에 표현한 대로, 설교와 치리의 일을 맡은 목사와 치리의 일만을 맡은 장로를 다 포함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고 말했다(딤전 5:17). 그러므로 장로의 직무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는 일이다. 그러므로 장로들은 두렵고 떨림으로 성실하게 그 직무를 다해야 한다. 양무리를 치는 일 즉 목양(牧羊) 혹은 목회는 성도들의 영적인 상태를 돌아보는 일이다. 그것은 담임목사에게만 맡겨진 일이 아니고 장로들에게도 맡겨진 일이다. 그들은 다 목양의 직무를 맡았다.

장로들은 하나님의 양무리를 칠 때 다음 세 가지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첫째로, 그들은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해야 한다. ‘부득이함으로’라는 원어(아낭카스토스)는 ‘의무감 때문에, 억지로’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선한 일이라도 억지로, 마지못해, 의무감 때문에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한 일들 중에 가장 귀한 일인 이 목양의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장로들은 이 직무를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수행해야 한다.

둘째는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 말고 즐거운 뜻으로 해야 한다. 목사들과 장로들은 교회의 일을 함에 있어서 사사로운 이익을 구해서는 안 된다. 봉사는 항상 순수하고 깨끗해야 한다. 그러므로 목사들과 장로들은 가능하면 교회 재정에 직접 관계하지 말고 만일 재정에 관계할 때에는 돈 계산에 있어서 정확하고 깨끗해야 한다. ‘즐거운 뜻으로’라는 원어(프로뒤모스)는 ‘준비된 마음으로, 열심으로’라는 뜻이다. 장로의 직분을 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동기와 준비된 마음과 열심이 필요하다.

셋째는 맡겨진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양무리의 본이 되어야 한다. 사람이 교인들의 대표자가 되고 인도하는 위치에 있을 때 다른 이들에 대해 높은 마음을 가지고 권위 의식을 가지고 대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악덕이다. 주께서는 이런 점에 대해,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교훈하셨다(마 20:25-27). 장로들은 주장하는 자세를 갖지 말고 양무리의 본이 되어야 한다.

[4절]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목자장은 예수님이시다. 그가 다시 오실 것이다. 그의 재림의 날에 그는 충성된 종들에게 영광의 상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상 주시는 분이시다(히 11:6). 주께서 마지막 날 복음의 일꾼들과 교회 장로들에게 주실 영광은 시들지 않는 영광이다. 그러므로 현재 목사들과 장로들은 주께서 주신 직분을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 힘들고 어려운 점들이 많을지라도 낙심치 말고 하나님만 바라고 또 우리는 부족투성이이지만 감히 그의 상 주심을 기대하며 충성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충성해야 할 것이다.

[5절]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서로에게 순복하고](전통사본)14)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엥콤보사스데)[옷을 입으라](원문, KJV, NASB, NIV).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베드로는 장로들에 대한 권면과 더불어 젊은이들에 대한 권면을 하였다. 젊은이들에 대한 권면은 일반 교인들에게도 적절한 교훈이다. 베드로는 젊은이들에게 세 가지의 권면을 하였다.

첫째로, 젊은이들은 장로들에게 순복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이 받아야 할 교훈이다. 히브리서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특히 젊은이들은 대체로 아직 인생의 고난들을 많이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교만하기 쉬운 때에 있다. 고난의 환경은 대체로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양약(良藥)이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은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법을 배움으로 지혜를 얻어야 한다.

둘째로, 젊은이들은 서로에게 순복해야 한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 5:21에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교훈하였다. 또 빌립보서 2:3에서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교훈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교회의 구성원이 된 우리 모두는 서로를 존중하면서 서로에게 복종하는 마음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며 그러할 때 교회는 하나님의 의도하신 대로 일치단합된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셋째로, 젊은이들은 겸손으로 옷을 입어야 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잠언의 말씀대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이다(잠 18:12). 겸손한 자는 자신이 부족한 사람인 것을 알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을 깨닫는 자이다. 이렇게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 장로들에게 순복할 수 있고 또 서로에게 순복할 수 있을 것이다.

[6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나님은 전능하신 주권자이시다. 그가 세우면 세워질 것이고 그가 파하면 파해질 것이다. 그가 높이면 높아질 것이고 그가 낮추면 낮아질 수밖에 없다. 사무엘상 2:6-7,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때에 우리를 높이 들어 쓰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높아지려는 자들을 결코 쓰지 않으실 것이다.

1절부터 6절까지의 교훈은 목자와 양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첫째로, 목사와 장로는 좋은 목자가 되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고, 더러운 이익을 위해 하지 말고 준비된 마음과 열심으로 하고, 맡겨진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어야 한다. 목사들과 장로들은 이 교훈을 명심하고 힘써 실천해야 한다. 좋은 목사들과 장로들은 둔 교회들과 양들은 참으로 복되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교인들은 좋은 양이 되어야 한다. 좋은 양은 목자의 음성을 잘 듣는 자이다. 요한복음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그러려면 양들은 무엇보다 겸손해야 한다. 본문은 젊은이들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또 서로에게도 순복하고 겸손으로 옷을 입으라고 교훈한다. 이것은 모든 교인들의 의무이다. 모든 교인들이 겸손한 마음으로 목사들과 장로들에게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교만은 불순종과 거역을 만들고 멸망에 이르게 하지만, 온유와 겸손은 순종을 가져오고 영생에 이르게 한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또 교회 전체를 위해서 필요하고 유익하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일치단합된 모습을 가지기를 원하신다. 그러려면 양들은 목자들의 바른 교훈에 즐거이 순종하고 따르며 행해야 할 것이다.

7-14절, 하나님만 의지하라

[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돌보심]이니라.” 사람이 세상을 사는 데 염려거리가 아주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성도들도 예외는 아니다. 인생에게는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염려거리가 항상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시며 친히 우리를 돌보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시다. 그는 자기 백성을 결코 버려두지 않으시며 날마다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다. 시편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염려를 다 그에게 맡겨버려야 한다.

[8-9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본절은 마귀 혹은 사탄의 존재를 증거한다. 마귀는 실제로 존재하는 영이다. 마귀의 성격은 대적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교회와 성도들을 대적한다. 그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대적한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불신앙에 떨어지고 낙심하고 좌절하며 서로 미워하게 만들기를 원한다.

마귀는 악하다. 그는 우는 사자같이 성도들을 삼키고 죽이며 멸망시키려고 한다. 그는 성도들에게 고난을 줌으로써 그들을 넘어뜨리려고 한다. 어떤 때는 질병으로, 또 어떤 때는 가난으로, 또 다른 때는 가정적, 사회적 환난으로 성도들을 시험한다. 초대교회는 성도들이 많은 핍박과 고난을 받았던 시대이었다. 마귀는 매우 활동적이다. 그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공격할 대상을 찾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마귀에게 틈을 주는 것은, 예를 들면, 우리가 게으르거나 욕심을 품거나 세상이나 돈을 사랑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고 근신하고 깨어서 믿음을 굳게 하고 도리어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야고보서 4:7-8,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하여 마귀를 대적하려면, 성경 읽기와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은 마귀를 물리치는 검이다. 주께서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기록된 성경말씀을 인용하심으로써 물리치셨다(마 4:4, 7, 10).

[10-11절]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예수]15)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권력[권세와 영광]16)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성도들은 세상에서 마귀의 시험과 고난을 당하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은혜가 풍성하시고 충만하신 하나님이시다. 그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부르셨고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이다. 그것이 바로 영광스런 천국이며 거기에서의 영생 복락이다.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영원한 천국에 비교해 볼 때, 성도들이 현실에서 당하는 고난은 ‘잠깐 고난’에 불과하다. 그것은 아무리 길어도 100년을 넘지 못한다. 그러나 실상 100년 중 고난의 기간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천국과 영생은 영원하고 영광스럽다. 그래서 바울도 고린도후서에서 말하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했다(고후 4:16-18).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계획하시고 뜻하신 바를 남김 없이, 실패 없이 다 이루신다. 하나님의 계획의 중심에는 우리의 구원이 있다. 그는 이 일을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를 대속하게 하셨다. 그는 이 일을 위해 성령을 보내셔서 활동하게 하셨다. 이렇게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친히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굳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터를 견고케 하실 것이 분명하다. 과연 그러하다.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고 든든한 보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치 말고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성실하자.

[12절]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이것이 너희가 그 안에 굳게 선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라].17)

실루아노는 바울의 협력전도자이었던 실라를 가리키는 것 같다(행 15:22; 고후 1:19; 살전 1:1; 살후 1:1). 원문에는 ‘신실한’이라는 말이 ‘너희에게’에 걸려 있다. 실루아노는 베드로전서가 보내졌던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 등의 성도들에게(벧전 1:1) 신실한 형제로 인정받고 있었고 베드로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또 그는 지금 베드로를 위해 이 서신을 대필(代筆)하고 있다. 실루아노가 실라라면, 그는 바울의 협력자인 동시에 또한 베드로의 협력자가 되었다. 그는 바울이 전한 복음과 베드로가 전한 복음이 동일한 복음이라는 것을 잘 증거하는 인물이 된 셈이다.

베드로는 또 자신이 증거하고 권면한 내용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였다. 또 전통사본에는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는 구절이 ‘너희에 그 안에 굳게 선’이라는 말로서 하나님의 참된 은혜를 수식하고 있다. 즉 베드로는 자신이 편지를 보내고 있는 성도들이 이미 하나님의 은혜 안에 굳게 서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확신 가운데서도 그는 또 그 은혜의 말씀으로 그들을 권면하고 격려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아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또 듣고 또 음미하고 기억할 필요가 있다.

[13-14절]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 . . .

베드로는 또 말한다.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 그리스도 [예수]18)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멘.]19)

‘바벨론에 있는 교회’는 문자 그대로 바벨론에 있는 교회를 가리키는 것 같다. 복음이 널리 바벨론에까지 퍼져 교회가 세워졌던 것 같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또 마가에 대한 언급도 앞절에서 실로아노에 대한 언급과 같이 초대교회의 같은 신앙과 사랑의 교제를 나타내는 것 같다. 마가는 바울에게도 협력자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베드로에게도 그러하였고 본절에서 ‘나의 아들’이라고 불리었다. 진정한 기독교는 일치된 진리와 신앙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진리와 이 신앙을 확인하고 확신하고 이 진리와 이 신앙 안에서 일치된 기독교를 확증하고 혹은 회복시키고 그것을 널리 전파하고 후대에 전수시키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7절부터 14절까지에서 우리는 세 가지 교훈과 진리를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고 모든 염려를 그에게 맡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주인이시다. 그는 우리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시는 자이시다. 우리가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짐을 그에게, 오직 그에게만 맡겨야 하며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염려 대신 감사의 기도를 올려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근신하고 깨어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마귀는 온 세상의, 특히 온 교회의 대적자이며 우는 사자같이 세상을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 우리는 믿음을 굳게 하여 그를 대적해야 한다. 오직 말씀과 기도로 마귀를 대적하자.

셋째로, 우리는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확신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실 것을 작정하셨다. 그 계획은 실패하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굳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우리의 믿음과 소망의 터를 견고케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환경여건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오직 그 앞에서 성실하게 살아가자.  

 

미주

1) Byz p72 א* C vgmss syrp copsa bo (arm) 등에 있음.

2) Byz에는 없으나, p72 א A B C latt syr cop Clement 등에는 있음.

3) Byz vgcl syrp copsa-ms bo Tertullian 등이 그러함.

4) Byz p72 C geo 등이 그러함.

5) p72 א A B C vg syrp copsa bo (arm) Clement 등이 그러함.

6) Byz vgms 등이 그러함.

7) Byz는 그러함. 그러나 p72 א A B C vg syrp copsa bo arm (geo) Clement 등은 한글개역 본문과 같음.

8) Byz א A C it vgmss syrp copbo 등이 그러함.

9) Byz B 등에 있음. 그러나 p72 א A C vgcl syrp copsa bo arm Clement Cyprian 등에는 ‘죽으사’로 되어 있음.

10) Byz A (copbo) arm 등에 있음.

11) Byz vgww copsa (bo-ms) Cyprian 등에 있음.

12) Byz. 그러나 p72 א A B latt syr cop 등은 ‘그 이름으로.’

13) p72 א A vg (syrp) copsa bo arm 등에 있으나, Byz B 등에는 없음.

14) Byz에 있으나, א A B lat syrp cop 등에는 없음.

15) Byz p72 A vg syr(p) copsa-ms bo arm 등에 있음.

16) Byz א vgcl copsa bo arm 등이 그러함.

17) Byz vgcl 등이 그러함.

18) Byz א vgcl copbo-mss arm 등에 있음.

19) Byz א vg syrp copbo-mss arm 등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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