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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1

세례와 구원관계/ 벧전 3장 연구

by 은총가득 2020. 12. 12.

세례로 구원을 받는가? (벧전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벧전 3:21)


대부분의 신자들이 세례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견은 일치하지 않는다.
  
언제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어떤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리고 세례의 효과가 무엇인가?
여기 본문도 세례에 대한 말씀이지만 그 해석이 쉽지 않다.  특별히 3:18-22절까지는 신약의 난제 중에 하나이다.
더구나 본문은 세례로 구원을 받는다 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세례가 사람을 구원하는가?   우리를 구원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가?
  
이 본문은 믿음을 통한 은혜 구원과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또 세례 받지 않은 사람의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등등에 문제가 이 본문에서부터 나올 수 있다.
  
먼저 이 본문의 일반적인 가르침부터 살펴보고 문제를 풀어 보자.
여기서 베드로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선을 행하라고 권면한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의 본이 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옳은 것을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2:14). 그는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사람들을 두려워하시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셨다.  그는 그의 양심을 깨끗하게 지키셨으며 그 결과 그 자신의 부활과 승귀의 엄청난 축복과 상급을 받으셨다. 이렇게 베드로는 그의 부활을 지적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요약을 결론짓고 있다.
  
다음으로 세례의 의미와 목적에 관해서 알아보자.
  
원래 세례는 물로 씻는 의식인데 영적인 정결을 위한 기도에서 상징적으로 적용되었다(시 51:1-2, 7-10). 그리고 세례의 목적은 하나님께 속한 관계로 들어오기 위한 것이었다. 특별히 세례에 대한 사도적 가르침의 의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었다(갈 3:27).1)
  
그러면 이제 본문에서 제기되는 세례와 구원의 관계를 살펴보자.
  
이 본문은 어떤 점에서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할례와 세례를 연관짓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한다는 말씀에서 아마도 베드로는 할례를 생각하였을 것이다.2)  이렇게 볼 때 선민 이스라엘 백성이 다 할례를 받았듯이 구원받은 신자가 세례를 받는 것과 연관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베드로는 노아 홍수 시대 때 모든 사람이 다 죽었지만 노아와 그의 식구가 산 것처럼 신자들도 물로 씻는 의식인 세례로 구원을 받는다 하였다.
  
그러면 과연 세례가 사람을 구원하는가?  어떻게 세례가 사람을 구원하는가? 어떤 학자는 세례가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맹세요 서약이기 때문에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지 않고 나쁜 양심에서 구원한다고 보았다.  더구나 베드로는 구원의 근거를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한 것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벧전 1:3).3)
  
그래서 사람을 구원하는 세례는 성례의 외적 의식과 신자의 마음에서 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서약을 통해서 표현되어져야 한다고 보았다.4)  그러므로 외적 의식의 세례만이 아니라 내적인 신앙이 수반된 세례가 구원을 가능하게 한다는 설명이다.
  
우리는 세례와 구원 관계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이요, 그리스도와 합일되는 것이요 우리가 그와 함께 부활의 생명을 공유하는 것이다.  바울은 유사하게 세례를 그리스도와 연합의 관점에서 사용하였다(롬 6:4-11; 골 2:12). 열쇠는 베드로전서 1:3대로 구원은 예수께 연합되는 것이다.  예수와 그의 부활이 없이는 세례는 의미가 없다.5)  그러므로 이런 그리스도와 연합 - 다시 말해서 그의 구속 전 행위에서 그리스도와 연합 - 의 의미에서 세례는 그 세례 받는 사람을 구원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주
   1. New Dictionary of the Theology(IVP,1988), pp.69-70
   2. Simon J. Kistemaker, Peter and Jude, p.148
   3.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New Testament, p.852
   4. Simon J. Kistemaker, op. cit.  
   5. Peter H. Davids, More Hard Sayings of the New Testament, p.167

 


3장: 선행에 힘쓰라

1-6절, 아내들에 대한 교훈

본문은 아내 된 자들에게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고 교훈한 말씀이다.

[1절]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道)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순복하라'는 원어(휘포탓소)는 2장에서 사용된 말과 동일하다. 13절,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18절, "사환들[종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순복하라'는 말은 '순종하라'는 말이나 '복종하라'는 말과 뜻이 다르지 않다. 성경은 아내 된 자들이 자기 남편들에게 순종하며 복종하라고 가르친다. 에베소서 5:22, 23,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골로새서 3:18, "아내들아 남편[들]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아내들이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명령이며 그러므로 아내들의 마땅한 의무이다. 거기에는 어떤 이의(異意)가 있을 수 없다.

아내들이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할 중요한 한 목적은 복음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자, 즉 불신 남편이라도 아내의 말로가 아니고 그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아내들의 말로 구원하기 힘든 남편들이 그의 행위로 감동을 받아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오게 된다는 뜻이다. 말로 안되면 행위로 보여주어야 한다. 같은 원리로, 우리는 이웃 사람들을 말로 구원하기 어려울 때 우리의 선한 행위로 그들을 구원할 수 있게 힘써야 할 것이다.

 

[2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남편을 구원시킬 아내의 행위는 무슨 행위를 말하는가? 그것은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가리킨다. '두려워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함과 남편을 두려워함을 다 포함하는 것 같다. 2:17,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2: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아내들은 자기 남편을 주인과 같이 생각하여 두려워함으로 순종해야 할 것이다. '정결한'이라는 원어(하그노스)는 '순결한, 정숙한, 단정한, 흠 없는' 등의 뜻이다. 모든 도덕 생활에서 순결하고 흠이 없을 뿐만 아니라, 특히 음란한 세상 속에서 성적으로 순결하고 단정한 것을 가리킨다.

 

[3절]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본문은 여성도들이 외적인 단장에 치중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한다. 예를 들어, 머리를 꾸미고 금은 보석의 목걸이, 귀걸이, 반지 등의 장신구를 차고 값비싼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 같은 단장에 힘쓰지 말라는 것이다. '머리를 꾸민다'는 원어(엠플로케 트리콘)는 '머리를 땋는다'는 뜻이다. 이 말씀은, 이런 단장이 죄악되므로 성도들이 이런 단장을 전혀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닌 줄 안다. 머리가 부시시 한 것보다 자주 감고 깨끗하게 단장하는 것은 필요할 것이다. 또 금은 보석이나 아름다운 옷이 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누릴 수 있는 정당한 것들일 것이다.

이 말씀은, 성도의 단장이 외적인 것들에 치중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성도는 외적인 단장을 크게 여겨서는 안된다. 이런 것들의 가치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우리는 그것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가치 있는 천국과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4절]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여성도의 단장은 내면적이어야 한다. '마음의 숨은 사람'은 사람의 내면적 인격성을 가리킨다. 여성도의 내면적 인격은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으로 단장되어야 한다. '안정한'이라는 원어(헤쉬키오스)는 '조용한, 평온한'이라는 뜻이다. 여성도들은 특히 온유하고 조용한 심령으로 자신을 단장해야 한다. 몸은 세월이 갈수록 쇠하여지지만, 이러한 고상한 인격성은 그 성질상 썩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다. 이런 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외적인 단장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고, 내면적 단장, 곧 고상한 인격성이 가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 때 우리가 받을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인 것이다.

 

[5-6절]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베드로의 교훈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여성도의 이러한 덕은 예전부터 경건한 여성도들이 가졌던 덕이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변하는 인간 도덕과 풍습에 따라 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여성들은 다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였고 이러한 덕으로 자신들을 단장하였던 것이다. 그 대표적 예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이었다. 그는 자기 남편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불렀다. 창세기 18: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이것은 남편에 대한 그의 복종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오늘날도 만일 여성도들이 사라처럼 선을 행하고 놀라며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사라의 딸들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6절까지의 내용은 아내 된 자들에게 주시는 교훈이다. 본문은 세 가지 가량의 내용을 강조한다. 첫째로,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순복해야 한다. 자기 남편이 좋은 사람이든지 그렇지 못한 자든지 간에 그렇게 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명령이며, 아내로서의 마땅한 의무이다. 둘째로,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심지어 말 없이 선한 행위로 감동과 영향을 주어야 한다. 그래서 복음 진리를 믿지 않는 남편들일지라도 자기 아내들의 두려워하며 순결하고 단정한 행위를 보고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내들 즉 여성도들은 머리를 꾸미거나 장신구를 걸치거나 아름다운 옷을 입는 등의 외적인 단장을 힘쓰지 말고, 온유하고 조용한 순종의 내면적 덕으로 단장하기를 힘써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마땅하고 또 가치 있는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들이고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고 소망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이 세상적 가치관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부유한 자들이 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7절, 남편들에 대한 교훈

[7절]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본문은 남편들에 대한 교훈이다. 첫째로, 본문은 남편들이 지식을 따라 아내들과 동거하라고 말씀했다. 무슨 지식을 말하는가? 그것은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관한 지식을 가리키는 것 같다. 결혼은 남녀가 결합하여 한 몸과 한 인격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밀접한 관계의 시작이다. 결혼의 목적은 첫째로 남자가 외롭지 않도록 돕는 아내와 더불어 살게 하기 위함이다. 창세기 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둘째는 자녀 출산을 위함이다. 창세기 1:27, 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셋째는 음행의 방지를 위함이다. 고린도전서 7:1, 2,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결혼의 의무는 사랑과 순종이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에베소서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남편들은 아내들을 자신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 알고 사랑해야 하며, 특히 교회를 사랑하사 자신의 몸을 주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무조건적으로, 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아내들은 남편들의 따뜻한 한 마디의 말과 얼굴 표정과 행위에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낀다.

 

성(性)에 대한 바른 지식도 필요하다. 인간의 성은 본래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고 더더욱 더럽게 여겨질 것도 아니었다. 성은 아름다운 것이다. 창세기 2: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그러나 성은 단지 부부 관계에서만 사용되어야 할 사랑의 도구이며, 그렇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가져오는 음란의 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음란의 죄는 미워하고 배격해야 하지만, 부부 간의 아름다운 사랑은 권장해야 할 일이다. 성경은 부부 관계를 결코 더러운 일이나 부끄러운 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건전한 부부 관계가 없을 때 음행의 죄에 떨어지기 쉽다고 교훈한다(고전 7:5). 성은 정상적 부부의 사랑에 중요한 한 요소이다.

둘째로, 본문은 남편들이 아내들을 귀히 여기라고 말씀했다. 창세기 2장에 증거된 대로, 아내는 남편의 갈빗대이며, 남편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므로 남편들은 아내들을 마땅히 아끼고 사랑하고 귀히 여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본절에서 남편들이 아내들을 귀히 여겨야 할 이유로서 두 가지 사실을 더 언급했다. 첫째는 아내들이 더 연약한 그릇이라는 것이며, 둘째는 저들이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라는 것이다. 여성들은 대체로 남성들보다 몸이 연약하고 마음도 약하고 예민하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에 남자들만 아니고 여자들도 참여할 것이다. 이런 연약한 아내들이 남편들과 자녀들을 위해 노동과 같이 힘든 집안 일을 하며 늙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그들을 울리지 말고 외롭게 하지 말고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슬프게 하지 말고, 그들을 귀히 여기고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주어야 할 것이다.

또 아내들은 생명의 은혜, 즉 영생과 천국을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들이다. 아내들은 세상에서만 아는 관계가 아니고 천국에까지 같이 갈 반려자들인 것이다. 물론 천국에서는 부부로서의 짝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내들은 천국에서도 함께 기쁨과 영광을 누릴 영원한 동료들이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아내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시편 133:1-3,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셋째로, 본문은 남편들이 이렇게 지식을 따라 아내들과 동거하고 그들을 귀히 여길 때 그들의 기도가 막히지 않는다고 말씀했다. 부부 사이가 좋아야 기도도 잘 되지, 부부가 서로 다투고 나면 기도의 문이 막힌다. 왜냐하면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은 것도 죄가 되기 때문이다. 죄는 우리의 기도의 문을 가로막는다. 요한일서 3:21, 22,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우리의 도덕 생활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성도들은 가정에서부터, 결혼한 이들은 부부 사이에서부터 성경의 교훈대로 바르고 선하게 행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남편들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남편들은 지식을 따라 아내들과 동거해야 한다. 남편들은 결혼의 의미와 목적, 결혼한 이들의 의무, 그리고 성 등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아내들과 동거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남편들은 아내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그 이유는 아내들이 남편들의 갈빗대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또한 아내들은 더 연약한 그릇이며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이기 때문이다. 남편들은 연약한 아내들을 귀히 여기며 보호하며 또 영원한 천국에서도 함께 교제할 동료로서 그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셋째로, 이렇게 할 때 남편들의 기도가 막히지 않을 것이다. 사랑이 넘친 부부 관계는 신앙 생활에 유익하다. 그러나 부부가 서로 자주 다투면 신앙 생활에도 해가 된다.

 

8-12절, 선한 마음을 가지라

[8절]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베드로는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마지막으로 몇 마디 더 교훈하고 그치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계속 좀더 교훈하도록 감동하셨다. 베드로의 마지막 당부는 요약하면 '다 마음을 같이하고 서로를 향해 선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첫째로, '마음을 같이하여'라는 원어(호모프론)는 '생각을 같이하여, 같은 생각을 하며'라는 뜻이다. 교회의 일치와 단합은 생각의 일치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아모스 3:3,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바울도 교회 안의 생각의 일치를 강조하였다. 로마서 12:15, 16,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체 말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라는 원어(토 아우토 에이스 알렐루스 프로눈테스)도 '서로 생각을 같이하며'라는 뜻이다. 고린도전서 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같은 마음으로'라는 원어(엔 토 아우토 노이)도 '같은 생각으로'라는 뜻이다. 빌립보서 2: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마음을 같이하여'라는 원어(토 아우토 프로네테)나 '한 마음을 품어'라는 원어(토 헨 프로눈테스)도 각각 '생각을 같이하여,' '하나의 생각을 품어'라는 뜻이다.

 

우리의 생각이 같아야 우리의 말도 우리의 행동도 같아질 수 있을 것이다. 분열은 생각의 다름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하나 되도록 힘써야 하겠다. 사심과 사욕을 버리고 상대방을 바르게 이해하며 모든 일에 있어서 생각을 같이하고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하도록 힘써야 하겠다.

 

둘째로, '체휼하며'라는 원어(쉼파테스)는 '같은 감정을 가지며, 동정심(同情心)을 가지며'라는 뜻이다. 사람은 지정의의 요소를 가진 존재인데, 생각이 첫째로 중요하지만, 또한 감정도 중요하다. 느낌이 같은 것이 좋다. 어떤 이는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이는 그것을 싫어하면 교회의 일치와 단합을 이루기 어려울 것이다. 성도들이 어떤 일에 대해 좋아하는 감정이나 싫어하는 감정이 같은 것이 교회의 일치와 단합을 위해 바람직하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생각을 같이하고 감정도 같이하려고 힘써야 하겠다.

 

셋째로, '형제를 사랑하며'라는 말씀은 성도의 기본적이고 가장 고상하고 포괄적인 덕이다. 예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친히 새 계명을 주셨다. 바울은 사랑의 성격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고린도전서 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쉽게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주께서는 우리가 이런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넷째로, '불쌍히 여기며'라는 원어(유스플랑크노스)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며, 불쌍히 여기며'라는 뜻이다. 상대방의 부족과 연약에 대해 멸시하고 배척하는 마음이 아니고 가능한 한 그를 이해하려 하고 불쌍히 여기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리킨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가 처한 환경과 받은 교육에 따라 인격이 형성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부족과 결함을 볼 때 이해심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바울도 이런 태도에 대해 많이 교훈하였다. 에베소서 4:31, 32,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골로새서 3:12-15,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다섯째로, '겸손하며'라는 원어(타페이노프론)는 '겸손한 생각을 하며'라는 뜻이다. 전통사본의 본문(필로프론)은 '친절한 생각을 가지며, 예절을 갖추며'라는 뜻이다. 겸손한 생각과 친절한 생각, 그리고 예절 있는 태도는 서로 거리가 멀지 않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 주께서는 우리가 서로에 대해 친절한 생각을 가지며 예절을 갖추기를 원하신다.

 

[9절]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섯째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는 교훈은 우리 주님 자신의 교훈이다. 마태복음 5:44의 전통사본에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고 되어 있다.

바울도 로마서 12장에서 같은 교훈을 하였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17-21절).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복을 위해 부르심을 입었다. 그 복이란 죄사함과 구원의 복이며, 그 결과로 얻는 평안의 복이며, 또 최종적으로 누릴 영광스런 천국과 영생의 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이 구원의 복을 깨닫고 귀히 여기고 감사하며 또 서로에게 이 복을 빌어야 할 것이다. 이 복을 상실하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부족한 믿음의 형제라 하더라도 이 복에서 제외되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않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진심으로 상대방을 위해 축복해야 할 것이다.

 

[10절]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성도는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곧 천국의 날들 보기를 원한다. 인간 세상에 죽음은 죄 때문에 왔고 그것은 어둡고 슬픈 사실이며 고통스럽고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생을 주셨고 천국의 복된 날들을 약속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모든 일들을 확증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 구원의 은혜를 받고 이런 놀라운 약속의 세계를 바랄진대, 거기에 합당한 자들답게 이 세상도 살아야 할 것이다. 즉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고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악한 말'이란 남에게 해를 주는 말, 즉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남의 명예에 손상을 주는 말을 가리킨다. 물론 불결하고 더럽고 음란한 말도 악한 말에 포함된다. 성도는 그런 악한 말을 그쳐야 마땅하다.

또 그 입술로 궤휼 즉 속임과 거짓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요한계시록 21:8에는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말씀했고, 또 요한계시록 22:15에는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고 말씀했다.

 

[11절]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성도는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해야 한다. 선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 즉 마음에 평안과 기쁨, 격려와 위로를 주는 것이다. 또 성도는 서로 간의 화평을 구하며 화평을 추구해야 한다. 즉 성도는 악과 거짓을 버리고 선과 화평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행실에 있어서도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22, 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2절]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관심과 돌보심을 나타낸다. 그것은 그가 연약할 때 격려하시고, 낙심할 때 위로하시고, 위험할 때 지키시고 도우시며, 범죄할 때 근심하시고 책망하시는 그의 관심과 돌보심이다. 또 주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신다. 의인이 감사할 때나 회개할 때나 무엇을 간구할 때 하나님은 그의 기도와 간구를 잘 들어주신다. 그러나 주의 낯은 악을 행하는 자들을 향하신다. 그것은 그가 그들의 악한 행위들을 보시고 판단하시고 기억하시고 진노하시고 심판하시고 징벌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긍휼이 풍성하시지만, 악한 자들에 대해서는 엄위하시고 두려우시다.

결론적으로, 8절로 12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실제적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감정을 같이하도록 힘써야 하겠다. 이것이 교회의 참된 일치와 단합의 모습이 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되, 특별히 부드러운 마음과 친절한 생각을 가져야 하겠다. 이것이 사랑의 참된 표현이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보복하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야 하겠다. 이것이 본문이 주는 교훈들이며 이것이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이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으로 단합된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13-17절, 선을 행하며 고난을 받으라

[13절]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이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너희가 선을 본받는 자들이라면'이다. 예수 믿는 자들은 선을 본받는 자들, 곧 선하게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선하게 살면, 양심이 있는 자들은 그런 우리를 잘 해치지 않을 것이다.

 

[14절]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그러나 우리가 선하게 살지라도 항상 평안한 것은 아니다. 사람은 악하기 때문에, 때때로 우리가 선하고 의롭게 살아도 우리를 핍박하고 해치려 하는 악한 자들이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 할지라도 복 있는 자'라고 말한다(원문 직역). 주께서도 마태복음 5:10에서 말씀하시기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셨다. 성도가 의롭고 선하게 살다가 당하는 고난은 화가 아니고 복이다. 자신이 잘못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이지만, 의롭고 선하게 사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하는 것은 복된 일이다.

베드로는 성도들이 의롭고 선하게 사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할 때 처신해야 할 바를 몇 가지 교훈한다. 첫째, '저희의 위협함을 두려워 말고 근심치 말라.' '저희의 두려워함'이라는 원어는 '저희의 위협함'이라는 뜻이다. 또 '소동치 말고'라는 원어는 '근심치 말고'라는 뜻이다. 우리에게는 현세와 내세의 확실한 약속과 보장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의 위협을 두려워할 것도 없으며 근심하고 염려할 것도 없다.

 

[15절]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둘째, '너희 마음에 하나님을 주님으로 거룩하게 구별하라.'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라는 원문은 전통사본에는 '하나님을 주님으로 [혹은 주님을 하나님으로] 거룩하게 구별하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주님께 절대적으로 복종하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성도의 행동의 이유가 된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혹은 주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살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셋째,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모든 자에게 대답할 바를 온유와 두려움으로 항상 예비하라.' 우리 속에 있는 소망은 예수님의 재림과 천국과 영생이다. 이러한 소망에 관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들을 사랑으로 택하시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하시고 성령으로 인치셨기 때문이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천국과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항상 대답할 바를 준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간증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답하라는 것은 우리의 우리 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연약성과 죄성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시라도 교만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도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다. 우리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16절]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넷째, '선한 양심을 가지라.'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과 행동으로 나타낸다. 마태복음 12: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우리가 사악과 거짓과 음탕을 많이 생각하면 우리의 말과 행위는 악하고 거짓되고 음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선과 진실과 거룩을 많이 생각하면 우리는 선하고 진실하고 거룩한 말과 행위를 나타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선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너희가 선한 양심을 가짐으로써, 저들이 '너희를 악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할 때'(전통사본)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을 행함에도 불구하고 악한 자들에게 그릇된 비난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성도가 선한 양심을 가지고 끝까지 선하게 말하고 선하게 행동하면 마침내 핍박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성도가 악을 행한다고 비난했던 저들의 악한 비난이 마침내 거짓임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17절]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난 중에도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은 당연히 받을 고난이지만,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예수님은 이런 고난을 당하셨다. 바울과 기타 사도들도 이런 고난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런 고난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13절부터 17절까지의 내용은 요약하면,

 첫째로 성도가 선과 의를 행하다가 고난과 핍박을 당하면 복 있는 자이며 그렇게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둘째로, 성도가 이런 고난을 당할 때 대처할 방법에 대해 말씀한다.

첫째, 핍박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근심치 말아야 한다.

둘째, 오직 하나님을 주님으로 삼아야 한다.

셋째, 우리의 소망의 이유에 대한 대답을 항상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예비해야 한다. 우리가 장차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누릴 것이라는 소망의 이유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들을 사랑하셨고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기회 있는 대로 다른 이들에게 간증해야 한다.

 

넷째, 우리는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끝까지 선하게 처신해야 한다. 그것이 성도다운 행동이다. 마태복음 5:10-12,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바울도 동일한 교훈을 주었다. 로마서 12:19-21,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18-22절,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

[18절]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본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한 번 죄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전통사본)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 '한 번'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번에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고 다시 반복될 필요가 없음을 나타낸다(히 10:10, 12, 14). 그의 고난과 죽음은 우리로 하나님과의 연합과 화목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 즉 그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심이었다.

죽임을 당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살리심을 받으셨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 본절과 다음절(19절)은 성경에서 난해구절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육체와 영을 인간 예수님의 육체와 영으로 보는 것은 정당하지 않은 것 같다. 영이 살리심을 받으려면 영도 죽임을 당하셨어야 할 것이지만, 본문은 단순히 육체와 영을 대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육체는 예수님의 인성, 즉 인간으로서의 그의 영육을 가리키고, 영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가리킨다고 본다. 즉 예수께서 인간으로는 죽으셨으나 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 삼일만에 부활하셨다는 뜻이라고 본다.

 

[19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원문에는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셔서 전파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옥에 있는 영들'은 다음 절에 말씀한 대로 노아 시대에 홍수로 멸망 당한 자들의 영들이다.

본절은 성경에서 난해구절들 중 하나이다. 예수께서는 언제, 어디에서, 그리고 왜 저 영들에게 가셨고 또 무엇을 전파하셨는가?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다. 천주교회는 예수께서 죽으신 후 구약 성도들이 거하고 있던 '림보'('지옥의 변두리'라는 뜻)에 내려가셔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그들을 이끌어 천국에 들여보내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본문이 죽은 악인들의 구원의 가능성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가능성은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분명히 부정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에서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의 입을 통해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고정된 큰 간격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눅 16:26).

루터교회는 본절을 예수께서 (부활 직전 혹은 직후에) 지옥의 영들에게 가셔서 승리의 영광을 선포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 전에 지옥에서 승리적 행진을 하신다는 것은 적당한 생각이 아닐 것이고, 부활 후에 가셨다면 영으로 가셨다는 것이 적당하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본절을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것이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하나의 승리의 선포 사건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바빙크크레다너스).

 

그러나 어거스틴을 비롯하여 기타 많은 정통적 성경학자들은 본절을 그리스도께서 지금 지옥에 있는 저 영들에게 노아 시대에 성령으로 가셔서 노아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아마 이 마지막 해석이 가장 적절한 해석일 것이다.

 

[20절]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오래 참으셨었다. 그는 사람들이 음란하고 강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20년간 심판을 유보하셨다. 그 동안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다. 그러나 노아의 8식구들 외의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불순종하였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구원받는 자들의 수는 심히 적었다. 오늘날도 그러한 줄 안다. 예수님은 넓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로 가다가 마침내 멸망할 자들은 그 수가 많으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가다가 영생에 이를 자들은 그 수가 적다고 말씀하셨다(마 7:13, 14). 구원받는 자들의 수는 심히 적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긍휼로 그 수에 들어 있기를 원하며 그 수에 든 것을 감사한다.

 

[21절]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의 물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는 표가 되는 세례에 비교할 수 있다. 세례는 죄씻음을 통해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사는 것을 상징하고 확증한다. 물론 세례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은 후에도 부족하고 연약할 때가 없지 않다. 그러므로 본문에는 세례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 찾아가는 것'이라고 표현되었다. 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자들은 선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응답하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인 것이다.

 

[22절]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본절은 예수님의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계심을 증거한다. 고난의 주께서는 부활하셔서 영광의 천국에 올리우셨고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영광을 누리고 계신다. 모든 선한 천사들은 그에게 순복하고 있다. 그것은 주께서 누리시는 우주적 왕권, 영계와 물질계에 행사하시는 왕권을 나타낸다.

결론적으로, 18절부터 22절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셨고 삼일만에 다시 사셔서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셔서 우주적 왕권을 행사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자. 둘째로, 우리는 죄가 없으셨으나 우리의 죄를 위해 대속의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도 선을 행하면서 고난받는 자들이 되자. 우리는 고난을 두려워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고난받는 자들이 되자. 셋째로, 우리는 노아 시대나 소돔 고모라 시대보다 더 악하고 음란한 이 세상과 세상의 풍조를 배격하고 노아와 그의 식구들같이 오직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며 순종하며 살아가자!

 

 

선행과 고난 (베드로 전서 3:16,17)

 

그리스도인의 고백은 여기에서 상세히 설명되어진 두 가지 수단 즉 "선한 양심"과 "선한 행실"이

아니고서는 반드시 지지를 받을 수가 없다. 양심은 그의 임무를 수행할 때에 순결하고 부패치 않았으며,

죄악으로부터 깨끗이 보전되어 있을 때에 선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여러분들을 비난할지라도

선한 양심은 여러분들을 정당화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한 행실"은 그리스도의 교훈과 보이신

본을 따라 사는 거룩한 생활이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양심과 행실을 잘 살피라. 그리고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욕하고 거짓으로 악을 행하는 자라고 비방을 할지라도 여러분은 자신의 정결함을 나타내어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선한 양심과

행실을 지킴으로써 당하는 고난이 어려운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이는

아무리 여러분의 원수가 악할지라도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1. 가장 양심적인 사람들은 악한 사람들의 모략과 중상을 피할 수 없다. 그들은 선한 사람들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욕하며, 그들의 심령의 범죄를 그들의 책임으로 전가할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도 이렇게 취급을 당했다.

 

2. 선한 양심과 선한 행실은 훌륭한 명성을 얻는데 가장 좋은 수단이 된다. 이러한 선한 양심과 선한

행실은 견실하고 영원한 명성을 부여한다.

3. 결국은 비난자들의 무분별, 부정, 거짓과 몰인정이 드러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거짓된 비방은

비난하는 자의 부끄러움을 초래케 한다.

4. 선한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함으로, 또한 그들이 정직과 믿음으로 인해 고난을 받는 것이 때로는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있다.

5. 선한 행동은 선한 사람에게 고난을 부여하는 것처럼, 악한 행동은 악한 사람에게 악을 면할 수

없게 한다. 사람은 두 가지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고 사도는 생각한다. 선을 함으로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것이 가혹하다면 악한 사람들이 악을 행함으로써 당하는 고난을

어떠할 것인가? 죄와 고난이 동시에 함께 임하는 사람은 매우 불행한 처지에 있다. 죄는 고난을

극심하게, 무익하게, 불쾌하게 그리고 파괴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 (베드로 전서 3:18-20)

 

 

Ⅰ. 그리스도의 본은 고난을 참는 것과 만일 우리들이 말씀에 내포되어 있는 몇 가지 점을 상고할 경우

인식될 수 있는 그의 인내하는 능력에 대한 논의로써 제기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몇 가지

점을 생각해 보자.

1.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죄가 없음에도, 또한 만일 원하기만 한다면 모든 고난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의 고난에서부터 면제되지 아니했다.

 

2.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의 이유와 명예로운 원인은 인간들의 죄이다. 곧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참되고 타당한 처벌이었다. 이러한 처벌은 속죄를 위해,

그리고 죄를 보상키 위해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속죄는 모든 죄에 대해 효과를 미친다.

3. 우리 주님의 당하신 고난의 경우에 있어서, 불의한 자를 위해 고통을 당하신 이는 의인이었다. 곧

그리스도는 그 자신을 우리와 대치시켰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 죄를 모르는 그가 의를 모르는

자들을 대신해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4. 그리스도의 희생의 공로와 안전함은 그가 한 번 고난을 당하심으로 충분한 것이었다. 율법적인

희생 제물은 매일, 또는, 매년 반복되어졌으나 그리스도의 희생은 단 한 번 드려짐으로 모든 죄를

깨끗이 하셨다(히 7:27; 9:26, 28; 10:10, 12, 14).

 

5. 우리 주님의 고난의 축복 목적과 계획은 우리를 하나님께 이끌어 하나님과 화목케 하며, 우리를

아버지께 가까이 하고, 우리와 우리의 예배를 합당케 하며 영원한 영광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엡 2:13; 3:12; 히 10:21, 22).

6. 그리스도의 고난의 문제와 사건은 그 자신에 있어서 이러한 것이었다. 그는 그의 인간의 질에서

죽음을 당했으나 영으로서 다시 살아 일어나셨다. 자, 만일 그리스도가 고난을 면치 아니하셨다면

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면케 되기를 기대하는가? 만일 그가 죄를 속하기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면 우리는 우리의 고난이 속죄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단련과 바르게 함일 때 왜

우리는 만족하며 감사치 아니하는가? 온전히 의로우심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고난 중에도

감사하셨다면, 그 고통이 잠시적이요, 그 후엔 영광의 주님을 따르게 된다면 우리들은 어찌

고통을 참지 못하겠는가? 만일 그가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해 "고난을 받으셨다면" 고난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귀의하도록 하며 그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도록 촉진하는데 유익이

되는 이상 우리들이 어찌 어려움을 감수하지 않겠는가?

 

Ⅱ.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본으로부터 옛 세대의 본에 이르기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서신을 받는 유대인들 앞에 그들은 같은 형벌 아래 있었음을 암시하면서 불순종과 불신앙을

계속하던 유대인들로부터 노아로 말미암아 전파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던 자들의 색다른 사건을

그들에게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에 대해 더 오래 참으실 수 없었다. 유대인들은 긍휼을

베푸는 자를 지금 맞이했다. 그 긍휼을 수락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으나 그리스도와 복음을

거부하는 자는 노아 시대에 있던 불순종하던 자들과 같이 분명히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

 

1.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에 주의를 기울여 보자.

(1) 전도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담과 맨 처음으로 언약하신 이후로 교회와 세상의 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창 3:15). 그리고 하나님이 자주 이동하라고 명하신 것처럼(창

11:5; 호 5:15; 미 1:3) 그리스도는 편협한 목적지가 아니라 각별한 동기로써 "나가셨다." 그는

나가서 "전파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과 분투하며 백성들에게 탄원하도록 에녹과

노아에게 능력을 주었고 그들에게 의를 전파했다(벧후 2:5).

 

(2) 듣는 자들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죽고 육체와 영이 분리되었으므로 사도는 그들을 적당히

감옥에 있는 영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저속한 라틴어 번역이나 카톨릭 교회 해석자들의

주장과 같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전파할 때 그들이 감옥에 갇혀 있던 것은 아니다.

 

(3) 이 백성들의 죄는 이러하다. 그들은 그 말이 의미하는 대로 "반역하며" 따르지 않는

불순종이며 또한 믿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죄는 하나님의 참으심과 고통으로 인해서

더욱 악화되었다(노아가 방주를 준비하고 그들에게 전도를 통하여 그들에게 임할 바를 명확히

경고하는 동안 하나님은 120년 동안 그들을 기다리셨다).

 

(4) 그 사건의 전모는 이러하다. 그들의 육체는 몰락되었고 그들의 영은 지옥에 던져졌다. 이를

가리켜 감옥이라 불렀다(마 5:25; 벧후 2:4, 5). 그러나 믿고 순종한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방주

안에서 구원을 얻었다.

 

2. 이러한 이야기 전체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은 이러하다.

 

(1) 하나님은 사람들이 모든 세대에 그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기 위해 지니고 있었던 모든 수단과

유리한 형편을 정확히 주시하고 계신다. 즉 그리스도께서 그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고 그의

성령을 보냈으며 노아를 통해 밝히 경고했으며, 그들의 회개를 오랫동안 기다리신 옛 시대의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다.

(2) 하나님의 인내가 죄인들을 오래 기다린다 하더라도 결국 하나님의 인내는 사라진다. 즉 그것은

헛되이 인간들을 항상 기다리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미치지 못한다.

(3) 불순종하는 죄인들의 영은 곧 그들의 육체에서 벗어나와 구원이 있는 지옥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4) 가장 많이 가는 길이 결코 가장 좋고 지혜로운 것이나 따르기에 안전한 길이 되지는 못한다.

홍수에 빠져 지옥의 저주를 받은 팔백만보다 방주 안에 있는 여덟 명을 따르는 일이 더욱

좋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내의 순종(벧전3:1)의 의미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벧전3:1)

 

베들레헴침례교회 원로인 존 파이퍼(John Piper)목사가 최근 자신의 블로그 ‘하나님을 향한 갈망(DesiringGod.org)에 ‘아내의 순종’에 대한 글을 올렸다.

 

아내의 순종에 대한 정의는 다양한다.

존 파이퍼 목사는 그 정의를 내리기 위해, 결혼 생활 속에서 ‘남편에 대한 순종이 아닌 6가지 예’를 소개했다.

 

1. 순종은 모든 것에 대한 동의가 아니다


순종은 아내가 ‘네’라고만 하는 여성이 되라는 의미가 아니다. 파이퍼 목사는 “(‘네’라고만 하다 보면) 수동적이 되어 남편의 말에 대한 생각을 아예 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아내가 교회 다니는 것을 남편이 원하지 않을 경우, 아내는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감각을 이용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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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순종은 여러분이 남편의 의견에 동의만 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특히 기독교 신앙과 같이 근본적이고 심각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지으셨다. 여러분은 생각해야 한다. 여러분은 사람이지 기계가 아니다. 복음이 진리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는 존재다. 만약 복음이 진리이고 여러분도 그렇게 믿는데 남편이 ‘당신은 교회에 나가지 말라’고 한다면, 겸손하고 유순하게 거부해야 한다”고 했다.


2. 순종은 여러분의 이성을 제단에 두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파이퍼 목사는 권위를 너무 강조하는 남성들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가정에서는 내가 생각한다’고 말하는 남성은 권위에 대한 병든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서, 이러한 남성들에게 “당신은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권위’, ‘리더십’, ‘복종’과 같은 말만 취할 뿐 성경과 동떨어져 있으며, 이러한 말들을 당신이 하고 싶어하는 것들로 채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리더십이란 다른 이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아니다. 또한 항상 마지막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좋은 리더십은 때로 ‘당신이 옳았고, 내가 틀렸어’라고 말한다”고 설명했다.


3. 순종은 남편에게 영향을 끼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배우자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실제로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 특별히 아내나 남편이 비신자이거나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파이퍼 목사는 “만약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가 죄 가운데 살고 있는 비신자일 경우, 여러분은 그를 변화시키길 원할 것이다. 만약 이를 원하지 않는다면, 배우자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말이 누군가에게 반항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성격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4. 순종은 남편의 의지를 그리스도의 의지보다 앞에 두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파이퍼 목사는 “결혼 안에서 아내는 반드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지만, 남편은 아내의 주인이 아니”라고 말했다. 만약 아내가 주님과 남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주님을 선택해야 한다.


5. 순종은 아내의 모든 영적인 힘을 남편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다

파이퍼 목사는 “남편과 아내가 영적인 힘을 얻기 위해 서로를 의지할 수 있지만, 그들의 소망은 하나님께 있다”고 설명했다.

6. 순종은 공포 속에 살며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내는 반드시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지만, 남편에 대한 복종이 남편을 두려워하면서 살라는 의미는 아니다.

파이퍼 목사는 “결혼에서 남성은 ‘독창적인 리더십’으로, 여성은 ‘독창적인 순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는다.

이는 매우 아름다운 것이며, 상대방을 보완하고 섬기는 역할을 한다”면서 “만약 우리가 말씀의 깊이를 연구하고 계속 파고들면, 비록 말씀이 다른 시기에 쓰였다 해도 오늘날의 결혼을 아름다운 것으로 빚어낸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파이퍼 목사는 순종에 대한 실제적인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나눴다.

“순종은

 아내가 남편의 리더십을 존중하고 지지하라는 결정적인 부르심이며,

 은사들에 따라 리더십을 수행하도록 돕는 것을 의미한다.”

 


연옥강하와 지옥강하 

                                          (벧전3: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벧전 3: 19)

이 구절은 사도신경에 나오는 “음부에 내려가사” (He descended into hell)에 대한 근거가 되는 본문이다. 

가톨릭은 이 구절이 예수를 알지 못한 의로운 사람들이 가는“선조 림보”(Limbus Patrum) 즉 일종의 ‘연옥’의 정당성을 말하는 근거로 삼는다. 따라서, 연옥에 있는 자들도 복음을 듣고 구원받을 기회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구절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세가지로 요약해 볼수 있다. 

1. 예수님이 실제로 지옥으로 내려갔다고 보는 견해
예수님께서 음부에 가셔서 복음(기쁜소식)을 전하셨고, 십자가를 통해 음부(지옥)에까지 하나님의 영원한 승리를 선포했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문자적인 해석인 동시에 '하나님의 통치권이 하늘과 이 땅 뿐 아니라 음부와 지옥에까지 이른다'고 선포하는 외경의 ‘에녹서’와 관계가 있으며, 지옥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2. 예수님이 연옥으로 내려가셔서 연옥에 있는 자들의 믿음을 굳게 하시려고 복음을 전하셨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카톨릭의 해석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한 베드로전서 4장 6절의 말씀과 연결하여 이해하기도 한다. 

 

3. 문자적 의미가 아닌 상징적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적 의미의 해석에는 2가지 견해가 있다: 

 

1) “음부”를 나타내는 헬라어 “하데스”를 어떤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격리된 것,’ 즉 ‘죽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예수님께서 3일간 죽으셨던 기간의 죽음 그 자체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2) 음부에 내려갔다는 말이 단순한 죽음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음부”라는 실제적 죽음의 공간에서 겪은 고통의 영적 체험이라는 것이다 (루터와 칼빈). 
이 말은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어 인간의 육체적 죽음을 완전히 체험하신 것처럼, 인간의 영적인 죽음의 고통도 동일하게 체험하셨는데 이를 “음부에 내려가사”로 표현했다는 것이다.그리고 이를 통해서 육적 죽음과 영적 죽음의 고통이라는 두 영역에 대한 완전한 대속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위의 설명에서 카톨릭 두번째의 해석을 따른다면 개신교에서는 주로 세번째의 해석을 따른다. 이에 대해 개신교 (개혁주의 노선)의 하이델베르크 문답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제 44 문: 왜 사도신경에는 “음부에 내려가셨다가”라는 귀절이 덧붙여져 있습니까? 

답: 내가 깊은 두려움과 유혹의 위기에 처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주가 되시어 온 삶을 통하여, 특별히 십자가에서 형언할 수 없는 영혼의 괴로움과 고통, 두려움을 당하시면서 나를 음부의 괴로움과 고통으로부터 구원하셨다는 것을 확신하게 합니다 (이사야 53 장; 마태복음 26:36-46; 27:45-46; 누가복음 22:44; 히브리서 5:7-10).

이처럼 전통적인 개신교(개혁교회)의 해석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인간과 동일하게 육체적 죽음을 당하시고 영적 죽음의 고통을 맞보셨지만, 죽음에서 부활 승천하심으로서 궁극적인 승리를 선포하신 것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는 베드로전서 3장의 내용이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이 부활로 승리하신 것처럼 (벧전3:22) 그리스도인들의 고난도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소망을 주는 말씀이라는 측면에서 적절한 해석으로 여겨진다.

또한 “옥에 있는 영”에게 전파 하셨다는 구절에 대해서, 해석자들은 노아의 방주 때 구원받은 8명의 가족 외에 불신앙 속에서 죽었던 자들(20절)에게 노아의 입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이 말씀을 전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옥에 있는 영들” (3:19)1이라는 표현이나 ‘음부에 내려갔다’는 표현들은 에녹서(“The Book of Watchers: I Enoch) 와 같은 유대문학적인 표현이다. 

따라서, 베드로서의 저자인 사도 베드로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당시의 헬라 사람들에게까지도 아주 익숙한 당시의 표현을 사용하여 예수님의 고난과 영광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문맥상 더 타당해 보인다 (Green, I Peter, 2007, 123; Witherington III, A Socio-Rhetorical Commentary on 1-2 Peter, 2007, 186-189. )

 

즉, “옥에 있는 영들” (the spirits in prison)이라는 이 한구절 만을 가지고 ‘옥’(prison)이 곧 연옥(purgatory)을 의미한다는 카톨릭의 해석은 무리가 있다. 
만약에 예수님이 연옥에 내려가서 복음을 전파하셨다면, 왜 노아시대의 불신자들에게만 복음을 전하시고 전도하셨는가? 

이 내용은 옥(prison)이 곧 불신자들이 사는 세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 합당하다. 즉 죽은자이 불신에 빠진 불신앙의 죄인들로서 곧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가르킨다고 볼수 있다. 

요약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죽은 영혼들을 살리기 위해서 성령으로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그 죽은 영혼들은 노아시대에 불신앙과 불순종에 빠졌던 것 처럼 현세에서 죄악의 옥에 갇혀 있는 죄인들을 가르키는 것으로 보인다 (한제호, ibid, 67). 


뿐만 아니라, 베드로전서3장18절에서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찌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가 죄인을 구원하기에 충분하지 못해서 연옥에 가야한단 말인가? 오히려 이 구절은 카톨릭의 연옥교리가 거짓임을 선언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4장 6절에 나오는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 되었으니”라는 구절은 문맥상 상징적 의미의 죽은자들이 아닌 실제적으로 죽은 이들을 가르킨다. 
그렇다고, '죽은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말이 곧' 연옥에 있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문맥상 이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죽은 성도들을 가르키는 내용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Witherington III, ibid, 198). 

초대 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 이루어 질 것으로 믿고,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먼저 죽은 자들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성경은 이러한 성도(신자)의 죽음을 “잠자는 자”들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베드로는 그렇게 재림 전에 죽은 성도들을 “죽은 자들”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들은 육체로는 죽은 자들이지만 이미 복음을 전해받은 자들이기에 영으로는 부활의 승리를 얻은 자들이다.

 

김곤주 / 시드니새언약교회


죽음 후에 제2의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는가?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벧전 3:19)

이 본문은 베드로전서의 난제일 뿐 아니라 성경 전체의 난제다. 그래서인지 유명한 종교 개혁자요 주석가였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도 나는 이 구절을 이해도 설명도 할 수 없다고 했으며 이어서 누구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1) 이 본문에 문제가 되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옥에 있는 영이 누구인가?  죽은 불신자들인가? 구약시대 죽은 신자들인가?  혹은 타락한 천사들인가?
   2. 그리스도가 전파하신 것은 무엇인가? 회개를 위한 제2의 기회인가? 구속적 사역의 완성인가?  마지막 정죄인가?
   3. 그가 언제 전파하셨나? 노아 시대인가? 죽음과 부활 사이인가? 그의 부활 후인가?2)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오늘날까지 많은 학자들이 다양하게 본문을 해석해 왔다. 그것들을 소개해 보면 아래와 같다.

1. 성육신하시기 전 상태에서 그리스도가 지금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 그리고 그것은 노아의 전파에서 성령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노아와 그의 가족만 믿고 구원받았다.
  
2. 그가 대홍수의 물로 멸망받기 전 하나님께로 돌아올 홍수의 희생자들에게 전파하셨다.
  
3. 그가 그의 영으로 영들만이 갈 수 있는 영역으로 들어 가셨고 그들이 노아의 전도를 믿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심판에 대한 의로움을 선포하셨다.
  
4. 그가 성령의 능력으로 가셔서 승리자 되신 자신을 선포하셨으며 악한 영들에게서 하데스의 낙원 부분을 분리시킴으로서 구약의 성도를 공중에 있게  하셨다.
  
5. 그는 죽은 후에 곧 비육신적 형태로 들어가셨으며 유혹의 능력으로 세계를 부패케 하고 홍수의 원인이 되게 한 도전적이며 파괴적인 타락한 천사를  이기신 승리를 선포하셨다. 모든 악을 이기신 그의 승리의 선언은 악한 영들에게 나쁜 소식이었다.
  
6. 그가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 몸으로가 아니라 영으로 가셔서 한 번 불순종했으나 그들의 사후에 그의 전파로 믿은 자들을 자유하게 하시려고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하셨다. 또 볼렌베르크(Wohlenberg)는 그리스도가 그의 선재 상태에서 지금 옥에 있는 노아의 설교를 배척한 자들에게 전파하셨다고  보았고, 어거스틴(Augustine)은 그리스도는 노아가 설교할 때 노아 안에 계셨다고  보았다. 그러나 비그(Bigg)는 그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 그리스도는  한 번 노아에게서 들은 자들에게 전파하셨고 그들에게 단지 정죄가 아니라, 다른 기회를 제시하셨다고 주장하였다.3)

위의 해석들은 크게 둘로 대별해 볼 수 있겠다. 사후에 제이의 구원의 기회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제이의 기회를 언급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사후 제2의 구원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해석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모순된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만이 구원받는다. 그래서 본문의 노아의 홍수 사건에서 범죄한 인류에게 내린 하나님의 홍수의 심판에서도 노아와 그의 가족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방주에 들어가므로써만 구원받았는데 그 방주는 나무로 만든 십자가에서 대속적인 속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예비임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4)  특별히 히브리서 9:27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하였다. 제2의 기회가 사후에 있다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은 그의 의미가 절감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사후에 제2의 구원 기회가 주어지는 것으로 본문을 해석하는 것은 잘못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본문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먼저 옥에 있는 영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여기서 영들은 사람의 영혼이나 타락한 천사를 가리킨다. 그 중에 타락한 천사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하게 보인다. 다음으로 전파했다는 말의 뜻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데 여기서 전파했다는 말은 복음을 전했다는(헬라어, 유앙겔리조)가 아니라, 선포했다는 말(케루소)이다.
  
그렇다면 본문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그는 존재의 인간 영역에서 죽으셨고 존재의 부활의 영역으로 사셨으며 그 존재의 상태에서 그가 타락한 천사들에게 그의 승리를 선포하셨다.5)
  
그러나 만일 그 대상이 노아 시대의 사람들로 지금 하데스(옥)에 갇혀서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이라면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노아 자신의 입으로 노아 시대 사람들을 경고하셨다는 해석이 옳을  것이다.6)  이 해석을 지지하는 것은 본서의 저자가 지금 신약 시대에 있으면서 노아의 홍수 시대를 언급하며 현재 부활하신 예수님의 선포를 이야기하면서 노아의 전파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
   1. M. Luther, Commentary on the Epistles of Peter and Jude. p.168
   2. Wayne Grudem, I Peter, IVP, 1989. pp.157-158
   3. A.T. Robertson, Word Pictures in the New Testament, Vol.IV. p.117
   4. G.L. Archer, Encyclopedia of Bible Difficulties, p.424
   5. Edwin A. Blum, 1, 2 Peter(E.B.C. Vol.12), p.242
   6. Grudem은 옥에 있는 영은 크게 보아 사람이 아니면 천사적인 영체들인데 옥에 있는 영들은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전파하실 때 지옥에 있었던 영들이거나 혹은 그리스도의 전파 때에 지상에 있던 사람들로 지금은 지옥에 있는 영들이라 하였다. Op. cit., p.210


 

 

더 연약한 그릇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3:7)

                                                                       
베드로전서 3:6의 불신 남편에게 복종의 미덕으로 그를 구원하라는 권면과 본문은 연관이 없다.  본문은 신앙인 남편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그러면 여기서 아내는 어떤 점에서 약한 그릇인가?  이 말은 아내를 비하시키는 말이 아닌가?  이 말 속에는 아내의 열등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왜 아내를 귀히 여기지 않으면 기도가 막힌다고 했는가?
  
먼저 본문에 나오는 그릇이란 말부터 생각해 보자.
그릇은 여러 가지 의미로 쓰였다.
   1. 도구로서 사람(인격)(행 9:15)
   2. 영의 그릇으로서 몸(Hermas: Man 5.1)
   3. 예레미야 18:1-11의 토기장이 비유에 의한 구약과 유대주의에서 공통적인 의미는 피조물로서 사람을 가리켰고,
   4. 랍비의 작품들에서는 아내를 그릇으로 썼다.  베드로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의미로 아내를 생각했을 것(살전 4:4; 딤후 2:20-21; 롬 9:21-23).1)

다음으로 약한 그릇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반적으로 여기서 아내가 약한 그릇이나 약한 피조물이라고 할 때 그 의미는 부정적으로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약하다는 뜻이 아니다(롬 5:6, 모든 사람은 다 도덕적으로 연약하다, 또 롬 14:1, 양심에서도 여자가 더 연약하다고 하지 않았다). 긍정적으로 이 말은 여자가 남자보다 육신적으로 연약하다는 뜻이요 감정적으로 연약하다는 것이다. 남자가 여자보다 일반적으로 크고 힘이 세며 여자가 결혼 생활에서 남자보다 더 쉽게 상처받기가 쉽다. 더구나 사회적으로 여자는 이혼 등의 법에서 남자보다 불리한 경우가 더 많았으며 사실상 오늘날도 여러 가지 면에서 불리한 입장에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더 연약하다는 말을 단지 육신적이나 감정이나 사회 문화적인 불리한 입장만으로 볼 것이 아니다. 여자가 연약하다는 것은 결혼에 대한 권위의 용어로 볼 수 있다(3:1, 5-6). 그러므로 베드로는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권위를 오용하지 말고 아내를 존귀하게 하는데 사용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감정적으로 보다 더 예민한 아내에게 비판이나 싸움의 관계 대신에 존중하며 지식을 따라 함께 살라 하였다.2)

그러면 이렇게 살지 않을 때 기도가 막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신약성경은 다른 사람과 불화한 관계가 기도 생활을 방해할 것을 가르치는 구절들이 있다(마 5:23; 6:12, 14-15; 고전 11:33-34; 약 4:3).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물며 남편의 학대로 인해 하나님께 호소하는 아내를 둔 남편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겠는가? 설사 아내가 호소하거나 불평을 안 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그녀의 눈물을 보시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긍휼과 공의의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가 약자와 압제받는 자의 편이 되시지 않겠는가?  
  
마태복음 18:19-20에 너희 중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하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의 합심한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부부가 불화할 때 그 기도가 응답되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베드로 사도는 여자의 연약성을 결코 여자의 열등함의 의미에서 쓰고 있지 않다. 그는 우리 모든 크리스천 남편들에게 지식을 따라 동거하며 귀히 여기라는 명령을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크게 보아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1. 우리 사회가 그렇게 인식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아내를 남편과 함께 생명의 유업을 함께 받을 자로 동등하게 보신다는 것이요,
   2. 남편의 아내와의 관계를 바로 정립하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손상이 되어 그의 기도가 막힌다는 사실이다.3)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남편의 기도는 하나님께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소리 이상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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