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이미지
(벧전 2:9-10)
9.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10.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해 좀더 깊고 넓게 살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성도들에게 ‘교회’는 매우 친숙한 단어이면서 여러 면에서 잘못 이해되고 있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많은 분들은 교회를 건물과 연관지어 생각합니다. ‘서현교회’ 라고 하면 웅장한 돌집으로 기억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적지 않은 목회자들이 교회당 건축을 목회의 성공 쯤으로 여기는 것이 현실입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라는 말을 특정 종파나 교단으로 연관시킵니다.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같은 개념이 교회 이해를 지배하는 경우 우리는 교회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놓치기 쉽습니다.
오늘은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며, 그리스도의 교회를 보는 안목을 넓히고 교회사랑을 더욱 키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니키 검블의 ‘Questions of Life(인생의 의문점들)’이란 책에서 핵심적인 내용을 참조했습니다. 저자에 의하면, 신약성경에는 100가지가 넘는 교회에 관한 이미지(Image)와 비유가 있는데, 성경은 이미지를 통해서 시대를 초월하여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밝히 보이고 있다고 했습니다.
미래학자 레너드 스위트는 은유(隱喩)와 이미지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각과 의식을 전달하는 언어의 본래 모습은 은유이다. 신앙의 전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지금 문화소통의 기반이 글에서 이미지로 옮겨가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성경의 본래 언어는 글이 아니라 이미지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실 때 글이나 명제나 요점 보다는 오히려 이미지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셨다.”(국민일보 07-8-18).
오늘은 성경에 나타난 수많은 교회의 이미지들 중 대표적인 것들을 살펴보며, 우리의 교회 사랑을 더욱 키우며, 우리 서현교회를 보다 성경적인 교회로 만들어가는 사역에 힘을 합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1.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 (=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임)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벧전 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교회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하나님의 백성’ 이라는 이미지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클레시아’는 회중 혹은 사람들의 모임을 뜻합니다.
교회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례를 통하여 교회의 멤버로 가입됩니다. 세례는 죄로부터 깨끗함을 받는 것(고전 6:11)과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롬 6:3-5, 골 2:12),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의 삶에 가져다 주시는 생수(고전 12:13)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전 세계에 퍼져 있으면서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세계 여러 곳에서 박해를 받고 있는 교회가 있는데, 이들은 핍박 속에서 오히려 강력한 영성을 키워나가고 있습니다. 제3세계에서 교회는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남미와 아프리카 남부와 북부, 동북아시아의 한국과 중국 등에서 부흥의 물결이 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세계에 있는 교회는 일반적으로 쇠락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영국교회는 1980년대 초반 5년 동안에만 백만 명의 신자를 잃었다고 했습니다. 한때 서구교회는 제3세계라고 불리는 국가들에 선교사들을 파송했습니다만, 이제는 자신들이 선교사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지역교회들(Local Churches)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들”(고전 16:1), “아시아의 교회들”(고전 16:19),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롬 16:16)와 같은 지역교회들은 더 작은 규모의 모임으로 나뉘어져서 주로 가정에서 모였던 것으로 보입니다(롬 16:5, 고전 16:19).
실제로 신약성경에 나타난 교회에는 대규모, 중간 규모, 소규모의 세 가지 종류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대그룹 모임(Celebration)은 성도들 전체가 모이는 주일예배와 같은 큰 모임입니다. 이것은 큰 교회에서 매 주일 열리거나, 혹은 여러 개의 작은 교회들이 예배를 위해 함께 모일 경우입니다.
대그룹 모임은 하나님의 전능하심, 무한하심, 특히 성령의 감동을 제공합니다. 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위대하심(the High God)과 예배가 가지는 심오한 의미를 재발견하게 됩니다. 수백, 수천 명의 예배자들이 한 곳에 모이는 이러한 모임은 외로움을 느끼던 사람에게 다시금 확신을 가지게 해 주며, 교회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임은 그것만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의 사귐을 만들어내기 어렵기 때문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구역모임(Cell)은 소그룹 모임인데, 여기서 우리는 서로 간에 어려운 문제들을 내어놓고 서로 사랑하며 격려하는 코이노니아 공동체를 이루게 됩니다. 셀에서는 대그룹 모임에서 이루지 못하는 성도의 사귐을 통하여 우리 가까이 계시며 우리의 삶 속에 함께하시는 주님(the Nigh God)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전도회 모임(Congregation)은 이상의 두 가지 모임의 중간 규모의 모임입니다. 성령의 은사와 사역이 사랑과 수용의 분위기 속에서 실행되기에 적합한 모임입니다. 우리 서현교회에서는 대예배의 모임과, 구역으로 이루어지는 소그룹 모임, 그리고 남녀전도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는 백성의 이미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와 전도와 봉사와 양육과 친교의 사역을 수행하는 성도들의 모임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보다 큰 눈으로 타교회와 타교단을 바라보며 가슴에 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개교회주의의 편협된 울타리에 갇히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소임을 감당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2.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 (= 한 아버지를 모시는 형제 자매)
벧전 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교회의 두 번째 이미지는 ‘하나님의 가족’ 이라는 이미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영접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교회를 하나로 묶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성령님은 우리의 내주자가 되십니다. 우리끼리는 형제요 자매입니다. 형제와 자매들은 비록 다투고 사이가 틀어지고 오랜 시간 서로를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형제와 자매로 남아 있습니다. 그 관계를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교회는 때때로 분열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가족’ 이미지에서 중요한 덕(virtue)은 하나 됨입니다. 예수님은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셨습니다(요 17:11). 사도 바울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라고 말했습니다(엡 4:3).
모든 단계에 있어서, 즉 구역이나 전도회나 대그룹 모임에서나, 우리 교단 안에서나 각 교단들 사이에서나 우리는 하나 됨을 추구해야 합니다. 신학자들과 교계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신학적인 차이를 논의하고 작업함으로써 하나 됨을 추구해야 하고, 성도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사역함으로써 하나 됨을 추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한 아버지를 모시는 형제요 자매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귀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사귐을 나타내는 헬라어 ‘코이노니아’는 본래 가장 친밀한 인간관계인 부부관계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하나님과의 코이노니아이며, 서로 간의 사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코이노니아는 인종, 교육, 배경, 문화의 장벽을 초월합니다.
주님의 교회 안에는 우리가 교회 밖에서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수준의 사귐이 있습니다. 성경의 강조점을 보십시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한 아버지를 모신 형제요 자매입니다. 교회는 코이노니아 공동체입니다. 지금 주위에 앉아 있는 성도님들을 보십시오. 이분들이 여러분의 형제 자매라고 주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 자신에게 이 진리가 얼마나 각인(刻印)되어 있는지 살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 우리는 그 몸의 지체)
고전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엡 1:22-23=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의 세 번째 이미지는 ‘그리스도의 몸’ 이라는 이미지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교회는 하나입니다. 유전인자(DNA)가 동일하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비유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교회 핍박에 앞장 선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홀연히 하늘로부터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 당시 사울은 예전에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적이 없으므로,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것은 곧 예수님 자신을 핍박하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심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이 비유를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더욱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몸이 하나(12절)라고 해서 그것이 획일적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일부이지만 동시에 손과 발처럼 별개의 존재들입니다. 몸에는 여러 지체들이 있으며, 그들은 여러 가지 은혜의 선물과 여러 가지 섬기는 일을 가진 모두 다른 지체들입니다(4-6절).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다른 지체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두 가지 잘못된 태도를 이야기 합니다. 하나는 열등감을 가지고 자신들은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느끼는 태도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우월감에 빠져 ‘나는 당신이 필요 없소’ 라고 하는 태도입니다. 우리 모두가 한 몸에 속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한 팀의 일원이며 각자가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고전 12:25=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고전 12: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지체요 부분입니다. 어느 교회의 한 성도가 어려움에 처한 어떤 사람을 만난 후 목사님에게 와서, 그 불쌍한 사람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얻으려다가 실패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목사님, 저를 찾아온 이 사람은 직장을 구하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 집과 음식과 생활비가 필요했어요. 그런데 저는 정말 실망했어요. 교회 사무실에 전화를 해 보았지만 나를 만나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죠. 그 사람을 도울 수가 없다는 거에요. 결국 그 사람을 제 집에 일주일이나 있게 해 주었지요. 목사님은 교회가 이런 사람들을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목사님은 잠시 생각한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교회가 그 일을 이미 잘 수행한 것 같은데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 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파트를 맡아 기능하고 있습니까? 자신이 맡은 지체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지체의 삶’(Body Life)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지체의 삶을 얼마나 살고 있습니까?
4. 교회는 거룩한 성전 (=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거하시는 곳)
엡 2:20-22=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교회의 또 다른 이미지는 ‘거룩한 성전’ 이라는 이미지입니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유일한 교회 건물은 사람들로 만들어지는 건물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셨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교회가 지어집니다. 그 기초는 ‘사도들과 선지자들’ 이며, 그 결과는 ‘살아 있는 돌’로 만들어진 성전입니다.
구약에서는 성전이 예배의 중심이었지만, 하나님의 임재에 다가가는 것은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자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써 그를 믿는 사람들이 아버지께 다가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주님의 임재는 더 이상 물리적인 성전 안에 제한되어 있지 않으며, 이제는 성령으로 모든 믿는 사람들과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성전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거하실 곳’ 이라고 불리는 교회입니다.
구약의 언약에 따르면 하나님 아버지께 가까이 가는 것은 제사장(히 4:14)을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백성들을 대신하여 희생제사를 드렸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의 생명을 완전한 희생제물로 드리셨으므로, 더 이상 희생제물이 필요하지 않고 더 이상 제사장도 필요치 않습니다. 신약의 모든 성도들은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의미에서 제사장들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다른 사람들의 대리자가 될 수 있으며, 세상 속으로 갈 때에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대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희생제물을 드리는 제사장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단번에 드려 죄를 없게” 하셨기 때문입니다(히 9:26). 우리는 더 이상 죄 때문에 희생제사를 드릴 필요도 없고 사실상 드릴 수도 없습니다. 차라리 우리를 위한 주님의 희생을 기억하며 감사할 뿐입니다. ‘거룩한 성전’인 교회에서 우리는 주님의 식탁에 초대됩니다.
떡과 포도주는 예수님께서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를 기억하게 합니다. 성찬을 받으면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사라지게 된 것을 감사하면서 십자가를 뒤돌아봅니다(마 26:26-28). 우리는 주님의 식탁에서 장차 우리가 참여할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미리 맛보게 됩니다. 한 식탁에 참여함으로 우리의 하나 됨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능력으로 식탁에 함께 하심으로 결신과 치유의 역사가 일어남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서현교회는 거룩한 성전의 이미지에 얼마나 부합되고 있습니까? 혹 나 하나 때문에 주님의 거룩이 위협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의 거룩은 나 한 사람의 거룩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5.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 (= 그리스도는 교회의 남편, 예수님과 교회는 모든 결혼관계의 모델)
엡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신약에 나오는 교회의 여러 이미지들 중 ‘그리스도의 신부’는 교회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비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도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하여 말하면서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2)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남편이 되십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는 모든 인간의 결혼관계의 모델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남편들에게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러한 신령하고 빛나는 교회의 모습은 교회의 현재 상태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예수님께서 영광 속에 다시 오실 때 교회를 행한 주님의 경륜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계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오늘의 교회는, 솔직하게 말한다면, 능력 면에서는 약하고, 내용면에서는 세속적인 것들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대환난을 이긴 교회가 예수님께서 뜻하시는 것과 같은 “해를 입은 여자”의 모습이 되는 것을 볼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신약의 비전에 가능한 한 가까운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된 우리는 그분의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증명하는 방법은 거룩하고 순결한 신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분에게 합당한 신부가 되기까지 우리는 변화를 받고 아름답게 만들어질 것입니다.
교회를 향하신 주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주님의 덕을 선포하는 것에는 예배와 전도가 포함됩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존경을 우리의 마음과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고, 전도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보답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교회로 데리고 오라고 명령하셨고, 우리 주위의 사람들에게 주님의 놀라운 위업을 선포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가 신약성경의 이미지와 더욱 가까워진다면 우리의 예배는 지루하거나 재미없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질 것입니다. 사실 예배는 흥미진진한 것이고, 우리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새롭게 하는 주님의 선물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로 이루어지며 그들은 가족처럼 묶여 있습니다. 교회의 성도들은 머리되신 그리스도께 절대 복종하며 세상에 대해서는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존재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예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들은 신부가 신랑을 사랑하듯 주님을 사랑하고, 신부가 신랑에게서 사랑을 받듯이 그분께 사랑을 받습니다. 얼마나 멋진 곳입니까!
교회는 땅 위의 천국과 같은 곳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사랑하는 서현교회를 이 땅의 천국과 같은 곳으로 만들어가는 일에 한 마음으로 매진합시다. <박순오 목사>
모퉁이의 머릿돌은 무엇인가(벧전 2:7)
이 돌은 건물의 모퉁이의 머릿돌, 곧 주춧돌을 가리킨다. 이 돌은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기초석이고 가장 중심이 되는 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중심이 되는 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올바로 세우기 위해 모퉁이의 머릿돌로 왔지만 교만하고 어리석은 그 땅의 건축자들(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찮게 여겨버렸다. 그 결과 예수님은 이방 교회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우셨다.
또 성경에 기록된 ‘건축자가 버린 돌'(시 118:22)은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는 시인 자신, 더 나아가 이방 나라들에게 업신여김을 받는 이스라엘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요컨대 건축에 쓸모없어 버려진 돌처럼 그렇게 하찮고 가치없는 존재란 뜻이다. 후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배척받는 자신에 대해 이 말을 적용했고(마 21:42) 사도들도 그렇게 해석했다(행 4:11, 벧전 2:7)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느니라"(벧전3:19).
예수님은 음부에 내려가셨는가?
우리나라 사도신경에는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부분이 없다. 그냥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화란개혁교회의 사도신경에는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있으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도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있다(제44문).
하지만 한국 장로교회가 받아들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는 이 부분이 없다. 그냥 “장사 지낸 바 되어 죽음의 능력 아래 머물러 있었으나 썩음을 당하시지는 않았다”고 고백한다(VIII,4).
소요리문답에도 이 부분이 없다. 다만 대요리문답에서 “제 삼일까지 죽음의 상태에 머무르시고 죽음의 능력 아래 계셨던 것인데, 이를 다른 말로 ‘지옥으로 내려가셨다’고 표현했다”고 설명한다(제50문의 답). 고대교회의 신조들 가운데 니케아 신조에는 없지만 아타나시우스 신조에는 있다.
이처럼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고백은 신조들에 따라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가톨릭교회의 사도신경은 물론 이 부분을 가지고 있으며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개혁교회의 신조들 중에는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이 부분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을 “그(예수님)가 그의 모든 고난 중에, 특히 십자가에서 겪었던 말할 수 없는 고통들과 슬픔들, 공포와 지옥의 고뇌”라고 설명하고 있다(제44문).
따라서 실제로 예수님께서 ‘음부’ 또는 ‘지옥’ 내려가셨다고 보지는 않는다. 단지 십자가에서 겪은 예수님의 고통을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을 가지고 있는) 사도신경에서는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다음에 “음부(지옥)에 내려가셨다”가 나온다. 따라서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십자가의 고통을 겪었다고 하는 것은 시간의 순서상 잘 맞지 않는 점이 있다. 따라서 개혁교회 안에서도 많은 논쟁이 있었다.
그래서 이 부분은 여러 모로 난제거리이다.
사도신경 본문도 시대마다, 교회마다 그 내용이 약간씩 다르다. 그러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사도신경에 대한 기록인 히폴리투스 로마누스(Hippolytus Romanus. 215년 또는 217년 기록)의 사도신경에는 “음부에 내려가셨다” 부분이 없다.
그 후에 이어서 나오는 네 개의 문서에도 없다. 4세기의 튀라니우스 루피누스(Tyrannius Rufinus)의 기록에 처음으로 이 부분이 나오는데, 그 후 6세기 이후에 좀 나오며 그 외 대부분의 문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cf. Denzinger-Schönmetzer, Enchiridion Symbolorum). 따라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것은 원래의 사도신경에는 없었는데 후대에 들어온 것으로 생각된다.
중요한 것은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구절은 베드로전서 3:19이다.
베드로는 여기서 이렇게 말한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느니라.”(개역개정)
개역한글판에는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느니라.”고 되어 있다.
개역개정판에서 ‘가서’가 덧붙은 것은 진전된 번역이기는 하나 위치가 좀 잘못되었다.
‘옥에 있는 영들에게’ 다음에 와야 더 정확하다.
뿐만 아니라 두 번역 다 ‘전파하시느니라’의 시상(시제)이 잘못되었다.
이 동사(에케뤽센)는 아오리스트로서 ‘전파하셨느니라’고 번역해야 옳다.
영어 번역은 다 그렇게 과거로 번역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실제로 지하 세계에 가서 복음을 전하셨다고 본다.
그러나 칼빈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이며,
따라서 믿지 않고 죽은 자들에게는 희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영혼’이 내려갔다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가셨다고 말하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여기의 ‘필라케’를 ‘옥’으로 보지 않고 ‘파수대’로 본다.
즉, 경건한 영혼들이 구원을 소망하며 기다리고 있다고 풀이한다(벧전 3:19 주석 중).
그러나 여기의 ‘옥에 있는 영들’은 칼빈이 생각한 것처럼 ‘경건한 영혼들’이 아니라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임이 분명하다(20절).
한편, 개혁교회에서는 대개 그리스도의 승천 시에 그의 승리를 죽은 자들에게도 선포하셨다고 본다(Bavinck, Greijdanus 등). 19절의 ‘가서’를 22절에서와 같이 ‘승천’으로 보고, 또 ‘전파하다’를 복음 전파가 아니라 단지 부활로 말미암은 승리의 사실을 ‘선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 해석은 물론 교리적으로 문제없는 해석이기는 하지만 주석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19절은 분명히 ‘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서’라고 말하며, 22절처럼 ‘하늘로 가서’라고 말하지 않는다.
현대의 많은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죽은 자들’에게 가서, 또는 ‘반항하는 천사들’에게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했다고 본다. 그러나 반항하는 천사들 곧 악령들에게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했다는 것은 이상하다. 그런 것은 외경에 나오는 사상일 뿐, 본문에서는 이들이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20절) 예수님은 바로 이 사람들에게 가서 전하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전하신 것일까?
19절은 ‘영으로’라고 말한다. 이것은 바로 앞 구절과 연결해서 살펴볼 때 ‘성령으로’이다.
곧 예수님은 ‘성령으로’ 노아 시대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노아 시대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구약 시대에도 계셨으며, 그 때 성령으로 노아를 통해 복음을 전하신 것이다.
이것은 고대교회의 어거스틴의 견해이며, 또한 베자와 고마루스의 견해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는 노아를 통해 그 때 그의 영(성령)으로 전파하였다.”(Gomarus)
우리는 이 견해가 옳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베드로 자신이 20절에서 그렇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선재(先在)하심에 대해 생각해야 하며(요 1:1, 8:58 등),
또한 구약 시대의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벧전 1:11, 벧후 1:21).
성령은 구약 시대에 아브라함에게도 역사하셨으며 이삭과 야곱에게도 역사하셨고,
나아가서 모든 성도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셨다(사 59:21, 63:11, 학 2:5, 느 9:20).
구약 시대 성도들도 ‘성령으로’ 거듭나서 천국에 들어갔다(cf. 요 3:5). 노아 시대도 마찬가지다.
성령은 노아를 통해 당시에 패역한 사람들에게 회개와 구원을 전파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은 구약 시대에도 성령으로 활동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노아는 이를 위해 사용된 한 도구였다.
그러면 왜 ‘옥에 있는 영들’이라고 말하였을까?
그 이유는 그들이 그때 노아의 설교를 듣고 불순종하여서 ‘지금’ 지옥에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이 편지를 기록할 당시에 그들은 지옥에 ‘영’으로 있었다.
이들이 노아 시대에 불순종하던 자들이었음은 베드로 자신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20절).
지금 지옥에 있는 그들은, 그들이 땅에 있을 때에, 노아의 설교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식의 표현은 베드로전서 4:6에도 나타난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
이것은 예수님이 음부(지옥)에 가서 죽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지금은 죽었지만 그들이 살아 있을 때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의미이다.
곧 베드로가 이 편지를 기록할 당시에 ‘살아 있는 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에게도 - 곧 그들이 땅에 있을 때에 -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런 식의 표현은 오늘날에도 흔히 사용된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우리 할아버지는 100년 전에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할 때, 이것은 그 할아버지가 천국에서 복음을 받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금은 천국에 계시지만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 곧 이 땅에서 복음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드로가 ‘옥에 있는 영들’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지금은 지옥에 있는 영들을 가리키지만 그들이 살아 있을 때에 그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베드로는 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하다가(18절) 갑자기 노아 시대의 복음 전파로 넘어가는 것일까? 갑작스럽게 수천 년을 뛰어넘는 데에는 어떤 연결이 있는 것일까? 여기에 ‘그리스도의 선재하심’과 ‘성령의 역사’가 있음은 이미 말하였다.
베드로는 구약 시대의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도 매우 민감하였다(벧전 1:11, 벧후 1:21).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중요한 연결고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물’이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는 표’이다(21절).
노아 시대의 ‘물’은 세상에 대한 ‘심판’을 의미함과 동시에 노아 가족에 대한 ‘구원’을 상징한다(cf. 벧후 2:5). 베드로의 머릿속에는 베드로 당시의 구원의 역사과 노아 시대의 구원의 역사가 나란히 놓여 있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같은 원리의 사건으로 오버랩 되어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중요한 것이 또 하나 더 있다.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물위를 걷다가 물에 빠져 죽을 뻔하다가 건짐 받은 경험이 있다. 이런 개인적 경험은 베드로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물’은 보통의 물이 아니라 죽음에서 건짐 받은 구원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말하다가(18-19절), 곧바로 ‘물’ 가운데서의 구원과 같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며(21절), 이를 위한 중간 다리로서 ‘노아 홍수’ 사건이 쉽게 떠올랐을 것이다.
어쨌든 신약성경 전체에서 볼 때 예수님이 음부 또는 지옥에 내려가셨다는 사상은 근거가 없는 것이며, 죽은 자들에게 또 다시 회개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도 맞지 않다. 개혁교회는 이러한 견해들을 배척한다. 사도신경에 “음부에 내려가셨다”가 들어온 것은 후대이다.
초기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단순한 고백뿐이었다. 후에 “음부에 내려가셨다”가 들어온 것은 베드로전서 3:19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음부에 내려가셨다”를 추가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된다.
저자: 변종길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옥에 있는 영들”에게 승리를 선포하신 그리스도
- 베드로전서 3장 18-20절의 해석과 교훈 -
'그리스도께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는 베드로전서 3장 19절은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본문입니다. 이 본문 앞뒤의 내용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8. . .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20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 . .
마틴 루터는 이 본문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아주 놀라운 말씀이요, 동시에 신약 성경 가운데서 어느 것보다도 모호한 말씀이다.
그래서 나는 베드로가 뜻한 바를 확신 있게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Martin Luther, Commentary on Peter and Jude, 166).
위대한 종교 개혁자 루터가 이 본문의 의미를 확신 있게 알지 못했다면, 과연 누가 제대로 알 수 있을까요? 실제로 이 본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본문을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신자의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본문을 통해서도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고 교훈을 주시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게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노력할 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이 본문의 의미와 관련해서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옥에 있는 영들"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이 표현을 지옥에 갇힌 죽은 자들의 영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지옥에 내려가서 노아 홍수 때 멸망당한 사람들의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있어서 오늘날에는 이 해석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성경 어디에서도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오직 살아있는 자들에게만 전파됩니다.
사람이 한번 죽으면 복음을 듣고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죽은 뒤에는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히 9:27). 그러면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베드로전서 4장 6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 본문은 지금 죽어 있는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즉 그들이 살아 있을 때,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음을 말합니다. 그 사람들은 살아있을 동안에 복음을 듣고 믿었습니다. 지금은 육체적으로 죽어있지만 장차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성경학자들은 "옥에 있는 영들"을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 해석에 따르면, 예수님은 지옥에 내려가서 죽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신 것이 아니라, 노아 시대에 성령으로 노아와 함께 하시면서 그를 통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셨습니다. 이 해석에도 문제점이 있는데, 그것은 18절과 19절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해치고, 19절에 있는 "가서"(남성・단수・주격 분사 "포류떼이스")라는 단어의 중요성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18절 후반부에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해서 말합니다. 예수님은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습니다." 이 진술에 이어서 19절에 "가서"라는 단어가 나옵니다(19절). 예수께서 언제, 어디로 가셨다는 말입니까? 본문의 흐름을 고려할 때 부활하신 후에 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셨다고 보아야 합니다(예수님의 죽으심 → 부활 → 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심). 이렇게 보는 것이 예수께서 영으로 노아시대로 가셨다고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습니다. 게다가 같은 단어(19절과 똑같은 형태의 분사)가 22절에도 나오는데, 거기서는 예수님의 승천을 나타냅니다. 개역 개정에서도 같은 단어를 "(하늘에) 오르사"라고 번역하여 승천의 의미를 분명히 합니다.
예수께서 영으로 노아를 통해서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전파했다는 해석에는 또 다른 문제점이 있는데, 그것은 "옥에 있는 영들"이라는 표현이 죽은 사람들의 영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pneuma, 프뉴마)"이라는 단어가 죽은 사람들의 영을 의미하려면 반드시 "죽은 사람들의," 또는 "의인의"와 같은 수식어가 수반되어야 합니다(참조. 히 12:23, "의인의 영들"). 신약성경은 물론 유대 문헌에서도 "영"이라는 단어가 단독으로 죽은 사람들의 영을 가리키는데 사용된 예를 찾을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죽은 사람들의 영을 가리키는 단어는 "프뉴마(pneuma)"가 아니라 "프쉬케(psychē)"입니다. 또한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죽은 사람들이 가는 곳을 "옥(phylakē)"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데스(Hades)"나 "스올(Sheol)"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영으로 노아를 통해서 노아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전파했다는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우선, "옥에 있는 영들"이 누구인지 밝혀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영"이라는 단어가 복수로 사용될 때, 거의 예외 없이 사람이 아니라 귀신들(마 8:16; 10:1; 막 1:27; 3:11; 5:13; 6:7; 눅 4:36; 6:18; 7:21; 8:2; 10:20; 11:26; 행 5:16; 8:7; 19:12-13; 딤전 4:1; 계 16:13-14;)이나 천사들(히 1:14)을 가리킵니다. 유대 문헌인 제1에녹서에서도 그렇습니다. 게다가 "옥"이라는 단어는 요한계시록 20장 7절에서 사탄이 천년 동안 갇혀 있는 장소를 가리킵니다(참조. 계 18:2).
이런 증거를 종합하면 "옥에 있는 영들"이란 하나님께서 옥에 가두신 악한 영들이나 악한 천사들입니다. 이 해석은 다른 성경의 지지를 받습니다. 예컨대, 베드로는 자신의 두 번째 편지에서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다"고 말합니다(벧후 2:4). 유다서 6절에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다"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20절에 따르면, "옥에 있는 영들," 즉 하나님께서 옥에 가두신 불순종한 천사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노아시대에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은 하나님의 아들들(=천사들)일 것입니다(창 6:2). 그들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처소를 떠나 범죄하였습니다(유 4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습니다(벧후 2:4). 부활하신 후 예수께서 성령에 의하여 가셔서 선포하신 대상이 바로 그 악한 천사들입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타락한 천사들에게 선포하신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복음의 메시지였을까요?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어 두셨기" 때문입니다(유 6절). 그들은 영원히 멸망당할 것입니다.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승천하신 그리스도에게 복종한다는 베드로전서 3장 22절은, 그리스도께서 불순종한 천사들에게 선포하신 것이 승리의 메시지였음을 암시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심으로써 타락한 천사들은 물론 사탄과 사망과 모든 악한 세력에 대해 승리를 거두셨음을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만물을 다스리시는 진정한 통치자이십니다!
오늘날 다수의 성경학자들이 이 해석을 지지합니다. 물론 이 해석에도 문제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흐름이나 단어들의 사용례에 비추어 볼 때 여러 해석들 가운데 이것이 가장 적절합니다. 이 해석은 최초로 베드로전서를 받은 독자들의 형편과도 조화를 이룹니다. 1세기 당시에 베드로전서의 독자들은 핍박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당하는 비방과 고난과 시험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머지않아 더 무서운 불시험이 그들에게 닥쳐올 것입니다(4:12). 이런 상황에서 독자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고난을 참고 견디면서(2:20) 열심히 선을 행하라(3:13)고 권고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도전합니다(4:13).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명령합니다(4:16).
그런데 비방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는 중에 즐거워하거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만일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그리스도께서 악한 세력들에게 승리를 거두시고 진정한 통치자가 되셨음을 확신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겉으로 보기에 패배한 것처럼 보였던 싸움에서 십자가와 부활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노아 시대에 하나님을 거역하다가 옥에 갇힌 악한 영들에게 승리를 선포하심으로써 자신이 사탄과 악한 영들을 이기신 진정한 승리자요 그들의 통치자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또한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모든 영적 세력들)을 다스리십니다(3:22).
사도 베드로는 이런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지금 그의 독자들을 핍박하고 있는 자들을 그리스도께서 능히 다루시고 마침내 벌하시리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독자들은 지금 자신들을 핍박하는 자들과 그들을 조종하는 악한 영적 세력들조차도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고난을 당하는 순간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여전히 만물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악한 영적 세력들을 이기시고, 하나님 우편에서 모든 영적 세력들을 통치하고 계시는데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자기 백성이 고난을 당할 뿐 아니라, 그 고난으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 하더라도 진정한 통치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악한 세력들의 손에 넘겨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악한 세력들은 이미 패배했으며, 마지막 형벌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질 최종적 승리를 확신한다면 오늘의 고난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1세기만큼 극렬한 고난이 없는 시대에 사는 신자들에게 이 본문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건져주신 구원자이시며, 동시에 악한 영적 세력들에게까지 승리를 거두신 진정한 만물의 통치자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지금도 악한 영적 세력들이 이 세상의 경제 정치적 구조와 함께 불의하고 악한 사람들 배후에서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면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지만, 진정한 승리자이자 통치자는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확신한다면 사회 경제적 위기 앞에서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얻은, 그리고 약속된 최종적 승리를 확신하면서 능히 위기를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자들은 위기의 한복판에서도 영적 세력들은 물론 만물을 통치하시는 진정한 승리자 그리스도 예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그가 모든 상황과 위기를 다루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길성남 교수 / 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 하시니라”(벧전3:19)는 무슨 뜻인가?
벧전 3:18-20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벧전 3:19은 흔히 난해 구절로 취급되며 참으로 오해하기 쉬운 곳입니다. 우리 성경으로 보면 특히 그렇습니다.
벧전 3:19절의 .옥에 있는 영들은 노아시대에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을 때 순종하지 않고 홍수에 멸망한 사람들 곧 순종치 않고 지옥에 간 ( 노아의 8명 식구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영으로 지옥에 있는 노아 시대의 불신자들에게 전도하셨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많은 모순이 따릅니다.
주님께서 죽으신 후 왜 하필 노아 시대에 지옥간 자들에게만 전도하셨습니까?
더욱이 이미 지옥에 간 자들에게도 전도가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옥에 있는 영들이 노아 시대에 불순종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그 시대에 사람들을 멸망의 길로 이끌었던 타락한 천사들을 말합니다.
우리말의 구조와 헬라어의 구조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 구조를 무시한 채 나온 오역의 결과로 엄청난 혼동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벧전 3:19~20절을 원문으로 보면 "주님은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 곧 불순종했던 천사들에게 가셔서 선포하셨다.
그런데 이 천사들이 불순종했을 때가 노아의 시대 방주가 예비 되고 있는 동안이었으며 이 방주에서 극소수 곧 8명만이 구원 받았다."
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순종했던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불순종했던 천사들에게 주님이 선포하셨는데 그 때가 바로 노아가 방주를 예비하고 있을 때였고 노아의 방주에서 구원 받은 사람은 극소수 곧 8명 뿐 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옥은 지옥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에 한 개의 영어 단어 "hell"(지옥)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세 개의 서로 다른 헬라어 단어(게헨나, 하데스, 탈타루스)가 있는 데 영어는 모두 오직 "hell" 하나로만 번역했고 우리말도 거의 구별하지 않고 번역했기 때문에 많은 혼란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곳에서의 옥은 흔히 불못이라고 말하는 “게헨나” 또는 음부라는 뜻의 “하데스”가 아니고 “탈타루스”로서 노아의 홍수 시대에 범죄했던 타락한 천사들을 가두었던 감옥을 말합니다.
이 단어가 벧후 2:4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여기에서 지옥이 원문에 “탈타루스”입니다.
또 유다서 1:6에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바로 이 범죄한 천사들을 가두어 두신 곳이 “탈타루스”입니다.
그리고 19절의 “전파하시니라”도 전도하다의 뜻이 아닙니다.
원문에는 “케뤼소”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사탄을 좇아 타락한 천사들에게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사탄의 심판과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셨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해 볼 것이 있습니다.
과연 천사들이 어떤 범죄를 저질러서 심판 때까지 “탈타루스”에 갇혀 있게 되었는가?
여기서의 범죄가 천사장이 타락하여 마귀가 되었을 때 같이 동참하여 타락했던 천사들의 범죄가아니라 이 천사들이 노아시대에 범죄했다는 것을 본문은 명백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노아 시대에 이들이 과연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가?
이들과 노아홍수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리고 우리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교훈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반역하고 도전했던 사탄, 지금도 꼬리를 감추고 교활하게 하나님의 자녀들을 처참하게 무너뜨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발버둥치고 있는 사탄에 대해 하나님의 자녀들은 너무나 무방비 상태인 것 같습니다. 김선기 목사
cafe.daum.net/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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